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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께 알현하다, 서해랑길 인천코스 제물포/ 한국근대문학관, 계몽기~카프문학 작품집전시

은인자중 2024. 2. 21. 02:17

孔子

 

출생사망시대지역학파

기원전 551년
노나라 곡부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 출생
기원전 479년(향년 72세)
노나라 곡부
춘추 시대
동양 철학
유학

 

https://ko.wikipedia.org/wiki/%EA%B3%B5%EC%9E%90

 

공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공자(중국어: 孔子, 병음: Kǒngzǐ 쿵쯔[*]) 또는 공부자(중국어: 孔夫子, 병음: Kǒngfūzǐ 쿵푸쯔[*], 라틴어: Confucius [kənfjú:ʃəs] 콘푸키우스[*], 기원전 551년 ~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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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군자교육(君子敎育)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인'이였다.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仁)'은 하나의 문장으로서 명백히 개념이 규정되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박애,도(道),덕,선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심오한 휴머니즘으로서, 정치적으로는 이름을 바르게 하고, 이에 따라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책임과 본분을 다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사회 생활에 있어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6] 남을 부축하며[7],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롯한 여러 가지 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을 지향하고 예에 정진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소인으로 규정했다.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군자가 보편적임에 비하여 소인은 상대적이라고 역설, 인간을 인간적으로 구분하였다.

'인'은 공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최고는 도,덕(德)이었다. 덕이란 인간에게서 기대되는 개개인의 훌륭한 자질이라고 중국인은 생각하며, 동시에 그것은 영향력 내지는 인격력으로서 남에게 감화를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정치사상에서 근간을 이루는 덕치주의(德治主義) 내지 정치에서의 도덕중심주의의 근거라고 하겠으며, 공자의 정치사상 근저에도 이 같은 기대가 있었다.

그는 당초 위정자 특히 최고 권력자인 군주에게 기대를 걸어 각국을 편력하면서 자기의 사상을 설명했다. 군주가 덕으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이에 따라 백성의 덕도 높아져 그 결과로서 도덕이 고루 퍼진다면 온 세상이 저절로 평화로워진다는 것이 공자의 정치사상이었다. 그러나 이 사고방식은 난세 아래의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인'을 터득하게 함으로써 학식과 함께 인격적인 '덕'을 겸비하는 군자가 되도록 하고, 그들을 장래 정치의 요직에 나아가게 함으로써 난세를 전쟁이 아니라 평화적 방법으로 평정하려 했던 것이다. 사상이 현실적이고 상식적인 듯하면서도 매우 심오하며, 제자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도 개인의 능력과 이해도에 따라 적합한 방법으로 유도하여 성품을 개발시켰다. 또한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고, 엄숙, 온화, 원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공자가 예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예의가 무슨 소용이겠는가!'라 하였으며 또한 공자와 자하의 대화에서 채색은 흰 바탕이 있은 연후에야 가능하다는 비유를 들어 예의 근본에 대해 강조한 것에 따르면 공자의 '예'는 외면적 사회규범의 측면도 가지지만 그 바탕에 정직한 마음(直)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백성을 중시하고 인간의 심미적 부분을 존중하는 것은 유교가 공자 사상의 장점이다. 반면 존비친소(尊卑親疎)적 규범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유가의 삼년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공자는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을 다하기 위해 삼년상을 치르는 것이 사람의 도에 맞다고 여겼는데, 묵자의 사상을 지지하는 비판자들은 삼년상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례허식이며, 그와 같은 관념이 백성들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자 사상과 묵자 이론은 존비친소적 규범에 관한 부분은 차이가 있으나, 본질적 이상의 차이라기보다는 방법론적 차이이다. 공자, 묵자의 사상을 서양 철학으로 분류하면 유심론에 가깝기 때문에 공유되는 부분도 존재한다.

공자의 사상은 생시에 실현되지 못한 채 증자·자사를 거쳐 맹자에 이르러 활기를 띠고, 한 무제 이후 중국의 사상계를 지배한 가장 커다란 조류를 이루었으며, 또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공자의 사상을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스스로를 왕족, 즉 은나라의 후예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분제적인 질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며, 요즘 공자의 가르침을 논구할 때는 이런 점은 거의 도외시된다. 공자가 이상으로 삼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종법제적인 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주나라였으며, 주나라의 종법-봉건제는 위의 천자를 중심으로 그 밑의 공후백자남의 五爵, 公卿大夫, 士 그리고 民을 위계로 하는 체제이다. 즉, 공자는 민주주의나 대중주의보다는 군주정에 더 친화적인 인물이었으며, 공자가 말한 예 또한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행하게 하고, 제후나 귀족 같은 지배계급의 윤리를 설파한 차원으로 보아야 한다. 예나 문화하고는 거리가 있는, 탈속적인 道家와는 달리, 세련되고 법도를 갖춘 문명화된 생활을 공자는 좋아했으며, 이러한 세계의 정점은 바로 천자를 위시로 하는 주나라였다.

또한, 원시 유가에서 주로 말해지는 군자 또한 돈, 재산이 오늘날의 재벌들처럼 많지는 않아도, 엄연한 상류층의 일원으로서, 그들은 일정 정도의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 사대부들의 경제적 배경이 향촌의 중소지주층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토대 위에서 그들의 학문을 전개하고 수양관을 펼쳐나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공자의 이러한 왕실적인 특징은 묵자와 비교해봐도 금방 드러난다. 묵자는 천민출신의 사상가로, 공자가 엘리트적, 군주친화적이었던 것에 비해, 묵자는 민중적이었고 피지배계급의 목소리와 특성을 그대로 그의 사상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한국에서 공자를 논할 때, 이런 계급적 요소, 경제적 요소를 도외시하고 순수한 사변철학이나 아니면 순전히 仁과 義 같은 도덕 차원으로만 공자의 사상을 논한다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주류 중국인을 한족이라고 하고, 이들이 쓰는 문자를 한자라 하여 중국의 정체성은 漢나라에 기반하고 있다는 설이 많다. 하지만, 중국이 '중화'라는 개념으로,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지난 2000년 동안 통일된 문명체를 이루고 이어져 왔음을 고려할 때, 중국은 한나라 이상으로 하은주의 삼대와 특히나라에 기대고 있는 것이 많다. 천명(天命)개념이 그러하고, 오늘날 중국인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복희, 신농, 황제 같은 위인들은 전부 이 때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공자는 이 중화, 즉 정통 화하족의 감수성을 건드렸으며, 그 감성을 활용하여 文質彬彬한 주나라의 시대를 그리워했고 중국인들도 이 성인의 가르침을 좋아하며 크게 따랐던 것이다. 이것은 외래종교인 불교와는 구별되는 것이었고, 출세간을 말하는 도가(道家)하고도 뚜렷한 차별점이 있어 세간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크게 흠모와 존숭이 되는 것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지난 역사 동안 수없이 많은 황제와 전제왕조들은 공자와 그 사상을 높일 수 밖에 없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1950

 

유학(儒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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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유학개념

그는 유학의 내용을 규정하면서, 인간의 삶에는 오륜(五倫 : 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 사이의 윤리)이 있어서 모든 인간의 규범을 포함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인간의 성품에는 오상(五常 : 仁·義·禮·智·信)이 있어서 모든 선을 갖추고 있다고 규정한다.

나아가 그는 이 오륜으로써 인류에게 기준과 다양성을 제시하여 질서 있게 차례 지으며, 동시에 오상의 도리로써 인간의 심성을 꿰뚫는다면 인간이 인간되는 이치가 갖추어지게 되어, 우주의 질서에 참여하고(參天地) 그 변화를 돕는다(贊化育)고 확인한다.

따라서, 그는 오륜과 오상은 우주를 유지하는 들보와 기둥[棟樑]이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기둥과 주추[柱石]라 정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유학의 기본 내용을 오륜의 도덕 규범과 오상의 도덕적 성품으로 제시하는 유학 개념은 그만큼 도덕 중심적인 이해임에 틀림없다. 사실상 그는 인간이 해야 할 학문으로서 유학은 이 오륜과 오상을 ‘닦아서 밝히고 확장하며 충실화시켜야 할 것(修明擴充)’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요·순 이래로 여러 성왕(聖王)과 선진시대의 공자·맹자(孟子)에서 송나라 때의 정호(程顥)·정기, 주희(朱熹)에 이르기까지 여러 성사(聖師)가 가르치고 밝혔던 일이라고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유학의 도덕적 기본 성격에 대한 이해가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유학은 도덕에만 머무르지 않고 전체적인 인간의 실현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송은헌은 유학의 학문 방법(爲學之要)에 주목하면서, 그 기본적 요령[體要]으로서, 근본을 세우는 ‘거경(居敬)’, 앎을 이루는 ‘궁리(窮理)’, 실천을 하는 ‘역행(力行)’의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경(敬)’은 마음을 간직하고 성품을 길러 인간의 몸과 마음 전체를 거느리는 공부다.

경전과 역사를 강론하여 밝게 이해하는 것은 ‘치지(致知)’로서 앎[知]의 문제다. 오륜과 오상을 실천해 나가는 것은 ‘역행’으로서 행위(行)의 문제다.

그러나 송은헌은 앎과 행위는 서로 닦아서 응용에 통달하는 공부요, 또한 ‘경’은 ‘치지’와 ‘역행’ 양자를 총괄하여 꿰뚫고 있는 것이라 규정함으로써, ‘경’으로써 인식과 실천을 종합하는 유학의 학문 방법을 체계화하고 있다.

여기서 유학은 일상적 생활 규범으로서의 도덕 체계일 뿐만 아니라, 인식론과 행위론을 수양론으로 종합한 매우 복합적인 학문 체계이며 도덕성을 그 기본 성격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知 : 致知·窮理)·행(行 : 實踐·力行)·경(敬 : 居敬·立本)의 세 기본 요령을 유학의 모든 학문 방법에 적용되고 있는 보편적 구조로 파악,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공자가 제시한 사교(四敎)인 문(文)·행(行)·충(忠)·신(信)의 경우에도, 그는 ‘문’으로 가르치는 것은 치지(致知)요, ‘행’으로 가르치는 것은 실천이요, ‘충’과 ‘신’으로 가르치는 것은 근본을 세우는 것(立本)으로 파악, 지(知)·행(行)·경(敬)의 세 기본 요령에 수렴시키고 있다.

또한, 『중용』의 학(學)·문(問)·사(思)·변(辨)·행(行)의 다섯 요소도 분석해보면, ‘지’와 ‘행’의 두 단서로 수렴되고, 이를 성(誠)으로 관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나아가 『대학』의 8조목(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도 ‘지’와 ‘행’의 두 단서로 수렴되고, 이를 ‘경’으로 관철하는 것이라 제시한다.

그 밖에 『맹자』에도 ‘부동심(不動心)’은 성경(誠敬)에서 연유하고, ‘지언(知言)’은 궁리(窮理)에서 연유하며, ‘양기(養氣)’는 집의(集義)에 연유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그리고 주자가 올린 주차(奏箚)에서도 “엄숙하고 공경하여 두려워한다(嚴恭寅畏).”는 것은 근본을 세우는[立本] 일이요, “독서하고 궁리한다(讀書窮理).”는 것은 앎을 이루는[致知] 일이요, “일에 대응하고 사물을 접한다(應事接物).”는 것은 실천[踐履]의 일이라며 세 요소로 파악한다.

나아가 이이(李珥)는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거경’은 근본을 세우는 일이요, ‘궁리’는 선(善)을 밝히는 일이요, ‘역행’은 실제로 행하는 것이라 규정하면서, 이 세 가지를 종신토록 추구해야 할 사업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인식과 실천과 수양을 학문의 세 기본 요소로 확인하는 유학의 성격은 이론적인 지식 체계로서의 근대적 학문과는 구별된다.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지식이 불완전하고 치우친 현상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유학은 인간 삶의 다양성을 포괄하고 있으며,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인격의 실현을 학문의 기본 과제로 내포하고 있다.

특히, 실천의 영역을 포함하는 것은 전통적 학문관이 지닌 인격 완성의 실현을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강조되고, 수양의 구체적 방법과 과제는 유학의 인간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으로서 독특한 형식으로 개발되어 왔다. 유학은 자신의 방법과 내용을 명확하게 인식함으로써 거기서 벗어난 입장에 대한 강한 비판적 태도를 내포하고 있다.

송은헌도 「유학설」에서 마음 곧 영각(靈覺)을 배양하는 데 전념하는 것은 불교의, 사사롭게 하는 관습(自私之習)이라 규정하고, 마음의 양지(良知) 곧 영식(靈識)을 지키기만 하고 학문의 강론(講學)에 힘쓰지 않는 것은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의 치우친 학문(偏詖之學)이라 지적한다.

그리고 성품을 함양하지 않고 글귀를 기억해 암송하거나 이론의 세련된 토론을 내세우는 것은 세속적인 유학자의, 입과 귀로만 익히는 공부(口耳之習)라 규정해 비판한다. 학문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작업은 동시에 그 정통성에 위배되는 것을 심사해 이단으로 배척하는 활동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떠나가는 배
ㅡ 박용철(1904~1938)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ㄴ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던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간다

 

https://church21.tistory.com/5802364

 

박용철(朴龍喆) 시 모음

용아 박용철 시인. 1904~1938(광주) 시인, 번역가, 평론가 배재고. 연희전문학교. 은관문화훈장. 박용철(朴龍喆) 시 모음 ◈ 떠나가는 배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church21.tistory.com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0977

 

박용철(朴龍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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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오야마학원 재학 때에 사귄 김영랑(金永郎)과 교우로 관계하면서 비롯되었다. 문단 활동 이외의 경력은 전혀 없다. 1930년대에는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詩文學)』 3권, 1931년에는 『문예월간(文藝月刊)』 4권, 1934년에는 『문학(文學)』 3권 등 도합 10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그가 주재하였던 시문학사에서 1935년 같은 시문학동인이었던 정지용(鄭芝溶)의 『정지용시집』과 김영랑의 『영랑시집』을 간행하였다. 문단 활동으로는 자신이 주축이 된 시문학동인 활동과 ‘해외문학파’‘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참여하여 입센(Ibsen,H.) 원작의 『인형의 집』 등 연극공연을 위한 몇 편의 희곡을 번역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eg-iRpKzqO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