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熱河日記) - 경개록(傾蓋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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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경개록(傾蓋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경개록(傾蓋錄)
1. 경개록 서(傾蓋錄序)
2. 경개록(傾蓋錄)
경개록 서(傾蓋錄序)
내 사신을 따라 북으로 장성을 나서서 열하에 이르렀다. 그 땅은 본시 왕정(王庭)이 있는 곳이나 그 백성들은 되놈들과 섞여 살았으므로 이야기할 만한 자가 없었다. 이제 태학에 들어 묵게 되매 중원의 사대부들 역시 먼저 여기에 와서 묵는 이가 많았다. 이는 역시 하반(賀班)에 참례하려 온 것이다. 그들과 함께 한 관에 묵자 하니 저절로 밤낮으로 서로 만나게 되는 동시에 어차피 다 나그네의 신세로서 서로 번갈아 주객(主客)이 된 지 무릇 6일 만에 서로 흩어졌다. 옛말에 이르기를,
“백두(白頭)에 처음 만났으나 마음은 새롭고 일산을 기울이자 곧 옛 친구와 같다.”
라고 하였다. 이제 한 마디 짧은 말을 제외하고는 모두 수록하여 이 경개록(傾蓋錄)을 쓰기로 하였다.
[주C-001]경개록 서(傾蓋錄序) : ‘박영철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따랐다.
[주D-001]백두(白頭)에……같다 :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오는 몇 구절.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경개록(傾蓋錄)
왕민호(王民皥)는 강소(江蘇) 사람이다. 이때 나이는 54세였고, 사람됨이 몹시 질박하여 아무런 꾸밈이 없었다. 지난해에 그가 승덕부(承德府)에 태학을 창건하는 일로 한번 연경에 갔으며, 올해 봄에 일이 끝나매 황제가 친히 석채례(釋菜禮)를 행하였다. 그는 거인(擧人)의 몸으로서 이곳에 수양하여 올해 4월 회시(會試)에 응하지 않았고, 8월 중에 황제가 7순(旬) 대경(大慶)을 맞이하자 거듭 회시를 보였으나 그는 역시 응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어째서 과거를 보러 가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나이가 늙었으니까요. 백두로서 고시장에 나타난다는 건 선비로서는 부끄러운 일이거든.”
한다. 왕군(王君)은 순후한 장자(長者)였고 호는 혹정(鵠汀)이라 한다. 따로 〈혹정필담(鵠汀筆談)〉과 〈망양록(忘羊錄)〉을 썼다. 그의 키는 7척이 넘고, 자못 궁수(窮愁)에 싸인 태도를 숨기지 못한 채 가끔 한숨을 내뿜곤 하였다. 단지 한 종이 있어서 서로 의뢰하였을 뿐이다. 어느 날 나를 초대하여 함께 식사하였다.
학성(郝成)은 흡(歙 안휘성(安徽省)의 지명) 사람이다. 그의 자는 지정(志亭)이요, 호는 장성(長城)이다. 현재 산동도사(山東都司)로 근무중이다. 그는 비록 무인(武人)이었으나 학문이 넓고 아는 바가 많으며, 키는 8척이요, 붉은 수염과 번쩍이는 눈동자에 골상이 비범[精緊]하였다. 나와 함께 밤낮 이야기를 잇달았으나 조금도 피로한 빛을 띠지 않았다. 그의 저서는 대개 시화(詩話)로 되어 있다.
윤가전(尹嘉銓)은 직례(直隷) 박야(博野)옛 조(趙)의 땅이다. 사람이다. 그의 호는 형산(亨山)이라 하고, 통봉대부(通奉大夫)대리시경(大理寺卿)으로 치사(致仕)하였으니 이때 나이는 일흔이다. 올해 봄에 글을 올려 물러가기를 청하매 황제가 특히 2품(品)의 관모(官帽)와 의복을 하사하여 괴이었다. 그는 시와 글씨, 그림에 조예가 깊고, 그의 시는 정성시산(正聲詩刪) 중에 많이 실려 있다. 그가 《대청회전(大淸會典)》을 편찬할 때 한림(翰林)편수관(編修官)으로 있었으며, 또 황제와 동경(同庚 동갑)이었으므로 더욱이 괴임을 입어 특명을 받들고 행재소(行在所)에 왔을 제 희대(戱臺)에서 악곡을 듣고서 〈구여송(九如頌)〉을 지어 바치매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81종의 극본(劇本) 중에 가장 먼저 이 〈구여송〉을 연출하였으니 그는 황제의 시 벗이라 한다.
나에게 〈구여송〉 한 본을 주었으니 이미 간행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어느 날 상자 속에서 부채 하나를 꺼내어 그 자리에서 괴석(怪石)과 총죽(叢竹)을, 그리고 위에 5절(絶) 시를 써서 내게 주고는 이어서 주련(柱聯) 한 쌍을 써 주었다. 또 어느 날 그는 양(羊) 온 마리를 쪄놓고 왕 거인(王擧人)과 나를 초청하여 함께 먹게 하고 그 밖에도 온갖 엿과 과실들을 섞어 내왔다. 이는 특히 나를 위해 마련한 것이다. 그의 키는 7척이 넘고 얼굴과 자태가 아담하고도 조촐[雅潔]하였으며, 두 눈동자가 맑은 채 안경을 쓰지 않고서도 가는 글씨를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렸다.
그는 몹시 건강하여 겨우 쉰 살이 넘은 듯싶으나 수염과 머리칼은 하얗게 희었으며 대체로 간솔 화락한 사람이다. 내게 연경으로 돌아가거든 반드시 서로 찾아 줄 것을 다짐하면서 그 집 있는 곳을 그려 보여 주고는 또 내게 술을 끊을 것과 여색(女色)을 멀리 할 것을 부탁한다. 내 그 뒤 연경에 돌아와 그에 대한 물의(物議)를 들어보니 모두들 그를 백부(白傅)에게 견주었다.
그때 마침 그가 황제(皇帝)를 모시고 역주(易州)에 있어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끝내 서로 만나 작별하지 못하였다. 따로 그와 함께 고금의 악률(樂律)과 역대의 치란에 대한 문답이 있어서 모두 〈망양록(忘羊錄)〉 중에 실었다.
경순미(敬旬彌)의 자는 앙루(仰漏)였고 몽고 사람이다. 현재 강관(講官 교수(敎授))으로 있으며 나이는 서른아홉이다. 키는 7척이 넘고 얼굴은 희면서 눈이 길고 눈썹이 짙으며, 손가락은 파뿌리[葱根]처럼 되었으니 미남자라 이르지 않을 수 없겠다. 나와 엿새 동안 같이 있었으나 한번도 이야기 자리에 오는 적이 없었다. 만(滿)ㆍ한(漢)을 논할 것이 없이 남에게 정성껏 대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유독 이 사람 하나가 제법 오만한 듯싶었다.
추사(鄒舍)는 산동 사람이었으며 거인(擧人)이다. 왕혹정(王鵠汀)과 태학에서 수양하는 중이다. 그때 연경에서 모임이 있어서 이곳에 머물던 선비 70명이 모두 그곳으로 떠나고, 다만 이 왕(王)ㆍ추(鄒) 둘만 잔류하였다. 그의 사람됨이 몹시 강개하여 시휘(時諱)를 피하지 않을뿐더러 얼굴이 괴이하고 행동이 거세었으므로 남들은 그를 광생(狂生)이라 지목하여 싫어하는 이가 많았다.
기풍액(奇豐額)은 만주 사람이며, 자는 여천(麗川)이다. 현재 귀주 안찰사(貴州按察使)로 있으며 나이는 37세이다. 그는 애초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중국에 들어간 지 이미 네 대째였으나 본국에서의 문망(門望)이나 조상은 알 길이 없고, 다만 그의 본성(本姓)이 황씨(黃氏)임을 알 뿐이라 한다. 키가 8척에 얼굴이 희고 풍도(風度)가 아름다운데 곧장 위의를 잘 꾸미며, 넓은 학문에 글 잘하고 또 해학과 웃음을 잘 지었다. 불교를 몹시 배격하고 의논을 가짐이 제법 올바르긴 하나 사람됨이 교만하여 온 세상이 안중에 없다. 태학사(太學士)이시요(李侍堯)가 운남(雲南)ㆍ귀주(貴州)의 총독(總督)이 되었을 때 귀주 안찰사해명(海明)이 2백 냥의 뇌물을 바쳤던 것이 발견되자 이시요를 가두게 되고 해명은 사형을 면하여 흑룡강(黑龍江)에 귀양살게 되었으므로 여천이 해명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내 우연히 그의 거처를 지나다가 누렇게 칠한 궤짝 수십 쌍을 발견하였으나 모두 아무 물건도 들어 있지 않았다. 아마 만수절(萬壽節)의 공물을 다 바친 것인 듯싶었다. 나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이별의 말이 나오자 문득 눈물을 흘리곤 한다. 혹자는 이르기를, ‘풍액이 화신(和珅)에게 아부하여 해명을 밀어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한다. 내 연경에 돌아와 그의 집을 찾아 귀주로 떠나는 길에 작별하였다.
왕신(汪新)의 자는 우신(又新)이었으며, 절강(浙江) 인화(仁和)에 살고 있었다. 현재 광동 안찰사(廣東按察使)로 있다가 나의 성명을 여천(麗川)에게서 듣고는 여천과 함께 찾아온 것이다. 여천의 자리에서 서로 만나 한번 보자 곧 마음을 기울여 옛 친구와 다름없게 되었다. 그의 키는 7척이 넘고, 성긴 수염에 얼굴빛이 검으면서 더러워 별다른 위의는 없었으나 성격이 진솔 그대로 아무런 꾸밈이 없었다. 나와 같은 해, 같은 달에 났으나 나보다는 열 하루 뒤졌을 뿐이다. 나는 그에게,
“오서림(吳西林) 영방(穎芳)이 무양(無恙)하신지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오서림 선생께선 오중(吳中)의 고사(高士)입니다. 나이 80입니다마는 오히려 건강하셔서 저서를 쉬지 않는답니다.”
한다. 나는 또,
“육소음(陸篠飮) 비(飛) 그분도 무양하시지요.”
하였더니, 그는 놀라는 어조로,
“알지 못하겠노라. 존형(尊兄)께서 오(吳)ㆍ육(陸)을 어떻게 아시는지요.”
한다. 나는,
“소음 말씀이셔요. 그가 건륭 병술년(1766) 봄에 과거 보러 연경에 머물렀을 제 우리나라 어떤 선비(홍대용(洪大容)을 가리킴)가 그를 여저(旅邸)에서 만난 일이 있어서 그의 시문과 서화가 동한(東韓)에 많이 회자(膾炙)되고 있답니다.”
하였다. 그는,
“소음이야 말로 기이한 선비지요. 올해 회갑(回甲)이에요. 그는 강호에 불우한 채 쓸쓸히 시와 그림으로 생명을 삼고, 산수로 벗을 삼을뿐더러 술마시어 크게 취한다면 광가(狂歌)ㆍ분매(憤罵)를 일삼는답니다.”
한다. 나는,
“무엇에 분개하여 타매(唾罵)를 한답니까?”
하였더니, 그는 대답을 회피하기에, 나는 또,
“그럼, 엄구봉(嚴九峯) 과(果) 그 분은 어떻게 되었는지요.”
하고 물었다. 그는,
“내 시골을 떠난 지 오래되어서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만 육(陸)은 저의 지극히 친한 벗이었으며 모두들 그를 육해원(陸解元)이라 부르죠. 그리고 그를 당백호(唐伯虎)와 서문장(徐文長)에게 견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서호(西湖)를 떠나지 않은 지 서른 해에 부귀가 극치에 달하였답니다. 그리고 저는 시골을 떠난 지 10년 만에 다만 바람결에 그의 소식을 들었으나 그는 차와 술에 취미를 붙였으며, 대체로 뜻을 얻은 사람이어서 저처럼 풍진 속에 골몰하진 않을 것입니다.”
한다. 그리고 그는 이틀 뒤에 다시 와서 미진한 기쁨을 다하기로 다짐한다. 여천이 왕(汪)에게,
“박공(朴公)께서 술을 좋아하시니 모름지기 야자주(椰子酒)를 사시우.”
한다. 그는 머리를 끄덕인다. 여천이 또,
“연암(燕巖)께선 성격이 양(羊)을 좋아하질 않구 낙화생(落花生)을 즐기시던구먼.”
한다. 그는 또 머리를 끄덕인다. 그제야 문에 나가 그를 보낸다. 여천이 나를 돌아보며,
“이야말로 해량(海量)이여유.”
한다. 이는 주량(酒量)이 많음을 이름이다. 이튿날 왕이 하인을 보내어,
“내일은 다른 곳에 가지 마시고 꼭 기다려 주십시사.”
하며, 거듭 부탁하였으나, 이튿날 갑자기 연경으로 떠나게 되어서 그와 다시 만나보지 못하였다.
파로회회도(破老回回圖)는 몽고 사람이었고, 자는 부재(孚齋)였으며, 아호는 화정(華亭)이다. 현재 강관(講官)으로 있으며 나이는 47세이다. 그는 강희 황제의 외손(外孫)이다. 키가 8척에 긴 수염이 심히 성하였고, 얼굴이 여윈데다가 누르고 바싹 말랐으며, 그의 학문은 깊고도 넓었다.
내 그를 주루(酒樓)에서 처음 만났는데 사람됨이 제법 점잖았으며 모신 하인(下人) 30여 명의 그 의모(衣帽)ㆍ안마(鞍馬) 차림이 호화 찬란한 것을 보아서 그가 병관(兵官)을 겸한 것인 듯싶고 그의 얼굴 역시 장군(將軍)처럼 생겼었다.
호삼다(胡三多)는 승덕부(承德府) 민가(民家) 한인(漢人)을 민가라 한다. 의 작은 아이다. 날마다 아침 일찍 책을 끼고 와서 왕혹정(王鵠汀)에게 글을 배운다. 나이는 방금 열두 살이지만 얼굴이 맑고 빼어나 조금도 속기(俗氣)가 없을뿐더러 예절에 익숙하고 거동이 조용하였다. 부사가 그에게 명하여 복숭아를 두고 시를 짓게 하였더니 운(韻)을 청하여 그 자리에서 지었는데 문장과 이치가 함께 원만하여 붓 두 자루를 상 탔다. 그가 또 운을 청하여 즉석에서 읊어 감사한 뜻을 표하였다. 어느 날 사신이 모두 일찍 조반에 들어가고 방이 빈 채 나 혼자서 남아 있게 되었다. 삼다가 와서 이야기하였다. 내 마침 망건(網巾)을 벗고 누웠을 제 삼다가 망건을 갖고 상세히 들여다보고서 심히 번거롭게 파고 묻기에, 나는,
“한 개의 되놈도 오히려 많거늘 하물며 셋일까보냐.”
하고, 농담을 걸었다. 삼다는 곧,
“한 땅덩이에 두 임금이 없사온데 어째서 일소(一少)라 하였답니까.”
하고, 응구 대첩한다. 이는 대개 왕일소(王逸少 왕희지(王羲之)의 자)를 이름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글자의 음(音)이 같을 경우에는 그와 같은 글자로 멋대로 쓰곤 한다. 이는 비록 말이 유창하진 못하나 재치 빠르고도 숙성하지 않다고는 이를 수 없으리라. 엄청나게 큰 통관박보수(朴寶樹)의 노새가 달음질쳐 마당 가운데서 뛰노는 것을 보고 삼다가 재빨리 나가 그 턱의 목살을 쥐고 가니 노새가 머리를 숙인 채 굴레를 순하게 받는다. 또 어느 날 정사가 창을 비껴 앉았을 제 삼다가 그 앞을 지나치기에 정사가 그를 불러 환약과 부채를 주었더니 삼다가 절하고 사례하면서 이내 정사의 성명과 관품을 물었다. 그 당돌함이 이러하였다.
조수선(曹秀先)은 강서(江西) 신건(新建) 사람으로 자는 지산(地山)이다. 현재 예부 상서(禮部尙書)이고, 나이는 60세 남짓 되었다. 어제 내가 사신의 뒤를 따라 그를 조방(朝房)에서 만났고, 다음날 내가 우연히 한 곳 새로 창건한 관후묘(關侯廟)에 들렀더니 그 동무(東廡)에 한 학구(學究)가 네댓 명 동자들을 가르치고 있기에 나는 그에게,
“이곳이 넓고도 통창하니 경대부(卿大夫) 몇 분이나 와 있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그 학구는,
“현재 예부 조대인(曹大人)께서 이곳에 계시답니다.”
한다. 내가 그에게 종이와 먹을 빌려 명함을 써서 통자(通刺)하였다. 학구는 곧 일어나 재빨리 가 버린다. 나는 그곳을 향하여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그 학구가 섬돌 위에 나서서 손을 들어 나를 부르기에 나는 섬돌 밑에 이르렀다. 조공(曹公)이 벌써 문 밖에 나와 서로 맞이할 제 손수 나를 이끌어 교의 위에 앉힌다. 나는 머뭇거리며 굳이 사양하였으나 그 역시 굳이 앉기를 청한다. 나는,
“공(公)은 귀인이시오니 먼 나라에 사는 제가 감히 주객(主客)의 예를 차리겠사옵니까.”
하였다. 그는,
“당신은 공사(公事)로 이곳에 오신 거요.”
하기에, 나는,
“아니올시다. 상국(上國)에 관광(觀光)하러 온 것이올시다.”
하였다. 그는 또,
“그럼 벼슬은 몇 품이나 되시오.”
한다. 나는,
“전 수재(秀才)입니다. 사신의 뒤를 따라왔을 뿐 아무런 직책은 없답니다.”
하였더니, 그는 황망히 나를 이끌어 앉히면서,
“아무런 직책이 없으시다면 선생은 곧 나의 존빈(尊賓)이고, 제대로 접대해 드릴 예식이 있으니 선생은 굳이 사양하지 마시오.”
하고는, 이내,
“귀국의 선거(選擧) 제도는 어떠하죠. 대비(大比)에 몇 명이나 뽑으며 시험에는 어떤 식의 문제로써 하시는지요.”
하고 묻는다. 그는 바야흐로 과제(科題)를 쓰는 모양이다. 그는 스스로 안경을 끄집어 내어 한편으로는 귀에 걸며, 한편으로는 재빨리 쓰곤 한다. 얼마 아니되어 30여 명이 별안간 들어와서 일자(一字)로 늘어서더니 그 중 이마가 번쩍번쩍하는 한 사람이 한편 무릎을 꿇고서 일을 여쭙는데 극도로 공손하여 그 와서의 거리가 30여 보나 되었으나 말할 때에는 반드시 손으로써 입을 가리곤 한다. 그러나 조(曹)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필담(筆談)을 쓰면서 그의 여쭙는 일을 수응하는 것이었다. 이마 번쩍이는 자가 잠깐 일어났다가 다시 앉아서 여쭙기를 끝내고는 스스로 교의 하나를 이끌어 멀리 동쪽 바람벽 밑에 앉는다. 그리고 그 늘어섰던 자들도 일시에 물러가고 얼마 아니되어 일을 여쭙던 자 역시 하직 인사없이 일어서 가 버린다. 온 집이 다시 사람 없는 듯이 괴괴하였다. 나는 그때 조와 마주 앉았었고, 그 학구는 한쪽 편에 앉았는데, 그의 나이는 50세 남짓하고 머리에는 풀모자를 썼으며 필담을 들여다본다. 별안간 한 사람이 명함을 드리는데 첫 머리에 신수호남(新授湖南)이라는 네 글자가 보이고 그 밑 몇 글자는 소매에 가렸고 끝에는 어사윤적(御史尹績)의 넉 자였다. 조가 붓을 던지고 일어나 재빨리 문을 나간다. 학구가 나를 이끌되 마치 잠깐 피해 달라는 시늉이다. 나는 학구를 따라 나와서 다시 아까 들었던 방에서 기다렸다. 윤적(尹績)이 조와 함께 들어가더니 얼마 아니되어 윤적은 앞에 서고 조는 뒤를 따라 나가기에 나는 마음속으로 손님 떠나보낸 뒤에는 의당 돌아와 나와 조용히 이야기하겠지 하고는 오래도록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는다. 괴이하여 학구더러 물으니 벌써 대궐에 들어간 것이다. 조의 얼굴은 늙고도 더러워서 아무런 위의가 엿보이지 않으나 사람됨이 개제(愷悌)하고 평화로웠다. 내 연경에 돌아온 뒤에 중국의 사대부가 많이들 조공(曹公)을 두고,
“지산선생(地山先生)의 문장과 학문이야말로 당세에 으뜸이시지.”
하고 기리면서, 또 그를 구양영숙(歐陽永叔)에게 견주기도 한다. 그리고 장정옥(張廷玉)이 《명사(明史)》를 엮을 때에 조가 역시 사국(史局)에 참여하였으니, 그는 대개 묵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뒤에 다시 관묘(關廟)에 들렀으나 그 학구도 어디론지 가 버렸다. 학구의 성명은 잊어버려서 이에 기록하지 못하겠으나 대개 한인(漢人)이었으며, 글이 짧아서 겨우 필담을 하긴 하나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연구한 뒤에서야 무슨 말인 줄을 알 정도였다.
왕삼빈(王三賓)은 복건 사람으로 나이는 스물다섯이다. 그는 윤형산(尹亨山)의 구종이거나 또는 기려천(奇麗川)의 하인인 듯싶다. 글을 잘 알며 그림에도 명수이다.
[주D-001]백부(白傅) : 당의 저명한 문학가 백거이(白居易). 부는 태자소부(太子少傅). 자는 낙천(樂天).
[주D-002]육소음(陸篠飮) 비(飛) : 소음은 호요, 비는 이름. 자는 해원(解元).
[주D-003]엄구봉(嚴九峯) 과(果) : 구봉은 호요, 과는 이름.
[주D-004]당백호(唐伯虎) : 명의 저명한 문학가 당인(唐寅). 백호는 자요, 또는 자장(子張). 호는 육여(六如).
[주D-005]서문장(徐文長) : 역시 명의 저명한 문학가 서위(徐謂). 문장은 자요, 또는 천지(天池).
[주D-006]한 개의……셋일까보냐 : 호삼다(胡三多)의 세 글자 풀이.
[주D-007]대비(大比) : 3년 만에 한 차례씩 보이는 과시. 곧 식년시(式年試). 뒤에는 흔히들 향시(鄕試)를 대비라 하였다.
[주D-008]구양영숙(歐陽永叔) : 송의 저명한 문학가 구양수(歐陽脩). 구양은 성이요, 영숙은 자.
[주D-009]장정옥(張廷玉) : 청의 사학가. 명사의 편찬 사업을 맡은 대표자.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