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백대붕(白大鵬)은 천한 종으로 중의 대열에 끼었다. 시를 잘 하였으므로 우리 중형과

승지(承旨) 심희수(沈喜壽)가 다 대등한 벗으로 사귀었는데,

秋天生薄陰

추천생박음 가을 하늘에 엷은 그늘 어리어

華岳影沈沈

화악영침침 화악의 그림자 침침해라

라는 시는 우리 중형이 칭찬해 마지않았다. 우리 백형을 따라 일본에 오간 일이 있으며,

아름다운 시가 매우 많다.

백대붕(白大鵬)은 전함사(典艦司)의 종이다. 심희수(沈喜壽)의 자는 백구(伯懼)이고 호

는 일송(一松)으로 청송인(靑松人)이다.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10. 맺음말

내가 어려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형님들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겨

차마 다그치거나 나무라지 않았기 때문에 게을러 빠져서 독서에 힘쓰지 않았다,

차츰 자라서는 남들이 과거하는 것을 보고 좋게 여겨 덩달아 해 보았으나, 글치레나 하는

것이 장부의 할 짓은 아니었다. 이제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으니, 세상에 나갈 뜻은 이미

사그라졌다. 10년 글읽기로 작정했으나, 아, 그 또한 늦었도다.

《학산초담(鶴山樵談)》 1부(部)를 짓는다.

명 신종(明神宗) 21년 계사년 양월(陽月) 연등(燃燈)한 뒤 사흘 만에 교산자(蛟山子)는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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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요즘 스님으로 시 잘 쓰는 사람이 많지 않는데, 유정산인(惟政山人)은 당(唐) 나라

구승(九僧)의 유를 배워 시가 몹시 맑고 고고하였다. 행사(行思)도 자못 좋은 시구

가 있어서 '상서로운 오색구름 아롱지니 나물 먹는 중이 아니다[慶雲爛熟非筍蔬]'

라는 구가 있다. 요즘 홍정(弘靜)이란 분이 또한 시를 잘하여 '스님을 칭송하다[送僧]'

란 시가 있었는데 우리 중형(仲兄)이 몹시 칭찬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去年別紅葉秋江波

거년별홍엽추강파 지난 해 헤어질 땐 가을 강물에 단풍 지더니

今年別落梅春山阿

금년별락매춘산아 올해 작별에는 봄 산언덕에 매화가 지네

波杳杳山阿隔

파묘묘산아격 물결은 아득하고 산언덕은 가렸는데

紅葉落梅愁奈何

홍엽낙매수나하 단풍잎 지는 매화 이 시름 어이하리

유정(惟政)의 호는 송운(松雲)이다. 행사(行思)와 같이 일본에 사신갔었다.

이 두 분의 시가 같이 《기아(箕雅)》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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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단간공(端簡公) 정효(鄭曉)의 오학편(吾學編)에 우리나라가 여진(女眞) 이만주(李滿住)를

정벌한 일의 본말(本末)이 아주 자상히 실려 있는데, 강순(康純)ㆍ어유소(魚有沼)ㆍ남이

(南怡)의 이름을 대서특필하였다. 이 세 사람은 진실로 장군감으로 국사(國史)에 그 이름이

드러났으니 이보다 큰 영광이 무엇이겠는가?

강순(康純)의 자는 태초(太初)요 신천인(信川人)이다. 음관으로 좌의정을 지냈고 남이(南怡)

의 옥사(獄事)에 죽었다.

어유소(魚有沼)는 충주인(忠州人)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정장(貞莊)

이다.

남이(南怡)는 의령인(宜寧人)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조판서를 지냈다. 의산위(宜山尉) 남휘

(南暉)의 손자(孫子)이고 익평(翼平) 권람(權擥)의 사위로 유자광(柳子光)의 무고에 의해 살해

되었다. 남이의 정남(征南)이란 절구는 다음과 같다.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석마도진 백두산 돌은 칼 갈아 닳아지고

豆滿江流飮馬無

두만강류음마무 두만강 물은 말 먹여 마르리라

男兒二十未平北

남아이십미평북 사나이 스물에 북을 정벌치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107.

척 총병(戚總兵 척계광(戚繼光)을 가리킴)은 위명(威名)과 사업이 남의 이목에 번쩍거릴뿐

더러 또한 시문에 능하여 이창명(李滄溟)의 무리가 치켜세웠다. 임회후(臨淮侯) 이언공(李

言公)의 자(字)는 유인(惟寅)인데, 또한 시문에 능하여 다음과 같은 시가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風捲潮聲喧島嶼

풍권조성훤도서 바람은 밀물소리 휘몰아 섬들 떠들썩하고

日斜帆影上樓臺

일사범영상누대 해에 비낀 돛 그림자 누대에 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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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무절공(武節公) 황형(黃衡)은 무장(武將) 출신으로, 또한 글과 글씨에 능했다.

경오년(중종 5, 1510)에 왜구를 진압하고 몰운대(沒雲帶)에 올라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建節高臺起大風

건절고대기대풍 높은 대에 깃발 세우니 큰 바람 이는구나

海雲初捲日輪紅

해운초권일륜홍 바다 구름 갓 걷히고 해는 둥실 붉어라

倚天撫劍頻回首

의천무검빈회수 하늘에 비겨 칼 어루만지며 자주 고개 돌리니

馬島彈丸指顧中

마도탄환지고중 탄환만한 대마도가 가까이 보이는구나

조어(造語)가 기이하고 장엄하여 마치 그 사람을 보는 듯하다.

어찌 인재가 옛사람에게 못 미치랴.

무절(武節)의 이름은 형(衡)이요 창원인이다. 무과급제로 공조 판서를 지냈다.

시안(諡案)을 상고컨대 형의 시호는 장무(莊武)이지, 무절이 아니었다.

103.

《승암시화(升庵詩話)》에 명초(明初) 이래 재상의 업적을 논함에 있어 유성의

(劉誠意 성의는 유기(劉基)의 봉호)를 제일로 치켜세웠다.

성의가 실로 어질긴 하지만 재상의 업적에 대해서는 소문난 게 없다.

영락(永樂) 연간에는 하원길(夏原吉)을 제일로 삼고 삼양(三楊 양사기(楊士奇)

양영(楊榮) 양보(楊溥))은 그 축에 들지 않았으니 그 의논 또한 온당치 못하다.

이 문달공(李文達公 문달은 이현(李賢)의 시호)이 그를 헐뜯어 심지어는 문달이

나윤(羅倫)을 내쳤으니, 비록 흠이 됨을 면할 수는 없으나, 그 공정한 것만은 숨

수 없는 것이다. 정덕(正德) 연간에 이르러는 거드름스럽게 자기 아버지를

제일로 쳤다. 젊어서는 비록 괜찮은 사람이었으나 입각(入閣)하여서는 임금의

외척을 연줄로 삼았으니 이미 올바른 선비는 아닌데, 공평하여 사심이 없다고

수 있겠는가?

104.

가정(嘉靖) 이래로 명정승은 문정공(文正公) 사천(謝遷)과 충의공(忠毅公)

양부(楊傅)가 더욱 드러나게 유명했는데, 소인(小人)도 제일 많았다.

계악(桂萼)ㆍ방헌부(方獻夫)ㆍ장총(張璁)ㆍ엄숭(嚴嵩)ㆍ이본(李本)이 모두

소인들인데, 그 중 엄숭은 은총을 20여 년이나 독차지했다.

그 뒤에는 소사

(少師) 서계(徐階)ㆍ소부(少傅) 이춘방(李春芳)이 다 명정승인데, 서소사(徐

少師)는 남들이 사마공(司馬公)에 비겼으니, 오랫동안 논정(論定)하는 일을

담당했었다. 융경(隆慶) 이래로 고공(高拱)ㆍ장거정(張居正)은 모두 약골(弱骨)

이었으며 신시행(申時行)은 기롱을 면할 수 없었고, 승상(丞相) 마자강(馬自强)

ㆍ소부(少傅) 허국(許國)ㆍ소보(少保) 왕석작(王錫爵)이 모두 괜찮은 사람이었

으나 그들의 사업은 삼양(三楊)에게 비기면 누가 나은지는 모르겠다.

인재가 날로 저하되니 개탄스러운 노릇이다.

105.

우리나라 명상(名相)은 황ㆍ허(黃許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를 제일로 삼는다.

세상에서는 더러 전조(前朝 고려(高麗))의 과제(科第)를 병폐로 여기기도 하는

데, 과연 그 뒤에는 별로 이름난 사람이 없었다. 중종 때 문익공(文翼公) 정광필

(鄭弼)은 전인(前人)에 부끄럽지 않다.

황희(黃喜)의 자는 구부(懼夫)이고 호는 방촌(厖邨)인데 장수인(長水人)이다.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익성(翼成)으로 세종묘정(世宗廟庭)에 배향(配享)

되었다. 허조(許稠)의 자는 중통(仲通)이고 호는 경암(敬庵)인데 하양인(河陽人)이

다.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文敬)으로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정광필(鄭光弼)의 자는 사협(士協)이고 호는 수부(守夫)인데, 동래인(東萊人)이다.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고 중종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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