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자 | 이번 좌담회는 한글날 제576돌을 기념한 것입니다. 오늘 좌담회 주제는 크게 넷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첫 번째로 ‘한글의 참뜻을 바로 알고 바로 쓰자’ 주제에 대해 생각을 나눠보겠습니다.
● 제2부 : 한글의 오인, 오용, 오판 사례에 대하여
사회자 | 보통 오용 사례라고 하면, “야, 너 한글 이름이 참 예쁘다” 뭐 이런 것, 또는 “어려운 한자를 쉬운 한글로 바꾸자” 같은 말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결국은 ‘한글’이라는 단어를 ‘우리말’과 혼용해서 쓰는 결과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 이사장님 아니면 학장님 어느 분께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제3부 : 한글의 우수성과 한계점에 대하여
전광진 세 번째 주제는 ‘한글의 우수성과 한계성’이지요. 어떤 일이든지 장점만 있고 단점은 없는 것은 없죠. 한글의 장점, 즉 우수성에 관해서는 초등학교 교과서부터 중학교·고등학교 국어책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한글은 배우기 쉽다는 말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한글이 쉬운 까닭이 뭡니까?”라고 물어보면 바로 답을 하는 학생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서 교육을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한글이 쉬운 까닭을 제대로 모르고 있습니다.
한글이 쉬운 까닭은 기본적으로 자음 14개, 모음 10개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알파벳은 26개이니 한글이 더 쉬운 셈입니다. 기본적으로 그렇습니다만, 이중음을 포함하고 음절 구조를 감안하면 복잡해집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글은 24개 자모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단순 사실 자체를 초·중·고 학생은 물론 대학생들도 잘 모르고 있더라고요. 이것은 학생 문제가 아니라 교과서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한글은 알파벳보다 2개가 더 적기 때문에 배우기 쉽다는 단순 사실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교과 교육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이에 대해서 권재일 이사장님께서 전문가로서 덧붙일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 제4부 : 한글, 바로 알아야 교육이 살고 나라가 산다
사회자 |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주제로 넘어가시지요.
전광진 ‘참신한 한자 연구’ 쪽으로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시대적 사명은 어쩔 수 없으니 그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제가 아무리 한 자를 좋아하고 한자 문제를 좀 안다고 하더라도 ‘한글 전용 시대’를 거역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글 전용은 음을 잘 알게 하고 읽기를 잘하게 할 뿐입니다. 한글 전용 교육은 학생들에게 소리 정보만 잔뜩 제공하고 시험에서는 뜻을 잘 아는지를 점검하는 얼토당토않은 교육인 셈입니다. 학생들은 읽을 줄 몰라서가 아니라 수없이 많이 등장하는 한자어의 속뜻을 몰라 현기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해식애(海蝕崖), 파식동(波蝕洞), 사주(沙洲), 석호(潟湖) 같은 한자어가 모스부호나 다름없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한글 전용 교과서로 공부하는 우리나라에 서는 한자를 혼용하는 일본과 달리, “선(先) 한자어-후(後) 한자” 학습이 효과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약 30년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말 표기에 한글보다 더 나은 문자는 없다. 헌데 한자어 표기가 문제죠. 토론장에서 예로 든 "해식애(海蝕崖), 파식동(波蝕洞), 사주(沙洲), 석호(潟湖)" 같은 한자어는 별도의 학습용 한자 교육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는개펄을 의미하는 "潟(석)" 字는 4학년 학습한자로 사용하고 있네요.
신미대사는 세종 대의 고승으로 문종으로부터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칭호를 받았다. 학열대사는 세조가 만든 불경 번역 기관인 간경도감을 지휘하며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번역, 전국에 널리 반포하였으며, 학조대사는 직지사의 주지로 역시 수많은 불경을 국어로 번역, 간행하였다.
이들 고승 세 명이 세조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상원사를 중창하면서 중창권선문을 지었다. 세조가 이 소식을 듣고 쌀, 무명, 베와 철 등을 보내면서 직접 친필로 쓴 상원사 어첩(御牒)을 전했는데, 중창권선문과 함께 월정사에서 소장 중이다.
중창권선문은 한자 원문과 한글 번역이 함께 있는데, 한글 번역본은 손글씨 한글 문서 중에서는 매우 초창기 것이라 의미가 크다. 중창권선문의 한글 번역문은 손으로 쓴 한글문서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알려졌지만, 2015년 원각사 소장 능엄경언해에서 세조 7년(1461)에 쓴 손글씨 한글이 나와 '가장 오래된 손글씨 한글'에서 밀려났다.
중창권선문에는 신미, 학열, 학조의 친필서명뿐만 아니라 세조와 세자빈, 왕세자의 수결과 도장까지 찍혔으므로, 세조 때 조선왕실의 불교 문화 포용성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또한 한글을 직접 쓴 당대 필사본 중 매우 초장기 문서로 한글 창제 극초기의 국문학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이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平昌 上院寺 重創勸善文세조 10년(1464) 세조의 왕사인혜각존자 신미등이학열, 학조등과 함께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상원사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지은 글로,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조가 쌀, 무명, 베와 철 등을 보내면서 쓴 글과 함께 월정사에 소장되어 전한다.
각각 한문 원문과 번역으로 되어 있는데, 신미 등이 쓴 글에는 신미, 학열, 학조 등의 수결(지금은 서명)이 있으며, 세조가 보낸 글에는 세조와 세자빈, 왕세자의 수결과 도장이 찍혀 있다. 한글로 번역된 것은 가장 오래된 필사본으로 유명하다.
세조와 상원사 및 신미와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자료이며, 당시의 국문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가장 오래된 한글 서적이면서도 보존 상태가 완벽하여 1996년 11월 28일 보물 제140호에서 국보 제292호가 되었다.
세조는 즉위 이전부터 불경을 언해하거나 불교 관련 행사를 지원하는 등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신미는 왕사(王師)로서 세조의 불교사상 형성에 영향을 끼쳤으며 당시 왕실 불사와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이었다. 그는 수미(守眉), 학열(學悅), 학조(學祖), 동생 김수온과 더불어 간경 사업의 핵심 세력이 되었고, 원각사 창건에도 일정 부분 참여하였다. [5]상원사를 중창하게 된 계기는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신미, 학열 등이 세조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평창 상원사를 중창하기로 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세조의 병환이 심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상원사 중창기』에 정희왕후가 신미와 학열 등에게 사찰을 중창할 장소에 대해 묻자 신미학열 등이 오대산의 중대에 절을 짓도록 권하였고 정희왕후가 이에 신미, 학열 등에게 일을 일임하였다는 일이 기록되어 있어 평창 상원사 중창이 세조의 병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6]
『능엄경언해』는 송(宋)나라 온릉계환(溫陵戒環)이 핵심이 되는 부분을 풀이한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에 세조(世祖)가 한글로 구결을 달고 번역한 책이다. 활자본·목판본의 두 종이 있는데 활자본은 1461년(세조 7)에, 목판본은 1462년(세조 8)에 간행되었다. 목판본은 같은 판목으로 1472년(성종 3)과 1495년(연산군 1)에 다시 간행되었다.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은 줄여서 『능엄경』이라고 하는데, 여래장(如來藏) 사상을 근간으로 하며, 원돈(圓頓)의 가르침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경전이다. 한국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쳐 『금강경(金剛經)』, 『원각경(圓覺經)』,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함께 불교 강원의 사교과(四敎科)를 구성하는 과목이기도 하다. 『능엄경』의 주된 내용은 대승 및 소승을 막론할 뿐만 아니라, 현교와 밀교를 포괄하고 있다. 아울러 성리학(性理學)과 사상적 연관성을 갖고 있어서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은 물론이고, 유가(儒家)에서도 널리 읽혀졌다.
편찬/발간 경위
세조와 신미(信眉)ㆍ김수온(金守溫) 등의 발문에 의하면, 원래 1449년(세종 31) 세종(世宗)의 명령에 따라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이 번역에 착수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미루어졌다. 그러다가 1461년(세조 7) 5월 석가모니의 분신사리(分身舍利) 100여 매가 나타나고,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이 책과 『영가집(永嘉集)』의 번역을 세조에게 청하자 세조가 번역을 끝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해 10월 교서관(校書館)에서 을해자(乙亥字)로 400부를 간행하였다고 전한다.
번역은 세조가 손수 한 것이란 뜻에서 뒤의 기록에는 어역(御譯)이라 되어 있으나, 발문에 따르면 실제로는 여러 사람이 분담하여 이루어졌다. 즉 세조가 구결을 단 후 신미에게 옳고 그름을 따져 밝히게 하여 구두(句讀)를 바르게 하고, 그에 따라 한계희(韓繼禧)ㆍ김수온이 번역을 하였다. 그리고 신미 등의 명승이 그 번역을 교정하고 세조가 확인한 후 확정하였다. 이 밖에 본문을 서로 견주어 고찰하는 것과 예문의 손질, 한자음의 표기 등도 각기 분담했던 것으로 전한다.
서지 사항
10권 10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의 크기는 세로 37.2㎝, 가로 24.2㎝이다. 지질은 한지로 되어 있다.
활자본·목판본의 두 종이 있는데 활자본은 1461년(세조 7)에, 목판본은 1462년(세조 8)에 간행되었다. 활자본은 급히 서둘러 간행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많았으므로, 이를 수정하여 이듬해인 1462년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다시 목판으로 간행하던 것이다. 이 책에는 간경도감 도제조(都提調)인 계양군(桂陽君)의 전문(箋文)과 조조관(雕造官)인 간경도감 도제조 이하 관원의 관직 및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목판본은 같은 판목으로 1472년(성종 3)과 1495년(연산군 1)에 다시 간행되었다.
현재 각 권에 소장처는 다음과 같다. 권1은 성암문고(誠庵文庫), 권2는 서울대학교, 권5는 서울대학교 가람문고와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권6은 덴리대학, 권7은 연세대학교, 권8은 동국대학교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권9는 김형규(金亨奎)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권10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이다.
구성/내용
이 책은 세종이 1449년 수양대군에게 번역을 명하였으나, 바로 완성하지 못하였던 것을 1461년(세조 7)에 세조에 의하여 언해가 모두 이루어지고, 같은 해 을해자(乙亥字)와 새로 주조한 한글 활자(을해자 병용 한글자)를 이용하여 인출하였다. 이 때 서둘러 간행한 탓에 본문에 주서(朱書)로 교정 지시를 한 부분이 간간히 보인다. 이러한 교정 지시는 을해자본 『능엄경언해』가 구성이나 내용 등에서 미흡한 부분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실제 1462년(세조 8) 간경도감에서는 을해자본 『능엄경』을 교정하여 목판본으로 간행하게 된다.
목판본의 간행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 않으나, ‘解脫’의 ‘解’자가 『월인석보(月印釋譜)』와 같이 ‘갱’으로 되어 ‘ㅎ항’으로 된 『법화경언해(法華經諺解)』 이후의 책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전문의 연대대로 간행년을 보고 있다. 이 때 잘못된 곳이 있는 활자본은 대부분 거두어서, 붉은 먹으로 교정하거나, 인쇄한 쪽지를 덧붙임으로써 목판본과 통일을 기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남아 있는 활자본의 대부분이 그러한 수정을 보여준다.
활자본 『능엄경언해』의 인쇄에 사용된 을해자는 1455년(세조 1) 강희안(姜希顔)의 글씨를 글자본으로 하여 만든 동활자이다. 그런데 한글 활자는 이때에 함께 주조되었다는 기록이 없으며, 『아미타경언해(阿彌陀經諺解)』와 『능엄경언해』에서 비로소 사용된 점 등을 고려할 때 1461년에 주조된 것으로 보인다. 을해자 한자 활자에는 대자, 중자, 소자가 있는데, 『능엄경언해』에서 대자는 ‘경 본문’, 중자는 ‘계환의 해’, 소자는 쌍행으로 된 ‘언해문’에 사용되었다. 한글 활자는 구결이나 언해문에서 모두 소자만 사용되었다.
이 책의 활자본은 활자 연구와 현존본의 희소가치 때문에 귀중한 자료로 다루어진다. 목판본은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최초의 언해본으로서 간경도감의 다른 언해본에 대하여 책의 형태는 물론, 번역의 양식과 정서법에 걸쳐 규범이 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번역양식은 철저한 직역인데, 원문에 한글로 구결이 달린 대문(大文)을 먼저 보이고, 이어서 번역을 쌍행으로 싣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문자와 정서법은 구결과 번역문에서 그 차이를 보이는데, 구결 표기에는 방점과 ‘ㅭ’, 각자병서(各自並書)가 나타나지 않는다.
목판본 『능엄경언해』에서는 활자본 『능엄경언해』처럼 언해의 한 글자와 한자음 표시의 한 글자가 크기가 같으나, 그 이후의 간경도감의 다른 불경언해들에서는 한자음 표시의 한 글자가 언해의 한 글자보다 좀 작으며, 행의 오른쪽에 치우쳐 있다.
목판본은 1462년에 처음 간행된 이후에 적어도 두 번의 인출이 있었다. 하나는 1472년(성종 3)의 인출로서 『원각경언해(圓覺經諺解)』, 『몽산법어(蒙山法語)』 등에 실린 그 때의 김수온의 발문에서, ‘법화경육십건 능엄경육십건 원각경 이십건(法華經六十件 楞嚴經六十件 圓覺經二十件)’과 같이 인출 서명(書名)과 부수(部數)가 밝혀져 있다. 또 하나는 1495년(연산군 1)의 인출로서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심경언해(心經諺解)』 등의 학조의 발문에 ‘번역법화경능엄경각오십건(飜譯法華經楞嚴經各五十件)’이라 되어 있다. 그런데 1472년과 1495년에 인출된 『능엄경언해』는 불교 관련 용어의 한자 독음 표시에 약간의 교정이 있었다.
문자와 정서법은 구결과 번역문에서 그 차이를 보이는데, 구결 표기에는 방점과 ‘ㅭ’, 각자병서(各自並書)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번역문에서는 반드시 방점이 나타나고, 받침의 표기에 ‘ㆍ홀띠니’ 등과 같이 받침 ‘ㅭ’이나 ‘ㄹ’과 각자병서가 쓰인다. 그 밖에는 구결과 번역문의 표기가 같은데, 순경음은 잘 쓰이지 않고, 사잇소리가 일반적으로 ‘ㅅ’으로 통일되어 표기된다.
주격형(主格形)의 표기에서는 ‘如來ㅣ, 義ㅣ, 對ㅣ’와 같이 ‘ㅣ’로 끝난 체언에 주격조사 ‘ㅣ’를 쓰고 있는 것이 특이한데, 이는 문법구조를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번역문에서는 한자마다 『동국정운(東國正韻)』에 따른 독음이 달려 있다. 발문에 의하면 이 독음은 전문가인 조변안(曺變安)과 조지(趙祉)가 달았다고 하며, 후대의 인출본들은 매목(埋木) 또는 인쇄한 글자를 오려붙이는 식으로 한자음 표기가 교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阿難’의 ‘阿’자가 ‘’에서 ‘’로, ‘般若’의 ‘般’자가 ‘반’에서 ‘’로 고쳐져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간경도감의 『법화경언해』ㆍ『금강경언해』 등에서도 완전히 일치되어 나타난다. 다른 언해본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요컨대 이 책은 간경도감의 다른 언해본에 미친 영향의 관점에서도 중요하지만, 풍부한 어휘와 문법 자료를 보이고 있으므로, 중세 국어 연구에 기본적인 문헌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대불정다라니(大佛頂陀羅尼)’라고도 한다. 『능엄경 楞嚴經』 제7권에 수록되어 있으며, 총 427구(句)이다. 이 주문은 큰 영험이 있다고 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일찍부터 널리 염송되었다.
모든 부처님이 이 주문의 근본을 깨달아서 깨달음을 얻고 마(魔)를 항복받았다고 하며, 이 주문을 근거로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주문을 외우는 중생은 모든 재앙을 물리칠 수 있고 영원히 좋은 곳에 태어나며, 모든 참회가 이루어질 뿐 아니라 마침내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어서 부처를 이룰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이 다라니를 8,000번 염송하면 무상정(無想定)에 들어가고, 모든 죄업이 소멸되며, 무량한 공덕을 성취한다고 하였다. 중국 선종에서도 이 주문은 널리 염송되어 당나라 때의 백장(百丈)은 『백장청규 百丈淸規』에서 이 주문을 외울 것을 권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고려시대에 『백장청규』와 『능엄경』이 전래되어 널리 유통됨에 따라, 교종과 선종이 모두 이 주문을 외우게 되었다. 특히, 이 주문이 깨달음의 경지인 무생법인을 얻게 하는 것이라 하여, 조선시대의 선승(禪僧)들은 저녁에 꼭 1편씩 염송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고, 오늘날에도 선원(禪院)의 수도승 중에는 매일 1편씩 독송하는 이가 많다.
이 주문을 새긴 불정다라니당(佛頂陀羅尼幢)은 평안북도 용천군 읍동면 동부동과 황해도 해주군 영동면 청풍리, 그리고 경기도 개풍군 송도면 원동 등에 남아 있다. 이것들은 모두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전부 육각형을 취하고 있으며, 높이는 5∼7척 정도이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도(道)가 시방(十方)을 덮어 가리는 것은 일불승(一佛乘)이 가장 훌륭하기 때문이고, 은덕이 사방의 나라에 두루 미치는 것은 전하께서 궁중에 계시기 때문이옵니다. 대체로 벗어남이 없는 인(仁)을 펴려고 하면, 반드시 무너짐이 없는 법에 의지해야만 하온데, 성스러운 세존께서 미묘하게 금강(金剛)에 비유하신 반야(般若)라고 불리는 위대한 경전이 있사옵니다.
세존께서 성에 들어가 걸식하시고서 원성실성법(圓成實性法)에서 뜻을 일으키려고 하시는데, 수보리(須菩提)존자가 오른 무릎을 땅에 꿇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며, 다만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잘 호념하십니다’에서 성심(誠心)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 물질과 인식작용의 토대인 육입(六入)을 근절하시고, 종자(種子)와 현행(現行), 두 의혹을 단절하셨습니다. 이미 집착이 사라지고 망정이 없어지면 공(空)이 맑아서 지혜가 나타나옵니다. 금강경 내용은 32품으로 이루어졌지만, 이치는 팔만여 학설을 거두고 있사옵니다. 실로 여래의 참된 진리의 말씀은 모두 모든 부처님의 바르고 두루 미치는 종지(宗旨)이옵니다.
欽崇至道하고 允屬熙朝인데, 矧翻宣之盛功이겠사옵니까. 待聖明이면 而必擧이옵니다.
지극한 도(道)는 흠모하여 숭상하고, 태평성세에는 진실로 가까운데, 하물며 경전을 번역해서 널리 알리는 성대한 공덕이겠사옵니까. 임금의 밝은 지혜를 기다린다면 반드시 거행될 것이옵니다.
조선의 7대 왕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불교를 선호했고 그 지식 또한 남달라, 이를 눈여겨본 세종의 곁에서 불서편찬과 불경간행을 도맡았다. [1] 1457년 묘법연화경을 간행하고 58년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꺼내 전국 사찰에 분장하였으며 59년에는 월인석보를 간행하였다. 이렇게 어느 정도 불경 간행의 업적을 쌓은 뒤 크게 마음을 먹고 유학자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1461년 설치한 기구가 간경도감이다.
간경도감은 한자로 만들어져 있어 백성들이 그동안 마음 놓고 읽을 수 없던 불경들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간행하는 기관으로 서울의 본사(本司)를 중심으로 안동부, 개성부, 상주부, 진주부, 전주부, 남원부 등 전국에 설치하여 전 백성이 우리말로 불경을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게 만들었다. 거의 대부분의 업무를 세조가 관장하였고 성종이 즉위한 후 성리학적인 이유로 폐지될 때까지 11년간 존속하며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선종영가집언해, 사법어언해, 원각경언해, 아미타경언해,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목우자수심결언해,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언해, 금강반야바라밀다경언해 등 수많은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 반야심경 또한 이 시기 언해본이 간경도감에서 만들어져 전국의 사찰과 민간인들이 쉽게 볼 수 있게 하였다.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般若波羅密多心經諺解)』는 세조 대에 한계희 등이 엮은 불경 언해서이다. 이 책은 흔히 『반야심경언해(般若心經諺解)』 또는 『심경언해(心經諺解)』라고 줄여서 부른다.
간경도감(刊經都監) 도제조(都提調)황수신(黃守身)의 『진금강경심경전(進金剛經心經箋)』과 책의 말미에 붙어 있는 한계희(韓繼禧)의 발문의 내용을 볼 때, 이 책은 세조가 손수 구결을 달고 효령대군과 한계희 등에게 명을 내려 언해하도록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찬/발간 경위
당(唐)나라 현장(玄裝)이 649년 한역(漢譯)을 한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密多心經)』에 702년 법장(法藏)현수(賢首)가 약소(略疏)를 달아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를 편찬하였다. 이어 1044년 송(宋)나라의 중희(仲希)가 주해하여 『반야심경소현정기(般若心經疏顯正記)』를 만들었는데, 『반야바라밀다심언해』는 세조와 효령대군, 한계희 등이 참여하여 이 책을 언해한 것이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은 신라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에서도 통용되었다.(『세종실록』 13년 9월 2일) 비록 조선은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았으나, 조선 초기에 불교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며 왕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세조는 효령대군과 한계희 등을 동원하여 1464년(세조 10) 간경도감에서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와 함께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언해하게 하였다.
한편 『반야바라밀다심경』은 권수 1행에 소자(小字)로 ‘반야심경소현정기(병서)(般若心經疏顯正記(幷序))’, 5행에 대자(大字)로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병인)(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幷引))’이라 하였고, 14뒷면 8행에 대자로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 하였는데 다른 불경 언해의 통칭에 비추어 『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