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교의는 무었인가? 한 마디로 요약하면 마음을 청정히 하여 선악을 구분하여

항시 국리민복을 위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아래의 七佛 傳法偈가 대변한다.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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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통계게-과거 일곱 부처님이 공통으로 수지한 게송 - 불교신문

과거 일곱 부처님이 공통으로 수지했다고 일컬어지는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는 모든 부처님이 한결같이 당부한 훈계로, 곧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를 의미한다.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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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이미 여섯 명의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했다.

첫 번째 부처님은 비바시불,

두 번째는 시기불,

세 번째는 비사부불,

네 번째는 구류손불,

다섯 번째는 구나함모니불,

여섯 번째가 가섭불이고

석가모니불이 일곱 번째다.

이 일곱 부처님을 총칭해 ‘과거칠불’이라고 하는데 칠불통계게는 과거칠불의 공통적인 가르침이다.

칠불통계게는 문헌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가섭불의 게가 일반적이다.

게송은 아래와 같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모든 악을 저지르지 말고, 모든 선을 행해 스스로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是諸佛敎

시제불교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가르침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LJug4vfUL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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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칠불(過去七佛)과 전법게(傳法偈)

(아미산 보국사) 과거칠불(過去七佛)과 전법게(傳法偈) 같은 씨족(氏族)의 유대를 존중하고, 조상을 숭배하고, 가계를 계승하며, 씨족의 단결을 꾀하고 소목(昭穆: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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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佛傳法偈

(大藏經  大正最新修訂  第48冊  諸宗部5  宗鏡錄卷第九十七)

第一毘婆尸佛偈云:

제일비파시불게운:

身從無相中受生。

신종무상중수생。몸은 무상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으니

由如幻出諸形像。

유여환출제형상。모든 형상처럼 환상에서 나왔도다

幻人心識本來無。

환인심식본래무。환상 같은 인간의 심식은 본래 空한 것이니

罪福皆空無所住。 

죄복개공무소주。죄와 복도 공한 것이어서 머물 곳이 없도다.

 

第二尸棄佛偈云:

제이시기불게운:

起諸善法本是幻。

기제선법본시환。모든 善法을 지어내는 것도 본시 허깨비요

造諸惡業亦是幻。

조제악업역시환。모든 惡業을 지어내는 것도 또한 환상이로다

身如聚沫心如風。

신여취말심여풍몸은 모였다 흩어지는 물거품 같고 마음은 바람 같은 것

幻出無根無實性。 

환출무근무실성。환상은 생겨난 근거가 없으니 실재하는 그 성품도 없네.

 

第三毘舍浮佛偈云:

제삼비사부불게운:

假借四大以為身。

가차사대이위신。地水火風 잠시 빌려 이 몸을 이루었나니

心本無生因境有。

심본무생인경유。마음은 본시 생명이 없었으나 환경에 따라 생겨나네.

前境若無心亦無。

전경약무심역무앞선 환경이 없었다면 마음 또한 없고

罪福如幻起亦滅。 

죄복여환기역멸좌와 복도 허깨비 같아 나타나는가 하면 금새 사라지네.

 

第四拘留孫佛偈云:

제사구류손불게운:

見身無實是佛見。

견신무실시불견。몸의 실상이 없음을 안다면 이는 부처가 본 것이요

了心如幻是佛了。

료심여환시불료。이 몸이 허깨비임을 안다면 이는 이미 부처로다.

了得身心本性空。

료득신심본성공이 육신과 마음의 본성이 空한 것임을 깨달았거늘

斯人與佛何殊別。 

사인여불하수별이 사람이 부처와 무엇이 다른가?

 

第五拘那舍牟尼佛偈云:

제오구나사모니불게운:

佛不見身知是佛。

불불견신지시불。부처란 그 몸을 볼 수는 없지만 이것이 부처임을 안다.

若實有知別無佛。

약실유지별무불。만약 그 실체를 안다면 부처가 따로 없다.


智者能知罪性空。

지자능지죄성공지혜로운 이는 죄의 본질이 空함을 알기에

坦然不懼於生死。

탄연불구어생사항시 태연하여 생사에 두려움이 없느니라.

 

第六迦葉佛偈云:

제륙가섭불게운:

一切眾生性清淨。

일절중생성청정。허개비로 변화함에 원인도 없고 태어남도 없도다

從本無生無可滅。

종본무생무가멸。모두 자연스레 발현됨이 이와 같다.

即此身心是幻生。

즉차신심시환생모든 法은 자연스레 생겨나지 않는 것이 없으니

幻化之中無罪福。 

환화지중무죄복 허깨비[心身]가 변화하여 생명이 다함도 두려울 것 없네.

 

第七釋迦牟尼佛偈云:

제칠석가모니불게운:

幻化無因亦無生。

환화무인역무생, 일체 중생들은 본성이 청정하여

皆即自然見如是。

개즉자연견여시본시 출생도 없고 소멸함도 없네.

諸法無非自化生。

제법무비자화생。이 몸과 마음은 허깨비로 생겨났으니

幻化無生無所畏。 

환화무생무소외。허깨비로 변화하는 가운데 죄도 복도 없도나.

 

復告摩訶迦葉。

부고마가가섭   

吾有清淨法眼。涅槃妙心。實相無相。

오유청정법안。열반묘심。실상무상。

微妙正法。付囑於汝。無令斷絕。聽吾偈曰。:

미묘정법。부촉어여。무련단절。청오게왈。:

 

法本法無法。

법본법무법。법이라 하는 본래 법은 없는 법이요

無法法亦法。

법법역법。없는 법이란 법도 또한 법이라

今付無法時。

금부무법시이제 없는 법을 부촉하는 때

法法何曾法。

법법하증법법 법이라 하여 어찌 법만 늘리는가

 

西天第一祖摩訶迦葉傳法偈云:

서천제일조마가가섭전법게운:

法法本來法。

법법본래법。

無法無非法。

무법무비법。

何於一法中。

하어일법중

有法有不法。

유법유불법

第二祖阿難傳法偈云:

제이조아난전법게운:

本來付有法。

본래부유법

付了言無法。

부료언무법

各各須自悟。

각각수자오

悟了無無法。

오료무무법

 

https://kabc.dongguk.edu/content/view?dataId=ABC_IT_K1499_T_097 

 

단락/경판 - 불교학술원 아카이브

ABC_IT_K1499_T_097 URL복사 통합뷰어 044_0519_a_01L종경록 제97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부처님의 교법은 이미 분명해졌으므로 조사의 뜻을 진술해야겠다. 불승(佛乘)을 통달한 이는 모두가 분명한 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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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의 게송에서 말했다.

허깨비는 원인 없고 또한 생김 없으며
모두가 곧 자연인데 이렇게 보이나니
모든 법은 모두가 허깨비로 생긴 것
허깨비라 생김 없고 두려워할 것 없네.

다시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말씀하기를 “나에게 있는 청정한 법 눈과 열반의 묘한 마음이며 참 모습과 모양이 없는 미묘한 바른 법을 너에게 부촉(付囑)하노니, 끊어짐이 없게 하라.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나의 게송을 들으라고 했다.

법은 본래 법이라는 법이 없으며
법이 없는 법 역시 법인 것이니
이제 없는 법을 부촉할 때에
법과 법이 어찌 일찍이 법이랴.

서천(西天)의 제1 조(祖) 마하가섭이 법을 전한 게송에서 말했다.

법과 법은 본래가 없는 것이요
없는 법도 법이 아님이 없나니
어찌 하나의 법 가운데서
법이 있고 법이 되지 않음이 있으랴.

제2조 아난(阿難)이 법을 전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본래는 있는 법을 부촉하고서
부촉하고 나서는 없는 법이라 하나니
저마다 스스로가 깨쳐야 하고
깨치고 나면 없는 법도 없는 것이다.

제3조 상나화수(商那和修)가 법을 전한 게송에서 말했다.

법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어서
마음도 없고 법도 없나니
이 마음과 법을 말할 때
이 법은 마음과 법이 아니다.

제4조 우바국다 존자(優波毱多尊者)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마음은 스스로 본래의 마음이요
본래의 마음에는 법이 있는 것 아니니
법이 있고 본래의 마음이 있다면
마음도 아니고 본래의 법도 아니다.

제5조 제다가(提多迦)는 향중(香衆)이라고도 이름하였는데, 처음 우바국다에게로 가서 출가할 적에 존자는 물었다. “마음을 위해 출가하는 것이냐, 몸을 위해 출가하는 것이냐.” 향중이 말했다. “≺나≻가 와서 출가하는 것이요 몸과 마음을 위해서 이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자께서 말씀하시되, “몸과 마음을 위하지 않는다면 다시 누가 출가하는 것이냐.” 향중이 말하되 “무릇 출가란 ≺나≻가 없기 때문이요 ≺나≻가 없기 때문에 곧 마음은 생멸하지 아니하며 마음이 생멸하지 아니하면 곧 항상하고 이미 항상하기 때문에 부처 또한 항상하나니, 마음에는 형상이 없고 그 본체 또한 그러합니다.
존자는 말했다. “너는 마음을 크게 깨쳐 스스로 밝아지면 불법에 의지하여 그 가운데서 항하 모래만큼 많은 중생들을 제도해야 하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법을 부촉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본래의 법인 마음을 통달하면
법도 없고 법이 아님이 없나니
깨치고 나면 깨치지 못한 것과 똑같아서
마음도 없고 법도 없게 된다.
제6조 미차가(彌遮迦)가 법을 부촉하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마음이 없고 얻을 것도 없으며
얻는다 말하여도 법이라 하지 않나니
만일 마음이 마음이 아님을 알면
비로소 마음과 마음의 법을 알리라.

제7조 바수밀(婆須密)이 법을 부촉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마음은 허공의지경과 같고
허공만큼의 법을 보이는 것이니
허공임을 증득하게 되는 때에는
옳음도 없고 그른 법도 없네.

제8조 불타난제(佛陁難提)가 법을 부촉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허공에는 안과 바깥이 없으며
마음의 법 또한 그와 같나니
만일 허공을 분명히 알면
바로 진여의 이치를 통달하리라.

제9조 복타밀다(伏馱密多)존자가 다음과 같이 불타난제 존자에게 게송으로 물었다.

부모는 나와 친한 이가 아니며
누가 가장 친한 이가 됩니까
모든 부처님은 나의 도가 아니며
무엇이 으뜸가는 도가 됩니까.

게송으로 대답했다.

너의 말은 마음과 친하는지라
부모로서는 비할 것 아니며
너의 행(行)은 도와 계합되는데
부처님들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바깥에서 구하는 것 모양 있는 부처라
너와는 서로가 비슷하지 않나니
너의 본래 마음 알고자 하면
합한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로 인하여 도를 깨쳤다.
법을 부촉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진리에는 본래 이름이 없되
이름으로 인하여 진리가 드러나고
진실한 법을 받고 얻게 되면
참됨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제10조 협(脇)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참된 체성은 저절로 진실하며
진실로 인하여 도리 있다 말하나니
진실한 법을 알아 얻으면
가는 것도 없고 그치는 것도 없다.

제11조 부나야사(富那夜奢)는, 어느 때 협존자가 어떤 나무 아래서 손으로 나무 아래의 땅을 가리키면서 대중들에게 말했다. “이 땅이 만일 변하여 금빛이 되면 당연히 성인이 있어서 이 모임에 들어올 것이다”고 했는데, 말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잠깐만에 금빛으로 되었으므로, 존자는 손을 들면서 모임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며 말했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야사가 말했다. “나의 마음은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머물러 있었던가.” “나의 마음은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대는 일정하지 아니한가.” “모든 부처님 역시 그러합니다.” “그대는 모든 부처님이 아니니라.” “모든 부처님 역시 아닙니다”고 했다.
그때, 야사는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스님께선 금빛의 땅에 앉으셔서
언제나 진실한 이치 말씀하셨으며
광명을 돌이켜서 저를 비추어
3마지(摩地)에 들게 하셨나이다.

또 법을 전한 게송에서 말했다.

미혹[迷]ㆍ깨침[悟]은 마치 숨음과 드러남 같고
밝음ㆍ어둠은 서로 여의지 아니한다
이제 숨음과 드러남의 법을 부촉하노니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제12조 마명(馬鳴)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숨음ㆍ드러남이 곧 본래의 법이요
밝음ㆍ어둠은 원래 둘이 아니다
이제 깨쳐 마친 법을 부촉하노니
취할 것도 아니고 버릴 것도 아니니라.

제13조 비라(毘羅)존자도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숨은 법도 아니고 드러난 법도 아닌 것
이것을 참된 실제(實際)라 하나니
이 숨음ㆍ드러남의 법을 깨치면
어리석은 것도 아니고 지혜로운 것도 아니다.

제14조 용수(龍樹)존자가 교화를 위해 남인도(南印度)에 갔더니, 그 나라 사람들은 대개가 복업을 닦으면서 부처의 도리는 알지 못했고 조그마한 변론(辯論)만을 행하면서 큰 지혜는 갖추지 못했었는데, 그들은 불성(佛性)에 대해서 물었다.
‘보시로 우리들은 복업을 구하는 것이요 불성을 아는 것이 아니니, 당신이 불성을 아신다면 우리를 위해 말씀해 주십시오” 했으므로, 스님은 말했다. “그대들이 도를 배우고자 하면 먼저 아만(我慢)을 없애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야 불성을 얻느니라.”
대중들이 말하였다. “불성은 큽니까, 작습니까.” “그대들이 알 바도 아니며, 크고 작은 것으로 말할 것도 아닙니다. 만일 크거나 작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크고 작은 것이요 불성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조그마한 변론을 버리고 큰 바다로 돌아가고 싶습니다”고 하자, 용수는 곧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면서 대중들에게 기이한 모습을 나타내며 몸을 달과 같이 하였으므로 자리 위에서는 설법하는 소리만 들릴 뿐 그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중 속에 제바(提婆)라고 하는 장자가 있다가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이 상서를 아십니까.” 그 대중들은 말하였다. “큰 성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고 했다.
그때, 제바의 마음 근본은 일찍부터 청정했으므로 역시 그 모양을 보고서 잠자코 계합되었는지라, 대중에게 말하였다. “스님께서 불성의 이치를 나타낸 것이요 스님의 몸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양 없는 삼매[無相三昧]는 형상이 마치 만월(滿月)과 같은 것이어서 불성의 이치입니다”고 했다.
말을 마치자마자, 스님은 본래의 몸을 자리 위에 나타내면서 게송으로 말했다.
몸으로 만월의 형상을 나타내서
부처님들 체성을 표시한 것이니
법을 설하면서 그 형상이 없었음은
변론으로써 함이요 소리와 빛깔은 아니니라.

또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숨음ㆍ드러남의 법을 밝히기 위해
바야흐로 해탈의 도리를 설했나니
법에서는 마음이 증득되지 않는지라
성냄도 없고 기쁨도 없느니라.

다음은 제15조 가나제바(迦那提)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이다.

본래 법을 전할 사람에 대하여
그를 위해 해탈의 도리 설한 것이니
법에서는 실로 증득함이 없는지라
마지막도 없고 시작도 없느니라.

제16조 나후라(羅睺羅)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법에서는 실로 증득함이 없는지라
취하지도 아니하고
여의지도 않나니
법은 있고 없는 모양이 아니거늘
안과 바깥이 어떻게 일어나랴.

제17조 승가난제(僧迦難提)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마음 자리는 본래 생김이 없어
종자로 인하여 연(緣)을 좇아 일어난다
연ㆍ종자는 서로가 방해하지 않으며
꽃과 열매 또한 다시 그러하니라.

제18조 가야사다(伽倻舍多)는, 처음에 제17조 승가난제가 그의 집에 갔더니 갑자기 한 아들이 손에 구리 거울을 가지고서 스님에게 온 것을 보고, 존자는 물었다.
“너는 잘 모르는구나. 아주 어린아이로 보이는데 ‘나는 백 살이오’ 하고 대답하니, 그것은 도리가 아니로다.” 그 아들이 대답했다. “나는 도리를 알지는 못하며, 꼭 백 살입니다.” “너는 좋은 근기로다.” “부처님의 게송에서 이르되

만일 사람이 백 살을 살면서
부처님들 근기를 알지 못하면
설령 하루를 살면서도
결단하여 알게 됨만 못하느니라

고 했습니다”고 했다.
이때, 존자는 공경하면서 이는 성인인 줄 깊이 알고서는 또 물었다. “네가 가진 이 거울은 무엇을 비유하고 있느냐.” 하자, 그때에 동자는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모든 부처님의 크고 둥근 거울은
안팎에 흠이나 흐림이 없으므로
두 사람이 똑같이 볼 수가 있으며
마음과 눈이 모두 비슷합니다.

부모는 그 아들의 기이한 행동을 보고 마침내 출가를 허락했으므로, 존자는 거느리고 유람하며 교화하다가 어떤 옛 절에 가서 계(戒)를 받게 하고 이름을 가야사다라고 지었다.
그 불전 위에 달린 구리 방울이 바람에 흔들려 소리가 났으므로 존자는 물었다. “저것은 바람이 우느냐, 방울이 우느냐, 구리가 우느냐.” 그는 대답했다. ‘저의 마음이 울 뿐이요 바람이나 구리나 방울에서가 아닙니다.” “바람이나 구리나 방울이 아니고 나의 마음이란 그 누구인고.” “두 가지 모두가 고요하나 3매야(昧耶)는 아닙니다.” “장하도다. 참된 비구여, 모든 부처님의 이치를 잘도 알았구나. 모든 법의 요의(要義)를 잘도 말하도다. 진실한 이치를 잘도 알았도다”고 했다.
또 말했다. “내 이제 이 법안장(法眼藏)을 너에게 부촉하노니, 너는 나의 게송을 받고 교화해야 하느니라”고 하고, 게송으로 말했다.

마음 자리는 본래 생김이 없어
종자로 인하여 연을 좇아 일어난다
연ㆍ종자는 서로가 방해하지 않으며
꽃과 열매 또한 다시 그러하니라.

가야사다는 구마라다(鳩摩羅多)에게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자가 있고 마음 자리 있어서
인(因)과 연(緣)이 능히 싹을 내나니
연에서는 서로가 장애하지 아니하여
생겨야 하면 생기고 생기지 아니한다.

제19조 구마라다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성품 위에선 본래 생김이 없지만
대경 위해 사람의 설명을 구하나니
법에서는 이미 얻음이 없거늘
어찌하여 결단과 결단하지 않음을 품으랴.

제20조 사야다(闍夜多)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은 다음과 같다.

말끝에서 생김이 없음에 계합되면
법계의 성품과 같아지나니
만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으면
현상[事]과 본체[理]를 통달하여 마친다.

제21조 바수반두(婆修槃頭)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거품ㆍ환상은 같아서 장애가 없거늘
어떻게 깨쳐서 알지 않으랴
법을 통달하면 그 안에 있어서
지금도 아니고 옛도 아니니라.

제22조 마나라(摩挐羅)가 학륵(鶴勒)존자에게 법을 전하는 게송을 부촉한 뒤에, 곧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솟구쳐 허공에서 18변(變)을 짓고 나서 도로 본래 자리로 돌아와 손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변화로 하나의 샘이 되게 하고는 게송으로 말했다.

마음 자리는 청정한 샘이며
용은 온갖 것을 적셔주나니
땅으로부터 솟아 나와서는
10방(方)에 두루 차며 구제하느니라.

또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마음은 온갖 경계 따라 굴리고
굴리는 곳 실로 그윽하나니
흐름을 따르면서 성품임을 인정하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느니라.

제23조 학륵존자가 법을 부촉하고 나서, 곧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솟구쳐 허공에서 18변을 지은 뒤에 도로 본래 자리로 돌아와서 고요히 멸도(滅度)하였다. 그러므로 그때의 대중들은 사리를 나누어 저마다 탑을 세우려고 화장을 한 뒤에 사리를 나누려 하자, 그때에 존자는 몸을 나타내면서 게송으로 설했다.

하나의 법이 온갖 법이요
온갖 법은 하나의 법으로 포섭하는 것
나의 몸은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온갖 탑에 다 나누랴.

또 법을 전하는 게송에 말했다.

심성임을 인정하게 되는 때에는
불가사의라고 말할 수 있나니
또렷또렷하면서도 얻는 바가 없고
얻는 때엔 안다고 말하지 않느니라.

제24조 사자(師子)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지견(知見)이라고 바로 말을 할 적에
지견은 모두가 마음이니
그 마음이 곧 지견인 것이요
지견이 곧 지금까지니라.
제25조 바사다(婆舍多)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성인은 지견을 말하였지만
경계에 당하면 이것 아님이 없다
나는 이제 참된 성품을 깨친지라
도(道)도 없고 또한 진리도 없다.

제26조 불여밀다(不如密多)존자의 법을 전하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참 성품은 마음 자리에 간직해 있되
머리도 없고 또한 꼬리도 없나니
인연에 응(應)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되
방편을 지혜라 부르느니라.

제27조 반야다라(般若多羅)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마음 자리는 모든 종자를 내되
현상[事]으로 인하고 또 본체[理]로 인하나니
결과 차면 보리가 원만하여져서
꽃이 피고 세계가 생기느니라.

서천(西天)의 바라제(波羅提)존자는 이견왕(異見王)을 교화하기 위해 신통력을 나타내어 구름을 타고 그 왕의 궁전 앞에 가 닿자, 그때 대왕은 구름을 탄 이에게 물었다.
“당신은 삿된 것을 위해서입니까, 바른 일을 위해서입니까.” 바라제존자가 대답했다. “나는 삿되거나 바른 것이 아니면서 바르고 삿된 일에 왔습니다. 대왕이 만일 바르다면 나는 삿되거나 바름이 없습니다.”
왕이 또 물었다. “어떤 이가 부처님입니까.” 바라제가 대답했다. “성품을 보면 바로 부처님입니다.” “스님은 성품을 보셨습니까.” “나는 불성을 보았습니다.” “성품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품은 작용함에 있습니다.” “이 무슨 작용이기에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까.” ‘지금에도 작용을 나타내건마는 왕 자신이 알지 못합니다.“ ”스님은 이미 보신 것이라 작용이 있다 하시지만 나의 처소에서도 작용하고 있습니까.“ ”왕이 만일 작용한다면 눈앞의 것이 모두가 그것이지만 왕이 만일 작용하지 않으시면 그 본체도 보기 어렵습니다.“ 왕이 가로되 ”만일 작용하게 되면 몇 군데서 출현하는 것입니까.“ 스님이 말씀하시되 ”만일 작용이 출현된 때는 그 여덟 군데가 있습니다.”고 하고, 구름 끝에 우뚝 서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胎) 안에 있을 때는 몸이라 하고
세간에 있을 때는 사람이라 하며
눈에 있을 때는 본다고 하고
귀에 있을 때는 듣는다고 한다.

코에 있을 때는 냄새를 알고
입에 있을 때는 말을 하며
손에 있을 때는 붙잡게 되고
다리에 있을 때는 걸으며 달린다.

두루 나타나면 다 함께 법계를 감싸고
거두어들이면 작은 티끌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나니
아는 이는 불성임을 알되
모르는 이는 정혼(精魂)이라고 부른다
『종경록』 97권(ABC, K1499 v44, p.519a01)

 

https://blog.daum.net/hyundam21/7191498

 

과거칠불[過去七佛] - 오도송悟道頌

과거칠불[過去七佛] - 오도송悟道頌 ◈ 제1존 비바시불 Vipasyin - 毘婆尸佛 <淨觀佛> ──────────────────   신종무상중수생   身從無相中受生   유여환출제형상   猶如幻出

blog.daum.net

*'오도송'은 '傳法偈'의 잘못임.

 

https://ko.wikipedia.org/wiki/%EA%B3%BC%EA%B1%B0%EC%B9%A0%EB%B6%88

 

과거칠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과거칠불(過去七佛)은 석가모니까지(석가를 포함해) 등장한 7명의 부처를 말한다. 오래된 순서로부터 비파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

ko.wikipedia.org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4564

 

과거칠불(過去七佛)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비바시불(毘婆尸佛)·시기불(尸棄佛)·비사부불(毘舍浮佛)·구류손불(拘留孫佛)·구나함불(拘那含佛)·가섭불(迦葉佛)·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가리킨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불국토설(新羅

encykorea.aks.ac.kr

 

 

 

 

 

https://www.youtube.com/watch?v=LJug4vfULgE 

 

 

http://www.drbachinese.org/online_reading/sf_others/seven_buddhas_verses/seven_buddhas_verses.htm

 

七佛傳法偈淺釋 上宣下化老和尚講述

毗婆尸佛偈 ◎ 宣公上人一九九四年四月三日 開示於國際譯經學院 尸棄佛偈 毗舍浮佛偈 ◎ 宣公上人一九九四年四月二十一日 開示於國際譯經學院 (編註:以下四首傳法偈,上人未加註解。今

www.drbachinese.org

 

毗婆尸佛偈

身從無相中受生,猶如幻出諸形象。
幻人心識本來無,罪福皆空無所住。

몸은 무상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으니

모든 형상처럼 환상에서 나왔도다

환상 같은 인간의 심식은 본래 한 것이니

죄와 복도 공한 것이어서 머물 곳이 없도다.

 

◎ 宣公上人一九九四年四月三日
開示於國際譯經學院

《七佛傳法偈》是很重要的,每一首偈頌都是說身心是虛妄的,不要認真。身是四大假合,心也是虛無飄渺,沒有什麼形象的。所以我們不要認假為真,執著我們的身心;樣樣都想佔便宜,樣樣不想吃虧,其實這是被身體害得我們生生世世,造無量無邊的罪業。

可是你若真正明白做人的道理了,那罪業本空。罪業本來也沒有什麼,這都是人的執著,所以才起惑、造業、受報;你若沒有惑,就不會造業、受報了。惑就是不明白,也就是無明。第一首傳法偈是毗婆尸佛偈:

身從無相中受生 猶如幻出諸形象

幻人心識本來無 罪福皆空無所住

몸은 무상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으니

모든 환상 같은 것도 모두 형상에서 나왔도다

환상 같은 인간의 心識은 본래 한 것이니

죄와 복도 모두 공한 것이어서 머물 곳이 없도다.

 

「身從無相中受生」:這個身從什麼地方來?它沒有一個形象,沒有一個實體,是四大和合而成為身的。所以說身從無相中受生,它就生出來了。

「猶如幻出諸形象」:就好像變戲法、變魔術的那個人,本來沒有這麼個東西,他變化出一個來。那麼變化出來的是真的嗎?不是,是假的。我們這個身體亦復如是,所以第二句說,猶如就是好像,幻出諸形象,是從虛幻不實這裡現出來,變化出這麼一個形象,這是說身體不是真的。

既然不是真的,為什麼有人罵你,你受不了?打你,你更受不了;讚歎你一句,你就高興得不得了;誹謗你一句,你就發脾氣。為什麼要這樣呢?這不是被這假的把真的給矇混住了嗎?你本來無一物,何處惹塵埃呢?怎麼有這麼多麻煩呢?這個麻煩是你自己找來的。有人罵你,你拿它當唱唱不好嗎?唉!他說日本話呢,我不懂。啊!他說西班牙話,我也不懂;說葡萄牙話,我也不懂他唱唱什麼。

他罵你,你不會罵人,那麼還有什麼叫罵呢?他罵就罵了,你拿它當音樂聽,不也很好的嘛!啊?不需要發脾氣。有人打你,就當做你走路沒小心,撞到門框上了,這不可以嗎?你撞到門框上,撞得痛了,那你找誰去再打一下?你打那個門框,你手又痛了;你若不打,那根本沒有事嘛,痛一陣怕什麼呢!

「幻人心識本來無」:幻化的人沒有心,沒有識,也沒有知覺。

「罪福皆空無所住」:罪和福都是空的,什麼叫罪?什麼叫福?你不應該執著到這個上。你執著我這個身體,又執著我這個心,這簡直是大錯而特錯;你若能不執著,你說這多自由、多好!不為這個枷鎖所枷著。

毗婆尸佛的傳法偈,就傳這個法,教你認識身心本來是虛幻的。

 

尸棄佛偈

起諸善法本是幻,造諸惡業亦是幻。
身如聚沫心如風,幻出無根無實性。

七佛中的第二尊佛,尸棄佛的傳法偈是這麼說的:

「起諸善法本是幻」:你以為你做善事這是真的?善事也是假的,你不要執著這個善事,所以起諸善法本是幻,本來也是虛幻的。

「造諸惡業亦是幻」:造這個惡業也是虛妄幻化的,它都沒有實體,沒有形相的。

「身如聚沫心如風」:這個身也是假的,它好像海裡那個泡沫似的,你看著有,你去一碰它,沒有了。心如風,心就像颳一陣風似的。「幻化無根無實性」,它沒有一個根的,找不著根。什麼是心的根,什麼是身的根?你找不著,沒有實在的一個東西,沒有實體。

所以由這個傳法偈來看,就是要我們人沒有身見,沒有心見,沒有這些個邊見,虛無飄渺這些個執著,你說這是不是愚癡呢?

我們人修行,如果能把身體看假了,把心也看得是虛妄了,那麼執著就沒有了。沒有我見、人見、眾生見、壽者見;沒有我相、人相、眾生相、壽者相了。就因為看不空,才什麼都有了;你若能看得空了,什麼相也沒有,連自己都沒有,怎麼又會有個人相,又有眾生相,又有壽者相呢?這都是我們人自生分別呢!

 

毗舍浮佛偈

假借四大以為身,心本無生因境有。
前境若無心亦無,罪福如幻起亦滅。

◎ 宣公上人一九九四年四月二十一日
開示於國際譯經學院

毘舍浮佛是七佛中的第三位,他的傳法偈:

 

假藉四大以為身 心本無生因境有

前境若無心亦無 罪福如幻起亦滅

這首偈頌就是說我們不要把身體認得那麼真。這個身體是四大和合而成的,熱力屬火大,搖動就是風大,有濕性就是水大,又有堅固性就是地大;這是地水火風,四大和合而成一個身體。所以說:

「假藉四大以為身」:我們假藉地水火風這個四大來成的一個身體。

「心本無生因境有」:我們這個心本來不生不滅的,可是因為你著到境界上了,也就有這個生滅心了。所以說:

「前境若無心亦無」:前面那個境界若沒有了,心也沒有了,心是因為境界而有的。

「罪福如幻起亦滅」:所以罪也是虛幻的,福也是虛幻的。罪福如幻就像泡沫,電光石火一樣;雖然罪福起了還是滅的,這是毗舍浮佛說的偈頌。

我們學佛的人,對七佛偈頌應該熟讀,不要忘了。這每一首偈頌都是叫你不要執著身心;我們一執著身心,就有障礙了。為什麼起這個障礙呢?就因為認假為真,認賊做子,認賊做父。那麼這樣子,所以古人說:「一念瞋心起,八萬障門開」,你看看這多厲害!就因為你一念的瞋心起來,這八萬的障門都來障著你了;你若不起瞋心呢,八萬障門自然都化為烏有了,所以這是各人要特別注意的。

所以一切唯心造,就是在這一點要認識;境界來了,這都是考驗,一種修道必然經過的步驟。那麼境界來了,我們一考驗就考不上,落選了,這就是平時功夫沒用好,所以到了緊要的關頭就手忙腳亂,無所措手足了。我們修道的人要注意這一點,要認識境界。

(編註:以下四首傳法偈,上人未加註解。今刊出偈頌原文,方便讀者閱讀。)

 

拘留孫佛偈

見身無實是佛身,了心如幻是佛幻。
了得身心本性空,斯人與佛何殊別。

拘那含牟尼佛偈

佛不見身知是佛,若實有知別無佛。
智者能知罪性空,坦然不怖于生死。

迦葉佛偈

一切眾生性清凈,從本無生無可滅。
即此身心是幻生,幻化之中無罪福。

釋迦牟尼佛偈

法本法無法,無法法亦法。
今付無法時,法法何曾法。

법이라 하는 본래 법은 없는 법이요

없는 법이란 법도 또한 법이라

이제 없는 법을 부촉하는 때

법 법은 어찌한 거듭된 법인가

 

 

https://www.youtube.com/watch?v=1c0P8njkwG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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