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5~8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제563주년 한글날을 기념하여 제1회 세계문자올림픽대회(The 1st World Alphabet Olympic)가 열렸다. 아마도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문자올림픽대회가 열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한글이 최고 문자로 평가되어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2위 은메달은 이태리의 로마자가, 그리고 3위 동메달은 희랍 글자에 돌아갔다. 이렇게 한글은 동서양의 모든 문자를 제치고 1위에 등극한 것이다.
세계문자올림픽대회는 글로벌 신학대학원 배순직 박사의 주도로 개최되었고 한글학회가 후원하는 국제 행사였다. 정부나 기업의 지원이 전혀 없이 순수하게 모금으로 대회를 치루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끝까지 포기하거나 연기하지 않고 예정대로 대회를 치루어 대회 조직위 관계자에게 먼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어문 관련 학술단체가 아닌 종교 단체가 이러한 세계 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겨운 일인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배순직 선생은 지난 24년간 전 세계를 다니며 포교와 신학 강의를 하며 여러 나라 문자의 현황을 살피는 과정에서 한글의 우수성을 새삼 깨닫고 이러한 세계문자대회를 계획하셨다고 한다.
세계문자학회에 따르면 지난 10월 1일부터 4일까지 태국 방콕 엠베서더 호텔에서 제2회 세계문자 올림픽대회가 열렸다. 이번 세계 문자 올림픽 대회는 세계 27개국 문자(한국, 영어, 러시아, 독일, 폴란드 우크라이나, 베트남, 터키, 셀비아, 불가리아, 아이슬란드, 에티오피아, 몰디브, 우간다, 포르투갈, 그리스, 스페인, 남아공, 인도,( 울드, 말라야람, 구자라티, 푼자비, 말라시, 오리아, 벵갈리, 캐나다)가 경합을 벌였다. 심사에는 미국, 인도, 수단, 스리랑카, 태국, 포르투갈 등 6개국이 참여했다.
각 나라의 학자들은 이번 대회에서 30여 분씩 자국의 고유문자 우수성을 발표하였다.
세계 문자 올림픽의 심사 기준은 다음과 같다.
▲문자의 기원 ▲문자의 구조와 유형 ▲글자의 수 ▲글자의 결합능력 ▲문자의 독립성 및 독자성 ▲문자의 실용성 ▲문자의 응용 개발성 등을 기초로 평가됐다.
♦️제 2회 세계문자올림픽 대회에서 우리의 한글이 금메달 획득! 세계문자학회에 따르면,지난해 10월 1일부터 4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 2회 세계문자올림픽대회에서 한글이 1위에 올랐다.
이번 대회는 세계 27개국 문자, 🔸️영어, 🔸️러시아, 🔸️독일, 🔸️우크라이나, 🔸️베트남, 🔸️폴란드, 🔸️터키, 🔸️셀비아, 🔸️불가리아, 🔸️아이슬란드, 🔸️에티오피아, 🔸️몰디브, 🔸️우간다, 🔸️포르투갈, 🔸️그리스, 🔸️스페인, 🔸️남아공, 🔸️한국, 🔸️인도, 🔸️울드, 🔸️말라야람, 🔸️구자라티, 🔸️푼자비, 🔸️말라시, 🔸️오리아, 🔸️뱅갈리, 🔸️캐나다, 가 경합을 벌였다.
♦️각국의 학자들은 30여분 씩 자국 고유 문자의 우수성을 발표했다.
♦️세계문자올림픽의 심사기준은, 🔸️문자의 기원, 🔸️문자의 구조와 유형, 🔸️글자의 수, 🔸️글자의 결합 능력, 🔸️문자의 독립성 및 독자성, 🔸️문자의실용성, 🔸️문자의 응용 개발성 등을 기초로 평가됐다고 한다.
♦️세계문자올림픽은 🔸️가장 쓰기쉽고 🔸️가장 배우기 쉽고 🔸️가장 풍부 하고 다양한 소리를 표현 할수 있는 문자를 찾아내기 위한 취지로 열린다고 한다,
♦️한글은 16개국이 경쟁한 지난 2009년 대회에 이어 또 다시 1위를 차지 하여 그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 받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 🔸️1위는 한국의 소리 문자, 🔸️2위는 인도의 텔루구 문자, 🔸️3위는 영어 알파벳이 차지 했다. ♦️대회의 마지막 날 참가한 각국의 학자들은 방콕선언문을 발표하고 자국 대학에 한국어 전문 학과와 한국어 단기반을 설치 하는 등, 한글 보급에 노력하겠다고 언급 했다고 한다.
또한 이 선언문은 인구 100만명 이상인 국가들과 유네스코에 전달될 계획이라고 한다. ♦️566돌 한글날, 제1회 세계 문자올림픽대회에 이어 제2회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 하여 세계 만방에 우리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게 되었다.
♦️참고로 세계에서,
🔸️1. 가장 우수한 글자 1위, 🔹️한글.
🔸️2. 가장 아름다운 음악 1위, 🔹️아리랑.
🔸️3. 가장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 1위는, 🔹️비빔밥이랍니다. ***지인들께 널리 알려야 할 소식입니다.
[참고] 표음문자[소리글자]는 산스크리트어[범어]의 영향
물론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라는 五音의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따 훈민정음을 창제한 건 한국인의 천재성의 발로임.
한편 복천암 사적비의 기록을 보면, "세종대왕은 복천암에 주석하던 신미대사로부터 한글 창제 중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 초기 유학자인 성현의 저서인 『용재총화』나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도 언문은 범어 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세종대왕이 신미대사가 범어를 모방해 실제로 한글을 창제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것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집현전 학자들 중에 불교를 배척하는 학자들이 있었고, 세종대왕이 한글을 오랫동안 지키고 신임이 두터웠던 신미대사를 보호하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신미대사 한글 창제설의 결정적인 근거는세종대왕의 왕사인 신미대사가 당대 최고의 대학자로 유일하게 범어에 능통했고, 한글이 범어(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하였다는주장이다. 그리고훈민정음 창제 시기(1443)보다 8년 앞선 정통 3년(1435)에 한글과 한자로 된 『원각선종석보』라는 불교 고서가 신미대사에 의해 출간됐다는주장이다. 또한 당시는 억불승유정책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종대왕에서 연산군 조까지 한글로 발간된 문헌의 85%가 모두 불교관련 서적들이고, 유교관련 서적은 약 5%도 되지 않는다. 『월인석보』, 『용비어천가』등이 그것이며, 특히 월인석보의 첫머리에 세종대왕의 어지가 정확히 108자이며, 『월인석보』 제1권의 페이지 수가 정확히 108쪽이다. 이것은 결코 우연히 아니라, 한글창제를 주도한 사람은 집현전 학자들이 아니라, 바로 복천암의 신미대사였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훈민정음이 28자와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찰에서 아침과 저녁에 종성을 바로 28번과 33번을 친다. 그 이유는 바로하늘의 28수(宿)와 불교의 우주관인 33천(天)을 상징하는숫자이다.
경전 언해는1447년 석보상절을 시작으로월인석보, 금강경, 반야심경, 능엄경등20여 종에 걸쳐 진행됐다. “1446년 한글이 창제되고 1447년 언해본 발행이 시작됐는데, 총 30종 가운데 21종이 불교 경전 언해였습니다. 경전 이외의 서적은 용비어천가와 의학서적이었고, 분량으로 볼 때80%에 육박하는 자료가 경전이었습니다. 초기 언해본은 우리 글자가 어떻게 정착되고 대중에게 확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석보상절》(釋譜詳節)은 1447년(세종 29년)에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주요설법을 뽑아 한글로 편역한 서적이다. 불교서적중에 한글로 번역, 편찬된 최초의 책으로[1]소헌왕후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을 받아 만들었다. ‘석보’(釋譜)는 석가모니의 전기(傳記)를 의미하고, ‘상절'(’詳節)은 중요로운 내용은 자세히(詳) 쓰고, 그렇지 않은 내용은 줄여서(節) 쓴다는 뜻이다.[1] 금속 활자에 의한 15세기 한글 산문 자료로서 한국 어학, 한국 문학, 한국 서지학, 한국 불교학에서 귀중한 자료 중의 하나이다.
한신대학교[4] 강진갑 외래교수는 기사를 통해, 세종대왕 친제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친제협찬설도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보지만, "실제 세종대왕 치세에는 임금과 신하가 협력하여 국력을 융성하게 만들었는데, 영화에서는 임금과 신하의 대립을 너무 극단적으로 묘사해 관객에게 당혹감을 주었다." 비판했다.
[이 블로그 운영자의 愚見]
왕조시대에는 그 왕조에 만들어진 것은 모두 당대 왕의 치적으로 기록한다. 영릉에 가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세종대왕께서 어떻게 그 많은 과학발명품들을 만드셨겠는가?
신미대사는 초기 경전에 접근하기 위한 방편으로 초기 불전의 문자인 산스크리트어[범어]를 공부했고, 범어에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전의 초기 번역은 대체로 그의 번역 내지 감수를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세종께서 소헌와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월인천강지곡>의 언해의 출간을 감행한 점이다. 유학 이념으로 건국한 조선이었지만 유학에는 제사외에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할 아무런 방편이 없었다. 억불숭유정책은 정도전 등이 주창한 건국이념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월인석보』에 전하는 「석보상절서」에 의하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석보상절』을 지어 올리자 이를 본 세종이 『석보상절』의 내용에 맞추어 부처의 공덕을 칭송하여 읊은 것이라 한다.
원간본과 대조해보면, 이때 『석보상절』보다는 심하지 않으나, 한자(漢字)와 독음의 위치 변경, 한자음 종성(終聲)에서의 ‘ㅇ’ 사용, 협주(夾註)의 추가, 가사(歌詞)의 수정 등 부분적인 변개와 곡차(曲次)의 변동이 있었다. 또한 이 책이 단독으로 중간된 일은 없었다.
이 책의 간행시기는 『석보상절』이 이루어진 1447년(세종 29)에서 그 다음해인 1448년 사이에 완성하여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권상에 실린 노래가 모두 194곡이므로 전체로는 모두 580여 곡의 노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월인석보』에 실린 노래까지 합하면 모두 약 440곡이 알려져 있다.
1961년 통문관(通文館)에서 실물 크기대로 영인하여 간행하였고, 그 밖에 1962년 『국어학』 1호 등에도 영인본으로 수록되었다.
1985년 대제각에서 ‘국어국문학 총림 11’로 『월인석보』와 함께 영인하였으며, 2002년에는 대산문화재단의 해외 한국학 연구지원을 받아 함부르크 대학의 베르너 삿세(Werner Sasse), 안정희 교수팀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된 것이 소학사에서 출간되기도 하였다.
서지사항
활자본. 상·중·하 3권으로 되었으나, 현재 상권 1책과 중권의 낙장(落張)이 전할 뿐이다. 상권 1책과 중권 낙장이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2017년에 국보로 승격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상권과 중권의 낙장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석보상절』에 끼어 전한다.
내용
『월인천강지곡』은 석가의 전생에서부터 도솔천에 하강하여 왕자로 태어나 성장[生長]하고, 화려한 결혼생활을 하면서 인생에 대한 번민으로 출가, 수도하여 불도를 깨치고, 장엄한 권능으로 중생을 교화, 제도하다가 열반하여 그 전신 사리를 신중[女僧]들이 봉안하고, 믿고 받들기[信仰]까지의 전 생애를 소설적인 구조로 서사화하였다.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석가의 인격과 권능을 신화적으로 미화함으로써, 이 작품은 영웅의 일생을 찬탄하는 전형적인 서사시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월인천강’이라는 명칭 자체도 부처의 공덕을 칭송한 것으로서, 『월인석보』 권1의 첫머리에, “부톄 百億世界에 化身ᄒᆞ야 敎化ᄒᆞ샤미 ᄃᆞ리 즈믄 ᄀᆞᄅᆞ매 비취요미 ᄀᆞᆮᄒᆞ니라.(부처가 백억세계에 화신하여 교화하심이 달이 천 강에 비치는 것과 같으니라)”라고 한 주석에서 보듯이, 곧 부처의 본체는 하나이지만 백억세계에 화신으로 나타나서 중생을 교화하시는 것이 마치 달이 하나이지만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수많은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 말미암은 것이다.
별곡계통의 악장체를 집대성한 거작으로 자리를 굳혔고, 「용비어천가」와는 달리 일관된 서사성을 지님으로써 시가문학사상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곧 이 작품은 ‘이야기체 노래’로서 가사(歌辭)의 기본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가사문학의 형성과정에서 한시 계통의 가사 구조로부터 본격적인 가사에 이르는 중간에 자리하여 그 맥락을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작품은 『월인석보』에 이르러 불교계 강창문학(講唱文學)의 대본이 되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상절부(詳節部)는 강설하는 부분이고, 월인부는 가창하는 대목으로 되어 있어서, 이것이 강창문학의 표본이라면 국문학의 소설사 내지 희곡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한글로 표기된 운문(韻文)으로서는 「용비어천가」 다음가는 최고(最古)의 자료로서, 장편서사시의 선구적인 작품이다.
국어학적 특징
『월인천강지곡』은 표기에 있어서 한글을 위주로 하고, 한자를 협주로 표기한 최초의 문헌이다. 이 한글 위주의 체재는 한자를 먼저 놓고 한글을 그 아래에 달아놓은 『월인석보』의 「월인천강지곡」 부분과 대조적이어서 한글을 존중한 세종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훈민정음으로 쓰여진 중세국어의 문헌자료들은 대부분 음소적 표기를 따르고 있는 반면에, 『용비어천가』와 함께 『월인천강지곡』은 ‘낱’, ‘앒’, ‘ᄂᆞᆾ’ 등과 같이 형태음소적 표기를 따르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사이시옷의 표기는 모두 ‘ㅅ’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한자음 표기에 있어서도 음가(音價) 없는 종성에 ‘ㅇ’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같은 중세국어의 문헌자료이지만, 『석보상절』 이후의 문헌에서는 동국정운식(東國正韻式) 한자음 표기의 한 특징으로서 위와 같은 환경의 종성에 ‘ㅇ’을 사용하였다.(예: 子 ᄌᆞᆼ)
이 밖에 중성(中聲)의 자형(字形)에 있어서도 ‘ㆍ’, ‘ㆎ’의 경우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한글 자형의 변천을 아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한편, 활자는 『석보상절』과 똑같이 갑인자(甲寅字)인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와 함께 쓰인 한글 활자를 포함하여 서지학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월인천강지곡』은 『용비어천가』와 함께 최고의 국문시가로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종교성과 문학성을 조화, 통일시킨 장편서사시로서, 인도문학의 걸작이라는 『불소행찬(佛所行讚)』과 대비되는 명작으로 평가된다. 최초의 한글활자본으로서, 중세국어의 언어를 연구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가치가 높은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내용이나 구조 및 표현상에 있에서도 완벽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음곡(音曲)에 의하여 가창(歌唱)됨으로써 거기에 알맞은 운율로 조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의 묘사에서 서경이나 서정이 뛰어나고 수사법이 고루 갖추어짐으로써 수려한 서사시로 완결되었다.
불쌍하게 목숨을 마치매 감자씨가 이으심을 대구담께서 이루었습니다. 아득한 후세에 석가모니 불이 되실 것을 보광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핵심정리 ▶의미 : 달이 천 개의 강을 비춘다는 말로 석가모니가 중생을 교화함을 말함 ▶창작 : 세종 29년 (1447) 추정 ('석보상절'과 거의 같은 시기임) ▶간행 : 세종 31년 (1449) ▶작자 : 세종대왕 ▶형식 : 악장, 서사시 ▶내용 : 석가모니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 찬불가로 용비어천가와는 달리 찬불가(讚佛歌)이므로 궁중 음악에서는 사용 안됨. 상, 중, 하 3권으로 간행되었는데 이 중 상권만이 발견되었다. 수록 작품은 모두 194장이나 이로 미루어 볼 때 전편은 580여 장이 될 것으로 추측됨. ▶제작동기 : 수양대군이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 바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세종께서 보시고 이 글을 지었음(두 500여 곡으로 된 3권의 활자본. 현재 상권 1책이 보물 398호로 지정) ▶의의 : 용비어천가와 함께 대표적인 신체 악장, 최대의 서사시(敍事詩이고, 15세기 국어의 귀중한 자료이며, 불교문학의 정화(精華)이고, 표기에 한글을 위주로 하여 한자를 협주로 한 점으로써 한글전용이 행해진 최초의 문헌으로 일컬어진다 ▶참고 : <월인천강지곡>을 세조 5년에 '석보상절(釋譜詳節)'과 합본하여 '월인석보(月印釋譜)'라는 이름으로 간행함
▲'월인천강지곡'의 배경 설화 헤아릴 수 없는 먼먼 전 세상 시절에 한 보살이 임금으로 있다가 왕위[王位]를 아우에게 맡기고, 부처의 도리를 배우러 출가하여 구담 바라문(瞿曇拍羅門)을 만나 자기의 옷[王位]을 벗고 구담의 떨어진 옷을 입고 깊은 산에 들어가 과실과 물을 잡수시고 좌선(坐禪)하시다가 자기가 다스리던 나라에 걸식(乞食) 하러 내려오니 모든 사람들이 그를 왕인 줄 몰라보고, 다만 구담의 제자라 소구담이라고 했다. 이 보살이 성 밖의 사탕수수밭에 불도를 닦는 정사를 만들어 혼자 좌선하고 있었는데, 그 때에 마침 500명이나 되는 도둑 떼가 나라의 제물을 훔쳐 가지고 보살이 좌선하고 있는 정사 앞을 지나갔는데, 이들은 보살의 500세(世)전의 원수였다.
●이해와 감상 석가모니의 공덕을 기린 작품으로 불교 문학의 정수로 조선시대 세종이 지은 악장체의 찬불가(讚佛歌). 상권 1책과 중권낙장이 보물 제398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용은 석가의 전생으로부터 도솔천에서 하강하여 왕자로 생장하고, 화려한 결혼생활 가운데에서 인생에 대한 번민으로 출가, 수도하여 불도를 깨치고, 장엄한 권능으로 중생을 교화, 제도하다가 열반하여 그 전신 사리를 신중들이 봉안, 신앙하기까지의 전생애를 소설적인 구조로 서사화하였다.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석가의 인격과 권능을 신화적으로 미화함으로써, 이 작품은 영웅의 일생을 찬탄하는 전형적인 서사시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또한, 표현면에서도 완벽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음곡(音曲)에 의하여 가창(歌唱)됨으로써 거기에 알맞은 운율로 조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의 묘사에서 서경이나 서정이 뛰어나고 수사법이 고루 갖추어짐으로써 수려한 서사시로 완결되었다. 〈용비어천가〉와 함께 최고의 국문시가로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종교성과 문학성을 조화, 통일시킨 장편서사시로서, 인도문학의 걸작이라는 ≪불소행찬 佛所行讚≫과 대비되는 명작으로 평가된다. 별곡계통의 악장체를 집대성한 거작으로 자리를 굳혔고, 〈용비어천가〉와는 달리 일관된 서사성을 지님으로써 시가문학사상 중요한 구실을 하여 왔다. 곧 이 작품은 ‘이야기체 노래’로서 가사(歌辭)의 기본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가사문학의 형성과정에서 한시계통의 가사구조로부터 본격적인 가사에 이르는 중간에 자리하여 그 맥락을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작품은 ≪월인석보≫에 이르러 불교계 강창문학(講唱文學)의 대본이 되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상절부(詳節部)는 강설하는 부분이고 월인부는 가창하는 대목으로 되어 있어서, 이것이 강창문학의 표본이라면 국문학의 소설사 내지 희곡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보물 제398호. 활자본. 상중하 3권으로 되었으나 현재 상권 1책과 중권의 낙장(落張)이 전할 뿐이다. 이 책은 ≪석보상절 釋譜詳節≫과 함께 합편되어 ≪월인석보 月印釋譜≫로 간행되었다. 원간본과의 대조에 의하면, 이 때 ≪석보상절≫보다는 심하지 않으나 한자(漢字)와 독음의 위치 변경, 한자음 종성(終聲)에서의 ‘窮’ 사용, 협주(夾註)의 추가, 가사(歌詞)의 수정 등 부분적인 변개와 곡차(曲次)의 변동이 있었다. 이 책이 단독으로 중간된 일은 없다. ≪월인석보≫에 전하는 〈석보상절서〉에 의하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석보상절≫을 지어 올리자 이를 본 세종이 ≪석보상절≫의 내용에 맞추어 부처의 공덕을 칭송하여 읊은 것이라 한다. ‘월인천강’이라는 명칭 자체도 부처의 공덕을 칭송한 것으로서, ≪월인석보≫ 권1의 첫머리에 “부텨 百億世界(백억세계)에 化身(화신)悧야 敎化(교화)悧샤미 愷리 즈믄 佳犬매 비치요미 加悧니라.”라고 한 주석에서 보듯이, 곧 부처의 본체는 하나이지만 백억세계에 화신으로 나타나서 중생을 교화하시는 것이 마치 달이 하나이지만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수많은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 책의 간행시기는 ≪석보상절≫이 이루어진 1447년(세종 29)에서 그 다음해인 1448년 사이에 완성하여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권상에 실린 노래가 모두 194곡이므로 전체로는 모두 580여 곡의 노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권상 1책과 권중의 낙장만이 전해지고 있으나, ≪월인석보≫에 실린 노래까지 합하면 모두 약 440곡이 알려져 있다. 한글로 표기된 운문(韻文)으로서는 〈용비어천가〉 다음가는 최고(最古)의 자료로서, 장편서사시의 선구적인 작품이다. 특히, 표기에 있어서 한글을 위주로 하고 한자를 협주로 표기한 최초의 문헌이다. 이 한글 위주의 체재는 한자를 먼저 놓고 한글을 그 아래에 달아놓은 ≪월인석보≫의 〈월인천강지곡〉 부분과 대조적이어서 한글을 존중한 세종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또 한자음 표기에 있어서도 이 책에서는 음가(音價) 없는 종성에 ‘窮’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도 특징적인데, ≪석보상절≫ 이후의 문헌에서는 동국정운식(東國正韻式) 한자음 표기의 한 특징으로서 위와 같은 환경의 종성에 ‘窮’을 사용하였다(예 : 希 ○). 이 밖에 중성(中聲)의 자형(字形)에 있어서도 ‘’, ‘○’의 경우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한글 자형의 변천을 아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한편, 활자는 ≪석보상절≫과 똑같이 갑인자(甲寅字)인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와 함께 쓰인 한글 활자를 포함하여 서지학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한교과서주식회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상권과 중권의 낙장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석보상절≫에 끼어 전한다. 1961년 통문관(通文館)에서 실물크기대로 영인, 간행하였으며, 그 밖에 1962년 ≪국어학 國語學≫ 1호 등에도 영인, 수록되었다.
≪참고문헌≫ 註解 月印千江之曲 上(許雄․李江魯, 新丘文化社, 1962),
論註 月印千江之曲 上(朴炳采, 正音社, 1974),
月印千江之曲攷(金思燁, 李朝時代의 歌謠硏究, 大洋出版社, 1956),
月印千江之曲解題(南廣祐, 國語學 1, 國語學會, 1962),
月印千江之曲 解題(許雄, 韓國의 名著, 玄岩社, 1969),
月印千江之曲(李東林, 韓國의 思想 大全集 7-세종-, 同和出版公社, 1972),
中世語의 한글資料에 대한 綜合的考察(安秉禧, 奎章閣 3, 서울大學校圖書館, 1979),
月印千江之曲의 몇 가지 問題(史在東, 語文硏究 11, 語文硏究會, 1982).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월인천강지곡 조선 세종이 1449년(세종 31)에 지은 불교 찬가(讚歌)로, 보물 제398호. 1447년에 왕명에 따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지어올리자 세종이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여 지은 노래이다. 그러나 왕의 측근이었던 김수온(金守溫)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것이라는 이설(異說)도 있다. 《월인천강지곡》이란, 부처가 나서 교화한 자취를 칭송한 노래라는 뜻으로, 상 ․중 ․하 3권에 500여 수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아울러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한국 최고(最古)의 가사(歌詞)이다.
이 책의 표기법에 관하여 몇 가지 두드러진 점을 들어보면, ① 당시의 맞춤법은 모두 표음(表音)의 원칙, 즉 소리나는 대로 적는 원칙에 따랐다. 곧, ‘사ᅗ미怠,바翠(食), 머그니(食), 마가(防)…’ 식으로 풀이씨(用言)와 줄기(語幹)와 씨끝(語尾)과의 구분이 지켜지지 않고 표기되었는데, 이 책에서는 ‘일이시나, 눈에, 말이시나, 일흠은, 담아, 안아, 안굼시니이다, 낮과, 곶우흰, 곶비, 맞나겝側며, 깊거다… ’ 등으로 비교적 현대 문법과 가깝다. ② 다른 문헌이 한자(漢字)를 앞세우고 그 밑에 한글로 음을 다는 표기법을 채택하고 있음에 비하여, 이 책은 그 위치가 반대로서 한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한글을 사용하려는 주체성(主體性)의 발로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③ 종성(終聲)이 없는 자리에 ‘ᄋ’을 붙이던 당시의 한자음 표기법을 볼 수 없다는 점 등이다.
이는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및 《훈민정음언해(訓民正音諺解)》 등과 함께 정음 창제 당시의 언어연구로서 빼지 못할 자료가 되지만, 《월인천강지곡》의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는 예술적인 독창성의 결여 때문에 그다지 높게 평가되지는 못하고 있다. 《월인천강지곡》은 산일되어 상권만이 전하다가 1961년 진기홍(陳錤洪)에 의하여 발견되어 3권으로 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1962년에 통문관(通文館)과 신구문화사(新丘文化社)에서 각각 영인본을 간행하였다. 또한 1995년 12월 발견된 《월인석보(月印釋譜)》 권25에 새로운 《월인천강지곡》의 시 7수가 수록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불소행찬(佛所行鑽, Buddhacarita) 5권은 마명(馬鳴, Asvaghosa)이 지은 것을 북량(北涼)시대에 담무참(曇無讖, Dharmaksema)이 414년에서 426년 사이에 고장(姑藏)에서 번역하였다. 별칭으로 『불소행찬경』ㆍ『불소행찬전』이라고도 한다. 서기 1세기 경에 마명(馬鳴)이 지은 부처님의 생애에 대한 서사시이다. 현존하는 범본 『불소행찬』은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부처님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환국(還國)으로 결말짓고 있다.
4. 구성과 내용
한역 『불소행찬』은 5권 28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문(譯文)은 아름다운 운문으로서 격조있고 장엄하며 그 말이 매우 아름답다. 현존하는 범본 『불소행찬』은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래 14장 32송까지만 남아 있던 것에 14장 33송부터 17장까지는 후대에 부가하였다. 부처님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환국(還國)으로 결말짓고 있다. 그러나 한역(漢譯)과 서장역(西藏譯)은 모두 28장으로서 「생품(生品)」에서 시작하여 「분사리품(分舍利品)」으로 결말짓고 있다. 운문으로 이루어진 서사시이므로 번역본 또한 시로서 옮기고 있다.
제1 생품(生品)은 싯달타 태자의 출생을 기록하면서 그의 타고난 덕을 찬탄한다. 싯달타 태자는 석가족의 가장 우수한 왕인 정반왕(淨飯王)을 아버지로, 의지가 굳고 마음이 깨끗한 마야 부인을 어머니로 태어났다. 그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중생들이 마음을 의지할 곳을 찾고 온갖 욕심에서 벗어나 어두운 이 세상을 멀리하고 안온한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제2 처품(處品)은 화려했던 궁중 생활을 묘사한다. 싯달타 태자가 탄생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어머니 마야 부인이 죽자, 이모가 태자를 양육하였다. 자라서는 야쇼다라를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았다. 또 아버지 정반왕은 즐거운 생활을 하도록 궁전을 새로 지어 주기도 하였다.
제3 염환품(厭患品)은 거리에 나갔다가 늙은 사람, 병자, 시체 등을 만남으로써 인간 세상을 싫어하고 집을 떠나 수행하려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제4 이욕품(離欲品)은 여자에 대한 욕망을 떠났음을 말한다. 정반왕이 새로운 궁전을 마련하여 준 것은 애욕에 빠져서 쾌락을 즐기고 집을 떠나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태자는 늙음, 병, 죽음 등의 한계 상황을 목격하였으므로 그 같은 무상한 욕락에서 벗어나는 출가의 길을 생각하게 되었다.
제5 출성품(出城品)은 출가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부왕은 "집을 떠나 도를 닦기에는 아직 이르다."라고 하면서 출가의 뜻을 포기하도록 만류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세상에서의 삶이 곧 불이 난 집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궁녀들이 모두 잠든 사이에 시중을 드는 차닉(車匿)과 함께 몰래 궁을 빠져 나와 출가하였다.
제6 차닉환품(車匿還品)은 태자를 모시던 차닉이 홀로 왕궁으로 돌아간다. 태자는 차닉에게 스스로 가지고 있던 보배 구슬을 풀어 주면서 "왕에게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인정을 버리라고 말씀드려라. 나는 태어나고, 늙고, 죽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이 숲속에 들어왔다."라고 말했다. 이에 차닉은 태자의 옷을 바꾸어 입고 왕궁으로 돌아갔다.
제7 입고행림품(入苦行林品)은 태자가 숲속으로 들어가 고행자들과 함께 생활한다. 숲속의 고행자들이 닦는 고행은 속세에서 나지 않는 맑은 찬물을 마시기도 하며, 나무‧뿌리‧줄기‧잎‧꽃‧열매를 먹기도 하고, 사슴이 먹는 풀을 먹기도 해야 한다. 물 속에 있으면서 고기의 흉내도 내야 한다. 이러한 고행들을 통하여 인간 세상의 안락이나 죽은 다음에 하늘에 태어나기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태자는 “고행으로 얻는 것이 인간의 안락이나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라 한다면 작은 괴로움은 면할 수 있으나 마침내는 더욱 큰 괴로움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비판하고 고행자들을 떠났다.
제8 합궁비우품(合宮悲愚品)은 태자가 출가한 뒤 온 왕궁이 슬픔에 잠겼음을 이렇게 말한다. “차닉과 백마가 절망 속에서, 통곡하며 돌아오는 모습 보고서, 흐느끼고 울부짖는 소리, 마치 부모 잃은 초상집 같다.”
제9 추구태자품(推求太子品)은 왕의 지시로 태자를 찾아나선 두 대신의 이야기다. 태자를 찾은 두 대신은 왕이 매우 슬퍼하고 괴로워한다고 말하면서 왕궁으로 돌아가자고 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태자는 “나를 왕으로 만들기 위하여 애쓰는 아버지의 사랑을 어기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그것은 환자에게 맞지도 않는 약을 먹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차마 높은 곳의 어리석은 자리에 앉아 사랑하고 미워하는 속세의 일을 따라 갈 수 없다.”라고 거절하였다.
제10 병사왕예태자품(甁沙王詣太子品)은 석가족의 태자가 집을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병사왕 즉 빔비사라 왕이 태자를 찾아간다. 그 역시 자기 나라의 절반을 줄 용의가 있음을 말하면서 출가를 만류하고 있다. 태자의 출가에 대한 이 같은 만류는 “늙으면 그 기운 허하고 약하리니, 그때 가서 도를 닦으라.”라는 것이다. 이 같은 만류는 태자의 출가가 노년에 출가하는 브라만교의 출가와는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1 답병사왕품(答甁沙王品)은 병사왕의 권유에 대답하는 내용이다. “젊어서는 경솔하고 조급하므로 늙어서 도를 닦으라 하지만, 늙은 사람은 힘이 모자라 견디지 못하고, 뜻도 굳세지 못하여 소원을 이루지 못한다.”라고 대답한다. 태자를 설득하려던 병사왕은 오히려 태자의 논리에 설득을 당하고 말았다.
제12 아라람울두람품(阿羅藍鬱頭藍品)에서는 아라람 즉 아라다와 울두람 즉 웃다카라는 두 선인(仙人)을 찾아가서 문답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먼저 찾아간 아라람과의 문답이 주된 것이며, 뒤에 찾아간 웃다카와의 문답은 간략하게 제시되어 있다. 아라람의 견해는 수론(數論) 학파가 정립한 전변설(轉變說)의 초기 형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싯달타 태자는 궁극적 자성이 있다면 그 역시 연기(緣起)의 이치에 따라야 한다는 입장에서 아라다의 견해를 비판한다.
제13 파마품(破魔品)은 보리수 아래에서 수행하는 태자에게 악마 파순(波旬)이 독 화살, 갖가지 흉기로 무장한 악마의 무리, 여자들을 동원하여 방해하였으나 모두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제14 아유삼보리품(阿惟三菩提品)에서 아유삼보리는 위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이라는 의미이다. 태자는 악마를 항복받은 뒤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고 깊은 명상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12인연의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제15 전법륜품(轉法輪品)은 최초의 설법을 담고 있다. 부처님은 바라나시로 가서 과거 함께 고행했던 교진여(憍陳如) 등 5비구에게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양 극단을 떠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를 얻어야 한다고 설하였다.
제16 병사왕제제자품(甁沙王諸弟子品)은 병사왕과 여러 제자들을 교화한 일을 서술한다. 부처님은 장자의 아들 야사(耶舍)를 비롯한 54명을 교화하였다. 부처님은 이들을 각처로 보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게 하였다. 그런 뒤 스스로 병사왕을 찾아가서 모든 고통의 근원은 나와 내 것에 집착하는 데 있으므로, 열반을 얻으려면 나와 내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설하셨다.
제17 대제자출가품(大弟子出家品)은 병사왕이 마련해 준 죽림 정사에서 지혜가 가장 뛰어난 제자 사리불(舍利弗), 신통력이 가장 뛰어난 제자 목련(目連), 검소한 생활에 철저하였던 가섭(迦葉) 등을 교화한 인연을 서술하였다.
제18 화급고독품(化給孤獨品)은 급고독 장자를 교화한 일을 서술한다. 죽림 정사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급고독 장자가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사위성(舍衛城)에 기원 정사를 세우겠다고 발원한다.
제19 부자상견품(父子相見品)은 부처님이 정반왕을 만난 일을 서술한다. 부처님이 애욕으로 인하여 생사의 길을 윤회함을 설하자 왕족 대신 귀족 출신의 여러 사람들이 다투어 집을 떠나 비구가 되었다. 부처님의 아들 라훌라도 그 후 집을 떠나 불도를 닦게 되었다.
제20 수기원정사품(受祇洹精舍品)은 급고독 장자가 세운 기원 정사를 헌납받고, 파사닉왕(波斯匿王)과 그 나라 사람들을 교화한 일을 서술한다.
제21 수재취상조복품(守財醉象調伏品)은 제바달다(提婆達多)가 부처님을 해치기 위해서 술에 취한 코끼리를 내몰았으나 부처님의 설법으로 술에 취한 코끼리가 감복한 이야기이다.
『월인석보』에 전하는 「석보상절서」에 의하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석보상절』을 지어 올리자 이를 본 세종이 『석보상절』의 내용에 맞추어 부처의 공덕을 칭송하여 읊은 것이라 한다.
원간본과 대조해보면, 이때 『석보상절』보다는 심하지 않으나, 한자(漢字)와 독음의 위치 변경, 한자음 종성(終聲)에서의 ‘ㅇ’ 사용, 협주(夾註)의 추가, 가사(歌詞)의 수정 등 부분적인 변개와 곡차(曲次)의 변동이 있었다.
또한 이 책이 단독으로 중간된 일은 없었다.
이 책의 간행시기는 『석보상절』이 이루어진 1447년(세종 29)에서 그 다음해인 1448년 사이에 완성하여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권상에 실린 노래가 모두 194곡이므로 전체로는 모두 580여 곡의 노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월인석보』에 실린 노래까지 합하면 모두 약 440곡이 알려져 있다.
1961년 통문관(通文館)에서 실물 크기대로 영인하여 간행하였고, 그 밖에 1962년 『국어학』 1호 등에도 영인본으로 수록되었다.
1985년 대제각에서 ‘국어국문학 총림 11’로 『월인석보』와 함께 영인하였으며, 2002년에는 대산문화재단의 해외 한국학 연구지원을 받아 함부르크 대학의 베르너 삿세(Werner Sasse), 안정희 교수팀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된 것이 소학사에서 출간되기도 하였다.
서지사항
활자본. 상·중·하 3권으로 되었으나, 현재 상권 1책과 중권의 낙장(落張)이 전할 뿐이다. 상권 1책과 중권 낙장이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2017년에 국보로 승격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상권과 중권의 낙장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석보상절』에 끼어 전한다.
내용
『월인천강지곡』은 석가의 전생에서부터 도솔천에 하강하여 왕자로 태어나 성장[生長]하고, 화려한 결혼생활을 하면서 인생에 대한 번민으로 출가, 수도하여 불도를 깨치고, 장엄한 권능으로 중생을 교화, 제도하다가 열반하여 그 전신 사리를 신중[女僧]들이 봉안하고, 믿고 받들기[信仰]까지의 전 생애를 소설적인 구조로 서사화하였다.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석가의 인격과 권능을 신화적으로 미화함으로써, 이 작품은 영웅의 일생을 찬탄하는 전형적인 서사시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월인천강’이라는 명칭 자체도 부처의 공덕을 칭송한 것으로서, 『월인석보』 권1의 첫머리에,
“부톄 百億世界에 化身ᄒᆞ야 敎化ᄒᆞ샤미 ᄃᆞ리 즈믄 ᄀᆞᄅᆞ매 비취요미 ᄀᆞᆮᄒᆞ니라.
(부처가 백억세계에 화신하여 교화하심이 달이 천 강에 비치는 것과 같으니라)”
라고 한 주석에서 보듯이, 곧 부처의 본체는 하나이지만 백억세계에 화신으로 나타나서 중생을 교화하시는 것이
마치 달이 하나이지만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수많은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 말미암은 것이다.
별곡계통의 악장체를 집대성한 거작으로 자리를 굳혔고, 「용비어천가」와는 달리 일관된 서사성을 지님으로써 시가문학사상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곧 이 작품은 ‘이야기체 노래’로서 가사(歌辭)의 기본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가사문학의 형성과정에서 한시 계통의 가사 구조로부터 본격적인 가사에 이르는 중간에 자리하여 그 맥락을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작품은 『월인석보』에 이르러 불교계 강창문학(講唱文學)의 대본이 되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상절부(詳節部)는 강설하는 부분이고, 월인부는 가창하는 대목으로 되어 있어서,
이것이 강창문학의 표본이라면 국문학의 소설사 내지 희곡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한글로 표기된 운문(韻文)으로서는 「용비어천가」 다음가는 최고(最古)의 자료로서, 장편서사시의 선구적인 작품이다.
국어학적 특징
『월인천강지곡』은 표기에 있어서 한글을 위주로 하고, 한자를 협주로 표기한 최초의 문헌이다. 이 한글 위주의 체재는 한자를 먼저 놓고 한글을 그 아래에 달아놓은 『월인석보』의 「월인천강지곡」 부분과 대조적이어서 한글을 존중한 세종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훈민정음으로 쓰여진 중세국어의 문헌자료들은 대부분 음소적 표기를 따르고 있는 반면에, 『용비어천가』와 함께 『월인천강지곡』은 ‘낱’, ‘앒’, ‘ᄂᆞᆾ’ 등과 같이 형태음소적 표기를 따르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사이시옷의 표기는 모두 ‘ㅅ’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한자음 표기에 있어서도 음가(音價) 없는 종성에 ‘ㅇ’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같은 중세국어의 문헌자료이지만, 『석보상절』 이후의 문헌에서는 동국정운식(東國正韻式) 한자음 표기의 한 특징으로서 위와 같은 환경의 종성에 ‘ㅇ’을 사용하였다.(예: 子 ᄌᆞᆼ)
이 밖에 중성(中聲)의 자형(字形)에 있어서도 ‘ㆍ’, ‘ㆎ’의 경우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한글 자형의 변천을 아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한편, 활자는 『석보상절』과 똑같이 갑인자(甲寅字)인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와 함께 쓰인 한글 활자를 포함하여 서지학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월인천강지곡』은 『용비어천가』와 함께 최고의 국문시가로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종교성과 문학성을 조화, 통일시킨 장편서사시로서, 인도문학의 걸작이라는 『불소행찬(佛所行讚)』과 대비되는 명작으로 평가된다. 최초의 한글활자본으로서, 중세국어의 언어를 연구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가치가 높은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내용이나 구조 및 표현상에 있에서도 완벽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음곡(音曲)에 의하여 가창(歌唱)됨으로써 거기에 알맞은 운율로 조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의 묘사에서 서경이나 서정이 뛰어나고 수사법이 고루 갖추어짐으로써 수려한 서사시로 완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