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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미추왕릉, 미추왕과 죽엽군(竹葉軍)

은인자중 2024. 4. 4.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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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 사료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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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왕대 이서국 사람들이 침략하자 미추왕능에서 죽엽군이 나와 물리치다.

제14대 유리왕(儒理王)註 497대에 이서국(伊西國)註 498 사람들이 와서 금성(金城)註 499을 공격하였다. 우리가 크게 막으려 했으나 오랫동안 견딜 수 없었다. 홀연히 이상한 병사가 있어 와서 도와주었는데 모두 댓잎[竹葉]을 귀에 꽂고 있었다. 우리 병사와 힘을 합쳐 적병을 공격해 격파했다. 적군이 물러간 후에 [이상한 병사들이] 돌아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대나무의 잎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 있음을 보고 그때서야 선왕에 의한 음덕의 공이 있었음을 알았는데, 이로 인하여 죽현능(竹現陵)이라 하였다.
註) 497
신라의 제1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284∼298년이다. 이 왕은 백제와 화친하여 함께 왜를 정벌하려다가 그만두었고, 이서고국(伊西古國)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498
현재의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에 있던 소국으로, ≪삼국유사≫ 권1 기이1 노례왕조의 기록에 따르면, 유리왕 19년(서기 42)에 신라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한다. 한편 유례왕 14년(297)에 이서국의 사람들이 신라를 침공한 사실은 이 기사 외에도 ≪삼국유사≫ 권1 기이1 이서국조에서도 확인된다.
註) 499
신라의 왕성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조 및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성곽조에 의하면, 부(府)의 동쪽 4리에 있고 토축으로서 둘레가 2,407척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본서 신라본기 및 지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금성은 신라 초기의 궁으로서, 혁거세거서간 21년(서기전 37)에 축조되었으며, 그에 관한 기록이 소지마립간 22년(500)까지 나온다.
 
 
 
 

[윤용섭의 신삼국유사] 48. 미추왕과 죽엽군(竹葉軍)

제13대 미추왕은 김알지의 7세손으로 성덕(聖德)이 있었으므로 첨해왕의 자리를 물려받아 왕위에 올라, 23년간 재위하였다. 미추왕에게는 신비한 이야기가 몇 있다.제14대 유례왕 때에 이서국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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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미추왕김알지의 7세손으로 성덕(聖德)이 있었으므로 첨해왕의 자리를 물려받아 왕위에 올라, 23년간 재위하였다. 미추왕에게는 신비한 이야기가 몇 가지 있다.

제14대 유례왕 때에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다. 신라는 군병을 동원하여 막으려 했으나, 오랫동안 대적할 힘이 부족했다. 그 때 이상한 군사가 나타나 신라의 병사와 힘을 합쳐 적을 멸하였는데 모두 댓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적의 잔병이 물러간 후에 그 이상한 병사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대나무의 잎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 있음을 보고 그제야 음덕으로 도와주었음을 알았다. 이로부터 이 능을 죽현능(竹現陵)이라 하였다.

미추왕의 성은 김씨(金氏)다. 미조, 미고, 미소라고도 한다. 갈문왕(葛文王) 구도(仇道)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 박씨이고, 왕비는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의 딸 광명부인(光明夫人)이다. 선왕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이 아들 없이 죽자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김씨 왕계의 시조가 되었다.

제37대 혜공왕 14년(779년)4월,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김유신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장군과 같았다. 갑주를 입고 무기를 든 40여명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서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조금후에 능 안에서 우는 통곡을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호소하는 말이 다음과 같았다.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습니다. 나라를 진호(鎭護)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다른 곳으로 멀리 가서 다시는 이 나라를 위하여 힘쓰지 않으렵니다. 임금님께서는 허락하여 주십시오.”

미추왕이 대답하기를, “공과 내가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오. 아무 말 말고 그전처럼 힘써 주시오.”

김유신이 세 번을 청하였으나 왕은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 바람은 이내 돌아갔다. 혜공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대신 김경신을 보내어 김공의 능에 가서 사죄하고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취선사에 내리어 명복을 빌게 하였다. 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인즉, 나라사람들이 그 덕을 기리며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서열을 오릉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불렀다.

출처 : 경북일보(http://www.kyongbuk.co.kr)

 

혜공왕대 유신공이 원통함을 미추왕에게 호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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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지나 제36대 혜공왕(惠恭王)대인 대력(大曆) 14년 기미(己未) 4월에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유신공(庾信公)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모습이 장군과 같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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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지나 제36대 혜공왕(惠恭王)註 500대인 대력(大曆)註 501 14년 기미(己未) 4월에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유신공(庾信公)의 무덤註 502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모습이 장군과 같았다. 또한 갑주를 입고 무기를 든 40여 명의 군사가 뒤를 따라 와서 죽현능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능속에서 우는 소리 혹은 호소하는 듯한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호소하는 말에,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혼백이 되어 나라를 진호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을 잠시도 가벼이 하거나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770)에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註 503 군신들이 저의 공훈을 생각지 않습니다.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가서 다시는 힘쓰지 않으려니 왕께서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오직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오. 공은 전과 같이 노력해 주시오.” 하였다. [유신공이] 세 번 청하였으나 [미추왕은] 세 번 모두 허락하지 않았고, 회오리바람은 이내 돌아갔다.
혜공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바로 상신註 504 김경신(金敬信)註 505을 보내어 김공의 능에 가서 사죄하고 공을 위하여 공덕보전(功德寶田)註 506 30결을 취선사(鷲仙寺)註 507에 내리어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을 토벌한 후 복을 빌기 위해 세운 곳이기 때문이다. 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인즉, 왕이 국가를 보호하려는 노력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라의 사람들이 그 덕을 기리며 삼산(三山)註 508과 함께 제사지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서열을 오릉(五陵)註 509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고 불렀다.註 510
註) 500
신라의 제36대 왕으로 ‘제37대’라고 서술한 본문은 잘못이다. 재위 기간은 765∼780년이다.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어머니인 만월부인이 섭정하였다. 혜공왕 4년에 대공(大恭)과 대렴(大廉)이 난을 일으켰고 동왕 6년에 김융(金融), 11년에 김은거(金隱居)·염상(廉相)·정문(正門)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어수선해졌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재위 16년에 일어난 김지정(金志貞)의 난 와중에서 죽음으로써 신라의 중대 왕실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501
당 대종(代宗)의 연호로 766~779년에 사용하였다.
註) 502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에 김유신의 무덤이라고 전하는 무덤이 있다. 무덤은 원형의 봉분에 십이지상을 조각한 호석으로 둘러져 있다.
註) 503
혜공왕 6년에 김유신의 자손인 김융이 복주(伏誅)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혜공왕 6년(770)조에 따르면 김융은 반혜공왕의 입장에서 난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한 바 있다(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註) 504
상신(上臣)은 상대등(上大等)을 가리킨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원성왕은 선덕왕 원년(780)에 상대등으로 임명된 바 있다. 원문에는 '工臣'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삼국사기≫의 관련 기사를 고려하여 '상신'으로 풀이한다.
註) 505
후에 원성왕으로 즉위하는 인물이다. 선덕왕이 죽은 후 김주원과 더불어 왕위를 다투었고 그 결과 신라 제38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註) 506
‘보(寶)’란 사원 또는 어떤 기관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재단의 명칭이다. 따라서 공덕보전이란 공덕에 보답하기 위하여 내리는 전지로 이해할 수 있다.
註) 507
≪삼국사기≫ 권43 열전3 김유신 하에서는 이 절을 두고 김유신이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평정하고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에서 김유신이 죽은 673년 사이에 창건되었겠지만, 어디에 세워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註) 508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조에는 신라가 삼산(三山)과 오악(五岳) 이하 명산 대천을 나누어 대사·중사·소사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중 삼산(三山)에 지내는 제사는 대사에 해당하였는데, 나력(奈歷)·골화(骨火)·혈례(穴禮)가 바로 그 세 산에 해당하였다.
註) 509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무덤을 가리킨다. 박혁거세는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만에 승천하였다가 7일만에 유체가 흩어져 땅으로 떨어졌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 합장하려 했으나 큰 뱀이 이를 방해하므로 다섯 조각의 유체를 각각 다섯 개의 무덤으로 장사지냈기 때문에 오릉이라고 하였다(≪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
註) 510
≪삼국사기≫에 의하면 제36대 혜공왕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오묘(五廟)를 정하는데 미추왕은 김씨의 시조이므로 태종대왕·문무대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큰 공이 있으므로 모두 세세불훼(世世不毁)의 신위로 하고 거기에 친묘 2위를 합해 오묘로 하였다(≪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 대묘에는 미추왕을 모셨으며 신라의 가장 큰 국가적 제사인 오묘 중 가장 으뜸의 위치에 있었다.
 

[삼국유사 오디세이] 32. 김유신이 미추왕릉을 찾아간 까닭은?

779년(혜공왕 15) 4월 초여름, 송화산 김유신 장군릉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바람 속에 김유신 장군이 얼핏 보였다. 준마에 오른 장군과 무장한 군사 40명이 회오리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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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왕에게 호국의 상징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도 추가했다.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 군사들이 금성을 공격해왔다. 전세가 불리했는데 귀에 대나무를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적군을 격파했다. 군사들은 홀연히 사라졌는데 미추왕릉 앞에 대나무 잎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선왕의 공덕인 줄 알고 그 능을 죽현릉이라 불렀다.

김유신이 미추왕을 찾아간 이유가 명확해졌다. 김씨가 왕위에 있는 동안 미추왕은 신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존숭받는 선조왕이었다. 김유신의 미추왕릉 불시방문은 홀대 받고 있는 김유신계의 집단 청원이었던 것이다.

김유신 또한 미추왕과 함께 신라의 지키는 호국의 수호신이다. 삼국을 통일의 주역이고 신문왕 때는 이견대에서 문무왕과 함께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신문왕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출처 : 경북일보(http://www.kyongbu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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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릉원 천마총, 천년의 역사/ 천마도& 금관

https://www.youtube.com/watch?v=Fbrbr4muNIo *대마도도 우리땅인디..... 사전 설명 https://namu.wiki/w/%EA%B2%BD%EC%A3%BC%20%EC%B2%9C%EB%A7%88%EC%B4%9D%20%EC%9E%A5%EB%8B%88%20%EC%B2%9C%EB%A7%88%EB%8F%84 https://www.youtube.com/watch?v=hsEpAzLtNu0

kydong77.tistory.com

 

 

https://namu.wiki/w/%EC%B2%9C%EB%A7%88%EC%B4%9D

 

천마총

天馬冢 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9 ( 황남동 )에 위치한 고분 이다. 과거에는 '경주 155호분'이라고

namu.wiki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tg/view.do?subjectCode=tg_ty_060&tabId=02&levelId=tg_001_0240&ganada=&pageUnit=10

 

우리역사넷

천마총(天馬塚)은 대형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나무 널[木棺]과 부장품을 넣는 수장궤(收藏櫃)를 큰 나무 덧널[木槨] 안에 넣고 돌을 쌓아 덧널을 덮은 후, 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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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은 대릉원의 무덤 중 가장 늦은 시기인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무덤의 주인은 소지 마립간(炤知麻立干, 재위 479~500)이나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으로 추정되는데, 보통은 지증왕의 무덤으로 본다.

[참고]

대릉원 가운데 무덤의 인물이 밝혀진 것은 미추왕지증왕뿐이다.

 

 

혼유석(魂遊石)은 영혼이 놀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설치한 돌이다. 제의(祭儀)를 올릴 때 제물(祭物)을 놓기 위해 만든 돌상은 조선 선조 이전까지는 석상(石床)으로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왕릉에서 지내는 불교식 제의에서 사용되던 기물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왕릉에서 직접 제의를 하지 않고 정자각(丁字閣)에서 유교식 제례를 올리게 되자 용도가 없어진 석상을 조선후기에 속칭을 따라 혼유석이라 하였다.

 

https://dh.aks.ac.kr/sillokwiki/index.php/%ED%98%BC%EC%9C%A0%EC%84%9D(%E9%AD%82%E9%81%8A%E7%9F%B3)

 

혼유석(魂遊石) - sillokwiki

능원(陵園)이나 묘(墓)의 봉분 앞에 설치된 직사각형의 돌로 된 상석. 개설 혼유석(魂遊石)은 영혼이 놀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설치한 돌이다. 제의(祭儀)를 올릴 때 제물(祭物)을 놓기 위해 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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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910

 

혼유석(魂遊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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