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화엄사 각황전 홍매 & 적멸보궁(寂滅寶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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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불이 『화엄경』을 설한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의 적멸도량(寂滅道場)을 뜻하는 전각으로, 불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이곳에서 적멸의 낙을 누리고 있는 곳임을 상징한다. 따라서 진신인 사리를 모시고 있는 이 불전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불사리는 곧 법신불(法身佛)로서의 석가모니 진신이 상주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적멸보궁의 바깥쪽에 사리탑을 세우거나 계단(戒壇)을 만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불사리를 모신 곳이 많지만 그 중 대표적으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①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 통도사의 적멸보궁,
②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중대(中臺)에 있는 적멸보궁,
③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에 있는 적멸보궁,
④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에 있는 적멸보궁,
⑤ 강원도 정선군 동면 고한리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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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華嚴寺)는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삼국 시대에 창건되었으며, 지리산 국립공원 안에 있다.[1] 544년에 인도에서 온 승려 연기가 창건한 것으로 《화엄경》(華嚴經)의 두 글자를 따서 절 이름을 지었다.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이 증축하여 석존사리탑(釋尊舍利塔)·7층탑·석등롱(石燈籠) 등을 건조하였다.
신라 문무왕대인 677년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각황전(覺皇殿)을 짓고 《화엄경》을 보관하였으며, 헌강왕 1년(875년)에 도선이 또 증축하였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피해를 입어 벽암선사(碧巖禪師)가 7년, 인조 8년(1630년)부터 14년(1636년)에 걸쳐 재건하였고, 이어 대웅전 · 각황전 · 보제루(普濟樓) 등이 차례로 복구되었다.[2][3]
현존하는 부속 건물은 모두 신라시대에 속하는 것으로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각황전 앞 석등·3층사자석탑·동 오층석탑, 서 오층석탑 등이 유명하며, 웅대한 건축물인 각황전과 대웅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의상대사가 화엄경을 선양하여 화엄 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3]
https://namu.wiki/w/%EC%82%AC%EB%A6%AC(%EB%B6%88%EA%B5%90)
사리(舍利)는 원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시신(屍身, Śarīra: शरीर)을 가리키던 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중국 문화권에서 불교를 받아들일 때 고승이나 여래의 시신을 가리키는 말로 쓰기 위해 번역할 때 일부러 음역하였다. 이미 신라시대 문서에서부터 나오는 이야기로 산스크리트어의 본디 의미와 달라졌다.
불교계에서는 크게 사리를 진신사리(眞身舍利)와 법신사리(法身舍利)[1], 그리고 승사리(僧舍利)로 나눈다.
진신사리는 석가모니의 실제 유해, 법신사리는 불법(佛法, 불교의 가르침)이 부처의 또다른 몸이라 하여 불경을 사리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승사리는 고승의 시신, 또는 그들을 화장하면 나오는 뼈 조각을 가리킨다.
한국에서 일반대중에게 다짜고짜 '사리'라고 하면 대개는 고승을 화장하면 나온다는 승사리(僧舍利)를 떠올린다. 아니, 한국 불교계에서도 승려의 시신을 높여서 법구(法軀)라고 부름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심지어 불자들조차도 '사리'라고 하면 보통은 화장하면 나오는 구슬 같은 승사리를 떠올린다.
https://ko.wikipedia.org/wiki/%EC%A0%81%EB%A9%B8%EB%B3%B4%EA%B6%81
적멸보궁의 유래
석가모니가 설법을 펼친 보리수 아래의 적멸도량을 뜻하는 전각으로 석가모니 사후에 와서는 그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절, 탑, 암자 등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보통 절과 보궁을 헷갈려 통도사 절 자체를 적멸보궁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틀린말은 아니지만 엄격히 따지자면 절 자체가 적멸보궁이 아니라, 절에서도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장소를 일컬어 보궁이라 한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진신사리라고 하며, 이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절에서는 석가모니, 즉 부처님이 계신다고 하여 다른 부처님을 상징할 수 있는 불상이나 조각을 절에 두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절의 시설은 전(殿)이나 각(閣)으로 나타내지만, (대웅전, 삼신각) 진신 사리를 봉안한 절은 보궁이라 하여 궁(宮)으로 높여 부른다. 적멸보궁은 여러 불교 문화재 중에서도 그 가치가 두드러지는 것[1]이라 볼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적멸보궁 중 가장 유명한 5개의 보궁을 꼽아 5대 적멸 보궁[2]이라 하는데 영축산 통도사의 적멸보궁, 오대산 중대(中臺)상원사에 있는 적멸보궁, 사자산 법흥사 (영월군)(法興寺)에 있는 적멸보궁, 정선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 설악산 인제 봉정암 한국 최고높이 사찰(鳳頂庵, 원효대사관련)에 있는 적멸보궁 등이다. 이중 태백산 정선 정암사는 임진왜란기 사명대사가 왜적의 탈취에 대비해 분산해 일부 옮겨온 것이다.
5대 적멸보궁과 관련된 설화와 그 역사
각각의 보궁과 관련된 전설은 모두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 유학후 당고종기 승려로 현신한 문수보살로부터 가사, 진신사리 100여과, 경전을 받으면서 시작한다. 해동에 불법을 밝히라는 보살의 말을 들은 후 율사는 친히 신라로 건너와 절을 창건하고 불법을 알리는 일에 앞장 서게 된다.
각각의 적멸보궁마다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비록 용과 봉황 등 전설의 동물들이 나와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자체의 상징과 유래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기에 설화를 설명하고자 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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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이란, 직역하면 '온갖 번뇌과 망상이 적멸한 보배로운 궁전'이라는 뜻이다. 이는 석가모니가 적멸의 낙을 누리며 안식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석가모니가 화엄경을 설한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의 적멸도량(寂滅道場)에서 유래하였다.
석가모니의 진신이 상주하고 있으므로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신 적멸보궁의 바깥쪽에 사리탑을 세우거나 계단(戒壇)을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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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법흥사 적멸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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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파(塔婆), 또는 파고다(Pagoda)는 산스크리트어인 스투파(Stupa)에 어원을 둔 단어로 석가모니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는 일종의 무덤 건축물을 의미한다. 불탑(佛塔) 혹은 줄여서 탑(塔)이라고도 한다.
역사
탑의 기원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후 그 사리를 보관한 무덤인데, 이후 석가모니의 사리가 여러 지방으로 옮겨지면서 여러 형태의 탑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대부분 네모난 기단을 다지고 그 위에 봉분에 해당하는 둥근 구조물을 얹고 다시 그 위에 우산 모양의 상륜부를 얹은 당시 인도의 무덤 형태를 따랐다. 이 구조는 탑이 중국으로 전파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중국의 목조건축양식 혹은 벽돌건축양식과 만나 둥근 구조물과 상륜부는 축소되어 탑의 지붕 위에 장식처럼 얹히게 되었다. 이들을 각각 목탑양식, 전탑양식이라 부른다. 이 두 양식이 다시 한국으로 전해져 황룡사, 미륵사, 분황사의 탑이 만들어졌고 다시 두 양식이 혼합되어 한국 고유의 석탑양식이 만들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감은사와 불국사의 탑이다. 석탑양식은 고려조까지 계속 이어졌고 고려 중기 이후 원의 영향으로 경천사 십층석탑 등이 만들어졌다. 일본으로 전파된 탑은 목조건축이 발달한 일본의 문화에 따라 목탑양식이 그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사리
탑은 본래 석가모니의 사리인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탑의 수가 늘어나자 한정된 수의 진신사리로는 수요에 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법신사리(法身舍利)로써 진신사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1] 법신사리는 불경·불상·옷·발우·지팡이·좌구(坐具)·보석 등이 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모래·풀·대나무·나뭇가지도 될 수 있다.[2]
구조
탑은 그 역사에서 비롯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구조를 가지는데 가장 아래쪽의 기단부와 탑의 몸체를 이루는 탑신부,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상륜부가 그것이다.
기단부는 다시 상대기단과 하대 기단으로 나누어지는데 경우에 따라 하대 기단은 생략되기도 한다. 탑신부는 탑의 중심이 되는 부분으로 탑의 층수를 결정한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용주, 보좌 등등의 여러 부분으로 세분된다.
인도의 스투파, 초기의 무덤 양식의 불탑
*한국의 왕릉급 무덤보다 위엄이 느껴진다.
아소카(𑀅𑀲𑁄𑀓, 산스크리트어:अशोकः 아쇼카)는 마우리아 제국의 제3대 삼라트(황제)이다.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함으로써 마우리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건설
아소카왕은 마우리아 왕조를 창건한 찬드라굽타의 손자로, 왕자 시절부터 부왕(父王) 빈두사라의 팽창 정책을 도와 명성을 쌓아 나갔다. 즉위 후 8년이 되었을 때 동남 벵골만 해안에 위치한 칼링가(Kalinga)국을 무력으로 정복하였다. 이로써 마우리아 왕조는 제3대 아소카왕 시대(약 기원전 273~232년)에 전성기를 맞았다. 아소카왕 시대에 제국의 판도는 서쪽으로는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동쪽으로는 오늘날의 방글라데시와 인도 아셈주 지역, 남쪽으로는 타밀나두 지역을 제외한 인도 남부 케랄라주에 이르렀다. 남부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사실상 인도아대륙(亞大陸) 전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한 것이다.[2]
호불(護佛) 정책
무력에 의한 정복전쟁이 불러온 참상에 죄책감을 느낀 아소카왕은 무력정복 방침을 버리고 불법(darma)에 의한 덕치주의(德治主義)를 추구하였다. 그는 상용어인 팔리(Pali)어로 된 불경을 수집하고 10년간 불교 유적지를 순례하면서 도처에 불탑을 세우고 불법을 역설하였다. 또한 정책이나 칙령·법령 등을 새긴 석주(石柱)를 전국 30여 소에 세웠다. 높이 40~50척(13~16m)에 무게가 최소한 50~60톤이나 나가는 이 석주는 뛰어난 조각예술로 장식되었다. [3]이는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 제국인 마우리아 왕조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유물이자, 오늘날 인도를 대표하는 국가 상징이기도 하다.[4]
아소카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무엇보다도 불교를 지방(북인도) 종교에서 세계적 종교로 격상시킨 것이다. 그는 스리랑카, 미얀마,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 그리스, 북아프리카 등 유라시아 여러 지역과 나라에 불교 포교단을 파견하였다. 특히 스리랑카에는 두 차례나 왕자 마헨드라(Mahendra)와 딸 산가미트라(Sanghamitra)를 파견해 포교에 성공하였다. 이로 인해 스리랑카는 남방불교(소승불교)의 근거지가 되어 여기서부터 미얀마, 타이, 수마트라, 자바 등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불교가 전파되었다.[5]
황룡사 건축
경주 황룡사 건축 당시 아소카왕과 관련된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해져 내려온다. 573년(신라 진흥왕 34) 3월 하곡현(河曲懸) 사포(絲浦)에 서역에서 온 큰 배가 닿았다. 이 배에는 인도의 아소카왕이 보낸 편지와 황금 3만푼, 황철 5만7,000근이 실려 있었다. 편지에는 아소카왕이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황금과 황철을 배에 띄워 보내면서 인연 있는 국토에 가서 장육존상이 되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배에는 장육상의 모형 불상도 함께 실려 있었다. 이에 왕은 황금과 황철로 황룡사 장육존상을 만들었으며, 모형 불상은 사포 동쪽 부근의 깨끗한 곳을 골라 절을 짓고 모셨다.[6]
[논문]
https://koreascience.kr/article/JAKO201117057862044.pdf
불탑의 의미와 어원
천 득 염* (전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