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熱河日記) - 망양록(忘羊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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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망양록(忘羊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망양록(忘羊錄)
1. 망양록 서(忘羊錄序)
2. 망양록(忘羊錄)
망양록 서(忘羊錄序)
아침에 윤형산(尹亨山)가전(嘉銓)과 왕혹정(王鵠汀)민호(民皥)를 따라서 수업재(修業齋)에 들어가 악기(樂器)를 훑어보고 돌아오다가 형산의 처소에 들렀더니 윤공은 양을 통째로 쪄 놓았는데, 이것은 오로지 나를 위해서 차린 것이다. 바야흐로 악률(樂律)이 고금에 같고 다른 것을 이야기하느라고 음식 차려 놓은 지가 오래지만 서로 먹으라 권하지 못했는데, 얼마 있다가 윤공이 양을 아직 찌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심부름하는 자가 대답하기를, 차려 놓은 것이 벌써 식었다고 하므로, 윤공은 자기가 정신을 못 차리고 두서가 없었다고 사과한다. 나는,
“옛날, 공자는 소(韶)를 듣노라고 고기맛을 잊었다더니, 이제 나는 대아(大雅)의 이야기를 듣다가 양 온 마리를 잊었습니다.”
했더니, 윤공은,
“이른바 장(臧)과 곡(穀)이 모두 양을 잊었다는 것이올시다.”
하여, 서로 크게 웃었다. 이에 그 필담(筆談)한 것을 모아서 망양록(忘羊錄)이라 이름한다.
[주C-001]망양록 서(忘羊錄序) : ‘박영철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으나, ‘주설루본’을 따라서 추록하였다.
[주D-001]수업재(修業齋) : 열하 태학 명륜당의 오른편에 있는 집 이름.
[주D-002]공자는 …… 잊었다 : 《논어(論語)》에 나오는 구절. 소(韶)는 순(舜) 때의 음악 이름.
[주D-003]대아(大雅) : 형산을 가리켜서 굉달(宏達)하고도 아정(雅正)한 학자라는 뜻. 이는 대개 학자들이 서로 상대방을 높여서 하는 말.
[주D-004]장(臧)과 …… 잊었다 : 《남화경(南華經)》에 나오는 말로 ‘장과 곡 두 사람이 양을 치는데, 장은 글을 읽고 곡은 노름을 하다가 둘이 다 양을 잃었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망양록(忘羊錄)
나는,
“오음(五音)으로 정명(正名)을 삼고 육률(六律)로 허위(虛位)를 삼아, 소리가 날 적에 헤아려서 맞는 소리를 율(律)이라 하고 맞지 않는 것을 율이 아니라고 한다면, 마땅히 고금에 다름이 없을 것이요, 아악(雅樂)과 속악(俗樂)의 구별이 없을 터인데, 시대마다 각각 음악과 풍아(風雅)가 변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혹시 악기를 만드는 데 있어서 고금의 다름이 있어 소리와 율이 여기에 따라 변하는 것인가요?”
했더니, 혹정은,
“아닙니다. 저는 이 학문에 본래 어둡습니다만, 그래도 한두 가지의 의견은 없지 않아서, 항상 학문이 올바른 군자에게 한 번 시정을 받고자 하던 터입니다. 소리는 목구멍과 혀와 입술과 이로부터 나와서 그 형상이 각각 다르고 보니 악기의 음도 또한 따라서 다르므로, 억지로 이름을 붙여서 소리에 따라 분배해 놓았으니, 오직 그 정한 이름이 있은 연후에야 그 변하는 바를 가히 알 수 있을 것이요, 그 변하는 바를 안 연후에야 만 가지를 불어도 소리가 같지 아니하고, 닮은 소리를 음의 이름에 맞추어 표준을 삼을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5음의 이름이 생긴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 변하는 것으로써 본다면 음이 하필 다섯 가지뿐이겠습니까. 백 음이라 한대도 가할 것입니다. 또 율이란 법률의 율과 같은 것이니,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이미 고저(高低)와 청탁과 크고 가는 구분이 있을진대, 귀로 들을 수 있는 악기를 만들어 일정한 법을 만들었으니, 비유하건대 문법(文法)에는 물론 차등이 있으나 각각 법칙에 맞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직 그 소리가 나는 것을 기다려서 거기에 맞추어야 비로소 표준을 삼을 수 있으므로 6율은 허위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차등이 있는 것으로써 헤아린다면 어찌 여섯 가지에만 그치겠습니까. 천 률이라 한대도 가할 것입니다. 제가 비록 무엇이 궁(宮)이요 우(羽)인지, 무엇이 종(鍾)이요 무엇이 여(呂)인지 모르지만, 만일 기장 알로 치수를 재고갈대 태운 재로 분분히 후기법(候氣法)을 하는 것은 또한 의심스럽다고 봅니다.”
한다. 나는,
“악기로 비유해 말하자면 골짜기와 같고, 소리로 비유한다면 바람과 같을 것이니 골짜기를 고칠 수 없는 것으로 안다면 바람도 부는 것이 변함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만 거센 바람과 화한 바람, 회오리 바람과 싸늘한 바람의 구별이 있을 따름이니, 이로써 의논한다면 음률이 고금에 다름이 있는 것은 악기가 고쳐진 것이 있어서 소리가 변한 것이나 아닐까요.”
했다. 혹정은,
“그렇습니다. 율이 연해서 조(調)가 되고, 조가 어울려 강(腔)이 되고, 강이 합하여 곡(曲)이 되는데, 율에는 간성(姦聲)이 없어도 조에는 편벽된 소리가 있으니, 과연 한 골짜기 바람 중에도 거세고 화하고 회오리와 찬 구별이 있고 새벽과 밤과 아침과 낮의 변화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그 곡조의 정취(情趣)가 달라짐과 듣는 자가 달라지는 데 따라 때때로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여 비로소 고금의 다름과 정성(正聲)ㆍ음성(淫聲)의 구별이 생깁니다. 당(唐)ㆍ우(虞) 시절에 백성의 풍속이 맑을 때에는 귀에 즐거운 음악이 소(韶)ㆍ호(濩)의 곡조이었으니 또 그들에게 배척당한 바를 가히 알 수 있는 것이요, 유(幽)ㆍ여(厲)의 시절에는 민속(民俗)이 음탕해서, 그들의 귀에 즐거운 음악은 상(桑)ㆍ복(濮)의 곡조였으니, 또 그들에게 배척된 바를 가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근세 잡극(雜劇)에, 서상기(西廂記)를 할 때에는 지리해서 졸음이 오다가도, 모란정(牡丹亭)을 연출하면 정신이 나서 고쳐 듣게 됩니다. 이것이 비록 시정의 하찮은 일이라 하더라도 족히 민속의 취향(趣向)이 때를 따라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대부들은 고악(古樂)을 부흥(復興)할 것을 생각하여 강(腔)을 고치고 조(調)를 바꿀 줄을 모르고, 졸지에 모든 악기를 부숴서 원음(元音)을 찾고자 한다면 사람과 악기가 한꺼번에 망하게 되고 말 것이니, 이것이 화살을 따라서 과녁을 그리고, 취하는 것을 싫어하면서 술을 억지로 마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한다. 나는,
“제가 심양에 이르렀을 때 생황(生簧)을 부는 사람이 있기에, 이것을 취해서 한번 불어 보았더니 과연 우리나라의 음에 맞았고, 연음(聯音 여러 음의 배열)이나 기조(起調)가 우리나라 율에 맞았습니다. 그 뒤 곧 북경에 들어와 유리창(琉璃廠)에서 또 한번 불어 보니 이 생황도 그 소리나는 구멍이나 또 부는 구멍들의 금엽(金葉)이 여와씨(女媧氏) 때의 옛 제도와 변함이 없는지 모르겠으니 웬일일까요.”
했더니, 혹정은,
“이것은 만든 구조에 달린 것이니 저는 아직 이 악기를 손에 들고 자세히 구경한 적이 없습니다.”
한다. 형산은,
“어찌 변하지 아니하였겠습니까. 팔음(八音) 중에서 포(匏)는 곧 생황(笙簧)이 이것인데, 벌써 오래 전부터 대뿌리를 잘라서 포(匏) 대신으로 쓴답니다.”
한다. 혹정은,
“율려(律呂)가 변하는 것은 악기의 죄가 아닙니다. 상(桑)과 복(濮)도 그 부는 악기가 관약(管籥)이 아니면 모르거니와, 만일 그 부는 것이 반드시 관약일 때는 그 제도는 마땅히 당ㆍ우 시절의 옛 법일 것이요, 그 치는 바가 종경(鍾磬)이 아니면 모르거니와 그 치는 바가 반드시 종경일 때는 그 음률도 응당 소ㆍ호의 옛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작하는 조(調)가 무슨 음으로부터 나와서 음이 연하며, 율에 화한 연후에 정음(正音)과 간성(姦聲)이 비로소 갈라질 것입니다. 합쳐지는바 간(姦)이 어떤 심정에 감동되어 곡조가 된 후에야 고금 음악이 구별될 것이며, 그 음률이 잘 맞고 맑은 것은 정음이요, 음탕하고 슬프고 사나운 것은 간성이 될 것입니다. 이제 무슨 악기이고 단 한 개의 음과 한 개의 율을 가지고서야 어찌 소ㆍ호를 의논할 것이며 또한 어떻게 상ㆍ복이라 이를 것입니까.”
한다. 나는,
“오음(五音) 소리를 한번 얻어들을 수 있을까요?”
했더니, 혹정은,
“저는 입으로 능히 소리를 내지는 못합니다만 그 형상을 들은 바 있습니다. 광대하고 웅심한 소리는 예로부터 궁음(宮音)이라 하고, 지나치게 높고 조급한 소리는 예로부터 상음(商音)이라 하고, 정확하고 뚝 그치는 것은 예로부터 각음(角音)이라 하고, 빠르고도 치솟는 소리는 예로부터 치음(徵音)이라 하고, 가라앉고 가는 소리는 예로부터 우음(羽音)이라 불렀습니다. 소리가 난다는 것은 모두 칠정(七情)을 거쳐서 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또 변궁(變宮)ㆍ변상(變商)ㆍ변각(變角)ㆍ변치(變徵)ㆍ변우(變羽) 소리가 있으니, 율은 소리를 따라 화해서 마음에 느끼는 바 바르고 편벽된 데 따라서 음이 변하고 율이 맞고 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그 음에는 혹시 선악(善惡)이 있을까요?”
했더니, 혹정은,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반문을 한다. 나는,
“궁음(宮音)처럼 광대하고 웅심한 것은 선(善)이요, 상음(商音)같이 조급한 소리나 치음(徵音)같이 빠른 소리는 착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했더니, 혹정은,
“아닙니다. 5음은 모두 바른 소리입니다. 소위 광대하고 웅심하며 조급하고 빠르다는 것은 다만 여러 가지 소리의 본질을 형용한 것뿐이요, 그 작용인즉 바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궁도 아니요, 상도 아니요, 각도 치도 우도 아닌 것을 간음(間音)이라 하여 5음의 사이에 끼어 있으니 이것이 곧 간성(姦聲)입니다. 5음은 변해서 반음(半音)이 되고, 또 반을 쪼개서 반의 반음으로 되나 이러고도 근본되는 율을 잃지 않을 때는 맑고 탁한 음이 서로 화하고, 높고 낮은 음이 서로 응하여 음이 서로 연하고, 조가 생긴 연후에야 그 음악의 선악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한 가지 일로써 증명할 수 있으니, 궁은 맨처음 정음으로 나와서 임금의 상(像)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파(琵琶)에서 새로 나는 궁성이 기조만 되고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왕영언(王令言)은 수양제(隋煬帝)가 대궐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다니, 어찌 궁성에 무슨 나쁜 것이 있었겠습니까. 이같이 한번 가고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연음(連音)과 기조(起調)의 죄입니다. 왕망(王莽)이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명당(明唐)에 바쳤더니, 그 소리가 슬프고 사나워서 듣는 자가 나라를 일으킬 음악이 아니라 하였고, 진후주(陳後主 진숙보(陳叔寶))는 무수곡(無愁曲)을 지었는데, 듣는 자가 슬퍼하고 원망하는 듯,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고, 수(隋)의 개황(開皇 수 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의 연호) 초년에 새로운 음악으로 만보(萬寶)라는 것이 나오자 항상 음탕하고 사납고도 슬프더니 필경 천하가 오래지 않아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대개 음악을 만들 때는 언제나 궁음 자리에서 조가 시작한다는 말은, 소리가 상음에서 시작될 때는 상이 궁음이 되고, 각음에서 시작될 때는 각이 궁음이 되고, 치음에서 시작될 때는 치가 궁음이 되고, 우음에서 시작될 때는 우가 궁음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한다. 형산은,
“유송(劉宋) 순제(順帝 유준(劉準)) 때 상서령(尙書令)왕승건(王僧虔)은 황제에게 아뢰기를, ‘지금의 청상(淸商)은 실상 동작삼조(銅爵三租 위(魏)의 대표적 음악)에서 나온 것으로 이것이 남겨놓은 풍류다운 음은 양양(洋洋)해서 귀에 넘치고 있어 소리가 알맞고 고르고 단아한 것이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었으나, 수년 동안에 없어진 곡조가 반이나 되고, 민간에서는 서로 다투어 새 잡곡(雜曲)을 만들어 음탕하고 시끄럽기가 한이 없으니, 마땅히 유사(有司)를 시켜서 이것을 모두 고치고 보철(補綴)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대개 위(魏)는 한(漢)을 계승했고 한은 진(秦)을 이었으니, 진의 수도 형산은 주(周)의 형산에서 멀지 않거든, 하물며 진의 음악은 열국(列國)에서 으뜸이 되었으니 마땅히 그 유풍(流風)과 여운(餘韻)이 오히려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진서(晉書)》 악지(樂志)에 이른바 비무(鼙舞)는 한(漢)의 시절에는 잔치 자리에서 쓰던 춤이요, 강좌(江左)에서는 옛날에는 아악(雅樂)이 없었습니다. 양홍(楊泓)은 말하기를, ‘처음에 강남(江南)에 와서 백부무(白符舞)를 보았는데 혹은 백부구무(白鳧鳩舞)라고도 하여 이것은 오(吳)의 사람들이 손호(孫皓 오(吳)의 말주(末主))의 학정(虐政)을 걱정하여 지은 것으로, 그 곡조에 「흰 비둘기는 우글우글, 갈석(북방의 지명)에만 녹을 주네[白鳩濟濟獨祿碣石]」란 구절이 있습니다. 혹은 말하기를, ‘백부구무는 곧 백부(伯符 손책(孫策)의 자)가 창춤을 잘 추어서 당할 자가 없었으므로 강동(江東) 사람들이 손랑(孫郞 손책을 가리킴)이 온다는 말을 듣고 모두 혼이 나갔다가, 그가 나라를 정한 뒤에 강동 어린이들은 드디어 노래를 지어 전했다.’고 합니다. 동작삼조란 말은 위 무제(魏武帝 조조(曹操))가 업(鄴)에다 동작대(銅爵臺)를 세우고 스스로 악부(樂府)를 지어 악기에 맞추었다 합니다. 문제(文帝 조비(曹丕))와 명제(明帝 조예(曹叡)) 무렵에는 청상령(淸商令 음악을 맡은 기관)을 두어 이를 관리하게 하였는데, 소리가 알맞고 고르고 단아한 품이 비록 반드시 왕승건의 말과는 같지 않다 하더라도 지나간 옛날이 오히려 멀지 않으며, 그들의 남겨놓은 풍류다운 음은 양양하여 아직도 귀에 가득하다는 말은 이를 두고 이른 것입니다. 진씨(晉氏)가 도읍을 파천(播遷)한 뒤로부터 중원(中原)의 옛 음악은 저절로 유리(流離)하게 되어 부견(苻堅 전진(前秦)의 임금)이 한ㆍ위의 청상악(淸商樂)을 얻게 되자 전진(前秦 부건(符健)이 창립한 나라)과 후진(後秦 요장(姚萇)이 창립한 나라)에 전했고, 송 무제(宋武帝 유유(劉裕)의 묘호)가 관중(關中)을 평정하자 악공(樂工)과 악기들을 모두 강남으로 옮겼습니다. 그 뒤에 수(隋)가 진(陳)을 평정하자 이것을 모두 얻게 되어 다시 중원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니, 이상이 악기에 대한 고금의 연혁입니다. 수에서는 강남에서 얻은 악공과 악기를 본래 화하(華夏)의 정성(正聲)이라 하여 청상이란 옛 칭호를 따라 관서(官署)까지 두었으니, 그것을 통틀어 청악(淸樂)이라고 합니다. 내 옛 친구에 태산(太山)에 사는 비불(費黻)이 있었으니 그의 자는 운기(雲起)요, 호는 노재(魯齋)로서 율려(律呂)에 정통하고 밝아 《삼뇌정의(三籟精義)》 30권과 《청상리동(淸商理董)》 30권을 지었습니다. 제가 《대청회전(大淸會典)》을 짓는 데 참가했을 때 비불은 찬국(纂局)에 와서 자기가 지은 악학(樂學)에 관한 여러 가지 책을 바치고 성음(聲音)과 악기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되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쓰기도 하여 역대 아악의 변천을 하나도 빠짐없이 아는 것이 마치 손바닥에 있는 손금 세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직 혼자서만 알 뿐이요, 다른 사람으로서는 그 이론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또 그 글 속에는 당시의 대신들에게 저촉되는 데가 많았을뿐더러 또는 비군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어서 그 글이 마침내 위에 전달되지 못하매, 식자들은 지금까지 이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내가 나이 젊었을 때 한번 보았지만 능히 자세히 해득할 수 없었고, 그후로 해가 오래고 보니 모두 잊어버렸으니 더욱 가석한 일입니다.” 형산이 이 글을 써서 혹정에게 보이니, 혹정은 연상 고개를 끄덕이면서 두 사람이 한참 수작이 오가곤 한다. 아마 비불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한다. 나는,
“구라파의 동현(銅鉉) 소금(小琴)은 어느 때부터 나왔던가요?”
했더니, 혹정은,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 지는 모릅니다만 아마 백년이 넘어서부터지요.”
한다. 형산은,
“명(明)의 만력(萬曆) 때 오군(吳郡)에 사는 풍시가(馮時可)가 서양 사람 리마두(利瑪竇)를 북경에서 만났을 때 그 거문고 소리를 들었고, 또 자명종(自鳴鍾)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이미 기록에 남아 있으니, 대개 만력 시대에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모두 역법(曆法)에 정통하고 기하(幾何)를 아는 데는 세밀하고 자세해서, 무엇이나 물건을 제조하는 데는 모두 이 방법을 쓰고 있답니다. 중국에서 기장낱을 포개 놓고 크기를 측량하는 일 같은 것은 도리어 추잡한 노릇입니다. 또 그들의 문자는 소리로 뜻을 삼아, 새와 짐승의 소리나 바람과 빗소리까지도 귀로 분별하지 못하는 것 없이 혀로 이것을 형용해 냅니다. 저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능히 팔방(八方)의 풍속을 알고 만국 말을 통한다.’ 하는데 이 거문고를 천금(天琴)이라 하고 있습니다.”
한다. 나는,
“그 빨간 글씨로 표해 놓은 것은 무엇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그것은 줄을 고르는 음악의 부호입니다. 그런데 귀국에도 이 거문고가 있습니까?”
한다. 나는,
“원래 중국에서 사 가지고 온 것인데 처음은 줄을 맞추지 못해서 다만 그 줄마다 나는 띵뚱 하는 소리가 소반 위에 구르는 구슬 소리 같아서, 노인들의 잠 안 올 때나 어린애 울음 그치는 데 가장 좋았지요.”
했더니, 두 사람은 크게 웃었다. 그는 또,
“귀국의 금슬(琴瑟)은 어떻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금과 슬이 다 있습니다. 제 친구 홍대용(洪大容)의 자는 덕보(德保)요, 호는 담헌(湛軒)인데 음률에 능하여 금슬을 잘 탈 줄 압니다. 우리나라 금슬은 중국과 다르고, 타는 방법 역시 다릅니다. 옛날 신라 시대에, 거문고를 만들었더니 현학(玄鶴)이 와서 춤을 추었다 하여 이름을 현금(玄琴)이라고도 합니다. 또 가야금(伽倻琴)이란 것이 있어 큰 슬(瑟)의 반 쪼갠 것이 되고 줄은 열둘이 되어, 그 타는 법이 중국의 거문고 타는 모양과 비슷합니다. 담헌은 처음으로 동현금(銅絃琴)의 소리를 골라서 가야금에 맞추었는데 지금은 금슬을 타는 악사들이 모두 이 본을 보고 현악이나 관악에 맞추고 있습니다.”
했다. 나는 또 묻기를,
“중국에는 아직도 소(韶)ㆍ호(濩)의 곡조가 남아 있습니까?”
했더니, 형산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다. 혹정은,
“대개 소ㆍ호의 시대는 어떠한 세계였던지, 그 시대 사람들이 지키는 떳떳한 도리와 시대의 유행과 풍속의 숭상하는 바로써, 이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요(堯)를 임금으로 삼고 순(舜)을 신하로 삼고 고요(皐陶)를 스승으로 삼아서 당시의 사대부들 중에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난 젊은이들을 골라서 학교에 넣었으니, 이른바 생활로써 기질을 바꾸고 수양으로써 몸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또 가르친다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너그럽고 간략하고 온순하고 강직한 것으로써, 성정(性情)을 훈도(薰陶)하고 신기(神氣)를 고무(鼓舞)하여 심령과 총명을 어릴 때부터 깨우치고, 기(虁)와 같은 음악에 밝고 이치에 통하는 자가 전사(典司)하는 관원이 되어 있으면서 평소에 교양 받은 천하의 자제들을 데리고 일대의 음악을 만들었으니, 이는 당시 임금의 도덕과 정치를 상징하고 백성들의 추향(趨向)에 맞추었으니, 이런 음악으로써 상제(上帝)께 바치면 하늘이 즐겨하고, 이런 음악을 종묘(宗廟)에 바치면 조상들이 감동했으며, 이로써 교화를 삼아 사방을 움직이면 백성들이 즐거워하여, 한 가지 물건이라도 억눌림이 없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도시 일단(一團) 평화스러운 기운뿐이니, 음악이 여기에 미친 것이 마땅하지요. 그후 천 백 년을 지나서 우리 부자(공자) 같은 이가 나서 한번 그 음조(音調)의 가락과 음절의 여운(餘韻)을 들어 보고 나서 멀리 옛날을 상상하여 석달 동안 고기 맛을 잊어버렸다고 하거늘, 하물며 당시에 친히 그 춤추는 봉황을 본 사람이겠습니까. 그는 손이 춤추고 발이 뛰놀았을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왕(武王 주(周) 희발(姬發)의 묘호)의 시절은 어떤 세계였기에, 당시의 백성들을 주지(酒池)ㆍ포림(脯林) 속으로부터 건져 내어 한번은 그 나쁜 풍속을 씻기도 했지만, 전에 물든 더러운 풍속은 오히려 남아 있어 이같은 폐단을 단단히 고친다는 것은 진실로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방패를 모은 것이 산처럼 둘러섰다는 말은 벌써 순리로 나라를 전해 받은 것만 같지 못하고, 거칠고 억센 기풍을 발양했으니, 이는 또 너그럽고 간략하고 온순하고 강직한 데 비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로써 말하자면 대무(大武 주 무왕의 음악 이름)가 이루어진 것은 성왕(成王 희송(姬誦)의 묘호)ㆍ강왕(康王 희교(姬釗)의 묘호)의 시대로서, 이 악곡에 무(武) 자 하나를 붙여 이름을 지었고 보니 부자(夫子)의 비평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능히 진선(盡善)이 못 될 것은 가히 알 수 있습니다. 주(周)는 번영할 때를 당해서 비록 후기(後虁 순(舜)의 풍악을 맡은 명신)로 하여금 음악을 맡도록 했더라도 그 성취한 바는 여기에 지나지 못하고 마쳤을 것이다. 그런데 황우(皇祐 송 인종(宋仁宗)의 연호)ㆍ원풍(元豐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연간에는 범(范)과 마(馬) 같은 여러 군자들이 옛날부터 있는 음악을 밝게 해득하지 못하고는 희미하게 고악(古樂)의 이치를 설명하면서 소소(素韶)의 구성(九成) 같은 옛날 음악을 다시 부흥하려고 했지만, 당시의 도덕과 정치가 하늘과 사람의 마음에 합하는지를 몰랐습니다. 더구나 우스운 것은 채씨(蔡氏)의 《신서(新書 율려신서(律呂新書))》에는 원성(元聲)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다고 하였지만, 그 찾아낼 수 있다는 원성이 본률(本律)을 버리고 다시 어디에 있겠습니까. 설사, 채씨의 말과 같이 원성을 찾아내어 구성을 본떠서 만든다 하더라도, 당시의 임금들이 진실로 중화(中和)하는 덕과 육성하는 공로가 없고 본즉, 비유하건대 글제 없는 공령(功令)이요, 시동(尸童)이 제물(祭物)이라 할 것입니다.”
한다. 나는,
“우(禹)는 목소리가 율이 되고 몸이 척도가 되었다 하고, 옛날에는 태자(太子)가 나면 태사(太史)는 음악으로 가르치고 소경으로 만져보게 했다 하니, 필시 일대의 음악은 임금의 목소리로 율을 삼았겠지요. 성인은 원기(元氣)를 타고났다 할 것이니, 성음을 내면 반드시 광대하고 화평하여 음률에 맞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인즉, 옛날의 성왕(聖王)은 역시 우와 더불어 다름 없이 소리가 음률일 것인데 홀로 우의 소리만 일컫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했더니, 혹정은,
“제왕들이 천하를 집으로 삼은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모태에서 떨어지자 시랑[狼]의 소리를 지르는 이도 있었는데, 그 소리는 마땅히 무슨 음률에 속하겠습니까. 사간(斯干 《시경(詩經)》의 편명)에서 이른바 황황(喤喤)한 울음 소리나 하(夏)의 계(啓)와 같은 고고(呱呱)의 소리가 모두 음률에 맞았기 때문에 제후(諸侯)가 되고 천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다. 형산은,
“옛 기록에 이르기를, 무릇 소리가 시작될 때는 사람의 마음을 거쳐서 나는 것이라 하였으니, 대개 극히 귀하고 오래 사는 사람은 목소리가 큰 종소리와 같고 내뿜는 힘이 웅장하고 화창하여, 간혹 황종률(黃鍾律 육률에서 기본 표준음)에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 곧 척도가 되고, 소리가 음률이 된다고 하면 우의 언행이 터럭만큼도 어긋남이 없고 움직이면 곧 법도에 맞는다는 것을 극도로 찬양해서 말한 것이요, 그 목소리의 청하고 탁한 것이 음률에 맞고 몸뚱이의 길고 짧은 것이 척도에 맞는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몸이 천하에 앞장 서서 인간의 윤리 도덕의 표준이 되고 보면 스스로 사방 억조 생민이 법으로 삼게 될 것입니다.”
하니, 혹정은,
“윤 대인(尹大人)의 말씀이 지극히 옳습니다.”
한다. 형산은,
“귀국의 악률(樂律)은 어떠합니까? 혹 성신(聖神)이 임금의 스승이 되어 마음을 다하여 율을 만든 것인지요. 그렇지 않으면 중화의 것을 본뜬 것인지요.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에도 모두 음악을 쓰는지요. 또 춤은 몇 일(佾)을 쓰는가요?”
한다. 나는,
“우리나라 삼국 시절에는 비록 성악(聲樂)이 없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동이(東夷)의 향악(鄕樂)에 지나지 않았고, 당 중종(唐中宗 이석(李晳)) 때에 신라 악부(樂府)가 있었고 측천(則天) 때에 양재사(楊再思)가 자줏빛 옷을 입고 구려무(句麗舞)를 추었다고 하니 필시 속되고 고상하진 못했을 것이요, 송 휘종(宋徽宗 조길(趙佶)) 때에 우리나라에 대성악(大晟樂)을 보내 왔다고 하나 모두 세월이 오래되어 가히 상고할 수가 없습니다. 명의 홍무 때에는 우리나라에 팔음(八音)이 들어왔고, 춤은 육일(六佾)을 쓰게 되어 돌아가신 임금의 제사를 지내는 예법을 갖추었습니다. 악기는 처음에는 중국으로부터 나왔으나 그후는 국내에서 그것을 본떠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향음(鄕音)은 잘못 변하기 쉽고 옛날의 척도는 표준 삼기가 어려웠습니다. 선군(先君) 장헌왕(莊憲王 조선 세종(世宗)의 시호)은 성덕(聖德)이 계시와, 상서롭게도 검은 기장과 고옥(古玉)을 얻어서 아악을 제정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중국 악기가 모두 고율(古律)에 맞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토산(土産)인 기장 알로써 헤아려 보아 과연 옛날 기록의 전하는 바에 착오가 없었다고 합니다.”
했더니, 형산은 의자에서 일어나 몸을 굽히면서,
“참으로 동방의 성덕 있는 임금이십니다. 귀국의 노래 몇 장(章)을 들을 수 없을까요?”
한다. 나는 몽금척(夢金尺)이라든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같은 노래를 창졸간에 외워서 대답할 수 없었고 또 기휘(忌諱)해야 할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어서 딴 말로 돌린즉 형산도 역시 다시 묻지 않았다.
혹정은,
“귀국의 음조(音調)는 어떠한지 선생은 능히 형용(形容)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저는 본래 소리 재주가 없어서 형용은 낼 수 없습니다만, 다만 그 음조가 느리고 길고 박자가 드문드문 합니다.”
했더니, 형산은,
“참으로 군자의 나라입니다.”
한다. 나는,
“제가 처음 요동에 왔을 때 길가에서 노랫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따라 들어가 보니 피리 한 사람, 퉁소 한 사람, 젓대 한 사람, 비파 한 사람, 월금(月琴) 한 사람이 노래에 맞추어 반주하고, 사발만 한 북을 가지고 박자를 맞추는데 피리 소리는 납 소리 같고, 젓대는 우리나라 우조(羽調)보다 청(淸)이 배나 높았습니다.”
했더니, 혹정은,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소위 우조란 것은 오음(五音)에서 말하는 우조가 아니고 즉 가락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비 우(雨) 자를 써서 우조라고도 부릅니다. 우리나라 속악(俗樂)에는 또 계면조(界面調)가 있는데 이것은 우조를 뒤집은 음입니다. 청이 배나 된다고 한 것은 대개 율을 말할 때는 다들 청(淸)이라 하는데, 이것은 청ㆍ탁의 청이 아니요, 청이 배라고 하는 것도 본율(本律)보다 청이 갑절 높다는 말입니다.”
했다. 혹정은,
“그러면 본율의 반이군요.”
하기에, 나는,
“어제 황제의 어전에서 하는 음악을 들으니, 역시 요동에서 들은 것과 비슷하고 또 징과 바라로써 박자를 맞추었습니다. 이것이 아악입니까. 왜 그 음조가 그렇게 높고 박자가 그렇게 빠릅니까?”
했다. 형산은,
“선생은 어제 대궐에 들어가셨던가요?”
하고 묻는다. 나는,
“아닙니다. 대궐에 들어가지는 않고 담 밖에서 들었을 뿐입니다.”
했다. 형산은,
“그것은 아악이 아닙니다. 이것은 연극을 놀 때에 하는 음악입니다. 아악에는 징과 바라를 쓰지 않습니다.”
한다. 나는,
“아악은 어떠한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형산은,
“대체로 명의 제도를 따라서 크게 조회를 할 때는 악공 예순 네 사람을 쓰는데, 인악(引樂)이 두 사람, 퉁소 네 사람, 비파 여섯 사람, 공후(箜篌) 네 사람, 진() 여섯 사람, 방향(方響 강철편을 배열한 타악기) 네 사람, 두관(頭管 피리의 일종) 네 사람, 용적(龍笛 큰 젓대) 네 사람, 장고 스물네 사람, 큰 북 두 사람, 박자판이 두 사람입니다. 협률랑(協律郞 음악의 기술을 지닌 관원)은 먼저 모든 악기를 궁전 뜰 위에 차려놓고, 천자의 수레가 장차 떠나며 구름 깃발이 움직이려 할 때 협률랑은 기를 높이 들어 비룡인지곡(秘龍引之曲)을 연주합니다. 황제가 용상 위에 앉으면 음악은 그치고 찬관(贊官)이 모두 국궁(鞠躬)하고 창을 하면, 협률랑은 풍운회지곡(風雲會之曲)을 아뢰고 합니다. 이 음악이 시작되면 백관은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며, 절을 마치고 일어나면 음악은 그칩니다. 화석친왕(和碩親王)이 전각 위로 올라가고 보국공(輔國公)들과 각로(閣老)들이 따라 올라가면 협률랑은 경황도(慶皇都)와 희승평(喜昇平)의 악을 아룁니다. 지금은 그 이름들이 비록 달라졌지만 악기는 바뀌지 않았고 소리 곡조도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다. 나는,
“악공들의 복색(服色)은 어떠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형산은,
“굽은 두건을 쓰고, 붉은 비단에 꽃을 그린 소매 넓은 장삼을 입고, 금칠한 띠를 띠고 붉은 비단으로 머리를 둘러 싸매고, 검정 가죽 신을 신었습니다.”
한다. 나는 다시,
“이것은 한인들의 제도와 같습니다그려.”
했더니, 형산은,
“아닙니다. 아악에는 비단이나 수놓은 망포(蟒袍) 같은 것을 쓰지 않고, 또한 번인(番人)의 모자도 쓰지 않습니다. 태상시(太常寺 음악을 맡은 기관) 아악에는 무릇 구주(九奏)ㆍ팔주(八奏)ㆍ칠주(七奏)ㆍ육주(六奏)의 네 가지 등급이 있어 음탕하고 지나치고 흉하고 거만한 소리를 금하고 있습니다. 큰 제사 때는 악생이 72명이요, 무생(舞生)이 1백 30명인데 먼저 신악관(神樂觀)과 태화전(太和殿)에서 연습을 합니다. 한 시대에는 태상관(太常官)을 심히 중히 여겼으니 무릇 나라에 큰 정사가 있어서 승상(丞相)과 열후(列侯)와 구경(九卿)들에게 의논을 한다면 박사(博士)는 으레 이 의논에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공경(公卿)과 장상(將相)들이 연명(聯名)해서 창읍왕(昌邑王)을 폐하자고 태후(太后)에게 청하는 글월 중에 이르기를, ‘신 창(敞) 등은 삼가 박사와 더불어 의논했습니다.’ 운운하였으니, 이것이 천하에 얼마나 큰 일이기에 반드시 먼저 박사의 말에 의거하고 있습니까. 지위는 낮고 사람은 미천하나 이같이 중히 여기는 것은 대개 그 천지신명과 종묘에 제사하는 예악(禮樂)의 근본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찬례(贊禮 축문을 맡아 읽는 관원)는 곧 송(宋)의 대축(大祝)인데, 송에서도 역시 그 벼슬을 중하게 여겨 반드시 재상의 임자(任子)들을 임명하였으니, 이것은 귀족의 자손들을 추려서 가르친다는 옛 뜻일 것입니다. 명의 초년에는 역시 문학하는 선비로 여기에 처하게 했지만, 후에는 누런 모자를 쓴 도사(道士)들로 자리를 채웠으니 이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옛날에 관리를 쓰는 데는 그 본업을 바꾸지 않았으며, 인재를 쓰는 데는 겸직을 시키지 않고 의례를 맡은 이(夷)나 음악을 맡은 기(蘷)가 구별되어, 각각 한 가지 직책을 오로지 하여 이것으로써 몸을 마치도록 익히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이와 기가 그 벼슬에 종신토록 있을 뿐 아니라, 대를 이어가면서 그 직책에 있는 것도 옳은바 태사(太史)나 음악 맡은 관리가 더욱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는 그 직책이 한결같지 못하여 위로는 기에게 미치지 못하고 아래로는 광대도 못 된 채 창졸간에 등용을 당하면, 마치 신부가 처음 와서 한 임에게 의탁하듯이, 대궐 위에서 깃발을 들고 서 있는 거동이 마치 저 관청 섬돌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와 같아서 참으로 우습습니다. 귀국의 음악을 맡은 관원도 응당 그럴 것입니다.”
한다. 나는,
“저의 이번 길이, 계찰(季札)이 주(周)의 고악을 감상한 것에 비하면 부끄럽습니다.”
했더니, 형산은,
“저의 옛날 친구 도규장(陶逵章)은 제(齊)에 사는 사람으로, 일찍이 태상관(太常官)으로 있으면서 나한테 보낸 편지에 우스개 소리로 자신을 조롱해서 말하기를, ‘도적이 해당(奚唐)의 서라 하는 말에 부끄러워하며, 매양 전부(田父)가 왼편으로 가라고 속일까 보아 의심합니다.’ 하였으니, 이야말로 수풀 개구리가 음악을 이야기하고, 대들보 위에 있는 제비가 ‘회여지지(誨汝知之)’를 가르쳐 주는 것이나 다름 없을 것입니다.”
하고는 서로 웃어대어 집이 떠들썩했다. 형산은,
“홍무(洪武) 초년에 처음으로 신악관(神樂觀)을 천단(天壇) 서쪽에 두고 음악과 무용을 가르쳤는데, 고황제(高皇帝)는 친히 산천에 지내는 제사에 나누어 쓰는 악장(樂章)을 만들고, 그 후에는 합쳐서 제사를 지내게 되자 다시 합사(合祀)하는 악장을 만들었으며, 또 예식이 이룩되자 노래 아홉 장을 불렀던 것입니다. 식자(識者)들은 그 음률들이 아직 옛날로 회복되지 못한 것을 병으로 여겼습니다. 상서(尙書)도개(陶凱)와 협률랑냉겸(冷謙)에게 조서를 내려 아악을 제정하게 하고, 또 학사(學士)송렴(宋濂)에게 명하여 악장을 만들게 했습니다. 무릇 원(園)이나 능(陵)에 제사를 지낼 때는 음악을 쓰지 않고 또 교제(郊祭)나 종묘의 제사에는 악기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홍무 6년(1373)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반드시 악생(樂生)ㆍ무생(舞生)들을 앞세워 길을 인도하게 되고, 한림(翰林)들과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음악의 가사를 짓도록 하여 공경하고 삼가고 경계하는 뜻을 갖도록 했습니다. 황제는 말하기를, ‘짐(朕)이 일찍이 한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후세의 악장들이 헛된 말로만 송미(頌美)하니, 이것은 귀신에게 아첨하는 것이냐, 당시의 임금에게 아첨하는 것이냐.’ 하였습니다. 이에 유신들은 뜻을 받들어 감주(甘酒)ㆍ준우(峻宇)ㆍ색황(色荒)ㆍ금황(禽荒) 등의 여러 곡조를 지었으니, 이것은 모두 장으로서 이름을 회난가(回鑾歌)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가히 음악의 근본을 알았다고 할 수 있으나 오히려 글에 응하는데 그치고 말았으니, 성률(聲律)에 이르러서는 당시의 식자들이 전부 틀렸다고 하였습니다. 또 12년(1379)에 조서를 내려, ‘짐이 한미한 처지에서 일어나 천하에 군림(君臨)하면서 상하의 신령들을 받들어 모시니, 만일 조금이라도 정성스럽지 않다면 생민들의 복을 비는 본정이 아닐 것이요, 또 영장(靈長)의 자리를 오래 유지하고 보전하지 못할 것이다. 옛날 성숙공(成肅公 주 문왕의 아들 성백(成伯))이 제물을 물려받고서 게으름을 부리는 것을 보고 군자들은 그의 지위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알았다 하니 동작(動作)과 위의(威儀)의 범절도 정명(定命)이 이와 같거든, 하물며 음성이 나게 되는 원인이 지성으로부터 감동되지 않음이 없음에랴. 귀신이 없다 하여 믿지 않는 자는 거짓이요, 귀신에 아첨하여 복을 비는 자는 혹했다 할 것이다. 짐이 신악관을 설치한 것은 음악을 갖추어 천지신명과 종묘의 신령께 제사지낼 따름이요, 구차히 전대의 제왕들이 허탄한 절차를 떠벌여 오래 사는 도를 맞아들이는 버릇을 본받음은 아니다. 설사 그런 도가 있다 할지라도 이는 마음을 맑게 닦고, 빨리 오고 빨리 가서 어려움과 장애가 없도록 하는 데 불과할 것이니, 만약에 과연 오래 사는 이치가 있었다면 은ㆍ주의 부로(父老)들이 어디로 갔으며 한ㆍ당의 기숙(蓍宿)들은 어디 있는가.’ 하고는 이내 돌에 새겨 신악관 안에 세웠으니 이 비석을 보면, 가위 음악의 이치에 밝고 사리를 통달한 이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가류(道家流)를 이끌어서 운위한 것은 마침내 옛날 뜻을 받들지 못하고 보매, 우리 성조 인황제(仁皇帝 강희 황제)는 예로써 천지에 제사 지내는 음악과 만방을 협화(協和)하는 성대한 식전을, 누런 모자를 덮어쓴 저 도사들에게 맡겨 관리시킬 것은 못 된다고 하여 이에 모두 태상(太常)에게 돌리게 되었고, 또 정 세자(鄭世子)와 같이 음악에 밝은 이로서도 당시에는 능히 쓰이지 못했음을 깊이 애석하게 여겼으니, 오늘의 《율려정의(律呂精義)》 등 서적이 이것입니다. 큰 성인이 중화(中和)의 덕을 세우게 되니 음악은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비로소 대아(大雅)를 바로잡게 되었습니다.”
한다. 혹정은,
“귀국의 악기와 악공은 응당 고려의 옛것일 것이니 이것은 반드시 송의 숭녕(崇寧 송 휘종(宋徽宗)의 연호) 때 반포된 대성악(大晟樂)일 것입니다.”
하기에, 나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쓰고 있는 것은 홍무 때에 들어온 것입니다.”
했다. 혹정은,
“홍무 때 나갔다는 것이 실은 대성악의 나머지입니까. 주자는, ‘숭녕 말년에 아첨한 자들의 모임에나 죄인들의 찌꺼기를 가지고 어찌 천하의 화평이라고 말할 수 있으랴.’ 했습니다. 그러나 송이 이미 강남(江南)으로 건너간 뒤로 금 태종(金太宗 완안성(完顔晟))은 변경(汴京 송의 수도 개봉(開封))에 있는 악기와 악공을 모조리 거두어 북쪽으로 옮겨가 태화악(太和樂)이라고 이름을 고쳤으니, 이것도 그 실상은 대성악입니다. 금이 망함에 이르러 다시 또 남쪽 변채(汴蔡)로 옮기고 변채가 함락되자 중국의 옛 물건은 모두 원(元)으로 들어갔습니다. 원의 오래(吳萊 원의 음악을 맡은 관원)가 태상이 되어 쓴 음악은 본래 대성악의 유법(遺法)으로 옛날 악공을 가르쳐 종묘의 제사에 썼으므로 원의 악호(樂戶)의 자손은 대대로 하변(河汴) 지방에 살고 있습니다. 명에 이르러서는 원을 쫓아내고 악공과 악기들을 모두 얻게 되었으므로 태상 아악과 악관들이 익히던 음악은 오히려 대성악이라고 불러 심지어 여럿이 추는 춤이나 모든 놀음은 원의 옛 제도를 본받게 되었습니다. 명의 고황제(高皇帝)는 원의 정치를 일신하게 개혁하면서 대성악에 이르러서는 금은 송에 따랐고 원은 금에 따르고 보니, 그 전통이 이미 오래되어 중국의 옛 제도를 지키고 있다 하여 음악을 새로 고쳐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이로써 홍무 때에 반포된 것이 대성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다. 나는 묻기를,
“옛날은 천자의 가운데 손가락 길이로써 율을 만들어 땅속에 묻고 후기법(候氣法)을 썼다는데 이 이치는 어떤 것입니까?”
했더니, 혹정은,
“이것은 곧 방사(方士) 위한진(魏漢津)이 휘종(徽宗)의 손가락을 재어 대성악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한진은 본래 촉(蜀)의 천인 출신으로 그는 말하기를, 성왕(聖王)의 타고난 천품은 천지 음양으로 더불어 한 몸뚱이로서 목소리는 율이 되고 몸은 척도가 된다 하여, 휘종에게 청하여 가운데 손가락 세 마디의 길이로 황종률(黃鍾律)을 정하고 이로써 천지의 정리와 음양의 조화에 맞춘다 하였습니다. 당시에 채경(蔡京)이 유독 그 말을 기특히 여겨 갖은 아첨으로 황제를 달래어 먼저 솥 여덟 개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가장 가소로운 일입니다. 옛적에 처음 난 성왕이 비로소 말과 자를 만들면서 아무 것도 의거할 것이 없으므로 마침 손가락 마디로 율(律)을 삼았고 기장 알 개수를 세어 표준을 삼았습니다. 또 당시 세상은 사시 기후가 그 절후를 잃지 않고, 소위 바람은 나뭇가지에 울지 않고 바다는 물결이 일지 않았다 하여 그런 기후가 사시의 기운을 얻었으니 이치가 괴이할 것은 없겠지만, 후세에 이르러서 임금이 어질어야 천지 기후도 고르고 생물이 자란다는 이치는 생각지도 않고, 다만 손가락으로써 율을 가늠하고 갈대 태운 재로써 좋은 기후를 얻고자 하니, 이것은 흰 바탕이 있은 뒤에야 채색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격이요, 그 근본은 헤아리지 않고 끝만 가지런히 하려고 하는 격이니, 이러고서는 설사 절후에 맞추어서 어떤 기운이 뻗친다 하더라도 이 기운이 어디에 속하는 기운인지 모를 것이거든, 하물며 사람의 손가락 마디는 길고 짧음이 같지 않은즉, 숭녕의 손가락이 길어서 악률이 높아졌으므로 한진(漢津)은 크게 놀라서 그 무리 임종요(任宗堯)에게 가만히 이르기를, ‘율이 높은 것도 북비(北鄙 북쪽 변방)의 음악이라 북쪽이 요란하니, 천하에 장차 무슨 변이 생기는 게 아닌가.’ 하였답니다. 음악이 이미 이루어지자 드디어 정강(靖康)의 화가 있었으니 음악이란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한진 같은 소인이 비록 음률을 들을 줄 아는 재주가 있었다 하더라도 음악을 지을 덕이 없었고, 당시 사대부들이 또 한진의 재주만한 자도 없어 급급히 그에게 아부했으니, 주자가 배척한 아첨하는 자들의 모임이요, 죄인들의 찌꺼기란 것이 이것입니다.”
한다. 형산은,
“그렇지 않습니다. 냉겸(冷謙)이 정했다는 음악과 춤은 홍무 6년의 일로서 대성률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대성악은 귀신을 맞는 첫 연주에는 남려(南呂)의 각음(角音)이니, 이는 대려(大呂)의 변조(變調)입니다. 홍무 때에 만든 태주(太簇)의 우음(羽音)은 중려조(中呂調)로, 냉겸의 칠균(七勻)은 태족으로부터 이측(夷則)ㆍ협종(夾鍾)ㆍ무역(無射)ㆍ중려(中呂)는 모두 정조(正調)인데 다만 청황종(淸黃鍾)ㆍ청림종(淸林鍾)의 변조입니다. 본소리는 무겁고 커서 임금과 아비에 속하고, 응하는 소리는 가볍고 밝아서 신하와 자식에 속하였으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사청성(四淸聲)이라 하는데, 만일 사청성을 쓰지 않는다면 이것은 감응하는 음이 없어서 임금의 덕은 치밀며 신하의 도리는 끊어지고 아비의 도리는 없어지매 자식의 직분은 허물어지게 됩니다. 한진의 음률은 옛 제도에서 두 율씩을 낮추어 임종(林鍾)을 궁음으로 할 때는 상음ㆍ각음이 정조(正調)가 되고, 그 나머지는 모두가 변조가 됩니다. 또 남려(南呂)가 궁음이 될 때는 오직 상음 하나만 정조가 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변조에 속합니다. 이것은 칠균 중에 변조가 다섯 가지로서, 의논하는 자는 이 때문에 임금의 도가 미세(微細)하게 되고 백성과 귀신과 사물의 힘이 떨치지 못한다 하는바 이것은 참으로 망국의 음률로서 슬프고 음란하고 원망하고 흐느끼게 되어 오래 들을 수 없다고 합니다. 송잠계(宋潜溪 잠계는 송렴(宋濂)의 호)가 말한, 한진이 만든 음악이 난세의 음악이라 한 것도 바로 이 까닭입니다. 주자가 건양(建陽) 땅 채원정(蔡元定)의 균조(勻調)와 후기의 방법이 치밀하고 통창한 것을 칭도하고, 자기의 예서(禮書) 중 악제(樂制)ㆍ악무(樂舞)ㆍ종률(鍾律) 등 각편을 대체로 채씨의 신서(新書)에 의거하여 고증하면서 부연해서 기술했습니다. 그러나 주자는 음률에 대하여도 그다지 명백히 해득하지 못하여, 오로지 채씨를 믿고 이른바 선입의 견해로서 한진을 배척한 것도, 음률을 감정하여 옳고 그름을 안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이 채경의 주장한 것이라 하여 있는 힘을 다 들여 이를 공격했던 것입니다. 원정(元定)의 저서는 능히 행사에 시험해 보지 못했고, 한진의 음악은 그 당세에 밝게 시험을 했던 터로 그 후의 의논하는 이들은 그 일을 지적하기가 쉬웠던 것입니다. 실상 채씨가 음악에 밝은 것은 고정(考亭 주희의 별칭)보다는 나으나 너무도 천착(穿鑿)ㆍ집요(執拗)하게 다루었다는 평을 면치 못할 것이요, 한진의 음률을 감상하는 것이 원정보다 정밀하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맞추고 아첨하고 있으며, 냉겸의 음악을 제정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옛 제도를 곡진하게 답습했다 하겠지만 그 소리는 송ㆍ원의 율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회전(會典)을 편찬하는 데 참가했을 때 여러 대가들을 연구하였는바, 홍무 때 제정한 것은 실상 대성악과도 판이하게 달라 왕노야(王老爺)가 말씀한, 귀국이 홍무 때 가져갔다는 대성악이 옛날 것이란 것은 사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다. 혹정은,
“어찌해서 그럴까요?”
하고 물으니, 형산은 웃으면서,
“그저 그렇지요.”
하고는 그는 또,
“대체로 중국의 악공은 진(晉) 시절에 망했고, 악기는 수(隋) 때에 망했으며, 잡극과 백 가지 놀음이 아악을 어지럽게 만든 것은, 당 현종(唐玄宗)이 마땅히 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한다. 나는,
“원컨대 그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했더니, 형산은,
“춘추 시절에 세상은 비록 어지러웠으나, 지나간 옛날이 그다지 멀지 않아서 진ㆍ한 이래로 비록 큰 난리가 자주 일어났으나 화는 나라 안에서 있었기 때문에 악기나 악공을 딴 데로 옮겨가지 않았고, 제도도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나라를 가진 자도 창과 칼을 버리고 우선 생(生)과 용(鏞)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음악을 맡은 관원들은 세대와 더불어 함께 일어나고, 풍진(風塵)이 조금 밝아지면 다투어 악기를 안고 관직에 나와서 자손들에게까지 세업(世業)을 전하여, 마음대로 악기 다루는 법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진씨(晉氏)가 도읍을 옮기게 되자 다섯 가지 성이 섞이고 어지러워 사해가 쪼개어 무너지고, 음악의 세밀한 기술은 도탄에 유리되었고, 석씨(石氏 후조(後趙)의 석륵(石勒))가 업(鄴)에 도읍하자 동작(銅爵)과 청상(淸商)은 모두 표령(飄零)하여 없어지고 모용초(慕容超 남연(南燕)의 임금)는 이불(李佛)태악관(太樂官)을 잡아온 대신 그 어머니를 요진(姚秦)에 바쳤으나 옛날 악공들은 모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송 무황제(宋武皇帝 남조의 송)는 관내에 들어왔지만 그가 얻었던 악기와 악공은 가히 알 만한 것이요, 그는 또 바쁘게 동쪽으로 돌아갔으니 그가 옮겨간 것도 또한 가히 알 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일찍이 중원의 악기는 진(晉) 시절에 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서(隋書)》에 실려 있는 역대의 동척(銅尺)은 열다섯 가지나 되어 주척(周尺)을 비롯하여 한의 유흠(劉歆)이 만들었다는 동곡척(銅斛尺)과 동한(東漢) 건무(建武 광무제의 연호) 시절의 동척(銅尺), 진(晉)의 순욱(荀彧)이 만든 율척(律尺) 조충지(祖冲之)의 동척들은 하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소위 주척은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신망(新莽) 15년 동안에 만든 물건은 무엇이나 주(周)의 것을 모방하여 이름을 붙였으나 이미 위조가 많았고 또 맘대로 아침에 만들었다가 저녁에 부셔버려서 척도가 떳떳하지 못했습니다. 후세에 주척이라고 불리는 것이 왕왕 유흠이나 왕망의 무리가 만든 위조로써 우문씨(宇文氏)가 한번 가짜 주를 창건하자 그가 가졌던 보물들은 바로 수의 소유로 돌아갔습니다. 수 문제(隋文帝)는 본래 학문을 좋아하지 않고 성질이 또 음악도 좋아하지 않았으나, 이미 천하를 얻고 본즉 부득이 음악을 제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패국공(沛國公) 정역(鄭譯)은 지음(知音)에 통하여 고악 십이율을 말하면서 궁음을 빨리 알아내어 칠성(七聲)을 각각 사용했으나 세상에는 통하지 못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주 무제(周武帝) 때에 백소지파(白蘇祗婆)는 원래 구자(龜玆 지금의 신강(新疆) 지방) 사람으로 비파를 잘 탔습니다. 한 균(勻) 가운데 칠성이 끼어 있었으니 소위 파타력(婆陀力)이란 중국말로 궁성(宮聲)이요, 계식(雞識)이란 중국 말로 남려(南呂)요, 사식(娑識)이란 중국 말로 각성(角聲)이요, 후가람(侯加藍)이란 중국말로 응성(應聲)이니 즉 변치(變徵)요, 사렵(沙獵)이란 중국말로 치성(徵聲)이요, 반첨(般瞻)이란 중국 말로 우성(羽聲)이요, 이건(利)이란 중국 말로 변궁(變宮)이라 합니다. 정역은 그 법을 연구하여 12균 84조로 정하고, 또 7음 밖에 다시 한 가지 음을 더 정해서 응성이라 했습니다. 정역은 본래 무뢰배요, 교묘한 자로서 여러 번 나라를 파는 행동을 했다가 다시 반복하곤 했습니다. 문제는 처음엔 그를 좋아했다가 나중에는 미워하였으니, 정역의 쓴 법은 비록 그럴싸했으나 그 근본은 이악(彛樂)에서 나왔기 때문에 율은 조금 높으며 거칠고, 만보상(萬寶常 수(隋)의 음악가)이 만든 여러 악기는 정역의 것보다 두 율이 낮아서 그 소리가 맑고 고왔으므로 속된 귀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모두 능히 자기의 기술로서 당세에 뜻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타(何妥)ㆍ소기(蘇夔)ㆍ우홍(牛弘) 등은 제각기 붕당(朋黨)을 모아서 하타는 임금에게 아첨하여 황종이 임금의 덕을 상징한다고 하니, 무제는 그 말을 기뻐하여 황종 한 궁음만 쓰는 데 그치고 다른 율은 쓰지 않았습니다. 우홍 등은 당시 선궁음(旋宮音)을 쓰지 않는 문제의 뜻에 맞추어 아첨했고, 다시 전대의 금석(金石) 악기들은 부수고 녹여 없애버려서 이로부터 역대 악기의 전형(典刑)을 고증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이 까닭에 저는 중국의 악기가 수에 와서 망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의 초기에는 조효손(祖孝孫)에게 명하여 아악을 제정했는데 효손은 일찍부터 하타ㆍ소기의 무리와는 뜻이 맞지 않아 수의 시절에는 배척을 당했다가 당에 와서는 뜻을 폈고, 장문수(張文收) 등과 더불어 의논하여 아악을 제정하는 데 퍽 전아(典雅)하다고 말했지만,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공리에 급급하고 본래부터 음악은 좋아하지 않아서 음악이란 정치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였으니, 이것은 소박한 듯하면서도 실상은 고루한 것입니다. 더욱이 예악이 정치의 근본이 되는 줄은 모르고 배우(俳優)는 남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노리개로 인정했습니다. 장문수는 또 세상에 아첨하여 하청(河淸)ㆍ경운가(景雲歌)를 짓고, 주안(朱雁)ㆍ천마(天馬)를 본떠서 연악(燕樂)ㆍ원회(元會)로 이름을 붙였으니 당 시절의 아악은 문헌에 따라 숫자나 채우는 데 그칠 뿐이었습니다. 현종(玄宗) 때 와서는 그가 음률을 잘 알았고 보니, 다시 좌우 교방(敎坊)을 두고 황제의 이원(梨園) 제자라고 불러, 몸소 악공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천보(天寶 당 현종 후기의 연호) 연간의 전성기에는 매양 잔치를 베풀고, 고창(高昌)ㆍ고려(高麗)ㆍ천축(天竺 인도의 별칭. 서북 인도)ㆍ소륵(疏勒) 등 여러 나라의 부(部)를 두었고, 코끼리춤, 말춤에 이르기까지 추게 되어 이에 역대로 내려오던 음악의 제도는 씻은 듯 없어졌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안녹산(安祿山)의 화가 있어 드디어 도탄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것은 당 현종이 음률에 밝았던 죄입니다.”
한다. 나는,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란 근자에 보는 〈서상기(西廂記)〉같은 잡극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형산은,
“그렇습니다. 예상우의 열두 편이 세상에 전하기로는,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 양경술(楊敬述)이 황제에게 바쳤는데 황제는 이것을 얻고서 매우 기뻐하여 드디어 스스로 이것을 연출하였다 합니다. 이것이 후세 잡극의 시작으로서 그 소리가 느리고 슬프고 가늘었습니다.”
한다. 나는,
“송이 인후한 것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숭녕 이전은 아악이 응당 볼 만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했더니, 형산은,
“이것은 화현(和峴)이 제정한 아악으로서, 송 태조(宋太祖) 때에 주왕박(周王朴 송의 음악가)이 만든 율척(律尺)을 서경(西京)에 있는 옛날 석척(石尺)에 비교하여 보니 조금 짧았으므로 악성(樂聲)이 좀 높아서 중화(中和)에 잘 맞지 않았습니다. 건덕(乾德) 4년(966)에 화현에게 명령하여 옛날 제도를 본떠 자를 만들었으니, 역사에서 말하기는, 화현의 아악은 음조가 화창하나 세상에 아첨하고 시세에 따르는 말이라 했습니다. 나라를 얻은 지 겨우 해를 지났을 뿐인데 무슨 인후한 것이 깊어서 그 빛이 사방을 뒤덮어 백성과 물건을 화락하게 했겠습니까. 화현이 말한 바 겸손한 태도로 나라를 얻었다고 하여 현덕승문(玄德升聞)의 춤을 만들었으니, 이 춤은 한 줄에 열여섯 사람씩을 여덟 줄로 세워 8일(佾)의 갑절을 만든 것이 더욱 우스운 일입니다. 현덕승문이라면 우빈(虞賓)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하니, 혹정도 역시 크게 웃으면서 붓을 잡아 빨리 쓰기를,
“방(房)에 있지요.”
했다. 형산이 말하기를,
“대저 제왕이 음악을 모를 수는 없는 일이요, 또한 음악을 알아도 걱정입니다. 음악을 알지 못하면 수의 문제나 당의 태종같이 가위 정치는 성공했다 할 수 있는 임금으로서 비록 부득이 음악을 제정하기에 힘썼다 하지만 그의 근본 취지는 비루하기 짝이 없었고, 당의 명황이나 송의 도군(道君) 같은 이들은 본래 음악을 잘 안다고 했으나 천보(天寶)ㆍ정강(靖康)의 두 난리를 불러일으킨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대개 음악의 덕이란 후충(候蟲)ㆍ시조(時鳥)와 같으며 음악의 재주란 시정(市井)과 같고, 음악의 사업이란 역사와 같으며, 음악의 이름이란 시호(諡號)와 같습니다.”
한다. 나는,
“어째서 후충과 시조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형산은,
“종사(螽斯)와 사계(沙雞 메뚜기)는 본래 같은 벌레요, 황조(黃鳥)와 창경(倉庚 꾀꼬리)은 본래 한 새인데, 때를 따라 변화해서 우는 소리가 각각 다르다는 말이지요.”
한다. 나는 또,
“시정이란 무슨 뜻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저자에서는 인화를 볼 수 있고, 우물 터에서는 질서(秩序)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건을 서로 교역하는데, 팔고 사는 두 편 뜻이 맞는 것이 시도(市道)요, 뒤에 온 자가 먼저 온 자를 원망하지 않고 그릇을 벌여놓아 차례를 기다리다가 제 뜻에 찼을 때 그치는 것이 정도(井道)입니다. 무릇 역사의 대체는 정직해야 하고, 시호라고 하는 것은 잘잘못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한다. 형산이 일어서서 조그마한 가죽 상자를 열고, 작은 검정 종이부채를 내어 나에게 보이는데, 그 표정이 너그러웠다.
또 아주 작은 사기합을 끄집어 내어 책상 위에 늘어놓는데, 무엇을 하려는지 그 뜻을 짐작할 수 없었다.
차례로 합을 여는데 보니, 석록색(石綠色)ㆍ수벽색(水碧色)ㆍ유금색(乳金色)ㆍ니은색(泥銀色)의 물감들이 가득 차 있다.
그는 책상에 기대어 부채를 펴놓고, 노석(老石)과 함께 치죽(穉竹)을 그린다. 나는,
“저는 선생이 용면(龍眠)의 높은 솜씨를 가지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였더니, 형산은,
“그저 마음먹은 뜻을 표해 본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한다. 나는,
“저 뱀의 발등과 매미의 날개처럼 생긴 것이 문득 천 길을 뻗을 기세가 있어 보이는데요.”
하였더니, 형산은 크게 웃으며 이내 화제로서,
아름다운 푸른 대는 임의 풍채 보는 듯이 / 綠竹瞻君子
굽어진 저 언덕에는 임의 소리 듣는 듯이 / 卷阿矢德音
이 부채를 펼쳐 내어 그림 한 폭 그려 들고 / 揮毫開便面
두 손을 맞잡으니 마음마저 같으이 / 握手得同心
라는 네 글귀를 쓰고 나서, 또 이름과 자를 새긴 작은 인(印)을 다른 종이에 찍어 도려내어 왼쪽에 붙이고는 접어서 나에게 주었다. 내가,
“옛날 음악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말까요?”
하였더니, 혹정은 웃으면서,
“선생은 퍽이나 옛것을 좋아하는 주장이십니다. 대개 세상에서 음악을 말하는 자가 율을 말하면서도 시는 말하지 않고, 시는 말하면서도 덕은 말하지 않고, 덕은 말하면서도 가세(家世)는 말하지 않고, 가세는 말하면서도 풍속은 말하지 않고, 풍속은 말하면서도 운수는 말하지 않아, 의론만 분분하여 헛되이 상당(上黨)양두산(羊頭山)에서 검정 기장을 찾는다든지, 진회(秦淮) 못가에 가서 가회법(葭灰法)을 한다 하여, 음악은 필경 옛날의 고아한 것은 얻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선궁률(旋宮律)이나 기조(起調)에 관한 법은 제가 본 바를 앞에서 대강 말했지만, 노래와 시에 있어서는 고인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유쾌한 사람은 웃지 않을 수 없고, 슬픈 자는 울지 않을 수 없고, 배고픈 자는 먹을 것을 찾지 않을 수 없고, 목마른 자는 물을 찾지 않을 수 없어, 허위와 가식이 없고 억지로 하는 일이나 구차한 것이 없습니다. 이같이 마음에 한번 감동되면, 비록 너무 즐거우면 음탕해지고, 너무 슬프면 병이 나는 폐단이 있지만, 모두가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지 않는 것이 없으니, 소위 시경 3백 편은 한 마디로 말해서 간사함이 없는 생각이란 이것입니다.
윤대인(尹大人)의 시(市)ㆍ정(井)의 비유는 정말 음악의 실정을 얻은 것으로, 양쪽이 서로 팔고 사고 할 때에 값을 다투다가도 뜻에 맞지 않으면 매매는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니, 사람을 협박하고 억지 흥정을 하는 것은 인화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경 3백 편은 모두 사람의 감정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바일 것입니다. 이상은 시를 논한 것이다. 유천(維天)과 집경(執競)을 칙천(勅天)과 갱재(賡載)에 비하면, 진실(眞實)하고 소박(素朴)한 품이 좀 모자라나 문장의 화려한 면은 더욱 나을 것입니다. 한ㆍ위의 악가로서 안세(安世)ㆍ방중(房中)을 비롯하여 주안(朱鴈)ㆍ천마(天馬)ㆍ삼조(三祖) 같은 사장(詞章)들의 뜻을 너무 과장해 놓았으니 과연 유천ㆍ집경에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비유하건대, 송사(訟事)를 듣는 것과 같아서, 이유가 바른 자는 모양이 씩씩하고 말이 간단하며 목소리는 화창한 것이요, 이유가 그른 자는 얼굴에 성이 나고 기색은 거칠며 말은 많고 소리가 떠들썩한 것입니다. 후세의 사신(詞臣)들이 이런 가사를 위조하는 데는 오로지 간사하고 아첨하고 거짓말하는 자들이고 보면, 이미 그 덕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소리가 먼저 떨릴 것입니다. 귀신이 내릴 때나, 사람들이 화락할 때는 말할 것 없이, 노래를 부를 때는 기쁘지도 않은데 억지로 웃고, 슬프지도 않은데 억지로 우는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니, 마음에 감동되어 우러나오는 소리처럼 화창하다 하겠습니까, 괴굴(愧屈)하다 하겠습니까. 그 말로 읊는 것도 이러할진대 음률의 소리야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며, 음률의 소리가 이러할진대, 소리에 조화된 음률이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또 서산(西山) 채씨(蔡氏)가 말한, 이른바 원성(元聲)을 어디에 의거해서 찾을는지 모르지만, 이 원성이란 음률에 있는지요, 도덕에 있는지요. 이것은 도덕을 근본으로 삼은데다가 시를 짝지었을 것이요, 소리를 주장으로 삼고 율은 다음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이상은 덕을 논한 것이다. 군자가 나라를 창설하고 대를 이을 때는, 만세에 무너지지 않을 터전을 세우지 않는 이가 없어, 주공이 노(魯)를 다스리고, 태공이 제(齊)를 다스리던 것과 같았으나, 또한 말손(末孫)이 불초(不肖)하고 본즉, 그들 둘은 일찍이 이에 대하여 의론이 있었고, 그 자손의 일이 이미 백 세 앞서 변천될 줄을 알고, 음악에서도 역시 변천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상은 가세(家世)를 논한 것이다. 풍속에 이르러서는 사방이 각각 달라서, 소위 백 리에 풍(風)이 같지 않고 천 리에 속(俗)이 같지 않다는 것이 곧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정(刑政)으로도 미치지 못하고, 언어로도 달랠 수 없는 처지라도, 오직 음악만은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 신기(神機)와 묘용(妙用)이야말로 바람처럼 움직이고 햇빛처럼 비치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고무시켜서 그 공화(功化)의 빠름이 우(羽) 춤을 두 뜰에서 춘 지 70일 만에 오랑캐가 감화되었다 하니, 비록 이것을 일러 풍속을 바꾸어 단번에 도에 이르렀다 하여도 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상은 남방의 부드러움과 북방의 강한 것을 바꿀 수 없을 것이요, 정성(鄭聲)의 음란한 것과 진성(秦聲)의 거센 것은 변할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은 제각기 향토의 소리를 기품으로 타고 났으므로 성인도 역시 풍속의 다른 바를 어쩌지 못한다 하여, 정의 음탕한 소리를 내쳐 버리라 하였을 따름이었던 것입니다. 이상은 풍속을 논한 것이다. 성인도 능히 어쩌지 못하는 것은 운수입니다. 영휴(盈虧)와 소장(消長)은 하늘의 운수요, 고허(孤虛)니 왕상(旺相)이니 하는 것은 땅의 운수입니다. 오래되면 변화를 생각하고, 묵으면 새것을 찾고, 궁하면 통하고 싶어하는 것은 운수의 기회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칠일겁(七日劫 찰나의 반대로 가장 오랜 세월)은, 우리 유교에서 말하는 5백 년의 일기(一期)인데, 이 기회에 성인이 탄생하면 시운이 잘 조화되어 천지간의 모든 일을 이룩할 따름입니다. 하(夏)가 충성을 숭상한 것이라든지, 은(殷)이 질박함을 숭상한 것이라든지, 주(周)가 문화를 숭상한 것이라든지, 영씨(嬴氏 진(秦)의 성)가 봉건(封建)을 파하고 정전법(井田法)을 없애어서 천고에 죄안(罪案)이 된 것은, 실상 시운의 어쩔 수 없었던 바였습니다. 기름진 고기는 사람마다 즐기는 바이지만, 오랫동안 앓는 사람에게는 비록 한 솥의 고깃국이나마 냄새만 맡아도 구역이 날 수 있고, 비록 풀 뿌리와 나무 열매라도 흔연히 입맛에 맞을 수 있습니다. 비록 노래를 잘 부르는 자라도, 한 곡조만 항상 부르면 듣던 좌중도 자리에서 일어설 것이요,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는 법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고칠 줄 모르는 자를 교주고슬(膠柱鼓瑟)이라 이르는 것이니, 이것은 인정이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ㆍ순의 정치가 없이는, 비록 소무(韶舞)가 있더라도 찬성하고 반대하는 틈에서 귀신과 사람이 화합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이것은 성인도 세상 운수의 순환에는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은 운수를 논한 것이다. 무릇 글자가 생긴 지 오랜지라, 공자가 산정(刪定)하여 기술한 것이 곧 천지ㆍ시운의 한 개 커다란 변화라 할 것이니, 공자도 부득이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공자가 돌아가신 뒤로부터, 백가(百家)의 말이 분분히 그 사이에 섞여 나와, 그 책들도 몹시 많아서 사람마다 제각기 마음대로 하여, 조그마한 아이들까지도 함부로 천성(天性)이니 인명(人命)이니 하는 이굴(理窟) 속으로 데려가곤 해서 육예(六藝)를 헌 갓처럼 보았기 때문에, 드디어 사도(師道)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도가 없어지매, 옛날 사도(司徒)의 직분과 전악(典樂)의 관직은 헛된 자리만을 그대로 두고는 구차한 헛소리만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음악은 천한 광대에게 돌아가고, 귀인 자제로서 총명하고 준수한 자는 헛되이 무작(舞勺)ㆍ무상(舞象)의 나이를 지내고 보니, 비록 상현(上絃)과 하관(下管)에 팔음(八音)이 잘 맞는다 하더라도, 어떤 것이 궁성ㆍ우성이 되고, 어떤 것이 종(鍾)과 여(呂)가 되는지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혹시 음률을 좋아하여, 여염집에서 거문고를 타고 젓대를 부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 부랑자(浮浪者)나 파락호(破落戶)를 면하지 못하고 보니, 자제들의 치욕으로 여기고, 부모들의 금하는 바가 되며, 향당(鄕黨)이 천히 여기는 바가 되어, 옛 성인들이 교육과 정치를 잘하는 데는 신기ㆍ묘용으로 알던 것이 오로지 광대나 천인들의 책임으로 되어 버렸으니, 만에 하나라도 이런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한다. 형산은,
“옳은 말씀입니다. 주(周)의 시절에는 국자(國子)에게 춤을 가르치는 데 대서(大胥)를 시켜서 춤추는 자리를 바로잡고 소서(小胥)를 시켜서 춤추는 항렬을 바로잡았으니, 이 법이 한의 시대까지 있었습니다. 천하고 낮은 자의 자식들은 종묘의 제사 때 춤을 추는 데 참가하지 못했고, 무릇 무생(舞生)은 모두 2천 석(石)으로부터 6백 석에 이르는 관내후(關內侯)나 대부(大夫)의 적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얼마 지나지 않은 옛날이었으나, 그 선택하는 것이 일정했고, 교육을 위한 준비가 이같았습니다.”
한다. 나는,
“7균(勻)이니 12균이니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하였더니, 형산은,
“균이란 것은 가지런하고 고른 것으로, 말하자면 운(韻) 자와 같습니다. 시를 짓는 자가 말하는 4운(四韻)이니 8운이니 10운이니 하는 것과 같습니다. 7균이란 것은 7성(聲)의 한 운이요, 12균이란 것은 12율의 한 운입니다. 옛날에는 운이란 글자가 없었으므로 균(勻)이라 했습니다.”
한다. 형산은 다시,
“귀국에는 《악경(樂經)》이 있다더니 참말 그렇습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이것은 떠돌아다니는 말입니다. 중국에도 없는 것이 어찌 외국에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이것은 있을 수 없을 겁니다. 세상에서는 악경도 진(秦)의 불 속에 들어갔다고 한탄하지만, 제 생각은 중국에도 처음부터 악경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한다. 나는,
“사전(史傳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으로 피해 올 적에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과 의(醫)ㆍ무(巫)ㆍ복서(卜筮)ㆍ공기(工伎)의 무리 5천 명을 데리고 함께 동쪽으로 나왔다 하였으니, 6예(藝)는 모두 진 시황(秦始皇)의 화염 속에 타지 않고 우리나라에 유전(流傳)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웃으면서,
“이것은 본래 중국에서 호기(好奇)하는 인사가 꾸며서 만든 말입니다. 풍희(馮凞)의 《고서세본(古書世本)》도 이런 것으로, 소위 《기자조선본(箕子朝鮮本)》이란 본래 기자를 조선에 봉할 때부터 전해 오던 고문 《서경(書經)》이라 하여 제전(帝典 《서경》의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으로부터 미자(微子 《서경》의 편명)까지에 그쳤고, 그 끝에는 다만 홍범(洪範 《서경》의 편명) 한 편을 붙였는데, 팔정(八政 홍범 중에 있는 말) 밑에는 52자를 더했습니다. 고정림(顧亭林)의 《일지록(日知錄)》에서, 왕추간(王秋澗)의 《중당사기(中堂事記)》에 의거하여 이미 위찬(僞撰)이란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한다. 나는,
“제가 심양에 들어온 뒤부터, 수재(秀才)를 만나면 문득 우리나라에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대개 기자가 조선으로 나올 때 가지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혹은 위만(衛滿)이 가지고 나왔다고 하는데, 위만은 비록 저 스스로 상투를 묶고 오랑캐 옷을 입었다지만, 역시 저대로는 호걸로 자처하였을뿐더러, 그 무리 수천 명 중에는 역시 선비로서 경서를 안고 진(秦)을 피하여 따라 나온 자가 없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인즉, 이치에 괴이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본래 무력을 숭상하여 다만 약탈을 좋아하고 보니, 설사 끼쳐진 경서가 있었더라도 이것을 받들어 소중히 여길 줄 몰랐을 것이고, 또 여러 차례 난리를 치른 나머지 우리나라에서 1천여 년 이래로 《고문상서》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하였다. 혹정은,
“선배 주석창(朱錫鬯)이 이미 변증한 바입니다. 주서(周書 《서경》의 편명) 공안국(孔安國)의 서문에, 성왕(成王)이 동쪽 이 한 점은 이(夷) 자인데, 그가 나를 대하였으므로 이를 피했다. 대체 그는 호(胡)ㆍ노(虜)ㆍ이(夷)ㆍ적(狄) 등 글자는 모두 기휘하였다. 을 이미 치자 숙신(肅愼)이 와서 축하하니, 성왕은 영백(榮伯 주(周)의 종실이요, 정치가)을 시켜 숙신에게 보내는 칙서(勅書)를 썼다고 했습니다. 그 전기(傳記)에 의하면, 해동의 여러 종족들로서 구려(句麗 고구려의 약칭)ㆍ부여(扶餘)ㆍ간맥(馯貊) 등은 무왕이 상(商)을 쳐서 이겼을 때부터 교통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주(朱)는 주서(周書)의 왕회편(王會篇)에, 직(稷)ㆍ신(愼)ㆍ예(濊)ㆍ양(良) 같은 나라는 처음으로 보이지만 구려니 부여 같은 이름은 없다 하여 동국사(東國史)에서 인용하기를, ‘구려의 건국이 한 원제(漢元帝 유석(劉奭)) 건소(建昭) 2년(B.C.37)이라면, 공안국이 황제의 명령을 받고 이 글을 쓸 때는, 구려와 부여는 중국과 아직 교통이 없었을 때이거늘, 더구나 주가 상을 처음 이겼을 때일까보냐.’ 했습니다. 주자는 사람이 8세가 되어서 모두 소학에 들어가면,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에 관한 글을 가르쳤다고 했지만, 이 이야기는 옛날 세상의 학교를 말한 것으로서 고대에야 이런 글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소위 쇄소(灑掃)하고 응대(應對)하는 것은 예라는 것이요, 노래 부르며 춤추는 것은 악이요, 사ㆍ어ㆍ서ㆍ수도 이런 것으로 미루어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니, 6예(藝)를 가르쳤다는 것은 옳지만 6예의 글을 가르쳤다는 것은 후세 사람들의 억설일 것입니다. 옛날 세상에는 과녁으로 밝히고 채찍으로 가르쳤을 따름이니, 공자가 말한 학예에 논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열다섯 살이 되면 천자의 맏자식과 중자(衆子)들을 비롯하여 공경(公卿) 대부(大夫)의 적자들과 민간의 준수한 아이들이 모두 대학에 들어갔다.” 하였으니, 이는 옳은 말입니다. 또 이치를 연구하고, 마음을 바로잡고, 자기 몸을 닦고,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도리를 가르쳤다는 말은 후세의 억설일 것입니다. 6예를 강습하는 것이 곧 이치를 연구하고 마음을 바로잡는 실증이므로, 옛날 사람은 실천궁행에 힘쓰고 보니 이런 것은 저절로 터득했을 것인데, 어쩌자고 15세 전에는 서둘러서 6예에 관한 글을 배우고, 15세 후에는 6예는 버리고 먼저 자기 몸을 닦고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도리를 알아야만 했겠습니까. 알지 못하겠습니다. 상세(上世)에 어느 도학선생(道學先生)이 고을에 있는 학교나 서당마다 앉아서, 무슨 이학전서(理學全書)를 펴놓고 이것은 형이상(形而上)의 이론이요, 이것은 형이하(形而下)의 실천이라고 가르쳤겠습니까. 13세에 작(勺)춤을 추고 15세에 상(象)춤을 추며, 20세에 대하(大夏 우(禹) 때의 무악(舞樂))춤을 춘다고 한 것은, 아마도 상고 세상에 있었던 소학ㆍ대학의 과목 순서가 이러하였음에 불과했을 터인데, 후세 선비들은 상세에는 6예에 관한 글이 본래 없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입만 열면 제각기 진 시황을 욕하면서 불태우기 전에 있었던 완전한 경서가 모두 해외로 유락(流落)되었다고 의심하였습니다. 아름다운 구구(歐九)가 지었다는 일본도가(日本刀歌) 같은 것은 더구나 가소로운 일입니다. 대체 천지간에 가득 차 있는 사물이란, 형상과 동작과 정리와 환경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시험삼아 이것을 6예에서 따져 본다면, 예란 것은 실천을 해야 되는 것으로, 무엇이나 실천을 할 때는 반드시 자취가 있는 법입니다. 활을 쏠 때도 제 몸을 바로잡은 후에야 화살을 놓는 법이니, 이것이 활쏘는 형식입니다. 말고삐를 깍지끼듯 잡고 두 마리의 말이 춤추듯 뛰는 것은 말을 타는 법식이요, 하나에 둘을 더하면 셋이 되는바, 이로부터 1천 년을 가도록 이렇게 계산하면 이것은 수학의 기술이요, 글씨의 육의(六義)에는 형상을 본뜻 상형(象形)이 가장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음악만은 내용은 있지만 형체는 없다고 할 것입니다. 무릇 형체가 있다는 것은 굵직한 형적을 보인 것으로, 모두 언어로 형용할 수 있고 문자로 기록할 수 있지만, 형체가 없다고 한 것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멀고 아득한 사이에서 깨우쳐 교양시킬 수 있고, 황홀한 속에서 활동을 합니다. 감추면 조용하고, 소리를 내면 화(和)하고, 소리가 아름답게 모일 때는 예절에 맞고, 소리가 적중하는 것은 활쏘기와 같고, 고르기는 말타기와 같고, 빌려 쓰기는 글씨와 같고, 숫자를 더하는 것은 수학과 같아서, 털끝 사이에서 감돌고 핏줄처럼 퍼집니다. 올 때에는 어렴풋하여 마중하고 싶고, 갈 때에는 묘연하여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더듬어도 얻을 것이 없고, 보아도 눈에 띄는 것이 없이, 사람으로 하여금 뼈까지 비통하도록 하고 내장까지 즐겁도록 하여, 가다가도 되돌아서서 못 잊는 것만 같고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질 때는 갑자기 딴 생각이 나는 듯합니다. 몹시 맑고 향내도 없으며 지극히 가늘고 보니 그림자도 없으며, 매양 빽빽하게 틈도 없고, 몹시 크고 보니 바깥이 없으며, 화목하니 흩어지지 않고, 아담하니 빛깔도 없으며, 신비스러우니 마음도 없고, 현묘(玄妙)하니 말도 없는바, 대개 가볍고 민첩한 말로써도 이것을 형용할 수 없거늘, 하물며 문자의 조박(糟粕)으로써 될 것이겠습니까. 이러므로, 저의 생각에는 삼대(三代) 이래로 당초에 《악경(樂經)》이 없었다고 여깁니다.”
한다. 형산은 수없이 권주를 치고는,
“먼저 사람들이 알지 못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악기(樂記) 한 편은 도리어 추솔함에 족할 것입니다. 악기란, 본래 한(漢)의 선비들의 부랑(浮浪)한 글입니다.”
한다. 나는,
“성인이 지은 책들은, 전성(前聖)의 도를 계승하고 뒤에 오는 학자들의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공자가 위(衛)로부터 노(魯)에 돌아와 시를 정리하고 예를 바로잡을 때에, 어찌 홀로 음악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저술한 것이 없을까요.”
하였더니, 혹정은 아무 말 없이 한참 있다가,
“그런 저술은 없습니다. 공자가 시를 정리하고 예를 바로잡았다는 것이 곧 악학(樂學)입니다. 음악의 본질은 시에 딸려 있는 것이요, 음악의 이용 역시 여기에 속합니다. 언어로 사람을 가르칠 때는 그 물정이 그릇되기 쉽고, 문자로 사람을 가르칠 때는 그 천기(天機)가 얕은 것입니다. 무릇 음악이란 것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빠르지만 촉박하지 않고, 나타나지만 드러나지 않고, 깊지만 어둡지 않고, 완곡하지만 굳셀 수 있으며, 곧으나 굽힐 수 있으며, 부앙(俯仰)하고, 감개(感慨)하고, 희희(欷歔)하고 간절해서, 그것을 사람이 들으면 두렵고, 떨리도록 놀랍고, 죽은 듯이 텅 비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이것은, 언어와 문자 밖에 따로 말하기 어려운 말과 글자 아닌 글자를 빌려서, 높게는 하늘에 배합하고 낮게는 땅에 배합하며, 굴신하기는 귀신과 배합하고, 순환하기는 세시(歲時)와 배합하며, 만물을 윤택하게 함에는 우로(雨露)의 덕택을 빌리지 않고, 사람을 일깨움에는 일월의 빛을 기다릴 것이 없으며, 사람을 고동(鼓動)시킴에는 바람과 우레처럼 급하지 않고, 점차 스며들되 강물의 범람과는 달라서, 금ㆍ석ㆍ사ㆍ죽ㆍ포ㆍ토ㆍ혁ㆍ목의 소리가 효제(孝悌)ㆍ충신(忠信)ㆍ예의(禮義)ㆍ염치(廉耻)의 행실이 아니건만, 입으로 불고 손가락으로 타고 팔로 춤추고 발로 뛰는 것도 모두 사단(四端)이 유연(油然)하고 칠정(七情)이 한연(汗然)한 것은, 이 누가 시킨 것이겠습니까. 사람의 사지와 백체를 말없이 깨우쳐 준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대개 상세(上世)에는 문서가 넓지 못하여, 항간에서 부르는 노래를 나라에서 세운 학교로 끌어들여 글자를 맞추어 구절을 만들고 이것을 악기에 맞추었으므로, 옛적에는 대학에서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이 반드시 책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부르고 춤추는 것이 곧 학문으로 되었었습니다. 점(點)의 슬(瑟)과 회(回 안회(顔回))의 거문고가 있는 데는 유상(遺像 공자의 초상)이 홀로 남아 있고, 청묘(淸廟 주문왕의 사당)에서 세 번 읊으면 문왕을 보는 듯하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5음이란 것이 소리의 문리(文理)라면, 6률이란 소리의 뜻일 것입니다. 몸은 각각인데, 똑같이 맞는 것은 소리의 덕행이요, 잡티 없이 순수하여 드러내는 것은 아(雅)하다는 것으로, 아하다는 것은 소리의 광휘(光輝)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특히 이같은 저작하지도 않은 책과 말도 없는 뜻에 유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도록 해서, 성격이 좋은 자는 덕을 알게 되고, 성격이 나쁜 자는 음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인이 과거의 학문을 계승하고 뒤에 오는 후진들을 계시하는 뜻일 것입니다. 이래서 저는 《악경(樂經)》이란 처음부터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6예에, 음악에 관한 저서가 없었다는 것은 이미 들은 말입니다. 그러나 악보(樂譜)는 있는가요?”
하였더니, 형산은,
“가석하게도 고보(古譜)는 모두 타버리고 지금은 전하지 않습니다.”
한다. 나는 또,
“그것도 진(秦)의 불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형산은,
“아닙니다. 수의 만보상(萬寶常)은 《악보》 64권을 지어, 8음이 저마다 궁(宮)에서 기조가 되는 법을 함께 말하면서, 줄을 갈고 지주(支柱)를 바꾸어 84조 1백 44율로 변하여 8천 1백 소리에 맞도록 했더니, 당시의 사대부들이 이를 배척하여, 보상은 마침내 굶어죽으면서 격분한 나머지 그 책을 모두 태워 버렸습니다. 명의 가정(嘉靖) 때, 태복승(太僕丞) 장악(張鶚)이 지은 《악서》에는, 첫째로 대성악도보(大晟樂圖譜)라 하여 거문고 종류로부터 이하 여러 악기들의 보(譜)를 하나씩 지었고, 둘째로 《고아심담(古雅心談)》을 지었으며, 같은 시대에 요주 동지(遼州同知) 요문찰(姚文察)이 저작한 악서로서 《사성도해(四聲圖解)》ㆍ《악기보설(樂記補說)》ㆍ《율려신서보주(律呂新書補注)》ㆍ《흥악요론(興樂要論)》 등이 있었고, 그 후에도 《율려정의(律呂精義)》ㆍ《오음정의(五音正義)》ㆍ《악학대성지결(樂學大成旨訣)》 등과 같은 책은 모두 성기(聲器)의 도수(度數)를 강론한 것입니다. 금보(琴譜)에는 조현(調鉉)ㆍ농현(弄鉉)ㆍ수법(手法)ㆍ수세(手勢) 등이 있고, 당랑포선(螳螂捕蟬)이니, 평사낙안(平沙落雁)이니, 일간명월(一竿明月)이니, 감군은(感君恩)이니 하는 법은 모두 금사(琴師)의 구결(口訣)입니다.”
한다. 혹정은,
“대개 음악이란 보(譜)가 없을 수도 있으니, 귀신이 통할 만큼 조화가 붙으면 《역경(易經)》한 부가 곧 악보라 할 수 있을 것이요, 음악이란 것은 비결이 없을 수도 없으니, 사물에 따라서 뜻을 붙여 늘이면 우소(虞韶) 한 편도 저절로 천지 사이에 있게 될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글자를 포개어 써서 모두 음악의 비결로 삼았던바, 바람의 습습(習習)함과 비의 처처(凄凄)함과 사슴의 유유(眑眑)함과 새의 영영(嚶嚶)함과 기러기의 옹옹(嗈嗈)함과 여우의 유유(綏綏)함과 저구(雎鳩)의 관관(關關)함과 벌레의 훙훙(薨薨)함과 날개의 숙숙(肅肅)함과 사냥개의 영영(令令)함과 방울의 장장(將將)함과 얼음 뜨는 충충(冲冲)함과 나무 베는 정정(丁丁)함이 모두 인용하여 비결을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또,
“중국의 악성(樂聲)은 한 글자가 한 율이 됩니까?”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아닙니다. 한 글자에도 청탁과 억양의 법이 있고 평(平)ㆍ상(上)ㆍ거(去)ㆍ하(下)의 다름이 있거늘, 하물며 노래란 영언(永言)이요, 영언을 읊는 것이겠습니까.”
한다. 나는,
“공자가 백어(伯魚 공자의 아들 공리(孔鯉))에게 말한 주남(周南)ㆍ소남(召南)을 하였느냐는 것도, 후세에서 논한다면 하루아침에 가히 욀 수 있을 것이요, 반드시 어진이에게 물어 볼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자가 읽었느냐고 묻지 않고 했느냐고 물었으니, ‘한다’는 것은 음악을 노래한다는 말입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선생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것은 먼저 사람들이 하지 못한 말을 하신 것입니다. 옛적의 노래는 후세의 독서나 다름이 없습니다. 상세의 서적은 《역경》ㆍ《서경》ㆍ《시경》ㆍ《예기》에 불과하여 모두 천자의 도읍에 감추어 두었던 것이므로, 공자가 주에 가서 노담(老聃 하(夏)의 후손)에게 예를 물었다는 것도 이 까닭입니다. 비록 공자 같은 성인으로서도 50세에 비로소 《역경》을 읽었다고 하여, 70명 제자들이 한번도 《역경》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고 언제나 시ㆍ예를 논함에 불과했는데, 이것도 모두 입으로 전한 것으로 후세에서 날로 늘어가는 번문(繁文)과는 달라서, 당시에 배운다는 것은 제사지내고 인사하는 동안에 문관(文官)은 깃을 꽂고 무관(武官)은 도끼를 들고, 아침에는 거문고를 타고 저녁에는 노래를 했을 따름입니다. 공자가 말씀하기를, ‘하(夏)의 예를 내가 능히 말할 수 있으나 기(杞 은(殷)의 후손)로써 증험삼기 부족하고 은(殷)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송(宋)을 증험하기 부족한 것은 문헌이 부족한 탓이다.’ 한 것을 보아, 이런 예절도 흘러온 내력이 입으로 전해온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이미 배운 것을 때로 복습한다는 말도 곧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자가 백어에게 말씀한 다음 장에는 예(禮)라 악이라 일렀지마는, 이 구절도 실상은 제사지내고 노래부르는 것 이외에 예악의 근본이 어디 있겠느냐 하는 의미를 일깨워 이르는 말투입니다. 관저장(關雎章) 같은 시는 그 시가 된 품이 친절하게 재삼 번복하여 지성에서 우러나오고, 애끊는 동정의 표정이 마음의 덕성과 사람의 도리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은 대체로 가사의 뜻이 그러함이요, 즐거워도 음탕하지 않고 슬퍼도 몸을 상하지 않는 것은 대체로 그 성음이 그러했던 탓입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태사(太師) 지(摯 태사의 이름)가 처음 음악을 지도하게 되자, 관저의 조리 있는 음률이 귀에 출렁출렁 넘친다.’라고 한 것이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후세에는 시를 공부할 때 악기와 노래를 없애고는 네모난 책만 마주 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소리와 시가 둘로 갈리고 보면, 주자가 《시경》을 주석(注釋)하면서 정풍(鄭風)ㆍ위풍(衛風)과 같은 시를 아주 음탕한 것으로 돌려 버렸으니, 이는 시의 음탕한 뜻만 깨닫고, 음곡은 깨닫지 못한 탓입니다. 남녀 간의 사사로운 즐거움은 남이 알까 두려워하는 바인데, 어찌 길가에서 자신들의 음탕한 행실을 큰 소리로 나타내겠습니까. 그렇다면, 공자가 안연(顔淵)에게 대답할 제, 왜 정의 시를 멀리하라 하지 않고 다만 정의 소리를 멀리하라고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약 정의 소리로써 노래를 부르면, 표매(標梅)니 야균(野麕)이니 하는 것도 응당 음탕한 시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또 소리를 눈으로 감상할 것인가, 귀로 감상할 것인가. 학사나 대부들이 그 근원을 따져 음악을 만드는 원리만 찾아 내려고 헤매다가 드디어 음률을 눈으로 찾게 되었습니다. 중세(中世)의 성인들은 귀로 익히는 데 힘썼으나, 오늘의 선비들은 일조에 이것을 눈으로 배우려 하여, 실지로 아침에는 줄을 타고 저녁에는 노래부르고 하는 데는 아무런 공부도 없이, 소리와 음률은 그만두고 한갖 책만 읽게 되었습니다. 이는 송의 시절에 모든 대유들이 입만 열면 음률을 말하였으나 실상 소리를 감상할 줄 모르고 보니, 도리어 악공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필경에는 고루한 데 그치는 것을 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한다. 나는,
“진ㆍ한 이래로 옛날 음악을 회복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좋은 시운(時運)이 돌아오더라도 음악을 지을 만한 사람이 나지 못할까요.”
하였더니, 혹정은,
“어찌 그렇겠습니까. 주가 쇠할 때에, 문치의 폐단은 극심해지고 제후(諸侯)들은 강대해져서 서로 다투어 가면서 무력을 숭상함에 이르러, 태학관을 비워 놓고 제각기 자리를 깔고 장소를 나누어 기세를 높인 자들은 모두가 모사나 술객이었습니다. 이로부터 백가(百家)의 학설이 종횡잡답하여 저마다 자기 학설을 옳다 하고 있었으니, 그 뜻인즉 필경 인ㆍ의에 근본을 두고 유교의 학설을 빌려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몸은 학교를 떠나 한갓 분요하게 되고, 예ㆍ악은 함부로 입으로 떠들 뿐 몸으로는 익히지 않아, 의례에 관한 모습은 점차 눈앞에서 사라지고, 음악 소리는 날로 귀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잠시라도 몸에서 떨어질 수 없는 실물이 쓸데없는 도구가 되어 다시는 익힐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쓸데없는 학문으로써 이치만 밝히려는 자들의 탓입니다. 이러고 보니, 인정은 문식을 싫어하고 질박한 것을 생각하며, 화려한 것을 미워하고 실지를 취하고, 사치를 버리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번거로운 것을 두고서 간략한 것을 찾게 되어, 천하를 다스린다는 자는 백성들로 하여금 암흑과 어리석은 구덩이로 몰아 넣었으니, 이는 반드시 옛날 성인의 정치의 요령이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파묻는 짓이 진(秦)에 있어서는 진실로 실책을 면할 수 없었으나, 한(漢)으로 보아서는 그대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또 유방(劉邦)과 항적(項籍)이 싸우던 사이에는, 천하의 젊은이들은 도탄 속에 시달리다가 다행히 칼끝에서 벗어나게 되어, 비로소 자기의 총명을 가지고 타고난 천품을 발휘하게 되었으니, 이는 곧 시운이 한번 돌아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형벌이란 세 가지 약법(約法)에 지나지 않고 보니, 법률이 가혹하지 못하여 자기 공로를 주장하던 장수들이 기둥을 치면서 취해 떠들었으므로, 신하들을 그다지 억제하지 않았던 터이요, 조정의 위에는 소박하고 말을 가벼이 하지 않는 장자들이 많아서 남의 과오를 말하기 부끄러워했으니, 풍속도 그다지 박하지는 않았고, 큰 부호들이 죽고 유리하게 되어 농토는 일정한 주인이 없어졌은즉, 천하의 밭을 비로소 한 번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文帝)ㆍ경제(景帝) 사이에는 이미 한이 일어난 지 40여 년이 되어 숨을 돌린 때라, 들에는 말을 길러 떼를 이루었고, 창고에는 곡식이 썩을 정도로 쌓이고 보니, 각 지방에는 학교를 세울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학사나 대부들은 박사(博士)의 집에 와서 머리를 숙이게 되매, 넉넉히 교육을 실시할 처지가 되었으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漢)의 초년에는 책 끼고 다니는 것을 금하는 법률이 오히려 풀리지 않아 천하의 서적은 모두 정부에 몰려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관리만 믿을 뿐이요, 처사(處士)들은 감히 함부로 정치에 관한 일을 의논하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한다. 나는 웃으면서,
“이것은 단사(段師)가 강(康)을 곤륜(崑崙)으로 보내서 10년을 두고 악기를 만지지 못하게 하여 음악의 본령(本領)을 잊어버리도록 한 것이군요.”
하였더니, 혹정은,
“그렇습니다. 세상에 드문 숙손통(叔孫通) 같은 이는 아첨배 속에 끼어 멀리 배척당했고, 나이 젊고 총명한 조조(鼂錯 한 무제 때 신진 정치가)와 가의(賈誼) 등 1백 10여 명은 눈을 막아 다른 책은 못 보게 해서, 음악으로써 문학을 대신 삼고 노래와 악기로써 행실을 깨우쳐, 멀리는 임금에게, 가까이는 부모에게 수족(手足)을 놀리며 춤을 추어서 섬기게 한 후에, 노(魯)의 두 선비를 사도(司徒)의 벼슬에 임명하였다면, 반드시 예악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니며, 또 다시 두 마씨(馬氏)와 같은 이들을 학교에 벌여 둔 것으로 보아, 반드시 찬송의 노래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 없음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그들은 무슨 공을 기록하고 무슨 덕을 찬양할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당ㆍ송의 제작(制作)이 전혀 공덕으로 표현할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두 마씨는 그들의 문사(文辭)만 취한 것일까요. 가의나 조조도 또한 두 마에게 견주어 어찌 못하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비단 그 문장만 취한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는 음악과 역학(曆學)이 모두 태사(太史)에게 속하여, 한의 율서(律書)에는 음악을 먼저 말하지 않고 군사를 말했으며, 군사 쓰는 법을 말한 것이 아니라 군사를 쉬게 하는 법을 말했으니, 음악과 군사와는 그 거리가 멀지마는, 그러나 천하가 부유하고 백성이 즐겁게 놀 만하면 이것은 평화로운 근본이니, 대개 음악을 제정할 뜻을 깊이 알았다 할 것입니다.”
한다. 나는,
“한(漢)이 천하를 차지한 때가 그렇게도 성(盛)했던가요.”
하고 물었더니, 혹정은,
“선생은 이 무슨 말씀이시오. 어찌 선생은 그렇게도 한의 왕실을 작게 보시나요. 제 생각으로는 한 고조의 공로는 주 무왕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요, 그 덕은 주의 왕실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못한 것은 서백(西伯 주 문왕의 봉호)의 세가(世家)가 아니요, 주공 같은 숙부와 소공(召公) 같은 대신과 주(周)와 같은 8백 년의 천록(天祿)이나 공자 같은 유민(遺民)이 없었을 뿐입니다. 무릇 삼대 때에는 천자가 다스린 땅이 천 리를 넘지 못했고, 천백 제후들이 각각 땅을 나누어 다스리면서 대간(大姦)만 아니면 천자에게 관계가 없었습니다. 천자는 25년에 한 번씩 순수(巡狩)를 하고, 율도(律度)와 양형(量衡)을 옳게 만들 뿐이었고, 큰 역적이나 없으면 자기 처소에서 잠자코 두 손 잡고 아무런 하는 일이 없었으니, 다시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상하가 유지하고 강약이 견제되어서, 소위 발이 백이나 있는 벌레는 죽어도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진ㆍ한 이래로 영토가 만 리나 되고, 필부(匹夫)와 필부(匹婦)의 기포(饑飽)ㆍ한난(寒煖)이 모두 천자의 생각 하나에 달려 있어, 천자가 생각 한번만 잘못 가져도 나라는 흙처럼 무너지고 기와처럼 깨어져서 문지방 없는 문정(門庭)이 되어 버렸습니다. 비록 부견(苻堅)의 강함과 두건덕(竇建德)의 꾀로도 천하의 절반을 얻었다가 일조에 자기 몸이 잡히게 되니 흥망이 덧없었습니다. 한 치 땅과 한 명의 백성이라도 반드시 천자 하나에 매이게 되었으니, 큰 운수가 아니고는 그 지위(地位)를 길이 누릴 수가 없고, 큰 제도가 아니고는 능히 진압할 수가 없었으니, 이와 같이 쉽고 어려움이 고금의 형세와 달랐습니다. 주가 일어날 때에 백이ㆍ숙제의 앞에는 태백(太伯)과 중옹(仲雍)이 있었고, 백이와 숙제의 뒤에는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있었는데, 한의 왕실이 일어날 때에도 역시 이런 일이 있었는가. 그러고 보면 고제(高帝)는 공로는 컸지만 그 마음이 없었고, 문제(文帝)는 덕행은 있었지만 학문이 없었으며, 무제(武帝)는 의지는 있었지만 식견이 없었습니다. 가석한 일은, 미앙궁(未央宮)은 축대도 온전히 쌓지 못하고 지형도 바르지 못한 채, 흙 한 줌 돌 한 덩이도 공장이에게 맡기지 않고 함부로 몇 길 되는 흙담을 바삐 쌓아서 3백 년 동안을 우물쭈물 지탱해 왔으니, 비유하건대 시골 늙은이가 보리밥에 오이김치로 입에 맞게 배를 채워서 도무지 홍운사(紅雲社 유명한 요리집인 듯하다)의 풍미(風味)를 돌아보지도 못한 것과 같습니다. 삼로(三老) 동공(董公)이 여상(呂尙)보다 더 어질고, 호소(縞素)의 한 격문이 태서(泰誓)보다 나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한의 공덕에 대한 선생의 말씀은 지나칩니다. 한 고제는 처음에 백성들을 건지겠다는 마음이, 술에 취하여 함부로 고함치던 김에 아방궁을 보고서 망녕되이 일어날 뜻을 세운 데 불과하니, 이같은 군도(羣盜) 중의 걸출을 어찌 주의 덕으로 일어난 데에 비하겠습니까. 만일 사적만을 가지고 공을 의논한다면, 고래로 난세(亂世)의 간웅(姦雄)들이 모두 후세에 할 말이 있겠지만, 천하가 이미 정해지고 보면 비록 한두 가지 표현할 것도 없지는 않으나, 이 또한 때를 따라 이해와 편의를 노린 데 불과한 것이니, 소위 신하로서의 의리로야 무엇이 귀하다 하겠습니까. 항우가 한을 위하여 의제(義帝 초 회왕(楚懷王) 손심(孫心))를 몰아내어 죽이게 한 것은 하늘이니, 만일 항우로 하여금 이러한 난처한 일을 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한왕(漢王)은 천하를 3분하여 그 둘을 차지하면서도 도리어 머리를 숙이고 숨을 죽이고는 의제의 뜰에 옥(玉)과 비단과 죽고 산 새짐승을 조공해야 했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크게 웃으면서,
“청하건대 선생은 노여워 마십시오.”
한다. 나는 크게 웃고는,
“저는 원래 노여워할 일이 없습니다.”
하였더니, 혹정은,
“한왕으로 하여금 의제를 섬겨 복종하게 해야 된다는 것은, 선생이 의리를 형식으로 따지는 말씀입니다. 삼대 이상은 불가불 덕을 의논해야 할 것이요, 삼대 이하로는 불가불 공을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천명(天命)의 두터운 바로써 짧고 긴 것을 점칠 수 있을 것이니, 주와 한의 덕을 비록 같이 말할 수는 없지만, 만일 어리고 외로운 임금을 속여서 천하를 취한 데 비교한다면 어찌 천양의 차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역대 왕조의 길고 짧은 것은 공덕의 많고 적은 데 달려 있습니다. 위(魏)와 진(晉)의 보복은 진실로 선배들의 의론이 있었지만, 당ㆍ송이 천하를 차지한 뒤에 몇 대가 못 되어 왕실이 크게 어지러워져서, 천보(天寶) 이후로는 가위 나라는 나라가 아니요, 임금은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양한(兩漢)을 여기에 비교한다면, 애제(哀帝 유흔(劉欣))ㆍ영제(靈帝 유굉(劉宏))로도 오히려 임금의 기율을 잡고 있었으며 강토도 나누어지지 않았으니, 이로써 나라를 얻은 것이 바르고 바르지 못한 데 따라 천명의 두텁고 두텁지 않은 것을 족히 증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의제가 있은 연후에 한(漢)의 공덕이 더욱 빛났으니, 당시에 의제를 받들어 세운 것은 항씨(項氏)의 한때 권도에 불과한 것으로, 마침 거소노인(居巢老人)의 졸한 꾀에서 나온 것이 당연합니다. 풍진 속에 갑자기 만든 명분을 초매(草昧)의 영웅에게 의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소복을 입고 성토(聲討)한 것은, 비유하건대 양쪽으로 갈려서 송사를 하는데 서로 억지 탈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가령 한 고제가 수수(濉水)에서 패해 죽었던들, 강목(綱目)에서는 예대로 의제 원년에 한왕 유방이 군사를 일으켜 항우를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썼을 것입니다. 의리를 형식으로 따진다면, 무왕이 미자(微子)나 기자(箕子)를 받들어 세우고 자기는 물러나 번방에 처하였다면, 그가 은의 순수한 신하로서 해로운 것이 없고, 잠자리에서 눈물을 흘려 끝까지 천위(天威)를 두려워한 것은 경시(更始)의 어진 종실이 되는 데 해롭지 않았으리다. 청궁(淸宮 위(魏)의 대궐 안채)을 차지하고 거처하는 것은 책망하지 않고, 도리어 죄를 성제(成濟)에 옮겼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어서 천천히 궁리한다면, 항씨의 집에서 높이는 의제가 한에게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의제를 강상(江湘) 백 리 되는 나라에 봉하고 한의 손님으로 여겼던들, 백 년에 제일 가는 성덕(盛德)으로 해로울 데가 없을 것이니, 의제를 처리함이 어찌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또 후세의 군자들은 의론을 세울 때 높은 체하여 한ㆍ당을 말하기를 부끄러워해서, 한의 덕을 낮게 여기고 이를 찬송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의 여러 대 임금들은 모두 대를 전해 가면서 효도와 우애를 했고, 사람을 쓸 때는 순량한 관리를 먼저 채용했으며, 백성을 지도하는 데는 농사에 힘쓰도록 장려하였는데, 이 세 가지는 천하의 근본되는 방침으로서 역대에 드문 바였습니다. 급암(汲黯)의 바른 것이나, 곽광(霍光)의 어린 임금을 도운 것이나, 자릉(子陵)의 고상한 것이나, 황헌(黃憲 동한의 고사(高士))의 모범될 만한 것이나, 제갈량(諸葛亮)의 올바른 출처라든지, 하간효왕(河間孝王)의 예절을 좋아함과 동평헌왕(東平憲王)의 착함을 즐긴 것은, 천하의 원기(元氣)요, 역대의 미치지 못할 바입니다. 무릇 이 여러 가지 사실은 질박하고 정직하고 충성되고 간절하고 참다운 뜻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른바 마음의 덕을 행하고 사랑의 이치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것이 모두 음악을 만드는 실상으로서, 영가(詠歌)하고 감탄해서 대아(大雅) 같은 음악이 생겨도 부끄러운 빛이 없을 것입니다. 천하의 생령(生靈)들은 한(漢)의 문화에 익어서 오래도록 생각에 남았으므로, 유연(劉淵 오호(五胡)의 하나로 전한(前漢)을 세웠다)은 이를 빌려서 안락공(安樂公)에 이어 종묘를 세웠고, 유유(劉裕 남북조의 송 무제(宋武帝))가 관(關)으로 들어가자 부로(父老) 십릉(十陵 한의 역대 왕릉)을 설명했고, 유지원(劉知遠 오대 때 한 고조(漢高祖))ㆍ유엄(劉龑 남한(南漢)의 고조(高祖)) 들도 오히려 ‘묘금도유(劉)’ 자를 빙자해서 대호(大號)를 세웠으니, 이는 비록 전한(前漢)에 아무런 소용도 없지만, 백성들의 마음은 다른 왕실이 한번에 패해서 망한 것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한다.
이때 해가 이미 저녁때나 되었고, 종일 마신 술이 각기 10여 배(杯)나 되어, 형산은 낮부터 의자 위에서 잠이 깊이 들었고, 혹정은 자주 칼을 빼어 양고기를 베어서 큼직하게 먹으며 자주 나에게도 권하는데, 나는 심히 그 노린내가 싫어서 떡과 과실을 먹을 뿐이었다. 혹정은,
“선생은 제ㆍ노 같은 큰 나라는 즐기지 않으십니까?”
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큰 나라는 노린내가 나서요.”
하였더니, 혹정은 부끄러운 빛이 있었고, 나 역시 그 촉휘(觸諱)된 것을 깨닫고 즉시 먹으로 지우면서 이내 사과하기를,
“저는 자공(子貢)처럼 사랑하진 않아도, 실정은 왕숙(王肅)과 같습니다.” 제(齊)의 왕숙(王肅)이 처음으로 위(魏)에 들어갔을 때에, 양고기를 먹지 않고 늘 붕어를 반찬으로 하였다. 고조(高祖)가 묻기를, “양고기가 생선국에 비해서 어떠하냐.” 했더니,고려 왕숙은 대답하기를, “양고기는 제ㆍ노의 큰 나라와 같다면, 생선은 주(邾)ㆍ거(莒)의 작은 나라와 같습니다.” 하였다. 팽성왕(彭城王) 협(勰)이 말하기를, “그대가 제ㆍ노의 큰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주ㆍ거의 작은 나라를 좋아한다면, 명일에는 주ㆍ거 요리를 차려 봄세.” 하였다. 혹정이 내가 양고기를 먹지 못함을 보고서, 내가 작은 나라에 나서 큰 나라의 맛을 모른다고 놀리려고 한 것인데, 내가 큰 나라는 노린내가 난다고 대답하여 도리어 그들이 기휘하는 말을 했기 때문에, 그는 무안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였다. 혹정은,
“고려의 공안(公案 고려에 대한 공문)을 공은 아십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이것은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호)의 《지림(志林)》에 실려 있는가요. 고려가 죄가 없는데 동파가 가장 미워했습니다. 고려 명신에 김부식(金富軾)과 부철(富轍 부식의 아우)이 있는데, 소(蘇)를 사모하였으므로 그들의 이름을 지었으나, 동파는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혹정은,
“자첨(子瞻 소식의 자(字))이 임금에게 올린 글에는, ‘고려가 조공을 드리는 것이 털끝만큼 있으니, 청하건대 서적을 사가는 것을 허락하지 마옵소서.’ 했습니다. 그러나 《책부원귀(冊府元龜)》는 그때 나간 것인데, 귀국에서 널리 인쇄되지 않았는지요.”
한다. 나는,
“동파의 상소는 실언을 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작은 나라가 중국을 사모해서 사간 것을 하필 이해로 따졌을까요.”
하였다. 혹정은,
“그렇습니다. 송의 정화(政和 송 휘종의 연호) 연간에 고려 사신을 올려서 국신(國信 지금의 대사격)으로 삼아 하국(夏國)의 윗자리에 있게 하고, 인반(引伴)ㆍ압반(押伴)을 고쳐서 접송(接送)ㆍ관반(館伴)이라 불렀는바, 고려는 요(遼)를 섬겼다가 금(金)에게 신하 노릇을 했기 때문에 중국의 예의를 많이 저버려서, 송 고종(宋高宗)은 심히 한스러워했습니다. 고려가 조공하던 길은 항상 명주(明州)ㆍ명월(明越) 지방을 경유하므로 공급(供給)에 곤란했고, 중국에서 맞이하는 비용이 여러 만 냥으로 계산되어, 회(淮)ㆍ제(淛 강소 절강) 지방은 이 때문에 시끄러웠습니다. 옛날 형남(荊南)의 고계흥(高季興)은 오대(五代) 시절의 절도사(節度使)로서, 당시에 한 개의 고을을 웅거한 자는 그 지방의 패권을 쥐지 않은 자가 없었지만, 고씨는 이런 비용을 받고자 일부러 자신을 낮추어 외번(外藩)으로 자처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고무뢰(高無賴)’라고 지목했습니다. 송 나라 시절에 회ㆍ제에서도 역시 고려를 ‘고무뢰’라고 불렀으니, 대개 그 비용을 부담하기에 괴로웠던 탓이요, 소(蘇)씨의 다섯 가지 해로움이란 말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사(御史) 호순척(胡舜陟)과 시어(侍御) 오불(吳芾) 등도 모두 이것을 말했으니, 비단 폐단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 그 허실을 탐지하는데, 실상 금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
한다. 나는,
“이것은 진실로 원통하고 억울한 일입니다. 우리나라가 중국을 사모하는 것은, 곧 그 천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21대 역사를 상고해 보건대, 신라와 고려로 국호를 삼은 상하 수천 년 동안에 아직 한번인들 귀국의 국경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습니까. 조선이 한(漢)의 사신을 죽인 것은 곧 위만의 조선이요, 기자의 조선이 아니며, 수(隋)나 당(唐)에 대하여 항거한 자는 곧 고씨(高氏)의 고구려(高句麗)요, 왕씨의 고려가 아닙니다. 중국의 사전(史傳)에는 문득 구(句) 자를 뽑고, 마(馬) 변을 없애서 ‘고려’라고 통칭했으니, 이것은 왕씨가 나라를 세우기 전부터 있었던 이름인데, 앞뒤가 뒤바뀌고 명실(名實)이 혼돈되었으니 족히 한심한 일입니다. 우리나라 삼국 시대에 신라가 가장 먼저 당을 사모하여, 수로(水路)로 중국을 통하면서 의관과 문물은 모두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가위 이(夷)가 변하여 중화가 되었습니다. 왕제(王制 《예기》의 편명)에는 동방을 ‘이(夷)’라고 불렀는데, 이는 뿌리박는다는 뜻이니, 곧 성품이 어질므로 생물을 좋아해서 만물이 땅에 뿌리박고 자라나는 것을 말한 것으로, 천성이 유순하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려는 신라를 계승하여 5백 년 동안에 비록 왕위를 잇는 데 예닐곱 번 잘못이 없지 않았지만, 그러나 중국을 사모하는 정성은 바뀌지 않아서 몽매간이라도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중국의 좋은 글을 얻을 때는 반드시 손을 씻고 받들어 읽다시피 하였습니다. 두 의원이 돌아올 때 가만히 음우(陰雨)의 경계를 가지고 온 일이 있었는데, 무릇 이 몇 가지 일은 역사에 남김없이 기록되었으니, 이는 곧 중국에 마음을 주고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정성이 지극한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당시 사대부들은 고려의 본심은 알지 못하고, 도리어 이웃 나라의 간첩으로 의심했으니, 또한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건염 천자(建炎天子 건염은 남송 고종의 연호)는 설분에 대한 대의는 잃어버리면서 양응성(楊應誠)의 옹졸한 계책을 쉽게 믿고, 지름길을 빌려서 황제를 업고 도망치려다가 필경 장수 적여문(翟汝文)의 선견대로 맞았으니, 송고종 2년에 절강로마보도총관(浙江路馬步都摠管) 양응성(楊應誠)이 상주하기를, “고려를 거쳐 여진까지 가기에는 길이 심히 빠르니, 청하건대 제가 삼한(三韓)에 사신으로 가서 계림(鷄林)과 약속을 맺어 두 황제를 맞아 오겠습니다.” 하매, 곧 응성을 임시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삼고 국신사(國信使)로 임하였더니, 절강 장수 적여문(翟汝文)이 말하기를, “만일에 고려가 금인(金人)들과의 관계로 거절을 하거나, 또 이를 기회로 길을 묻는다고 빙자하여 중국의 남방을 엿보게 된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였다. 응성이 고려에 이르자, 과연 적여문의 말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드디어 약한 나라로 하여금 감정을 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일러, 고려의 공안이 아니라 고려의 원안(寃案)이라 하고 싶습니다. 왕씨는 본래 거란 때문에 통로를 끊기고 중국에 다닐 길이 없어, 비록 들어오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변경(汴京)과의 문화 교류는 앉아서 이룬 것이 아니라, 험한 먼 길을 가리지 않고 뱃길로 만 리를 왕래했으며, 신라가 다니던 옛 자취를 찾아서 무서운 고래와 악어를 밟으며 앞 배가 넘어지면 뒷 배가 잇달아, 만 번도 더 죽을 뻔한 고비를 무릅쓰고 성의를 다했던 것이니, 이것은 작은 나라로서의 떳떳한 직분이요, 어찌 이것을 큰 나라에 대하여 잇속을 노리는 짓으로 보겠습니까. 변변하지 못한 토산물품이야 천자의 뜰에 갖출 수 있는 것이 못 되지만, 그래도 옛날을 회상하면 인사 차리는 범절을 어김없이 하여 누르고 붉은 꾸러미를 보에 싸서 보내니, 이나마 중국을 사모하는 정성인데, 어찌 이것을 상국(上國)에 잘 보이려는 수단으로만 보겠습니까. 고려가 비록 나라는 작고 백성은 가난하다 하지만, 기름진 곡식들은 족히 조상께 제사를 모실 만하고, 실과 삼은 족히 제복(祭服)을 갖출 만하며, 산에서 나는 쇠와 바다에서 구운 소금은 남의 나라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지낼 수 있으니, 어찌 상국의 재물에 욕심을 내고 천자의 유사(有司)들에게 시끄럽게 했겠습니까. 송의 여러 황제들은, 관곡(館穀)이 허비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멀리 찾아온 수고를 따뜻하게 위로하는 뜻은 다른 나라보다 더했습니다. 오래 전해 온 기자 같은 성인의 가르침이 있다 하여 본래부터 예의의 나라로 불려서 대우가 심히 두터웠으니, 중국의 부유하고 포용력이 큰 것을 볼 수 있는지라, 어찌 사해의 부력을 가지고 한 개 사신의 비용을 아끼겠습니까. 천자의 높음으로 옥백(玉帛)의 모임에 이해를 따지겠습니까. 자첨은 학식이 천단(淺短)해서, 후하게 주고 박하게 받는 뜻을 알지 못하고, 갑자기 조그마한 이익과 다섯 가지 손해를 말하여 장사치들이 장단을 다투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로써 장사꾼의 도(道)로 사방과 사귀어서 만국의 오는 정을 끊어 버렸으니, 저는 일찍이 소식의 상소문은 당시 조정의 수치라고 말했습니다.”
하였다. 혹정은,
“선생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후세에서 의논할 때는 대체로 어긋난 일이라 할 수 있으나, 그 당시를 헤아려 볼 때는 매우 심장한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자는 촉당(蜀黨 소식의 당)과 낙당(洛黨 정호(程顥)ㆍ정이(程頤)의 당) 때문에 극도로 자첨을 비방(誹謗)하여, 오히려 공문중(孔文仲)이 정자(程子 흔히 숙정자(叔程子) 정이(程頤)를 가리킨다)를 비방한 것보다도 심해서, 다섯 귀신 중에 괴수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진관(秦觀 촉당의 한 사람. 자는 소유(少游))ㆍ이천(李薦 송의 문학가. 촉당의 한 사람)의 무리를 경솔하고 허탄한 도배로 지목하면서, 남헌(南軒)과는 교의가 친하다 하여 장준(張浚)을 추존했으니, 군자가 파당에 가담하지 않는 것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이제 선생은 주자의 정론(定論)을 끼고 소(蘇)를 배척하는 품이 오히려 주자보다도 엄하니, 고려를 위한 감정풀이를 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고는, 이내 크게 웃는다. 나도 웃으면서,
“원통한 것을 호소했다고 하면 그럴 법하지만, 어찌 감정풀이라고야 하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애오라지 농담이었습니다. 천고에 공적이 옳은 일이나 공적이 옳지 아니한 일에는 인정이 대동(大同)할 터인즉, 누구로 하여금 권하게 하며 누구로 하여금 막게 하겠습니까.”
한다. 나는 웃으면서,
“주자와 같은 당이라 함은 진실로 감심(甘心)하는 바입니다만, 대면해서 착오를 하시니 아직 지독한 촉당(蜀黨)인데요.”
하였다. 혹정은 크게 웃으면서,
“아닙니다, 아니어요. 민호(民皥)는 주자 문하의 자로(子路)입니다.”
한다. 나는,
“성인의 문장(門墻)에까지 이른 모양이니 불러들이지요.”
했더니, 혹정은,
“주자와 같은 당이면 세상에 드문 한아(漢兒)이겠군요. 한아가 문약(文弱)한 것은 주자의 책임에 불과합니다.”
한다. 나는,
“주자가 전고에 의리를 지키는 주인인데, 의리가 이기는 곳에는 천하에서 더 강할 수 없겠거늘, 문약한 것을 무얼 걱정합니까.”
했더니, 혹정은 ‘세상에 드문 한아’란 구절을 찢어 화로 속에 던지면서,
“일부러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자연히 알게 되겠지요.”
하고는, 혹정은 또 말하기를,
“《홍간록(弘簡錄)》 군서목(群書目)에는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고려사(高麗史)》가 들어 있는데, 선배 고령인(顧寧人 고염무(顧炎武))은 역사가의 문체를 갖추었다고 칭찬했으나, 나는 아직 얻어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무석(無錫) 왕안(王晏)이 초출(鈔出)한 《고려기략(高麗紀略)》에는, 외국의 국가 정통(正統)의 대의를 몰라 보고 고려 건국 초기의 사건에 관계된 연호를 쓰면서 첫머리에 역적 양(梁 오대의 후량(後梁). 주온(朱溫)이 세운 나라)의 가짜 연호를 걸었다고 이것을 배척했습니다.”
한다. 나는,
“고려가 처음 일어난 것은 주량(朱梁)의 정명(貞明) 4년(918)으로서, 중국에는 아직 일통(一統)한 천자가 없었으니, 외국의 연호를 무엇으로 붙이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난신(亂臣)과 적자(賊子)가 어느 대인들 없으리오만, 한때나마 거짓으로 나라를 정한 것은 모두 선왕(先王)들을 본뜬 것으로, 주온(朱溫)의 내력은 순전한 도적입니다. 황제의 위를 찬탈(簒奪)한 순서로 황제의 정통으로 떠받든 자는 홀로 사마광(司馬光) 한 사람뿐입니다.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의 자)의 광명정대한 식견으로써 유 예주(劉豫州 유비(劉備)가 일찍이 예주목(豫州牧)이 되었다)를 제실(帝室)의 후손이라 했으니, 당시 견문의 확실한 것을 어찌 후세에서 도보(圖譜)만 따지는 데 비할 수 있겠습니까. 후세에 역사를 짓는 자는, 공명의 말을 믿지 않고 어디에서 대의를 취하였던가요. 구(寇)란 것은 남몰래 남의 집에 들어가서 가만히 도둑질하는 것을 말함인데, 공명은 제실의 종신(宗臣)으로서 자기 스스로 자기 집에 들어가서 다른 도적을 쫓아 잡으려던 것이니, 천하에 어느 사람이 이것을 잘못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제갈자(諸葛子 제갈량을 높이는 말)를 구(寇)라고 한다면, 천하의 문헌으로부터 의(義) 자를 모두 깎아 버려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의 말을 한 번 씹어 보자면, ‘소열(昭烈 유비의 묘호)은 비록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이라 이르지만’이라고 했는데, ‘비록 이르지만’이란 말은 더구나 사람으로 하여금 기가 막히게 합니다. ‘비록 이르지만’이란 말은 도청도설(塗聽途說)의 믿을 수 없는 말을 이름인데, 누가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극온이나 그런 말을 했겠습니다. 이변(李昪)은 본래 권신의 가짜 아들로서, 교묘하게 양(楊 양행밀(楊行密))ㆍ서(徐 서온(徐溫))의 기업(基業)을 빼앗고, 그 뜻을 얻은 후에는 또 찬탈한 자취가 부끄러워서 죽은 의부(義父)를 배반하고 조상을 문황(文皇)에게 의탁시켰으니, 천하의 이씨가 비단 농서(隴西)뿐이 아닐 터인데 널 앞에서 왕조를 계승한다고 했습니다. 막길렬(邈佶烈)도 이와 같은 자입니다. 그(사마광(司馬光))는 곧 역적 양(梁)에게 정통을 내주면서 당당한 제실의 후손(유비(劉備))에게 비하였으니, 무슨 배짱으로 주씨(朱氏 주온(朱溫))로 당을 대신하여 온 사방이 산산이 흩어지게 했으며, 주사(朱邪)가 변경(汴京)에 들어온 것을 신(新 왕망(王莽)의 나라)에 비교하여 국운이 끊어졌다고 한탄했겠습니까. 강목(綱目)에 연대를 쓴 예는 비록 대단히 정당한 자리에 섰다 할 수 있으나, 아직도 익도(益都 산동성 청주(靑州)) 종 상서(鍾尙書) 이름은 우정(羽正)이다. 가 그 권형(權衡)을 얻은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정통론(正統論) 중에는, 준열하게도 사마광ㆍ구양수의 잘못된 이론을 배척하면서 삼대와 한ㆍ당ㆍ송을 정통이라 하였습니다. 바르고도 통일을 못한 자는 동주군(東周君 주(周)의 말주로서 혜왕(惠王)의 아들)과 촉한(蜀漢)의 소열제, 진의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 송의 고종이요, 통일은 했지만 바르지 못한 자는 진 시황ㆍ진 무제(晉武帝 사마요(司馬曜))ㆍ수 문제(隋文帝) 등이라 하였습니다. 비록 정통이 아니라 하더라도, 세상을 오랫동안 비워 둘 수는 없고 보니, 역사를 만드는 자는 할 수 없이 제(帝)라고 하였습니다. 조비(曹丕 조위(曹魏)의 문제(文帝))와 왕망(王莽)과 주온(朱溫) 같은 자들은, 이미 의리도 바르지 못하고 형세도 같지 않다고 운운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장주(長洲 강소성에 있다) 송실영(宋實穎)이 양(梁)의 연호를 엄격하게 배척한 논평만 같지 못하니, 그는 왕망에게 ‘신(新)’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고, 안녹산(安祿山)에게 ‘연(燕)’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다면, 누가 전충(全忠 주온의 또 다른 이름) 같은 흉악한 역적에게 양의 이름을 줄 것입니까. 하물며 당시에 진(晉)ㆍ기(岐)ㆍ오(吳)ㆍ촉(蜀) 등의 여러 왕들이 격문을 돌려 당을 회복하고자 하였던들 당의 왕실이 망하지 않았을 것이며, 모두 천우(天祐 당 애제(哀帝) 때의 연호)란 연호를 20년이나 오래도록 붙여 왔으니 당의 왕조는 아직 존속했던 것입니다. 진(晉)은 비록 당이 사성(賜姓)한 나라지만, 그는 제후들 중의 종맹국(宗盟國)으로서 자기 임금의 원수요, 나라의 역적을 자기 손으로 베어서 소탕했은즉, 세상에서 일찍이, “전충(全忠)의 양(梁)이 없었다.” 운운했습니다. 당시 외번(外藩)들은 중국에서 열립한 임금의 진위를 알지 못하고, 혹은 중국을 사모하는 극진한 정성으로나, 또는 자기 나라의 국경을 방위하기 위해서나, 대국과 결탁해서 우리를 진압시키기 위하여 굽실거리면서, 외번으로 자처하고 그 연호를 받드는 것도 이치에 괴이할 것이 없지만, 다만 후세에 역사를 쓰는 자로서 의논한다면, 진위가 밝아지고 득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 땅에서 문헌들이 해마다 압록강을 건너서, 교화는 태사(太師 기자(箕子))를 따르고 학문은 자양(紫陽 주자의 별칭)을 표준하여 ‘예의의 나라’라 일컬어 오는 터에, 천 년의 춘추 대의는 어진 자의 책임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비록 온공(溫公 사마광의 봉호) 같은 어진 이로서도 출척(黜陟)하는 일에는 오히려 이런 과실이 있었거든, 하물며 외국이겠습니까. 저의 나라는 비록 한 집이나 다름없지만, 오히려 중국에게는 벽을 뚫고 불빛을 빌리며 얼굴을 가린 채 더듬어 찾는 것과 같거든, 하물며 식견이 여기에 이르지 못함이겠습니까. 이제 선생의 양(梁)을 배척하는 의론을 들으니, 모르는 사이에 상쾌해서 망연자실(茫然自失)할 따름입니다. 그런즉, 고려사의 연호는 마땅히 어디에 매어야 되겠습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이것은 당시의 진(晉)ㆍ기(岐)ㆍ오(吳)의 예로 상고해 보면 정하기 쉬울 것입니다.”
하더니, 드디어 일어나서 탁자 위에 있는 조그만 가죽 상자를 열었다. 형산은 코를 우레처럼 골면서 가끔 머리로 병풍을 건드린다. 혹정은 웃으면서 높은 소리를 질러 읊기를,
“목침십자열(木枕十字裂).”
하니, 형산은 코 골던 것을 즉시 그쳤다가 이내 또 시작한다. 나도 이에 큰 소리로,
“목침십자열.”
하였더니, 혹정은 손에 조그만 책을 들고 눈을 크게 뜨더니,
“알아듣는군.”
하니, 그것은 내가 능히 한어(漢語)를 안다는 말이다. 작은 책은 과거보는 사람들이 갖는 역대 기년(紀年)을 적는 책이다. 혹정은 후당(後唐) 장종(莊宗)의 연대를 훑어 본 뒤에, 동광(同光) 원년(923) 갑신(甲申 계미(癸未)의 그릇된 것)으로부터 거꾸로 세어 양(梁)의 균왕(均王 양 말제(末帝)의 봉호) 우정(友貞 균왕의 이름)의 정명(貞明) 4년(918)을 가리켜,
“고려의 건국은 당의 소선제(昭宣帝) 천우(天祐) 15년(918) 무인(戊寅)인 듯합니다. 천우 4년(907)에 전충(全忠)이 황제를 폐하여 제음왕(濟陰王)으로 삼았다가 그 다음해 무진(戊辰)에 죽음을 당했으나, 당(唐)의 정삭(正朔)은 오히려 당시의 제후들에게 쓰인 지 16년이 되었으니, 이것은 역시 공(公)이 건후(乾侯 하북성(河北省)의 지명)에 있다는 뜻입니다.”
한다. 나는,
“지금 해내(海內)의 학문으로 주(朱)ㆍ육(陸) 중에서 어느 편을 숭상하나요.”
하였더니, 혹정은,
“모두 자양을 존숭합니다. 모신(毛甡)과 같은 사람은 글자마다 주자를 반박했지만, 그는 천성이 왕법(王法)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주자를 반박하는 것이 옳은 데는 적고 억지가 많았는데, 그 옳다는 것도 반드시 유문(儒門)에 공이 있는 것이 아니요, 그의 억지는 도리어 세도(世道)에 해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죽이려 하는 자가 도리어 지기(知己)가 되고, 때리지 않으면 정을 알지 못한다 하여, 조사(祖師)를 욕하는 것은 도리어 그 근본을 사랑하는 것으로, 모(毛)가 주자를 반박한 것은 비록 공신(功臣)으로 자처하지만, 때리면 피를 보는데야 누가 그의 사랑을 믿어 주겠습니까. 주자의 문생들은 이웃을 맺었으므로, 마땅히 부득불 바삐 임안부(臨安府 남송의 수도)로 가서 한 소장(訴狀)을 내니, 포염라(包閻羅)는 곡직(曲直)을 불문하고 모신을 잡아다가 먼저 죽비(竹篦) 30대를 때렸으나, 모신은 참고 이내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으며 자꾸만 더 때리라고 소리쳤습니다. 포공(包公)은 크게 노해서 다시 건장한 자들을 불러 더 사납게 때렸으나, 모신은 마침내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모신은 평생에 자기를 알고, 자기를 죄줄 점이 모두 주자를 공박한 데 있다는 것을 자인(自認)했습니다. 주자는 홀로 춘추에만 손을 대지 않았으니, 이는 통달한 사람이나, 보망(補亡) 한 장으로 인하여 소아배(小兒輩)의 허다한 말썽이 되었고, 소서(小序)를 모두 깎아 버려서 독한 노권(老拳)의 맛을 본 셈입니다. 《참동계(參同契)》 주(註)에 …… ” 날이 저물어 파해 일어서느라고 끝을 맺지 못했다.
[주D-001]무엇이 …… 여(呂)인지 : 십이율(十二律)의 하나.
[주D-002]기장 …… 재고 : 중국 고대에서는 악기의 일정한 치수를 극히 정확하게 맞추기 위하여 관악기의 빈 곳의 적(積)을 헤아릴 때는 천연 산물로서 그 크기가 가장 고르고 변화가 없다고 치는 검정 기장 낱알로써 척도의 표준으로 삼았다.
[주D-003]갈대 …… 후기법(候氣法) : 《후한서(後漢書)》 율력지(律曆志)에 나오는 후기할 때에 쓰는 것.
[주D-004]소(韶)ㆍ호(濩) : 우순(虞舜)과 은탕(殷湯) 때의 음악 이름.
[주D-005]유(幽)ㆍ여(厲) : 주(周)의 폭군.
[주D-006]상(桑)ㆍ복(濮) : 상은 상간(桑間), 복은 복상(濮上). 《시경》에 나오는 음탕한 노래.
[주D-007]모란정(牡丹亭) : 명의 탕현조(湯顯祖)가 지은 전기소설(傳奇小說) 모란정환혼기(牡丹亭還魂記).
[주D-008]기조(起調) : 일정한 율에 맞추어 음이 처음 시작되는 음계.
[주D-009]여와씨(女媧氏) : 뱀의 몸에 사람 머리를 한 전설상의 인물. 중국 고대에 생황(笙篁)을 지었다고 함.
[주D-010]왕영언(王令言) : 수 양제(隋煬帝) 때의 저명한 음악가.
[주D-011]수 양제(隋煬帝)가 …… 알았다 : 수 양제의 성명은 양광(楊廣). 그 뒤 과연 강도(江都)에서 시해당했다.
[주D-012]유송(劉宋) : 유유(劉裕)가 창건한 남송(南宋).
[주D-013]진서(晉書) 악지(樂志) : 당(唐)의 방교(房喬) 등의 저.
[주D-014]백부무(白符舞) : 마상(馬上)에서의 무악(舞樂).
[주D-015]진씨(晉氏)가 …… 파천(播遷) : 사마염(司馬炎)이 세운 서진(西晉)이 낙양(洛陽)에서 건강(建康)으로 옮겼다.
[주D-016]리마두(利瑪竇) : 1580년 중국에 온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릿치.
[주D-017]소(韶)ㆍ호(濩) : 우순(虞舜)과 은탕(殷湯) 때의 음악.
[주D-018]한번 …… 잊어버렸다 : 《논어》에 나오는 말.
[주D-019]주지(酒池)ㆍ포림(脯林) : 폭군 은주(殷紂)의 고사. 술 못과 고기 숲.
[주D-020]방패를 …… 둘러섰다 : 《서경(書經)》 무성편(武成篇)에 나오는 구절. 무왕이 무력으로 은을 쳐서 평정했음을 말한 것이다.
[주D-021]범(范)과 마(馬) : 송의 학자요, 정치가. 범은 범중엄(范仲淹), 자는 희문(希文). 마는 사마광(司馬光), 자는 군실(君實).
[주D-022]소소(素韶)의 구성(九成) : 소소는 곧 소악(韶樂)인데 그 풍류가 아홉 번 마치자 봉황이 와서 춤추었다 한다.
[주D-023]채씨(蔡氏) : 송의 학자 채원정(蔡元定). 자는 계통(季通).
[주D-024]시동(尸童) : 중국 고대 신주(神主)가 이룩되기 전에는 제사에 동자를 신 대신으로 앉혔다.
[주D-025]하(夏)의 계(啓) : 우(禹)의 아들로서 천자가 되었다.
[주D-026]고고(呱呱)의 소리 : 《사기(史記)》 중에서 나오는 말.
[주D-027]몇 일(佾) : 대열(隊列). 주(周)의 제도에 천자는 팔인 팔열의 팔일이요, 제후는 육인 육열의 육일.
[주D-028]구려무(句麗舞) : 고구려의 춤. ‘려(麗)’의 본음은 ‘리’였으나 뒤에 변해서 ‘려’가 되었다.
[주D-029]대성악(大晟樂) : 송 신종(宋神宗) 때 대성부(大晟府)에서 만든 음악.
[주D-030]팔음(八音) : 금(金)ㆍ석(石)ㆍ사(絲)ㆍ죽(竹)ㆍ포(匏)ㆍ토(土)ㆍ혁(革)ㆍ목(木).
[주D-031]몽금척(夢金尺) : 조선 때 궁중(宮中) 연회에 쓰던 무악의 명칭.
[주D-032]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조선 세종 때 정인지(鄭麟趾) 등의 저. 조선의 창업을 칭송한 아유 작품. 최초에 한글을 이용하였으므로 귀중히 여긴다.
[주D-033]우조(羽調) : 우리 옛 음악에서 곡조의 웅장하고 장쾌한 성질을 띤 장조(長調) 계통이다.
[주D-034]청(淸) : 우리 음악에서의 음정(音程).
[주D-035]계면조(界面調) : 우리 음악에서의 우아한 곡조 또는 슬프고 애끊는 듯한 느낌을 띤 비곡 계열로 양악의 단조(短調)에 해당한 것.
[주D-036]찬관(贊官) : 의례를 집행할 때 창홀(唱笏)하는 관원.
[주D-037]창읍왕(昌邑王) : 한(漢)의 폐왕(廢王) 유박(劉髆). 창읍은 봉호.
[주D-038]신 창(敞) : 장창(張敞). 당시의 대장군.
[주D-039]임자(任子) : 한의 제도에 이천석(二千石)의 벼슬 이상으로써 삼년의 임기가 차면, 자기와 자산 등급이 같은 사람의 아들 한 사람을 추천하여 낭(郞)을 삼았는데 이를 임자라 하였다.
[주D-040]이(夷) : 순(舜) 임금 때 의례를 맡은 신하.
[주D-041]계찰(季札) : 전국 때 오(吳)의 어진 왕자로서 노(魯)에 초빙을 받아서 주(周)의 고악을 감상하였다.
[주D-042]도적이 …… 부끄러워하며 : 출전 미상.
[주D-043]매양 …… 의심합니다 : 항적(項籍)이 해하(垓下)에서 패하여 강동으로 갈 때에 전부에게 길을 물었는데, 전부가 일부러 속여서 왼편으로 가게 하였다.
[주D-044]수풀 …… 이야기하고 : 제(齊)의 공규(孔珪)가 숲을 깎지 않고 개구리 소리로써 양부(兩郛)의 고취(鼓吹)를 대신한다 하였다.
[주D-045]대들보 …… 회여지지(誨汝知之) : 《논어》의, ‘지지위지지(知之爲知之) 부지위부지(不知爲不知) 시지지야(是知之也)’가 제비가 ‘지지배배’ 지저귀는 소리와 같다는 것이니 이는 설부(說部)에 나오는 왕안석(王安石)의 말이다.
[주D-046]감주(甘酒) …… 금황(禽荒) : 이 네 가지는 모두 《서경(書經)》 오자지가(五子之歌)에 나오는 말들. 감주는 아름다운 술이요, 준우는 집을 굉걸하게 짓는 것이요, 색황은 여색에 음탕함이요, 금황은 사냥에 방탕하는 것이다.
[주D-047]정 세자(鄭世子) : 명의 정공왕(鄭恭王)의 세자 재육(載堉).
[주D-048]숭녕 …… 있으랴 : 주자가 당시 조정의 예악을 맡은 자들을 평한 말.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나오는 구절.
[주D-049]악호(樂戶) : 죄인의 처자를 적몰하여 음악을 전공하는 악공으로 삼은 집안.
[주D-050]바람은 …… 않았다 : 요ㆍ순의 지치(至治) 시대의 일. 《사기(史記)》에 나오는 구절.
[주D-051]흰 …… 있다 : 《논어》에 나오는 구절.
[주D-052]정강(靖康)의 화 : 정강은 송 흠종(宋欽宗)의 연호. 정강 2년(1126) 금(金)이 송을 쳐들어와 송은 강남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주D-053]청황종(淸黃鍾)ㆍ청림종(淸林鍾) : 음명 위에 청을 붙일 때는 표준 옥타브보다 한 옥타브 높은 음을 표시하는 말이다.
[주D-054]사청성(四淸聲) : 표준 옥타브보다 한 옥타브 높은 상황종(上黃鍾)으로부터 시작하여 넷째 협종(夾鍾)에 이르기까지 네 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D-055]진씨(晉氏)가 …… 무너지고 : 서진(西晉)이 강남으로 쫓겨가자 강북에는 다섯 종족의 오랑캐가 서로 다투어 16개국이 명멸했다.
[주D-056]요진(姚秦) : 요씨(姚氏)에 의해 건국된 후진(後秦). 부진(苻秦)과 구분하여 요진이라 한다.
[주D-057]유흠(劉歆) : 서한(西漢)의 한학자. 흠은 이름이요, 자는 자준(子駿).
[주D-058]순욱(荀彧) : 진의 학자. 욱은 이름이요, 자는 자증(子曾).
[주D-059]조충지(祖冲之) : 남제(南齊)의 학자. 충지는 이름이요, 자는 문원(文遠).
[주D-060]신망(新莽) : 왕망(王莽)이 세운 나라 신(新).
[주D-061]우문씨(宇文氏)가 …… 창건하자 : 우문씨는 북주를 세우고 스스로 주(周)의 종실이라 일컬었다.
[주D-062]주무제(周武帝) : 북주(北周) 우문옹(宇文邕). 무제는 묘호.
[주D-063]이악(彛樂) : 동이(東夷)의 음악. 연암은 흔히 이(夷)를 이(彛)로 썼다.
[주D-064]하타(何妥) …… 우홍(牛弘) : 모두 수의 학자. 하타의 자는 서봉(棲鳳), 소기의 자는 백니(伯尼), 우홍의 자는 이인(里仁).
[주D-065]주안(朱雁) : 한 무제(漢武帝)가 동해에 거둥하여 기러기를 얻고서 지은 노래.
[주D-066]천마(天馬) : 한 무제 때에 악와(渥洼)에서 말이 나왔으므로 이 노래를 지었다.
[주D-067]고창(高昌) : 수(隋)의 때 신강 지방에 있었던 나라.
[주D-068]소륵(疏勒) : 역시 신강 지방에 있었던 나라.
[주D-069]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 …… 연출하였다 :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설이 있는데 이것은 악원(樂苑)에서 나오는 말이다. 악원에 예상우의곡은 개원(開元) 연간에 서량부절도(西凉府節度) 양경술이 바쳤다 하였다. 그러나 당일사(唐逸史)에는 나공원(羅公遠)이 현종과 함께 월궁에 이르렀을 때 선녀가 예상과 우의를 입고 광정에 춤추는 것을 구경하고 악공을 시켜 이 곡을 지었다 하였고, 또 일설에는 현종이 엽법선(葉法善)과 더불어 월궁을 구경하고 이 곡을 지었다 하였다.
[주D-070]화현(和峴) : 송대의 학자. 자는 회인(晦仁).
[주D-071]현덕승문(玄德升聞)의 춤 : 순(舜)의 숨은 덕행이 요(堯)에게 달렸다는 것을 모방하여 지은 춤이다.
[주D-072]현덕승문이라면 …… 있었습니까 : 빈은 요의 아들 단주(丹朱)가 불초하였으므로 천자의 위를 순에게 전하매 순은 단주를 국빈(國賓)의 예로써 대접하였는데 송 태조는 누구에게 전위를 받은 것이 아닌 만큼 이 현덕승문의 춤이란 적당하지 않다는 것.
[주D-073]송의 도군(道君) : 송 휘종(宋徽宗)의 스스로 일컬은 이름.
[주D-074]용면(龍眠) : 송의 화가 이공린(李公麟)의 호 용면거사(龍眠居士). 용면은 산 이름.
[주D-075]아름다운 …… 보는 듯이 : 《시경(詩經)》 기욱편(淇澳篇)에 나오는 말.
[주D-076]굽어진 …… 듣는 듯이 : 《시경》 권아편(卷阿篇)에 나오는 말.
[주D-077]상당(上黨) …… 찾는다든지 : 산서성 상당 고을에 있는 산으로서, 악기와 수척을 맞추는 데 쓰는 검정 기장이 난다 한다.
[주D-078]진회(秦淮) …… 한다 : 강서성에 있는 강인데, 아름다운 갈대의 소산지.
[주D-079]시경 …… 생각 :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
[주D-080]유천(維天) : 주 문왕(周文王)에게 제사하던 노래의 한 구인 유천지명(維天之命). 《시경》의 주송(周頌)에 나온다.
[주D-081]집경(執競) : 주 무왕(周武王)ㆍ성왕(成王)ㆍ강왕(康王)에게 제사하던 노래의 한 구인 집경무왕(執競武王). 《시경》 주송에 나온다.
[주D-082]칙천(勅天) : 순(舜)의 노래 중의 한 구로 칙천지명(勅天之命). 《서경》 익직편(益稷篇)에 나온다.
[주D-083]갱재(賡載) : 계속해서 이룩한다는 뜻인데, 고요(皐陶)가 순의 노래를 계속하여 화답한 노래. 《서경》 익직편에 나온다.
[주D-084]안세(安世)ㆍ방중(房中) : 한(漢) 방중(房中)에서 제사하던 노래의 일종.
[주D-085]주안(朱鴈) …… 삼조(三祖) : 한 무제(漢武帝) 때 지은 악장(樂章).
[주D-086]서산(西山) 채씨(蔡氏) : 채원정(蔡元定). 서산은 호.
[주D-087]주공이 …… 있었고 : 주공은 노를 다스리고, 태공은 제를 다스릴 때, 주공은 문치(文治)를 주장하였으나 후손이 문약(文弱)에 빠질 것을 예측했고, 태공은 무치(武治)를 주장하였으나 후손이 무단(武斷)이 있을 것을 예측하였다.
[주D-088]우(羽) 춤을 …… 감화되었다 : 《시경》에 나오는 구절.
[주D-089]정의 …… 버리라 : 《논어》에 나오는 구절.
[주D-090]사도(司徒) : 주(周) 시대에 교육을 맡았던 관리.
[주D-091]전악(典樂) : 주 시대에 음악을 맡았던 관리.
[주D-092]무작(舞勺)ㆍ무상(舞象) : 주공(周公)이 지었다는 춤으로 어려서는 무작을 익히고, 장성해서는 무상을 익힌다고 했다.
[주D-093]대서(大胥)를 …… 바로잡았으니 : 주(周) 시대에 음악을 맡은 관원.
[주D-094]7성(聲) : 궁(宮)ㆍ상(商)ㆍ각(角)ㆍ치(徵)ㆍ우(羽)ㆍ변궁(變宮)ㆍ변치(變徵).
[주D-095]균(勻) : ‘수택본’에는 ‘均’으로 되었다.
[주D-096]풍희(馮凞) : 후위(後魏)의 정치가. 희는 이름이요, 자는 진창(晉昌).
[주D-097]왕추간(王秋澗) : 원(元)의 학자 왕운(王惲). 추간은 호요, 자는 중모(仲謀).
[주D-098]주석창(朱錫鬯) : 주이준(朱彛尊). 석창은 그의 자.
[주D-099]공안국(孔安國) : 한의 저명한 학자. 안국은 이름.
[주D-100]동쪽 : 여러 본에 모두 ‘동○’로 되어 있으나 그릇된 것이므로, 여기서는 ‘수택본’을 따랐다.
[주D-101]숙신(肅愼) : 고조선(古朝鮮)과 병립했던 북방족.
[주D-102]예(禮) …… 가르쳤다 : 대학장구 서(大學章句序)에 나오는 한 절.
[주D-103]학예에 논다 : 《논어》에 나오는 구절.
[주D-104]열다섯 …… 가르쳤다는 말 : 《대학장구》 서문에 나온다.
[주D-105]구구(歐九) : 구양수(歐陽脩). 구(九)는 형제의 순서. 유분(劉蕡)이 일찍이 구양수를 평하기를, “아름다운 구구가 글을 많이 못 읽은 것이 한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주D-106]빌려 …… 같고 : 육서(六書) 중에 가차(假借)의 법이 있는데, 예를 들면 장(長) 자는 ‘길다’는 뜻을 빌려서 ‘어른’의 뜻으로 쓰는 것.
[주D-107]점(點)의 슬(瑟) :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 그는 슬을 잘 탔다. 《논어》에 나오는 말.
[주D-108]주남(周南) …… 하였느냐 : 《논어》에 나오는 한 절.
[주D-109]하(夏) …… 탓이다 : 《논어》에 나오는 한 구절.
[주D-110]태사(太師) …… 넘친다 : 《논어》에 나오는 한 구절.
[주D-111]표매(摽梅)니 야균(野麕)이니 : 《시경》의 장명(章名).
[주D-112]세 가지 약법(約法) : 유방이 관중에 들어왔을 때 진(秦)의 부로들과 세 가지의 조항만을 정하고, 나머지 가혹한 법은 모두 제거하였다.
[주D-113]책 끼고 …… 법률 : 진 시황(秦始皇)이 지은 협서율(挾書律).
[주D-114]단사(段師)가 …… 한 것 : 출전 미상.
[주D-115]숙손통(叔孫通) : 한(漢)의 초기에 국가의 의례를 제정한 유학자. 숙손은 성이요, 통은 이름.
[주D-116]두 마씨(馬氏) : 저명한 문학자인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사마천(司馬遷). 사마는 성, 상여ㆍ천은 이름.
[주D-117]두건덕(竇建德) : 수(隋)의 말기에 하북 지방을 근거하여 장락왕(長樂王)이라 자칭하였다.
[주D-118]중옹(仲雍) : 곧 우중(虞仲). 형 태백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가서 그의 아우 계력에게 임금의 자리를 양보하였다. 계력은 문왕의 아버지.
[주D-119]관숙(管叔) : 문왕의 셋째 아들 희선(姬鮮)의 봉호. 주공과 성왕(成王)의 사이를 이간하다가 극형을 당하였다.
[주D-120]채숙(蔡叔) : 문왕의 다섯째 아들 희도(姬度)의 봉호. 역시 관숙과 동조하다가 추방을 당했다.
[주D-121]삼로(三老) : 한의 제도에 백 리에 한 정(亭)을 두고, 십 정에 한 향(鄕)을 두어서, 향에는 삼로를 두어 교화의 사업을 맡게 하였다.
[주D-122]동공(董公) : 삼로의 한 사람으로서, 한 고조가 낙양 신성(新城)에 갔을 때에 서로 만났다. 동은 성이요, 공은 봉호.
[주D-123]호소(縞素)의 한 격문 : 호소는 백색의 상복. 한 고제가 항적을 치러 신성으로 출병하였을 때, 동공이 길을 가로막고 명분이 없는 군사를 낼 수 없다고 하매, 고제는 그의 말에 의하여 항적이 의제(義帝)를 죽인 죄를 문책하여, 군사들에게 흰 상복을 입히고 제후들에게 격문을 돌려 항적을 칠 것을 호소하였다.
[주D-124]태서(泰誓) : 《서경》의 편명. 주 무왕이 은(殷)을 치러 맹진(孟津)에 이르러서 군사와 제후들에게 서약한 글.
[주D-125]항씨(項氏) : 항량(項梁)ㆍ항적의 숙질.
[주D-126]거소노인(居巢老人) : 항적의 모사 범증(范增). 거소는 그가 살고 있던 곳이요, 노인은 그가 나올 때에 벌써 70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D-127]미자(微子) : 주왕(紂王)의 서형. 미자는 봉호.
[주D-128]경시(更始) …… 않았으리다 : 경시는 광무제의 족형으로 앞서 황제를 칭한 회양왕(淮陽王) 유현(劉玄)의 연호. 동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경시의 부하로 있을 때에 경시가 그의 형 연(縯)을 죽였는데, 유수는 상복을 입지 않고 태연하였으나, 잠자리에 들 때는 그 형을 생각해서 울었다.
[주D-129]청궁(淸宮)을 …… 옮겼습니다 : 성제는 위의 신하로서 사마소(司馬昭)에 붙어 위의 마지막 황제 조모(曹髦)를 죽였는데 사마소는 정권을 전횡하여 대궐에 웅거하고서 황제를 죽인 죄를 성제에게 돌렸다.
[주D-130]안락공(安樂公) : 촉한(蜀漢)의 후주(後主) 유선(劉禪)이 위(魏)에게 망한 뒤의 봉호.
[주D-131]큰 나라는 …… 나서요 : 큰 나라를 양고기에 견준 고사도 있었거니와, 큰 나라가 노린내가 난다는 말은, 한족이 북방 호족을 노린내가 난다고 표현하고 있으므로, 청에게 통치를 받는 대국은 노린내가 난다고 풍자하는 의미이다.
[주D-132]책부원귀(冊府元龜) : 송의 왕흠약(王欽若)ㆍ양억(楊億) 등이 칙명을 받아서 엮은 것인데, 중국 역대 군왕의 사적을 서술하였다.
[주D-133]하국(夏國) : 송의 초기에 조원호(趙元昊)가 세운 나라.
[주D-134]인반(引伴)ㆍ압반(押伴) : 둘 다 외국 사신을 인도하는 자.
[주D-135]명주(明州)ㆍ명월(明越) : 둘 다 지금 절강성의 해안 지방.
[주D-136]음우(陰雨)의 …… 온 일 : 송 휘종 때에, 고려가 송에 의원을 구하매 황제가 의원 두 명을 보냈는데, 그 둘이 자국으로 돌아가는 편에, 실상은 고려가 의원을 구함이 아니라, 송은 당시에 거란보다도 오히려 여진을 경계하여야 된다고 비밀의 실정을 보고하게 한 사실이 있었다.
[주D-137]지름길을 …… 도망치려다가 : 당시 금에 포로가 된 흠종(欽宗)과 휘종(徽宗) 두 황제를, 몰래 고려를 통해서 구출할 계책을 세웠다.
[주D-138]송 고종 …… 한다 : 이 원주는 모든 본에 다 이 편의 끝에 있었으나, 여기에다 옮기는 것이 옳을 듯하다.
[주D-139]공문중(孔文仲) : 촉당의 한 사람으로, 왕안석(王安石)의 학설을 지지하는 학자.
[주D-140]남헌(南軒) : 주자의 친우인 장식(張栻). 남헌은 호, 자는 경부(敬夫).
[주D-141]장준(張浚)을 추존했으니 : 주자가 장식과 지극히 친한 사이이므로 장준의 행장을 지었는데, 장준은 소인이라는 명을 들었으므로 주자가 그 뒤에 스스로 후회하였다.
[주D-142]성인의 …… 불러들이지요 : 자로의 학문이 공자의 방에는 들어오지 못했으나 그 문에까지는 왔다는, 공자의 말을 이용하여 혹정을 조롱하였다.
[주D-143]구(寇) : 사마광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을 때에 조위(曹魏)를 정통으로 하고, 촉한(蜀漢)이 위를 쳤을 때에 그를 침략적인 ‘구(寇)’라 하였다.
[주D-144]이변(李昪) : 당의 말년 사람으로서, 처음에는 오왕(吳王) 양행밀(楊行密)에게 양자로 들었다가, 뒤에는 후임 오왕이 된 서온(徐溫)에게 양자들어, 서지고(徐知誥)의 이름으로 뒷날 남당(南唐)의 임금이 되었다.
[주D-145]문황(文皇) : 당 문종(唐文宗). 이변이 남당을 창건하고 당조(唐朝)를 정통으로 계승한다 하여 성명을 변하였다.
[주D-146]막길렬(邈佶烈) : 후당(後唐) 명종(明宗) 이사원(李嗣源)의 별칭. 이극용(李克用)의 양자.
[주D-147]주사(朱邪) : 후당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勗)의 본성(本姓).
[주D-148]송실영(宋實穎) : 청 세조(淸世祖) 때의 학자. 자는 기정(旣庭).
[주D-149]진(晉) : 당의 말년에 이극용(李克用)을 봉했던 나라 이름.
[주D-150]제후들 …… 소탕했은즉 : 후당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勗)이 양(梁)을 정복하였다.
[주D-151]목침십자열(木枕十字裂) : 목침이 십(十) 자로 쪼개어진다는 뜻.
[주D-152]알아듣는군 : 혹정은 물론 한음으로 읊었겠고, 연암도 역시 한음으로 읊었으므로, 혹정이 알아들음을 칭찬하였다.
[주D-153]공(公)이 …… 뜻입니다 : 전국 때 제 소공(齊昭公)이 왕의 자리를 쫓겨나와 건후에 있을 때에도 연호는 그대로 썼다. 《춘추(春秋)》에 나오는 고사.
[주D-154]모신(毛甡) : 모기령(毛奇齡). 신은 본명(本名). 본자는 초청(初晴). 고친 자는 대가(大可).
[주D-155]포염라(包閻羅) : 송 인종(宋仁宗)의 공정한 신하 포증(包拯)이 죽어서 염라왕이 되었다 한다.
[주D-156]포공(包公)은 …… 않았습니다 : 이상의 서술은 실제로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가정적으로 소설체로 써서 모기령을 조롱한 말들이었다.
[주D-157]모신은 …… 자인(自認)했습니다 : 공자가 일찍이, “나를 알아 줄 자도 《춘추》요, 나를 죄줄 자도 《춘추》라.” 한 말씀을 암암리에 빌렸다.
[주D-158]보망(補亡) : 주자가 《대학(大學)》 중에 한 장이 누락되었다 해서, 스스로 한 장을 지어서 보충하였다.
[주D-159]소서(小序) : 복상(卜商)이 지었다는 《시경(詩經)》의 해제인데, 주자가 모두 깎아 버렸다.
[주D-160]참동계(參同契) : 위백양(魏伯陽)이 지은 도가서(道家書)인데, 주자가 자기의 별호와 성명을 고쳐서 공동도사(空同道士) 추기(鄒祈)라 하여 고이(考異)를 지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