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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燕巖集)》 해제(解題) - 김명호

  《연암집(燕巖集)》 해제(解題)     김명호(金明昊)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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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燕巖集) 해제(解題)

 

 

김명호(金明昊)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568A

 

 

1. 머리말

본서는 한국문학사의 최고봉에 속하는 문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시문(詩文)을 최초로 완역한 것이다.

 

연암은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정조(正祖) 임금이 특별히 거론하고 그 문체의 영향력을 문제 삼았을 정도로 당대 조선의 걸출한 작가였다. 뿐만 아니라 연암은 사후(死後)에도 그의 문학과 사상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고조되어 간 점에서 유례가 드문 작가라 할 수 있다.

 

19세기에 필사본으로만 전하던 그의 문집은 20세기의 벽두인 애국계몽기(愛國啓蒙期)에 처음 활자본으로 공간(公刊)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조선학운동(朝鮮學運動)이 일어나던 무렵에 다시 활자본으로 공간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또한 그에 관한 학문적 연구는 북에서는 홍기문(洪起文)김하명(金河明) 등에 의해 1950년대부터 활발하게 이루졌으며, 남에서는 1960년대 이후 이가원(李家源)이우성(李佑成) 등의 선구적 연구에 이어 오늘날까지 실로 왕성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리하여 이제 열하일기를 비롯한 연암의 작품들은 한국문학이 낳은 특출한 성과로서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주목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이 연암 연구가 날로 발전해 온 추세를 감안할 때 아직 연암의 문집이 완역되지 못한 것은 만시지탄을 금할 수 없다. 연암의 문집 중 열하일기는 이미 완역본이 나온 바 있으나, 일반 시문은 선집(選集)의 형태로만 몇 차례 국역되었을 따름이다.

 

홍기문의 박지원 작품 선집(1960)을 비롯해서 현재까지 남과 북에서 몇 종의 국역서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연암집(燕巖集)에 수록된 시문 전체의 3할을 넘지 않는 일부 작품들만 국역되는 데 그쳤다. 게다가 이러한 국역서들은 대개 텍스트 자체에 대한 서지적 검토를 소홀히 하고 작품의 이해와 감상에 필요한 주해(註解)를 충실히 베풀지 않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본서는 종전의 국역서들이 지닌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하고자 연암의 시문 전체를 국역 대상으로 했을 뿐 아니라, 역자(譯者) 자신을 포함한 학계의 연암 연구 성과를 국역에 충분히 반영한 전문적 학술 번역을 추구하였다.

 

그간 학계의 숙원 사업의 하나였던 연암의 시문 완역이 이루어지게 된 데에는 우전(雨田) 신호열(辛鎬烈 : 1914 ~1993) 선생의 공로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우전 선생은 일찍이 1978년부터 매주 연암집 강독회를 열고 작고할 때까지 연암의 글들을 국역구술하셨다.

 

그 뒤 문하생들이 선생의 유업(遺業)으로 연암집 국역 출간을 기획했으나 선생의 구술을 받아 적은 원고가 방대한 분량이라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결국 문하생 중에서 연암 문학을 전공한 필자가 그 일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동안 필자는 연암의 손자인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고 있어서 그 연구를 마치는 대로 우전 선생의 국역 원고를 정리할 계획이었는데, 어느덧 10여 년이 지났음에도 환재 연구가 끝나지 않아 연암집 국역 작업 역시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늘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던 차,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시급히 국역해야 할 고전의 하나로 연암집을 선정하고 우전 선생과 필자의 공역(共譯) 형식으로 국역해 줄 것을 요청해 왔으므로, 제백사하고 이 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연암 서거 200주년이 되는 2005년에 맞추어 연암의 시문을 드디어 완역 출간하게 된 것이다.

 

2. 연암의 생애와 문학

연암 박지원은 1737(영조 13) 음력 2 5일 서울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중미(仲美)이다. 연암의 가문은 선조조(宣祖朝)의 공신인 박동량(朴東亮)과 그의 아들로서 선조의 부마가 된 박미(朴瀰)를 위시하여 세신귀척(世臣貴戚)을 허다히 배출한 명문거족이었다. 연암의 조부 박필균(朴弼均)은 경기도 관찰사와 호조 참판을 거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지냈으며, 시호(諡號)는 장간(章簡)이다. 부친 박사유(朴師愈)는 평생 포의(布衣)로 지내면서 부모 밑에서 조용한 일생을 보냈다. 따라서 연암의 정신적 성장에는 집안의 기둥이던 조부가 부친보다 더 강한 영향을 끼쳤던 듯하다.

 

연암은 16세 때 전주 이씨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혼인하였다. 장인 이보천은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학통을 계승한 산림처사(山林處士)로 명망이 높았다. 이보천의 아우인 이양천(李亮天)은 시문에 뛰어났으며,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결혼 후 연암은 이러한 장인 형제의 자상한 지도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학업에 정진하였다.

 

20세 무렵부터 연암은 여느 양반가 자제와 마찬가지로 과거 준비에 몰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혼탁한 벼슬길에 과연 나서야 할 것인지 몹시 번민했다고 한다. 그의 초기작을 대표하는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은 이러한 심각한 정신적 갈등 상황에서 창작된 것으로서, 여기에 수록된 마장전(馬駔傳)’ ‘양반전 등은 당시 양반사회의 타락상을 통렬하게 풍자한 작품들이다. 또한 연암은 1765년 가을 금강산을 유람하고 장편 한시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叢石亭觀日出를 지었다.

 

장래의 거취 문제로 오랫동안 번민하던 연암은 1771년경 마침내 과거를 폐하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 연암은 서울 전의감동(典醫監洞)에 은거하며 벗 홍대용(洪大容) 및 문하생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과 교유하는 가운데 자신의 사상과 문학을 심화해 나갔다.

 

이 시절에 그는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본받되 새롭게 창조하자는 말로 집약되는 특유의 문학론을 확립하고, 파격적이고 참신한 소품(小品) 산문들을 많이 지었다. 뿐만 아니라 홍대용을 필두로 잇달아 연행(燕行)을 다녀온 박제가 등과 함께,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자 청 나라의 발전상을 깊이 연구하였다.

 

1778년경 연암은 왕위 교체기의 불안한 정국과 어려운 가정 형편 등으로 인해 개성(開城) 근처인 황해도 금천군(金川郡) 연암협(燕巖峽)으로 은둔했다. 이곳에서 그의 고명을 듣고 찾아온 개성의 선비들을 지도하는 한편, 국내외의 농서(農書)들을 두루 구해 읽고 초록(抄錄)해 두었다. 후일 연암은 이때 초록해둔 것을 바탕으로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저술하게 된다.

 

1780(정조 4) 삼종형(三從兄) 박명원(朴明源)이 청 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을 축하하는 특별 사행(使行)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자, 연암은 그의 수행원으로서 숙원이던 연행(燕行)을 다녀왔다. 북경(北京)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번 사행은 사상 처음으로 황제의 별궁이 있던 만리장성 너머 열하(熱河)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당시의 견문을 도도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열하일기, 이 책은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면서 연암의 작가적 명성을 한껏 드높여 주었다.

 

1786년 연암은 음직(蔭職)으로 선공감 감역이 되었다.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나이 쉰 살에 비로소 벼슬길에 나선 것이다. 그 후 평시서 주부, 의금부 도사, 제릉 영(齊陵令), 한성부 판관을 거쳐, 1792년부터 1796년까지 경상도 안의(安義)의 현감으로 재직했다. 이 안의 현감 시절에 연암은 선정(善政)에 힘쓰는 한편으로,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여 주옥같은 작품들을 지었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비판한 홍범우익서(洪範羽翼序), 과부의 순절(殉節) 풍속을 문제삼은 열녀 함양 박씨전 병서(幷序), 장편 한시 해인사 등의 걸작들은 모두 이 시기의 소산이다. 그런데 이 시절에 그는 뜻밖에 열하일기로 인해 곤경을 겪기도 했다. 열하일기의 문체가 정통 고문(古文)에서 벗어난 점을 질책하면서 속죄하는 글을 지어 바치라는 정조의 어명이 내려왔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편승하여 열하일기가 오랑캐인 청 나라의 연호(年號)를 쓴 글이라는 비방 여론이 일어났던 것이다.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로 돌아온 연암은 제용감 주부, 의금부 도사, 의릉 영(懿陵令)을 거쳐, 1797년부터 1800년까지 충청도 면천(沔川)의 군수로 재직했다. 면천 군수 시절에 그는 어명으로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를 지어 바쳤다. 이 글은 제주도 사람 이방익이 해상 표류 끝에 중국 각지를 전전하다 극적으로 귀환한 사건을 서술한 것으로서, 정조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연암은 농업 장려를 위해 널리 농서를 구한다는 윤음(綸音)을 받들어 과농소초를 진상하였다. 과농소초에 대해 정조는 좋은 경륜 문자(經綸文字)를 얻었다고 칭찬하면서 장차 연암에게 농서대전(農書大全)의 편찬을 맡겨야겠다고까지 했으며, 규장각의 문신들 사이에서도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정조가 승하한 직후인 1800년 음력 8월 연암은 강원도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승진했다. 그러나 궁속(宮屬)과 결탁하여 횡포를 부리던 중들을 징치(懲治)하는 문제로 상관인 관찰사와 불화한 끝에 이듬해 봄 노병(老病)을 핑계 대고 사직했다. 1805(순조 5) 음력 10 29일 연암은 서울 북촌 재동(齋洞) 자택에서 영면하였다.

 

연암의 저작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열하일기 과농소초이다. 이 책들에서 벽돌과 수레 등 청 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적극 수용할 것을 주장하고 선진적인 중국의 농사법과 농기구를 소개했고, 이로 말미암아 연암은 오늘날 조선 후기 북학파(北學派)를 대표하는 실학자로 간주되고 있다.

 

한편 김택영(金澤榮)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서는 연암을 중국의 당송팔가(唐宋八家)에 비견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고문가(古文家)의 한 사람으로 꼽았다. 그런데 연암은 고문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소설식 문체와 조선 고유의 속어속담지명 등을 구사하여 기기(奇氣)’ 기변(奇變)’이 넘치고 민족문학적 개성이 뚜렷한 산문들을 남겼다.

 

방경각외전 중의 양반전, 열하일기 중의 호질(虎叱) 허생전, 그리고 안의 현감 시절 작품인 열녀 함양 박씨전 병서 등은 오늘날 한문소설로 간주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연암은 조선후기 소설사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는 비록 과작(寡作)이기는 하지만,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 「해인사 등과 같이 빼어난 한시도 남겼다. 따라서 연암은 탁월한 자연 묘사를 성취한 시인으로서도 재인식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법고창신(法古創新)’을 핵심으로 한 연암의 문학론은, 시대착오적인 모방을 일삼던 당시의 문풍을 비판하고 당대 조선의 현실을 참되게 그릴 것을 역설한 점에서 근대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문학론의 선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연암집의 편성과 수록 작품

본서에서 국역 대본으로 삼은 텍스트는 1932년 박영철(朴榮喆)이 편한 활자본 연암집이다. 이는 연암의 직계 6대손인 박영범(朴泳範)이 보관해온 필사본 연암집을 그 저본(底本)으로 삼았다고 하며, 모두 17 6책으로 되어 있다.

 

그중 제 1 권부터 제 10 권까지가 일반 시문이고,

 11 권부터 제 15 권까지는 열하일기,

 16 권과 제 17 권은 과농소초이다.

 

본서의 국역 대상이 된 일반 시문에 한하여 박영철 편 연암집의 편성을 필사본 연암집과 비교해 보면 아래와 같다.

 

박영철 편 연암집 필사본
연암집
양식별 특징
원집(原集)  1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1 ~ 6 각종 산문
 2  연상각선본
 3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7 ~ 10 각종 산문
 4  영대정잡영(映帶亭雜詠)  11  ()
 5  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  12  척독(尺牘)
별집(別集)  6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  13  서사(書事)
 7  종북소선(鍾北小選) 14 ~ 15 각종 산문
 8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16  ()
 9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  56  각종 산문
 10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  57  각종 산

 

박영철 편 연암집에서 근간을 이루는 부분은 제 1 권에서 제 3 권까지에 해당하는 연상각선본 공작관문고라고 할 수 있다. 연암의 초기작부터 만년작까지 망라하여 전체 산문의 절반이 넘는 글들이 여기에 정선(精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더욱 핵심적인 부분은 연상각선본이다.

 

연상각(煙湘閣)은 연암이 안의 현감 시절에 세운 정각(亭閣)의 하나였다. 안의 현감으로 갓 부임한 때인 1793, 연암은 정조로부터 열하일기로 인해 문풍(文風)의 타락을 초래한 잘못을 속죄하는 뜻에서 순정(純正)한 문체로 글을 지어 바치라는 하교를 받았다.

 

이에 그는 새로 글을 지어 바치는 대신 구작(舊作)에서 고른 약간 편과 안의에서 지은 글 몇 편을 합쳐 몇 권의 책자로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장차 정조에게 진상할 목적으로 연암 자신이 정선한 글들만을 모은 자찬(自撰) 문집이 바로 연상각선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은 연상각선본과 유사한 성격의 필사본 선집들을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연상각집(煙湘閣集), 운산만첩당집(雲山萬疊堂集), 하풍죽로당집(荷風竹露堂集) 등은 판심(版心) 연암산방(燕岩山房)’이라 찍힌 사고지(私稿紙)를 사용하고 있어 연암 집안의 가장본(家藏本)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러한 필사본 선집에 수록된 글들은 열하일기에서 뽑은 5편의 글을 제하면 모두 연상각선본의 수록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짐작건대 연암은 열하일기의 일부도 포함한 자찬본(自撰本)을 만들어 두었으나, 그의 사후에 문집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열하일기를 별도로 포함함에 따라 연상각선본에서 열하일기 중의 글들은 배제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연암의 처남이자 지기(知己)였던 이재성(李在誠) 연상각선본과 아울러 공작관문고에만 평어(評語)를 남긴 점으로 미루어, 공작관문고 역시 연암의 작품 중 정수(精髓)를 모아 놓은 부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연상각선본에는 모두 32편의 글에 대해 이재성의 평어가 있는 데 비해, 공작관문고에는 단 3편의 글에 대해서만 평어가 있다. 공작관문고에는 연암이 십대 소년인 1755년에 지은 영목당 이공에 대한 제문祭榮木堂李公文〕」에서부터 노년인 1801년 양양 부사로서 강원도 관찰사에게 올린 편지까지 상당한 시차를 둔 작품들이 두루 섞여 있는 점이 특색이다.

 

또한 공작관문고의 자서(自序)와 동일한 글인 공작관집서(孔雀館集序) 겸헌만록(謙軒漫錄)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글을 지은 시기가 기축(1769)’년으로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원래 공작관문고에는 청향당 이선생 묘지명(淸香堂李先生墓誌銘) 죽각 이 선생 묘지명(竹閣李先生墓誌銘)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연암 손자 박규수가 필사본에 붙인 두첨(頭籤)에 의하면 이는 이재성의 글이 잘못 편입된 것이어서, 박영철 편 연암집에서는 제외했다고 한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아마도 연암이 중년 이전에 자찬(自撰) 공작관집(孔雀館集)이 있었는데, 거기에다 연암의 만년작들까지 포함하여 연상각선본에 수록되지 못한 작품들을 합쳐서 개편한 것이 곧 공작관문고가 아니었던가 한다. 이재성의 평어가 단 세 군데에 그치고 있고 그의 글 2편이 혼입되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공작관문고는 이재성이 별세한 1809년 이후의 어느 시기에 편찬된 듯하다.

 

이와 같이 연암집의 근간을 이루는 연상각선본 공작관문고에다, 연암의 시만을 모은 영대정잡영, 중년 이전의 짧은 편지들만을 모은 영대정잉묵, 1797년경 정조의 어명으로 지은 독립된 저술 서이방익사, 주로 중년에 지은 소품 산문들을 모은 종북소선, 그리고 오늘날 한문소설로 간주되는 그의 초기 전() 9편을 모은 방경각외전이 합쳐져서, 1차로 문집이 완성되었던 듯하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朴宗采)가 선친의 언행을 기록한 과정록(過庭錄)을 지은 뒤 1831년에 쓴 추기(追記), 열하일기 과농소초를 제외한 연암의 문고(文稿)는 모두 ‘16이라고 하였다. 위의 표에서도 보듯이, 이는 곧 필사본으로 제 16 권인 방경각외전까지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반당비장 엄화계수일은 각각 연암의 은거지에 있던 고반당이란 집과 엄화계란 시내의 이름을 취한 것이다. 또한 박종채가 문집에 붙인 안설(按說)이 모두 일곱 군데 있는데, 그중 엄화계수일에 마지막으로 수록되어 있는 원사(原士) 한 군데에만 자신의 초명(初名) 종간(宗侃)’을 적지 않고 종채라 적어 놓았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고반당비장 엄화계수일은 아마도 박종채가, 과정록에 추기를 쓴 1831년부터 그의 몰년인 1835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황해도 금천 연암협에 남아 있던 선친의 유고를 마저 수습하여 문집에 최후로 추가한 것이 아닌가 한다.

 

박영철 편 연암집은 위와 같은 경위로 만들어져 후손가에 보관되어 온 필사본 연암집을 모두 6책의 활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연암집을 편찬하면서 종종 임의로 개작했던 것과 달리, 박영철본이 필사본의 원문을 존중하여 함부로 고치지 않은 점은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원문 판독이나 인쇄 과정에서 발생한 오자탈자가 적지 않고, 필사본 원문 자체의 오류가 시정되어 있지 않으며, 필사본의 편차를 그대로 따른 결과 편차가 정연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점 등 일부 문제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박영철 편 연암집에 수록된 연암의 시문을 양식별로 분류하고 괄호 안에 작품의 편수를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연암의 글인지, 독립된 작품인지, 어떤 양식으로 분류할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는 별도의 설명을 붙였다.

 

 (30) : (20)/ 自序(3)/ (1)/ 贈序(3)/ 送序(2)/ 壽序(1)

 (35)

 

* 안의현 여단 신우기(安義縣厲壇神宇記)(1)는 본래 박제가(朴齊家)가 연암의 부탁으로 대신 지은 글이다. 박제가가 지은 원본은 그의 문집에 여단기(厲壇記)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그런데 안의현 여단 신우기를 이 원본과 대조해 보면 연암이 박제가의 글에 상당한 손질을 가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안의현 여단 신우기를 연암의 글로 간주해도 무방하다고 보아 작품 편수에 넣었다.

 (12) : (3)/ 題跋(7)/ 書後(2)

* 광문전 뒤에 쓰다書廣文傳後〕」(8) 외에 이몽직 애사(李夢直哀辭)(3)의 후기(後記) 1편의 서후(書後)로 간주하였다. 연암집 목록에서 그 제목 아래에 서후를 붙였다書後附고 밝히고 있을 뿐더러, 이 작품의 본보기가 된 한유(韓愈) 구양생 애사(歐陽生哀辭)에도 별도로 애사 뒤에 쓰다題哀辭後〕」가 있기 때문이다.

 書牘(101) : (52)/ 尺牘(49)

 傳狀(14) : (8)/ 行狀(1)/ 家狀(1)/ 事狀(3)/ 諡狀(1)

*방경각외전(8)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은 실전(失傳)이라 작품 편수에서 제외했다.

 碑誌(18) : 墓誌銘(5)/ 墓碣銘(9)/ 墓表陰記(1)/ 神道碑(1)/ 紀蹟碑(1)/ 塔銘(1)

 哀祭(11) : 祭文(6)/ 進香文(2)/ 哀辭(3)

 論說(5) : (4)/ (1)

 奏議(7) : (2)/ 狀啓(2)/ 報牒(2)/ 對策(1)

*순찰사에게 답함答巡使書〕」(2)의 부록인 감사 자핵소 초본監司自劾疏草〕」을 독립된 1편의 소()로 간주했다. 감사 자핵소 초본은 김택영의 중편(重編)연암집에도 경상 감사를 대신하여 지은 자핵소代慶尙監司自劾疏〕」라는 제목으로 별개의 글로 수록되어 있다.

*순찰사에게 올림上巡使書〕」(2)의 부록 병영에 올린 보첩의 초본兵營報草〕」 순찰사에게 올림上巡使書〕」(3)의 부록 보첩의 초본(報草)을 각각 독립된 1편의 보첩(報牒)으로 간주하였다.

*주금책(酒禁策)(3)은 실전(失傳)이라, 작품 편수에서 제외했다.

 雜著(3)

*원사(原士)(10)와 아울러, 원도에 대해 임형오에게 답함答任亨五論原道書〕」(2)에서 덕성이기(德性理氣)를 논한 부록과, 순찰사에게 올림上巡使書〕」(2)에서 사학원위(邪學源委)를 논한 부록도 별개의 잡저(雜著)로 간주하였다.

 書事(1) : 5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

 (42) : 4 영대정잡영(映帶亭雜詠) 32()

 

위와 같이 계산하면 연암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통틀어 시() 42, () 237편이다.

 

4. 원문 교감과 주해 작업

본서가 목표로 한 전문적 학술 번역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연암집의 이본(異本)들을 널리 수집검토하여 신뢰할 수 있는 교감본(校勘本)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종전의 국역서들처럼 어구 풀이에 그치지 않고, 창작 시기나 창작 배경, 작품들의 상호 관계, 난해하거나 심오한 의미를 지닌 대목들에 대한 해명 등 작품 해석에 긴요한 내용까지 충실히 주해(註解)해야 할 것이다.

 

연암집의 주요 이본으로는 다음과 같은 활자본 4종과 필사본 6종이 알려져 있다.

 

활자본

 김택영 편, 연암집(1900) : 선집(選集)으로 6 2책이다.

 김택영 편, 연암속집(燕巖續集)(1901) : 선집으로 3 1책이다.

 김택영 편, 중편(重編)연암집(1917) : 선집으로 7 3책이다.

 박영철 편, 연암집(1932) : 전집(全集)으로 17 6책이다.

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승계문고본(勝溪文庫本) : 전집이나 총 57 22책 중 2 1책이 빠졌다.

 숭실대 소장 자연경실본(自然經室本) : 전집이나 11책만 남아 있다.

 연세대 소장본 : 전집이나 7책만 남아 있다.

 영남대 소장본 : 전집이나 8책만 남아 있다.

 연암 후손가 소장 연상각집 : 1. ()와 기() 27편을 수록했다.

 연암 후손가 소장 운산만첩당집 : 1. 33편의 글을 수록했다.

 

이러한 주요 이본들에 관해서는 김혈조(金血祚) 교수가 연암집 이본에 대한 고찰(한국한문학회, 한국한문학연구 17, 1994)에서 자세히 검토한 바 있으며, 본서에서는 그 연구 결과를 원문 교감에 요긴하게 활용하였다. 다만 그 연구에서도 이본 간의 차이를 간과한 경우가 간혹 있고, 서로 차이 나는 경우에 시비(是非) 판단을 내리지 않았으며, 원문 자체가 잘못된 결과 이본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오류 등은 적시(摘示)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서에서는 그러한 한계를 보완하고, 나아가 아래와 같은 여러 문헌들을 추가로 참고하여 더욱 철저한 원문 교감을 하고자 하였다.

 

○ 《병세집(幷世集) : 윤광심(尹光心)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연암의 시 2수와 문() 11편을 수록했다.

 

○ 《종북소선(鍾北小選) : 연암 후손가 소장. 1. ()를 포함하여 연암의 글 11편을 수록했다.

 

○ 《연암제각기(燕岩諸閣記) : 서울대 소장. 1. ‘연암산방(燕岩山房)’ 사고지(私稿紙)를 사용했으며, 연암의 글 7편을 수록했다.

 

○ 《백척오동각집(百尺梧桐閣集) : 장서각(藏書閣) 소장. 1. 연암의 글 15편을 수록했다.

 

○ 《하풍죽로당집(荷風竹露堂集) : 성균관대 소장. ‘()’ 1. ‘연암산방 사고지를 사용했으며, 연암의 글 41편을 수록했다.

 

○ 《연상각집(煙湘閣集) : 성균관대 소장. 1. ‘연암산방 사고지를 사용했으며, 연암이 지은 비지(碑誌) 11편을 수록했다. 말미에 문고 보유목록(文稿補遺目錄) 열하일기 보유목록(熱河日記補遺目錄)이 있어 주목된다.

 

○ 《연암집(燕巖集) : 성균관대 소장. 1. 산고(散稿)로서, 여릉 참봉 왕군 묘갈명(麗陵參奉王君墓碣銘)」 「운봉 현감 최후 묘갈명(雲峰縣監崔侯墓碣銘)」 「백수 이 공인 묘갈명(伯嫂李恭人墓碣銘) 3편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이본들에는 일실(逸失) 여릉 참봉 왕군 묘갈명(麗陵參奉王君墓碣銘)의 명사(銘辭)가 보존되어 있는 등 자료적 가치가 적지 않다.

 

○ 《동문집성(東文集成) : 송백옥(宋伯玉) . 연암의 글 26편을 수록했다.

 

○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 : 김택영 편(1921). 연암의 글 17편을 수록했다.

 

이 밖에 모초재실기(慕初齋實紀), 나은선생문집(羅隱先生文集) , 연암의 글이 단 1 ~ 2편이라도 실려 있는 다수의 문헌들을 찾아서 원문 교감에 참고하였다.

이상과 같이 철저한 원문 교감을 한 위에서, 본서에서는 가급적 충실하고 친절한 주해를 달고자 하였다. 본서의 주해에서 특별히 힘을 기울인 점을 밝히고, 아울러 그에 해당하는 사례를 하나씩만 들면 아래와 같다.

 

(1) 이본들 간의 차이에 대해 시비를 판단하고자 했다.

소완정의 하야방우기에 화답하다酬素玩亭夏夜訪友記〕」(  3 ) 중 연암의 자찬(自讚) 鼓琴似子桑戶 著書似揚雄으로 1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영남대본승계문고본연세대본김택영본 등에는 공백 없이 鼓琴似子桑戶로 되어 있다. 이러한 이본 간의 차이에 대해 본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해를 달았다.

자상호(子桑戶)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인물로, 그가 죽자 막역지우인 맹자반(孟子反)과 자금장(子琴張)이 그의 시신을 앞에 두고서 편곡(編曲)하거나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상호가 거문고를 탔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는 같은 대종사에 나오는 자상(子桑)과 혼동한 결과인 듯하다. 즉 자상의 벗 자여(子輿)가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자상은 거문고를 타면서 자신의 지독한 가난을 한탄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하였다. 원문의 鼓琴似子桑를 그 다음 문장과 연결시켜서 鼓琴似子桑 戶著書似揚雄으로 구두를 떼고 누락된 글자를 로 추정하여 鼓琴似子桑 閉戶著書似揚雄으로 판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찬의 문장들이 대개 □□□□ 5자구(字句)를 취하고 있는 점과 어긋난다. 또한 소순(蘇洵) 폐호독서(閉戶讀書)’한 사실은 있어도 양웅이 폐호저서(閉戶著書)’했다는 기록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子桑戶 는 역시 연자(衍字)로 보아야 할 것이다.(국역 연암집 1 325)

 

(2) 이본들의 공통된 오류로서 필사 또는 인쇄상의 오자탈자연문(衍文)연자(衍字) 등을 지적하였다.

창애에게 답함答蒼厓〕」( 5 ) 두 번째 편지의 첫머리 還他本分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해하였다.

이는 還守本分의 잘못이다. 초서로  자가  자와 비슷하여 잘못 판독한 듯하다. 이 편지의 말미에 守分이라는 유사한 표현이 다시 나오고, 김병욱(金炳昱) 곡망자묘문(哭亡子墓文)에도 이제부터는 출세길에서 일찍 물러나 본분으로 돌아가 이를 지키고 싶을 뿐이다.惟願從今以後 早謝名途 還守本分라는 예가 있다. 磊棲集 卷4

 

(3) 이본들의 공통된 오류로서 원문 자체가 잘못된 경우, 즉 저자가 인명지명서명원전(原典) 인용 등에서 범한 실수를 바로잡았다.

순찰사에게 답함答巡使書〕」( 2 ) 첫 번째 편지의 부록에서 잘못된 사항들을 바로잡고 자세한 주해를 달았다. 사학(邪學)의 본말을 논한 부록 중 제 5 조에서 연암은 선우(單于)가 안문(雁門)의 위사(尉史) 천주(天主)’로 삼았으며 이것이 천주란 말이 쓰인 최초의 사례라고 하였다. 이는 자치통감(資治通鑑) 18 한기(漢紀) 10 세종 효무황제(世宗孝武皇帝) 원광(元光) 2년 조의 기사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나 자치통감의 해당 기사와, 그것의 전거가 되는 사기(史記)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흉노열전(匈奴列傳)이나 전한서(前漢書) 흉노열전 등을 보면, 모두 선우가 안문의 위사를 천왕(天王)’으로 삼았다고 했지 천주로 삼았다고는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연암은 자치통감에 의거한 결과, 부록 제 6 조에서 인명인 옹유조(雍由調)’ 옹곡조(雍曲調)’, 부록 제 8 조에서 인명인 복고돈(伏古敦)’ 복명돈(伏名敦)’으로 적는 오류를 답습했다. 또한 같은 제 8 조에서 인명인 후려 능씨(候呂陵氏)’ 후릉 여씨(候陵呂氏)’로 잘못 적었다. 본서에서는 주해와 원문 각주에서 이상의 사실들을 지적하고 본문에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4) 필요한 경우 창작 시기나 창작 배경, 소재와 주제 등에 대해서도 해설하여 작품 감상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주공탑명(麈公塔銘)( 2 )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해하였다.

()’가 원문에는 (𪊧)’로 되어 있는데, 오자이다. (𪊧)는 사슴의 일종이고, ()는 고라니에 속하여 서로 다르나 글자가 비슷해서 혼동하기 쉽다. ()는 사슴보다 몸집이 훨씬 크고 그 꼬리가 움직이는 대로 뭇 사슴들이 따라간다고 해서 사슴 중의 왕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왕중왕(王中王) 주중주(麈中麈)’라 한다. 또한 그 꼬리인 주미(麈尾)는 고승이 설법할 때 번뇌와 어리석음을 물리치는 표지로서 손에 쥐는 불자(拂子)로 쓰이는데 이를 승주(僧麈)라 한다. 이 글은 연암의 젊은 시절 작품으로, 그 시절 연암과 절친했던 김노영(金魯永 : 1747 ~ 1797)이 이를 애송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연암의 처조카인 이정리(李正履 : 1783 ~ 1843)는 이 글을 불교를 배척하는 작품이라 보았고, 아들 박종채가 이 글을 어느 노승에게 보였더니 그 노승 역시 불교를 배척하는 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過庭錄 卷4 아울러 그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도 이 글은 실존했던 고승의 사리탑에 대한 명()이 아니라, 승주(僧麈)를 의인화(擬人化)한 이름의 가상적인 고승을 설정하고 그에 대한 탑명(塔銘)의 형식을 빌어 불교를 비판한 희작(戱作)이 아닐까 한다.(국역 연암집 1 290)

 

(5) 내용이 난해하거나 심오하여 오역하기 쉬운 대목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해석의 근거를 밝혔다.

원도에 대해 임형오에게 답함答任亨午論原道書〕」( 2 )에서 출전이 명시되지 않은 경우까지 포함하여 일일이 원전의 출처를 밝히고 해설해 두었다. 이를테면 馬牛之起櫪也 圓蹄先前 耦武先後라는 구절에 대해 말과 소가 마구간에서 일어설 때 말은 앞발을 먼저 일으키고 소는 뒷발을 먼저 일으킨다.”라고 번역하고, 다음과 같이 주해하였다.

원제(圓蹄)는 발굽이 둥근 말을 가리키고 우무(耦武)는 발굽이 둘로 갈라진 소를 가리킨다. 조화권여(造化權輿)에 말은 양물(陽物)이라 발굽이 둥글고 일어설 때 앞발을 먼저 일으키며起先前足, 소는 음물(陰物)이라 발굽이 갈라졌고 일어설 때 뒷발을 먼저 일으킨다起先後足고 하였다. 周易玩辭 卷15 馬牛(국역 연암집 1 147)

 

(6) 종전의 번역서들에서 답습하던 해석상의 오류들을 철저히 바로잡고자 했다.

양반전( 8 )에서 양반이 지켜야 할 예의 범절을 나열한 대목 중 漱口無過에 대해, 종전에는 양치질할 때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이에 대해 냄새 없게 이를 잘 닦아야 한다로 번역하고 다음과 같이 주해하였다.

입냄새를 구과(口過)’라 한다.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송지문(宋之問)이 재주 있는 시인임을 알았으나 그의 입냄새가 심한 것을 싫어하여 기용하지 않았다고 한다.(국역 연암집 2 241)

5. 맺음말

본서의 번역 대본이 된 박영철 편 연암집은 연암의 전() 저술을 모아 최초로 공간한 점에서, 편자의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원문 판독이나 인쇄 과정에서 적지 않은 오류를 범했을 뿐더러, 실은 여기에도 누락된 연암의 작품들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러한 작품들을 발굴하여 보완하는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연암집의 보유편(補遺篇)을 만들고 이를 마저 번역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로 남아 있다. 또한 그와 아울러, 필사본의 편차를 답습한 결과 혼란스러운 박영철 편 연암집의 편성을 해체하여, 연암의 전 작품들을 양식과 창작 순서에 따라 정연하게 재편성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이제 연암의 시문에 대한 완역이 이루어진 만큼, 학계의 연암 연구도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국역 연암집 12의 출간을 계기로, 종래와 같이 어느 일면에 치우치거나 국한되지 않고 연암 문학의 총체적인 실상(實相)을 다각도로 밝히는 연구 논저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2005 12 16

 한국고전번역원 | 김명호(金明昊) | 2005

 

박제가, 北學議

 

https://leeza.tistory.com/5813

 

박지원 - 북학의서(北學議序)

불치하문의 정신으로 조금이라도 낫다면 배워야 한다 북학의서(北學議序) 박지원(朴趾源) 모르는 게 있으면 배우는 게 학문의 방법 學問之道無他, 有不識, 執塗之人而問之可也, 僮僕多識我一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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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게 있으면 배우는 게 학문의 방법

 

學問之道無他,

학문하는 방법이란 다른 게 없다.

 

有不識, 執塗之人而問之可也,

알지 못하는 게 있으면 길 가는 사람을 잡고 묻는 게 옳고

 

僮僕多識我一字姑學.

머슴이 나보다 한 자라도 많이 안다면 짐짓 배워야 한다.

 

汝恥己之不若人而不問勝己,

네가 ‘자기가 남만 못한 것’을 부끄러워 하여 나보다 나은 이에게 묻질 않는다면

 

則是終身自錮於固陋無術之地也.

이것은 종신토록 스스로 고루하고 재술(才術)이 없는 지경에 갇히게 하는 것이다.

 

잘 배운 이는 순임금과 공자

 

舜自耕稼陶漁, 以至爲帝,

순이 밭갈고 질그릇 굽고 물고기 잡던 때부터 임금이 됨에 이르기까지

 

無非取諸人.

남에게 취하지 않은 게 없었다.

 

孔子曰: “吾少也賤多能鄙事.”

공자가 “나는 어려서 가난했기 때문에 비천한 일을 많이 잘할 수 있게 됐다.”라고 말했는데,

 

亦耕稼陶漁之類是也.

비천한 일이란 또한 밭갈고 질그릇 굽고 물고기 잡는 부류가 이것이다.

 

雖以孔子之聖且藝,

비록 순임금과 공자의 성스러움과 재예를 지닌 사람이라도

 

卽物而刱巧, 臨事而製器,

사물에 나아가 기교를 창조했고 일에 다다라 기물을 제조하니

 

日猶不足, 而智有所窮.

시간은 오히려 부족했고 지혜는 곤궁한 게 있었으리라.

 

孔子之爲聖,

그러므로 순과 공자가 성인이 된 것은

 

不過好問於人, 而善學之者也.

남에게 묻길 좋아하여 잘 배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배우려하지 않다

 

吾東之士, 得偏氣於一隅之土,

우리 동방의 선비들은 한쪽 모퉁이 땅에서 치우친 기운을 얻어서

 

足不蹈凾夏之地, 目未見中州之人,

발로는 큰 땅을 밟지 못했고 눈으론 중국 사람을 보지 못했으며

 

生老病死, 不離疆域.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을 때까지의 일생동안 영토를 떠나지 않는다.

 

鶴長烏黑, 各守其天,

학은 다리가 길고 까마귀는 검듯이 각자가 천성을 지켜

 

蛙井蚡田, 獨信其地.

우물의 개구리나 밭의 두더지처럼 홀로 자기의 영토만을 믿는다.

 

禮寧野, 認陋爲儉,

예는 거친 게 낫다고 여겨 비루한 걸 검소하다 여겼고

 

所謂四民, 僅存名目,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의 사민(四民)은 겨우 명목만 남았으며

 

而至於利用厚生之具, 日趨困窮.

이용후생의 도구에 이르면 날로 곤궁해지고 궁벽해진 데로 나아갔다.

 

此無他, 不知學問之過也.

이것은 다른 게 없이 배우고 물을 줄 모르는 잘못인 것이다.

 

 

중국을 오랑캐나라라며 천시하는 풍조

 

如將學問, 舍中國而何?

장차 배워 물으려 한다면 중국을 버리고 어떤 나라에 하겠는가?

 

然其言曰: “今之主中國者, 夷狄也.”

그러나 그들은 “지금 중국에 주인된 사람들은 오랑캐다.”라고 말하며

 

恥學焉, 幷與中國之故常而鄙夷之.

배우길 부끄러워하고 중국의 옛법들도 아울러 비루하고 오랑캐스럽다고 한다.

 

彼誠薙髮左袵,

저들은 진실로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하고 있지만

 

然其所據之地,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곳이

 

豈非三代以來漢唐宋明之凾夏乎?

어찌 삼대 이후로 한ㆍ당ㆍ송ㆍ명의 큰 나라가 아니겠는가.

 

其生乎此土之中者,

이 땅 속에 사는 사람들이

 

豈非三代以來漢唐宋明之遺黎乎?

어찌 삼대 이후로 한ㆍ당ㆍ송ㆍ명의 남겨진 백성들이 아니겠는가.

 

苟使法良而制美,

진실로 법이 좋고 제도가 아름답다면

 

則固將進夷狄而師之,

참으로 장차 오랑캐에게 가서 그를 스승삼아야 하는데,

 

况其規模之廣大, 心法之精微,

하물며 규모가 광대하고 심법【심법(心法): 용심지법(用心之法)을 말한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청 나라 문물의 특장(特長)으로 ‘대규모(大規模) 세심법(細心法)’ 즉 규모가 크고 심법이 세밀한 점을 들었다】이 정미하며

 

制作之宏遠, 文章之煥爀,

제작한 것이 굉장하고 원대하며 문장이 찬란하며

 

猶存三代以來漢唐宋明固有之故常哉.

아직도 삼대 이후로 한ㆍ당ㆍ송ㆍ명의 고유한 옛 법을 보존하고 있는 경우라면 오죽할까.

 

以我較彼固無寸長,

우리나라를 중국과 비교하면 진실로 조금도 장점인 게 없지만

 

而獨以一撮之結, 自賢於天下曰:

홀로 한 움큼의 쌍투만으로 스스로 천하에 어질다고 여기며 말한다.

 

“今之中國, 非古之中國也”

“지금의 중국은 예전의 중국이 아니다.”

 

其山川則罪之以腥羶,

중국의 산천은 누린내가 난다고 그들을 탓하고

 

其人民則辱之以犬羊,

그곳에 사는 인민은 개와 양 같다고 욕하며

 

其言語則誣之以侏離,

그들의 언어는 사투리【주리(侏離): 방언(方言)을 뜻하는 말로, 소수민족 혹은 외국의 언어나 문자를 말한다】라고 무함하고

 

幷與其中國固有之良法美制而攘斥之.

중국 고유의 좋은 법과 미풍양속의 제도를 함께 배척해버린다.

 

則亦將何所倣而行之耶?

그러니 또한 장차 어디서 모방하며 실천해야 하는가?

 

 

열하일기와 완벽한 한 쌍인 북학의

 

余自燕還在先爲示其『北學議』內外二編,

내가 연경으로부터 귀국하자【연암은 정조 4년(1780) 5월부터 10월까지 진하 겸 사은별사(進賀兼謝恩別使)의 일원으로 중국 북경을 다녀왔다】 재선은 『북학의(北學議)』 내외 2편을 보여주니,

 

在先先余入燕者也.

대체로 재선은 나보다 앞서 연경에 들어갔던 사람이다【박제가는 정조 2년(1778)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의 일원으로 이덕무와 함께 북경을 다녀온 뒤 『북학의』를 저술하였다】.

 

自農蚕ㆍ畜牧ㆍ城郭ㆍ宮室ㆍ舟車, 以至瓦簟筆尺之制,

농잠ㆍ목축ㆍ성곽ㆍ궁실ㆍ배와 수레로부터 기와 대자리와 붓과 자 등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莫不目數而心較.

눈으로 헤아리고 마음으로 비교하지 않은 게 없었다.

 

目有所未至, 則必問焉,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면 반드시 물었고

 

心有所未諦, 則必學焉.

마음으로 이해되지 않은 것이면 반드시 배웠다.

 

試一開卷, 與余日錄,

시험삼아 한 번 책을 펴보니 나의 『열하일기(熱河日記)』와

 

無所齟齬, 如出一手

어긋나는 게【저어(齟齬): 이가 맞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물이나 일이 맞지 않고 어긋남’을 이르는 말】 없어 한 손에서 나온 것 같았다.

 

此固所以樂而示余,

이것은 진실로 즐거워하며 나에게 보여준 까닭이고

 

而余之所欣然讀之三日而不厭者也.

내가 기쁘게 3일 동안 읽으며 싫어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噫! 此豈徒吾二人者得之於目擊而後然哉.

아! 이것이 어찌 다만 우리 두 사람이 목격한 후에야 그러한 것이겠는가.

 

固嘗硏究於雨屋雪簷之下,

진실로 일찍이 비 내리는 집에서와 눈 내리는 처마 아래서 연구하고

 

抵掌於酒爛燈灺之際,

술에 고주망태되고 등불이 꺼질 때까지 이야기한 것【저당(抵掌): ① 기분좋게 이야기하다 ②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다】을

 

而乃一驗之於目爾.

곧 한 번에 눈으로 증험해본 것일 뿐이다.

 

要之不可以語人, 人固不信矣,

요컨대 남에게 말할 수 없고 남은 진실로 믿지 않을 것이고

 

不信則固將怒我.

믿지 못하면 진실로 장차 우리에게 화를 낼 것이다.

 

怒之性, 由偏氣,

화내는 성품은 치우친 기운에 따른 것이고

 

不信之端, 在罪山川. 『燕巖集』 卷之七

믿지 못하는 단서는 누린내 난다는 산천을 탓함에 있는 것이다

【북학의서(北學議序): 박제가의 『북학의』에 붙은 원래의 서문 말미에 신축년(1781, 정조 5) 중양절(重陽節)에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t9GMQa0BYw 

 

 

총석정관일출(叢石亭觀日出)

ㅡ 박지원(朴趾源)

 

行旅夜半相叫譍 

행려야반상규응. 나그네들이 한 밤중에 부르짖으며 응답하길

遠鷄其鳴鳴未應

원계기명명미응, 먼 닭의 울었나? 응당 울진 않았을 텐데.

遠鷄先鳴是何處

원계선명시하처, 먼 닭이 먼저 우니 이곳은 어느 곳이던가.

只在意中微如蠅

지재의중미여승, 다만 생각 속에 있을 뿐, 은미한 소리는 파리소리 같기만 하네

【『시경(詩經) 제풍(齊風) 계명(鷄鳴) 닭이 우는 것이 아니라, 파리 소리로다.匪鷄則鳴 蒼蠅之聲라고 하였다. 현비(賢妃)가 임금이 조회(朝會)에 늦지 않게 깨우려고 조바심하다가 파리 소리를 닭 울음으로 잘못 들었다는 뜻이다.

邨裏一犬吠仍靜

촌리일견폐잉정, 마을 안 한 마리 개가 짓다가 이내 조용해지니

靜極寒生心兢兢

정극한생심긍긍, 고요함이 극단에 이르니 한기가 생겨 마음이 불안불안.

是時有聲若耳鳴

시시유성약이명, 이때 소리가 들리니 이명인 듯하고이명증(耳鳴症)으로 헛소리를 들은 듯하다는 뜻이다..

纔欲審聽簷鷄仍

재욕심청첨계잉. 겨우 자세히 들으려 하니 처마의 닭소리 따르네.

此去叢石只十里

차거총석지십리, 여기서 총석정까지 거리는 다만 10리 이니

正臨滄溟觀日昇

정림창명관일승, 바로 푸른 바다에 다다르면 일출 보이리.

天水澒洞無兆眹

천수홍동무조진, 하늘가 물은 넘실거려 해 뜰 조짐 없고

洪濤打岸霹靂興

홍도타안벽력흥, 파도가 언덕을 때리니 벼락이 치네.

常疑黑風倒海來

상의흑풍도해래, 항상 의심스러운 건 검은 바람이 바다를 뒤집어

連根拔山萬石崩

연근발산만석붕, 연이은 뿌리째 산을 뽑아 온 바위가 붕괴될까?

無怪鯨鯤鬪出陸

무괴경곤투출륙, 고래 곤어가 다투다 육지로 나오더라도 괴이치 말고

不虞海運値摶鵬

불우해운치단붕, 바다 일어 만나 붕새와 엉기더라도 우려치 말라.

但愁此夜久未曙

단수차야구미서, 다만 걱정되는 건 이 밤에 오래도록 동트지 않아

從今混沌誰復徵

종금혼돈수부징, 이로부터 혼돈스럽다면  누가 다시 징계할까?

無乃玄冥劇用武

무내현명극용무, 바다신이 극렬히 힘을 사용하여

九幽早閉虞淵氷

구유조폐우연빙, 구유(九幽)를 일찍 닫고 우연(虞淵)을 얼리지 않겠는가.

恐是乾軸旋斡久

공시건축선알구, 아마도 하늘축이 돌고 돌기 오래도록 하다가

遂傾西北隳環絙

수경서북휴환환, 마침내 서북쪽으로 기울어져 고리의 끈이 상했네.

三足之烏太迅飛

삼족지오태신비, 삼족오는 매우 빠르게 나는 새인데

誰呪一足繫之繩

수주일족계지승, 누가 한 발에 주술을 걸어 끈으로 묵어왔나?

海若衣帶玄滴滴

해야의대현적적, 해야(海若)해약(海若): 전설상의 해신(海神).의 옷과 띠는 검어 물방울로 적셔 있고

水妃鬢鬟寒凌凌

수비빈환한릉릉, 수비(水妃)의 쪽 찐 머리는 차가워 으슬으슬하네.수비(水妃): 전설상 수중의 신녀(神女).

巨魚放蕩行如馬

거어방탕행여마, 큰 고기가 방탕하게 달리길 말처럼 하고

紅鬢翠鬣何鬅鬙

홍빈취렵하붕승, 붉은 머리에 비취빛 갈기가 어찌하여 덥수룩한가.

天造草昧誰參看

천조초매수참간, 하늘이 어둔 세상 만들 적에 누가 참관했겠는가.

大叫發狂欲點燈

대규발광욕점등, 크게 부르짖어 발광하며 등불 켜려 하네.

欃槍擁彗火垂角

참창옹혜화수각, 혜성참창(欃槍]이 꼬리를 끌고 화성(火星)이 광망(光芒)을 뻗치네

禿樹啼鶹尤可憎

독수제류우가증, 낙엽 진 나무의 부엉이 울음 더욱더 밉상일레

斯須水面若小癤

사수수면약소절, 조금 뒤에 수면에 작은 부스럼 생긴 듯

誤觸龍爪毒可疼

오촉룡조독가동, 용의 발톱 잘못 긁혀 독기로 벌겋더니

其色漸大通萬里

기색점대통만리, 그 빛이 점점 커져 만리를 비추누나

波上邃暈如雉膺

파상수훈여치응, 물결 위에 번진 빛 꿩의 가슴 비슷하이

天地茫茫始有界

천지망망시유계, 아득아득 이 천지에 한계 처음 생겼으니

以朱劃一爲二層

이주획일위이층, 붉은 붓 한 번 그어 두 층이 되었구려

梅澁新惺大染局

매삽신성대염국, 매삽이라 신성이라 염색집이 하도 커서

千純濕色縠與綾

천순습색곡여릉, 몇 천 필 색을 들여 온갖 비단 으리으리

作炭誰伐珊瑚樹

작탄수벌산호수, 산호나무 누가 베어 참숯을 만들었나

繼以扶桑益熾蒸

계이부상익치증, 부상나무 뒤이으니 더욱더 이글이글

炎帝呵噓口應喎

염제가허구응괘, 염제는 불을 불어 입이 응당 비틀리고

祝融揮扇疲右肱

축융휘선피우굉,  축융축융(祝融): 불을 주관하는 신.은 부채 휘둘러 바른팔이 지쳤구려

鰕鬚最長最易爇

하수최장최이설, 새우 수염 가장 길어 그슬리기 제일 쉽고

蠣房逾固逾自𦚦

려방유고유자증, 굴껍질은 굳을수록 더욱더 절로 익네

寸雲片霧盡東輳

촌운편무진동주, 한 치 구름 조각 안개 동으로 다 쓸려 가서

呈祥獻瑞各效能

정상헌서각효능, 온갖 상서 바치려고 제 힘을 다하누나

紫宸未朝方委裘

자신미조방위구, 자신궁(紫宸宮)엔 조회 전에 바야흐로 갖옷을 모셔놓고

陳扆設黼仍虛凭

진의설보잉허빙, 병풍만 펼쳐 논 채 용상은 비어 있네

纖月猶賓太白前

섬월유빈태백전, 초승달은 샛별 앞에 오히려 밀려나서

頗能爭長辥與滕

파능쟁장설여등, 먼저 예를 행하겠다고 등설(滕薛)처럼 제법 맞서누나

赤氣漸淡方五色

적기점담방오색, 붉은 기운 차츰 묽어 오색으로 나뉘더니

遠處波頭先自澄

원처파두선자징, 먼 물결 머리부터 절로 먼저 맑아지네

海上百怪皆遁藏

해상백괴개둔장, 바다 위 온갖 괴물 어디론지 숨어 버리고

獨留羲和將驂乘

독류희화장참승, 희화(羲和,수레 모는 신)만이 홀로 남아 수레 장차 타려 하네

圓來六萬四千年

원래육만사천년, 육만이라 사천 년을 둥글둥글 내려왔으니

今朝改規或四楞

금조개규혹사릉, 오늘 아침 동그라미 고쳐 어쩌면 네모가 될라

萬丈海深誰汲引

만장해심수급인, 만길의 깊은 바다에서 어느 누가 길어 올렸을까

始信天有階可陞

시신천유계가승, 이제서야 믿겠노라 하늘도 오를 계단이 있음을

鄧林秋實丹一顆

등림추실단일과, 등림(鄧林)에 가을 열매 한 덩이가 붉었고

東公綵毬蹙半登

동공채구축반등, 동공(東公)이 채색 공을 차서 반만 올렸구려

夸父殿來喘不定

과부전래천부정, 과보는 헐레벌떡 뒤따라오고 있고

六龍前道頗誇矜

육룡전도파과긍,  육룡은 앞서 끌며 교만스레 자랑하네

天際黯慘忽顰蹙

천제암참홀빈축, 찌푸리듯 하늘가 어두워지다가

努力推轂氣欲增

노력추곡기욕증 , 어영차 해 수레 미니 기운이 솟아난 듯

圓未如輪長如瓮

원미여륜장여옹, 바퀴처럼 둥글잖고 독처럼 길쭉한데

出沒若聞聲砯砯

출몰약문성빙빙, 뜰락 말락 하니 철썩철썩 부딪치는 소리 들리는 듯

萬物咸覩如昨日

만물함도여작일, 만인이 어제처럼 모두 바라보는데

有誰雙擎一躍騰 

유수쌍경일약등, 어느 뉘 두 손으로 받들어 단번에 올려놨노

燕巖集 卷之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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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 총석정관일출(叢石亭觀日出)

총석정에서 일출을 보며총석정관일출(叢石亭觀日出) 박지원(朴趾源) 行旅夜半相叫譍 遠鷄其鳴鳴未應遠鷄先鳴是何處 只在意中微如蠅邨裏一犬吠仍靜 靜極寒生心兢兢是時有聲若耳鳴 纔欲審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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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

누이가 시집가던 날의 어여쁜 모습이 산천에 그대로 담겨 있네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 박지원(朴趾源) 초상 지르던 날의 풍경 孺人諱某, 潘南朴氏, 其弟趾源仲美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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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

 

초상 지르던 날의 풍경

孺人諱某潘南朴氏, 其弟趾源仲美誌之曰:

유인 휘모씨【휘(諱): 원래 ‘기피한다’는 듯인데, 보통 죽은 이의 이름을 가리길 때 쓰는 말이다. 전근대 동아시아 문화는 남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큰 실례라고 생각했기에 ‘이름’을 ‘휘’라고 했다】는 반남 박씨【반남(潘南)은 박씨의 한 본관인데, 예전의 반남현(潘南縣), 즉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潘南面)에 해당한다. 반남 박씨는 조선 후기에 유력한 벌열 가문의 하나로 성장하였다】로 그 아우 지원 중미가 묘지명【묘지명(墓誌銘): 죽은 사람의 이름ㆍ신분ㆍ행적 따위를 기록한 글로, 보통 돌이나 도편(陶片, 도자기 조각)에 새겨 무덤 속에 넣는다. 묘지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엔 죽은 이의 이름과 행적을 산문으로 서술하는바 이를 ‘지(誌)’라 하고, 뒷부분엔 죽은 이에 대한 칭송을 운문으로 붙이는바 이를 ‘명(銘)’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남편의 품계에 따라 아내의 작호(爵號)가 정해졌다. ‘유인(孺人)’은 원래 정9품 및 종9품 문무관 처에 대한 작호인데, 생전에 벼슬하지 못한 양반의 처에 대해서도 높이는 의미에서 신주(神主)나 명정(銘旌)에 이 말을 사용했다. 연암의 큰누님이 돌아가셨을 당시 그 남편 이택모(李宅模)는 아직 아무 벼슬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후자의 용례로 쓰였다. / 예전부터 묘지명이나 비문은 유묘지문(諛墓之文), 즉 귀신에게 아첨하는 글이라 하여 포(褒)는 있어도 폄(貶)은 없는, 다시 말해 좋은 말만 잔뜩 늘어놓는 것이 상례이다. 그리고 글의 짜임새 또한 규격화되어 있어, 심지어 한유가 지은 여러 묘지명을 놓고는 사람 이름만 바꿔 넣으면 아무라도 괜찮다는 ‘중인동제지문(衆人同祭之文)’의 비난까지 있어 왔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정민, 태학사, 2000년, 321쪽】을 다음과 같이 쓴다.

 

孺人十六, 歸德水李宅模伯揆.

유인은 16살에 덕수 이씨인 택모 백규에게 시집을 갔다.

 

有一女二男, 辛卯九月一日歿, 得年四十三.

2녀 1남을 두었고 신해년(1791년) 9월 1일에 돌아가셨으니 43살이 되었다.

 

夫之先山曰‘鵶谷’, 將葬于庚坐之兆.

가족의 선산은 ‘아곡(鵶谷)’【백아곡(白鵶谷)을 말하는데, 조선시대 지평현(砥平縣)의 한 지명으로,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楊東面)에 해당한다. 일찍이 택당 이식이 이곳에 부친의 장지(葬地)를 마련한 이래 그 후손들의 선영(先塋)이 되었으며, 이식은 여기에 택풍당(澤風堂)이나 집을 짓고 기거한 바 있다】에 있으며, 장차 경좌(庚坐)【묏자리나 집터 따위가 경방(庚方)을 등진 방향. 또는 그렇게 앉은 자리. 서남쪽을 등진 방향】의 남쪽에 장례지낼 것이다.

 

伯揆旣喪其賢室, 貧無以爲生,

백규는 이미 그 어진 아내를 잃었고 가난하여 생을 도모할 수가 없으니,

 

挈其穉弱婢指十, 鼎鎗箱簏,

그 어린 아이들과 허약한 종 한 명을 데리고 솥과 상자를 챙겨

 

浮江入峽, 與喪俱發.

강에 배 띄워 골짜기로 들어갔으니 상여와 함께 출발하였다.

 

仲美曉送之斗浦舟中, 慟哭而返.

나는 새벽에 두포(斗浦)【두포(斗浦)는 두모포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의 동호대교 부근에 있던 작은 나루로서, 한강나루의 보조 나루였다. 이 일대 한강을 동호(東湖)라 불렀으며, 강 건너편 돌출 부분에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에서 그들을 보내고 배 안에서 통곡하며 돌아왔다.

 

去者丁寧留後期

거자정녕류후기

떠나는 사람(이택모)은 정령 머물며 다시 만날 날 기약하자 해도

猶令送者淚沾衣

유령송자루첨의

오히려 보내는 사람으로 눈물로 옷을 적시게 하네.

扁舟從此何時返

편주종차하시반

조각배 이로부터 어느 때에나 돌아오려나

送者徒然岸上歸  

송자도연안상귀

보내는 이 망연자실하게 언덕에서 돌아오네.

 

28년 전 일이 스치듯 떠올라

嗟乎! 姊氏新嫁曉粧, 如昨日.

아! 누이 시집가려 새벽에 화장할 때가 마치 어제 같다.

 

余時方八歲, 嬌臥馬𩥇,

나는 겨우 8살로 교태부리며 누워서 발 장난 치면서【마전(馬𩥇): 말이 땅에 뒹굴며 몸을 비벼대는 것을 뜻하는 단어다. 여기서는 발랑 누워 어리광을 부리며 발버둥을 치는 어린 연암의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 개구쟁이 같은 여덟 살 소년 연암의 짖궂은 태도가 이 글자에 잘 집약되어 있다. 그후 28년이 흘러 이 글을 쓸 당시 연암은 서른다섯 살의 장년이었다】

 

效婿語口吃鄭重.

신랑의 말을 흉내 내어 더듬거리며 정중하듯 했었다.

 

姊氏羞, 墮梳觸額,

누이는 부끄러워하며 얼레빗을 떨어뜨려 내 이마를 맞췄기에

 

余怒啼, 以墨和粉,

나는 성질을 내며 울면서 먹으로 분을 섞고

 

以唾漫鏡.

침을 거울에 뱉어 더럽혔었다.

 

姊氏出玉鴨金蜂,

그러자 누이는 옥으로 된 기러기와 금으로 된 나비 노리개를 꺼내

 

賂我止啼, 至今二十八年矣.

나에게 주며 울음을 그치게 했으니, 지금으로부터 28년 전의 일이로구나.

28년 전 일이 현재의 풍경과 뒤섞이다

 

立馬江上, 遙見丹旐翩然,

말을 강가에 세워두니 아득히 붉은 명정(銘旌)【붉은 천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관직이나 성명 등을 기록하여 상여 앞에 들고 가는 긴 기(旗)를 말한다】이 나부끼는 게 보이고

 

檣影逶迤,

돛대 그림자 구불구불 흘러가

 

至岸轉樹隱不可復見.

강굽이에 이르러 나무 그림자에 가려져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而江上遙山, 黛綠如鬟,

이윽고【이(而):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사이에는 연속과 단절, 고조와 전환, 인식의 비상과 미학적 고양이 존재한다. 아무 뜻도 갖지 않는 이 한 글자가 이 모든 것을 매개하고, 이 모든 것을 실현시키고 있다. 이 점에서 이 글자는 천금의 값어치를 가지며, 아무런 질량도 없으면서도 굉장한 존재론적 무게를 갖는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연암을 읽다』, 박희병, 돌베개, 2006, 25~26쪽】 강가의 먼 산은 검푸른 빛깔이 눈썹먹 같고,

 

江光如鏡, 曉月如眉.

강 빛은 거울 같고, 새벽달은 눈썹 같기만 하다.

 

泣念墮梳, 獨幼時事歷歷,

울며 얼레빗을 떨어뜨릴 때를 생각하니 유독 어릴 때의 일이 하나하나 기억났고

 

又多歡樂, 歲月長,

또한 즐거움과 기쁜 일이 많아 세월이 더디 갈 것만 같더니,

 

中間常苦離患憂貧困, 忽忽如夢中.

중간부턴 늘 근심과 우환과 빈곤이 있어 아득히 마치 꿈인 것만 같다.

 

爲兄弟之日, 又何甚促也?

형제가 되었던 날(누나가 시집가기 전까지 8년을 말함)은 또한 어찌 그리고 금방이던가【연암은 23세 때 모친이 돌아가셨고, 이듬해에 집안의 기둥이었던 조부 박필균이 작고했으며, 31세 때 부친이 돌아가셨다. 부친이 돌아가신 지 4년 만에 다시 큰누님의 죽음을 맞은 것이다. -『연암을 읽다』, 27쪽】.

 

처남 이재성의 이 글에 대한 평

 

緣情爲至禮, 寫境爲眞文.

정을 따르면 지극한 예가 되고, 경치를 묘사하면 참된 글이 된다.

 

文何甞有定法哉?

글이란 게 어찌 일찍이 정해진 법칙이 있겠는가?

 

此篇以古人之文讀之, 則當無異辭,

이 글을 옛 사람의 글로 읽으면 마땅히 다른 말이 없겠지만,

 

而以今人之文讀之, 故不能無疑.

지금 사람의 글고문(古文)’이란 일종의 전통주의로서, 당송팔대가 등 과거에 이미 확립된 문장의 법도를 전범으로 삼는 창작 태도를 가리킨다. '금문'이란, 다른 말로는 시문(時文)’이라고도 하는데, 일종의 반전통주의로서, 고문의 법도에 구애됨이 없이 진솔하고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글로 옮기는 창작 태도를 가리킨다. -연암을 읽다, 30로 읽으면 의심이 없을 수가 없다.

 

願秘之巾衍.

그러니 상자에 넣어 비밀스럽게 간직하길 원한다.

 

 

박지원朴趾源: 1737(영조 13)~1805(순조 5) 생애 요약

조선 후기의 실학자ㆍ문인.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호는 연암(燕巖)ㆍ열상외사(洌上外史).

1737   서울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출생. 장인 이보천(李輔天)의 아우인 이양천(李亮天)에게서 사기(史記)를 시작으로 역사서적을 통해 문장 쓰는 법을 습득함.
1752 16 전주 이씨 보천(輔天)의 딸과 결혼.
1754 18 10대 후반에 우울증에 시달려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영역을 확대하여 18세 무렵에 광문자전(廣文子傳)을 지었다. 지음.
1757 21 민옹전(閔翁傳) 지음.
1759 23 모친 함평 이씨 별세.
1760 24 조부 박필균(朴弼均) 별세로 생활이 곤궁해짐.
1765 29  총석정관일출(叢石亭觀日出)을 지음. 처음 과거시험에 실패하자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게 됨.
1766 30 장남 종의(宗儀) 출생.
1767 31 부친 박사유(朴師愈) 별세.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소설을 완료 지음.
1768 32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박제가(朴齊家이서구(李書九서상수(徐常修유득공(柳得恭유금(柳琴)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가짐.
1772 36 종루(鍾樓) 북쪽 전의감동(典醫監洞)에 우거. 초정집서(楚亭集序) 지음.
1777 41 장인 이보천 별세.
1778 42 황해도 금천군 연암동(燕巖洞)으로 와서 살다.
1780 44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던 때에 삼종형 박명원(朴明源) 청의 고종 70세 축하사절로 가자 함께 따라가며 열하일기(熱河日記)라는 기록을 남김. 차남 종채(宗采) 출생.
1781 45 북학의서(北學議序) 지음
1783 47 벗 홍대용 별세.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 지음. 열하일기(熱河日記)』 「渡江錄序 지음
1786 50 음보(蔭補)로 선공감 감역에 임명됨.
1787 51 부인 이씨 별세
1789 53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승진
1790 54 의금부 도사ㆍ제릉령(齊陵令)으로 전보됨.
1791 55 한성부 판관으로 전보됨. 안의(安義) 현감에 임명됨.
1792 56 안의에 부임함.
1793 57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을 지음
1796 60 임기 만료로 귀경(歸京). 제용감(濟用監) 주부ㆍ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ㆍ의릉령(懿陵令)으로 전보됨.
1797 61 면천(沔川) 군수로 임명됨.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 지음.
1799 63 과농소초(課農小抄) 지음
1800 64 양양(襄陽) 부사로 승진.
1801 65 양양 부사 사직함.
1805 69 노환으로 별세

 

평가.

1.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열하일기(熱河日記), 담총외기(談叢外記)

열하일기 웃음과 유머 연암을 만나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연암을 읽는다
문체반정과 열하일기  
孔雀館文稿 自序 觀齋記
課農小抄諸家摠論後附說 琴鶴洞別墅小集記
蜋丸集序 泠齋集序
菱洋詩集序 綠天館集序
湛軒所藏淸明上河圖跋  
변화를 긍정하라亡羊錄 馬首虹飛記
伯夷論 上 伯夷論 下
髮僧菴記 北學議序
不移堂記  
象記 蟬橘堂記
騷壇赤幟引 酬素玩亭夏夜訪友記
素玩亭記 旬稗序
安義縣 厲壇 神宇記 夜出古北口記
念齋記 玉璽論
嬰處稿序 柳氏圖書譜序
以存堂記 原士
一夜九渡河記 일야구도하기를 지은 이유
自笑集序 族兄都尉公周甲壽序
鍾北小選 自序 晝永簾垂齋記
竹塢記 贈白永叔入麒麟峽序
贈季雨序  
楚亭集序 醉踏雲從橋記
최성대가 쓴 이화암 노승  
楓嶽堂集序 筆洗說
夏夜讌記 限民名田議
幻戱記後識 炯言挑筆帖序
好哭場論 繪聲園集跋
會友錄序  
   
伯嫂恭人李氏墓誌銘 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
李夢直哀辭 李處士墓碣銘
祭鄭石癡文 洪德保墓誌銘
孝子贈司憲府持平尹君墓碣銘  
放璚閣外傳 自序 穢德先生傳
許生傳 閔翁傳
兩班傳 虎叱
廣文子傳 / 書廣文傳後 烈女咸陽朴氏傳
   
與人 與人
答京之之一 答京之之二
答京之之三 與成伯之二
答仲玉之一 答南壽
答蒼厓之一 答蒼厓之二
答蒼厓之三 答蒼厓之四
答蒼厓之五 答蒼厓之九
答李仲存書 與仲存
答洪德保書() 答洪德保書()
答洪德保書() 映帶亭賸墨自序
與中一之三  
   
叢石亭觀日出 燕岩憶先兄
贈左蘇山人 麈公塔銘
元朝對鏡 遼野曉行
一鷺 渡鴨綠江回望龍灣城
極寒 馬上口號
山行  
熱河日記 過庭錄
  한국한시사

 

行旅夜半相叫譍
행려야반상규응
나그네들이 한 밤중에 부르짖으며 응답하길
遠鷄其鳴鳴未應
원계기명명미응
먼 닭의 울었나? 응당 울진 않았을 텐데.
遠鷄先鳴是何處
원계선명시하처
먼 닭이 먼저 우니 이곳은 어느 곳이던가.
只在意中微如蠅
지재의중미여승
다만 생각 속에 있을 뿐, 은미한 소리는 파리소리 같기만 하네【『시경(詩經) 제풍(齊風) 계명(鷄鳴) 닭이 우는 것이 아니라, 파리 소리로다.匪鷄則鳴 蒼蠅之聲라고 하였다. 현비(賢妃)가 임금이 조회(朝會)에 늦지 않게 깨우려고 조바심하다가 파리 소리를 닭 울음으로 잘못 들었다는 뜻이다.
邨裏一犬吠仍靜
촌리일견폐잉정
마을 안 한 마리 개가 짓다가 이내 조용해지니
靜極寒生心兢兢
정극한생심긍긍
고요함이 극단에 이르니 한기가 생겨 마음이 불안불안.
是時有聲若耳鳴
시시유성약이명
이때 소리가 들리니 이명인 듯하고이명증(耳鳴症)으로 헛소리를 들은 듯하다는 뜻이다..
纔欲審聽簷鷄仍
재욕심청첨계잉
겨우 자세히 들으려 하니 처마의 닭소리 따르네.
此去叢石只十里
차거총석지십리
여기서 총석정까지 거리는 다만 10리 이니
正臨滄溟觀日昇
정림창명관일승
바로 푸른 바다에 다다르면 일출 보이리.
天水澒洞無兆眹
천수홍동무조진
하늘가 물은 넘실거려 해 뜰 조짐 없고
洪濤打岸霹靂興
홍도타안벽력흥
파도가 언덕을 때리니 벼락이 치네.
常疑黑風倒海來
상의흑풍도해래
항상 의심스러운 건 검은 바람이 바다를 뒤집어
連根拔山萬石崩
연근발산만석붕
연이은 뿌리째 산을 뽑아 온 바위가 붕괴될까?
無怪鯨鯤鬪出陸
무괴경곤투출륙
고래 곤어북해(北海)에 살며 크기가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는 물고기로,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온다. 원문의  병세집에는 로 되어 있다.가 다투다 육지로 나오더라도 괴이치 말고
不虞海運値摶鵬
불우해운치단붕
바다 일어 만나 붕새와 엉기더라도 우려치 말라.
但愁此夜久未曙
단수차야구미서
다만 걱정되는 건 이 밤에 오래도록 동트지 않아
從今混沌誰復徵
종금혼돈수부징
이로부터 혼돈스럽다면혼돈은 천지개벽 초에 만물이 아직 구별되지 않은 어두운 상태를 가리킨다. 이 혼돈은 중국 고대 문헌에서 주로 부정적인 존재로 의인화(擬人化)되었다. 장자 응제왕(應帝王)에서는 눈, , , 귓구멍, 콧구멍이 없는 중앙의 제왕으로 소개되어 있다. 삼황(三皇) 이전 천지의 시초의 제왕이라고도 한다. 또한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제홍(帝鴻) 즉 황제(黃帝)의 못난 자식으로서 그 후손이 요순(堯舜) 시대 때 악명 높은 사흉(四凶)의 하나였다고 한다. 신이경(神異經)에는 곤륜산(崑崙山) 서쪽에 사는 악수(惡獸)라고도 하였다. 원문의 從今 병세집에는 從玆로 되어 있다. 누가 다시 징계할까?
無乃玄冥劇用武
무내현명극용무
바다신이 극렬히 힘을 사용하여
九幽早閉虞淵氷
구유조폐우연빙
구유(九幽)구유(九幽): 땅속의 가장 깊은 곳을 가리킨다.를 일찍 닫고 우연(虞淵)우연(虞淵): 전설상 해가 지는 곳이다.을 얼리지 않겠는가.
恐是乾軸旋斡久
공시건축선알구
아마도 하늘축이 돌고 돌기 오래도록 하다가
遂傾西北隳環絙
수경서북휴환환
마침내 서북쪽으로 기울어져 고리의 끈이 상했네.
三足之烏太迅飛
삼족지오태신비
삼족오는 매우 빠르게 나는 새인데
誰呪一足繫之繩
수주일족계지승
누가 한 발에 주술을 걸어 끈으로 묵어왔나?
海若衣帶玄滴滴
해야의대현적적
해야(海若)해약(海若): 전설상의 해신(海神)이다.의 옷과 띠는 검어 물방울로 적셔 있고
水妃鬢鬟寒凌凌
수비빈환한릉릉
수비(水妃)수비(水妃): 전설상 수중의 신녀(神女)이다.의 쪽 찐 머린빈환(鬢鬟): 양쪽 귀밑머리를 잡아당겨 만든 환상(環狀)의 쪽 찐 머리를 말한다. 차가워 으슬으슬하네.
巨魚放蕩行如馬
거어방탕행여마
큰 고기가 방탕하게 달리길 말처럼 하고
紅鬢翠鬣何鬅鬙
홍빈취렵하붕승
붉은 머리에 비취빛 갈기가 어찌하여 덥수룩한가.
天造草昧誰參看
천조초매수참간
하늘이 어둔 세상 만들 적에 누가 참관했겠는가.
大叫發狂欲點燈
대규발광욕점등
크게 부르짖어 발광하며 등불 켜려 하네.
欃槍擁彗火垂角
참창옹혜화수각
혜성참창(欃槍): 혜성의 이름이고, 혜성은 비를 들어 쓸어 버린 듯이 꼬리를 길게 끌기 때문에 소추성(掃帚星)이라고도 한다.이 꼬리를 끌고 화성(火星)이 광망(光芒)을 뻗치네
禿樹啼鶹尤可憎
독수제류우가증
낙엽 진 나무의 부엉이 울음 더욱더 밉상일레
斯須水面若小癤
사수수면약소절
조금 뒤에 수면에 작은 부스럼 생긴 듯
誤觸龍爪毒可疼
오촉룡조독가동
용의 발톱 잘못 긁혀 독기로 벌겋더니
其色漸大通萬里
기색점대통만리
그 빛이 점점 커져 만리를 비추누나
波上邃暈如雉膺
파상수훈여치응
물결 위에 번진 빛 꿩의 가슴 비슷하이
天地茫茫始有界
천지망망시유계
아득아득 이 천지에 한계 처음 생겼으니
以朱劃一爲二層
이주획일위이층
붉은 붓 한 번 그어 두 층이 되었구려
梅澁新惺大染局
매삽신성대염국
매삽이라 신성매삽 신성은 그 의미가 불확실하나 염색집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원문의  열하일기 일신수필(馹迅隨筆) 7 20일 조에는 으로 되어 있다.이라 염색집이 하도 커서
千純濕色縠與綾
천순습색곡여릉
몇 천 필 색을 들여 온갖 비단 으리으리
作炭誰伐珊瑚樹
작탄수벌산호수
산호나무 누가 베어 참숯을 만들었나
繼以扶桑益熾蒸
계이부상익치증
부상나무 뒤이으니 더욱더 이글이글
炎帝呵噓口應喎
염제가허구응괘
염제는 불을 불어 입이 응당 비틀리고
祝融揮扇疲右肱
축융휘선피우굉
축융축융(祝融): 불을 주관하는 신이다.은 부채 휘둘러 바른팔이 지쳤구려
鰕鬚最長最易爇
하수최장최이설
새우 수염 가장 길어 그슬리기 제일 쉽고
蠣房逾固逾自𦚦
려방유고유자증
굴껍질은 굳을수록 더욱더 절로 익네
寸雲片霧盡東輳
촌운편무진동주
한 치 구름 조각 안개 동으로 다 쓸려 가서
呈祥獻瑞各效能
정상헌서각효능
온갖 상서 바치려고 제 힘을 다하누나
紫宸未朝方委裘
자신미조방위구
자신궁(紫宸宮)자신궁(紫宸宮): 당송(唐宋) 시대에 천자가 신하나 외국의 사신을 조회하던 정전(正殿)이다.엔 조회 전에 바야흐로 갖옷을 모셔놓고임금이 죽고 새 임금이 아직 조정에 나와 앉기 전에는 선왕의 유의(遺衣)인 갖옷을 모셔놓고 조회한다.
陳扆設黼仍虛凭
진의설보잉허빙
병풍만 펼쳐 논 채 용상은 비어 있네
纖月猶賓太白前
섬월유빈태백전
초승달은 샛별 앞에 오히려 밀려나서
頗能爭長辥與滕
파능쟁장설여등
먼저 예를 행하겠다고 등설(滕薛)처럼 제법 맞서누나() 나라 은공(隱公) 11년 봄에 등후(滕侯)와 설후(薛侯)가 노 나라에 조현(朝見)을 왔다가 예를 행하는 데 있어 그 선후를 다투자 은공이 설후를 설득하여 등후가 먼저 예를 행하도록 한 데서 온 말이다. 春秋左氏傳 隱公11』】
赤氣漸淡方五色
적기점담방오색
붉은 기운 차츰 묽어 오색으로 나뉘더니
遠處波頭先自澄
원처파두선자징
먼 물결 머리부터 절로 먼저 맑아지네
海上百怪皆遁藏
해상백괴개둔장
바다 위 온갖 괴물 어디론지 숨어 버리고
獨留羲和將驂乘
독류희화장참승
희화희화(羲和): 전설상 해를 태운 수레를 모는 신이다.만이 홀로 남아 수레 장차 타려 하네
圓來六萬四千年
원래육만사천년
육만이라 사천 년소옹(邵雍)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의하면, 우주가 개시해서 소멸할 때까지를 1()이라 하는데, 1원은 12(), 1회는 30()으로, 1운은 12(), 1세는 30()으로 나뉜다. 따라서 1원은 12 9600년이 된다. 우주의 역사가 6()가 되면 6 4800년이 된다.을 둥글둥글 내려왔으니
今朝改規或四楞
금조개규혹사릉
오늘 아침 동그라미 고쳐 어쩌면 네모가 될라
萬丈海深誰汲引
만장해심수급인
만길의 깊은 바다에서 어느 누가 길어 올렸을까
始信天有階可陞
시신천유계가승
이제서야 믿겠노라 하늘도 오를 계단이 있음을【『논어(論語) 자장(子張), 진자금(陳子禽)이 자공(子貢)에게 공자라도 그대만 못하겠다고 칭찬하자, 자공은 선생님에게 미칠 수 없음은 하늘을 계단을 밟아 오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夫子之不可及也 猶天之不可階而升也라고 반박하였다.
鄧林秋實丹一顆
등림추실단일과
등림등림(鄧林): 전설상의 숲 이름이다. 산해경(山海經) 해외북경(海外北經), 과보(夸父)가 해를 따라 달리다가 목이 말라 죽었는데 그때 버린 지팡이가 숲을 이뤄 등림이 되었다고 한다.에 가을 열매 한 덩이가 붉었고
東公綵毬蹙半登
동공채구축반등
동공동공(東公): 전설상의 해를 맡은 신이다.이 채색 공을 차서 반만 올렸구려
夸父殿來喘不定
과부전래천부정
과보는 헐레벌떡 뒤따라오고 있고
六龍前道頗誇矜
육룡전도파과긍
육룡은 앞서 끌며전설에서 해의 신이 수레를 타면 여섯 용이 수레를 끌고 희화가 이를 몰고 다닌다고 한다. 원문의  열하일기 일신수필(馹迅隨筆) 7 20일 조에는 로 되어 있다. 교만스레 자랑하네
天際黯慘忽顰蹙
천제암참홀빈축
하늘가 어둑해져 갑자기 눈살 찌푸리듯 하늘가 어두워지다가
努力推轂氣欲增
노력추곡기욕증
어영차 해 수레 미니 기운이 솟아난 듯
圓未如輪長如瓮
원미여륜장여옹
바퀴처럼 둥글잖고 독처럼 길쭉한데
出沒若聞聲砯砯
출몰약문성빙빙
뜰락 말락 하니 철썩철썩 부딪치는 소리 들리는 듯【『병세집에는 이 구절 다음부터 끝까지 전혀 다르게 되어 있다.  金銀震蕩色未定 欲掛冥靈枝不勝 慌惚直欲雙手擎 轉眄之間一躍騰 快如盡曉難解書 喜極新逢欲招朋 爽如翻惺作噩夢 喉中未聲聲忽能 離海一尺無不照 儘覺生平天宇弘으로 되어 있다.
萬物咸覩如昨日
만물함도여작일
만인이 어제처럼 모두 바라보는데【『주역(周易) 건괘(乾卦) 구오(九五)의 효사(爻辭)에 대한 공자의 풀이 중에 성인이 나타나시니 만물이 바라본다.聖人作而萬物覩는 말이 있다. 주자(朱子)의 본의(本義)에 의하면 이때 만물(萬物)은 만인(萬人)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해를 성인에 비겼다.
有誰雙擎一躍騰
유수쌍경일약등
어느 뉘 두 손으로 받들어 단번에 올려놨노 燕巖集 卷之四

 

 

해설

연암의 아들 박종채(朴宗采)가 지은 과정록(過庭錄) 1 16에 의하면, 영조 41(1765) 연암은 벗 유언호(兪彦鎬)ㆍ신광온(申光蘊)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할 때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시를 보고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칭찬해 마지않았다고 하며, 연암 스스로도 득의작으로 자부하여 열하일기』 「일신수필(馹迅隨筆) 7 20일 조에 수록해 놓았다. 윤광심(尹光心) 병세집(幷世集)에는 총석관일(叢石觀日)이라는 제하에 수록되어 있는데, 자구의 차이가 있으며 12 84자가 추가되어 있다. 연암집에 수록된 시의 초고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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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 증백영숙입기린협서(贈白永叔入麒麟峽序)

영숙 백동수가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걸 전송하며 쓰다 증백영숙입기린협서(贈白永叔入麒麟峽序) 박지원(朴趾源) 무사 백동수의 근실했던 삶 永叔將家子. 其先有以忠死國者, 至今士大夫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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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백동수의 근실했던 삶

永叔將家子. 其先有以忠死國者, 至今士大夫悲之.

永叔工篆隸嫺掌故, 年少善騎射, 中武擧. 雖爵祿拘於時命, 其忠君死國之志, 有足以繼其祖烈, 而不媿其士大夫也.

 

내가 연암협에 들어갈 때 걱정해주던 영숙의 모습

嗟呼! 永叔胡爲乎盡室穢貊之鄕?

永叔嘗爲我相居於金川之燕巖峽. 山深路阻, 終日行, 不逢一人. 相與立馬於蘆葦之中, 以鞭區其高阜, : “彼可籬而桑也, 火葦而田, 歲可粟千石.” 試敲鐵, 因風縱火, 雉格格驚飛, 小麞逸於前. 奮臂追之, 隔溪而還.

仍相視而笑曰: “人生不百年, 安能鬱鬱木石居食粟雉兎者爲哉?”

 

너 떠나는 게 맘 아프지만 나 자신의 상홍이 더 맘 아프기에 슬퍼하진 않네

永叔將居麒麟, 負犢而入, 長而耕之, 食無鹽豉, 沈樝梨而爲醬, 其險阻僻, 遠於燕巖, 豈可比而同之哉.

顧余徊徨岐路間, 未能決去就, 況敢止永叔之去乎?

吾壯其志, 而不悲其窮. 其人行之, 可悲如此, 而却不爲之悲, 其不能去者之尤有可悲可知. 音節豪壯, 如聞擊筑. 

燕巖集 卷之一

 

무사 백동수의 근실했던 삶

永叔將家子.

영숙은 장수 집안의 자식【장가자(將家子): 증조부 백시구(白時耈, 1649~1722)가 무과에 급제하여 황해도ㆍ함경도ㆍ평안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낸 일을 가리킨다. 하지만 백영숙의 조부인 백상화가 백시구의 서자였으므로 백영숙은 서얼 신분이었다. -『연암을 읽는다』, 223쪽】이다.

 

其先有以忠死國者, 至今士大夫悲之.

그 선조 중에 충성으로 나라에 목숨 바친 사람【증조부 백시구(白時耈)가 경종(景宗) 때 벌어진 노론과 소론 간의 권력 투쟁인 신임사화(辛壬士禍)에 연루되어 죽은 일을 가리킨다. 경종은 장희빈의 아들인데, 병약한 데다 후사가 없었다. 이 때문에 노론측은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뒤의 영조)을 후계자로 세울 것을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이에 연잉군이 우여곡절 끝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노론측은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경종을 비호하며 노론과 대립하고 있던 소론은 노론이 역모를 꾀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영의정을 비롯한 노론 대신(大臣) 넷이 역모죄로 사사되고, 그 외 노론측 인사 수백 명이 사형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이 일이 신축년(辛丑年, 1721)과 임인년(壬寅年, 1722) 사이에 일어났으므로 간지의 첫 글자를 각각 따서 신임사화라고 이른다. 신임사화 당시 백시구는 노론의 거두였던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연루되었다는 자백을 강요받다가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이에 노론측 인사들은 백시구가 노론의 의리를 지키다 순절했다고 평가하여 충절을 지킨 무장이라고 기렸다. -『연암을 읽는다』, 223~224쪽】이 있기에 지금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그를 슬퍼한다.

 

永叔工篆隸嫺掌故,

영숙은 전서(篆書)와 예서(隷書)에 기술이 좋고 전고(典故)를 익혔으며【백동수는 무인이지만 문학에도 밝았다. 당시 서얼 출신은 비록 무과에 급제하더라도 벼슬자리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1772년 영조는 서얼을 중용하라는 교시를 내렸다. 그러나 병조(兵曹)에서 실제 서얼을 기용한 경우는 영조가 직접 거명한 한 사람뿐이었다. 이듬해 영조는 이 일이 임금의 명령을 가볍게 여긴 것이라 하여 훈련도감의 수석 선전관이던 백동준 및 그 밖의 선전관들을 유배 보냈다. 그리고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에 추천된 후보자 중에서 그 자리를 채우게 하였다. 이때 백동수도 후보 명단에 올랐으나 유배 간 백동준이 재종형이었으므로 그를 대신하여 벼슬할 수는 없었다. 또 조정의 논의도 재종형제 사이의 교체는 안 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런 일을 겪은 후 백동수는 기린협으로 들어가게 된다. -『연암을 읽는다』, 224쪽】

 

年少善騎射, 中武擧.

나이가 젊어 말 타며 활쏘기를 잘해 무과에 급제했다.

 

雖爵祿拘於時命,

비록 벼슬과 녹봉이 시대의 운명에 구애되었지만

 

其忠君死國之志, 有足以繼其祖烈,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나라에 목숨을 바친 뜻은 넉넉히 선조의 공열을 계승할 만하니

 

而不媿其士大夫也.

사대부들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내가 연암협에 들어갈 때 걱정해주던 영숙의 모습

 

嗟呼! 永叔胡爲乎盡室穢貊之鄕?

아! 영숙은 어째서 집안 식구를 다 데리고 강원도의 고을로 가는 것인가?

 

永叔嘗爲我相居於金川之燕巖峽.

영숙은 일찍이 나를 위해 금천의 연암협에서 머물 곳의 지리를 봐줬었다.

 

山深路阻, 終日行, 不逢一人.

산은 깊고 길은 좁아 종일토록 걷더라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한다.

 

相與立馬於蘆葦之中, 以鞭區其高阜, 曰:

서로 갈대숲에 말을 세우고 채찍으로 높은 언덕을 구획지으며 말했다.

 

“彼可籬而桑也,

“저기는 뽕나무로 울타리 세울 만하고

 

火葦而田, 歲可粟千石.”

갈대를 태워 밭으로 만들면 한 해에 곡식이 천섬이 될 만하겠구려.”

 

試敲鐵, 因風縱火,

시험삼아 철을 쳐서 바람에 따라 불을 놓으니

 

雉格格驚飛, 小麞逸於前.

꿩들이 제각각 놀라 달아갔고 작은 노루는 앞으로 달아났다.

 

奮臂追之, 隔溪而還.

팔을 휘두르며 쫓아갔다가 시내에 막혀서 돌아왔다.

 

仍相視而笑曰: “人生不百年,

이에 서로 보고 웃으며 말했다. “사람의 삶이란 100년도 채 못 사는데

 

安能鬱鬱木石居食粟雉兎者爲哉?”

어째서 답답하게 나무와 돌 사이에 살면서 꿩과 토끼를 먹는 짓을 하리오?”

 

 

 

너 떠나는 게 맘 아프지만 나 자신의 상홍이 더 맘 아프기에 슬퍼하진 않네

 

永叔將居麒麟也,

이제 영숙은 장차 기린협에 거처하려

 

負犢而入, 長而耕之,

송아지를 짊어지고 들어가

【이 말은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길이 워낙 험하여 송아지를 몰고 갈 수 없어 등에 업고서야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유곤전(劉昆傳)」에 보면, 유곤이 혼란한 정국을 피해 하남(河南)의 부독산(負犢山)으로 들어갔다는 말이 보인다. 연암은 이러한 어구를 사용하여 뜻있는 사람이 때를 만나지 못해 깊은 곳에 은거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연암을 읽는다』, 229쪽】 

키우며 농사지으려 하고

 

食無鹽豉, 沈樝梨而爲醬,

먹을 메주도 없어 아가위를 담가 장을 만든다고 한다.

 

其險阻僻, 遠於燕巖,

그곳의 험하고 좁고 궁벽함이 연암협보다도 심하니

 

豈可比而同之哉.

어찌 비교하여 같다할 수 있겠는가.

 

顧余徊徨岐路間, 未能決去就,

돌아보건대 나는 갈림길에서 배회하며 거취를 결정할 수 없는 지경인데

 

況敢止永叔之去乎?

하물며 감히 영숙의 떠남을 멈추게 할 수 있겠는가.

 

吾壯其志, 而不悲其窮.

나는 영숙의 뜻을 씩씩하다 여기기에 그 곤궁함을 슬퍼하지 않겠다.

 

其人行之, 可悲如此, 而却不爲之悲,

그 사람이 떠남에 슬퍼할 만한 것이 이와 같은데도 도리어 슬퍼하지 않았으니

 

其不能去者之尤有可悲可知.

떠날 수 없는 사람은 더욱 슬퍼할 만한 일이 있다는 알 수 있으리라.

 

音節豪壯, 如聞擊筑. 『燕巖集』 卷之一

음절이 호탕하고 웅장하여 고점리(高漸離)가 축을 치는 소릴 듣는 것【전국 시대 말기 진(秦) 나라에 의해 위(衛) 나라가 멸망당하자 위 나라 출신의 자객인 형가(荊軻)가 연(燕) 나라로 망명을 갔다가 축(筑) 연주를 잘하는 고점리를 만나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형가가 연 나라 태자의 간청을 받고 진 나라 왕을 죽이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되자 역수(易水)를 건너기 전에 전송객을 향해 고점리의 축 반주에 맞추어 강개한 곡조로 노래를 불렀더니, 사람들이 그에 감동하여 모두 두 눈을 부릅떴으며 머리카락이 곤두서 관(冠)을 찌를 듯하였다고 한다. 『史記』 卷86 「刺客列傳」】만 같았다.

[해설]

강원도 인제군(麟蹄郡) 기린면(麒麟面)의 산골짜기로 이주하고자 떠나는 벗 백동수(白東修, 1743~1816)를 위해 지은 증서(贈序)이다. 백동수는 자(字)가 영숙(永叔)이고, 호는 인재(靭齋), 야뇌(野餒) 등이다. 그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백시구(白時耈, 1649~1722)의 서자(庶子)인 백상화(白尙華)의 손자였다. 따라서 신분상 서얼에 속하여, 일찍 무과에 급제해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았다. 오랜 낙백(落魄) 시절을 거쳐, 1789년(정조 13) 장용영 초관(壯勇營哨官)이 되어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그 후 비인 현감(庇仁縣監)과 박천 군수(博川郡守) 등을 지냈다. 백동수는 이덕무의 처남이기도 하다. 『硏經齋全集』 本集 卷1 「書白永叔事」 박제가도 기린협으로 이주하는 백동수를 위해 장문의 송서(送序)를 지어 주었다.

 『貞蕤閣文集』 卷1 「送白永叔基麟峽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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