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열하일기

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熱河日記) - 심세편(審勢編)

은인자중 2023. 7. 13.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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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심세편(審勢編) 박지원(朴趾源, 1737∼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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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심세편(審勢編)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심세편(審勢編)

1. 심세편(審勢編)

 

심세편(審勢編)

나는 생각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중국에 노는 이로, 다섯 가지 허망(虛妄)된 일이 있다. 지벌(地閥)로 서로 뽐내는 것은 애초에 우리나라의 더러운 관습이므로, 유식한 이가 국내에 있을 때에도, 오히려 양반(兩班) 이야기를 부끄럽게 생각하거늘, 하물며 외국의 토성(土姓)으로서 도리어 중국의 오래된 종족을 깔보려 하니, 이는 첫째의 허망이다. 중국의 붉은 모자나 이상한 소매는 비단 한족이 부끄러워할 뿐이 아니라, 만인들 역시 부끄러워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들의 예속(禮俗)이나 문물(文物)은 사이(四夷) 중에서 오히려 당할 자 없음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들과 조금도 버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만 한 줌만큼 작은 상투 하나로써 스스로 천하에 뽐내려 하니, 이는 둘째의 허망이다. 옛날, 월정(月汀) 윤공(尹公) 근수(根壽)가 명()에 사신갔다가 길에서 어사(御史)왕도곤(汪道昆)을 만나, 길가에 피해서 숨을 죽이고 그의 행진(行塵)을 바라본 것만으로써도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하였다더니, 이제 중국이 비록 변하여 오랑캐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천자의 칭호는 오히려 고쳐지지 않은 만큼, 그들 각부(閣部)의 대신들은 곧 천자의 공경(公卿)인 동시에, 반드시 옛날이라 해서 더 높다든지, 또는 이제라고 해서 더 깎이었다든지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신들은 제대로 관장(官長)을 뵈는 예식은 두고도, 그들의 조정에서 절하고 읍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문득 모면하기를 일삼아서 이것이 드디어 하나의 규례가 이룩되었으며, 설혹 그들을 만나면 대체로 거만한 것으로써 고상한 취미를 삼고 공손한 것은 욕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니, 그들이 비록 이에 대하여 가혹하게 추궁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우리쪽의 무례함을 우습게 여기지 않겠는가. 이는 셋째 허망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문자(文字)를 안 뒤로부터 중국의 것을 빌려 읽지 않는 글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 역대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치고 어느 것이나 꿈 가운데 꿈을 점침이 아닌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공령(功令)의 남은 기습(氣習)으로써 억지로 운치(韻致) 없는 시문을 쓰면서, 별안간 중국에는 문장이 없더구먼.’ 하고 헐뜯으니, 이는 넷째 허망이다. 중국의 선비들은 강희(康熙) 이전에는 모두 명()의 유민이었으나, 강희 이후에는 곧 청실(淸室)의 신하와 백성임이 틀림없는 만큼, 실로 그 정부에 충성을 다하여 법률을 존중하되, 보통 때에 언론이라도 외국 사람들에게 그 정부를 반대하는 말을 세운다면, 이들은 곧 이 세상의 난신(亂臣)이요, 적자(賊子)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은 한번 중국의 선비를 만난 때에, 그들이 그 임금의 은택을 자랑함을 보고는, 정반대로 문득 일부(一部) 춘추(春秋)를 이제야 읽을 곳이 어디 있겠어.’ 하고는, 말마다 연()()의 저자에 옛날과 같은 강개(慷慨)한 선비가 없음을 탄식하니, 이는 다섯째의 허망이다.

그리고, 중국의 선비들은 세 가지 남보다 어려운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한 번 거인(擧人)이 되면 경()()의 전체에 대한 가지가지의 변증(辨證)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백가(百家)구류(九流)에 이르기까지라도 그 원류(源流)는 대략 섭렵해서 물음에 막힘이 없나니, 그렇지 않으면 족히 선비가 될 수 없는 까닭이니, 이것이 첫째의 어려움이었고, 그들의 인간적인 면은 생각이 너그럽고 행동이 속되지 않으며, 예법에 익숙하여 아름다운 얼굴에다 교만한 태도를 나타내지 않으며, 게다가 몸을 낮추어 가면서 남을 받아들이어 대국의 체면을 잃지 않으니, 이것이 둘째의 어려움이었고,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먼 일이나 가까운 일이나를 막론하고 법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으니, 법을 두려워하므로 벼슬에 조심하고, 벼슬에 조심하므로 제도가 한결같으며, 사민(四民)이 각기 업()을 나누어서 자치에 힘쓰지 않는 자가 없게 되니, 이것이 셋째의 어려움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위와 같은 다섯 가지의 허망을 가진 것은 실로 중국 사람이 저희들끼리 멸시함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끼리의 멸시하는 내용을 따진다면 이 역시 중국의 과오는 아닐뿐더러, 그들이 애초부터 지니고 있는 세 가지의 어려움은 또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결코 멸시하지 못할 일이다. 옛날 진경지(陳慶之 남북조 때 양()의 명장)가 위()로부터 남쪽으로 돌아온 뒤에 북방 사람들을 매우 존중하게 여기기에, 주이(朱异 남북조 때 양의 학자)가 괴이하게 여겨서 물었더니, 경지는,

 

()() 이후로 낙양을 황무한 지역(地域)으로 본 것은 곧, 장강 이북이 모두 이적(夷狄)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으나, 이제 낙양에 이르러, 비로소 예법을 갖춘 사족들이 모두 중원에 있으니 예의의 풍부하고 인물들이 번영하며, 듣고 본 것을 이루 다 전할 수 없겠어.”

하고 답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망양(望洋)의 탄식을 금하지 못함은, 지금이나 예나 마찬가지임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내가 열하에 있을 동안에 중국의 사대부들과 접촉이 자못 많았었다.

그리하여 보통 때 서로 이야기하는 중에서도, 날마다 전일에 알지 못하던 바를 안 것이 퍽 많았다. 그러나 시정(時政)의 잘잘못이나 또는 민정(民情)의 향배에 대하여는 비록 알려고 애써도 방법이 없었다. 옛글에 말하기를,

 

그 나라의 예법을 살펴보고는, 그들의 정치를 알 것이며, 그 나라의 음악을 듣고는, 그들의 도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진리는 백세를 지난 뒤에 백세 이전의 왕()을 비교해 보더라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벌써 자공(子貢)의 기술과 계찰(季札)의 슬기가 없은즉, 비록 여러 가지의 악기(樂器)와 춤추는 도구가 날마다 앞에 벌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정치와 도덕이 나온 근본을 알 방법이 없을 것인데, 하물며 먼 옛날의 음률을 범론(泛論)해서 어찌 그 당시 정치의 고하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너절하고도 번잡한 혐의를 헤아리지 않고 짐짓 이러한 사리에 닿지 않고 막연한 질문을 하는 것은 무슨 이유냐 하면, 대개 중국 선비들의 천성은 과장을 좋아하고 학문에 해박함을 귀하게 여겨서, 그들의 이론은 경()()에 드나들며 파리채를 휘두르고 바람을 내었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첫째 말씨가 아름답지 못한데다가 또한 질문에 급해서 대뜸 시국에 관한 일을 이야기하려 들며, 또는 스스로 옛 의관의 차림을 자랑하여 그들이 부끄러워하는가 또는 부끄러워하지 않는가를 살필 뿐이었고, 혹은 대뜸 만나면,

 

당신들은 민족적인 사상(思想)을 지녔느냐?”

고 물어서, 그들로 하여금 말문이 막히게 하니, 이런 일들은 비단 저희들만이 싫어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실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의 환심을 사려면, 반드시 대국의 명성(名聲)과 교화(敎化)가 갸륵함을 극히 칭찬하여, 먼저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며, 또 중국과 우리들과의 사이가 일체가 되었는 듯이 하여, 그 혐의쩍은 것을 피하되, 한편으로는 그들의 예악(禮樂)에 뜻을 붙이며, 그 전아(典雅)함을 숭배하는 듯이 할 것이요, 또 한편으로는 역대의 역사를 들출지언정, 최근의 일에는 언급하지 말 것이다. 그리고 뜻을 공손히 하여 배우기를 원하되, 그로 하여금 마음 놓고 이야기할 기회를 주고는, 거짓으로 모르는 척하여 그의 마음을 울적하게 하여 본다면, 그의 미첩(眉睫) 사이에는 진실인지 허위인지가 저절로 나타날 것이며, 보통 웃고 지껄이는 사이에 그의 정실을 탐지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곧, 내가 그 영향을 문자(文字)의 밖에서 얻은 것이리라.

아아, 슬프도다. 중국의 유학은 점차 줄어듦에 따라서 온 천하의 학문이 한 갈래로 나오지 않게 되어, ( 주희(朱熹))()의 나눔이 벌써 수백 년이 되어 서로 헐뜯으며 미워하기를 원수와 같더니, ()의 말기에 이르러서 천하의 학자가 모두 주자를 숭배하였으므로, 육씨(陸氏)를 따르는 이가 드물게 되었다. 그러다가 청()이 중국의 주인이 되자, 가만히 학술(學術)의 종주(宗主)가 있는 곳과, 또 당시 그를 따르는 수효가 많고 적음을 살펴서 많은 편을 좇아 힘껏 숭배하여, 주자를 십철(十哲)의 동렬에 올려 모시고는 천하에 외치기를,

 

주자의 도덕은 곧 우리 제실(帝室)의 가학(家學)이야.”

하매, 천하 사람들 중에는 이에 만족하여 열복(悅服)하는 이도 있거니와, 또는 이것을 가장하여 출세의 길을 바라는 자도 없지 않았다. 그러니 이른바 육씨의 학문은 거의 끊어지고 말았다.

아아, 슬프도다. 그들이 어찌 주자의 학문을 알아서 그 올바른 것을 터득하였으리오. 이는 곧 천자의 높은 지위로서 거짓 숭배하였음이니, 이는 그 뜻이 한갓 중국의 대세를 살펴서 재빨리 남보다 먼저 이를 차지하여, 온 천하 사람의 입을 재갈먹여서 감히 자기들에게 오랑캐라는 이름을 씌우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다.

어째서 그런 줄 알았는가 하면, 일찍이 중국을 높이며 오랑캐를 배격하였음을 보고서 재빨리 논문(論文)을 써서 송 고종(宋高宗 조구(趙構)) 춘추(春秋)의 정의를 알지 못하였음을 배격하였으며, 진회(秦檜)가 강화를 주장한 죄악을 성토하였고, 주자가 모든 글에 집주(集注 유학 경전의 주석)하였던 것을 보고는, 곧 천하의 선비를 모아서 천하의 글을 증집하여 도서집성(圖書集成)》ㆍ《사고전서(四庫全書) 등을 만들고는 온 천하 사람들에게,

 

이는 곧 주자의 말씀이며 또는 주자의 끼치신 종지(宗旨)들이야.”

하고 외쳤다. 그가 걸핏하면 주자를 드높이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천하 사대부의 목덜미를 걸터타고는 그들의 목구멍을 조른 채 그 등마루를 어루만지면, 천하의 사대부들은 모두들 그 위협과 어리석게 하는 술법에 휩쓸리어, 구구(區區)하게 예문이나 제도의 가운데에 눌어붙어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어떤 이가 말하기를,

 

청인(淸人)이 벌써 중국의 예문을 숭상하면서도 이내 만주의 옛 풍속을 변경하지 않음은 무슨 이유인가.”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어어, 이것만으로도 그들의 뜻을 알 수 있지 않아.”

하고 답한다. 그러나 그들은,

 

나는 결코 천하의 이권(利權)을 사랑함이 아니야. 나는 오로지 명실(明室)만을 위하여 커다란 원수를 갚으며 커다란 치욕을 씻어 주려고 함이야. 그리고 천하에는 오랫동안 텅 비어 있는 이치가 없을 것인즉, 나는 천하를 위해서 중국을 지키다가 중국의 주인이 생긴다면 모든 것을 거두어 가지고 동쪽으로 돌아갈 것이야. 그러므로 나는 감히 우리 조상의 옛 제도를 고치지 못하는 거야.”

하고 변명할 것이요, 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저들이 자기의 옛 습속을 그대로 가진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째서 천하를 휩쓸어서 억지로 그들의 법을 따르게 하는 거야.”

한다면, 어떤 이는,

 

그럼 이것만으로도 그들의 뜻을 알 수 있잖아.”

하고는 답한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 제왕(帝王)이란 문자(文字)라든가 수레의 궤도(軌道)라든가 모든 제도를 통일할 따름인만큼, ()의 신하가 된 자는 마땅히 시왕(時王)의 제도를 따를 것이요, 청의 신하가 되지 않는 자라면 시왕의 제도를 따르지 않으면 그만이야.”

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동남 지방은 어디보다도 개명을 하여, 반드시 온 천하 중에 그들이 먼저 일을 일으킬 걱정이 있을뿐더러, 그들의 성격은 경조하고도 부박하여 이론을 좋아하므로, 강희 황제가 강소절강 지방에 여섯 차례나 순행하여 가만히 모든 호걸의 사상을 눌렀으며, 지금 황제는 그 뒤를 밟아서 다섯 차례나 순행하였고, 천하의 큰 걱정은 늘 북쪽 오랑캐에게 있으므로 그들을 항복받은 뒤에도 강희 황제가 열하에다가 행궁(行宮)을 세우며, 몽고의 강력한 군대를 이에 주둔시켜 놓으니, 이는 실로 중국의 군사를 괴롭히지 않고도 호()로써 호를 방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군비(軍費)는 생략되나 국방은 굳셀 것이므로 황제가 친히 통솔하여 지키고 있는 것이며, 서번(西藩)이 비록 강한(强悍)하나 다만 황교(黃敎)를 몹시 두려워함을 보고는, 황제는 곧 풍속을 따라서 몸소 스스로 그 교를 믿어서, 그 법사(法師)를 모셔다가 집을 찬란하게 꾸며서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는, 게다가 명목만 ()’이라 빌려 주어서 그의 세력을 쪼개었으니, 이는 곧 청인(淸人)이 사방을 제어하는 교묘한 방법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만 중국에 대하여 마치 무관심한 듯싶으나 역시 그런 것은 아니다. 대개 그는, 온 천하의 세민(細民)들이야 그들에게 세금(稅金)만 헐하게 해 준다면 곧 안정될지니, 그렇다면 그들은 도리어 우리의 벙거지와 의복의 제도를 편리하게 여겨서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다만 천하 사대부의 사상을 억누를 방법이 없는 만큼 고식적으로나마 주자의 학문을 높여서, 허랑한 선비들의 마음을 크게 위안시킨다면, 그들 중에 호걸은 감히 노여워할지언정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중 야비하고 아유하는 자는 시체(時諦)를 따라서 자기 개인적인 이익을 꾀할 것이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불언 중에 중국 선비의 사상을 약체화시키고,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문화인의 대우를 받게 하되, 저 진()의 갱유(坑儒)와 같은 행위를 취하지 않고도, 그들의 선비는 문자 교정하는 사무에 골몰하게 하며, 진의 분서(焚書)와 같은 정책을 떠나서도 그들의 서적은 실제적으로는 취진국(聚珍局)에서 흩어지게 된 셈이다. 건륭은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책판을 가리켜 취진판(聚珍板)이라 하였다. 아아, 슬프도다. 이는 곧, 이른바 구서(購書)의 재앙(災殃)이 분서에 비해서 심하다는 말은, 이를 말함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중국 선비들은 가끔 주자 반박하기에 조금도 거리낌없는 모기령(毛奇齡)에 대해서도 어떤 이는 그를 주자의 충신이라 하고, 혹은 그는 위도(衛道)의 공이 있다.’ 하고, 또는 은가(恩家)를 도리어 원망함이다.’ 했으니, 이런 것들을 보아서도 족히 그들의 미의를 짐작할 것이다. 아아, 주자의 도덕은 마치 해가 중천에 떠오른 것과 마찬가지여서 세계 만국(萬國)이 모두 우러러보는 바이거늘, 저 황제가 사사로이 숭배했다 한들 주자에게는 아무런 누가 될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의 선비들이 이다지 부끄러워하는 것은, 대개 그들이 거짓 높여서 세인을 억누르려 하는 자구(資具)로 쓰는 데에 격분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가끔 한두 가지 집주(集注)의 그릇된 곳을 빙자하여, 백년 동안의 번민하고 원통한 기운을 씻으려는 것인즉, 이로써 가히 지금의 주자를 반박하는 자는, 실로 옛날 육씨(陸氏)의 학문을 하는 이와는 차별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뜻을 짐작하지도 못하고, 잠깐 중국 선비를 접견할 때에, 대수롭지 않는 말이라도 약간만 주자에 관계된다면, 곧 깜짝 놀라서, 문득 그들을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의 호)의 무리라고 배격하고는, 돌아와 국내의 사람들에게 이르되,

 

어어, 중국에는 육학(陸學)이 한창 성하여 사곡한 학설이 쉴 날이 없더구먼.”

한다. 그러면 듣는 이 역시 이에 대한 시말도 연구해 보지 않은 채 이런 말들을 듣자 마음에는 노여움이 먼저 생기고 만다. 아아, 슬프도다.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성토는 비록 먼 중국에까지 미치지는 않을지라도, 이단(異端)을 용납한 과오는 실로 사람에게 용서받기가 어려운 것이다.

엄계(罨溪) 꽃나무 아래에서 술을 조금 마시고 망양록(忘羊錄) 혹정필담(鵠汀筆談)을 교열(校閱)하여 차례를 정하다가, 이내 붓을 꽃이슬에 풀어서 이 의례(義例)를 만들어 뒷날 중국에 놀러가는 이로 하여금, 그들 중에서 터놓고 주자를 반박하는 이를 만나거든, 그가 반드시 비상한 선배인 줄 알고, 부질없이 이단이라고 해서 배척하지 말며, 말을 잘하여 점차로 그 속까지 스며든다면, 아마 이로 인하여 천하의 대세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C-001]심세편(審勢編) : 이 편은 여러 본에 모두 망양록(忘羊錄)  혹정필담(鵠汀筆譚) 위에 있었으나 이제 연암의 본편 중에 말한 바에 의하여 이곳에 옮겼다.

[D-001]월정(月汀) 윤공(尹公) 근수(根壽) : 조선 선조(宣祖) 때 명신. 월정은 호요, 근수는 이름. 자는 자고(子固).

[D-002]왕도곤(汪道昆) : 명 세종(明世宗) 때 명신. 도곤은 이름이요, 자는 백옥(伯玉).

[D-003]() …… 없음 : 전국 때에 연()()에는 나라를 잃고 비분강개하는 이가 많았다.

[D-004]백가(百家)구류(九流) : 춘추 전국 시대 전후에 유행되던 여러 학파.

[D-005]망양(望洋)의 탄식 : 해약(海若)이라는 물귀신이 바다의 넓음을 바라보고 탄식하였다는 남화경에 나오는 말.

[D-006]그 나라의 …… 것이다 :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

[D-007]자공(子貢) : 전국 때 오()의 현인(賢人).

[D-008]() : 송의 학자 육구연(陸九淵). 자는 자정(子靜)이요, 호는 상산(象山).

[D-009]진회(秦檜) : 송말의 매국적(賣國賊). 회는 이름.

[D-010]구서(購書) …… 심하다 : 모기령(毛奇齡)의 말인 듯하다.

[D-011]엄계(罨溪) : 연암서당(燕巖書堂) 앞에 있는 시내 이름.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