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열하일기

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熱河日記) -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은인자중 2023. 7. 13. 09:55

 

https://blog.naver.com/karamos/222580232510

 

열하일기(熱河日記) -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환연도중록(還燕...

blog.naver.com

 

열하일기(熱河日記) -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8 15일 신유(辛酉)에 시작하여 20일 병인(丙寅)에 그쳤다. 모두 6일 동안이다.

 

1. 가을 8 15일 신유(辛酉)

2. 16일 임술(壬戌)

3. 17일 계해(癸亥)

4. 18일 갑자(甲子)

5. 19일 을축(乙丑)

6. 20일 병인(丙寅)

 

 

 

가을 8 15일 신유(辛酉)

 

 

날씨가 맑고 잠깐 서늘하였다.

사신들이 서로 의논하되,

 

이제 우리의 사정은 마땅히 연경으로 돌아가야 될 것이나, 예부에서는 우리나라 사신을 경유하지 않고 가만히 정문(呈文)의 사연을 고쳤다니, 이는 비단 눈앞의 일이 해괴할 뿐 아니라, 이를 그대로 두고 변명하지 않는다면 장래의 폐단이 클 것인즉, 마땅히 다시 예부에 글을 제출하여 그들이 몰래 고친 것을 밝힌 연후에 길을 떠나야겠다.”

하고는, 곧 역관에게 시켜서 예부에 글을 제출하니,제독(提督)이 크게 두려워했는데, 대개 덕상서(德尙書)에게 먼저 통했던 때문이다. 상서 등도 크게 두려워하여 우리에게 위협을 더하되,

 

이 일에 대한 허물을 장차 우리 예부에다 넘기고자 하는 거냐. 예부에서 죄를 얻는다면 너희 사신인들 좋겠는가. 그리고 너희들 전주(轉奏)한 정문이야말로 사연이 모호하여 전연 성의를 표한 실상이 없었으나, 내 실로 너희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방도로 꾸며 진달해서 그 영광스럽고 감격한 뜻을 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도리어 이렇게 한단 말이냐. 이는 실로 제독의 과오가 더 크겠지.”

하고는, 정문을 떼어 보지도 않고 물리쳤다. 사신이 그제야 제독을 맞이하여 예부에 대한 모든 사정을 상세히 물은즉, 그 이야기가 몹시 장황해서 알아듣기 어려워 한참 동안을 머엉하고만 말았을 뿐이다. 그리고 예부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곧 길 떠날 것을 재촉하되,

 

사신 일행의 떠나는 시간을 적어서 곧 위에다 아뢰겠다.”

하니, 이다지 떠나기를 재촉함은 대개 다시 글을 제출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단이다. 이에 대한 일은 행재잡록(行在雜錄) 중에 상세히 보인다.

아침밥이 끝난 뒤에 곧 길을 떠났다. 해가 벌써 점심나절이 지났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저 뽕나무 아래에 사흘 밤을 묵은 일도 오히려 추억에 남았다는데, 하물며 나는 우리 부자(夫子 공자)님을 모시고 엿새 밤을 지난 것임에랴. 또 더군다나 그 자고 나온 곳이 신선하고 화려하여 저절로 잊히지 않는다. 내 일찍부터 과거를 폐하여 하찮은 진사(進士) 하나도 이루지 못했은즉, 비록 국학(國學)에 몸을 수양하고자 한들 얻을 수 없음도 사실이거늘, 이제 별안간 나라를 떠나서 만 리 머나먼 변새 밖에 와 엿새 동안을 노닐어 마치 나에게만 고유한 일인 것같이 생각되니,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느냐. 뿐 아니라 우리나라 선비 중에 능히 멀리 이 중국의 한복판에서 놀아 본 이로서 신라의 최고운(崔孤雲) 치원(致遠)이나 고려의 이익재(李益齋) 제현(齊賢)과 같은 이도 비록 서촉(西蜀)강남(江南)의 땅을 두루 밟았으나, 새북(塞北)에야말로 이를 길이 없었음은 사실이다.

이로부터 천백년(千百年) 뒤일지라도 몇 사람이나 다시 이곳에 걸음을 할는지도 모르는 일이겠는데, 나의 이번 걸음에는 기정(沂鄭)영빈(潁濱)의 수레 자국과 말 발자국이 모두 선하게 눈앞에 벌였으니, 아아, 슬프도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아무런 질정(質定)된 일이 없음이 어찌 이러할 줄이야 알았으리오.

광인점(廣仁店)삼분구(三坌口)를 거쳐 쌍탑산(雙塔山)에 이르러서 말을 멈추고 한 번 바라본즉, 참으로 기절(奇絶)하기 짝이 없다. 바위들은 결과 빛이 마치 우리나라 동선관(洞仙館)의 사인암(舍人巖 바위 이름)과 같고, 높이 솟은 탑의 모습은 금강산(金剛山)의 증명탑(證明塔)과 같이 뾰족하게 둘이 마주 섰는데, 아래위의 넓이가 똑같아서 남에게 의지할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이 짝짐도 없고, 기울어짐도 없는 채, 정직 단엄하고 교려 웅특(巧麗雄特)하여 햇빛과 구름 기운이 마치 비단처럼 찬란할 뿐이다. 난하(灤河)를 건너서 하둔(河屯)에서 묵었다. 이날 모두 40리를 걸었다.

 

 

[B-001]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이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의 뒤에 위치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C-001]가을 8 : ‘수택본에는 이 한 구절이 탈락되었다.

[D-001]저 뽕나무 ……  : 불교에서 인연설을 설명할 때에 쓰는 고사.

[D-002]최고운(崔孤雲) 치원(致遠) : 우리나라 한문학의 문을 연 초조(初祖). 고운은 호요, 치원은 이름.

[D-003]이익재(李益齋) 제현(齊賢) : 고려의 저명한 정치가문학가. 익재는 호요, 제현은 이름이며, 자는 중사(仲思). 그의 시와 사()는 우리나라 몇천 년 이래의 제일이다.

[D-004]동선관(洞仙館) : 황해도 동선령(洞仙嶺)에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6일 임술(壬戌)

 

 

개다.

아침에 일찍 길을 떠나 왕가영(王家營)에서 점심을 먹고 황포령(黃舖嶺)을 지날 제, 나이 스무 남은 살 된 어떤 귀족 청년 하나가 붉은 보석과 푸른 깃으로 장식한 모자를 쓰고 검은 말을 탄 채 달려가는데, 그 앞에 한 사람이 가고 뒤에 따른 자가 기병 30여 명이나 되며, 모두들 금안(金鞍)준마(駿馬)에 의관의 차림이 선명하고도 화려하고, 혹은 화살을 지기도 하고, 혹은 조총(鳥銃)을 메기도 하고, 혹은 다창(茶鎗)을 받들기도 하였으며, 혹은 화로를 들고서 번개처럼 달리면서도 벽제(辟除) 소리 한 마디 내지 않는데, 다만 말굽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그 구종군에게 물었더니 그는,

 

황제의 친 조카 예왕(豫王)이십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 뒤에는 태평거가 따라가는데, 힘센 노새 세 필로 멍에를 짓고는 초록빛 천으로 겉을 가리고 사면엔 유리를 붙여서 창을 내었으며, 그 위에는 파란 실그물로 얽고 네 모서리에는 술을 드리웠다. 대체 귀족들이 탄 가마나 수레는 모두 이런 것들로 꾸며서 그 계급을 표시하였다. 그 수레 속은 마치 보일 듯하나 뵈지는 않고, 다만 여인의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얼마 아니 되어 노새가 멎고 오줌을 흘리는 순간, 우리의 말도 오줌을 눈다. 수레 속으로부터 여인이 북쪽 차창을 열고 다투어 가며 얼굴을 내미는데, 아름답게 뭉친 머리에는 구름이 얽힌 듯, 귀를 꿴 구슬들은 별이 흔들리듯 노란꽃과 파란 줄구슬이 꿈인 듯이 얽히어, 예쁘고도 화려함이 마치 낙수(洛水)의 놀란 기러기와 같은데, 잠자코 창을 닫고 선뜻 가버린다. 그들은 모두 셋인데, 예왕을 모시는 궁녀(宮女)라 한다.마권자(馬圈子)에 이르러서 묵었다. 이 날에는 80리를 걸었다.

 

 

[B-001]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이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의 뒤에 위치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7일 계해(癸亥)

 

 

개고 따뜻하다.

새벽에 길을 떠나 청석령(靑石嶺)을 지날 제, 때마침 황제가 계주(薊州)동릉(東陵)에 거둥하게 되었으므로, 벌써 도로와 교량을 닦되 한가운데에는 치도(馳道)를 쌓고, 각 고을에서 미리 역군을 징발하여 높은 데는 깎고 깊은 곳은 메우되, 맷돌로 다지고 흙손으로 바른 듯 마치 베[]를 펴놓은 듯싶고, 표목을 세웠으되 조금 굽은 것도 없고 기운 것도 없으며, 치도의 넓이는 두 길이요 좌우의 협로(夾路)는 각기 한 길 남짓 하다. 시경에 이르기를,

 

주 나라 가는 길이 숫돌처럼 바르구나 / 周道如砥

라 하였더니, 이제 이 길이 숫돌처럼 되었으니 그 비용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흙을 메고 물을 지는 이들이 가는 곳마다 떼를 이루어서, 허물어지면 곧 흙으로 보수하되, 한 번 말굽이 지나간 곳이면 벌써 흙손질하고는, 나무를 새끼로 어긋나게 묶어 치도 위로 다니는 자들을 금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반드시 그 나무를 거꾸러뜨리며 놋줄을 끊어 버리고는 가버린다. 나는 곧 마부에게 타일러 치도 밑으로 가게 했다. 이는 감히 못해서 그런 것이겠는가마는, 역시 차마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길 한편에는 반드시 두어 걸음마다 돌담을 쌓았는데, 높이는 어깨에 닿을 정도이고, 넓이는 대략 여섯 자쯤 되는데, 마치 성()에 치첩(雉堞)이 있는 듯싶으며, 교량치고는 난간이 없는 게 없고, 돌난간에는 천록(天祿 상상적으로 생긴 짐승)이나 사자 모양을 앉혔는데, 모두들 입을 열어 생동하는 듯싶고, 나무 난간인즉 단청이 눈부시다. 물이 넓은 곳엔 나무쪽을 짜서 광주리처럼 만들되 둘레는 거의 한 칸, 길이는 한 길쯤 되게 해서, 물가의 자갈을 채워 물속에 굳게 꽂아서 다리 기둥을 만들었고, 난하(灤河)나 조하(潮河)에는 모두 수십 척의 큰 배를 띄워서 부교(浮橋)로 삼았다.

아침밥을 삼간방(三間房)에서 먹을 제 우리 일행이 점방에 들렀는데, 어제 길에서 만난 예왕(豫王)이 관왕묘에 들렀으므로, 우리가 든 점방과 아래위 사이다. 그들은 모두 다른 점방에 흩어져 떡고기차 따위들을 사서 먹곤 한다. 내가 우연히 관왕묘를 구경하기 위하여 걸어서 들어간즉, 문에는 지키는 자도 없이 뜰 안이 물을 끼얹은 듯 아무런 사람 하나도 없이 괴괴하였다. 나는 애당초 예왕이 그 속에 머무른 줄을 몰랐던 것이다. 뜰 가운데에는 석류가 주렁주렁 달려 있고, 낮은 솔은 용이 서린 듯이 굼틀굼틀한다. 내가 그 곳을 바장이며 두루 구경하고 섬돌을 디디고 마루턱으로 오르려는 즈음에, 어떤 한 아름다운 청년이 모자를 벗은 채 맨머리로 문밖으로 쫓아나와 나를 보고 웃으며 맞이하되,

 

씬쿠[辛苦].”

하니, 이 말은 대체로 나를 위로하는 뜻이다. 나는,

 

하오아[好阿].”

하고 답하였다. 이는 곧 우리나라 사람들의 안부(安否)를 묻는 인사의 말이다.

그 섬돌 위에는 아로새긴 난간이 있고, 난간 아래에는 교의 둘이 있으며, 그 가운데에 붉은 탁자를 놓고는, 나에게 줘이줘(坐着)”라고 하는 것은 주인이 손님에게 앉기를 청함이다. 혹은 칭춰(請坐) 칭줘라고도 하고, 혹은 줘저 줘저라고 거듭 부르기도 하려니와, “() 칭 칭을 잇달아 내기도 하니, 이는 정중하고도 간곡함을 표함이다. 그리고 길가에 오면서 어떤 집에 들어갔을 때마다 주인들은 모두 그렇지 않은 이가 없으니, 이는 대개 손님을 접대하는 예식이다. 그리고 그 청년이 모자를 벗고 사복(私服)을 입었으므로, 나는 애초에 그가 주승(主僧)이 아닌가 하였는데, 급기야 상세히 살펴본즉, 그가 곧 예왕인 듯하다. 나는 그래도 아는 척하지 않고 심상하게 봐 버리고, 그도 역시 교만하고 고귀한 서슬을 보이지 않으나, 붉은 빛이 얼굴에 부풀어올랐음을 보아서 아침 술을 많이 마셨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는 곧 손수 술 두 잔을 따라서 나에게 권한다. 나는 연거푸 두 잔을 기울였다. 그는 나더러,

 

만주 말을 할 줄 아셔요.”

하고 묻기에, 나는,

 

모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가 별안간 난간 밑을 향해서 한번 토하자, 술이 마치 폭포처럼 쏟아진다. 문안을 돌아보며,

 

량아(凉阿 시원하다).”

한다. 웬 늙은 환시[老閹] 하나가 방안에서 담비 갖옷[貂裘] 한 벌을 갖고 나오더니, 손으로 나에게 나가라는 시늉을 하기에, 나는 곧 일어서서 나오며 난간 머리를 돌아본즉, 그는 오히려 난간에 비켜 앉았다. 그의 행동은 몹시 경박하고 얼굴은 유달리 창백하여, 조금도 위엄이 없이 마치 시정배의 아들 같았다.

아침밥이 끝난 뒤에 곧 떠나서 몇십 리를 나아갔다. 뒤에 백여 명이나 되는 말탄 사냥꾼이 멀리 산 밑을 바라보며 달린다. 독수리를 안은 자 10여 명이 산골에 흩어져 갔다. 한 사람은 큰 독수리를 안았는데, 독수리의 다리는 마치 사냥개 뒷다리처럼 살지고, 누런 비늘이 정강이에 번쩍인다. 검은 가죽으로 머리를 싸매고 눈을 가렸으며, 그 남은 것들도 모두 눈을 가렸으니, 이는 그것들이 행여나 물건이 눈에 뜨이면 함부로 퍼덕이다가 다리에 생채기를 내거나 또는 위협을 느낄까 보아서 그런 것이고, 또는 그렇게 해야만 눈 정기를 기르는 동시에 사나운 성질을 그대로 지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제야 말에서 내려 모래 위에 앉아서 담뱃대를 털어 담뱃불을 붙였다. 그 중 활과 살을 몸에 두른 자 하나가 역시 말에서 내려 담배를 넣더니 불을 청한다. 나는 그제야 그에게 말을 물었더니, 그는,

 

황제의 조카 예왕께옵서, 열다섯 살 되는 황손과 또 열한 살 되는 황손 둘을 데리고 열하로부터 북경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사냥하시는 것이옵니다.”

하기에, 나는,

 

그럼, 소득이 얼마나 되우.”

하였더니, 그는,

 

사흘 동안에 겨우 독수리 한 마리를 얻었답니다.”

한다. 그 즈음에 별안간 옥수숫대 꺾이는 소리가 나며 등골이 서늘해진다. 말 탄 이 하나가 나는 듯이 밭 가운데로부터 달려 나오는데, 화살을 힘껏 버틴 채 안장 위에 엎드려 달리되 그의 희디흰 얼굴은 눈인양 눈부신다. 담배 태우던 자가 그를 가리키며,

 

저이가 열한 살에 드는 황손입니다.”

한다. 그는 토끼 한 마리를 쫓아 달렸는데, 토끼는 달리다가 모래 위에 넘어져 누워서 네 발을 모은다. 말을 빨리 달려 쏘았으나 맞히지 못하였다. 토끼는 다시 일어나 산 밑으로 달음질친다. 그제야 백여 명이 달려가 에워싸니, 아득한 평원에 티끌이 공중을 가리고 총소리가 진동하더니, 별안간 에워쌌던 것을 풀고 가버릴 제 티끌 그림자 속에 일단(一團)의 무엇이 감돌더니 아득히 그 자취가 보이지 않는다. 과연 토끼를 잡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말 달리는 법에 있어서는 어른이나 아이를 불구하고 모두 타고난 천재들이다.

대개 책문으로부터 연산관(連山關)에 이르기까지 높은 뫼와 험한 재가 많고 숲이 울밀하여 가끔 새들이 지저귀더니, 요동에서 연경까지 2천 리 사이에는, 공중에는 나는 새가 끊이고 땅에는 달리는 짐승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때마침 장마지고 날씨가 찌는 듯하나, 벌레나 뱀이 숲속에 다니는 것도 보지 못하였거니와, 개구리 소리도, 두꺼비 뛰노는 것도 보이지 않으며, 벼가 한창 누럴 때이지만 참새 한 마리가 내리지 않고, 물가 모래톱 근방에도 물새 한 마리가 보이지 않으며, 다만 이제묘(夷齊廟) 앞 난하(灤河)에서 비로소 두 쌍의 갈매기를 보았다. 그리고 까마귀까치솔개 따위는 흔히 도시 중에 모여듦에도 불구하고, 이 연경에선 역시 드물게 보이니 결코 우리나라 그것들의 공중을 가리고 나는 것과는 같지 않음을 느꼈다. 애초에는 이러한 변새의 수렵(狩獵) 지역에는 반드시 금수가 많으리라 생각하였더니, 이제 이곳의 모든 산은 갈수록 초목이 없고 새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아서, 비로소 호인들이 사냥으로써 생명을 유지함이 이와 같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장차 어느 곳에서 사냥을 하겠는지, 짐승들을 이렇게 절종시켰음은 이치에 맞는 일인지, 또는 짐승들이 별도로 도피할 곳이 있는지는 알 수 없겠다.

강희 황제가 위에 오른 지 20년 만에 오대산(五臺山)에 놀러 갔을 때 범이 숲속에서 뛰어나오매, 황제가 친히 쏘아서 죽였다. 그 때 산서(山西) 도어사(都御史) 목이새(穆爾賽)와 안찰사(按察使) 고이강(庫爾康)이 황제에게 여쭈어 그 땅 이름을 석호천(射虎川)이라 하고, 범의 가죽은 대문수원(大文殊院)에 간직하여 이제까지 전하고 있으며, 그는 또 친히 화살 서른 개를 쏘아서 토끼 스물아홉 마리를 잡았고, 그가 송정(松亭)에서 사냥할 때에 큰 범 세 마리를 쏘아 죽였는데, 모두들 그림을 그려서 민간에서 서로 팔고 사니, 이는 실로 신기한 기예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여러 공자(公子)들이 사냥할 때 재빨리 달리는 것을 구경한즉, 대체로 그들의 가법(家法)이 그러함을 알겠다. 만일 그 때 옥수수밭 속에서 범 한 마리가 뛰어나왔더라면, 비단 그가 기뻐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 리의 길을 멀리 온 나로 하여금 한 번 유쾌하게 했을 것인데, 이제 그렇지 못하였음이 한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장성 밖에 다다르니, 뫼에 잇달아서 성을 쌓았으므로 높낮이와 굽이가 생겼고 그 요충지(要衝地)에는 속이 텅 빈 돈대를 세웠는데, 높이는 예닐곱 발, 너비는 열네댓 발이나 되었다. 그런데 대체로 요충지에는 4, 50걸음 만에 돈대가 하나씩 있고, 조용한 곳에는 2백 걸음 만에 돈대 하나씩을 두었으며, 돈대마다 백총(百總 현대의 소위(少尉)에 해당)이 지키고, 열 돈대를 천총(千總 중위에 해당)이 지키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1, 2() 사이마다 방울 소리가 들린다. 만일 한 사람이 일이 있을 때에는 좌우에서 횃불을 들어 서로 나누어 전하매, 수백 리 사이에도 모두 재빨리 알아채고 예비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척 남궁(戚南宮)이 끼쳐 준 책략이라 한다.

옛날 육국(六國) 때에도 역시 장성이 있었다. ()의 이목(李牧)이 흉노(匈奴)를 크게 깨뜨려 10여만 명의 기병을 죽이고 첨람(襜襤)을 전멸시키며, 임호(林胡)누번(樓煩) 등을 깨뜨리고 장성을 쌓되, ()와 음산(陰山)으로부터 고궐(高闕)에 이르기까지 새 문을 만들어 운중(雲中)안문(雁門)대군(代郡) 등의 여러 고을을 두었고, ()은 의거(義渠 감숙성 지방에 있던 부족)를 멸한 뒤에 비로소 농서(隴西)북지(北地)상군(上郡) 등지에다 장성을 쌓아서 호족을 막았으며, ()은 또 동호(東胡)를 깨뜨려서 천 리를 넓히고 역시 장성을 쌓되, 조양(造陽)으로부터 양평(襄平)에 이르기까지 상곡(上谷)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요동(遼東) 등의 여러 고을을 두었다. 그리하여 진조 세 나라가 모두 저 세 곳에 새문을 둔 지가 오래고, 각기 장성을 쌓았으되 그 실에 있어서는 서로 잇달리어 북서에 뻗은 것이 벌써 만 리나 되었더니, ()이 천하를 통일하고 천자가 되자 곧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장성을 쌓되 지세를 따라 험한 곳을 이용하여 변새지를 눌러서, 임조(臨洮)로부터 요동에 이르기까지 만 리에 뻗었으니, 생각하건대 몽염이 옛성을 모두 증수(增修)한 것이었던가. 또는 연조의 옛 성터에다 새로 쌓았던 것인지는 알 수 없겠다. 몽염의 말에,

 

이 성은 임조에서 시작되어 요동까지 잇달렸다.”

하였으니, 이 성이 만여 리에 뻗은 그 사이에 지맥(地脈)을 끊지 않을 수 없겠고, 또 사마천(司馬遷)이 북변(北邊)에 가서 몽염이 쌓은 장성을 보매 그 역정(驛亭)과 돈대가 모두 산을 끊고 골을 메운 것을 보고 그가 가벼이 백성의 힘을 허비하였음을 책망하였다. 그렇다면 이 성은 정말 몽염이 쌓은 것으로, 조의 옛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 성은 모두 벽돌로 쌓았으며, 벽돌은 모두 한 기계에서 찍어 낸 것으로서 두껍고 얇음이나 크고 작은 것이 조금도 차이가 없고, 성 밑 돈대는 돌을 다듬어서 쌓았으되 땅 밑에 포갠 것이 다섯이요, 땅 위에 포갠 것이 셋이라 한다. 그 돈대는 가끔 무너진 곳이 있었다. 그 높이는 댓 길쯤 되나, 흙을 섞지 않고 오로지 벽돌에 석회를 발랐는데, 종이를 가린 듯이 얇아서, 겨우 벽돌을 이어붙인 것이 마치 나무에 아교를 합친 듯싶다. 성의 안팎이 대패로 깎은 듯하되, 아래는 넓고 위는 좁아서 비록 대포(大礮)와 충차(衝車)라도 갑자기 깨뜨리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대개 그 바깥 벽돌은 비록 이지러졌으나, 그 속에 쌓은 것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담결핵(痰結核)을 다스리는 데에는 천년 묵은 석회에다가 초를 타서 떡을 만들어 붙이곤 한다. 묵고 오래 된 석회로는 장성이 으뜸이었으므로, 으레 사신이 오가는 편에 이를 구했던 것이다. 내 일찍이 젊었을 때 주먹만큼 큰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제 와서 보고 결코 그 참된 것이 아님을 발견하겠다. 길가의 모든 성의 제도는 모두들 장성과 다름없으니, 어디에서 주먹처럼 큰 석회를 얻을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일부러 새외로 멀리 돌아서 구득하였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길가의 무너진 성 밑을 지나다가 주운 것에 지나지 않으리라 생각될 뿐이다.

돌아오는 길에 고북구(古北口)에 들렀다. 내 저번에 새문을 나갈 때에는 마침 밤이 깊어서 두루 구경하지 못하였더니, 이제 그와 반대로 대낮이므로 수역과 더불어 잠깐 모래 벌판에 쉬다가 곧 첫째 관()으로 들어섰다. 말 수천 필이 관문이 메도록 서 있고, 둘째 관문을 들어갔더니 군졸 4, 50명이 칼을 차고 삑 둘러섰고, 또 두 사람이 의자를 맞대고 앉았다. 나는 수역과 함께 말에서 내려 조용히 걸었다. 그 둘은 기쁜 얼굴로 재빨리 앞에 와서 몸을 굽히며 읍하고 위안의 말을 간곡히 보내는데, 그 하나는 머리에 수정관(水晶冠)을 썼고, 또 하나는 산호관(珊瑚冠)을 썼다. 그들은 모두 수비하는 참장(叅將)이라 한다.

석진(石晉)의 개운(開運) 2(945)에 거란주(契丹主) 덕광(德光)이 침입하여 호북구(虎北口)로 돌아오다가, ()이 태주(泰州)를 치러 갔다는 말을 듣고 다시 군사를 통틀어서 남쪽으로 내려갈 제, 거란주가 수레 속에서 철요기(鐵鷂騎)의 기병(騎兵)에게 명령을 하고 말에서 내려 진군(晉軍)의 녹각(鹿角)을 빼고 들어갔었다. 대개 장성(長城)을 둘러 구()라는 이름을 지닌 곳이 무려 몇백이나 되었는데, 태원(太原 산서성에 있다) 분수(汾水)의 북에 역시 호북구라는 지명이 있으니, 그때 덕광(德光)의 군사가 기양(祈陽)으로부터 북으로 향해 갔던 바, 그 길이 아니고 보니 유주(幽州)단주(檀州)의 호북이 곧 이 관()이리라 생각된다. ()의 선조에 호()라는 휘()가 있으므로, 당에서 호()를 고쳐 고북구라 하였다. 송인(宋人)이 지은 사료행정록(使遼行程錄)에 이르기를,

 

단주(檀州)로부터 북으로 80리를 지나고, 거기에서 또 80리를 가서 호북구관(虎北口關)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단주의 고북구 역시 호북구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 선화(宣和) 3(1121)에 금인(金人)이 요병을 고북구에서 깨뜨렸고, 가정(嘉定) 2(1209)에 몽고(蒙古)가 금()에 침입하여 고북구에 이르매 금인은 물러가서 거용관(居庸關)을 지켰으며, ()의 치화(致和) 원년(1328)에 태정제(泰定帝 야손철목이(也孫鐵木爾))의 아들 아속길팔(阿速吉八)이 상도(上都 찰합이(察哈爾)다륜현(多倫縣))에서 임금이 되어 군대를 보냈는데, ()를 나누어 연()의 철첩목아(鐵帖木兒)와 대도(大都 북경)에서 싸울 때에 탈탈목아(脫脫木兒)는 고북구를 지키다가 상도의 군대와 더불어 의흥(宜興)에서 싸웠고, ()의 홍무(洪武) 22(1389)에 연왕(燕王)에게 명령을 내려 군사를 거느리고 고북구로 나가서 내안불화(乃顔不花)를 이도(迤都)에서 쳤고, 영락(永樂) 8(1410)에는 고북구 소관(小關)의 어귀와 대관(大關)의 바깥 문을 메워서 겨우 사람 하나 말 한 필을 용납하게 되었다는데, 이제 이 관은 다섯 겹이나 되는 문이 있으나 아무런 메운 흔적이 없음을 발견하였다.

대개 이 관은 천고의 전쟁을 치른 마당이므로, 천하가 한 번 어지러우면 곧 백골(白骨)이 뫼처럼 포개어지게 되니, 이야말로 진실로 이른바 호북구였다. 이제 태평이 계속된 지 1백여 년이나 되어서 네 경내(境內)에 병혁(兵革)의 어지러움을 보지 못하였을뿐더러, 삼과 뽕나무가 빽빽이 서 있으며, 개와 닭 울음이 멀리 들리어, 이와 같이 풍족한 휴양(休養)과 생식(生息)이야말로 한()() 이후로는 일찍이 보지 못한 일이었으니, 그들은 무슨 덕화(德化)를 베풀었기에 이 경지에 이르렀을까. 그러나 그 높음이 극도에 달하면 반드시 허물어짐은 이치가 으레 그러한 것인만큼, 이곳 백성이 전쟁을 치르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은즉, 아아, 앞으로 다가올 토붕(土崩)와해(瓦解)도 걱정이 아닐 수 없구려.

이 관()은 대개 뫼 위에 자리잡아, 비록 수많은 묏봉우리가 삥 둘렀으나 큰 사막이 오히려 눈앞에 보인다. 금사(金史)를 상고하면,

 

정우(貞祐) 2(1214)에 물이 넘쳐 흘러, 고북구의 쇠로 만든 관문을 허물어 버렸다.”

하였으니, 대개 되놈들이 중국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그의 나라가 상류(上流)에 웅거하여 형세가 병 목을 거꾸로 달아 놓은 것처럼 된 까닭이다. 내 어렸을 때에 어떤 어른이 백곤(伯鯀)의 홍수(洪水)를 메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변증(辨證)한 것이 기억에 떠올랐다.

 

중국에 커다란 근심 두 가지가 있으니, 곧 하()와 호()이다. 대개 백곤의 재주나 힘이나 인격이나 슬기 그 어느 것이나 저 되놈이 멋대로 날뛸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으므로, 그는 유주(幽州)와 기주(冀州)를 소개(疏開)하고 항산(恒山)과 대군(代郡)을 파서 구주(九州)의 물을 이끌어 사막에 끌어 대고는, 중국으로 하여금 도리어 그 상류에 웅거하여 되놈[]을 견제하기를 꾀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악(四岳) 역시 그의 제안을 옳게 여겨 한 번 시험해 보려 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시험해 보고 말 것이다.’가 곧 그것이다. 그러므로 요()는 비록 물을 거꾸로 따냄이 옳다고 여기지 않았건마는, 백곤의 변론이 몹시 강력하므로 반박을 하지 못하였으며, ()도 물의 역행이 마땅한 일이 아님을 알았지마는, 백곤의 재주와 슬기가 심히 뛰어났으므로 감히 간하지도 못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명령을 어기고 화합을 깨뜨린다.’가 곧 그것이었던 것이다. 대개 백곤의 사람됨이 사납고도 꼿꼿하였을뿐더러, 제 마음대로 의견을 주장하되, 오로지 되놈으로써 중국 만세의 걱정을 삼아, 저 높은 데까지도 물에 잠길 것은 눈앞의 둘째 일로 보고서, 지형도 측량하지 않고 공비도 아낌 없이 기어코 거꾸로 개울을 파서 거슬러 흐르게 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물이 거슬러 행함을 강수(洚水)라 하므로, ‘강수란 곧 홍수(洪水)이다.’라는 말이 곧 그것이다. 그러나 개울도 치고 구덩이도 파려니와, 소개도 하고 씻어 내기도 하는 도중에 지세가 점차 높아짐에 따라 흙이 저절로 메워지게 되었으니, 이가 이른바, ‘백곤이 홍수를 메웠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가 유독 무슨 마음으로 이처럼 커다란 물을 메워서 스스로 죄과를 범하였으며, 또 당시의 사악과 십이목(十二牧)은 어찌하여 한 목구멍에서 나다시피 그를 역천(力薦)하였으며, 또 요로서도 어떻게 차마 9년 동안이나 두고 보면서 그가 패할 것을 기다렸을까. 아아, 백곤이 만일 이 공업을 이룩하였더라면, 중국이 되놈을 막는 것이나 하()를 막는 계책이 한꺼번에 이룩되어 만세를 두고 힘을 입히는 동시에, 그의 커다란 공로와 거룩한 사업이 당연히 우()의 우위에 올랐을 것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 이곳 지형을 살펴본즉, 이는 맹랑한 말이다. 그리고 이백(李白)의 시에 이르기를,

 

황하수 깊은 물이 하늘 높이 내리는 듯 / 黃河之水天上來

이라 하였으니, 대개 그 지형이 서편이 높아서 황하가 마치 하늘 위로 내려 흐르는 듯싶다는 것이다.

관내(關內) 점방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 벽 위에 황제의 어필 칠절(七絶) 한 수가 붙어 있었다. 이는 공민(孔敏)에게 내린 것이다. 황제가 일찍이 남으로 순행하고는 곧장 열하로 돌아올 제, 모든 공씨(孔氏)가 나와서 배알하기에 황제가 이 시를 읊어 권장하였다. 그리하여 공씨의 문장(門長) 공민이 이에 발()을 달았는데, 황제의 은악(恩渥)과 영총(榮寵)을 극도로 포장하였을뿐더러, 벌써 돌에 새겨 널리 찍어서 이 점주(店主)에게 한 벌을 주고 갔다 한다.

그 시는 비록 변변하지 못하나 글씨는 묘하게 썼다. 점주가 나에게 이를 사라고 조르기에 시험조로 그 값을 물었더니, 그는 돈 서른 냥을 부른다. 식사가 끝난 뒤 곧 떠나서 셋째 관문에 들어갔다. 양편 벼랑에 석벽이 깎은 듯이 높이 서 있고, 그 가운데에는 차 한 대가 지나칠 수 있게 되었으며, 아래에는 깊은 시내와 커다란 바위가 더덕더덕하였다. 기공(沂公) 왕증(王曾)과 정공(鄭公) 부필(富弼)이 일찍이 거란에 사신갈 제 역시 이 길을 경유하였으므로, 그의 행정록(行程錄) 중에,

 

고북구는 양편에 준험한 석벽이 있고, 그 사이에는 길이 났으되, 겨우 수레를 용납할 만하다.”

하였음을 보아서 그가 이곳으로 지나간 것을 알 수 있겠다. 한 소사(蕭寺)에서 쉴 때, 거기에 영빈(潁濱)소철(蘇轍)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어지런 뫼가 둘렀으니 갈 곳 없음 의아하더니 / 亂山環合疑無路

가는 길 얽힌 채 시내 곁을 둘러 있네 / 小徑縈回長傍溪

꿈속에 잠긴 듯이 서촉 길을 헤매니 / 彷佛夢中尋蜀道

흥주에서 동편 골이 봉주에선 서라네 / 興州東谷鳳州西

송사(宋史)를 상고해 보면,

 

원우(元祐 1086~1094) 연간에 소철이 그의 형 소식(蘇軾)을 대신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고, 얼마 아니 되어 예부 상서(禮部尙書)의 직을 대리하여 거란에 사신갔으므로, 그의 관반(館伴)시독학사(侍讀學士)왕사동(王師同)이 능히 소순(蘇洵)소식의 글과 소철의 복령부(茯苓賦)를 외었다.”

하였으니, 이 시는 곧 문정공(文定公 소철의 시호)이 사신으로 갈 때에 이곳으로 지나치다가 쓴 것이리라. 살고 있는 중은 겨우 둘뿐이고, 난간 밑에는 바야흐로 오미자(五味子) 두어 섬을 말리고 있기에, 내 우연히 두어 낱을 주워서 입에 넣었다. 한 중이 주시(注視)하더니, 별안간 크게 노하여 눈을 부릅뜨며 호통하는데, 그의 행동이 몹시 흉패(凶悖)하였다. 나는 곧 일어서서 난간 가로 비켜 섰다.

마침 마두(馬頭) 춘택(春宅)이 담뱃불을 붙이러 들어섰다가, 그 꼴을 보고는 크게 노하여 줄곧 앞으로 다가서며,

 

우리 영감께옵서 더운 날씨에 찬물 생각이 나셔서, 이 자리에 가득 찬 것들 중에서 불과 몇 알 아니 되는 것을 씹어 침을 돋우려 함이거늘, 너같이 양심 없는 이 까까중놈아, 하늘에도 높은 하늘이 있고, 물에도 깊은 물이 있거늘, 이 당나귀처럼 높낮이도 분간하지 못하고 얕은 것과 깊은 것도 측량한 줄 모르는 이런 무례한 놈, 이게 무슨 꼴이냐.”

하며 꾸짖는다. 중은 모자를 벗어 던졌다. 입가에는 흰 거품이 부풀어 오르고 어깻죽지를 기웃거리면서 까치걸음으로 앞으로 나서서,

 

너희들 영감 내게 무슨 감정이 있어, 하늘 높다 하나 너나 두려워하지, 나는 두려울 게 없어. 제 아무리 관노야(關老爺)가 현령(顯靈)하고 태세(太歲)가 문에 들었다 하더라도, 난 그가 두려울 게 없어.”

한다. 춘택이 곧 그에게 뺨 한 대를 치고 이어서 수없이 우리나라의 무리한 욕지거리를 더한다. 중이 그제야 뺨을 손으로 가리고 비틀거리며 들어가 버린다. 나는 목청을 높여 춘택에게 요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였다. 춘택은 오히려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곧장 그 자리에서 싸워 죽이고 말 기세였다. 한 중은 부엌문에 서서 웃음을 머금은 채 편을 들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역시 말리지도 않는다. 춘택은 또 한 주먹으로 그를 두들겨 엎고는,

 

우리 영감께옵서 이 일을 만세야(萬歲爺 황제를 높여서 하는 말) 앞에 여쭙는다면, 네놈의 대가리를 쪼개 버리든지, 그렇지 않다면 이 절을 소탕하여 깨끗이 평지를 만들겠어, 이놈.”

하며 호통친다. 중은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며,

 

너희 영감 말이야, 공짜로 오미자를 훔치고, 또 네놈을 시켜 사발처럼 모진 주먹을 보내니, 이게 무슨 도리야.”

하며 꾸짖으나, 그의 기색은 차차 죽어 간다. 춘택은 더욱 기를 내어,

 

무슨 공짜야, 기껏해야 한 말이 되겠느냐, 한 되가 되겠느냐. 그까짓 눈꼽처럼 작은 한 알 때문에 우리 영감님의 높으신 위신을 깎았단 말이냐. 만세야께옵서 만일 이 일을 아신다면 너같은 까까중놈의 대가리통을 대번에 쪼개 버릴 거야. 그리고 우리 영감께옵서 이 일을 만세야께 여쭙는다면, 네놈이 우리 영감은 두렵지 않다지마는 만세야도 두렵지 않단 말이냐.”

하고, 폭언을 퍼부었다. 그제야 중이 기가 죽어서 다시 앙갚음의 말도 내지 못한다. 춘택은 또 무수히 욕지거리를 하는데, 세력을 피며 걸핏하면 만세야를 팔아 댄다.

이때에는 응당 만세야의 두 귀가 가려웠으리라 생각된다. 대개 춘택이 말끝마다 황제를 일컬으니, 그가 헛 세력을 믿고 성세를 과장하는 꼴이야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절도(絶倒)하게 할 일이다. 그 중은 진짜 그를 두려워하여, 만세야라는 석 자를 듣자 마치 뇌성이나 귀신을 본 것처럼 떨 뿐이었다.

그제야 춘택이 벽돌 하나를 뽑아서 중에게 던지려 한다. 두 중은 별안간 웃음을 지으며 달아나 숨어 버렸다가, 곧 산사(山楂 아가위) 두 낱을 갖고 와서 오히려 웃는 얼굴로 바치며 청심환을 요구한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이러한 짓은 청심환을 얻기 위함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의 마음씨를 따져 본다면, 실로 나쁘다 이르지 않을 수 없겠다. 나는 곧 청심환 한 알을 주었더니, 중은 머리를 무수히 조아리곤 한다. 그 염치 없는 일이 심하였다. 대체 산사는 살구처럼 굵기는 하지마는, 몹시 시금털털하여 먹을 수 없었다.

옛 성인은 남의 물건을 사양하고 받으며 취하고 주는 것을 심히 삼갔으니, 말하기를,

 

만일 옳은 일이 아니라면, 비록 한낱 지푸라기라도 함부로 남에게 주지도 않을뿐더러, 남에게 받지도 않는 거야.”

하였던 것이다. 대체 한 낱의 지푸라기로 말한다면, 천하에 지극히 작고도 가벼운 물건이어서, 족히 만물 중에서 손꼽을 존재조차 없겠으니, 어찌 이것으로써 사양하고 받는다든지 취하고 준다든지 하는 순간을 논할 나위가 될까보냐. 그러나 성인(聖人)은 이와 같이 엄청나게 심한 말씀을 하여 마치 이에 커다란 염치와 의리가 존재하는 듯 말하였음을 이상하게 여겼더니, 이제 이 오미자로 인하여 일어난 일을 체험하고 나서, 비로소 성인의 한낱 지푸라기를 이끈 말씀이 과연 지나치게 심함이 아님을 깨달았으니, 아아, 성인이 어찌 나를 속이겠느냐. 두어 낱의 오미자는 실로 한낱 지푸라기와 같은 물건이건마는 저 완패(頑悖)한 중이 나에게 무례(無禮)한 행위를 한 것은 가위 횡역(橫逆)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이로 말미암아 다투기 시작하여서 주먹다짐에까지 이르렀을뿐더러 바야흐로 그들이 싸울 때에는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제각기 생사를 분간하지 않았으니, 이때를 당해서는 비록 두어 낱의 오미자일망정 재화가 산더미처럼 높았던 만큼 이는 결코 천하에 지극히 가늘고도 가벼운 물건이라 얕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옛날 춘추(春秋) 전국(戰國) 때에 종리(鍾離)에 살고 있는 한 여인이 초()의 여인과 뽕 따기를 다투다가 종말에는 두 나라의 전쟁을 일으켰던 일이 연상된다.

이제 그를 이 일에 비한다면, 두어 낱의 오미자가 벌써 성인이 이른바 한낱의 지푸라기보다 많았을뿐더러 그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초의 여인이 뽕 따기 다툼과 다름 없음을 보아서, 만일 이때에 그들이 싸우는 도중에 목숨을 잃은 사변이 생겼더라면, 어찌 군사를 일으켜 문책할 일이 없었을 것을 누가 예측하겠느냐.

내 일찍이 학문이 추솔하고도 얕아서 애초에 갓을 바로잡고 들메 끈을 매는 혐의를 삼가지 못하여 스스로 공짜로 오미자를 먹었다는 모욕을 취하였으니, 어찌 부끄럽고도 두려움을 이루 말할 수 있으리오.

길가에서 빈 차가 열하로 달려가는 것이 날마다 몇천 몇만인지 모를 만큼 많았으니, 이는 황제가 장차 준화(遵化) 역주(易州) 등지에 거둥하는 까닭으로 짐바리를 실으러 가는 것이다. 그리고 몇천의 탁타(槖駝)가 떼를 지어 물건을 싣고 나온다. 이놈들은 대체 한결같이 크고 작은 놈이 없이 모두 엷은 흰 빛에 약간 누런 빛을 띠었으며, 짧은 털에 머리는 말과 다름 없으나 작은 눈매는 양과 같고, 꼬리는 마치 소와 같이 생겼다. 그리고 다닐 때에는 반드시 목을 움츠리고 머리를 쳐들되 마치 나는 해오라기처럼 생겼고, 무릎에는 두 마디가 생겼으며, 발은 두 쪽으로 쪼개졌고, 걸음은 학처럼, 소리는 거위 소리 같았다. 옛날 가서한(哥舒翰)이 서하(西河)에 머무르고 있을 제, 그 주사관(奏事官)이 장안(長安)으로 향할 때마다 흰 탁타를 타고 하루에 5백 리를 달린 일도 있거니와 석진(石晉)의 개운(開運) 2년에 부언경(苻彦卿)이 거란 철요(鐵鷂)의 군사를 크게 깨치매 거란 임금이 해차(奚車)를 타고 달아날 제 뒤에 적병이 급하게 쫓아오기에 덕광(德光)이 탁타 한 마리를 잡아 그를 태워서 달아났다 하였는데, 이제 탁타의 걸음걸이를 보건대, 몹시 더디고도 둔하니 뒤에 쫓아오는 적군에게 포로를 면하기 어려울 듯싶다. 혹시나 그놈들 중에서도 석계륜(石季倫)의 소와 같이 잘 달리는 놈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고려 태조(太祖) 때에 거란이 탁타 40마리를 바쳤으나, 태조는 거란이 워낙 무도(無道)한 나라라 하여 다리 밑에 매어놓은 지 10여일 만에 모두 굶어 죽었으니, 거란은 비록 무도한 나라라 할지라도 탁타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대체 탁타는 하루에 소금 몇 말과 꼴 열 단쯤을 먹기는 일쑤인 만큼 나라에서 세운 목장이 몹시 빈곤할뿐더러 꼬마 목노(牧奴)가 그를 기르기가 어려움은 물론이요, 또는 그를 이용하여 물건을 싣고자 하여도 도시의 건물마저 낮고 좁으며 문과 거리가 더욱 비좁아서 그를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니, 실로 이는 쓸데없는 물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까지도 그 다리 이름을 탁타교라 하여 개성(開城)유수부(留守府)에서 3리쯤 가서 있는데, 다리 곁에 돌을 세워 탁타교(橐駝橋)라 새겼으나, 토인(土人)들은 탁타교라 부르지 않고 모두 약대다리(若大多利)라 한다. 이는 사투리로 약대는 탁타, 교량은 다리이기 때문이다. 이에서 또 와전되어 야다리(野多利)라 부르는 것이 일쑤이다.

내 처음 개성에 놀러 갔을 때 탁타교를 물었으나, 어느 곳에 있는지를 아는 이가 없었으니 아아, 사투리가 아무런 의미 없이 함부로 되었음이 이와 같구려. 이날 80리를 갔다.

 

 

[B-001]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이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의 뒤에 위치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D-001]동릉(東陵) : 청 능묘의 총칭. 세조의 효릉(孝陵), 성조의 경릉(景陵), 고종의 유릉(裕陵), 문종의 정릉(定陵), 목종의 혜릉(惠陵)이 모두 이어 있다.

[D-002]척남궁(戚南宮) : 명의 명장 척계광(戚繼光). 남궁은 봉호인 듯하고, 자는 원경(元敬).

[D-003]이목(李牧) : 전국 시대의 명장. 염파(廉頗)와 같이 치는 명장.

[D-004]첨람(襜襤) …… 누번(樓煩) : 전국 때 조() 곧 지금의 산서성 서북에 있던 부족.

[D-005]석진(石晉) : 오대 때의 후진(後晉). 석은 그의 성.

[D-006]철요기(鐵鷂騎) : 거란의 기병대 이름인 듯하다.

[D-007]녹각(鹿角) : 군대에서 쓰는 나무로 만든 방어물(防禦物)의 일종.

[D-008]백곤(伯鯀) : 하우씨(夏禹氏)의 아버지로서 9년의 홍수를 맡아 다스리다가 실패하여 귀양살이를 당한 사람.

[D-009]사악(四岳) : ()의 때에 있었다는 사방 산악을 맡은 책임자.

[D-010]시험해 …… 것이다 : 서경(書經)에 나오는, 백곤의 치수에 관한 말의 한 구절.

[D-011]명령을 …… 깨뜨린다 : 서경(書經)에 나오는, 백곤의 치수에 관한 말의 한 구절.

[D-012]강수란 곧 홍수(洪水)이다 : 맹자(孟子)의 고자편(告子篇)에서 나온 한 구절.

[D-013]백곤이 …… 메웠다 : 서경에 나오는, 백곤의 치수에 관한 말의 한 구절.

[D-014]황하수 ……  : 이태백집(李太白集) 장진주(將進酒).

[D-015]소철(蘇轍) : 송의 문학가. 연빈은 호요, 철은 이름이며, 자는 자유(子由). 소식은 아우.

[D-016]소순(蘇洵) : 송의 문학가. 순은 이름. 자는 명윤(明允)이요, 호는 노천(老泉)이며, 소식의 아버지.

[D-017]관노야(關老爺) : 관우(關羽)의 혼령. 노야는 높여서 하는 말.

[D-018]태세(太歲) …… 들었다 : ()이 들었다는 말.

[D-019]옛날 ……  : 사기(史記)에 나오는 구절.

[D-020]갓을 …… 혐의 : 일명씨가 지은 군자행(君子行) 중에, “오이밭에서는 들메 끈을 매지 말 것이요, 오얏나무 밭에서는 갓을 바로잡지 말 것이다.” 했는데, 군자는 혐의로운 일을 애당초 하지 않는다는 뜻.

[D-021]가서한(哥舒翰) : 당 현종 때 장수로서 서장 지방에 공을 세웠다.

[D-022]석계륜(石季倫) : 중국 고대 춘추 시대 진()의 부호 석숭(石崇). 계륜은 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8일 갑자(甲子)

 

 

아침에는 개더니 늦게 가는 비가 잠시 내렸으나, 곧 멎고 오후에는 바람과 우레가 크게 일어 소낙비가 쏟아졌다.

아침에 떠나서 차화장(車花莊)사자교(獅子橋)를 지났는데, 행궁(行宮)이 있었다. 목가곡(穆家谷)에 이르러 점심 식사를 마치고, 곧 떠나서 석자령(石子嶺)을 지나 밀운(密雲)에 이르매, 청실(淸室)의 모든 왕과 보국공(輔國公 황실로서 봉작을 받은 자)과 수없는 관원이 북경으로 돌아가는 자가 길에 잇달았다. 백하(白河)에 이르매, 나루에 모여든 사람들이 서로 먼저 건너려고 시끄럽게 다투는데 이들을 한꺼번에 건너주기가 어려우므로 바야흐로 부교(浮橋)를 매는 것이다. 모든 배들은 대개 돌을 운반하는 것이었고 사람을 건너주는 배는 다만 한 척이 있을 뿐이다. 앞서 이곳을 지날 때에는 군기(軍機)가 나와 맞이하고 낭중(郞中)은 건너는 일을 감독하고 황문(黃門)은 길을 인도하였으며,제독과 통관들의 기세가 당당하여 물가에서 채찍을 들어 친히 지휘하였으되, 그야말로 산하(山河)를 움직일 지경이더니, 이제 연경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그들 근신(近臣)의 호송도 없거니와 황제 또한 한 마디 위로의 말씀이 없었다. 이는 대체로 사신들이 부처님 뵙기를 꺼려한 까닭으로 이러한 푸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들의 기색을 살펴보면, 갈 때와 올 때의 대우가 다름을 나는 느꼈다. 대개 저 백하(白河)는 그저께 건너던 물이었으며 모래 언덕은 전날 발을 멈춘 곳이었고, 제독의 수중에 가진 채찍이나 물 위에 떠 노는 배까지도 올 때의 것들과 다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독은 입을 다물고 통관마저 머리를 숙였을 뿐이었으며, 저 강산은 아무런 변함이 없건만 세태의 염량(炎凉)은 완연히 눈앞에 떠오른다.

아아 슬프도다. 대개 시세의 믿지 못할 것이 이러하구려. 그리고 세력이 있는 곳에는 모두들 달음질쳐서 따르곤 하였으나, 눈 한번 끔벅할 사이에 시세는 옮겨지고, 일은 식어져서 전연 빙자할 곳 없이 되어 마치 저 진흙에 빠진 소가 바다로 들어가는 듯이 얼음산이 햇빛을 만나 녹듯이 천고의 모든 일이 거의 이와 다름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을까보냐. 이렇게 생각하는 차에 별안간 어지러운 구름이 공중을 덮으면서 바람과 우레가 크게 일었다. 그러나 오히려 갈 때에 비하여 그처럼 가공할 위세는 아니었다. 그러나 다만 갈 때나 올 때가 모두 이러함을 보아서 이상한 일이라 아니할 수는 없겠다. 옛 역사를 더듬어 보건대,

 

()의 천순(天順) 7(1463)에 밀운(密雲)회유현(懷柔縣)에 홍수가 나서 백하가 몇 길이나 불어 올라 밀운의 군기고(軍機庫)와 문서방(文書房)이 표류되었다.”

하였으니, 아마 이곳은 옛 전쟁터로서 맹풍(盲風)괴우(怪雨)가 일기 일쑤여서 분노한 번개와 우레와 그 침울한 원혼이 오히려 풀리지 않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길을 지나오는 곳마다 그들의 배는 제도가 한결같지 않았음은 물론 이 백하의 배는 마치 우리나라의 나룻배와 비슷하면서 어떤 것에는 톱으로 배 한 허리를 에워서 몇 채를 노끈으로 묶어 하나를 만든 것이 있었다. 그 꼴이 하나만으로서도 이상한데 거기다 셋을 연결한 것은 더욱 그러함을 느꼈다.

글자를 만드는 데는 상형(象形)이 가장 많았음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배 주() 자의 변에는 도()니 첩()이니 작()이니 항()이니 맹()이니 정()이니 함()이니 몽()이니 하는 따위가 모두 그 꼴을 따라서 이름을 지은 것이 가지마다 모두 그렇거늘, 어쩐지 우리나라에서는 작은 배는 걸오(傑傲)니 나룻배는 날오(捏傲)니 커다란 배는 만장이(漫藏伊)니 곡식을 실은 배는 송풍배(松風排)니 하였을 뿐 아니라, 바다에 출범(出帆)할 때에는 당돌이(唐突伊) 상류에 뜰 때에는 물우배(物遇排)라 하였고, 또 관서(關西)에서는 배를 마상이(馬上伊)라 일컫는다. 그 제도는 비록 각기 같지 않으나, 다만 선()의 한 글자로 통일되어 있을 뿐이요, 또 비록 도()()()() 등의 글자를 차용(借用)하였으나, 그 이름과 실물은 맞지 않는 것이다.

때마침 사오십 필의 기병이 회오리바람처럼 달려온다. 그 기세가 퍽이나 사나워 우리나라의 피로하고 잔약한 말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그들은 한꺼번에 배에 오른다. 가장 뒤에 따르는 기병 하나가 팔에는 푸른 매를 끼고 채찍을 드날려 단번에 배에 뛰어오르려다가 말의 뒷굽이 미끄러져 안장채를 맨 채 물속에 떨어지자 한 번 덤벙거리며 다시 솟구쳐 일어서려다가 할 수 없이 가라앉아 힘없이 몸을 굴려 이윽고 물 위에 솟아 지친 몸을 이끌고 배에 오른다. 그리고 매는 마치 기름 항아리에 던져진 나방과 같고, 말은 오줌에 빠진 쥐와 같았을뿐더러 그 고운 옷과 화려한 채찍이 애처롭게도 물망울져 몸둘 곳이 없음에도 오히려 말만을 채찍질하자 매는 더욱 놀라 날곤 한다. 대개 제몸을 과장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갚음이 즉시에 이르고 마는 것을 보아서 족히 경계하여야 함을 느꼈다. 물을 건넌 뒤에 그를 따르는 기병에게 물었더니, 그는 말 등에서 몸을 갸우뚱하면서 채찍으로써 진흙 위에다가,

 

그이는 사천장군(四川將軍)이랍니다. 나이가 늙어서 용맹이 줄었답니다.”

한다. 부마장(駙馬莊)에 이르러서 묵었다. 객점은 그 성 밑에 있고 성은 곧 회유현(懷柔縣)이다. 밤에 문을 나서 뒷간으로 향하였다. 때마침 그들은 20, 30명씩 또는 4백여 명씩 한 곳에 몰려 달릴 제 한 대열마다 등불 하나가 앞을 인도한다. 그들은 아마 모두 귀족인 듯싶다. 그리하여 수레와 말소리가 밤새 끊이지 않았다. 이날 모두 65리를 갔다.

 

 

[B-001]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이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의 뒤에 위치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9일 을축(乙丑)

 

 

개었다 가끔 비가 뿌리다가 늦어서 갰으나 날씨가 몹시 뜨거웠다.

새벽에 회유현을 떠나 남석교(南石橋)에 이르러서 점심을 먹었다. 비로소 홍시(紅柹)를 맛보았다. 그 꼴을 보니 네 골이 졌는데다 또 턱이 생긴 것이 마치 우리나라의 이른바 반시(盤柹)와 다름없으나, 다만 달고 연하기 짝이 없고 또 물이 많았다. 이 감은 계주(薊州)의 반산(盤山)에서 나는데, 그곳 울창한 숲이 모두 감대추 따위라 한다. 임구(林溝)를 지나 청하(淸河)에 이르러서 묵었다. 이곳에는 곧 한길이 나옴을 보아서 갈 때의 길이 아님을 알았다. 길에 한 묘우(廟宇)에 들렀다. 강희 황제의 어필로,

 

좌성 우불(左聖右佛)”

이라 쓰여 있으니, 좌성은 곧 관운장(關雲長)을 말함이다. 그리고 좌우의 주련(柱聯)에는 그의 도덕과 학문을 높이 찬양하였다. 대개 그들이 관공(關公)을 숭봉한 것은 명() 초기의 일이었으며, 심지어 그의 이름을 휘하여 패관(稗官) 기서(奇書) 들까지도 모두 관모(關某)라 일컫는다. 그리하여 명()()의 즈음에는 공이(公移)와 부첩(簿牒)까지도 관성(關聖)이니 관부자(關夫子)니 하고 높여 불렀다. 그 그릇됨과 야비함을 그대로 좇아서 천하의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그를 학문하는 이로 높여 왔던 것이다. 대개 소위 학문이란 삼가 생각함과, 밝게 변증(辨證)함과, 상세히 물음과, 널리 배움을 이름이다. 그리하여 한갓 덕성(德性)만을 높임에 그쳐서는 아니 되므로 문학(問學)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옛날 하우씨(夏禹氏)가 아름다운 경고에 절하고 촌음(寸陰)을 아낀 것이나, 안자(顔子)가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고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의 마음이 추솔한 점이 없지 않다고 하였은즉, 학문의 극치(極致)에 이르러서도 객()된 기운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객기(客氣)를 온전히 제거함에 있어서의 제몸의 사욕(私慾)을 누르며 잃어버렸던 것을 예법의 행동 안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방법을 써야 할 것이다. 대체 라는 것이 벌써 사욕에 지나지 않으니, 만일 일호라도 그 사욕이 몸에 따르면 성인은 반드시 그를 마치 원수나 도적처럼 간주하여 기어코 끊어 없애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에는,

 

()을 쳐서 기어코 이겨야 하겠다.”

하였고, 역경(易經)에는 또,

 

고종(高宗)이 귀방(鬼方)을 쳐서 3년 만에 이겼다.”

하였으니, 전쟁을 3년 동안이나 이끌어 가면서도 반드시 이기고 만다는 것은 실로 싸움을 이기지 못한다면, 나라가 나라의 구실을 하지 못하는 까닭이리라. 그러므로 제몸의 사욕이 이긴 뒤에서야 비로소 예법으로 돌아올 것이니, 이 돌아온다는 말은 일호라도 미진한 것이 없음을 의미함이다. 예를 들면 저 해와 달이 때로는 다 먹혔다가 다시 그 둥근 형태로 돌아올 수 있고, 또 잃었던 물건을 도로 추심(推尋)하면 그 무게가 조금도 감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러서는 결코 슬기와 어짊과 용맹의 세 달덕(達德)을 갖추지 않는 이로서는 이 학문이란 이룩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관공(關公)과 같은 정의와 용맹이야말로 자기의 사욕을 이기기 전에 벌써 예법에 돌아온 분이겠지만, 다만 이제 그를 학문한 분으로 일컫는 것은 다만 그가 춘추(春秋)에 밝았던 까닭이리라.

그리하여 그가 일찍이 오()()의 참적(僭賊)을 엄격히 배격했던바, 그가 어찌 스스로 망녕되게 높여 준 ()’라는 칭호를 마음 편히 차지할까 보냐. 그의 영혼이 천추에 살아 있다면 반드시 이런 따위의 명분에 어긋난 일을 받지 않을 것이요, 만일 그의 영혼이 이미 사라졌다면 이렇게 아첨해 본들 무엇이 유익하리오. 그리고 그들 오경박사(五經博士) 역시 성현의 후예로서 이어받는 것이었으므로, 동야씨(東野氏 주공(周公)의 후예)공씨(孔氏 공자의 후예)를 비롯하여 안씨(顔氏 안회(顔回)의 후예)증씨(曾氏 증참(曾參)의 후예)맹씨(孟氏 맹가(孟軻)의 후예) 등은 으레 모두 성인의 후예니 현인의 후예니 하였고, 관씨(關氏 관우의 후예)의 박사(博士) 역시 성인의 후예라 하여 동야씨공씨의 사이에 참렬시켰으니 심히 부당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전( 운남성(雲南省))에 문묘(文廟)가 있는데 왕희지(王羲之)를 주로 모셨으니, 이는 그를 서성(書聖)이니 필종(筆宗)이니 하여 높였음에 그릇됨을 깨닫지 못함이다.

성도(聖道)가 더욱 멀고 오랑캐들이 바꾸어 가며 중국의 임금이 되었으므로 제각기 제 방법으로 천하를 어지럽게 하여 바른 학문이 아득히 끄나풀처럼 끊어지지 않을 뿐인즉, 어찌 천년 후의 사람들이 저 수호전(水滸傳)으로써 정사(正史)를 삼지 않을 줄 알리오. 혹은 이르기를,

 

남만(南蠻)북적(北狄)이 줄곧 중국의 임금 노릇을 한다면, 왕 우군(王右軍)을 문묘에 주사(主祀)함도 가할 것이며, 수호전으로써 정사(正史)를 삼는다 하더라도 아니 될 것 없을 것인 동시에, 비록 공()()을 내쫓아 버리고 석가(釋迦)를 들여 모신다 하더라도, 나는 아무런 유감이 없을 거요.”

하고는, 서로 한바탕 크게 웃고 일어섰다. 연경으로 돌아가는 관원들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더욱 많아졌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빈 차가 열하로 향하는 것이 밤낮으로 끊어지지 않았다. 마부나 역군들 중에 일찍이 서산(西山)에 가본 자는 멀리 서남쪽에 둘려 있는 돌산을 가리키며,

 

이게 곧 서산이야.”

한다. 구름 속에 출몰하는 천백(千百)의 봉우리가 보일락말락하고 산 위에는 흰 탑이 뾰족뾰족 공중에 솟았으며 병풍처럼 둘린 산들은 그림폭에 푸른 빛이 뜨는 듯이 얽히었다. 그들 둘이 서로 수작하는 말을 들어본즉,

 

저 수정궁(水晶宮)봉황대(鳳凰臺)황학루(黃鶴樓) 등에 붙어 있는 그림이 모두 이를 모방해 그린 거야.”

한다. 강 남쪽에 넓은 호수(湖水)가 열리고 흰 돌을 깎아 다리를 만들었는데, 수기(繡綺)니 어대(魚帒)니 십칠(十七)이니 하는 다리들이 모두 넓이 수십 보에 길이 백여 길이었으며, 굼틀굼틀 무지개처럼 누웠으며 좌우에는 돌 난간이 둘려 있는데, 용을 그린 배와 비단으로 꾸민 돛이 다리 밑에 출몰한다. 이는 40리나 되는 먼 곳의 물을 이끌어서 호수를 만들었으며 폭포가 돌 틈에서 뿜으니, 이가 곧 옥천(玉泉)이다. 황제가 강남(江南)에 거둥할 때나 또는 막북(漠北)에 머물 적에도 반드시 이곳을 거치며 이 샘물을 마신다 한다. 이 샘의 물맛이 천하에 첫째이므로 연경의 팔경(八景) 중에 옥천수홍(玉泉垂紅)이 그 하나라 한다. 마부 취만(翠萬)은 이미 다섯 차례나 왔고, 역졸 산이(山伊)는 두 번이나 구경하였다 하므로, 곧 둘과 서산으로 가기로 약속하였다.

 

 

[B-001]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이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의 뒤에 위치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D-001]삼가 …… 배움 : 중용(中庸)에 나오는 몇 구절.

[D-002]문학(問學) : ()의 철학가 육구연(陸九淵)은 존덕성(尊德性)을 주장하였고, 주희(朱熹)는 도문학(道問學)을 주장하였다.

[D-003]고종(高宗) : ()을 중흥시킨 임금 무정(武丁). 고종은 묘호.

[D-004]오경박사(五經博士) : 한 무제(漢武帝) 때 실시한 유학. 오경에 능통한 학자에게 준 학위 혹은 관직.

[D-005]왕 우군(王右軍) : 왕희지(王羲之). 우군은 그의 벼슬.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0일 병인(丙寅)

 

 

개다.

새벽에는 잠깐 비가 뿌렸으나 곧 멎고 일기가 약간 서늘하다.

아침에 떠나 20여 리를 가서 덕승문(德勝門)에 이르렀다. 이 문의 제도는 조양(朝陽)정양(正陽) 등 아홉 문과 다름없을뿐더러 흙탕이 심하여, 만일 그 가운데에 한 번 빠진다면 솟아나기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 수천 마리가 길에 빽빽하게 몰려드는데, 다만 몇 명의 목동(牧童)이 앞에서 이끌 뿐이다.

덕승문은 곧 원()의 건덕문(建德門)인데, ()의 홍무(洪武) 원년(1368)에 대장군(大將軍)서달(徐達)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한다. 문 밖 8리 되는 곳에 토성(土城)의 옛 터가 있으니, 이는 원대에 쌓았던 것이다. 정통(正統) 14(1449) 10월 기미에 먀선(乜先  로도 쓴다)이 상황(上皇 현존한 황제의 아버지를 말함. 당시는 명 영종(明英宗))을 모시고, 토성에 올라 통정사참의(通政司叅議)왕복(王復)을 좌통정(左通政)으로 삼고, 중서사인(中書舍人)조영(趙榮)을 태상시소경(太常寺少卿)으로 삼아서 상황을 토성에 나와 뵙게 하였으니 곧 이곳이었다. 그리고 명사(明史)를 상고하면,

 

먀선이 상황을 끼고 자형관(紫荊關)을 깨뜨리고 줄곧 경사(京師)를 엿볼 제 병부상서(兵部尙書)우겸(于謙)이 석형(石亨)과 더불어 부총병(副摠兵)범광무(范廣武)를 거느리고 덕승문 밖에 진을 벌여 먀선을 막을 제, 병부의 사무를 시랑(侍郞)오녕(吳寧)에게 맡기고, 모든 성문을 닫고 친히 싸움을 독려하되, ‘싸움에 임하여 장수가 군졸을 돌보지 않은 채 먼저 물러서는 자 있다면, 그 장수를 벨 것이요, 군사로서 장수를 돌보지 않은 채 먼저 물러서는 자 있다면, 후대(後隊)가 전대(前隊)를 죽일 것이다.’ 하고 호통쳤다. 이에 장수와 군졸들이 각기 반드시 죽을 것을 짐작하고 그 명령을 따랐다. 그리고 경신(庚申)에 적군(敵軍)이 덕승문을 엿보기에 우겸이 석형으로 하여금 빈 집 속에 군사를 매복하고는 기병 몇에게 시켜 적을 꾀었다. 이에 적이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접근하자 복병이 일어나 먀선의 아우 발라(孛羅)가 포탄에 맞아 죽었다. 그런 지 닷새 만에 먀선이 가끔 도전하였으나, 응하지 않았을뿐더러 또 싸워도 이롭지 못하였기 때문에 강화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상황을 모시고 북으로 떠났다.”

하였으니, 이제 이 문 밖의 여염이나, 시전이 번화하고 화려함이 정양문 밖과 다름없고 또 승평(昇平)한 지 날이 오래되어 이르는 곳마다 모두 그러하였다.

()에서 묵었다. 역관비장과 일행 중의 하인들이 모두 길 왼편에서 대기하다가 말에서 내려 다투어 손을 잡으며 그간의 노고를 위로한다. 그러나 다만 내원이 보이지 않는다. 대개 그는 멀리 나와 맞이하기 위하여 홀로 먼저 밥을 먹고 동문으로 잘못 가버렸으므로 서로 어긋났다 한다. 창대가 장복을 보더니, 그 사이 서로 떠났던 괴로움을 말하기 전에 대뜸,

 

너 별상금(別賞金) 얼마나 갖고 왔니.”

하자, 장복 역시 안부하기 전에 얼굴에 가득찬 웃음으로,

 

, 상금이 몇 냥이더냐.”

하며 반문한다. 창대는,

 

천 냥이야, 의당 너와 반분해야지.”

한다. 장복은 또,

 

, 황제를 뵈었니.”

하자, 창대는,

 

뵈었고 말고. 황제 말이야, 그 눈은 호랑이, 그 코는 화롯덩이 같고, 옷을 벗은 채 발가숭이로 앉아 있데그려.”

한다. 장복은 또,

 

그의 쓴 것은 무엇이던.”

하매, 창대는,

 

황금 투구를 썼지 뭐야. 그리고 나를 부르더니 커다란 잔에 술을 부어 주며, 넌 서방님을 잘 모시고 험한 길을 꺼리지 않고 왔다니, 기특도 하이 하데그려. 그리고 상사님껜 일품 각로(一品閣老), 부사껜 병부상서(兵部尙書)로 높여 주데그려.”

한다. 이는 모두 거짓말 아닌 것이 없으나 비단 장복이 이에 속았을 뿐 아니라, 하인들 중에 제법 사리를 아는 자치고도 믿지 않는 이 없었다. 변군(卞君)과 조 판사(趙判事)가 나와 환영한다. 곧 서로 이끌고 길 곁 주루(酒樓)에 올랐다. 파란 기에 옛 시 두 구를 썼다.

 

서로 만나 의기 높아 님과 함께 마시려니 / 相逢意氣爲君飮

높은 다락 수양 밑에 말을 매고 오르려네 / 繫馬高樓垂柳邊

이제 수양버들에 말을 매고 높은 다락에 올라 술을 마시매, 더욱 고인의 시 읊음이 즉사(即事)를 묘사함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참된 뜻이 완연히 나타나 있음을 느끼곤 하였다. 이 다락은 아래위 모두 마흔 칸에 아로새긴 난간과 그림 기둥에 단청이 눈부시고 분벽(粉壁)사창(紗窓)이 아득히 신선이 살고 있는 곳 같았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고금의 법서(法書)와 명화(名畵)가 많이 진열되어 있고, 또 술자리에서 읊은 아름다운 시구가 많이 붙어 있었다. 이는 대개 조신(朝臣)들이 공무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또는 해내의 명사들이 석양(夕陽)에 모여들어 수레와 말이 구름처럼 많을 제, 술이 취한 뒤 시 읊기는 물론이요, 글씨와 그림의 고하를 논평하여 온 저녁을 묵으면서 다투어 그 아름다운 시구와 글씨그림을 남기기를 날마다 이러하였으나, 어제 남긴 것이 오늘 다 팔리곤 한다. 이런 일을 술집에서 몹시 부러워하므로 서로 다투어서 그 교의탁자그릇골동 들을 사치하게 벌여놓을뿐더러 온갖 화초를 줄지어 놓아 시의 자료로 이바지하였으며, 좋은 먹과 아름다운 종이, 보배로운 벼루, 부드러운 붓들은 으레 그 가운데에 갖추어 있었다. 옛날 양무구(楊無咎)가 어떤 기생집에 들렀을 제, 짧은 바람벽 위에 절지매(折枝梅) 한 폭을 그려 붙였더니, 오가는 사대부들이 이를 감상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 집을 찾아 들었으므로, 그 기생의 문호가 더욱 번영하였다. 그러나 그 뒤 이 그림을 도적에게 잃어버리자 찾아드는 수레와 말이 점차 적어졌다 하였고, 또 장 일인(張逸人)은 일찍이 최씨(崔氏)의 주로(酒罏),

 

무릉성 깊은 곳에 최씨 집 아름다운 술 / 武陵城裏崔家酒

이 인간에 없을 것이 하늘 위나 있었던고 / 地上應無天上有

구름인 양 이 내 몸이 한 말 그냥 마시고서 / 雲遊道士飮一斗

백운 깊은 저 동구에 취한 채 누웠다오 / 醉臥白雲深洞口

라는, 시 한 절을 썼으므로 손님이 더욱 많이 찾아들었다 한다. 대개 중국의 명사와 대부들은 기생집과 술집에 출입함을 혐의롭게 여기지 않았으므로, 여씨(呂氏)의 가훈(家訓) 중에서 다방과 술집에 나들며 거니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의 술 마시는 것을 연하여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더할 수 없는 독음(毒飮)이었으나, 그 소위 술집이란 모두 항아리 구멍처럼 생긴 들창에 새끼로 얽은 문에 지나지 못하였으며, 흔히들 길 왼편 소각문(小角門)에 새끼로 발을 늘이고 체바퀴로 등롱(燈籠)을 만들어서 단 것이 반드시 술집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 시인(詩人)들의 시중에 나타난 파란 기()는 모두 실상이 아니었으니, 나는 여태까지 술집 등마루에 나부끼는 깃발 하나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술 배는 너무나 커서 반드시 커다란 사발에 술을 따라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꺼번에 기울이곤 한다. 이는 무작정 술을 뱃속에 따르는 것이요, 마시는 것은 아닐 것이며 배 불리기 위함이요, 취미를 돋우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 번 술을 마시면 반드시 취하게 되고, 취하면 문득 주정을 하게 되고 주정이 나면 문득 서로 격투를 시작하여, 술집의 항아리와 사발들을 남김없이 차 깨뜨려 버린다.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소위 풍류(風流)문아(文雅)의 모임이라는 참된 취지가 아랑곳없을뿐더러 도리어 중국의 술 마심이야 아무런 배불릴 것이 없음을 비난하는 것이 일쑤이다. 이제 이런 술집을 압록강 동편에 옮겨 본다 하더라도 하루저녁을 참지 못하여 벌써 그 보배로운 그릇과 골동을 두들겨 깨고, 아름다운 화초를 꺾고 밟아 버릴 것이 가장 아까운 일이리라 생각된다. 그 실례 하나를 들어 보면, 이주민(李朱民)은 풍류문아를 지닌 선비로서 한평생 중국을 기갈(饑渴)처럼 연모하였지마는, 유독 술마심에 있어서는 중국의 옛법을 기뻐하지 않아 술잔의 대소와 술의 청탁을 헤아리지 않고, 손결에 닿으면 곧 기울여 입을 벌리고 한꺼번에 따르곤 하면, 친구들은 이를 복주(覆酒 술을 엎어 버린다는 뜻)’라 하여 아학(雅謔)을 삼곤 하였다. 이번 걸음에 그가 같이 오기로 되었으나, 어떤 이가,

 

그는 주정을 부려서 가까이할 수 없겠어요.”

하고, 고자질하였다. 그러나 내 일찍이 그와 함께 10년 동안을 마셨으되, 얼굴에 단풍 빛 오른 적이나 입에 감거품 게워 내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이 마실수록 더욱 얌전해지고, 다만 그의 술 엎는 방법이 조금 결점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주민은 늘,

 

옛날 두자미(杜子美)도 술을 엎었다오. 그의 시에 이르기를, ‘아이야, 이리 나오너라 장중배를 엎으련다[呼兒且覆掌中杯]’라고 하였으니, 이건 입을 벌리고 누워 아이들로 하여금 술을 입에다 엎는 게 아니겠어.”

하고, 증거를 댄다. 그러면 온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허리를 꺾곤 하였다. 이제 만리 타향에서 별안간 친구의 옛 일이 기억에 떠오른다. 알지 못하겠다, 주민이 이날 이 시간에 어느 집 술 자리에 앉아서 왼손으로써 잔 잡고, 다시 이 만리 타향에 노니는 나를 생각할런지.

갈 때에 들렀던 객관을 다시 찾았다. 바람벽 위에 붙었던 몇 폭의 주련(柱聯)과 좌우(座右)에 머물러 둔 생황(笙簧)철금(鐵金) 등이 모두 무양하였으니, 옛 시에,

 

병주를 바라보며 나의 고향 이곳이요 / 却望幷州是故鄕

가 곧 이를 두고 말함이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조 주부(趙主簿) 명위(明渭)가 자기 방에 기이한 구경이 있다 하기에 나는 곧 그와 함께 가 보았다. 문 앞에 화초 십여 분(十餘盆)을 진열하였는데, 그 이름은 모두 알 수 없겠고, 흰 유리 항아리의 높이는 두 자쯤이고 침향(沈香)으로 만든 가산(假山)의 높이 역시 두 자쯤 되어보이고, 석웅황(石雄黃)으로 만든 필산(筆山 붓을 꽂는 도구의 일종)의 높이는 한 자 넘고, 또 청강석(靑剛石) 필산이 있어 대추나무로 밑받침을 했는데 저절로 괴강성(魁罡星)의 무늬가 이룩되었을뿐더러 흑단(黑檀)으로 다리를 달았다. 그 값은 화은(花銀) 30냥이라 한다. 또 기서(奇書) 몇십 종이 있는데,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 () 포정박(鮑廷博)의 편)》ㆍ《격치경원(格致鏡源 청 진원룡(陳元龍)의 저()) 등은 모두 값이 지나치게 비쌌다.

대개 조군(趙君)은 이십여 차나 연행(燕行)을 하였으므로, 북경이 제집처럼 되었고, 또 한어(漢語)에 매우 익숙할뿐더러 물건을 매매할 때에도 심한 에누리를 하지 않는 까닭으로 단골 손님이 많아서 그가 거처하는 방에 그들을 진열하여 청상(淸賞)에 이바지함이 예사이다. 연전 창성위(昌城尉)황인점(黃仁點)이다. 가 정사로 왔을 때 건어호동(乾魚衚衕)에 있는 조선관(朝鮮館)에 화재가 나서 예비했던 장사치들의 모든 물건이 모두 재가 됐는데, 조군의 방어가 더욱 심하였다. 이는 매매된 물건을 제외하고도 불에 탄 것들이 모두 희귀한 골동과 서책이어서 그 가격을 따진다면 3천 냥의 거액이었으며, 그는 모두 융복사(隆福寺)나 유리창(琉璃廠) 중에서 옮겨 온 물건이다. 모든 단골 손님이 조군의 방을 빌려서 진열한 것이어서 그 보상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며, 그들은 앞에서 겪은 일을 경계하지 않고 이제 또 이 방을 빌려 진열하되, 조금도 전과 다름없게 하여 조군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이에서 족히 중국 풍속이 결코 악착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겠다.

밤에 태학관에서 묵었다. 여러 역관이 모두 내 방에 모여들었다. 약간의 주찬이 있었으나, 행역(行役)한 나머지 전혀 입맛을 잃었다. 모든 사람이 내 곁에 놓인 봇짐을 흘겨보곤 한다. 아마 그 가운데에 먹을 것이나 없을까 하는 표정이다. 나는 곧 창대를 시켜 보를 끌러서 속속들이 헤쳐 보게 했으나, 아무런 다른 물건이 없고 다만 갖고 왔던 붓과 벼루가 있을 뿐, 그 두툼하게 보인 것이 모두 필담(筆談)난초(亂草)로 된 유람할 때의 일기(日記)에 지나지 않는다. 그제야 여러 사람이 모두 석연히 웃음을 지으며,

 

난 괴이하게 여겼어, 갈 때엔 아무런 행장이 없더니, 이제 돌아올 젠 짐이 어찌 이렇게 부풀었어.”

하고, 장복 역시 창대더러,

 

별상금(別賞金)은 어디다 두었어?”

하며, 몹시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B-001]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이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의 뒤에 위치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D-001]서로 …… 오르려네 : 당시(唐詩).

[D-002]양무구(楊無咎) : 청의 양무구(楊无咎)인 듯하나 불명.

[D-003]장 일인(張逸人) : 이름은 미상. 일인은 은사(隱士).

[D-004]주로(酒罏) : 술항아리. 혹은 흙을 돋우어서 술 항아리를 두는 곳.

[D-005]여씨(呂氏)의 가훈(家訓) : 송의 학자 여조겸(呂祖謙)의 가훈. 가훈은 가정에서 자녀에게 훈계하는 글.

[D-006]이주민(李朱民) : 연암의 친우. 주민은 자인 듯하나 이름은 미상.

[D-007]병주를 …… 이곳이요 : 당 시인 가도(賈島)의 시구로서, 고향을 떠나 병주에서 살다가 거기에서 또 여행을 하고 보니, 제이의 고향인 병주를 원 고향으로 여겼다는 뜻이다.

[D-008]석웅황(石雄黃) : 유화물(硫化物)로 만든 광석(礦石).

[D-009]화은(花銀) : 청에서 사용하던 은화의 일종.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