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熱河日記) - 황교문답(黃敎問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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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황교문답(黃敎問答)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황교문답(黃敎問答)
1. 황교문답서(黃敎問答序)
2. 황교문답(黃敎問答)
3. 황교문답후지(黃敎問答後識)
4. 중존평어(仲存評語)
황교문답서(黃敎問答序)
남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흔히들,
“나는 용하게도 적국(敵國)의 비밀을 엿본다.”
하기도 하려니와, 또는,
“난 남의 나라 풍속을 잘 살피지.”
하고 과장한다. 나는 그들의 말을 반드시 믿지 않는다. 왜냐 하면, 남의 나라에 들어간 자가 어찌 길에 다니는 사람을 잡고 갑자기 그 나라의 정세를 캐어 물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첫째 불가한 일이요. 그들과 말씨가 서로 같지 않아서 주고 받는 사이에 서로 의견이 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둘째 불가한 일이요. 안팎의 지역적인 차이가 있어서 저절로 형적(形迹)이 드러날 혐의가 있으니, 이것이 셋째의 불가한 일이요. 말이 얕으면 그 나라 실정을 얻지 못할 것이고 말이 깊으면 기휘(忌諱)에 저촉되기 쉬우니, 이것이 넷째로 불가한 일이요. 묻지 않을 것을 물으면 정탐을 하는 듯한 자취가 생길 것이니, 이것이 다섯째로 불가한 일이요. 그 지위에 있지 않거든 그 정치를 꾀하지 않는 것이 그 나라에 사는 사람의 도리일 것이니, 하물며 다른 나라일까 보냐. 그 나라의 크게 금하는 것을 물어본 연후에야 감히 들어가는 것은 남의 나라에 들어가 사는 도리라 하겠거늘, 하물며 대국(大國)일까 보냐. 이것이 여섯째로 불가한 일이요. 더욱이 그 나라 장수나 재상들의 어질고 그른 것과 풍속의 맑고 흐린 것과, 만주와 중국의 등용되고 소외되는 것과 명(明)의 옛 실정은 더구나 물어서는 안 될 것이니, 이것은 비단 물어서 안 될 일일 뿐만 아니라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다. 저들도 또한 마땅히 대답할 것이 아니요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다. 또 돈이나 곡식과 군사와 산천의 형승(形勝)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심한 관계가 없을 것 같지만 이것도 마땅히 말할 일이 못 되는 것이며, 저들도 또한 이를 의심하고 괴상히 여길 것이니, 그 까닭인즉 돈과 곡식은 국가의 허실에 관계되는 일이요, 산천의 형승은 관액(關阨)과 요새(要塞)에 관계되므로 이것을 문답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다. 저 옛날 사람들은 항상 언어를 문답하는 사이에 실정을 얻어서 교량과 시간과 또는 관리들의 등급 같은 것을 점쳐서 안 일도 있었다. 시가(詩歌)를 베풀고 음악을 들은 뒤에 시장 물가의 높고 낮은 것을 징험해 알아 맞힌 일도 있었다. 이미 옛 사람만 한 지식과 재주도 없으면서 한갓 조그만 글이나 짤막한 말로써 그 나라 실정을 얻는다는 것은 그 또한 어려운 일이거늘, 하물며 사해(四海)가 광대하여 끝간 데를 못 보는 데일까보냐. 내가 열하에 이르러 잠자코 천하의 형세를 살펴 본 것이 다섯 가지가 있었다. 황제는 해마다 열하에 주필(駐驆)하게 되는데 열하란 장성(長城) 밖 궁벽한 땅이라, 천자는 무엇이 부족해서 이런 변두리의 거친 벽지에 와서 거처하는 것일까. 이름은 ‘피서(避暑)’라 하였지만 그 실상인즉 천자가 몸소 나가서 변방을 방비한 것이니, 이러고 본즉 몽고가 강했던 것을 가히 알 수 있겠다. 황제는 서번(西番)의 승왕(僧王)을 맞아다가 스승으로 삼아 황금으로 전각을 지어 그를 살게 하고 있으니, 천자는 또 무엇이 부족해서 이러한 떳떳하지 못한 참람된 예절을 쓰는 것일까. 명목은 ‘스승’으로 대접하지만 그 실상인즉 전각 속에 가두어 두고 하루라도 세상이 무사할 것을 기원하고 있는 것이니, 이러고 보면 서번이 몽고보다도 더 강한 것을 알 수 있는 터로, 이 두 가지 일은 황제의 마음이 이미 괴롭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람들의 문자를 보면 비록 그것이 심상(尋常)한 두어 줄 편지라 하더라도, 반드시 역대 황제들의 공덕(功德)을 늘어놓고 당세의 은택(恩澤)에 감격한다는 것은 모두 한인(漢人)들의 글이다. 대개 스스로 중국의 유민(遺民)으로서 항상 걱정을 품고 혐의하는 경계를 이기지 못하여, 입만 열면 칭송(稱頌)을 하고 붓만 들면 아첨을 함으로써 자신들이 당세에서 벗어나 있는 듯이 생각한다. 이것을 보면 한인들의 마음도 이미 괴롭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사람과 필담(筆譚)을 할 때는 비록 심상한 수작을 한 것이라도 말을 마친 뒤에는 곧 불살라 버리고 쪽지 하나도 남겨 두지 않는다. 이것은 비단 한인만이 이런 것이 아니라 만인(滿人)들은 더욱 심하다. 만인들은 그 직위가 모두 황제와 근밀(近密)한 데 있는 터이므로, 법령이 엄하고 가혹한 것을 더욱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고 보니 비단 한인들의 마음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천하를 법으로 금하고 있는 자의 마음도 괴로울 것이다. 시장에서 파는 벼루 한 개의 값이 백 냥을 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슬프다. 천하가 일이 있으면 주옥(珠玉)이 굴러다녀도 거두어들이지 않지만 해내(海內)가 승평한 때는 기왓장이나 벽돌이 땅에 묻혀 있어도 반드시 캐내는 것이다. 부귀한 자들은 심심풀이로 취하여 보고, 빈천한 자들은 눈을 뒤집고서 거두어 간직하며, 취미로 감상하는 자는 우연히 한 번 만져만 보고, 우둔한 자는 발이 부르트도록 쏘다니며 구하여 밭 갈다가 얻은 것, 낚시질하다가 건진 것, 송장 냄새나는 무덤 속에서 파낸 것까지도 천하의 보물로 여기고 있으니, 천하의 보물을 보배롭게 감상하는 마음도 또한 괴롭다 할 것이다. 이러고 보니 한 조각 돌로 족히 천하의 대세를 알아맞힐 수 있을 것이어늘 하물며 천하의 괴로운 심정이 돌보다 더 큰 것이 있음에랴. 이제 타고 남은 반선(班禪)에 관계되는 이야기를 기록하여 《황교문답(黃敎問答)》이라 한다.
[주C-001]황교문답서(黃敎問答序) : 여러 본에 모두들 이 소제(小題)가 없으나 여기서는 ‘주설루본’에 의하여 넣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황교문답(黃敎問答)
내가 ‘찰십륜포(札什倫布)’로부터 먼저 숙소로 돌아오니, 지정(志亭)은 자는 학성(郝成)이 요, 호는 장성(長城)이다. 나를 맞으면서,
“선생이 잠깐 보고 온 활불(活佛)의 얼굴 모양이 어떻습디까.”
하고 묻는다. 나는,
“공은 그를 보지 못하셨나요.”
하였더니, 지정은,
“활불은 깊고도 장엄한 데 거처해서 사람마다 볼 수가 없답니다. 더구나 신통한 법술(法術)이 있어 사람의 장부를 들여다 본답니다. 보배로운 거울을 하나 걸어 놓았는데 사람이 간음한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푸른 빛으로 비치고, 사람이 탐심이나 적심을 품으면 반드시 검은 빛으로 비치며, 사람이 위험하고 불측한 마음을 지니면 반드시 흰 빛으로 비치고, 오직 충효(忠孝)스러운 마음과 일심(一心)으로 부처를 공경하는 사람이 오면, 반드시 붉은 빛 아지랑이에 누른 빛을 띄워 경운(慶雲)과 같이 거울 바닥에 서리게 되니, 이 다섯 색 거울이야말로 가히 두려운 것이지요.”
한다. 나는,
“이것은 진 시황의 조담경(照膽鏡)을 본떠서 이야기를 신통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담경은 역시 정사(正史)에서 전하는 것이 아니고 보니, 어찌 족히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지정은,
“벽 사이에 그 거울이 없던가요.”
하고 묻는다. 나는 ‘오색경이 가히 두렵다.’라는 대목에 권주를 치면서,
“공이 푸르고 검고 흰 세 가지 마음이 스스로 없고 보면 무엇 때문에 이 거울이 그렇게 두려울까요.”
하였더니, 지정은,
“《법화(法華)》ㆍ《능엄(楞嚴)》 같은 모든 불경의 게(偈)들은 모두 사람을 위협하여 그 책을 존경하지 않으면 곧 화를 받는다고 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가공하도록 하여 착한 길로 돌아가게 하는 것도, 대개 이 거울이나 마찬가지 일이지요. 거울은 글자를 쓰지 않은 경전(經典)이요, 경전은 또 구리로 만들지 않은 거울일 것입니다. 내가 비록 열흘 동안 담식(淡食)을 하고 열흘 동안 목욕을 했더라도, 혹시 간(肝) 구석이나 폐(肺) 틈에 터럭만 한 흠이라도 있다면 어찌 세 가지 빛깔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바로 글쓴 종이를 찢어서 불 속에 던진다. 그는 다시 말하기를,
“과연 진실로 신통하답니다. 활불에게 절을 하는 자가 모자를 벗고 머리를 조아리면, 활불이 친히 손으로 이마를 만지면서 웃음을 머금으면 큰 복을 받게 되는 것이요, 만일 웃지 않으면 받는 복이 그리 크지 못하고, 또 활불이 눈을 감을 때는 절하던 사람은 겁이 나서 향불을 피우고 참회하면서 뼈저리게 회개하면, 자연히 죄악은 소멸되고 다시는 죄를 짓지도 않는답니다. 이것은 활불이 말로써 교훈하지 않고, 손 한 번 펴는 사이에 공과(功果)가 이 같은 것입니다. 화석(和碩) 친왕(親王)과 화석 액부(額駙)는 매일 아침 활불 앞에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지만, 외인들이나 보통 관품(官品)들은 이런 사실을 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한다. 내가 그 내력을 물었더니, 지정은,
“건륭 40년 경에, 서방(西方) 사람들이 자자하게 말하기를, 활불 법왕이 세상에 나타났다고 떠들었고, 혹은 이 법왕은 능히 사십세(四十世) 전신(前身)의 일까지도 안다고 했는데, 지금의 몽고 48부가 강하다 하지만 가장 서번을 무서워했고, 서번의 여러 나라들은 활불을 가장 무서워 한답니다. 활불이란 곧 장리대보법왕(藏理大寶法王)입니다. 명(明)의 양삼보(楊三寶)와 중 지광(智光)ㆍ오향(吾鄕)ㆍ하객(霞客) 등 여러 사람들은 서역(西域)의 여러 불교국을 두루 다닌 일이 있었는데, 오사장(烏斯藏)은 중국으로부터 1만여 리나 떨어져 있고, 이 나라에는 대보법왕(大寶法王)과 소보법왕(小寶法王)이 있는데, 서로 번갈아 후생(後生)에 환생하여 모두 도술이 있고 나면서부터 신성하니, 지금의 활불은 곧 옛날 원(元)의 시대의 서천(西天) 지방 부처의 아들이요, 대원 황제(大元皇帝)의 스승의 후신이랍니다. 지난해에, 내각(內閣)의 영공(永公 영귀(永貴))은 여섯 황자(皇子)를 배종(陪從)하여 불교의 예식을 갖추고 가서 활불을 맞아 왔는데, 활불은 이미 황제의 귀한 신하들이 자기를 맞으러 올 것과 북경을 떠날 날짜와 귀신(貴臣)의 이름이 아무개라는 것까지도 알았다 합니다. 이름은 영귀(永貴)요, 현재 내각의 학사(學士)로 총애받는 신하라 한다. 거처하는 곳은 모두 황금으로 지은 집이요, 그 사치하고 화려한 품은 중국보다도 굉장하더랍니다. 도중에서 신통한 일이 많이 있었고, 거쳐온 여러 나라의 번왕(番王)들은 심지어 몸뚱이를 불사르고 머리를 태우며 손가락을 끊고 살을 베는 자까지 있었답니다. 또 어리석은 백성 중에 불효한 자가 활불을 한번 보더니 갑자기 효심이 생겨, 아비가 괴상한 병에 걸리자 칼로 자기 왼쪽 옆구리를 베고 간(肝)의 한쪽 끝을 잘라서 구워 먹이니, 아비의 병이 즉시 낫고, 불효자의 왼쪽 옆구리도 금방 나아서 금시에 효자로 변하매, 나라로부터 표창을 받고, 고향에서는 정문(旌門)을 세우며, 몸을 부역에서 면제하였답니다. 또 산서(山西)에 어떤 어리석은 자는 형세는 거부(巨富)이나 평생에 인색하여 한 푼 돈도 쓰지 않더니, 길에서 활불을 쳐다보고는 곧바로 자비심이 생겨 드디어 10만 금을 녹여 일좌(一座) 부도(浮圖)를 세웠다 하니, 이것이 활불의 공덕 중의 대략입니다. 물을 만나도 다리나 배가 필요 없고, 맨발로 물을 밟아도 물결이 발목을 넘지 않았답니다. 강 건너 저쪽 언덕에 큰 범 한 마리가 길에 엎드려 꼬리를 흔들고 있었는데, 황자(皇子)가 화살을 빼어 쏘려 하니, 활불은 이를 말리면서, 수레에서 내려 범을 쓰다듬어 주자, 범은 그의 옷자락을 물고 무슨 호소할 일이 있는 것처럼 하며 남쪽으로 가매 활불도 따라가 보니, 큰 바위 틈에 굴이 있는데 범 한 마리가 바야흐로 젖을 먹이고 있고, 큰 뱀 두 마리가 범의 굴을 둘러싸고 범의 새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습니다. 뱀의 한 마리는 젖먹이는 범과 겨루고, 다른 한 마리 뱀은 숫범과 겨루고 있었으나 범의 어금니로도 이것을 막을 도리가 없어 슬피 울다가 기진해 버렸습니다. 이때 활불은 지팡이로 가리키면서 주문(呪文)을 외우니, 두 마리의 뱀은 저절로 돌에 부딪쳐 죽었는데, 그 대가리 속에서 밤중에도 빛이 나는 진주가 한 개씩 나오자, 이 구슬을 한 개는 황자에게 바치고, 한 개는 학사(學士)에게 바쳤습니다. 이런 뒤에, 범은 열흘 동안이나 활불을 모시고 따라가면서 심히 공손하고 순하니, 황자는 범을 궤 속에 잡아 넣어 같이 데리고 가고 싶었으나, 활불은 이것을 불가하다고 하여 중지시키고, 드디어 범을 경계하여 말하는 듯하니, 범은 머리를 조아리면서 가버렸다 하니, 이는 그 법술의 신통한 것입니다. 두 개의 구슬은 임금의 행차에 쓰는 물건으로 바쳤는데, 홍수나 가뭄 및 역질에는 신비스러운 물건이 되어 영험이 많다 합니다.”
한다. 나는 또,
“활불의 전생(前生) 일이란 비유하면, 느티나무 잎에 붙은 푸른 벌레가 꿀집을 뚫고 들어가 벌이 되고, 큰 송충이가 표범 가죽 같은 껍질을 벗고 범 나비가 되며, 누에가 나방이 되고, 굼벵이가 매미가 되며, 비둘기가 매가 되고, 매가 꿩이 되며, 꿩이 조개가 되고, 닭이 뱀이 되며, 뱀은 거북이 되는 등 변화되지 않는 것이 없이 모두 각성(覺性)이 있어 이렇게 변화된 몸을 가지고 능히 전생에 가졌던 형태를 안단 말인가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장주(莊周)가 호접(蝴蝶)의 꿈을 깬 것처럼 서로 판이하여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인가요. 만일 과연 활불처럼 전생에는 이 몸이 아무데 누구의 아들이요, 금생(今生)에는 이 몸이 다시 아무데 누구의 아들이 되었다면 전생의 부모와 금생의 아비 어미가 오늘도 아무런 탈도 없이 한결같이 자애(慈愛)롭게 역력히 다 알아보고, 저마다 아무개냐고 부를 터이니 이러고서야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은혜롭게 여길 것이며, 무엇이 슬프고 무엇이 즐거울 것입니까.”
했더니, 지정은 홀연 두어 줄기 눈물을 흘리면서 ‘무엇이 슬프고 무엇이 즐거울 것인가.’라는 구절에 권주를 쳤다.
이때 홀연 문 여는 소리가 나니, 지정은 바쁘게 글 쓰던 종이를 비벼서 손에 쥔다. 문이 열리고 보니, 같은 숙소에 있는 왕민호(王民皥)였고, 뒤따라 들어오는 이는 역시 왕군(王君)과 같이 있는 추사시(鄒舍是)이다. 이들은 모두 거인(擧人)으로서 객지인 장성 밖에서 노는 사람들이다. 지난해에, 열하에 태학(太學)을 신설하였으니 북경 제도를 본떠서 세웠다. 이때 두 사람은 그 태학에서 머무르며 공부하는 중이었는데 나를 찾기 위해서 온 것이다. 지정이 두 손님을 향하여 무엇인가 글을 읽듯이 설명을 하는데, 두 손님은 한편으로 지정의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책상 위에 권주 쳐놓은 데를 가리키는 것이 필경 내가 한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왕 거인(王擧人)은 내 성명과 자와 호를 써서 추 거인에게 보였는데, 왕은 벌써 숙면(宿面)이요, 추는 처음 보기 때문이다.
추생(鄒生)이,
“귀국은 불교가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나요.”
하고 묻기에, 나는,
“소량(蕭梁 대통(大通 527~529) 연간에 중 아도(阿道)가 신라(新羅)에 처음 들어왔지요.”
했더니, 그는,
“귀국의 사대부들은 세 가지 교 중에, 어느 교를 가장 숭상합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사실 신라나 고려 시대에는 사족으로서 비록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도 서교(西敎 불교)를 공부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우리나라(이조(李朝))가 나라를 세운 지 4백 년에 사족으로서는 비록 어리석은 자라도 공자의 글을 외우고 익힐 뿐입니다. 국내의 명산(名山)에는 비록 전대에 세운 명찰(名刹)들이 있으나, 이미 모두 황폐되었고, 절에 사는 중들이란 대체로 천한 무뢰배(無賴輩)로서 종이나 뜨고, 신이나 삼아서 생업을 삼고 있으나, 명목은 비록 중이지만 눈으로 불경을 볼 줄도 모르니 누가 배척하기를 기다릴 사이 없이 그 교는 스스로 끊어질 것입니다. 또 국중에 도교(道敎)란 것이 없으므로 역시 도관(道觀)도 없는 까닭에 소위 이단(異端)의 교는 금절할 것을 기다릴 사이 없이 저절로 국중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했더니, 추생은,
“가위 천하 중의 낙국(樂國)입니다그려. 이단의 폐해는 성인들이 이미 우려한 터로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다는 말까지 있어, 이것을 듣는 자로 하여금 반드시 지나친 말이라고 여기게 하였으나, 요즈음 산중에 왕왕 사람을 잡아먹는 도사(道士)가 있어 어린애를 기르기는 더욱 어려우니, 순양(純陽) 동자(童子)가 제일 좋다고 해서 이를 쪄서 먹는답니다. 심지어 밤에는 궤 속에 감추어 두어도 오히려 잃어버릴까 걱정이 되어서 이 지방의 관청에서는 이것을 적발하여 붙들고자 도관을 불살라 허물면, 다시 이름을 중의 명목에 붙여 두고 있든가 그렇지 않으면 몸을 절간에 숨기고 있답니다. 심지어 은밀한 방 속에서 하는 비술(秘術)이라든지, 더러운 병에 쓰는 기이한 방문들은 모두 가난한 도사가 만든 것으로 사람들은 그들을 많이 따라다니며, 또는 몰래 이 술법을 배우고 있으니, 해괴하여 무엇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중국의 선(禪)과 석(釋)은 그 본지(本旨)에 어그러져 앙루(仰漏)가 말한 바 소위 이름은 중인데, 실상은 도교라는 말이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한다.
앙루란 이는 몽고 사람 경순미(敬旬彌)의 자인데, 나와 더불어 이야기할 때에 중 이름이 도사 노릇을 한다는 말을 하였기에 나는 이를 지정에게 하였더니 지금 한 말은 지정이 아마 외워서 추생에게 말한 모양이다. 추생은 또,
“귀국에서도 옛날에는 역시 신승(神僧)이 있었나요. 그 이름을 듣고자 합니다.”
한다. 내가,
“우리나라가 비록 바다 한쪽에 있으나 풍속은 언제나 유교를 숭상하여 예나 지금이나 큰 선비나 학자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선생의 묻는 것은 이것이 아니고 도리어 신승 이야기고보니, 우리나라 풍속에는 이단의 학문을 숭상하지 않아 신승이 없는지라, 진실로 대답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였더니, 왕군(王君)이 말하기를,
“이단 가운데도 또한 이단이 있어 도리어 그 도를 해치는 일이 있지요. 이제 우리 친구 추(鄒)는 귀국의 유교와 불교의 다른 점을 알고자 해서 한 말이지요.”
하니, 추생도,
“그렇습니다.”
한다. 내가,
“비록 중의 이름을 듣는다 해도 어찌 유교와 불교의 다른 점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추생은,
“유학하는 사람 중에도 도학(道學)과 이학(理學)의 이름이 있는데 귀국에서도 유학자 중에 또한 이런 분간이 있나요.”
한다. 나는,
“성문(聖門)의 설교(設敎)에는 오직 네 가지 과목을 두어 이것을 일관(一貫)한 도는 다만 한 가지 이치일 것이요, 이것을 배우고 이것을 묻는 것이 바로 학문일 것입니다. 어찌 유문(儒門)에 함부로 딴 과목을 두어 이런 두 가지 명목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추생은,
“그렇습니다. 선생의 말씀이 지극히 옳습니다. 공자의 문도(門徒) 70명이 그들의 스승에게 묻는 것은 인(仁)이나 효(孝)에 지나지 않는데, 후세에 와서는 그렇지 않아서 제자된 자가 맨처음 책을 펴 놓고서는 우선 이기(理氣)부터 묻습니다. 그러면 소위 선생은 옷깃을 여미고 자리에 올라 앉으면서 문득 말하는 것이 성명(性命)입니다. 요즈음 학자들의 학문은 하늘과 사람을 꿰뚫고 있지만 실지로는 한 고을을 다스리지도 못하고, 그들의 이학이란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현상을 살피면서도(《중용(中庸)》에 나오는 말) 한 가지 일도 판단을 못합니다. 이러한 학문을 하는 자를 소위 ‘이학선생(理學先生)’이라 합니다. 시골의 사숙(私塾)에서는 천품과 성질이 고루하고 행동이 못나고 괴이한 자라도 약간 경전(經傳)을 배우고 조금 훈고(訓詁)를 익히면 자리를 베풀고 강론을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야말로 썩어빠진 것을 맛보고는 숙속(菽粟)이라 하고 누더기를 기워 모은 것을 구갈(裘褐)이라 하여, 자막(子莫)의 집중(執中)을 오히려 정도(正道)를 지킨다 하고, 호광(胡廣)의 처세하는 것을 스스로 중용(中庸)이라 하니, 이러한 학문을 하는 자를 소위 ‘도학군자(道學君子)’라 한답니다. 이것은 오히려 족히 말할 것이 못 되지만 옛날 이단은 묵(墨)을 버리고 유로 돌아오기도 하고, 유로부터 양(楊)의 도로 붙는 자도 있어, 서로 시새우고 갈라지며, 서로 배반하고 저마다 딴 속셈을 가졌습니다. 오늘의 유학자들을 본다면 죽기까지 제 고장을 떠나지도 않고 한번 지반을 잡은 뒤에는 더욱 육경(六經)의 공부를 쌓아서 자기의 지위를 튼튼히 하고, 때로는 여러 가지 학설을 뒤바꾸어 새로운 기치를 올려, 반은 주자요, 반은 육상산(陸象山)으로 이들로 포주(逋主)를 삼아서, 머리를 감추기도 하고 머리를 들기도 하여, 물에 빠진 두어(蠹魚)가 여우나 쥐로 화한즉, 고증학(攷證學)을 가지고 성이나 사직단 같은 것을 근거를 삼고 뛰어난 인재들을 억눌러 바보로 만드는 동시에, 훈고학(訓詁學)으로써 재갈을 물립니다. 때로 용기를 돋구어 싸우다가도 상대방의 강력한 공격을 만나서 형세가 불리하면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는 것이 요즈음 세상의 유학자들입니다. 그야말로 참으로 무섭고 두렵다 할 것이니, 저는 평생에 유학을 배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만일 능히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열어 이단의 학문을 제창하는 자가 있다면, 저는 장차 불원 천리하고 양식을 짊어지고 쫓아가 스승으로 삼겠다고 하였는데, 이제 선생의 의론을 들으니 확실히 옳은 것을 지켜 소인의 마음으로 하여금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슬프게 합니다.”
한다. 추생의 용모를 보니 의젓하게 생겼으며 그의 언사는 방탕해서 칭도하는 것도 같고 조롱하는 것도 같으며, 변환하고 속이는 듯하여 모든 사건에 나를 업신여기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이제 선생의 이단을 물리치는 의론을 들으니 흠복함을 이기지 못하오나 도리어 이렇게 괴상한 말을 하시는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저는 바다 한쪽에서 나서, 듣고 본 것이 적고 학식이 보잘것없으니, 대방가(大方家)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만, 잘하는 것을 칭도하고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군자의 덕의(德義)로 정당한 도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족하(足下 상대방을 높인 말)는 성묘(聖廟)에 몸을 붙이고 있으면서 이단을 배우고 싶다 하니, 그 말씀이 만일 진정이라면 상국(上國)이 먼저 본을 보일 처지에 있으면서 이 같은 이야기가 나올 것은 뜻하지 않은 일이요, 또 만일 그 말씀이 거짓이라면 외국에서 온 한 부유(腐儒)를 조롱하는 것이니, 먼 데서 온 사람을 대접하는 덕의가 아닐까 두렵습니다. 부끄러워서 나는 물러가겠습니다.”
하였더니, 추생은 사과하여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마침 심중에 격한 일이 있어 말머리가 왔다갔다 하다가,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제 선생께서 이처럼 저를 죄주시니 저는 감히 오래 족하를 모시지 못하겠습니다.”
하고는, 추생이 의자에서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니, 이것은 사과를 하는 뜻이다. 왕군이,
“저의 친구는 순실한 사람으로 그의 뜻은 본래 그렇지 않사온데, 선생이 잘못 의심한 것이니, 그가 이단을 배우고 싶다고 한 말은 구이(九夷)에 살고 싶다(《논어》에 나오는 말)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하고, 서로들 크게 웃기에 나도 따라서 웃었으나 심사가 끝내 개운하지는 못했고, 구이의 땅에 가서 살고 싶다는 비유가 더욱이 나로 하여금 한스럽게 하였다. 추생은 다시,
“선생의 이번 길은 오로지 서불(西佛)을 배망(拜望)하기 위한 것인가요, 또는 황제의 성탄을 축하하기 위한 것인가요.”
하고 묻는데, 그 동안 지정은 잠깐 문밖에 나갔었다. 나는,
“오로지 황제의 칠순(七旬) 경절(慶節)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지요. 황제의 조지(詔旨)가 없으면 어떻게 열하까지 왔겠습니까. 어제 활불을 본 것도 역시 황제의 분부입니다.”
하였다. 왕군이,
“박 선생은 사신이 아니고 그 족형(族兄)되는 어른을 따라 구경차 오신 길이랍니다.”
하니, 추생은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다가,
“선생은 이번 길에 담인(噉人)이 무섭지 않습디까.”
한다. 나는,
“담인이 무엇인가요.”
하고 물으니, 추생은,
“양련진가(楊璉眞加)가 다시 세상에 태어났답니다.”
한다. 이때 왕군은 얼굴빛을 변하여 말다툼을 하려는 모습인데, 나는 그가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는 못하였지만, 그 사람의 기색이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왕군이 추생을 책망하는 것 같았다. 이럴 즈음에 지정이 돌아와 자리에 앉아 글쓴 종이를 보자, 급히 손으로 찢어 입에 넣고 씹으면서 눈으로 추생을 보며 얼마 동안 말이 없다가 내가 한눈 파는 틈을 타서 입으로 나를 가리키면서 추생에게 눈을 주다가, 우연히 내 눈과 마주치자 몹시 부끄러운 빛을 보이더니, 이내 차를 청하면서,
“귀국 말은 하소(何宵 어느날 밤)에 낳았는지요.”
하고 묻기에, 내가,
“말 낳는 시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고 대답하매 여러 사람들은 모두 크게 웃었다. 지정이,
“소소(宵小)라는 소(宵) 자로 써서 음이 같으면 쓰기를 같이 합니다.”
하니, 대개 그들은 음이 같으면 같은 뜻으로 쓰곤 한다. 나는,
“나라가 작은 까닭에 먹이는 짐승들도 따라서 작아집니다.”
했다. 나는 반선의 내력을 자세히 알고 싶었지만 추생의 말에 무슨 곡절이 있기에 저 두 사람이 저렇게 기휘하는가 싶어 감히 함부로 묻지 못했다. 추생은 차를 마신 후에 바로 돌아가고, 지정 역시 다른 일이 있었고 나도 또한 일어나니, 왕군도 내 뒤를 따라 나왔다.
어느 날 내가 형산(亨山)을 찾았더니, 그는 대궐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형산의 이름은 가전(嘉銓)이요, 성은 윤씨(尹氏)인데, 역시 태학에서 묵고 있었다. 벼슬은 대리(大理)요, 나이는 지금 일흔으로서 올해 봄에 치사(致仕)하였다. 다시 지정의 처소에 들렀으나 빈 방에 아무도 없으므로 바로 발길을 돌려 나오려 하는데, 지정이 출타했다가 때마침 돌아오다 나를 보고는 매우 반가워하면서 내 손을 잡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모자를 벗어 벽에 걸고 나서 차를 청하더니,
“추 거인(鄒擧人)은 광사(狂士)이니 선생은 절대로 다시 만나지 마시오.”
한다. 나는,
“무엇을 가리켜 광사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그의 뱃속에는 강개(慷慨)한 기운이 꽉 차 있어서 사람들과 더불어 토론을 할 때에는 좀처럼 지려고 하지 않고 욕질하기를 좋아합니다. 나는 혹시 노야(老爺)께서 그 사람의 성질도 모르고 주먹으로 때리지나 않는가 걱정했습니다.”
한다. 나는 웃으면서,
“그 미친 짓은 따르지 못하겠군요.”
했더니, 지정은,
“저 같은 사람으로는 그 어리석음을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는 서로 크게 웃었다. 나는,
“활불이 양련(楊璉)의 후신이라는 것을 장군(將軍)은 이제 무슨 까닭으로 심히 꺼려하시나요.”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저 추생 미치광이가 나를 끌어다가 남을 욕하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짐짓,
“양련이란 것이 무슨 욕입니까.”
하고 물으니, 지정은 좋지 않은 표정으로,
“차마 말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습니다.”
한다. 나는,
“왕팔(王八)이나 마박륙(馬泊六) 같은 몹시 나쁜 것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손을 흔들면서,
“아닙니다. 양련이란 원래 서번(西番) 중으로, 원(元) 때에 중국에 들어와 송조(宋朝)의 능침(陵寢)들을 파헤치기를 병화(兵火)보다 더 지독하게 하여, 보물과 구슬을 모은 것이 산더미 같았습니다. 그는 비술(秘術)이 있고, 산을 쪼개는 보검(寶劍)을 가지고 있는데, 주문을 외우면서 한번 치면 비록 남산(南山)에 석곽(石槨)이 아무리 깊이 묻혀 있더라도 즉시 열리지 않는 것이 없어, 금으로 만든 오리나 옥으로 만든 물고기 같은 것이 땅을 차면 저절로 뛰어 나오고, 구슬로 짠 옷과 옥 궤짝이 낭자하게 벌려 있으며, 심지어 시체를 달아매고 수은(水銀)을 짜내며 시체의 뺨을 쳐가며 진주를 찾는답니다. 강남(江南) 사람들은 서로 욕하기를, 밥을 지어 곰보 양련에게 바칠 놈이라고 하는데, 이제 활불은 서번 사람이므로 그를 빌려다가 한번 욕한 것이요, 양련의 후신이라서 한 말이 아닙니다.”
한다. 나는,
“그는 무슨 까닭에 그토록 활불을 욕할까요.”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그는 유학(儒學)을 업으로 삼는 고로 활불에게는 불복하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그가 만일 유학이 본업이라면, 저번에는 어째서 또 유학자를 욕했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그는 미치광인지라 하늘이나 우레도 무서워하지 않고 왕법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성인도 욕하고 부처도 욕하여, 저 하고 싶은 대로 실컷 꾸짖어야만 정수리까지 차 있는 객기가 풀리는 모양입니다.”
하고는, 지정은 다시,
“귀국의 침묘(寢墓) 제도는 어떠합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비록 옛날 예법을 모방하지만, 나라 풍속이 검소한 것을 숭상하여 보옥을 순장하지 않고 공경과 귀인으로부터 아래로 필부(匹夫)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상장(喪葬)의 제도는 모두 주자의 가례(家禮)를 쓰고 있습니다. 또 땅이 궁벽한 한쪽에 있고 보니 병화(兵禍)도 자주 일어나지 않아 저절로 그러한 근심은 없습니다.”
했다. 지정은 감탄하면서,
“즐거운 나라 즐거운 땅에 즐겁게 나서 즐겁게 죽는 셈입니다. 주공(周公)이 예법을 만든 것은, 만세에 도적질할 마음을 열어 준 것이지요. 필부의 시체가 무슨 죄리오. 구슬을 가진 것이 죄이지요. 하물며 제왕가(帝王家)의 일이겠습니까. 천하를 위하여 그 어버이에게 검소하게 하지 않는 것인데(《맹자》에 나오는 말) 천고 제왕의 말을 화로 삼으니, 이러므로써 한번 상난(喪亂)을 겪으면 파헤치지 않는 능침이 없어 경사(京師)의 유리창 같은 데서 파는 고완품(古玩品)은 모두 역대의 능침에서 나온 물건들이랍니다. 파묻자마자 바로 파헤치기도 하고 묻힌 세월이 오랠수록 그 파헤치는 도수가 잦았으며, 이런 데서 파낸 물건일수록 더욱 보기(寶器)라고 쳐주어, 그 중에는 열 번이나 땅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있답니다. 이제 와서는 비록 장석지(張釋之 한(漢)의 법관)가 삽을 쥐고, 유향(劉向)이 삼태기를 잡아서 양후(楊侯 후한 때의 명신 양진(楊震))를 장사지낸다 하더라도 도적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무덤 속에서 나온 기완(器玩)이란 흉하고 더럽고 냄새가 나서 상서롭지 못한 데가 많을 터인데, 그것을 어찌 보물로 칩니까.”
하고 물으니, 지정은,
“참 그렇습니다. 은(殷)의 대야와 주(周)의 술잔은 그 해독이 만고에 내려와 후세의 일 좋아하는 자들이, 글 읽는 방이나 그림 그리는 마루나 위신을 높이는 방 치장에 이렇게 상서롭지 못한 그릇 아니고는 벌여 놓을 줄 모른답니다. 감상가들은 역력히 이것을 알아내는 것으로 박식하다 하였고, 수장가들은 부지런히 모아들이는 것으로 취미를 삼습니다.”
한다. 나는,
“장군 댁에도 역시 볼 만한 고기(古器)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저는 무인(武人)이라 능히 이런 것을 사 모을 수도 없고 대대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묵은 물건도 있을 수 없으나 다만 손바닥만 한 옛날 벼루 하나를 가졌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는 동파(東坡)가 손수 만든 것이라 하며 원장(元章 송(宋) 미불(米芾)의 자)의 낙관이 찍혀 있습니다. 또 원풍(元豐 송(宋)의 연호) 연간에 구리로 만든 푸른 금잔이 있습니다.”
한다. 내가 한번 구경하기를 청하자 지정은,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지금은 객지에 와서 묵고 있는 처지인즉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한다. 나는,
“제가 듣기에는 강남(江南)에서 나는 서화와 기완은 교장(巧匠)들이 위조한 것이 많다는데 사실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그렇습니다. 우리 집에 있는 그릇 두 개도 창문(閶門 항주(杭州)에 있다)에서 아무렇게나 만든 것이 아니라고 어찌 보증하겠습니까. 저는 본래 감식이 깊지 못하여 바보 형세를 면치 못합니다.”
한다. 나는 다시,
“활불은 참으로 그러한 행동이 있었나요.”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무슨 행동이란 말입니까.”
한다. 나는 종이에 양(楊) 자를 써 보이니 지정은 손을 흔들면서,
“아닙니다. 그는 참으로 신통하였습니다.”
하고는, 또 부탁하기를,
“삼가 다시는 그(추사시(鄒舍是))를 찾아보지 마시오.”
하는데 지정의 뜻은 추를 마음 놓고 대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해서 말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또 묻기를,
“소위 라마(喇嘛)란 무슨 종족(種族)인가요. 이것도 몽고의 딴 부족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아닙니다. 라마란 말은 서번에서 도덕(道德)을 일컫는 것으로, 소위 라마라 하면 이것은 모두 중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몽고 사람들이 중이 되면 모두 라마 복장을 차립니다. 북경의 웅화궁(雄和宮)에 있는 중들은 모두 라마라고 불러 만인이나 한인들도 라마에 몸을 붙여 중이 되는 자가 많으니, 이것은 의식이 풍족한 까닭이지요. 대체로 원(元)이나 명(明)의 시대는 번왕(番王)이 몸소 사신이 되어 조공(朝貢)을 바쳤는데 3ㆍ4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데리고 국경에 들면 항상 생기는 것이 많아서 혹 새하(塞下)에 머물러 있고 돌아가지 않은 자도 있었습니다. 홍무(洪武) 초년에는 번왕을 경중하고 사랑하기 비할 데 없이 하였고, 영락(永樂) 연간으로부터 무종(武宗) 때에 이르기까지는 대우가 더욱 융숭해서 수도 안에 있는 여러 절간에 머물러 두고 대접했습니다. 금년 봄에는 금으로 궁전을 세우고 활불을 맞아다가 살게 했지만 옛날 원(元)이나 명(明)의 시절에 비한다면 그 접대하는 품이 못한 데가 많을 것입니다. 서번의 여러 법왕(法王)들은 그 거처하는 곳이 황금 기와와 백옥 층대로, 문과 난간에는 침향(沈香)이나 강진(降眞 향나무의 일종)ㆍ오목(烏木 화류) 같은 목재를 쓰고, 창에는 수정(水晶)과 유리를 달고, 벽은 모두 화제(火齊 운모(雲母)의 일종)나 슬슬(瑟瑟 구슬의 일종) 같은 구슬로 만들었답니다. 지금 거처하는 집을 그의 본집에 비하면 토계(土階) 무자(茅茨 요의 궁전을 가리킨다)와 같은 것이라 오랫동안 머물기를 즐기지 않고 굳이 돌아가기를 청합니다. 황제는 내년에 오대산(五臺山)으로 거둥을 할 때 친히 산서(山西)까지 전송을 해 준다는 약속을 하고 기일까지 이미 정했습니다. 그는 음률을 잘 알아 팔풍(八風)을 점치고 열 나라 말에 능하답니다.”
한다. 나는,
“열 나라 말에 능하다면 무엇 때문에 이중으로 통역을 할까요.”
하고 물으니, 지정은,
“비록 소리는 잘 안다 하지만 어찌 능히 제자리에서 말뜻이 통할 수야 있겠습니까. 또 그가 올 적에는 나무숲 속에서 향내를 맡고서 신령스러운 나무 한 주를 뽑아다가 분에 심어가지고 왔답니다.”
한다. 나는,
“신령스러운 나무란 무엇인가요.”
하고 물으니, 지정은,
“이것은 이름을 천자만년수(天子萬年樹)라 하는데 엇걸린 나무와 뒤덮은 가지가 모두 천자만년(天子萬年)이란 글자 모양을 이루었으니 장주(莊周)가 이른바 3천 년으로 봄을 하고, 3천 년으로 가을을 한다는 나무로서 혹은 이 나무를 명령(冥靈)이라고 한답니다.”
한다. 나는,
“지금 집안에 있는 매화에서 연한 가지를 잘 잡아 옆으로 비스듬히 눕힌 거야 사람의 교묘한 재주이지 어디에 하늘이 만든 것입니까.”
하니, 지정은,
“아닙니다. 잎새 옆에 있는 힘줄이 모두 천자만년(天子萬年)이란 글자로 되어 있습니다.”
하고는, 이어서 그 잎새를 그려서
나에게 보였다. 나는,
“공은 일찍이 이 나무를 본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그 형상을 보지는 못했으나 다만 그 이름만 들었습니다. 요(堯)의 뜰에 있었던, 명(蓂)이요, 초(楚)에 있었다는 영(靈)과 같아서 온 사해에 향기를 퍼뜨려 만국이 다 같이 평안하고 사시에 언제나 꽃이 핀답니다. 꽃은 열두 잎으로 꽃봉오리가 처음 터지는 것으로써 초하루인 것과 초생달의 밝아지는 것을 알게 되고, 꽃이 하루 한 잎씩 피어 열두 잎이 다 피고 보면 보름인 것과 달의 이그러지는 것을 알게 되며, 꽃이 하루 한 잎씩 말라 들어가 꽃 꼬투리가 떨어지면 그믐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명수(蓂樹)라고도 부르고 또는 영수(靈樹)라고도 부릅니다. 또 일찍이 황제와 함께 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남쪽을 향하여 찻물을 뿌리자 황제는 놀라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활불은 공손히 대답하기를, 방금 7백 리 밖에서 큰불이 나서 1만 호나 되는 인가가 불타고 있는 것이 보이기에 비를 좀 보내 불을 끄는 것이라고 하더랍니다. 다음날 부신(部臣)이 아뢰기를, 정양문(正陽門) 밖 유리창에서 불이 나서 망루(望樓)에까지 연소되어 화세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인력으로는 끄지 못하겠더니 마침 대낮 맑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는데 졸지에 큰비가 동북방으로부터 몰려와서 즉각에 불을 껐다 하니, 대개 차를 뿌려 비를 보낸 시각이 꼭 불났던 때와 맞았답니다.”
한다. 나는,
“나도 북경에 도착하기 전에 도중에서 이런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만 난파(欒巴)도 술을 뿜어 비를 만들었다는데 이것이 무슨 기이할 것이 있겠습니까. 또 북경으로부터 이곳까지는 4백여 리인데 7백 리란 말은 무엇입니까.”
하였더니, 지정은,
“그렇습니다. 이것은 그의 영험이 신통하다는 것이지요. 대체로 이곳은 북경으로부터 7백 리인데, 인조(仁祖 청(淸) 고종의 별칭)가 항상 이곳에 머물러 있고 보니 화석(和碩) 친왕(親王)을 비롯하여 각부 대신(閣部大臣)들이 다들 발섭(跋涉)하기를 꺼리게 되었으므로 특히 각 참(站)의 이수(里數)를 줄여서 4백 리로 만들어 항상 말을 달려 일을 아뢰게 하였으니 이것은 성군이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운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다. 내가 지정과 말할 때는 매양 동점(東漸)하는 교화와 사해에 퍼지는 문교(文敎)를 칭송하였으므로 그는 나와 더불어 말하기를 즐겨했던 것이요, 또 추생이 망발을 하였으므로 짐짓 장황스레 말을 늘어놓아 나로 하여금 청각을 흐리게 했던 것이다.
어느 날 대궐 밖에서부터 혼자 걸어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한 다락집에 올랐더니 거기에 웬 사람이 혼자서 밥을 먹다가 나를 보고는 수저를 놓고 옛 친구나 만난 듯이 의자에서 일어나 손을 잡아 맞으면서 자기 의자에 앉기를 청하고, 자기는 딴 의자를 이끌어서 마주 앉아 각각 성명을 써 보였다. 그의 이름을 보니 파로회회도(破老回回圖)요, 자는 부재(孚齋)며, 호는 화정(華亭)인데 지금 강관(講官)의 직책에 있었다. 나는 그가 만주 사람인 줄 알고 물었더니 몽고 사람으로서 종이를 만지는 것이라든가 글씨를 속히 쓰는 것을 보니 매우 솜씨가 정민했다. 나는,
“군은 박명(博明)이란 사람을 아시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내 아우나 다름없습니다.”
한다. 나는,
“반정균(潘庭筠)을 아시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일찍이 무영전(武英殿)에서 한 번 본 일이 있습니다.”
한다. 박명은 박식한 데다가 글씨를 잘 써, 나는 수십 년래로 그의 필적을 많이 보았던 터라, 그가 같은 몽고 사람이기에 물어 본 것이요, 또 그는 현재 강관의 직책에 있다기에, 반의 소식을 물어 그가 사는 집이 어딘지를 알고자 했더니, 반과는 그다지 친하지 못한 듯했다. 나는,
“세상에는 세 가지 교가 있는데, 귀국에서는 무슨 교를 가장 숭상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부재(孚齋)는,
“어찌 중국 같은 큰 나라로서 세 가지 교만 있겠습니까. 그 도를 행하는 자는 모두 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한다. 나는,
“귀국은 몽고이지요. 중국을 이른 것이 아닌데요.”
했더니, 부재는,
“저는 중화(中華)에서 생장하여 사막(沙漠)을 알지는 못합니다만, 그도 대국의 한 모퉁이겠으니 마땅히 우리 도가 성할 것입니다. 귀국에서는 무릇 몇 교나 있나요.”
하고 묻기에, 나는,
“유교가 있을 뿐입니다.”
했다. 부재는,
“인생의 무엇이 유교가 아니리요마는, 유교라고 부르고 보면 이미 구류(九流)의 열에 물러서게 되니, 유교같이 광대한 것을 가지고 도리어 세 가지 교라는 좁은 틈에 끼어 유(儒) 자 하나로써 끝을 맺으니, 이것이 이단을 조장시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한다. 이때 마침 회회(回回) 사람 몇이 와서 술을 마시고 있다. 나는,
“저 사람들도 서번의 부락 사람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아닙니다. 회회 사람들은 당(唐)의 시대에 회흘(回紇)이라고 불렀는데 당에 공을 세웠고, 또 역시 중국의 큰 걱정거리가 되던 나라로서 회골(回鶻)이라고도 부릅니다. 오대(五代) 시절에는 서쪽으로 돌궐(突厥) 땅을 침입해서, 한(漢)의 서역(西域) 땅이었던 곳을 점령하여 소위 청진교(淸眞敎)를 행했으니, 이 역시 이단 중의 한 교입니다. 천지 사이에는 다만 우리 도가 있을 따름인데, 우리 도의 일단(一端)을 얻은 자가 스스로 한 교를 만들어 부릅니다. 우리들 도를 배운 사람들은 바로 우리 도라고 부를 것이지 유교라고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한다.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를 우리라고 부르는 것은 저 사람을 대해서 부르는 말이니, 우리와 저 사람이 서로 대하게 될 때에는, 상대와 내가 서로 형성되는 터라 우리라는 한 편만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자신을 우리에만 국한한다면, 우리와 상대자 사이가 공평하지 못할 것입니다. 도라는 것은 이 천지 사이에 가장 공변된 이치인데, 또한 우리 한 사람의 물건을 만들어 딴 사람이 와서 엿보지도 못하게 한다면, 이것은 오도(吾道)라는 두 자를 확연(廓然)히 크게 공변된 칭호로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유(儒)에 대하여서는 이미 가르침을 잘 받았습니다만, 교(敎)에 이르러서는 어찌 도를 닦는 것이 교라(《중용》에 나오는 말)고 하지 않았습니까. 문교(文敎)니 성교(聲敎)니 명교(名敎)니 하는 것은 모두 성인의 교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도 교라 하고 저것도 교라고 하여 이단과 서로 혼돈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교라는 글자가 장차 없어질 판입니다. 지금 우리 도라고 부르는 것을, 저들도 역시 그 교를 가져다가 우리 도라고 부르고 보면, 나중에는 우리 도까지 삭제해 버리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부재는,
“그런 일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선비들은 이단이란 것이 우리 도의 한 끝인 줄을 모르고서 분분하게 배격하다 보니, 저들도 비로소 앙연(昻然)히 머리를 쳐들어 우리 도와 대치하려 합니다. 양(楊)ㆍ묵(墨)이나 노(老)ㆍ장(莊) 등의 말은 모두 우리 도에 있는 말이요, 더구나 불교의 인과설(因果說)은 우리 도로서는 가장 깊이 배척하는 바이지만, 그 실상인즉 우리 도에서 먼저 말한 것입니다.”
한다. 나는,
“인과(因果)란 윤회(輪回)한다는 것과 다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아닙니다. 인과설이란 다만 어떤 일에 인연이 되면 어떤 것이 공(功)으로 나타난다는 것으로서, 비유하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이 원인이 되고 거기서 나는 싹이 결과가 되는 것이요, 밭을 매는 것이 원인이라면 수확하는 것이 결과가 되는 것이요, 나무를 심는 것도 역시 그러하니, 그 꽃은 원인이 되고 열매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옳은 길을 가면 길하고 역리를 따르면 흉하게 되는 것(《서경》에 나오는 말)이니, 이것이 우리 도의 인과로서, 옳은 길과 역리는 원인이 되고, 길하고 흉한 것은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또 길흉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그림자와 소리처럼 따르고 좇는 사이에 부응(孚應)하는 영험이 이같이 빠를 수야 있겠느냐고 합니다. 또 착한 일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남아 있고, 착하지 않은 일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재앙이 남을 것(《역경》에 나오는 말)이니, 이는 우리 도의 인과입니다. 그러나 재앙과 경사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반드시 남음이 있다고 하는데, 이 반드시 남는 것을 본 것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불교를 하는 자도 처음에 인과를 말한 것은 지극히 고명했지만, 다음에 우리 도에서 좋고 나쁜 일에는 반드시 보응(報應)하는 자취가 있다는 것을 보고는 윤회설(輪廻說)로 바꿨으니, 실상 우리 도에서는 병통으로 치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하면 백 가지 상서로운 것이 내려지고, 착하지 못한 일을 하면 백 가지 재앙이 내린다는 말도 우리 도의 인과설인데, 그렇다면 그 내려 주는 자는 누구일까요. 태서(泰西) 사람들은 자기의 몸을 공경한 데 두는 것이 심히 두터우면서 불교를 공박하는 데 더욱 힘쓰지만, 오히려 천당ㆍ지옥의 설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도에서 한 마음으로 월(越)을 대한다는 말을 듣고 임(臨)했느니 감(監)하느니 보느니 듣느니 하여 분명히 주재(主宰)하는 것이 있다 하고, 재앙과 상서를 내린다는 내릴 강(降) 자를 가지고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대체로 불가에서는 윤회설도 없었는데, 중국 사람이 불경을 번역할 때에 그 말이 다르고 글도 서투르고 보니 형용하기가 어려워서, 보응설(報應說)과 윤회설로 번역하고 그 위에 인과설을 가져다가 관련시켰던 것입니다. 후세에 와서 선가(禪家)에서도 또 인과설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이를 불교의 조박(糟粕)으로 여겼으니, 이는 가히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지금 법왕이 말하는, 남의 몸에 태어난다는 법은 윤회의 증거가 아닙니까.”
하고 물었더니, 부재는,
“아닙니다. 남의 몸에 태어난다는 법은 윤회설과는 다릅니다. 소위 윤회설이란, 곧 여기 맹수(猛獸)가 있어 홀연히 불성(佛性)을 품게 되면 다음 대에는 좋은 갚음을 입어 착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이요, 오늘의 중생(衆生) 중에도 짐승의 행실을 하는 자가 있으면 후생에 가서는 나쁜 보복을 받아 반드시 짐승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하는 말에 불과한 것으로, 조잡하고 어리석고 천박한 말들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효자는 끊어지지 아니하여 / 孝子不匱
너와 같은 무리를 길이길이 주시리라 / 永錫爾類
하였으니, 윤회설의 증거는 본래 이러한 것으로, 법왕이 말한 남의 몸에 태어난다는 것은 때묻고 더러운 옷을 갈아입듯이 자기 몸을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한다. 나는,
“참으로 이러한 이치가 있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부재는,
“그가 주문을 가지고 기운을 움직이는 술법은 도가(道家)의 것과 같으나, 실상은 선가(禪家)에서 이르는 마선(魔禪)일 것입니다. 대체로 이런 일은 있을 법도 하고 없을 법도 해서, 제 자신이 중이 되어 보지 않고서야 참과 거짓을 어찌 능히 알겠습니까. 옛날 내가 진남(鎭南)에 있을 적에 공사의 틈을 타서 일찍이 이 일을 가지고 태학사(太學士)아계(阿桂)에게 묻기를, ‘서장 땅에 들어가 본 자들이 지혜가 부족해서 이렇게밖에 알지 못한 모양인데, 장군은 명철한 분이니 그 일이 필경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했더니, 아공은 대답하기를, ‘그 사실이 반드시 있고 없음을 물어 볼 것도 못 됩니다. 만일 우리 집안에서 지극히 총명스러운 자식 하나가 났는데, 네댓 살 때부터 일호도 세상일을 알리지 않고, 날마다 늙은 스승과 탁월한 선비로 하여금 그 옆을 떠나지 않고 성현의 말로써 그 마음을 적셔 주고, 자란 뒤에는 먹고 입는 데 걱정이 없이 금옥과 금수 같은 인간으로서 하고 싶은 물건들을 눈에 띄어도 마음에 두지 않도록 하여 신명(神明)과 같이 공경하고 보면, 날마다 한결같이 도를 향하여 나갈 뿐이니 어찌 성현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늙은 중으로 하여금 기르게 하여, 날마다 설법을 하고 부처를 극진히 존경하게 하여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세상 걱정으로 그 마음을 쭈그러지지 않도록 한다면, 또한 어찌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더이다.”
하였다.
저녁에는 형산을 찾아,
“법왕이 다른 데 태어난다는 것이 윤회와 무엇이 다릅니까.”
하고 물었더니, 형산은,
“그것은 몸을 바꾸는 것이나 같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육신(肉身)이란 바람과 비, 또는 덥고 추운 데 침노되어 머리털이 희어지고 가죽이 쭈그러져서 늙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흙이나 물ㆍ바람ㆍ비 같은 것으로 화해 버리게 마련이지만, 소위 밝은 정신과 금강(金剛)의 보체(寶體)는 본래부터 젊고 늙는 것이 없이, 한 개비 장작이 다 타고 나면 다른 나무로 불이 옮겨 붙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비유하건대, 천 리 길을 가는 자가 자기 집을 짊어지고 가지는 못할 것이요, 반드시 숙소를 갈아 가면서 갈 것입니다. 비록 천하에 다정한 사람이라도, 자기가 자던 주막집에 정이 들어 여기서 오래 머무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불은 나무에 인연(因緣)하여 일어나서 잠시는 불과 나무가 서로 엉키어 기쁜 듯이 타다가도, 불이 다른 나무로 옮겨 붙을 때에 다시 먼저 타버린 재를 연모하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법왕이 다른 몸에 태어난다는 것도 다만 이런 말일 것이요, 윤회설이란 불가의 율서(律書)일 뿐입니다. 옛날 한(漢)의 두 태후(竇太后 한(漢) 무제(武帝)의 황후)가 조관(趙綰)과 왕장(王臧)을 꾸짖으며 어찌 사공(司空)의 성단서(城旦書)가 될 수 있겠느냐고 하였으니 이는 유가의 말을 율서로 본 것입니다. 저들이 말하는 윤회설은 당시의 임금들이 제정한 제도로서, 오복(五服)ㆍ오형(五刑)이 모두 다 헌장(憲章)이 있어 경상(慶賞)과 위살(威殺)하는 것이 다 같이 문서를 따라서 공죄(功罪)도 보이기 전에 먼저 법문부터 갖춘 셈입니다. 불교를 하는 자는 세간의 공죄가 부당하고 상벌이 믿을 수 없다고 하여 발로 밟고, 눈으로 보는 것으로는 사람들이 소홀하게 여기기 쉽다 해서 유명(幽冥)의 불칙한 데에 옮겨서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속에서 징계하고 벌을 주려 하니, 옛 사람들의 이른바 남몰래 임금의 권세를 조종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유가에서는 또한 반드시 그들을 원수와 같이 공격하지는 않으니, 성인이 도로써 교양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을 것입니다. 또 천지는 한없이 크며, 풍속도 각각 다르고, 기운은 바르고 편벽된 것이 있으며, 이치도 경우에 따라 달라서, 마치 그곳에 담긴 물이 그릇의 모양에 따라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고금 천하에 또한 윤회란 것이 없지 않으며, 또한 다른 몸에 태어나는 법도 없지 않고, 화식(火食)을 끊는 사람도 없지 않으며, 장생불사하는 사람도 없지 않고, 또 이러한 이치가 전혀 없다는 사람도 혹(惑)한 탓이요, 이런 이치가 있다는 사람도 역시 혹한 탓입니다. 대체로 이런 이치가 왕왕 있을 수도 있는 것이므로, 이 왕왕 있을 수 있는 일을 가지고 함부로 만 가지 이치에 맞추려 하거나 천하를 바꾸려 하는 것은 더욱 혹한 노릇입니다.”
한다. 나는,
“진ㆍ한 이래로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모두 이단이었으니, 진은 형명(刑名)으로도 오히려 능히 천하를 겸병(兼幷)했고, 한은 황(黃)ㆍ노(老)의 도로써 족히 백성을 가멸지게 하였습니다. 성인들은 비록 이단이 인의(仁義)를 억누를까 하여 근심하지만, 오늘 법왕이 말하는 남의 몸에 태어난다는 술법으로 천하를 다스리더라도, 그가 도리어 우리 유교에 의존하여 인의예지의 사이를 벗어나지 않고 인간 윤리를 근본으로 삼은 법칙 안에 설 수도 있을 것이나, 그렇다고 요ㆍ순의 도에까지 들어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했다. 형산은 눈을 감고 한참 동안 입속으로 염불을 하는 것 같더니, 얼마 후에야 눈을 뜨고 빙그레 웃으면서,
“선생님의 말씀이 지극히 옳습니다. 이단과 우리 도를 비교해 보면, 비록 사정(邪正)과 수박(粹駁)의 분별은 있지마는, 그 이로운 것을 일으키고 어진 것을 행하며 잔악한 일을 물리치고 살육을 없애는 점은 같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법왕의 법술을 무슨 도라고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형산은,
“소위 황교(黃敎)라고 합니다.”
한다. 나는,
“황교란 황(黃)ㆍ노(老)의 도를 말하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황백(黃白) 비승(飛昇)의 법술을 말하는 것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형산은,
“천지간에는 별스러운 세상과 별스러운 사람도 있어서 그 도야말로 이름 없는 것도 귀하게 여기며, 맑고 참되고 편안하고 즐거운 것이 그 사는 것이라면, 때를 맞추어 귀화(歸化)하는 것이 그 죽음이랍니다. 그 사는 것이 즐거울 것이 없고, 죽는 것이 슬플 것이 없이 번갈아 가며 환생(幻生)해서 만겁(萬劫)을 겪어도 변하지 않고, 벼슬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 아는 것도 모르는 체하고, 그 모르는 것도 깨닫는 듯하여 혼돈(昏屯)히 법천(法天)에도 말이 없고, 난리나 살생을 좋아하지 않으며, 이 세상을 꿈속같이 여기고 모든 사물을 요망된 것으로 보며, 모든 언어를 거짓으로 보고, 세상에 붙어사는 것을 모두 허탄한 것으로 보며, 사모하는 것을 장애로 보아, 부처도 아니요, 선술(禪術)도 아니며, 생각도 없고 걱정도 없으니, 이야말로 천지간에 별다른 세계를 꾸민 셈이요, 일종의 별다른 학문을 하는 셈입니다. 이것은 옛날의 지인(至人)이나 신인(神人)들의 도이며, 자기 자신도 없고 공리(功利)도 모르는 학문입니다. 자휴(子休)의 이른바 정신을 가다듬으면 백성이 병이 없고, 농사도 풍년이 든다는 말과, 요(堯)가 고산(姑山)ㆍ분수(汾水)를 보고 망연히 그 천하를 잊어버렸다고 한 것이 곧 이 도 같은 것이니, 비단 서번 여러 나라들이 그 교에 복종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몽고 지방의 여러 부족들도 이 교를 숭신(崇信)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본조(本朝)의 정치와 교화는, 위로는 당ㆍ우를 능가하여, 성교(聲敎)가 이르는 곳마다 모두가 편안하여 국경 밖의 풍진은 항상 맑았습니다. 대개 그 싸우고, 죽이며, 침략하고, 도적질하는 것은 나라의 풍속에 꺼리는 바인즉, 역시 황교(黃敎)란 것이 도리어 중국 성화(聖化)에 만 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되겠지요.”
한다. 이때 딴 곳에서 일이 있는 듯하기에 즉시 일어나서 여천(麗川)의 처소로 갔다. 여천은 기풍액(奇豐額)의 자요, 그는 만주 사람이다. 여천은 사천 어사(四川御史)단례(端禮)의 시, 칠언(七言) 50수(首)를 내어 보인다. 이 시는 황제가 공작(孔雀)의 깃을 하사한 데 대하여 읊은 것이다. 무관이 사품(四品) 이상의 지위가 되면 모자 앞에 깃을 다는 법이요, 문관도 황제로부터 하사를 받으면 역시 이것을 달게 되므로 이를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시를 보니 섬세하고 교묘(巧妙)하고도 고와서, 그 절향(絶響)이 만당(晩唐)과 호원(胡元) 때의 시체(詩體)가 있었다. 여천이 나를 보고 비평하라 청했지만 내 굳이 사양했더니, 여천도 역시 굳이 청한다. 대개 그는 내 재주와 식견을 보고자 함인데, 나도 역시 자신의 우졸(愚拙)함을 탄로하고 싶지 않아서 끝내 사양했던 것이다. 여천은 즉시 염(簾)이 틀린 데를 세 군데나 지적하면서 다시 접어 탁자 위에 놓더니, 형산의 율시(律詩) 하나를 내어 보이면서 붓으로 함련(頷聯)의 대구인 연모(燕毛)와 웅장(熊掌)에 점을 찍으면서 웃고 하는 말이,
“이건, 구시(狗屎)로군. 이 사람이 한 정사(政事)도 모호하기가 이 시와 같겠지.”
한다. 나는,
“어찌 그리 경박합니까.”
했더니, 여천은 즉시 구시(狗屎) 두 자를 찢어서 입에 넣고 씹는다. 나는 크게 웃으면서,
“어른을 조롱하더니 그 벌로 개똥을 자시는구료.”
했더니, 여천도 역시 크게 웃었다. 조금 있다가 형산이 들어와 셋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형산이 바로 나가기에, 둘은 서로 쳐다보고 웃었다. 어느 날 여천이 명륜당(明倫堂)으로 산보를 하는데 한 사람이 대야를 들고 뒤를 따르니, 여천은 서서 낯을 씻고 수건질을 한 다음 다시 걸어가면서 나를 보고 멀리서,
“박공.”
하고 부른다. 내가 바로 쫓아갔더니, 여천은,
“아까 황제가 어사한 누른 비단으로 봉한 것을 조금 맛봅시다.”
한다. 나는 곧 돌아와서 병을 기울여 보니 꼭 한 잔쯤 남았기에, 손수 들고 갔더니, 여천은 웃으면서,
“이것은 여지즙인데, 여지란 열매는 나무에서 떨어져 하루만 지나면 바로 향기와 빛깔이 변해서 만 분의 하나도 성하질 못합니다. 그러므로, 꿀에 담가 두어도 열에 아홉은 빛과 맛이 변하기 쉽습니다. 처음 나무에서 딸 때에는, 비록 입이 열이고 손이 열이라도 실로 그 맛을 형용하기 어렵지요. 저도 북경에 이르러서 이것을 하사받은 것이 한 번뿐이 아니어서, 어제도 또한 이것을 받았지요.”
하고, 인해 한 잔을 내어 소주 대여섯 잔에 타서 나에게 권한다. 내가 한 잔을 마시니, 맑은 향기가 입에 가득하여 달고 시원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내가 여천에게 잔을 돌려 권했더니, 여천은 머리를 흔들면서 굳이 사양한다. 나는 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저는 이미 불계(佛戒)를 좇아서 술을 끊은 지 오래입니다.
하루 줄곧 먹어져라 여지도 삼백 낱을 / 日食荔支三百顆
영남 사람 된 이 내 팔자 무방코야 / 不妨常做嶺南人
라는 것은 곧 동파(東波)의 시입니다.”
하고, 그는 또,
“저는 지금 얼사(臬司 안찰사(按察使))의 자리에 있으면서 항상 이것을 먹습니다.”
하고는 또,
“영남(嶺南)이란 옛날 귀양살던 곳입니다.”
한다. 어느 날 밤중에 달이 밝기에 여천과 함께 대(臺) 위를 배회하다가, 밤이 깊고 이슬이 차서 여천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기를 청하면서,
“사신이 활불을 보지 않으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하고 묻는다. 나는,
“사신은 조서(詔書)를 받들고 만나러 갔습니다.”
하였더니, 여천은,
“사신이 말에서 내려 도중에 앉아서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황제는 다시 조서를 내려 그만두라고 했다니,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어정거리나요.”
하는데, 그 말로 보아 자못 무슨 관계가 있는 듯하고, 그 정실(情實)을 파보려 하는 것 같기에, 나도 갑자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여천은,
“사신의 반열 순서는 소문이 자자합디다.”
한다. 나는,
“도중에 말에서 내렸다는 것은, 가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통관의 말에 군기 대신(軍機大臣)이 꼭 오게 되었다고 기다려서 같이 가는 것이 옳다 하기에, 궁성(宮城) 밑 나무 그늘 아래서 말에서 내려 피서(避暑)하면서 군기 대신을 늦도록 기다리다가, 갑자기 분부가 내린 까닭에 중도에 그만두고 돌아온 것이요, 일부러 자신이 늦게 온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여천은,
“사신이 책망을 당할 뻔하였고, 예부(禮部)의 여러 대인(大人)들은 이 때문에 겁을 내어 식사를 폐하고 있는데, 어제는 다시 황제의 은지(恩旨)를 들었으니, 이것은 세상에 없는 성전(盛典)입니다. 고려는 마땅히 사대(事大)하는 정성을 더욱 굳게 해야 할 것이요, 두 대인도 서로 은총을 치하하여야 할 것입니다. 묘중(廟中)에서 덕대인(德大人)을 만났더니 기쁨을 이기지 못합디다.”
한다. 나는 놀라고 괴이함을 깨닫지 못하여 천천히 대답하기를,
“우리나라가 대국과는 한 집이나 같은 터라, 이제 저와 공은 이미 안팎의 구별이 없지만, 법왕(法王)에 이르러서는 이는 서번 사람이고 보니, 사신으로서 어찌 감히 선뜻 만나보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인신(人臣)으로서는 사사로운 외교가 없다는 의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번 성상(聖上)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보니, 사신이 또한 어찌 감히 가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여천은,
“진실로 의당한 말씀입니다. 어제 사신이 활불에게 절했나요. 그렇지 않으면 황제의 성지를 받고 절을 하였던가요.”
한다. 실상 사신은 활불에게 절을 한 적은 없었으나, 그의 묻는 말이 몹시 깊은 의미이기에 감히 절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할 수 없어 붓을 쥔 채 주저하고 있는데, 여천이 먼저,
“조서를 받들고 갔으니, 응당 성은에 숙배(肅拜)한 것이나 같겠지요.”
하고는 또,
“존형(尊兄)도 활불에게 절을 했던가요.”
한다. 나는,
“다만 망견(望見)하였을 따름이지요.”
하였더니, 여천은 망견(望見) 두 자를 가리키면서,
“바라본다는 것은 이미 활불에게 아첨했다는 말이지요. 존형은 이미 분부를 받지도 않았으면서 그렇게 옷을 거꾸로 입고 뛰어나갔습니까.”
한다. 나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여 이내 사과하기를,
“관광(觀光)하는 데 미쳐서 그런 생각을 못했군요.”
하였다. 여천은 또 크게 웃으면서,
“그렇지요. 진실로 어진 분에게 행동이 완벽하기를 따졌음에 불과하니 만 번 죄를 용서해 주기 바랍니다.”
한다. 나는,
“저는 이미 만 리 길에 관광차 나선 터라,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따라가서 금전 옥루를 볼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여천은,
“그렇지요.”
하고는 또,
“저의 전신(前身)은 본래 중입니다. 뒤에는 일찍이 한 번 …… .”
하고는, 수십 자를 먹이 마른 붓으로 바삐 써서 뜻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마침 촛불에 담배를 붙이느라고 자세히 보지 못하고 막 다시 보려 하는데, 이미 촛불을 이끌어 태워 방바닥에 던져 버리면서,
“저는 본래 유발(有髮)한 늙은 비구(比丘)입니다.”
한다. 나는,
“공은 일찍이 활불을 본 적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여천은,
“친왕(親王)이나 액부(額駙)ㆍ몽고왕(蒙古王)이 아니면 감히 볼 수 없답니다.”
하더니 또,
“저는 유학자의 갓을 쓰고 유학자의 옷을 입은 자로서, 평생에 흙으로 만든 고불(古佛)에게도 절을 안 했는데, 어찌 육신(肉身)의 가짜 부처에게 절을 하겠습니까.”
한다. 나는, 유발(有髮)이니 관유(冠儒)니 하는 말을 보고 실소(失笑)함을 금하지 못하여 굵다랗게 권주를 쳤더니, 여천은 내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 모양으로 역시 크게 웃으면서 즉시 태워서 방 아래로 던진다. 나는,
“공은 자신을 스스로 유학자라고 하면서, 또 말마다 늙은 비구니 머리 있는 중이니 하는 것은 어찌된 셈입니까. 딴 사람을 부처에게 아첨을 한다고 책을 잡아, 저로서 본다면 가위 가불(假佛)의 제자(弟子)라 할 수 있으니, 힘써서 부처나 배우시지요.”
하였더니, 여천은 크게 웃으면서 가불 제자란 구절에 크게 권주를 치고는,
“만일 형이 재물이 많았다면, 저는 반드시 단골 손님을 삼았을 것이요.”
한다. 나는,
“그건 무슨 말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여천은 웃으면서,
“말 빚을 잘 갚으니까요.”
하고 또,
“한창려(韓昌黎)도 늙을 지경에는 마침내 선학(禪學)을 즐겼다지요.”
한다. 나는,
“양명(陽明 명(明)의 왕수인(王守仁). 양명은 호)의 학문은, 비록 편벽되기는 하지만, 창려와 같이 희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더니, 여천은,
“신건백(新建伯 왕수인의 봉호)이 명분과 이론은 자못 성하고, 그의 부처를 배척하는 것은 깊이 기골(肌骨)에 사무치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과 눈을 쾌하게 해 줄 뿐이요, 창려의 장맹(壯猛)함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는 또,
“재 마루턱 위 구름을 보고 집을 생각하며, 관(關)에 쌓인 눈을 보고 말을 걱정했다는 말은, 이미 지난 일을 뉘우쳤던 것이지요.”
한다. 나는,
“지금 세상의 문장 대가로서 이 두 늙은이에 비교할 만한 이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여천은 대답하지 않고 이내 붓장난으로,
“공(空)은 곧 색(色)이요, 색도 역시 공이지요.”(불가의 말이다.)
한다. 나는,
“나는 너요, 너는 나로다.”
하였더니, 여천은 앞으로 와서 내 손을 잡고 한참 있다가,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고 또 내 가슴을 가리키더니 이내,
“그 중의 상모가 어떻습디까.”
하고 묻는다. 나는,
“여래존자(如來尊者)의 상과 비슷합디다.”
하였더니, 여천은,
“응당 살이 쪘겠지요.”
하고는 탐(貪) 자를 크게 쓰면서,
“구하지 않는 것이 없고 취하지 않는 것도 없으니까 말이지요.”
한다. 나는,
“출가승(出家僧) 같지도 않은데 무슨 계율(戒律)이 있을까요.”
하였더니, 여천은,
“즐기지 않는 것이 없지요. 말ㆍ소ㆍ약대ㆍ양ㆍ개ㆍ돼지ㆍ거위ㆍ오리를 모두 먹기도 하려니와 나귀를 통째로 먹으니, 살이 찔 수밖에 없잖아요.”
한다. 나는,
“탐색(貪色)도 하나요.”
하고 물으니, 여천은,
“그것 한 가지만은 범하지 않는가 봅디다.”
한다. 나는,
“법술이 신통한가요.”
하고 물었더니,
“전혀 없답니다.”
하고는 또,
“완적(阮籍)의 후신이 안 태사(顔太師)요, 안태사의 후신이 포염라(包閻羅)요, 포염라의 후신이 악무목(岳武穆)이라 한다니, 이것은 간사한 사람들이 가르친 말이지요.”
한다. 내가 지정이 말한 오색경(五色鏡) 이야기를 물었더니, 여천은,
“과연 그런 것이 있다고 합디다. 그런데 화제(火齊)로 만든 거울이라 합니다.”
한다. 다시 만년수(萬年樹) 이야기를 물었더니, 그는,
“들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생겼답디까.”
하고 묻기에, 나는 학성(郝成)에게 들은 대로 대강 이야기를 하고,
“만일, 과연 그렇다면 참으로 신령된 나무지요.”
하였더니, 여천은 크게 웃으면서,
“존형은 이런 허망한 나무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습니까.”
하면서, 또,
“활불은, 임종(臨終)할 때에는 자기의 학문을 말 한 구절로 전한다고 했답니다.”
한다. 내가 북경으로 돌아와서 사대부와 더불어 함께 논 일이 많았지만, 여천같이 철저히 불교를 배척해서 말하는 자는 보지 못했다. 어느 날 내가 방문 앞에 서 있노라니, 여천이 거울을 가지고 자기를 비춰 보고 다시 와서 내 얼굴을 비치다가, 또 장난으로 내가 차고 있는 주머니에 든 연주(聯珠)를 만지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유가가 가질 물건이 아닌데요.”
하기에, 나는,
“이것은 갓끈입니다.”
하였더니, 여천은,
“좀 빌려 보아야 믿을 수 있지요.”
한다. 즉시 주머니 속에서 꺼내 보였더니, 여천은 크게 웃었다. 대개 그는 처음에 그것을 염주(念珠)로 알았던 모양이다. 내가 벽에 걸린 조주(朝珠)를 가리키면서,
“저것은 무슨 물건인가요.”
하였더니, 여천은,
“이것은, 국가의 명기(名器)로서 없을 수 없는 물건이외다. 대개 조복(朝服)을 입으면 목에 염주를 거는 까닭에 이것을 조주라 하며, 그 값이 천만 냥이 되기도 한답니다. 우각노(于閣老) 민중(敏中)의 자는 내재(耐齋)인데, 금년에 죽었지요. 7월에 그 집 재산을 몰수해서 파는데, 조주 네 개 값이 은(銀) 3만 7천 냥이더랍니다. 그 값이 너무 많아서, 감히 사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하였다.
[주D-001]네 가지 과목 : 덕행(德行)ㆍ언어(言語)ㆍ정사(政事)ㆍ문학(文學).
[주D-002]자막(子莫) : 전국 때 고집쟁이. 《맹자(孟子)》 진심상(盡心上)에 나온다.
[주D-003]호광(胡廣) : 후한의 정치가. 자는 백시(伯始). 모두들 천하에 중용을 지키는 이는 호공(胡公) 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는 칭찬이 있었으나 그 뒤에는 일을 잘못해서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주D-004]묵(墨) : 전국 때 저명한 사상가 묵적(墨翟). 그는 겸애주의(兼愛主義)를 제창하였다.
[주D-005]양(楊) : 역시 전국 때 철학자인 양주(楊朱). 극단의 이기주의(利己主義)를 제창하였다.
[주D-006]담인(噉人) : 활불을 가리켜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라 하여 모욕하는 말이다.
[주D-007]양련진가(楊璉眞加) : 원 세조 때에 강남 석교(釋敎)의 총통이 되어서 송조의 임금과 대신들 무덤을 판 것이 백 한 곳이요, 미녀와 보물을 받은 것이 많았다. 가(加)는 ‘박영철본’에는 가(珈)로 되었으나 잘못되었다.
[주D-008]소소(宵小) : 작고 가늘다는 뜻. 곧 사람으로 말하면 소인을 소소배(宵小輩)라 한다.
[주D-009]팔풍(八風) : 팔음(八音)과 같은 뜻으로 ‘팔풍지음(八風之音)’의 준말.
[주D-010]이어서 …… 보였다 : 그 그림은 여러 본에 다 있는데, 여기에서는 거의 원형 그대로 복사하여 실었다.
[주D-011]명(蓂) : 그 잎의 나고 떨어짐으로써 월력을 대신했다 한다.
[주D-012]영(靈) : 곧 위에서 말한 장주의 명령(冥靈).
[주D-013]효자 …… 주시리라 : 《시경(詩經)》 대아(大雅) 기취편(旣醉篇)에 나오는 두 글귀.
[주D-014]마선(魔禪) : 불교의 참선 중에서 정통파가 아닌 참선.
[주D-015]흙 …… 비 : 불교에서 말하는, 사람의 몸뚱이를 구성하는 사대(四大) 원소.
[주D-016]옛날 …… 꾸짖으며 : 조관(趙綰)과 왕장(王臧)이 신공(申公)을 맞이하여 명당(明堂)을 짓고 유학을 숭상하려 하였으나, 두 태후는 황(黃)ㆍ노(老)를 좋아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경제에게 꾸지람을 하였더니, 경제는 조관과 왕장을 가두어서 스스로 죽게 하였다. 성단서(城旦書)는 형서(刑書)를 이르는 말.
[주D-017]형명(刑名) : 유가의 인의(仁義)와는 달리 강력한 형법으로써 국가를 다스리려는 정치의 이론.
[주D-018]자휴(子休) : 《남화경(南華經)》 중에는 연숙(連叔)으로 되었으니, 이는 오기인 듯하다.
[주D-019]정신을 …… 잊어버렸다 : 《남화경(南華經)》 소요유편(逍遙遊篇)에 나오는 말. 가상적인 인물 연숙의 말을 인용한 것.
[주D-020]염(簾) : 율시(律詩)에 있어서 평측(平仄)을 보는 원칙.
[주D-021]함련(頷聯) : 율시 팔구(八句) 중의 다섯째 구와 여섯째 구.
[주D-022]한창려(韓昌黎) : 당의 저명한 유학자요, 문학가인 한유(韓愈). 창려는 봉호.
[주D-023]재 마루턱 …… 걱정했다 : 한유(韓愈)의 시에, “운횡진령가하재(雲橫秦嶺家何在)요, 설옹남관마부전(雪擁藍關馬不前)이라.”는 구절이 있다.
[주D-024]나는 …… 나로다 : 왕수인의 시에, “칠십년전왕수인(七十年前王守仁)은, 개문인시폐문인(開門人是閉門人)이라.”는 구절이 있다.
[주D-025]완적(阮籍) : 진(晉)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하나. 자는 사종(嗣宗).
[주D-026]안 태사(顔太師) : 당 현종(唐玄宗) 때 저명한 서예가요, 충신인 안진경(顔眞卿). 태사는 벼슬이요, 자는 청신(淸臣).
[주D-027]포염라(包閻羅) : 송 인종(宋仁宗) 때의 저명한 법관인 포증(包拯). 죽어서 염라왕이 되었다 한다.
[주D-028]악무목(岳武穆) : 송 고종(宋高宗) 때의 저명한 충신 악비(岳飛). 자는 붕거(鵬擧).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황교문답후지(黃敎問答後識)
연암이 말하기를,
“천하에는 여러 가지 잡종락(雜種落)이 많다. 내가 열하에 이르러 왕이라 하여 모여든 자들을 많이 보았다. 몽고 사람으로서 중국에서 생장한 자는 그 문장과 학문이 만인이나 한인에게 어깨를 겨누지만, 그 용모는 험상스럽고 커서 아주 달랐으니, 더구나 그 48부의 추장(酋長)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추장들은 저마다 각기 왕호를 가져서 좌현(左賢)이니 곡리(谷蠡)니 하는데, 저희들끼리는 서로 예속(隸屬)되는 법이 없이 세력을 나누고 힘으로 버티고 있어, 누구든지 감히 먼저 움직이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중국이 안연(晏然)히 아무 일도 없을 수 있는 이유이다. 나는 몽고왕 두 사람을 찰십륜포(札什倫布)에서 보았고, 또 두 사람을 산장(山莊) 문 앞에서 보았는데, 그 중에도 늙은 왕 하나는 나이 방금 81세로서 허리가 굽고 피골이 썩은 것 같으며, 얼굴은 나귀처럼 길고 키는 거의 한 길이 되었다. 젊은 자는 귀신같이 생겼고, 종규도(鍾馗圖) 같기도 하였다. 서번 사람들은 더욱 사납고 날래고 추악해서, 괴상한 짐승이나 기이한 귀신 같아서 두려웠다. 회회국은 옛날 회골(回鶻)로서, 더욱 사나웠다 한다. 토사(土司 남방 묘족(苗族) 두목의 칭호)는 서번이나 회골에 비하면 웅장하고 큰 것이 대개 같았다. 아라사(鄂羅斯)란 것은 흑룡강(黑龍江)에 있는 부락으로, 집마다 반드시 개 한 마리를 두는데, 개마다 크기가 나귀만 하고, 목에는 작은 방울을 10여 개나 달며, 턱 밑에는 여러 가지 끈을 장식해서 멍에로써 수레를 끌게 했으니, 개 크기도 이 같거든 하물며 사람일까 보냐. 출입을 할 때에는, 반드시 개를 이끌고 옆눈을 뜨고 퉁소를 분다. 그들의 갓이나 의복은 신분에 따라 모양이 다르므로 분간하기가 쉽다. 대개 만주는 비록 많이 번식했지만 아직 천하의 반이 못 되니, 그들이 중국에 들어온 지는 이미 백여 년으로, 수토(水土)에 익고 풍기를 길렀으므로 한인과 다를 것이 없이 맑아지고 단아해져서 이미 저절로 문약(文弱)해지고 있으니, 오늘 천하의 형세를 돌이켜 볼 때, 그 두려운 바는 항상 몽고에 있고 딴 오랑캐에 있지 않다. 그것은 무슨 까닭일까. 몽고의 강하고 사나움은 서번이나 회회국만은 못하나, 전장(典章)과 문물이 가히 중원(中原)과 서로 대항할 만하기 때문이다. 유독 몽고는 땅이 서로 접하기가 백 리도 못 되는데, 흉노(匈奴)ㆍ돌궐(突厥)로부터 거란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국의 후예이다. 위율(衛律)과 중행열(中行說)이 이미 도망가는 소굴로 삼았거든, 하물며 그 전장과 문물이 아직도 옛날 원(元)의 유풍(遺風)을 가지고 있음에랴. 겸해서 군사와 말이 강장한 것은 본래 사막의 본질이고 보니, 천하의 법도가 한 번 해이(解弛)해지고 호흡이 잠깐 급해지면, 48부의 몽고왕들이 또한 한갓 강한 활을 가지고 새하(塞下)에 가서 토끼나 여우만 쫓을 뿐이리요. 내가 본 바로는 그들 추장이 이미 저와 같고 나와 더불어 이야기한 자들도 부재(孚齋)ㆍ앙루(仰漏) 같은 사람은 모두 문학하는 선비이다. 옛날 유연(劉淵)이 새내(塞內)에 들어와 살 때에, 유주(幽州)ㆍ기주(冀州)의 명사들은 많이 그를 따라갔다. 연의 아들 총(聰)은 경사(經史)를 널리 알고, 약관(弱冠) 시절에 경사에 놀며 명사들과 더불어 사귀지 않는 이가 없었다. 슬프다. 천하가 한 번 흔들려 풀처럼 움직이고 바람처럼 일어나면, 어찌 연과 총의 무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은 것을 알리요. 이것은 내가 눈으로 본 바 확실한 몇 사람이거든, 하물며 내가 얻어 보지 못한 자가 몇 사람인지 알지 못함에랴. 이제 내가 열하의 지세를 살펴보니, 대체로 천하의 두뇌(頭腦)와 같았다. 황제가 북쪽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다름 아니라 두뇌를 누르고 앉아 몽고의 인후를 틀어막자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몽고는 이미 날마다 나와서 요동을 뒤흔들었을 것이니, 요동이 한 번 흔들리고 보면 천하의 왼쪽 팔이 끊어지는 것이요, 천하의 왼쪽 팔이 끊어지고 보면 하황(河湟 영하성 지방)은 천하의 오른편 팔이라 혼자서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니, 내가 보기에는 서번의 여러 오랑캐들이 나오기 시작하여 농(隴)ㆍ섬(陝)을 엿볼 것이다. 우리 동방은 다행히 바다 한 쪽에 궁벽되어 있어서 천하 일에 상관이 없다 하겠으나, 내 이제 머리털이 흰지라 앞일을 가히 보지는 못할 것이로되, 30년을 넘지 않아서, 능히 천하의 근심을 걱정할 줄 아는 자가 있다면 응당 나의 오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호(胡)ㆍ적(狄) 잡종의 일을 위와 같이 아울러 기록해 둔다.”
하였다.
[주C-001]황교문답후지(黃敎問答後識) : 여러 본에 모두 이 소제가 없었으나, 이제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주D-001]종규도(鍾馗圖) : 당 현종(唐玄宗)이 꿈에 본 귀신을, 오도현(吳道玄)을 시켜 그린 그림.
[주D-002]위율 …… 중행열(中行說) : 위율과 중행열은 한(漢) 때 한을 배반하고 흉노에게 항복하여 이적의 행위를 한 자.
[주D-003]유연(劉淵) : 오호(五胡) 때 전한(前漢)을 세운 흉노족 출신의 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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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존평어(仲存評語)
중존씨(仲存氏)는 말하기를,
“다섯 가지의 망령된 일과 여섯 가지의 옳지 못한 일은, 모두 반드시 《예기(禮記)》 곡례편(曲禮篇)에 있는 3천 가지 금지(禁止)하는 일은 아니지만, 예절을 아는 자는 자연히 이것을 범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비단 딴 나라에 간 사람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집에 앉아서 한 사람을 접대하고 한 물건을 접할 때에도 다 그렇지 않을 수 없으니, 소위 말이 충성되지 못하고 행실이 도탑지 못하면 비록 자기 고을에서도 살 수 없다는 것이 곧 이것이다. 알지 못하는 자는, 이것은 연암이 남들에게 세상에 행세하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할 것이나, 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바로잡는 법이 본래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한 개의 반선(班禪)이지마는 처음 듣고 처음 보는 것인데, 그 괴상망측한 것은 말로는 능히 그 모양을 짐작할 수 없고, 보아도 그 빛깔을 능히 감정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말한 바는 한 날 한 자리에서 한 것이 아니요, 제각기 들은 바와 전한 바를 가지고 말했기 때문에, 그 천심(淺深)과 상략(詳略)함이 이처럼 같지 않았다. 대개 모두 놀랍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며, 칭찬하는 듯도 하고 조소하는 듯도 하며, 기괴하고 거짓말 같아서 모두 믿을 수가 없으나, 아무튼 이것들을 주워 모아서 쓰고, 조잡한 것들을 서술해서 한 편의 글을 이룬 것이다. 신령스럽고 현란스럽고 크고 곱고 비기도 하고 밝기도 하며, 섬세하고 교묘하여 평범하지 않은 이 문자는, 소위 활불이란 자의 법술의 내력을 특별히 깊이 캐어서 썼을 뿐만 아니라, 만나서 서로 이야기한 여러 사람들의 성정과 학식, 용모와 말솜씨 등도 똑똑히 나타내고 있었다.”
하였다.
[주C-001]중존평어(仲存評語)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주D-001]다섯 …… 못한 일 : 연암의 심세편(審勢編)에 자세히 나온다.
[주D-002]소위 …… 없다 :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나오는 말.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