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熱河日記) - 황도기략(黃圖紀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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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황도기략(黃圖紀略)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황도기략(黃圖紀略)
1. 황성구문(皇城九門)
2. 서관(西館)
3. 금오교(金鼇橋)
4. 경화도(瓊華島)
5. 토원산(兎園山)
6. 만수산(萬壽山)
7. 태화전(太和殿)
8. 체인각(體仁閣)
9. 문화전(文華殿)
10. 문연각(文淵閣)
11. 무영전(武英殿)
12. 경천주(擎天柱)
13. 어구(御廐)
14. 오문(午門)
15. 묘사(廟社)
16. 전성문(前星門)
17. 오봉루(五鳳樓)
18. 천단(天壇)
19. 호권(虎圈)
20. 천주당(天主堂)
21. 양화(洋畫)
22. 상방(象房)
23. 황금대(黃金臺)
24. 황금대기(黃金臺記)
25. 옹화궁(雍和宮)
26. 대광명전(大光明殿)
27. 구방(狗房)
28. 공작포(孔雀圃)
29. 오룡정(五龍亭)
30. 구룡벽(九龍壁)
31. 태액지(太液池)
32. 자광각(紫光閣)
33. 만불루(萬佛樓)
34. 극락세계(極樂世界)
35. 영대(瀛臺)
36. 남해자(南海子)
37. 회자관(回子館)
38. 유리창(琉璃廠)
39. 채조포(綵鳥舖)
40. 화초포(花草舖)
황성구문(皇城九門)
북경(北京) 성의 주위는 40리인데 꼭 바둑판처럼 생겼다. 정남향은 정양(正陽)이요, 동남은 숭문(崇文)이요, 서남은 선무(宣武)요, 정동은 조양(朝陽)이요, 동북은 동직(東直)이요, 정서는 부성(阜成)이요, 서북은 서직(西直)이요, 북서는 덕승(德勝)이요, 북동은 정안(定安)이라 부른다. 성 안에는 자금성(紫禁城)이 있어 주위는 17리인데 붉은 단장에 누런 유리 기와를 덮었고, 문에서 서북쪽을 지안(地安), 남쪽을 천안(天安), 동쪽을 동안(東安), 서쪽을 서안(西安)이라 부른다. 자금성 안은 곧 궁성이 되어 정남은 태청문(太淸門)이요, 제2문은 곧 자금성의 천안문(天安門)이요, 제3문은 단문(端門)이요, 제4문은 오문(午門)이요, 제5문은 태화문(太和門)이었으며, 뒤는 건청문(乾淸門)이요, 건청의 북쪽은 신무(神武)요, 동쪽은 동화(東華)요, 서문은 서화(西華)였다. 그리고 9개의 문루(門樓)는 모두 처마가 3겹이요, 문마다 옹성(甕城)이 붙어 있으며, 옹성에는 모두 2층 적루(敵樓)가 있고, 쇠로 싼 관문이 성문과 마주보고 섰고, 좌우에는 편문(便門)이 함께 있다. 그 정남쪽 1면은 외성(外城)이 되어 7문이 났으니 제도는 내성 9문과 같다. 정남이 영정(永定)이요, 남쪽 왼편이 좌안(左安)이요, 오른편이 우안(右安)이요, 동쪽이 광거(廣渠)요, 서쪽이 광녕(廣寧)이요, 광거의 동쪽 모퉁이 문은 동편(東便)이요, 광녕의 서쪽 모퉁이 문을 서편(西便)이라 한다. 지안문 밖에는 고루(鼓樓)가 있고, 고루의 북편에는 종루(鍾樓)가 있다. 각루(角樓)가 6개요, 수문(水門)이 3개다. 성을 두른 못 물은 옥천산(玉泉山)에서 발원을 하여 고량교(高梁橋)를 지나 물은 두 갈래로 흩어졌다. 한 갈래는 성 북쪽을 돌아 동쪽으로 꺾어 남으로 흐르고, 하나는 성의 서쪽을 돌아 남으로 꺾어 동으로 자금성에 들어 태액지(太液池)가 되었고, 이 물은 9문을 감돌아 9삽회(牐滙 수문(水門))를 지나서 대통교(大通橋)에 이르는데, 동서 언덕은 모두 벽돌과 돌로 쌓았다. 9문의 못 도랑은 모두 큰 돌다리를 놓았다. 외성의 못 물은 역시 옥천의 물이 갈라져 서각루(西角樓)에서 성을 감돌아 남으로 흘러서 또 동으로 꺾어 동각루(東角樓)까지 이르러 7문을 거쳐 동으로 운하(運河)에 들어간다. 각기 다리 하나씩 걸쳐 있다. 내성이 16개에, 네거리는 24방(坊)이 되었으되 태정문의 동쪽 방(坊) 부문(敷文)이요, 서쪽은 진무(振武)라 하고, 숭문문 안의 맞은편 방은 취일(就日)이요, 선무문 안의 맞은편 방은 첨운(瞻雲)이요, 동대가(東大街)의 사패루(四牌樓)는 이인(履仁)이요, 서대가(西大街)의 사패루는 행의(行義)요, 태학(太學)의 동서로 마주보는 방은 성현(成賢)이요, 부학(府學)의 동서로 마주보는 방은 육현(育賢)이요, 제왕묘(帝王廟)의 동서로 마주보는 방은 경덕(景德)이라 한다. 바로 정양문을 나서 10리 밖 남교(南郊)에는 원구(圓邱)가 있고, 정안문 밖으로 곧장 10리를 가면 북교(北郊)가 되어 방택(方澤)이 있고, 조양문 밖을 줄곧 10리를 나가면 동교가 되어 해가 여기서 뜨고, 부성문 밖으로 줄곧 10리를 나가면 서교(西郊)가 되어 달 지는 데가 여기다. 태묘(太廟)는 대궐의 왼쪽에 있고, 사직(社稷)은 대궐의 오른편에 있고, 육과(六科)는 단문의 좌우에 있으며 육부(六部)와 백사(百司)는 태청문 밖 좌우에 있다. 내가 이미 중국으로부터 돌아와 지난 곳을 매양 회상할 제 모두가 감감하여 마치 아침 놀이 눈을 가리는 듯하고, 침침하기는 마치 넋을 잃은 새벽 꿈결인 양 싶어서 남북의 방위를 바꾸기도 하고 명목과 실상이 헝클어지기도 하였다. 하루는 정석치(鄭石痴)로 하여금 《팔기통지(八旗通志 저자 미상)》에서 〈황성일피도(皇城一披圖)〉를 내어 달라 하여 보니 성지ㆍ궁궐ㆍ가방(街坊)ㆍ부서(府署)들이 손금을 들여다보는 듯하고, 지상(紙上)에서 마치 신발 끄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기에 드디어 요긴한 대목을 추려 권수(卷首)에다가 기록하고 ‘황도기략(黃圖紀略)’이라 이름하였다. 대체로 북경의 제도가 앞은 조정이요, 뒤는 저자요, 왼편은 종묘(宗廟)요, 오른편은 사직이요, 9문이 바르고 9거리가 곧아서 한 번 도성이 바르자 천하가 바로잡힘을 볼 수 있었다.
[주D-001]정석치(鄭石痴) : 연암의 친구 정철조(鄭喆祚)의 호.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서관(西館)
서관(西館)은 첨운패루(瞻雲牌樓) 안의 큰 거리 서쪽 백묘(白廟)의 왼쪽에 있다. 정양문 오른편에 있는 것은 남관(南館)이라 하니 모두 우리나라의 사관(使館)이다. 동지사(冬至使)가 먼저 남관에 들었을 때 별사(別使)가 뒤미쳐 오게 되면 이 관에 나누어 든다. 혹자는 이르기를,
“이 집은 죄과로 몰수당한 것이다.”
한다. 앞 담이 10여 칸인데 벽돌로 모란을 새겨 쌓아 알쏭달쏭 물린 무늬가 영롱했다. 정사(正使)는 정당(正堂)에 거처하고 가운데 뜰에는 동서 양당이 있어 부사와 서장관이 나누어 거처하고 나는 전당(前堂)에 거처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금오교(金鼇橋)
태액지(太液池)를 걸쳐 돌다리를 놓았는데 동서가 2백여 보요, 양쪽엔 백옥 난간을 세웠고, 가운데는 두 자를 더 높여서 길을 닦았고, 양 옆 협도에는 겹 난간을 만들어 난간 머리에 새긴 짐승 대가리는 모두 4백 80여 개나 되었다. 모두가 저만큼 모양을 달리하여 하나도 같은 것이 없었다. 다리의 양쪽 끝은 두 방(坊)이 마주 섰는데, 서쪽이 금오요, 동쪽이 옥동(玉蝀)이다. 거마는 문 어귀에 들어차서 울부짖고 수많은 유람객은 몹시 복잡하였다. 호수 물결은 햇빛 아래서 반짝이고 티끌 하나 없는데 북쪽으로는 오룡정(五龍亭)이 바라보이고 서쪽으로는 자금성이 바라다 보였다. 깊은 숲은 자욱한데 층층 누각과 겹겹 궁전이 서로 가리고 마주 비치어 있고, 5색 유리 기와는 햇빛에 따라서 밝았다 어두웠다 한다. 백탑사(白塔寺)의 부도(浮屠)와 정각들의 황금 호로병(葫蘆甁) 꼭대기는 때로 나무숲 위로 솟아 있고, 수풀 저쪽으로 멀리 보이는 하늘 빛은 파란데, 맑은 아지랑이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만들어 마치 늦은 봄 날씨만 같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경화도(瓊華島)
태액지 복판에 있는 섬을 경화(瓊華)라고 부른다.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요 태후(遼太后)가 화장하던 대(臺)이다.”
하였고, 원 순제(元順齊)는 영영(英英 미상)을 위해서 채방관(采芳館)을 이곳에 짓고 섬까지 돌다리를 걸쳐서 놓았는데, 제도는 금오교와 같았다. 다리 두 끝에는 역시 두 방(坊)을 세웠는데, 퇴운(堆雲)과 적취(積翠)라고 불렀다. 더러는 이르기를,
“이 다리의 이름은 금해교(金海橋)라고 부른다.”
한다. 호수 위에는 축대가 있어 옹성(甕城)과 같이 생겼고, 축대 위에는 전각이 섰는데 푸른 일산 같았다. 다리 위에 서서 금오교를 보니 행인과 거마들이 인간 세상과는 달라 보였다. 축대 아래는 금(金) 나라 때 늙은 소나무가 있어서 명(明)의 가정(嘉靖) 연간에 녹봉을 내리고 호를 도독송(都督松)이라 불렀다. 이 솔을 전나무라고도 하고, 혹은 노송나무라고도 했다. 명과 청(淸) 사이에 많은 시구들을 남겨 놓았다. 지금은 모두 꺾어져 없어지고 다만 2그루의 썩은 나무둥치만 남아 빛은 허옇고 무슨 나무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토원산(兎園山)
토원산(兎園山)은 일명 토아산(吐兒山)이다. 높이는 불과 5,6길이요, 둘레는 겨우 1백여 보이다. 깎은 주춧돌이 군데군데 놓여 옛날 전각의 축대 같기도 했다. 안으로는 흙을 쌓아 산을 만들고, 바깥에는 빙 둘러 태호석(太湖石)을 세워 알쏭알쏭 뚫어진 구멍이 영롱하게 푸를 뿐, 다른 빛깔은 섞이지 않았다. 높이는 모두 한 길 남짓 되는데 돌로서는 아주 다시 없을 만큼 이상하게 생긴 것이다. 돌을 쌓아 작은 굴을 만들었는데 양쪽 머리에는 모두 홍예문(虹霓門)을 달았다. 굴을 빠져 나오면 또 괴석으로 길을 끼고 달팽이집처럼 틀어 올려 봉우리를 만들어 굽이굽이 돌도록 하였으며, 그 위에는 몇 칸 정자를 세워 대궐을 굽어보도록 하였다. 또 다리 몇 10보를 가면 돌로 만든 용이 머리를 쳐들었고, 그 아래로는 네모난 연못이 있다. 벽돌로 도랑을 내어 구불구불 틀어지게 하였는데, 이는 흡사 유상곡수(流觴曲水) 자리인 것만 같다. 그러나 기계를 돌려 물을 끌어대던 물건은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다. 산 앞에는 돌 평상과 옥 바둑판이 있고, 또 수십 보를 더 가니 3층으로 된 둥근 축대가 있는데 그 모양이 맷돌과 같았다. 그 아래에는 갓 허물어진 전각이 있었다. 산 속에 있는 돌이란 돌은 모두가 꼿꼿이 서서 기울어진 놈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는데, 허물어진 담장과 부서진 기와는 이곳저곳 흩어져 있었다. 내가 듣기로는,
“황제가 일찍이 서산(西山)에서 토목의 역사에 사치가 궁극하였다.”
하는데, 유독 이곳은 금원(禁苑)의 지척에 있건마는 전연 수리를 하지 않은 채 마치 황산과 폐허나 다름없이 두었음은 과연 무슨 까닭일까.
[주D-001]유상곡수(流觴曲水) : 술잔을 물에 띄워 돌려 가면서 마시도록 한 놀이터.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만수산(萬壽山)
태액지를 파서 산을 만든 것이 곧 만수산(萬壽山)인데 또는 매산(煤山)이라고도 한다. 산 위에는 3층 전각이 있고 4개 법륜간(法輪竿)을 세웠으니, 여기가 명(明)의 의종렬황제(毅宗烈皇帝)가 순국(殉國)하던 곳이다. 나는 항주(杭州) 사람 육가초(陸可樵)와 이면상(李冕相) 등을 오룡정(五龍亭)에서 만났다. 두 사람이 함께 처음으로 북경에 와서 길을 모르고 헤매는 것은 나나 다름 없었다. 그들은 다만 옛 사람의 기록에 의거하여 때때로 이것을 옷주머니 속에서 자주 끄집어내어 보면서 때로는 서로 보고 웃기도 하고, 때로는 둘이 마주보고 깜짝 놀라기도 하였으니, 대체로 그들은 옛날 기록을 뒤적거려 보다가 맞힐 때도 있고 맞지 않을 때도 있고 한즉, 스스로 기뻐할 적도 있으려니와 또 놀랄 때도 없지 않았던 것이었다. 저들은 중국 사람이지마는 보고 들은 것이 서로 틀리고, 옛 기록이 때로는 이같이 착오와 거짓이 있거늘 하물며 나 같은 외국인일까보냐. 나도 이 때문에 나 자신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내가 처음은 만세산(萬歲山)을 만수산으로만 알았던 것이다. 대체로 중국 발음으로 만(萬)을 ‘완’이라 하고 세(歲)는 ‘수(秀)’와 ‘쇄(灑)’의 번절(飜切)인 ‘쒜이’이기 때문에, 만수나 만세는 음과 뜻이 함께 비슷하고 보니 산 하나를 두고 두 이름을 붙이게 된 줄로만 알았더니, 이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옛 기록을 상고해 보면 과연 같은 산이 아니었다. 며칠 전에 구경한 토원산과경화도가 곧 만세산이다. 비하자면 사람이 자리를 마주 앉아 얼굴을 보고 이름을 물어서 각각 서로 분간해 아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세산은 금(金)의 사람들이 송(宋)의 간악(艮嶽)을 손수레로 실어 옮겨 만든 것으로 당시에는 ‘절량석(折糧石)’이라 불렀었다. 원 세조(元世祖)는 그 위에 광한전(廣寒殿)을 두었으니, 명 선종(明宣宗)의 어제(御製) 광한전기(廣寒殿記)가 바로 이것이다.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때에 원(元)의 태자(太子)는 고려 찬성사(贊成事) 이공수(李公遂)를 광한전에서 불러 보았다 하였으니 곧 이 만세산이다. 또 고려 원종(元宗) 5년(1264년) 9월에 왕은 연경으로 와서 10월에 만수산 옥전(玉殿)에서 황제를 작별했고, 또 신사전(申思佺)은 만수산옥전을 두루 구경했다고 하였으나 다만 옥전이라고만 말하고 전각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만수산이라 불렀은즉 소위 옥전은 광한전이 아님은 분명하다. 수황정(壽皇亭)을 구경하고자 했으나 파수꾼이 들여놓지를 않았다. 알지 못하겠다. 정자는 지금도 남아 있는지. 어허, 서글픈 일이로구나.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태화전(太和殿)
태화전(太和殿)은 명(明) 때 옛 이름으로 황극전(皇極殿)이다. 3층 지붕에 9층대 뜰이요, 지붕은 누런 유리 기와를 이었다. 월대(月臺)는 3층이요, 높이는 각각 한 길이요, 매층에는 백옥으로 난간을 둘렀는데, 모두 용과 봉을 아로새겼고, 난간 머리에는 모두 이무기 대가리를 새겨 밖으로 향했다. 축대 위에는 쇠로 만든 학을 세워 훨훨 날아가는 것만 같았고, 첫 축대 난간 속에는 솥 8개를 벌여 놓았고, 둘째 축대에는 난간 모서리를 마주 대하여 솥 2개를 놓았고, 셋째 축대 난간 속에는 난간을 사이에 끼우고 각각 솥 1개를 마주 놓았는데 솥의 높이는 모두 한 길 남짓 되었다. 뜰에는 역시 솥 30여 개를 늘어놓았는데 그 물색의 뛰어난 귀신 같은 솜씨는 옛날의 구정(九鼎)이 혹시 이곳에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태청문으로부터 백옥 난간을 연이어 굽이굽이 틀어 태화전까지 닿았다. 또 난간은 태화전을 빙 둘러 중화전(中和殿)과 보화전(保和殿)까지 이르러 모양이 마치 아자(亞字)처럼 되었고, 전 앞의 동쪽 전각은 체인(體仁)이요, 서쪽 전각은 ‘홍의(弘義)’라 부른다. 축대의 높이는 거의 태화전 섬돌과 높이가 같으나 다만 한 층대에 한 난간일 뿐이다. 대체로 태화전은 천자가 정치를 하기 위하여 나가 앉는 곳으로 그리 크고 높지도 않게 뵈어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다. 그들의 의견들도 모두 비슷하여 매우 의아했더니 수역(首譯)이 웃으면서,
“이는 다름이 아니외다. 지금까지 거쳐온 수천 리 어간의 성읍과 민가가 그처럼 장려했고 사찰과 궁관이 굉장히 사치했고 본즉, 보는 안목은 날로 사치해지고 마음과 뜻은 점차 넓어져 태화전을 보기 전에 벌써 머리 속에는 청양(靑陽 주(周)의 궁전 이름)과 옥엽(玉葉 주(周)의 궁전 이름) 같은 큼직한 명당(明堂)들이 천자의 좌기하는 곳이리라고 생각했었고, 또 지금 좌우 낭무(廊廡)로부터 갑자기 태화전을 보니 그렇게 색다르게 보이지 않으므로 도리어 어리둥절해져서 예상과 틀리게 보였을 뿐입니다. 사람에게 비한다면 요(堯)와 순(舜)도 역시 보통 사람과 같지마는 만일에 좌우에 보필할 신하로서 원(元)과 개(愷) 같은 여러 대신이 없이 구차하게 직위를 채울 자로서 모두가 망나니와 나무꾼 따위뿐이라면 아무리 요ㆍ순과 같은 성인이 있어서 해ㆍ달ㆍ별ㆍ산(山)ㆍ용(龍)ㆍ꿩ㆍ분미(粉米)ㆍ마름ㆍ불ㆍ범새끼ㆍ보(黼)ㆍ불(芾) 등의 갖은 무늬를 수놓은 복장을 하고 영롱한 광채를 휘날리며, 겹눈동자를 꿈벅거린다 하더라도 저 혼자서 우뚝 서서 어떻게 그 높고도 넓은 정치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찰과 궁관은 당(唐)ㆍ우(虞) 시대의 악(岳)ㆍ목(牧)에 비한다면, 족히 제후(諸侯)의 조공을 받아서 천하를 지닐 수 있을 것이요, 여염과 시전들은 강(康)ㆍ구(衢)의 백성들에 비해서 즐비하게 들어찬 연후에야 비로소 황제가 거처하는 곳의 굉걸한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3겹 지붕과 아홉 층대의 뜰과 누른 기와는 일반 백성들로서는 참람히 하지 못할 물건이며, 기타 궁전의 제도도 모두 태화전을 본뜨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은 곧 태화전을 가장 사치하게 꾸민 까닭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태화전 역시 오막살이 초가집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한다. 나는,
“자네 말과 같다면 요ㆍ순이 걸(桀)ㆍ주(紂)를 겸한 연후에야 비로소 뽐낼 만한 천자가 되겠구먼.”
하였더니, 옆에서 듣는 자들이 모두 크게 웃곤 하였다.
[주D-001]구정(九鼎) : 하우(夏禹)가 만든 황금 솥. 구주(九州)를 상징하였다.
[주D-002]원(元) : 중국 상고 때 고신씨(高辛氏)의 재자(才子) 여덟 사람으로서 백분(伯奮)ㆍ중감(仲堪)ㆍ숙헌(叔獻)ㆍ계중(季仲)ㆍ백호(伯虎)ㆍ중웅(仲熊)ㆍ숙표(叔豹)ㆍ계리(季貍).
[주D-003]개(愷) : 고양씨(高陽氏)의 재자 여덟 사람으로서 창서(蒼舒)ㆍ궤개(隤敱)ㆍ도인(檮戭)ㆍ대림(大臨)ㆍ방강(尨降)ㆍ정견(庭堅)ㆍ중용(仲容)ㆍ숙달(叔達).
[주D-004]해ㆍ달 …… 불(芾) : 여기의 12가지는 천자의 옷에 수놓은 12장(章).
[주D-005]겹눈동자 : 전설에 순(舜)의 눈동자가 둘이라 하였다.
[주D-006]악(岳)ㆍ목(牧) : 당시 제후(諸侯)인 4악(岳)과 2목(牧).
[주D-007]강(康) …… 구(衢) : 강은 5달(達)의 길이요, 구는 4달의 길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체인각(體仁閣)
내무부(內務府)의 관원이 통관(通官)과 함께 우리 역관을 안동(眼同)하여 우리나라에서 바치는 자주(紫紬)와 황저(黃紵)를 체인각에다 살펴 받아들였다. 때마침 각로(閣老)로 있던 이시요(李侍堯)의 가산을 몰수해 들이고 있었다. 시요는 운귀총독(雲貴總督) 해명(海明)으로부터 금 2백 냥을 받은 뇌물 사건으로 인하여 가산을 몰수당하게 된 것이다. 중국은 안팎으로 대소와 귀천이 없이 모두 일정한 봉급과 보수가 있지마는 지방관에 이르러서는 복잡하고 시끄러워 일정한 제도를 만들기 어려웠다. 만일 정한 금액 외에 사사로이 부과한 세금이 있든지, 혹시 뇌물을 받은 사건이 탄로되면 이를 추궁하여 비록 털끝만 한 범죄의 사실이 있더라도 뇌물과 살림을 모조리 몰수하고, 다만 관직만은 박탈하지 않기 때문에 벌거숭이로 직위에 있으므로 처자는 의지할 곳 없이 유리하게 된다. 이 법은 대개 명(明)의 옛 법으로서 더욱 엄격해졌던 것이다. 내무부의 관원이 마주 앉아서 받아들이는데 다른 물건은 없고 모두 부인네들이 입는 초피(貂皮) 갖옷 2백여 벌로 그 중 한 벌은 매우 길고 털 가장자리에는 금으로 용틀임 수를 놓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문화전(文華殿)
옹화문(雍和門)을 나서면 한 전각이 있는데 문화(文華)라고 부른다. 누런 유리 기와 지붕이다. 명(明)의 고사(故事)에 의하면,
“문화전 동쪽 방에는 9개 신주함을 만들어 놓고 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황제(黃帝)ㆍ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 등을 모시고 왼쪽 함 1개에는 주공(周公)을, 오른쪽 함 1개에는 공자(孔子)를 각기 모셨다. 매일 천자가 문화전에 나와 강의 좌석을 베풀고는 먼저 한 번 절하고, 세 번 조아리는 예를 행하고, 각로와 강관은 축대 위 돌 난간 왼편에 서서 기다린다. 그러다가 승지(承旨)가 ‘선생님 듭신다.’라는 창(唱)을 하면 각로와 강관들은 고기를 꿰미에 꿰듯이 한 줄로 열을 지어 뒤를 따라 들어와 반을 나누어 자리에 든다. 이때는 여러 가지 대궐에서 쓰는 까다로운 예절을 생략하고 강의하는 신하가 책상에 기대도록 편리를 보아 준다.”
하였다. 알지 못하겠다. 요즘에도 강의하는 좌석에서 이런 예법을 지키는지.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문연각(文淵閣)
문화전 앞에 있는 전각을 문연(文淵)이라 부른다. 여기는 천자가 장서(藏書)를 하는 곳이다. 명(明)의 정통(正統) 6년(1441년)에 송(宋)ㆍ금(金)ㆍ원(元) 때의 모든 책들을 합하여 목록(目錄)을 만들었는데 모두 4만 3천 2백여 권이라 하였다. 그 뒤에 또 《영락대전(永樂大全)》의 2만 3천 9백 37권을 더 보태게 되었다 한다. 만일 그 뒤 다시금 근세에 와서 간행된 《도서집성(圖書集成)》과 지금 황제가 수집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더 보태었다면 아마도 서고는 다 차고 밖에 노적을 해 두었을 것만 같다. 문을 채웠으므로 간신히 주렴 틈으로 대강 전각의 웅심함을 바라보았으나 천자의 풍부한 장서는 한 번도 엿보지 못하였으니 매우 한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일찍이 듣건대,
“옛날 우리나라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구왕(九王)을 따라 이 전각에 묵었다.”
한다. 구왕이란 곧 청(清)의 초기 예친왕(睿親王)다이곤(多爾袞)이다.
[주D-001]영락대전(永樂大全) : 명 성조(明成祖) 때에 칙명에 의하여 엮은 유서(類書).
[주D-002]도서집성(圖書集成) : 청조(淸朝)의 칙명에 의하여 엮은 총서(叢書)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주D-003]사고전서(四庫全書) : 청 건륭제(淸乾隆帝)의 칙명에 의하여 엮은 총서.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무영전(武英殿)
협화문(協和門) 밖에 무영전(武英殿)이 있다. 제도는 문화전과 다름없었다. 옹화문(雍和門)과 서화문(西華門)이 서로 곧장 마주 대하고, 협화문과 동화문(東華門)이 서로 마주 대했는데, 무영전 앞에는 무연각(武淵閣)이 있다. 대체로 전각의 대문과 단장들은 어디고 서로 마주 대짝으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뜰의 척수도 반드시 서로 맞아 조금도 차가 없었다. 황강한(黃江漢)경원(景源)의 〈배신전(陪臣傳)〉에는,
“숭정(崇禎) 갑신년(1644년)에 살합렴(薩哈廉)이 수도에 들어와 명(明)의 문무관의 조하(朝賀)를 무영전에서 받았다.”
라고 하였지마는, 이는 잘못 전한 일이다. 살합렴은 곧 패륵(貝勒 황족(皇族)이란 뜻의 만주 말)인데 《시호록(諡號錄 저자 미상)》에 보면,
“살합렴의 시호는 무의(武毅)다.”
하였으니, 문무관의 조하를 이 전각에서 받은 자는 곧 다이곤(多爾袞)이요, 살합렴은 아니다. 갑신 3월에 이자성(李自成)이 수도(북경)를 함락시키자 이해 5월에 다이곤이 수도에 들어갔으니 이때는 명이 망한 지 한 달쯤밖에 안 되어서 우리나라 하급 관리로서 무영전의 화려한 댓돌을 볼 때에 박쥐의 똥만 남아있을 뿐이므로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쳐다보았다고 한다. 이제는 역졸과 마부들이 전각에 미어지라고 들어와 마음대로 유람을 하고 있다. 그들은 비록 당시의 광경을 잘 모를 터이지마는 모두 청인(淸人)의 붉은 모자와 마제수(馬蹄袖)를 업신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제 스스로 의복이 남루한 줄 알면서 오히려 비단옷 입은 자들과 함께 버티고 서서 조금도 부끄러운 티가 없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소위 존화(尊華)ㆍ양이(攘夷)하는 대의가 하급 노예에게도 뿌리 깊게 박혔으며 양심에서 나온 이념이 모두 같다는 것은 변명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주D-001]경원(景源) : 조선 영조(英祖) 때의 유신(儒臣). 강한은 호요, 경원은 이름. 자는 대경(大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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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주(擎天柱)
오문(午門) 밖 좌우에는 몇 길 되는 돌 사자를 세워 두었고, 단문(端門) 안 좌우에는 큰 돌 거북을 앉혀 두었고, 그 위에다가 6모 난 돌 기둥을 세웠다. 기둥 높이는 예닐곱 길은 되고, 기둥 몸에는 용 무늬를 둘러 새겼다. 기둥 머리에 앉힌 물건은 무슨 형상인지 알아낼 수 없으나 모두 무엇을 잡아 치는 형상이며, 천안문(天安門) 밖에도 역시 이런 것이 한 쌍 있었는데 아마도 돌문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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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구(御廐)
황실의 말을 먹이는 마방은 전성문(前星門) 밖에 있다. 동서로 나무 울짱을 세워서 문을 만들었다. 말은 불과 3백여 필밖에 안 되는데 모두 굴레를 벗고 제멋대로 있었다. 마침 대낮이 되어 말먹이꾼들이 울타리를 열고 채찍을 쳐들어 부르는 시늉을 하면서 지휘를 하니 동서 양쪽 마굿간으로부터 말들이 일제히 나와 머리를 가지런히 하고 좌우로 갈라섰다. 북쪽 담장 밑에는 큰 우물이 있고, 우물가에는 커다란 돌 구유가 있었다. 사람 둘이 기계를 돌려 물을 길어 계속 구유 속으로 푼다. 말먹이꾼은 채찍으로 말들을 10마리씩 한 무리로 갈라 순서대로 들어가 물을 마시게 했다. 앞 대열이 일제히 마시고 일제히 물러나오니 뒷 대열이 이어 나가 감히 서로 앞서려고 다투는 법도 없이, 들어가는 패는 오른편으로, 나오는 패는 왼편으로 제발로 마굿간으로 들어갔다. 나는,
“도대체 천자의 말이 이것뿐이냐.”
하고 물었더니, 말먹이꾼은 웃으면서,
“천자는 만승(萬乘)이라 일컫는답니다. 서울이나 지방에 살고 있는 웬만한 부잣집이라도 이만한 수효는 가지고 있는 터에 하물며 만승천자이겠습니까. 창춘원(暢春園)ㆍ원명원(圓明園)ㆍ서산(西山) 등지까지 치면 모두 1만 마리는 될 것입니다. 황제의 장원인 남해자(南海子)에도 역시 천리마(千里馬)가 있답니다. 이제는 천자께옵서 거둥을 했기 때문에 말들은 모두 준화주(遵化州)로 가고, 여기 남아 있는 말들은 모두 늙고 병들어 타기가 어려운 것들로 단문(端門) 앞에 의장으로나 설 만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모두 나이는 6ㆍ70살씩은 됩니다.”
한다. 그리고 그는 그 중에서 누런 말 한 필을 가리키면서,
“이 말의 나이는 백세 살 났습니다.”
하면서, 그 입술을 열어 보이는데 이가 단 두 개만 남아 여물을 못 먹은 지가 벌써 30여 년이라 한다. 낮에는 좋은 막걸리 두 동이를 먹이고 아침저녁에는 엿밥과 보릿가루 두 되를 소주에 섞어 주면 구유에 대고 핥아 먹곤 하여 한 달에 삼품(三品)의 급료를 받는다고 한다. 황제가 때로 어찬을 내리면 반드시 두 무릎을 꿇고는 머리를 조아리며, 옹정(雍正) 때에도 오히려 하루 천 리를 갔다고 한다. 말의 털빛으로 보아서 정결하고 윤기가 흘러 그리 많이 늙어 보이지는 않았으나, 다만 눈이 작고 눈곱이 끼고 두 눈동자는 맑고 푸르러서 말갈(靺鞨) 사람 같았다. 두 눈썹에는 터럭 5ㆍ6개가 남아 풀기 없이 늘어졌고, 귓속의 흰 털이 바깥까지 나와 갈기처럼 되었다. 그러나 정강이만은 다른 말들보다는 아주 커서 젊었을 때는 힘이 세었을 것이 상상되었다. 말먹이꾼의 눈치가 나에게 선물이라도 많이 바라는 것만 같고, 얼굴 생긴 꼴이 완악하고 더럽게 되먹은 것으로 보아 이 자가 하는 말을 믿어도 될지 모를 일이다. 해마다 삼복(三伏)에는 한낮에 귀인들이 임금 타는 식의 수레 차림으로 어마감(御馬監)이 관리하는 말들을 인도하여 덕승문(德勝門) 밖 적수담(積水潭)에서 목욕시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오문(午門)
오문(午門)은 홍예문(虹霓門)이 셋으로 깊기가 굴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되어 여럿이 떠드는 소리가 마주 쿵쿵 울려 요란하게도 웅성거렸다. 다리 5개는 모두가 백옥 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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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廟社)
6과(科)는 단문(端門) 안에 있고, 6부(府)와 백사(百司)는 태청문(太淸門) 밖에 나누어 두었으니, 이것을 전조(前朝)라 하며, 태액지(太液池) 북쪽의 신무문(神武門) 안을 후시(後市)라 한다. 종묘(宗廟)는 대궐 왼편에 있고, 사직(社稷)은 대궐 오른편에 있어 전후와 좌우의 배치와 설비가 균형이 잡혔으니, 이래서 임금으로서의 제도가 갖추어지는 것이다. 일찍이 《유구기략(綏寇紀略 청 나라 오위업(吳偉業) 저)》을 보니 이르기를,
“숭정(崇禎) 16년(1643년) 5월 북경서 붉은 비가 내리면서 하룻밤을 새도록 우레와 번개가 번쩍였고, 태묘(太廟)의 신주가 거꾸러지고 보정(寶鼎)과 이기(彝器)들이 모두 녹아 내렸다.”
하였고, 또,
“6월 23일 밤에는 벼락이 봉선전(奉先殿) 묘문(廟門)에서 일어나 쇠 문고리가 모두 용의 발톱에 녹았고 묘 앞에 있는 돌 위에는 용의 누운 흔적이 났다.”
하였으니, 아아, 슬프도다. 갑신년(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난리는 천고에 없었던 것으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종묘가 뒤흔들리면서 드디어 각라씨(覺羅氏)의 판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 이 같은 큰 변괴가 없었을 것인가.
[주D-001]각라씨(覺羅氏) : 청 황제의 성 애친각라씨(愛親覺羅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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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문(前星門)
체인각(體仁閣)으로부터 협화문(協和門)을 나와 동화문(東華門)을 곧장 마주 보면 전각이 있는데 이것은 문화(文華)요, 그 동쪽에 있는 문을 전성(前星)이라고 한다. 푸른 유리 기와로 이엉을 하였고 대문 안에는 또 겹문이 있었으나 모두 쇠를 채웠다. 겹문 안은 모두 푸른 기와집이었는데 이것만 보아도 태자(太子)가 거처하는 궁전임을 알 수 있다. 혹자는 말하기를,
“태자가 살고 있는 집을 전심전(傳心殿)이라 하고 그 뒤에는 활 쏘는 정자가 있는데, 쇠로써 빗돌을 만들어 청(清) 황실 조상의 교훈을 새겨 묻었으므로 아무도 감히 이곳까지 이르는 자가 없다.”
한다. 또 전설에 의하면,
“강희(康熙)가 임금 자리에 오래 있게 되자 태자는 궁에서 일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세상에 미리 세운 태자가 있을 수 있으랴.’ 하며 빈정거렸다. 이 말이 새어나자 태자는 폐출되었고 이로부터 태자를 미리 세우지 않았다.”
한다. 옹정(雍正) 원년(1723년) 8월 17일에 조서를 내리기를,
“우리 성조인황제(聖祖仁皇帝)께옵서 나라를 위하시어 삼가 짐(朕)을 택하여 작년 11월 13일에 황위를 계승케 하셨다. 이는 말 한 마디로 국가의 대계를 정한 것이다. 나라의 내외를 불구하고 짐을 기쁘게 받들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날 성조가 두 형님의 일로 인하여 몸소 걱정을 매우 하신 것은 천하가 다 들어 아는 바이다. 오늘 짐은 여러 아들들이 아직 어려서 반드시 근심해야 될 것이므로 이 일을 친히 기록하여 단단히 봉한 뒤 건청궁(乾凊宮) 중에 있는 세조장황제(世祖章皇帝)의 친필인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는 현판 뒤에 간직해 두었으니 곧 여기는 궁중에서는 제일 높은 곳으로 이로써 불의의 걱정을 막는 준비로 삼는다. 따라서 여러 왕들과 대신들에게 이르노니 모두가 함께 반드시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예부 주사(禮部主事) 육생남(陸生楠)은 소(疏)를 올려 태자를 미리 세우기를 청했으나 옹정은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준절히 꾸짖었다.
“태자를 미리 봉하지 않는 법은 곧 우리 황가에서 대대로 내려 오는 법이 아니겠는가. 황자들로 하여금 각기 저마다 효도하고 우애하고 공손하고 검소함에 힘쓰도록 할 것인 바 이래서 천명을 기다릴 뿐이요, 형제간에 시기와 참소와 간특을 끊게 되는 것이다. 이 법이야말로 만대를 통하여 오래 두고 쓸 아름다운 법도이다. 명의 간신 왕석작(王錫爵)이 태자를 세울 것을 청원하여 어진 태자를 세우지 않고 천계(天啓 명(明) 희종(憙宗))를 세워 필경 천하를 망쳤으니 네가 왕석작을 본받을 것이냐.”
하였다. 이로부터 천하에서는 감히 또 다시금 태자를 미리 세우자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였으니, 전성문이 닫힌 지도 곧 백 년이 될 것이다.
[주D-001]두 형님의 일 : 태자를 두 번 세웠다가 폐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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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루(五鳳樓)
태화전(太和殿) 앞 뜰의 면적은 거의 수백 보요, 한 길 남짓 되는 축대 위에는 백옥 난간을 둘렀고, 그 위에 태화문(太和門)이 섰다. 문은 3층 처마에 누른 기와를 이었으니 이것을 오봉루(五鳳樓)라고 부른다. 황제가 큰 조회를 할 때 태화전에 거둥하여 나와 앉으면 흠천감(欽天監 기상대(氣象台)의 장)은 시간을 아뢰는 북을 누각 위에 설치하고 교방사(敎坊司 음악을 맡은 관서)는 중화소악(中和韶樂)을 누각의 동서에 배설한다. 통관 서종현(徐宗顯)의 말을 들으면,
“조회를 할 때는 금의위(錦衣衛 황제의 의복과 기구를 맡은 관서)는 노부(鹵簿)와 의장(儀仗)을 태화전 뜰 동서에 벌이어 북향케 하고, 길들인 코끼리를 오봉루 아래 동서로 마주 대하여 세우며, 천자가 타는 수레들을 태화문의 뜰 복판길에 북향으로 세우고, 어마감(御馬監 황제의 말을 기르는 관서)은 의장마를 벌여 세우며, 금오위(金吾衛 궁중 경비군)와 운휘사(雲麾司 황제의 거둥 때 의장을 맡은 관서)는 갑사(甲士)와 의장과 쇠북을 태화문 밖 오문(午門) 안 뜰에 벌여 세우고, 수도를 수비하는 장교 7만 명이 길을 끼고 깃대를 세우고 바둑판 같은 거리를 호위 경계한다. 백관은 단문(端門) 안 경천주(擎天柱) 아래서 시간을 기다리다가 오봉루 속에서 북 소리가 처음 울리면 백관이 반열을 정비하고, 북이 두 번째 울리면 반열을 나누어 태화문의 좌우 협문을 통하여 한 줄로 늘어서서 들어온다. 황제가 탄 수레는 보화전(保和殿)으로부터 중화전(中和殿)을 거쳐 태화전으로 드는데 길잡이 하는 시위는 9개의 옥새(玉璽)와 인부(印符)를 받들고 앞서 간다. 풍악은 비룡인지곡(飛龍引之曲)을 아뢰고, 대악(大樂)은 풍운회지곡(風雲會之曲)을 아뢴다. 이 때야 여러 문을 한목으로 열면 곧장 바로 정양문(正陽門)까지 툭 터져 내다보인다. 안팎이 먹줄로 친 듯 바르고 조금도 굽은 데가 없다. 오봉루 속에서 연주하는 경황도(慶皇都 악곡 이름)와 희승평(喜昇平 악곡 이름) 등의 음악은 마치 하늘에서 울려 오듯 들린다.”
한다. 또 예로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에,
“숭정(崇禎) 초년에 오봉루 위에서 하늘이 내린 글이라고 누런 보자기 열 벌을 얻었는데 바깥 제목에는 천계(天啓)는 7년, 숭정은 17년, 복왕(福王)은 1년이다.”
라고 씌였으니, 이것은 비록 요언(妖言)이라 하더라도 이같이 큰 나라 왕조의 성쇠에 있어서 어찌 하늘이 정한 명수가 없을 것인가.
[주D-001]비룡인지곡(飛龍引之曲) : 악곡 이름. 황제가 보위(寶位)에 오름을 축하하는 곡조.
[주D-002]풍운회지곡(風雲會之曲) : 악곡 이름. 임금과 신하가 서로 제회(際會)를 얻음을 노래한 곡조.
[주D-003]천계(天啓) …… 1년이다 : 천계는 7년 만에 끝나고, 숭정은 17년 만에 끝나며, 복왕은 1년 만에 끝난다는 의미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천단(天壇)
천단(天壇)은 외성(外城) 영정문(永定門) 안에 있다. 담장의 주위는 거의 10리쯤 되고 그 기반은 세 급(級)으로 되어 그 위로는 능히 말이라도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안에는 원구(圓邱)가 있는데 제1층단의 넓이는 백여 보나 되고 높이는 넉넉히 한 길 남짓이나 되며, 단의 바닥은 모두 푸른 유리 벽돌을 깔았다. 난간 네 둘레는 모두 초록색 유리로 헌함을 만들고 네 군데로 터진 층층대는 모두 아홉 층대로 되었다. 층층대의 넓이는 거의 두 발이나 되는데 역시 푸른 유리 벽돌을 깔았다. 층층대의 양쪽 난간도 역시 초록색 유리로 된 헌함을 했다. 제2층의 단면(壇面)은 두 발 남짓이나 되는데 층층대가 네 군데로 터졌고 층대는 아홉 켜다. 단면에는 푸른 유리 벽돌을 깔았고 단의 아래 동아리와 네 둘레의 난간은 역시 다 초록색 유리로 된 헌함이다. 원구의 밖에는 또 누런 기와를 이은 담장으로 둘렀는데, 사면에 기둥을 세워 성문(星門)을 만들었으되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으로 나누어 이름 붙여 동ㆍ서ㆍ남ㆍ북의 방위에 배속시켰다. 동쪽 제1단은 해를 제사하고, 서쪽 제1단은 달을 제사하며, 동쪽 제2단은 이십팔수(二十八宿)를 제사하고, 서쪽 제2단은 바람ㆍ구름ㆍ비ㆍ뇌정을 제사한다. 그리고 황궁우(皇穹宇)ㆍ신악관(神樂觀)과 태화전의 재궁(齋宮)ㆍ천고(天庫)ㆍ신주(神廚) 등은 모두 누런 유리로 된 기와 지붕이다. 신악관은 평일에는 음악ㆍ무용을 연습시키는 곳으로써 매번 큰 제사를 치를 때는 미리 태화전에서 예습을 한다. 양ㆍ돼지ㆍ사슴ㆍ토끼 등을 기르는 각방이 있고, 북쪽 담장 아래로는 네모난 못을 20여 군데나 파서 겨울이 되면 얼음을 캐어서 빙고에 저장한다. 제사에 소용되는 물건은 정결하게 갖추어 두고 무엇이나 이 속에서 가져다 쓰도록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정양문 적루(敵樓) 아래의 정남향으로 된 문은 언제나 닫혀 있어서 이상하다 하였더니, 누군가 말하기를,
“황제가 친히 천단에 제사를 지내러 나갈 때는 정남향을 한 옹성 문을 여는데 기름 백 석을 부은 뒤에야 비로소 열린다.”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호권(虎圈)
어용(御用)하는 마굿간 뒤에는 범 우리가 있는데 연대(煙臺)같이 성을 쌓고 그 위에는 우물 정(井) 자로 들보를 걸치고 팔뚝만큼씩 한 큰 철망을 덮었다. 담장 면에는 작은 구멍을 뚫고 쇠를 박아 울타리로 삼았다. 옛날에는 범 두 마리가 있었는데 한 마리는 최근에 죽었고 한 마리는 원명원(圓明園)으로 데리고 가 버려서 이제는 빈 우리로 있다. 황제가 어디로 거둥을 할 때는 반드시 범 우리를 앞장 세우고 가다가 못마땅한 생각이 날 때는 황제가 우리 앞으로 와서 친히 쏘아 죽인다 한다.
[주D-001]연대(煙臺) : 명의 때에 왜구(倭冠)를 막기 위하여 쌓았던 낭연대(狼煙臺).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천주당(天主堂)
내 친구 홍덕보(洪德保)는 일찍이 서양 사람들의 기교를 논하면서,
“우리나라의 선배들로 김가재(金稼齋)와 이일암(李一菴)같은 이들은 모두 식견이 탁월하여 후세 사람들로서는 따를 수 없는 바요, 더구나 중국을 옳게 본 데도 쳐줄 바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천주당(天主堂)에 대한 기록들은 약간의 유감이 없지 않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으로는 잘 미칠 수 없는 것이고, 또 갑자기 얼핏 보아서는 알아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뒷날 계속해서 간 사람들에게 이르러서는 역시 천주당을 먼저 보지 않을 자가 없지마는 황홀 난측하여 도리어 괴물 같이만 알고 이를 배척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안중에 아무 것도 보지를 못한 까닭이다. 가재는 건물이나 그림에만 상세하였고, 일암은 더욱이 그림과 천문 관측의 기계에 자세하였으나 풍금(風琴) 이야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대체로 이 두 분이 음률에 이르러는 그리 밝질 못했으므로 잘 분별을 못했던 것이다. 내가 비록 귀로 소리를 밝게 들었고 눈으로 그 만든 솜씨를 살폈다 하더라도 이를 다시금 글로써 그 오묘한 곳을 다 옮길 수는 없고 보니 정말 이것이 유감스러운 일로 되었던 것이다.”
하면서, 곧 가재의 기록을 끄집어내어 나와 함께 보았다.
“방안 동편 벽에는 두 층계의 붉은 문이 달렸는데 위에는 두 짝이요, 아래에는 네 짝이다. 순차로 열리면서 그 속에는 기둥이나 서까래처럼 생긴 통(筒)이 총총하게 섰는데, 크기가 같지 않았다. 모두 금은빛으로 섞어 칠을 발랐고, 그 위에는 철판을 가로 놓고 그 한쪽 가에는 수없이 구멍을 뚫고 다른 한쪽 가에는 부채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방위와 12시(時)의 이름을 새겼다. 잠시 보니, 해 그림자가 그 방위에 이른즉 대 위에 놓인 크고 작은 종(鍾)이 각각 네 번씩 울고 복판에 있는 큰 종은 여섯 번을 쳤다. 종소리가 잠시 그치자 동쪽 변두리 홍예문(虹霓門) 속에서 갑자기 바람 소리가 쏴 하면서 여러 개의 바퀴를 돌리는 것 같았는데 계속해서 관ㆍ현ㆍ사ㆍ죽 등의 별별 음악 소리가 들렸다. 어디로부터 이 소리가 나는지 알 수 없다. 통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중국 음악입니다.’ 한다. 얼마 아니되어서 소리는 그치고 또 다른 소리가 나는데 조회 때 들은 음악 소리와 같이 들렸다. 이는 ‘만주 음악입니다.’ 한다. 조금 있다가 이 소리도 그치고 또 다시 다른 곡조가 들리는데 음절이 촉급하였으니, ‘이는 몽고 음악입니다.’ 한다. 음악 소리가 뚝 그치고는 여섯 짝 문이 저절로 닫혔다. 이는 서양 사신 서일승(敍日昇)이 만든 것이라 한다.”가재의 기록이 여기에 이르러서 그쳤다.
덕보는 다 읽고 나서 한바탕 크게 웃으면서,
“이야말로 이야기는 하면서도 자세하진 못하다는 말이구료. 속에 기둥이나 서까래처럼 생겼다는 통은 유기로 만들었는데 제일 큰 통은 기둥이나 서까래만큼씩 하여 크고 작게 총총하게 섰는데 이는 생황(生黃) 소리를 내기 위하여 크게 한 것이다. 크기가 같지 않은 것은 다음 틀을 취하여 곱절로 더 보태고 8율(律)씩 띄어 곧장 상생(相生)케 하여 8괘(卦)가 변하여 64괘(卦)가 되는 것이나 같다. 금은 빛을 섞어 바른 것은 거죽을 곱게 보이기 위함이요, 갑자기 한 줄기 바람 소리가 여러 개 바퀴를 돌리는 소리 같이 난다는 것은 땅골로부터 구불구불 서로 마주 통한 데서 풀무질을 하여 입으로 바람을 불 듯이 바람 기운을 보내는 것이요, ‘연방 음악 소리가 났다.’는 것은 바람이 땅골을 통하여 들면 바퀴들이 핑핑 재빨리 돌아 생황 앞이 저절로 열리면서 뭇 구멍에서 소리가 나게 된다. 풀무 바람을 내는 법식은 다섯 마리의 쇠가죽을 마주 붙여서, 부드럽기는 비단 전대처럼 만들고, 굵은 밧줄로 들보 위에 큰 종처럼 달아 매어서 두 사람이 바를 붙잡고는 몸을 치솟구어 배 돛대를 달듯 몸뚱이가 매달려 발로 풀무 전대를 밟으면 풀무는 점차 내려 앉으면서 바람주머니배는 팽창되어 공기가 꽉 들어찬다. 이것이 땅골로 치밀려 들면서 이때야 틀에 맞추어 구멍을 가리우면 어디고 바람은 새지 않고 있다가 쇠 호드기 혀를 부딪쳐서 순차로 혀는 떨려 열리면서 여러 소리를 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내가 대강 이렇게 말할 수 있으나 역시 그 오묘한 데를 다 말할 수는 없다. 만일에 국가에서 돈을 내어 이것을 만들라고 명령을 내린다면 될 법도 하지.”덕보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다.
하였다. 이제 내가 중국에 들어와서 풍금 만드는 법식을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마음속에 잊히지 않았다. 이미 열하로부터 북경으로 돌아와 즉시로 선무문(宣武門) 안 천주당을 찾았다. 동쪽으로 바라다 본즉 지붕 머리가 종처럼 생겨 여염 위로 우뚝 솟아 보이는 것이 곧 천주당이었다. 성내 사방에서는 다 한 집씩 있는데 이 집은 서편 천주당이다. 천주라는 말은 천황씨(天皇氏 중국 전설에 나오는 최초의 임금)니 반고씨(盤古氏 중국 전설에 나오는 최초의 임금)니 하는 말과 같다. 이 사람들은 역서(曆書)를 잘 꾸미며 자기 나라의 제도로써 집을 지어 사는데, 그들의 학설은 부화(浮華)함과 거짓을 버리고 성실을 귀하게 여겨 하느님을 밝게 섬김으로써 으뜸을 삼으며, 충효와 자애로써 의무를 삼고, 허물을 고치고 선을 닦는 것으로써 입문(入門)을 삼으며, 사람이 죽고 사는 큰 일에 준비를 갖추어 걱정을 없애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저들로서는 근본되는 학문의 이치를 찾아 내었다고 자칭하고 있으나 뜻한 것이 너무 고원하고 이론이 교묘한 데로 쏠리어 도리어 하늘을 빙자하여 사람을 속이는 죄를 범하여 제 자신이 저절로 의리를 배반하고 윤상을 해치는 구렁으로 빠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 천주당 높이는 일곱 길은 되고 무려 수백 칸인데 쇠를 부어 만들거나 흙을 구워 놓은 것만 같았다. 명(明)의 만력(萬曆) 29년(1601년) 2월에 천진감세(天津監稅) 마당(馬堂)이 서양 사람 이마두(利瑪竇)의 방물과 천주 여상(女像)을 바쳤더니 예부(禮部)에서 이르기를,
“대서양(大西洋)이란 회전(會典)에 실려 있지 않으므로 참인지 거짓인지 알 길이 없으니, 적당히 참작해서 의관을 내려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몰래 북경에 숨어 있지 못하도록 하라.”
하고는, 황제에게는 보고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서양이 중국과 서로 통한 것은 대체로 이마두부터 시작되었다. 건륭(乾隆) 기축년(1769년)에 천주당이 헐렸으므로 소위 풍금이란 것은 남은 것이 없었고, 다락 위의 망원경과 또 여러 가지 표본기들은 창졸간에 연구할 수 없으므로, 여기 기록하지 않는다. 이제 덕보의 풍금 제도에 관한 이야기를 추억하면서 서글픈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주C-001]천주당(天主堂) : 이 소제(小題)는 여러 본에는 풍금(風琴)으로 되었으나 여기에서는 ‘수택본’을 좇았다.
[주D-001]홍덕보(洪德保) : 홍대용(洪大容)의 자.
[주D-002]김가재(金稼齋) : 김창업(金昌業)의 호 노가재(老稼齋).
[주D-003]이일암(李一菴) : 조선 숙종(肅宗) 때 학자 이기지(李器之)의 호.
[주D-004]회전(會典) : 명대(明代)의 유신(儒臣)이 칙명을 받들어 엮은 《명회전(明會典)》.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양화(洋畫)
무릇 그림을 그리는 자가 거죽만 그리고 속을 그릴 수가 없음은 자연의 세(勢)이다. 대체로 물건이란 불거지고 오목하고, 크고 작고, 멀고 가까운 그 세(勢)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능한 자는 붓대를 대강 몇 차례 놀려 산에는 주름이 없기도 하고, 물에는 파도가 없기도 하고, 나무에는 가지가 없기도 하니, 이것이 소위 뜻을 그린다는 법이다. 두자미(杜子美 두보(杜甫). 자미는 자)의 시(詩)에 이르기를,
마루 위의 단풍나무 이것이 어인 일고 / 堂上不合生楓樹
강과 뫼에 내가 이니 괴이키도 한저이고 / 怪底江山起煙霧
라 하였으니, 대체로, ‘마루 위’란 나무가 날 데가 아니요, ‘어인 일고’란 말은 이치에 맞지 않음을 이름이었으며, 내는 응당 강과 뫼에서 일어나겠지마는 만일 병풍에서 일어난다면 매우 괴이쩍은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천주당 가운데 바람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는 구름과 인물들은 보통 생각으로는 헤아려 낼 수 없었고, 또한 보통 언어ㆍ문자로는 형용할 수도 없었다. 내 눈으로 이것을 보려고 하는데, 번개처럼 번쩍이면서 먼저 내 눈을 뽑는 듯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나는 그들(화폭 속의 인물)이 내 가슴속을 꿰뚫고 들여다보는 것이 싫었고, 또 내 귀로 무엇을 들으려고 하는데, 굽어보고 쳐다보고 돌아보는 그들이 먼저 내 귀에 무엇을 속삭이었다. 나는 그것이 내가 숨긴 데를 꿰뚫고 맞힐까봐서 부끄러워 하였다. 내 입이 장차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데 그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돌연 우레 소리를 내는 듯하였다. 가까이 가서 보매 성긴 먹이 허술하고 거칠게 묻었을 뿐, 다만 그 귀ㆍ눈ㆍ코ㆍ입 등의 짬과 터럭ㆍ수염ㆍ살결ㆍ힘줄 등의 사이는 희미하게 그어 갈랐다. 터럭 끝만한 칫수라도 바로잡았고, 꼭 숨을 쉬고 꿈틀거리는 듯 음양의 향배가 서로 어울려 절로 밝고 어두운 데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림에는 한 여자가 무릎에 5ㆍ6세 된 어린애를 앉혀 두었는데, 어린애가 병든 얼굴로 흘겨서 보니, 그 여자는 고개를 돌리고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옆에는 시중군 5ㆍ6명이 병난 아이를 굽어보고 있는데, 참혹해서 머리를 돌리고 있는 자도 있었다. 새 날개가 붙은 귀신 수레는 박쥐가 땅에 떨어진 듯, 그림이 슬그머니 돌아 웬 신장(神將)이 발로 새 배를 밟고, 손에는 무쇠 방망이를 쳐들고 새 머리를 짓찧고 있었다. 또 사람 머리, 사람 몸뚱이에 새 날개가 돋아 나는 자도 있으며, 백 가지가 기괴 망측하여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해 낼 수도 없었다. 좌우 바람벽 위에는 구름이 덩이덩이 쌓여 한 여름의 대낮 풍경 같기도 하고, 비가 갓 갠 바다 위 같기도 하며, 산골에 날이 새는 듯 구름이 끝없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고, 수없는 구름 꽃봉오리가 햇발에 비치어 무지개가 뜨고, 멀리 바라뵈는 데는 까마득하고도 깊숙하여 끝간 곳이 없는데, 뭇 귀신들이 출몰하고, 갖은 도깨비가 나타나 멱살을 붙들고 소매를 뿌리치며, 어깨를 비비고 발등을 밟아서 가까운 놈은 멀리 뵈기도 하고, 얕은 데는 깊어 보이기도 하며, 숨은 놈이 드러나기도 하고, 가렸던 놈이 나타나기도 하여 뿔뿔이 따로 서 있으니, 모두가 허공에 등을 대고 바람을 모는 형세이었다. 대체로 구름이 서로 간격을 두어 이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천장을 우러러 보니 수없는 어린애들이 오색 구름 속에서 뛰노는데,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살결을 만지면 따뜻할 것만 같고, 팔목이며 종아리는 포동포동 살이 쪘다. 갑자기 구경하는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래지도록 놀라, 어쩔 바를 모르며 손을 벌리고서 떨어지면 받을 듯이 고개를 젖혔다.
[주C-001]양화(洋畫) : ‘수택본’에는 이 소제(小題) 양화가 천주당화(天主堂畫)로 되어서 목차(目次)에만 실려 있고, 원전(原典)에는 소제의 ‘천주당화’는 물론이요, 다음 주석과 같이 궐문(闕文)이 많았다.
[주D-001]무릇 그림 …… 갑자기 : ‘수택본’에는 첫머리의 “무릇 그림”으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궐문(闕文)으로 되었다.
[주D-002]구경하는 …… 젖혔다 : ‘수택본’에는 “구경하는”으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한 구가 상문(上文) “천주당”의 끝에 별행(別行)으로 붙어 있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상방(象房)
코끼리 우리는 선무문(宣武門) 안 서성(西城) 북쪽 담장 아래에 있다. 코끼리 80여 마리가 있는데, 코끼리들은 큰 조회 때 오문(午門)에서 의장으로 서기도 하고, 황제가 타는 가마와 노부(鹵簿)에 쓰이기도 한다. 코끼리는 몇 품(品)의 녹봉도 받고, 조회 때는 백관이 오문으로 들어오기를 마치면, 코끼리가 코를 마주 엇대어 서 있어서 아무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게 하였다. 코끼리가 때로 병이 나서 의장으로 서지 못할 때에는 억지로 다른 코끼리를 끌어 내려 해도 코끼리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코끼리 부리는 자가 병난 코끼리를 끌어다가 보여 주어야만 이를 곧이 듣고 바꾸어 선다. 코끼리가 죄를 범하면 칙명이라 하고는 매를 친다. 물건을 다치거나 사람을 상하는 따위다. 그러면 엎드려 매를 다 맞고 나서는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를 하며, 봉급을 깎으면 벌 받은 코끼리의 반열에 물러가 선다. 나는 코끼리 부리는 자에게 부채와 환약 한 알을 주고 코끼리 재주를 한번 시키라고 했더니 그는 이것이 적다고 부채 한 자루를 더 부른다. 나는 당장 가진 것이 없으므로 꼭 더 가져다 주겠으니 먼저 재주를 시켜 보라 했더니, 그가 코끼리에게 가서 타일렀으나 코끼리는 눈웃음으로 마치 절대 할 수 없다는 시늉을 한다. 그제야 따라 온 자를 시켜 코끼리 부리는 자에게 돈을 더 주었는데, 코끼리는 한참 동안 눈을 흘겨 보더니, 코끼리 부리는 자가 돈을 세어 주머니 속에 넣는 것을 보고서야 승낙을 하고, 시키지도 않는데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린다. 머리를 조아리며 두 앞발을 꿇기도 하고, 또 코를 흔들면서 퉁소 불듯 휘파람도 불고, 또 둥둥 북소리를 내기도 한다. 대체로 코끼리의 묘한 재주는 코와 어금니에 있다. 예전에 코끼리의 그림을 볼 때에 두 이빨이 모두 죽 바로 뻗어 곧추 무슨 물건이라도 찌를 듯하여 코는 늘어지고 이는 뻐드러진 것인 줄 알았더니, 이제 코끼리를 보니 그렇지 않다. 이빨도 다 아래로 드리워져 막대기를 짚은 것만 같고, 갑자기 앞으로 향할 때는 환도를 잡은 것 같기도 하며, 갑자기 마주 사귈 때는 예(乂) 자 같이도 보여 그 쓰는 법이 한 가지가 아니었다. 당 명황(唐明皇) 때에 코끼리 춤이 있었다는 말이 사기에 있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의심을 했더니, 이제 보아 사람의 뜻을 잘 알아 먹는 짐승으로는 과연 코끼리 같은 짐승은 없었다. 전하는 말에,
“숭정(崇禎) 말년에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코끼리 우리를 지나갈 때에 뭇 코끼리들은 눈물을 지으면서 아무것도 먹지를 않았다.”
한다. 대체로 코끼리는 꼴은 둔해 보여도 성질은 슬기롭고, 눈매는 간사해 보이면서도 얼굴은 덕스러웠다. 혹자는 이르기를,
“코끼리는 새끼를 배면 다섯 해 만에 낳는다.”
하고, 또는,
“열두 해 만에 낳는다.”
한다. 해마다 삼복날이면 금의위(錦衣衛) 과교들이 의장 깃발을 늘인 노부(鹵簿)로 쇠북을 울리면서 코끼리를 맞아 선무문 밖을 나와 못에 가서 목욕을 시킨다. 이럴 때는 구경꾼이 늘 수만 명이나 된다.또 별도로 《상기(象記)》가 있다.
[주D-001]또 별도로 …… 있다 : ‘수택본’에는 이 원주가 없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황금대(黃金臺)
노군(盧君) 이점(以漸)은 국내에 있을 때 경술(經術)과 행검으로 쳐 주었고, 또 춘추(春秋)의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격하는 대의에 엄격하였으므로 길을 오면서도 사람을 만나면 만(滿)ㆍ한(漢)을 불구하고 한결같이,
“되놈아.”
하고 불렀다. 거쳐 온 산천이나 누대들은 모두 누린내 나는 고장이라 하여 구경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적으로서 황금대(黃金臺)나 석호석(射虎石)ㆍ태자하(太子河) 같은 곳은 길을 돌아가는 데나 또는 이름이 틀렸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파고 들어서 찾아내고야 만다. 어느 날 나와 황금대를 구경하기로 약속하였다. 나는 곧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물었으나 아는 자가 없었다. 또 옛 기록을 찾아 보았으나 이야기들은 다 같지 않았다. 《술이기(述異記)》에는 이르기를,
“연 소왕(燕昭王)이 곽외(郭隗)를 위하여 쌓은 축대로서 지금의 유주(幽州) 땅인 연왕(燕王)의 옛 성 중에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현사대(賢士臺)라고 부르고 또는 초현대(招賢臺)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지금의 북경이 곧 기주(冀州) 땅이고 본즉, 연왕의 옛 성이란 데는 어느 곳에 있는지 나는 모를 일이니, 하물며 이른바 황금대일까보냐. 또 《태평어람(太平御覽)》 중에는,
“연소왕이 천금을 대 위에 두고 천하의 현사를 초청했다 하여 황금대라고 불렀다.”
하였다. 그러면 뒷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그 이름만 전할 뿐이요, 정말 대가 없음은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거늘, 노군은 어느 날 몽고 사람 박명(博明)으로부터 얻었다는 《장안객화(長安客話)》 중에서 초록한 것을 나에게 보인다.
“조양문(朝陽門)을 나서서 남쪽으로 못을 돌아가면 동남쪽 모롱이에 높다랗게 솟아 있는 흙 둔덕이 바로 황금대라 한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때 옛일을 슬퍼하는 선비로서 이 대 위에 올라간 자는 갑자기 천고의 고사를 회상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거닐게 된다.”
노군은 이때부터 서글퍼하면서 구경을 파하고 다시는 황금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노는 날 틈을 타서 노군과 함께 동악묘(東嶽廟)의 연극 구경을 가기 위해 같은 수레로 조양문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고 태사(高太史) 역생(棫生)을 만났다. 고는 능사헌(凌簑軒) 야(野)와 함께 탔는데, 이르기를,
“지금 황금대를 찾아 가는 길입니다.”
한다. 능은 본시 월중(越中 절강 지방) 사람으로서 역시 기이한 인물이었다. 북경에 처음 와서 고적 구경을 하기 위하여 나에게 동행을 청한다. 노군은 매우 좋아하여,
“하늘이 정해 주신 연분이야.”
하고, 가서 본즉, 두어 길 되는 허물어진 흙 둔덕이 주인 없는 황폐한 무덤과도 같으면서도 억지로 이름을 황금대라고 불렀다. 별도로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주C-001]황금대(黃金臺) : ‘수택본’에는 이 ‘황금대’의 전문(全文)이 탈락되었다.
[주D-001]술이기(述異記) : 양(梁) 임방(任昉)의 저.
[주D-002]곽외(郭隗) : 전국 때 사람. 연 소왕이 현인을 구하매 곽외가 소왕에게 천리마(千里馬)의 뼈를 사온 고사를 이야기하여 스스로 추천 등용되었다.
[주D-003]태평어람(太平御覽) : 송(宋) 이방(李昉) 등이 칙명을 받들어서 엮은 유서(類書).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황금대기(黃金臺記)
조양문(朝陽門)을 나서 못을 따라 남쪽에 두어 길 되는 허물어진 둔덕이 있으니, 여기가 곧 옛날 황금대(黃金臺)이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연 소왕이 여기에다 궁전을 짓고, 천금을 축대 위에 놓고, 천하의 어진 선비들을 맞이하여 당시의 강한 제(齊)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옛 일을 슬퍼하는 인사들은 여기에 이르면 비창한 회포를 참지 못하고 감개가 무량하여 거닐면서 좀처럼 발길을 돌리지 못하곤 한다. 아아, 슬프도다. 축대 위의 황금은 없어졌건마는 국사(國士)는 오지 않는구나.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란 본래부터 아무런 원수가 없으면서도 원수를 갚으려는 자는 그칠 때가 없고 본즉 이 축대 위에 놓였던 황금이 반드시 그대로 온 천하에 깔리지 않음은 아니리라. 나는 여기에서 지난 역사상에 모든 원수를 갚던 중에서 가장 큼직한 사건을 역력히 들어서 천하에 가장 황금을 많이 쌓아 놓은 자에게 외쳐 고하련다. 진(秦) 때에 황금으로써 제후들의 장수에게 먹여서 그 나라를 멸망시킨 것으로 보아서는 몽염(蒙恬 진 시황 때의 명장)을 가장 유력하게 쳐 주어야 할 것이다. 이사(李斯 진 시황 때의 정치가)는 원래 제후의 문객으로 제후를 위하여 몽염을 복수하였으니, 천하에 복수자는 여기에 와서 좀 멈칫해졌다. 얼마 뒤에 조고(趙高)는 이사를 죽였고, 자영(子嬰)은 조고를 죽였으며, 항우(項羽 항적(項籍). 우(羽)는 자)는 자영을 죽였고, 패공(沛公)은 항우를 죽였는데, 패공이 항우를 죽일 제 황금 4만 냥이 들었고, 석숭(石崇 진(晉)의 부호가)의 이와 같은 많은 재물도 생겨난 데가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타고난 재물인 듯이,
“이놈이 내 재물을 탐내는가.”
라고 욕질을 하였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소리인가. 그러나 재물이란 구르고 굴러 서로 원수를 갚으면서 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금덩이가 아직도 어디고 그대로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 줄을 알 것인가. 원위(元魏)의 이주조(爾朱兆 장수인데 반란을 일으켰다)의 난리 때 성양왕(城陽王) 휘(徽)는 황금 백 근을 가지고 있었는데, 낙양령(洛陽令) 구조인(冦祖仁)의 일문(一門)에서 난 세 자사(刺史)는 모두 자기가 발탁해 준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 가서 의탁하였다. 그러나 조인은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에 와서 우리 집의 부귀는 지극하다 할 수 있지마는 저 휘 때문에 걱정이야.”
하고는, 휘를 잡으러 오는 장수가 장차 이를 것을 알고, 휘를 다른 장소로 도망하라고 꾀인 뒤, 길에서 그를 맞아서 죽여 버리고는 그 머리를 조(兆)에게로 보냈다. 조의 꿈에 죽은 휘가 와서 이르기를,
“내게 황금 2백 근이 있어 조인에게 맡겼으니 빼앗아 가지도록 하여라.”
하기에, 조는 조인을 잡아서 꿈에 시킨 대로 금을 받으려고 했으나, 이를 얻지 못하고 조인을 죽여 버렸다. 이것을 본다면 황금의 복수자는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오대(五代) 때에 성덕 절도사(成德節度使) 동온기(董溫箕)는 황금 수만 냥을 가지고 있었는데, 온기가 거란에 포로가 되자 아문 안에 지휘사(指揮使)인 비경(秘瓊)이 온기의 한 가족을 한몫으로 다 죽여 한 구덩이에 파묻고 그 금을 빼앗았다. 진 고조(晉高祖 후진의 석경당(石敬瑭))가 왕위에 오르자 비경이 제주 방어사(齊州防禦使)가 되어 부임하게 되어서는 그 금을 싸 가지고 위주(魏州) 길로 나오는데, 범연광(范延光)이 국경에 복병을 했다가 경을 죽이고 금을 몽땅 빼앗았다. 연광은 또 이 금으로 인하여 양광원(楊光遠)에게 살해를 당하고 광원은 진 출제(晉出帝 석중귀(石重貴))가 목을 베어 죽였다. 그리하여 광원의 부하 관리인 송안(宋顔)이 그 금을 죄다 털어다가 이수정(李守貞)에게 바쳤다. 수정은 뒤에 주 고조(周高祖)에게 패하여 처자와 함께 불에 타서 자살했으니 그 금은 아직도 응당 인간 세상에 남아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 줄을 알 수 있을까. 옛날에 도적 세 명이 함께 남의 무덤 하나를 파서 금을 도적질하고는 저희들끼리 이르기를,
“오늘은 피곤하니 돈을 많이 벌은 판에 어찌 술 한 잔 사 오지 않겠어.”
하매, 그 중 한 명이 선뜻 일어나 술을 사러 가면서 가는 도중에 스스로 마음속으로 축하하기를,
“하늘이 시키는 좋은 기회로구나. 금을 셋이 나누는 것보다는 내가 독차지하는 것이 좋겠지.”
하고는, 술에 독약을 타 가지고 돌아오자 남아 있던 도적 둘이 갑자기 일어나서 그를 때려 죽이고는 먼저 주식을 배불리 먹고, 금을 반분하려고 했더니 얼마 못 되어 둘이 함께 무덤 곁에서 죽고 말았다. 아아, 슬프도다. 이 금은 반드시 길 옆에서 굴러 다니다가 또 다시금 딴 사람이 주워 얻게 되었을 것이요, 이렇게 주워 얻은 자는 가만히 하늘에 감사를 드리면서도 이 금이 무덤 속에서 파내어졌고, 독약을 먹은 자들의 유물이며, 또 앞사람 뒷사람을 거쳐 몇 천 몇 백 명을 독살했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음은 무슨 까닭일까.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두 사람이 마음을 합치면 그 이로움은 금이라도 끊는다.”
고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이런 도적을 전제한 말이리라. 어째서 그럴 줄을 알겠느냐. ‘끊는다’는 말은 ‘가른다’는 말이다. 가른다는 것이 금일진대 마음을 합치는 것도 잇속이라는 것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의리를 말하지 않고 잇속이라고 했은즉, 불의의 재물인 것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도적질이 아니고 무엇이랴. 원하건대 천하의 인사들은 돈이 있다 하여 꼭 기뻐할 것도 아니요, 없다고 하여 슬퍼할 것도 아니다. 아무런 까닭 없이 갑자기 돈이 앞에 닥칠 때는 천둥처럼 두려워하고, 귀신처럼 무서워하여 풀섶에서 뱀을 만난 듯이 머리끝이 오싹하여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주C-001]황금대기(黃金臺記) : ‘수택본’에는 ‘황금대’로 되었다.
[주D-001]조고(趙高) : 진 이세(秦二世) 때의 환관으로서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 자.
[주D-002]자영(子嬰) : 진 시황의 장자(長子) 부소(扶蘇)의 아들.
[주D-003]패공(沛公) : 한 고조유방(劉邦)이 천자가 되기 전의 봉호.
[주D-004]패공이 …… 들었고 : 패공이 항적과 범증(范增)을 이간시키기 위하여 진평(陳平)의 계교를 써서 황금 사만 냥을 흩었다.
[주D-005]주 고조(周高祖) : 후주(後周) 태조 곽위(郭威)인 듯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옹화궁(雍和宮)
옹화궁(雍和宮)은 옹정 황제(雍正皇帝)의 원당(願堂)이다. 세 겹 처마의 큰 전각이 있고, 그 속에는 금부처가 있으며 열두 개의 사닥다리를 올라가는 것이 무슨 귀신 동굴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사닥다리가 다 하면 누각에 오르게 되어 처음으로 햇빛을 보게 된다. 누각의 네 둘레는 난간으로 두르고 복판은 우물처럼 둘려 파서 금으로 만든 부처의 아랫도리 절반까지 미치게 된다. 또 여기서부터는 사닥다리를 밟고 올라 캄캄한 속으로 한참 가야만 여덟 창문이 환하게 터진다. 누각 속 우물처럼 꺼진 데는 아래층 같아서 금부처의 등 절반이 겨우 보이게 된다. 또 다시금 어둠 속을 더듬어 발 가늠으로 캄캄한 데를 올라가노라면 곧장 윗층으로 나오게 되어 비로소 부처의 머리 정수리와 가지런하게 된다. 난간을 의지하고 굽어 보니, 바람이 세차서 마치 소나무 숲이 우수수 불어 오는 것과 같다. 이 절에 있는 중은 모두가 나마(喇嘛) 중 3천 명으로서 생긴 꼴들이란 완악하고 더럽기 짝이 없었다. 다들 금실로 짠 가사를 질질 끌고 있었다. 때마침 우중(禺中 상오 10시경)이라 여러 중들은 큰 전각 속으로 한 줄로 죽 들어간다. 다리가 짧은 바둑판 같은 걸상을 늘어 놓고 한 사람이 걸상 한 개씩 차지하여 평좌를 하고 앉는다. 중 하나가 종을 울리매 여러 나마는 일제히 염불을 한다. 다시 역관 이해적(李惠迪)과 함께 대사전(大士殿)에 올라갔다. 마음속으로는,
“아마 아홉 개의 성문을 한 눈으로 바라다 볼 것은 물론이요, 즐비한 시가와 황성의 전 판국이 눈 아래에 깔릴 것이리라.”
하였던 것이 급기야 창문을 열고 난간에 나서서 본즉 곳곳에 솟은 누대가 겹겹으로 둘러 가렸다. 난간을 한 바퀴 빙 돌고 보니 도리어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게 되고, 아래를 내려다 보니 다리가 벌벌 떨려 오래 서 있지 못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대광명전(大光明殿)
서안문(西安門) 안에서 남으로 작은 골목을 수백 보 가면 세 겹 처마에 열두 면으로 된 둥근 전각이 있다. 자줏빛 유리 기와를 이었고, 황금 호로병 모양의 꼭지를 달았는데, 현판에는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고 했다. 그 속 네 기둥에는 금빛 용이 위로 올라가는 놈, 아래로 내려가는 놈을 그려, 위로 지붕 끝에 닿을 만했다. 복판에는 상제(上帝)의 소상을 안치하고 빙 둘러 33좌의 소상을 세웠는데, 모두 곤룡포와 면류관에 홀(笏)을 잡고 있었다. 네 바람벽에는 작은 창들이 났고, 벽은 다 푸른 유리 벽돌이다. 아홉 개의 뜰 층대는 세 층 난간으로 되었다. 이 집 이름은 대현도(大玄都)라 한다. 명(明)의 세종 황제(世宗皇帝)가 도진인(陶眞人)을 맞아 대광명전에서 내단(內丹)을 강의했다고 했는데 곧 여기이다. 청(淸)의 순치(順治) 신축년(1661년)에 만주 대신 색니(索尼)ㆍ오배(鰲拜)ㆍ소극살합(蘇克薩哈)ㆍ알필륭(遏必隆) 등(청조의 훈신들이다)이 세조가 죽을 때 내린 겨우 여섯 살에 임금이 된 어린 강희(康熙)를 보좌하라는 유명을 받을 제 이 네 신하가 이에 올라서 분향을 하고 팔뚝을 찔러 피를 내면서 상제께 맹세를 했다 한다. 뒤에 있는 전각은 태극전(太極殿)인데, 삼청(三淸)의 소상을 모셨고, 또 그 뒤에 있는 전각은 천원각(天元閣)이라 하여 도사 몇십 명을 기르고 집을 지키는 태감(太監)이 있었다. 대광명전과 천원각의 동편 행랑을 중수(重修)할 때에 김가재(金稼齋) 창업(昌業)이 당시 역군들이 사닥다리를 놓고 기와를 벗기는 역사가 매우 장하더라 했는데, 그의 일기(日記)를 보면 그때가 바로 강희 계사년(1713년) 2월 9일이다. 이제 태극전과 천원각을 보면 모두 누런 기와와 금벽 단청이 찬란하게 번쩍이고 있으니, 지금으로부터 계사년은 벌써 68년 전이지마는 어제처럼 새롭다. 고사기(高士奇)의 〈금오퇴식필기(金鼇退食筆記)〉에,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제택(第宅)이 바로 이 전각 왼편에 있었음을 밝히고는, 또 그의 기록에,
“때는 바로 가을비가 처음 개고 푸른 하늘은 씻은 듯이 맑아 가슴을 풀어 헤치고 밖에 나와 앉으니, 높이 솟은 집은 흘러 내리는 밝은 달빛과 함께 마주 비치어 마치 광한궁(廣寒宮 달 나라의 궁전 이름)에 올라 앉은 듯이 황홀하구나.”
라고 하였다. 대체로 이 터가 앞이 조금 터진 데가 되어 달 밝고 맑은 밤이면 더욱 아름다웠을 것이다.
[주D-001]내단(內丹) : 도교에서의 일종의 수련술(修鍊術).
[주D-002]삼청(三淸) : 원시천존(元始天尊)ㆍ태상도군(太上道君)ㆍ태상노군(太上老君).
[주D-003]일기(日記) :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주D-004]고사기(高士奇) : 청 강희 때의 문학가. 자는 담인(澹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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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방(狗房)
사냥개 몇백 마리를 두었는데, 크고 작게 생긴 모양이 저마다 달랐다. 모두가 매우 여위고, 더러는 눕기도 하고 또는 웅크리기도 하여 거동이 한가해 보인다. 심심해서 졸음을 못 이기는 놈이 있는가 하면, 좋아라고 꼬리를 치는 놈도 있고, 긴 하품을 하는데 아래 윗턱 사이가 거의 한 자나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몇십 명이 달려드니, 복장과 음성이 아마도 눈에 생소하게 보였을 것이나 하나도 놀라거나 짖지를 않았다. 따라온 하인이 육포를 내어 개 치는 사람에게 주면서 개 재주를 한 번 시켜보라 하였더니, 개 치는 사람이 육포를 두어 발 되는 장대 끝에 미끼처럼 매달고 개 한 마리를 불렀다. 그 중에서 누런 개 한 마리가 냉큼 뛰어나오는데, 여러 개들은 발을 재게 디디고 섰을 뿐 경쟁을 하지 않는다. 육포를 단 장대를 들었다 내렸다 하니, 개는 좌우로 껑충껑충 뛰다가 한 발로 끌어 잡아 채려고 하므로 개 치는 사람은 장대를 뿌리쳐 마치 뛰는 물고기가 공중으로 솟듯이 서너 길씩 올리니, 개도 역시 높이 뛰어 도리어 그 긴 장대를 뛰어 넘는데, 날래기가 질풍과 같았다. 개 치는 자는 그 개를 고함쳐 물리치고 이번에는 또 다른 개를 불러 순서로 시험하곤 한다. 개를 치는 법은 물건을 공중에 던지면 개가 고개를 젖히고 뛰어 잡아 채어서 먹게 하고, 땅에 떨어지면 먹지를 않는다. 따로 똥ㆍ오줌 누는 데가 있어서 울안이 정결하고 더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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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포(孔雀圃)
푸른 놈 두 마리와 주홍빛을 띤 놈 한 마리가 있는데 꼬리 끝의 금전(金錢) 무늬는 다 같았다. 붉은 놈도 몸을 한 번 휙 돌리면 아주 새파란 빛깔로 변하고, 푸른 놈이 한 번 몸을 돌리면 붉은 빛이 되며, 금전 무늬는 아청(鴉靑) 빛으로 변했다. 사람의 기침 소리를 들으면 온몸의 깃과 털이 갑자기 빛깔을 잃어버렸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처음 빛깔로 되돌아온다. 몸은 해오라기에 비하면 조금 작고, 꼬리의 길이는 석 자가 넘는데, 정강이와 발은 더럽게 생겨 비단 옷에 짚신 감발이란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먹는다는 것이 다만 뱀뿐이며 또 뱀과 흘레도 붙어 온 마당에 흰 것이 남겨 있는 자리가 몹시 더럽다. 원두정이가 우리 하인들이 맨발로 걷는 것을 보고 이것을 못 밟도록 타이르기를,
“뱀 뼈가 살에 들어가면 살이 곧장 썩는 걸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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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정(五龍亭)
태액지(太液池) 뚝에서 서남으로 향하여 물가에 서 있는 채색 정자 다섯 채가 있는데, 따로 부르기를 징상(澄祥)ㆍ자향(滋香)ㆍ용택(龍澤)ㆍ용서(湧瑞)ㆍ부취(浮翠)라 하고, 통틀어서 오룡정(五龍亭)이라 부른다. 맑은 물결 만경(萬頃)에 금벽 단청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제 멀리 바라다 뵈는 금오교(金鰲橋) 위의 거마와 행인들이 까마득하게 신선이 살고 있는 곳 같이만 보였다. 뒷날 오중(吳中 강소성) 사람들과 놀면서 서호(西湖)의 아름다운 경치를 물었더니, 그들은,
“서호를 못 보셨다면 오룡정은 바로 그 일부입니다.”
하였다. 이 정자는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명(明)의 천순(天順) 연간에 태소전(太素殿) 뒤에 초가 정자가 있었다는데, 이제는 없어졌음을 보아서 이곳이 곧 그 옛 터인 듯싶다. 자광각(紫光閣)과 승광전(承光殿)은 자줏빛 기와로 이엉한 추녀가 숲 속에 숨었으며 붉은 담장 속에 채색 기와 이엉이 높고 낮고 겹겹이 주름잡혀 있었다.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과 함께 왔을 때는 마침 석양 무렵이어서 엷은 아지랑이가 하느작거리는 광경이란 더욱 기이하였다. 또 일찍이 어느 맑은 날 아침 한번 갔더니, 돋아오르는 햇발을 받아 더욱 아름다웠으나 정자 아래에 있는 수없는 연 줄기에 꽃이 없는 것이 한스러웠을 뿐이다. 역관들의 말을 들으면,
“오룡정 광경은 비록 아침과 저녁으로 그 경치가 달라지지마는 그래도 한 여름 연꽃 철만은 못하고, 여름 연꽃 철도 역시 깊은 겨울의 얼음놀이보다는 못할 거요.”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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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벽(九龍壁)
오룡정을 거쳐 한 조그만 둔덕을 돌아서 한 대문에 들면 문 앞에는 향장(響牆)이 있는데, 높이가 대여섯 길은 되고 넓이는 여남은 발이나 되었다. 흰 사기 벽돌로 쌓고 아홉 마리 용을 새겨놓았다. 용의 몸뚱이는 모두 몇 발씩이나 되고, 오색 빛깔 이외에 별도로 자줏빛ㆍ초록빛ㆍ남빛 등이 섞였었다. 양각(陽刻)으로 도드라져 구불구불한 것을 자세히 보니 용의 사지ㆍ몸뚱이ㆍ머리ㆍ뿔들을 한켜 한켜 구워내어 합쳐서 마주 붙였다. 오르고 내리고 나는 모습이 각기 자세를 갖추어 변화가 불측한데도 터럭끝만큼 이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마음먹고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는다면 알아 챌 길이 없을 만큼 되어 있다. 향장이란 것은 옛날의 색문(塞門 차면(遮面) 담 같은 것이다)이나 다름없으니, 궁궐이나 관청이나 사찰 같은 데에 흔히 있는 것이요, 일반 여염집에서는 다들 대문 안에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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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액지(太液池)
태액지는 서안문(西安門) 안에 있는데, 둘레는 몇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내가 일찍이 동해 구경을 할 때에 고성(高城)삼일포(三日浦)의 주위가 10여 리나 되었는데, 이제 이 못은 그만 못한 것만 같다. 옛날 이름으로는 서해자(西海子)라 불렀다. 못 가운데는 구름다리를 놓았는데, 길이가 몇백 보요, 흰 돌을 깎아서 난간을 만들었고, 난간 밖에 또 흰 돌 난간이 있어 난간 머리에는 사자(獅子) 수백 마리를 새겼는데, 크기는 같으나 모양은 제각기 달랐다. 다리의 양쪽 머리에는 각기 패루(牌樓)를 세워 동쪽 머리에는 옥동(玉蝀)이라 써 붙였고, 서쪽 머리에는 금오(金鰲)라고 써 붙였다. 또 북쪽으로 바라보면 다리 하나는 경화도(瓊華島)로부터 승광전(承光殿)까지 이어졌다. 이 다리 남북에도 역시 패루를 세워 하나는 적취(積翠)요, 또 하나는 퇴운(堆雲)이다. 못을 둘러싸고 있는 전각과 누대는 첩첩한 지붕과 엇물린 처마였고 고목들은 회나무와 버들이 많았다.
팔월 초사흗날 나는 옥동에 이르러 월중(越中)에 살고 있는 사람 능야(凌野)를 만나 함께 오룡정에 이르렀다. 능야 역시 북경이 초행으로 온 지가 아직 며칠 되지 않았으므로 나에게 못 위에서 열리는 얼음놀이와 북경의 팔경(八景)이 어디어디인가를 물었다. 그의 소탈하고 꾸밈 없음이 이러하였다. 대체로 북경에서 멀리 만 리 밖에 있어서 북학(北學)하는 이가 드문 까닭이다. 내가 5, 6일 전에 갔었더라면 이 못의 늦 연꽃을 구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작은 거룻배 수십 척이 마름 줄기 사이를 젓고 다니면서 연밥을 따고 있었다. 배를 탄 사람들은 모두 벌거벗어 몹시 흉해 보인다. 오색 빛깔의 고기가 많이 있으며 큰 고기 세 마리가 보이는데, 모두 두 자 길이는 넘고 온 몸뚱이에 얼룩이 졌다. 막 부들대 밑에 와서 무엇을 먹기에 손뼉을 쳐서 놀라게 하였으나 아주 유유히 제멋대로 노닌다. 해마다 한 여름이 되면 만(滿)ㆍ한(漢) 대신(大臣)과 한림(翰林) 또는 대성(臺省)들에게 경도(瓊島)ㆍ영대(瀛臺)에서 뱃놀이 잔치를 베풀고 연뿌리와 생선을 하사하였고, 얼음이 얼고 눈이 쌓이면 팔기(八旗)를 대오로 나누어 공 차기와 타상(拖床)의 놀이를 하는데, 신 바닥에 모두 쇠이빨을 박아서 달리고 쫓음이 재빠름을 연습하면 이때는 황제도 친림하여 구경하게 된다.
[주D-001]삼일포(三日浦) :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 신라 때 사선(四仙)이 사흘 동안을 놀았으므로 이 이름을 얻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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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광각(紫光閣)
태액지를 돌아들면 지붕이 둥글고 작은 전각이 있는데, 위에는 누런 기와를 이었고, 처마는 푸른 기와를 썼으니 이름은 자광각이다. 그 곁에는 백조방(百鳥房)이 있어 기이한 새와 짐승들을 기른다. 이 전각은 높고도 넓으며 그 아래는 말 달리고 활 쏘는 마당이 있는데, 옛 이름은 평대(平臺)이다. 숭정(崇禎) 경진년(1640년)에 계주 순무사(薊州巡撫使) 원숭환(袁崇煥)이 황제를 구원하러 들어왔으나, 황제는 도리어 평대에 친히 나와 앉아서 숭환을 찢어 죽였으니 이곳이 곧 그 땅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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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불루(萬佛樓)
구룡벽을 거쳐 몇 걸음을 더 가면 큰 전각이 나타난다. 벽으로 둘러 쌓아 감실을 만들어서 작은 부처를 앉혔는데, 한 감실에 부처가 하나씩 도합 1만 개이다. 또 여섯 길 되는 관음보살의 변상(變相)이 있는데, 머리 위에는 부처 1만 개를 둘러 앉히고, 손이 1천 개, 눈이 역시 1천 개요, 발로는 간사한 귀신과 기이한 귀신, 흉한 짐승과 독한 뱀들로 요정(妖精)으로는 변화했으나 아직 불성(佛性)을 얻지 못한 것들을 밟고 있었다. 그 앞에는 세 발 달린 큰 향로가 놓였는데 높이는 한 길 남짓 되었다. 수많은 요괴들이 와서 팔로 떠받고 다리를 버티며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리고는 무엇을 부르짖는 것이 마치 귀신의 자모(子母)가 유리발(琉璃鉢)을 떠받든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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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세계(極樂世界)
새로 지은 몇백 칸 되는 큰 전각이 있는데 푸른 기와를 이었다. 방 안에는 침향(沈香)과 전단(旃檀 남방에서 나는 명향(名香))으로 오악(五嶽) 명산을 만들었으되 바위 솟은 봉우리와 깊숙한 동학(洞壑)들이 숨어 있고, 사찰과 누각이 그 위에 벌여져 있으며 비단을 오려 가화를 만들었는데, 소나무나 전나무는 모두 구리와 쇠로 잎을 만들어 붙였으며 유달리 새파랗게 뵌다. 몇 길 되는 폭포는 흰 눈을 뒤번지는 듯 거품이 일어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을 자아내도록 한다. 어떤 이는,
“이건 얼음으로 새긴 거야.”
하고, 또는,
“물결을 치솟구쳐서 이렇게 된 거야.”
하고, 떠들어대나 이는 대체로 유리를 녹여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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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대(瀛臺)
영대는 태액지 가에 있는데, 전각의 이름은 소화전(昭和殿)이요, 정자의 이름은 영훈정(迎薰亭)이라 하여, 모두 누런 기와로 이었다. 못가의 수목들은 모두 아름드리 고목으로 그윽하고도 깊숙하여 무지개 다리를 가렸고, 복도는 구불구불하게 숲 속으로 서로 통했다. 푸른 기와와 자줏빛 지붕은 못 복판으로 그림자가 거꾸로 박혔다. 때마침 연꽃은 갓 떨어지고 갈대가 덮인 물가 마름덩쿨 사이로는 가끔 작은 거룻배가 연방(蓮房)을 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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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자(南海子)
숭문문(崇文門)을 나서 남으로 20리를 가면 큰 동물원(動物園)이 있으니 남해자라 부른다. 둘레가 1백 60리나 되는데, 원(元) 때 천자가 사냥하던 곳으로 명(明)에 이르러서는 담장으로 둘러싸고 해호(海戶)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북경의 안팎 할 것 없이 새들이 드물게 보이니, 대체로 짙은 숲이 없는 까닭이다. 남해자를 못 미쳐 몇 리를 두고 울창한 숲이 끝없이 바라다 보이는데 까치ㆍ솔개ㆍ해오라기ㆍ황새들이 벌써 하늘을 뒤덮는다. 조 역관(趙譯官) 달동(達東)이 뒤에 따라와서 하는 말이,
“지금 해호 마을에는 역질이 크게 번지고 있어 발 들여 놓을 수 없고, 또 해도 저물어 미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대홍교(大紅橋)가 20리요, 대홍교로부터 안응대(按鷹臺)가 십여 리인데, 이 사이에 큰 못 세 군데가 있어 넓은 못물이 듬뿍 실려서 희맑고, 일흔두 개의 다리가 놓였으며 전각과 누대는 길가에서 보던 그것과 다를 것이 없고, 기른다는 기이한 새와 짐승들은 말을 달리지 않고서는 다 구경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여기서부터 곧 빨리 돌아가더라도 성문 닫는 시각까지 닿기는 어려울까 하옵니다.”
라고 하며 한사코 말렸다. 할 수 없이 서글픈 대로 수레채를 되돌렸다. 천녕사(天寧寺)와 백운관(白雲觀)을 거쳐 바삐 정양문(正陽門)에 드니 벌써 황혼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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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자관(回子館)
회자관의 바깥 문은 벽돌로 쌓았는데, 제도가 기이하기 짝이 없어 천주당(天主堂)에서 보던 것과도 달랐다. 문에 들어서 겨우 걸음을 몇 자국 옮겨놓지도 않아 개 두 마리가 와락 뛰어나와 입을 벌리고 짖으며 으르렁거렸다. 깜짝 놀라 돌아서니 회회(回回) 어린이 수십 명이 손뼉을 치면서 일제히 웃는다. 문안 좌우에는 큰 기둥을 마주 세우고 몇 발 되는 쇠사슬로 기둥 아래에다 개의 목을 비끄러매어 두고는 문을 지켰다. 개가 사람을 보면 비록 와락 달려들기는 하지마는 사슬 길이가 있어 언제나 사람 앞 몇 걸음의 거리에서 멈춘다. 그러나 그 형세는 매우 사납다. 회회 여자 10여 명이 나와 보는데, 모두 남자처럼 건장했다. 볼은 붉고 광대뼈가 넓고 눈썹이 푸르고 눈은 붉었다. 그 중 한 젊은 여인이 두어 살 난 어린이를 안고 섰는데, 꽤 얼굴이 고왔다. 모두 흰옷에 숱이 좋은 머리털을 여남은 가닥으로 땋아 등 뒤에 드리웠다. 머리 위에는 흰 모자를 얹었는데, 광대들이 쓰는 뾰죽모자와 같고 옷은 우리나라 철릭[天翼]과 비슷하되 소매는 좁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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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琉璃廠)
유리창은 정양문 밖 남쪽 성 밑으로 가로 뻗치어 선무문(宣武門) 밖까지 이르니 곧 연수사(延壽寺)의 옛 터이다. 송 휘종(宋徽宗)이 북으로 순행할 때에 정 황후(鄭皇后)와 함께 연수사에서 묵었다. 지금은 공장이 되어 여러 가지 빛깔의 유리 기와와 벽돌을 만든다. 이 공장에는 사람의 출입을 금하고 기와를 구울 때면 더구나 금기하는 것이 많아서 비록 전속 기술자라도 모두 넉 달 먹을 식량을 갖고 들어가되 한번 들어가면 마음대로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공장 바깥은 모두 점포로서 거기에는 재화와 보물이 넘치고 있다. 서점으로서 가장 큰 데는 문수당(文粹堂)ㆍ오류거(五柳居)ㆍ선월루(先月樓)ㆍ명성당(鳴盛堂) 등이다. 천하의 거인(擧人)과 지명의 인사들이 많이들 이 속에서 묵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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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조포(綵鳥舖)
점방 안에는 온갖 새가 우는데 산장(山莊)의 창문 앞에서 봄철의 아침을 맞는 듯싶다. 모두 철사로 만든 작은 조롱으로 한 조롱에 새 한 마리 혹은 두 마리씩이 들었는데, 두 마리 든 것은 자웅이다. 새는 대체로 우리나라에도 있는 것들이지마는 그 이름은 알 수 없었다. 조롱 속에는 다들 작은 종지에 물을 넣어 두었고, 몇 줄기 조이삭을 걸어 두어 쪼아먹고 마시도록 하였다. 빈 조롱을 갖고 온 자들이 어깨를 마주 비비고들 있었다. 그때에 한림(翰林) 팽령(彭齡)이 주 거인(周擧人 이름 미상)과 함께 각기 빈 조롱을 들고 점방에 와서 새 한 쌍이 든 조롱과 바꾸어 가는데, 새는 우리나라의 속명(俗名)으로는 뱝새로서 그렇게 희귀한 것도 아닌데 값은 50냥을 내고 간다. 금계(錦鷄)는 모양이 집닭 비슷한데 볏이 없고, 멱미레에 달린 쌍 귀걸이도 없고 입부리와 목이 함께 붉고, 흰 꽁지가 두 가닥으로 그 끝은 조금 구부러졌는데, 푸른 돈 무늬가 한 점 있었다. 큰 물통에 물을 채워 두고 바깥에는 울을 두르고 위에는 그물로 덮었는데 그 속에다가 금계를 기르고 있다. 큰 쇠광주리 속에 흰 꿩을 두었는데 크기는 까치만 하고 꽁지는 금계와 같았다.
[주D-001]뱝새 : ‘뱝새’의 두 글자는 특히 원전에 한글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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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초포(花草舖)
모두가 풀꽃들이다. 가장 많은 것이 수구(繡毬)와 가을 해당화(海棠花)와 철쭉이다. 여러 가지 꽃을 구색에 맞추어 병에 벌여 꽂은 것은 모두 사계화(四季花)요, 푸른 꽃병에 한 송이의 붉은 연꽃을 꽂았는데 크기가 박꽃만 하고 잎은 손바닥 같았다. 때마침 가을 국화가 한창이었는데, 다 우리나라에도 있는 것으로 학령(鶴翎)이 제일 많았다. 줄기는 그리 길지 못하고 홀로 금국(金菊)만이 가장 이색으로 꽃송이는 겨우 돈짝만큼 하나, 새로 금박칠을 해 놓은 듯했다. 수선(水仙)은 아직 피지를 못했고, 난초는 훤초(萱草)와 비슷하여 잔뜩 푸르기는 하나 맡을 만한 향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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