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熱河日記) - 피서록(避暑錄) [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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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피서록(避暑錄) [1번]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1번]
피서록(避暑錄)
1. 피서록서(避暑錄序)
2. 피서록(避暑錄)
[2번]
3. 주곤전소지(朱昆田小識)
피서록서(避暑錄序)
이 《피서록(避暑錄)》은 내가 피서산장(避暑山莊)을 구경갔을 때에 쓴 글이다. 대체로 열하에는 36개소의 이름난 경치가 있는데, 강희가 일찍이 그 경치 좋은 곳마다 전각 하나씩을 두었다. 그 전각의 이름들은 다음과 같았다.
煙波致爽 芝逕雲隄
연파치상 지경운제
무서청량(无暑淸涼) 연훈산관(延薰山館)
수방암수(水芳巖秀) 만학송풍(萬壑松風)
송학청월(松鶴淸越) 운산승지(雲山勝地)
사면운산(四面雲山) 북침쌍봉(北枕雙峯)
서령신하(西嶺晨霞) 추봉낙조(錘峯落照)
남산적설(南山積雪) 이화반월(梨花伴月)
곡수하향(曲水荷香) 풍천청청(風泉淸聽)
호복한상(濠濮閑想) 천우함창(天宇咸暢)
난류훤파(煖溜喧波) 천원석벽(泉源石壁)
청풍록서(靑楓綠嶼) 앵전교목(鶯囀喬木)
향원익청(香遠益淸) 금련영일(金蓮映日)
원근천성(遠近泉聲) 운범월방(雲帆月舫)
방저임류(芳渚臨流) 운용수태(雲容水態)
징천요석(澄泉遶石) 징파첩취(澄波疊翠)
석기관어(石磯觀魚) 경수운잠(鏡水雲岑)
쌍호협경(雙湖夾鏡) 장홍음련(長虹飮練)
보전총월(甫田叢樾) 수류운재(水流雲在)
그리고 전체를 합하여 피서산장이라 이름하고 강희가 친히 기(記)를 지었다.
“금산(金山)은 줄기차게 뻗어 내리고 따뜻한 샘은 솟구쳐 흐른다.
구름 잠긴 동학은 깊디깊고 돌 쌓인 못엔 푸른 아지랑이 둘렸다.
경계가 넓고 초목이 무성하니 밭집에도 해롭진 않으리.
바람이 맑아 여름철도 서늘하니 사람의 수양할 곳으로 적당하구나.
내 일찍이 여러 차례 양자강 가를 순행하여 깊이 남방의 수려함도 알고,
두 번이나 진롱(秦隴 섬서ㆍ감숙성 지방)에 거둥하여 더욱 서토의 사정을 잘 알았으며,
북으로는 용사(龍沙 흑룡강 지방)를 지나고, 동으로는 장백산을 구경하여
산천과 인물의 아름다움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나, 모두 나의 좋아하는 바 아니었고
다만 이 열하는 길이 북경으로부터 가깝고, 땅은 거친 들판을 새로이 개척하였구나.
이에 높고 낮으며 멀고 가까운 거리를 측량하며, 빼어난 봉우리 자연의 형세를 따라서
소나무를 의지하여 집을 짓고 물을 이끌어서 정자에 둘렀으니, 이는 모두 사람의 힘으로써는 될 바가 아닐 것이다.
꽃다운 벌판을 빌렸을 뿐, 서까래의 새김이나 기둥의 단청에도 아무런 허비가 없었으나,
아늑한 임천(林泉)이 나의 정서에 맞음을 기뻐하노라.
날개가 찬란한 새들은 푸른 물 위에 노닐되 사람을 피하지 않고, 노는 사슴들은 저녁 볕을 띠고 떼를 이루었구나.
솔개는 공중에 날고 고기는 물에 뛰노니 자유로운 분위기를 따름이요,
파란 빛과 붉은 기운은 마치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오르내리는구나.
이것이 곧 피서산장의 경개이다.”
이 글은 강희 50년(1711년) 6월 하순에 쓴 것이나 강희가 늘그막에는 주로 열하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때는 바야흐로 8월이 되었건만 북방의 더운 기운이 오히려 찌는 듯하므로, 나는 늘 흰 모시 홑적삼을 입었는데 대낮이 되면 땀이 흐르곤 했다. 유람하다 짬이 날 때마다 의자를 잿방 밖의 큰 회나무 밑으로 옮겨서 바람을 쏘였다. 이에 귀에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마음에 느낀 것들을 그 자리에서 얻는 대로 적어 보았다. 이름을 《피서록》이라 한다.
[주C-001]피서록서(避暑錄序)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으나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피서록(避暑錄)
기려천(奇麗川)은 만주 사람이다. 그는 성격이 몹시 교만하여 윤형산(尹亨山)을 멸시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으나, 형산은 일부러 알지 못하는 체하고 얼굴에나 말씨에도 겸손할 뿐이다.
대체로 윤(尹)은 기(奇)에 비하여 나이가 20여 세나 많고 벼슬도 역시 조금 높은 편이다.
그러나 그는 한인이라 해서 마치 나그네처럼 된 처지였으니, 그 정세가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여천이 거처하고 있는 방이 나의 사관과 문이 마주 보이는 터라,
내가 형산을 찾아서 이야기를 하려면 반드시 여천의 문 앞을 지나치게 되므로 나는 반드시 여천에게 먼저 들른다.
그러면 형산은 나의 뜻을 모르고서 반드시 나의 뒤를 따라서, 그곳에 잠깐 지체했다가
곧 일어서면서 다른 곳에 약속이 있다고 핑계한다.
여천은, “윤공(尹公)이 다른 곳으로 간다는 말이야.”
하고,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깔깔대고 웃는다.
그리고 형산도 언젠가 돌아앉아서,
“저 비둘기처럼 생긴 눈이 여태껏 탈을 벗지 못해.” 하면서 악평한다.
만족과 한족 사이의 심한 알력을 이로써 짐작할 수 있겠다.
또 어느날 여천이 나에게,
“전에 어떤 산동에 포정사(布政司)로 부임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탐관으로 이름이 높았답니다. 그가 일찍이,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자 / 視民若子
법률은 산같이 엄중하리 / 立法如山
라는 주련(柱聯) 두 구를 지어서 아문(衙門)에 붙였더니, 그날 밤에 어떤 이가 그 끝에다 잇달아서,
우양도 어버이 것 창고도 어버이 것이니 / 牛羊父母倉廩父母
우리는 다만 아들 직분을 지키자 / 共爲子職而己矣
보물도 예서 일고 재산도 예서 생기니 / 寶藏興焉貨財興焉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일까 보냐 / 此豈山之性也哉
라고 썼더라는군요.” 하면서 말을 나직이 한다.
이는 아마 형산을 가리키는 듯싶기에 나는 그 뒤에 우연히 형산더러,
“당신은 일찍이 산동 포사로 부임하신 일이 있소.” 하고 물은즉,
형산은, “그런 일이 있었지요.” 하였다.
그 뒤에 연경(燕京)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 인사들과 이야기하다가 기(奇)를 아느냐고 물었으나 모두들 머리를 흔들 뿐이다. 풍병건(馮秉健)이 홀로 분개하는 어조로,
“점잖은 선비가 어찌 되놈의 새끼를 안단 말이요.” 한다.
나는 또, “윤형산은 어떤 인물인가요.” 하고 물은즉,
모두들 기쁜 빛으로, “그는 참으로 백락천(白樂天)과 같은 유의 인물이지요.” 하였다.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 남쪽 골목 둘째 문은 동씨(董氏)의 집이다. ‘쌍청문(雙淸門)’이란 현판이 붙었는데 강희의 어필이다. 또 지금 황제가 쓴 ‘양세삼효(兩世三孝)’라는 액자가 붙어 있다. 이곳은 구외(口外)의 민가(民家)임에도 불구하고 천자의 거둥이 세 번이나 있었다 한다.
강희가 절강(浙江)에 순행할 때에 산음(山陰)에 살고 있는 노인 왕석원(王錫元) 등 5형제를 불러 보았다. 그들은 누런 머리에 어린 아이의 이빨이며 서로 붙들고 다닌다. 황제가 행궁(行宮)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그들 다섯 중 맏이와 둘째는 쌍둥이로 나이가 80이요, 그 다음은 78, 다음은 76, 다음은 75인데, 통계하면 3백 89세이다. 그들의 자손은 모두 45명인데, 각기 비단을 나누어 주고 또 어필로 ‘일문인서(一門仁瑞)’라는 액자를 써서 주고 황태자는,
다섯 가지 비단 나무 이 세간의 영화이고 / 五枝錦樹榮今代
백세토록 높은 나이 한 집안에 모였구나 / 百秩仙籌萃一門
라는 주련을 써서 주었다.
이로 미루어서 요즘 그들의 정려(旌閭)나 표창하는 은전이 전대보다 지나침을 짐작할 수 있겠다.
북진묘(北鎭廟) 뜰에 서 있는 늙은 솔을 지금 황제가 친히 그림 그려서 검은 돌에 새겨 바위 뱃구레를 파고 간직했는데, 그 바위의 높이는 겨우 한 길 남짓하다.
이를 명(明) 때에는 취운병(翠雲屛)이라 불렀더니 지금 황제가 보천석(補天石)이라 고치고 그림 곁에 시를 지어서 새겼다.
북진묘 서이러냐 일산처럼 퍼진 솔이 / 鎭廟門西似蓋松
절반은 시들었고 푸른 잎도 상기로다 / 半存枯幹半籠葱
정신이 어렸으니 포박자(갈홍(葛洪)의 호)를 보는 듯이 / 凝神如見抱朴子
얼굴을 그리자니 진소옹(미상)이 내 아니다 / 圖貌慙非陳少翁
밑에 서서 볼 양이면 비나 개나 의심이요 / 立下忽疑晴與雨
앞에 뵈는 그 무엇이 색이 공임 깨닫고녀 / 現前可悟色兮空
유월이라 더운 날에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 何當六月其根坐
낭랑히 글을 외며 맑은 소 들어보렴 / 讀疏仡聽謖謖風
그리고는 건륭의 낙관이 찍혀 있다. 또,
“갑술년(1754년)에 내가 동쪽으로 순행하는 길에 친히 북진묘에 치제하고, 예가 끝나자 묘 속에 들어가서 두루 구경하였다. 늙은 솔 한 그루가 있는데 그 반은 벌써 철석같이 굳은 가장귀였고, 다만 동편 한 가지가 울창할 뿐이다. 오히려 기이하고 에굽은 품이 사랑스러웠다. 이내 나무 밑에 서서 이 그림을 그렸다. 구월 이십사일 어필.”
이라는 글이 있고 ‘천지위사(天地爲師)’라는 도장이 찍혔다. 황제의 글씨나 그림이 모두 공교롭다.
바위 곁에 또 삼한(三韓) 사람 김내(金鼐)의 시가 있었다.
의무려산 이마 턱에 때때로 오르거다 / 時登醫巫閭山頭
구름이랑 바다랑 한 눈에 다 보리라 / 雲舍滄桑望裏收
돌 옷과 바위 털은 티끌 자취 혐의롭고 / 石髮巖衣嫌跡擾
우는 새 읊는 매미 사람 소리 섞이누나 / 鳥鳴蟬噪帶人幽
공중에 솟은 나무 늙은 용은 어디 가고 / 凌空樹古龍飛去
그 곁에 피는 꽃이 봉황 성터 남아 있네 / 傍地花新鳳壘留
북두성 높디높아 하늘 괴는 기둥이라 / 北斗惟神天一柱
갸륵하신 우리 님은 억만 년을 누리소서 / 億年萬紀庇皇秋
그 끝에는 ‘화공(和公)’이란 낙관을 찍었으며 필력(筆力)이 몹시 옹졸하다. 혹은,
“이 시는 조선 사람 김내가 지은 것이다.”
하였으나, 이는 요동(遼東)을 또한 삼한이라 일컫는 줄을 모르고 한 말이다.
고정림(顧亭林)은 일찍이 관함이나 지명에 옛 이름을 빌려서 쓰는 것을 배격했으나, 아직도 그를 본받아 남용하는 이도 없지 않을뿐더러, 이 시가 비록 잘된 것은 아닐지라도 역시 우리나라 사람의 구기(口氣)는 아니다.
난설헌(蘭雪軒 이조(李朝)의 여류 문학가 허초희(許楚姬)) 허씨(許氏)의 시는 《열조시집(列朝詩集 전겸익(錢謙益) 저)》과 《명시종(明詩綜 주이준(朱彛尊) 저)》에 실려 있는데, 혹은 이름으로, 또는 호를 쓰되 모두 경번(景樊)으로 적혀 있다.
내 일찍이 〈청비록서(淸脾錄序 《청비록》은 이덕무(李德懋) 저)〉를 쓸 때에 상세히 고증한 일이 있었다.
무관(懋官 이덕무의 자)이 연경에 있을 때에 그것을 축 한림(祝翰林) 덕린(德麟)과 당 낭중(唐郞中) 낙우(樂宇)와 반 사인(潘舍人) 정균(庭筠)의 세 사람과 함께 돌려 가면서 읽고 모두 칭찬했다 한다.
이제 내가 이곳에 와서 시 중의 빠지고 그릇된 곳을 논하다가 이내 허씨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윤공(尹公)이 말하기를,
“우회암(尤悔菴) 동(侗)이 지은 〈외국죽지사(外國竹枝詞)〉를 보면 그 첫머리에 귀국의 것을 지어 실었는데,
양화도 드는 어귀 살구꽃이 붉으레라 / 楊花渡口杏花紅
팔도 민요들이 그 나라의 국풍이라 / 八道歌謠東國風
못내 님을 그리노니 저 비경 여도사를 / 最憶飛瓊女道士
들보 올려 글 지려고 달나라에 노닌다오 / 上梁曾到廣寒宮”
라고 하였고,
그는 또 주석을 내기를,
“규수 허경번이 나중에는 여도사가 되었으며, 그는 일찍이 광한궁 백옥루(廣寒宮白玉樓)의 상량문(上梁文)을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이에 허경번에 대한 그릇된 것을 상세히 변명하였더니, 윤과 기 두 사람이 각기 나누어 기록하여 간직한다. 중국의 명사들이 마땅히 이 일로써 또 한 번 저서의 자료를 삼을 것이다.
대체로 규중 부인으로 시를 읊는 것은 애초부터 아름다운 일은 아니나, 이 외국의 한 여자로서 꽃다운 이름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니, 가히 영예스럽다고 이르지 않을 수 없겠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인으로서는 일찍이 그의 이름이나 자가 본국에도 나타나지 못했은즉, 이 난설의 호 하나라도 오히려 분에 넘치는 일이어늘, 하물며 경번의 이름으로 잘못 알고는 군데군데에 기록되어서 천추에 씻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가 어찌 뒷세상의 재사(才思)가 풍부한 규중 재녀들의 의당히 경계하여야 할 거울이 아니겠느냐.
여러 가지 요술 중에는 술을 만들어 낸다는 주석(酒石)이 가장 요긴한 물건이다. 만일 참으로 이러한 돌이 있다면 의당히 천하에 다시 없는 보배가 될 것이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명(明)의 천계(天啓) 연간에 왜(倭)가 유구(琉球)를 쳐서 그 임금을 사로잡았는데, 유구의 태자가 그 나라의 세보(世寶)를 싣고 가서 그 아버지를 속(贖)하려 하다가, 배가 풍파에 휩쓸려서 제주(濟州)에 닿았다. 목사(牧使) 아무가 배에 무슨 물건이 실렸느냐고 물으니, 태자가 주천석(酒泉石)과 만산장(漫山帳)이 있다고 답하였다.
주천석은 모양이 마뇌(瑪瑙)처럼 생겼는데 가운데가 오목하게 파이고 물 한 잔이 들 정도이다. 맑은 물을 채우면 곧 아름다운 술이 되고, 만산장은 바닷거미의 실에다 약으로 물빛을 들여서 뜬 것인데, 적게 펼치면 집 하나를 덮을 정도이나 넓게 펼치면 산 하나를 덮을 수 있으며, 작은 놈으로는 모기나 파리, 큰 놈으로는 뱀이나 이무기 따위가 모두 그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 목사가 그것을 얻고자 청하였으나 태자는 허락하지 않으므로, 드디어 군사를 내어서 배를 에워싸니 태자가 돌과 창을 모두 바다 속에 던졌다. 목사가 배에 실은 물건을 다 몰수하고는 태자를 죽였다.
태자가 죽기에 임하여,
착한 말은 분간 없고 몹쓸 옷을 입은 이 몸 / 堯語難分桀服身
꿈이러냐 이 죽음을 푸른 하늘 아오리까 /臨刑何暇訴蒼旻
삼량이 묘혈 판들 누구라서 속해 낼꼬 / 三良臨穴誰能贖
두 아들 배를 탈 제 도적 어이 잔폭하오 / 二子乘舟賊不仁
백골은 모래벌판 거친 풀에 얽혔어라 / 骨暴沙場纏有草
혼이야 고국 간들 슬퍼할 이 누구던고 / 魂歸古國吊旡親
죽서루 밑 저 물 소리 처량도 한져이고 / 竹西樓下滔滔水
만고의 끼친 한을 분명히 울어 예네 / 遺恨分明咽萬春
라는 시 한 편을 읊었다.” 한다.
이 사실은 이중환(李重煥 이조 때 학자. 자는 휘조(輝祖))의 《택리지(擇里志)》에 실렸으며, 목사는 대간의 탄핵을 만나서 사형에 한 등급을 감하여 멀리 귀양보냈다 하였다. 나는 일찍부터 이 기록이 하나의 전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 일이 과연 참말이라면 목사의 죄악은 비록 거리에다 시신을 진열한다 해도 남음이 있을 것인데, 이제 그의 자손이 어찌 길이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유구 중산왕(中山王) 상녕(尙寧)이 해마다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편에 자주 글월과 예폐를 부쳐 오더니, 갑신년 뒤로는 다시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내 이번 걸음에 해외의 모든 나라 사신을 만나보지 못함이 더욱 유감이다. 아까 구경하던 요술 중의 주석으로 미루어 보면, 유구의 주석도 역시 요술의 하나인 듯싶다. 그리고 민중(閩中 복건성) 사람 왕삼빈(王三賓)이 말한 바와 같이, 바닷거미가 범을 얽는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이 만산장(漫山帳)은 이치에 그럴 법도 하다.
열하의 술집들은 몹시 번화하여 연경에 비해서 손색이 없었다. 바람벽 위에는 명인들의 글씨와 그림이 많이 붙어 있다. 유하정(流霞亭)에는,
높은 이름 좋은 벼슬 이제야 아랑곳가 / 功名富貴兩忘羊
나의 삶이 얼마런고 이 술 한 잔 기울이세 / 且盡生前酒一觴
고운 꽃 삼백 포기 심어 두고 보려무나 / 多種好花三百本
낮은 울타리 비바람에 향내 줄곧 풍기리라 / 短籬風雨四時香
라는 시가 붙어 있다. 또 취구루(翠裘樓)에 들렀더니 역시 벽 사이에 써 붙인 시가 있는데 먹 흔적이 아직도 젖은 듯싶다. 우민중(于敏中)이나 아극돈(阿克敦)의 필치인 듯싶기에 술아범더러,
“이 글씨 쓴 분이 누구냐.” 고 물으니,
그는, “아까 어떤 손님이 이걸 써서 걸어 두곤 막 나갔답니다. 그러니 그의 성명이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한다.
그 시에 이르기를,
님을 섬겨 하올 맘은 한당만 못잖건만 / 致主初心陋漢唐
이 몸이 늙어 가서 밭집 아비 되었구나 / 暮年身計落農桑
내 낀 숲 속 소 발자국 동문 밖 나는 길에 / 草煙牛跡東郊路
술다락에 높이 누워 저녁 볕을 보내누나 / 又臥旗亭送夕陽
(육유(陸游) 작) 라고 하였다.
이 두 시는 모두 어떤 시대에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겠으나, 바람을 쏘이면서 한 번 읊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감개가 무량하게 할 뿐이다. 둘 다 부채에 써 두었다가 돌아와서 윤형산에게 물은즉, 그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으나 또 잊어버리고 말았다.
윤형산이 나더러,
“고려의 박인량(朴寅亮 고려 문종(文宗) 때 문학가. 자는 대천(代天))이 당신에게 어떻게 되시나요.” 하고 묻기에
나는, “귀국을 말한다면 모수(毛遂)와 모담(毛聃 미상)과 같은 터수일 것입니다. 저는 애초에 토성(土姓)으로 여덟 집이 나눠졌으므로 관향이 각기 달라서 서로 한 겨레가 되지 못하며, 역시 감히 분양(汾陽)을 통곡(痛哭)할 수도 없는 터수입니다.”
한즉,
형산은 또, “그러면 강희 연간에 박뇌(朴雷)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자는 명하(鳴夏)요, 역시 조선 사람이라 합디다. 이제 대청(大淸)이 천하를 통일하여 중외가 한 집이 되고 보니 결코 푸른 입술의 혐의란 없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푸른 입술의 혐의란 무슨 말입니까.” 한즉,
형산은,
“송(宋)의 원풍(元豊 송 나라 신종(神宗) 때의 연호) 연간에 고려 사신 박인량이 명주(明州)에 이르렀을 때에, 상산위(象山尉) 장중(張中)이 시로써 전송하였더니, 박인량의 답시(答詩) 서문에,
‘꽃 같은 얼굴이 곱게 불을 부니 이웃 여인의 푸른 입술이 움직임을 부끄럽게 하고, 상간(桑間)의 야비한 소리로써 영인(郢人)의 백설(白雪) 곡조를 잇노라.’
는 글이 있었습니다. 언관(言官)이 낮은 벼슬에 있는 장중이 사사로 외국의 사신을 교제함은 부당한 일이라 하여 탄핵했습니다. 신종(神宗)이 좌우에게 ‘푸른 입술’이란 어떠한 고사인가 하고 물었으나, 대답하는 자 없어 조원로(趙元老)에게 물었더니,
원로가 아뢰기를,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어떤 이가 본즉 이웃집 사내가 그 아내의 불 부는 것을 보고,
불 부는 예쁜 맵시 붉은 입술 오물오물 / 吹火朱唇動
섶나무 때고 나니 하얀 팔뚝 드러났네 / 添薪玉腕斜
멀리서 보아하니 연기 가린 저 얼굴이 / 遙看煙裏面
피는 것이 꽃이런가 안개 더욱 은은해라 / 恰似霧中花
는 시를 읊었답니다.
그 아내가 그의 남편에게 하는 말이, 당신도 어찌 그를 본받지 않느냐고 하였을 때에, 남편은 대답하기를, 당신이 먼저 불을 불면 내 응당 본떠서 시를 지으리라 하고, 이내 읊되,
불 부는 님의 양은 푸른 입술 벌렁벌렁 / 吹火靑唇動
장작을 때고 나니 검정 팔뚝 비꼈구나 / 添薪墨腕斜
멀리서 보아하니 연기 가린 그 상판은 / 遙看煙裏面
무엇에 비할쏜고 구반다(추악한 귀신의 이름)가 이 아니냐 / 恰似鳩槃茶
라고 하였었는데, 이 이야기는 본래는 왕벽지(王闢之)의 《민수연담록(澠水燕談錄)》에서 나왔다 하였습니다.” 한다.
내가 학지정(郝志亭)더러,
“장군은 비록 무관 출신이지만 장고(掌故)에 몹시 익숙하고 문필이 유려하여, 비록 이름 있는 학자나 늙은 선비라도 장군의 짝이 될 자 드물까 하오니, 귀국의 무관은 반드시 문관과 학문이 넉넉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장군은 특히 유가의 연원이 깊어서 정원(定遠)의 문장이 금석에 새겼음을 본받은 것이옵니까.” 하고 물었더니,
지정은,
“저의 집은 대대로 농업에 종사하더니 이제 다행히 성스러운 시대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수(隨 한(漢) 때의 장수 수하(隨何))ㆍ육(陸 미상)ㆍ강(絳 한(漢) 때의 장수 주발(周勃). 강은 그의 봉호)ㆍ관(灌 한(漢) 때의 장수 관영(灌嬰))의 한스러운 일은 그 유래가 벌써 오래지 않습니까. 저 같은 자는 수레에 싣거나 말로 셀 수 있을 만큼 많으니 무엇을 칭찬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태학사(太學士) 아계(阿桂)와 얼마 전에 태학사를 지낸 서혁덕(舒赫德)과 같은 분은 모두들 문장이 태평 성대를 이룩할 만하며, 무략이 어지러운 난리를 평정할 수 있고, 부귀와 수복(壽福)은 분양(汾陽)ㆍ서평(西平 미상)이요, 공로와 훈벌은 배진(裵晉 배도(裵度). 진은 봉호)ㆍ문로(文潞)와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문관도 할 수 없고 무관 역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사이(四彝)가 모두 복종하고 풍진이 고요하니, 저 같은 자는 가위 한 개의 썩은 무부(武夫)였습니다.
서른 해 쉬지 않고 옛 병서를 읽고 나서 / 三十年來學六韜
꽃다운 그 이름이 당시에 문장이라 / 英名嘗得預時髦
나라에 몸을 던져 금 갑옷 입었을 제 / 曾因國難披金甲
아무리 가난해도 보배칼을 팔진 않네 / 不爲家貧賣寶刀
뛰노는 이 팔뚝에 화살 힘이 약다 하랴 / 臂健尙嫌弓力輭
오히려 밝은 눈에 싸움 터를 바라보네 / 眼明猶識陣雲高
어젯밤 뜰 앞에서 가을 바람 일어나니 / 堂前昨夜秋風起
꽃 놓인 옛 전포를 보기도 부끄러라 / 羞見團花舊戰袍
이 조한(曹翰)의 시를 외고 나면 그들이 안장에 걸터앉아서 사면을 돌보던 모습이 못내 그리워질 뿐입니다.
옛날부터 글 읽은 장수로서 손무(孫武)ㆍ오기(吳起)ㆍ염파(廉頗)ㆍ악의(樂毅)ㆍ왕전(王翦)ㆍ조충국(趙充國)ㆍ반초(班超)ㆍ심경지(沈慶之)ㆍ한세충(韓世充) 등은 모두 70세가 넘도록 장수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웃으면서,
“심경지는 글 모르는 까막눈인데, 어찌 글 읽은 장수라 하시요.” 하였더니,
지정은,
“심공(沈公)이 일찍이 농사일은 사내종에게 묻는 것이 의당하고, 길쌈 일은 여종에게 묻는 것이 의당하다고 하였으므로 그의 학문은 그 당시에 벌써 인정된 것이었고, 척남궁(戚南宮)은 더욱 시 공부가 깊어서,
호각 소리 처량할사 초목 그저 쓸쓸하군 / 畫角聲傳草木哀
구름 머리 높이 솟고 돌문이 열리누나 / 雲頭起對石門開
삭풍 불어 술이 찰 제 취하지도 않거니와 / 朔風邊酒不成醉
지는 잎 기러기는 요란스레 우는구나 / 落葉歸鴻無數來
다만 당 원과 쉬어 살기 아예 사라지면 / 但使元戈銷殺氣
이 몸이 헛 늙은들 그 무엇이 한이리요 / 未妨白髮老邊才
높은 봉에 이름 새김 이 내 뉘와 함께 할꼬 / 勒名峯上吾誰與
칼춤 추던 저 대 위에 그리워라 이 장군이 / 故李將軍舞劍臺
이라는 시를 읊었답니다.
그리고 보면 그의 장수 재주는 미칠 수 있겠으나 시 재주는 미칠 수 없겠습니다그려.” 하고 웃었다.
저녁 무렵에 풍윤성(豐潤城)에 올랐더니 수염이 아름다운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내 앞에 와서 손을 들어 읍하면서,
“저의 성명은 임고(林皐)요, 절강에 살고 있습니다.” 하고,
나의 성명을 물어서 알자 놀라는 듯 반기면서,
“당신은 필시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호)의 일가시죠.” 한다.
나도 역시 놀라서,
“당신은 초정을 어떻게 잘 아시나요.” 한즉,
임고는, “지난해에 초정이 같은 나라 사람 이형암(李炯菴 이덕무. 형암은 그의 호)과 함께 문창루(文昌樓)에 올랐다가 이내 그 고을 호형항(胡逈恒)에게 묵은 일이 있었습니다.” 하고,
성 밑에 있는 한 집을 가리키면서,
“저곳이 곧 호씨(胡氏)의 집이며, 그 바람벽 위에는 초정의 글씨가 붙어 있습니다.” 한다.
이에 변계함(卞季涵)과 정 진사(鄭進士) 각(珏)으로 더불어 함께 그 집을 찾으니 날이 벌써 어둑어둑하였다.
주인이 등불 넷을 켜서 벽을 밝혀 주기에 그 시를 한 번 낭독하니 이것은 곧 우리 집이 전동(典洞 이조 때 서울에 있던 동리)에 있을 때에 형암이 마침 왔다가 지은 것이다.
쓸쓸한 가을 소식 저 나무가 먼저 아네 / 泬㵳秋令樹先知
춥고 더움 다 잊으나 바보되고 말았구나 / 任忘暄涼做白癡
고요한 벽과 벽엔 벌레 소리 유난하곤 / 壁靜萬蟲勤自護
발 틈으로 새 한 마리 엿보기 일쑤러라 / 簾虛一鳥慣相窺
돈 벽일랑 버리거나 이 몸을 더럽힐 듯 / 抛他錢癖如將浼
나를 일러 서음(書淫)이라 하니 나는 이를 사양 않소 / 呼我書淫故不辭
중국 것만 좋다 하여 부질없이 그리 마오 / 好事中州空艶羨
요봉(청(淸) 문학가 왕완(王琬)의 호)은 문필이요 완정(왕세진(王世稹)의 호)은 시라 하네 / 堯峯文筆阮亭詩
백로지(白鷺紙) 두 폭을 붙여서 쓴 것인데, 글씨 자태가 물 흐르는 듯하고 한 글자의 크기가 마치 두 손바닥만 하다. 전날에 우리들이 중국일을 이야기할 때에 부질없이 그리워만 했던 것이 이 몇 해 사이에 차례로 한 번씩 구경하였을 뿐 아니라, 이렇게 먼 만리 타향에서 이 시를 읽으매 마치 고인의 얼굴을 만나는 듯싶었다.
유리창(琉璃廠) 육일재(六一齋)에서 유황포(兪黃圃) 세기(世琦)를 처음 만났다. 그의 자는 식한(式韓)인데, 눈매가 맑고 눈썹이 길기에 나는 그가 혹시 반정균(潘庭筠)ㆍ이조원(李調元)ㆍ축덕린(祝德麟)ㆍ곽집환(郭執桓) 등과 같은 명사인가 하고 의심하였다. 그들은 나보다 앞서 교유한 이가 있으므로 그들의 이름이 입에 향기롭고 그들의 수염이나 눈썹이 눈에 선하였던 까닭이다.
이제 유(兪)와 필담을 하는 사이에 그는 유혜풍(柳惠風 유득공(柳得恭). 혜풍은 호)이 그 숙부 탄소(彈素 유금(柳琴)의 호)를 연경으로 보내는 시에,
고운 국화 시든 난초 님의 수레 비치옵네 / 佳菊衰蘭映使車
맑은 구름 보슬비는 구월도 늦가을 / 澹雲微雨九秋餘
이 말씀 한 토막을 중토에다 전하고저 / 欲將片語傳中土
지북의 어떤 사람 다시금 글을 쓸꼬 / 池北何人更著書
를 써서 보였더니,
황포는, “지북의 어떤 사람이란 누구를 이름이시오.” 하고 묻기에,
나는,
“이것은 완정이 지은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실린 우리나라 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 청음은 호)의 고사를 쓴 것이지요.” 한즉,
황포는, “글쎄, 《감구집(感舊集 왕세진 저)》 가운데 이름은 상헌(尙憲)이요, 자는 숙도(叔度)라는 이가 있더군요.” 한다.
나는, “옳습니다. 저,
엷은 구름 가벼운 비가 시누이의 사당터에 / 淡雲輕雨小姑祠
고운 국화 시든 난초 팔월이 이때라네 / 佳菊衰蘭八月時
라는 시는 곧 청음이 지은 것이요,
또 완정의 논시절구(論詩絶句)에는,
맑은 구름 이슬비가 소고사가 여기로다 / 淡雲微雨小姑祠
빼어난 국화 지는 난초 때마침 팔월이야 / 菊秀蘭衰八月時
조선에서 오신 손님 그 말을 기억하니 / 記得朝鮮使臣語
동쪽 나라 그분네가 시를 과연 알더구먼 / 果然東國解聲詩
이라 하였으니, 혜풍의 이 시는 완정을 본받아서 지은 것입니다.” 한즉,
황포는 또,
“혜풍의 시는 실로 얻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동국 사람이 시를 안다는 말이 과연 그렇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을 더 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다. 나는 곧,
글을 읽다 눈물 지니 옛 역사가 아롱지네 / 看書淚下染千秋
물에 닿은 저 시인은 시름도 하도 할사 / 臨水騷人旡限愁
확사(심덕잠(沈德潛)의 자)가 시를 엮되(《청시별재(淸詩別裁)》) 너무나 초라터라 / 碻士編詩嫌草草
《치청전집》 있다 하니 어디서 구해 볼까 / 豸靑全集若爲求
를 썼더니,
황포는 손을 흔들며 붓으로 ‘치청전집’ 넉 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은 금서(禁書)랍니다. 철군(鐵君 이개(李鍇)의 자)의 선조는 애초에 귀국 사람이라지요.” 한다.
나는, “무슨 까닭으로 금법에 걸렸나요.” 하였더니, 황포는 답을 하지 않는다.
나는 또 잇달아서 그 다음 절의,
시 짓기로 이름 높은 곽집환이 있다고녀 / 有箇詩人郭執桓
담원(곽태봉(郭泰峯)이 거처하는 곳)이 읊은 글귀 동국에 헌사롭네 / 澹園聯唱遍東韓
이제껏 삼 년이라 소식 그저 끊겼으니 / 至今三載旡消息
처량한 이 꿈속에 물 소리 뿐이로세 / 汾水悠悠入夢寒
를 읊었더니,
황포는 평하려 들면서, “곽은 어느 고을에 살고 있는 시인입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그는 태원(太原)에 산답니다.” 하고,
또, “사동망(師東望)과 양유동(梁維棟)은 어떤 인물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모두 다 모른다고 답한다.
나는 또,
“그러면 서점 중에는 갓 새긴 《회성원집(繪聲園集)》이 있겠습니까. 그 책머리에 사와 양의 두 서문이 있고, 역시 저의 것도 있습지요.” 한즉,
황포는 곧 ‘회성원집’ 넉 자를 써서 문수당(文粹堂)서사(書肆)의 편액(扁額)이다. 에 사람을 보내어 구했으나 없다 한다.
나는 또, “선생은 반정균학사를 잘 아시나요.” 하고 물었더니,
황포는, “일찍이 사귀어 본 일은 없습니다.” 한다.
나는, “반 학사의 댁이 종인부(宗人府)에서 벽 하나가 가렸답니다. 제가 나라를 떠나올 때에 어떤 친구가 말하기를, ‘종인부 대문을 지나 오른편으로 돌면 그 댁이 있다.’ 합니다. 그러면 종인부가 여기에서 거리로 얼마나 됩니까.” 한즉,
황포는, “선생이 예부(禮部)를 잘 알고 계시겠지요.”
하고 반문할 즈음에 마침 한 손님이 좌석에 들어앉더니,
“종인부를 찾을 것 없이 그 댁이 여기서 멀지 않소이다. 저 양매서가(楊梅書街)에 있는 단씨(段氏)의 백고약포(白槀藥鋪)에서 마주 선 문이 곧 반이 우거한 곳입니다.” 하고 설명한다.
황포가 그와 무어라고 이야기하더니 곧,
“지난해 가을에 그가 이곳으로 옮아왔다 하는데, 선생은 누구를 통해서 그를 아셨나요.” 한다.
나는,
“저의 나라 사람 홍대용(洪大容)이 건륭 병술년(1766년)에 공사(貢使)를 따라서 연경에 왔다가 반을 만났고, 그 뒤에도 그와 서로 사귀어 본 이가 있으니, 저는 비록 그를 보지 못했으나 마음으로는 벌써 서로 통했답니다. 반은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여 일찍이 스스로 복숭아와 버드나무를 그리고서,
우리 집은 서자호(서호(西湖)) 물가를 둘린 나무 / 吾家西子湖邊樹
푸른 잎 붉은 꽃이 때마침 이월이라네 / 淺碧深紅二月時
이렇듯한 저 강남을 돌아가지 못하고는 / 如此江南歸不得
연한 티끌 분가루요 가는 꿈은 실일러라 / 軟塵如粉夢如絲
는 시를 써서 홍대용에게 주었답니다.” 한즉,
황포가 크게 권주를 치면서,
“선생의 벗 홍 수재(洪秀才)의 아름다운 글귀를 듣고자 합니다.” 한다.
나는, “일찍이 외우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혜풍(惠風)이 탄소(彈素)를 연경으로 보내는 시에서,
푸른 잎 붉은 꽃이 때마침 이월이라오 / 淺碧深紅二月時
연한 티끌 분가루요 가는 꿈은 실일러라 / 軟塵如粉夢如絲
항주가 낳은 선비 그 사람은 반향조를 / 杭州擧子潘香祖
어여쁠사 그의 시구 남시와 어떻던고 / 可憐佳句似南施
하였으니, 우리나라 시인들이 중국의 명사를 그리워함이 이렇답니다.”
한즉, 황포는 또 이에 권주를 치면서,
“반은 진실로 이름 있는 선비이긴 하나 혜풍의 것도 역시 아주 아름답습니다.” 하고,
황포는 곧 그 종이를 거두어 품속에 넣으면서,
“제가 방금 〈구당시화(毬堂詩話)〉를 쓰고 있는데 다행히 이런 한 토막 재미있는 이야기를 얻었소이다.”
하고는 이내 같이 문을 나와서 작별할 제,
황포는, “이 길이 바로 양매서가로 가는 것입니다. 단씨의 약포는 저 문패에 큰 물고기를 그린 곳이 그 집이랍니다.”
하고, 한 곳을 가리켰다.
강녀묘(姜女廟)는 산해관 밖에 있는데, 이는 이른바 망부석(望夫石)이다.
왕건(王建 당(唐) 시인. 자는 중초(仲初))의,
고운 님 바라던 곳 강물만이 예는구나 / 望夫處江悠悠
이 몸이 돌 될망정 고개도 안 돌리네 / 化爲石不回頭
나날이 이 산 위에 바람 불고 비 내릴 제 / 山頭日日風和雨
님이 돌아오시는 땐 이 돌 응당 입 열 것을 / 行人歸來石應語
이란 시가 곧 이것을 말함이다.
세간에서는 망부석이 이 한 군데뿐이 아니라 하나는 태평(太平)에 있고, 또 하나는 무창(武昌)에 있으니, 그러면 왕건이 읊은 것은 이 돌이 아님을 알겠다. 지금 이곳에 행궁(行宮)이 있는데, 그 웅장ㆍ화려함이 북진묘(北鎭廟)에 못지 않고, 또 과친왕(果親王)이 금자(金字)로 쓴 ‘진고명적(振古名蹟)’이라는 주련이 있으며,
건륭 8년(1743년) 10월에 황제가,
서늘 바람 늙은 가지 저녁 볕에 우는 듯이 / 涼風頹樹吼斜陽
이제껏 구슬프게 고운 님을 그리웁네 / 尙作悲聲吊乃郞
천고의 내 절개를 자랑코자 하랴마는 / 千古旡心誇節義
이 몸이 죽고 죽음 강상을 위함이네 / 一身有死爲綱常
그날부터 내려오며 강녀라 이름 불러 / 由來此日稱姜女
당년에 그 슬픔은 기량을 울었다네 / 盡道當年哭杞梁
이 마음 본받아서 아름다움 지킨다면 / 長見秉彝公懿好
전한 말이 그르다손 무엇이 해로우랴 / 訛傳是處也何妨
라는 시를 지어서 돌에 새겼고, 돌 곁에는 작은 정자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진의정(振衣亭)이다. 대체로 청의 황실은 대대로 명필이 많으나 과친왕(果親王)이 더욱 이에 능하여 미원장(米元章)보다도 나을 듯싶었다.
사신을 따라서 중국에 들어가는 이는 반드시 칭호 하나씩을 가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역관을 종사(從事)라 하고, 군관을 비장(裨將)이라 하며, 놀 양으로 가는 나와 같은 이는 반당(伴當)이라 부른다. 우리나라 말에 소어(蘇魚)를 반당(盤當)이라 하니 대개 반(盤)과 반(伴)의 음이 같은 까닭이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면 아까 이른바 반당은 은빛 모자와 정수리에 푸른 깃을 꽂고 짧은 소매에 가뿐한 행장을 차리게 된다. 이를 본 길가의 구경꾼들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새우라고 부른다. 어째서 새우라 하는지는 모르나 대체로 무부(武夫)의 별호인 듯싶다. 또 지나는 곳마다 어린이들이 떼를 지어 몰렸다가 일제히,
“가오리가 온다. 가오리가 오네.” 하고, 또는 말 꼬리에 따라오면서 다투어가며 지껄인다.
대체로 가오리가 온다는 것은 고려(高麗)가 온다는 말이다.
나는 일행더러,
“이제 세 가지 물고기로 변하는구먼.” 하고는 웃었다.
모든 사람들은, “어째서 세 가지 고기라 하는고.” 한다.
나는,
“길을 떠날 때에는 반당이라 하였으니 이는 소어요,
압록강을 건넌 뒤로는 새우라고 하니 새우도 역시 고기의 한 족속이요,
되놈 애들은 모두 가오리(哥吾里)하고 부르니 이는 홍어(洪魚)가 아닌가.”
한즉, 사람들은 모두 크게 웃었다.
나는 이내 말 위에서 시 한 절을 불렀다.
푸른 깃 은 정수리 의젓한 무부로서 / 翠翎銀頂武夫如
천리라 요동 길을 사신 뒤를 따랐구나 / 千里遼陽逐使車
중국 땅에 들어서자 고기 별호 세 번째와 / 一入中州三變號
예부터 못난 이 몸 종이 씹는 좀이라오 / 鯫生從古學蟲魚
고려(高麗)는 애초에 고구리(高句驪)로부터 나온 이름이었는데, ‘구(句)’ 자와 ‘마(馬)’ 변을 생략한 것이다. 만일 산과 물이 곱다고 풀이해서 ‘고려’라고 읽는다면 이는 천자문(千字文) 중에 있는 금생려수(金生麗水)의 ‘려(麗)’ 자가 될 것이니 이는 거성(去聲)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평성(平聲)의 ‘리(麗)’로 발음한다. 수ㆍ당 때에도 고구리를 모두 ‘고리’라고 불렀으니 ‘고리’란 이름은 그 유래가 벌써 오래다.
이무관(李懋官)은 일찍이,
“‘고구리’란 말은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 처음 나타났으며, 그들 조상은 금와(金蛙)인데, 우리나라 말로 와(蛙)를 개구리(皆句麗)라 하고 또는 왕마구리(王摩句麗)라 한다. 옛 사람들이 몹시 질박하여 곧 임금 이름으로써 나라 이름을 삼고는 성을 그 위에다 씌워서 ‘고구리’가 된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비록 일시의 조롱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 것 같지마는 제법 이치에 맞는 말이다. 외국의 방언이 대체로 소리는 있으나 글자가 없는 것이 많으므로 중국 사람들이 그 소리를 한자로 옮겼을 때 예를 들면, 은(銀)을 몽고(蒙古)라 하고, 아름다운 금을 애신각라(愛新覺羅)라 하며, 장사(壯士)를 예락하(曳落河)라고 부르는 따위가 곧 그것이다.
산서(山西)에 살고 있는 사람 곽집환(郭執桓)의 자는 봉규(圭)요, 또는 근정(勤庭)이며, 호는 반오(半迂)요, 혹은 동산(東山)이며, 또는 회성원(繪聲園)이라 한다. 그는 건륭 병인년(1746년)에 났으며, 시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능하고 집이 대대로 부유하였으며, 그의 집은 호산(虎山)을 뒤에 지고 앞에는 노천(蘆泉)이 흐르고 있다. 그의 아버지 태봉(泰峰)의 자는 청령(靑嶺)이요, 호는 금랍(錦衲)이니 나라에서 중헌 대부(中憲大夫)의 직함을 주었는데, 뒤에 또 자정 대부(資政大夫)에 승진되었다. 금랍은 날마다 심덕잠(沈德潛)ㆍ가락택(賈洛澤) 등 모든 명사와 더불어 그 동산에서 시를 창수(倡酬)하였다.
봉규가 일찍이 그와 한 고을에 살고 있는 등문헌(鄧汶軒) 사민(師閔)을 통하여 우리나라 명사들에게 담원팔영(澹園八詠)의 시를 청하였으니, 담원은 곧 금랍이 거처하는 곳이었으며, 이 시는 대체로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함이다.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써 주었다.
붉은 파초 푸른 바위 담 너머로 솟아 뵈고 / 紅蕉綠石出東墻
한 그루 오동일랑 깊숙한 찰 간직했네 / 一樹梧桐窈窕堂
평생에 오만한 몸 손님 맞이 게을리하여 / 傲骨平生迎送懶
어른님 하시는 일은 저문 산에 절만 하네 / 丈人惟拜暮山光
위는 내청각(來靑閣)을 읊었다.
남쪽 비탈 그림자는 진종일 나풀나풀 / 南陀竟日影婆娑
그림자 물에 지자 나를 불러 누구인가 / 耐可呼吾亦喚他
산들바람 잠깐 불 제 해오라기 저어가니 / 乍綴微風鳬鷺去
요란한 물결 위에 백 동파가 설렁이네 / 不禁撩亂百東坡
위는 감영지(鑑影池)를 읊었다.
코 끝에 희끗하며 보기는 보았건만 / 已觀微白鼻端依
무엇이고 맡으려니 콧구멍이 닫혔고나 / 欲辨臟神掩兩扉
다만 암향 있어 꿈에 들어 싸늘하네 / 獨有暗香侵夢冷
나부산 밝은 달에 매화 가지 춤추는 듯 / 羅浮明月弄輝輝
위는 소심거(素心居)를 읊었다.
卍자 새긴 난간 위에 울한 솔이 덮여 있고 / 松覆深深卍字欄
기운 바위 넌출 달려 푸른 빛이 어울렸네 / 垂蘿欹石翠相攅
그림 배에 바람 불어 가는 대로 두려무나 / 一任畫舫風吹去
밤새도록 들려오는 찬 여울 물소린 듯 / 盡夜寒聲瀉作灘
위는 송음정(松陰亭)을 읊었다.
가볍게 뿜는 놀은 취한 넋을 깨우는 듯 / 噀輕堪醒醉魂花
하늘 말이 높이 달려 푸른 갈기 너울너울 / 天褭行空翠鬣髿
약 캐러 갔다가 옛 신선을 찾으려니 / 採藥將尋劉阮去
적성 아침 놀에 길마저 아득코녀 / 路迷廉閃赤城霞
위는 비하루(飛霞樓)를 읊었다.
꽃은 하도 은근하여 가는 임을 붙드는 듯 / 花似將歸强挽賓
비바람 어이하여 도리어 새우는고 / 囑他風雨反逢嗔
골짝 꽃 꺾어다가 화병에 모셔 두니 / 自從洞裏修甁史
일년 삼백 육십 날이 어느 때가 봄 아니랴 / 三百六旬都是春
위는 유춘동(留春洞)을 읊었다.
옥파리채 맑은 저녁 높은 대에 홀로 올라 / 玉塵淸宵獨上臺
버들 울에 서리 내리고 기러기 슬피 울 제 / 杞棚霜落雁流哀
찢어지듯 한 소리에 가을 구름 흩어지고 / 一聲劃裂秋雲盡
깨끗한 저 하늘에 달님 이제 오신다네 / 萬里瑤空皓月來
위는 소월대(嘯月臺)를 읊었다.
꽃다운 화예부인 이 궁에 들어올 제 / 花蘂夫人初入宮
수줍은 채 말하자니 뺨이 먼저 붉었다네 / 含羞將語臉先紅
앵가의 사리쯤이 그 무엇이 묘하던고 / 鸚哥舍利元非妙
아란의 깨달은 도를 누구라서 알아주리 / 誰識阿難悟道功
위는 어화헌(語花軒)을 읊었다.
봉규가 그가 지은 ‘회성원집(繪聲園集)’ 각본(刻本) 한 권을 나에게 보내고는 서문을 청하였다. 그 글을 읽어본즉 청허(淸虛)하고도 쇄탈(灑脫)하여 세속 사람의 것과 같지 않고, 그는 약관 때부터 그 아버지의 가진 재산을 받았으며, 해내의 사객(詞客)들을 초빙하여 글과 술로 회합을 지었으니, 양유동(楊維棟)ㆍ노병순(盧秉純) 등이 모두 그 서문을 쓰게 되었다. 그의 ‘회진문서정(懷津門西亭)’이라는 시에,
향기 흩자 꽃이 지니 작은 정원 가을이라 / 香散花殘小院秋
추녀 끝에 달린 달은 갈퀴인양 되었으리 / 西亭簾角月如鉤
북으로 예는 외기러기 푸른 공중 스쳐오니 / 北來一雁橫空碧
그 그림자 동남으로 바다에 흘러드네 / 影下東南入海流
라 하였고, 또 그의 ‘제표요산수소폭(題表耀山水小幅)’이라는 시에는,
고기잡이 갯마을에 물빛은 밝았는데 / 蟹舍漁灣水色明
이슬 젖은 나무 숲에 흐렸다가 맑아지네 / 煙條露葉半陰晴
하늘가 구름 사이 외로운 배 멀리 저어 / 雲間天際孤帆遠
적막한 석양 속에 한 소리 기러기를 / 寂寞斜陽一雁聲
이라 하였고, 또 그의 ‘유감(有感)’에는,
강가에 밝은 달빛 가을이 맑노매라 / 壕梁月色照淸秋
회남의 갈대 숲에 내 꿈이 둘리누나 / 夢繞淮南蘆萩洲
초원에 잠긴 비는 갯마을이 고요하고 / 雨暗楚原連浦靜
고목에 급한 바람 강물 소리 섞여 흘러 / 風催古木雜江流
외로운 배 방향 몰라 건곤이 넓은지고 / 孤舟旡依乾坤濶
물과 구름 같은 신세 내 홀로 떠 있구나 / 隻影空持雲水浮
한없이도 쓸쓸한 건 시력이 끝난 그곳 / 最是蕭條極目處
머나먼 만리 길에 끝없는 나의 시름 / 迢遙萬里使人愁
이라 하였다.
내 일찍이 금오(金鰲 북경 궁중에 있는 다리[橋])와 옥동(玉蝀 북경 궁중에 있는 다리[橋]) 사이를 배회한 일이 있으니, 저 우촌(雨村)이조원(李調元) 과 추루(秋樓)반정균(潘庭均), 지당(芷塘)축덕린(祝德麟) 의 모든 명류는 오히려 만나 볼 기회가 있겠으나, 다만 곽씨 집환(執桓)은 세상을 떠난 지가 벌써 6년이나 되었다. 집환이 건륭 을미년 8월에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회성원집’은 아마 중간된 책[本]이 있을 듯 싶기에 유리창 안에서 구하여 보았으나, 끝내 얻지 못했으니 한스럽다.
윤경(尹卿)이 검은 종이로 장정한 작은 부채를 내어서 대와 돌을 그리고 또 젖에다 금가루를 타서,
아름다운 푸른 대는 님의 풍채 보는 듯이 / 綠竹瞻君子
굽어진 저 언덕에는 님의 소리 듣는 듯이 / 卷阿矢德音
이 부채를 펼쳐 내어 그림 한 폭 그려 들고 / 揮毫開便面
두 손을 맞잡으니 마음마저 같으리 / 握手得同心
라고 써 있고, 그 밑에는,
“윤가전(尹嘉銓)이 쓰니 이때에 나이는 70이다.” 라고 썼다.
《명시종(明詩綜)》에 나의 5세조(世祖) 금양군(錦陽君)의 대동관제벽(大同館題壁)의 한 절로서,
한 나라의 홍가(한(漢) 성제(成帝)의 연호) 연간에 일어난 고구려 / 高句麗起漢鴻嘉
쓸쓸한 옛 궁터가 풀숲에 가리웠네 / 宮殿遺墟草樹遮
슬프다 을지문덕 그이가 죽은 뒤에 / 怊悵乙支文德死
나라가 망한 것 후정화 탓 아니라네 / 國亡非爲後庭花
가 실려 있다.
고구려의 일어남은 홍가 연간이 아니요, 곧 한 원제(漢元帝)의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년)이다. 성제(成帝)의 홍가 3년에는 백제(百濟)의 태조 고온조(高溫祚)가 직산(稷山)에 왕도를 정하였던 것을 선조께서 우연히 상고하지 못하셨던 것이다. 유식한(兪式韓)의 《구당록(毬堂錄)》에는 《일지록(日知綠)》을 이끌어서 조선 역사의 자료로서 《서경(書經)》 대전(大傳)을 고증삼아, 이 시 가운데서 쓴 홍가의 그릇된 것을 변증(辨證)하였으니, 중국의 선비들이 고거(考據)와 변증에 알뜰하여 이로써 박아(博雅)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대체로 이러하였다.
장주(長洲 우동이 살고 있던 지명) 우동(尤侗) 회암(悔菴)이 〈외국죽지사(外國竹枝詞)〉를 지으매, 그 첫머리에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그 다음 백여 나라의 민요(民謠)와 토산(土産)의 대개를 소개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일에 대하여서도 그의 서술이 오히려 그릇된 것이 많으니 하물며 해외 만 리의 먼 곳이랴. 더군다나 문자가 없으니 무엇으로써 그들의 토속을 통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조선(朝鮮)을 두고 읊은 시에,
고구려를 하구려로 낮추어서 고쳤다니 / 高句麗降下句麗
조선이란 옛 이름이 보다 더 아름답네 / 未若朝鮮古號宜
천 리란 그 서울엔 온갖 연극 벌여 있고 / 千里王京陳百戱
한 나라 옛 모습을 이곳에서 보겠구나 / 漢城猶見漢官儀
라 하고는 그 주(注)에는,
“옛 조선이 고구려에게 합병되었으므로 수(隋)가 그를 쳤으되 항복받지 못하고는 그를 낮추어서 ‘하구려(下句麗)’라 하였더니, 명(明)의 홍무(洪武) 연간에 그들이 중국에 들어와서 공물을 바치고 조서(詔書)를 받들었으므로, 다시 조선의 이름을 회복시켰으며 한성(漢城)을 서울로 삼았다. 매양 조사(詔使)가 이르면 여러 가지 연극(演劇)을 진열하였다.”
라고 하고,
또 그 뒤를 이어서,
긴 저고리 넓은 소매 절풍건은 머리에다 / 長衫廣袖折風巾
다듬 종이 이리 붓은 한자 쓰면 진서라네 / 硾紙狼毫漢字眞
스스로 쓴 역사에는 전통이 오래다니 / 自序世家傳國遠
《상서》의 구주 속에 살고 있는 그들이라네 / 尙書篇內九疇人
라 하고는, 또,
작은 아이 여덟 살이 황창이라 부르는데 / 小兒八歲號黃昌
칼춤을 추다 말고 백제왕을 베었다네 / 舞劍能誅百濟王
8월이라 한가윗날 회소곡을 다시 불러 / 更唱嘉俳會蘇曲
아침 나절 그 길쌈이 대바구니 가득 찼네 / 朝來蠶績已盈筐
라고 하고, 또 그 주에,
“신라(新羅)의 황창랑(黃昌郞)이 8세에 그의 임금을 위하여 백제(百濟)에 가서 거리에서 춤추는데, 백제왕이 그를 불러 궁중에서 춤추게 하였더니, 그는 이내 그 칼로써 백제왕을 죽였다. 7월 보름에 신라왕이 왕녀(王女)로 하여금 육부(六部)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넓은 뜰에서 길쌈을 시작하여, 8월 보름에 이르러서 그들의 공적을 비교하여 이에 진 자가 비용을 담당하여 주연을 벌이고 서로 노래 부르며 춤추되, 이를 ‘가위[嘉俳]’라 하였다. 그 중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며 회소곡(會蘇曲)을 불렀더니, 그 뒤에 조선이 신라를 깨치고 끼친 소리를 모의하여 황창과 회소의 두 곡조를 만들었다.” 하였다.
기려천(奇麗川)이 《소대총서(昭代叢書 청(淸) 장조(張潮) 저)》 를 내놓고 이 글을 뽑아서 나에게 뵌다.
내가 윤형산(尹亨山)에게,
“이름을 ‘하구려(下句麗)’로 낮춘 것은 곧 왕망(王莽) 때 일입니다.”
윤은, “그렇습니다.” 한다.
나는 또,
“스스로 쓴 역사라는 구절은 온통 그릇된 것입니다. 기씨(箕氏)의 조선은 위만(衛滿)에게 축출된 것입니다.”
하였더니
윤은,
“그거야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에서는 복잡한 관계인 동방(東方)의 삼국(三國)을 통틀어 이야기한 것이요, 오로지 귀국만을 가리킨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가 이른바 전통이 오래다는 것은 대체로 그의 나라 이름 조선이 벌써 기자(箕子)로부터임을 말하며, 귀국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찬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본시 가작(佳作)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꿈 이야기를 하다시피 또는 가죽신을 격해 놓고 가려운 곳을 긁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한다.
나는 또,
“그의 주(注)에 이르기를 조선이 신라를 깨쳤다는 것은 더욱 그릇된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고려를 이었고, 고려는 신라를 이었으니 어찌 5백 년 앞의 신라를 깨칠 수 있겠습니까.” 한즉,
여천은, “이야말로 을축(乙丑)ㆍ갑자(甲子)라는 겁니다.” 하고, 크게 웃는다.
내가 윤경더러,
“현존한 시인(詩人)으로서 해내(海內)에 가장 으뜸될 분은 누구십니까. 그의 이름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윤경은,
“천하가 넓은지라, 홍장(鴻匠)과 묘재(妙才)가 진실로 없는 것은 아니로되, 저는 나이가 늙고 세상일을 모두 끊어버렸으므로 젊은 재자들은 아는 이가 없고, 다만 저의 늙은 벗으로서 원 태사(袁太史) 매(枚)라는 이가 있습니다. 그의 자는 자재(子才)였고 뜻이 고상하여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선비입니다. 그는 벼슬을 사랑하지 않고 산수에 방랑하여 가장 회고적(懷古的)인 작품이 능수입니다.”
하고는, 이내 소리를 높여서 그의 시 두어 귀를 읊는다. 나는 그가 읊는 것을 잘 알아듣지 못하므로 글씨로 써서 보여 주기를 청하였다.
그의 〈박랑성시(博浪城詩)〉에,
약을 캐는 진인들은 봉래산을 향해 가고 / 眞人採藥走蓬萊
아득한 박랑의 모래벌은 망해대에 연했구나 / 博浪沙連望海臺
구정은 아직 잠기고 삼호들은 일어섰네 / 九鼎尙沈三戶起
여섯 왕이 쓰러지자 한 방망이 오는구려 / 六王纔畢一椎來
범과 용이 기개 높은들 누른 금은 다하였네 / 虎龍有氣黃金盡
산도깨비 소리 없고 흰 구슬만 슬프다네 / 小鬼旡聲白璧哀
열흘 두고 찾다 못해 손을 마침 떼었다네 / 大索十日還撒手
그대 같은 기이한 재주 예부터 몇이런고 / 如君終古儘奇才
하였으니, 그 시를 보아서도 가히 중국 사대부(士大夫)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형산이 구태여 이 시를 읊어 보임도 역시 그의 뜻이 명확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려천(奇麗川)에게도 기피하지 않음은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다.
강희 무오년(1678년)에 강우(江右)에 살고 있는 계문란(季文蘭)이라는 여인이 되놈들의 노략을 당하여 심양으로 가다가 진자점(榛子店)에 이르러서 바람벽 위에 시 한 절을 썼으되,
뭉텅 머리 방망인양 옛 단장 가엾어라 / 椎髻空憐昔日粧
길 나선 초라한 양은 비단 치마 다 낡았네 / 征裙換盡越羅裳
아빠 엄마 어떠신고 그곳 몰라 애태우며 / 爺孃生死知何處
봄 바람에 흐뭇 울어 심양으로 예는구나 / 痛哭春風上瀋陽
하고는, 그 아래에 또 쓰기를,
“저라는 계집은 곧 강우에 살고 있는 우 상경(虞尙卿) 수재(秀才)의 아내로서 지아비는 놈들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이제 왕장경(王章京)에게 팔린 몸이 되어서 심양으로 가는 길이오. 무오년 정월 21일에 눈물을 뿌려 벽을 닦고 이 시를 쓰노니, 오직 천하에 유심(有心)한 사람들은 이 글을 읽고서 이 몸을 가엾이 여겨 건져 주시옵길 바랍니다. 제 나이는 지금 21세외다.”
하였다. 그 뒤 6년 만인 계해(1683년)에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공(金公) 석주(錫胄)가 사신으로 이곳을 지나다가 이 일을 기록하여 돌아왔고, 또 그 뒤 30여 년을 지나서 노가재(老稼齋) 김공(金公) 창업(昌業)이 역시 이곳을 지나니 바람벽에 쓴 글자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하였다. 이제 나는 노가재보다도 60여 년 뒤인 이날에 또 이곳을 지나다가 이를 생각하여 배회하였으나 벽 사이의 글자는 다시 찾아 볼 곳이 없었다. 내 우연히 이 시로써 기풍액(奇豐額)에게 이야기하였더니 그는 산연(潸然)히 눈물지우며,
“진자점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산해관 밖에 있습니다.”
하였더니, 기는 곧 시 한 절을 읊었다.
붉은 단장 아침 나절 되놈에게 팔렸으니 / 紅粧朝落鑲黃旗
호가의 슬픈 박자 그 다섯째 글귈러라 / 笳拍傷心第五詞
천하에 많은 사내 맹덕이 이제 없으니 / 天下男兒無孟德
천금이 있다손들 채문희를 속할쏘냐 / 千金誰贖蔡文姬
강희의 산장시(山莊詩)는 통틀어 36마디였는데, 모두가 야비하고 졸렬하여 운치가 없으니, 대체로 그는 억지로 읊어서 평소의 포부를 자랑한 것인데 그의 모든 신하들이 반드시 뭇 글을 수집ㆍ나열하여 전주(箋注)를 내었으니, 한 예를 들면 그의 연파치상(煙波致爽)을 읊은,
서늘한 이 산장에 가끔 와서 더위 피하니 / 山莊頻避暑
잠자코 고요하여 떠들썩한 일 드무네 / 靜黙少喧嘩
는 아무런 주석도 필요하지 않건마는 그들은 양(梁) 소통(蕭統 양(梁)의 문학가. 자는 덕시(德施)) 시의,
수레를 바삐 몰아 산장으로 가자꾸나 / 命駕出山莊
든가, 유우석(劉禹錫) 시의,
푸른 넌출 그늘 속에 산장 하나 예 있구나 / 綠蘿陰下有山莊
라든가, 대숙륜(戴叔倫) 시의,
지초 이랑 대추밭 길 오가기도 잦았고녀 / 芝田棗逕往來頻
와, 손적(孫逖 당의 문학가) 시의,
이 땅이 가장 맑으니 숲 속 정자 좋을씨고 / 地勝林亭好
시절이 태평인 제 잔치도 자주로다 / 時淸宴賞頻
와, 위징(魏徵) 구성궁 예천명(九成宮醴泉銘)의,
“황제께서 구성궁에서 더위를 피하셨다.”(그 서문의 한 구절)
와, 양 간문제(梁簡文帝 자는 세찬(世纘)) 납량시(納涼詩)의,
높은 오동 그 밑에서 더위를 피하노라니 / 避暑高梧側
가벼운 바람 들어 옷깃이 서늘하군 / 輕風時入襟
과, 백거이(白居易) 시의,
봄철을 바라보며 꽃빛이 따뜻하고 / 望春花景暖
더위를 피하니 대 바람이 서늘코녀 / 避暑竹風涼
와, 《남사(南史)》 심린사전(沈麟士傳)의,
“나이가 80이 지났으나 귀와 눈은 오히려 총명하므로 남들은 그의 몸 수양이 정(靜)ㆍ묵(黙)한 소치라고 말하였다.”
와, 황보증(皇甫曾 당의 문학가. 자는 효상(孝常)) 시의,
화창한 바람엔 풀잎이 빼어나고 / 草長光風裏
잠자코 고요한데 꾀꼬리만 우는구나 / 鶯啼靜黙間
와, 하손(何遜 양의 문학가. 자는 중언(仲言)) 시의,
뵈는 거나 듣는 것이 떠들썩한 일 전혀 없네 / 視聽絶喧嘩
등을 이끌었으니, 이 시는 겨우 두 글귀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내용이 풀이하지 못할 것도 없거늘 어찌 허다한 전주(箋注)를 내었을까. 제용작가(帝庸作歌)라는 글이 있으나 어찌 허다한 출전을 밝힐 것이야 있으리요. 그러므로 주자(朱子)는 일찍이 말하기를,
“관관저구(關關雎鳩)란 말은 애초부터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라고 하였으니, 이야말로 시학(詩學)에서의 대성(大成)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가두에 떠드는 말 하간전 외는 소리 / 街頭喧誦河間傳
규중의 슬픈 노래 양백화가 이 아니야 / 閨裏悲歌楊白花
이 시는 곧 점필재(佔畢齋)가 사방지(舍方知)를 풍자한 것이다. 사방지라는 자는 사천(私賤) 계층의 출신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여복(女服)을 가장하여 얼굴에 분과 기름을 단장하며 재봉을 배웠더니, 자라나서 조사(朝士)들의 집에 드나들곤 했다. 천순(天順) 7년(1463년) 봄에 사헌부(司憲府)에서 그 일을 풍문으로 듣고 체포하여 그가 평소에 간통하던 여보살에게 취조한즉, 보살은,
“그의 양도(陽道)가 유달리 큽니다.”
한다. 이에 여의(女醫) 반덕(班德)을 시켜서 만져 보았고, 또 영순군(永順君) 이보(李溥)와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등도 번차례로 실험하며 보고는 모두 혀를 뽑으면서,
“에이, 대단하더구만.”
하였다. 이때에 중국에서도 역시 이보다 먼저(뒤인 것을 잘못 센 것 같다.)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오군(吳郡)양순길(楊循吉)의 《봉헌별기(蓬軒別記)》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성화(成化) 경자년(1480년)에 경사(京師)에 과부 하나가 여공(女紅)에 능란하고 젊고도 예쁘며, 또 신이나 버선이 네 치에 지나지 않을 만큼 작았다. 모든 부귀가에서 서로 맞이하여 수놓기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남자를 보면 문득 부끄러운 빛으로 회피하기도 하려니와, 밤이면 그에게 배우는 여자와도 서로 자누이되 자물통을 튼튼히 잠그곤 한다. 그러므로 남들은 더욱이 그가 자기 몸조심에 가장 엄격하다고 믿었다. 이때 태학생(太學生)으로 있던 아무개가 그를 연모하여, 처음에는 그의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속이고 그 과부를 자기의 집에 맞이하고, 가만히 그 아내에게 타일러 밤들어 문을 열고 거짓으로 뒷간에 가는 듯이 하고는, 갑자기 방안으로 들어가 촛불을 끄니 과부는 고함을 치자, 그는 과부의 목덜미를 껴안고는 강탈한즉 곧 남자인지라 구속하여 관청에 보내어 조사하니, 그의 성은 상(桑)이요, 이름은 중(翀)이며, 나이는 24세인데 어릴 때부터 발을 싸 매었다 한다. 법사(法司)가 그 옥사를 위에 아뢰었더니 헌종 황제(憲宗皇帝)가 이는 ‘인요(人妖)’라 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한다.
망부석(望夫石)에는 천산(千山) 범광원(范光遠)의 시 일절이 쓰여져 있다.
성 쌓은 이 어디 가고 보이지를 않는구나 / 不見築城人
다만 정녀 아씨 그 자취 완연쿠나 / 但見貞女迹
묻노라 만리장성 너는 이를 알려니 / 試問萬里城
이 한 조각 돌에 비겨 봄이 어떠할꼬 / 何如一片石
강희때 간행한 전당시(全唐詩)는 모두 1백 20권이나 되는 거질이었으니, 마땅히 빠진 것이 없을 것이로되 당 현종(唐玄宗)의 〈어제사신라경덕왕(御製賜新羅景德王)〉이라는 5언 10운(韻)의 시가 그 속에 실리지 않았다. 《삼국사(三國史)》에,
“신라 경덕왕(景德王) 15년 봄 2월에 경덕왕은 당 현종이 촉(蜀)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당의 절강으로부터 성도(成都)에 이르러서 공물(貢物)을 바쳤더니, 조서(詔書)로 말하기를, 신라왕이 해마다 조공을 바쳐서 능히 예악(禮樂)과 명분(名分)을 지키는 것을 가상하게 여겨 시 한 수를 지어준다 하고,
넷 벼리 나누어서 밝은 햇빛 나타나고 / 四維分景緯
여러 가지 기상들이 그 속에 포함되네 / 萬象含中樞
구슬과 피륙들은 온 천하에 깔려 있고 / 玉帛遍天下
다리 놓고 배를 저어 우리나라 찾아드네 /梯航歸上都
아득한 이내 회포 푸른 뭍이 막혔더니 / 緬懷阻靑陸
오랜 세월 흐르도록 우리 위해 수고했소 / 歲月勤黃圖
망망한 하늘가를 그즈음 누가 알꼬 / 漫漫窮地際
창창한 그 어란이 바다 구석 자리잡아 / 蒼蒼連海隅
갸륵한 이 나라는 명분을 지켰다네 / 興言名義國
산천이 멀다 하여 허수로이 생각하랴 / 豈謂山河殊
우리 사신 갔을 때엔 풍속 교화 전해 있고 / 使去傳風敎
그들이 이에 오면 옛 법을 배워 가네 / 人來習典謨
옷갓이 정제하니 예식을 알아 하고 / 衣冠知奉禮
충실하고 믿음 지켜 유학을 높였구나 / 忠信識尊儒
어린 정성 나타나니 하느님이 하감하고 / 誠矣天其鑒
어질도다 그의 덕은 외롭진 않으리라 / 賢哉德不孤
깃발 안고 함께 일어 인민을 기르리니 / 擁旄同作牧
아름다운 이 선물은 생추에 비할쏘냐 / 厚貺比生蒭
님이 가진 푸른 뜻을 더 한층 굳게 하여 / 益重靑靑志
바람 서리 치더라도 어디까지 변치 마오 / 風霜恒不渝
라고 하였다.”
한다. 송(宋)의 선화(宣和) 연간에 고려의 사신 김부의(金富儀)가 이 시의 각본(刻本)을 가지고 관반(館伴)으로 있던 학사(學士) 이병(李邴)에게 보였더니, 이병이 황제 휘종 황제(徽宗皇帝) 에게 올렸는데 이내 양부(兩府)와 모든 학사들에게 보이고, 황제는 또,
“이 진봉시랑(進封侍郞)이 올린 시는 당 명황(唐明皇)의 글씨가 틀림없는 것이야.”
하고 가탄하여 마지않았다. 이 시가 이미 중국에 들어가서 도군(道君 송(宋) 휘종이 자칭한 별호)의 예상(睿賞)을 겪었으나, 후세 사람이 당시(唐詩)를 엮는 이는 모두 이를 수록하지 않았음을 보아서, 비로소 옛날의 잃어버린 글은 듣고 본 것으로서만이 다할 바가 못 되고, 도리어 해외 편방(偏邦)의 선비가 이따금 천유(闡幽)의 업적이 있음을 깨달았으니, 이 어찌 우리들의 다행이 아니리요.
오중(吳中)의 사람들은 예로부터 부박하고 허탄하며, 경솔하고 변덕이 많으나 대체로 문장이 공교롭고 글씨 그림을 잘하기로 이름 높은 선비가 많았다. 그러나 중원(中原)의 인사들은 모두 그들을 미워하여 장사치나 장쾌들을 지목할 때에는, 반드시 항주풍(杭州風)이라고 일컬으니 대체로 오인(吳人)은 교활한 술책이 많았던 까닭이다. 전당(錢塘) 전여성(田汝成)의 《위항총담(委巷叢談)》에,
“항주의 풍속이 부박하고도 허탄하여 남을 자랑함에도 가벼이 하려니와, 구차히 나무라기도 잘하여 한 길에서 들은 말들을 다시 생각하여 보지도 않는다. 예를 들면 아무개가 이상한 물건을 가졌다고 하거나, 또는 아무개의 집에 범상하지 않는 일이 생겼다고 한 사람이 외치면 뭇 사람이 따라서 남의 의심나는 일에는 스스로 증언하되, 마치 자기의 눈으로 환하게 본 듯이 하여 저 바람처럼 일 때에도 머리가 나타나지 않거니와, 지나는 곳에도 그림자가 없어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까닭으로, 상말에 ‘항주 바람은 포착하자 없어져 버린다네.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모두 한 패가 되어 있네.’라고 하였거니와, 또 이르기를, ‘항주 바람은 한 묶음 파라네. 꽃은 쭝긋쭝긋 속은 다 비었다네.’라고 하였으며, 또 그들의 습속이 거짓을 만들어서 눈앞의 이익을 맞이하되, 신후(身後)의 일을 돌보지 않음도 일쑤이다. 그리하여 술에다 재를 타고 닭에다 모래를 채우고 거위 배때기에 바람을 불어 넣고, 고기나 생선에 물을 집어 넣으며, 천에 기름과 분을 바르는 따위의 일이 벌써 송(宋) 때부터 그러하였다.”
라고 하였다. 내 일찍이 기 귀주(奇貴州)에게 육비(陸飛)의 글씨와 그림이 공교함을 이야기하였더니, 기는,
“그쯤이야 아무 것도 아닌 벌레입니다.”
한다. 이도 역시 항주풍을 두고 말함이다. 그들 북쪽 사람이 남쪽 선비를 미워함이 대체로 이러하였다.
최두기(崔杜機)성대(成大) 의 〈이화암노승가(梨花菴老僧歌)〉에,
오왕이 연극 보다가 뭉텅 상투 슬퍼했고 / 吳王看戲泣椎結
전수가 중이 되어 춘추 필법 위탁했네 / 錢叜爲僧托麟筆
라 하였으니, 우리나라 선배들이 매양 중국 일에 대하여 풍문에 휩쓸려서 실적에 충실하지 못함이 일쑤이다. 이에 이른바 오왕은 오삼계(吳三桂)를 말함이요, 전수는 전겸익(錢謙益)을 말함이다. 겸익이나 삼계가 모두 되놈에게 항복하여 머리털이 희도록 오래 살았으나 무료히 지나는 중에, 그 하나는 비록 의거(義擧)에 의탁하였으나 임금의 칭호가 벌써 참람하였고, 또 하나는 저서에 뜻을 붙였으나 대절이 이미 이지러졌으니, 비록 교활하게 후세의 공격을 회피하고자 한들 누가 믿어 주리요. 우리나라 상말에 대체로 사물(事物)에 어두운 것을 ‘몽롱춘추(朦朧春秋)’라 한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춘추를 이야기하기 좋아하나 몽롱하기가 이러한 종류와 같은 것이 많으니, 어찌 만인(滿人)들의 조소를 입지 않으리요.
송 휘종(宋徽宗)의 대관(大觀) 연간에 섭몽득(葉夢得)이 고려 사신의 관반(館伴)이 되었더니, 옛 규칙에 사신이 대궐 아래에 이른 지 달이 넘지 않아서 곧 돌려보내는 법이었는데, 휘종은 그로 하여금 전시(殿試) 신방(新榜)과 상지(上池 상림원(上林苑)의 못)를 구경시키고자 하여, 드디어 거의 70일을 머물게 되었다. 사신이 자못 몸가짐을 삼가고 행동이 아담하였으므로 섭(葉)이 그를 전송하려 점운관(占雲館)까지 이르러서 하직하였더니, 그의 부사(副使) 한교여(韓皦如)가 섭에게 옥대(玉帶)를 주면서,
“이것은 애초에 당(唐)의 고물이었으며, 우리 선조부터 대대로 보배로 삼았던 거요.”
하고는, 또 스스로 홀(笏) 위에다가 시 한 수를 써서 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이별이 장차로다 / 泣涕汍瀾欲別離
이 몸이 한 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 此生旡復再來期
다만 보배 띠로 깊은 뜻을 베푸노니 / 謾將寶帶陳深意
이 물건 볼 때마다 이 사람을 잊지 마오 / 莫忘思人見物時
라 하였으나, 섭은 고려 사신의 옛 일에 물건을 끌어서 기증하는 예가 없었으므로 굳이 사양하고는 다만 그 시가 비록 박졸(朴拙)하긴 하나, 가히 그의 견권한 뜻은 짐작할 수 있겠다고 칭찬하였다 한다.
옹정(雍正) 초년에 칙사(敕使) 서산(書山)이 부벽루(浮碧樓)에 시를 썼으되,
풍물은 아름다워 옛적과 같건마는 / 風物獨依舊
산천은 어찌하여 부끄럼을 띠었는고 / 山河猶帶羞
하였으니, 서산은 만인(滿人)인데도 불구하고 별안간 한(漢)을 생각하는 말을 지음은 무슨 까닭일까.
얼마 전에 상선(商船)이 바람을 만나서 옹진(甕津)에 닿았는데, 배 가운데에는 시에 능통한 자가 있어서 율시 한 편으로 수사(水使)에게 올렸으되,
고국에 누구 있어 변한 음률 슬퍼하랴 / 故國誰憐鍾簴變
타향에 이 몸이란 성명이 부끄럽소 / 殊方還愧姓名通
천고에 주의 있어 신정에 빚은 눈물 / 千秋周顗新亭淚
바다에 뿌려본들 마를 줄이 있으랴 / 空灑滄溟水不窮
하였더니, 그 전편(全篇)을 얻어 보지 못함이 유감이려니와 그의 성명도 전하지 않음이 한스러울 뿐이다.
《석림시화(石林詩話)》 섭몽득(葉蒙得) 저(著)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고려가 태종조(太宗朝)로부터 오랫동안 조공을 바치지 않더니, 원풍(元豐) 초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매 신종(神宗)이 장성일(張誠一)을 관반(館伴)으로 삼고는, 그에게 다시 조회하는 뜻을 물었더니, 그는 답하기를,
‘우리나라가 거란과 더불어 이웃이 되었더니 그들의 주구(誅求)에 견디지 못한 국왕(國王) 왕휘(王徽)문종(文宗)의 휘 는 늘 《화엄경(華嚴經)》을 외어 중국이 재생하기를 빌었는데, 하룻저녁 꿈에 별안간 이 경사에 몸이 이르러서 성읍과 궁실의 번영함을 샅샅이 구경하고 꿈을 깨자, 이곳을 연모하여 즉시로 시를 읊으셨는데,
악한 인연 어이하여 거란에게 이웃되어 / 惡業因緣近契丹
한 해에 바친 공물 몇 가지나 괴롭혔네 / 一年朝貢幾多般
이 몸에 날개 돋쳐 먼 중국에 왔건마는 / 移身忽到中華裏
애달파라 깊은 대궐 누수 소리 날 새려네 / 可惜深宮滴漏殘
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전수지(錢受之 전겸익(錢謙益). 수지는 자)의 이른바,
나라 안에 창이 없이 한 사람만 앉아 있네 / 國內旡戈坐一人
는 김모재(金慕齋)가 지은 시인데 그의 본집(本集 《모재집(慕齋集)》)에 실려 있다. 수지가 《황화집(皇華集 화찰 저)》에 발(跋)을 달 때에 이 시를 들어서 조롱하였다. 그러나 그 실상은 화홍산(華鴻山)찰(察)이 조서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비로소 작용(作俑)한 것이다. 예를 들면,
넓디넓은 이 들판엔 가이 없는 물이요 / 廣野無邊水
기나긴 저 하늘엔 기러기 한 점뿐일러라 / 長天一點鴻
라는 따위가 곧 그것이다. 이는 야(野) 자는 넓게 쓰고, 천(天) 자는 길게 쓰며, 수(水) 자는 그 편방(偏傍)을 떼어서 무변(無邊)이 되고, 홍(鴻) 자는 비점(批點)을 쳐서 한 점(點)이 된다. 이를 일러서 두 글자의 뜻을 포함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배신(陪臣)이 원접사(遠接使)로서 용만(龍灣)에 가자면 반드시 사학(詞學)에 능통한 선비를 묘선(妙選)하여 종사(從事)를 삼아서 별안간 나타나는 응수(應酬)에 대비하였으며, 조사(詔使)는 역시 도중에서 으레 이러한 문제를 구상하여 두는 법이다. 이는 접반(接伴)을 곤란하게 하기 위함이다. 당시의 접반을 맡은 이들도 또한 반드시 이러한 문제를 미리 연습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드디어 한 예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를 기뻐서 함은 아니거늘, 수지가 홍산을 위하여 이 《황화집》에 발을 쓸 때에 그 실상(實狀)은 모두 없애 버리고는 다만 우리나라 사람의 한 글귀를 뽑아내어 웃음거리를 삼았을뿐더러 또 그들과 함께 창수를 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동국(東國) 인사의 마음을 후련하게 할 수 있겠는가. 내 일찍이 이 일을 들어서 유식한(兪式韓)에게 이야기 하였더니 식한은 곧 이를 적어서 품속에 간직하되 마치 귀중한 보물을 얻은 듯이 기뻐하였다.
최간이(崔簡易)의 〈삼일포시(三日浦詩)〉에,
갠 봉우리 서른 여섯 조개인 양 나비 눈썹 / 晴峰六六斂螺蛾
흰 해오라기 쌍을 지어 맑은 물결 희롱할 제 / 白鳥雙雙弄鏡波
사흘을 바장이곤 님은 다시 못 오시니 / 三日仙遊猶不再
십주 아름다운 곳이 많은 줄을 알았노라 / 十洲佳處始知多
라 하였다. 내 일찍이 사선정(四仙亭)에 올랐더니 심백수(沈伯修)가 이 시를 새겨서 정자 위에 걸었으나 이는 결코 가작은 아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간이(簡易)가 왕감주(王弇州)를 만나러 갔더니 그는 공무가 산처럼 많이 쌓여 있어서 수십 명의 서리(書吏)가 번차례로 문서를 아뢰는데, 감주는 교의에 기대고 앉아 파리채를 휘두르면서 좌수우응(左酬右應)하되, 결재가 몹시 빠르매 뭇 사람들의 붓이 일제히 움직여서, 잠깐 사이에 구름처럼 사라져 버리고 또 10여 명의 청년이 각기 그들의 과작(課作)한 시(詩)와 문(文), 또는 소품(小品)ㆍ서종(書種) 등을 바치면 감주는 곧 붉은 먹으로써 비점(批點)을 치며 빨리 넘기는 손에는 붓이 멈춰지지 않았다. 간이는 이를 보고 크게 경복(驚服)하여 시자(侍者)더러, ‘노야께서는 전에도 늘 저러시고 계셨던가.’ 하고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오늘은 마침 자리가 조용하여 조금 한가하신 편입니다. 노야께서는 전일에 벌써 시 1만 수(首)를 읊었으며 글 천 권을 지으셨답니다.’ 한다. 간이는 한참 잠자코 풀이 죽어 소매 속에 간직하였던 자기의 글을 내어서 가르침을 청하였더니 감주는, ‘글짓기에 뜻을 둔 분임은 알 수 있겠으나 다만 글 읽은 게 많지 못하고 문견이 넓지 못하니, 이제 돌아가서 창려(昌黎)의 글 중에서 〈획린해(獲麟解)〉를 5백 번만 읽고 나면 마땅히 글 짓는 혜경(蹊逕)을 알 것이오.’ 하였다. 간이가 크게 부끄럽고 한스러워서 감주를 만났던 일을 깊이 숨기고는 글쓸 때에 일부러 뒤틀린 버릇으로 기괴한 글을 썼으니, 이는 이우린(李于鱗 명(明) 문학가 이반룡(李攀龍). 우린은 자)에게 배운 것이라 하였다. 우린은 원래 감주를 가장 두려워하는 바이므로 이것으로써 그를 한 번 누르려던 것이다.”
허균(許筠)이 주 태사(朱太史) 지번(之蕃)을 접대할 때에 주(朱)에게,
“일찍이 감주를 보신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주는,
“일찍이 계사년(1593년) 봄에 태창(太蒼 강소성에 있는 지명)에 가서 감주에게 배움을 청하였더니, 감주는 그때에 남사구(南司寇)로서 치사(致仕)하였는데 얼굴은 중인(中人)에 비하여 지나침이 없으나, 눈빛이 별 같고 서재를 화원(花園)에 쌓고 문도를 모아서 술 마시며 시를 읊는데, 감주는 날마다 5ㆍ6말의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고, 누구라도 시문(詩文)을 청하는 이가 있으면 시비(侍婢)로 하여금 음악으로 아뢰게 하면서 먹을 갈며 종이를 펴는 것이 마치 풍운과 귀신이 이는 듯이 빠릅니다.”
한다. 그는 또,
“그러면 감주도 누구를 두려워하는 이가 있던가요.”
한즉, 주는,
“공이 평생에 두려워하고 심복하는 이는 오직 창명(滄溟 이반룡의 호) 한 분이 있을 뿐이니, 그는 매양 글귀를 생각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이우린(李于麟)의 〈진관시(秦關詩)〉에,
푸른 용이 멀리 걸리니 진천에 비 내리고 / 蒼龍遠掛秦天雨
돌 말이 길이 우니 한원에는 바람 이네 / 石馬長嘶漢苑風
를 높은 목소리로 읊었으니 그는 어찌 두려운 이가 없으리요.”
하고 답하였다.
심분(沈汾 남당(南唐) 때의 문학가)의 《속신선전(續神仙傳)》에 이르기를,
“신라(新羅)의 빈공(賓貢) 진사(進士) 김가기(金可紀 신라 때의 문학가)가 신선이 되었다.”
고 하였는데, 장효표(章孝標)의 〈송김가기귀신라(送金可紀歸新羅)〉라는 시에,
당나라에 과거 하여 말소리도 닮았더니 / 登唐科第語唐音
해돋이를 바라보곤 고국 생각 간절하다네 / 望日初生憶故林
일엽편주 바람 일 제 고래 등에 나는 듯이 / 風高一葉飛魚背
맑은 호수 그 가운데 삼신산이 솟아나네 / 湖淨三山出海心
라 하였으니, 김가기가 본국(本國)으로 돌아온 것은 명확한 일이다. 그런데 《속신선전》에는,
“가기가 종남산(終南山) 자오곡(子午谷)에 살고 있더니, 그 뒤 3년 만에 뱃길로 본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 도복(道服)을 입고 종남산에 들어가 음덕(陰德)을 힘써 행하더니, 당(唐)의 대중(大中) 11년(857년) 12월에 별안간 표문(表文)을 올리기를, ‘신(臣)이 옥황(玉皇)님의 조서를 받자와 명년 2월 25일에 마땅히 하늘에 오르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선종(宣宗)이 이를 이상히 여겨서 궁녀(宮女) 네 명과 향악(香樂)과 금채(金綵)를 하사하고, 또 중사(中使) 두 사람을 보내어 가까이 모시게 하였더니, 그날에 이르러 과연 채색 구름과 난새ㆍ학새와 저ㆍ퉁소와 금ㆍ석과 깃일산과 깃발이 공중에 가득하더니, 그는 학을 타고 승천하였다. 조사(朝士)나 서민(庶民)을 나눌 것 없이 구경하는 이가 산골짜기에 모여서 누구든지 우러러 절하며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하였고, 한무외(韓无畏)의 《전도록(傳道錄)》에는, 또,
“김가기가 최승우(崔承祐)와 중 자혜(慈惠)와 더불어 신원지(申元之)를 좇아서 도술(道術)을 배우더니, 종리 장군(鍾離將軍)과 지선(地仙) 2백의 무리를 만났다.”
고 일렀으나, 이는 아마 부회(傅會)한 이야기인 듯싶다.
나의 벗 나걸(羅杰) 중흥(仲興 나걸의 자)은 글 잘하고 괴걸(魁傑)한 선비이다. 그는 역리(易理)에 깊고 평생에 종(鍾 조위(曹魏) 때의 서예가 종요(鍾繇))ㆍ왕(王 왕희지(王羲之))의 서법(書法)을 사랑하여 휴지 한 장이나 편지 한 쪽을 얻게 되면, 언뜻 종이 뒷장에 예학명(瘞鶴銘) 두어 글자를 쓰다가 때로는 종이가 부족하여 점이나 획을 마음껏 쓰지 못할 경우에는 붓을 움직여 종이 밖에까지 뻗어서, 앉은 자리가 모두 검게 하는 까닭에 만일 문밖에 중흥의 나막신 소리가 나면 반드시 먼저 연구(硯具)를 감춘 뒤에 나가서 맞이하고, 중흥이 방에 들어오자 반드시 먼저 좌우(左右)를 살펴서 종이와 붓을 찾아도 눈앞에 뜨이지 않은 연후에야 비로소 인사를 교환하게 된다. 그의 진솔함이 이와 같았다.
지난 병신년(1776년) 동짓달에 그는 신 서장(申書狀) 사운(思運)을 따라서 연경(燕京)에 들어갔으니, 그때의 정사(正使)도 곧 금성위(錦城尉)로서 선비에 대한 대우가 높아서, 그에게 아무런 검속을 가하지 않고 부채와 환약을 공급하기도 하려니와, 자주 역관에게 타일러서 그의 통행을 편리하게 하였으나 중흥의 천성이 몹시 진솔하므로 이르는 곳마다 저지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껏 유람하지 못하였을 뿐더러 중국의 이름 높은 선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였다 한다. 그가 연경 길을 떠날 때에 내가 송도(松都)까지 전송하였다. 그가 돌아오자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태평차(太平車) 한 대를 만들어서 그의 처자를 태우고는 적상산(赤裳山 전북 무주(茂州)에 있다) 속으로 들어간 지 이제 벌써 4년이 되어도 보이지 않는다. 이내 내가 이 길을 떠날 때에 상자 속에 두었던 친구들의 서찰과 시문을 찾아서 다시 간직하려다가 중흥이 옛날에 쓴 시를 발견하였는데 행초(行草)로 쓴 것이 자못 찬란하였다. 곧 행탁(行槖)에 집어넣었던 것을 이에 기 귀주(奇貴州)에게 내어 보였더니 기는,
“창건하고도 침울하며 그의 격력(格力)은 흡사 노두(老杜 두보를 높인 말)와 같아.”
하고는 크게 칭상(稱賞)하였다. 그의 〈우성(偶成)〉에,
산 사립문 비었는데 옷갓을 다 버리고 / 山扉寥廓棄冠巾
이 몸이 늙어갈수록 한가한 일뿐이라네 /老去漸能幽事親
빈 뜰에 홀로 앉으니 햇빛만 고요코야 / 階除留對日華靜
공중에 지나는 구름 한 조각 또 한 조각 / 空外翻過雲片新
꾀꼬리 어디서 오자 푸른 숲에 울어 있고 / 黃鳥忽來啼綠樹
아롱진 꽃 수없이 청춘을 수놓는다 / 斑花旡數度靑春
어느 것 한 물건이 내 뜻을 새오리요 / 知旡一物違吾意
하느님 길러 주시는 그 은덕을 저버리랴 / 不負皇天長育辰
하늘가의 금서산은 산 밖에 또 산이고 / 天外錦西山復山
요즈음 집을 지니 한가함이 늘상이라 / 近來卜宅不離閒
외로운 봉우리 갠 바위 공중에 비겼구나 / 孤峰晴石依空翠
벼랑 길 깊숙한 꽃 점점이 아롱졌네 / 側徑幽花點細斑
나는 새도 조심스레 비 맞은 채 지나가고 / 鳥避誤疑沾雨過
꿀벌은 너도 나도 꽃향기로 배불리네 / 蜂窺爭占飫香還
흥겨운 그날 그날 청려장을 짚고 일어 / 興長日日扶黎杖
보고 읊고 읊고 보니 객의 시름 사라지네 /一望一吟開旅顔
흑치 장군(백제의 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 전장터서 그 동쪽에 자리 잡아 / 戰經黑齒郡之東
타향살이 몇 해런고 일일마다 다 잘 아네 / 久住殊方事盡通
깊은 산 새벽 구름 골짜기에 잠겨 있고 / 峽曉雲移幽洞翠
시냇가 저녁놀은 옛 성에 붉었구나 / 澗曛日隱古城紅
늦게 일고 일찍 잠도 멋대로 하려니와 / 晩興早寢從他好
짧은 노래 긴 읊음이 그 맛이 무궁하구나 / 短咏長吟不自窮
다만 지체하여 흥취마저 없다 하면 / 若道淹留旡逸興
나그네 이 시름을 어느 때나 씻으리요 / 何時得豁旅愁空
라고 하였고, 또 그의 〈불매(不寐)〉에는,
밤 들어 산 구름은 보암직도 한져이고 / 入夜喜看連峽雲
먼 허공에 붉은 빛이 어지러이 떠오르네 / 遙空漸改赤紛紛
처마를 향해 앉자 새 소리도 고요하곤 / 對簷獨坐息喧雀
베개 괴고 잠깐 졸매 모기들이 모여드네 / 支枕乍眠還聚蚊
산 나무 시냇 모래 부질없이 헤어 볼까 / 峰樹溪沙漫欲數
남기성과 북두성은 저절로 무늬로다 / 南箕北斗自成文
시름이 병이 된들 무엇이 해로우랴 / 未憐愁劇添新病
아름다운 시를 낳아 비단에 수놓은 듯 / 剩得詩如刺繡紋
이라 하였고, 또 〈오침(午枕)〉에는,
낮 졸음에 잠겼더니 날씨가 찌는 듯이 / 昏昏午睡困炎蒸
모든 일에 게을러서 하는 수가 없구나 / 萬事疎慵著不能
책권을 펴 두니 엿보는 건 제비이고 / 未卷牀書窺紫燕
벼루에 먹물 고여 파리를 배불리네 / 常餘硯墨飽靑蠅
길 지나던 손님들이 부질없이 찾아오곤 / 客過小徑虛相問
밭 이랑이 거치니 아내마저 밉구나 / 妻對荒畦久欲憎
맑은 빛이 별안간에 달돋이를 보고서는 / 忽得淸光看月出
붉은 해가 솟는가봐 그릇되이 의심코녀 / 錯疑赫日碾空昇
라고 하였다.
귀주(貴州)는 이에 대하여 비평하되,
“실로 명구(名句)가 많긴 하나 이따금 음률에 맞지 않은 것이 있다.”
하니, 이는 대개 우리나라 음운(音韻)이 중국의 것과 같지 않으므로 가끔 음률에 어긋남이 있었던 것이다.
박충(朴充)과 김이어(金夷魚)는 모두 신라(新羅) 사람으로서 당(唐)에 들어가 빈공(賓貢)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당 장교(張喬 당(唐) 소정 때의 문학가)의 〈송김이어봉사귀본국(送金夷魚奉使歸本國)〉이라는 시(詩)에,
바다를 건너와서 선적(빈공과의 학적(學籍))에 올랐더니 / 渡海登仙籍
고향에 돌아갈 젠 한의(중국의 문물(文物))를 갖추었네 / 還家備漢儀
라 하였고, 장교는 또 〈송박충시어귀해동(送朴充侍御歸海東)〉이라는 시에,
하늘가에 떠나온 지 이제 벌써 스물 네 해 / 天涯離二紀
대궐에 드나들어 세 임금을 섬겼구나 / 闕下歷三朝
라고 하였더니, 중국의 인사들이 나와 처음 만날 때에 반드시 먼저 항해(航海)의 노정과 어느 곳에서 상륙하였는가를 묻기에, 나는 줄곧 육로를 따라 요동으로부터 산해관을 들어 연경에 닿았다고 답하면 그들은 혹시 믿지 않은 이가 있어서,
바다에 건너와서 선적에 올랐더니 / 渡海登仙籍
라는 글귀를 외어 고증(考證)을 삼으니, 이는 우리나라가 저 먼 바다 밖에 있는 유구(琉球)나 구라(毆邏 구라파)와 같은 나라인 줄로 아는 모양인즉 중국 사람들이 가끔 무식하기가 이와 같았다.
이무관(李懋官)이 묵장(墨莊)을 찾았을 때에 반추루(潘秋樓)에게 시를 청했더니, 묵장은 한림서길사(韓林庶吉士) 이정원(李晶元)이니 촉(蜀)의 금주(錦州) 사람이요, 추루는 반정균의 호이다. 반(潘)은,
“내 앞날에 시를 쓸 때 제법 생각을 허비하여 몹시 곤작(困作)이었기 때문에 시가 많지 못함을 한했더니, 요즈음 운철소(惲鐵簫 청(淸)의 문학가)의 한류(寒柳)를 읊은 책자(冊子)를 읽은즉, 왕추사(王秋史 청(淸) 문학가 왕평(王苹). 추사는 자)가 그 뒤에다 네 편의 시를 썼으며, 이 버들은 곧 명(明) 은 상국(殷相國 미상)의 통악원(通樂園) 옛 나무였기에 느낌이 있어서 읊되,
서러운 이내 심사 화공에다 얘기할까 / 愁心都付畫工論
애처로운 긴 가지가 갯마을이 꿈에 드네 / 凄絶長條夢水邨
바다 한 편 묵은 정자 명사들은 흩어지고 / 海右亭荒名士散
하늘가 지는 잎은 옛 동산만 남았다네 / 天涯木落廢園存
반만 남은 지새는 달 봄 두고 이별할 제 / 半規殘月春留別
석양 빛 어제대로 저녁 넋을 거두었네 / 一例斜陽暮斂魂
예순 해를 읽어 오던 곱게 꾸민 그 책들을 / 六十年來看粉本
먹 향기 종이 빛깔 티끌 속에 침침할 뿐 / 墨香牋色又塵昏
그 둘째는,
슬슬 동풍 고루 불어 씻어 간 곳 새로운데 / 看遍東風窣地新
잠긴 가지 나는 가지 모두가 정이 얽혀 / 蘸波吹絮摠情塵
푸른 잎 매미 울던 그곳이 그리웁고 / 可憐碧葉吟蟬地
붉은 난간 말 매던 이 찾을 길 전혀 없네 / 不見紅欄係馬人
낡은 다락 그림자에 늙은 두보 슬퍼했고 / 衰影驛樓傷老杜
시름 어린 이 마음에 털보 그대 추억되오 / 離悰門巷憶髯秦
자주(自注) : 진관사(秦關詞)에 이르기를, “꽃 밑에는 거듭 문이요, 버들 가에는 깊은 마을이다.”라고 하였다.
작화산 저 기슭에 우뚝 섰는 가지 밖에 / 鵲華山麓髡枝外
맑은 호수 가에 앉아 수건 씻는 이만 뵈네 / 只有明湖冷濯巾
그 셋째는,
화가나 시인들이 한꺼번에 사라졌고 / 畫人吟子一時稀
아름드리 푸른 숲도 엉성해진 옛 성일네 / 減盡金城翠十圍
언덕 기슭 누운 가지 저문 눈 속 비껴 섰고 /緣岸臥枝欹暮雪
어둔 빛이 스민 다락 겨울 해를 띠었구나 / 入樓暝色帶冬暉
떨어진 잎 숨 죽인 채 소리도 적거니와 / 靜中黃葉旡多響
아득한 까치마저 두어 점이 날아가네 / 遠處昏鴉數點歸
오히려 진흙 젖은 부질없는 한이 있어 / 猶有沾泥閒恨在
다시금 봄이 온단들 한목 날지나 말아다오(버들꽃을 말한다) / 逢春莫更作團飛
그 넷째는,
칠십천 소리소리 돌 절구질 하는 듯이 / 七十泉聲亂石舂
초라한 두 나무에 들 서리 자욱하네 / 兩株憔悴野霜濃
전조에 세운 누대 모래톱이 남아 있고 / 前朝臺榭沙痕在
늙을 무렵 변방살이 숲 그늘이 층층코녀 / 晩歲關河樹影重
우연히 선비 위해 푸른 눈을 지어보나 / 偶爲士流靑眼放
흡사 기생처럼 흰 머리로 서로 만나 / 恰如女妓白頭逢
오동꽃 떨어지곤 산 생강이 늙다 한들 / 桐花零落山薑老
왕랑의 아름다운 얼굴 뉘라서 알아볼까나 / 誰識王郞濯濯容
라고 하였습니다.”
한다. 이에서도 한인(漢人)들이 접하는 것마다 감흥이 많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것을 형산(亨山) 제공(諸公)에게 보였더니, 모두 슬픈 빛으로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남약천(南藥泉) 구만(九萬)이 어사(御史)로 순행하다 성주(星州)에 이르러서, 밤에 본 고을의 선생안(先生案)을 열람하다가,
“제말(諸沫)은 만력(萬曆) 계사(1593년) 정월 아무 날에 도임(到任)하여 4월 아무 날에 파귀(罷歸)하였다.”
라는 말을 발견하고, 그는 우리나라에 제(諸)의 성(姓)을 지닌 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기에, 자못 괴이하게 여겨서 윤형성(尹衡聖)에게 물었더니, 윤(尹)은,
“중국 강(江)ㆍ절(浙) 사이에 제씨(諸氏)가 살고 있으니, 제말의 조상은 아마 중국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며, 임진왜란 때에 제말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쳐서 그가 향하는 곳마다 승리하니, 이름이 곽재우(郭再祐)와 같이 높았다오.”
라고 답하였다 한다. 이 일은 《약천집(藥泉集 남구만의 시문집)》 중에 실려 있다. 약천과 같은 박식으로도 오히려 백 년 이내인 제말의 사적을 알지 못하였는즉, 그가 미천한 계층의 출신인 줄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는 비록 공을 세움이 이렇다 했더라도 이름이 그만 묻혔으니, 어찌 그 억울함이 원혼이 되지 않았겠는가.
성주에 살고 있던 정석유(鄭錫儒)가 급제(及第)에 오르기 전에, 본 고을의 자제들과 함께 공령(功令 과체(科體)의 시문(詩文))을 짓느라고 동헌(東軒)에 유숙하니, 그 집 뒤에는 매죽당(梅竹堂)이 있고 당 앞에는 지이헌(支頤軒)이 있었다. 하루는 정(鄭)이 지이헌 속에서 홀로 거니는데 때마침 달이 몹시 밝았다. 별안간, 검은 사모(紗帽)를 쓰고 붉은 도포(道袍) 입은 이가 대밭 속으로부터 나오더니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는 이 고을 옛 목사(牧使) 제말이다. 나는 본시 고성현(固城縣)에 살던 백성으로 임진의 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왜적을 쳤으매, 조정(朝廷)에서 특히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제수(除授)하였다. 저 웅해(熊海)ㆍ작영(斫營)ㆍ정진(鼎津) 등지에서 왜적을 맞으면 깨뜨리지 못한 적이 없었으나, 당시의 격문(檄文)이 없어지고 역사가 전하지 못하였으니, 그때 정기룡(鄭起龍) 같은 여러 사람은 모두 나의 비장(裨將)이었다.”
하고는, 이내 허리에 찼던 보검(寶劍)을 뽑으면서,
“이 칼로써 일찍이 왜장(倭將) 몇 놈을 베었다.”
한다. 그는 이마 위에 불꽃이 펄펄 이는 듯하고 성기고 뻣뻣한 수염이 움직이면서 시를 읊었다.
머나먼 산 길에선 구름과 함께 예고 / 山長雲共去
높디높은 하늘에는 달과 함께 외롭네 / 天逈月同孤
그는 또 말하기를,
“나의 무덤은 칠원(漆原 경남 창원)에 있으나, 자손이 없어서 이제껏 묵고 있다.”
하고는, 표연히 읍하고 물러가서 다시 대숲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날이 밝은 뒤에 함께 그 일을 이야기한즉, 그들도 평일에 비록 선생안(先生案)에 제말이라는 이가 있었으나, 성(姓)도 쓰여 있지 않았음을 의심하였을 뿐, 그의 공렬(功烈)이 이렇게 갸륵함을 알지 못하였다가, 이제 별안간 알게 되어 감탄하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감사(監司) 정익하(鄭益河)가 이 이야기를 듣고, 정석유를 불러 상세히 물은 뒤에 바야흐로 장계(狀啓)를 올려 조정에 알리려 하였으나, 마침 벼슬이 갈렸으므로 여의치 못하고, 다만 칠원에 통첩하여 그의 무덤을 수축하고 묘지기 두 호(戶)를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칠원의 원으로 있던 어사적(魚史迪)이 낮에 졸다가 꿈에 한 관인(官人)이 와서 말하기를,
“나의 무덤은 이 동헌에서 몇 리쯤 되는 아무 마을 아무 좌향(坐向)에 있다. 감사가 마땅히 무덤을 수리하라 명령하실 테니, 그대는 유의할지어다.”
한다. 꿈을 깨자 이상히 여겼더니, 그날 저녁에 통첩이 이르렀으므로 어사적이 드디어 그 무덤을 크게 수리하였다 한다. 제말은 실로 시골뜨기여서 살아 있을 때는 글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이런 갸륵한 공적이 있었다 해도 스스로 나타내지 못하고 본즉, 죽어서 그 억울한 영혼이 맺히어 흩어지지 않음이 이와 같을 뿐더러, 그는 또 능히 시를 읊을 줄 알았다 하였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 평사(辛評事) 경연(慶衍)이 나이 열두 살에 배천(白川)에서 서울로 올라갈 제, 길에서 명(明)의 조사(詔使)를 만났다. 때마침 역놈이 신(辛)이 탔던 말을 빼앗았으므로 그는 사정이 몹시 궁박하였다. 그는 도보로 조사의 점심참에 닿아 하소연하였더니, 조사는 그의 얼굴이 백옥처럼 맑음을 보고 사랑하여, 길가에 서 있는 장승(長丞)을 가리키면서,
“그대 능히 이를 두고 시를 읊는다면 마땅히 말을 주리라.”
하여, 신이 운자(韻字)를 청하니, 조사가 운자를 내어 주었다. 신은 곧 대답하기를,
초 패왕(항적(項籍))의 혼령인 양 천추에 남아 있네 / 楚伯千秋尙有靈
오강을 건널 체면 없어 형체만 남았구나 / 渡江旡面只存形
당년에 한스러운 일은 음릉 길을 잃은 것이 / 當年恨失陰陵道
언제나 길에 서서 앞잡이 노릇 하렵니다 / 長向行人指去程
하매, 조사가 크게 놀라서 탄식하여 칭상하고 문방(文房)의 여러 보물을 주었다 한다. 이 글이 무명씨(無名氏)의 작으로 《명시선(明詩選 명(明) 이반룡(李攀龍) 저)》에 실렸으며, 그는 광해(光海) 때 과거에 올라서 벼슬이 평안도(平安道) 병마(兵馬) 평사에 이르렀을 때에, 서쪽 변새에 일이 있어서 청천강(晴川江)을 아홉 번 건넜으며 이내 관에서 죽었는데, 그의 혼령이 여러 번 나타났다. 그 뒤 수십 년에 그의 벗 아무개가 그를 관서(關西) 도중에서 만났는데, 그는 친구의 자를 부르며 옛 일을 이야기함이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 벗에게 부탁하기를,
“나의 자손이 심히 가난한데 유물이 있는 것을 미처 전하지 못했네. 보도(寶刀)와 옥관자 한 쌍이 우리집 들보 위에 얹혀 있어도 집 권속들이 아무도 아는 이가 없으니 그대는 부디 이 말을 전해 주소. 이 두 가지 물건을 판다면 많은 값을 받을 것이네.”
하매, 그의 벗은 크게 이상히 여겨 돌아오자 곧 그 자손에게 이야기하여 함께 그 집을 들춰서, 마침내 보도와 옥관자를 발견하였다 한다. 우리나라에서 길 위에다가 매 10리 5리 마다 나무로 장군과 같이 깎은 등선을 세우고 지명과 이정을 기록하여 두는데, 이를 보통 ‘장승’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중국의 장정(長亭)ㆍ단정(短亭)과 같으므로, 우리나라 시민들은 흔히들 장정을 빌려 쓰면서 혹은 중국의 이정표도 우리나라 장승과 같은 줄만 알고, 또는 장정을 정장(亭長)으로 잘못 알기도 하니 심히 고루한 일이다. 내가 중국에 들어와 보니, 길에는 장정표를 세우고 아무 땅이라 쓰고는, 그 좌우에는 단정표를 세우며, 동으로 아무 데까지가 몇 리요, 서로 아무 데까지가 몇 리라고 써 있었다. 이제 열하에 오는데 장정 밖에는 장정에 흔히들 신(汛) 자를 썼는데 무엇을 말한 것인지를 모르겠다.
신장(辛丈) 돈복(敦復)씨가 일찍이 나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중종(中宗) 때 남주(南趎 조선 때 학자. 자는 계응(季應))가 열아홉 살에 급제(及第)하여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의 천에 올랐으며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상한 일이 많았다. 매일 아침 글방 선생에게 글을 배우는데 결석할 때가 많으므로 집안 사람들이 가만히 그의 뒤를 밟은즉, 도중에 지레 어떤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한 정사(精舍)가 있는데 주인의 행동이 맑고 훤하여 속기(俗氣)가 없었다. 주가 그의 앞에 절하고 나아가서 글을 강론받고 반드시 해가 저문 뒤에야 돌아오곤 하였다. 집 사람들이 물으면 문득 괴변으로 대답하더니, 그 뒤 신선의 수련술(修鍊術)을 행하였고 그가 급제하자,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만나 곡성현(谷城縣)에 귀양갔고, 이내 그곳에서 집을 정하고 살았다. 하루는 종을 시켜 편지를 갖고 지리산(智異山)청학동(靑鶴洞)에 들여보냈는데, 오채가 영롱한 집이 있고 극히 정려(精麗)하며 두 사람이 살고 있는데, 하나는 운관(雲冠)과 자의(紫衣)요, 또 하나는 늙은 중이었다. 둘이 종일토록 바둑만 두기에 그 종은 하루를 묵고 편지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었다. 종이 애초에 2월에 떠나 산에 들어갈 제는 초목이 바야흐로 무성하던 것이, 산을 나올 때에는 들판에서 익은 벼를 거두는 것을 보고 괴이히 여겨 물으니 곧 9월 초순이다. 남주가 죽을 때 나이가 30세였다. 널을 들어보니 유달리 가벼운지라, 집안 사람들이 관을 열고 본즉 빈 것이었고 그 안에 시가 쓰였는데,
창해에 떠난 배는 찾을 곳이 전혀 없고 / 滄海難尋舟去跡
청산에 나는 학은 흔적조차 뵈지 않네 / 靑山不見鶴飛痕
라 하였다. 그 마을 앞에 김을 매던 농부가 공중에서 흘러내리는 음악 소리를 듣고 쳐다본즉, 남주가 말을 타고 둥실 떠서 흰 구름 사이로 올랐다 한다. 지금 충주(忠州)에 살고 있는 진사(進士) 남대유(南大有)가 그의 방손(傍孫)이라 한다.”
한유(韓愈)의 시에도,
나무와 돌에도 요물이 생기더라 / 木石生妖變
하였지마는, 당(唐)의 말년에 소주(蘇州)에 살고 있던 중 의사(義師)는 나무로 새긴 부처를 만나면, 문득 한 군데 모아서 불살라 버렸다 한다. 우리나라 양주(楊州)회암사(檜巖寺)에 옛날부터 나무로 만든 큰 부처가 있어서 극히 영검스러우므로, 원근 사람들이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고 모여들어 숭배해서 향화(香火)가 심히 성하였다. 나옹(懶翁 이성계(李成桂)의 스승으로 있던 중)이 처음 주지(住持)가 되어 이 절에 도임할 제, 뭇 중들에게 명하여 그 부처를 끌어 내어 불사르게 하였다. 모두들 놀라고 두려워하여 굳이 간했으나, 나옹은 듣지 않고 중 백여 명을 시켜 큰 동아줄로써 동여매라 하고 밀쳐당겼으나 털끝도 까딱하지 않았다. 나옹이 노하여 스스로 한 쪽 손으로 밀어 곧 넘어뜨리고 절 밖에 이끌어 내어 장작을 쌓고 태우니, 더러운 냄새가 견디지 못할 만큼 풍겼다. 대개 큰 뱀이 부처 뱃속에 서리어 있던 것으로 그런 뒤에는 오래도록 재환이 없었다 한다. 대체로 나무가 오랫동안 묵으면 접신(接神)이 되므로 허물어진 절간의 나무 부처에 많이들 이상한 요물이 붙는 법이니, 곧,
“나무와 돌에도 요물이 생기더라.”
함은 이를 말함이다. 오늘 저 반선(班禪)이 우리에게 준 부처는 길이가 거의 한 자나 될뿐더러, 아마 나무로 새긴 데다 금을 입힌 것인즉 이에는 어찌 요물이 붙지 않았을 줄 알리요. 창졸간에 이 물건을 받긴 했으나, 일행의 상하가 모두 꿀 단지에 손 빠뜨린 듯이 어쩔 줄을 모르는 판이다. 내가 밤에,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잘 구처하겠습니까.”
하고 정사께 물었더니, 정사는,
“벌써 수역(首譯)을 시켜 작은 궤짝을 만들어라 하였네.”
한다. 나는,
“잘 하셨소이다.”
하였더니 정사는,
“뭐가 잘했단 말인가.”
하기에 나는,
“이는 강에 띄우고자 하는 의미뿐이겠죠.”
하고 대답하였더니, 정사가 웃기에 나도 웃었다. 대저 이 부처를 길가 사찰에다 내어버린다면 중국의 노염을 입을까 두렵고 또 이를 이끌고 입국한다면 마땅히 물의(物議)를 일으킬 테니, 저들과 우리나라의 국경에서 순류(順流)에 띄워 바다에 추방하는 수밖에 없고 보니, 띄울 곳은 압록강(鴨綠江)이 가장 좋을 것이다.
정호음(鄭湖陰) 사룡(士龍)은 평생에 호사로이 지냈다. 나이가 젊을 때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박평성(朴平城) 원종(元宗)에게 나아갔더니, 평성이 때마침 수상(首相)이 되어서 별장 깊숙한 곳에 앉아 시비(侍婢) 수십 명을 시켜 호음을 인도하여 들어오게 하니, 호음이 겹문을 지나 들어오는데 곳곳이 아롱진 누각이요, 구비구비 붉은 난간이다. 평성은 못 위 반송(盤松) 그늘 밑에 앉았는데 좌우에는 시비들이 모두 비단 치마를 질질 끌고 번갈아가면서 진귀한 음식상을 올리고, 또 기생 몇 패가 풍악을 하면서 날이 다하도록 기쁜 잔치를 열었다. 잔치가 끝날 무렵에 호음이 공사(公事)에 대한 결재를 청했으나 평성은,
“이 늙은 사람은 애초에 무인(武人)이라, 다행히 풍운(風雲)의 제회(際會)를 만나 몸이 이 자리에 이르렀으니, 다만 스스로 마음을 기쁘게 하여 성세(盛世)의 은혜를 보답할 따름이므로 그대가 가진 공사는 돌아가서 본조(本曹)의 판서(判書)에게 물어보게.”
하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호음은 망연히 어쩔 줄 몰랐다. 그리하여 그는 이 일을 평생에 연모하였으므로 늙을 때까지 호사를 계속하였다 한다. 이 이야기는 나의 6세조(世祖) 금계군(錦溪君)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 실려 있다. 그리고 세속에서 전하는 말에,
“호음이 평성의 이 일을 연모하여 호백구(狐白裘)를 훔치는 수단에 익숙하니, 그가 일찍이 강원 감사(江原監司)가 되었을 때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정양사(正陽寺)에서 묵는데 순금 부처를 훔쳐서 드디어 크게 치부(致富)하더니, 나이 늙으매 그 일을 심히 참회하여,
정양사 깊은 곳 향불 태던 그날 밤에 / 正陽寺裏燒香夜
40년 그릇된 일을 거원인 양 깨우쳤네 /蘧瑗方知四十非
라는 시를 읊었다.”
한다. 내 일찍이 정양사에 놀 때 과연 바람벽 위에 이 시가 쓰여 있음을 보았다. 이제 삼사(三使)들의 선사받은 금부처는 모두 셋인즉 수천 냥의 돈을 얻기에는 어렵지 않을 것이며, 만일 호음으로 하여금 이 경우를 만나게 하였으면 반드시 저 정양사에서만 잘못을 깨달았을 뿐 아니리라. 내 부사와 이 이야기를 하고 서로 크게 한바탕 웃었다. 나는 또,
“이제 이 불상이 불행히도 나무 몸뚱이인지라 멀찍이 물리쳐 버렸지만, 만일 순금으로 된 몸이었더라면 이단(異端)을 물리치자는 논(論)도 아마 좀 생각할 점이 있겠지요.”
하고는, 서로들 허리를 잡았다.
장자(莊子 《남화경(南華經)》)에 이르기를,
“말 머리엔 굴레를 씌우고 소 코엔 코뚜레 꿴다.”
하였으니, 소의 코 꿰는 일은 옛날부터 그러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 소는 난 지 겨우 7, 8삭이 되면 벌써 코를 꿴다. 왕형공(王荊公)의 시에,
미련한 저 소에다 코를 꿰지 않을 양이면 / 牛若不穿鼻
맷돌 방아 찧으려도 곧잘 되지 않으리라 / 豈肯推入磨
하였으니, 맷돌 방아도 그러하다면 하물며 수레 끌기나 밭 갈기야 어떠하겠는가. 이제 책문(柵門)에 들어온 뒤 열하에 이르기까지 호(戶)마다 기르는 소가 7ㆍ8두(頭) 이하가 없고, 혹은 3ㆍ40두에 이른다. 그런데 밭을 가나 수레를 이끄나 모두 뿔을 얽매어서 부리고, 하나도 코를 꿴 놈은 없었으며, 소는 모두 유달리 크되 집집마다 방목하였으며, 작은 아이 하나가 수십 마리를 몰 수 있으나 다만 코를 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역시 뿔도 얽매지 않았으니, 중국 사람들의 소치는 기술이 비록 우리에 미칠 바 아니었으나, 다만 코를 꿰지 않는 것은 역시 고금의 다름이 있는가 싶다. 그리고 진(晉) 두예(杜預 진(晉)의 학자. 자는 원개(元凱))의 상소(上疏) 중에도,
“전목(典牧)의 종우(種牛)가 4만 5천여 두나 있으나, 수레도 이끌지 않을뿐더러 늙을 때까지도 코를 꿰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라는 말이 있다. 이를 보아도 중국서도 옛날에는 부리는 소는 모두 코를 꿰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강녀묘(姜女廟)의 주련(柱聯)은 문 승상(文承相)이 쓴 것이 가장 비장(悲壯)하다. 그 글에,
강녀가 죽지 않았고나 천 년 묵은 조각돌이 정렬하고 / 姜女未亡也千年片石猶貞
진황은 어디로 갔는고 만리성엔 원망만 쌓였구녀 / 秦皇安在哉萬里長城築怨
라 하였는데, 글씨도 몹시 기굴(奇崛)하고 과친왕(果親王) 윤례(允禮)가 쓴 시는 역시 전려(典麗)하다.
푸른 전나무 잎은 고생살이 나머지요 / 栢葉從來常自苦
매화꽃은 곱잖아도 향기로 한몫 보네 / 梅花終古不爲姸
그 글씨는 신화(神化)한 듯싶고, 또 건륭(乾隆) 을해년(1755년) 동짓달에 황삼자(皇三子) 등금거사(藤琴居士)가 쓴 시는 또한 산한(酸寒)하다.
늙은 솔 허물어진 담장 옛 사당이 보이고녀 / 松老頹垣見古祠
임 위해 죽은 강녀 그 일이 슬프구나 / 崩城姜女事堪悲
집 방춧돌 바라다가 기절을 이루고는 / 藁砧望斷成奇節
환패만 남았으니 옛 자태를 보는 듯이 / 環佩空餘識舊姿
돌에 뿌린 눈물 자취 그날의 한이러냐 / 石洒淚痕當日恨
예는 물 구슬퍼서 이내 생각 자아내네 / 水流鳴咽後人思
정자 기슭 옷을 털매 쓸쓸하기 짝이 없어 / 振衣亭畔凄涼甚
임의 그 어린 눈동자 이제 더욱 그리워라 / 猶憶凝眸睩曼滋
그 글씨는 더욱 민묘(敏妙)하다. 그리고 방류요수(芳流遼水)는 건륭황제(乾隆皇帝)의 어필이요, 경절처풍(勁節凄風)은 과친왕의 글씨였고 ‘망부석(望夫石)’이란 세 글자는 태원(太原) 백휘(白輝)가 쓴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글자로부터 말 배우기로 들어가고 우리나라 사람은 말로부터 글자 배우기로 옮겨가므로 화(華)ㆍ이(彝)의 구별이 이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로 인하여 글자를 배운다면 말은 말대로 글은 글대로 따로 되는 까닭이다. 예를 들면 천(天) 자를 읽되 ‘한날천(漢捺天)’이라고 한다면, 이는 글자 밖에 다시 한 겹 풀이하기 어려운 언문(諺文)이 있게 된다. 설부(說部) 중에 《계림유사(鷄林類事)》가 실렸는데, 천(天)을 가른 한날(漢捺)이라 하였다. 작은 아이들이 애당초에 ‘한날(漢捺)’이란 무슨 말인 줄을 알지 못한즉, 더군다나 천(天)을 알 수 있겠는가. 정현(鄭玄)의 집 여종이 모두 《시경(詩經)》으로써 문답할 수 있었다 하여, 천 년 동안 아름다운 이야기가 떠돌고 있지마는, 그 실제에 있어서는 중국 사람들은 부인이나 어린이도 모두 문자(文字)로 말을 하므로, 비록 눈으로는 정(丁) 자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으나 입으로는 봉(鳳)을 토(吐)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은 모두 그들의 입에 익은 항용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의 어린이가 시내를 격해서 어머니를 부를 때,
물이 깊어서 건너지 못하외다 / 水深渡不得
라는 말을 처음 듣고는 크게 놀라서,
“중국엔 다섯 살 먹은 아이가 입을 열자 시가 이룩되데그려.”
한다. 이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은 말이 이러함이요, 무슨 뜻이 있어서 글귀를 이루려는 것은 아니다. 노가재(老稼齋)가 일찍이 천산(千山)에 놀러 갔다가 어떤 술 파는 촌 할미를 보고서,
“길이 궁벽하고 사람이 드문 이곳에 누가 술을 사 마시오.”
하고 물었더니 그는,
꽃 향내 풍기니 나비 옴도 저절로 / 花香蝶自來
라고 대답하였다. 여러 말이 아니되 사의(辭意)가 명창(明暢)하여 저절로 운치 있는 말이 되었다. 이는 다름 아니라, 글자로 인하여 말 배우기로 들어간 묘증(妙證)이다. 우리 집 소비(小婢)가 사람됨이 지극히 혼미(昏迷)하여, 어느 날 떡을 얻어 먹게 되었을 때, 엿을 얻어 가지고는 기뻐서 치하하는 말로,
“파촉(巴蜀)도 역시 관중(關中)이랍니다.”
하니, 이는 지패(紙牌 노름의 일종)에 유행되는 말이다. 그가 애초부터 파촉이나 관중을 아는 것이 아니었으나, 다만 그 둘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은즉, 그 말은 저절로 맞아버린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중국말이 알기가 어렵지 않을 뿐더러, 반드시 정씨(鄭氏)의 여종이 천고에 유식하기로 이름 높지 못한 것을 알았노라.
《청비록(淸脾錄)》 이덕무(李德懋)의 저 에 이르기를,
“삼한(三韓) 사람으로서 중국을 골고루 구경한 사람으로는 이익재(李益齋)이름은 제현(齊賢) 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 그의 유력(遊歷)한 것이 시(詩)에 나타난 것만 하더라도 정형(井陘)ㆍ예양교(豫讓橋)ㆍ황하(黃河)ㆍ촉도(蜀道)ㆍ아미(峨眉)ㆍ공명사당(孔明祠堂)ㆍ함곡관(函谷關)ㆍ민지(澠池)ㆍ이릉(二陵)ㆍ맹진(孟津)ㆍ비간묘(比干墓)ㆍ금산사(金山寺)ㆍ초산(焦山)ㆍ다경루(多景樓)ㆍ고소대(姑蘇臺)ㆍ도량산(道場山)ㆍ호구사(虎口寺)ㆍ표모묘(漂母墓)ㆍ탁군(涿郡)ㆍ백구(白溝)ㆍ업성(鄴城)ㆍ담회(覃懷)ㆍ왕상비(王祥碑)ㆍ효릉(崤陵)ㆍ장안(長安)ㆍ정장공묘(鄭莊公墓)ㆍ허문정공묘(許文貞公墓)ㆍ관용방묘(關龍逄墓)ㆍ망사대(望思臺)ㆍ무측천릉(武則天陵)ㆍ숙종릉(肅宗陵)ㆍ빈주(邠州)ㆍ경주(涇州)ㆍ보타굴(寶陀窟)ㆍ월지사자헌마(月支使者獻馬) 등이 있으니, 그 발자취가 이른 곳이 모두 웅장한 곳이어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미쳐 보지 못한 곳이었고, 그 시도 마땅히 동방 2천 년 이래의 명가(名家)가 될 것이다. 그 화려하고 곱고 밝고 맑음이, 삼한의 궁벽하고 고루한 누습(陋習)을 활짝 벗어 버렸으나, 이즈음 사람들은 딱하게도 익재가 곧 이제현임을 알지 못하고, 고군협(顧君俠 미상)이 《원백가시선(元百家詩選)》을 엮을 때도 고려 사람의 시는 한 수도 뽑히지 않았으며, 당시의 목암(牧菴)요공(姚公)과 염자정(閻子靜 원(元) 문학가 염복(閻復). 자정은 자)ㆍ장양호(張養浩 원(元) 문학가. 자는 희맹(希孟)) 등도 모두 익재의 시를 칭찬하였으나, 역시 한 수도 뽑힌 것이 없으니 이는 실로 괴이한 일이다.”
고 운운하였다. 익재의 무덤은 금천(金川) 지금리(只錦里) 도리촌(桃李村 개성(開城))에 있고, 그 밑에는 곧 익재의 구택(舊宅)이요, 구택에다 서원(書院)을 세워서 향례를 치르게 되었다. 나의 연암별업(燕巖別業)이 그 서원에서 십 리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나도 일찍이 한두 번 서원에 가서 그 유집(遺集 《익재난고(益齋亂藁)》)을 읽고서, 더욱이 《청비록(淸脾錄)》의 논평한 말이 철론(鐵論)임을 믿었다. 그의 〈사귀(思歸)〉에는,
늦은 가을 청신(양자강 위에 있는 지명) 숲은 비 속에 잠겨 있고 / 窮秋雨鎖靑神樹
해 저물녘 백제성(양자강 위에 있는 지명)엔 구름이 비꼈구나 / 落日雲橫白帝城
하였고, 〈이릉조발(二陵早發)〉에는,
주사(이이(李耳)의 벼슬 이름)의 약 솥에는 구름만 감돌고 / 雲迷柱史燒丹竈
문왕(주(周) 문왕) 비 피했던 능엔 눈마저 덮여 있네 / 雪壓文王避雨陵
하였고, 〈주행아미(舟行峨眉)〉에는
비에 쫓긴 송아지는 어점으로 돌아오고 / 雨催寒犢歸漁店
물결에 밀린 해오라기 손님 배를 따르더라 / 波送輕鷗近客舟
하였고, 〈다경루(多景樓)〉에는,
밤들어 풍경 울 제 포구에 밀물 들고 / 風鐸夜喧潮入浦
도롱이채 우뚝 서니 비 새는 그 다락을 / 煙簑暝立雨侵樓
하였고, 〈함곡관(函谷關)〉에는,
흙 주머니 그 입을랑 황하 북에 묶어두고 / 土囊約住黃河北
땅덩어리 둥글둥글 백일 서편 둘렀구나 / 地軸句連白日西
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시인(詩人)들이 중국의 고사를 쓸 때, 멋대로 차용하기는 했으나, 정말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서 체험한 이는, 오직 익재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 내 이제, 한 번 고북구(古北口)를 나오자 스스로 옛사람보다 낫다고 생각되었으나, 다만 익재에 비한다면 참으로 모자라는 것이 많음을 깨달았다.
《감구집(感舊集 왕사진(王士稹) 저)》에 청음 선생(淸陰先生 김상헌(金尙憲). 청음은 호)의 시가 실려 있었다. 대개 왕이상(王貽上 왕사진. 이상은 호)의 전처(前妻) 추평(鄒平) 장씨(張氏)는 강남(江南) 진강부(鎭江府)추관(推官) 만종(萬鍾)의 딸이요, 도찰원(都察院)좌도어사(左都御史) 충정공(忠定公) 연등(延登)의 손녀이다. 숭정(崇禎) 말년에 선생이 뱃길로 중국을 향하매, 길이 제남(濟南)을 거치게 되었다. 그때 장충정(張忠定)이 한 번 보고 곧 기뻐하여 엿새를 만류하고, 선생의 ‘조천록(朝天錄)’ 1권에 서(序)를 썼다. 이상이 선생을 익숙히 알게 된 것은 대개 그 처가를 통해서이다. 그가 선생의 시를 초록하여 실은 것은 다음과 같다.
늦은 가을 바닷가엔 기러기 처음 오고 / 三秋海岸初賓雁
깊은 밤 천문에는 객성 하나 번뜩인다 / 五夜天文一客星
폭군의 모진 손에 돌다리는 끊어졌고 / 橋石已從秦帝斷
은하성 높은 배에 사신 오길 허락했네 / 星槎猶許漢臣通
조각달 오경 깊어 수역의 성 머리에 / 五更殘月水城頭
외로이 역사 읊어 배 닿은 이 누구런고 / 咏史何人獨艤舟
동쪽 바다 향해 서서 돌아갈 길 찾지 않고 / 不向東溟覓歸路
북두성 의지하여 신주(중국의 별칭)를 바라보네 / 還依北斗望神州
남쪽 장수 북쪽 손님 모래톱에 모여 들어 / 南商北客簇沙頭
그림 새 푸른 주렴 몇 군데나 배 떴던고 / 畫鷁靑簾幾處舟
죽지사 함께 불러 팔 겨르고 지나가니 / 齊唱竹枝聯袂過
성 속에 연월 가득 이곳도 양주(양자강 운화가 통하는 곳)인 듯 / 滿城煙月似揚州
이들은 모두 이상이 이른바, 맑고 완순하여 가히 읊을 만하다는 작품이다. 이상은 당시 해내의 시종(詩宗)이었으므로 사대부들은 그의 척자(隻字)ㆍ편언(片言)에 대하여 다반(茶飯)처럼 입에서 떠나지 못하므로, 청음의 성명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선생의 천고 대절(大節)은 아는 이가 없었다. 학지정(郝志亭) 성(成)이 김숙도(金叔度 김상헌. 숙도는 자)의 몇 편 가작(佳作)을 들었으면 하고 청하기에, 나는 답하기를,
“저는 애초부터 그의 시를 외는 것이 없고, 다만 이번 걸음에 청음 선생의 6대손(代孫) 이도(履度)의 별장(別章)이 있습니다.”
한즉, 지정은 크게 기뻐하면서,
“이것 역시 기이한 일이군요.”
하기에, 나는 그 시를 내어 보였다. 지정이 두세 번 읊더니 그 뒤에 이 일을 그의 초록한 《용재소사(榕齋小史)》중에 다음과 같이 실었다.
“화산(華山 김이도의 호) 김이도(金履度)는 조선 사신 김청음 상헌의 6세손인데, 그의 〈봉별연암조경(奉別燕巖朝京)〉 원고(原稿)에는 ‘부연(赴燕)’으로 된 것을 지정이 ‘조경(朝京)’이라고 고쳤다. 이란 시에,
넓디넓은 저 연산은 사면에 벌여 있고 / 四面燕山濶
높다란 이 장성은 만 리를 뻗쳤구나 / 萬里秦城高
그 중에 말 달리며 가시는 임이시여 / 中有垂鞭者
백발이 성성하시니 먼 길에 수고할사 / 白髮行邁勞
그 둘째다.
경개하신 담헌(홍대용(洪大容)의 호)이요 / 耿介湛軒子
척당할사 연암님을 / 倜儻燕巖叟
사해가 넓건마는 그의 성명 다 알리라 / 海內知姓名
앞 가고 뒤따르니 높은 바람 한 가지라 / 高風屬前後
하고, 그 뒤를 이어서, ‘건륭(乾隆) 경자년 5월 23일에 화산 김이도는 쓰다.’라고 하였다. 그의 자(字)는 계근(季謹)이요, 글씨는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으니 동국(東國)의 문장 기사(奇士)이다. 그의 벗 박연암(朴燕巖)ㆍ한석호(韓錫祜)와 함께 시주로써 막역의 친구를 삼았더니, 이해 8월에 박연암이 공사(貢使)를 따라 북경에 와서 나와 함께 만나 서로 기뻐하였다. 이에 나는 화산의 증행시(贈行詩) 석 장을 얻어 읽은즉, 그는 사모(四牡 《시경》의 편명. 사신을 보내는 시) 황화(皇華 《시경》의 편명. 사신을 보내는 시)의 끼친 뜻을 깊이 지니었다. 나는 그 중 두 마디를 뽑아서 기록하였다.” 원시(原詩)에는, ‘수방지성명(殊方知姓名)’과 ‘고풍계전후(高風繼前後)’라 했던 것을 지정이 수방(殊方)을 ‘사해(四海)’로, 계(繼)를 ‘속(屬)’으로 고쳤다.
지정은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연암의 족손(族孫) 남수(南壽)의 자는 산여(山如)요, 호는 금성(錦城)이니, 그는 얼굴이 아름답기가 관옥(冠玉 옥으로 꾸민 갓)과 같다 한다. 그의 〈증행(贈行)〉에,
머리가 세었다고 임은 슬퍼하지 마오 / 莫云頭已白
이 하늘 이 땅이란 잠깐인 듯 가 없어라 / 天地忽無窮
요동성 넓은 들에 필마로 돌아 들면 / 匹馬遼東野
한 번 채찍 휘두르매 만리의 바람 부네 / 一鞭萬里風
라고 하였다.” 금성(錦城)은 우리 관형이므로 남수가 금성 박남수 산여라고 썼던 것을 지정은 그릇 호인줄 알았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 나라의 고사(高士) 이재성(李在誠) 중존(仲存 이재성의 자)의 호는 지계(芝溪)인데, 연암의 부제(婦弟)이다. 그의 〈증행(贈行)〉에는,
압록강 두른 물은 띠처럼 되어 있고 / 鴨綠衣帶水
만 리라 저 장성은 묵어서 가올 것을 원고(原稿)에는 ‘연성(燕城)’이라 되었던 것을 지정이 ‘장성(長城)’이라 고쳤다. / 長城宿舂之
머나먼 이 길 떠나 오가는 나그네여 원고에는 ‘고래경유객(古來經遊客)’이라 되어 있었다. / 悠悠遠行客
역력히 알고파라 묻노니 누구누구 / 歷歷知是誰
라고 하였고, 또,
열 해나 지나도록 바위 틈에 숨은 선비 / 十載巖棲客
새벽에 행장 묶어 먼 길을 떠난다니 / 晨裝告遠遊
반생을 글만 읽고 본 적이 없던 것을 / 半生方冊裏
이제야 구경하니 제왕의 거룩한 고을 / 今日帝王州
이라 하였고, 또,
뽕나무 활 다북 살은 일찍 품은 뜻이언만 / 宿昔桑蓬志
사슴 떼와 함께 놀아 불우한 지 몇 해런고 / 沈冥鹿豕群
오히려 두 눈 있으니 이 구경이 재미로서 / 猶被雙眼役
헝클어진 백발 시름 잊어나 보올까나 / 可忘白頭紛
라고 하였고, 또,
여름 비 끓는 곳에 강물은 부풀고 / 雨熱關河漲
구름은 찌는 듯이 계문 숲이 낮게 뵈네 / 雲蒸薊樹低
청컨대 임이시여 먼 길에 조심하오 / 請君愼行李
임은 떠나 가시거다 부디 평안 하옵소서 원고에는 ‘면전신행역(勉旃愼行役)’이라 되어 있다. / 去矣莫棲棲
라고 하였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한석호(韓錫祜) 혜당(惠堂 한석호의 호)과 양상회(梁尙晦) 백후(伯厚 양상회의 자)와 이행작(李行綽) 유재(裕齋 이행작의 자)는 모두 개성(開城)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개성은 여씨(麗氏)의 옛 도읍인데, 그 나라 사람들은 송경(松京)이라 부른다. 이는 옛 개주(開州)이며 옛 이름은 촉막군(蜀莫郡)이다. 이곳에는 신숭(神嵩 개성(開城)의 진산(鎭山))ㆍ자하(紫霞 개성의 동명(洞名))의 좋은 경치가 있고, 문인(文人)과 운사(韻士)들은 오히려 을지생(乙支生)ㆍ정인지(鄭麟趾)가 끼친 풍채를 지녔다. 이는 우리 성조(聖朝)의 문교(文敎)가 널리 먼 나라에까지 미친 보람이었다. 혜당의 〈송연암조경(送燕巖朝京)〉에,
우연히 방향 몰라 이 몸을 붙인 곳이 / 偶爾無方住著身
한 하늘 아래건만 바다 동쪽 가이라네 / 一天之下海東濱
가까운 곳 먼 지역을 평등으로 본다 하면 / 如將遠邇看平等
문밖으로 안 나와도 만리 사람 되오리라 / 不出門時萬里人
새벽 달 뫼에 걸려 시냇집 창이 밝고 / 曉月依山磵戶明
목련화 나무 밑에 남은 정서 이끌리네 / 木蓮花下藹餘情
중국의 아름다움 꾀꼬리는 모르고서 / 黃鸝不識中州好
이별이 서러 우냐 소리소리 울더라 / 啼作陽關惜別聲
푸른 하늘 들을 덮어 사면을 둘렀는데 / 靑天蓋野四周環
동남쪽 솟은 뫼는 한점 두점 사라지네 / 漸失東南點點山
요양에 들어서는 무엇이 보이던고 / 行到遼陽何所見
햇바퀴 빙글 굴러 고국 산천 가리키네 / 日輪回指海雲間
만리 배에 몸을 싣고 바람에 저어가서 / 常願風漂萬里舟
천하 명루 곳곳마다 두루 올라 보고져라 / 遍登天下有名樓
유유히 필마로써 금대 길 달려 본들 / 悠悠匹馬金臺路
가을 바다 외로운 돛에 설렁임과 어떻더니 / 何似孤帆碧海秋
장성이 무너지자 나라도 그렇건만 / 長城自壞國隨之
도시와 인물이야 갑자기 변탄말가 / 朝市人煙遂不移
공자문 사당에는 돌북이 상기 있어 / 夫子廟庭周石鼓
인간 세상 몇 번이나 석양을 겪었던고 / 人間幾度夕陽時
라고 하였고, 또 그의 〈춘원세우(春院細雨)〉에는,
이슬이 방울짐을 오동잎이 먼저 듣고 / 露重梧先聞
우레 소리 가벼우니 새들도 놀라지 않네 / 雷輕鳥不疑
고운 풀 깊어가니 꿈이런가 의심하고 / 嫩草深疑夢
짙어가는 꽃봉오리 흡사히 어린 듯이 / 濃花恰欲痴
검정 개미 섬돌 위에 미끄럼을 타는 듯이 / 玄蟻緣階滑
파랑 벌레 잎을 안아 그 재주 위태롭네 / 靑蟲抱葉危
물 속에 솟아 선 건 쌍무지개 멀리 뵈고 / 水立雙虹遠
연기를 뚫고 가니 외론 새 더디고나 / 煙穿獨鳥遲
시름에 잠긴 채로 홀로 앉은 나그네 / 悄悄孤客坐
그리운 님 생각에 깊이깊이 잠겼구나 / 湛湛美人思
라고 하였고, 백후(伯厚)의 〈송연암조경(送燕巖朝京)〉에는,
눈이 닿도록 바라보니 갈 길이 실이라네 / 極目山河路一絲
마음이 얽혔다면 따라갈 수 없단말가 / 心如相約未相隨
떠나려는 이 자리에 한잔 술 거듭 권하니 / 離筵更進一杯酒
때마침 석양이라 양류만 그저 청청 / 楊柳靑靑斜日時
이라 하였고, 이행작(李行綽)의 〈송별(送別)〉에는,
바닷가에 떠나는 임은 채찍 하나 믿을 뿐 / 濱海行人信一鞭
먼 하늘 유월 철에 빗줄기 길이 달려 / 遼天六月雨長懸
노정을 헤어보니 이에서 삼천 리를 / 計程從此三千里
묻노니 어느 때에 연경에 이를꼬 / 借問幾時可到燕
라”
하였다.
중국 사람들의 기록이 대체로 이와 같다. 이는 비단 원시(原詩)를 많이 점화(點化)하였을뿐더러, 그가 이른바 을지생(乙支生)과 정인지(鄭麟趾)의 끼친 바람이라는 말은 더욱 허리를 잡을 일이다. 우리나라에는 을지생이란 사람이 없은즉, 이는 아마 을지문덕(乙支文德)을 이름일 것이다. 을(乙)ㆍ정(鄭)은 실로 수천 년이나 멀리 떨어진 인물인데, 이제 그들을 나란히 열거하였으니, 이는 아마 을(乙)은 《수서(隋書)》에 나타났고, 정(鄭)은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한 까닭으로 특히 드러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의 기록 중에 계근(季謹)이 한석호(韓錫祜)와 더불어 술로써 막역한 벗이라 하였으니, 가장 가소로운 일이다. 이 둘은 비단 서로 얼굴을 모를 뿐 아니라, 비록 같은 때에 살고 있었으나, 이름자도 통하지 못하였은즉 어찌 시주로써 막역한 벗이 되었겠는가. 더군다나 둘 다 평생에 술을 마시지 못했으니, 이를 어찌할꼬. 명일 내 별안간 길을 떠나게 되었기에, 그 그릇됨을 지적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불(李紱 청 문학가. 자는 거래(巨來))의 《목당집(穆堂集)》 중 〈경인원조조조시(庚寅元朝早朝詩)〉에,
조선 사람 멀리 천자국에 통래한 지 오래되니 / 朝鮮內屬來王久
의관이 속될망정 괴이할 것 무엇 있나 / 肯怪衣冠太俗生
사모 쓰며 관복 입고 봄 들어서 공 바치니 / 紗帽版袍春入貢
바닷가 해돋이에 태평시절 누리고녀 / 海隅日出最昇平
하였으니, 아침 날 산장(山莊) 밖에 천관(千官)들의 퇴근하는 모습을 구경한즉, 붉은 벙거지에 마제수(馬蹄袖)를 입은 차림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럽기 짝이 없음에 비하여, 우리나라 사신들의 의관이야말로 신선처럼 빛이 찬란하였다. 그러나 그 거리에 노는 아이들까지도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서 우리를 도리어 연극하는 배우 같다고 하니, 아아, 서글프다.
이익재(李益齋)의 자는 중사(仲思)요, 또 하나의 호는 역옹(櫟翁)이며, 관(貫)은 경주(慶州)이고, 나이 15세에 급제에 올랐었다. 충선왕(忠宣王)이 원(元)의 수도에 머물 때 만권당(萬卷堂)을 세우고 동으로 돌아올 의사가 없어서 익재를 불러 부중(府中)에 두고 중국의 명류(名流) 조자앙(趙子昻 원(元)의 문학가, 서화가 조맹부(趙孟頫). 자앙은 자)ㆍ원복초(元復初 원의 문학가 원명선(元明善). 복초는 자) 등과 함께 창수하였으며, 그는 또 서촉(西蜀)에까지 사신으로 간 적도 있거니와, 강남(江南)에도 강향(降香)하여 이르는 곳마다 제영(題詠)한 작품이 남의 입에 회자(膾炙)되었다. 그가 동으로 돌아오자, 다섯 임금을 섬겨 네 번이나 재상이 되었다. 충선왕이 고자질에 얽혀서 토번(吐蕃)에 귀양살이 갔을 때, 만 리를 달려가서 위문하되 충분(忠憤)의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 뒤에 김해후(金海侯)에 봉했더니 나이 81세에 졸하였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의 시는 화려하고 곱고도 밝고 맑아서 우리나라 사람의 궁벽하고 고루한 기습에서 쾌히 탈피하였다. 그의 〈노상(路上)〉에,
말 위에 끄덕끄덕 촉도난을 읊으면서 / 馬上行吟蜀道難
다시금 오늘 아침 진관(감숙성에 있는 관문(關門))으로 들어갈 제 / 今朝始復入秦關
푸른 구름 저문 날에 어부수(감숙성에 있는 수명) 막혀 있고 / 碧雲暮隔魚鳧水
붉은 나무 아침 숲은 조서산(감숙성에 있는 산명)이 여기라네 / 紅樹朝連鳥鼠山
문자는 남아 있어 천고 한을 더하였고 / 文字賸添千古恨
명리에 지친 몸은 언제나 한가할꼬 / 利名誰博一身閒
나의 생각 잠긴 곳은 안화사 옛 길에서 / 令人最憶安和路
죽장 망혜 짚고 신고 오가던 그 일뿐을 / 竹杖芒鞋自往還
하였는데, 내가 살고 있는 연암(燕巖) 뒷산 기슭에서 한 재 마루턱을 격하여 안화사(安和寺)의 옛 터가 있으므로 익재의 이 시를 읊을 때마다 그가 죽장 망혜로 이 사이에 서성이던 것을 연상하기도 하려니와 저 촉도(蜀道)ㆍ진관(秦關)ㆍ어부(魚鳧)ㆍ조서(鳥鼠)의 이야기를 듣고서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잃은 듯이 멍하였거든, 하물며 나의 이번 걸음은 또 익재가 이르지 못한 곳일까보냐.
송(宋) 원풍(元豐) 7년(1084년)에 경동(京東) 회남(淮南) 고을에 조서를 내려 고려(高麗) 정관(亭館)을 세우게 하였으므로 밀(密)ㆍ해(海) 두 고을에 시소(時騷)가 일어 백성이 도망한 자가 있었다. 그 이듬해에 소식(蘇軾)이 그곳을 지나다가 제도의 웅장 화려함에 감탄하여 시 한 수를 읊었으되,
처마 끝 높이 솟아 담장 밖에 나르는 듯 / 簷楹飛舞垣墻外
농가 숲은 쓸쓸하여 도끼 자취 뿐이고나 / 桑柘蕭條斤斧餘
오랑캐의 종으로서 다 내주고 보니 / 盡賜昆耶作奴婢
내 몰라라 그들에게 얻은 것이 무에런고 / 不知償得此人無
하였으며, 동파(東坡)가 고려를 미워함이 이르는 곳마다 이러하니, 만일 그로 하여금 강희(康熙)가 세운 33참(站)의 찰원(察院 조선 사신의 내왕을 위해 설치한 숙소)을 보았던들, 그는 또 무어라 하였겠는가.
황산곡(黃山谷 송(宋) 문학가 황정견(黃庭堅). 산곡은 호)의 〈차운목보증고려송선(次韻穆父贈高麗松扇)〉에,
은 마구리 옥 물리고 깨끗한 고치 종이 / 銀鉤玉唾明繭紙
솔 부채 가벼운 바람 한꺼번에 보내 주네 / 松箑輕涼幷送似
가애롭다 이 부채가 책구루고려의 성(城) 이름 를 멀리 건너 / 可憐遠度幘溝漊
더위에 알맞음이 내대자(피서립(避暑笠))와 어떠한고 / 適堪今時褦襶子
라 하였고, 또
옥보다 결백한 문인 기운이 높고 차고 / 文人玉立氣高寒
삼한에 사신 가서 삼신산을 보았다네 / 三韓持節見神山
안기생(중국 신선의 이름)의 불사약을 의당코 얻어다가 / 合得安期不死藥
티끌 속 이내 몸에 옛 껍질을 벗겨 주리 / 使我蟬蛻塵埃間
하였으니, 이제 와서는 고려의 송선(松扇)이란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내 일찍이 고 태사(高太史) 역생(棫生)의 좌상(座上)에서 반정균(潘庭筠)의 〈차왕추사한류시(次王秋史寒柳詩)〉를 외었더니 한자리에 앉았던 손들이 모두 좋다고 칭찬한다. 나는 이내,
“왕추사(王秋史)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풍명재(馮明齋) 병건(秉健)은,
“이는 곧 역성(歷城) 왕 진사(王進士)인데, 이름은 평(苹)이요, 자는 추사(秋史)이며, 자호(自號)를 칠십이천주인(七十二泉主人)이라 하였으니, 반(潘)의 시에,
칠십천 소리소리 돌 절구질 하는 듯이 / 七十泉聲亂石舂
는 곧 이를 두고 이른 것이랍니다.”
하고, 능사헌(凌蓑軒 사헌은 능야의 호) 야(野)는,
“국조(國朝)의 시인으로서는 많이들 추사를 추앙합니다. 그는 일찍이,
어지런 폭포 속에 나막신 소리 누구던고 / 亂泉聲裏誰通屐
누른 잎 숲 사이에 스스로 글을 쓰네 / 黃葉林間自著書
라는 글귀를 읊었고, 그는 또,
누른 잎 떨어질 제 황소 등에 해 늦었고 / 黃葉下時牛背晩
푸른 뫼 이지러진 곳 술 취한 손님 지나가네 / 靑山缺處酒人行
를 읊었으므로, 한때 사람들은 그를 왕황엽(王黃葉)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한다.
고 태사 역생 풍승기(馮乘驥 풍병건. 승기는 자) 등 모든 사람과 더불어 명성당(鳴盛堂)에서 이야기하다가 도보(道甫 이조 때의 문학가ㆍ서예가 이광사(李匡師)의 자)가 쓴 글씨첩 하나를 내어 보였다. 그들은 서로 살펴보더니, 이윽고 나에게,
“이 글씨는 동한(東韓)에 있어서 어떤 등류(等流)에 속합니까.”
한다. 나는 이에 대하여 멍하니 무엇이라 대답하기 어렵기에 다만,
“우연히 행장(行裝) 속에 들어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여, 스스로 옛날 조자(趙資)의 말처럼 슬쩍 피해버렸다.
《일하구문(日下舊聞 주이준(朱彝尊) 저)》에 《동국사략(東國史略 저자 미상)》과 《고려사(高麗史 정인지(鄭麟趾) 등의 저)》 열전(列傳)의 말을 실었는데, 그 글에,
“고려 세자(世子)가 원(元)에 들어가서 원제(元帝)를 편전(便殿)에서 만날 제, 그가 무슨 글을 읽느냐고 물으니, ‘세자는 선비 정가신(鄭可臣 고려 때의 정치가. 자는 헌지(獻之))ㆍ민지(閔漬 고려 때의 문학가. 자는 용연(龍涎))가 따라왔으며 시위하는 여가를 타서 그들에게 《효경(孝經)》과 《논어(論語)》를 질문합니다.’ 하였더니, 원제가 기뻐하여 세자에게 명하여 그들과 함께 들어오게 하고 자리를 주고서, ‘본국(本國)의 세대(世代)가 서로 전해온 순서와 치란(治亂)의 자취와 풍속의 아름다움을 말하라.’ 하여 조금도 지루하게 여기지 않고 들었다. 그 뒤 공경에게 명하여 교지(交趾 월남(越南))를 치려고 할 때 그 두 사람을 불러 함께 의론하니, 그 진술한 것이 뜻에 맞기에 정가신에게는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주고, 민지에겐 직학사(直學士)를 제수하였다.”
하고, 열전(列傳)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제(元帝)가 세자를 자단전(紫檀殿)에서 불러 볼 때 가신이 뒤를 따랐더니, 원제가 명하여 앉게 하고 이내 명하여, ‘갓을 벗기되 수재(秀才)는 머리를 묶을 필요가 없으니 의당 건(巾)을 써야 될 것이야.’ 하였다. 그리고 어안(御案) 앞에 어떤 물건이 있는데, 둥글면서도 조금 뾰죽하고 빛은 깨끗하며, 높이는 한 자 다섯 치며, 그 안은 술 댓 말쯤 수용될 만하다. 이는 마하발국(摩訶鉢國 미상)에서 바친 낙타조(駱駝鳥)의 알이라 한다. 원제가 세자에게 구경시키면서 이내 세자와 종신(從臣)들에게 술을 내리고 가신으로 하여금 시를 읊게 하였다. 가신이 시를 드리되,
알이라 했지마는 크기는 항아리라 / 有卵大如甕
그 속에 간직한 건 늙지 않는 봄이리다 / 中藏不老春
원컨대 천세 수를 임이 먼저 누리시고 / 願將千歲壽
남은 은택 나누어다 해동에도 미치소서 / 醺及海東人
라 하니, 원제가 기뻐하여 자기의 식탁에서 국을 하사하였다.”
[주D-001]우양도 …… 썼더라는군요 : 여기서 ‘우양도 …… 것이니’는 《맹자》 만장 상(萬章上), ‘우리는 …… 지키자’는 《맹자》 이루 상(離婁上), ‘보물도 …… 생기니’는 《중용》 26장, ‘이것이 …… 보냐’는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있는 말을 인용하여 엮은 것이다.
[주D-002]하였다. : ‘그 뒤에 연경 …… 하였다’는 ‘수택본’에는 소주(小註)로 되었으나, 여기서는 여러 본에 의하여 대문(大文)으로 하였다.
[주D-003]우회암(尤悔菴) 동(侗) : 청의 문학가. 회암은 호요, 동은 이름. 자는 전성(展成).
[주D-004]〈외국죽지사(外國竹枝詞)〉 : 외국의 지방 풍속을 칠언절구(七言絶句)로 읊은 것.
[주D-005]비경(飛瓊) : 중국 여도사의 이름. 여기서는 허초희를 그에게 비한 것이다.
[주D-006]나는 …… 것을 : 허경번은 본시 여도사 번 부인(樊夫人)을 경모(景慕)하여서 지은 것인데, 번천(樊川) 두목(杜牧)의 아름다운 풍모를 연모하여 지었다는 그릇된 것을 변명하였다.
[주D-007]목사(牧使) 아무 : 김려(金鑪)의 《유구왕세자외전(琉球王世子外傳)》에는 이난(李灤)이라 하였다.
[주D-008]삼량(三良) : 어진 세 사람. 춘추시대 때 진 목공(秦穆公)이 죽으매 순장(殉葬)시킨 엄식(奄息)ㆍ중행(仲行)ㆍ겸호(鎌虎)를 가리킨 말이다.
[주D-009]두 아들 …… 잔폭하오 : 전국 때 위 선공(衛宣公)의 두 아들 급(伋)과 수(壽)가 계모의 흉계에 의하여 배에서 피살된 일을 말한 것. 《左傳 桓公 16年》
[주D-010]모수(毛遂) : 전국 때 조(趙)의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의 문하에 있던 변사(辯士).
[주D-011]분양(汾陽) : 당의 정치가 곽자의(郭子儀)의 봉호. 자도 역시 자의(子儀).
[주D-012]상간(桑間) : 하남성에 있는 지명. 음탕한 남녀들이 모여드는 곳.
[주D-013]백설(白雪)의 곡조 : 백설은 곡조 이름. 백아(伯牙)가 저속한 하리(下俚)를 탈 때에는 듣는 이가 많았는데, 백설을 타니 화답하는 자가 적었다 한다.
[주D-014]《태평광기(太平廣記)》 : 송의 이방(李昉) 등이 어명을 받들어 엮은 책.
[주D-015]왕벽지(王闢之) : 송 철종(宋哲宗) 때 학자. 벽지는 이름이요, 자는 성도(聖塗).
[주D-016]정원(定遠) : 후한의 명장 반초(班超). 정원은 봉호요, 자는 중승(仲升).
[주D-017]그러나 …… 일은 : 위의 네 장수는 모두 무식하다는 이름을 얻은 자들이다.
[주D-018]문로(文潞) : 송 인종(宋仁宗) 때 명상 문언박(文彦博). 노는 봉호. 자는 관부(寬夫).
[주D-019]사이(四彝) : 사이(四夷). 연암과 필담하였기 때문에 이(夷)를 이(彝)로 하였다.
[주D-020]그들이 …… 모습 : 전국 때 조(趙)의 장수 염파(廉頗)를 늙었다고 등용하지 않기에 그는 말에 올라서 자기는 늙었어도 전장에 나갈 수 있음을 과시하였다.
[주D-021]농사일은 …… 의당하다 : 이 몇 구절은 한(漢) 진평(陳平)의 말인데, 심경지가 빌려 썼던 것이다.
[주D-022]원(元) : 현(玄)이다. 청 나라 사람은 강희의 이름이 현엽(玄曄)이었으므로 ‘현(玄)’ 자를 피하여 ‘원(元)’ 자로 대신 썼다.
[주D-023]이 장군 : 이광(李廣)
[주D-024]돈 벽 : 화교(和嶠)가 그 가멸기가 왕자에 비길 만하였으나 오히려 돈을 아꼈으므로 그를 전벽(錢癖)이라 하였다.
[주D-025]서음(書淫) : 황보밀(皇甫謐)이 글 읽기를 지나치게 좋아하여 침식을 잊으므로 그를 서음(書淫)이라 하였다.
[주D-026]《치청전집》 : 청 이개(李鍇) 저. 치청은 그의 호. 치청산인(豸靑山人).
[주D-027]종인부(宗人府) : 황족(皇族)의 관계 사무를 보는 관부.
[주D-028]기량을 울었다네 : 전국 제(齊)의 사람. 그가 전쟁에 나갔다가 죽었는데, 그의 아내가 무덤에 가서 우는 소리가 너무나 슬펐기 때문에 제인(齊人)은 그것을 노래로 불렀다 한다.
[주D-029]봉규(圭) : 어떤 본에는 봉규(封圭)로 되었으나 잘못된 것이다.
[주D-030]담원팔영(澹園八詠) : 담원의 주위에 벌여 있는 팔경(八景)을 읊어서 축하하는 시.
[주D-031]절만 하네 : 송(宋) 서예가 미불(米芾)이 무위(無爲)라는 고을에서 커다란 괴석(怪石)을 발견하고는 의관을 갖추어 절하여 형(兄)이라 일컬었다.
[주D-032]백 동파 : 소식(蘇軾)이 미피(渼陂)에서 놀 때의 고사.
[주D-033]나부산 : 매화가 많이 난 고장.
[주D-034]적성(赤城) : 천태산(天台山) 부근에 있다.
[주D-035]화예부인 : 오대 때 촉왕(蜀王) 맹창(孟昶)의 부인으로 절색에 문장을 겸하였다.
[주D-036]아름다운 …… 같으리 : 이 시는 벌써 《망양록(忘羊錄)》 중에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주석은 생략하였다.
[주D-037]진서라네 : 당시에는 국문을 언문이라 하고 한자를 진서(眞書)라 하였다.
[주D-038]구주(九疇) : 기자(箕子)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진술한 〈홍범편(洪範篇)〉에 실린 정치 이론.
[주D-039]육부(六部) : 신라 초기에 그 서울인 경주를 중심으로 설치한 행정 구역.
[주D-040]약을 …… 가고 : 진 시황이 서시(徐市)로 하여금 동남(童男) 동녀(童女) 5백 명을 거느리고 바다 섬으로 보내어 불사약(不死藥)을 구했다.
[주D-041]박랑의 모래벌 : 장량(張良)이 창해 역사(滄海力士)를 시켜 박랑 모래벌에서 매복하였다가 철퇴로써 진 시황을 쳤으나 잘못되어 다음 수레가 맞았다.
[주D-042]구정은 아직 잠기고 : 구정은 하우(夏禹) 때부터 내려오던 신기(神器)였으므로 나라가 망한 것을 구정이 잠겼다 한다. 여기서는 주(周)가 망했다는 말.
[주D-043]삼호들은 일어섰네 : 초(楚)의 항적(項籍)을 말한다.
[주D-044]여섯 왕이 쓰러지자 : 당시의 한(韓)ㆍ조(趙)ㆍ위(魏)ㆍ연(燕)ㆍ제(齊)ㆍ초(楚)의 6국이 망했음을 말한다.
[주D-045]손을 마침 떼었다네 : 진 시황이 저격한 범인을 열흘 동안을 찾았으나 잡지 못했다.
[주D-046]호가의 슬픈 박자 : 한말 채문희(蔡文姬)가 되놈에게 몸이 팔리어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을 지어서 스스로 슬퍼하였다.
[주D-047]채문희를 속할쏘냐 : 조조(曹操)가 천금으로 채문희를 속환하였다.
[주D-048]대숙륜(戴叔倫) : 당 현종(唐玄宗) 때 문학가. 자는 유공(幼公).
[주D-049]제용작가(帝庸作歌) : 《시경》 익직편(益稷篇)에 나오는 한 구절.
[주D-050]관관저구(關關雎鳩) : 《시경》 관저장(關雎章)의 첫 구절.
[주D-051]양백화 : 음탕한 일을 풍자한 패곡(牌曲)의 이름인 듯하나 출전 미상.
[주D-052]점필재(佔畢齋) : 이조 때의 문학가 김종직(金宗直)의 호. 자는 계온(季昷).
[주D-053]생추(生蒭) : 《시경》 소아(小雅) 백구장(白駒章)에 나오는 말로서 예물(禮物)이라는 뜻.
[주D-054]기 귀주(奇貴州) : 기풍액(奇豐額). 귀주는 그가 그 고을을 맡고 있었다.
[주D-055]최두기 …… 일쑤이다 : 최두기는 멋모르고 변절한 오삼계가 상투를 보고 명(明)을 생각해서 울었다 하고, 또 전겸익이 청(淸)에 벼슬까지 한 것을 지사인 듯 칭찬하였는데, 이는 모두 ‘몽롱춘추’라는 것이다. 최두기는 조선 정조(正祖) 때 문학가로, 두기는 호요, 성대는 이름이며, 자는 사집(士集)이다.
[주D-056]주의(周顗) : 진(晉)의 지사(志士). 자는 백인(伯仁). 신정에서 고국이 망하였음을 슬퍼하였다.
[주D-057]나라 …… 있네 : 국(國)자 속에 과(戈) 자를 떼고 일(一) 자와 인(人) 자를 더 넣은 듯하나 무슨 글자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다.
[주D-058]김모재(金慕齋) : 조선 때 유학자 김안국(金安國)의 호. 자는 국경(國卿).
[주D-059]화홍산(華鴻山) 찰(察) : 명(明)의 관리이면서 문학가. 홍산은 호요, 찰은 이름이며, 자는 자잠(子潜).
[주D-060]최간이(崔簡易) :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학가 최립(崔岦). 간이는 호요, 자는 입지(立之).
[주D-061]사흘을 바장이곤 : 국선(國仙) 영랑(永郞)ㆍ술랑(述郞)ㆍ안상(安詳)ㆍ남석(南石) 네 사람이 사흘을 놀았다 해서 삼일포라는 이름을 얻었다.
[주D-062]심백수(沈伯修) : 조선 영조(英祖) 때 관리이며, 문학가인 심염조(沈念祖). 백수는 자.
[주D-063]왕감주(王弇州) : 명의 문학가 왕세정(王世貞). 감주는 호.
[주D-064]만나러 갔더니 : 최립은 일찍이 이정귀(李廷龜)의 사행을 따라서 명에 갔다.
[주D-065]획린해(獲麟解) : 불과 2백 자도 차지 않는 단편이지마는 논리의 정연함과 조직의 체계로 보아서 전형적인 고문장의 궤범이 된다.
[주D-066]허균(許筠) :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의 저명한 문학가ㆍ사상가. 자는 단보(端甫).
[주D-067]주태사(朱太史) 지번(之蕃) : 명의 정치가요, 문학가. 자는 원개(元介) 또는 원승(元升).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던 일이 있다.
[주D-068]빈공(賓貢) : 당(唐)에 외국 학생을 받기 위해 설치한 학과(學科). 곧 빈공과.
[주D-069]한무외(韓无畏) : 조선 선조(宣祖) 때 신선이 되었다는데 방술에 저명하였다.
[주D-070]최승우(崔承祐) : 신라 진성왕(眞聖王) 때 문학가. 일찍이 당에 유학하였다.
[주D-071]종리 장군(鍾離將軍) : 한 고조(漢高祖) 때 장군 종리매(鍾離昧). 한신(韓信)을 위해서 자살하였다.
[주D-072]예학명(瘞鶴銘) : 육조(六朝) 때 양(梁)의 은사 도홍경(陶弘景)이 초산(焦山) 석벽 위에 지어 새긴 글의 탑본(搨本).
[주D-073]사운(思運) : 자는 형중(亨仲). 어떤 본에는 ‘사운(思運)’이란 두 글자는 소주로 되어있다.
[주D-074]칠십천 : 왕추사가 살고 있던 성수천(聖水泉)은 원(元)의 우흠(于欽)이 품정(品定)한 72 천(泉) 중의 24천이었으므로, 그는 《이십사 천초당집(二十四泉草堂集)》이 있었다.
[주D-075]왕랑의 …… 얼굴 : 진(晉)의 왕공(王恭)의 얼굴이 아름다우므로 사람들이 탁탁한 봄 버들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왕추사가 서로 견준 것이다.
[주D-076]남약천 구만(九萬) : 조선 숙종(肅宗) 때 문학가며 정치가. 약천은 호요, 구만은 이름이며, 자는 운로(雲路).
[주D-077]선생안(先生案) : 그 고을 장관을 지낸 이의 성명과 약력을 기록한 책.
[주D-078]윤형성(尹衡聖) : 조선 숙종 때의 학자. 자는 경임(景任). 당시의 진주 목사(晉州牧使).
[주D-079]곽재우(郭再祐) : 조선 선조(宣祖) 때 저명한 장수. 자는 계수(季綬)요, 호는 망우당(忘憂堂). 홍의 장군(紅衣將軍)이라 일컬었다.
[주D-080]웅해 …… 정진(鼎津) : 모두 경상도에 있는 작은 지명들이다.
[주D-081]음릉 …… 것이 : 항적이 한 고조(漢高祖)와 싸우다가 해성(海城)에서 패하여 음릉으로 도망할 때, 어떤 노부의 말을 들어 길을 잃었고, 오강에 이르러서는 강동(江東) 사람들을 대하기 부끄러워 자살하였다.
[주D-082]정호음(鄭湖陰) 사룡(士龍) : 조선 중종(中宗) 때 문학가. 호음은 호요, 사룡은 이름이며, 자는 운경(雲卿).
[주D-083]박평성(朴平城) 원종(元宗) : 조선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고 중종을 맞아들인 훈신. 평성은 봉호요, 원종은 이름이며, 자는 백윤(伯胤).
[주D-084]금계군(錦溪君) : 조선 문학가 박동량(朴東亮). 금계는 봉호요, 자는 자룡(子龍).
[주D-085]호백구 …… 수단 : 전국 제(齊)의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이 진(秦)에서 붙들려 있을 때에, 그의 문객이 개구멍 도적질을 잘하여 진왕(秦王)의 흰 여우 갖옷을 훔쳐서 진왕의 애희(愛姬)에게 바치고 면했다.
[주D-086]거원(蘧瑗) : 전국 때 위(衛)의 현인으로서, 나이 50이 되어서 49세까지의 잘못을 깨달았다.
[주D-087]설부 …… 계림유사(鷄林類事) : 설부는 명의 도종의(陶宗儀)가 엮은 것이요, 계림유사는 손목(孫穆)이 지었다.
[주D-088]파촉 …… 관중(關中)이랍니다 : 파촉은 중국 사천 지방이요, 관중은 섬서 지방으로서 한 고조 유방과 초 패왕 항적이 서로 먼저 관중을 점령하려고 경쟁을 할 때 생긴 말. 꿩 대신에 닭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주D-089]시(詩)에 …… 있으니 : 정형은 하북성정형산 위에 있는 요새지. 예양교는 전국 때 절사(節士) 예양이 지백(智伯)을 위해서 조양자(趙襄子)를 저격하려고 숨었던 다리. 촉도는 사천성에서 섬서성으로 통하는 험로(險路). 아미는 사천성에 있는 산명. 공명사당은 제갈량(諸葛亮)의 사당. 공명은 그의 자. 함곡관은 하남성 서북부 황하의 계곡에 있는 요해의 관문. 민지는 하남성에 있는 호수명. 이릉은 하남성 효(殽)에 있는 명소. 맹진은 하남성에 있다.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을 칠 때 제후를 모았던 곳. 비간묘는 은의 충신 비간의 무덤. 금산사는 강소성 진강부에 있는 명소. 초산은 강소성 단도현(丹徒縣)에 있는 명소. 다경루는 강소성감로사(甘露寺)에 있는 명소. 고소대는 강소성 오현(吳縣)에 있는 명소. 도량산은 강소성에 있는 명소이며, 호구사도 같다. 표모묘는 강소성 회음(淮陰)에 있는데, 한신(韓信)에게 밥을 먹인 표모의 무덤. 탁군은 하북성에 있는 지명. 백구는 위와 같음. 업성은 하남성에 있으며 담화도 같다. 왕상비는 하남성에 있으며 왕상은 진(晉)의 효자. 효릉은 하남성에 있는 명소. 장안은 섬서성에 있는 도시. 정장공묘는 전국 때 정장공의 무덤. 허문정공묘는 원의 유학자 허형(許衡)의 무덤. 문정은 시호. 관용방묘는 하(夏)의 충신 관용방의 무덤. 망사대는 한 무제(漢武帝)가 그의 아들 여 태자(戾太子)를 죽이고 후회하여 쌓은 대. 무측천릉은 당의 황후 무조(武曌)의 무덤. 숙종릉은 당 숙종의 무덤. 빈주는 섬서성에 있는 지명. 경주는 안휘성에 있는 지명. 보타굴은 절강성에 있는 명소. 월지사자헌마는 중앙 아시아 지방에 있던 월지국 사자가 헌납한 말을 보고 읊었다.
[주D-090]요공(姚公) : 원(元)의 문학가 요수(姚燧). 목암은 호요, 자는 단보(端甫).
[주D-091]주행아미(舟行峨眉) : 원제(原題)는 〈8월 17일 방주향아미산(八月十七日放舟向峨眉山)〉.
[주D-092]다경루(多景樓) : 원제에는 〈다경루배권일재용고인운동부(多景樓陪權一齋用古人韻同賦)〉.
[주D-093]깊은 …… 번뜩인다 : 한 나라 엄광(嚴光)이 광무제(光武帝)의 배 위에 발을 올렸을 때 태사(太史)가 여쭙기를 객성이 제좌(帝座)를 범했다 하였다. 여기에서는 김상헌이 자기가 사신으로 왔음을 말한 것이다.
[주D-094]은하성 …… 허락했네 : 한(漢)의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으로 사신 가던 고사.
[주D-095]만리 …… 보고져라 : 연암의 아들 종간(宗侃)의 주(注)에, “삼가 상고하옵건대 이 두 글귀는 원집(原集) 중에 있는 것을 혜당(惠堂)이 이용한 것이다.”
[주D-096]강향(降香) : 유명한 사원(寺院)이나 묘우(廟宇)에 내리는 치전(致奠).
[주D-097]촉도난(蜀道難) : 촉도의 험준함을 읊은 이백(李白)의 시가 있다.
[주D-098]조자(趙資) : 삼국 때 오(吳)의 변사. 자는 덕도(德度). 조위(曹魏)에 사신 갔을 때 임기응변이 많았다.
[주D-099]슬쩍 피해버렸다 : ‘고 태사 역생 …… 피해버렸다’ 까지의 이 한 절은 다른 본에 없던 것을 이에 ‘일재본’에 의하여 넣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