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열하일기

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熱河日記) -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은인자중 2023. 7. 13.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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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태학유관록(太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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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전편(前篇) 9일 을묘(乙卯)를 계속하여 14일 경신(庚申)에 그쳤다. 모두 엿새 동안이다.

 

1. 가을 8 9일 을묘(乙卯)

2. 10일 병진(丙辰)

3. 11일 정사(丁巳)

4. 12일 무오(戊午)

5. 13일 기미(己未)

6. 14일 경신(庚申)

 

 

 

가을 8 9일 을묘(乙卯)

 

 

사시(巳時)에 태학(太學)에 들었다. 사시 이전의 일은 이미 길에서 적었고, 사시 이후의 것은 관()에 머무른 일을 기록하기로 했다. 이날 몹시 더웠다. 말에서 내려 곧 후당(後堂)으로 들어섰다. 한 노인이 모자를 벗고 교의에 걸터앉았다가 나를 보고 교의에서 내려,

 

수고하십니다.”

하며 맞이한다. 나도 읍하여 답례하고 좌정한 뒤, 노인이 내게,

 

벼슬이 몇 품()이나 되시는지요.”

하고 묻기에, 나는,

 

선비의 몸입니다. 귀국에 관광차로 삼종형(三從兄) 대대인(大大人)을 따라 이곳에 온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정사를 대대인이라 하고, 부사를 얼대인[乙大人]’이라 하니, []은 둘째라는 의미였다. 그는 또 나에게 성명을 묻기에 써 보이니, 그는 또,

 

영형(令兄) 대인의 존명(尊名)과 관직과 품계(品階)?”

하고 묻기에, 나는,

 

명함은 □□□(박명원(朴明源))이요, 일품(一品), 부마(駙馬), 내대신(內大臣)이어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는 또,

 

영형(令兄) 대인께선 한림(翰林) 출신이십니까?”

하므로, 나는,

 

아니어요.”

하였다. 노인이 붉은 명함 한 장을 내어 보이며,

 

저는 이와 같습니다.”

한다. 오른편에 가는 글씨로,

 

통봉대부(通奉大夫 종삼품(從三品)) 대리시경(大理寺卿) 치사(致仕) 윤가전(尹嘉銓).”

이라 씌어 있다. 나는,

 

()이 이미 공사(公事)를 그만두셨다면 무슨 일로 멀리 변새 밖에 나오셨나요?”

하였더니, 그는,

 

황제의 명을 받들었답니다.”

한다. 또 한 사람이,

 

저 역시 조선 사람이올시다. 천명(賤名)은 기풍액(奇豊額)이옵고, 경인년(庚寅年 1770)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현재 귀주 안찰사(貴州按察使)로 근무 중입니다.”

한다. 윤공(尹公),

 

이제 사해(四海)가 한 집안이라, 문을 나서면 모두 동포 형제가 아니옵니까. 고려의 박인량(朴寅亮)이 혹시 존문(尊門)의 명망 높은 어른이 아니시옵니까.”

하기에 나는,

 

아닙니다. 주죽타(朱竹坨) 채풍록(採風錄) 중에 나타난 ( 박미(朴瀰))라는 어른이 저의 5대조(代祖)랍니다.”

했더니, 기공(奇公),

 

과연 문망(文望)이 높으신 상경(上卿)이시구려.”

하고, 윤공은 또,

 

왕어양(王漁洋) 지북우담(池北偶談) 중에 그 어른의 시문(詩文)을 상세히 실었습니다. 이른바 제비와 기러기가 서로 등지고,말과 소도 상관이 없는 곳이었는데, 이제 하늘이 주신 연분이 공교로워 이곳 새북(塞北)에서 평수(萍水)의 종적이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이는 곧 책에 나오는 어른의 후손이구려.”

한다. 좌중에 있던 한 사람이 감탄하는 어조로,

 

그의 시를 읊고 그의 책을 읽고도 그의 인품을 몰랐다니 될 일입니까.”

한다. 기공은,

 

비록 옛 어른은 가셨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의 전형(典刑)은 남아 있지 않소.”

하며, 이어서,

 

귀국의 연사(年事)는 어떻습니까.”

한다. 나는,

 

유월에 압록강을 건너서 가을이 아직 멀었으므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올 때엔 우순풍조(雨順風調)하였습죠.”

하였다. 좌중(座中)에 또 한 사람은 성명이 왕민호(王民皥)라는 거인(擧人)이다. 그는,

 

조선은 땅이 얼마나 너릅니까.”

한다. 나는,

 

옛날 기록에는 5천 리라 하였지만, 단군의 조선은 당요(唐堯)와 한 때였고, 기자(箕子)의 조선은 주 무왕(周武王 희발(姬發)) 때에 봉한 나라였으며, 위만(衛滿)의 조선은 진() 때에 연()의 백성들을 이끌고 피란왔기에 모두들 부분적으로 한 쪽만을 점유하였으니, 땅이 5천 리가 다 차지 못하였을 것이며, 전조(前朝) 때엔 고구려백제신라 등을 합하여 고려가 되었으니, 동서가 천 리요 남북이 3천 리였습니다. 중국의 역사책 중에 조선의 민물(民物)과 요속(謠俗)을 적은 것이 실지와 달라서, 모두 기자위만 때의 조선이요, 오늘의 조선은 아닙니다. 그리고 역사를 쓴 이가 대체로 외국 일은 간략하게 하므로, 한갓 옛날의 기록을 좇을 따름이었으나, 그 토풍(土風)과 국속(國俗)이란 제각기 시대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오로지 유교(儒敎)를 숭상하여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모두 중화(中華)를 본받았으므로, 예로부터 소중화(小中華)’라는 이름이 있었으며, 나라의 규모라든가 사대부(士大夫)의 행신범절이 전혀 조송(趙宋)과 다름없습니다.”

했더니, 왕군(王君),

 

군자지국(君子之國)이라 할 만하구려.”

하고, 윤공은,

 

아아, 찬란하게도 태사(太師)의 유풍(遺風)이 남았으니 가히 존경할 만하구려. 시종(詩綜)에 실려 있는 영존선공(令尊先公)께서는 어째서 소전(小傳)이 없었는지요.”

하기에, 나는,

 

비단 우리 선인(先人)의 자호와 관작이 빠졌을 뿐만 아니고, 그 중 소전이 있다는 이도 대개가 잘못된 것이 많습니다. 저의 5대조의 휘()는 미(), 자는 중연(仲淵)이며, 호는 분서(汾西)라 하여, 문집 네 권이 국내에서 간행되어 있고, ()의 만력(萬曆) 때 어른이시며, 소경왕(昭敬王)의 부마(駙馬)로 금양군(錦陽君)이요,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라 합니다.”

했다. 윤공은 이를 품속에 거둬 넣으며,

 

이것으로 빠진 곳을 보충하여야죠.”

하고, 왕 거인(王擧人),

 

여느 잘못된 곳도 바로잡아 주셔야죠.”

하고, 기공도,

 

옳습니다. 이는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입니다.”

한다. 나는,

 

나는 본디 기억력이 분명하지 못해서 책을 놓고 고증(攷證)했으면 좋겠습니다.”

했다. 기공이 왕 거인을 돌아보며 무어라 수작하고, 윤공 역시 서로 이야기한 끝에, 이윽고 왕 거인이 곧 명시종(明詩綜)’이란 석 자를 써서,

 

이리 오너라.”

하고 부르자, 한 청년이 앞에 와 절한다. 왕 거인이 그 종이쪽지를 주니, 청년이 받아 들고 재빨리 어디로 가버린다. 아마 다른 곳에 빌리러 보냄인 듯하다. 그 청년이 곧 돌아와 꿇어앉아서,

 

없습니다.”

한다. 기공이 또 한 사람을 불러 그 종이쪽지를 주자, 곧 돌아와서 무어라 말하니 왕 거인은,

 

새외(塞外)엔 워낙 책점이 없더군요.”

한다. 나는,

 

우리나라 이달(李達)이란 이가 있는데, 그의 호는 손곡(蓀谷)입니다. 이에 이달의 시()를 싣고, 또 따로 손곡의 시를 실었으니, 이는 그의 호를 보고서 딴 사람의 성명으로 잘못 알고 나누어 실은 모양입니다.”

했더니, 세 사람이 크게 웃고 서로 돌아보며,

 

옳아, 그렇구먼요. 치이(鴟夷)나 도주(淘朱)가 애초에 한 사람 범려(范蠡)이거든요.”

한다. 윤공이 갑자기 바삐 일어서면서 붉은 명함 석 장과 자기가 지은 구여송(九如頌)을 내어 주며,

 

선생의 수고를 빌려 영형(令兄) 대인께 뵈옵고자 하옵니다.”

하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일어서며,

 

윤대인(尹大人)께서 방금 조정에 나가시니 후일 다시 만납시다.”

한다. 윤공은 이미 모복(帽服)을 갖추어, 조주(朝珠)를 걸고, 나를 따라 나와서 정사의 방 앞에 이르렀다. 아까 문에서 나오는 길에 나는 아득히 그가 이곳에 들를 것을 몰랐었다. 대체 다른 사람들이 모두 윤공이 방금 조정에 나간다 하였을 뿐, 윤공의 명함 내놓는 것이 그같이 간솔하기로, 곧 나를 따라올 줄은 나도 생각지 못하였던 것이다. 정사는 밤낮으로 시달린 나머지 겨우 눈을 붙이었고, 부사와 서장관은 내가 소개할 바 아니며, 더욱이 우리나라 대부들은 생()으로 존귀한 체함이 대단하여, 중국 사람을 보면 만인(滿人)한인(漢人)의 구분도 없이 모두 휩쓸어 되놈으로 보고, 한갓 마음만 도도한 체하는 것이 애초부터 몸에 밴 습속이 되어 버렸다. 그가 어떠한 호인(胡人)이며 무슨 지체인지 알기 전에 벌써 그를 반겨 맞이할 리도 없거니와, 비록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필시 견양(犬羊)과 같이 푸대접할 것이며, 또한 나를 불긴하게 여길 것이다. 윤공이 뜰에 서서 기다리므로 일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내가 그제야 정사에게 들어가 말하였다. 정사는,

 

나 혼자서 만날 수는 없으니 어쩌면 좋을까.”

한다. 나는 몹시 늙은 손님이 뜰에 오래 서 있음을 딱하게 여겨서 나가,

 

정사께서 밤낮을 가리지 않으시고 먼 길을 오시느라 매우 피로하시므로 삼가 맞이하지 못하오니, 다른 날에 몸소 나아가 사례하려 하옵니다.”

하였다. 윤공은 곧,

 

그렇습니까.”

하고 한 번 읍하고 나가는데, 그 기색을 살펴보니 매우 머쓱한 모양이었으며, 표연히 가마를 타고 가버렸다. 그 가마 차림의 휘황찬란한 품이 참으로 귀인이 타는 것이다. 종자(從者) 10여 명이 모두 비단옷에 수놓은 안장을 하고 가마를 호위하고 가는데, 향내 바람이 멀리 풍기곤 한다.

통관이 당번한 역관에게,

 

귀국에서도 부처를 존경하는지요. 국내의 절은 얼마나 있죠?”.

하므로, 수역이 들어와 사신에게 여쭙되,

 

통관의 이 말은 허투루 하는 것이 아닌 듯하오니 무어라 대답하오리까.”

한다. 삼사가 의논하여 수역으로 하여금,

 

우리나라 습속에는 본디 부처를 숭배하지 않았으므로, 시골엔 혹 절이 있으나 서울이나 도회에는 없는 거요.”

하고 대답하게 지시하였다. 조금 뒤에 군기장경(軍機章京) 소림(素林)이 관중(館中)에 왔으므로, 삼사가 캉[]에 내려 동면으로 앉았다. 이는 지세를 따른 것이었다. 소림이 황제의 조서(詔書)를 입으로 전달한다.

 

조선 정사는 이품(二品) 끝의 반열(班列)에 서라.”

이는 진하(陳賀)하는 날의 조정에서의 좌차(座次)를 미리 일러 줌인데, 이는 전에 없던 일이라 한다. 그리고 소림은 나는 듯이 몸을 돌려 가버렸다. 또 예부(禮部)에서 관중에 말을 전해 왔다.

 

사신의 우반(右班)에 오름은 전례에 없는 은전(恩典)인즉, 의당 황감하옵다는 인사 절차가 있어야 할 것이니, 이 뜻으로 예부에 글월을 내면 곧 황제께 올리겠소.”

사신은 곧,

 

배신(陪臣)이 사신으로 와서 비록 황제의 지극하신 은총을 입사와 황감하기 그지없사오나, 사사로이 사례함은 도리에 어긋남일까 하오니 어떠하오리까.”

했더니, 예부에서,

 

무엇이 해롭겠소.”

하고 잇달아 독촉이 빗발치듯 한다. 황제는 나이가 높고 또 재위(在位)한 지 오래여서 권세가 한 손에 있고, 총명이 쇠하지 않았으며 기혈이 더욱 왕성하였다. 그러나 해내가 태평하고 임금의 자리가 점차 높아짐에 따라 시새우고 사납고 엄하고 가혹한 일이 많을뿐더러, 기쁘고 성냄이 절도가 없으므로 조정에 선 신하들은 모두 그때그때 잘 꾸며대는 것을 상책으로 삼고, 오로지 황제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만을 시의(時義)에 맞는 일인 줄로 알아, 이제 예부에서 정문(呈文)을 이다지 재촉하는 것도 대체로 그러한 의미에서 나온 일로서, 그들의 거조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 지시가 오로지 예부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당번 역관의 말이,

 

전년 심양에 사신갔을 때도 글월을 올려서 사례한 일이 있사온즉, 이번 일도 그와 다를 것이 없을 듯하오이다.”

한다. 이에 부사와 서장관이 서로 의논하여 글월을 만들어서 예부에 보내어, 곧 황제에게 바치게 하였다. 예부에서 또 내일 오경(五更)에 궐내에 들어가서 황은(皇恩)을 사례하게 하니, 이는 이품과 삼품으로 우반(右班)에 참하(叅賀)하게 된 은혜를 사례하라 함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 다시 윤공(尹公)의 우소(寓所)를 찾았더니, 왕군(王君)은 이미 다른 방으로 옮겨 갔고, 기공(奇公)은 중당(中堂)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윤공과 더불어 기공의 처소에서 이야기하였다. 윤공은 얌전하고도 소탈한 사람이다. 그는,

 

아까는 몹시 바빠서 이야기를 마치지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시종의 빠지고 잘못된 곳을 들려 주셔서 선배의 소루한 점을 보충하도록 하여 주시오.”

한다. 나는,

 

우리나라 선유(先儒)들은 바다 저 한 편 구석에서 나서 늙어서 병들어 죽도록 한 곳을 떠나지 못하고는, 반딧불처럼 나부끼고 버섯처럼 말라서, 겨우 하잘것없는 시편(詩篇)으로써 큰 나라의 책에 실리게 됨은 실로 영광스럽고 다행한 일이나, 우물에 떨어진 모수(毛遂)가 있는가 하면, 좌중을 놀라게 하던 진공(陳公)이 있다는 것은 불행히도 너무 지나친가 봅니다. 우리나라 선유(先儒) 중에 이선생 이()라는 어른이 있으니, 그의 호는 율곡(栗谷)이요, 또 이 상공(李相公) 정귀(廷龜)라는 이가 있으니, 그의 호는 월사(月沙)인데, 시종에는 이정귀의 호가 율곡이라 잘못 적혔고, 월산대군(月山大君)은 공자(公子)인데, 그의 이름이 ()’이므로 여자인 줄로 잘못 알았으며, 허봉(許篈)의 누이동생 허씨(許氏)는 호가 난설헌(蘭雪軒)인데, 그 소전(小傳)에는 여관(女冠 여도사(女道士))이라 하였으니, 우리나라엔 본디 도관(道觀)’이니 여관이니 하는 것이 없으며, 또 그의 호를 경번당(景樊堂)이라 하였으나, 이는 더욱 잘못된 일입니다. 허씨가 김성립(金誠立)에게 시집갔었는데, 김성립의 얼굴이 오종종하게 못생겼으므로 그 벗들이 그를 놀리어 그 아내가 두번천(杜樊川)을 연모한다 하여 조롱한 것입니다. 대개 규중(閨中)의 음영(吟詠)이 본시 아름답지 못한 일인데, 더욱이 두번천을 연모한다고 유전(流傳)하였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까.”

했다. 기 두 분이 모두 크게 웃었다. 문 밖에 아이놈들이 무슨 까닭인지도 모르고 모두 늘어서서 따라 웃는다. 이는 이른바 웃음소리만 듣고 따라 웃는다는 격이다. 알지 못하겠노라, 그들의 웃음이 무슨 일인지. 나 역시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영돌(永突)이 찾아왔으므로 일어서 나오니, 두 사람이 문 밖까지 나와 전송하여 주었다. 때마침 달빛이 뜰에 가득하고, 담 너머 장군부(將軍府)에서는 이미 초경(初更) 넉 점을 치는 야경 소리가 사방으로 울린다. 상방(上房)에 들어가니 하인들이 휘장 밖에 누워 코를 골고 정사도 이미 잠들었다. 짧은 병풍 하나를 격하여 나의 잠자리를 보아 놓았다. 일행 상하가 닷새 밤을 꼬박 새운 끝이므로 이제 깊이 잠든 모양이다. 정사 머리맡에 술병 둘이 있기에 흔들어 보니, 하나는 비고 하나는 차 있었다. 달이 이처럼 밝은데 어찌 마시지 않으리. 마침내 가만히 잔에 가득 부어 기울이고, 불을 불어 꺼버리고서 방에서 나왔다. 홀로 뜰 가운데 서서 밝은 달빛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할할하는 소리가 담 밖에서 들린다. 이는 낙타가 장군부(將軍府)에서 우는 소리였다. 드디어 명륜당(明倫堂)으로 나왔다. 나와 본즉, 제독과 통관의 무리가 각기 탁자를 끌어다 둘을 한데 붙여 놓고 그 위에서 잠들었다. 제 비록 되놈이기로 무식함도 심하다. 그 누워 자는 자리인즉, 곧 선성(先聖)선현(先賢)께 석전(釋奠)이나 석채(釋菜)를 거행할 때 쓰는 탁자인데, 어찌 감히 이를 침상으로 대용할 수 있으며, 또 어찌 차마 누워 잘 수 있으랴. 그 탁자들은 모두 붉은 칠을 하였는데 백여 개가 있었다.

오른편 행각에 들어가니, 역관 세 사람과 비장 네 사람이 한 구들에 누워 자는데 목덜미와 정강이를 서로 걸치고 아랫도리는 가리지도 않았다. 천둥소리처럼 코를 골지 않는 자가 없는데, 혹은 병을 거꾸러뜨려 물이 쏟아지는 소리요, 혹은 나무를 켜는데 톱니가 긁히는 소리였으며, 혹은 혀를 끌끌 차며 사람을 꾸짖는 시늉이요, 혹은 꽁꽁거려 남을 원망하는 정경이다. 만리 길을 함께 고생하고 와서 자나 먹으나 떠남이 없으매, 그 정분이야말로 친형제와 다름없이 사생을 같이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잠든 모습을 볼 때엔 한 자리에 꿈이 다르고, 그의 간담(肝膽)은 초()()처럼 먼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담뱃불을 붙이고 나오니, 개 소리가 표범 소리인양 장군부에서 들려 온다. 그리고, 야경 치는 소리가 마치 깊은 산중 접동새 소리같이 울렸다. 뜰 가운데를 거닐며, 혹은 달려도 보고 혹은 발자국을 크게 떼어 보기도 해서 그림자와 서로 희롱하였다. 명륜당 뒤의 늙은 나무들은 그늘이 짙고, 서늘한 이슬이 방울방울 맺혀서 잎마다 구슬을 드리운 듯, 구슬마다 달빛이 어리었다. 달 밖에서 또 삼경의 두 점을 쳤다. 아아, 애석하구나. 이 좋은 달밤에 함께 구경할 사람이 없으니, 이런 때에는 어찌 우리 일행만이 모두 잠들었으랴. 도독부(都督府)의 장군도 그러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도 곧 방에 들어가, 쓰러지듯이 베개에 머리가 저절로 닿았다.

 

 

[C-001]가을 : 이 위에 경자(庚子)’라는 두 글자가 있었으나, ‘박영철본에 의하여 삭제하였다.

[D-001]얼대인[乙大人] …… 의미였다 : 이 부분은 주설루본에 의거하였다. ‘박영철본에는 얼대인[二大人]’으로 되었다.

[D-002]대리시경(大理寺卿) : 최고 법원장(法院長)에 해당하는 벼슬.

[D-003]박인량(朴寅亮) : 고려 문종(文宗) 때 문장가로서, 송에 사신으로 가 문장으로써 이름을 날렸으므로, 송에서 그의 문집을 출판하기까지 하였다.

[D-004]주죽타(朱竹坨) : 주이준(朱彛尊). 죽타는 호.

[D-005]왕어양(王漁洋) : 어양은 왕사진(王士稹)의 호.

[D-006]제비와 …… 등지고 : 두 후조(候鳥)가 남북의 추향이 다름을 일렀다.

[D-007]말과 …… 곳이었는데 : 좌전(左傳), “풍마우(風馬牛)가 서로 미치지 못한다.” 하였는데, 풍은 주(), “암수가 서로 유인함이다.” 하였으니, 이는 초자(楚子)가 제후(齊侯)에게 보낸 말로써, 제와 초의 거리가 멀다는 의미.

[D-008]그의 …… 일입니까 : 맹자(孟子)에 나오는 구절(句節).

[D-009]조송(趙宋) :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의 성인 조()를 붙여서 다른 송과 구별하였다.

[D-010]태사(太師) : 기자(箕子)가 일찍이 은의 태사 벼슬에 있었다.

[D-011]시종(詩綜) : 명시종(明詩綜). 주이준(朱彛尊)의 저.

[D-012]소경왕(昭敬王) : 조선 선조(宣祖)의 시호.

[D-013]이달(李達) : 조선 중종(中宗) 때 시인. 자는 익지(益之).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과 함께 삼당(三唐)의 시파를 이룩하였다.

[D-014]구여송(九如頌) : 구여는 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편(天保篇)에 나오는 아홉 가지의 축복, 곧 여산(如山)여부(如阜)여강(如岡)여릉(如陵)여천방지(如川方至)여월항(如月恒)여일승(如日升)여남산수(如南山壽)여송백무(如松柏茂).

[D-015]배신(陪臣) : 제후(諸侯)의 대부가 천자를 대하여 스스로 일컫는 말.

[D-016]사사로이 …… 하오니 : 인신(人臣)은 외교(外交)가 없다는 의미.

[D-017]모수(毛遂) : 모수는 전국 때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의 식객(食客)으로, ()에 유세(遊說)하여 진()을 물리친 변사(辯士).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이가 우물에 빠졌다 한다.

[D-018]진공(陳公) : 진공은 곧 한()의 명사 진번(陳蕃). 자는 유자(孺子). 그가 일찍이 재명(才名)이 있어서 좌객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와 같은 이름을 지닌 이가 있었다.

[D-019]이선생 이() : 이이를 말한다.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정치 이론가. 자는 숙헌(叔獻).

[D-020]이상공(李相公) 정귀(廷龜) : 이정귀를 말한다. 조선 선조 때의 정치가문학가. 자는 성징(聖徵).

[D-021]월산대군(月山大君) : 조선 성종(成宗)의 형. 월산은 봉호. 자는 자미(子美).

[D-022]허봉(許篈) : 조선 선조 때 문학가. 자는 미숙(美叔). 허균(許筠)의 형.

[D-023]허씨(許氏) : 조선의 탁월한 여류 문학가 허초희(許楚姬).

[D-024]두번천(杜樊川) : ()의 풍류 미남으로 유명한 시인 두목(杜牧). 번천은 호요, 자는 목지(牧之).

[D-025]두번천을 …… 않으리까 : 허씨의 호 경번은 번천을 연모한 것이 아니라 옛 선녀(仙女) 번부인(樊夫人)을 연모한 것이다. 연암이 이에 대해서 명확히 밝히지 않음이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D-026]웃음소리만 …… 웃는다 : 우리나라 속담.

[D-027]역관 세 사람 : 홍명복조달동윤갑종.

[D-028]비장 네 사람 : 주명신정창준이서귀조시학.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0일 병진(丙辰)

 

 

개다.

영돌이 나를 깨웠다. 당번 역관과 통관이 모두 문 밖에 모이어, 연방 때가 늦었다고 재촉한다. 나는 겨우 눈을 붙였다가 떠드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야경 소리가 아직도 들려 온다. 노곤한 몸에 달콤한 졸음으로 꼼짝하기 싫은데, 아침 죽이 머리맡에 놓여 있다. 억지로 일어나서 따라가 보니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가 있다. 등불 빛에 좌우의 시전(市廛)이 보이나, 연경보다는 어림없고 심양요동에도 미칠 수 없었다.

() 밖에 이르렀으나, 날이 오히려 새지 않았으므로 통관이 사신을 인도하여 큰 묘당에 들어 쉬게 하였다. 이는 지난해 새로 세운 관제묘(關帝廟)이다. 중첩된 누각과 깊은 전당, 굽은 행각, 겹친 곁채들의 조각이 공교롭고 단청이 어리어리하다. 중들이 모여들어 서로 다투어 구경하고 있다. () 안에는 이곳저곳에 연경의 벼슬아치들이 와서 머물러 있고, 왕자(王子)들도 이 속에 많이 와 붙여 있다 한다.

당번 역관이 와서,

 

어제 예부에서 알린 것은 다만 정사와 부사의 사은(謝恩)만을 말하였으니, 이는 대저 황제가 명을 내려 정사부사만을 우반(右班)에 승참(陞叅)하게 함이며, 따라서 그 은혜를 사례하는 것이므로 서장관은 사은하는 일이 없을 듯하다.”

한다. 이에 서장관은 관제묘에 머물고, 정사와 부사는 궐내로 들어갈 제 나도 따라 들어갔다. 모든 전각에는 단청을 꾸미지 않았고,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 편액을 붙였는데, 오른편 곁채에 예부 조방(朝房)이 있어서 통관이 이에 인도한다. 한인(漢人) 상서(尙書) 조수선(曹秀先)이 교의에서 내려와 정사의 손을 잡고 매우 반기는 뜻을 보이며,

 

대인(大人)은 앉으시죠.”

한다. 사신은 손을 들고 사양하여 주인이 먼저 앉기를 청하였으나, 조공(曹公) 역시 손을 들어 연방,

 

대인께서 먼저 앉으시죠.”

한다. 사신은 굳이 사양하기 4, 5차에 이르렀으나, 조공은 더욱 사양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정사와 부사가 할 수 없이 먼저 캉[]에 올라앉았다. 그런 다음에야 조공이 비로소 교의에 걸터앉아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 사신의 의관 그의 모복(帽服)에 비기면 가위 풍채로운 선인(仙人)이라 할 수 있겠으나, 말이 통하지 못하고 행지(行止)가 서툴러서 수어 수작이 저절로 뻣뻣하고 서먹하여, 저네들의 세련되고 은근한 솜씨에 비기면 그 생경(生硬)함이 도리어 중후한 태도를 갖게 된다. 정사는,

 

서장관의 거취(去就)는 어떻게 하오리까.”

하였더니, 조공(曹公),

 

오늘 사은엔 함께 할 것이 아니고, 후일 하반(賀班)에는 함께 나와도 좋겠습니다.”

하고는 곧 일어선다. 통관이 또,

 

만인(滿人) 상서(尙書) 덕보(德甫)가 들어옵니다.”

하기에, 사신이 문에 나와서 맞아 읍하니, 덕보 역시 읍하여 답례하고 발을 멈추어,

 

행리(行李) 무양(無恙)하신지요. 어제 황상께서 내리신 각별한 은총을 잘 아시는지요.”

하므로, 사신은,

 

황은(皇恩)이 거룩하와 영광이 그지없소.”

하였다. 덕보는 웃으면서 무어라 지껄였으나, 그 말소리가 목에 걸리는 듯 꺽꺽하여 ()’인지 ()’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대개 만주 사람들의 말은 이 따위가 일쑤이다. 그도 말을 마치고 곧 가버린다. 내옹관(內饔官)이 찬() 세 그릇을 내어 왔는데, 설기와 돼지고기 적과 과실 들이다. 떡과 과실은 누런 쟁반에 담고, 돼지고기는 은쟁반에 담았다. 예부낭중(禮部郞中)이 곁에 있다가,

 

이는 황제의 아침 찬에서 세 그릇 물려 온 것이오.”

한다. 얼마 안 되어 통관이 사신을 인도하여 전문 밖에 나아가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고 돌아온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와서 읍하며,

 

이번 황은(皇恩)이야말로 망극하오이다.”

하고, 그는 또,

 

귀국은 의당 예단(禮單)을 더 보내야 할 것이오. 그러면, 사신과 종관(從官)에게도 두 번째로 상품이 내릴 것이리다.”

한다. 그는 곧 예부 우시랑(禮部右侍郞) 아숙(阿肅)인데, 만주 사람이었다. 사신은 조방(朝房)에 다시 들고, 나는 먼저 나왔다. 대궐 밖에는 수레와 말이 빽빽이 들어섰는데, 말은 모두 담을 향하여 즐비하게 늘어섰으되 굴레도 없고 고삐도 없는 것이 마치 나무로 만들어 세운 것 같았다. 문 밖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서는데, 지껄이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모두들,

 

황자(皇子)가 오시는 거요.”

한다. 한 사람이 말을 탄 채 궐내로 들어가는데,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가는 것이었다. 이가 소위 황륙자(皇六子) 영용(永瑢)이다. 흰 얼굴에 얽은 자욱이 낭자하고, 콧날은 낮고 작으나 볼이 몹시 넓으며, 흰 눈에 눈자위가 세 거풀 지고, 어깨가 넓고 가슴이 떡 벌어져서 체격이 건장하긴 하나, 전혀 귀기(貴氣)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글을 잘하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여, 지금 사고전서(四庫全書) 총재관(總裁官)이며, 민망(民望)이 그에게 쏠린다 한다. 내 일찍이 강녀묘(姜女廟)에 들어갔을 때, 그 벽 위에 황삼자(皇三子)와 황오자(皇五子)의 시()를 깊이 간직한 것을 보았다. 황오자의 호는 등금거사(藤琴居士)라 하며, 시가 몹시 쓸쓸하고 글씨마저 가냘파서, 재주는 있으나 황왕가(皇王家)의 부하고 귀한 기상이란 엿볼 수 없었다. 그리고, 등금거사는 호부 시랑(戶部侍郞) 김간(金簡)의 생질이요, ()은 상명(祥明)의 종손(從孫)이다. 상명의 조부는 본시 의주(義州) 사람으로 중국에 들어갔으며, 상명은 벼슬이 예부 상서에 이르렀고, 옹정(雍正) 때 사람이다. ()의 누이동생이 궁중에 들어가서 귀비(貴妃)가 되어 총애를 받았었다. 건륭제의 뜻은 다섯째 아들에게 뒷일을 맡기려 하였는데, 연전에 일찍 죽어 버리고 지금은 영용이 총애를 독차지하여서, 지난해에 서장(西藏)에 가서 반선(班禪)을 맞아 왔다 한다. 그 죽은 아들이 읊은 시()는 뜻이 몹시 스산하고, 그 남은 아들의 것도 귀기(貴氣)가 전혀 없으니, 폐하(陛下)의 집안 일이 어찌 될지 모를 노릇이다.

가산(嘉山) 사람 득룡(得龍)은 마두로 연경에 드나든 지 40년이어서 중국말에 능숙하였다. 이 날 많은 사람 중에서 멀리 나를 부르기에 사람들을 밀치고 가보니, 마침 한 늙은 몽고왕(蒙古王)과 서로 손잡고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몽고왕은 모자에 홍보석(紅寶石)을 달고 공작(孔雀)의 깃을 꽂았으며, 나이는 여든 하나요, 키가 거의 한 길[6]이나 되는 장신인데, 허리가 구부러지고, 얼굴 길이는 한 자 남짓한데, 검은 바탕에 회백색이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체머리를 흔드는 것이 아무런 보잘것이 없어 마치 금방 거꾸러지려는 썩은 나무등걸 같은데, 전신의 원기(元氣)가 모두 입으로 나오는 듯하다. 그 늙은 모양이 이러하니, 그가 설사 묵돌(冒頓)일지라도 두려울 것이 못 된다. 따른 자가 수십 명이건만 부축하지도 않는다. 또 한 몽고왕이 있는데, 건장하고 기운이 세어 보이기에 득룡과 함께 가서 말을 붙이니, 그는 내 갓을 가리키며 무엇인지 묻고는 말도 채 알아듣지 못한 사이에 가마를 타고 휭 가버린다.

득룡이 그들 귀인(貴人)마다 찾아가서 읍하고 말을 붙이니, 모두 읍으로 답례하며 대꾸하여 준다. 득룡이 나더러도 저와 같이 해 보라 하나, 내 처음 배워서 어색할뿐더러, 또 관화(官話)가 서툴러서 어찌할 수 없었다. 곧 관제묘에 들어간즉, 사신이 이미 나와서 옷을 갈아 입고 있었다. 드디어 함께 관()으로 돌아왔다.

아침 식사가 끝난 뒤에 후당(後堂)으로 들어갔다. 왕 거인(王擧人) 민호(民皥)가 나와 맞는다. 왕 거인의 호는 혹정(鵠汀)이었으며, 산동도사(山東都司) 학성(郝成)과 한 구들에 거처한다. ()의 자는 지정(志亭)이요, 호는 장성(長城)이라 한다. 혹정이 우리나라 과거제도를 물으면서,

 

어떠한 문자로 무슨 글을 지어 바치는지요.”

하기에, 나는 약간 그 대략을 일러 주었다. 그는 또 혼인에 대한 예식을 묻기에, 나는,

 

()()()()는 모두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따릅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가례는 주부자(朱夫子)가 완성하지 못한 책이므로, 중국에서도 반드시 이것만을 좇지는 않습니다.”

하고, 그는 또,

 

귀국의 아름다운 점 몇 가지를 들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기에, 나는,

 

우리나라가 비록 바다 한쪽 구석에 자리잡았으나, 역시 네 가지 좋은 점이 있답니다. 온 나라 풍속이 유교(儒敎)를 숭상함이 첫째요, 땅에 황하(黃河)처럼 큰 수해의 걱정이 없음이 둘째요, 고기와 소금을 다른 나라에서 빌리지 않음이 셋째요, 여자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함이 넷째 좋은 일입니다.”

하였다. 지정(志亭)이 혹정을 돌아보며 서로 무어라 중얼중얼하더니, 이윽고 혹정은,

 

진실로 좋은 나라이구려.”

하고, 지정은,

 

여자가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니, 온 나라가 모두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한다. 나는,

 

온 나라의 미천한 농사백성이나 하인들까지 모두 그러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명색이 사족(士族)이라 하면, 비록 아무리 가난하고 또 삼종(三從)의 길이 이미 끊어졌다 하더라도, 평생 과부의 절개를 지켜 변하지 아니하며, 이러한 기품이 비복하천에게까지도 미쳐서, 저절로 풍속을 이룬 지 4백 년이 되었습니다.”

하였더니, 지정은,

 

금령(禁令)이 마련되어 있습니까.”

하기에, 나는,

 

별로 드러난 금령은 없습니다.”

하였다. 혹정은,

 

중국에서도 이 풍속이 막심한 폐단을 이루어서, 어떤 이는 납채(納采)만 하고 초례(醮禮)를 이루지 않았다거나, 성례만 하고 아직 첫날밤을 치르지 아니하였는데도, 불행히 사고가 있으면 평생토록 과부의 절개를 지켜야 하는데, 이런 건 오히려 나은 편이고, 심지어는 세의(世誼)가 두터운 집 사이면 아이가 뱃속에 들었을 때 이미 언약한다거나, 또는 더벅머리 때 부모끼리 말이 있었다가 불행하면, 독약을 마시거나 목을 매어서 같이 따라 합장되기를 구하니, 이는 예()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므로, 군자(君子)들은 그런 것을 시분(尸奔)이라 기롱하기까지도 하고, 또는 절음(節淫)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국법(國法)으로 이를 엄격히 단속하여 그 부모에게 죄를 주기로 하였으나, 마침내 습속을 이루었으며, 동남 지방이 더욱 심합니다. 그러므로, 유식한 집안에서는 여자가 성년(成年)이 된 뒤에 비로소 혼인을 말하니, 이는 요즈음 일입니다.”

한다. 나는,

 

유계외전(留溪外傳)에 보면, 효자가 간()을 내어서 그 어버이의 병을 낫게 한 일이 있으며, 조희건(趙希乾 명말의 저명한 효자)은 가슴을 뻐개고 염통을 꺼내다가 잘못 그 창자에 한 자 남짓 생채기를 내면서 이를 끊어 삶아서 그 어머니의 병을 고쳤으나, 나중에 그 상처가 아물어 아무런 일이 없었다 하니, 이를 본다면 손가락을 끊었다든지 똥을 맛보았다 함은 오히려 대단하지 않은 일이었으며, 눈 속에서 죽순(竹筍)을 캐내었다거나 얼음 구멍에서 잉어[鯉魚]를 잡았다거나 하는 일들도 어리석은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이런 일이 많습죠.”

하고, 지정은,

 

최근에도 산서(山西)에서 어떤 효자의 정문(旌門)을 세웠다는데, 그 일인즉 이상하더군요.”

하고, 혹정은 또,

 

눈 속에서 죽순을 캐고 얼음 구멍에서 잉어를 잡은 일이 진실이라면, 이는 천지의 기운이 온통 문란해진 것이지요.”

하고는 서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지정은 또,

 

육수부(陸秀夫)가 임금을 업고 바다에 들어간 것과, 장세걸(張世傑 송말의 충신)이 향을 피워 배가 뒤집히기를 원한 것과, 방효유(方孝孺)가 그 십족(十族)의 멸함을 달갑게 받은 것과, 철현(鐵鉉)이 기름을 튀게 하여 사람을 데게 한 것 같음은 모두 범상하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렇지 않으면 족히 마음에 쾌하달 것이 못 되니, 뒷세상의 충신(忠臣)과 열사(烈士)가 되는 것도 그 역시 어려운 노릇입니다.”

하고, 혹정은,

 

천지가 개벽한 지 오래여서, 뛰어나게 쾌한 일이 아니면 이름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남화노선(南華老仙 장주(莊周))의 말에, ‘한숨지으면서 효도를 말하는 것이 된다.’ 함은 이를 두고 말함이었지요.”

한다. 나는,

 

아까 왕() 선생께서 천지의 기운이 온통 문란하다고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단술을 고아서 소주를 만든다면 전내기 술[]을 말할 수 없을 것이요, 입으로 담배를 피운다면 다시는 매운 맛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만일 깊이 꼬집고 캐어 말한다면, 절의(節義)를 배척하는 의론이 세상에 다시 일고 말 것입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또,

 

그렇습니다. 귀국 부인의 의관 제도는 어떠합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대강 저고리치마와 또 머리의 쪽찌는 법을 이야기하고, 원삼(圓衫)당의(唐衣) 같은 것은 탁자 위에 그 제도를 대충 그려서 보였더니, 두 사람이 모두 좋다 하였다. 지정은,

 

달리 약속한 곳이 있어서 잠시 나갔다 곧 돌아올 터이니, 선생께서 조금 더 앉아 계십시오.”

하고는 이내 일어나 버린다. 혹정은 지정을 극도로 칭찬하여,

 

그는 무인(武人)이기는 하지만, 문학이 넉넉하여 당세에 드문 사람입니다. 지금 사품(四品) 병관(兵官)이거든요.”

하고, 그는 또,

 

귀국 부인도 역시 발을 묶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아뇨, 중국 여자들의 활굽정이처럼 생긴 신은 차마 볼 수 없더군요. 휘뚱거리며 땅을 디디고 가는 꼴이, 마치 보리씨를 뿌리는 것처럼 외로 흔들고 오른쪽으로 기우뚱거려, 바람도 없는데 저절로 쓰러지곤 하니 이게 무슨 꼴이어요.”

하였더니, 혹정은,

 

이로 인하여 도륙을 당하였음은 가히 세운(世運)을 짐작할 수 있으리다. 전조(前朝) 명대(明代)엔 그 죄가 부모에게 미쳤고, 본조(本朝)에 와서도 이에 대한 금령(禁令)이 몹시 엄격하였으나, 끝끝내 이를 막을 수 없음은 대개 남자는 따르지만 여자는 따르지 말라는 때문이어요.”

한다. 나는,

 

모양이 흉하고 걸음이 불편한데, 왜 하필이면 그걸 합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만주 계집들과 한가지로 보일까봐 그런 게죠.”

하고는 곧 붓으로 지워 버리고 그는 또 이어서,

 

죽어도 고치지 않는답니다.”

한다. 나는,

 

삼하통주 사이에서, 늙은 거지 여인이 머리에 가득히 꽃을 꽂고 발을 싸맨 채 말을 따라오면서 구걸하는데, 마치 오리가 배불리 먹은 것처럼 뒤뚱뒤뚱 넘어질 듯하니, 내 보기에는 도리어 만주 여자보다도 흉하더군요.”

하였더니, 혹정은,

 

그러니까 삼액(三厄)이라 하였습죠.”

한다. 나는,

 

삼액이란 무슨 말씀이어요.”

하였더니, 혹정은,

 

남당(南唐) 때 장소랑(張宵娘)이 송궁(宋宮)에 사로잡혀 왔는데, 궁인(宮人)들이 모두 그 작은 발이 뾰족한 게 보기 좋다 하여, 다투어서 헝겊으로 발을 팽팽하게 싸매어, 마침내 풍속이 이룩되었답니다. ()의 시절엔 중국 여자들이 발을 싸맴으로써 스스로 표적을 삼았으며, ()에 이르러선 이를 금했으나 소용이 없었지요. 그러나 만주 계집들이 중국 여자들의 발 싸맨 것을 비웃어 회음(誨淫)이라 하지만, 이는 실로 억울한 일입니다. 이것이 족액(足厄)이오. 홍무(洪武) 때에 고 황제(高皇帝)가 가만히 신락관(神樂觀 도관(道觀)의 이름)에 거둥하여, 한 도사(道士)가 실로 망건(網巾)을 떠서 머리칼을 싸매는 것이 보기에 편리할 듯해서, 이를 빌려 거울 앞에서 써 보고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그 제도를 천하에 명령하였답니다. 그 뒤부터 말 갈기로써 실을 대신하여 꼭 졸라매어서 자국이 낭자하게 났으며, 이를 호좌건(虎坐巾)이라 함은 그 앞이 높고 뒤가 낮아서 흡사 범이 쭈그리고 앉은 것 같음을 이름이었고, 또 수건(囚巾)이라 함은 당시에도 벌써 이를 옳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어서 천하의 두액(頭額)이 모두 그물 속에 갇혔다 함이었으니, 대개 불편히 여긴 이가 많았던 것입니다.”

하고는 붓으로 내 이마를 가리키며,

 

이게, 두액(頭厄)이 아니어요.”

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그의 이마를 가리켜,

 

이 번쩍번쩍하는 건 무슨 액()이어요.”

하였다. 혹정은 별안간 슬픈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곧 천하두액(天下頭額) 이하의 글자를 모두 까맣게 지워 버리었다. 그리고 그는 또,

 

이 담배는 만력(萬曆) 말년에 양절(兩浙 절동(浙東)절서(浙西)) 사이에 널리 퍼졌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답답하고 취하여 넘어지게 하는 천하의 독초(毒草)입니다. 먹어서 배가 부른 것도 아니건만, 천하의 좋은 밭에 갈아서 이문(利文)이 좋은 곡식과 다름없고, 부인이며 어린아이들까지도 즐겨 피우지 않는 이가 없을뿐더러, 그 좋아하는 정도가 저 기름진 고기나 또는 차나 밥을 능가하더군요. 쇠끝과 불이 함께 입을 뜸질하니, 이 또한 세운(世運)이지요. 이보다 더한 변이 어디 있겠습니까. 선생께서도 이것을 즐기시는 편이지요.”

한다. 나는,

 

.”

하자, 혹정은 또,

 

저는 이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전에 한 번 시험삼아 피어 보았더니, 곧 취하여 쓰러질 것 같고 구역질이 나서 죽을 뻔했습지요. 이야말로 구액(口厄)이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아마 귀국에서도 사람마다 이를 피우겠죠.”

한다. 나는,

 

. 그러나, 부형이나 존장 앞에서는 감히 피우지 못합니다.”

하였다. 혹정은,

 

그럴 터이죠. 독한 연기를 피움이 남의 앞에서 불공(不恭)한 일이거든, 하물며 부형 앞에서이겠습니까.”

한다. 나는,

 

비단 그래서 그럴 뿐만 아니라, 입에 긴 대를 물고 어른 앞에 나아감은 몹시 거만스럽고 무례하기 때문이어요.”

하였다. 혹정은,

 

그럼, 토종(土種)입니까. 혹은 중국서 사가는 것입니까?”

한다. 나는,

 

만력 연간에 일본(日本)으로부터 들어와서, 지금은 토종이 중국 것과 다름없답니다. ()이 아직 만주(滿州)에 있을 때에, 담배가 우리나라에서 들어갔으며, 그 씨는 본시 일본으로부터 왔으므로 남초(南草)라 이른답니다.”

하였다. 혹정은,

 

이는 본시 일본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서양(西洋) 배편으로 온 것입니다. 서양 아미리사아(亞彌利奢亞 아메리카)의 임금이 여러 가지 풀을 맛보아서, 이것으로 백성들의 입병을 낫게 하였다죠. 사람은 비장(脾臟)이 토()에 속하였으므로, 허랭(虛冷)해서 습기가 차면 벌레가 생기고, 그것이 입에까지 번지면 당장에 죽는답니다. 이에 불로써 벌레를 쳐서, ()을 이기고 토()를 도와 장기(瘴氣)를 이겨 내고 습기를 덜어서 신효를 거두었으므로, 영초(靈草)라 일렀답니다.”

한다. 나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남령초(南靈草)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만일 그 신효함이 이와 같다면, 수백 년 동안에 온 세상이 다 함께 즐겨 피우는 것도 역시 운수가 그 사이에 있는가봐요. 선생의 이른바 세운이라 하심이 실로 좋은 말씀입니다. 만일 이 풀이 아니었더라면, 천하 사람이 모두 입창으로 죽었을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저는 담배를 즐기지 아니하여도, 나이 예순에 아직 입병이란 없고, 지정 역시 즐기지 않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대체로 허황하여 이익을 낚는 데 교묘하니, 어찌 그 말을 다 곧이 듣겠습니까.”

한다. 이윽고 지정이 돌아와서, 혹정의 필담 중에, ‘저는 담배를 즐기지 아니하여도 지정 역시 즐기지 않습니다라는 구절에 먹으로 동그라미를 치고,

 

그거 아주 독하지요.”

하고는 서로 웃었다. 나는 이에 하직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군기 대신(軍機大臣)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와서 전갈하기를,

 

서번(西番)의 성승(聖僧)에게 가보지 않겠느냐.”

하매, 사신은,

 

황제께서 작은 나라를 중국과 다름없이 보시니, 중국의 인사(人士)와는 스스럼없이 오가도 무방하지만, 여느 외국 사람과는 함부로 사귀지 못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법이오.”

하였다. 군기 대신이 가버린 뒤, 사신들은 얼굴에 수심을 띠었고, 당번 역관들은 황황히 분주하여 마치 숙취(宿醉)가 덜 깬 사람 같았다. 그리고 비장들은 공연히 성을 내어서,

 

황제의 일 괴악하거든. 반드시 망할 거야, 반드시 망하지. 오랑캐니까 그렇지. 명 나라 때야 어디 이런 일이 있었나.”

하고, 수역(首譯)은 백망(百忙) 중에서도 비장을 향하여,

 

춘추(春秋) 대의를 논할 때가 아닐세.”

하고 핀잔주었다. 얼마 아니 되어 군기 대신이 또 말을 달려와서 황제의 명령을 거듭 전갈하기를,

 

이는 중국 사람과 마찬가지니 즉시 가보라.”

한다. 이에 사신이 서로 의논하여, 혹은,

 

가보는 것은 결코 중난(重難)한 일이야.”

하고, 또는,

 

글을 예부에 보내어 이치로 따지자.”

하고, 당번 역관은 말끝마다,

 

, .”

할 뿐이었다. 나는 본시 한산한 몸으로서 구경할 뿐, 사행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간섭이 없었으려니와, 또 이때껏 내게 묻는 일도 없었다. 이때 내 마음속으로 하도 희한하여,

 

이는 참으로 좋은 기회이다.”

하고는, 또 손가락 끝으로 공중에 무수히 권주(圈朱)를 치며,

 

좋은 제목(題目)이다. 이런 때 사신이 만일 소장을 올린다면, 그 의로운 명성이 천하에 떨치어서 크게 우리나라를 빛내리로다.”

하고, 또 스스로 묻기를,

 

그렇다고 군사를 낼 것인가.”

하고, 또 스스로 답하기를,

 

이건 사신의 허물이니, 어찌 그 나라에 노여움을 옮길 것인가. 그러나, 사신이 그 빌미로 진( 운남의 별칭)( 귀주의 별칭)이니 운남(雲南)귀주(貴州)니 하는 곳으로 귀양살이가는 것쯤이야 하는 수 없는 일일 테지. 그리되면 내 혼자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 서촉(西蜀)과 강남(江南)의 땅을 내 곧 밟게 되리로다. 강남은 오히려 가깝되, 저 교주(交州 안남 하내(安南河內))니 광주(廣州 광동(廣東))니 하는 곳은 연경에서 만여 리 길이나 된다니, 내 구경이 이처럼 난만(爛漫)하여지리.”

하고, 하도 마음속으로 기뻐서 곧 밖으로 뛰어나가 동상(東廂) 밑에 서서 이동(二同)건량(乾糧)의 마두 이름 을 불러 내어,

 

얼른 술을 사오려무나. 너는 돈일랑 아끼지 말아라. 내 이제부터 너와 이별이다.”

하고, 술을 마시고 들어갔으나, 아직껏 의논이 정하여지지 않았는데, 예부의 독촉이 성화(星火) 같아서 비록 하원길(夏原吉)의 위풍(威風)일지라도 배겨 낼 수 없으므로, 안장과 말을 정돈하는 사이에 저절로 늦어져서 해가 이미 기울었다. 낮이 지나면서 날씨가 몹시 뜨거웠다. 행재소의 대궐문을 거쳐 성을 돌아서 서북으로 향해 반도 못 갔을 무렵에, 별안간 황제의 명령이 내렸다.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사신은 돌아가서 다른 날을 기다리라.”

이에 서로 돌아보며 놀라서 되돌아섰다.

소위 성승(聖僧)이란 서번의 승왕(僧王)인데, 호는 반선불(班禪佛)이요, 또 장리불(藏理佛)이라고도 하며, 중국 사람들은 거개 그를 존신(尊信)해서 활불(活佛)이라 일컫는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마흔두 대 전신(轉身)이라 하며, 전신(前身)은 중국에서 많이 태어났고, 나이는 지금 마흔셋이오.”

한다. 지난 오월 스무날에 열하로 맞아 와서, 따로 궁궐을 짓고 스승으로 섬기는 것이다. 혹은 이르기를,

 

그의 하인들이 많아서, 이곳에 들어온 뒤에 점차 떨어져 남았으나, 그를 따라온 자가 그래도 수천 명이 넘으며, 그들은 모두 비밀히 병장기를 감추고 있건만 황제만이 이를 깨닫지 못한다.”

한다. 이는 공연히 인심을 소란하게 하고자 하는 말인 듯싶다. 또 거리의 아이들이 부르는 황화요(黃花謠)는 이를 두고 말함이라 한다. 그리고 그 시()는 욱리자(郁離子)가 지은 것이다.

 

붉은 꽃 다 지고 누런 꽃 피는구나 / 紅花落盡黃花發

붉은 꽃이란 붉은 모자를 가리킴이었고, 몽고와 서번은 모두 누런 모자를 쓰는 것을 이름이었다. 또 한 노래에,

 

원래는 옛 물건이니 누가 정말 주인인고 / 元是古物誰是主

라 하였으니, 이 두 노래를 보건대 모두 몽고를 두고 부름이다. 몽고는 방금 마흔여덟 부가 강하고, 그 중 토번(吐番)이 가장 사납다. 토번은 서북의 호족(胡族)이었으며, 몽고의 별부(別部)로서 황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자였다.

박보수(朴寶樹)가 예부에 가서 일을 탐문하고 와 하는 말이,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나라는 예()를 알건만 사신은 예를 모르네그려.’ 하더군요.”

하고는 보수와 통관들이 모두 가슴팍을 치고 울면서,

 

우리들은 죽습네그려.”

하나, 이는 통관 무리들이 일쑤 잘하는 버릇이라 한다. 비록 털끝만한 작은 일일지라도, 황제의 명령이라면 문득 죽는다고 야로를 하기가 일쑤인데, 하물며 중로에서 돌아가라 함은 마음에 언짢음을 뜻함에랴. 또 예부에서 전하는 말 중,

 

()를 모르네.”

라는 구절은 곧 불평을 띤 말인즉, 통관들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도 공연한 공갈만은 아니겠으나, 그 거조가 흉측하고 왈패스러워 사람들로 하여금 요절하게 한다. 우리나라 역관들도 두렵긴 할 테지만, 조금도 까딱하지 않았다.

저녁에 예부에서 알려 오기를,

 

내일 식후에나 모레 아침결에 황제께서 사신을 만나보실 테니, 일찍 서둘러서 늦지 말라.”

한다. 저녁 뒤에 윤형산(尹亨山)을 찾았다. 마침 홀로 앉아서 담배를 피우다가, 손수 담아 불을 붙여서 내게 권하고는,

 

영형 대인께서 귀중하신 몸 안녕하십니까?”

한다. 나는,

 

황제 덕택에 별고는 없으시답니다.”

하였더니, 그는 또 계림유사(鷄林類事)를 묻기에 나는,

 

이는 열수(冽水) 지방의 방언(方言)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윤공(尹公)은 또,

 

귀국에 악경(樂經)이 있다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하는 중에 기공(奇公)이 와서 악경이란 글자를 보고는 역시,

 

귀국에 또 안부자(顔夫子 안회(顔回))가 지은 책이 있으나, 중국에 오는 사신(使臣)이 이 두 책을 지니고 오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지 못한다 하니, 정말 그렇습니까.”

한다. 나는,

 

공자가 계신데 안회(顔回)가 어찌 책을 지었으리까. 또 진() ()》ㆍ《()를 불살랐으니 어찌 악경만이 빠졌을 수 있으리까.”

하였더니, 기공은,

 

참 그럴 터이죠.”

한다. 나는 또,

 

중국은 문명(文明)이 집중되는 곳이니, 만일 우리나라에 참으로 이 두 가지 책이 있어서 가져 오려는 자가 있었다면, 이는 모든 신령이 두호할 일이거늘, 어찌 강물을 잘 건너지 못하였으리까.”

하였다. 윤공은,

 

옳은 말씀이어요. 고려지(高麗志)가 일본(日本)에서 나왔으니까요.”

하기에, 나는,

 

고려지라니, 몇 권이나 됩디까?”

하였더니, 윤공은,

 

난완(蘭畹) 무공련(武公璉)이 초() 청정쇄어(蜻蜓瑣語)에 고려서목(高麗書目)이 있습디다.”

한다. 기공이 나를 이끌고 나와서 달을 구경하는데, 이때 달빛이 낮같이 밝았다. 나는,

 

달 속에 만일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면, 달에서 땅을 바라보는 이 있어서, 그 난간(欄干) 밑에 비겨 서서 우리와 함께 땅의 빛이 달에 가득함을 구경할 터이죠.”

하였더니, 기공이 난간을 치면서 기이한 말이라 일컬었다.

 

 

[C-001]병진(丙辰) :  병진 두 글자는 일재본에 의하여 추록했는데, 다른 여러 본에는 탈락되었다.

[D-001]조방(朝房) : 조회하러 들어갈 때의 대기실.

[D-002]조수선(曹秀先) : 당시 예부 상서. 자는 빙지(氷持), 호는 지산(地山).

[D-003]덕보(德甫) : 소작락덕보(素綽絡德保). ()는 보()의 그릇된 것이다. 자는 중용(仲容).

[D-004]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 세 번 무릎을 꿇고 절하며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중국 최대의 경례.

[D-005]반선(班禪) : 서장의 국교인 라마교의 교주요, 최고 통치자. 다음 반선시말(班禪始末)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D-006]혹정(鵠汀) : ‘의 음은 흔히들 으로 읽었으나, 이제 원음을 따랐다.

[D-007]학성(郝成) : ‘의 음은 흔히들 으로 읽으나, 이에서는 원음을 좇았다.

[D-008]삼종(三從) : 의례(儀禮)에 나오는 말. 여자가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었을 때에는 아들을 따르는 것.

[D-009]시분(尸奔) : 시체를 따라서 음분(淫奔)하는 것.

[D-010]절음(節淫) : 절개를 구실로 한 서방질.

[D-011]똥을 맛보았다 : 남북조 시대 유검루(庾黔婁)의 고사.

[D-012]눈 속에서 …… 캐내었다 : 맹종(孟宗)의 고사.

[D-013]잉어[鯉魚]를 잡았다 : 왕상(王祥)의 고사.

[D-014]육수부(陸秀夫) ……  : 송말의 충신. 최후에 애산(厓山)에서 임금을 업고 바다로 들어갔다.

[D-015]방효유(方孝孺) …… 받은 것 : 명초의 학자. 자는 희직(希直). 연왕(燕王)의 즉위조서(卽位詔書)의 기안을 거부하고는, 온 집안이 학살당했다.

[D-016]철현(鐵鉉) …… 한 것 : 명초의 명장. 연왕에게 사로잡혀서 악형을 당했다.

[D-017]원삼(圓衫) : 옛날 여자 예복의 일종. 연두색 길에 자주색 깃을 달고 색동을 달아 지었다.

[D-018]당의(唐衣) : 역시 옛날 여자 예복의 일종. 거죽은 초록빛, 안은 다홍빛이고, 깃과 고름은 자주색이며, 앞은 짧고 뒤는 길게 지었다.

[D-019]남자는 …… 말라 : 청초에 한족이 만족에 대하여 십부종(十不從)을 부르짖었는데, 그 열 가지의 첫째가 곧, “남자는 그들을 따르되 여자는 따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D-020]남당(南唐) : 오대 때 남경에 수도를 정했던 나라.

[D-021]장소랑(張宵娘) : 남당 후주(後主)의 궁인. 초승달같이 작은 발로 금련(金蓮) 위에서 춤추어서 후주의 마음을 고혹하게 하였으나, 남당이 망하매 송에게 사로잡히었다.

[D-022]회음(誨淫) : 그 발의 좁은 것으로 모든 사내들의 음탕한 생각을 맹동시킬 수 있다는 것. 역경(易經), “여인이 얼굴을 곱게 차림은 음란을 지도하는 것이다.” 하였다.

[D-023]서번(西番)의 성승(聖僧) : 라마교 승려. 서번은 티베트를 중심한 중앙아시아 지방을 총칭해 부르는 지명. ‘은 다른 본에 으로 된 것이 있으나 그릇되었다.

[D-024]하원길(夏原吉) : 명의 홍무 때 명신. 다섯 조정을 역사(歷事)하였으며, 대신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D-025]전신(轉身) : 라마교에서 말하는 전생(轉生). 반선이 죽는 순간 국내 다른 집에서 아기로 다시 태어나면, 그 아기를 찾아 길러서 후계자로 삼는다 한다.

[D-026]욱리자(郁離子) : 명 유기(劉基)의 별호. 이내 그의 저서의 이름이 되었다.

[D-027]() : ‘()’ 원 나라라는 의미로도 통한다.

[D-028]계림유사(鷄林類事) : () 손목(孫穆)이 우리나라 고사(故事)를 적은 책. 계림은 경주(慶州)의 고호.

[D-029]공자가 …… 지었으리까 : 논어에 나오는 안회의, “선생님이 계시니 제가 어찌 죽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해학조로 이용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1일 정사(丁巳)

 

 

개다.

새벽에 사신이 궐내로 들어갔다. 덕상서(德尙書)가 사신과 인사를 나눈 뒤에,

 

내일은 의당 만나보시겠다는 명령이 내릴 것이나, 오늘 역시 반드시 없으리라고는 기필할 수 없겠은즉, 잠깐 조방(朝房)에 앉아서 기다리십시오.”

한다. 사신이 모두 조방에 들어간즉, 황제가 또 어찬(御饌) 세 그릇을 내리었는데, 그 내용은 어제 것과 같았다. 나는 궐문 밖에 나가서 천천히 걸어다니면서 구경하였다. 어제 아침보다 더 분답하여 검은 티끌이 공중에 가득하며, 길가 다방(茶房)과 주점(酒店)에 수레와 말이 들끓었다.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났으므로 속이 헛헛하여 혼자 사관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한 젊은 중이 준마(駿馬)를 타고서 흑단(黑緞)으로 만든 방관(方冠)을 쓰고 공단으로 지은 도포(道袍)를 입었는데, 얼굴도 아름답고 의관의 차림도 말쑥한 품이, 중인 것이 아까웠다. 의기가 양양하게 지나치다가, 아주 큰 노새를 타고 오는 한 사람과 만나 말 위에서 서로 손잡고 반기더니, 중이 별안간 성낸 빛을 띠었다. 그러다가 둘이 다 목소리를 높이더니 마침내 말 위에서 서로 때리었다. 중이 두 눈을 사납게 부릅뜨며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고, 또 한 손으로 머리를 팬다. 노새 탄 자는 몸을 기울이며 약간 비키더니, 모자가 떨어져서 목에 걸렸다. 그 역시 몸이 건장하고 머리와 수염이 약간 희끗희끗한데, 그 기색을 살피니 중에게 조금 꿀리는 모양이다. 둘이 서로 붙안은 채 안장에서 떨어져 땅에 뒹굴었다. 처음엔 노새 탔던 자가 중을 가로탔으나, 나중에는 중이 뒤쳐서 위에 올랐다. 제각기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어 서로 때릴 수는 없고, 다만 얼굴에 침을 뱉을 뿐이다. 노새와 말은 마주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둘이 한 덩어리가 되어 길을 굴러갈 뿐, 에워싸 구경하는 사람도 없고, 풀어 말리는 자도 없었다. 서로 쳐다보고 내려다보면서 헐떡헐떡할 뿐이다.

한 과일점에 들렀다. 마침 새로 난 과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노전(老錢 중국의 엽전(葉錢)) 일백(一陌) 열여섯 닢이 우리나라 한 돈에 해당된다. 으로 배 두 개를 사가지고 나오니, 맞은편 술집의 깃대가 헌함 앞에 펄럭이고, 은호(銀壺)주병(酒甁)이 처마 밖에 너울너울 춤을 춘다. 푸른 난간이 공중에 걸쳤고, 금빛 현판은 햇빛에 어린다. 좌우의 푸른 술기[酒旗]에는,

 

신선의 옥패 소리 이곳에 머물렀고 / 神仙留玉佩

공경의 금초구는 끌러서 주는구나 / 公卿解金貂

라 씌어 있다. 다락 밑에는 수레와 말이 몇이 놓여 있고, 다락 위에선 사람들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마치 벌과 모기 떼 같았다. 나는 발걸음 가는 대로 다락 위로 올라가니, 계단이 열둘이었다. 탁자를 사이에 놓고 교의에 앉아 혹은 서넛, 혹은 대여섯 사람들이 끼리끼리 둘러앉았는데, 모두 몽고나 회자(回子)들이요, 무려 수십 패였다. 몽고 사람의 머리에 쓴 것은 마치 우리나라 쟁반 같고, 모자가 없으며, 그 위에는 양털로 꾸몄는데 누렇게 물들였다. 혹은 갓을 쓴 자도 없지 않으나, 그 모양은 우리나라 전립(氊笠)과 같은데, 혹은 등()으로 하고, 혹은 가죽으로 하여 안팎에 금을 칠하고, 혹은 오색 빛깔로 구름무늬 같은 것을 그렸다. 모두 누런 웃옷에 붉은 바지를 입었고, 회자는 대체로 붉은 옷을 입었으나, 또한 검은 옷도 많았다. 붉은 전()으로 고깔을 만들어 썼으나, 모자가 너무 길어서 다만 앞뒤에 차양을 달았을 뿐, 그 모양이 마치 돌돌 말린 연잎이 물 속에서 갓 나온 것 같고, 또 약을 가는 쇠 연[鐵硏]과 같이 두 끝이 뾰족하여 가볍고 부박해서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내가 쓴 갓은 전립(氈笠) 이른바 갓이란 벙거지이다. 과 같은데 은으로 술을 새기고 꼭지에 공작 깃을 꽂았으며, 턱을 수정 끈으로 매었으니, 두 오랑캐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 것인가. 만주족이고 한족이고 간에 중국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다락 위에 없었다. 두 오랑캐들의 생김생김이 사납고도 더러워서, 올라온 것이 후회가 되기는 하나, 이미 술을 청했는지라 그 중 한 좋은 교의를 골라서 앉았다. 술심부름꾼이 와서,

 

몇 냥()어치 술을 마시렵니까?”

하고 묻는다. 여기서는 술 무게를 달아 파는 것이다. 나는,

 

넉 냥만 쳐 오려무나.”

하고 가르쳐 주었다. 심부름꾼이 가서 술을 데우려 하기에, 나는,

 

데워선 못 써. 찬 것 그대로 달아 와.”

했더니, 술심부름꾼이 웃으면서 부어 와서 먼저 작은 잔 둘을 탁자 위에 벌여 놓으므로, 나는 담뱃대로 그 잔을 쓸어 엎어 버리고,

 

큰 술잔을 가져 와.”

하여, 모두 부어서 대번에 다 들이켰다. 뭇 되놈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대개 내가 쾌하게 마시는 것을 장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중국의 술 마시는 법이 매우 얌전하여서, 비록 한여름에라도 반드시 데워 먹을뿐더러, 심지어 소로(燒露 소주)라도 끓이며, 술잔은 은행 알만한데도 오히려 이빨에 대어서 조금씩 마시고, 탁자 위에 남겨 두었다가 때때로 다시 마시며, 단번에 쭈욱 기울이는 법이 없고, 되놈들도 이와 같아서, 세속에서 이른바 큰 종지나 사발에 따라 마시는 일은 아주 없었다. 내가 찬 술을 달래서 넉 냥쭝을 단숨에 마신 것은, 이것으로 저들을 두렵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대담한 척하려 함이니, 이는 실로 겁쟁이 짓이요, 용기가 아니었다. 내가 찬 술을 달랄 때 여러 되가 이미 3()쯤 놀랐는데, 단번에 마시는 것을 보고는 크게 놀라서, 도리어 저쪽에서 나를 두려워하는 기색이다. 주머니에서 8푼을 꺼내어 심부름꾼에게 술값을 치러 주고 나오려는데, 여러 되가 모두 교의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한 번 앉기를 권하고는, 그 중 한 사람이 제 자리를 비워서 나를 붙들어 앉힌다. 저희는 호의로 하는 것이나, 나는 벌써 등에 땀이 배었다. 내 어릴 때 하인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술 먹는 것을 보았는데, 그 주령(酒令) 중에,

 

자기 집을 지나치면서도 들어가 본 적 없이 나이 일흔에 생남하고 보니, 등이 땀에 젖었구려.”

라는 구절이 있었다. 내 성미가 본디 웃음을 참지 못하므로, 사흘 동안 허리가 시큰거렸다. 오늘 아침에 만 리 변새에서 문득 뭇 되놈과 더불어 술을 마시매, 만일 주령을 세운다면 정말,

 

등에 땀이 솟는다.”

하여야 의당할 것이리라. 한 되놈이 일어나 술 석 잔을 부어 탁자를 두드리면서 마시기를 권한다. 나는 일어나 그릇에 남은 차()를 난간 밖에 버리고는, 그 석잔을 모두 부어 단숨에 쭈욱 들이켜고, 몸을 돌려 한 번 읍한 뒤 큰 걸음으로 층층대를 내려오는데, 머리끝이 으쓱하여 무엇이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나와서 길 가운데 서서 위층을 쳐다보니, 웃고 지껄이는 소리가 요란하다. 아마 내 말을 하는 모양이다.

사관에 돌아오니 점심때가 아직 멀었기에 윤형산(尹亨山)의 처소에 들렀더니, 조정에 나가고 없었다. 다시 기 안찰(奇按察)을 찾았으나, 역시 없었다.

또 왕혹정(王鵠汀)을 찾았더니, 혹정이 구정시집서(毬亭詩集序) 한 수()를 내어 보이는데, 글도 그리 잘 되지 못하였고, 또 전편이 오로지 강희 황제와 지금 황제의 성덕(盛德)대업(大業)을 기술한 것으로, 그들을 요순처럼 높인 것이 지나치게 번거롭다. 미처 다 읽기 전에 창대가 와서,

 

아까 황제께서 사신을 불러 보시고, 또 활불(活佛)을 가보라 하십니다.”

한다. 나는 밥을 재촉하여 먹고 의주 비장(義州裨將)과 함께 궐내에 들어가서 사신을 찾았으나, 이미 반선(班禪)의 처소로 가고 없었다. 곧 궐문을 나오니, 황륙자(皇六子)가 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문 밖에 매어 두고, 구종들과 더불어 바쁜 걸음으로 들어간다. 어제는 말을 탄 채 그대로 들어가더니, 오늘은 말에서 내리는 것이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다. 궁성을 끼고 왼편으로 돌아드니, 서북쪽 일대의 궁관(宮觀)과 사찰(寺刹)들이 면면이 눈에 들어온다. 혹은 너덧 층 누각도 있으니, 이는 이른바,

 

상강에 배를 타고 굽이굽이 돌아들 제 / 帆隨湘轉

형산 아홉 봉우리 그 얼굴 다 뵈누나 / 望衡九面

가 곧 이를 이름이리라. 군포(軍舖)가 있는 곳마다 숙위(宿衛)하는 장정들이 모두 나와서 구경하다가, 내가 혼자서 방황하고 있음을 보고 서로 다투어 서북쪽을 멀리 가리켜 준다. 그제서야 내를 끼고 가니, 물가에 흰 군막이 수천이나 있는데, 모두 수자리 사는 몽고병이었다. 또 북녘으로 눈을 돌려 멀리 하늘 가를 바라본즉, 두 눈이 별안간 어지러워진다. 반공에 우뚝 황금건물[金屋]이 솟았는데, 구름 속에 들어가 햇빛에 눈이 부신 까닭이다. 강에는 거의 1()나 되는 다리가 놓였으며, 난간을 꾸민 단청이 서로 어리었고, 몇 사람이 그 위로 다니는 것이 아련히 그림 같다. 이 다리를 건너고자 하니, 모래 위로 사람이 급히 오면서 손을 휘젓는 것이, 건너지 말라는 것 같다. 마음은 몹시 바빠서 말을 곧장 채찍질하였으나, 오히려 더딘 것 같으므로 마침내 말에서 내려 강을 따라 올라가니, 돌다리가 있고 그 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오가기에 문을 들어서니, 기이한 바위와 이상한 돌들이 층층으로 쌓였고, 그 솜씨의 교묘함은 사람 아닌 귀신의 수법인 듯싶다.

사신과 당번 역관은, 궐내에서 바로 왔으므로 내게 미처 알리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기던 차에 내가 나타난 것이 뜻밖이어서, 모두들 내게 구경 벽()이 심하다고 조롱한다.

연경의 숲 사이에도 자주다홍초록파랑 등 여러 빛깔의 기와로 이은 집이 드러나 보이고, 더러는 정각(亭閣) 꼭대기에 금빛 호로병을 세운 것은 있었으나, 지붕 위에 금기와를 올린 것은 못 보았다. 이제 이 전(殿)에 덮은 기와가 비록 순금인지 도금인지는 알 수 없겠으나, 2층 대전(大殿)이 둘, 다락 하나, 문 셋이었고, 그 나머지 정각은 여러 빛깔로 된 유리기와인데, 이에 비기면 무색하여 보잘것이 없었다. 동작대(銅雀臺)의 기와는 가끔 캐어서 고연(古硏)으로 쓰나, 이는 가마에 구운 것이요, 유리가 아니었다. 유리기와는 어느 때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시인(詩人)이 이른바,

 

옥섬돌에 금지붕이여.”

하고 떠들던 것이 정말 오늘 내가 보는 것과 같음인지, 그 일이 사전(史傳) 중에 나타난 것으로는,

 

한 성제(漢成帝)가 소의(昭儀)를 위하여 집을 짓는데, 그 체()를 모두 구리로 하여 황금을 입히었다.”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가 이에 주()를 내어,

 

()란 문지방이니, 구리를 그 위에 입히고, 게다가 또 금을 입히었다.”

하였고, 또 사전에 이르기를,

 

바람벽 가운데엔 가끔 황금항(黃金缸)을 해 박고는, 남전산(藍田山)에서 나는 옥과 진주와 비취(翡翠)의 날개로 하였다.”

하였는데, 복건은 이르기를,

 

()이란 벽 가운데 가로지르는 것이다.”

하였고, 진작(晉灼),

 

금환(金環)으로 꾸민 것이다.”

하였다. 대체로 영인(伶人) ()이나 반맹견(班孟堅)의 무리가 몇 번이나 힘껏 황금(黃金)이란 글자를 되풀이하여, 천 년 뒤에 한번 책을 펼치면 오히려 눈부시고 휘황할 지경이다. 그러나, 이들은 벽이나 문지방에 금칠한 정도임을 보고, 역사를 쓰는 이들이 지나치게 과장했을 뿐이리라. 참으로 소의(昭儀)의 자매(姉妹)에게 이 집을 보였던들, 반드시 몸부림치며 침대에 쓰러져 울고 밥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설사 성제(成帝)가 화려하게 하고 싶어하였더라도, 안창(安昌)무양(武陽)의 무리가 모두 유자(儒者)인지라, 반드시 옛 경서를 이끌어 붙여서 이를 반대했을 것인즉, 성제의 역량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것이었고, 또 설혹 그 뜻대로 되었다 하더라도, 반맹견의 필력(筆力)으로써 과연 어떻게 포장(舖張)하였을까. 알지 못하겠다. 대뜸,

 

금전(金殿)이 어리어리하구나.”

하지 않았겠느냐. 필시 이를 지워 버렸을 것이요, ,

 

금궐(金闕)이 하늘 높이 솟았다.”

고 하였겠지. 그러고 나서는 한번 읊어 보고 또 지워 버렸을 것이요, ,

 

“2층 대궐을 세우고 기와에 황금을 칠했다.”

하였거나, 또는,

 

임금께서 황금전(黃金殿)을 세웠다.”

라 하였을까. 비록 양한(兩漢) 때 문장이라 하였지만, 그는 늘 작은 제목을 커다랗게 과장하니, 이는 천고 작가(作家)들에게 끼친 한()이 아닐 수 없겠다. 예를 들면, 저 궁실을 잘 그린다고 하더라도 궁실에는 사면이 있고 또 안팎이 있으며, 또 덧놓이고 겹친 곳도 없지 않다. 이에 비록 서양의 그림이 제아무리 교묘하단들, 다만 한 면을 그렸으니 남은 세 면은 그릴 수 없을 것이요, 밖은 그려도 속은 그릴 수 없으며, 복전(複殿)첩사(疊榭)와 회랑(回廊)중각(重閣)은 단지 그 날아갈 듯한 처마와 아련한 대마루를 모사했을 뿐이요, 그 파고 새김이 섬세하여 털끝 같으니, 그림으로는 이를 그려 낼 수 없는 것이 곧 천고 화가(畵家)가 끼친 한이리라. 그러므로, 우리 공부자께서 이미 이 두 가지에 대하여 탄식하시되,

 

글월은 말을 다할 수 없고, 그림은 뜻을 다할 수 없다.”

하였던 것이다. 천하에 사관(寺觀)이 만을 헤아리지만, 금을 입힌 것은 다만 산서(山西) 오대산(五臺山)의 금각사(金閣寺)가 있을 뿐이다. 당 대종(唐代宗 이예(李豫)) 대력(大曆) 2(767)에 왕진(王縉)이 정승이 되어, 중서성(中書省) 부첩(符牒)을 내려서 오대산의 중 수십 명을 사방에 흩어 보내어 시주(施主)를 모아 이를 짓게 하되, 구리쇠로 기와를 굽고 금을 입히어서 그 비용이 여러 만금인데, 그 집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한다. 이제 이 기와 역시 구리쇠로 굽고 금을 씌웠을 것이다.

내가 요양의 거리에서 잠시 쉴 제, 모두들 다투어,

 

황금, 갖고 오셨지요.”

하고 묻기에, 나는,

 

금은 토산(土産)이 아니오.”

하였더니, 그들은 모두 비웃는다. 심양산해관영평통주를 지나칠 때에도 모두들 금을 묻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내가 번번이 처음같이 대답하면, 그들은 문득 제 모자 꼭대기를 가리키면서,

 

이게, 조선 금이라오.”

한다. 연암(燕巖)에 있는 우리 집이 송도(松都)에 가까워서 가끔 그 곳에 드나들었는데, 송도는 곧 연상(燕商 연경에 드나드는 장사치)을 기르는 곳이었으므로, 해마다 칠팔월서부터 시월까지의 사이에 금값이 폭등하여, 한 푼쭝에 엽전으로 마흔다섯 닢, 또는 쉰 닢씩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금을 쓸 곳이 별로 없으며, 문무(文武) 이품(二品) 이상의 금관자나 금띠로 말하더라도, 늘 만드는 것이 아니요, 흔히들 서로 빌려쓰고, 또 시집가는 색시의 가락지나 머리꽂이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인즉, 금은 천하기가 흙이나 다름없을 것이어늘, 그 귀함이 이러함은 어인 까닭일까.

내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박천(博川) 땅에 이르러 말을 길 옆에 세우고 버드나무 밑에서 땀을 들일 제,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가는 사람들이 떼를 지었는데, 모두 8~9세 되는 사내와 계집아이들을 데리고 마치 흉년에 유리하여 가는 것 같기에 이상히 여겨서 물은즉,

 

성천(成川) 금광으로 가는 것이옵니다.”

한다. 그 기계를 보니, 나무 바가지 하나, 포대 하나, 끌 하나일 뿐인데, 끌로 파내어 포대에 담으며 바가지로 이는 것이다. 온종일 흙 한 포대만 일면 별로 애쓰지 않아도 먹을 수 있으며, 조그만 계집아이들이 더욱 잘 파서일뿐더러, 눈이 밝아서 금을 잘 얻곤 한다. 나는 그들에게,

 

하루 종일 하면 금을 얼마나 얻는 거요.”

하였더니, 그들은,

 

그건 재수에 달렸지요. 혹은 하루에 여남은 알을 얻는 일도 있고, 재수가 없으면 서너 알에 그치며, 재수가 트이면 삽시에 부자가 된답니다.”

한다.

 

그럼, 그 알이 어떻게 생겼던고.”

하였더니,

 

거의 피 낱알만합지요.”

한다. 이는 농사짓기보다 이익이 나으니, 한 사람이 하루에 얻는 금이 적어도 예닐곱 푼쭝은 되어서, 돈으로 바꾸면 두세 냥이나 되므로, 비단 농사꾼들 태반이 농장을 떠나 이에 모여들 뿐 아니라, 사방의 건달패와 놈팽이들이 달려와 저절로 부락이 이루어져 무려 십여만 명이 들끓고, 쌀이나 기타 여러 가지의 물건이 모여들어, 술과 밥이며 떡과 엿 같은 것을 파는 장사들이 산골에 가득 차 있다 한다. 나는 알지 못하겠노라. 그 금이 어디로 가며, 그 캐낸 금이 많은데도 그 값이 더욱 오름이 무슨 까닭일까. 이제 이 기와에 물들인 것이 우리나라 금인지 아닌지 어찌 알 수 있으랴. 청초의 세폐(歲幣)에 제일 먼저 금을 면제하였음은, 토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만일 간상배가 법을 어기고 가만히 이를 팔다가, 혹시 이것이 청의 조정에 알려지게 된다면, 비단 사단이 생길 염려가 있을 뿐 아니라, 황제가 이미 황금으로 지붕을 칠하였으니 우리나라에 금광을 열지 않을 줄 누가 알겠는가. () 위의 작은 정각의 창호는 모두 우리나라 종이로 도배하였다. 창 틈으로 들여다보니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었고, 혹은 교의탁자향로화병 등이 모두 운치 있어 보인다. 사신들이 하인들을 문 밖에 남겨 두고서 함부로 들어오지 말도록 엄명하였는데, 조금 뒤에 모두 기어올라왔다. 역관과 통관들이 크게 놀라서 꾸짖어 도로 나가게 하자, 그들은,

 

저희들이 감히 함부로 들어왔겠습니까. 문지기가 오히려 저희들이 들어가지 않을까 저어하는 듯이 인도해서 올라온 것이옵니다.”

한다. 찰십륜포(札什倫布)와 반선시말(班禪始末)의 기록이 따로 있다.

정사가 말하기를, 아침나절 사찬(賜饌)이 있은 뒤 조금 지나서 인대(引對)하겠다는 명령이 내려서, 통관이 인도하여 정문 앞에 이르렀더니, 그 동쪽 협문에 시위(侍衛)하는 여러 신하들이 섰거나 혹은 앉아 있었다. 덕상서와 낭중 몇 사람이 와서, 사신의 출입을 주선하는 절차를 지휘하고 갔다. 이윽고 군기 대신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그대의 나라에도 사찰이 있으며, 또 관제묘도 있는지?”

하고 묻더니, 얼마 아니 되어 황제가 정문으로 해서 문 안의 벽돌을 깔아 놓은 위에 나앉았다. 교의와 탁자도 내오지 않고, 다만 평상에 누런 보료를 깔았으며, 좌우의 시위는 모두 누런 옷을 입었는데, 그 중에서 칼을 찬 자는 서너 쌍에 불과하고, 누런 일산을 받들고 선 자는 두 쌍이다. 그들은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조용하다. 먼저 회자(回子)의 태자가 앞으로 나와 몇 마디 아뢰고 물러간 뒤에, 사신과 세 통사(通事)를 나오라 하매 모두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이는 무릎이 땅에 닿을 뿐, 뒤를 붙이고 앉은 것은 아니다. 황제가,

 

국왕(國王)께서 평안하신가?”

하고 물으니, 사신은 공손히,

 

평안하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황제는 또,

 

만주말을 잘하는 이가 있는가.”

하매, 상통사(上通事) 윤갑종(尹甲宗),

 

약간 아옵니다.”

하고 만주말로 대답하였더니, 황제가 좌우를 돌아보며 기뻐하며 웃었다. 황제는 모난 얼굴에 희맑으면서 약간 누런 빛을 띠었으며, 수염이 반쯤 희고, 나이는 예순쯤 된 듯싶다. 애연히 춘풍화기를 지녔다. 사신이 반열(班列)에 물러서자, 무사 예닐곱이 차례로 들어와 활을 쏘는데, 살 하나를 쏘고는 반드시 꿇어앉아서 고함을 친다. 그리하여 과녁을 맞힌 자가 두 명인데, 그 과녁은 마치 우리나라의, 풀로 만든 과녁과 같으면서 한복판에 짐승 한 마리를 그렸다. 활쏘기가 끝나자 황제가 곧 돌아갈 제, 내시들은 모두 물러가고 사신도 역시 물러갔다. 문 하나를 채 못 나와서 군기(軍機)가 와서,

 

사신은 곧장 찰십륜포(札什倫布)로 가서 반선(班禪) 액이덕니(額爾德尼)를 뵈라.”

하고 황제의 전갈을 내린다. 옛 역사를 상고하건대, 서번(西番)은 멀리 사천(四川)운남(雲南)의 밖에 있는데, 이른바 서장(西藏)의 땅이다. 대체로 변방에 있어서, 중국과 거리가 더욱 멀었다. 강희 59(1720)에 책망아라포원(策妄阿喇布垣)이 납장한(拉藏汗)을 유인하여 죽이고 그 성지(城地)를 점령하여, 묘당을 헐어 버리고 번승(番僧)을 해산시켰다. 그래서 도통(都統) 연신(延信)을 평역장군(平逆將軍)으로, 갈이필(噶爾弼)을 정서장군(定西將軍)으로 삼고는, 장병(將兵)을 거느리고 새로 봉한 달라이라마[達賴刺麻]를 보내어 서장 일대를 평정한 뒤에, 황교(黃敎 라마교의 별칭)를 진흥시켰다 한다. 소위 황교라는 것이 무슨 도()인 줄은 알 수 없겠으나, 대개 몽고 제부(諸部)가 숭배하는 교이므로, 서장이 혹시 침략의 걱정이 있으면, 강희 황제 때부터 친히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영하(寧夏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지명)까지 이르러 장수를 보내서 구원하여 동란을 진정시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건륭 을미(1775)에 삭락목(索諾木)이 금천(金川)에서 반기를 들었을 제, 황제가 서장 길이 막힐까보아 두려워해서 아계(阿桂)를 정서장군으로, 풍승액(豊昇額)명량(明亮)을 부장(副將)으로, 해란찰(海蘭察)서상(舒常)을 참찬(叅贊)으로, 복강안(福康安)규림(奎林) 등을 영대(領隊)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쳐서 평정하였으니, 이 역시 서장을 위함이다. 대개 서장의 땅은 황제가 친히 보호하는 곳이요, 그 사람은 천자가 스승으로 섬긴다. 또 황()으로 그 교의 이름을 지은 것은, 혹시 황제(黃帝)노자(老子)의 도()를 숭배함이 아닌가 싶었다.

서장 사람들의 옷과 갓은 모두 누르므로, 몽고 사람이 이를 본받아서 역시 누런 빛을 숭상한다. 그렇다면 황제의 시기함과 사나움이 어찌 유독 이 황화요(黃花謠)를 꺼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액이덕니(額爾德尼)는 서승(西僧)의 이름이 아니라, 서번 땅에서도 이런 이름이 있으니, 괴이하고도 황당(荒唐)하여 그 요령을 얻기 어려운 일이다. 사신은 비록 억지로 나아가 반선(班禪)을 보았으나 마음속으로는 불평을 품었으며, 당번 역관인즉 오히려 일이 날까보아 급급히 미봉(彌縫)하는 것을 다행으로 알았고, 하인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번승과 황제를 욕하고 비방하였다. 왜냐하면, 만국의 공통된 군주로서 한 가지의 거조라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태학(太學)에 돌아오매, 중국의 사대부들은 모두 내가 반선을 만나 보았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였거니와, 또한 그 도술(道術)의 신통(神通)함을 극구 칭찬하지 않는 자 없었으니, 그들의 희세(希世) 부회(傅會)의 기풍이 이러하였다. 대개 예로부터 세도의 승침(昇沈)이나 인심의 선악이, 모두 윗사람으로부터 인도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학지정(郝志亭)의 집에서 잠시 술을 마셨다. 이날 밤에는 달이 유난히 밝았다. 수작한 이야기는 황교문답(黃敎問答)에 싣기로 한다.

 

 

[D-001]한 성제(漢成帝) …… 입히었다 : 한서(漢書)에 나오는 말이다. 소의(昭儀)는 궁녀의 벼슬 이름으로, 당시의 소의는 곧 조비연(趙飛燕) 자매(姊妹)를 가리킨다.

[D-002]안사고(顔師古) : 당 태종(唐太宗) 때의 학자. 한서의 주석을 냈다.

[D-003]바람벽 …… 하였다 : 한서에 나오는 말이다.

[D-004]복건(服虔) : 전한 말기의 학자. 자는 자신(子愼).

[D-005]진작(晉灼) : ()의 학자. 한서음의(漢書音義)를 지었다.

[D-006]영인(伶人) () : 영인의 이름인데, 시대는 미상. 영인은 악관(樂官) 혹은 배우.

[D-007]반맹견(班孟堅) : 한서(漢書)의 저자 반고(班固). 맹견은 자.

[D-008]안창(安昌) : 성제의 스승 안창후 장우(張禹).

[D-009]무양(武陽) : 성제 때의 재상 무양후 설선(薛宣).

[D-010]글월은 …… 없다 : 역경(易經) 계사전(繫辭傳)에서 나온 구절.

[D-011]왕진(王縉) : 당의 시인 왕유(王維)의 아우. 자는 하경(夏卿). 대종 때 정승으로 불교를 독신하였다.

[D-012]찰십륜포(札什倫布) : 반선 라마 활불이 살고 있는 곳.

[D-013]액이덕니(額爾德尼) : 반선의 이름.

[D-014]책망아라포원(策妄阿喇布垣) : 신강 지방에 있던 준갈이(準噶而) 부족의 장수.

[D-015]납장한(拉藏汗) : 몽고 부족의 추장. 청해고시한(靑海固始汗)의 손자.

[D-016]삭락목(索諾木) : 건륭 때 대금천(大金川)의 토사(土司).

[D-017]금천(金川) : 사천성(四川省) 서북 변경에 있는 물 이름.

[D-018]아계(阿桂) : 아극돈(阿克敦)의 아들. 자는 광정(廣廷).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2일 무오(戊午)

 

 

개다.

새벽에 사신이 조반(朝班)에 들어가 광대(廣大)의 노래를 들었다. 나는 몹시 졸음이 오므로, 이내 누워서 편안히 잤다. 아침밥이 끝난 뒤에 천천히 걸어서 궐내에 들어간즉, 사신은 조회에 참여한 지 이미 오래고, 당번 역관 및 모든 비장은 뒤에 떨어져 궁문 밖 낮은 언덕 위에 머물러 있으며, 통관들 역시 이곳에 앉아서 들어가지 못하였다. 음악 소리가 담장 안 가까이 새어 나오기에 좁은 문틈으로 엿보았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담장을 돌아 여남은 걸음을 가서 작은 일각문(一角門)이 있는데, 한 쪽은 열려 있고 또 한 쪽은 닫혀 있다. 내가 조금 들어가서 보려 한즉, 군졸 몇이 말리며 문 밖에서 바라보기만을 허용한다. 문 안 사람들은 모두 문을 등진 채 즐비하게 섰는데, 조금도 자리를 옮기지 않고 마치 허수아비를 세워놓은 듯하였으며, 엿보려고 하여도 작은 틈도 없기에 다만 그들 머리 사이 빈 곳으로 바라본즉, 은은히 한 더미 푸른 뫼에 솔과 잣나무가 울창한데 잠깐 눈을 돌린 사이 별안간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다. 또 채삼(彩衫)에 수포(繡袍)를 입은 자가, 얼굴에는 붉은 연지를 바르고 허리 이상이 사람들 머리 위로 헌걸차게 솟았으니, 아마 초헌(貂軒)을 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대(舞臺)의 거리는 멀지 않으나 그늘지고 깊숙하여 마치 꿈속에 성찬(盛饌)을 만난 것처럼 먹어도 맛을 알 방법이 없었다. 문지기가 담배를 달라기에 곧 내어 주었다. 또 한 사람이 내가 오랫동안 발꿈치를 들고 선 것을 보고는 걸상[]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올라서서 바라보게 하기에, 나는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 또 한 손으로 문지방을 짚고 섰었다. 출연하는 자들은 모두 한인(漢人)의 의관(衣冠)으로 차렸으며, 4, 5백 명이 함께 몰려들었다가 또 물러서면서 일제히 노래를 부른다. 내가 디디고 선 걸상은 마치 횃대를 탄 오리처럼 되어 오래 서 있기 어렵기에, 돌아나와 작은 언덕의 나무 그늘 밑에 앉았다. 이 날은 몹시 더웠으나, 구경꾼들은 빽빽하게 둘러서 있었다. 그들 중에 수정꼭지를 여러 개 단 사람이 있었으나, 그가 어떤 관원(官員)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한 청년이 문을 나서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피한다. 그 청년이 잠시 발을 멈추고 종자(從者)에게 무슨 말을 하는데, 돌아보는 모습이 몹시 사나워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 잠자코 있었다. 두 군졸이 채찍을 갖고 와서 사람을 몰아내니, 회자(回子) 하나가 앉았다가 성내며 일어나서 두 군졸의 뺨을 치고 한주먹으로 때려 눕혔다. 청년 관원은 눈을 흘기면서 어디로 사라져 버린다. 남들에게 물은즉, 수정꼭지 단 자는 곧 호부상서(戶部尙書)화신(和珅)이라 한다. 눈매가 곱고 준수한 얼굴에 기운이 날카로웠으나, 다만 덕기가 없으며, 나이는 이제 서른하나라 한다. 그는 애초 난의사(鑾儀司) 호위 군졸 출신으로, 성격이 몹시 교활하여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었으므로, 불과 대여섯 해 사이에 갑자기 귀한 자리를 얻어서 구문(九門)을 통령하는 제독이 되어, 병부 상서(兵部尙書) 복융안(福融安)과 함께 언제나 황제의 좌우에 붙어 있으므로, 그 세력이 조정에 떨쳤다. 이시요(李侍堯)가 해명(海明)의 뇌물 먹은 것을 적발하여 우민중(于敏中 청 건륭 때의 고관)의 집을 몰수하고 아계(阿桂)를 내친 것이 모두 화신의 힘이었는데, 이런 일은 모두 올봄과 여름 사이의 일이었다. 사람들이 함부로 눈을 뜨고 바로 보지 못한다. 그리고 황제가 이제 여섯 살 나는 딸을 화신의 어린 자식에게 약혼시켰는데, 황제의 나이가 늙어서 성격이 점차 조급해져 노염이 잦으므로 좌우에게 매질하기가 일쑤였으나, 그가 이 어린 딸을 가장 사랑했으므로, 황제가 크게 성낼 때면 궁인이 번번이 이 어린 딸을 껴안고 와서 황제 앞에 놓는다. 그러면 황제가 노염을 그친다 한다.

이날 조회 반열에는 차와 음식이 세 차례나 내렸다. 사신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떡 한 그릇을 얻어먹었다. 누런 것과 흰 것 두 층으로 괴었는데, 네모가 반듯하였으며, 그 빛은 마치 누런 밀랍(蜜蠟)과 같았다. 단단하고 가늘고도 매끄러워 칼이 잘 들지 않았으며, 그 위층이 더욱 옥처럼 윤기가 나고 기름기가 흘렀으며, 떡 위에는 한 선관(仙官)을 만들어 세웠는데 수염과 눈썹이 생동하는 듯 도포와 홀()이 화려했고, 그 좌우에는 또 선동(仙童)을 세웠는데 그 조각이 몹시 기묘하였다. 이들은 대개 밀가루에다 사탕가루를 섞어 만든 것이다. 땅에 묻는 허수아비를 만드는 것도 옳지 않다 하였거늘, 하물며 이 인조(人造) 사람을 어찌 차마 먹을 수 있겠는가. 사탕 여남은 가지를 곁들여 담은 것이 한 그릇, 또 양고기가 한 그릇이다. 또 조정 진신(縉紳)들에게 채색 비단과 수놓은 주머니 등을 주었는데, 사신에게는 채단이 다섯 필, 주머니가 여섯 쌍, 담뱃대가 하나이고, 부사와 서장관에게는 각기 조금씩 줄여 차등이 있었다.

이날 저녁에는 구름이 끼어 달빛이 흐리었다.

 

 

[D-001]화신(和珅) : 만인. 성은 유호록(鈕祜祿)이요, 자는 치재(致齋).

[D-002]난의사(鑾儀司) : 황제의 거둥 때에 필요한 사무와 의장(儀仗)을 맡은 관서.

[D-003]구문(九門) : 황성의 각 성문을 지키는 장군.

[D-004]복융안(福融安) : 복강안(福康安)의 잘못인 듯하다.

[D-005]이시요(李侍堯) : 청의 건륭 때에 높은 벼슬을 지냈으나 뇌물 먹기를 좋아하였다.

[D-006]땅에 …… 않다 : 맹자(孟子)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 4에서 맹자가 공자의 말씀이라고 인용하고 있다. “공자께서 처음 나무 허수아비[]를 만든 자는 그 자손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서 장례에 썼기 때문입니다.[仲尼曰, 始作俑者, 其無後乎. 爲其象人而用之也]”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3일 기미(己未)

 

 

새벽에 비가 잠시 뿌리다가 마침내 쾌청하였다.

사신이 만수절 하반(賀班)에 참가하러 오경(五更)에 대궐로 들어갔다. 나는 포근히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 조용히 걸어서 대궐 밑에 이르렀다. 누런 보가 덮인 걸방짐 일곱을 권문 앞에 두고 쉰다. 짐 속에는 옥으로 만든 그릇과 골동이 담겨 있고, 또 보통 사람만큼 커다란 금부처 하나를 앉혀 놓았으니, 이들은 모두 호부상서 화신이 진상한 것이라 한다. 이 날도 음식을 세 차례나 내리고, 또 사신에게 백자(白瓷)로 만든 차호(茶壺) 하나, 차종(茶鐘)()까지 갖추어 한 벌, 실로 뜬 빈랑(檳榔) 주머니 하나, 칼 하나, 자양(紫陽)에서 만든 주석 차호 하나씩을 주었고, 또 저녁에 작은 황문(黃門 환시(宦侍))이 와서 모난 주석 항아리 하나를 내렸다. 통관이,

 

이건 차().”

하고 설명해 주자, 황문은 곧 달려가 버린다. 누런 비단으로 항아리 마개를 봉했기에, 떼고 본즉 빛이 누르면서도 약간 붉어 술과 같았다. 서장관이,

 

이건, 정말 황봉주(黃封酒).”

한다. 맛이 달고 향내가 풍겨 술 기운이란 전혀 없었다. 다 따르자, 여지(荔支) 여남은 개가 떠오른다. 모두들,

 

이건, 여지로 빚은 것이야.”

하고 각기 한 잔씩 마시고는,

 

참 좋은 술이구려.”

한다. 비장과 역관들에게 찻잔이 이르니 마시지 않는 자도 있거니와, 대번에 들이키는 이가 없다. 이는 너무 지나치게 취할까 보아서 그런 것이다. 통관들이 목을 내밀며 침을 흘린다. 수역이 남은 것을 얻어서 주었더니 돌려가며 맛보고는,

 

아름다운 궁중 술이야.”

하며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윽고 일행이 서로 돌아보며,

 

취했어, 취했구먼.”

한다. 이날 밤에 기공(奇公)을 찾았을 때 한 잔을 따라서 보였더니, 기공은,

 

이건 술이 아닌 여지즙(荔支汁)이랍니다.”

하며 깔깔대고는, 곧 소주 대여섯 잔을 내어 거기다가 타니, 맑은 빛깔 매운 맛에 이상한 향내가 배로 풍긴다. 이는 대개 여지 향내가 술 기운을 얻어서 더욱 은은한 향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까 꿀물을 마시고 향내를 논한 것이나 여지즙을 맛보고 취함을 말하는 것이, 곧 종 소리를 듣고서 해를 측량함이나 매실나무를 바라보고 갈증을 푸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오.

이날 밤,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기공과 함께 명륜당(明倫堂)으로 나가 난간 밑을 거닐었다. 나는 달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달의 몸뚱이는 언제나 둥글어 햇빛을 빙 둘러 받고 보니, 이 때문에 지구(地球)에서 본 달이 찼다가 기울었다 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 저녁 저 달을 온 세계가 한가지로 본다면, 보는 장소에 따라서 달은 살지고 여위며 깊고 옅음이 있지 않을까. 별은 달보다 크고, 해는 땅덩이보다 크되, 보기에는 그와 달라 보이는 것이 멀고 가까운 까닭이 아닐까. 만약에 이것이 참말이라면, 해와 땅과 달 등은 모두 허공에 둥둥 뜬 별들로 보임이 아닐까. 별에서 땅을 볼 때에도 역시 그렇게 보일 것이 아니겠는가. 땅의 한 줄이 해와 달을 함께 꿰어서 반짝반짝하는 세 낱이 마치 저 하고(河鼓)와 같지 않겠는가. 땅껍질에 붙어 있는 가지가지의 만물은 어떤 것이고 모양이 모두 둥글둥글할 뿐, 하나도 네모진 것은 볼 수가 없는데, 다만 방죽(方竹)과 익모초(益母草) 줄기가 네모졌지마는, 이것 역시 네모 반듯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은즉, 네모 반듯한 물건은 과연 찾을 수 없거늘, 무엇 때문에 땅에 대해서만 네모난 물건이라고들 하였을까. 만일에 땅덩어리를 네모졌다고 하면, 저 월식(月蝕)을 할 때에 달을 검게 먹어 들어가는 변두리가 왜 활등처럼 둥글게 보일까. 땅덩이가 네모지다고 우기는 자는 무어나 방정(方正)해야 된다는 대의(大義)에 입각해서 물체(物體)를 이해시키려 함이요, 땅덩이가 둥글다고 주장하는 자는 실제에 뵈는 형태를 믿고 다른 뜻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보아서, 땅덩이란 실제 물체는 둥글고, 대의로 말한다면 모나다는 것이 아닐까. 해와 달은 오른쪽으로 수레바퀴처럼 돌고 돌아, 도는 궤도가 해는 크고 달은 작으며, 도는 속도가 늦고 빠름이 없어 한 해와 한 달은 일정한 도수에 맞거늘, 해와 달이 땅을 둘러싸고 왼편으로 돈다는 말은 우물 속에서 보는 지식이 아닐까. 땅덩이의 본바탕이란 둥글둥글 허공에 걸려, 사방도 없고 아래위도 없이 마치 쐐기 돌 듯 돌다가 햇빛을 처음 받은 곳을 날이 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지구가 더 돌아, 처음에 해와 마주 대하는 데는 차차 어긋나 가며 멀어져서, 오정도 되고 해가 기울기도 하여 밤과 낮이 되는 것이 아닐까. 비유해 말하자면, 창구멍이 뚫어진 곳으로부터 햇살이 새어 콩 낱알만하게 비친다고 하자. 창 아래는 맷돌을 햇살 비치는 자리에 놓고, 바로 햇살 비치는 자리에 먹으로써 표를 해 두고는, 그 다음에 맷돌을 돌리고 보면 먹 자국은 햇살 비치는 곳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 서로 떨어져 사이가 멀어져 갈 것인가. 맷돌짝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그 자리에 돌아오면, 햇살 비치는 자리와 먹 자국은 잠시 마주 포개어졌다가는 또 다시 떨어지게 될 것이니, 지구가 한 바퀴 돌아 하루가 되는 것도 이런 이치가 아닐까. 또 등불 앞에 놓인 물레를 가만히 두고 보면, 물레바퀴가 돌 적에는 물레바퀴의 군데군데가 등불 빛을 받고 있으나, 그렇다고 등불이 물레바퀴를 돌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리라. 지구의 밝고 어두운 이치도 역시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러면 해와 달은 애초부터 뜨고 지는 것이 아니요, 또 오가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땅이 움직여 돌지를 않고 언제나 한 자리에 박혀 있다고 너무 믿기 때문에 생긴 착각이 아닐까. 명백한 이론을 찾지 못하면, 이 땅의 춘동을 가리켜 그 방위를 따라 노는 것이라고 해 버렸으니, 결국 논다는 것은 나가고 물러서고 하는 것을 말함이요, 올라갔다 내려갔다 함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미 논다고 할 바엔 차라리 돈다고 함이 어떨까. 저 착각을 한 자는 이렇게 말하리라. 땅덩이가 돌 때는 땅 위에 실렸던 일체 물건들은 엎어지고 자빠지고 기울어져 떨어질 터이라고. 만일에 쏟아져 떨어진다면 어느 땅에 떨어질 것인가. 만일에 그렇다면, 저 허공에 달린 별들과 은하(銀河)는 기운을 따라 돌아가면서 무엇 때문에 떨어져 쏟아지지 않고 그대로 있을까. 움직이지도 않고, 돌지도 않고, 생명도 없는 덩이진 물건이, 어째서 썩지도 부서지지도 흩어지지도 않고 그대로 남아 견딜 것인가. 땅덩이 거죽에 생물들이 붙어서 살 때는, 공과 같은 물체의 표면에다 발을 붙이고 어디서나 머리에 하늘을 이고 있는 것을 비겨 본다면, 수많은 개미와 벌들이 혹시는 꼿꼿이 선 바람벽에 기어가기도 하고, 혹은 천장에 붙어서 사는 것을 누가 바람벽에 가로 붙어 섰다고 할 것이며, 누가 천장에 거꾸로 붙어 섰다고 할 것인가. 지금도 이 땅덩이 밑에는 역시 바다가 있을 터인데, 만일에 땅 거죽에 붙어 사는 생물들이 아니 떨어지는가 의심을 한다면, 땅 밑 바다는 누가 둑을 쌓아 두었다고 물이 아니 쏟아지고 그대로 있을 것인가. 저 하늘에 총총한 별들은 그 크기가 얼마씩이나 될 것이며, 역시 거죽 껍질은 지구나 다름없지 않을까. 별도 껍데기가 있을진대 생물이 붙어 살 터이니, 역시 그러할까. 만일에 생물이 있다면, 따로 또 세상을 배판해 놓고 새끼까지 쳐가면서 살지나 않을는지. 지구는 둥글게 생겨 원래 음양이 없을 터인데, 해로부터 불기운을 받고 달로부터 물기운을 얻어, 흡사 살림꾼이 동쪽 이웃에서 불을 빌리고 서쪽 집에서 물을 얻는 것이나 다름없으매, 한 쪽은 불이요 또 한 쪽은 물이라 하여 이를 소위 음양이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를 억지로 오행(五行)이라 이름붙여 저마다 서로 상생한다 하고 서로 상극한다고 하나, 큰 바다에 풍랑이 일 때에 불꽃이 너울너울 타오르는 현상은 무슨 까닭이라 할까.얼음 속에는 누에가 살고, 불 속에는 쥐가 살고, 물 속에는 고기가 살아서, 저들 각종 생물들은 어디나 붙여 있는 곳을 제각기 땅이라 한다. 만일에 달 속에도 세계가 있다면, 오늘 이 밤에 어떤 두 명의 달세계의 사람이 난간 머리에 마주 서서 달빛 아닌 땅빛의 차고 기우는 이야기를 속삭이지 아니한다고 누가 증명할 것이랴.”

기공은 껄껄대며,

 

참 기이한 이야기요. 땅이 둥글다는 이야기는 서양 사람들이 처음 말했지마는 땅덩이가 돈단 말은 하지 않았는데, 선생의 이 학설은 선생이 터득한 것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어느 스승으로부터 이어받으신 것인가요.”

한다. 나는,

 

사람의 일도 모르는 터에 하늘 일을 어찌 알겠소. 나는 본디 도수(度數)의 학()에 어두우니까요. 비록 칠원옹(漆園翁 장주(莊周)의 별칭)의 깊은 생각으로서도 아득한 우주에 관한 지식은 덮어 두고 해설을 하지 않았더군요. 이것은 실로 내가 터득한 지식이 아니라 귀동냥이랍니다. 우리 친구에 홍대용(洪大容)이라는 사람이 있어 호는 담헌(湛軒)인데, 그의 학문은 좁지 않아서 일찍이 나와 함께 달구경을 하면서 장남 삼아 이런 이야기를 터뜨렸답니다. 대체로 황당하여 종잡기 어려우나 비록 성지(聖智)를 지닌 이라도 이 학설을 깨뜨리기는 어려울까 합니다.”

하였더니, 기공은 크게 웃으며,

 

남의 꿈속 길을 동행할 수야 없지요. 당신의 친구 되시는 담헌 선생(湛軒先生)께서는 이에 관한 저서가 몇 권이나 됩니까.”

한다. 다는,

 

아직 저서는 없나 봅니다. 선배 되시는 김석문(金錫文)이란 분이 있어서 일찍이 삼환부공설(三丸浮空說)을 말했는데, 그 친구가 특히 장난 말 삼아 이 학설을 부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실제로 보아 얻은 것이 이렇다는 것도 아니요, 또 일찍이 남더러 꼭 이것을 믿어 달라고 한 적도 없었습니다. 나 역시 오늘 밤 달구경을 하다가, 문득 그 친구 생각이 나서 말을 한바탕 늘어놓고 보니, 그 친구를 만나본 듯도 합니다.”

했다. 대개 여천(麗川)은 한인(漢人)과는 다르기 때문에, 담헌이 일찍이 항주(杭州) 인사들과 섞여 논 옛 일들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기공은 또 나에게,

 

김석문 선생이 지은 시() 중에서 아름다운 것 몇 구만 들려 주실 수 없을까요.”

하기에, 나는,

 

그에게 아름다운 시구가 있다는 것은 못 들었습니다.”

했다. 기공은 나를 이끌고 자기 방으로 들었다. 벌써 촛불을 네 자루나 켜 놓고, 큰 교자상에 음식을 잘 차려 두었다. 특별히 나를 위해서 차린 것이다. 향고(香糕) 세 그릇, 각색 사탕 세 그릇, 용안육(龍眼肉)여지(荔支)낙화생(落花生)매실(梅實) 서너 그릇, 거위오리 들을 주둥이와 발이 달린 채로, 또 통돼지를 껍질만 벗겨서 용안육여지대추마늘후추호도살구씨수박씨 등을 섞어 쪄서 떡같이 만들었는데, 맛은 달고 매끄러우면서도 너무 짜서 먹기는 어려웠다. 떡이나 과실들은 모두 자 넘어 높이 괴었다. 이윽고 다 물리고는, 다시 채소와 과실만 각기 두 접시씩 차리고, 소주 한 주전자로 시름시름 따라 가면서 조용히 이야기들을 하였다. 이야기는 황교문답(黃敎問答) 중에 실려 있다. 닭이 두 홰째나 울어서 자리를 파하고 숙소에 돌아와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하인들이 벌써 일어나라고 깨운다.

 

 

[D-001]종 소리를 …… 측량함 : 출전 미상.

[D-002]매실나무를 …… 푸는 것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는 조조(曹操)의 고사. 즉 행군 중 군사들이 갈증을 느끼자 조조가 저 고개를 넘으면 매실나무가 있다고 말하여 군사들이 그 말에 입에 침이 돌아 갈증을 풀었다.

[D-003]하고(河鼓) : 견우성(牽牛星)의 북쪽에 있는 삼태성(三台星).

[D-004]방죽(方竹) : 네모진 대나무. 중국에서 난다.

[D-005] …… 할까 : 옛사람들은 바다에 풍랑이 심할 때 일광(日光)의 반사로 일어나는 현상을 불꽃으로 보아왔다.

[D-006]얼음 속에는 누에 : 빙잠(氷蠶). 습유기(拾遺記)에서 나오는 전설.

[D-007]불 속에 쥐 : 화서(火鼠). 산해경(山海經)에서 나온 전설.

[D-008]김석문(金錫文) : 조선 숙종(肅宗) 때의 학자. 자는 병여(炳如), 호는 대곡(大谷). 역학도해(易學圖解)를 지었으며 만년에 표천 다대곡(多大谷)에 살았다.

[D-009]삼환부공설(三丸浮空說) : 해와 달과 땅과의 세 개 둥근 방울이 공중에 떠서 있다는 학설.

[D-010]담헌이 …… 없었다 : 홍대용은 북경에서 항주(杭州)의 선비 육비(陸飛)엄성(嚴誠)반정균(潘庭筠) 등을 만나서 막역의 벗을 맺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4일 경신(庚申)

 

 

개다.

삼사는 밝기 전에 대궐에 들어가고, 홀로 실컷 자고는 아침에 일어나 윤형산(尹亨山)을 찾아갔다가, 거기서 다시 왕혹정(王鵠汀)을 찾아 함께 시습재(時習齋)로 들어가서 악기(樂器) 구경을 했다. 거문고나 비파는 모두 길고도 넓으며, 붉은 비단에 솜을 넣어서 주머니를 만들었고, 거죽은 붉은 털 천으로 쌌다. ()과 경()은 시렁에 달아매여 있는데 역시 두툼한 비단으로 덮었고, 비록 축어(柷敔) 같은 따위라도 다들 별스러운 비단으로 집을 만들어 넣어 두었다. 대개 거문고와 비파 등속은 그 본이 너무 크고 칠이 지나치게 두꺼웠으며, 젓대와 퉁소 등속은 궤짝 속에 넣고 단단히 채워 구경할 길이 없었다. 혹정은,

 

악기를 보관해 두기는 매우 까다로워 습기 있는 곳을 피해야 되고, 또 너무 건조한 것도 좋지 않을뿐더러, 거문고 위에 앉은 티끌은 사자학(獅子瘧)이라 하고, 거문고 줄 위의 손때는 앵무장(鸚鵡瘴)이라 하며, 생황(笙簧)의 부는 구멍에 말라 붙은 침은 봉황과(鳳凰過)라 하고, 종이나 경에 앉은 파리똥은 나화상(癩和尙)이라 한답니다.”

한다. 웬 얼굴이 곱게 생긴 청년 하나가 바쁘게 들어오더니, 눈을 부라리고 나를 보면서 내 손에 든 작은 거문고를 빼앗아 급히 집에 넣는다. 혹정은 퍽 두려워하는 얼굴로 내게 눈짓하여 나가자는 것이다. 그 청년은 별안간 웃으면서 나를 붙들고 청심환을 달라 한다. 나는 없다고 대답하면서 곧 나왔다. 그 자는 몹시 무안한 기색이다. 사실인즉, 내 허리 전대 속에는 환약 여남은 알이 있었지마는, 그의 버릇이 괘씸하여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혹정에게 한 번 읍하고는 가버린다. 나는,

 

그는 누구여요.”

하고 물었다. 혹정은

 

그는 윤대인(尹大人)을 따라서 북경에서 온 자랍니다.”

한다. 나는,

 

그가 악기에 무슨 참견을 하나요.”

하였더니, 혹정은,

 

아무런 상관이 없고, 단순히 조선 환약을 짜내기 위하여 염치를 돌보지 않고 선생을 속이려고 든 것이니, 선생은 마음에 거리끼실 것 없으시죠.”

한다. 나는 생각 없이 문 밖을 나섰다. 수백 필의 말 떼가 문 앞을 지나간다. 한 목동(牧童)이 큰 말에 올라앉아 수숫대 한 개비를 쥐고 따라간다. 또 뒤따라 소 3,40마리가 가는데, 코도 꿰지 않고 뿔도 잡아 매지 않고, 뿔은 모두 한 자 남짓씩 길며 빛깔은 푸른 것이 많았다. 또 당나귀 몇십 마리가 따라가는데, 목동이 방망이 같은 막대기를 가지고 맨 앞의 푸른 놈을 힘껏 한 대 후려갈기니까 소가 씩씩거리며 달려갈 제, 모든 소도 그 뒤를 따르는데, 마치 대오가 행진하는 듯하였다. 이는 대개 아침나절 방목하기 위하여 끌고 나서는 것이었다. 한가한 때에 다니면서 살펴보니, 집집마다 대문을 열고 말이니 나귀니 소니 양 들을 몇십 마리씩 몰아 내놓는다. 돌아와서 우리 사관 밖에 매어 둔 말의 꼴을 보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내 일찍이 정석치(鄭石癡 석치는 호요, 자는 성백(城伯))와 이름은 철조(哲祚), 벼슬은 정언(正言)이며, 술을 잘 마시고 서화에도 능하다. 함께 우리나라 말 값의 높낮이를 이야기하다가, 내가,

 

불과 몇십 년이 안 가서 베갯머리에서 조그마한 담뱃대통을 말 구유로 삼아 말을 먹이게 될 것이야.”

하였더니, 석치는,

 

그게 무슨 말이야.”

하고 반문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서리배 병아리를 여러 번 번갈아 씨를 받아서 너덧 해를 지나면, 베개 속에서 울음을 우는 꼬마닭이 되는데, 이 놈을 침계(枕鷄)라고 부른다네. 말도 역시 종자가 작아지기 시작하면 맨 나중은 침마(枕馬)가 아니 되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하였다. 석치는 크게 웃으며,

 

우리들이 점차 더 늙어가면 새벽 잠이 자꾸만 없어지는 터에 베개 속에서 닭 울음 소리를 듣게 될 것이고, 또 베개말을 탄 채 뒷간길을 가도 무방하겠군. 그러나 요즘 시속에 말 흘레붙이는 것을 대기(大忌)로 알아, 기르는 말이 수놈 암놈 할것없이 모두 동정으로 늙어 죽거든. 국내의 말이 그래도 몇만 필이나 되는데, 그 놈들에게 흘레를 안 붙이면, 기르는 말이 어떻게 번식될 것인가. 이리하여 국내에서는 해마다 말 몇만 필을 잃게 되니, 이러고는 몇십 년이 못 가 베개말이고 무어고 다 절종이 될 것이야.”

하고는 둘이 서로 웃으며 희담을 한 일이 있었다.

실상 내가 연암(燕巖)에 살 곳을 마련한 것은, 일찍부터 목축(牧畜)에 뜻을 두었던 때문이다.

연암에 자리잡으니, 첩첩산중에 양쪽이 편평한 골짜기인데다가, 수초(水草)가 매우 좋아서 마소노새나귀 등 몇백 마리를 치기에 넉넉하였다. 나는 일찍부터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이토록 가난한 것은 대체로 목축이 제대로 되지 못한 까닭이다. 우리나라에서 목장이라야 가장 큰 곳으로 다만 탐라(耽羅 제주도)가 있을 뿐인데, 그 곳의 말들은 모두 원 세조(元世祖 홀필렬(忽必烈))가 방목한 종자로서, 4, 5백 년을 두고 내려오면서 종자를 한 번도 갈지 않고 보니, 비록 애초에는 용매(龍媒 준마(駿馬))악와(渥洼 신마(神馬))와 같은 우수한 종자일지라도, 마침내는 과하(果下)관단(款段 꼬마 말의 이름)과 같은 꼬마말이 될 것은, 이치에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과하와 관단을 대궐 지키는 장사들에게까지 내주니, 고금 천하에 이런 느림뱅이와 꼬마말을 타고 적진을 향하여 달리는 꼴이 어디 있을 일인가. 이것이 첫째로 한심한 일이다. 대궐 안에서 먹이는 말로부터 장수들이 타는 말에 이르기까지 토산 말이란 하나도 볼 수 없고, 모두가 요동심양 등지로부터 사서 들인 말들로서, 한 해에 새로 생기는 말이라고는 네댓 필에 지나지 않는 형편이니, 만일 요동심양 길이 끊어지는 날이면 어디에서 또 말을 얻을 것인가. 이것이 둘째로 한심한 일이다. 임금이 거둥할 때 배종하는 반열에는, 백관들이 말을 많이 빌려 타기도 하고, 혹은 나귀를 타고도 임금의 뒤를 따르게 되어, 이 꼴로서는 위의를 갖추지 못하게 되니, 이것이 셋째로 한심한 일이다. 문신들로서 초헌(貂軒)을 탈 수 있는 자 이상은 말을 탈 일도 없고, 또 말을 집 안에서 먹이기도 어려워서 탈 것을 없애 버리고, 자제들이 걷지 않으려고 겨우 작은 나귀나 한 마리쯤 먹이게 된다. 옛날에는 백 리의 강토에 불과한 나라라도, 대부(大夫)쯤 되면 타는 수레 열 대쯤은 가지는 법이다. 그래도 우리나라로 말한다면 둘레가 몇천 리나 되는 나라로서, ()()급쯤 된다면 타는 수레 백 대쯤씩은 갖추어야만 할 것이거늘, 이제 우리나라 대부의 집안에서 수레 열 대는 그만두고라도 단 두 대인들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이것이 넷째로 한심한 일이다. 삼영(三營)의 초관(哨官)들은 다들 백 명 졸개의 장이 되는 터에 말 한 필을 가질 형세가 못 되고 보니, 한달에도 세 번씩 치르는 훈련에는 임시로 삯말을 내어 타게 된다. 삯말을 타고 전쟁에 나간다는 소리는 아예 이웃 나라에 들릴 수 없는 창피이다. 이것이 다섯째 한심한 일이다. 서울 영문에 있는 장수들이 이러할 바에야, 팔도(八道)에 나누어 둔 기병들이란 이름만 남고 실상은 없을 것은 이로써도 뻔한 일일 것이다. 이것이 여섯째 한심한 일이다.

국내에 있는 역말들이란 모두가 토산 말들로서, 그 중에서 좀 낫다는 놈이라도 한번 사신(使臣) 손님이라도 치르고 나면 죽거나 병이 들고 만다. 왜냐하면, 그런 사신 손님들이 타는 쌍가마가 잔뜩 무거운데다가, 네 명의 교군(轎軍)은 으레 말에다가 몸을 싣듯이 양 옆에 붙어서 탄 사람이 까불려 흔들리지 못하도록 가마채를 붙잡고 간다. 말 등에 실린 짐이 이토록 무거우니, 말은 짐을 피하듯이 빨리 안 달릴 수 없게 되었고, 말이 달릴수록 짐은 더욱 눌려지기 때문에 말이 죽지 않으면 병이 든다는 것이다. 죽은 말이 날로 불어나니, 따라서 말 값은 뛰어오른다. 이것이 일곱째 한심한 일이다. 말 등에다 짐을 싣는다는 것은 벌써 틀려먹은 노릇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수레가 국내에서 다니지 못하고 보니, 관청에서고 민간에서고 짐이란 짐은 말 잔등이 아니고는 못 실어 나를 줄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이야 죽든 말든 많이 싣기에만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부득불 힘을 쓸 만큼 먹이를 먹인다고 더욱 여물죽을 많이 먹이게 된다. 그러므로 말 정강이가 힘을 못 쓰고 발굽은 물씬물씬해져, 한 번만 흘레를 겪으면 뒤를 못 가누게 되므로, 요즘 세속에서는 흔히 들 말이 흘레붙어 새끼 치는 것을 금한다. 이러고서야 말이 어디서 생길 것인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말을 다루는 솜씨가 틀렸고, 말을 먹이는 방법이 옳지 못했으며, 좋은 종자를 받을 줄 모르고, 일 맡은 관원이 목마에 무식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채찍을 잡고 나앉은 자마다 국내엔 좋은 말이 없다고 떠든다. 그래, 정말 국내엔 쓸 만한 말이 없단 말인가. 이런 한심한 일이 이루 다 손꼽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면, 말을 다루는 솜씨가 틀렸다는 말은 무엇을 두고 이름이었던가. 무릇 생물들의 성질이란, 사람이나 다름없이 고달프면 쉬고 싶고, 답답할 때엔 시원한 데를 찾고 싶으며, 굽은 놈은 펴고 싶고, 가려우면 긁고 싶을뿐더러, 그놈들은 비록 사람이 먹을 것을 주면 먹는다 하더라도, 때로는 제 마음대로 편한 것을 찾고 싶은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말도 반드시 이따금 굴레와 고삐를 풀어 놓아 물가 같은 시원한 곳에 놀게 해서 답답증을 풀도록 할 것이니, 이것이 곧 생물의 성질에 따라 그 뜻을 맞추어 주는 것이거늘, 우리나라에서 말 먹이는 법이란, 북띠나 굴레가 단단하지 않은가 염려하여 이것을 될수록 졸라 매어서, 빨리 몰 때에도 말은 견마 잡는 고통을 벗어날 수 없고, 쉴 때만 해도 긁는 재미나 땅에 뒹구는 맛을 얻어 볼 수 없으며, 사람과 말 사이는 언제나 뜻이 통하지 못하여 사람은 툭하면 욕질이 일쑤요, 말은 자나깨나 사람을 상대로 살기(殺氣)가 등등하니, 이런 것이 다 말을 다루는 솜씨가 틀렸다는 것이다. 또 말을 먹이는 방법이 옳지 못하다는 말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무릇 목마른 고통은 배고픈 고통보다도 심한 법이다. 우리나라 말들은 아직껏 찬 물을 안 먹이고 있다. 말의 성질인즉, 익힌 음식을 가장 싫어하니, 이는 말에게 더운 것은 병이 되기 때문이다. 콩이나 여물죽에 소금을 뿌리는 것은, 먹이를 짜게 하여 물을 켜도록 하려는 때문이요, 물을 켜도록 하는 것은 오줌을 잘 누도록 하기 때문이요, 오줌을 잘 누도록 하는 것은 몸에 지닌 열을 풀게 함이요, 냉수를 먹이는 것은 정강이를 굳세게 만들고 발굽이 단단하게 만들기 위함이거늘, 우리나라 말들은 삶은 콩과 끓인 죽을 먹어, 종일을 달리면 벌써 신열을 못 이겨 병이 되고, 그리하여 한 끼라도 건너뛰어 죽을 못 먹게 되면 시들부들 몸을 못 가누며 느림뱅이 걸음을 걸어 길 낭패를 보기가 십상이다. 이것은 모두가 더운 죽을 먹인 탓이다. 이보다도 군마가 되고 보면 더운 죽을 먹인다는 것은 더욱 실책이다. 이것을 일러서 말 먹이는 방법이 틀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무엇을 가리켜 종자를 잘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인가. 말이란, 어떻든 커야지 작은 종자는 못 쓰는 법이요, 건장해야지 약해선 못 쓰며, 준수해야만 되지 노둔해서는 못 쓰는 법이다. 말에다가 무거운 짐을 싣고 먼 길을 달리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마는, 만일 그것이 필요하다면 이러한 토산말로써는 단 하루의 보통 집안 일도 치러 내지 못할 것이요, 또한 나라의 무비(武備)와 군용(軍容)을 돌보지 않는다면 모르겠으나, 만일 그것이 필요하다면 이꼴인 토산말로써는 단 하루도 군사를 치러 내지 못할 것이다. 오늘로 보아 우리와 청국(淸國) 두 나라는 태평으로 지나는 사이, 암놈 수놈 아울러 몇십 필쯤 청구한다 해서 저 큰 나라에서 이것쯤을 아끼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외국으로부터 말을 구해 들여, 이것을 사사로 기른다는 것이 좀 혐의쩍어 보인다면, 해마다 드나드는 사신들 편에 가만히 사들일 수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 근교에 널찍한 수초(水草) 좋은 땅을 골라, 10년 동안을 두고 새끼를 쳐 가면서 점차로 탐라를 비롯한 국내의 여러 군데에 목장을 퍼뜨려 종자를 개량해야 할 것이며, 또 새끼를 치게 하는 방법으로서는 반드시 주례(周禮)와 월령(月令)으로 표준을 삼아야 할 것이니, 주례에는 대개 말을 먹이는 데 수놈이 4분의 1을 차지한다 하였는데, 그 주석(注釋)에는, 그의 비위에 알맞게 하고 싶어함이니 생물은 기질이 같으면 마음도 같다고 했다. 그리고 정 사농(鄭司農)은 이르기를, ‘4분의 1이라는 말은 암놈 세 마리에 수놈 한 마리를 끼운다는 말이다.’ 했다. 월령에 보면, 늦은 봄 삼월쯤 되어 종마(種馬)와 종우(種牛)를 암놈 있는 목장에다 풀어 놓는다 하였는데, 진혜전(秦蕙田)은 말하기를, ‘말 먹이는 사람이 종마를 교대하여 부리되 그 몸을 너무 피로하지 않게 하여 기운과 혈기를 안정되게 할 것이요, 또 말을 맡은 관리는 반드시 여름에는 수놈을 치워 두어야 한다.’ 하였다. 암말이 새끼를 뱄을 때에는 수놈이 암놈 곁에 못 가도록 하는 것을 말 번식시키는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모두, 옛 임금들이 때를 맞춰서 생물을 길러 생물의 제 특성을 살린다는 뜻이다. 이제 중국에서는, 매년 봄날이 화창하고 풀들이 푸릇푸릇 돋을 때 수놈 목에다가 방울을 달아서 내놓아 흘레를 붙이면, 수놈 임자는 흘레의 대가로 닷 돈씩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말이나 노새 새끼를 낳을 때 수놈으로 준수한 놈을 낳으면, 또 다시 닷 돈을 받는다. 낳은 새끼가 신통하지 못하거나 털빛이 좋지 못하고 길들이기도 어려울 때는, 아비말은 반드시 불알을 까버려 쉽게 종자를 퍼뜨리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종자를 특별히 크고 성질이 길들이기 좋은 것으로만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목장을 감독하는 관리들이 이런 생각을 못하고, 덮어놓고 토산말로만 종자를 받기 때문에, 낳으면 낳을수록 종자는 자꾸만 작아지게 되어, 필경은 똥통이나 나뭇짐 한 짐도 변변히 견디지 못할 만큼 되었으니, 하물며 한 나라의 군국(軍國)의 수요에 이바지할 수 있으랴. 이런 것이 곧 좋은 종자를 못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관직에 있는 자가 목마에 무식하다는 말은 무엇을 두고 이른 것인가. 우리나라 벼슬하는 양반들은 일반 허드렛일은 알려고도 않으려는 버릇들이 있어서, 옛날 어디서는 여럿이들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가 마부에게, 말에게 콩을 좀 더 주라는 말을 한 마디 했다가, 사람이 좀스럽다고 이조(吏曹)의 전랑(銓郞 좌랑(佐郞))에게 버림을 받은 일까지 있었고, 요즘은 어떤 학사가 평소에 말을 사랑하는 버릇이 있어, 말을 잘 고르는 법이 백락(伯樂)이나 다름없었으나,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옛적에는 양고기 잘 굽는 도위(都尉)가 있다더니, 지금 세상에는 말 잘 다루는 학사가 있네 그려.’ 하며 비방하여, 까다롭기 짝이 없다. 한 나라의 큰 정책으로 이를 고려하지 않고, 도리어 수치로 삼아 하인들의 손에만 맡겨 두고 있으니, 비록 그 직책은 감목(監牧)이라고는 하지마는 사람은 유품(流品)이어서, 목마의 지식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이것은 실로 능력이 없다기보다도 배우기를 사리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들어서, 관원들이 목마에 무식하다고 나무라는 것이다.

옛날 당()의 초기(初期), 암컷 수컷이 섞인 말 3천 필을 적수(赤水)의 언덕에서 몰아 내어 농우(隴右 감숙성의 서쪽)에다 옮기고는, 태복(太僕 목축을 맡은 고관) 장만세(張萬歲 당 태종 때 저명한 목축가)로 하여금 감목하게 하였다. 정관(貞觀)으로부터 인덕(麟德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까지 이르는 동안에 말은 70만 필로 번식되었는데, 무후(武后) 때는 말이 줄어들었으나, 당 명황(唐明皇 당 현종(唐玄宗)) 때에 아직도 24만 필이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왕모중(王毛仲)장경순(張景順) 등으로 한구사(閑廐使)를 삼아 여남은 해 동안을 먹인 결과, 43만 마리로 불었다. 개원(開元) 13(725)에는 명황이 동쪽으로 가서 태산(泰山)에 제사할 제, 말 몇만 필을 털빛에 따라 대열을 지어 놓은 것이, 멀리서 바라보면 비단필처럼 보였다고 하니, 이것은 담당한 관직에 적당한 사람을 얻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말을 좋아하고 말을 잘 먹일 줄 아는 자를 얻어 목마하는 행정을 맡긴다면, 비록 말 잘 치는 학사라는 기롱을 들을망정, 태복 벼슬감으로서는 맞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와서,

 

연암 박 선생님이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다. 기공의 심부름하는 이가 나를 가리켜 준다.

그는 곧 내게 읍하면서 몹시 기뻐하는 얼굴이, 마치 옛 벗을 만나는 듯하였다. 그는,

 

저는 바로 광동(廣東) 안찰사(按察使) 왕노야(汪老爺)의 청지기온데, 우리 댁 노야께옵서 그저께 선생님을 만나뵙고는 퍽도 기뻐하시와, 내일 정오쯤은 꼭 다시 찾아뵙겠다고 하시면서, 절강(浙江)에서 만든 부채에 금칠로 서화 그린 것을 올리겠다고 하십디다.”

한다. 나는,

 

전일은 왕공(汪公)의 과분한 사랑을 입고서도 아무런 대접을 못했는데, 먼저 귀한 선물까지 받는다는 것은 도리어 당치 않은가 하오.”

했더니, 그는,

 

제가 이번에 갖고 온 것은 아닙니다. 노야께서 오실 적에 몸소 지니고 오시겠답니다. 명일 정오 선생님께서는 부디 다른 데 출입하시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약속하지요. 그런데 댁은 고향이 어디고, 성함은 뉘신지요.”

하였더니, 그는,

 

저는 강소(江蘇) 사람이요, 성은 누(), 이름은 일왕(一旺)이며, 호는 원우(鴛圩)라 한답니다. 일찍이 왕노야를 좇아서 광동에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귀국을 떠나신 지가 몇 해나 되셨는지요.”

한다. 나는,

 

금년 오월에 고국을 떠났습죠.”

하였더니, (),

 

우리 광동에 비하면, 오히려 문 밖이나 다름없군요.”

하고는, 그는 또,

 

귀국 황제의 연호(年號)는 무어라 부릅니까?”

한다. 나는

 

무슨 말씀이오.”

하고 되물었더니, 누는,

 

황제의 기원 연호 말이외다.”

한다. 나는,

 

우리나라는 중국의 기원을 쓰고 보니, 어찌 따로이 연호가 있겠소. 금년이 곧 건륭 45년이죠.”

하였더니, 누는,

 

귀국의 임금은 중국과 대등한 천자가 아니옵니까?”

한다. 나는,

 

만국이 한 천자를 받들고, 천지가 모두 대청(大淸)이요, 해와 달이 다 건륭인가봅니다.”

하였더니, 누는,

 

그러시다면 관영(寬永)이니 상평(常平)이니 하는 연호는 어디에서 난 것이옵니까?”

한다. 나는,

 

그게, 무슨 말씀이오?”

하였더니, 누는,

 

제가 바다에서 표류해 온 귀국의 배에서 보았는데, 관영통보(寬永通寶)라는 돈을 잔뜩 실었습디다.”

한다. 나는,

 

그건, 일본(日本) 사람들이 참칭한 연호요, 우리나라의 것은 아니오.”

하였더니, 누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행동거지라든지 말하는 태도로 보아서는, 얼굴만 풍후하고 맑은 듯하나, 어딘지 무식해 보인다.

당초 그의 묻는 바가 무슨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요, 돈이란 워낙 금물인데도, 그가 묻는 까닭은 금물(禁物)이라고 해서 물은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를 정말 천자가 있는 나라로만 알았기 때문에 시방의 연호까지도 물었던 것이요, 그가,

 

귀국 황제.”

하고 묻는 그 한 마디 말에 벌써 그의 무식을 알 수 있겠고, 또 비록 관영이니 상평이니 하는 것들을 우리나라 연호로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못 쓸 것을 쓰는 것인 줄도 모르는 모양이다.

또 우리나라의 표류한 배가 돈을 실었다손 치더라도 그리 이상해할 일도 아니지마는, 관영통보를 한 배나 가득 실었을 리야 어디 있을 것인가. 그는 필시 관영통보를 구경하고 또 상평통보를 구경했던 것이 뒤범벅이 되어, 모두 우리나라 돈인 줄만 알았던 모양이다.

그는 정말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책력을 쓰는 줄도 몰랐고, 돈을 보고는 우리나라에도 연호가 있는 줄만 알았던 모양으로, 특별히 다른 의심을 갖고 내 속을 떠 보려고 물었던 것이 아님을 알았다.

누가 차를 다 마시자,

 

내일은 부디 다른 데 출입을 말아 주셔요.”

하고 거듭 부탁한다. 내가 고개를 끄덕인즉, 그는 곰곰 섭섭해하는 빛을 보이면서 한 번 읍하고 가버린다. 나는 수역을 보고,

 

돈을 금하는 것은 대관절 무슨 까닭이오?”

하고 물었더니, 수역은,

 

별반 약조된 일은 없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안에서는 중국 돈을 쓰는 것을 금했고, 또 작은 나라로서 돈을 따로 지어 쓴다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하기에, 나는,

 

옛날 제 태공(齊太公 여상(呂尙)의 봉호)이 경중(輕重) 구부(九府)를 두었지마는, ()의 천자가 이를 금한 적이 없었고, 또 돈을 근래에 와서 쓰기 시작하기는 숙종(肅宗 이돈(李燉)) 경신년(庚申年 1680)이니까, 올해는 벌써 101년이나 지났은즉, ()의 초기에 두 나라가 맺은 약조에도 이런 금법이 들지 않았던 것 같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세종(世宗 이도(李祹)) 때 돈을 한번 지어서 한 7, 8년 동안이나 쓰다가는, 민간에서 불편하다고 하여 다시 저폐(楮幣)를 쓰게 되었고, 인조(仁祖 이종(李倧)) 때 와서 두 번째로 돈을 지었다가 진작 말았으나, 모두 민간에서 불편하다 해서 그랬던 것이지, ()을 두려워하여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제 북도 지방은 돈을 금하고 무명을 돈으로 삼아 쓰고 있으니, 국경이 가깝다 해서 그런 것이요, 관서(關西) 지방으로는 의주로부터 압록강 가의 여러 고을까지 아직 한 번도 돈을 금한 적이 없으니, 이것도 알쏭달쏭하여 종잡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표류된 배가 지닌 돈을 금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였더니, 수역은,

 

그렇습니다. 지금도 역원(譯院 통역을 맡은 기관)에서는 몇 해를 두고 임시 변법으로 중국 돈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우리나라 은()은 자꾸만 귀해지고 중국 물건 값은 날로 비싸지니, 이로써 역원의 손해는 막심하지요. 은 한 냥으로 중국 돈 7()를 바꾸고 보니, 만일 중국 돈을 통용한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돈을 만들 수고도 없이 돈은 저절로 헐해질 것이요, 이익은 막대해질 것입니다.”

한다. 주 주부(周主簿)가 있다가,

 

조선통보(朝鮮通寶)는 한()의 오수전(五銖錢)보다도 더 잘 되었을뿐더러, 돈 중에는 가장 오래된 돈이기 때문에, 귀신이 붙어 점치는 돈으로 쓴다죠.”

하기에, 나는,

 

오래 돼서 귀신이 붙다니.”

하였더니, (),

 

이 돈은 기자(箕子) 때 돈으로, 중국 사람들이 보면 의당히 커다란 보물로 삼을 텐데, 애석도 하이, 이걸 못 갖고 와서.”

한다. 나는,

 

이건, 세종 때 지은 돈이야. 기자 때에 해자(楷子)가 어디 있었어. () 동유(董逌)의 전보(錢譜)에 의하면 우리나라 돈이 네 가지 실렸는데, 삼한중보(三韓重寶)삼한통보(三韓通寶)동국중보(東國重寶)동국통보(東國通寶)만 실렸지 조선통보는 실리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돈이 오랜 적 돈이 아닌 것을 알 것이네.”

하고 설명해 주었다.

오후에는 세 분의 사신이 대성전(大成殿)에 배알하였다. 주자(朱子)의 석차를 높여 십철(十哲)의 아랫자리에 모셔 두었다. 위패(位牌)는 모두 번들번들한 붉은 칠을 하고 금자로 썼는데, 옆에는 만주글자로 썼다. 대성문(大成門) 바깥벽에는 검은 빗돌을 둘러 세우고, 강희옹정과 지금 황제의 훈시와 친히 지은 학규(學規)를 새겨 두었으며, 마당에 세운 빗돌은 작년에 세웠다는데, 역시 황제가 세운 것이라 한다. 그리고 대성전 뜰에는 한 길 남짓 되는 향정(香鼎)을 두었는데, 아로새긴 솜씨는 말할 수 없이 정교했다. 전각 안에는 위패 앞마다 작은 향로 한 개씩을 두었는데, 모두 건륭(乾隆) 기해제(己亥製)라 새겨져 있다. 위패 앞마다 붉은 운문단(雲紋緞) 휘장을 드리웠고, 양쪽 행랑채 안 위패들 앞에 차려 놓은 것도 본전의 내용과 다름없이 장엄하고도 화려한 품이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삼사는 돌아와 각기 청심환 몇 알과 부채 몇 자루씩을 추 거인(鄒擧人) 사시(舍是)와 왕 거인(王擧人) 민호(民皥)에게 보냈다.

숭정(崇禎) 갑술년(1634) 6 20일에 명()의 칙사(勅使) 노유령(盧有齡)이 우리나라로 나왔는데, 그는 바로 환관(宦官)이다. 그는 24일에 성균관(成均館)에 나아가 참배를 하면서 참렬했던 유생들에게, 백금 오십 냥을 내놓은 일이 있었다. 이제 우리 사신들이 큰 나라에 와서 성묘(聖廟)를 배알하면서 공부하는 두 명 거인에게, 겨우 변변하지도 못한 환약과 부채 따위를 선물로 보낸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몸소 두 선비가 있는 숙소를 찾아서,

 

창졸간에 나선 나그네의 처지라, 아무 것도 지닌 것이 없어 변변하지 못한 환약과 부채를 올린다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고 말했더니, 두 거인은 허리를 굽히고 사례를 한다.

 

주인된 도리로 인도한 것이 무슨 수고랄 것이 있겠습니까. 여러분께서 이토록 분에 넘치는 선물을 주시니 충심으로 감사하옵니다.”

저녁을 치른 뒤에, 왕혹정(王鵠汀)이 학도 아이를 시켜 붉은 종이 편지 쪽지를 한 장 보내 왔다. 그 사연에는,

 

왕민호는 삼가 연암 박 노선생(朴老先生)님께 부탁을 드리나이다. 수고스러우시겠사오나 여기 천은(天銀) 두 냥을 보내오니, 청심환 한 알만 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뜻이다. 나는 보내온 은을 곧 돌려 보내면서 진짜 청심환 두 알을 보냈다.

저녁 으스름녘에, 황제로부터 사신은 황성(皇城)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일행은 부산하게 밤이 이슥하도록 길 떠날 치장을 차렸다. 밤에 기려천(奇麗川)과 작별하였다. 여천은,

 

“18일에 열하를 출발하여 25일에는 북경에 도착해서, 26, 7, 8 사흘 동안은 두루 작별 인사를 다니고, 9 6일에는 선산에 성묘를 갔다가 9일에는 집으로 돌아와, 11일에는 귀주(貴州)로 떠날 터인데, 떠나는 전날은 집에서 기다릴 터이니 꼭 왕림해 주십시오.”

하기에, 나는 응락하고, 다시 왕혹정에게 작별차로 들렀다. 혹정은 눈물을 지으면서,

 

이 밤에 길이 이별을 하면, 또 뵈올 기약이 없겠소이다. 더구나 다가올 밝은 달밤에는 그 심회를 어찌하오리까.”

한다. 이는 전일, 추석날 달밤에 명륜당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자고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학지정(郝志亭)의 처소를 찾았더니, 지정은 다른 곳에 자러 나가고 없어 서운하기 짝이 없었다. 또 윤형산(尹亨山)에게 들렀더니, 형산은 눈물을 닦으면서,

 

내 나이 늙고 보니, 이제야 아침 이슬이나 다름없나 봅니다. 선생은 아직 좋은 나이로, 또 다시 연경 걸음이 계시게 된다면 응당 오늘 밤 생각을 하실 거외다.”

하고는 술잔을 들어 달을 가리키면서,

 

달 아래 이 이별을 하고 보니, 다른 날 만 리 밖에 계신 선생이 그리울 적엔 저 달을 보고 선생을 대하는 듯하리다. 보아하니, 선생은 술도 잘 자시고, 또 한창 시절에 호색하실 테라, 이제부턴 부디 몸조심하시와 수련의 길을 찾도록 하시옵소서. 저는 18일에 연경으로 돌아갈 테니, 선생이 만일 그 때까지 귀국하시지 않으셨거든, 다시 한 번 찾아 주십시오. 동단패루(東單牌樓) 둘째 골목[衚衕] 둘째 집 대문 위에 대경(大卿 대리시경(大理寺卿)) 편액이 붙어 있는 것이 곧 저의 집이올시다.”

한다. 그리고는 서로 악수하고 하직하였다.

 

 

[D-001]축어(柷敔) : 풍류를 시작하거나 그칠 때 치는 나무로 만든 악기.

[D-002]초헌(貂軒) : 종이품(從二品) 이상 문관이 타던 외바퀴 달린 가마.

[D-003]삼영(三營) : 훈련원(訓鍊院)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합칭. 삼군영(三軍營)삼군문.

[D-004]주례(周禮) : 십삼경(十三經)의 하나. 주공(周公)이 지었다 전하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D-005]월령(月令) : 예기(禮記)의 한 편명으로 매달마다 정치적 행사에 관한 요강을 적어 놓은 것.

[D-006]정 사농(鄭司農) : 후한(後漢)의 명신 정중(鄭衆). 사농은 그의 벼슬. 주례의 해석이 있다.

[D-007]진혜전(秦蕙田) : 청의 건륭 때 저명한 학자. 경술(經術)과 독행(篤行)으로 이름났다. 자는 수봉(樹峯). 호는 미경(味經)

[D-008]양고기 …… 도위(都尉) : 후한 때 유현(劉玄)의 고사. 벼슬을 몹시 남발하여 양의 염통 요리를 하는 자는 도위를 주었고, 양의 머리로 요리를 잘하는 자에게는 관내후(關內侯)를 주었다.

[D-009]무후(武后) : 측천무후(則天武后) 무조(武曌).

[D-010]왕모중(王毛仲) : 고려(高麗) 사람으로 당 현종 때의 유명한 목축가.

[D-011]관영(寬永) : 일본 후수미(後水尾)명정(明正) 천황 때의 연호(1624~1643).

[D-012]상평(常平) : 상평통보(常平通寶). 조선 인조(仁祖) 11년에 처음 지었고, 숙종(肅宗) 때 두 번째 지었던 엽전.

[D-013]구부(九府) : 모든 재물과 돈을 관리하는 아홉 곳의 관부.

[D-014]저폐(楮幣) : 지폐(紙幣). 한 장에 쌀 서 되.

[D-015]오수전(五銖錢) : 한 무제(漢武帝) 때 삼수전(三銖錢)이 지나치게 가볍다 해서 새로 지은 돈.

[D-016]동유(董逌) : 북송 말년의 학자. 자는 언원(彦遠).

[D-017]십철(十哲) : 공자의 뛰어난 10명의 제자. 안연(顔淵)민자건(閔子騫)중궁(仲弓)재아(宰我)자공(子貢)염유(冉有)계로(季路)자유(子游)자하(子夏).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