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양궁 단체전 올림픽 8연패

http://www.fnnews.com/news/201608081742555461

 

[Rio 2016] 금·금·금·금·금·금·금·금.. 한국 여자양궁 단체전 올림픽 8연패

한국 여자양궁 대표팀이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단체전 8연패를 달성했다. 여자양궁은 단체전이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 이번 대회까지 단 한 차례도 금메달을 놓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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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리우올림픽에서 한국은 현재 남녀양궁단체전에서 금메달 2개를 획득하여 세계 5위에 올랐다.

선수들의 피땀어린 노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 근저를 따져보면

활쏘기의 명수 동명성왕*1)의 DNA 덕분임을 부정할 수 없다.

*1) 고구려를 건국한 활의 명수, 주몽.

이참에 이규보의 <동명왕편> 1906년의 글 한 편을 소개한다.

 

<동명왕편> 본문은 본블로그의 아래 포스트에 소개한 바 있다.

기쁘다, 해모수 오셨네 -동명왕편1

http://kydong77.tistory.com/8038

 

해모수, 하백의 딸 유화와 성혼 후 유기하다 -동명왕편2

http://kydong77.tistory.com/8037

 

주몽의 탄생과 고구려 건국 -동명왕편3

http://kydong77.tistory.com/8036

 

비류왕이 왕위를 다투어 그 도읍을 수몰시키고 -동명왕편4

http://kydong77.tistory.com/8035

 

유리왕자가 아비 찾아 태자가 되다 -동명왕편5

http://kydong77.tistory.com/8034

 

<한단고기> 지도

현 중국 고비사막 일대에 대형 고구려식 피라미드 고분이 발굴되었습니다. 이 고분들이 고비사막에 발견되었다는 것은 고구려가 고비사막까지 진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릉비문 영락 8년조 기사를 보면 "토번을 정벌했다"란 기사가 나오는데 여기서 토번은 지금의 티베트를 말합니다. 고구려가 토번을 정벌했다는 것은 저 멀리 중국을 넘어 티베트까지 영토로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중국의 역사책 『진서』를 보면 고구려가 수군으로 후연의 수도 연군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이 기사 이후 진서 등 다른 중국 역사서에는 후연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광개토대왕이 이 때 수군으로 당시 화북지방에 있던 후연을 멸망시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명왕편 [東明王篇] - 우리 민족의 영웅서사시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006. 9. 18., 휴머니스트)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제1장

이지영,동명왕편. 신화의 상상력과 상징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휴머니스트,2006. 9. 18.)

「동명왕편」 산출의 배경

「동명왕편()」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권3 고율시()조에 실린 고구려 건국신화로서, 건국시조인 주몽, 곧 동명성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우리 한문학사상 보기 드문 영웅서사시이다. 이 작품은 제작 동기를 밝힌 병서()에 이어서 오언고율() - 1행이 5자로 된 장편 한시 - 의 280여 구, 1,400여 자의 본시()와 430여 구 2,200여 자의 주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는 그의 나이 26세에 『구삼국사』를 읽고나서 썼다. 그는 22세에 사마시에, 23세에는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집안이 한미하여 관직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술과 시로 한가한 세월을 보냈고 특히 24세 때 부친이 죽은 이후로는 천마산에 은거하였다. 그는 26세 때 시랑() 장자목()에게 「백운시()」를 지어 바쳤는데, 이 시는 아마도 장자목을 찬양하는 내용으로서, 벼슬을 구하고자 하는 뜻을 피력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 그는 「동명왕편」과 함께 장편의 「개원천보영사시()」도 지어서 자신의 문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이처럼 그의 문학 창작의 내면에는 정치적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규보의 부친 이윤수()는 호부낭중()을 지냈다. 하지만 이규보 이전에는 가계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집안이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14세 때부터 문헌공도 성명재()에 들어가 학문을 익히기 시작하였는데, 평소에 과거()의 문장을 익히지 않은 탓에 여러 차례 과거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만다. 그러다가 22세에 비로소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에는 예부시에 응시하여 동진사()에 뽑혔다. 이때 급제의 순위가 낮아 그는 사양하려 했으나 그 사양의 전례가 없어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의 문집 속의 연보()에는 이때의 사정을 두고, "공()은 과거의 문장을 따로 배우지 않아 그 글이 격식과 율격에 맞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가 아버지의 뜻과 달리 과거시험에 열심히 대비하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한미한 집안 때문에 출세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당시 무신집정기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관직을 얻기가 어렵다고 여겼던 것인지, 또는 원래 타고난 그의 성정이 호방하고 구속되기를 싫어한 탓에 형식과 규격에 얽매인 과거의 시문을 익히는 일에 등한히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규보 부친의 고향 여주에는 이씨 일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호장, 교위() 등의 향직()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배경으로 그의 부친은 개성에서 관리노릇을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부친은 개성의 서교(西)에 초당과, 전장()을 겸한 조그만 별업()을 소유했는데 훗날 부친의 사후에 그것은 이규보에게 상속되었다. 게다가 집에는 7, 8명의 가내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그의 집안은 일정한 토지와 노예를 소유한 지방의 신흥 중소지주층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든 그는 과거에 합격한 후에도 권력자들의 환심을 사지 못해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불우한 젊은 시절은 그가 문학수업에 전념할 수 있는 기간이 되기도 한 것 같다. 그런 와중에 24세 때 부친상을 당하자 그는 자기의 삶과 앞날을 걱정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개성의 천마산에 거처하면서 『백운거사어록』과 『백운거사전』을 지었다. 백운거사라는 이름에서 은둔적인 삶을 지향한 의식을 찾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영 세상과 단절하여 초야에 묻힐 생각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집에 수록된 총 2,088수의 시 가운데 창작 시기를 알 수 있는 작품들을 시기별로 볼 때 26세에서 30세까지의 것이 대략 401수 정도인데, 이 작품들은 상당수가 벼슬을 구하는, 소위 '구관시()'의 성격이 강하다는 학자들의 지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앞서 언급한 「동명왕편」, 「개원천보영사시」뿐만 아니라 「차운오동각세문정고원제학사삼백운시()」(28세)와 같은 일련의 장편 영사시()를 쓰는데, 이러한 시들은 군왕의 도덕성이나 당대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교훈의 의미를 강하게 부여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후 32세에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까지 쓴 시들도 대개는 중앙정부의 여러 낭관()들에게 바쳐진 것들이다. 이런 노력이 주효했기 때문인지 실제로 30세가 되던 해 12월에는 조영인, 임유, 최당, 최선 등이 연명으로 그를 추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32세에 최충헌으로부터 벼슬을 얻은 후부터는 '구관시'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보면, 이규보가 26세 때 지은 「동명왕편」은 "시대정신을 터득하고 민족의 맥박에 심호흡을 가한" 결과물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벼슬길에 나아가기 위해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지어진 일련의 '구관시'의 출발점에 서는 작품이라는 점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건국신화의 가치와 의의에 대한 진정한 인식

이규보는 「동명왕편」의 본시()에 앞서 '병서'를 통해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동명왕 - 곧 주몽() - 의 이야기를 장편시로 짓게 된 내력을 밝히고 있다.

세상에서 동명왕의 신이한 일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한다. 비록 어리석은 남녀들까지도 역시 그 일을 능히 이야기한다. 내가 일찍이 이를 듣고 웃으며 말하여, "선사() 공자께서는 괴력난신()을 말씀하지 않았는데, 동명왕의 사적은 실로 황당하고 기괴한 일이어서 우리들이 말할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그 뒤 『위서』와 『통전』을 읽어 보니 거기에도 역시 그 일을 실어 놓았으나 간략하고 자세하지 못하였다. 이는 자기 나라의 일은 상세히 하고, 다른 나라의 일은 간략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지난 계축년 4월에 『구삼국사』를 얻어 「동명왕본기」를 보니, 그 신이한 사적이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를 믿지 못하고 귀신이야기거나 환상적인 이야기로만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세 번 반복하여 읽고 그 뜻을 탐색하여 점점 그 근원에 들어가니, 환상적인 것이 아니고 신성한 것이요, 귀신이야기가 아니고 신의 이야기였다. 하물며 국사() - 즉, 김부식()의 『삼국사기』 - 는 사실 그대로 쓴 글이니, 어찌 망녕된 것을 전하겠는가? 김부식이 국사를 다시 찬술할 때에, 자못 그 일을 매우 간략하게 다루었다. 공은 '국사'란 세상을 바로 잡는 글이니 크게 이상한 일은 후세에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생략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당현종본기」와 「양귀비전」을 살펴보면, 방사()가 하늘에 오르고 땅 속에 들어갔다는 일이 없는데, 오직 시인 백낙천()이 그 일이 없어질까 염려하여 노래 - 「장한가」를 가리킨다 - 를 지어 기록하였다. 저것은 실로 황당하고 음란하며, 기이하고 허탄한 일인데도 오히려 노래로 읊어서 후세에 보였는데, 하물며 동명왕의 일은 변화의 신이한 일로서 여러 사람의 눈을 현혹한 것이 아니고 실로 나라를 창업한 신비한 사적이니, 이것을 기술하지 않으면 후인들이 장차 무엇을 보고 알 것인가? 그러므로 시를 지어 기록하여,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나라임을 천하에 알리고자 할 따름이다.

이규보는 먼저, 동명왕의 신이한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어리석은 백성들도 그 일을 이야기할 줄 안다고 했다. 게다가 중국의 사서인 『위서』와 『통전』에도 그에 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는 공자의 말에 따라 황당하고 괴이한 일들은 말할 거리가 못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동명왕의 일을 가볍게 여겼다. 여기서 괴이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이야기, 귀신의 이야기 따위는 말하지 않는다는 유가적 의식과 소양을 알 수 있거니와, 이규보를 포함한 고려의 일부 지식층의 설화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의 변화에 이르게 되는 계기는 『구삼국사』 - 현재 전하지 않음 - 의 「동명왕본기」를 읽은 이후이다. 『구삼국사』에 실린 이야기는 세상에 전하는 것보다 더 자세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세 번씩이나 읽어가며 의미를 탐구하다보니 처음에는 믿지 못하였으나 점차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신성한 것이고, 귀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의 이야기임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즉, 건국신화의 가치를 정당하게 인식하고 인정하려는 작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신화를 성스럽고 신이한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는 김부식이 윤리적인 교화와 유가적 관점에서 신화를 이해하다보니 그것을 『삼국사기』에 제대로 싣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정사()가 지니는 사서의 한계를 보완함으로써 자칫 잃어버릴 뻔한 고구려 건국신화의 세부적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이는 작가가 김부식과 달리 근본적으로 민족설화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로써 작가는 당대 문화의 본질을 이해하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동명왕편」이 가지는 시대적, 문화적, 정신사적 의의는 크다 하겠다.
이규보는 중국 「당현종본기」에는 보이지 않던 방사()의 이야기를 백낙천이 훗날 없어질까 염려해서 「장한가」를 지어 후세에 전했으며, 더욱이나 그 방사의 이야기가 황당하고 음란하며 기이하고 허탄하기까지 한 점에 주목하고 있다. 세상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일조차 후세에 전하기 위해 애써 작품을 짓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에 비해 우리의 동명왕 사적은 나라를 창업한 신비한 일이어서 '양귀비 고사와 관련된 방사 이야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한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그는 후세인들에게 이 동명왕 사적을 전하고자 하였고 그럼으로써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나라임을 천하에 알리고자"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그가 누구를 향하여 이처럼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나라"임을 과시하려고 했겠느냐 하는 점이다. 중국일까, 아니면 몽고와 같은 오랑캐일까? 그리고 그것이 어떤 우월의식을 내포하는 것일까? 우선, 오랑캐인 몽고를 향하여 정신적인 승리와 민족적 자부심을 과시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당시의 국제 정세를 감안할 때 혈기왕성한 20대의 작가라면 이러한 의식을 가졌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시가 지어진 당시에는 몽고의 침입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작가는 이런 의식을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의 「제화이도장단구()」라는 시를 살펴보자. 이것은 그의 문집 17권에 실린 시인데, 20대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만국의 삼라만상이 두어 폭 종이에 펼쳐져
삼한은 모퉁이의 한 작은 덩어리 같네.
보는 자는 작다고 말하지 말라.
내 눈에는 조금 큰 편이로다.
고금에 어진 인재 끊임없이 태어나
중국에 견주어도 크게 부끄러울 것 없네.
인재 있으면 나라요, 없으면 나라 아니니
오랑캐는 땅만 컸지 초개 같을 뿐
중화인이 우리를 소중화()라 하였으니
이 말은 진실로 채택할 만하네.

이러한 소중화의식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역사관을 바탕으로 한다. 그는 오랑캐를 인재가 없는 나라로, 우리는 땅은 작지만 인재가 많은 나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국과 견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고려시대 중후기의 신진 사류로서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거니와,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사고의 바탕으로 삼아 중세적 질서체제에 순응하며 사는 지식인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규보가 백낙천의 「장한가」를 「동명왕편」 제작의 전례로 제시한 것은 중국과 대등한 문화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끝부분에 우리나라도 중국처럼 성인이 나라를 창업하였음을 대내외에 과시함으로써 우리가 소중화라는 정신적인 자부심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중국 사적의 사례를 먼저 내세워 중국과 대등하다는 의식을 보이는 형식은 본시()에서도 맨 앞의 첫 부분과 맨 뒷부분에서 각각 확인된다.

 

해모수, 주몽 그리고 유리의 이야기

「동명왕편」의 본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태초에서부터 해모수가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이야기다.

원기가 혼돈을 걷어내
천황씨, 지황씨가 되었다.
머리가 열 셋 혹은 열 하나니
그 모습 기이함이 많다네.
그 나머지 성스러운 제왕
경서와 사서에 실려 있다.
여절()은 큰별에 감응되어
대호() 지()를 낳았고,
여추()는 전욱()을 낳되
역시 북두성 광채에 감응되었다.
복희씨는 희생 제도를 마련하였고
수인씨는 나무를 비벼 불을 만들었네.
명엽()풀이 난 것은 요임금의 상서로운 일이요,
곡식에 비내림은 신농씨의 상서라.
푸른 하늘은 여와씨가 깁고[],
홍수는 우임금이 다스렸네.
황제가 하늘에 오르려 할 때
수염 난 용이 어찌 나타났나.
순박한 태고 시절에는
신령하고 성스러운 일 많았건만
후세에는 인정이 점점 경박해져서
풍속이 지나치게 사치해졌다.
성인이 간혹 탄생하나
신성한 자취 보인 바가 적었다.

천지개벽 후 나타나는 중국 제왕들의 신이한 탄생과, 그들의 신성한 통치 행적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절이 지를 낳고 여추가 전욱을 낳은 일은 탄생담이며 복희와 수인, 요, 신농, 여와, 우, 황제 등의 통치 행적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는 성인이 탄생하기는 하나 신성한 자취를 드러낸 일이 없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인정이 경박해져서 풍속이 사치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옛날 옛적에' 우리나라에도 중국의 성인들처럼 동명왕이 탄생하여 나라를 세운 신이한 행적을 펼쳐보였지만, 후세 곧 고려 당시에는 인정과 풍속이 나빠져 왕의 신성한 자취를 보기 어렵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본시의 두 번째 부분은 고구려의 건국신화로서 해부루와 금와왕, 해모수, 해모수의 아들인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 그리고 그의 아들 유리 등 대단히 긴 줄거리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고구려 건국신화와 부여계 여러 나라의 신화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작가는 오언고율의 본시로는 건국신화의 줄거리를 충분히 드러낼 수 없다고 보았던지 중요한 구절마다 주석문을 첨부하여 자세하게 신화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 주석문은 작가가 보았다는 『구삼국사』의 「동명왕본기」의 것이다. 우리는 이 주석문을 통해 고구려 건국신화의 실상에 다가설 수 있는 소중한 자료 하나를 더 확보하게 된다. 이 부분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한()나라 신작 3년
첫여름 북두가 사방( : 남쪽)에 들어섰을 때
【한나라 신작 3년 4월 갑인년이다.】
해동의 해모수는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

【본기()에 이렇게 쓰여 있다. 부여왕 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대를 이을 아들을 구하였다. 이때 타고 가던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들을 시켜서 그 돌을 굴리게 하니, 거기에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 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하느님이 나에게 훌륭한 아들을 준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하였다. 아이를 거두어 길러 이름을 금와()라 하였다. 그 아이는 자라서 태자가 되었다.】

처음에 해모수()를 본시에서 거론한 뒤, 주석문을 첨부하여 동부여 건국신화를 수록하고 있다. 즉, 부여왕 해부루가 산천에 자식 얻기를 기도하다가 곤연에서 금와()를 얻은 뒤 길러서 태자로 삼는다는 내용이다 - 이것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도 실려 있다. 이어서 주석문에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해부루가 동해의 가섭원으로 수도를 옮겨 동부여를 세웠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 옛땅에 하느님의 아들[] 해모수가 하강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처음 공중에서 내릴 때에는
오룡거()에 몸을 싣고,
종자() 백여 사람은
고니 타고 우의() 휘날려,
맑은 음악 소리 퍼져 가고
구름은 뭉게뭉게.

하느님의 아들 해모수가 하늘에서 하강하는 장면이 자못 웅장하다. 오룡거를 탔으며, 종자 백여 명은 고니를 탄 채 음악소리를 내며 내려온다는 것이다. 이후에 전개되는 고구려 건국신화의 내용을 이 주석문을 중심으로 간략히 소개하면 대강 이러하다.

청하()의 하백의 세 딸이 웅심연으로 놀러 나왔다가 해모수의 꾐에 빠져 맏언니 유화가 술에 취하여 붙잡힌다. 하백의 꾸지람으로 해모수는 혼인 의사를 보이며 신성한 변신경쟁을 치룬 뒤 유화와 혼인하나, 홀로 하늘로 올라간다. 이에 하백은 노하여 딸 유화를 우발수로 귀양을 보낸다. 이때 금와는 고기잡이의 하소연에 그물을 던져 물속에 있던 유화를 건져내고, 그녀를 자신의 별실에 둔다.
유화는 햇빛을 받아 임신하게 되고 알을 낳으니, 왕은 상서롭지 못하다며 알을 버린다. 그러나 짐승들이 알을 보호하였고, 이에 알을 도로 모친에게 주니 알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그는 활을 잘 쏘아 주몽으로 불렸는데, 금와왕의 왕자들이 그를 시기하여 죽이려 한다. 그러나 왕은 그에게 말을 돌보는 임무를 주었고, 주몽은 앞날을 위해 준마를 골라 일부러 마르게 기른다. 얼마 뒤 왕으로부터 그 말을 얻었고, 목숨이 위험해지자 세 친구들과 성장지를 탈출한다. 큰 강가에 이르러 하늘과 강에 위험을 고하니 자라와 물고기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주었고, 그는 그것을 타고 강을 무사히 건넌다. 나중에 모친이 보낸 비둘기에서 보리씨를 얻어 오곡의 종자를 모두 받는다. 그는 졸본의 비류수 위에 집을 짓고 고구려를 세우며 고씨를 성으로 삼는다.
비류왕 송양을 만나 다투었는데 화살쏘아 맞히기, 고각 훔치기, 오래된 궁실 짓기 등으로 재주를 겨루고, 결국 흰 사슴을 거꾸로 매달아 비를 내려 비류왕의 도읍을 표몰시키는 신성함을 보인 끝에 송양이 항복한다. 하늘에서 칠일 만에 성과 궁실을 지어준다. 왕은 40세에 홀연 승천한다. 그의 아들 유리는 어려서 새총쏘기를 잘 하였는데, 짖궂은 장난으로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욕을 먹는다. 이에 유리는 모친으로부터 아버지가 남긴 유물이 있으며 이를 얻기 위해 수수께끼를 풀어야 함을 듣는다. 그는 간신히 자기집 기둥 아래에서 부러진 칼 조각을 얻으며, 이를 가지고 아버지를 찾아가서 칼을 맞추었고, 창으로 새어드는 햇빛을 타는 신성함을 보인 뒤 태자로 책봉된다.

이처럼 고구려 건국신화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 해모수의 아들 주몽, 주몽의 아들 유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해모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천신과 태양신의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하늘에서 직접 하강하여 나라를 열었고 아침저녁으로 천상과 지상을 왕래한다. 그의 아들 주몽 역시 해모수의 신성성을 이어받고 있는데, 그것은 어머니 유화가 햇빛을 쬐어 임신한 뒤 그를 낳았다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주몽은 부여 왕궁에서 박해를 받으며 성장했다가 탈출하여 졸본에서 고구려를 세운다. 반면에 유리는 제2대 왕으로서 건국시조의 모습을 지니지 않으면서도 고구려 건국신화의 한 축을 담당하는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특이한 것은 유리에게는 탄생담이 누락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유리이야기가 독자적으로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유리가 해씨 계통의 첫째 왕이며, 집단을 이끌고 부여에서 이탈하여 고구려로 온, 새로운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온조와 비류에 맞선 왕위계승의 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과시할 정치적인 필요성이 요청되었다는 점 등에서 평범한 2대왕과는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신화적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셋째 부분에는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지은 궁극적인 목적이 잘 드러난다.

내 성품 본래 질박하여
기이하고 괴상한 것 좋아하지 않는다.
처음에 동명왕의 일을 보고
요술인가 귀신인가 의심하다가
서서히 서로 섭렵하여 보니
변화무쌍함을 추측하여 의논하기 어렵다.
하물며 이것은 그대로 쓴 글이라
한 글자도 헛된 글자가 없다.
신이하고도 신이하여
만세에 아름다운 일이다.

그는 여기서 신화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있다. 특히 『구삼국사』의 「동명왕본기」는 사실을 바탕으로 쓴 것이어서 한 글자도 헛된 것이 없다는 대목에서 동명왕 사적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어떠한지 잘 드러난다. 이어서 그는 첫째 부분에서처럼 중국 제왕의 탄생 및 창업과정에서 보이는 신이한 징조와 상서로운 일을 이야기한 뒤, 후세 왕들의 게으름과 황음함을 경계하고 있다.

생각건대 창업하는 임금은
성신()이 어찌 아니겠는가.
유온()이 큰 못에서 쉬다가
꿈꾸는 사이에 신을 만났다.
우뢰, 번개에 천지가 캄캄하고
교룡()이 괴이하게 서렸네.
이로 인하여 임신이 되어
거룩한 유계()를 낳았다.
이것이 적제()의 아들인데
일어날 때는 특이한 복조 많았네.
세조 광무 황제 처음 태어날 때는
밝은 빛이 집안에 가득하였고
예언을 적은 적복부()처럼 응하여서
황건적을 소탕하였다.
예로부터 제왕이 일어남에
많은 징조와 상서로움이 있으나
후손들이 게으르고 황음()함이 많아
모든 선왕 제사를 끊게 했네.
이제야 알겠구나, 수성()하는 임금은
작은 일에도 조심하며
너그러움과 어짊으로 왕위를 지키고,
예와 의로 백성을 교화하여
길이길이 자손에게 전하고
오래도록 나라를 다스려야 함을.

「동명왕편」의 맨 끝부분이다. 우선, 그는 창업 군주를 성신()으로 보면서 창업에는 수많은 징조와 상서로움이 나타났음을 강조하고 있다. 유온이 유계를 낳은 일, 후한 광무제가 태어나고 황건적을 소탕한 일 등이 그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창업 군주인 동명왕도 탄생에서 신성함이 있었으며 창업의 과정에도 상서로운 징조가 많았음을 제시함으로써, 동명왕이 중국의 창업 제왕에 결코 뒤지지 않은 성신이었음을 과시하고 있다. 중국과 대등한 역사의식을 드러낸 셈이다.
그러나 작가는 고대 성신들의 탄생과 창업과정에서 나타난 신성함이 후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 이유는 후손들이 게으르고 황음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때 '후손'은 고구려 동명왕의 후손으로서 고구려의 후계를 자처하는 고려 사람들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그가 내세운 수성의 방법은 고대의 제왕들처럼 신성함을 잃지 않는 것인데, 이는 조심하여 왕위를 지키고 예의로 백성을 교화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는 이처럼 군왕의 덕을 강조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당시 고려 조정의 실정 때문에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의 문집에 실린 시 가운데 백성의 어려운 삶을 걱정하고 세금 수탈과 같은 위정자의 폭정을 비판하는 내용이 자주 확인된다. 결국 이 시에서 그는 당시 어지러운 국가가 부강하기를 바라면서 성인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학사적 의의

「동명왕편」은 이규보가 우리 건국신화에 대한 진정한 가치인식을 바탕으로 하면서 문학적 창작력을 발휘하여 지은, 우리 한문학사상 보기 드문 영웅서사시다. 이 시의 가치와 의의에 대해서는 주로 역사학과 국문학에서 논의되어 왔던 바, 여기서는 주로 문학사적 측면에서 다음 몇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먼저, 이 작품에 담겨 있는 고구려 건국신화는 다른 자료의 것에 비하여 아주 방대한 분량이며 이야기의 내용도 자세하고 길다. 그래서 국내의 많은 신화 연구자들은 이것을 연구 자료로 삼기도 한다. 특히 이 작품 속의 고구려 건국신화는 『삼국사기』에서와 달리 서사적 전개가 대단히 합리적인데, 이는 순전히 이규보의 문학적 창작력에 기인한 것이다. 실제로 『삼국사기』에 실린 고구려 신화는 전성기인 6세기 무렵에 완성된 것으로, 오히려 이것이 더 고구려 당대의 실상에 부합한 것일 수 있다.

다음으로, 영웅서사시의 특징에 대한 문제이다. 세계 문학사에서 12, 3세기는 서사시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서구의 『지그프리트』, 『롤랑의 노래』, 『베어울프』, 『엘 시드』 등이 그러하며, 우리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이규보 역시도 20대 중후반에 몇 편의 서사시를 지었고 그를 이어서 이승휴도 『제왕운기』를 지었다. 그런데 「동명왕편」이 고구려라는 한 나라의 신화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면, 『제왕운기』는 민족의 시조로서 단군을 설정하고 이후의 역대 각 나라의 신화를 기술하고 있어서 그 폭이 넓다. 또한 이규보나 이승휴가 보여준 민족의 영웅들에 대한 관심은 고려시대 후기 신흥 지식인들의 작품에도 자주 보이는데, 이는 당시 내우외환에 시달린 역사적 환경에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영웅의 출현을 바랐던 시대적 의식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밖에도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종자()들이 고니를 타고 내려오는" 장면이나, "유화의 세 자매를 선녀라 하고, 특히 한고()라는 선녀로 비유하는" 대목 등에서 도교적 상상력 내지는 도교의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이규보 문학의 토대와 문학사상적 소양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동명왕편」을 영웅서사시로 간주하는데, 이러한 개인 창작의 한문서사시가 지니는 의의와 한계는 무엇인가?
이 시는 병서와 본시의 체제로 되어 있으며, 본시에는 다시 주석문이 끼어 있다. 이러한 형식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도 나타나는데 이러한 양상이 동아시아의 고전적 한문서사시에 두루 나타나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시는 구술()하는 것은 직접 한역하여 기록한 영웅서사시와도 차이가 난다.

2.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짓게 된 동기는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이에 대해서는 민족자주의식의 발로, 민족의 전통에 대한 새로운 평가, 민족적 역사의식, 고구려 계승자라는 역사계승의식, 국가의식, 국난극복의 의식 등의 견해가 제기되었다. 유의할 점은 그가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26세에 이 시를 지었고 당시에는 몽고가 침입하지 않았으며, 운문의 난과 같은 민란 또한 이 시가 지어진 이후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3. 「동명왕편」은 3대기 구조의 전형으로 알려져 왔다. 과연 다른 문헌자료 속의 신화에도 그 점이 공통적으로 확인되는가?
똑같은 건국신화라고 해도 문헌 자료별로 내용적 차이가 존재한다. 세부적인 미세한 차이일 수도 있으나, 그 의미를 달리할 정도로 차이가 큰 경우도 있다. 고구려 건국신화를 전하는 문헌자료는 국내외에 걸쳐 있다. 국내의 자료는 대개 『삼국사기』와 「동명왕편」의 계열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후자는 이규보라는 문학가가 상상력과 문학적 능력을 가미하여 지어진 것이다.

추천할 만한 텍스트

『동명왕편·제왕운기』, 이규보·이승휴 지음, 박두포 역, 을유출판사, 1974.
『이규보시문선』, 이규보 지음, 민족문화추진회 편, 솔, 1997.
『백운 이규보 시선』, 이규보 지음, 허경진 엮음, 평민사, 2003.

 

[참고]

동명왕 신화

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seol-hwa/dong-myeong-wang.htm

 

주몽신화의 세 유형

http://kydong77.tistory.com/8042

 

 

동명왕본기[삼국사기]

http://kydong77.tistory.com/8041

 

 

영품리왕[탁리국왕]의 시비의 아들이 부여왕이 되다

http://kydong77.tistory.com/8040

 

 

동명왕편서

http://kydong77.tistory.com/8039

󰁭장편 영웅서사시 <東明王篇>: 五言古律 141韻 282句.

舊三國史의 東明王本紀 기록이 分注 31條에 나타남.

 

내용은 解慕潄, 東明王[출생,시련,투쟁,승리], 類利 三代에 걸친 행적.

김부식의 신라정통론에 반발한 북방중심의식의 고구려정통론의 역사인식.

 

 

계축년(1193) 26세 작.

 

 *cf.李承休(1224-1300) 『帝王韻紀』

상권 中國歷代帝王 七言

 

하권 韓國歷代帝王

其一 ‘東國君王開國年代’ 七言

其二 ‘本朝君王世系年代‘ 五言

◇古朝鮮(王儉朝鮮)

-삼국유사 권1, 紀異제1

*'王儉'은 王神, 곧 神王의 뜻임.

魏書云

魏書(북제의 위수가 쓴 북위의 정사)에 이르기를,

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 전에 단군왕검이 계셨는데,

立都阿斯達

(일연주: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云在開城東. 或今白岳宮是)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開國號朝鮮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는데

與高同時.

이때는 중국의 요[陶堯]임금과 같은 시기였다고 한다.


古記云

古記에는 이르기를,

昔有桓因(謂帝釋也)

옛날에 환인(제석을 말한다)이 있었는데,

庶子桓雄 數意天下

그 서자 환웅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貪求人世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했다.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

아버지가 그 뜻을 알고 삼위태백산을 내려다보니,

可以弘益人間.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만한 곳이어서

乃授天符印三個 遣往理之.

이에 天符印[하늘의 信標]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이곳을 다스리게 했다.

雄率徒三千 降於太白山頂(則太白 今妙香山) 神壇樹下

환웅은 무리 삼천명을 이끌고 태백산정(지금의 묘향산) 있는 신단수 아래 하강했는데

謂之神市.

이곳을 일러 神市라고 한다.

是謂桓雄天王也.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고 말한다.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그는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과 생명, 질병, 법률, 선악 등 인간세상의 36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여

在世理化.

인간세상에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이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동굴에서 살았는데,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항상 신웅에게 기도하여 변화하여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時神遺靈艾一炷蒜二十枚. 王曰

이 때 천신(天神)은 신령스런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라 했다.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곰은 이것을 받아 먹고 세이레(21일)동안 금기(禁忌)하여 여자의 몸을 얻을 수 있었다.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그러나 범은 금기하지 못하여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熊女者 無與爲婚

웅녀는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날마다 제단의 나무밑에 와서 잉태하기를 축원하였다.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이에 환웅이 임시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니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號曰壇君王儉.

이름울단군 왕검이라 했다.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

단군 왕검은 도당(陶唐) 요(堯임금)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에

(일연주:唐高卽位元年戊寅 則五十年己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요가 즉위한 원년은 무진년이니 즉위후 50년은 경인년이 아니고 정사년이다.사실이 아닌 듯하다.)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다. [이 기록이 BC.2333년 개국 근거다]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이후 백악산 아사달[한자어로 바꾸면 조선朝鮮이 된다]로 도읍을 옮겼다.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그곳을 궁(또는 方)흘산이라고도 하고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御國一千五百年.

그는 이 곳에서 1500년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周虎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주나라 武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壇君乃移於藏唐京.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

後還於阿斯達爲山神

나중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는데

壽一千九百八歲.

나이가 1908세였다고 한다.


唐裵矩傳云

당나라 배구전에 전하기를,

高麗本孤竹國(今海州)

고려는 본디 고죽국(지금의 해주)이었는데

周以封箕子爲朝鮮

주나라를 봉해 줌으로써 조선이라 하였으며,

漢分置三郡

한나라가 이르 다시 나누어 세 군을 설치하여

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

이를 낙랑,현도,대방 이라 불렀다. 통전(通典,당나라의 두우가 편찬한 정치제도사) 에도 또한 이 설과 같다.

(漢書則眞臨樂玄四郡

한서에는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한사군으로 되어 있는데,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여기서는 삼군이라 하여 이름이 같지 아니하니 어째서인가?


壇君神話 해설

[은자주]

1

단군(壇君)>단군(檀君)

오늘날은 단군을 ‘檀君’으로 표기하나 삼국유사에는 ‘壇君’으로 표기하였다. 유사에는 제단을 주재하던 사제(司祭)의 기능을 중시하였던 점을 밝힌 것으로 보면 된다.


김부식이 무시한 고조선을 일연이 내세운 까닭은 무엇일까? 몽고 지배하에서 국민통합을 모색한 일연의 아이디어는 서태지의 등장과는 비교도 안 되는 파천황적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는 필생의 작업으로 이뤄진 유사의 첫 작품으로 단군신화를 제시하였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를 전제로 붙여진 서명이다. 유사(遺事)란 빠뜨린 사실과 사건이란 뜻으로, 유학적 세계관을 지닌 김부식이 빠뜨린 초현실적 세계가 담긴 설화를 모은 책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불교설화집이 되었다.


주목할 것은 단군신화가 일연의 손을 거쳐 불교설화화하였다는 점이다. 환인은 통치신인 제석신의 범어역에서 나온 이름이고, 치국이념도 불교사상인 홍익인간이었다. 인도에는 창조신인 범천[神)과 지배신인 제석천[神]이 분리되었는데, 환인의 역할은 후자에 해당한다. 등장인물인 곰은 물론 ‘신(神)’에서 발상된 말이었지만 ‘감(中聲은 아래아 표기)’에서 ‘神’의 개념이 사라지자 ‘곰’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곰의 인간 변신이다. 그것은 불교의 생명관인 육도윤회를 개입시키면 쉽게 해결된다. 그런데 설화는 왜 문자도 없던 시대에 구비전승되었는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무꾼과 선녀 설화를 보자. 나무꾼은 농사를 지을 땅 한뙈기 없는 무산계급이다. 지금말로는 달동네의 도시노동자이다. 그는 사슴을 숨겨준 업보로 선녀를 만난다. 떵떵거리고 사는 부자들조차 꿈도 못 꾸는 선녀를 만났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통해 나무꾼에 비해 훨씬 부자인 서민들은 오늘도 꿈과 희망을 무의식의 저층에 간직하고 살아간다. 그것이 설화문학의 힘이다. 서민들의 삶에 무한한 에너지를 제공하는 그 설화를, 비현실적이라 해서 제거한 유학적 세계관에 반기를 든 작업이 일연의 불교설화 수집이었고, 그 작업은 철저히 필드웍을 통해 이뤄졌다. 유사가 신라중심의 불교사라는 한계를 지니는 것도 거기에 기인한다.


나라 이름이 왜 조선인가?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했기 때문이다. 아사[あさ]는 아침이고, 달은 ‘양달, 응달’에 남아 있는 공간 개념인데, <이아>에서는 ‘산(山)’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아사달은 ‘아침+산’의 결합어이고, 한자 표기로는 “조선(朝鮮)”이 된다. 그 뜻은 ‘아침햇살이 비치는 산’이다. 그래서 타고르의 명상력은 일찍이 한국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 궤뚫은 건가? 신기롭기 그지없다.


조선 앞에 ‘古’가 붙은 건 위만조선 등의 등장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신화체계를 분석해 보면, 환인(桓因)은 제석(帝釋)으로 석제환인다라(釋提桓因多羅)의 차용어이고, 환웅, 곰, 환웅의 의미소는 아래와 같다.


◊桓雄(환웅) ― 수신 곧 男神[天神]

◊감(아래아 표기, 이하 같음)[熊은 감의 借字]― 여신[地母神]

◊감 神. 神의 고유어는‘감’ 일본어의 かみ. 일본어에는 현재도 かみ 사용. 神聖한 것. 감〉암(아래아)[모계사회]〉엄→어머니

◊雄,干,今은 시베리아어로 司祭(巫師) 또는 長의 뜻. 몽골어로는 王을 干이라 함. 司祭(巫師)란 삼라만상을 주관하고 天界와 人間을 연결하는 전달자.


따라서 단군은 天神[男神]과 地母神[女神]의 결합으로 태어나 우로(雨露)를 내리는 천성(天性)과 만물을 화육하는 대지의 덕성을 공유한 인간세계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말하자면 단군의 탄생으로 만물의 정화(精華,에센스)인 천지인(天地人)의 동양적 세계관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환인이 지상에 하강한 목적은 홍익인간(弘益人間)에 있는데, 이는 지금도 한국 교육의 이념으로 삼고 있다.〈석보상절서〉에서는 “佛이 爲三界之尊하샤 弘渡群生하시나니 無量功德이 人天所不能盡讚이시니라.”라고 하였다.


따라서 단군신화가 불교설화화되었다고 슬퍼할 일은 아닌 듯하다. 고유한 민간신앙에 당시 세계종교인 유불선의 하나와 결합함으로써 세계화, 보편화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할 것이다.


2

그리고, 인용서 가운데 “古記”는 우리나라의 기록인데, 구삼국사 등의 다른 기록도 상상할 수 있으나 삼국유사 ‘고구려조’ 주석에는 <단군기>라는 기록물도 보인다. 일연은 해부루와 주몽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하여 이 자료를 활용하였다. 아래에 옮겨본다.


[壇君記云:

<단군기>에는

“君與西河伯之女要親,

“단군이 서하 하백의 달과 친하여

有産子, 名曰夫婁.

아들을 낳아 부루라 이름하였다.”고 했다.

今按此記,

지금 이 기록(유사 고구려조)을 보면

則解慕漱, 私河伯之女,

해모수가 하백의 딸을 사통하여

而後産朱蒙.

후에 주몽을 낳았다고 한다.

壇君記云: “産子名曰夫婁,

<단군기>에 아들을 낳아 부루라 이름했으니

夫婁與朱蒙, 異母兄弟也.],

부루와 주몽은 어머니가 다른 형제간이다.


부루가 해모수의 아들임은 아래 ‘북부여’조에 자세히 나온다.

北扶餘

古記云.

고기에 이르길,

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

“전한 선제 신작 3년 임술(58년) 4월 8일에

天帝降于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 乘五龍車.

천제가 흘승골성(대요 으주 경계에 있다)에 하강했는데 오룡거(五龍車)를 탔었라.

立都稱王. 國號北扶餘.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自稱名解慕漱.

스스로 칭하기를 해모수라 이름했다.

生子名扶婁. 以解爲氏焉.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고 해(解)로서 성을 삼았다.

王後因上帝之命. 移都于東扶餘.

해부루왕은 후에 상제의 명령으로 인하여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東明帝繼北扶餘而興.

동명제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

立都于卒本州. 爲卒本扶餘.

졸본부에 도읍하여 졸본부여가 되었으니

卽高句麗之始.(見下)

곧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 (아래에 보인다)

위의 기록물들을 종합해 보면 일연은 부여의 여러 부족국가를 통합하여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을, 고조선을 계승한 부여사의 정통으로 삼는 데 동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단군신화는 북방계 신화다. 이민족의 통치하에서 국민통합을 위해서라면 일연은 북방계 신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1]

◊朝鮮:<이아>권7 釋山 小山別大山鮮.(疎... 釋曰 謂小山與大山 分別 不相連屬者 名鮮.李巡云 大山少故曰鮮.) 고유어는 阿斯達 아사[あさ]는 아침, 달은 공간 개념.양달 응달.이병도는 山과 관련시킴. 곧 아침 햇볕을 받은 산. 아침산.

◊桓因(환인)은 帝釋(세계의 중심인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임금)의 범어역인 釋提桓因多羅에서 차용함. 인도인들은 창조신인 梵天과 지배신인 帝釋天을 상정함.

帝釋天[神] > 四天王> 龍王(鬼神衆을 거느리고 인간세계를 감찰함)

◊桓雄(환웅) ― 수신 곧 男神[天神]

◊감[熊은 감의 借字]― 여신[地母神] [감의 중성은 아래앗자 표기,여기서는 불가함]

◊감 神. 神의 고유어는‘감’ 일본어의 かみ. 일본어에는 현재도 かみ 사용. 神聖한 것.감〉암(중성 아래아)[모계사회]〉엄→어머니

◊雄,干,今은 시베리아어로 司祭(巫師) 또는 長의 뜻. 몽골어로는 王을 干이라 함. 司祭(巫師)란 삼라만상을 주관하고 天界와 人間을 연결하는 전달자.

◊弘益人間: 〈석보상절서〉에 “佛이 爲三界之尊하샤 弘渡群生하시나니 無量功德이 人天所不能盡讚이시니라.”


[참고2]

◇김부식의 女王論(三國史記)

동명왕편5

5.유리왕자가 아비 찾아 태자가 되다


[주] 중심축이 동명왕신화임은 부인하지 않지만 해모수나 동명왕의 거창하고 현란한 등장에 비해 유리왕자의 내용을 4구에 그치고 구삼국사의 내용을 소개하는 데 그친 것은 소략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신성성(神聖性)에 초점을 맞췄는데 유리는 기인(奇人)에 그치고 그것이 부족했기 때문인가?


245-248句.◇注31.

俶儻有奇節 포부 크고 기이한 절개 가진

元子曰類利 元子 이름 類利인데

得劒繼父位 칼을 찾아 왕위 잇고

塞盆止人詈 동이 막아 남의 욕을 그쳤다. *詈(리):꾸짖다.


◇注31.類利少有奇節云云.

유리는 소년시절에 남다른 징표를 지녔다고 한다.

少以彈雀爲業.

어려서 참새잡이를 일삼았는데

見一婦戴水盆. 彈破之.

한 부인이 물동이를 이고 있는 걸 보고 쏘아 구멍을 냈다.

其女怒而詈曰.

그녀가 노하여 꾸짖기를,

無父之兒. 彈破我盆.

「아비 없는 자식이 내 물동이를 깼구나.」라고 했다.

類利大慙. 以泥丸彈之.

유리가 크게 부끄럽게 생각하고 진흙 탄환을 쏘아 맞혀

塞盆孔如故.

동이 구멍을 막으니 전처럼 되었다.

歸家問母曰.

집에 돌아와 어미에게 물었다.

我父是誰.

「나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母以類利年少. 戱之曰.

어미는 유리가 나이 어리므로 장난삼아

汝無定父.

「너는 정한 아비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類利泣曰.

유리는 울면서

人無定父.

「사람이 정한 아비가 없이

將何面目見人乎.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남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하고는

遂欲自刎.

마침내 자살하려 하였다.

母大驚止之曰.

어미가 깜짝 놀라 제지하여 말하기를

前言戱耳.

「아까 한 말은 장난이었다.

汝父是天帝孫. 河伯甥

너의 아버지는 천제의 손이요 하백의 외손으로

怨爲扶餘之臣.

부여의 신하됨을 원통하게 생각하여

逃往南土. 始造國家.

남쪽 땅으로 가서 나라를 세웠는데

汝往見之乎.

네가 가서 뵙겠느냐?」라고 하였다.

對曰. 父爲人君.

대답하기를 「아버지가 남의 임금이 되었는데

子爲人臣.

자식은 남의 신하가 되었으니

吾雖不才. 豈不愧乎.

제가 비록 재간이 없사오나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오.」라고 하였다.

母曰.

어미가 말하기를,

汝父去時有遺言.

“너의 아버지가 떠날 때에 遺言하기를,

吾有藏物七嶺七谷石上之松.

「내가 감추어 둔 물건이 있는데, 七嶺七谷의 돌 위 소나무에 있다.

能得此者. 乃我之子也.

이것을 얻은 자가 내 자식이다.」라고 하였다.


類利自往山谷. 搜求不得.

유리가 산골짜기에 가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疲倦而還.

지쳐 돌아왔다.

類利聞堂柱有悲聲.

그가 집 기둥에서 슬픈 소리가 나는 걸 듣고 보니,

其柱乃石上之松木. 體有七稜.

그 기둥이 돌 위의 소나무요 기둥 모양이 일곱 모[角]였다.

類利自解之曰.

유리가 스스로 깨달아 말하기를,

七嶺七谷者. 七稜也.

「칠령칠곡은 일곱 모이고

石上松者. 柱也.

돌 위의 소나무는 기둥이다.」 하고

起而就視之.

일어나 가보았다.

柱上有孔.

기둥 위에 구멍이 있었는데

得毁劒一片. 大喜.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얻고 몹시 기뻐했다.

前漢鴻嘉四年夏四月.

前漢 鴻嘉 4년 여름 4월에

奔高句麗. 以劒一片. 奉之於王.

고구려로 달려와서 칼 한 조각을 왕에게 바쳤다.

王出所有毁劒一片合之.

왕은 지니고 있던 칼 한 조각을 꺼내 그것과 맞추자

血出連爲一劒.

피가 흘러나와 이어져 한 자루의 칼이 되었다.

王謂類利曰.

왕이 유리에게 말했다.

汝實我子. 有何神聖乎.

「네가 진실로 내 아들이라면 무슨 신성한 것이 있느냐? 」

類利應聲. 擧身聳空.

유리는 소리에 맞추어 몸을 들어 공중으로 솟구쳐

乘牖中日. 示其神聖之異.

들창을 타고 해를 맞쳐 신성한 이적을 보였다.

王大悅. 立爲太子.

왕은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발문]◊서문을 오언시로 다시 쓰다

서사시 <동명왕편>은 위의 248구로 끝나고,

이하 34行은 서문의 내용을 오언시로 고쳐 지어 발문으로 삼음.


我性本質木 내 성품 질박하여

性不喜奇詭 기탄(奇誕)한 일 싫어했다.

初看東明事 동명 사적 처음 보고

疑幻又疑鬼 환귀(幻鬼)로 의심타가,

徐徐漸相涉 차차로 알아보곤

變化難擬議 전의 생각 달라졌다.

況是直筆文 하물며 직필문(直筆文)에

一字無虛字 한 자도 거짓 없다.

神哉又神哉 신이(神異)하고 신이쿠나,

萬世之所韙 만세(萬世) 빛날 바라.

因思草創君 생각컨대 초창군(草創君)에

非聖卽何以 성신(聖神) 아님 어디 있나.

劉媼息大澤 유온(劉媼)은 큰 못에서

遇神於夢寐 신인(神人)을 꿈에 만나,

雷電塞晦暝 우뢰 번개 캄캄터니

蛟龍盤怪傀 교룡(蛟龍)이 서리었다.

因之卽有娠 이렇게 잉태(孕胎)하여

乃生聖劉季 탄생한 이 유계(劉季)였네.

是惟赤帝子 이 분이 적제(赤帝) 아들,

其興多殊祚 일어날 때 많은 길조(吉兆).

世祖始生時 세조(世祖)가 처음 날 때

滿室光炳煒 밝은 빛이 집에 가득,

自應赤伏符 적복부(赤伏符) 응하여서

掃除黃巾僞 황건적(黃巾賊)을 쓸어낸다.

自古帝王興 옛부터 제왕(帝王) 설 때

徵瑞紛蔚蔚 서징(瑞徵)이 많았거늘,

末嗣多怠荒 후손들이 게을러서

共絶先王祀 선왕(先王) 제사 끊게 했네.

乃知守成君 알았노라, 수성군(守成君)은

集蓼戒小毖 대소사(大小事)에 조심하며,

守位以寬仁 왕위(王位)에선 관인(寬仁)하고

化民由禮義 다스림엔 예의(禮儀) 서야,

永永傳子孫 길이길이 자손 잇고

御國多年紀 나라 살림 무궁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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