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전/詩經

131 황조(黃鳥)三章 - 꾀꼬리 /진풍 秦風

은인자중 2009. 12. 27.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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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交黃鳥
(교교황조) : 꾀꼴꾀꼴 꾀꼬리가

止于棘
(지우극) : 대추나무에 앉았네.

誰從穆公
(수종목공) : 누가 목공의 죽음에 따라 죽었는가?

子車奄息
(자차엄식) : 자거의 아들 엄식씨로다.

維此奄息
(유차엄식) : 이 엄식씨란 분은,

百夫之特
(백부지특) : 백사람 중의 특별한 사람,

臨其穴
(임기혈) : 그가 무덤 속에(죽으러)들어갈 때엔

惴惴其慄
(췌췌기율) : 두려움에 덜덜 떨리셨겠지.

彼蒼者天
(피창자천) : 저 푸른 하늘이여,

殲我良人
(섬아량인) : 어이 우리님(엄식)을 죽이셨는가?

如可贖兮
(여가속혜) : 만약 그 분 몸이 되살 수만 있다면

人百其身
(인백기신) : 백 사람으로도그 분을 되 찾으련만.

興이다. 交交는 날아서 왕래하는 모양이다. 穆公을 따른다는 것은 따라 죽음이다. 子車는 氏요 奄息은 이름이다. 特은 傑出함을 칭한 것이다. 穴은 壙이다. 惴惴는 두려운 모양이다.慄은 두려움이요, 殲은 다함이요, 良은 善함이요, 贖은 바꿈이다.

 

○ 秦穆公이 卒함에 子車氏의 세 자식을 殉葬하니 무두가 秦나라의 賢良이었다. 國人들이 슬퍼하여 黃鳥를 읊으니 일이 ꡔ春秋傳ꡕ에 보이니, 바로 이 詩이다. “交交하는 黃鳥는 가시나무에 앉는다. 누가 穆公을 쫓는가 子車奄息이로다.”라 말하였으니, 아마도 본 바를 인하여 興을 일으킨 성싶다. 구덩이에 임하여 두려워 함은 산채로 壙안에 넣음이다. 세 사람이 모두 나라의 賢良인데 하루 아침에 죽이니, 만약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있을진댄 모두 백번이라도 그 몸을 바꾸기를 원한 것이다.

 

 

交交黃鳥
(교교황조) : 꾀꼴꾀꼴 꾀꼬리

止于桑
(지우상) : 뽕나무에 앉았네.

誰從穆公
(수종목공) : 누가 목공의 죽음에 따라 죽었는가?

子車仲行
(자차중행) : 자거의 아들 중행씨로다.

維此仲行
(유차중행) : 이 중행씨란 분은

百夫之防
(백부지방) : 백 사람을 당해 낼사람이었지.

臨其穴
(임기혈) : 그가 무덤 속에(죽으러) 들어갈 때엔

惴惴其慄
(췌췌기율) : 그 두려움에 덜덜떨리셨겠지.

彼蒼者天
(피창자천) : 저 푸른 하늘이여,

殲我良人
(섬아량인) : 어이 우리 님(중행)을 죽이셨는가?

如可贖兮
(여가속혜) : 그 분의 몸을 되사서 바꿀 수만 있다면

人百其身

(인백기신) : 백 사람으로도 그 분 몸을 대신하련만.

 

興이다. 防은 감당함이니 한 사람으로 百사람을 감당함을 말한 것이다.

 

 

交交黃鳥

(교교황조) : 꾀꼴꾀꼴 꾀꼬리
止于楚

(지우초) : 싸리나무에 앉았네.
誰從穆公

(수종목공) : 누가 목공의 죽음에 따라 죽었는가?
子車鍼虎

(자차침호) : 자거의 아들 침호씨로다
維此鍼虎

(유차침호) : 이 침호씨란 분은
百夫之禦

(백부지어) : 백사람을 막아내실만한분이였지.
臨其穴

(임기혈) : 그가 무덤속에 (죽으러)들어 가실 적에
惴惴其慄

(췌췌기율) : 그 두려움에 덜덜 떨리시었겠지.
彼蒼者天

(피창자천) : 저 푸른 하늘이여,
殲我良人

(섬아량인) : 어이 우리님(침호)을 죽이셨는가?
如可贖兮

(여가속혜) : 그분의 몸을 되사서 바꿀 수만 있다면
人百其身

(인백기신) : 백 사람이 그 분의 몸을 대신하련만.

 

興이다. 禦는 當과 같다.

 

黃鳥 三章이니, 章 十二句이다.

 

ꡔ春秋傳ꡕ에 이르기를 “君子가 말하기를 ‘秦穆公이 盟主가 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죽으면서까지 백성을 버렸도다. 先王은 세상을 떠날 때에도 오히려 法을 끼치거늘 하물며 善人을 빼앗음에서랴.’ 이제 無法한 일을 방종히 행하여 後嗣에게 남기고 또 그 賢良을 거두어 죽이니 위에 있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군자는 이 때문에 秦이 다시 東征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라 하였다. 내가 살펴보니, 穆公이 이에 그 죄를 도망할 수 없다. 다만 혹은 穆公의 遺命이 이와 같거늘 세사람이 자살하여 쫓았다고 하는데, 세사람 역시 죄가 없을 수 없거니와 지금 구덩이에 임하여 惴慄한 말을 본다면 이는 康公이 아버지의 亂政을 쫓아서 핍박하여 구덩이에 넣을 것을 명한 것이니 그 죄를 돌릴 곳이 있으랴.

 

또 ꡔ史記ꡕ를 살펴보니, “秦武公이 卒함에 처음에는 사람을 따라 죽게하여 죽은 자가 66인이었는데, 穆公때에 이르러 드디어 177인을 사용하여 세사람의 賢良이 이에 끼었으니, 아마도 그 처음에는 戎狄의 풍속에서 나왔거늘 明王`賢伯이 그 죄를 성토함이 없었다. 이에 습관으로 떳떳함을 삼으니, 비록 穆公의 어짐으로도 면할 수 없었다. 그 일을 논한 자 또한 한갓 三良의 불행만을 슬퍼하고 秦의 쇠미함만을 탄식하고 王政의 기강이 없어서 제후들이 擅命하여 殺人을 꺼리지 않음이 이같음에 이르러서는 그 그릇된 줄을 알지 못하니, 아! 풍 속의 퇴폐함이 오래되었도다. 그 후에 始皇을 장사할 적에 後宮에게 모두 따라 죽을 것을 명하고 工匠을 산채로 묘 안에 매장하니 어찌 족히 괴이하지 않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