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무절공(武節公) 황형(黃衡)은 무장(武將) 출신으로, 또한 글과 글씨에 능했다.
경오년(중종 5, 1510)에 왜구를 진압하고 몰운대(沒雲帶)에 올라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建節高臺起大風
건절고대기대풍 높은 대에 깃발 세우니 큰 바람 이는구나
海雲初捲日輪紅
해운초권일륜홍 바다 구름 갓 걷히고 해는 둥실 붉어라
倚天撫劍頻回首
의천무검빈회수 하늘에 비겨 칼 어루만지며 자주 고개 돌리니
馬島彈丸指顧中
마도탄환지고중 탄환만한 대마도가 가까이 보이는구나
조어(造語)가 기이하고 장엄하여 마치 그 사람을 보는 듯하다.
어찌 인재가 옛사람에게 못 미치랴.
무절(武節)의 이름은 형(衡)이요 창원인이다. 무과급제로 공조 판서를 지냈다.
시안(諡案)을 상고컨대 형의 시호는 장무(莊武)이지, 무절이 아니었다.
103.
《승암시화(升庵詩話)》에 명초(明初) 이래 재상의 업적을 논함에 있어 유성의
(劉誠意 성의는 유기(劉基)의 봉호)를 제일로 치켜세웠다.
성의가 실로 어질긴 하지만 재상의 업적에 대해서는 소문난 게 없다.
영락(永樂) 연간에는 하원길(夏原吉)을 제일로 삼고 삼양(三楊 양사기(楊士奇)
양영(楊榮) 양보(楊溥))은 그 축에 들지 않았으니 그 의논 또한 온당치 못하다.
이 문달공(李文達公 문달은 이현(李賢)의 시호)이 그를 헐뜯어 심지어는 문달이
나윤(羅倫)을 내쳤으니, 비록 흠이 됨을 면할 수는 없으나, 그 공정한 것만은 숨
길 수 없는 것이다. 정덕(正德) 연간에 이르러는 거드름스럽게 자기 아버지를
제일로 쳤다. 젊어서는 비록 괜찮은 사람이었으나 입각(入閣)하여서는 임금의
외척을 연줄로 삼았으니 이미 올바른 선비는 아닌데, 공평하여 사심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104.
가정(嘉靖) 이래로 명정승은 문정공(文正公) 사천(謝遷)과 충의공(忠毅公)
양부(楊傅)가 더욱 드러나게 유명했는데, 소인(小人)도 제일 많았다.
계악(桂萼)ㆍ방헌부(方獻夫)ㆍ장총(張璁)ㆍ엄숭(嚴嵩)ㆍ이본(李本)이 모두
소인들인데, 그 중 엄숭은 은총을 20여 년이나 독차지했다.
그 뒤에는 소사
(少師) 서계(徐階)ㆍ소부(少傅) 이춘방(李春芳)이 다 명정승인데, 서소사(徐
少師)는 남들이 사마공(司馬公)에 비겼으니, 오랫동안 논정(論定)하는 일을
담당했었다. 융경(隆慶) 이래로 고공(高拱)ㆍ장거정(張居正)은 모두 약골(弱骨)
이었으며 신시행(申時行)은 기롱을 면할 수 없었고, 승상(丞相) 마자강(馬自强)
ㆍ소부(少傅) 허국(許國)ㆍ소보(少保) 왕석작(王錫爵)이 모두 괜찮은 사람이었
으나 그들의 사업은 삼양(三楊)에게 비기면 누가 나은지는 모르겠다.
인재가 날로 저하되니 개탄스러운 노릇이다.
105.
우리나라 명상(名相)은 황ㆍ허(黃許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를 제일로 삼는다.
세상에서는 더러 전조(前朝 고려(高麗))의 과제(科第)를 병폐로 여기기도 하는
데, 과연 그 뒤에는 별로 이름난 사람이 없었다. 중종 때 문익공(文翼公) 정광필
(鄭光弼)은 전인(前人)에 부끄럽지 않다.
황희(黃喜)의 자는 구부(懼夫)이고 호는 방촌(厖邨)인데 장수인(長水人)이다.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익성(翼成)으로 세종묘정(世宗廟庭)에 배향(配享)
되었다. 허조(許稠)의 자는 중통(仲通)이고 호는 경암(敬庵)인데 하양인(河陽人)이
다.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文敬)으로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정광필(鄭光弼)의 자는 사협(士協)이고 호는 수부(守夫)인데, 동래인(東萊人)이다.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고 중종묘정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