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불경/사찰 연등 유적

예천 용문사 관음전, 산신각, 천불전, 응진전, 명부전/ 포대화상

은인자중 2022. 8. 21. 07:37

 

 

 

 

https://www.youtube.com/watch?v=Ncn7ZwK5d5A 

 

 

 

https://www.youtube.com/watch?v=pdzdi9fkd6A 

 

 

여러 사찰을 찾다보면 가끔 만나게 되는 포대화상 조각이다.

포대(布袋)는 탁발승들이 곡식을 담아 어깨에 메고 다니기도 하는 자루이다.

서울 도선사에는 서 있는 표대화상상도 있는데  배꼽 주위를 만지며 기도하여 손때로 절어 있다. 그래야 기도발이 받는다나 어쩐다나. 아래 사진 속의 신도는 두 손 엄지를 배꼽에 박고 제대로 복을 빌고 있다.

최상의 복은 4성제. 8정도에 대한 깨달음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D%8F%AC%EB%8C%80%ED%99%94%EC%83%81

 

포대화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베트남 미토시 빈짱사의 포대화상 포대(布袋, 생년 미상-917년(?))는 당나라 말기부터 오대 십국 시대까지 명주(현재의 중국 저장성 닝보시)에 실재했다는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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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대(布袋, 생년 미상-917년(?))는 당나라 말기부터 오대 십국 시대까지 명주(현재의 중국 저장성 닝보시)에 실재했다는 전설적인 불승이다.[1][2] 흔히 수묵화의 좋은 소재로 여겨지며 큰 포대를 멘 배불뚝이 승려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일본에서도 칠복신 중 하나로서 추앙받고 있다.[1]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夜夜胞佛眠
(야야포불면) 밤마다 부처를 보듬고 자다가

朝朝還共起
(조조환공기) 아침마다 같이 일어난다.

起坐鎭相隨
(기좌진상수) 일어나건 앉건 서로 붙어다니며

語默同居止
(어묵동거지) 말을 하건 않건 같이 머물고 눕는다

纖豪不相離
(섬호부상리) 털끝만큼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如身影相似
(여신영상사) 몸의 그림자 같구나

欲識佛居處
(욕식불거처 ) 부처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자 할진대

只這語聲是
(지저어성시) 다만 말하는 이놈이니라

一鉢千家飯
(일발천가반) 바루대 하나로 천 집의 밥을 얻어먹으며

孤身萬里遊
(고신만리유) 외로운 이 몸 만리 길을 떠다니네

靑日觀人少
(청일관인소) 맑은 날에도 사람 만나기가 어렵고

問路白雲頭
(문로백운두) 길을 묻는 사이 머리에는 백발이 내렸네

騰騰自在無所爲
(등등자재무소위) 늠름하고 자재하여 하는일 없으니

閔閑究竟出家兒
(민한구경출가아) 한가롭고 한가로와 출가한 장부일세.

若覩目前眞大道
(약도목전진대도) 눈 앞에 참된 도를 본다 하여도

不見纖毫也大奇
(부견섬호야대기) 티끌만큼도 기이하게 여기지 않으리.

我有一布袋
(아유일포대) 나에게 포대가 하나 있으니

虛空無가碍
(허공무가애) 허공처럼 걸림이 없어라.

展開邊宇宙
(전개변우주) 열어 펴면 우주에 두루하고

入時觀自在
(입시관자재) 오므릴때도 자재하도다.

彌勒眞彌勒
(미륵진미륵) 미륵불 중에도 진짜 미륵불

分身百千億
(분신백천억) 백천억 가지로 몸을 나누어

時時示時人
(시시시시인) 항상 사람들 앞에 나타나도

時人自不識
(시인자불식)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네

— 포대화상, 경덕전등록)

 

https://www.youtube.com/watch?v=3Lmml1KizFc 

 

 

https://ko.wikipedia.org/wiki/%EC%98%88%EC%B2%9C_%EB%AC%B8%ED%9A%A8%EC%84%B8%EC%9E%90_%ED%83%9C%EC%8B%A4

 

예천 문효세자 태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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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태실은 1783년(정조 7)에 조성된 문효세자의 태실이다. 문효세자는 조선 22대 왕인 정조의 맏아들로서 1784년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86년 5세의 나이로 죽었다.[1]

태실은 용문사 경내에서 약 100m 정도 떨어진 뒷산 중턱에 마련되어 있다. 1930년대에 발굴조사 되어 태항아리는 경기도 서삼릉으로 이장되었으며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태실지에는 비신(碑身) 높이 100cm, 너비 52cm 크기의 태실비가 뒤로 약간 기운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상황이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