43. 나의 누님이 언젠가 ‘시를 지으면 운율에 맞다’고 차칭하면서 소령(小令)짓기를 좋아하기에, 내 속으로 남을 속이는구나 하였는데, 《시여도보(詩餘圖譜)》를 보니 구절마다 옆에 동그라미와 점으로, 어떤 자는 전청(全淸)ㆍ전탁(全濁)이고 어떤 자는 반청(半淸)ㆍ반탁(半濁)이라 하여 글자마다 음을 달았기에 시험삼아 누님이 지은 시를 가지고 맞추어 보니, 어떤 것은 다섯 자 어떤 것은 세 자의 착오가 있을 뿐, 크게 서로 어긋나거나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제야 걸출ㆍ고매한 천재적인 소질로 겸손하게 힘썼기 때문에 많은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이처럼 성취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어가오(漁家傲)’ 한 편은, 모조리 음율에 맞고 다만 한 자가 맞지 않았다. 사(詞)는 다음과 같다.

庭院東風惻惻 정원동풍측측

墻頭一樹梨花白 장두일수이화백

斜倚玉欄思故國 사의옥란사고국

歸不得 귀부득

連天芳草凄凄色 연천방초처처색

羅幙綺窓隔寂寞 라막기창격적막

雙行粉淚霑朱臆 쌍행분루점주억

江北江南煙樹隔 강북강남연수격

情何極 정하극

山長水遠無消息 산장수원무소식

뜰에는 봄바람 스산하고

담머리엔 한 그루 배꽃 희어라

옥난간에 기대어 고향 그리나

갈 수는 없고

하늘과 맞닿은 우거진 꽃다운 풀빛만이

비단방장 비단창도 쓸쓸히 닫겼는데

단장한 얼굴에 두 줄기 눈물 붉은 가슴 적시네

강북과 강남은 무성한 나무가 가리었는데

이 그리움 어이하리

산 높고 물은 아득 님 소식은 없으니

‘주(朱)’ 자는 마땅히 반탁(半濁) 글자를 써야 하는 자리인데 ‘주(朱)’ 자는 전탁(全濁)이다. 하긴 소장공(蘇長公:소식) 같은 재주로도 굳이 운율에 맞추지를 않았거든 하물며 그만 못한 사람일까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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