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만덕산 백련사 & 다산초당/ 九江浦
https://www.youtube.com/watch?v=NljnhvkVxaQ
https://www.youtube.com/watch?v=M0jaXcDJC6s
https://kydong77.tistory.com/2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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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人一快事六首效香山體
늙은이의 한 가지 즐거움들에 관한 시 여섯 수를 향산(香山, 白居易)의 시체(詩體)를 본받아 짓다
1.[머리카락이 빠져 손질할 일 없음]
2.[치아 빠져 치통이 사라짐]
3.[눈이 어두워지니 경치나 구경]
4.[귀가 어두워지니 시비할 일 없음]
5.[나는 조선인, 조선시를 쓴다]
ㅡ한시의 형식에 다소 벗어나더라도 의미 전달에 초점을 둔다
老人一快事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縱筆寫狂詞 붓 가는 대로 미친 말을 마구 씀일세
競病不必拘 경병을 굳이 구애할 것이 없고
推敲不必遲 퇴고도 꼭 오래 할 것이 없어라
興到卽運意 흥이 나면 곧 이리저리 생각하고
意到卽寫之생각이 이르면 곧 써내려 가되
我是朝鮮人 나는 바로 조선 사람인지라
甘作朝鮮詩 조선시 짓기를 달게 여길 뿐일세
卿當用卿法 누구나 자기 법을 쓰는 것인데
迂哉議者誰 오활하다 비난할 자 그 누구리오
區區格與律 그 구구한 시격이며 시율을
遠人何得知 먼 데 사람이 어찌 알 수 있으랴
6.[바둑은 강자와의 대국을 기피하고 약자와만 상대함.]
https://www.youtube.com/watch?v=FslnyVcxXS4
https://www.youtube.com/watch?v=Tm-WmxEyV6U
https://www.youtube.com/watch?v=S9I5p6Auzrw
https://www.youtube.com/watch?v=ZU_N6cPmG0U
https://www.youtube.com/watch?v=jNHK1bPSB8A
만덕산 백련사 (전각 이름)
해탈문 (전각 이름)
백제불교에는 미륵신앙이 강하다.
일주문 지나 사천왕 전각 대신 코끼리를 탄 문수보살을 만나는데 전각이름도 금강문이 일반적이나 여긴 해탈문이라 썼다.
동백숲 진입로는 연등이 동백꽃을 대신했다.
한 판에 '대웅보전'이라 쓰지 않고, '대웅'과 '보전' 두 장의 나무판을 쓴 것이 특이하다. 명필 이광사의 글씨.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4587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심판관 10왕 모심, 문지기 두 장수는 없었다.
오른쪽 호랑이를 거느린 분은 단군할배, 불교의 한국신화 수용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3101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난(阿難)과 가섭(迦葉)을 협시로 모시고, 다시 그 주위에 16나한상을, 끝부분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함께 봉안한다.
때로는 아난과 가섭 대신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羯羅菩薩)을 안치하여 삼세불이 이루어지게 배열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함께 안치되는 16나한은 수행이 완성되어 이미 성자의 위치에 오른 수많은 아라한(阿羅漢)들 중 말세(末世)의 중생에게 그 복덕을 성취하게 하고 정법(正法)으로 인도하게 하겠다는 원(願)을 세운 성자들이다. 이들이 일찍이 많은 영험담과 함께 민간에서 크게 신봉되어 나한신앙을 형성하게 됨에 따라 사찰 중요 당우의 하나인 응진전에 봉안된 것이다. 수행을 통해 더 이상 번뇌가 새어나오지 않는 경지에 이르면, 공양을 받을 만하다고 하여 '응공(應供)'이라 불리는 아라한의 경지가 된다. 아라한을 줄여서 '나한'이라 부르고, 그들은 진리와 하나가 되었다고 하여 '응진(應眞)'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아라한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그 상(像)을 만들어 안치한 전각을 '나한전' 또는 '응진전'이라 부르게 되었다.후불탱화(後佛幀畫)로는 주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나 16나한도가 많이 봉안된다.
위 벽면 그림은 심우도
탐진치를 벗어나 자아의 본성 찾기를 불교에서는 잃어버린 소를 찾아 환희하다 인우구망의 경지에 이름을 표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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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강포九江浦, 중국에 고려청자를 이송하던 포구임. 서해로 이어짐.
https://blog.naver.com/lsdcjm/222343427189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2070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백련사에 대한 사적은 1432년(세종 13) 윤회(尹淮)가 저술한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와 정약용(丁若鏞)의 『만덕사지(萬德寺誌)』 등에 나타나 있다.
만덕산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하였다. 이 절은 839년(문성왕 1) 무염(無染)이 창건하였으며, 중요한 수도도량으로 면모를 달리한 것은 1211년(희종 7) 요세(了世)가 크게 중창한 뒤부터이다.
요세는 천태종계(天台宗系)의 승려로서 고승 지눌(知訥)과 깊은 친분 속에서 지눌과 함께 송광사에 머물다가, 1208년에 천태종의 묘의(妙義)를 얻었고, 강진에 살고 있던 최표(崔彪)와 최홍(崔弘)·이인천(李仁闡) 등의 권유로 만덕산에 자리를 잡고 그의 제자 원영(元營)으로 하여금 가람 80칸을 짓게 하였다.
이 역사(役事)는 1211년부터 1232년(고종 19)까지 21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당시 목백(牧伯)이 지극한 정성으로 재물을 보시(布施)하였다고 한다. 절이 완공되자 요세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고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결사(結社)를 맺었다. 이것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修禪社)와 쌍벽을 이루었던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이다.
그 뒤 이 절에서는 120년 동안을 이어 고려의 8국사(國師)를 배출하였다. 고려 말에는 강진지방이 세 차례의 왜구침입을 받았을 때 이 절도 함께 폐허화되었다. 조선 세종 때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보호를 받아 주지 행호(行乎)가 불타버린 가람을 복원하였다. 그 뒤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였으며, 그때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조계종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하여 종세(宗勢)를 키우고 있을 때, 이 절은 천태사상에 입각한 결사도량(結社道場)을 개설하여 침체한 불교중흥을 꾀한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외세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절 주위에 성을 쌓았는데, 이 성을 행호토성(行乎土城)이라고 한다. 현재의 절 또한 그때 쌓은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시왕전(十王殿)·나한전(羅漢殿)·만경루(萬景樓)·칠성각·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써 각 추녀마다 네 개의 활주(活柱)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전면 두 개의 주두(柱頭)는 용두(龍頭)로 장식한 다포집 건물이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만경루는 규모가 큰 누각으로 강진만 일대의 바다를 환히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 밖의 사중유적(寺中遺蹟)으로는 만덕산 백련사사적비와 원묘국사중진탑(圓妙國師中眞塔)이 있다. 사적비의 거북은 앉은 키가 높은 편이고 용의 눈이 험상궂게 생긴 귀부(龜趺) 위에 비신(碑身)이 있으며,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 모양을 한 가첨석(加檐石)이 놓여 있다. 중진탑은 방형의 지대석(地臺石)인 위에 연화문(蓮花文)의 중대석(中臺石)이 있으며, 상대석에도 무늬가 있으나 잘 보이지 않는다.
고복형(鼓腹形)의 옥신(屋身)에는 두 줄의 주렴문이 조각되어 있고,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하며, 상륜부에는 노반(露盤)·복발(覆鉢)·보주(寶珠)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절 주위에는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의 동백림과 정약용이 신유사옥 때 강진으로 귀양와서 조선의 실학을 집대성하고 차를 끊여 마시던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백련사를 가리켜 ‘남쪽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여 동백 또한 곁들여서 수목이 싱싱하게 푸른 모습이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라고 한만큼, 주위의 경관 또한 아름답다.
아홉 물줄기 九江은 백련사 아래 구강포를 지나 강진만으로 흘러 서해에 이른다.
무여스님, 백련사(전남 강진)
https://www.youtube.com/watch?v=I-1lpc9m0W8
https://www.yna.co.kr/view/AKR20150904178600005
유배 초기에 주막의 방을 얻어 살았던 그는 1808년부터 1818년까지 초당에 거주하면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해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같은 대표적인 저서를 완성했다. 고단하고 곤궁한 환경 속에서 학문의 꽃을 피워냈던 것이다.
만덕산 자락에 있는 다산초당은 10분 남짓 산길을 걸어야 닿는다. 자그마한 암자처럼 산중에 숨어 있는데, 바람에 풀잎이 사박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질 정도로 적막하다.
초당은 남향집으로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걸려 있고, 집 안에는 정약용의 초상화가 있다. 대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한여름에도 그리 덥지 않다.
집 주변에는 제자들이 머물던 숙소인 '서암'(西庵)과 다산이 집필 공간으로 삼았던 '동암'(東庵)이 복원돼 있다.
이외에도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기 전 '정석'(丁石)이라는 글자를 새긴 바위, 차를 우릴 때 이용했다는 샘물인 약천(藥泉), 차를 마셨던 반석, 연못 안에 돌로 조성한 작은 산인 석가산(石假山)이 있다.
다산초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야생차와 동백림으로 유명한 사찰인 백련사(白蓮寺)가 자리한다. 다산은 백련사의 혜장 스님을 찾아 함께 차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