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명연수(永明延壽), 종경록(宗鏡錄) 제97권/ 송성수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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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宗鏡錄)》은 오대(五代)로부터 북송(北宋)에 걸친 선승(禪僧)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의 저작으로, 100권으로 되어 있다.[1]
영명연수는 선종5가(禪宗五家)의 일파인 법안종(法眼宗)에 속하며, 천태(天台) · 화엄(華嚴) · 법상(法相) 등의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을 융화회통(融和會通)케 하려는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주장한 선승이다.[1]
《종경록》도 이러한 입장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역설하고 있으며, 불심종(佛心宗)이라고 불리는 선종의 마음과 불어종(佛語宗)이라고 불리는 교종 각파에서 말하는 마음과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여러 예증(例證)을 들어서 논하고 있다.[1]
전체적으로 체계화에 결함이 있으나 경 · 론 · 장 · 소(經論章疏)의 폭넓은 인용이 백과전서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오늘날 상실되어 찾아볼 수 없는 일서(逸書) · 일문(逸文)의 인용이 들어 있어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의 불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1]
내용
"종경(宗鏡)"의 종(宗)이란 일심(一心)을 가리키며, 일심이 만법(萬法)을 비추는 것이 마치 거울과 같다고 하여 "경"(鏡)이라 하였다.[1] 이러한 이름에 걸맞게 《종경록(宗鏡錄)》은 만법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일심에 관하여 경론(經論)을 예증(例證)으로 인용하고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1]
전체 내용은 다음의 3부로 나뉘어 있다.[1]
- 제1부는 제1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총론에 해당한다.
- 제2부는 제93권까지로서, 마음에 관한 교선제종(敎禪諸宗)의 이동(異同)에 관해 경론을 인용하면서 상술하고 있다.
- 제3부는 제94권 이하의 7권으로 제2부의 논술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300이 넘는 인용문을 게재하고 있다.
종경록 제97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부처님의 교법은 이미 분명해졌으므로 조사의 뜻을 진술해야겠다. 불승(佛乘)을 통달한 이는 모두가 분명한 이치[了義]와 상응할 것이니, 마치 법화경(法華經)에 이르되, 이런 사람은 생각하고 헤아리고 말하는 바가 있으면 모두가 이는 불법이라 진실하지 아니함이 없다”고 함과 같다. 역시 이것은 먼저의 불경 가운데서 설명한 바다.
제1 비바시불(毘婆尸佛)의 게송에서 말했다.
身從無相中受生,由如幻出諸形像,
幻人心識本來無,罪福皆空無所住。
몸은 모양이 없는 것 에서 받아 난지라
마치 요술에서 모든 형상 나옴과 같나니
요술로 된 사람의 심식(心識)은 본래가 없으므로
죄와 복은 다 ≺공≻하여 머무는 데가 없네.
제2 시기불(尸棄佛)의 게송에서 말했다.
起諸善法本是幻,造諸惡業亦是幻,
身如聚沫心如風,幻出無根無實性。
모든 선법(善法)을 일으켜도 본래가 환상이요
모든 악업(惡業) 지어도 역시 환상이며
몸은 무더기 거품이요 마음은 바람 같나니
환상에서 나온 근본 없는 것이라 진실한 성품도 없네.
제3 비사부불(毘舍浮佛)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假借四大以爲身,心本無生因境有,
前境若無心亦無,罪福如幻起亦滅
4대(大)를 빌려서 몸을 삼았고
마음은 본래 생김 없고 대경으로 인해 있는 것
앞의 대경 없으면 마음 또한 없나니
죄와 복은 환상 같아 일어나다 소멸하네.
제4 구류손불(拘留孫佛)의 게송에서 말했다.
見身無實是佛見,了心如幻是佛了,
了得身心本性空,斯人與佛何殊別
몸에 진실 없다고 봄이 부처님의 보심이요
마음이 환상 같다고 앎이 부처님의 앎이니
몸과 마음의 본래 성품이 ≺공≻한 줄 알게 되면
이 사람은 부처님과 무엇이 다르랴.
제5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의 게송에서 말했다.
佛不見身知是佛,若實有知別無佛,
智者能知罪性空,坦然不懼於生死。
부처님은 몸을 보지 않고 부처인 줄만 아나니
만일 실로 앎이 있으면 따로 부처는 없다
지혜로운 이 죄의 성품이 ≺공≻한 줄 능히 알고
탄연(坦然)하여 생사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제6 가섭불(迦葉佛)의 게송에서 말했다.
一切衆生性淸淨,從本無生無可滅,
卽此身心是幻生,幻化之中無罪福。
모든 중생의 성품이 청정하여서
본래부터 생김 없고 소멸할 것 없나니
곧 이 몸과 마음은 환상으로 생긴 것
허깨비 가운데엔 죄와 복이 없네.
제7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의 게송에서 말했다.
幻化無因亦無生,皆卽自然見如是,
諸法無非自化生,幻化無生無所畏。
허깨비는 원인 없고 또한 생김 없으며
모두가 곧 자연인데 이렇게 보이나니
모든 법은 모두가 허깨비로 생긴 것
허깨비라 생김 없고 두려워할 것 없네.
다시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말씀하기를,
“나에게 있는 청정한 법 눈과 열반의 묘한 마음이며 참 모습과 모양이 없는 미묘한 바른 법을 너에게 부촉(付囑)하노니, 끊어짐이 없게 하라.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나의 게송을 들으라고 했다.
法本法無法,無法法亦法。
今付無法時,法法何曾法?
법은 본래 법이라는 법이 없으며
법이 없는 법 역시 법인 것이니
이제 없는 법을 부촉할 때에
법과 법이 어찌 일찍이 법이랴.
서천(西天)의 제1 조(祖) 마하가섭이 법을 전한 게송에서 말했다.
法法本來法,無法無非法,
何於一法中,有法有不法。
법과 법은 본래가 없는 것이요
없는 법도 법이 아님이 없나니
어찌 하나의 법 가운데서
법이 있고 법이 되지 않음이 있으랴.
제2조 아난(阿難)이 법을 전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本來付有法,付了言無法,
各各須自悟,悟了無無法。
본래는 있는 법을 부촉하고서
부촉하고 나서는 없는 법이라 하나니
저마다 스스로가 깨쳐야 하고
깨치고 나면 없는 법도 없는 것이다.
제3조 상나화수(商那和修)가 법을 전한 게송에서 말했다.
非法亦非心,無心亦無法,
說是心法時,是法非心法。
법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어서
마음도 없고 법도 없나니
이 마음과 법을 말할 때
이 법은 마음과 법이 아니다.
제4조 우바국다 존자(優波毱多尊者)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心自本來心,本心非有法,
有法有本心,非心非本法。
마음은 스스로 본래의 마음이요
본래의 마음에는 법이 있는 것 아니니
법이 있고 본래의 마음이 있다면
마음도 아니고 본래의 법도 아니다.
제5조 제다가(提多迦)는 향중(香衆)이라고도 이름하였는데, 처음 우바국다에게로 가서 출가할 적에 존자는 물었다.
“마음을 위해 출가하는 것이냐, 몸을 위해 출가하는 것이냐.”
향중이 말했다. “≺나≻가 와서 출가하는 것이요 몸과 마음을 위해서 이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자께서 말씀하시되, “몸과 마음을 위하지 않는다면 다시 누가 출가하는 것이냐.”
향중이 말하되 “무릇 출가란 ≺나≻가 없기 때문이요 ≺나≻가 없기 때문에 곧 마음은 생멸하지 아니하며 마음이 생멸하지 아니하면 곧 항상하고 이미 항상하기 때문에 부처 또한 항상하나니, 마음에는 형상이 없고 그 본체 또한 그러합니다.
존자는 말했다. “너는 마음을 크게 깨쳐 스스로 밝아지면 불법에 의지하여 그 가운데서 항하 모래만큼 많은 중생들을 제도해야 하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법을 부촉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通達本法心,無法無非法,
悟了同未悟,無心得無法。
본래의 법인 마음을 통달하면
법도 없고 법이 아님이 없나니
깨치고 나면 깨치지 못한 것과 똑같아서
마음도 없고 법도 없게 된다.
제6조 미차가(彌遮迦)가 법을 부촉하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無心無可得,說得不名法,
若了心非心,始解心心法。
마음이 없고 얻을 것도 없으며
얻는다 말하여도 법이라 하지 않나니
만일 마음이 마음이 아님을 알면
비로소 마음과 마음의 법을 알리라.
제7조 바수밀(婆須密)이 법을 부촉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心同虛空界,示等虛空法,
證得虛空時,無是無非法。
마음은 허공의지경과 같고
허공만큼의 법을 보이는 것이니
허공임을 증득하게 되는 때에는
옳음도 없고 그른 법도 없네.
제8조 불타난제(佛陁難提)가 법을 부촉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虛空無內外,心法亦如是,
若了虛空故,是達眞如理
허공에는 안과 바깥이 없으며
마음의 법 또한 그와 같나니
만일 허공을 분명히 알면
바로 진여의 이치를 통달하리라.
제9조 복타밀다(伏馱密多)존자가 다음과 같이 불타난제 존자에게 게송으로 물었다.
父母非我親,誰爲最親者,
諸佛非我道,誰爲最道者。
부모는 나와 친한 이가 아니며
누가 가장 친한 이가 됩니까
모든 부처님은 나의 도가 아니며
무엇이 으뜸가는 도가 됩니까.
게송으로 대답했다.
汝言與心親,父母非可比,
汝行與道合,諸佛心卽是。
너의 말은 마음과 친하는지라
부모로서는 비할 것 아니며
너의 행(行)은 도와 계합되는데
부처님들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外求有相佛,與汝不相似,
欲識汝本心,非合亦非離。
바깥에서 구하는 것 모양 있는 부처라
너와는 서로가 비슷하지 않나니
너의 본래 마음 알고자 하면
합한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로 인하여 도를 깨쳤다.
법을 부촉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眞理本無名,因名顯眞理,
受得眞實法,非眞亦非僞。
진리에는 본래 이름이 없되
이름으로 인하여 진리가 드러나고
진실한 법을 받고 얻게 되면
참됨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제10조 협(脇)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眞體自然眞,因眞說有理,
領得眞實法,無行亦無止。
참된 체성은 저절로 진실하며
진실로 인하여 도리 있다 말하나니
진실한 법을 알아 얻으면
가는 것도 없고 그치는 것도 없다.
제11조 부나야사(富那夜奢)는, 어느 때 협존자가 어떤 나무 아래서 손으로 나무 아래의 땅을 가리키면서 대중들에게 말했다. “이 땅이 만일 변하여 금빛이 되면 당연히 성인이 있어서 이 모임에 들어올 것이다”고 했는데, 말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잠깐만에 금빛으로 되었으므로, 존자는 손을 들면서 모임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며 말했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야사가 말했다. “나의 마음은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머물러 있었던가.” “나의 마음은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대는 일정하지 아니한가.” “모든 부처님 역시 그러합니다.” “그대는 모든 부처님이 아니니라.” “모든 부처님 역시 아닙니다”고 했다.
그때, 야사는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師坐金色地,常說眞實義,
迴光而照我,令入三摩諦。
스님께선 금빛의 땅에 앉으셔서
언제나 진실한 이치 말씀하셨으며
광명을 돌이켜서 저를 비추어
3마지(摩地)에 들게 하셨나이다.
또 법을 전한 게송에서 말했다.
迷悟如隱顯,明暗不相離,
今付隱顯法,非一亦非二。
미혹[迷]ㆍ깨침[悟]은 마치 숨음과 드러남 같고
밝음ㆍ어둠은 서로 여의지 아니한다
이제 숨음과 드러남의 법을 부촉하노니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제12조 마명(馬鳴)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隱顯卽本法,明暗元不二,
今付悟了法,非取亦非棄。
숨음ㆍ드러남이 곧 본래의 법이요
밝음ㆍ어둠은 원래 둘이 아니다
이제 깨쳐 마친 법을 부촉하노니
취할 것도 아니고 버릴 것도 아니니라.
제13조 비라(毘羅)존자도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非隱非顯法,說是眞實際,
悟此隱顯法,非愚亦非智。
숨은 법도 아니고 드러난 법도 아닌 것
이것을 참된 실제(實際)라 하나니
이 숨음ㆍ드러남의 법을 깨치면
어리석은 것도 아니고 지혜로운 것도 아니다.
제14조 용수(龍樹)존자가 교화를 위해 남인도(南印度)에 갔더니, 그 나라 사람들은 대개가 복업을 닦으면서 부처의 도리는 알지 못했고 조그마한 변론(辯論)만을 행하면서 큰 지혜는 갖추지 못했었는데, 그들은 불성(佛性)에 대해서 물었다.
‘보시로 우리들은 복업을 구하는 것이요 불성을 아는 것이 아니니, 당신이 불성을 아신다면 우리를 위해 말씀해 주십시오” 했으므로,
스님은 말했다. “그대들이 도를 배우고자 하면 먼저 아만(我慢)을 없애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야 불성을 얻느니라.”
대중들이 말하였다. “불성은 큽니까, 작습니까.” “그대들이 알 바도 아니며, 크고 작은 것으로 말할 것도 아닙니다. 만일 크거나 작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크고 작은 것이요 불성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조그마한 변론을 버리고 큰 바다로 돌아가고 싶습니다”고 하자, 용수는 곧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면서 대중들에게 기이한 모습을 나타내며 몸을 달과 같이 하였으므로 자리 위에서는 설법하는 소리만 들릴 뿐 그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중 속에 제바(提婆)라고 하는 장자가 있다가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이 상서를 아십니까.”
그 대중들은 말하였다. “큰 성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고 했다.
그때, 제바의 마음 근본은 일찍부터 청정했으므로 역시 그 모양을 보고서 잠자코 계합되었는지라, 대중에게 말하였다.
“스님께서 불성의 이치를 나타낸 것이요 스님의 몸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양 없는 삼매[無相三昧]는 형상이 마치 만월(滿月)과 같은 것이어서 불성의 이치입니다”고 했다.
말을 마치자마자, 스님은 본래의 몸을 자리 위에 나타내면서 게송으로 말했다.
身現滿月相,以表諸佛體,
說法無其形,用辯非聲色。
몸으로 만월의 형상을 나타내서
부처님들 체성을 표시한 것이니
법을 설하면서 그 형상이 없었음은
변론으로써 함이요 소리와 빛깔은 아니니라.
또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爲明隱顯法,方說解脫理,
於法心不證,無瞋亦無喜。
숨음ㆍ드러남의 법을 밝히기 위해
바야흐로 해탈의 도리를 설했나니
법에서는 마음이 증득되지 않는지라
성냄도 없고 기쁨도 없느니라.
다음은 제15조 가나제바(迦那提)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이다.
本對傳法人,爲說解脫理,
於法實無證,無終亦無始。
본래 법을 전할 사람에 대하여
그를 위해 해탈의 도리 설한 것이니
법에서는 실로 증득함이 없는지라
마지막도 없고 시작도 없느니라.
제16조 나후라(羅睺羅)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於法實無證,不取亦不離,
法非有無相,內外云何起。
법에서는 실로 증득함이 없는지라
취하지도 아니하고
여의지도 않나니
법은 있고 없는 모양이 아니거늘
안과 바깥이 어떻게 일어나랴.
제17조 승가난제(僧迦難提)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心地本無生,因種從緣起,
緣種不相妨,華果亦復爾。
마음 자리는 본래 생김이 없어
종자로 인하여 연(緣)을 좇아 일어난다
연ㆍ종자는 서로가 방해하지 않으며
꽃과 열매 또한 다시 그러하니라.
제18조 가야사다(伽倻舍多)는, 처음에 제17조 승가난제가 그의 집에 갔더니 갑자기 한 아들이 손에 구리 거울을 가지고서 스님에게 온 것을 보고, 존자는 물었다.
“너는 잘 모르는구나. 아주 어린아이로 보이는데 ‘나는 백 살이오’ 하고 대답하니, 그것은 도리가 아니로다.” 그 아들이 대답했다.
“나는 도리를 알지는 못하며, 꼭 백 살입니다.”
“너는 좋은 근기로다.”
“부처님의 게송에서 이르되,
若人生百歲,不會諸佛機,
未若生一,日而得決了之。
만일 사람이 백 살을 살면서
부처님들 근기를 알지 못하면
설령 하루를 살면서도
결단하여 알게 됨만 못하느니라
고 했습니다”고 했다.
이때, 존자는 공경하면서 이는 성인인 줄 깊이 알고서는 또 물었다.
“네가 가진 이 거울은 무엇을 비유하고 있느냐.” 하자,
그때에 동자는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諸佛大圓鏡,內外無瑕翳,
兩人同得見,心眼俱相似
모든 부처님의 크고 둥근 거울은
안팎에 흠이나 흐림이 없으므로
두 사람이 똑같이 볼 수가 있으며
마음과 눈이 모두 비슷합니다.
부모는 그 아들의 기이한 행동을 보고 마침내 출가를 허락했으므로, 존자는 거느리고 유람하며 교화하다가 어떤 옛 절에 가서 계(戒)를 받게 하고 이름을 가야사다라고 지었다.
그 불전 위에 달린 구리 방울이 바람에 흔들려 소리가 났으므로 존자는 물었다. “저것은 바람이 우느냐, 방울이 우느냐, 구리가 우느냐.” 그는 대답했다. ‘저의 마음이 울 뿐이요 바람이나 구리나 방울에서가 아닙니다.” “바람이나 구리나 방울이 아니고 나의 마음이란 그 누구인고.” “두 가지 모두가 고요하나 3매야(昧耶)는 아닙니다.” “장하도다. 참된 비구여, 모든 부처님의 이치를 잘도 알았구나. 모든 법의 요의(要義)를 잘도 말하도다. 진실한 이치를 잘도 알았도다”고 했다.
또 말했다. “내 이제 이 법안장(法眼藏)을 너에게 부촉하노니, 너는 나의 게송을 받고 교화해야 하느니라”고 하고, 게송으로 말했다.
心地本無生,因種從緣起,
緣種不相妨,華果亦復爾。
마음 자리는 본래 생김이 없어
종자로 인하여 연을 좇아 일어난다
연ㆍ종자는 서로가 방해하지 않으며
꽃과 열매 또한 다시 그러하니라.
가야사다는 구마라다(鳩摩羅多)에게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有種有心地,因緣能發萌,
於緣不相礙,當生生不生。
종자가 있고 마음 자리 있어서
인(因)과 연(緣)이 능히 싹을 내나니
연에서는 서로가 장애하지 아니하여
생겨야 하면 생기고 생기지 아니한다.
제19조 구마라다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性上本無生,爲對求人說,
於法旣無得,何懷決不決。
성품 위에선 본래 생김이 없지만
대경 위해 사람의 설명을 구하나니
법에서는 이미 얻음이 없거늘
어찌하여 결단과 결단하지 않음을 품으랴.
제20조 사야다(闍夜多)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은 다음과 같다.
言下合無生,同於法界性,
若能如是解,通達事理竟。
말끝에서 생김이 없음에 계합되면
법계의 성품과 같아지나니
만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으면
현상[事]과 본체[理]를 통달하여 마친다.
제21조 바수반두(婆修槃頭)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泡幻同無礙,如何不了悟,
達法在其中,非今亦非古。
거품ㆍ환상은 같아서 장애가 없거늘
어떻게 깨쳐서 알지 않으랴
법을 통달하면 그 안에 있어서
지금도 아니고 옛도 아니니라.
제22조 마나라(摩挐羅)가 학륵(鶴勒)존자에게 법을 전하는 게송을 부촉한 뒤에, 곧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솟구쳐 허공에서 18변(變)을 짓고 나서 도로 본래 자리로 돌아와 손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변화로 하나의 샘이 되게 하고는 게송으로 말했다.
心地淸淨泉,能潤於一切,
從地而涌出,徧滿十方濟。
마음 자리는 청정한 샘이며
용은 온갖 것을 적셔주나니
땅으로부터 솟아 나와서는
10방(方)에 두루 차며 구제하느니라.
또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心逐萬境轉,轉處實能幽,
隨流認得性,無喜亦無憂。
마음은 온갖 경계 따라 굴리고
굴리는 곳 실로 그윽하나니
흐름을 따르면서 성품임을 인정하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느니라.
제23조 학륵존자가 법을 부촉하고 나서, 곧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솟구쳐 허공에서 18변을 지은 뒤에 도로 본래 자리로 돌아와서 고요히 멸도(滅度)하였다. 그러므로 그때의 대중들은 사리를 나누어 저마다 탑을 세우려고 화장을 한 뒤에 사리를 나누려 하자, 그때에 존자는 몸을 나타내면서 게송으로 설했다.
一法一切法,一切一法攝,
吾身非有無,何分一切塔。
하나의 법이 온갖 법이요
온갖 법은 하나의 법으로 포섭하는 것
나의 몸은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온갖 탑에 다 나누랴.
또 법을 전하는 게송에 말했다.
認得心性時,可說不思議,
了了無所得,得時不說知。
심성임을 인정하게 되는 때에는
불가사의라고 말할 수 있나니
또렷또렷하면서도 얻는 바가 없고
얻는 때엔 안다고 말하지 않느니라.
제24조 사자(師子)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正說知見時,知見俱是心,
當心卽知見,知見卽于今。
지견(知見)이라고 바로 말을 할 적에
지견은 모두가 마음이니
그 마음이 곧 지견인 것이요
지견이 곧 지금까지니라.
제25조 바사다(婆舍多)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聖人說知見,當境無非是,
我今悟眞性,無道亦無理。
성인은 지견을 말하였지만
경계에 당하면 이것 아님이 없다
나는 이제 참된 성품을 깨친지라
도(道)도 없고 또한 진리도 없다.
제26조 불여밀다(不如密多)존자의 법을 전하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眞性心地藏,無頭亦無尾,
應緣而化物,方便呼爲智。
참 성품은 마음 자리에 간직해 있되
머리도 없고 또한 꼬리도 없나니
인연에 응(應)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되
방편을 지혜라 부르느니라.
제27조 반야다라(般若多羅)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心地生諸種,因事復因理,
果滿菩提圓,華開世界起。
마음 자리는 모든 종자를 내되
현상[事]으로 인하고 또 본체[理]로 인하나니
결과 차면 보리가 원만하여져서
꽃이 피고 세계가 생기느니라.
서천(西天)의 바라제(波羅提)존자는 이견왕(異見王)을 교화하기 위해 신통력을 나타내어 구름을 타고 그 왕의 궁전 앞에 가 닿자, 그때 대왕은 구름을 탄 이에게 물었다.
“당신은 삿된 것을 위해서입니까, 바른 일을 위해서입니까.” 바라제존자가 대답했다. “나는 삿되거나 바른 것이 아니면서 바르고 삿된 일에 왔습니다. 대왕이 만일 바르다면 나는 삿되거나 바름이 없습니다.”
왕이 또 물었다. “어떤 이가 부처님입니까.” 바라제가 대답했다. “성품을 보면 바로 부처님입니다.” “스님은 성품을 보셨습니까.” “나는 불성을 보았습니다.” “성품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품은 작용함에 있습니다.” “이 무슨 작용이기에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까.” ‘지금에도 작용을 나타내건마는 왕 자신이 알지 못합니다.“ ”스님은 이미 보신 것이라 작용이 있다 하시지만 나의 처소에서도 작용하고 있습니까.“ ”왕이 만일 작용한다면 눈앞의 것이 모두가 그것이지만 왕이 만일 작용하지 않으시면 그 본체도 보기 어렵습니다.“ 왕이 가로되 ”만일 작용하게 되면 몇 군데서 출현하는 것입니까.“ 스님이 말씀하시되 ”만일 작용이 출현된 때는 그 여덟 군데가 있습니다.”고 하고, 구름 끝에 우뚝 서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在胎曰身,處世名人,
在眼曰見,在耳曰聞。
태(胎) 안에 있을 때는 몸이라 하고
세간에 있을 때는 사람이라 하며
눈에 있을 때는 본다고 하고
귀에 있을 때는 듣는다고 한다.
在鼻辯氣,在口談論,
在手執捉,在腳雲奔。
코에 있을 때는 냄새를 알고
입에 있을 때는 말을 하며
손에 있을 때는 붙잡게 되고
다리에 있을 때는 걸으며 달린다.
徧現俱該法界,收攝不出微塵,
識者知是佛性,不識者喚作精魂。
두루 나타나면 다 함께 법계를 감싸고
거두어들이면 작은 티끌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나니
아는 이는 불성임을 알되
모르는 이는 정혼(精魂)이라고 부른다
이 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다라(菩提達磨多羅)는 남천축국(南天竺國)왕의 셋째 아들로서, 항상 진리를 논의하기를 좋아했고 마음으로는 중생을 생각하면서도 부처는 알지 못했다.
또 스스로 탄식하기를, “세간에는 형체가 있는 법이어서 알기가 쉽지만 부처와 마음의 법만은 알기가 어려운 것이구나”고 했다.
그때, 반야다라존자가 그의 나라에 이르렀더니 왕은 하나의 보배 구슬을 주었는데 그 구슬 광명이 찬란하게 빛나서 아주 아름다웠다.
존자는 보고 나서 그 구슬로써 시험하며 물었다. “이 보배 구슬은 큰 광명이 있어 물건을 능히 비추는데 다시 이 보다도 더 훌륭한 좋은 구슬이 있을까.”
보리다라는 말하였다. “그것은 세간의 보배라 아직 으뜸가는 것이 못되며 모든 빛 중에서는 지혜의 빛이 으뜸이 됩니다. 그것은 세간의 밝음이라 아직 으뜸가는 것이 못되며 모든 밝음 중에서는 마음의 밝음이 첫째입니다.
그 구슬에 있는 광명은 스스로를 비출 수가 없고 반드시 지혜 광명을 빌려서 지혜가 그것을 가려야 하며 그것을 가리고 나면 곧 그것이 구슬임을 알게 되고 그것이 구슬임을 알게 되면 곧 그것이 보배임이 밝혀집니다.
만일 그것이 보배임이 밝혀지면 보배는 스스로 보배가 되지 못하고, 만일 그것이 구슬임이 가려지면 구슬은 스스로 구슬이 되지 못합니다. 구슬이 스스로 구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반드시 지혜 구슬을 빌려서 세간의 구슬임을 가려야 한다는 것이요, 보배가 스스로 보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반드시 법의 보배를 빌려서 세속의 보배임을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님께서는 그 도(道)가 있으므로 그 보배가 이미 나타났으며, 중생에게도 도가 있는지라 마음의 보배 또한 그러합니다”고 했다.
존자는 기특하게 여겼고 그로 인하여 출가하여 도를 깨쳤으며 마침내는 교화를 위해 이 땅으로 왔었는데, 보지(寶誌)는 그가 부처의 심인(心印)을 전하기 위한 관음(觀音) 성인임을 알고 있었다.
스님은 안심(安心) 법문에서 이르되, “미혹했을 때는 사람이 법을 따르고 알았을 때는 법이 사람을 따르나니, 알면 의식[識]이 물질[色]을 포섭하되 헷갈리면 물질이 의식을 포섭한다. 다만 마음에 분별과 계교와 현량(現量)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꿈일 뿐이며, 만일 마음이 고요히 사라져서 생각이 동요할 곳이 하나도 없음을 알면 그것을 바른 깨달음[正覺]이라 한다.
【문】어떻게 자기 마음으로 나타내는가.
【답】온갖 법이 있는 것을 보건대, 있는 것은 스스로 있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으로 헤아려서 있는 것을 만든다. 온갖 법이 없는 것을 보건대, 없는 것은 스스로 없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으로 헤아려서 없는 것을 만든다. 이리하여 온갖 법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아서 다 같이 이는 자기 마음으로 헤아려서 있는 것을 만들고 자기 마음으로 헤아려서 없는 것을 만든다.
또 만일 사람이 온갖 죄를 지었으면 스스로가 자기의 법왕(法王)을 보아야 곧 해탈하게 된다.
만일 일 위에서 알게 된 이면 기력이 씩씩하고, 일 가운데서 법을 본 이면 곧 처처에서 생각을 잃지 아니한다. 문자에서 아는 이면 기력이 허약하고, 일에 즉(卽)하고 법에 즉한 이면 깊이 그대의 갖가지 움직이는 일을 좇아 뛰고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하되 모두가 법계에서 나가지도 않고 법계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만일 법계로써 법계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곧 어리석은 사람이니, 무릇 하는 일이 있어도 끝내 법계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왜냐 하면, 마음 자체가 바로 법계이기 때문이다.
【문】세간 사람들은 갖가지로 배우고 묻고 하거늘, 어찌하여 도를 얻지 못하는가.
【답】자기[己]를 보기 때문에 도를 얻지 못한다. 자기라 함은 ≺나≻[我]다. 도덕이 지극히 높은 사람은 괴로움을 만나도 근심하지 아니하고 즐거움을 만나도 기뻐하지 않나니, 자기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괴로움과 즐거움을 모르는 이는 자기를 없애기 때문이요 허무(虛無)에 이르게 된다. 자기 자신도 오히려 없애거늘, 다시 무슨 물건이 있기에 없애지 않겠는가.
【문】모든 법이 이미 ≺공≻하였다면 누가 도를 닦는가.
【답】누가 있어서 도를 닦아야 되는가. 만일 누가 없다면 곧 도를 닦을 필요가 없다. ‘누구[阿誰]’한 역시 ,≺나≻다. 만일 ≺나≻가 없다면 물건을 만난다 해도 시비(是非)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시(是)란 나 스스로만 옳고 중생은 옳지 않다는 것이요, 비(非)란 나 스스로만 그르고 중생은 그르지 않다는 것이다.
곧 마음에 생각이 없으면 바로 불도에 통달한 것이니, 다른 물건에 소견을 일으키지 않으면 도에 통달했다고 한다. 다른 물건을 만나서 곧장 그 근원을 통달하여 알면 이 사람은 지혜 눈이 열린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물건에게 맡기고[任物] 자기에게 맡기지 않으므로[不任己] 곧 가지거나 버리거나 어기거나 좇음이 없지만, 어리석은 이는 자기에게 맡기고 물건에게 맡기지 않는지라 곧 가지고 버리고 어기고 좇음이 있다.
한 물건도 보지 않음을 도를 본다[見道]고 하고, 한 물건도 행하지 않음을 도를 행한다[行道]고 한다.
온갖 처소에서 처소가 없는 이것이 곧 법 처소[法處]이니 곧 짓는 곳은 짓는 곳이 없고 짓는 법이 없으면 곧 부처를 뵙는다.
만일 모양을 볼 때는 온갖 처소에서 귀신을 본다.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지만, 법을 관하기 때문에 해탈하게된다.
만일 기억과 분별을 보면 끓는 가마솥 물과 이글거리는 숯불에 타는 고통이 되는 일을 당하면서 실제로 나고 죽는 모양을 볼 것이요, 만일 법계의 성품을 보면 곧 열반의 성품인 것이니, 기억과 분별이 없는 이것이 곧 법계의 성품이다.
마음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로되 작용하면서 그만두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도 아니다. 또 작용하면서도 항상 ≺공≻하기 때문에 있는 것도 아니고 ≺공≻하면서도 항상 작용하기 때문에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또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吾本來茲土,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結果自然成。
내가 본래 이 당에 온 것은
법을 전해 미혹된 유정 구제함이니
한 송이 꽃에서 다섯 잎사귀가 나고
열매를 맺는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지라.
제2조 혜가(慧可) 대사가 이르되, “범부는 옛날이 이제와 다르다 하고 지금이 옛날과 다르다 한다. 또 4대(大)를 떠나서 다시 법신(法身)이 있다고 하나, 알고 난 때에는 지금 5음(陰)의 이 마음이 바로 원만하고 청정한 열반이니, 이 마음은 만행(萬行)을 완전히 갖추어 있으므로 바로 대종(大宗)이라 일컫는다”고 했다.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本來緣有地,因地種華生,
本來無有種,華亦不能生。
본래 연(緣)으로 땅이 있고
땅의 종자로 인하여 꽃이 생기나니
본래에 종자가 없으면
꽃 또한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제3조 승찬(僧璨)대사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華種雖因地,從地種華生,
若無人下種,華種盡無生。
꽃의 종자가 비록 땅으로 인하나
땅의 종자로부터 꽃이 생기나니
만일 사람이 종자를 뿌림이 없으면
꽃 종자는 모두 생김이 없느니라.
제4조 도신(道信) 대사는 이르되, “무릇 마음의 선정[定]을 알고자 하면, 똑바로 앉았을 때 앉아 있음을 아는 이 마음이며, 허망하게 일어남이 있음을 아는 이 마음이 허망하게 일어남이 없음을 아는 이 마음이고, 안팎이 없음을 아는 이 마음이다. 진리는 모두가 마음으로 돌아가며 마음이 이미 청정하여지면 청정함이 곧 본래의 성품이다. 안이나 바깥이 오직 한 마음일 뿐이요 이것이 지혜의 모양이며 분명히 알면서 동요하지 않는 마음을 제 성품의 선정이라고 한다”고 했다.
또 융(融) 대사에게 지시하며 이르되, “백천의 미묘한 문이 다 같이 방촌(方寸)으로 돌아가고 항하 모래만큼 많은 공덕이 모두 마음의 근원에 있다. 온갖 선정의 문과 온갖 지혜의 문과 온갖 수행의 문이 모두 다 두루 갖추어졌고 신통의 미묘한 작용도 다 같이 그대의 마음에 있다”고 했다.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華種有生性,因地華生生,
大緣與性合,當生生不生。
꽃의 종자는 나는 성품이 있되
땅으로 인하여 꽃은 나고 나나니
큰 연(緣)과 성품이 합치게 되면
나야 하면 나되 나지 않느니라.
제5조 홍인(弘忍) 대사가 이르되, “법의 요의를 알고자 하는가. 마음은 12부경(部經)의 근본이다. 오직 일승(乘)의 법이 있을 뿐이다. 일승이란 마음이 그것이다. 한 마음을 지키는 것만이 곧 심진여문(心眞如門l니, 온갖 법과 행은 자기 마음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마음 뿐임을 스스로가 알아야 하나니, 마음은 형색이 없다. 모든 조사(祖師)들은 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했을 뿐이니, 통달한 이가 인가(印可)하는 것이요 다시는 다른 법이 없다”고 했다.
또 이르되, “온갖 것은 마음으로 말미암으며 삿됨과 바름은 자기에게 있다. 한 물건도 생각지 않으면 이것이 곧 본래 마음이니, 지혜로만이 알 수 있는 것이요 다시는 다른 수행이 없다”고 했다.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서 말했다.
有情來下種,因地果還生,
無情旣無種,無性亦無生。
유정들은 와서 씨를 뿌리고
땅으로 인하여 열매가 도로 생기지만
무정은 벌써 종자가 없는지라
성품도 없고 생김도 없다.
제6조 혜능(慧能) 대사가 이르되, ‘그대들 모든 사람의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이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 마음 밖에 다시는 건립할 수 있는 하나의 법도 없나니, 이는 다 자기 마음에서 만 가지 법을 내는 것이다. 경에서 이르되,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긴다‘고 하였지만, 그 법은 둘이 없고 그 마음 또한 그러하다. 그 도(道)는 청정하여 모든 모양이 없나니, 그대들은 청정하고 ≺공≻한 그 마음을 관하지도 말라. 이 마음은 둘이 없고 가지거나 버릴 만한 것도 없으며, 가고 서고 앉고 눕는 것이 모두 하나의 곧장 마음이요 이것이 곧 정토(淨土)이니, 나의 말에 의지하는 이는 결정코 보리를 이루리라”고 했다.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心地含諸種,普雨悉皆生,
頓悟華情已,菩提果自成。
마음 자리는 모든 종자 포함되어서
널리 내리는 비에 모두 다 나나니
꽃의 뜻을 단번에 깨치고 나면
보리의 열매는 저절로 이룩되리라.
양(讓) 대사가 이르되, “온갖 만법은 다 마음으로부터 생긴다. 만일 마음 자리를 통달하게 되면 하는 일에 걸림이 없어지리니, 그대의 지금의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달마(達磨)가 서쪽에서 와서 오직 한 마음의 법을 전했을 뿐이다. 3계(界)는 마음일 뿐이요 삼라만상도 하나의 법으로 인가한 바다. 무릇 보이는 빛깔은 다 자기 마음이며, 마음이 스스로 마음이 되지 못하고 빛깔로 인해서 마음인 것이다. 그대는 때를 따라 현상[事]에 즉(卽)하고 본체[理]에 즉하되 도무지 걸리는 바가 없어야 하리니, 보리도의 과위 역시 그와 같아서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바라 곧 빛깔이라 하며, 빛깔의 ≺공≻함을 알기 때문에 생기되 곧 생기지 않느니라”고 했다.
마(馬) 대사가 물었다. “어떻게 뜻을 쓰면 선정의 모양 없는 삼매[無相三昧]에 계합됩니까.”
스님은 대답했다. “그대가 마음 자리 법문을 배우는 것은 마치 씨를 뿌리는 것과 같고 내가 법요(法要)를 말하는 것은 마치 하늘에서 내린 비와 이슬과 같나니, 그대의 연(緣)과 합하기 때문에 당연히 도(道)를 볼 것이니라.”
또 물었다. “화상께서는 ‘도를 본다’고 하시는데, 도는 빛깔이 아니거늘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스님은 대답했다. ‘마음 자리의 법 눈으로 도를 볼 수 있는 것이니, 모양 없는 삼매 역시 그러하니라.“
“이루어지거나 무너짐이 있습니까.”
‘만일 이 도에 계합되면 시작도 없고 마지막도 없으며, 이루어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으며, 모이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질지도 않고 짧지도 않다. 고요하지도 않고 어지럽지도 않으며,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 않나니, 만일 이렇게 알면 도라 하느니라.
그대는 나의 가르침을 받고 나의 게송을 들으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心地含諸種,遇澤悉皆萌,
三昧華無相,何壞復何成。
마음 자리는 모든 종자 포함되어
비와 이슬 만나면 모두 다 싹 트나니
삼매의 꽃은 모양이 없거늘
어찌 무너지고 이루어짐 있으랴.
길주(吉州) 사(思) 화상이 이르되, “지금 말하는 그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요 이 마음이 바로 부처며 이것이 참 모습[實相]이요 법신불이니라. 경에서 이르되, ”3아승기(阿僧祇)와 백천의 명호가 있다’고 했지만, 세계를 따르고 처소에 응하여 붙인 이름이다. 마치 빛깔을 따르는 마니주(摩尼珠)가 청색에 닿으면 청색으로 되고 황색에 닿으면 황색으로 됨과 같으나, 마니보는 본래대로의 빛깔이다. 마치 손가락이 제 손가락을 대지 못하고 칼이 제 칼을 베지 못하며 거울이 제 거울을 비추지 못함과 같나니, 형상 따라 나타나게 된 것이 저마다 같지 않으므로 붙인 이름에 낫고 못함도 같지 아니하다.
이 마음은 허공과 수명을 똑같이 한다. 만일 삼매의 문에 들면 삼매가 되지 아니함이 없고 만일 모양 없음의 문에 들면 그 모두가 모양이 없나니, 성립되는 것에 따라 모두 다 종문(宗門)이 된다. 말하고 울고 웃고 굽히고 펴고 숙이고 우러르고 함이 저마다 성품 바다에서 일어나는 바라 그 때문에 종(宗)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며, 상호(相好)있는 부처는 바로 인과(因果)의 부처요 곧 실상불(實相佛)의 가용(家用(가용)이다.
경에 이르되, ‘32상(相)과 80종호(種好)는 모두가 마음으로부터 생긴다’고 했고, 또 이르되 ‘법 성품 집의 불길이다’고 했으며, 또 이르되 ‘법 성품의 공훈이다’고 했나니, 그 마음의 청정해짐에 따라 곧 불국토도 청정해지며 모든 생각이 생기면 생각 따라 결과를 얻는다.
물건에 응하면서 나타나므로 그를 일러 여(如)가 온다고 하고 따라 응하면서 가기 때문에 구할 것이 없나니, 온갖 때 안에 다시는 얻을 만한 법은 하나도 없고 이로부터 법을 얻되 얻음으로써 다시는 얻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법은 법을 알지 못하고 법은 법을 듣지 못하며, 평등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평등이라 평등으로써 다시는 평등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혼자일 뿐이요 짝이 없다’고 한다.
헷갈렸을 적에는 깨침에서 헷갈리고 깨쳤을 적에는 헷갈림에서 깨친 것이므로, 헷갈림은 도리어 스스로 헷갈리고 깨침은 도리어 스스로 깨치는 것이니, 하나의 법도 마음으로부터 생기지 아니함이 없고 하나의 법도 마음으로부터 소멸하지 아니함이 없다. 그러므로, 헷갈림과 깨침은 모두 하나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하나의 티끌에 법계를 포함한다’고 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란 것은, 참으로 본래의 성품이어서 모든 수량을 초월하였고 성인도 아니며 변재도 없나니, 변재로 말할 수 있는 바도 아니고 부처로서 만들 만한 것도 없으며 도(道)로써 수행할 만한 것도 없다.
경에서 이르되, ‘만일 여래가 항상 설법하지 않은 줄을 알면 이것을 다문(多聞)을 두루 갖추었다고 한다’고 했나니, 곧 자기 마음에 다문을 두루 갖추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초목에도 불성이란 것이 있다. 이것은 한 마음이라 밥으로도 불사(佛事)를 짓는 것이요 옷으로도 불사를 짓는 것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숭산(嵩山) 안(安)화상은, 옛날 양(讓)화상과 탄연(坦然)선사가 형주(荊州) 옥천(玉泉)에 있으면 계율을 듣다가, 두 사람은 서로가 말하기를 “우리는 듣건대, 선종이 최상의 불승(佛乘)이라 하더라. 하필 이 조그마한 종(宗)에 국집하면서 큰 진리를 잃을 것이 있느냐”고 하고, 마침내 구름처럼 노닐며 선지(先知)에게 널리 물으면서 숭산 안화상의 처소까지 와서는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스님이 대답했다. “어찌하여 자기의 뜻은 묻지 않는가. 다른 사람의 뜻을 물어서 무엇을 하려는가.”
“어떤 것이 탄연의 뜻입니까.”
스님이 말씀하되, “그대는 은밀하게 작용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은밀한 작용입니까. 엎드려 지시를 청합니다.”
스님이 눈을 들면서 그들을 보자, 두 사람은 그때에 크게 깨쳤다.
굴다삼장(崛多三藏)이 행각하면서 태원(太原)의 정양현(定襄縣)에 이르러 마을을 지나다가 수(秀)대사의 제자가 풀을 엮어 암자를 지어 놓고 마음을 관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스님이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대답했다. “고요함[靜]을 자세히 보고[看] 있습니다.”
스님은 말했다. “자세히 보는 것은 어떤 사람이며, 고요하다는 것은 어떤 물건인가.”
그 납승(衲僧)은 대답이 없다가 물었다. “그 이치는 어떠한 것입니까. 스님께서 지시하여 주십시오.”
“어찌하여 스스로를 자세히 보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스스로를 고요히 하지 아니하는가.”
스님은 그의 근성(根性)이 더딘 것을 보고는 물었다. “그대의 스승은 누구신가.”
“수(秀)화상입니다.”
“그대의 스승은 이 법만을 가르쳐 주시던가. 따로 뜻이 있어서인가.”
“다만 저에게 고요함을 자세히 보라고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서천(西天)의 하열한 외도들이 익히던 법을 이 땅에서 선종으로 삼고 있구나. 크게 사람을 그르치고 있도다.“
그 납승은 삼장에게 물었다. “스승은 누구십니까.”
“육조니라” 하고 또 말했따. “바른 법은 듣기 어렵느니라. 그대는 어찌하여 그 곳으로 가지 아니하는고.”
그 납승은 스님의 가르침을 듣고 곧 조계(曹鷄)로 가서 육조를 뵙고 위의일을 자세히 말하자, 육조는 말했다.
“진실로 굴다가 말한 바와 같도다. 그대는 어찌하여 스스로를 자세히 보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스스로를 고요히 하지 아니하는가. 누가 그대를 고요하게 하는고.” 하자, 그 말 끝에 크게 깨쳤다.
지책(智策)화상이 북쪽 땅을 행각하다가 우연히 5조(祖) 아래의 지황(智隍)선사가 20년 동안 선정 닦는 것을 만났으므로 물었다.
“여기 있으면서 무엇을 합니까.”
지황이 대답했다. “선정에 들어 있습니다.”
“선정에 들었다는 것은, 마음이 있어 들은 것입니까. 마음이 없이 들은 것입니까. 만일 마음이 있어 들었다면 곧 일체의 유정들은 모두 다 마음이 있으므로 역시 선정을 얻었다 해야 되겠고, 만일 마음이 없이 들었다면 일체의 무정(無情)들도 역시 선정을 얻었다 해야 될 것입니다.”
“나는 바로 선정에 들었을 때에는 있다 없다 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지 아니합니다.”
“만일 있다 없다 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항상한 선정이므로 다시는 난다 든다 함이 있지 않아야 합니다.”
지황은 대답이 없다가 물었다. “당신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육조십니다.”
“당신의 스승께서는 무슨 법으로 선정을 삼으십니까.”
“묘히 잔잔하고 뚜렷히 고요하여 체성과 작용이 여여(如如)하며 5음(陰)은 본래 ,≺공≻하고 6진(塵)은 있는 것이 아니며, 나오지도 않고 들지도 아니하며 안정하지도 않고 산란하지도 아니하며, 선의 성질은 머무름과 머무름을 여읨도 없는 선의 고요함이요 선의 성질은 생김과 생김을 여읨도 없는 선의 생각이어서 마치 허공과 같고 떠한 허공이라는 헤아림조차도 없습니다.”
지황은 이 설명을 듣고도 아직 의심이 쉬지 않으므로, 마침내 석장(錫杖)을 떨쳐 짚고 남쪽으로 가서 곧장 조계에 이르러 6조를 뵈었더니, 6조 역시 위와 같은 설명을 하자, 지황은 그 말 끝에 크게 깨쳤다.
남악(南嶽) 사(思) 대화상이 이르되, “만일 배운다면 먼저 마음을 통달해야 하고 마음을 만일 통달하게 되면 온갖 법이 일시에 다 통달해진다.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도 청정하다는 생각이 나지 않고 ≺공≻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도 ≺공≻을 취하지 아니함은 마치 새가 공중에 날고 있는 것과 같아지나니, 만일 공중에서 있다고 하면 반드시 떨어지리라는 근심이 있기 때문이다. 머무름이 없는 이것이 본래 제 성품의 체성이요 고요하면서도 그 마음을 냄은 바로 비춤[照]의 작용이니, 곧 고요함 이것은 제 성품 선정이요 곧 비춤 이것은 제 성품 지혜이다.
곧 선정 이것은 지혜의 체성이요 곧 지혜 이것은 선정의 작용이며, 선정을 여의면 따로 지혜가 없고 지혜를 여의면 따로 선정이 없으며, 곧 선정일 때 그대로가 지혜요 지혜일 때 그대로가 선정이니, 곧 선정일 때는 선정이 없고 지혜일 때는 지혜가 없다. 왜냐 하면, 성품 스스로가 여(如)하기 때문이다.
마치 등불과 빛이 비록 두 가지 이름이 있기는 하나, 그 자체는 다르지 않아서 곧 등불이 빛이요 빛이 등불이며 등불을 여의고는 따로 빛이 없고 빛을 여의고는 따로 등불이 없다. 곧 등불이 빛의 체성이요 빛이 등불의 작용인 것과 같나니, 곧 선정과 지혜는 쌍으로 닦는 것이요 서로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우두 융(牛頭融)대사의 절관론(絶觀論)에서 “물었다. ‘어느 것이 마음인가.’
대답했다. ‘여섯 감관으로 관하는 바 모두가 다 같이 마음이다.’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마음은 고요히 사라진 것이다.’
‘어떤 것이 체성인가.’
‘마음이 체성이다.’
‘어떤 것이 종(宗)인가.’
‘마음이 종이다.’
‘어떤 것이 근본인가.’
‘마음이 근본이다.’
‘어떤 것이 선정과 지혜가 쌍으로 노니는 것인가.’
‘심성이 고요히 사라짐이 선정이 되고, 항상 고요히 사라짐을 앎이 지혜이다.’
‘어느 것이 지혜인가.’
‘경계에서 앎을 일으킴이 지혜이다.’
‘어떤 것이 경계인가.’
‘자신의 심성이 경계이다.’
‘어느 것이 펴는 것인가.’
‘비춤의 작용이 펴는 것이다.’
‘어느 것이 마르는 것인가.’
‘마음이 고요히 사라져서 가고 옴이 없으면 마르는 것이니, 펴면 법계에 가득히 노닐고 마르면 선정의 자국조차 찾기 어렵다.’
‘어느 것이 법계인가.’
‘겉도 얻을 수 없음을 법계라 한다’”고 했다.
법조(法照) 선사가 이르되, “경에서 ‘3아승기 백천의 명호는 모두가 여래의 이명(異名)이다’고 하셨지만, 곧 참 마음의 별칭(別稱)인 것이며, 또 경에서 이르되 ‘만법은 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고 하셨는데, 바로 이런 뜻이다.
무릇 속박은 마음으로부터 속박되고 해탈은 마음으로부터 해탈되나니, 속박과 해탈은 마음으로부터요 그 밖의 일과는 상관이 없다. 뛰어난 기술은 오직 마음을 관함에 있는 것이다. 나아가 만일 한 마음의 문을 든다면 온갖 것이 한 마음일 뿐이요 만일 하나의 법이 마음이 아니라면 이 마음은 바깥에서 존재하므로 누가 마음 밖에 있으면서 따로 한 줄기를 제압할 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고 했다.
범(梵)선사가 이르되, “만일 온갖 법이 모두 법임을 알면 곧 해탈하게 되나니, 눈이 법이요 빛깔이 법이다. 경에서 이르되, ‘법이 도리어 법과는 속박됨을 보지 못하고, 법이 도리어 법과는 해탈됨을 보지 못하느니라’고 했다”고 했다.
장(藏)선사가 이르되, “온갖 법에서 얻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곧 마음이 바로 도(道)라는 것이니, 눈은 온갖 빛깔을 얻지 못하고 귀는 온갖 소리를 얻지 못하느니라”고 했다.
연(緣)선사가 이르되, “마치 집 가운데에 큰 돌이 있어서 평소에 앉고 눕고 하다가 혹시 불상을 만들까 하였더니 마음에 불상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죄송해서 감히 앉지 못하는 것과 같나니, 이것은 다 의식이라는 붓 끝으로 그려 만들어서 스스로가 서둘고 스스로가 두려워하는 것이요 돌 안에는 실로 죄와 복이란 것이 없다”고 했다.
안(安)선사가 이르되, “곧 마음 이것이 도(道)다. 왜냐 하면,곧장 생각하고 곧장 작용하는 것이요 다시는 ≺공≻이라고 관하지도 아니하며 방편을 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경에서 이르되, ‘곧장 보아도 보지 아니하고 곧장 생각해도 생각하지 아니하며 곧장 받아도 행하지 아니하고 곧장 말하여도 번거롭지 아니하다’고 했다”고 했다.
각(覺)선사가 이르되, ‘만일 마음이 속한 데가 없음을 깨치면 곧 도의 자취를 얻으리라. 눈은 온갖 빛깔을 보되 눈은 온갖 빛깔에 속하지 않았나니, 이것이 제 성품의 해탈이다. 경에서 이르되, ’온갖 법은 서로가 속하지 아니한다‘고 했기 때문이니, 마음과 온갖 법은 저마다 서로 알지 못하느니라“고 했다.
원적(圓寂)비구니가 이르되, “온갖 법은 마음일 뿐이요 상대가 없으며 곧 제 성품의 해탈이다. 경에서 이르되, ‘온갖 법은 눈과는 대상이 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법은 법을 보지 못하고 법은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했다”고 했다.
요(堯)선사가 이르되, “심식의 성품을 환히 알면 자체가 항상 진리이니, 반연할 바[所緣]와 생각하는 곳이 불법 아님이 없다”고 했다.
낭(朗)선사가 이르되, “무릇 보이는 것 모두는 자기 마음에서 나타나니, 도(道)는 무슨 물건과 같기에 닦으려 하고 번뇌는 어떤 물건과 같기에 끊으려고 하는가”고 했다.
주(稠)선사가 이르되, “온갖 바깥 연(緣)은 일정한 모양이 없다는 것은 옳고 그름과 나고 없어짐이 한결같이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음에서다. 만일 자기 마음이 마음이 되지 않으면 누가 옳다 그르다 하고 꺼리겠는가. 주체와 객체가 모두 없으면 곧 모든 모양이 항상 고요하다”고 했다.
혜자(慧慈)선사가 이르되, “무릇 법 성품이란 것이 큰 도[大道]이다. 법 이것은 법의 몸이요 성품 이것은 깨닫는 성품이니, 곧 중생의 자연인 성품이다. 그러므로 금강반야(金剛般若)는 마치 큰 불 무더기와 같아서 삼매의 불길의 모든 누(累)도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하늘 위와 하늘 아래서 나만이 홀로 높다’고 일컬은 것이다”고 했다.
혜만(慧滿)선사가 이르되, “모든 부처님이 마음을 말씀함은 마음 모양이 바로 허망한 법임을 알게 하심이니, 이제 마음의 모양을 거듭 보태는 것은 부처님의 뜻을 깊이 어기는 것이다. 또 논의(論義)를 더하는 것도 큰 진리에 자못 어긋나는 것이니, 언제나 4권(卷) 능가경(楞伽經)을 지니어 심요(心要)를 삼고 그 말씀을 따르고 행을 따르라”고 했다.
『종경록』 97권(ABC, K1499 v44, p.519a01)
宗鏡錄卷第九十七 茂慧日永明寺主智覺禪師 延壽 集夫佛教已明,須陳祖意,達佛乘者皆與了義相應。如法華經云:是人有所思惟籌量言說,皆是佛法,無不眞實,亦是先佛經中所說。第一毘婆尸佛偈云:身從無相中受生,由如幻出諸形像,幻人心識本來無,罪福皆空無所住。 第二尸棄佛偈云:起諸善法本是幻,造諸惡業亦是幻,身如聚沫心如風,幻出無根無實性。 第三毘舍浮佛偈云:假借四大以爲身,心本無生因境有,前境若無心亦無,罪福如幻起亦滅。 第四拘留孫佛偈云:見身無實是佛見,了心如幻是佛了,了得身心本性空,斯人與佛何殊別。第五拘那舍牟尼佛偈云:佛不見身知是佛,若實有知別無佛,智者能知罪性空,坦然不懼於生死。 第六迦葉佛偈云:一切衆生性淸淨,從本無生無可滅,卽此身心是幻生,幻化之中無罪福。 第七釋迦牟尼佛偈云:幻化無因亦無生,皆卽自然見如是,諸法無非自化生,幻化無生無所畏。復告摩訶迦葉:吾有淸淨法眼涅槃妙心實相無相微妙正法,付囑於汝,無令斷絕。聽吾偈曰:法本法無法,無法法亦法。今付無法時,法法何曾法?西天第一祖摩訶迦葉傳法偈云:法法本來法,無法無非法,何於一法中,有法有不法。第二祖阿難傳法偈云:本來付有法,付了言無法,各各須自悟,悟了無無法。 第三祖商那和修傳法偈云:非法亦非心,無心亦無法,說是心法時,是法非心法。 第四祖優波鞠多尊者傳法偈云:心自本來心,本心非有法,有法有本心,非心非本法。 第五祖提多迦,亦名香衆,初投優波鞠多出家。尊者問曰:爲心出家耶?身出家耶?香衆曰:我來出家,非爲身心而求利益。尊者曰:不爲身心復誰出家。香衆曰:夫出家者,無我之故。無我之故,卽心不生滅。心不生滅,卽是常,旣是常故佛亦常,心無形相其體亦爾。尊者曰:汝當大悟心自明朗,依佛法中度恒沙衆。付法偈云:通達本法心,無法無非法,悟了同未悟,無心得無法。 第六祖彌遮迦付法偈云:無心無可得,說得不名法,若了心非心,始解心心法。 第七祖婆須蜜付法偈云:心同虛空界,示等虛空法,證得虛空時,無是無非法。第八祖佛陀難提付法偈云:虛空無內外,心法亦如是,若了虛空故,是達眞如理。第九祖伏馱蜜多尊者問佛陀難提尊者偈云:父母非我親,誰爲最親者,諸佛非我道,誰爲最道者。偈荅云:汝言與心親,父母非可比,汝行與道合,諸佛心卽是。外求有相佛,與汝不相似,欲識汝本心,非合亦非離。因茲悟道付法偈云:眞理本無名,因名顯眞理,受得眞實法,非眞亦非僞。 第十祖脅尊者傳法偈云:眞體自然眞,因眞說有理,領得眞實法,無行亦無止。 第十一祖富那夜奢。時,脅尊者於一樹下,以手指樹下地告大衆曰:此地若變爲金色,當有聖者而入此會,言當未久須臾之頃以爲金色。尊者擧手,而見一人,當會前立。尊者曰:汝從何來?夜奢曰:我心非往。尊者曰:何處所住?夜奢曰:我心非止。尊者曰:汝不定耶?夜奢曰:諸佛亦然。尊者曰:汝非諸佛。夜奢曰:諸佛亦非。爾時,夜奢說偈讚曰:師坐金色地,常說眞實義,迴光而照我,令入三摩諦。又傳法偈云:迷悟如隱顯,明暗不相離,今付隱顯法,非一亦非二。 第十二祖馬鳴尊者傳法偈云:隱顯卽本法,明暗元不二,今付悟了法,非取亦非棄。 第十三祖毘羅尊者傳法偈云:非隱非顯法,說是眞實際,悟此隱顯法,非愚亦非智。 第十四祖龍樹尊者行化到南印土,彼國人多修福業不會佛理,唯行小辯不具大智,及問佛性,而云:布施我求福業,非解佛性,汝會佛性爲我說之。師曰:汝欲學道先除我慢,生恭敬心方得佛性。衆曰:佛性大小。師曰:非汝所知,非說大小。若說大小,卽是大小,非佛性也。彼衆曰:我欲棄小辯歸于大海,龍樹卽爲說法,對大衆而現異相,身如月輪,當於座上唯聞說法不睹其形。彼衆有一長者,名曰提婆。謂諸衆曰:識此瑞不?彼衆曰:非其大聖,誰能識也。爾時,提婆心根宿淨,亦見其相默然契會。乃告衆曰:師現佛性之義,非師身者無相三昧,形如滿月,佛性之義也。語未訖師卽現本身座上說偈曰:身現滿月相,以表諸佛體,說法無其形,用辯非聲色。又傳法偈云:爲明隱顯法,方說解脫理,於法心不證,無瞋亦無喜。第十五祖迦那提婆尊者傳法偈云:本對傳法人,爲說解脫理,於法實無證,無終亦無始。第十六祖羅睺羅尊者傳法偈云:於法實無證,不取亦不離,法非有無相,內外云何起。第十七祖僧迦難提尊者傳法偈云:心地本無生,因種從緣起,緣種不相妨,華果亦復爾。第十八祖伽耶舍多初第十七祖僧伽難提,因至其舍,忽見一子,手執銅鏡而至師所。尊者曰:子幾歲耶?子曰:我當百歲。是時,尊者見荅百歲。覆問曰:汝當無知,看甚幼小?荅:吾百歲。非其理也。子曰:我不會理正當百歲。尊者曰:子善機耶?子曰:佛偈云:若人生百歲,不會諸佛機,未若生一,日而得決了之。時,尊者敬之深知是聖。又徵問曰:汝執此鏡意況如何?爾時,童子以偈荅曰:諸佛大圓鏡,內外無瑕翳,兩人同得見,心眼俱相似,父母見子奇異,遂捨出家。尊者卽領遊化,至一古寺而爲受戒,名曰伽耶舍多,於彼殿上,有銅鈴,被風搖響。尊者問曰:彼風鳴耶?彼鈴鳴耶?彼銅鳴耶?子曰:我心鳴耳。非風銅鈴。尊者曰:非風銅鈴我心誰耳。子曰:二俱寂靜。非三昧耶?尊者曰:善哉!眞比丘,善會諸佛理,善說諸法要,善識眞實義。又告曰:我今將此法眼藏,付囑於汝,汝受吾偈當行化之。偈曰:心地本無生,因種從緣起,緣種不相妨,華果亦復爾。伽耶舍多後付鳩摩羅多傳法偈曰:有種有心地,因緣能發萌,於緣不相礙,當生生不生。第十九祖鳩摩羅多尊者傳法偈云:性上本無生,爲對求人說,於法旣無得,何懷決不決。第二十祖闍夜多尊者傳法偈云:言下合無生,同於法界性,若能如是解,通達事理竟。第二十一婆修槃頭尊者傳法偈云:泡幻同無礙,如何不了悟,達法在其中,非今亦非古。第二十二祖摩挐羅付鶴勒尊者,傳法偈後卽從座起,踊身虛空作十八變訖,卻歸本座以手指地,化爲一泉,而說偈言:心地淸淨泉,能潤於一切,從地而涌出,徧滿十方濟。又傳法偈云:心逐萬境轉,轉處實能幽,隨流認得性,無喜亦無憂。 第二十三祖鶴勒尊者付法已竟,卽從座起,踊身虛空,作十八變已,卻歸本座寂然滅度。爾時,大衆欲分舍利各自起塔,臨闍維訖欲分舍利。爾時,尊者現身說偈:一法一切法,一切一法攝,吾身非有無,何分一切塔。又傳法偈云:認得心性時,可說不思議,了了無所得,得時不說知。第二十四祖師子尊者傳法偈云:正說知見時,知見俱是心,當心卽知見,知見卽于今。第二十五祖婆舍多尊者傳法偈云:聖人說知見,當境無非是,我今悟眞性,無道亦無理。第二十六祖不如密多尊者傳法偈云:眞性心地藏,無頭亦無尾,應緣而化物,方便呼爲智。 第二十七祖般若多羅尊者傳法偈云:心地生諸種,因事復因理,果滿菩提圓,華開世界起。 西天波羅提尊者,化異見王現神通力,乘雲至王殿前。爾時,大王問乘雲者曰:‘汝爲是邪,汝爲是正。’波羅提尊者荅曰:‘我非邪正,而來正邪。大王,若正我無邪正。’王又問曰:‘何者是佛。’波羅提曰:‘見性是佛。’王曰:‘師見性不?’波羅提曰:‘我見佛性。’王曰:‘性在何處?’波羅提曰:‘性在作用。’王曰:‘是何作用今不睹見。’波羅提曰:‘今現作用,王自不識。’王曰:‘師旣所見云有作用,當於我處而有之不?’波羅提曰:‘王若作用現前,摠是,王若不用體亦難見。’王曰:‘若當用之幾處出現。’師曰:‘若出用時當有其八。’卓立雲端以偈告曰:在胎曰身,處世名人,在眼曰見,在耳曰聞。在鼻辯氣,在口談論,在手執捉,在腳雲奔。徧現俱該法界,收攝不出微塵,識者知是佛性,不識者喚作精魂。 此土初祖菩提達磨多羅,南天竺國王第三之子,常好理論,心念衆生而不識佛。又自歎曰:世有形法而易了之,唯佛心法難有會者。爾時,般若多羅尊者,至于其國,王賜一寶珠。其珠光明璨然殊妙。尊者見已,用珠試曰:‘此寶珠者有大光明能照于物,更有好珠能勝此不?’菩提多羅曰:‘此是世寶,未得爲上,於諸光中,智光爲上。此是世明未得爲上,於諸明中,心明第一。其此珠者,所有光明不能自照,要假智光智辯於此,旣辯此已,卽知是珠,旣知是珠卽明其寶。若明其寶寶不自寶,若辯其珠珠不自珠。珠不自珠者,要假智珠而辯世珠。寶不自寶者,要假法寶以明俗寶,然則師有其道。其寶旣現,衆生有道,心寶亦然。尊者異之,因出家悟道,遂行化此土,寶誌識是傳佛心印觀音聖人。’師述安心法門云:迷時人逐法,解時法逐人,解則識攝色,迷則色攝識,但有心分別計校自心現量者,悉皆是夢。若識心寂滅無一動念處。是名正覺。問:云何自心現?荅:見一切法有,有自不有,自心計作有,見一切法無,無自不無自心計作無,乃至一切法亦如是。竝是自心計作有,自心計作無。又若人造一切罪,自見己之法王,卽得解脫。若從事上得解者,氣力壯,從事中見法者,卽處處不失念,從文字解者,氣力弱,卽事卽法者,深從汝種種運爲,跳踉顚蹶悉不出法界,亦不入法界。若以界入界卽是癡人,凡有所施爲終不出法界心。何以故?心體是法界故。問:世間人種種學問,云何不得道?荅:由見己故不得道,己者我也至人逢苦不憂,遇樂不喜,由不見己故。所以不知苦樂者,由亡,己故得至虛無,己自尚亡,更有何物而不亡也?問:諸法旣空,阿誰修道?荅:有阿誰須修道,若無阿誰卽不須修道,阿誰者亦我也。若無我者,逢物不生是非,是者我自是,而物非是也。非者我自非,而物非非也。卽心無心,是爲通達佛道,卽物不起見,名爲達道,逢物直達知其本原。此人慧眼開,智者任物不任己,卽無取捨違順,愚者任己不任物,卽有取捨違順不見一物,名爲見道,不行一物,名爲行道,卽一切處無,處卽是法處,卽作處無作處,無作法,卽見佛。若見相時,則一切處見鬼,取相故墮地獄,觀法故得解脫。若見憶想分別,卽受鑊湯爐炭等事,現見生死相。若見法界性卽涅槃性,無憶想分別,卽是法界性,心非色故非有,用而不廢故非無。又用而常空故非有,空而常用故非無。傳法偈云:吾本來茲土,傳法救迷情,一華開五葉,結果自然成。第二祖可大師云:凡夫謂古異今,謂今異古。復離四大更有法身,解時卽今五陰心是圓淨涅槃。此心具足萬行,正稱大宗。傳法偈云:本來緣有地,因地種華生,本來無有種,華亦不能生。 第三祖璨大師傳法偈云:華種雖因地,從地種華生,若無人下種,華種盡無生。 第四祖道信大師云:夫欲識心定者,正坐時知坐是心,知有妄起是心,知無妄起是心,知無內外是心。理盡歸心,心旣淸淨,淨卽本性,內外唯一心,是智慧相,明了無動心名自性定。又示融大師云:百千妙門同歸方寸,恒沙功德摠在心原,一切定門、一切慧門、一切行門悉皆具足,神通妙用竝在汝心。傳法偈云:華種有生性,因地華生生,大緣與性合,當生生不生。 第五祖弘忍大師云:欲知法要心是十二部經之根本,唯有一乘法,一乘者一心是,但守一心卽心眞如門,一切法行不出自心,唯心自知心無形色,諸祖只是以心傳心,達者印可更無別法。又云:一切由心,邪正在己,不思一物卽是本心。唯智能知更無別行傳法偈云:有情來下種,因地果還生,無情旣無種,無性亦無生。 第六祖慧能大師云:汝等諸人自心是佛,更莫狐疑,心外更無一法而能建立,皆是自心生萬種法。經云:心生種種法生,其法無二其心亦然,其道淸淨無有諸相,汝莫觀淨及空其心。此心無一無可取捨,行住坐臥皆一直心,卽是淨土,依吾語者決定菩提。傳法偈云:心地含諸種,普雨悉皆生,頓悟華情已,菩提果自成。讓大師云:一切萬法皆從心生。若達心地所作無礙,汝今此心卽是佛故,達磨西來,唯傳一心之法。三界唯心,森羅及萬像,一法之所印。凡所見色皆是自心,心不自心,因色故心。汝可隨時卽事卽理都無所礙,菩提道果亦復如是,從心所生卽名爲色,知色空故生卽不生。馬大師問曰:‘如何用意合禪定無相三昧?’師曰:‘汝若學心地法門,猶如下種。我說法要,譬如天澤。汝緣合故,當見于道。’馬大師又問曰:‘和尚云,見道,道非色故,云何能睹?’師曰:‘心地法眼能見于道,無相三昧亦復然矣。’馬大師曰:‘有成壞不?’師曰:‘若契此道,無始無終,不成不壞,不聚不散,不長不短,不靜不亂,不急不緩。若如是解,當名爲道,汝受吾教,聽吾偈言:心地含諸種,遇澤悉皆萌,三昧華無相,何壞復何成。’ 吉州思和尚云:卽今語言卽是汝心,此心是佛,是實相法身佛。經云:有三阿僧祇百千名號,隨世界應處立名,如隨色摩尼珠觸靑卽靑,觸黃卽黃,寶本色,如指不自觸,刀不自割,鏡不自照,隨像所現之處各各不同,得名優劣不同,此心與虛空齊壽。若入三昧門無不是三昧,若入無相門摠是無相,隨立之處盡得宗門,語言啼笑,屈伸俯仰,各從性海所發故得宗名相好之佛,是因果佛,卽實相佛家用。經云:三十二相八十種好皆從心想生。亦云:法性家焰。又云:法性功勳,隨其心淨卽佛土淨,諸念若生隨念得果,應物而現謂之如來。隨應而去故無所求一切時中,更無一法可得,自是得法,不以得更得,是以法不知法,法不聞法,平等卽佛,佛卽平等,不以平等更行平等。故云獨一無伴。迷時迷於悟,悟時悟於迷,迷還自迷,悟還自悟,無有一法不從心生,無有一法不從心滅,是以迷悟摠在一心。故云一塵含法界。非心非佛者,眞爲本性過諸數量,非聖無辯,辯所不能言,無佛可作,無道可修。經云:若知如來常不說法,是名具足多聞,卽見自心具足多聞。故草木有佛性者,皆是一心,飯食作佛事,衣服作佛事故。 嵩山安和尚昔讓和尚與坦然禪師,在荊州玉泉聽律,二人共相謂言:‘我聞禪宗最上佛乘,何必局此小宗,而失大理?遂乃雲遊博問先知,至嵩山安和尚處。問:‘如何是祖師西來意旨?’師云:‘何不問自家意旨?’問:‘他別人意旨,作什麽?’問:‘如何是坦然意旨?’師云:‘汝須密作用。’問:‘如何是密作用?伏請指示。’師擧視之,二人當時大悟。 崛多三藏,師因行至太原定襄縣,歷村見秀大師弟子結草爲庵,獨坐觀心,師問作什麽?對云:‘看靜。’師曰:‘看者何人,靜者何物,其僧無對問此理如何?乞師指示,’師曰:‘何不自看,何不自靜?’師見根性遲迴,乃曰:‘汝師是誰?’對云:‘秀和尚。’師曰:‘汝師只教此法,爲當別有意旨,云只教某看靜。’師曰:‘西天下劣外道所習之法,此土以爲禪宗也。’大悞人其僧問三藏,師是誰?師曰:‘六祖。’又云:‘正法難聞,汝何不往彼中?’其僧聞師示訓便往曹谿,禮見六祖具陳上事。祖曰:‘誠如崛多所言,汝何不自看,何不自靜,教誰靜汝?’言下大悟。 智策和尚遊行北地,遇見五祖下智隍禪師二十年修定。師問:‘在此間作什麽?’隍云:‘入定。’師云:‘入定者,爲有心入也。爲無心入也。若有心入者,卽一切有情悉皆有心,亦合得定。若言無心入者,一切無情,亦合得定。’隍曰:‘吾正入定之時,不見有有無之心。’師曰:‘若不見有有無之心,卽是常定,不應更有出入。’隍無對卻問:‘汝師是誰?’云:‘六祖。’問:‘汝師以何法爲禪定?’師曰:‘妙湛圓寂,體用如如,五陰本空,六塵非有,不出不入,不定不亂,禪性無住離住禪寂,禪性無生,離生禪想,心如虛空,亦無虛空之量。’隍聞此說,未息疑心,遂振錫南行直往曹谿,禮見六祖。祖乃亦如上說,隍於言下大悟。 南嶽思大和尚云:若言學者先須通心,心若得通一切法,一時盡通,聞說淨不生淨念,卽是本自淨,聞說空不取空。譬如鳥飛於空。若住於空,必有墮落之患。無住是本自性體寂,而生其心是照用,卽寂是自性定,卽照是自性慧,卽定是慧體,卽慧是定用,離定無別慧,離慧無別定,卽定之時卽是慧,卽慧之時卽是定,卽定之時無有定,卽慧之時無有慧。何以故?性自如故。如燈光雖有二名其體不別,卽燈是光,卽光是燈,離燈無別光,離光無別燈,卽燈是光體,卽光是燈用,卽定慧雙修不相去離。牛頭融大師絕觀論問云:‘何者是心?’荅:‘六根所觀竝悉是心。’問:‘心若爲?’荅:‘心寂滅’問:‘何者爲體?’荅:‘心爲體。’問:‘何者爲宗?’荅:‘心爲宗。’問:‘何者爲本?’荅:‘心爲本。’問:‘若爲是定慧雙遊?’云:‘心性寂滅爲定,常解寂滅爲慧。’問:‘何者是智?’云:‘境起解是智。’‘何者是境?’云:‘自身心性爲境。’問:‘何者是舒?’云:‘照用爲舒。’‘何者爲卷?’云:‘心寂滅無去來爲卷。舒則彌遊法界,卷則足迹難尋。’問:‘何者是法界?’云:‘邊表不可得名爲法界。’法照禪師云:經云:三阿僧祇百千名號皆是如來異名,卽眞心之別稱也。又經云:萬法不出一心,此義是也。夫縛從心縛,解從心解,縛解從心不關餘事,出要之術唯有觀心乃至若擧一心門,一切唯一心。若一法非心,則是心外有,誰能在心外別制一條者?梵禪師云:若知一切法皆是法,卽得解脫,眼是法色是法。經云:不見法還與法作繫縛,亦不見法還與法作解脫。 藏禪師云:於一切法,無所得者,卽心是道,眼不得一切色,耳不得一切聲。 緣禪師云:譬如家中有大石尋常坐臥,或作佛像心作佛解,畏罪不敢坐,皆是意識筆頭畫作自忙自怕,石中實無罪福。 安禪師云:直心是道。何以故?直念直用更不觀空,亦不求方便。經云:直視不見,直念不思,直受不行,直說不煩。 覺禪師云:若悟心無所屬,卽得道迹,眼見一切色,眼不屬一切色,是自性解脫。經云:一切法不相屬故,心與一切法各不相知。 圓寂尼云:一切法唯心無對,卽自性解脫。經云:一切法不與眼作對。何以故?法不見法法不知法。堯禪師云:了心識性自體恒眞,所緣念處無非佛法。 朗禪師云:凡有所見皆自心現,道似何物而欲修之,煩惱似何物而欲斷之?稠禪師云:一切外緣名無定相,是非生滅一由自心。若自心不心,誰嫌是非,能所俱無卽諸相恒寂? 慧慈禪師云:夫法性者,大道也。法是法身,性是覺性,卽衆生自然性也。是以金剛般若,如大火聚,三昧焰焰諸累莫入,故稱天上天下唯我獨尊。 慧滿禪師云:諸佛說心,令知心相是虛妄法,今乃重加心相深違佛意。又增論議殊乖大理,常齎四卷楞伽經,以爲心要,隨說隨行。宗鏡錄卷第九十七音義坦他伹反平也安也 馱唐佐及又音陀字 脅虛業反胸脅也 挐女加反牽也璨倉案反 跳徒聊反躍也 踉呂張反跳踉 癲都年反病也蹶居月反走也 嵩息弓反山高也 策楚革反謀也 隍胡光反齎祖雞反持也遺也戊申歲分司大藏都監開板
『종경록』 97권(ABC, K1499 v44, p.519a01-522c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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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이미 여섯 명의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했다.
첫 번째 부처님은 비바시불,
두 번째는 시기불,
세 번째는 비사부불,
네 번째는 구류손불,
다섯 번째는 구나함모니불,
여섯 번째가 가섭불이고
석가모니불이 일곱 번째다.
이 일곱 부처님을 총칭해 ‘과거칠불’이라고 하는데 칠불통계게는 과거칠불의 공통적인 가르침이다. 칠불통계게는 문헌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가섭불의 게가 일반적이다. 게송은 아래와 같다.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모든 악을 저지르지 말고, 모든 선을 행해 스스로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0779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