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전/詩經

이재훈 / 주자의 음시론

은인자중 2009. 12. 20.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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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熹의 淫詩論

李 再 薰*

<목 차>

1. 서론

2. '變<風>止乎禮義'說 否定

3. 淫詩의 作者

4. 詩敎로서의 思無邪論

5. 결론

1. 서 론

宋代 性理學의 집대성자 朱熹(1130-1200)의 ≪詩集傳≫은 南宋 이후 현재까지 가장 널리 읽혀지고 있는 ≪詩經≫ 주석서이다. ≪詩集傳≫은 漢唐의 전통 詩經論에 의심을 품어 <詩序>說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관점으로 ≪詩經≫ 시편의 내용을 이해하려 하였던 宋代 新詩經論의 '集大成 著作'이며, 중국 ≪詩經≫ 硏究史에 있어서 鄭玄의 ≪毛詩傳箋≫과 孔穎達의 ≪毛詩正義≫의 뒤를 이어 세번째 이정표를 세운 저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후세 ≪詩經≫ 연구에 이정표가 되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詩集傳≫에 반영되어 있는 朱熹의 詩經論은 크게 <詩序>說 비판, ≪詩經≫ 六義에 대한 새로운 견해, 淫詩論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 세 가지 詩經論 가운데 淫詩論은 앞의 두 가지 詩經論과 朱熹의 性情論 및 道德觀을 바탕으로 하여 전개된 것이기 때문에 朱熹 詩經論의 要諦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淫詩論은 禮敎를 중시하는 유가사상이 지배하는 전통 사회에 있어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當時의 학자는 물론 ≪詩集傳≫의 설이 국가 공인의 定說로 인정되던 元明淸代 학자들까지도 朱熹의 淫詩論을 주된 논의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筆者는 이처럼 역대로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朱熹의 淫詩論이 어떠한 이론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여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淫詩論의 득실에 대한 검토작업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다.

2. '變<風>止乎禮義'說 否定

朱熹는 古代 시가의 총집인 ≪詩經≫에는 당시 정치 사회의 현상을 논한 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 사물에 觸動되는 바가 있어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읊은 시도 있으므로 三百篇의 시가 반드시 다 시인의 올바른 性情으로부터 나와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는 <大序>의 '變<風>止乎禮義'라는 설에 이의를 제기하였을 뿐 아니라, 里巷의 가요가 주종을 이루는 變<風>의 시편 중에는 예의의 규범에서 일탈한 '男女情思之詞', 즉 음탕한 시가 적지 않게 존재한다고 주장하여 淫詩論의 첫번째 근거로 삼았다.

그는 <詩集傳序>에서 ≪禮記·樂記≫篇의 '人生而靜, 天之性也; 感於物而動, 性之欲也.'라는 말을 인용하고 거기에 자신의 性情論을 가미하여 시의 기원과 본질을 설명함으로써 <大序>의 '變<風>止乎禮義'說에 대한 반론 전개의 시발점으로 삼았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고요한 것은 하늘이 부여한 性이고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性의 욕구이다. 무릇 욕구하는 바가 있으매 생각이 없을 수 없고 생각이 있으매 말이 없을 수 없다. 이마 말이 있으되 말로써 다 나타낼 수가 없어서 탄식과 영탄으로 나타난 나머지 반드시 자연의 음향과 節奏를 갖게 되어 그칠 수 없으니, 이것이 시가 지어진 까닭이다.……시란 사람의 마음이 사물에 감응하여 말로써 표현된 나머지이다. 마음이 감응한 바에는 비뚤고 바름이 있으므로 말로써 표현된 것에 옳고 그름이 있게 된다.

朱熹의 性情論에 의하면 性은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心의 본체로서 純善한 것이며 '性之欲', 즉 情은 性이 사물에 감응하여 일어나는 心의 작용으로서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理와 氣, 즉 天命之性과 氣質之性을 겸비하고 있는 인간은 그 氣稟 즉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氣質之性에 淸濁의 相異함이 있기 때문에, 氣의 주재자인 心이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게 된다. 이에 따라 '性之欲'이며 心의 작용인 情 역시 선과 악이 있게 된다. 시는 '性之欲'이며 心의 작용인 情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情의 선과 악에 따라 시의 내용 역시 선한 것과 악한 것, 즉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과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게 된다.

朱熹는 이와 같은 관점에 입각하여 ≪詩經≫ <國風>의 경우 正<風>인 <周南>·<召南> 시편의 시인은 文王의 德化를 입어서 그 性情이 올바르기 때문에 그 詩의 내용 역시 禮義의 기준에 부합하지만, 變<風>인 < 風> 이하의 시편의 시인은 文王의 德化가 쇠퇴한 시대의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 性情이 바른 자가 있는가 하면 바르지 않은 자도 있으며 따라서 그 시의 내용 역시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있고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여겼다.

다만 <周南>·<召南>은 친히 文王의 敎化를 입어 덕을 이루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 性情의 바름을 얻었기 때문에 그 말로 나온 것이 즐겁되 지나치게 음란하지 않으며 슬퍼도 傷함에 이르지 않으므로 二篇만이 <風>詩의 正經이 되었다. < > 이하부터는 그 나라의 治亂이 같지 않고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이 또한 달라 그 느껴서 (말로) 發出된 바에 비뚤고 바르고·옳고 그르고가 고르지 않음이 있어 이른바 先王의 <風>이 이에 변했다.

그래서 朱熹는 <大序>의 '變<風>은 情에서 나와 예의에서 머물렀다(變<風>發乎情, 止乎禮義)'라는 말 중의 '예의에 머물렀다'라는 견해가 합당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情이라는 것은 性의 움직임이고 예의라는 것은 性의 덕이다. 움직이되 그 덕을 잃지 않음은 先王의 혜택이 사람들에게 들어간 것이 깊어 이에 이르렀어도 아직 잊지 않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그것이 대체로 이와 같다는 것으로 그 放逸하여 예의에 머물지 않은 것이 본래 매우 많다.

<大序> 또한 미진함이 있다. 예컨대 '情에서 나와 예의에서 머물렀다'는 또 단지 正詩를 말할 뿐으로 變<風>이 어찌 일찍이 예의에서 머물렀던가? 變<風>의 <柏舟> 등 시는 예의에서 머물렀다고 일컬어도 되지만 <桑中> 諸篇은 예의에 머물렀다고 하면 안된다. 대체로 大綱에 있어서 예의에서 머문 것이 있다는 것이다.

朱熹의 견해에 의하면, 變<風>의 시편은 135편 전체로 보아서는 純善하여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는 情으로부터 나온 것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예의에서 머물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개별적으로 본다면 사악하여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情으로부터 나와 예의에서 벗어난 것 역시 적지 않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대부분이 里巷 歌謠의 作으로 남녀간의 애정을 읊은 變<風> 시편중에 이와 같이 예의에서 벗어난 放逸한 시, 즉 음란한 시가 많다고 주장하였다. 變<風>의 경우 또 음란한 시가 많다. 때문에 班固는 남녀가 서로 노래하여 그 마음 아픔을 말하였다고 하였는데 옳은 말이다.

朱熹는 시는 시인의 情志를 표달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고 음악은 시를 위하여 지어진 것이라는 견해에 입각하여 시와 음악 즉 聲音이 동질성을 갖고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禮記·樂記≫의 이른바 亂世의 音인 鄭·衛의 音이 바로 < 風>·< 風>·<衛風>의 三衛詩와 <鄭風>의 시이고 그 시들은 예의에서 벗어나 사악하고 음란하다고 주장하였다.

예전부터 보건대 ≪詩≫中의 鄭詩와  · ·衛詩가 바로 鄭·衛의 音으로 그 시가 대단히 사음하다. 시와 음악이 동질성을 갖고 있다는 朱熹의 견해에 의한다면, 鄭詩 즉 <鄭風>의 시가 대부분 남녀의 淫奔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므로 그 음악도 마찬가지로 음란하다. 그렇다면 孔子가 ≪論語·衛靈公≫ 篇에서 '鄭聲淫'이라고 한 까닭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孔子가 '鄭聲淫'이라고 한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聖人이 鄭聲이 음탕하다고 한 것은 대체로 鄭나라 사람들의 시는 대부분 당시 풍속에 남녀가 淫奔한 것을 말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말이 있었던 것이다.

朱熹는 三衛詩와 鄭詩가 다른 變<風>의 시에 비해 예의에서 벗어난 음란한 시가 많은데, 이 양자의 차이를 자세히 고찰하여 비교한 결과 다음의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하였다. 첫째, 三衛詩가 총 39편중의 4분의 1이 淫詩인 데 비해 鄭詩가 총 21편중의 7분의 5가 淫詩이다. 둘째, 三衛詩가 남자가 여자를 희롱한 것이 대부분인 데 비해 鄭詩는 여자가 남자를 희롱한 것이 대부분이다. 朱熹는 孔子가 三衛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鄭詩에 대해서만 "鄭聲은 음탕하다"·"鄭聲을 몰아내야 한다(放鄭聲)" (≪論語·衛靈公≫篇)라고 비판한 까닭이 바로 鄭詩가 三衛詩보다 수량면의 비율과 내용면의 사악함에 있어서 훨씬 심하였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하였다.

鄭과 衛의 樂은 모두 음탕한 聲이다. 그러나 시로써 상고하여 보면 衛詩는 39편인데 淫奔詩가 겨우 4분의 1이지만 鄭詩는 21편인데 淫奔詩가 7분의 5만이 아니다. 衛는 오히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말인데 鄭은 다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는 말이다. 衛나라 사람은 오히려 풍자하고 나무라며 징계하는 뜻이 많은데 鄭나라 사람은 거의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며 후회하고 깨닫는 징후가 전혀 없다. 이는 鄭聲의 음탕함이 衛보다 심한 것이다.

때문에 孔子가 顔淵과 나라 다스리는 것을 논하면서 유독 鄭聲으로써 경계를 삼되 衛를 언급하지 않았다. 대체로 비중이 큰 것을 들어서 말한 것이니 원래 순서가 있는 것이다.

"대체로 이른바 <序>라는 것은 대부분이 世儒의 말로 시인의 本意를 이해하지 못한 곳이 매우 많다. 예컨대 '예의에서 머물렀다' 하였는데 과연 예의에서 머무른다 할 수 있겠는가? <桑中>詩는 예의가 어느 곳에 있는가?" 王德修가 말하기를 "그것은 경계를 남기려고 한 것입니다." "이 (<桑中>篇) 正文中에는 경계의 의미가 없으니 단지 그 음란한 일을 직접 진술한 것일 뿐이다. 예컨대 < 之奔奔>과 <相鼠> 등의 시는 오히려 꾸짖고 욕을 하여 경계로 삼을 만하지만 이것은 그렇지 않다.

내가 이제 鄭詩를 보건대 <叔于田> 등의 시 외에 예컨대 <狡童>과 <子衿> 등의 시편은 모두 음란한 시들인데, ≪詩≫를 말하는 자들이 그릇되게도 昭公을 풍자한 것이라느니 학교가 폐해짐을 풍자한 것이라느니 하였다. 衛詩는 그래도 可해서 아직은 남자가 부인을 희롱한 것이나, 鄭詩는 그렇지 않아 부인이 남자를 희롱한 것이 많다. 이러한 까닭에 聖人이 鄭聲을 더욱 싫어하신 것이다.

孔子는 일찍이 鄭聲이 음탕하므로 鄭聲을 몰아내야 한다고 하고 또 "鄭聲이 雅樂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한다(惡鄭聲之亂雅樂也)"(≪論語·陽貨≫篇)고 하여 鄭聲에 대하여 극도의 증오감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晩年에 "내가 衛나라에서 魯나라로 돌아온 후에 음악이 바로잡혔고 <雅>와 <頌>이 각기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吾自衛反魯, 然後樂正, <雅>,<頌>各得其所.)"(≪論語·子罕≫篇)라고 하여 음악과 ≪詩經≫을 정리하였음을 밝혔다.

이러한 孔子의 말로 인하여 漢代에 孔子 刪詩說이 등장하게 되었다. 즉, '≪詩≫三百'은 춘추전국시대의 학자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던 말이었는데, 漢 司馬遷이 ≪史記≫에서 古詩 三千餘篇을 孔子가 중복된 것을 제거하고 예의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취하여 305편으로 정하였다고 하여 최초로 孔子 刪詩說을 제기하였다. 後漢의 王充은 ≪論衡≫에서 정식으로 '刪'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孔子가 ≪詩≫·≪書≫를 刪定하였다.(孔子刪定≪詩≫,≪書≫)" (<知實>篇)·"≪詩經≫은 옛날에는 또한 수천편이었는데 孔子가 중복된 것을 刪去하고 바로잡아서 三百篇을 보존시켰다.(≪詩經≫舊時亦數千篇, 孔子刪去複重, 正而存三百篇.)"(<正說>篇)라고 하여 司馬遷의 설을 뒷받침하였다.

전통 漢唐學者이자 朱熹의 知友인 呂祖謙은 이와 같은 孔子의 刪詩說을 믿어 의심치 않는 학자였다. 그는 孔子가 ≪詩經≫을 刪定함으로 인해 鄭·衛의 음란한 시와 음악이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詩≫ 三百篇 모두가 제사와 朝聘에 사용할 수 있는 中和한 聲에 머무르는 雅樂이며 그 내용 역시 예의의 기준에 부합한다고 여겼다. ≪詩≫는 雅樂으로 제사와 朝聘에 쓰이는 바이며 桑間· 上의 音은 鄭·衛의 樂으로 세속에서 쓰는 바이다. 雅와 鄭이 部를 같이 하지 않음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다. 전국시대에 魏 文侯가 子夏와 古樂과 新樂을 이야기하였고 齊 宣王과 孟子가 古樂과 今樂을 이야기하였는데 대체로 모두 구별을 하여서 말하였던 것이다. 비록 今世에도 太上과 敎坊에 각기 司局이 있어 처음부터 서로 뒤얽혀 있지 않은데 하물며 위로 춘추시대에 어찌 鄭·衛의 악곡을 雅에 편입할 리가 있겠는가?

<桑中>·<溱洧> 제편은 周나라 도가 쇠하였을 때 지어져서 그것이 비록 이미 煩促함으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中和한 聲에서 머물러 荀子이 아직도 이를 알 수 있었으며, 그 말이 비록 하나를 풍자하고 백을 권면하는 것에 가깝지만 여전히 예의에서 머물러 <大序>가 홀로 이를 알 수 있었으니 孔子가 이를 經에 수록한 것은 世變의 시초에 신중하였던 바이다. 가령 孔子 이전에 雅와 鄭이 과연 일찍이 뒤섞였었다면 衛나라로부터 魯나라로 돌아와 樂을 바로잡을 때 마땅히 바로잡아야 할 것으로 이것보다 큰 것이 없다. 唐 明皇이 胡部와 鄭·衛의 聲을 합주하도록 명령하였을 때 俗樂을 말하는 자들조차도 이를 그르다고 하였는데 孔子가 오히려 雅와 鄭을 합주하도록 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論語≫에서 顔子의 물음에 답한 것은 孔子의 천하를 다스리는 大綱으로 鄭聲에 대해서 시급히 몰아내고자 하였는데 어찌 ≪詩≫를 刪定하여 萬代를 가르치면서 오히려 鄭聲을 거두어서 六藝에 갖추었겠는가?

呂祖謙의 견해에 의하면, 孔子가 '鄭聲이 雅樂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雅와 鄭은 비교적 넓고 추상적인 의미를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雅는 <小雅>·<大雅>의 雅가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체 雅正하고 中和한 聲의 총칭을 가리키는 것이다. 설사 <鄭風>·<衛風>이라 하여도 中和한 聲에 합치되고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기만 하면 또한 雅에 속하며, 鄭은 일체 속악의 총칭으로 ≪禮記·樂記≫의 이른바 亡國之音인 桑間· 上之音과 같은 음란한 鄭·衛의 俗樂이 이에 속한다.

雅樂인 雅와 속악인 鄭은 본래 서로 부류가 달라서 분명하게 구분이 되어 있었지만, 춘추 말기에 예악이 붕괴함에 따라 雅와 鄭이 뒤섞이게 되었다. 이에 孔子가 晩年에 이를 바로잡아 鄭을 雅로부터 제거하여 ≪詩經≫을 中和한 聲에 합치되고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西周 말년의 작인 < 風·桑中>篇이나 <鄭風·溱洧>篇 등의 경우 비록 그 音이 煩促하여 속악인 鄭과 유사할 뿐 아니라 그 내용 역시 남녀간의 음란한 일을 읊어 풍자하되 諷一勸百하는 혐의가 짙으므로 淫詩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식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시편들이 ≪詩經≫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鄭이 아니라 雅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까닭에 荀子가 '≪詩≫는 中和한 聲이 머무는 바이다.(≪詩≫者, 中聲之所止也.)'(≪荀子·勸學≫篇)라고 여겼고 <大序>에서 '예의에서 머물렀다'라고 한 것이다. 聲과 시는 동질성을 띠고 있어 일치하므로 '放鄭聲'이 바로 刪詩를 의미하는 것인즉, 孔子가 刪詩를 할 때 鄭聲을 제거하여 수록하지 않았을 것이니 ≪詩≫ 三百篇中에는 음란한 시가 존재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요컨대 ≪禮記·樂記≫의 이른바 鄭·衛의 音이나 桑間은 ≪詩經≫의 <鄭風>과 < 風>·< 風>·<衛風>이나 < 風>의 <桑中>篇이 아니므로, ≪詩經≫중에는 淫詩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과 같은 呂祖謙의 견해는 ≪詩經≫에 淫詩가 있다는 朱熹의 주장에 대한 전통 漢唐詩經學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朱熹는 <讀呂氏詩記桑中高>와 ≪詩序辨說≫에서 長文으로써 呂祖謙의 견해를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대저 雅·鄭·衛 같은 것은 여러 편에서 구하면 본래 각기 그 명목이 있다. 雅는 <大雅>와 <小雅> 약간 편이 그것이고 鄭은 <鄭風> 약간 편이 그것이며 衛는  · ·衛<風> 약간 편이 그것이다. 이것은 孔子가 衛나라로부터 魯나라로 돌아온 이래로 바뀌지 않았으며 <風>과 <雅>의 시편은 말하는 자들에게 또 正·變의 구별이 있다.

<桑中>의 <小序> "정사가 산란해지고 백성들이 유리하되 제지할 수 없었다"라는 글은 <樂記>와 부합한즉 이 詩가 桑間이 됨은 또한 근거할 바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반드시 三百篇이 모두 雅여서 <大雅>와 <小雅>만이 홀로 雅가 아니고 <鄭風>이 鄭이 아니며·衛의 <風>이 衛가 아니고 <桑中>이 桑間 亡國의 音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 篇帙이 혼란해지고 비뚤고 바름이 뒤섞여져 더 이상 옛 孔子 때의 것이 되지 않는다.

대저 二<南>正<風>은 房中之樂이며 鄕樂이고 二<雅>의 正은 조정의 음악이며 商·周의 <頌>은 종묘의 음악이다.……變<雅>에 이르러서는 원래 이미 일에 무용하고 變<風>은 또한 단지 里巷의 가요일 뿐으로 그것이 악관에 領屬된 까닭은 시대의 변화를 알고 토속을 살필 수 있고 사방 오랑캐의 음악보다 훌륭하기 때문일 따름이다. 지금 기어코 三百篇이 모두 제사와 朝聘에 사용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桑中>篇과 <溱洧>篇 같은 것은 응당 어떠한 귀신에게 올리고 어떠한 손님을 맞아야 할지 모르겠다.……그러나 그것이 先王 <雅>·<頌>의 正篇과는 篇帙이 같지 않고 쓰임 또한 다름이 앞에서 진술한 바와 같으니 본래 뒤섞이는 것에 꺼릴 바가 없다.

지금 鄭과 衛의 실질에 대해 자세히 살피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뒤섞인다는 명분에 대해 또한 너무 심하게 두려워하여 오히려 들뜨고 放逸한 鄙詞를 이끌어다가 풍자라는 아름다운 설로 문식하여 반드시 억지로 先王의 <雅>·<頌>의 반열에 놓으려고 하는데, 이는 오히려 뒤섞임이 심하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이다. 대저 胡部와 鄭·衛를 합주하는 것조차도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더군다나 억지로 <桑中>과 <溱洧>를 雅樂으로 삼고 또 <鹿鳴>·<文王>·<淸廟>의 篇什에 합쳐서 종묘 안과 조정 위에서 연주하려고 하다니! 두 시가 中和한 聲에서 머물렀다고 여긴 것과 司馬遷이 孔子가 모두 현악기에 맞추어 노래하여 <韶>와 <武>의 音에 합할 것을 추구하였다고 일컬은 것은 그 오류 또 이와 같다.……또 백을 권면하고 하나를 풍자하는 것에 가깝지만 예의에서 머물렀다고 여긴 것은 또 <大序>의 잘못을 믿은 것이다.……<桑中>과 <溱洧> 같은 것은 나는 그것이 어떤 말로 풍자하였으며 무슨 예의에서 머물렀는지를 모르겠다.

雅라는 것은 二<雅>가 그것이고 鄭이라는 것은 <緇衣> 이하 21篇이 그것이며 衛라는 것은  · ·衛 39편이 그것이고 桑間은 衛의 1편으로 <桑中>詩가 그것이다. 二<南>·<雅>·<頌>은 제사와 朝聘에 사용하는 것이고 鄭·衛·桑· 은 狎妓들이 노래하는 것이다.……지금 이것을 살피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위해 鄭·衛·桑· 의 실질을 기피하고 雅樂의 이름으로써 문식하려 하고 또 그래 가지고서는 종묘 안과 조정 위에서 연주하려고 하니 장차 어떠한 귀신에게 올리고 어떠한 손님에게 사용할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聖人의 나라를 다스리는 법에 대해서 또한 어찌 겉으로는 지키면서 속으로는 배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 또한 틀렸다.……묻기를: "荀子의 이른바 '≪詩≫는 中和한 聲이 머무르는 바이다'라고 한 것과 司馬遷 또한 三百篇은 孔子가 모두 현악기에 맞추어 노래하여 <韶>와 <武>의 音에 합할 것을 추구하였다고 일컬은 것은 무엇인가?" 말하기를: 荀子의 말은 본래 正經에 대해서 한 것이고 司馬遷의 설은 근거로 삼을 만하지 못하다. 어찌 음란한 音의 曲이 억지로 <韶>와 <武>의 音에 합할 수 있겠는가?

위의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朱熹는 孔子가 이미 '放鄭聲'하여 俗樂인 鄭·衛의 邪淫한 音을 ≪詩經≫으로부터 刪去하였으므로 現傳 ≪詩經≫의 모든 시편이 다 내용이 雅正하고 聲이 中和한 雅라는 呂祖謙의 주장이 천부당 만부당하다고 하여 극력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朱熹의 견해에 의하면, 孔子가 晩年에 '正樂', 즉 殘缺되고 차례가 뒤바뀌어 버린 ≪詩≫·≪樂≫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여 <風>·<雅>·<頌>과 正·變의 차례를 원래대로 바로잡아 제자리에 두어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한 이후로 어느 누구도 이를 바꾼 적이 없다. 또 ≪詩經≫ 중에 雅와 鄭 그리고 衛라는 명칭이 있는 것으로 보아 雅가 바로 <小雅>와 <大雅>이고 鄭이 바로 <鄭風>이며 衛가 바로 三衛詩인 < 風>·< 風>·<衛風>이고 <樂記>의 이른바 桑間이 바로 < 風·桑中>篇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서 <風>을 正 또는 變 막론하고 모두 다 雅 즉 雅樂이라고 여기고 또 <鄭風> 밖에서 따로 鄭聲 즉 속악을 찾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呂祖謙은 ≪詩經≫ 시편이 모두 聲이 中和한 雅樂이므로 <桑中>篇이나 <溱洧>篇 따위의 鄭·衛의 變<風>詩 역시 제사와 朝聘에 사용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儀禮≫의 <鄕飮酒禮>·<鄕射禮>·<燕禮>篇과 ≪周禮·春官≫篇 및 ≪禮記≫의 <祭統>·<仲尼燕居>·<射義>篇의 기록을 보면 呂祖謙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들 典籍의 기록에 의하면 제사와 朝聘에 사용되는 樂章들은 모두 房中之樂이며 鄕樂인 二<南> 正<風>·조정의 음악인 正<雅>·종묘의 음악인 <頌>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變<風>·變<雅>의 시편이 제사와 朝聘에 사용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變詩中에서도 妓房에서나 노래할 수 있을 정도로 특히 음악이 淫 하고 내용이 음란한 <桑中>篇이나 <溱洧>篇 따위의 시는 幽王· 王·   같이 邪淫한 인물의 제사나 齊 襄公·陳 靈公 같이 음란한 賓客의 燕饗에 사용한다면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만약 이를 훌륭한 조상의 祭祀나 佳賓의 燕饗에 사용한다면 그것은 귀신을 모독하고 賓客에게 不敬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朱熹는 荀子의 '≪詩≫者, 中聲之所止也.'라는 말은 단지 제사와 朝聘에 사용되는 雅樂인 正<風>·正<雅>·<頌>의 경우만을 지칭한 것일 뿐으며, 내용이 경박하고 음란하여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시가 적지 않은 變<風>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林武子가 '≪詩≫는 中和한 聲이 머무는 바이다'에 대하여 물었다. 대답하기를: "이것은 단지 正<風>·<雅>·<頌>만이 中和한 聲이고 그 變<風>은 아니라는 말이다. 呂祖謙은 굳이 억지로 끌어 붙여서 變<風> 역시 그렇다고 말하였지만 아마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지금 단지 읽어보기만 해도 그 경박한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 예컨대 韓愈가 몇 句는 '그 소리가 들뜨고 음탕한' 部類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렇다.

朱熹는 초기에는 <詩序>說을 따르고 孔子의 刪詩說을 믿었다. 그러나 후에 鄭樵의 영향을 받아 <詩序>說을 폐기하면서부터 ≪論語≫에서 孔子가 鄭聲은 淫蕩하다고 비판하였지만 刪詩를 하였다고는 말한 기록이 없는 사실에 의거하여 孔子가 ≪詩≫를 刪去하지 않고 刊定하였을 뿐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사람들은 孔子가 ≪詩≫를 刪去하였다고 하는데 보기에 단지 많은 시를 채집하였을 뿐으로 孔子는 일찍이 刪去하지 않고 왕왕 단지 刊定하였을 따름이다.

刪詩에 대하여 물었다. 말하기를: "어디 聖人이 집필하여 저것을 刪去하고 이것을 보존하였다고 보이는가! 또한 단지 전해져 오는 것에 의거하여 해설하였을 뿐이다.

朱熹는 孔子가 刪詩를 하지는 않았지만 '放鄭聲'한 것은 사실이라고 여겼다. 그는 孔子가 '그 소리가 들뜨고 음탕하여(其聲浮且淫)' 제사와 朝聘에 사용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變<風>의 악장은 그 음악만을 제거하고 시는 그대로 남겨 두었기 때문에, 變<風>中에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淫詩가 적지 않게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몰아낸다는 것은 그 聲을 몰아내어 교묘와 빈객에 사용하지 않은 것일 따름으로 그 詩는 본래부터 존재하였다.

그래서 朱熹는 孔子가 ≪詩經≫ 三百篇을 모두 현악기에 맞추어 노래하여 <韶>와 <武>의 音에 합할 것을 추구하였다는 司馬遷의 말은 잘못된 것이므로 믿을 수가 없다고 여겼다. 또 <大序>說을 신봉한 呂祖謙이 비록 '諷一勸百'의 혐의가 있지만 역시 예의의 기준에 부합한다고 여긴 <桑中>篇이나 <溱洧>篇 따위의 鄭·衛 變<風>詩는 사실상 풍자의 의도가 전혀 내포되지 않아 예의의 규범에서 일탈한 淫詩임에 분명하다고 여겼다.

3. 淫詩의 作者

朱熹는 淫詩가 民間閭巷 小人輩들의 作이라는 주장을 하여 淫詩論 근거의 하나로 삼았다. 變<風> 등과 같은 시에는 좋지 않은 것이 대단히 많다. 대체로 좋은 시들은 대부의 작이며 그 좋지 않은 시들은 단지 閭巷 소인의 작이다. 선배들은 대부분 (思無邪가) 시를 짓는 생각이라고 하였는데 그렇지 않다. 그 중에는 淫奔하는 좋지 않은 시가 많이 있어서 역시 사악한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民間閭巷의 소인배들은 신분이 미천하고 도덕적 소양이 결여되어 시가로써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노래함에 있어서 소양이 깊은 사대부들처럼 美刺를 염두에 두어 溫柔敦厚하고 완곡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에 느낀 바를 아무 거리낌없이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變<風>中에 民間閭巷의 敗德한 소인배들이 예의의 규범에서 일탈한 자신들의 애정 행각을 아무 부끄럼 없이 노래한 시 즉 淫詩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詩序>의 美刺說을 篤信한 呂祖謙은 '≪詩≫ 三百篇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생각에 邪惡함이 없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라는 孔子의 말을 시인이 사악함이 없는 생각으로써 짓고 독자 역시 사악함이 없는 생각으로써 읽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는 <桑中>篇이나 <溱洧>篇처럼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鄭·衛의 시편들이 비록 음란한 일을 권면하는 혐의가 있지만, 사실은 음란한 일을 풍자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桑中>·<溱洧> 諸篇은 (음란한 일을) 권면함에 가까운데 孔子가 취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말하기를: "≪詩≫의 體는 같지 않아 그 직설적으로 풍자하는 것이 있으니 <新臺>의 類가 그것이고, 완곡하게 풍자하는 것이 있으니 <君子偕老>의 類가 그것이며, 그 일을 펴 진술하여 한 마디 말도 더하지 않아도 뜻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 있으니 이와 같은 類가 그것이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후세 狎妓의 樂府는 이 시의 <序>를 冒頭에 둔다면 어찌 불가하겠는가?" 말하기를: 孔子가 '≪詩≫ 三百篇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시인이 사악함이 없는 생각으로써 짓고 배우는 자 또한 사악함이 없는 생각으로써 보면 가엽고 애석하게 여기며 징계하는 뜻이 은연중에 저절로 言外에 나타난다.

이상과 같이 呂祖謙은 시인과 독자 모두 사악함이 없는 생각으로써 시를 짓고 읽는 것이라고 하여 <桑中>篇과 <溱洧>篇 등을 풍자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朱熹는 이러한 呂祖謙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思無邪'라는 한 마디 말은 좋은 것이지만 ≪詩經≫ 모두가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는 것은 아니므로" 이 시편들은 음란한 자의 자작일 뿐이지 시인이 음란한 자를 풍자한 것은 아니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하였다.

어떤 사람이 "풍자시의 體에는 원래 그 일을 펴 진술하여 한 마디 말도 더하지 않아도 가엽고 애석하게 여기며 징계하는 뜻이 저절로 言外에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이와 같은 類가 그것이다. 어찌 반드시 꾸짖고 책망을 한 다음에야 풍자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 설은 그렇지 않다. 대저 ≪詩≫의 풍자에는 본래 한 마디 말도 더하지 않아도 뜻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 있으니 <淸人>·< 嗟>의 類가 그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그것들을 玩味하여 보니 그것들을 읊은 사람은 여전히 읊은 바의 밖에 있고 말뜻의 사이에는 여전히 客과 主의 구분이 있다.

어찌 장차 남의 악한 것을 풍자하려고 하면서 오히려 스스로가 그 사람의 말을 하여 자신을 풍자하는 가운데에 빠뜨리고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 있겠는가? 그것이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 더군다나 이러한 사람들은 악을 행하는 것에 편안해 하였으므로 그들이 이러한 시들에 대해서 그들의 평상시의 언행을 헤아리면 본래부터 이미 그 입으로부터 발설하면서도 부끄러워함이 없었을 것이니, 또 어찌 내가 펴 진술한 후에야 비로소 그들이 한 바가 이와 같음을 알겠으며 또 어찌 내가 가엽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문뜩 징계하는 마음을 갖겠는가? 이것을 풍자라고 여긴다면 무익할 뿐 아니라 고무하여 오히려 그 악을 권면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朱熹의 견해에 의하면, 시편의 文辭에 의거하여 보면 <鄭風·淸人>篇이나 <齊風· 嗟>篇같은 풍자시는 시의 작자가 제삼자의 입장에서 풍자하고 있어 그것이 다른 사람을 풍자한 것이 분명하다. 이에 비해 <桑中>篇이나 <溱洧>篇 따위의 淫詩는 시편 안에 작자가 직접 등장하고 있으므로 음란한 일을 다른 사람이 풍자한 것이 아니라, 예의도덕 의식이 결여된 작자가 자신의 음란한 애정 행각을 아무 부끄럼 없이 스스로 노래한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시는 점잖은 사람들도 입에 담기 거북해 하는 바이다. 만약 呂祖謙의 주장대로 이 시편들이 음란한 일을 풍자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작자가 음란한 자의 입장에 서서 그 음란한 행각을 대신 노래해 주는 것이 된다. 결국 음란한 자를 警戒하여 개과천선하게 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邪淫한 일을 하도록 고무하고 권면하는 나쁜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朱熹는 만약 鄕里에 시를 지어 오로지 남을 풍자하는 것만을 일삼는 자가 있다면 鄕里 사람들에게 분란을 조장하는 性情이 올바르지 못하고 경박한 악인으로 간주되어 미움을 받을 것이 분명하므로 '情意가 溫柔寬和한(情意溫柔寬和)' 옛날의 賢人들이 음란을 풍자한 시를 지어 남에게 비난받을 행위를 결코 할 리가 없다고 하여 ≪詩經≫ 三百篇이 모두 賢人들의 작이라는 呂祖謙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였다.

呂祖謙은 ≪詩≫가 모두 賢人들이 지은 바라고 하였는데,……이는 매우 그렇지 않으니 예컨대 <國風>중에도 또한 邪淫한 것들이 많이 있다.……만약 모두 賢人들이 지은 바라고 한다면 賢人들은 결코 이렇게 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한 鄕里에 그러한 사람이 있어 오로지 이러한 원망과 풍자를 일삼는다면 아마도 역시 조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朱熹는 남의 은밀한 일을 들추어내어 시로써 풍자하는 옳지 못한 행위는 옛날의 賢人들이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풍자설을 주장한 呂祖謙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 사실을 들어 呂祖謙의 풍자설을 반박함으로써 <桑中>篇이나 <溱洧>篇 따위의 淫詩가 음란한 자의 자작이라는 자신의 주장이 틀림없음을 강조하였다.

만약 시인이 지어서 淫奔을 꾸짖고 풍자한 것이라면,  州의 사람이 만약 淫奔한 일이 있다면 呂祖謙은 어째서 시를 하나 지어 풍자하지 않는가?……만약 다른 사람에게 은밀한 일이 있기만 하면 시를 지어 그 단점을 들추어내어 꾸짖고 풍자한다면 이것은 지금의 경박한 자가 戱謔하는 말을 지어서 鄕里에서 비웃기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온 고을이 질시하는 바이다. 시인은 溫柔하고 醇厚하므로 반드시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呂祖謙과 이것에 대하여 논하여 <桑中> 따위의 시를 만약 풍자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이것은 남의 은밀한 일을 들추어내어 시에 나타내는 내는 것이니 賢人들이 어찌 이러한 일을 하겠는가? 呂祖謙이 "단지 곧이곧대로 말한 것일 뿐입니다"라고 하기에 "당신이 만약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일이 있음을 본다면 시를 지어 곧이곧대로 말하려 들겠습니까? 당신이 평소에 시를 짓는 것 또한 그렇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요컨대 朱熹는 變<風>중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한 내용을 담은 시편들의 대부분이 篇中에 一人稱代詞 '我'字 또는 '予'字를 사용하여 자신의 일을 서술하는 표현 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이와 같은 시편들이 예의도덕 의식이 결여되어 부끄러움을 모르는 음란한 民間閭巷의 소인배들이 자작한 음시이지 결코 양식이 있는 사대부·賢人들이 남의 淫亂을 풍자한 시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4. 詩敎로서의 '思無邪'論

<詩序>의 美刺說을 篤信한 呂祖謙 같은 학자는 孔子가 일찍이 鄭聲이 음탕하므로 鄭聲을 몰아내야 한다는 한 말에 의거하여 孔子가 "鄭聲을 몰아냈으니, 그 시는 반드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放鄭聲矣, 則其詩必不存)"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鄭·衛 및 기타 諸國의 음악과 시 가운데 邪淫한 것들이 모두 刪去되었으므로 ≪詩經≫ 305篇中에는 淫詩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淫詩를 모두 풍자시로 해설하였다. 朱熹는 '放鄭聲'을 글자의 액면적 의미 그대로 이해하여 呂祖謙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孔子가 變<風>中의 鄭·衛 등의 음탕한 聲을 ≪樂經≫으로부터 제거하여 교묘와 빈객에 사용하지 않도록 하되 그 음란한 시는 그대로 ≪詩經≫에 존속시켜 後世 사람들에게 警戒로 삼도록 하였으니, 이는 ≪春秋≫를 지으면서 상당히 많은 亂臣賊子의 일을 기록한 깊은 뜻과 상통한다고 주장하였다.

孔子가 鄭과 衛에 대해서 대체로 그 聲을 ≪樂≫으로부터 깊이 禁絶하여 법으로 삼고 그 말을 ≪詩≫에 엄정하게 세워 警戒로 삼았으니 聖人이 본래 亂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지만 ≪春秋≫에 기록된 것이 亂臣賊子의 일이 아닌 것이 없는 것과 같다. 대체로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당시의 풍속과 사변의 실질을 보여 후세에 鑒戒를 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존속시킨 것이니 이른바 도가 함께 행해지되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朱熹의 견해에 의하면, 孔子는 鄭·衛 등의 음란한 시를 삭제하지 않고 ≪詩經≫에 그대로 존속시켜 당시 풍속의 美惡을 보여줌으로써 후세에 ≪詩經≫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것은 본받고 악한 것은 警戒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선한 것이 많아야 할 뿐 아니라 악한 것이 적어서도 안된다. 그래서 朱熹는 ≪詩經≫에 음란한 시가 적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聖人의 뜻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선한 것을 본받고 악한 것을 경계하도록 한 것인데, 이것은 해와 별처럼 밝게 빛난다.……단지 聖人이 권면하고 경계함을 후세에 남겨 보여준 뜻을 玩味하여 얻는다면 ≪詩≫의 쓰임은 내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鄭·衛의 시가 篇篇이 이와 같으니 그 풍속이 매우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한 두 篇만을 실었다면 사람들이 우연히 그러한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만약 雅正한 시가 ≪詩經≫ 시편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邪淫한 시가 한 두 편에 불과하다면 ≪詩經≫의 교화 효용에 있어서 선을 권면하는 효과는 기대할 수 있으나 악을 경계하는 효과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孔子가 鄭·衛의 음란한 시를 삭제하였을 리가 없다. 이러한 까닭에 朱熹는 "≪論語≫에서 顔子의 물음에 답한 것은 孔子의 天下를 다스리는 大綱으로 鄭聲에 대해서 시급히 몰아내고자 하였는데, 어찌 ≪詩≫를 刪定하여 萬代를 가르치면서 오히려 鄭聲을 거두어서 六藝에 갖추었겠는가?"라는 呂祖謙의 힐문에 대하여 직접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이것은 曾鞏이 ≪戰國策≫에서 劉安世가 <三不足之論>에서 일찍이 말하였으니, 또 어찌 내 말을 기다린 다음에야 분명해지겠는가?"라는 말로써 반문하였다. 曾鞏은 <戰國策目錄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君子가 邪說을 금함에 있어 본래 그 설을 천하에 밝혀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그 설이 따라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도록 한 다음에 금하면 가지런해지고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그 설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도록 한 다음에 경계하면 분명해지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그 典籍을 없애야 할 필요가 있는가? 몰아내어 禁絶하는 것으로 이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曾鞏은 위의 글에서 모든 사람이 邪說의 옳지 못함을 절감하도록 하여 그것을 따르고 행하지 않게 하는 것이 邪說의 유행을 禁絶하는 최선의 방법이므로 邪說이 들어 있는 典籍은 없앨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존시켜 경계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朱熹는 曾鞏이 말한 바가 바로 孔子가 ≪詩經≫에서 淫詩를 처리한 방식이라고 여겼는데, 이는 孔子가 鄭·衛 등의 음란한 시를 ≪詩經≫에서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존속시킨 이유에 대하여 불후의 常道를 말한 '經'의 효용 측면보다는 역사사실을 아무런 여과나 취사선택없이 美惡을 아울러 기록한 '史'의 효용 측면으로부터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朱熹의 ≪詩經≫의 變<風> 淫詩 존재 주장은, 그가 孔子의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라는 말을 ≪詩經≫ 교화론 즉 詩敎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더욱 구체화되었다. 朱熹는 <詩集傳序>에서 詩敎, 즉 ≪詩經≫의 교화적 효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란 사람의 마음이 사물에 감응하여 말로써 표현된 나머지이다. 마음이 감응한 바에는 비뚤고 바름이 있으므로 말로써 표현된 것에 옳고 그름이 있게 된다. 오직 聖人만이 위에 있어서 그 느낀 바에 바르지 않음이 없으니, 그 말이 다 족히 가르침이 된다. (그렇지 못한 凡人은) 간혹 그 느낀 바가 잡되어서 發한 바에 가릴 만한 것이 없을 수 없으니 윗사람이 반드시 스스로 돌이킬 바를 생각하여 이로써 권면하고 징계하면 이 또한 가르침이 되는 바이다.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朱熹는 ≪詩經≫의 교화적 효용을 권선징악을 통한 性情 도야의 기능으로 보았다. 朱熹는 오직 聖人만이 그 느낀 바에 바르지 않음이 없고 보통 사람들의 情은 그 자체로서 선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여 일정한 도덕적 선택과 여과를 거쳐야 비로소 가르침의 재료가 된다고 보았다. 그는 善과 惡이 섞여 있는 ≪詩經≫이야말로 이러한 가르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최상의 교재가 된다고 생각하여 '興·觀·群·怨' 가운데에서 특히 興과 觀의 기능을 중시하였다. 이에 그는 興과 觀의 문자적 의미를 "志意를 感發한다(感發志意)"·"得失을 상고하여 본다(考見得失)"라고 풀이하고 그 기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른바 '≪詩≫는 興起시킬 수 있다'라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興起하여 感發하는 바가 있고 징계하는 바가 있게 하는 것이고, '볼 수 있다'라는 것은 한 때의 습속이 이와 같음을 보고 聖人이 그것들을 존속시켜 다 刪去하지 않은 까닭이 당시 풍속의 美惡을 다 보아 모두가 賢人이 지은 것은 아니라는 알게 한 것이다.

朱熹는 '思無邪'의 의미 역시 이상과 같은 ≪詩經≫의 교화론적 효능 즉 詩敎의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즉 그는 "聖人이 ≪詩≫의 가르침을 말한 것은 단지 사람들이 思無邪하게 하려 한 것일 뿐으로" 사람들이 "≪詩≫를 읽는 까닭은 사람의 마음에 사악함이 없도록 하는 하는 것이니, 이는 ≪詩≫의 효용이 이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여 '思無邪'가 바로 詩敎인 동시에 그 효용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래서 朱熹는 詩敎인 '思無邪'의 궁극적인 경지는 人欲이 橫流하는 악을 없애고 天理가 流行하는 선을 길러 '性情의 바름'을 얻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무릇 ≪詩≫의 말은 선한 것은 사람의 선한 마음을 感發케 할 수 있으며 악한 것은 放逸한 뜻을 징계할 수 있으니, 그 효용은 사람으로 하여금 情性의 바름을 얻도록 하는데 귀착할 따름이다."

孔子가 "≪詩≫ 三百篇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라고 말하였으니, 대체로 ≪詩≫의 말이 아름답고 악한 것이 같지 않아 혹은 권면하고 혹은 징계하여 다 사람들로 하여금 性情의 바름을 얻게 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백하고 간단 절실하여 上下에 통하는 것이 이 말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특별히 칭하여 三百篇의 뜻으로 삼을 수 있다고 여겼으니 그 요지가 이것을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배우는 자들이 진실로 능히 그 말을 깊이 玩味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살펴서 반드시 생각하는 바가 바름으로 나가지 아니함이 없게 하면 매일 쓰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天理가 流行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朱熹가 보기에 선과 악이 섞여 있는 ≪詩經≫을 도덕적 판단에 의거하여 수용함으로써 후천적 氣稟과 外物의 작용에 따라 악해질 수도 있는 情을 다스려 본원적 性의 純善함으로 돌아가는 것, 다시 말해 '誠意正心'하여 '存心養性'하고 '存天理, 滅人欲'함으로써 '性情의 바름'을 얻어 자아 인격의 完善함을 이루는 것이 詩敎인 '思無邪'의 결과론적 효능이요 궁극적인 경지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思無邪'는 ≪詩經≫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효용이고 또 性情論으로 보아 시인들이 모두 '思無邪'할 수가 없으므로 '思無邪'의 대상은 당연히 독자이지 결코 시인이 될 수는 없다.

시를 지은 사람이 '思無邪'하다는 말이 아니다.……그것을 읽는 자가 '思無邪'할 따름이다. 지은 자가 한 사람이 아니니 어찌 '思無邪'할 수 있겠는가? 단지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朱熹는 呂祖謙이 ≪詩經≫의 효용이 단지 '可以怨'일 뿐이고 모든 시인이 다 溫柔敦厚한 性情을 가졌다고 함으로써 '詩眼'을 멀게 하는 나쁜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비판하고, '思無邪'를 시인과 독자 양자 모두 '思無邪'한 것이라고 한 呂祖謙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孔子가 '思無邪'라고 칭한 것은 ≪詩≫ 三百篇이 권선징악하여 비록 그 요지가 바름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지만 이 말처럼 간략하면서도 곡진한 것이 없다고 여긴 것이지 시를 지은 사람들이 생각한 바가 모두 사악함이 없다고 여긴 것은 아니다. 지금 반드시 그가 사악함이 없는 생각으로 음란한 일을 펴 진술하여 가엽고 애석하게 여기며 징계하는 뜻이 저절로 言外에 나타난다고 하려고 하는데, 어찌 그가 비록 사악함이 있는 생각으로 지었지만 내가 사악함이 없는 생각으로 읽는다면 그가 자신의 추악함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 내가 두려워하고 징계하는 자료가 되는 것만 하겠는가! 하물며 왜곡되게 해설하여 그 사악함이 없음을 그에게서 찾는 것은 돌이켜서 나에게서 얻는 것만큼 쉽지 않고 교묘하게 이것저것 변설하여 그 사악함이 없음을 그에게 돌리려고 하는 것이 돌이켜서 나에게서 추구하는 것만큼 절실하지 못함에 있어서랴.

여기서 朱熹는 우선 孔子가 말한 '思無邪'가 시를 읽는 사람의 '思無邪', 즉 사악함이 없는 생각으로써 시를 읽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결코 시를 지은 사람들이 모두 순정무사한 생각을 가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 그리고 나서 실제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詩經≫의 교화적 효용은 그 획득의 가능성과 정도가 매우 많고 높음을 강조하여, 詩 특히 사악한 음시를 풍자설로써 왜곡 해설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朱熹는 이상과 같은 '思無邪'에 대한 해석에 입각하여 孔子가 '思無邪'라는 詩敎로써 후세의 독자들을 가르쳐 '性情의 바름'을 얻도록 하려는 깊은 뜻을 가지고 ≪詩經≫에 聖賢의 훌륭한 사적을 노래한 시를 존속시켰을 뿐 아니라 民間閭巷의 敗德한 소인배들이 자신들의 음란한 일을 自述한 시까지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존속시켰다고 여겼다. 따라서 現傳 ≪詩經≫에 淫詩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詩≫에는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어 종류가 가장 많지만 오로지 '思無邪' 한 마디가 족히 포괄할 수 있다. 위로는 聖人까지 아래로는 淫奔한 일까지 聖人이 존속시킨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징계하고 권면하는 바를 알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思無邪'라고 말한 것은 사악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朱熹는 ≪詩經≫의 시편이 時君과 국정, 즉 현실 정치를 찬미하거나 풍자하는 효용을 갖는다는 전통 <詩序>說을 부정하는 대신 순수한 윤리도덕적 차원에서 '思無邪' 詩敎論을 전개하여 시를 性情을 도야하는 재료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종래에 풍자의 뜻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던 상당수의 變<風>詩를 달리 이해하여 淫詩로 규정하였다.

5. 결 론

朱熹는 인간의 性은 善하나 情은 善할 수도 있고 惡할 수도 있다는 性情論과 孔子의 '鄭聲淫'이라는 말에 의거하여, 變<風> 시편중에 性情이 바르지 못한 民間閭巷의 敗德한 소인배들이 지은 예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음탕한 '男女相悅之詞'가 있다고 여겼다. 그는 또 孔子의 '放鄭聲'이라는 말의 해석에 있어서 전통적인 說을 따르지 않고 나름대로의 재해석을 가하였다. 즉 孔子가 淫蕩한 聲을 ≪樂經≫으로부터 제거하여 郊廟와 빈객에 사용하지 않도록 하되 그 음란한 시는 그대로 ≪詩經≫에 존속시켜 후세 사람들에게 경계로 삼도록 하였다고 하여 刪詩說을 부정하였다.

朱熹는 孔子의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라는 말 역시 새로이 ≪詩經≫의 효용적 측면, 즉 詩敎의 측면에서 해석하였는데, 이는 그의 淫詩論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의 思無邪論은 '誠意正心'하여 '存心養性'하고 '存天理, 滅人欲'함으로써 '性情의 바름'을 얻어 자아 인격의 完善을 얻고자 하는 修養論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思無邪'란 시를 지은 자의 생각이 無邪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읽는 자가 선악이 섞여 있는 ≪詩經≫을 도덕적 판단에 의거하여 수용함으로써 후천적 기품과 외물의 작용에 따라 악해질 수도 있는 情을 다스려 思無邪한 본원적 性의 純善함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사실, ≪詩經≫은 古代 시가의 總集으로 전쟁, 노역, 남녀간의 애정, 통치계급에 대한 비판과 찬미 등 다양한 내용의 시편들이 실려있다. ≪詩經≫의 시편 중에는 그 내용이 孔子가 주장하고 추구하였던 정치적·도덕적 기준에 부합하는 思無邪한 것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思有邪것들도 있다. ≪詩經≫에 대한 이해가 남달리 깊었고 ≪詩經≫을 무엇보다도 중시하였던 孔子가 이 점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思無邪는 朱熹의 해석을 따라 ≪詩經≫을 읽는 자의 思無邪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詩經≫中에 '男女相悅之詞'가 있다는 朱熹 주장은 '≪詩≫可以怨'을 중시하는 <詩序>의 美刺觀, 즉 정치·사회관의 굴레로부터 탈피한 것이다. 朱熹는 '≪詩≫可以興, 可以觀'을 중시하여 '詩人之意'를 찾을 것을 주장함으로써 ≪詩經≫을 經學의 영역으로부터 文學의 영역으로 회귀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 道學者의 입장에서 '聖人之意'를 추구하여 순수한 남녀의 애정시를 자신의 도덕적 평가 기준에 의거하여 '淫(奔)'字로써 폄하함으로써 그 문학적 가치를 부정하는 과오를 범하였다. 朱熹의 淫詩論은 三傳弟子 王柏에게 영향을 주어 이른바 淫詩 31篇을 ≪詩經≫으로부터 삭제할 것을 주장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후인으로부터 ≪詩經≫의 지위를 經에서 '誨淫之書'로 격하시킨 名敎의 죄인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요컨대 朱熹가 순수한 男女의 애정시를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 의거하여 淫詩라고 칭한 것은 시대적 한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실이 있다고 하여 그가 ≪詩經≫을 다소나마 文學의 궤도로 다시 올려놓은 공을 부정할 수는 없다.

<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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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 ≪楚辭集注≫, 臺北: 河洛圖書出版社,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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