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비문은인재(忍齋)홍섬(洪暹)이 지었으며, 글씨는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이 썼다. 원문은홍섬의 문집인 『인재집(忍齋集)』에도 기록되어 있다. 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중추부사 증시효절이공신도비명, 유명조선국숭정대부행지중추부사증시효절이공신도비명 병서.
예로부터 인신은 벼슬을 이루고 명망이 선 뒤에는 몸을 거두어 한적한 곳에 물러나 있고 싶으나 대개 자유로이 하기 어려워 구차하게 용납함을 구하였다. 그 덕은 완악한 자가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가 서게 되며 나이가 족하면 나라에 대로가 되고 고향 언덕과 동산에 쓸쓸히 한산하게 거닐고 노년의 절개를 보전함은 근세에 구해 보니 오직 효절(孝節) 이(李)공 한 사람뿐이다. 공의 이름은 현보요, 자(字)는 비중(棐仲)이다. 그 선조는 영천(永川) 사람이다.
휘(諱) 헌(軒)이 처음 예안(禮安)현에 이거하여 드디어 현인(縣人)이 되었다. 벼슬은 군기소윤인데 공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소윤이 휘 파(坡)를 낳았으니 의흥현감이고, 현감이 휘 효손(孝孫)을 낳으니 통례문봉례이며 휘 흠(欽)을 낳았으니 인제현감이다. 현감이 호군 권겸(權謙)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성화(成化) 정해년(1467) 7월 29일에 공을 낳았다. 처음에 봉례공이 일찍 산사에 노닐다가 꿈에 신인(神人)이 고하여 말하되 적선(積善)의 집에 반드시 나머지 경사가 있다고 하였다. 잠을 깬 뒤에 권씨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마음이 이상한 까닭으로 공의 어릴 때 이름을 유경(有慶)이라 하였다. 공이 나서부터 재지(才智)가 뛰어나고 골상이 비범하며 뜻이 호탕하여 구애됨이 없고 자못 활 쏘고 사냥하기를 좋아하여 학문에는 전력하지 아니하였다. 향교에 유학할 때부터 비로소 발분(發憤)하여 글을 읽고 문장을 짓게 되니 글을 짓는 데 뛰어나서 여러 무리 가운데 중하게 되었다.
문광공(文匡公)홍귀달(洪貴達)에게 수업하니 문광이 그의 기국(器局)을 중히 여겼다. 을묘년(1495) 진사에 합격하고 무오년(1498)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교서관정자가 되고 신유년(1501) 예문관검열에 추천되었다. 처음 사필을 잡고 국사를 쓰는 데 구차하지 아니하였다. 임술년(1502) 공이 연산주(燕山主)에 계달하여 말하되 ‘사관은 인주(人主, 임금)의 언동을 기재하는 데 멀리 엎드려 있으니 청하건대 임금 앞에 가까이 있어 기주(記注)하는 데 소루하고 빠짐이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라고 하니 폐주가 언짢게 여겼으나 허락하였다.
갑자년(1504) 성균관전적에 올라 세자시강원사서, 사간원정언이 되어 서연관(書筵官)의 잘못을 말하니 이때 연산주가 언관(言官)을 원수같이 보아 이로 인하여 그만 화가 나서 말하되 ‘간관들은 일이 있으면 즉시 계달하지 어찌 늦추어 하루를 넘기는고?’라고 의금부에 내리고 마침내 안동의 안기역(安奇驛)에 유배를 시켰다. 병인년(1506) 중종이 반정하여 공이 배소로부터 일어나 호조좌랑을 받고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곧아서 권세에 힘쓰지 않아서 때에 사람들이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 부르니, 대개 바깥은 검은 듯하나 안으로는 맑고 맵다는 말이다.
무진년(1508)에 어버이가 늙자 형조정랑에서 영천군수로 나갔다 계유년(1513)에 만기가 되어 들어와 군자첨정이 되었다. 갑술년(1514)에 나가 밀양부사가 되어 잘 다스려 백성에 끼친 사랑이 컸었다. 을해년(1515)에 파면되고 병자년(1516) 겨울에 선공부정을 제수 받고 겨울에 충주목사로 나갔다. 정축년(1515)에 조정에서 가까이서 어버이를 편하게 봉양하라고 안동으로 바꾸어 주었다. 공은 백성을 교화하는 근본이 학교가 제일이라 하여 선비들을 크게 모아 공궤를 넉넉히 하니 원근에서 모여들어 향교가 다 용납지 못하였다.
조정으로 들어와 사복시정이 되고 사헌부집의로 옮기고 군자감부정으로 바뀌었다. 얼마 되지 않아 성주목사로 나가니 임금이 공이 가는 곳에 정치가 아름답다 하여 표리(의복)를 주시고 유서로 표장하였다. 을유년(1525)에 부모님 봉양으로 사직하시고 돌아오셨다. 병술년(1526)에 시강원보덕에 제배되었고 정해년(1527)에 특별히 통정대부로 품계가 오르고 병조참지가 되었다가 곧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다. 무자년(1528)에 좌천이 되어 대구부사가 되었다. 얼마 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기축년(1529)에 영천군수가 되었다가 신묘년(1531)에 외간(外艱)상을 만나 계사년(1533)에 복을 마치고 형조참의를 제배 받고 다시 홍문관으로 들어가 부제학이 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옮겼다. 갑오년(1534) 봄에 경주부윤으로 나가서 폐해를 없애고 간소화하여 다스린 효과가 더욱 드러났다. 병신년(1536)에 부모님의 연세가 더욱 높아서 벼슬을 두고 돌아와 봉양하였다. 겨울에 예조참의로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발탁이 되어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를 제수 받았다.
공은 본도는 친구들이 있는 바이나 감사는 풍헌(風憲)을 겸하는 것이니 사사로이 뵙는 것을 허락한다면 법이 문란하여질까 하여 엄하게 막아 자제와 친구들이 감히 공관(公館)에 오지 아니하고 일도(一道)가 숙연해졌다. 정유년(1537)에 어떤 일로 파면되었다가 내간(內艱)상을 당하였다.
공은 이때 연세가 71세인데 오히려 여러 아우를 데리고 여묘(廬墓) 3년을 하다가 기해년(1539) 복을 마치고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 공이 본래 물러가 쉬려는 뜻이 있었더니, 경자년(1540) 가을에 이르러 글을 올려 몸을 빌었으나 허락을 아니하시어 초정(椒井)에 목욕을 청하였다.
때에 나의 선군인 문희공(文僖公)이 정승이 되어 공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고 머물러 두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인견(引見)하시고 속히 돌아오라 명령하시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겨울에 호조참판에 옮겼다. 임인년(1542) 봄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가을에 또 병으로 목욕을 청하고 배 삯을 주고 돌아오니 일시에 진신(縉臣)들이 의정 이하로부터 도성 문밖에 나와 전별하니 천막이 한강까지 뻗쳤고 수레가 꽉 차게 되니 보는 사람이 근고에 없었던 일이라 하였다.
계묘년(1543)에 중종이 공의 염퇴(恬退: 벼슬을 사직함)를 가상히 여기시어 특별히 지중추부사를 주시고 황고(皇考)를 의정부좌참찬, 모부인(母夫人)을 정부인(貞夫人), 조부를 이조참판, 증조를 병조참의를 주시어 선세(先世)를 추증하였다.
을사년(1545)에 인종이 즉위하시니 공이 노병으로 조정에 가지 못하시고, 소를 올려 청하기를 ‘대략 정치의 요령은 사람을 얻는 데 있으니 임무를 맡기는 처음에 밝음으로써 변별하여야 하며 임명 후에는 믿음으로 맡겨야 합니다. 선왕께서 어진 이를 좋아하시고 선비를 즐겨하였으나 혹 어진 이와 간사한 무리가 서로 섞이고 임용이 마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전하의 이목에 미친 바입니다. 삼가 어렵기는 하지만 힘써서 하나로 화하는 것을 신정의 요령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보는 자가 깊이 노성 한 분이 임금께 고하는 체통을 얻었다 하였다.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자헌의 품계로 올려 포상하였다. 이해 가을에 인종이 승하하시어 두 임금이 계속 돌아가시니 공이 시골에 있었는데 상을 듣고 슬픔을 부르짖어 수레로 빨리 부임하려 하시니 자제들이 공의 쇠병이 심하다 하여 힘써 만류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명종 기유년(1549)에 찬성(贊成) 김광준(金光準)이 절의(節義) 포장(襃獎)을 청하여 정헌의 품계를 주시고 이해에 나라에서 우로지전(憂老之典)이 있어 또한 숭정(崇政)의 품계를 주셨다.
갑인년(1554)에 한 간관이 계달하여 말하기를 ‘이모(李某, 이현보)는 나라의 기덕(耆德)이요 정력(精力)이 쇠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불러오면 반드시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림의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글을 내려 아름다움을 포장하시고 역마를 타고 조정으로 오게 하니 공이 포장하시는 말씀이 지나침을 황구하게 여기고 글을 올려 사양하시고, 또 소에 말하기를 ‘선과(禪科)의 복설(復設)과 사원(寺院)의 수선(修善)이 전하의 선에 향하는 마음이 간단(間斷)한 바가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사의가 절실하여 시골에 머물면서도 임금을 잊지 않는 충성은 늙어서도 더욱 돈독하였다. 을묘년(1555) 5월에 병이 들어 6월 13일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89세였다. 부음이 조정에 올라가니 상이 놀라서 슬퍼하시고 좌우에 이르러 ‘여러 번 불러도 오지 않더니 지금은 그만이다 하시고 내가 심히 슬프고 비통하구나. 부의를 더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해 8월 28일 현(縣)의 북쪽 용두산(龍頭山) 남쪽 도곡(道谷) 선영 아래에 장사 지냈다. 공의 천성이 효도하고 우애하여 봉양에 급하였다.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섬김에 은혜를 돌봄이 쇠하지 아니하였고 한가하기를 빌어 목욕을 청하고 잇따라 소장을 올리니 조정에서도 또 지정(至情)을 알고 뜻에 순하게 좇으므로 군수로 봉양케 한 것이 여덟 고을이며 분천(汾川)에 살면서 그 위에 집을 지어 ‘애일당(愛日堂)’이라 하고 어버이를 받들어 위안하여 노시고 그 바위는 농암(聾巖)이라 하여 자기의 생각을 사물에 비하여 은근히 나타냈다.
일찍이 부제학으로 근친하여 오니 이때 참찬(參贊)공의 나이 94세이고, 숙부 균(鈞)의 나이 92세이며, 외숙 첨지 권수익(權受益)이 82세이고, 또 향인 중 나이 높은 사람 6인을 모아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었고 자손이 앞에 가득하고 공이 채색 옷으로 춤을 추니 영광스런 효도의 성함이 보고 듣는 자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였다.
어버이가 이미 돌아가셔도 상장(喪葬)의 비용은 여러 아우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문족(門族)의 곤궁한 자가 있으면 힘써 도와주어서 혼인에 때를 잃지 않게 하며, 때로 임금의 하사품이 있으면 인척에게 나누어 주었다. 가득히 찼는지 깊이 경계하며 일급이라도 올리면 놀란 듯이 불안해하였다.
일시에 3자가 세 고을로 봉양하는 것을 도리어 근심하여 영광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복용(服用)이 간소 검박하여 공경하고 삼간으로 지내고 비록 평상시에도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의관을 바르게 하고 종일 주렴 안에서 의지하며 춥고 덥더라도 폐하지 아니하고 남을 위하여 부지런하고 자기를 위해서는 졸(拙)하고 성품이 고상 개결하나 남을 대접하는 데는 정성으로 하여 어리석고 천한 사람에게도 빠지지 않고 술과 음식으로 청하면 억지로 사양하지 않으니 향당 사람들이 모두 애모하여 부형과 같이 보더라도 시골에 살면서도 사적인 일을 공공에 범하지 않았다.
본 현은 백성도 적고 고을도 피폐하여 1호당 한 사람이 나오게 되니 폐단을 구제할 수가 없었다. 공이 창의(倡義)하여 8결(結)에 1명씩 나오게 하니 세금이 가볍고 부역이 고르게 되어 백성이 모두 편안하였다. 일을 헤아림에 밝게 살피고 만일 의심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물어보고 자신의 과실이 있다면 남에 대하여 감추지 않으니 사람이 공의 공직한 도량에 감복하였다.
담박하고 욕심이 적어 명성과 이익을 생각지 아니하고 집 주변에 작은 당(堂)을 지어 명농(明農)이라 일컫고 벽에 도잠(陶潛, 도연명)의 귀거래도(歸去來圖)를 붙이니 사람들이 공의 뜻을 알았고, 치사(致仕)할 연령이 넘어 예법을 따라 힘껏 사양하였으나 조정에서 공의 근력 이목이 쇠퇴하지 않으므로 체직할 수 없다 하였다.
공은 몸이 물러 나와도 벼슬살이로 인순(因循: 옛 습관을 고치지 못하고 우물거림)하여 지나가면 끝내 이룰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이 신하의 진퇴 의리가 아님을 생각하고 경자년 이후로 물러날 것을 구하여 그치지 않고 반드시 물러나기를 기대하였다. 기어이 물러 나와서 14년을 지냈으나 애군우국(愛君憂國)은 진퇴가 다르지 아니하였고, 그 심신은 이미 한가하여 더욱 계산을 즐기며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언덕과 숲을 찾으니 농부와 소먹이가 만나도 재상인지 몰랐다.
작은 배를 타고 임강사(臨江寺)를 왕래하여 서식(栖息)하는 곳으로 삼으니 풍신(風神)이 탈속하였고 운치가 조용하였다. 술이 약간 취하면 시아(侍兒)로 하여금 어부사(漁父詞)를 부르게 하고 초연히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독립하는 생각이 있었다. 시를 지어도 뜻이 청신하여 소년의 생각이 미칠 수 없었다. 임종에 모든 아들이 호읍(號泣)하니 공의 말이 ‘내 나이 90이고 너희들이 모두 있고 국은(國恩)을 후히 받았으니 죽어도 유감이 없다. 초상을 검약하게 하고 장사는 시기를 넘기지 말라.’고 말을 마치고 가시었다.
공은 안동권씨 충순위(忠順衛) 효성(孝誠)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6남 1녀를 낳으니 장자는 석량(碩樑)인데 요절하였고, 다음은 문량(文樑)인데 평릉도찰방이고, 다음은 희량(希樑)인데 봉화현감이고, 다음은 중량(仲樑)인데 갑오년에 문과에 올라 승지가 되고 바야흐로 우뚝한 이름이 있다. 다음은 계량(季樑)인데 의흥현감이고, 다음은 숙량(叔樑)인데 진사이다. 딸은 군수 김부인(金富仁)에게 갔다. 측실에서 2남을 낳으니 윤량(閏樑)은 태의(太醫)가 되었고, 다음은 연량(衍樑)이다.
문량은 이승손(李承孫)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원승(元承)이다. 장녀는 황준량(黃俊良), 다음은 금응세(琴應洗), 다음은 김기보(金箕報)에게 시집갔다. 희량은 황정(黃珽)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으니 아들은 선승(善承)·극승(克承)이며 딸은 송복숭(宋福崇)에게 시집갔다. 승지는 습독(習讀) 반사형(潘士泂)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으니 영승(令承)이다. 계량은 김옥견(金玉堅)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광승(光承)이고 큰딸은 양한신(楊漢臣), 차녀는 임균(任鈞)에게 시집갔다.
숙량은 이복신(李復新)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군수 김부인이 4남을 낳으니 호(壕)·전·탄(坦)·기(圻)이다. 승지(承旨) 공이 이미 면상(免喪)하고 퇴계 지사(知事) 이황(李滉)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신도(神道)의 비문을 지으라 부탁하니 슬프다. 공이 내 선인과 동년(同年) 사마시(司馬試)이고 공이 옥당(玉堂) 장관 때 내가 박사로 더럽히고 편달하기를 오래하였으니 의로서 감히 사양할 수 없고 하물며 퇴계가 공의 심사(心事)를 지어 자세히 하였고, 또 다하였으니 그 말이 족히 후세에 믿을 만한 까닭으로 서문은 퇴계의 글을 쓰고 이어 명(銘)을 지었다.
명에 이르기를 ‘아름다운 덕이 사람이 있는데 효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공이 효를 다하였으니 증자와 민자건을 이을 것이다. 귀한 것이 벼슬이 아닌데 벼슬이 와서 나를 얽매었네. 몸은 물러 나와도 벼슬은 높였으니 남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였다. 90을 모(耄)라 하니 성인도 반드시 두지 못하였는데 공이 능히 누렸으니 하늘이 부여한 것이 심히 후하였다. 덕과 벼슬과 나이를 달존(達尊)이라 하였는데, 이 세 가지를 겸하였으니 예전부터 있기 드물었다.
명농당(明農堂)이 있으니 내가 갈고 매는 것이 즐겁다. 바위를 농(聾)이라 불렀으니 알고 듣는 것을 단절할까 하였다. 양조(兩朝, 중종·인종)에게 상소를 올려 요순시대를 기약하였고, 충성은 효도로부터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니 내 어찌 임금을 잊겠는가. 임금께서 노성을 생각하여 예로 부르기를 부지런히 하였다. 창생(蒼生)을 어찌 하는고 앞길이 저물어 간다. 정성은 애일당에 있으니 효도에 게으른 자가 본받아야 하며, 명성과 이익은 더럽힐 듯하니 나아가기를 즐기는 자가 부끄러운 것이다. 나약한 자가 서게 되고 완악한 자가 청렴하게 되니 돌아가신 후에 청풍(淸風)이 남았다. 돌에 사실을 기재하여 무궁토록 밝게 빛나게 한다.’라고 하였다. 가정(嘉靖) 45년 병인(丙寅) 2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