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熱河日記) - 알성퇴술(謁聖退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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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알성퇴술(謁聖退述)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알성퇴술(謁聖退述)
1 순천부학(順天府學)
2 태학(太學)
3 학사(學舍)
4 역대비(歷代碑)
5 명조진사제명비(明朝進士題名碑)
6 석고(石鼓)
7 문승상사(文丞相祠)
8 문승상사당기(文丞相祠堂記)
9 관상대(觀象臺)
10 시원(試院)
11 조선관(朝鮮館)
순천부학(順天府學)
북경의 동북 모퉁이 시시(柴市)에 두 방(坊)이 맞서 있으니, 그를 육현(育賢)이라 부른다. 두 방의 복판이 곧 순천부학으로 되었다. 영성문(欞星門)에 들면 반월형으로 못을 팠는데, 이것이 반수(泮水)이다. 세 개의 구름다리를 놓고 난간은 흰 돌로 둘렀다. 다리 북쪽에 세 대문이 있는데, 복판이 대성(大成)이요, 왼편이 금성(金聲)이요, 오른편이 옥진(玉振)이다. 성전(聖殿)의 바깥 편액에는 선사묘(先師廟)라 했고, 안으로는 만세사표(萬世師表)라고 썼는데 강희황제(康熙皇帝)의 글씨이다. 위패에는 지성선사공자지위(至聖先師孔子之位)라 하였고, 네 분의 배향으로서는 복성 안자(復聖顔子 안회(顔回))와 술성 자사(述聖子思 공급(孔伋))가 동에 있고, 종성 증자(宗聖曾子 증참(曾參))와 아성 맹자(亞聖孟子 맹가(孟軻))는 서에 있었다.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사이에는 늙은 전나무들이 많은데 세상에 전하기를,
“허노재(許魯齋) 형(衡)이 손수 심은 나무라오.”
하고, 혹은,
“야률초재(耶律楚材 원(元) 학자. 자는 진경(晉卿))가 심은 거야.”
한다. 명륜당(明倫堂)은 성전의 동에 있고, 계성사(啓聖祠)는 명륜당의 북에 있으며, 규문각(奎文閣)은 명륜당의 동북에 있고, 문승상사(文丞相祠)는 명륜당의 동남에 있는데, 중문 밖의 왼편은 명환사(名宦祠)요, 오른편은 향현사(鄕賢祠)이다. 부학은 옛날 보은사(報恩寺)로서 원(元)의 지정(至正) 말년에 유람하던 중이 호남(湖南) 지방에서 시주를 받아서 절을 짓고, 불상을 채 안치하기도 전에 명(明)의 군대가 북경에 쳐들어왔다. 그들이 군졸들에게 공자묘에 못 들어가도록 명령하자, 중이 창황히 공자의 위패를 빌려다가 성전 속에 모셨다. 그 뒤에 마침내 이 위패를 감히 옮기지 못하게 되어 결국 북평(北平)의 부학이 되었다가, 청(淸)의 수도가 북경으로 옮겨진 뒤에 곧 순천부학이 되었다 한다.
[주D-001]허노재(許魯齋) 형(衡) : 원의 유학자. 노재는 호요, 형은 이름. 자는 중평(仲平).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태학(太學)
북경 동북쪽 모퉁이에 있는 곳을 숭교방(崇敎坊)이라 하고, 패루(牌樓) 네거리를 성현가(成賢街)라 하며, 패루 안은 국자감(國子監)이라 썼다. 영락(永樂) 2년(1404년)에 이룩되었는데, 왼편은 묘(廟)요, 오른편에는 태학을 세웠더니, 선덕(宣德) 4년(1429년) 8월에는 대성전(大成殿) 앞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수리하였다. 이에 앞서, 태학은 원(元)에 의해 더럽혀졌다고 하여 이부 주사(吏部主事) 이현(李賢)이 수리할 것을 아뢰어 그 말을 좇았던 것이다. 정통(正統) 9년(1444년) 1월에 태학이 낙성되자, 천자가 친히 나와서 선성(先聖)에 참배하고 석전례(釋奠禮)를 거행하고는, 이륜당(彛倫堂)에 물러나와 좨주(祭酒) 이시면(李時勉)에게 강의를 명령하였고, 홍치(弘治 명(明) 효종(孝宗)의 연호)라 연호(年號)를 고치고 나서는 또 태학에 거둥하였는데, 이때에 《성가임옹록(聖駕臨雍錄 명(明) 주홍모(周洪謨) 저)》이라는 책이 이룩되었으니, 황제의 칙지(勅旨)ㆍ장주(章奏)ㆍ의례(儀禮)ㆍ문이(文移)ㆍ강의(講義)ㆍ관직(官職) 등에 관한 일이 빠짐 없이 기록되었으므로 태학의 제도는 이에서 완전히 갖추어졌다. 만력(萬曆) 경자년(1600년)에는 성전을 유리 기와로 바꾸었으니, 사업(司業) 부신덕(傅新德)의 청에 따른 것이었고, 숭정(崇禎) 14년(1641년)에 또 태학을 수리하였는데, 낙성이 된 뒤 8월에 천자가 태학에 거둥하여 좨주(祭酒 태학(太學)에 속한 벼슬) 남거인(南居仁)이 고요모(皐陶謨 《서경》의 편명)를 강의하고, 사업 나임대(羅大任)은 《역경(易經)》의 함괘(咸卦)를 강의하였으니, 이때에는 벼슬의 문(文)ㆍ무(武)를 논할 것 없이 삼품 이상은 함께 앉아 청강하고 천자로부터 차를 하사받았다. 강의가 끝난 뒤 천자가 경일정(敬一亭)에 들러 세종(世宗)이 세운 정자(程子 송(宋) 유학자 정이(程頤))의 사잠비(四箴碑)와 석고(石鼓)의 헐어진 글자를 보고, 다시금 수리하고 보고하라고 명령하였다. 《장안객화(長安客話 저자 미상)》 중에는,
“국초(國初)에 고려(高麗)에서 김도(金濤) 등 네 사람을 보내어 태학에 들었는데, 홍무(洪武) 4년(1371년)에 김도가 진사(進士)에 올라 귀국하였다.”
라 하였고, 또 《태학지(太學志 저자 미상)》를 상고해 보면,
“융경(隆慶) 원년(1567년)에 천자가 국자감에 거둥하였는데, 조선(朝鮮) 사신 이영현(李榮賢) 등 여섯 사람이 각기 제 급수에 알맞은 의관(衣冠)을 갖추고 이륜당에 가서 문신(文臣) 반열의 다음에 섰다.”
라고 했다. 나는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을 따라 뜰에서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다. 내가 얼마 전에 열하의 태학에서 참배한 제도는 우리 서울의 태학과 같더니, 이제 두루 이 묘의 제도를 살펴보니, 아마 명(明)의 옛 제도를 본뜬 듯한데, 태화전에 비하면 비록 조금 모자라는 것 같기는 했으나 그 제도의 정제된 폼은 비슷했다. 뜰의 넓이라든가 아랫집들의 둘레는 역시 동악묘(東岳廟)에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위패는 모두 독(櫝)을 덮어 감실 속에 넣고 누른 휘장을 드리웠다. 강희 연간에 주자를 10철(哲)의 다음에 올려 모셨다. 거문고ㆍ비파ㆍ종ㆍ북 등의 악기를 성전 속에 진열해 놓았으며, 동무와 서무에 종향(從享)된 분에게도 모든 설치가 성전과 다름없었고, 태학당(太學堂)에는 일곱 개의 윤리를 강론하는 장소가 있으니, 회강(會講)ㆍ솔성(率性)ㆍ수도(修道)ㆍ성심(誠心)ㆍ정의(正義)ㆍ숭지(崇志)ㆍ광업(廣業) 등이 모두 여러 생도들의 공부하는 곳이라 한다. 이륜당 앞에 심은 솔과 전나무는 세속에서 전하기를,
“이는 원(元)의 유학자 허형(許衡)이 손수 심은 거야.”
라고 한다. 묘문에는 석고(石鼓) 열 개를 늘어 놓았는데, 주 선왕(周宣王)의 엽갈(獵碣)이다. 혹은 이르기를,
“안로공(顔魯公)의 쟁좌위첩(爭座位帖 안진경의 서첩(書帖) 이름)과 장평숙(張平叔)의 금단사백자(金丹四百字)와 조 문민(趙文敏)이 임모(臨摹)한 왕 우군(王右軍)의 악의론(樂毅論 저자 미상)ㆍ황정경(黃庭經 도경(道經)의 일종)ㆍ난정정무본(蘭亭定武本) 등의 다섯 비(碑)가 모두 이 태학 안에 있다.”
고 하나, 찾을 곳을 몰라서 구경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주D-001]사잠비(四箴碑) : 정이가 《논어(論語)》의 비례물시(非禮勿視)ㆍ비례물청(非禮勿聽)ㆍ비례물언(非禮勿言)ㆍ비례물동(非禮勿動)을 취하여 〈사물잠(四勿箴)〉을 지었는데, 이 글을 새긴 빗돌.
[주D-002]석고(石鼓) : 주(周)ㆍ진(秦) 때의 돌 북에 새긴 고문(古文).
[주D-003]엽갈(獵碣) : 수렵(狩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빗돌.
[주D-004]안로공(顔魯公) : 안진경(顔眞卿)의 봉호. 자는 청신(淸臣).
[주D-005]장평숙(張平叔) : 송의 도사(道士) 장백단(張伯端). 평숙은 그의 자.
[주D-006]금단사백자(金丹四百字) : 장백단이 유해섬(劉海蟾)으로부터 받았다는 연금술(鍊金術) 비결(秘訣).
[주D-007]조 문민(趙文敏) : 조맹부(趙孟頫)의 시호. 자는 자앙(子昻).
[주D-008]왕 우군(王右軍) : 왕희지(王羲之). 우군은 벼슬. 자는 일소(逸少).
[주D-009]난정정무본(蘭亭定武本) : 왕희지 자신이 지은 〈난정기(蘭亭記)〉를 쓴 서첩. 무정은 남북조(南北朝) 때 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의 연호.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학사(學舍)
어제는 조교(助敎 태학의 교관(敎官)) 구양(歐陽)이 국자감 안팎 학사의 제도를 기록해 보였다. 내호(內號)로서 광거문(廣居門)의 오른편에 있는 것은 퇴성호(退省號)라 하여 사방으로 잇달린 것이 모두 49칸인데, 남에는 목욕탕과 뒷간이 있고, 퇴성문(退省門)으로부터 점차 북으로 꺾어져 서에는 천(天)ㆍ지(地)ㆍ인(人)ㆍ지(知)ㆍ인(仁)ㆍ용(勇)ㆍ문(文)ㆍ행(行)ㆍ충(忠)ㆍ신(信)ㆍ규(規)ㆍ구(矩)ㆍ준(準)ㆍ승(繩)ㆍ기(紀)ㆍ강(綱)ㆍ법(法)ㆍ도(度) 등의 글자로 표시한 것이 모두 18호가 있는데, 매호마다 21칸씩이다. 도자호(度字號)의 북에 보안당(保安堂)이라는 5칸이 있어 감생(監生) 중의 병자를 수용한다. 이륜당 뒤에는 격(格)ㆍ치(致)ㆍ성(誠)ㆍ정(正) 등의 번호를 붙인 사호가 있으니 전체가 98칸인데, 가정(嘉靖) 7년(1528년)에 경일정(敬一亭) 밖에 고쳐 세웠고, 동호(東號)는 문묘(文廟)의 왼편에 있어 모두 34칸이다. 대동호(大東號)는 거현방(居賢坊)의 새만백창(賽萬百倉) 서문가(西門街)에 있다. 문이 둘이 있고 하나는 등준호(登俊號)인데, 동서의 양쪽으로 잇달린 집이 모두 40칸이었고, 또 하나는 집영호(集英號)인데 27칸이다. 신남호(新南號)는 북성(北城) 두 갈래 길 동쪽 어구에 있는데, 문이 한 채에 동서로 방이 잇달려 모두 34칸이요, 남북으로는 4칸이다. 소북호(小北號)는 거현방 거리에 있고 문이 한 채요, 남북으로 집이 두 줄로 나뉘어졌는데 80칸이다. 교지호(交趾號)는 국자감의 남쪽에 있고 문 한 채에 남북으로 나뉜 집 두 채가 모두 28칸이다. 서호(西號)는 성현가(成賢街)의 서북에 있고 국자감과의 거리는 50보쯤 되는데, 옛날 운간사(雲閒寺) 터이다. 작은 방 10칸과 또 2층 방까지 모두 9칸인데 국자감의 속관들이 번갈아 거처한다. 북쪽 작은 방 4칸과 남쪽 1칸과 서쪽에 가까운 작은 방 16칸이 있는데, 여기는 감생(監生)만이 거처하는 곳이라 한다.
밤에 내원(來源)과 함께 계산을 해보니, 전부가 5백 80여 칸이다. 그 밖에도 이륜당을 비롯하여 동서 강당과 서적고, 식량 창고와 식사장, 의원 약방과 종 치고 북 치는 다락, 부엌ㆍ목욕탕과 범죄자를 취조하는 방, 박사(博士)가 앉는 대청과 계성사(啓聖祠)ㆍ토지사(土地祠) 등이 얼마나 더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는데, 구양조교의 이러한 기록은 아마도 외국 사람에게 자랑삼아 떠벌리는 것 같으나, 한(漢)ㆍ당(唐)에 비한다면 벌써 쓸쓸한 감이 없지 않다. 송(宋)의 경력(慶曆) 연간에 왕공신(王拱辰)이 국자감을 맡고 있을 때에 말하기를,
“한(漢)의 태학이 1천 8백 칸에 생도가 3만 명이나 되었고, 당(唐)에 이르러서는 6천 2백 칸이나 되었다.”
라고 하였으니, 당시 학사의 넓음과 생도의 수효가 많았던 것은 뒷날 세상에 비교할 바 아니다. 또 옛 일을 상고해 보면,
“명(明)의 홍무(洪武) 4년(1371년)에 천자의 명령으로 지방에서 뛰어난 수재들을 뽑아 국자감에 입학시켰다.”
라고 하였는데, 당시는 난리가 갓 평정되어 떠돌아다니는 이들이 아직도 많았을 무렵이었지마는, 그래도 진여규(陳如奎) 등 2천 7백 82명이 입학하였고, 26년에는 감생으로 열자(悅慈) 등 8천 1백 24명을 얻게 되었고, 영락(永樂) 19년(1421년)에는 감생이 방영(方瑛) 등 9천 8백 84명에 이르렀으나, 그래도 아직 만의 수를 채우지 못했으니, 옛날 시대의 선비를 양성시키던 성대함에 비교해 보면 엄청나게 틀린다. 이제 청(淸)은 나라를 세운 지도 이미 오래되어 국내가 승평하고 문물과 교화가 혁혁하여 제 스스로 이르기를,
“한ㆍ당보다야 낫겠지.”
라고 자랑하지마는, 오늘 내가 여러 학사를 돌아보니 십중 팔구는 텅텅 빈 방뿐이요, 더구나 며칠 전에 간신히 석전(釋奠)을 지내는데 대성문(大成門) 왼편 극문(戟門)의 왼편 벽에 써 붙여 둔 참례한 제생(諸生)의 명단을 본즉 겨우 4백여 명에 지나지 않고, 그것 역시 모두가 만주인과 몽고인뿐이요, 한인은 하나도 없음은 무슨 까닭일까. 한인은 비록 벼슬을 하여 공경(公卿)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성 안에서는 집을 얻을 수 없은즉, 이 수선(首善 경사(京師))의 아름다운 곳에 유학하는 선비도 감히 거처를 못함이었던가. 그렇지 않으면 중화족이 스스로가 되놈의 종자와 한 책상에서 공부함을 치욕으로 여김이었던가. 그러나 여기에서도 오히려 본받을 일이 없지 않다. 이곳 서재와 학사들이 텅텅 비어 있다면 응당 먼지에 파묻히고 잡풀이 돋았을 터인데, 어디든지 씻고 닦아 맑게 정돈하지 않은 데가 없어 탁자들은 가지런하고, 창호는 비록 종이로 바른 지는 오래되었으나 밝고 하나도 찢어지고 떨어진 곳이 없었다. 이것은 비록 한 가지 조그마한 일이지마는 중국 법도의 대체를 짐작할 수 있겠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역대비(歷代碑)
반적(潘迪 원(元)의 학자)의 석고음훈비(石敲音訓碑)는 대성문 왼편 극문(戟門)에 있고, 원(元)의 대덕(大德) 11년(1307년)에 세운 가봉성호조비(加封聖號詔碑) 한 개는 외지경문(外持敬門)에 있으며, 지순(至順) 2년(1331년)에 세운 가봉선성부모처병사배제사비(加封先聖父母妻竝四配制詞碑) 한 개는 대문 서쪽에 있고, 명(明)의 홍무(洪武) 3년(1370년) 신명학제비(申明學制碑) 한 개, 15년(1382년) 칙유태학도비(勅諭太學圖碑) 한 개, 16년(1383년) 정학규비(定學規碑) 한 개, 30년(1397년) 흠정묘학도비(欽定廟學圖碑) 한 개, 가정(嘉靖) 7년(1528년)에 지은 경일정(敬一亭)과, 어제성유비(御製聖諭碑) 한 개, 정통(正統) 9년(1444년) 어제중수태학비(御製重修太學碑) 한 개, 홍무 연간에 세운 네 개 비는 남태학(南太學)에 있던 것으로, 뒤에 다시금 새겨 이 태학 가운데 세운 것 같다. 이제 청의 인황제(仁皇帝)가 지은 선현찬(先賢贊) 한 개와 안증사맹찬(顔曾思孟贊) 한 개는 모두 강희 28년(1689년) 윤 3월에 세웠고, 아로덕유(阿魯德猶)를 평정한 뒤 어제헌괵비(御製獻馘碑) 한 개는 강희 43년(1704년)에 세운 것이다. 조 역관(趙譯官) 달동(達東)을 시켜 여러 비문들을 나누어 베끼도록 하였는데, 다 베낄 수가 없었다. 볼 만한 글이 많았으나 두루 열람을 못한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명조진사제명비(明朝進士題名碑)
국자감의 진사제명비(進士題名碑)는 명(明)의 선덕(宣德) 5년(1430년) 임진(林震)의 방(榜)으로부터 시작되어 숭정(崇禎) 13년 경진 위덕조(魏德藻)의 방까지 7개이다. 그 아래도 오히려 빗돌 2개는 더 세울 만했으나 황제는 진사에 싫증이 나서 낙제한 거인(擧人) 사돈(史惇)ㆍ오강후(吳康矦) 등을 머물게 하고 특별히 임용하게 되자, 사돈 등이,
“진사의 전례에 따라 성묘에 배알하고 석채례(釋菜禮)에 참가하와 비를 세워 이름을 기록코자 하옵니다.”
하고 청원하였더니, 황제는 이를 승낙하였다. 태학사(太學士) 주연유(周延儒)가 칙명을 받들고 글을 지어 경진년에 세운 비 다음에 이를 세웠다. 16년 계미(1643년)에 양정감(楊廷鑑)의 방 다음부터는 비를 세울 만한 자리가 없어져서 이로부터 명의 진사제명비는 끝났다고 한다. 이제 청의 과거 제도는 일체 명의 옛 것을 본떠 제명을 한 빗돌은 파서 이랑처럼 빽빽하게 들어서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만일 깨끗한 덕(德)이 향기롭고 나라의 운명이 한없이 뻗어나가거나 또는 중국의 정통이 자주 갈리면서도 언제나 이곳을 수도로 삼아 태학에 비를 세우는 옛 행사를 그대로 지킨다면, 나는 저 이무기 대가리와 거북 등의 흔한 빗돌들을 어느 땅에 다 세울지 모르겠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석고(石鼓)
석고(石鼓)는 10개인데 천간(天干)의 차례로 대성문 좌우 극문(戟門) 안에 각기 5개씩 세웠다. 주 선왕(周宣王)이 기산(岐山) 남쪽에서 사냥놀이를 크게 하고는 돌을 깎아 북을 만들어 그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높이 두 자 남짓하고 폭이 한 자 남짓 되는데, 그 글씨는 사관(史官) 유(籕 주(周) 선왕 때의 태사(太史))의 필적이요, 글은 풍(風)ㆍ아(雅)의 체와 같으니, 천자의 사냥을 찬송하는 노래이다. 애초에는 진창(陳倉 섬서성에 있던 옛 지명)의 들판에 있던 것을 당(唐)의 한유(韓愈 당(唐)의 유학자. 자는 퇴지(退之))가 박사로 있을 때, 좨주(祭酒)에게 청하여 둘러메어 태학에 가져다 두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못했다. 재상(宰相)으로 있던 정여경(鄭餘慶)이 봉상부(鳳翔府 섬서성에 있던 옛 고을)의 장관으로 있을 때, 이 북을 봉상의 성묘에 가져다 두었다. 뒤에 오대(五代)의 난리통에 석고는 모두 흩어져 잃어버렸다. 송(宋)의 사마지(司馬池)가 봉상부의 장관으로 있을 때에 이를 찾아서 다시 본부의 태학에 두었으나, 한 개는 잃어버렸다가 황우(皇祐) 4년(1052년)에 상부사(尙傅師)가 잃었던 북 한 개를 찾아 드디어 10개를 마저 채웠다. 대관(大觀) 2년(1108년)에는 북경으로부터 변경(汴京)으로 옮기고 황제가 금으로 그 글자 새긴 자국을 메우도록 명령하였다. 애초에는 태학에 두었다가 다음은 보화전(寶和殿)으로 옮겼다. 정강(靖康) 2년(1127년)에 금인(金人)들이 변경을 함락시키면서 담요로 거듭 싸서 수레로 끌어 북경까지 가지고 왔다. 메웠던 금은 후벼 내버리고 왕선무(王宣撫)의 집에 두었다가 다시 대흥부학(大興府學)으로 옮겼다. 원(元)의 대덕(大德) 11년(1307년)에 우집(虞集 원(元)의 문인. 자는 백생(伯生))이 대도(大都)의 교수(敎授)로 있으면서 이를 풀숲의 진흙 속에서 찾아내어 비로소 국학에 두게 되었다. 그 중에 기자고(己字鼓)는 민간에 굴러 다니면서 머리를 우묵하게 파서 확을 만드니 새긴 글자는 더욱 닳고 이지러졌지마는, 그래도 고적으로서 가장 이채로운 물건으로는 이 석고 같은 것이 없을 것이다. 내가 나이 18세 때 처음으로 창려(昌黎 한유(韓愈)의 봉호)와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호)의 석고가(石鼓歌)를 읽고, 그 글을 기이하게 여긴 적이 있으나 다만 석고에 새긴 전문(全文)을 보지 못한 것을 한탄했더니, 오늘 내 손으로 석고를 어루만지면서, 입으로 반적(潘迪)의 음운비(音韻碑)를 읽고 본즉, 외국 사람으로서 이 어찌 행복스러운 일이 아닐까보냐.
[주D-001]변경(汴京) : 하남성에 있다. 북송(北宋) 때의 수도.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문승상사(文丞相祠)
문 승상의 사당은 시시(柴市)에 있으니 동리 이름은 교충방(敎忠坊)이다. 사당은 세 칸으로 앞이 대문이 되고, 또 대문 앞으로 사당의 서쪽은 회충회관(懷忠會館)이 되어 강우(江右 강서성 지방) 지방의 사대부들이 설에는 이곳에 모여 제사를 드린다고 한다. 명의 홍무 9년(1376년)에 북평 안찰부사(北平按察副使) 유송(劉菘)이 비로소 사당 짓기를 청원하여 영락(永樂) 6년(1408년) 태상박사(太常博士) 유이절(劉履節)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제사에 대한 의례를 정리할 때에,
“문천상이 송(宋)의 왕실에 충성을 다하였고, 연경은 곧 그의 입절하던 땅이오니 사당을 지어 제사지냄이 옳을까 하옵니다.”
하고 아뢰었더니, 황제가 이를 좇았었다. 유악신(劉岳申 원(元) 학자. 자는 고중(高仲))의 〈신공전(信公傳 신공은 문천상의 봉호 신국공)〉을 상고해 보면,
“공(公)이 연경 객사에 이르자 상빈(上賓)처럼 대우하여 장막을 치니, 공은 의리에 차마 여기서 거처를 못하고 앉아서 날을 밝히었다. 장홍범(張洪範)이 와서 그가 굴복하지 않던 진상을 상세히 여쭈매 병마사(兵馬司)를 보내어 형틀을 채우고 빈 집 속에 가두었다가 10여 일 만에 결박을 풀고 칼을 빼앗은 뒤에 4년 동안을 감금하였다. 시를 지어서 《지남록(指南錄)》 3권과 그 후록(後錄) 다섯 권, 집두(集杜 두시(杜詩)에서의 집구(集句)) 2백여 편이 있었는데, 모두 자작 서문을 남겼다.”
고 하였고, 조필(趙弼 미상)의 〈신공전(信公傳)〉에는,
“공이 시시(柴市)로 끌려 나오자 구경꾼이 만 명이나 되었다. 공은 남으로 향하여 두 번 절을 하였다. 이날에 대풍이 일어 모래를 날려 천지가 캄캄해지매 궁중에서는 촛불을 켜들고 다니게 되자, 세조(世祖)가 장진인(張眞人)에게 까닭을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이는 아마도 문 승상을 죽인 소치인가 봅니다.’ 하였으므로, 황제는 곧 공에게 특별히 금자광록대부 개부의동검교태보 중서평장정사 여릉군공(金紫光祿大夫開府儀同檢校太保中書平章政事廬陵郡公)이라 추증하고, 또 시호를 충무(忠武)라 하여 추밀(樞密) 왕적옹(王積翁)을 시켜 신주를 써서 시시를 깨끗이 소제하고, 단(壇)을 모아 제사를 하였다. 승상 발라(孛羅)가 초헌례(初獻禮)를 행할 제 별안간 회오리바람이 불어 신주를 구름 속으로 휩싸서 올라가 버렸다. 할 수 없이 신주에 전송승상(前宋丞相)이라 고쳐 썼더니 하늘이 비로소 맑게 개었다. 처음에 강남(江南)으로부터 10명의 의사(義士)가 와서 공의 시체를 거적에 싸서 둘러메고 남문(南門) 밖 한길 가에 장사를 지냈다. 대덕 2년에 공과 의로 맺은 아들 승(陞)이 직릉호(織綾戶)의 여인을 만났는데, 그는 곧 공의 옛날 몸종인 녹하(綠荷)이다. 그는 승을 위하여 이야기를 하고 드디어 공의 시체를 여릉(廬陵)에 반장하였다. 선덕 4년에 부윤(府尹) 이용중(李庸重)이 사당을 짓고, 춘추 중간 삭일에 유사(有司)가 제사를 차려 모시게 되었다.”
고 하였다. 따로 한 편 기문을 남겼다.
[주D-001]문 승상의 사당 : ‘수택본’에는 이 일절(一節)의 전문(全文)이 없이 곧 하문(下文) 문승상사당기(文丞相祠堂記)가 이 자리에 올라 있었다.
[주D-002]장진인(張眞人) : 송의 도사 장백단(張伯端). 자는 평숙(平叔).
[주D-003]여릉(廬陵) : 강서성에 있던 옛 현(縣)의 이름.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문승상사당기(文丞相祠堂記)
문 승상의 사당을 참배하러 갔다. 사당은 시시에 있으니, 곧 선생이 입절한 곳이다. 동리 이름은 교충방(敎忠坊)이다. 원의 시대에는 선비 복색으로 소상(塑像)을 만들었더니, 명의 정통(正統) 13년(1448년)에 순천 부윤(順天府尹) 왕현(王賢)이 임금에게 여쭈어 송(宋) 때 승상의 복장으로 고쳤고, 제사를 올리기는 영락 6년(1408년)에 처음으로 하였으며, 매년 춘추(春秋) 중삭(仲朔)에 황제가 순천 부윤을 보내어 제사를 차리는데, 술이 세 종류요, 과실이 다섯 종류, 비단이 한 필, 양(羊)이 한 마리, 돼지가 한 마리였다. 나는 두 번 절하고 물러나면서 후유하고 한숨을 쉬고는 탄식하여 말했다.
“천고에 흥하고 망하는 판에는 하늘 뜻을 단연코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들이 요망스러운 재앙과 상서로운 경사로 나타날 때에는 이를 반드시 쫓기도 하고, 알뜰하게 힘써 붙들기도 하여 비록 부녀자와 어린 아이라도 하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뻔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충신이나 의사들이란 한갓 단신으로 하늘에 버티다시피 하고 보니, 이 어찌 억지 놀음이 아니며 또 어려운 일이 아닐까보냐. 천하를 얻을 수 있는 위엄과 무력이라도 한낱 지사의 절개를 꺾지는 못한다. 이야말로 지사 한 사람이 버티는 절개는 백만 명의 군대보다도 강한 것이요, 만대를 통하는 떳떳한 도덕 규범은 일시에 한 나라를 차지하는 것보다도 더 소중할 것이니, 이 역시 천도(天道)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나라를 흥륭시킨 임금이 충분한 자신을 가지고 천자의 지위를 얻었다면, 이는 하늘이 명한 것이라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힘으로 얻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하늘이 이미 천자의 지위를 명하였고 자신의 힘을 들이지 않았다면, 역시 자신으로써 천하의 책임을 맡게 한 것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천하로써 자신에게 이롭게 하려는 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늘이 이미 자신으로써 천하에 이익을 주고자 할진대, 천하에 이익을 주는 방법은 역시 어떤 원칙이 있을 것이니, 그것은 곧 자신이 하늘의 명령을 받들어 도탄 속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낼 따름일 것이다. 그러므로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정벌한 것은 무왕이란 개인이 이를 멋대로 한 것이 아니라, 곧 정의를 가지고 무도한 자를 정복한 것이다. 그리하여 당당히 천하를 차지하고서도 무왕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대하여는 의심이 없고, 사람에 있어서도 기탄이 없었으며, 적국에 대하여는 원수가 없었고, 천하에 대해서는 나라는 것을 없애고, 도가 있는 곳을 따라 나아갔을 뿐이었다. 무왕이 기자(箕子)를 방문한 것은 기자 개인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의 도를 찾은 것이요, 도를 찾아간다는 것은 그것이 천하에 이익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무왕이 기자를 강박하여 신하를 삼았다면, 기자로서도 역시 구주(九疇)를 껴안고 시시(柴市)로 갔을 뿐이었을 것이다. 도를 전하지 못한다고 자기에게야 무슨 손색이 있겠는가. 후세에 와서 천하를 차지한 자는 역시 하늘로부터 명령을 받았다고 하지 않는 이 없지마는, 그는 다만 확호(確乎)한 자신이 없었던 만큼 하늘을 믿지 않았고, 하늘을 믿지 않았던 까닭에 사람을 꺼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무릇 자기 힘으로써 굴복시킬 수 없는 자는 모두 자기의 강적일 것이므로, 언제나 그들이 정의의 군대를 규합하고 옛날의 것을 회복할 것을 두려워하여 천하를 차지한 자는 차라리 그 사람을 죽여 후환을 없애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 사람이란 역시 자신이 한 번 죽음으로써 천하에 대의를 밝히고자 하고 있는 것인즉, 여기서 ‘그 사람’이란 천하의 부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니, 천하의 부형을 죽이고서 어찌 그 자제들의 원수가 됨을 면할 수 있으랴. 어허, 천하의 흥망이란 운수가 없지 않지마는 전조의 유민으로 문 승상 같은 분이 배출되지 않았음은 아니리라. 그러면 당시 하늘의 명령을 받았다는 임금으로서 이 같은 그 사람에 대하여는 어떻게 대처해야 될 것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그를 백성으로 대하되 신하로 삼지 말고, 존경은 하되 직위는 주지 말며, 봉작도 조회도 하지 않는 반열에 둘 뿐이라고 일러 주리라. 그러면 원 세조(元世祖 홀필렬(忽必烈))로서 할 일은 친히 문 승상의 사관을 찾아 들어 손수 그가 쓴 칼을 벗기고 동으로 향하여 절을 하면서 오랑캐를 중화로 변화시키는 방도를 묻고 천하의 백성들과 함께 그를 스승으로 섬겼더라면 이 역시 옛날 임금들의 아름다운 법도일 것이다. 백이(伯夷)의 좁은 성격이나 이윤(伊尹 은(殷)의 명상(名相))의 책임지울 수 있는 그것은 곧 선생이 자유대로 택할 길이리라. 여릉(廬陵)의 백묘쯤 되는 밭을 떼어 주고 세금을 물리지 않는다면, 봉록을 주지 않아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아아, 저 황관(黃冠 농부가 쓰는 갓)을 쓰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지망이란 곧 흰 말을 타고 동으로 나가려는 뜻이나 무엇이 다를 것이 있겠는가. 예악(禮樂)이란 언제나 사람이 응당 지켜야 할 윤리 도덕에서 나오는 것인즉, 선생의 먹은 뜻이 여기에 있지 않았음을 뉘라서 알리요.”
[주C-001]문승상사당기(文丞相祠堂記) : ‘수택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이 일절(一節)의 전문이 상문(上文) 문승상사(文丞相祠) 소제 밑 자리에 올라 있었다.
[주D-001]구주(九疇) : 기자가 무왕의 물음에 응한 아홉 가지의 정치 요강(要綱). 곧 홍범(洪範).
[주D-002]동으로 나가려는 뜻 : 기자가 주(周)의 신하가 되기 싫어서 흰 말을 타고 조선으로 나왔다는 고사.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관상대(觀象臺)
성에 붙여 쌓은 높은 축대가 성첩보다 한 길 남짓이 솟은 데를 관상대(觀象臺)라 한다. 대 위에는 여러 가지 관측하는 기계들이 놓였는데, 멀리서 보면 큰 물레바퀴 같았다. 이로써 천체와 기후의 일체를 연구한다. 무릇 일월ㆍ성신과 풍운ㆍ기색의 변화하는 현상을 이 대에 올리면 예측할 수 있다. 대 아래는 이 사무를 맡은 마을이 있으니, 곧 흠천감(欽天監)이다. 그 정당(正堂)에 붙어 있는 현판에는 ‘관찰유근(觀察惟勤)’이라 씌었다. 뜰에는 여기저기에 관측하는 기계를 놓아 두었는데, 모두 구리로 만들었다. 비단 이 기계들의 이름을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만든 모양들도 모두 이상스러워서 사람의 눈과 정신을 얼떨떨하게 하였다. 대에 올라가니 성은 한 눈에 굽어볼 만하였으나 수직하는 자가 굳이 막으므로 올라가지를 못하고 돌아섰다. 대체로 대 위에 진열한 기계들은 아마도 혼천의(渾天儀 천문 기구(天文器具))와 선기옥형(璿璣玉衡 천문 기구) 종류 같아 보였다. 뜰 한복판에 놓여 있는 것들도 역시 내 친구인 정석치(鄭石癡 정철조(鄭喆祚). 석치는 호)의 집에서 본 물건과 같았다. 석치는 일찍이 대나무를 깎아 손으로 여러 가지 기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튿날 보러 갔더니, 그는 벌써 부셔 없애 버렸다. 언젠가 홍덕보(洪德保 홍대용(洪大容). 자는 덕보)와 함께 정의 집을 찾아갔는데, 두 친구가 서로 황(黃)ㆍ적도(赤道)와 남(南)ㆍ북극(北極) 이야기를 하다가 때로는 머리를 흔들고, 또는 고개를 끄덕이곤 하였는데, 그 이야기들이 모두 까마득하여 알기 어려워서 나는 자느라고 듣지 못하였더니, 두 친구는 새벽까지 그대로 어두운 등잔을 마주 대하고 앉았다. 정의 말이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 강진현(康津縣) 북쪽 끝에 나온 곳은 북극 몇 도인데, 황하(黃河)가 회수(淮水)에 들어오는 어귀와 직선으로 되어 있으므로 탐라(耽羅)의 귤(橘)이 바다를 건너 강진에만 오면 탱자가 된다.”
하였다. 이 이야기가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리라.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시원(試院)
시원의 담 둘레는 거의 5리나 되는데, 벽돌로 쌓아 성과 같고, 미끄럽기가 깎은 듯하였다. 높이는 두 길이나 되는데, 그 위에는 가시를 올려 놓았다. 복판에는 큰 집이 한 채 있고, 네 둘레에는 한 칸 집 수천 채가 갈리어 한집 한집 간격이 반 칸씩은 되었다. 좌우편은 창문을 내어 햇볕을 받아들이고, 앞에는 판자문을 내고, 가운데는 작은 온돌을 만들고, 부엌과 목욕탕까지 갖추었다. 바깥은 벽돌담으로 처마가 묻히도록 쌓았는데, 한 집도 허물어진 데가 없고, 안팎이 정결하여 비록 담장을 뚫고 작간(作奸)을 하고 싶어도 담장이 쇠벽과 다름없이 튼튼하므로 할 수 없을 형편이다. 어제 낙제한 거인(擧人)의 시권(試券)을 보았는데, 길이는 두 자 남짓하고 넓이는 여섯 자인데 행용(行用)하는 책종이나 다름없었다. 정(井) 자 형의 붉은 줄을 쳤는데, 해자(楷字)로 가늘게 쓴다면 한 천 자는 담을 만하였다. 맨 첫머리에 붉은 도장으로 예부(禮部)라는 두 글자를 찍었고, 밑에는 봉미(封彌 시험관이 봉하는 것)가 되었다. 아마도 예부에서 인쇄한 시험지로서 응시자에게 나누어 준 모양이다. 시험지 교열하는 것을 보니, 옛 사람의 글을 비평하라는 논제(論題)가 있고, 밑에는 본방(本房)이라 하여 직함과 성명을 갖추고 몇 줄 비평문이 있으며, 또 여러 고시관의 성명을 죽 늘어 기록하였다. 평점란(評點欄)에는 모두 붉은 글자로 썼는데, 한 난(欄)에 한 글자씩 했으며, 상(上)ㆍ중(中)ㆍ하(下)니, 차(次)ㆍ외(外)ㆍ경(更) 등의 차례로 하지도 않았고, 비록 낙제한 시험지라도 제품(題品)이 친절하고 상세하여, 응시자로 하여금 똑똑히 낙제된 연유를 알도록 되었다. 그 정성스럽고 간곡한 태도는 선생과 제자 사이에서 일깨우고 가르치는 태도 그대로이다. 이에서 족히 큰 나라 시험장 제도의 간명하고 엄격한 점과 고시하는 절차의 상세하고도 주의 깊은 것은 과거보는 자로서 넉넉히 유감이 없도록 해 놓았음을 보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조선관(朝鮮館)
조선 사신이 묵는 곳은 애초에는 옥하관(玉河館)이라 이름하여 옥하교(玉河橋) 위에 있었는데, 아라사(鄂羅斯) 사람들에게 점령되고, 지금은 정양문 안 동성(東城) 밑 건어호동(乾魚衚衕) 한림서길사원(翰林庶吉士院)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연공사(年貢使)가 먼저 와서 관에 머물게 되고, 다시 별사(別使)가 왔을 때는 서관(西館)에 나누어 들게 되므로 여기를 남관(南館)이라 한다. 작년에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가 사행으로 왔을 때 남관에 불이 났었다. 밤중 삼경(三更)이나 되었는데, 여러 사람들은 물 끓듯이 후닥닥 뒤집혀져 일행이 가졌던 폐백과 돈들을 성 밑에 쌓아 둔 채 말 수백 필은 대문이 메이도록 먼저 뛰어나가려고 덤볐다. 삽시간에 장갑군 수천 명이 철통같이 둘러싸고 물수레 몇십 대가 몰아 달려 들어왔다. 두 통씩 둘러멘 물통이 뒤따라 연거푸 수레 물통 속에 물을 길어 붓는데, 한 방울 물도 허비가 없었다. 불 끄는 자는 죄다 전(氈)으로 만든 벙거지와 갖옷을 갖추고 벙거지나 복장이 함께 물에 젖었으나 손에는 긴 자루가 달린 도끼ㆍ갈퀴ㆍ낫ㆍ창 등을 들고 불길을 무릅쓰고, 마음대로 헐고 돌격하여 얼마 지난 뒤 불을 껐는데, 끽소리 없이 조용하여 흐트러진 물건들이 하나도 잃어버린 것이 없었다. 이것으로서도 중국의 규율이 엄격함과 매사에 구차함이 없음이 이와 같음을 볼 수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