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당시인은 삼당(三唐)으로 줄여 부르기도 하며 이들의 시를 삼당시(三唐詩)라 한다. 삼당이라는 명칭은 임상원(任相元)이 ≪손곡집 蓀谷集≫의 서(序)에서 이들 세 사람의 문집을 합간(合刊)하여 삼당집(三唐集)이라 하였다는 기록에서부터 보인다. 이후 신위(申緯)가 <동인논시절구 東人論詩絶句>에서 다시 “재천삼당최백이(才擅三唐崔白李)”라 하였고, 그 주에 이들 세 사람을 세상에서 삼당이라 일컬는다고 하였다. 삼당시인의 가장 큰 의의는 고려 전기 이래 지속되어 온 송시풍(宋詩風)을 당시풍으로 전환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주(李冑), 김정(金淨), 신광한(申光漢), 나식(羅湜), 김인후(金麟厚), 박순(朴淳) 등이 나와 당시풍의 시를 썼으나 이러한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는데, 이들에 이르러 당시풍이 시단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송시(宋詩)의 관념적이고 이지적인 면 대신, 흥취와 여운을 중시하며 내용에 있어서도 낭만적인 경향을 띠는 것이 많다.
이달이 박순(朴淳)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교유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후 남원 광한루(廣寒樓)와 대동강의 부벽루(浮碧樓) 등에서 시회(詩會)를 가지면서 시사(詩社)로서의 성격이 형성되었다. 특히 봉은사(奉恩寺)에서 시재를 자주 겨루었다고 한다. 이달은 처음부터 당시풍을 지향한 것은 아니어서 송시풍을 선호하다가 최경창과 백광훈을 만나면서 당시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고도 한다.
이들 세 사람이 모두 당시를 배웠지만, 최경창은 청경(淸勁)하고 백광훈은 고담(枯淡)하며 이달은 부염(富艶)하다는 개성의 차이는 있다. 또 이들이 성당(盛唐)의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만당(晩唐)의 기미(綺靡)에 머물렀다는 한계도 아울러 지적되고 있으며, 모두 그 생애가 불우하여 맹교(孟郊)와 가도(價島)의 유(類)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또 율시보다는 절구에 능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출처 : 네이버고전문학사전, 권영민교수 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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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당시인(三唐詩人)의 시풍(詩風) 개괄(槪括)

◈ 삼당시인(三唐詩人)의 시풍(詩風) 개괄(槪括) 삼당시인(三唐詩人)이란 조선 중기에 세 사람의 당풍시(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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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훈(白光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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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훈은 박순(朴淳)의 문인으로 13세 되던 해인 1549년(명종 4)에 상경하여 양응정(梁應鼎)·노수신(盧守愼) 등에게서 수학하였다.

1564년(명종 19)에 진사가 되었으나 현실에 나설 뜻을 버리고 강호(江湖)에서 시와 서도(書道)로 자오(自娛)하였다. 1572년(선조 5)에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백의(白衣)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시재(詩才)와 서필(書筆)로써 사신을 감탄하게 하여 백광선생(白光先生)의 칭호를 얻었다.

백광훈은 1577년(선조 10)에 처음으로 선릉참봉(宣陵參奉)으로 관직에 나서고, 이어 정릉(靖陵)·예빈시(禮賓寺)·소격서(昭格署)의 참봉을 지냈다. 그는 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리었다. 송시(宋詩)의 풍조를 버리고 당시(唐詩)를 따르며 시풍을 혁신하였다고 해서 그렇게 일컬었다.

송시냐 당시냐 하는 시비는 아주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삼당시인들은 송시가 자연스런 감동에서 멀어지고 인정이나 세태의 절실한 경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을 지적하고, 방향전환을 위해서 당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백광훈의 시는 당풍(唐風)을 쓰려고 노력하였고, 풍류성색(風流聲色)을 중시하여 자못 낭만적이고 염일(艶逸)한 시풍(詩風)을 지녔던 것이다. 이정구(李廷龜)는 그의 문집 서(序)에서 백광훈은 손꼽히는 호남시인으로 특히 절구(絶句)를 잘하여 당나라의 천재시인 이하(李賀)에 비견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의 시는 천기(天機)로 이루어진 것이라 평하였다. 백광훈은 이산해(李山海)·최립(崔岦) 등과 더불어 팔문장(八文章)의 칭호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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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창(崔慶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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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창은 백광훈(白光勳) · 이후백(李後白)과 함께 양응정(梁應鼎)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555년(명종 10) 17세 때에 을묘왜란으로 왜구를 만나자, 퉁소를 구슬피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일화가 있다.

1561년(명종 16) 23세 때부터 상상(上庠)에서 수학했다. 1568년(선조 1)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가 됐다. 예조 · 병조의 원외랑(員外郎)을 거쳐 1575년(선조 8)에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1576년(선조 9) 영광군수로 좌천됐다. 이때에 뜻밖의 발령에 충격을 받고 사직했다. 그 뒤에 가난에 시달렸다.

다음해에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복직했다. 1582년(선조 16) 43세에 선조가 종성부사(鍾城府使)로 특별히 제수했다. 그러나 북평사의 무고한 참소가 있었고 대간에서 갑작스러운 승진을 문제 삼았다. 그래서 선조는 성균관직강으로 고치도록 명했다. 최경창은 상경 도중에 종성객관에서 죽었다. 저서로 『고죽유고』가 있다.

최경창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이이(李珥) · 송익필(宋翼弼) · 최립(崔岦) 등과 무이동(武夷洞)에서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또한 정철(鄭澈) · 서익(徐益) 등과 삼청동에서 교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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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李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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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은 당시의 유행에 따라 송시(宋詩)를 배우고 정사룡(鄭士龍)으로부터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그러나 박순(朴淳)은 그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이류로 떨어진 것이다.”라고 깨우쳤다. 그리고 이백(李白)의 악부(樂府)·가(歌)·음(吟)과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보여주었다.

이에 그는 이백·왕유·맹호연의 시를 보고 시의 오묘한 이치가 그들의 작품에 있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 당시를 열심히 익혔다. 『이태백집(李太白集)』과 성당십이가(盛唐十二家: 당나라 때의 유명한 열두 명의 시인)의 글, 유우석(劉禹錫)과 위응물(韋應物)의 시, 양백겸(楊伯謙)의 『당음(唐音)』 등을 모두 외웠다고 전한다. 이렇게 5년 동안 열심히 당시를 배우자, 시풍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비슷한 품격의 시를 쓰던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은사(奉恩寺)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모였다. 임제(林悌)·허봉(許愼)·양대박(梁大樸)·고경명(高敬命) 등과도 자주 어울려 시를 지었다.

김종직 1431-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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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집 [김종직 1431-1492] 시집 제1권 [시(詩)] 53편

점필재집 [김종직 1431-1492] 시집 제1권 [시(詩)] 53편     [시(詩)] 53편 1 진주 권 양구의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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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년 이월 이십 팔일에 직산의 성환역에서 묵는데, 제주에서 약물을 진공하러 온 김극수란 사람도 왔기에, 인하여 밤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곳의 풍토와 물산을 대략 물어보고 마침내 그 말을 기록하여 탁라가 십사 수를 짓다[乙酉二月二十八日宿稷山之成歡驛濟州貢藥人金克修亦來因夜話略問風土物産遂錄其言爲賦乇羅歌十四首]

 

여관서 막 만났어도 마치 서로 친한 듯한데 / 郵亭相揖若相親

겹겹의 보자기엔 갖가지 약물 진기도 해라 / 包重般般藥物珍

옷에선 비린내 나고 언어는 간삽하니 / 衣袖帶腥言語澁

보건대 그대는 진정 바다 안 사람이구려 / 看君眞是海中人

 

당초의 세 사람은 바로 신인이었는데 / 當初鼎立是神人

서로 짝지어 해뜨는 동쪽에 와서 살았네 / 伉儷來從日出濱

백세토록 세 성씨만 서로 혼인을 한다 하니 / 百世婚姻只三姓

듣건대 그 유풍이 주진촌과 비슷하구려 / 遺風見說似朱陳

 

성주는 이미 죽고 왕자도 끊어져서 / 星主已亡王子絶

신인의 사당 또한 황량하기만 한데 / 神人祠廟亦荒涼

세시엔 부로들이 아직도 옛 일을 추모하여 / 歲時父老猶追遠

광양당에서 퉁소와 북을 다투어 울리누나 / 簫鼓爭陳廣壤堂

 

바닷길이 어찌 수천 리만 되리오마는 / 水路奚徒數千里

해마다 왕래하여 일찍부터 잘 아는지라 / 年年來往飽曾諳

구름 돛을 걸고서 쏜살같이 달리어 / 雲帆掛却馳如箭

하룻밤의 순풍에 해남을 당도하누나 / 一夜便風到海南

 

한라산의 푸른 기운 방사와 통하여라 / 漢拏縹氣通房駟

물풀 사이에 아침 놀이 활짝 걷혔네 / 雲錦離披水草間

한번 호원에서 목장을 주관한 이후로 / 一自胡元監牧後

준마들이 해마다 황실로 들어갔다오 / 驊騮歲歲入天閑

 

오매며 대모이며 검은 산호에다 / 烏梅玳瑁黑珊瑚

부자며 청피는 천하에 없는 것이니 / 附子靑皮天下無

물산만이 동방의 부고일 뿐 아니라 / 物産非惟東府庫

그 정수가 다 사람 살리는 데로 들어간다오 / 精英盡入活人須

 

대합조개며 해파리며 석화에다 / 車螯海月與蠔山

농어며 문린 이외에 또 몇 가지이던고 / 巨口文鱗又幾般

해 저물면 비린 연기가 향정을 덮어라 / 日暮腥煙冪鄕井

수우의 수많은 배들이 생선 싣고 돌아오네 / 水虞千舶泛鮮還

 

집집마다 귤과 유자 가을 서리에 잘 익어 / 萬家橘柚飽秋霜

상자마다 가득 따 담아 바다를 건너오는데 / 採著筠籠渡海洋

고관이 이를 받들어 대궐에 진상하면 / 大官擎向彤墀進

빛과 맛과 향기가 완연히 그대로라네 / 宛宛猶全色味香

 

사군의 수레와 기마대가 길이 포위하여라 / 使君車騎簇長圍

꿩 토끼 고라니 노루 온갖 짐승이 쓰러지네 / 雉兔麇麚百族披

해도엔 다만 곰과 범과 표범이 없어 / 海島但無熊虎豹

숲에서 노숙을 해도 놀래킬 것 없다오 / 林行露宿不驚疑

 

뜨락의 풀밭에서 전룡을 만나면은 / 庭除草際遇錢龍

분향하고 축주 올리는 게 그 지방 풍속인데 / 祝酒焚香是土風

육지 사람들 놀라며 서로 다퉈 비웃으면서 / 北人驚怕爭相笑

도리어 오공이 죽통에 든 걸 원망한다오 / 還怨吳公在竹筒

 

여염집 자제들이 태학에 유학하여 / 閭閻子弟游庠序

학문으로 많은 인재 길러짐을 기뻐하노니 / 絃誦而今樂育多

큰 바다라서 어찌 지맥이야 끊어졌으랴 / 滄海何曾斷地脈

높은 인재가 이따금 문과에도 오른다오 / 翹材往往擢巍科

 

두무악의 위에 있는 영추의 물은 / 頭無岳上靈湫水

가물어도 안 마르고 비가 와도 불지 않는데 / 旱不能枯雨不肥

천둥 벼락과 구름이 별안간에 발생하나니 / 霹靂雲嵐生造次

노는 이가 뉘 감히 신의 위엄을 가벼이 보리 / 遊人疇敢褻神威

 

화태도의 서쪽은 물이 서로 부딪치어 / 火脫島西水相擊

풍뢰를 뿜어대고 성난 파도가 하도 높아 / 風雷噴薄怒濤高

만곡의 크나큰 배가 비스듬히 가노라면은 / 萬斛海鰌傾側過

나그네의 목숨은 가볍기 그지없다오 / 行人性命若鴻毛

 

순풍 기다리며 조천관에 머무노라면 / 候風淹滯朝天館

처자들이 서로 만나 술잔을 권하는데 / 妻子相看勸酒盃

한낮에도 이슬비 부슬부슬 내리나니 / 日中霢霂霏霏雨

알건대 이는 고래가 기를 뿜어서라네 / 知是鰍魚噴氣來

 

[주D-001]당초의 세 사람은……신인이었는데 : 제주도(濟州島)에는 맨처음 양을나(良乙那)·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라는 세 사람이 있어 그 땅에 나누어 살면서 그 사는 곳을 도(都)라고 이름하였는데, 신라(新羅) 때에 고을나의 후손 고후(高厚)가 그 두 아우와 함께 바다를 건너서 신라에 조회하니, 왕이 기뻐하여 고후에게는 성주(星主)란 호칭을 주고, 그 둘째 아우는 왕자(王子)라 하고, 끝 아우는 도내(都內)라 하고, 나라 이름을 탐라(耽羅)라 했다고 한다.

[주D-002]주진촌 : 옛날 중국 서주(徐州)의 주진촌에는 주씨와 진씨만이 살면서 대대로 통혼(通婚)을 하며 서로 의좋게 살았다는 데서 온 말이다.

[주D-003]광양당 : 제주도 남쪽 호국신사(護國神祠)의 당명(堂名)임. 전설에 이르기를 “한라산신(漢拏山神)의 아우가 나서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고 죽어서는 신이 되었다. 고려(高麗) 때에 송(宋) 나라 호종단(胡宗旦)이 와서 이 땅을 압양(壓禳)하고 배를 타고 돌아가는데, 그 신이 매로 변화하여 돛대 머리에 날아오르더니, 이윽고 북풍이 크게 불어 호종단의 배를 쳐부숨으로써 호종단은 끝내 비양도(飛揚島) 바위 사이에서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그 신의 신령함을 포창하여 식읍(食邑)을 주고 광양왕(廣壤王)을 봉하고 나서 해마다 향(香)과 폐백을 내려 제사하였고, 본조(本朝)에서는 본읍(本邑)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했다.”고 하였다.

[주D-004]방사 : 거마(車馬)를 관장한다는 별 이름이다.

[주D-005]호원에서 목장을 주관 : 원(元) 나라 때에 제주도를 거마(車馬)를 관장하는 방성(房星)의 분야(分野)라 하여 이 곳에 말의 목장(牧場)을 두고 단사관(斷事官)이나 만호(萬戶)를 두어 목축을 주관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6]수우 : 본디 소지(沼池)나 하천(河川)을 맡은 관명인데, 여기서는 곧 해산물(海産物)을 관장하는 기관을 가리킨 말이다.

[주D-007]전룡 : 큰 뱀을 말하는데, 용(龍)의 일종이라고도 한다.

[주D-008]두무악 : 한라산(漢拏山)의 이칭이다.

[주D-009]조천관 : 제주도 세 고을을 경유하여 육지로 나가는 자는 모두 여기에서 바람을 기다리고, 전라도를 경유하여 세 고을로 들어오는 자도 모두 이 곳과 애월포(涯月浦)에 배를 댄다고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다산 선생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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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_ 다산 정약용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늙은이의 한 가지 즐거움(老人一快事)'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년)의 시집 '송파수작(松坡酬酢)’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나이 71세 때(75세에 서거)에 쓴 것으로서, 늙음에 따른 신체의 변화를 겸허하고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달관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요 내용은.. 1수에서 머리카락이 없어지니 감고 빗질하는 수고도 없고 백발의 부끄러움도 없다고 하며 민둥머리를 예찬하고, 2수에서는 치아가 다 빠져도 음식을 씹고 삼키는 데 지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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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_ 다산 정약용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늙은이의 한 가지 즐거움(老人一快事)'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년)의 시집 '송파수작(松坡酬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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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_ 다산 정약용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늙은이의 한 가지 즐거움(老人一快事)'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년)의 시집 '송파수작(松坡酬酢)’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나이 71세 때(75세에 서거)에 쓴 것으로서, 늙음에 따른 신체의 변화를 겸허하고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달관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요 내용은..

1수에서 머리카락이 없어지니 감고 빗질하는 수고도 없고 백발의 부끄러움도 없다고 하며 민둥머리를 예찬하고,

2수에서는 치아가 다 빠져도 음식을 씹고 삼키는 데 지장이 없고 무엇보다 치통이 없어졌음을 즐거워 하고,

3수에서는 눈이 어두어지니 책 읽어야 할 부담이 없어지고 좋은 경치를 보고 즐기게 되며,

4수에서는 귀가 들리지 않아 세상의 시비 다툼을 듣지 않게 됨을 노래하고

5수에서는 붓 가는 대로 미친 말을 마구 써도 퇴고할 필요도 없고 남의 비평에 신경 쓰지 않아서 좋고,

6수에서는 손님과 바둑을 두는 일을 꼽으며, 만만한 상대만을 골라 두며 편안히 즐김을 읊고 있다.

[출처] 강진 사의재(四宜齋)/文前대통령,‘사의재’ 출범/정약용,'自笑'|작성자 은자

1.

老人一快事

로인일쾌사,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髮鬜良獨喜

발간량독희, 민둥머리가 참으로 유독 좋아라 

髮也本贅疣

발야본췌우,머리털은 본디 군더더기이건만 

處置各殊軌

처치각수궤, 처치하는 데 각각 법도가 달라 

無文者皆辮,

무문자개변, 예문 없는 자들은 땋아 늘이고 

除累者多薙

제루자다치, 귀찮게 여긴 자들은 깎아 버리는데 

髻丱計差長

계관계차장, 상투와 총각이 조금 낫기는 하나 

弊端亦紛起

폐단역분기, 폐단이 또한 수다하게 생기었고 

巃嵷副編次

롱종부편차, 높다랗게 어지러이 머리를 꾸미어라 

雜沓笄總縰

잡답계총쇄, 쪽 짓고 비녀 꽂고 비단으로 싸도다 

網巾頭之厄

망건두지액, 망건은 머리의 재액이거니와 

罟冠何觸訾

고관하촉자, 고관은 어이 그리 비난을 받는고 호원(胡元)의 관이다. 

今髮旣全無

금발기전무, 이제는 머리털이 하나도 없으니 

衆瘼將焉倚

중막장언의, 모든 병폐가 어디에 의탁하리오 

旣無櫛沐勞

기무즐목로, 감고 빗질하는 수고로움이 없고 

亦免衰白恥

역면쇠백치, 백발의 부끄러움 또한 면하여라 

光顱皓如瓠

광로호여호, 빛나는 두개골은 박통같이 희고 

員蓋應方趾

원개응방지, 둥근 두상이 모난 발에 어울리는데 

浩蕩北窓穴

호탕북창혈, 널따란 북쪽 창 아래 누웠노라면 

松風洒腦髓

송풍쇄뇌수, 솔바람 불어라 머릿골이 시원하구려 

塵垢馬尾巾

진구마미건, 말총으로 짠 때묻은 망건일랑 

摺疊委箱裏

접첩위상리, 꼭꼭 접어 상자 속에 버려 두나니 

平生拘曲人

평생구곡인, 평생을 풍습에 얽매이던 사람이 

乃今爲快士

내금위쾌사, 이제야 쾌활한 선비 되었네그려 

[주-D001] 고관(罟冠) : 고고관(罟罟冠)의 준말로, 원(元) 나라 시대에 귀부인(貴婦人)들이 착용했다고 한다.

 

2.

老人一快事

로인일쾌사,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齒豁抑其次

치활억기차, 치아 없는 게 또한 그 다음이라 

半落誠可苦

반락성가고, 절반만 빠지면 참으로 고통스럽고 

全空乃得意

전공내득의, 완전히 없어야 마음이 편안하네 

方其動搖時

방기동요시, 한창 움직여 흔들릴 적에는 

酸痛劇芒刺

산통극망자, 가시로 찌른 듯 매우 시고 아파서 

鍼灸意無靈

침구의무령, 침 놓고 뜸질해도 끝내 효험은 없고 

鑽鑿時出淚

찬착시출루, 쑤시다가는 때로 눈물이 났었는데 

如今百不憂

여금백불우, 이제는 걱정거리 전혀 없어 

穩帖終宵睡

온첩종소수, 밤새도록 잠을 편안히 잔다네 

但去鯁與骨

단거경여골, 다만 가시와 뼈만 제거하면은 

魚肉無攸忌

어육무유기, 어육도 꺼릴 것 없이 잘 먹는데 

不唯呑細聶

불유탄세섭, 잘게 썬 것만 삼킬 뿐 아니라 

兼能吸大胾

겸능흡대자, 큰 고깃점도 능란히 삼키거니와 

兩齶久已堅

량악구이견, 위아래 잇몸 이미 굳은 지 오래라 

頗能截柔膩

파능절유니, 제법 고기를 부드럽게 끊을 수 있으니 

不以無齒故

불이무치고, 그리하여 치아가 없는 것 때문에 

悄然絶所嗜

초연절소기, 쓸쓸히 먹고픈 걸 끊지 않는다오 

山雷乃兩動

산뢰내량동, 다만 턱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여 

嗑嗑差可愧

합합차가괴, 씹는 모양이 약간 부끄러울 뿐일세 

自今人病名

자금인병명, 이제부터는 사람의 질병 이름이 

不滿四百四

불만사백사, 사백 네 가지가 다 안 되리니 

快哉醫書中

쾌재의서중, 유쾌하도다 의서 가운데에서 

句去齒痛字

구거치통자, 치통이란 글자는 빼 버려야겠네 

 

3.

老人一快事

로인일쾌사,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眼昏亦一快

안혼역일쾌, 눈 어두운 것 또한 그것이라 

不復訟禮疏

불부송례소, 다시는 예경 주소 따질 것 없고 

不得硏易卦

부득연역괘, 다시는 주역 괘사 연구할 것도 없어 

平生文字累

평생문자루, 평생 동안 문자에 대한 거리낌을 

一朝能脫灑

일조능탈쇄, 하루아침에 깨끗이 벗을 수 있네 

生憎汲古板

생증급고판, 급고각 판본은 가증스럽기도 해라 

蠅頭刻纖芥

승두각섬개, 자디잔 글자를 티끌처럼 새겼는데 

六卿郊外去

륙경교외거, 육경은 교외로 나갔거니와 

再閏何時掛

재윤하시괘, 재윤은 어느 때에 걸 것인고 

嗟哉望經注

차재망경주, 슬프다, 경문의 주석을 엿보건대 

後人依樣畫

후인의양화, 후인들은 옛사람 본만 따라서 

唯知駁宋理

유지박송리, 송 나라 이학 반박할 줄만 알고 

不恥承漢註

불치승한주, 한대의 오류 답습함은 수치로 안 여기네 

如今霧中花

여금무중화, 이젠 안개 속의 꽃처럼 눈이 흐리니 

無煩雙決眥

무번쌍결자, 눈초리를 번거롭게 할 것 없고 

是非旣兩忘

시비기량망, 옳고 그름도 이미 다 잊었는지라 

辨難隨亦懈

변난수역해, 변난하는 일 또한 게을러졌으나 

湖光與山色

호광여산색, 강호의 풍광과 청산의 빛으로도 

亦足充眼界

역족충안계, 또한 안계를 채우기에 충분하다오 

 

4.

老人一快事

로인일쾌사,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耳聾又次之

이롱우차지, 귀먹은 것이 또 그 다음이로세 

世聲無好音

세성무호음, 세상 소리는 좋은 소리가 없고 

大都皆是非

세성무호음, 모두가 다 시비 다툼뿐이나니 

浮讚騰雲霄

부찬등운소, 칭찬은 하늘에까지 추어올리고

虛誣落汚池

허무락오지, 헛 무함은 구렁텅이로 떨어뜨리며 

禮樂久已荒

례락구이황, 예악은 황무한 지 이미 오래이어라 

儇薄嗟群兒

현박차군아, 아, 약고 경박한 뭇 아이들이여 

譻譻螘侵蛟

앵앵의침교, 개미가 떼지어 교룡을 침범하고 

喞喞鼷穿獅

즐즐혜천사. 생쥐가 사자를 밟아 뭉개도다 

不待纊塞耳

부대광색이, 그러나 귀막이 솜을 달지 않고도 

霹靂聲漸微

벽력성점미, 천둥소리조차 점점 가늘게 들리고 

自餘皆寂寞

자여개적막, 그 나머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黃落知風吹

황락지풍취, 낙엽을 보고야 바람이 분 줄을 아니 

蠅鳴與蚓叫

승명여인규, 파리가 윙윙대거나 지렁이가 울어 

亂動誰復知

란동수복지, 난동을 부린들 누가 다시 알리오 

兼能作家翁

겸능작가옹, 겸하여 가장 노릇도 잘할 수 있고 

塞黙成大癡

색묵성대치, 귀먹고 말 못해 대치(大癡)가 되었으니 

雖有磁石湯

수유자석탕, 비록 자석탕 같은 약이 있더라도 

浩笑一罵醫

호소일매의, 크게 웃고 의원을 한번 꾸짖으리 

5.

老人一快事

로인일쾌사,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縱筆寫狂詞

종필사광사, 붓 가는 대로 미친 말을 마구 씀일세 

競病不必拘

경병불필구, 경병을 굳이 구애할 것이 없고 

推敲不必遲

퇴고불필지, 퇴고도 꼭 오래 할 것이 없어라 

興到卽運意

흥도즉운의, 흥이 나면 곧 이리저리 생각하고 

意到卽寫之

의도즉사지, 생각이 이르면 곧 써내려 가되 

我是朝鮮人

아시조선인, 나는 바로 조선 사람인지라 

甘作朝鮮詩

감작조선시, 조선시 짓기를 가장 좋아한다네.

卿當用卿法

경당용경법, 누구나 자기 법을 쓰는 것인데 

迂哉議者誰

우재의자수, 오활하다 비난할 자 그 누구리오 

區區格與律

구구격여률, 그 구구한 시격이며 시율을 

遠人何得知

원인하득지, 먼 데 사람이 어찌 알 수 있으랴 

凌凌李攀龍

릉릉리반룡, 능가하기 좋아하는 이반룡은 

嘲我爲東夷

조아위동이, 우리를 동이라고 조롱했는데 

袁尤槌雪樓

원우퇴설루, 원굉도는 오히려 설루를 쳤으나 

海內無異辭

해내무이사, 천하에 아무도 다른 말이 없었네 

背有挾彈子

배유협탄자, 등 뒤에 활을 가진 자가 있거늘 

奚暇枯蟬窺

해가고선규, 어느 겨를에 매미를 엿보리오 

我慕山石句

아모산석구, 나는 산석의 시구를 사모하노니 

恐受女郞嗤

공수녀랑치, 여랑의 비웃음을 받을까 염려로세 

焉能飾悽黯

언능식처암, 어찌 비통한 말을 꾸미기 위해 

辛苦斷腸爲

신고단장위, 고통스레 애를 끊일 수 있으랴 

梨橘各殊味

리귤각수미, 배와 귤은 맛이 각각 다르나니 

嗜好唯其宜

기호유기의, 오직 자신의 기호에 맞출 뿐이라오.

https://kydong77.tistory.com/20875

정약전은 흑산도에 유배당함.

https://www.youtube.com/watch?v=IkUQfsVl90g

 

[참고] 名物學 - 해양생물 백과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名物學의 전개와 성격

명물학의 유행은 조선 후기 문화계의 특기할 만한 현상의 하나이다. 명물학은 명물도수학 혹은 명물고증학 등으로 불리며 18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그간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외부 사물의 정보를 수집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취합한 정보를 정리한 저술이 나타났다. 명물학 자체가 反성리학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명물학은 성리학적인 토대를 흔들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명물학의 그러한 위험성을 간파하였던 정조는 학술 정책을 통해 명물학의 성격을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는 세도가들이 경세와는 거리가 먼 명물고증학에 심취한 가운데 일부 지식인들은 정조의 정책을 계승하여 명물고증학의 확산에 대응하였다. 명물학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연구하려는 움직임과 그것을 견제하려는 시도가 교차하면서 명물학은 전개되었다. 명물학의 유행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이와 관련한 연구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명물학은 조선 후기의 사상사 내지 문화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검토해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491598

조선전기 전남지역의 유배지는 珍島 濟州島뿐이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이르면 고금도·나로도·녹도·돌산도·발포·여도·임자도·신지도·지도·흑산도 등이 새로운 유배지로 추가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PtbzZYTKYZo

 
 
 
 
 
 
 
 
 
 

5.18 유공자단체, 대통령실에 청원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3/01/18/2023011800163.html

 

 

[참고]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작품부터 읽어 봅니다.

https://kydong77.tistory.com/5489

 

001 관저 /주남

은자주]시경 주자주 원문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이윤숙님의 아래 주소창에서 이전해 덧붙인다. http://www.tae11.org/>고전강의>시경 원문 http://blog.naver.com/bhjang3/140035480672 001 國風(국풍)周南(주..

kydong77.tistory.com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sy1851&logNo=221691011766&parentCategoryNo=&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다산 정약용의 시경론 및 시의식

다산 정약용의 시경론 및 시의식 - <관저(관저)>장(장)을 중심으로 - 전경원(건국대강사) 1. 서론 시...

blog.naver.com

 

[췌언] 문장의 호흡이 길어 읽기 편하게 의미 단위를 중심으로 운영자가 행 바꾸기를 한 점 양해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bhjang3/140034950338

다산정약용의 시경(詩經)론 및 詩意識

- <관저(關雎)>장(章)을 중심으로 -

ㅡ 전경원(건국대강사)

 

1. 서론

* 茶山은 조선후기의 실학자로서 여러 방면에서 연구되고 있다.

그의 詩觀 또한 연구의 대상이 되는데는 이상할 것도 없다.

전경원의 "茶山의 詩"의 학술연구의 한 논문을 발췌하여 옮겨본다

시(詩)를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과거 선인들에게 시(詩)를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잠시라도 게을리 할 수 없는 소중한 공부였다.

그런 이유로 과거 많은 지식인들은 끊임없이 시(詩)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역시 시(詩)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철저한 자세로 고증(考證)하고 훈고(訓)했던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다산은 우리에게 철학가이자 사상가로서 더욱 알려져 있기에 문학 분야에서의 조명은

여타의 분야에 비해 비교적 연구가 한산한 편이다.

특히 다산은 정조 임금 당시에 행해졌던『시경강의(詩經講義)』를 통해

그의 시론(詩論)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경론(詩經論)에 대한 연구보다는 그가 남긴 2,487수의 시작품만을 중심으로 연구성과가 일정 정도 마련되어 있을 뿐이다.

그나마 시경론(詩經論)에 주목한 논의로는 김흥규와 심경호, 이병찬 등의 연구성과가 마련되어 있을 정도이다.

김흥규의 논의는 최초이자 본격적으로 다산의『시경강의(詩經講義)』와 일련의 저서에 주목하면서,

시론과 시세계의 관련성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다산 시경론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의의가 인정된다.

그러나 연구방향이 통시적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졌기 때문에 우리나라 시경론의 사적 고찰은 가능했지만

다산만의 시경론과 시작품 사이의 관련성을 심도있게 서술하지는 못하고 개략적인 수준에서 머물고 말았다.

심경호의 논의는 다산의 "시경강의"에 주목했다기 보다는

청나라의 "모기령"의 학설과 다산의 학설을 비교하여 그 영향 관계를 규명하고자 했기 때문에

다산의 시경론과 그의 시세계의 상관성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이병찬의 연구는 최근까지 진행된 우리나라 시경론의 성과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논의에서는 한국 시경론의 사적 개관을 통해서 시경론의 쟁점이 되어 온

"시서설(詩序說)"과 "음시설(淫詩說)"의 문제,

국풍(國風)의 체재(體裁)와 차서론(次序論)

그리고 국풍의 해석과 부비흥(賦比興)의 문제 등을 심도있게 논의했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도 역시 다산의 시경론이 부분적으로 소개되고 있을 뿐,

집중적인 논의는 이루어지 못했고, 아울러 시 작품과의 상관성을 다루지 못했다.

이 외에도 다산의 문학적 성과를 논의한 연구성과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된다.

이 논문에서는 그간 선행연구를 통해 마련된 한국 시경론의 사적 전개 과정을 토대로 하되,

그 가운데에서 다산 정약용의 시경론(詩經論)만이 갖고 있는 시사적 위치와 의의를 고찰하는 동시에

그의 작품세계와 시경론(詩經論)과의 관련성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2. 다산(茶山)의 시경론(詩經論)과 <관저(關雎)>장의 해석

다산 시경론(詩經論)의 핵심은 <관저(關雎)>편의 해설을 통해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주자는 『시경집전(詩經集傳)』에서 <관저>를 "후비(后妃)의 덕(德)"을 찬미(讚美)하는 작품으로 해석한 반면에

다산은 <관저(關雎)>를 풍자시로 파악한다.

다산의 견해가 주자와 정면으로 대립되는 지점이다.

이는 시경 전체의 해석에서 첨예한 대립으로 이어지는 "미자설(美刺說)"이 제기된 지점이다.

과연 <관저>편을 찬미시(讚美詩)로 해석해야 하는가?

아니면 풍자시(諷刺詩)로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집약된다.

그렇다면 다산은 어째서 당대의 보편적이자 타당하다는 견해였던 "미시설(美詩說)"을 인정하지 않고,

"풍자설(諷刺說)"을 주장하게 된 것인지 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제기된다.

이는 『시경(詩經)』을 포함하여 경학을 인식하는 다산의 관점과

시경 관련 기사의 수용 및 인식 과정을 통해 구체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다산은 시경(詩經)을 포함한 경학(經學) 연구에서 일정한 태도와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임금이 "모든 경서(經書)의 목록 중에 십삼경(十三經)이 제일 첫머리에 있다.

십삼경(十三經)은 진실로 도덕(道德)이 담겨있는 풀무요, 문예(文藝)가 실려 있는 깊은 못이요, 큰 바다이다.

그 전수(傳受)의 원류와 전주(箋注)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모두 자세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라며

십삼경(十三經)에 대하여 물음을 던지자 다음과 같이 답을 개진해 올린다.

다신은 대답합니다.

신이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건대, 경서(經書)들을 해석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전하여 들은 것으로,

둘째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셋째는 자기의 의사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사로 해석한 것은 아무리 천백년 뒤에 출생하였어도

천백년 이상의 것을 초월하여 능히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中略...

무릇 한(漢)나라 때의 선비들이 위(魏)·진(晉) 시대의 선비보다 낫고,

위·진 시대의 선비들이 수(隨)·당(唐) 시대의 선비들보다 낫다는 것은,

옛 사람들은 모두 현명하고 지금 사람들은 모두 못나서가 아닙니다.

이는 시대의 원근(遠近)과 사승(師承)의 친소(親疎)의 차이가 서로 상대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거리가 동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삼경의 원래 뜻을 연구하려면 그 주소(注疏)를 버리고서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자가『시경』,『서경』의 집전(集傳)과 『논어』,『맹자』의 집주(集注) 등을 만들 적에

그 의리(義理)의 조리나 도학(道學)의 맥락 등에 있어서는

실로 자신의 의사로써 초월하여 입증하고 주소(注疏)와는 들쭉날쭉한 점이 없지 않지만,

그러나 글자의 뜻을 풀이하거나 장구(章句)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전적으로 주소를 인용했습니다.

주자의 뜻은 한 사람이나 한 학파의 말만 가지고 싸워 이겨서

천하의 학문을 변혁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아, 그런데 지금의 학자들은 모두 주자의 칠서대전(七書大全)이 있는 줄만 알지,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춘추(春秋)』와 『의례(儀禮)』, 『주례(周禮)』, 『예기(禮記)』등의 천지에 빛나는 글도

칠서(七書)의 목록에 배열되지 않았다 해서 그들을 폐기하여 강론하지 않으며, 도외시하여 들여놓지도 않으니,

이는 참으로 유학(儒學)의 큰 걱정거리이며, 세상의 교화에도 시급한 문제입니다."

(...이하생략)

인용문의 언급과 같이 다산이 경학(經學)을 연구하는 기본 자세는 경전의 근본에 충실함으로써

경전이 지니고 있는 참된 의미에 다가설 수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 보더라도 위(魏)·진(晉)시대보다는

한(漢)나라 때의 논의가 실상과 부합되는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등의 관점을 통해,

이른 시기에 전해진 기록들이 더욱 신빙성 있음을 제시하면서,

주자가 정리한 "칠서(七書)"에만 집착하는 경학 연구 자세를 비판하고 있다.

이는 설득력 있는 견해로서 다산의 경학 연구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본 인식에 해당한다.

이처럼 근본에 충실하고자 했던 다산의 경학 연구자세는

송나라 때의 주자가 정리한 『시경집전(詩經集傳)』에 입각해서 논의를 진행하되,

주자의 논리만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자의 논리 가운데도 의문나는 사항이 있으면

다양한 문헌을 널리 참고해서 철저하게 고증하는 과정을 통해 주자가 지녔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학문 자세는 당대의 주자 존숭의 맹목적 태도와는 구별되는

다산 정약용의 학문적 특징이 드러나는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같은 점은 주자의『시경집전(詩經集傳)』을 토대로 분석하되,

많은 부분에서 한(漢)대 삼가시(魯詩, 齊詩, 韓詩) 계열의 논의와

십삼경(十三經) 가운데 시경과 관련된 언급에 더욱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염두하고 본다면

다산이 반주자학적 견해를 지니고 있다는 시각은 지나치게 도식적 사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주자의『시경집전(詩經集傳)』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선진유학에 주목하면서 거시적 안목으로 역대의 시경론 전체를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다산은 맹자의 "왕자(王者)의 자취가 종식됨에 시(詩)가 없어졌으니,

시(詩)가 없어진 뒤에 『춘추(春秋)』가 지어졌다."라는 언급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맹자의 이 언급은 『시경(詩經)』이 지니고 있었던 본래의 기능과 의미가

세태의 변화로 말미암아 자기 고유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공자께서 『시경(詩經)』을 대신해서 『춘추(春秋)』를 지었다는 인식이다.

이같은 언급은 다산의 시경론 형성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맹자의 논리대로라면 『춘추(春秋)』는 "포폄( 貶)"을 생명으로 한다.

그렇다면 시경 역시 "포폄( 貶)"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칭송하고 높일만한 것은 높이는 것이 "포( )"이고, 떨어뜨리고 평가절하 하는 것이 "폄(貶)"이다.

『시경』이 제 기능을 발휘하던 시대에는 "포폄( 貶)"이 가능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공자가『춘추(春秋)』를 지었다는 논리인 셈이다.

이는 당대의 『시경(詩經)』이 지니고 있었던 의미가

오늘날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시경(詩經)』의 개념과는

그 시간적 거리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본질적 의미였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산이 『시경강의(詩經講義)』를 집필하게 된 동기는 그의 나이 48세가 되던 1809년에 작성한 글에서

"건륭 신해년(1791년) 가을 구월에 내원(內苑)에서 활쏘기를 시험했는데,

내가 명중하지 못하여 벌로 북영(北營)에서 숙직하였다.

얼마 후에 정조께서 시경조문 800여장을 내려주시며

나에게 조목조목 대답하되, 40일 이내에 올리도록 하였다.

나는 기한을 20일 더 늘려달라고 빌어서 임금님께 윤허를 받았다.

조문을 완성하여 개진해 올렸더니 임금님의 평이 찬란하게 빛났다.

임금님의 격려가 융성하고 무거웠으며 조문마다 품평해 주심이 모두 나의 분수를 지나쳤다."

라고 하면서 지난 일을 회고하며 소개했다.

1809년 기사년에 작성된『시경강의(詩經講義)』원고는

처음 작성한 1791년의 원고 내용을 정리한 후에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조문의 수가 800여장이라 했으나 500장을 조금 넘는 수의 조문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아

1791년 당시 정조가 내린 시경조문은 800여장이었는데,

이를 다산이 다시 첨삭하고 정리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1791년 신해년 겨울에 작성한 『시경강의(詩經講義)』서문(序文) 가운데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詩)란 맑게 성음과 용모나 말과 안색 밖에서 읊어야만 그 말의 맥락이 언뜻언뜻 나타나므로,

일문일답(一問一答)하는 기사문(記事文)과 같이 평범하게 그 뜻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글자의 뜻을 잘못 해석하면 한 구(句)의 뜻이 어두워지고,

한 구의 뜻을 잘못 해석하면 한 장(章)의 뜻이 어지러워지고,

한 장의 뜻을 잘못 해석하면 한 편(篇)의 뜻이 이미 서로 멀리 동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소서(小序)가 폐해진 뒤에 한마디 말도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훈고(訓詁)에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돕는(許與) 자가 적은 사람은 말이 꺽이게 되고,

후원이 많은 자의 말은 사리가 펴지게 되는 것이다.

경서를 해석하는 이가 참으로 선진(先秦)과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문자를 널리 고증하여

많고 적은 그 중간을 절충하면 본래의 뜻이 거의 나타날 것이다.

나는 다만 뜻은 있으면서 저술하지 못했다가 신해(辛亥) 가을에

임금께서『시경문(詩經問)』 800여 조목을 친히 지어서 신에게 조목조목 대답하도록 명하였다.

내가 이를 삼가 받아서 읽어보니,

아무리 큰 선비나 대학자라도 대답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에 구경(九經)과 사서(四書) 및 고문(古文)과 모든 제자(諸子)와 사서(史書)에서

극히 짧은 말 한마디 글 한 구절이라도 시경(詩經)의 시를 인용하거나 논한 것이 있을 경우에는

모두 차례대로 초록(抄錄)하고 이에서 인용하여 대답하였는데,

대체로 훈고(訓 )가 분명해지자 올바른 뜻에 문제가 없었다.

글을 올리자, 임금은 어필(御筆)로 그 끝에 비평하시기를,

"백가(百家)의 말을 두루 인증하여 그 출처가 무궁하니,

진실로 평소의 학문적 역량(蘊蓄)이 깊고 넓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대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아아!, 내가 어찌 학문의 깊고 넓은 데에 해당될 수 있겠는가.

내가 감히 사사로운 의견으로 성상(聖上)의 분부에 대답하지 못했을 뿐이다.

위의 서문(序文)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다산은 한 글자 한 글자의 정확한 의미를 훈고(訓考)해 내는 것이

작품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 중요한 단서가 됨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산은 소서(小序)를 불신하게 된 상황을 지적하며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해도

주변에서 긍정하지 않으면 그 말은 기세가 꺽이는 법이고,

후원하는 사람이 많은 말은 사리가 펴지게 마련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돕는 이가 적은 말"이란 "소서(小序)"를 의미하는 것이고,

"후원하는 사람이 많은 말"이란『시경집전(詩經集傳)』에서 언급되고 있는 주자의 설명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선진(先秦)과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문자를 널리 고증하여" 경서를 해석해야 한다는

일관된 경서 해석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다산은 정조의 물음에 대한 답을 개진하여 올릴 적에는

이같은 방법으로 13경은 물론이고 제자백가와 여러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시경 관련 언급들을

모조리 고증하여 기록하였고,

이를 토대로 답안을 작성할 때는 일단 훈고(訓考)를 통해 글자의 의미가 분명해지자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는데도 어려움이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다산이 경학을 연구하는 관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제는 이러한 다산의 경학 연구 방식이 <관저(關雎)>편의 의미를 규명하는데

어떠한 방식으로 접근하는가 하는 점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겠다.

<관저(關雎)>편은 『시경(詩經)』「국풍(國風)」《주남(周南)》의 첫머리에 실려있는 작품이다.

작품은 다음과 같다.

 

<1>

關關雎鳩 관관(關關)하고 우는 저구(雎鳩)새

在河之洲 하수(河水)의 모래섬에 있도다

窈窕淑女 요조(窈窕)한 숙녀(淑女)

君子好逑 군자(君子)의 좋은 짝이로다.

 

<2>

參差荇菜 들쭉날쭉한 마름나물을

左右流之 좌우로 물길따라 취하도다

窈窕淑女 요조한 숙녀를

寤寐求之 자나깨나 구하도다

求之不得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지라

寤寐思服 자나깨나 생각하고 그리워하니

悠哉悠哉 아득하고 아득해라

輾轉反側 전전하며 반측하노라.

 

<3>

參差荇菜 들쭉날쭉한 마름나물을

左右采之 좌우로 취하여 가리도다

窈窕淑女 요조한 숙녀를

琴瑟友之 거문고와 비파로 친히 하도다

參差荇菜 들쭉날쭉한 마름나물을

左右芼之 좌우로 삶아올리도다

窈窕淑女 요조한 숙녀를

鍾鼓樂之 종과 북으로 즐겁게 하도다.

다산이 인식했던 <관저(關雎)>편을 논하기 위해서는

<관저>가 실려있는 "국풍(國風)"의 "풍(風)"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다산은 처음에 정조의 물음에 조문별로 대답을 하였는데,

훗날 다시 시경을 정리할 기회가 생기자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면서『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나의 「시경강의(詩經講義)」12권이 이미 차례가 정해지고 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강의의 체제는 오직 물음에 대답할 뿐이어서

물음이 나오지 않은 것은 종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라도 감히 서술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논한 것은 백에 하나도 거론하지 못해 조금 알고 있는 바를 다 나타낼 수 없었다.

경오년(1810년) 봄에 내가 다산에 있을 때에 학유(學游)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이청이 곁에 있었는데 산은 고요하고 해는 길어서 마음을 의지할 데가 없었다.

때때로 「시경강의(詩經講義)」에서 못다 한 내용을 이청에게 받아쓰게 하였다.

내가 중풍이 들고 몸이 피곤하여 정신이 맑지 않았는데도 이 일을 그치지 않은 것은

선성(先聖)·선왕(先王)의 도에 있는 힘을 다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혹시 잘못되고 망령된 점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나를 용서해주기 바란다.

인용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정조의 조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이미 『시경강의(詩經講義)』가 이루어졌으나

당시의 방식은 임금의 물음에 대해서만 설명을 해야했기 때문에

묻지 않은 것은 감히 답할 수가 없어서 제대로 서술하지 못한 것이 많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다산은 그 정도를 백에 하나도 거론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경강의(詩經講義)』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를 통해

『시경(詩經)』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의 "국풍(國風)" 조(條) 부분을 보면 "풍(風)"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보충해서 말한다.

풍(風)에는 두 가지 뜻이 있고 또한 두 가지 음이 있으니

의미하는 바가 아주 달라서 서로 통할 수가 없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풍으로써 교화하는 것은 풍교(風敎)·풍화(風化)·풍속(風俗)이니 그 음은 평성(平聲)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풍자하는 것은 풍간(風諫)·풍자(風刺)·풍유(風喩)이니 그 음이 거성(去聲)이다.

어떻게 하나의 "풍(風)" 자가 거듭 두 가지의 뜻을 포함하고 두 가지의 음을 지녔는가?

「주역(周易)」에 "풍행지상(風行之上)이 관(觀)이니

선왕이 이 관괘(觀卦)로서 사방을 살피고 백성을 관찰한다."라고 하였고,

「맹자(孟子)」에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풀들이 눕게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풍교(風敎)의 퍼져나감으로 국풍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충신에게는 다섯 가지의 간(諫)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내가 그 풍간을 따르리라"고 하였고,

「백호통(白虎通)」에 "그 일을 보고 드러나기 전에 풍(風)으로 고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풍자에 인한 감동으로써 이름을 얻은 것이다.

「시서(詩序)」에서는 두 가지의 뜻을 겸비하고자 했는데 그것이 가능한가?

주자의「시집전(詩集傳)」에서는 풍자를 제거하고 풍화만 남겨두었다.

그러나 풍자의 뜻을 여기에서 강론할 수가 있다. ...

 

다산은 훈고(訓 )와 고증(考證)을 통해 "풍(風)"의 의미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같은 "풍(風)"자 안에도 평성일 경우와 거성일 경우의 차이점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교화하는 "풍교(風敎)", "풍화(風化)", "풍속(風俗)"을 말할 때는 평성(平聲)으로 읽히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풍간(風諫)", "풍자(風刺)", "풍유(風諭)"할 때는 거성(去聲)으로 읽힌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 용례를 『주역(周易)』과 『맹자(孟子)』, 『공자가어(孔子家語)』등의 문헌을 통해 고증해 내고 있다.

그러면서 본래는 두 가지의 의미가 공존했었으나

주자의 『시집전(詩集傳)』에 이르러 "풍자"의 의미를 제거하고, "풍화"로 남겨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매우 예리한 지적이라고 판단된다.

이 외에도 다산은 시경에서 중요한 개념인 "육의(六義)"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는 시경의 체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 된다.

 

...(공영달의 소(疏)에 이르기를, "부(賦)·비(比)·흥(興)은 시의 기능이요,

풍(風)·아(雅)·송(頌)은 시의 형식이다."라고 했다.) 보충해서 말한다.

풍·아·송을 일컬어 세 가지 날줄(三經)이라하고 부·비·흥을 세 가지 씨줄(三緯)이라 한다.

내가 보건대, 「주례(周禮)」춘관(春官) <태사(太師)> 본문에

부(賦)·비(比)·흥(興)이 아(雅)·송(頌)보다 앞서 있음은 대개 풍시(風詩)에만 부·비·흥이 있고,

아·송에는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雅)는 모두 바르게 하는 말이고, 송(頌)은 찬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글이 은미(隱微)한 뜻에 힘쓰지 않는데, 어떻게 부·비·흥의 구별이 있겠는가?

풍(風)은 풍간(諷)으로, 더러는 의미를 펴고 베풀어서 스스로 알게 하고(賦),

더러는 물건의 비슷한 것에 견주어서 스스로 알게 하고(比),

더러는 깊고 먼 뜻을 의탁하여 스스로 알게 하니(興),

이것은 모두 풍시(風詩)의 체(體)이다.

 

그러므로 풍(風)·부(賦)·비(比)·흥(興)은 본래 육의(六義)의 네 부분이나

-「주례」에 이르기를, "태사가 여섯 시를 관장하였다."라고 하였다.-

지금 합쳐져서 풍(風)이 된 것이다.

소아(小雅)에는 비록 비(比)·흥(興)에 가까운 것이 있으나, 그 지취(志趣)는 같지 않다....

 

인용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풍아송(風雅頌)은 삼경(三經)으로 시의 형식이 되고,

부비흥(賦比興)은 삼위(三緯)로서 시의 표현기교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면서, 풍아송(風雅頌)과 부비흥(賦比興)의 차례가

풍(風)·부(賦)·비(比)·흥(興) 그리고 아(雅)·송(頌)의 차례로 되어 있음에 주목하여,

본래는 오직 "풍(風)"에 부(賦)·비(比)·흥(興)이 속해 있는 것이고,

아(雅)와 송(頌)에는 부(賦)·비(比)·흥(興)이 없는 것임을 주장한다.

그 근거로 "아(雅)"는 모두가 바르게 말하는 것이고, "송(頌)"은 오직 "찬미(贊美)"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 문장은 "국풍(國風)"의 부비흥(賦比興)과 같이 "은미함(隱微)"에 힘쓰는 글이 아닌데,

어째서 부비흥(賦比興)의 구별이 따로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고 있다.

반면에 "풍(風)"은 "풍자(諷刺)"를 의미하므로

문장의 성격 자체가 직접 서술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은미함"에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다산의 논리대로라면 "부비흥(賦比興)"을 통해 "풍시(風詩)"를 구현하게 되는 셈이다.

 

논의의 초점을 다시 <관저(關雎)> 편에 맞춰보면,

당대에 <관저(關雎)>를 해석했던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하나의 지침으로 삼았던 말은

공자가 논어에서 언급한 <관저>에 대한 평이었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관저(關雎)는 즐거우면서도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상심하지 않는다."라고 언급했던 사실에 주목해서

"낙이불음(樂而不淫)"과 "애이불상(哀而不傷)"을 <관저>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산은 철저한 고증(考證)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낸다.

 

...보충해서 말한다. 서(序)에 쓰인 "애상(哀傷)" 두 자(字)는 "슬픔에 응하되 상심하지 않는다" 하니 한마디로 비루하고 졸렬함의 극치이다.

"애이불상(哀而不傷)"은 <권이(卷耳)>를 이름이다.

<춘추전(春秋傳)>에 목숙(穆叔)이 진나라에 가니, 진나라 제후가 그를 대접했는데(양공4년),

악공이 <문왕(文王)>의 삼장(三章)을 노래하고,

또 <녹명(鹿鳴)>의 삼장(三章)을 노래했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세 편의 시는 첫 편의 제목을 나란히 덮어쓰는 것이다.

이것이 옛사람들이 시(詩)를 칭하던 법례(法例)였다....

 

<관저(關雎)>라고 이르는 것은 <관저(關雎)>가 머리편이 되고

<갈담(葛覃)>, <권이(卷耳)>는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관저(關雎)>는 "즐겁되 음란하지 않고(樂而不淫)",

<갈담(葛覃)>은 "부지런하되 원망하지 않고(勤而不怨)",

<권이(卷耳)>는 "슬프되 상심하지 않는다(哀而不傷)"라고 하였으니,

계자(季子)와 공자(孔子)의 말을 합쳐서 살펴보면 곧 그 뜻이 명료해진다.

<권이(卷耳)>의 시에 이르기를,

"오래 그리워하지 않으리라, 오래 상심하지 않으리라(維以不永懷 維以不永傷)"라고 했으니

이른바 "애이불상(哀而不傷)"이 아니겠는가!

 

옛날의 시악(詩樂)은 반드시 세 편을 취했기 때문에

향음(鄕飮)이나 연례(燕禮) 등에서 주남(周南)이라면

<관저(關雎)>, <갈담(葛覃)>, <권이(卷耳)>를 취했고,

소남(召南)이라면 <작소(鵲巢)>, <채번(采 )>, <채빈(采 )>을 취했음은 살펴서 알 수 있다.

이는 본디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 공의 학설이니, 나의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에 상세하게 나온다.

 

<관저(關雎)>장에 대한 논의는

다산의 저서인『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에서도 동일한 관점에서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관저(關雎)>라고 할 때는 <관저(關雎)>를 포함해서 <갈담(葛覃)>, <권이(卷耳)>까지를 포함한 3장을 말한다.

<관저>는 "금슬(琴瑟)"과 "종고(鐘鼓)"로 하되 그 공경함을 잊지 않으니 즐겁되 음란하지 않은 것이고,

"척고(陟高)"하고 "승리(乘羸)"하되 오래 상심하지 않음이니,

이것이 바로 "슬프되 상심하지 않는 것이다.(哀而不傷)"이다.

정리해보면, 공자가『논어(論語)』에서 언급한 <관저(關雎)>편에 대한 언급은

<관저>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갈담(葛覃)>과 <권이(卷耳)>를 포함하여

세 작품의 총칭으로 가장 먼저 나오는 작품으로 이름을 삼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의미가 명료해진다.

 

작품 해석과 관련하여 정조가 내린 조문과 이에 다산이 답해 올린 답안을 통해

당대 시경강의(詩經講義)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기에

<관저>편과 관련된 정조 임금의 물음과 다산의 답안을 살펴보겠다.

 

군자(君子)는 문왕(文王)을 가리킨다.

군자라는 것은 부인이 남편을 일컫는 호칭이니,

<은기뢰(殷其雷)>편(篇)의 "진진군자(振振君子)"와

<여분(汝墳)>편(篇)의 "기견군자(旣見君子)"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시는 궁인(宮人)이 지은 것이기는 하지만

태사 입장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문왕(文王)을 군자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한록(旱麓)>편(篇)의 개제군자(豈弟君子)를 인용하면서

이것은 인군을 가리키는 호칭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문왕이 태사와 결혼한 것은 그가 세자(世子)였을 때였다.

그러니 어떻게 대번에 인군에 대한 호칭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대기(戴記)』를 보면 "문왕은 97세에 죽었다."고 하였고,

『서경(書經)』 <무일>편(無逸篇)에서는 "문왕은 50년 간 왕위에 있었다."하였으니,

그렇다면 문왕은 48세에야 즉위하여 서백(西伯)이 된 것이다.

그리고 문왕이 13세 때에 백읍고(伯邑考)를 낳았으니,

태사와 결혼한 것은 10여 세 때에 해당된다.

옛날에 과연 세자를 군자라고 일컬은 글이 있었는지 보지 못했다.

만약 문왕이 즉위한 뒤에 전에 혼인하던 때를 돌이켜 서술한 것이라고 한다면,

대지(大旨)에서 말한 "궁중(宮中)에 있는 사람이 그가 처음 이르렀을 때

유한정정(幽閑貞靜)한 덕이 있음을 보고 이 시를 지은 것이다."고 한 것은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신이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문왕(文王)이 세자인데도 군자(君子)라고 이름은

"덕(德)"으로 말한다면 세자도 역시 (德이 있다면) 군자(君子)라고 칭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를 만일 반드시 태사나 궁인의 작품으로 생각한다면 뜻은 대부분 통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실로 그와 같다면) 문왕은 왕계를 아버지로 모시고,

나이 10여세에 갑자기 스스로 배필을 구하여 자나깨나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했다는 것인데,

이는 이치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세자가 비록 어진 배우자를 얻었다고 할 지라도

"금슬종고(琴瑟鐘鼓)"로 "이우이락(以友以樂)"함은 때에 맞지 않습니다.

제시(齊詩)와 노시(魯詩) 두 계열(二家)의 풍자(諷刺)설은

비록 요점을 서술할 수는 없으나 시인은 예(禮)와 의(義)의 시를 베풀어 설명했습니다.

제1장은 오직 숙녀인 뒤에야 군자의 배우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고,

제2장은 숙녀를 얻기 어려워도 가벼이 취할 수는 없음을 말한 것이고,

제3장은 이미 얻었기에 화락(和樂)한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태사가 처음 이르렀던 초기에 궁인이 지은 것이라면 곧 의미가 대부분 통하기 어렵습니다.

진실로 임금님께서 하문(下問)하심과 같습니다."...

 

『시경강의(詩經講義)』에서 행해진 정조와 다산의 문답이다.

정조는 "군자(君子)"라는 시어(詩語)에 주목하여 예리한 시각을 보인다.

곧 <관저(關雎)>에 등장하는 "군자(君子)"가 문왕(文王)을 지칭하는 것인데

문왕이 배필을 구한 시점은 세자 때일 것이고,

"군자"라는 말은 부인이 남편을 일컫는 경우에 쓰이거나

<한록(旱麓)>편에 사용된 용례에서처럼 인군(人君)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하는데,

문왕이 세자 신분이었는데, 어찌 시인이 문왕에게 "군자(君子)"라는 칭호를 쓸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그러면서 문왕이 결혼할 당시의 상황을 토대로 해석 상의 무리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다산은 "군자(君子)"란 말은 "덕을 이룬 사람의 명칭(德者, 成德之名)"이니,

세자 신분이라도 덕(德)을 갖추었다면 "군자(君子)"라고 칭할 수 있다고 답함으로써

"군자(君子)"라는 용어 사용에 대한 의문을 말끔히 씻어낸다.

그러나 이 작품이 "태사"나 "궁인"의 작품일 수가 없다는 점에서는 정조의 의문과 그 맥을 함께 한다.

이 작품을 문왕의 비인 "태사"나 "궁인"의 작품으로 보기 위해서는 많은 무리가 따름을 지적한다.

인용문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문왕이 지었다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다.

그래서, 다산이 인식한 <관저>편은

제1장에서 오직 정숙한 숙녀라야 군자의 좋은 배우자가 될 수 있음을 말했고,

제2장에서는 정숙한 숙녀를 얻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함부로 아무나 취할 수 없음을 언급한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제3장에서는 배우자를 이미 얻은 상황이므로 화락(和樂)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관저(關雎) 새는 다른 강의 물가에 있지 않고, 황하(黃河)의 물가에 있으니

<관저(關雎)>는 황하(黃河) 주변의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것이지,

빈( )이나 기(岐)의 풍(豊), 호(鎬) 지역의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데,

문왕의 궁인이 어찌 지을 수 있었겠습니까?

주소(周召) 영락(營洛)의 후에 이락(伊洛) 삼하(三河)의 땅이 마침내 경연(京輦)이 되고서야

임금과 신하, 위와 아래가 서로 왕래교유 했는데,

<관저(關雎)>의 시는 그 기간에 지어졌다고 한 제시(齊詩)와 노시(魯詩)의 설명을 모조리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양웅(揚雄)은 이르기를,

"주나라 강왕(康王) 때에 <관저(關雎)>가 비로소 지어졌다."고 하였고,

사마천이 말하기를 "주나라의 도가 이지러짐에 잠자리( 席)를 근본으로 하여 <관저>를 지었다(12제후년표)"고 하였고,

두흠이 말하기를 "패옥(佩玉)이 아침 늦게 울림에 <관저(關雎)>로 탄식하였다(전한서)"고 하였으며,

명제(明帝)의 조칙에 "응문(應門)이 파수를 잘못하여 <관저(關雎)>로 풍자하였다"고 하였고,

범엽의 사론(史論)에 "강왕(康王)이 조회에 늦게 나오자 <관저>를 지어 풍자하였다.(皇后記)"고 하였습니다.

 

주자는「소서변설(小序辨說)」에서 이 설을 배척하지 않고 도리어 "아마도 이런 이치가 있을 법하다."고 하였습니다.

모두 주자의 말인데 하필이면「변설(辨說)」의 견해를 버리고「집전(集傳)」의 설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공자께서 <관저>를 성대하게 칭송하였는데 이제 자시(刺詩)라고 이름하면 혹 사체(事體)에 미안한 것 같지만,

이것이 성현을 높이는 인사들이 문왕의 설을 고수하려고 하는 까닭입니다.

그렇지만 <관저>는 성인의 시입니다.

강후(康后)가 실덕(失德)한 것이 어찌 <관저(關雎)>에 오점이겠습니까?

 

시인의 뜻은 대개 배필은 가려뽑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른 것입니다.

(두흠이 이르기를,

"숙녀가 배필을 갈구하되 위로는 충효가 돈독하고 인후(仁厚)함을 일으키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했다."고 하였습니다.)

제사는 공경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슬종고(琴瑟鐘鼓)"는 즐기면 즐거운 것입니다만 음란함으로 이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물(事物)에 의탁하여 흥(興)을 일으킴이니 먼저 "저구(雎鳩)"를 사용한 것입니다.

 

"저구(雎鳩)"는 사나운 새입니다.

"관관(關關)"은 화합하는 울음입니다.

화합하면서도 사나울 수 있고, 즐거우면서도 분별이 있으니, 제비나 참새, 원왕새의 등속과는 같지 않습니다.

"닐닐설설(    )"은 음탕하고 무람한 뜻이 있습니다.

"하주(河洲)"는 깊고 빽빽한 땅으로 대하(大河)의 가운데에 이 작은 섬이 있는데, 사람의 자취가 이르지 못하는 곳입니다. 오호라! 화(和)·낙(樂)·귀(貴)에는 부끄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요조숙녀(窈窕淑女)는 군자의 좋은 짝"이라 한 것입니다.

"요조(窈窕)"는 깊고도 깊음(深邃)이니 부인의 뜻입니다.

"규방의 문(규달閨 )"은 깊게 하고자 함이고, "문지방(곤역  )"은 엄히 하고자 함입니다.

다만 "박(薄)"은 엄밀하고자 함이니, 말하자면, 움직이면서도 고요하고자 함입니다.

이것이 "요조(窈窕)"가 "숙녀" 되는 조건입니다.

 

뜻은 강왕(康王)때에 왕과 후비의 행락(行樂)이 이따금씩 드러난 곳에서도 있었기 때문에 시인이 풍자한 것입니다.

이처럼 그 지취(志趣)는 신하와 자식이 충성하고 사랑하는 것이요,

그 의미는 세상에서 배필(配匹)과 합함이요,

그 덕은 온화함과 공경의 지극함이요,

그 소리는 우렁차서 귀에 가득함이니, 그 어떻습니까?

「시경(詩經)」삼백 편의 으뜸되는 것이 불가능하겠습니까?

궁인(宮人)은 여어(女御)입니다.

저 궁녀의 충성(忠誠)스런 마음으로 신부를 아름답다고 일컬으며,

아첨하고 아부하여 신부가 된 초기에 그녀를 높이고서야 성경(聖經)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주자가 노시(魯詩) 학설(學說)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

 

다산은 인용문에서처럼 "관저(關雎)"가 황하(黃河) 물가에 있는 것임을 통해,

문왕(文王) 시대의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양웅, 사마천, 두흠, 범엽, 명제(明帝)의 조칙 심지어 주자의 『소서변설(小序辨說)』등 여러 문헌에서의 고증(考證)을 통해 <관저(關雎)>의 작자가 문왕(文王) 당시의 궁인(宮人)이 아니며,

<관저(關雎)> 시는 풍자시(諷刺詩)임을 논증하고 있다.

<관저(關雎)>의 작자 문제에 대해서는 주자 자신도 분명한 확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주자는『소설변설(小序辨說)』에서 <관저>를 풍자시로 본 견해에 이치가 있다며 수긍했는데,

『시집전(詩集傳)』에서는 "궁인(宮人)"의 작품이라고 상호 모순되는 시각을 드러내놓았다.

다산은 이렇게 주자가 <관저>를 풍자시로 본 노시(魯詩)의 설명을 버리지 못했던 이유가,

다산의 지적과 같이 <관저>의 작자라고 생각하는 궁인(宮人)들이 태사가 처음에 문왕의 신부로 들어왔을 때,

그녀를 가리켜 칭송하며 아름답다고 아첨하고 아부하는 것이라면,

그같은 내용으로 어떻게 "경전(經典)"에 포함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 제기이다.

이는 타당한 견해라고 생각된다.

 

결국, 다산은 다양한 문헌을 두루 고증하여

<관저>가 시기적으로는 강왕 때의 작품으로 파악하고 있고,

풍자의 대상은 밑줄 친 바와 같이

왕 때에 왕과 후비의 행락(行樂)이 이따금씩 공개된 곳에서도 절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저>를 통하여 은근하게 풍자(諷刺)한 것으로 파악했다.

한편, 조선조의 유학자들의 <관저>에 대한 감상과 해석은 어떠했는가를 알아보고자 자료를 검색했는데

서하(西河) 김인후의 문집에 <관저(關雎)편을 읽고서-原題는 讀關雎>라는 작품이 있어 잠깐 소개해 본다.

김인후는 어려서부터 스스로 시경의 주석만도 수 천번을 읽었다고 할만큼 시경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사대부였다.

 

綿綿王業起岐山 면면한 왕업이 기산(岐山)에서 일어나

至于文王德如天 문왕(文王)에 이르러서는 덕(德)이 하늘과도 같구나

天生聖女洽之陽 하늘이 낳으신 성녀(聖女)는 임금의 짝으로 적합하니

窈窕婦德曾無前 요조한 후비의 덕은 일찍이 전에 없었다네

造舟爲梁嬪于周 배를 만들고 들보를 지어 주나라로 향하니

國人爭詠關雎篇 백성들은 다투어 <관저편(關雎篇)>을 읊조리네

由來夫婦居人倫 예부터 부부가 인륜에 거처함은

陰比乎坤陽比乾 음은 땅에 비유되고, 양은 하늘에 비유되었네

文王旣聖 又聖 문왕은 이미 성인이시고 태사 또한 성인이시니

同明 德家道全 함께 밝고 나란한 덕이 가도(家道)를 온전히 하네

赫赫盛化流乾坤 혁혁하고 성대한 문화가 천지에 넘쳐 흐르고

汝漢陋俗皆相悛 여(汝)수와 한(漢)수 지역 비루한 풍속을 서로 고쳐서

天下歸心大命集 천하에 귀일하는 마음이 천명으로 운집되어서는

子孫相傳八百年 자손에게 서로 전하여 8백년을 이어왔도다

吾觀興廢由婦人 내 보니, 흥하고 망하는 것은 부인(婦人)으로 말미암으니

喜己入宮邦國顚 "하나라 말희와 은나라 달기"가 입궁했기에 나라가 엎어졌네

不有懿德徒淫荒 아름다운 덕은 있지 않고 다만 음란하고 황폐해졌으니

明眸皓齒空嬋姸 아름다운 눈동자와 새하얀 치아는 부질없이 고왔구나

如何後王不能承祖武 어찌하여 후대의 왕은 조상의 위업을 잇지 못하고

僞烽一擧兵戎連 거짓 봉화가 한 번 오름에 난리만 계속되었는가!

 

이 작품에서도 드러나듯 <관저편(關雎篇)>을 읽은 서하 김인후 역시

문왕(文王)과 후비 태사의 덕(德)을 찬미하는 작품으로 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작품의 후반부에 가서는 "말달(  )의 고사를 빌어 후비를 함부로 뽑을 수 없음을 경계하기도 하면서

약간의 자시적(刺詩的) 측면으로 읽히는 면도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다산이 <관저>편 3장을 해석한 내용과 그 맥락이 닿아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다산은 <관저>편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1장은 오직 정숙한 숙녀라야 군자의 배우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라고 해석했고,

2장은 숙녀를 얻기 어려워도 가벼이 함부로 취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이 시의 후반부 역시 이 같은 의미로 읽을 수 있음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다산의 시경론과 <관저(關雎)>장의 해석에 나타난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산은 시경의 "풍(風)"에는 본래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밝혀내면서,

주자 이후로 "풍자(風刺)"의 의미가 사라지고, "풍교(風敎)"의 의미만 남게 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육의(六義)"의 문제에서는 풍(風)·부(賦)·비(比)·흥(興)·아(雅)·송(頌) 의 순서와 갈래의 특징에 주목한 결과,

풍아송(風雅頌)은 시의 형식이고,

부비흥(賦比興)은 "풍(風)"에만 해당되는 개념이고,

"아(雅)"와 "송(頌)"에는 해당되지 않는 개념으로 인식하였다.

그 이유는 "아(雅)"와 "송(頌)"의 경우는

그 갈래가 요구하는 갈래의 속성 자체가 부(賦)·비(比)·흥(興)과는 서로 동떨어진 것이기에

"아(雅)"와 "송(頌)"에서는 변별되어 사용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주자(朱子)는 다산과 달리 그것을 구별하여 구분해 놓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자의 자의적인 구분이지 본래의 의미와는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관저>에 대한 해석은

강왕(康王)과 후비(后妃)의 행락(行樂)을 <관저(關雎)>를 통해 은미(隱微)하게 간(諫)한 작품임을 논증하고 있었다.

끝으로 다산은 <경의시(經義詩)>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이해한 내용을 칠언절구로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는 "시경(詩經)"도 물론 다섯 수로 구분되어 포함되어 있다.

다산이 시경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핵심적인 측면이 드러나기에 참고할 수 있게 소개한다.

 

<1>

古人百計格君心  誦工歌被素琴/

全把國風兼二雅  直須看作諫書林

 

옛사람은 온갖 방법으로 임금 마음을 바로잡아

장님이 외고 악관이 외어 소금에 올렸는데

국풍과 소아 대아까지 모조리 가져다가

곧장 임금 간하는 글로 간주하였네

 

<2>

風賦比興都是風  正言體栽不相同/

六詩平列無經緯  納五言時未頌功

 

(풍과 부와 비와 흥이 모두가 풍인데

바른 말 하는 체재가 서로 같지 않더라

육시를 평등하게 열거하여 조리가 없고

오언을 바칠 때는 공을 칭송하지 않도다.)

 

<3>

鼎彝紀惡尙堪憎  于誦于絃豈不懲

樂器未遷詩道喪  春秋袞鉞乃相承

(정이에 악을 기록해 둔 것도 미움직한데

읊고 거문고 타고 함에도 왜 징계하지 않는고

악기는 그대로 있으나 시도가 없어졌기에

춘추의 포폄이 이에 서로 이어졌다오)

 

<4>

狹邪淫冶本無歌   設有謳唫采奈何

虞帝巡方無此法  獻詩誰到太山阿

(화류가의 음란한 풍은 본디 노래도 없지만/

설령 노래가 있다 해도 채집하면 무엇하랴/

순임금이 지방 순수할 땐 이 법이 없었으니/

누가 태산 모퉁이까지 시를 갖다 바치리오)

 

<5>

小序傳流大小毛/衛宏潤色總摸撈/

紫陽劈破眞豪快/垂二千年隻眼高

(소서가 대모 소모에게 전해 내려왔는데/

위굉이 윤색한 건 다 더듬어 찾은 거로세/

자양이 벽파한 것은 참으로 호쾌하여라/

공자 이후 이천 년간에 견식이 가장 높았네)

 

3. 시의식(詩意識)과 작품 세계의 관련성

앞에서는 다산의 시경론(詩經論)과 <관저(關雎)>장의 해석에 나타난 특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앞장의 논의를 토대로 하되,

다산의 시에 대한 견해라 할 수 있는 시의식(詩意識)과 다산(茶山)의 한시 작품과의 상관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무릇 문장이라는 것은 어떠한 물건인가 하면, 학식이 속에 쌓여 그 문채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네.

이는 기름진 음식이 창자에 차면 광택이 피부에 드러나고 술이 배에 들어가면 얼굴에 홍조가 도는 것과 같은 것인데,

어찌 들어간다고 이룰 수 있겠는가.

 

중화(中和)한 덕으로 마음을 기르고 효우(孝友)의 행실로 성(性)을 닦아

공경으로 그것을 지니고 성실로 일관하여 이로써 변하지 않아야 하네.

이렇게 힘쓰고 힘써 도(道)를 바라면서 사서(四書)로 나의 몸을 채우고 육경(六經)으로 나의 지식을 넓히고,

여러 가지 사서(史書)로 고금의 변천에 달통하여

예악형정의 도구와 전장법도의 전고(典故)를 가슴 속 가득히 쌓아놓아야 하네.

그래서 사물(事物)과 서로 만나 시비와 이해에 부딪히게 되면

나의 마음 속에 한결같이 가득 쌓아온 것이 파도가 넘치듯 거세게 소용돌이쳐

세상에 한번 내놓아 천하 만세의 장관으로 남겨보고 싶은 의욕을 막을 수 없게 되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네.

그리고 이것을 본 사람은 서로들 문장이라고 말할 것이네. 이러한 것을 일러 문장이라 하는 것이네.

 

.위의 인용문은 다산 자신의 문장관(文章觀)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다산은 문장(文章)이라는 것을 삶 속에서 도(道)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것들,

예컨대, 외적으로는 효우(孝友)와 같은 행실로 본성(本性)을 연마하여 공경을 몸에 지니고

성실함으로 일관됨을 유지하는 자세와 더불어 내적으로는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그리고 역사서와 고금의 저서들을 통해 지식을 체득해야 함을 전제 조건으로 삼고 있다.

그런 뒤라면, 특정한 상황이나 경우에 처했을 때,

마음 속에 쌓아놓았던 것이 파도치듯 거세게 소용돌이쳐서 쏟아져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참된 문장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늘어놓음으로써 문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글쓰는 사람의 부단한 노력을 통해 절로 우러나야 참된 문장이라는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음은 다산이 시(詩)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겠다.

 

시(詩)라는 것은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 근본적으로 낮고 추잡하면 억지로 맑고 고상한 말을 해도 조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뜻이 본디 편협하고 비루하면 억지로 달통한 말을 해도 사정(事情)에 절실하지 않게 된다.

시를 배움에 있어 그 뜻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썩은 땅에서 맑은 샘물을 걸러내는 것 같고,

냄새나는 가죽나무에서 특이한 향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서 평생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이치를 알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나뉨을 살펴서,

찌꺼기를 걸러 맑고 참됨이 발현하게 하면 된다.

 

다산이 인식하고 있는 시(詩)의 본질을 언급하는 인용문이다.

이처럼 다산의 시의식(詩意識) 역시 앞에서 살펴본 문장관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시(詩)는 뜻을 말하는 것이므로 뜻이 낮거나 추잡하면

조리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과 아울러 뜻이 낮거나 비루해지면

사정(事情)에 절실하지 못하게 되므로 뜻을 헤아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다음은 다산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낸 서신의 일부인데,

이 글에서 다산은 편지라는 형식을 빌어서 그리고 아들이기에

다른 양식의 글에서보다 더욱 진솔하고 과감하게 자신의 시의식(詩意識)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번에 성수(惺 ) 이학규(李學逵)의 시를 읽어보았다.

그가 너의 시를 논평한 것은 잘못을 잘 지적하였으니 너는 당연히 수긍해야 한다.

그의 자작시 중에는 꽤 좋은 것이 있기는 하더라만 내가 좋아하는 바는 아니더라.

오늘날 시는 마땅히 두보(杜甫)의 시를 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모든 시인들의 시 가운데 두보(杜甫)의 시가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시경(詩經)』에 있는 시 300편의 의미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시경』에 있는 모든 시는 충신, 효자, 열녀, 진실한 벗들의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의 발로로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내용이 아니면 그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될 수 없는 것이며,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하고 미운 것을 밉다고 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그러한 뜻이 담겨 있지 않은 시를 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뜻이 세워져 있지 아니하고, 학문은 설익고, 삶의 대도(大道)를 아직 배우지 못하고,

위정자를 도와 민중에게 혜택을 주려는 마음가짐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시를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니,

너도 그 점에 힘쓰기 바란다

. ... 中略...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을 인용한답시고 걸핏하면 중국의 일이나 인용하고 있으니, 이건 또 볼품 없는 것이다.

아무쪼록 『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국조보감(國朝寶鑑)』,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징비록(懲毖錄)』,『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및

우리나라의 다른 글 속에서 그 사실을 뽑아내고 그 지방을 고찰하여 시에 인용한 뒤에라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가 나올 것이며,

세상에 명성을 떨칠 수 있다. 혜풍(惠風) 유득공(柳得恭)이 지은 「16국회고시」는

중국 사람들도 책으로 간행해서 즐겨 읽던 시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 사실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동사즐(東史櫛)』은 본디 이럴 때 쓰려고 만들어 놓은 것인데, 지금은 대연(大淵)이가 너에게 빌려줄 턱이 없으니,

우선 중국의 17사(史)에 있는 동이전(東夷傳) 가운데서 이름난 자취를 뽑아놓았다가 사용하면 될 것이다.

 

인용문과 같이 다산은 두보(杜甫)야말로 『시경(詩經)』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작가로 손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두보의 시 세계가 다산이 지향하고자 했던 시 세계와 가장 잘 부합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나라를 사랑하고 시대를 아파하며,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찬미(讚美)할 줄 알아야 하고,

잘못된 것은 풍자(諷刺)할 줄도 알아야 하고,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할 줄 알아야 참다운 시(詩)가 된다는 생각이다.

뿐만 아니라, 다산은 용사(用事)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는데, 이는 주목할만한 다산의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다산은 한시 작품에서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는데 대개의 경우가 중국(中國)의 역사를 인용하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한심한 일이라고 질타하고 있다.

 

중국의 고사를 인용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서인『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국조보감(國朝寶鑑)』등의 역사서와

우리나라 고유의 문헌을 대상으로 그 속에서의 사실을 통해 인용할 줄 알아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가 되며,

세상에 명성을 떨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는 다산의 "조선시(朝鮮詩)" 선언과도 동일한 맥락에서 언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의 글도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이기 위해 작성한 서신인데,

이 글에서 다산은『시경(詩經)』시의 전형적 형식인 네 자로 된 시(四字詩)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가 인식했던 시의 근본에 관해 언급한다.

 

... 시(詩)를 반드시 힘써야 할 것은 아니지만 성정(性情)을 도야(陶冶)하려면 시를 읊는 것도 상당히 도움이 된다. 예스러우면서 힘있고, 기이하면서 우뚝하고, 웅혼하고, 한가하면서 뜻이 심원하고, 맑으면서 환하고 거리낌없이 자유로운 그런 기상에는 전혀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가늘고 미미하고, 자질구레하고 경박하고 다급한 시에만 힘쓰고 있으니 개탄할 일이로다. 단지 율시(律詩)만 짓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비루한 습관으로 실제로 다섯 자나 일곱 자로 된 고시(古詩)는 한 수도 보지 못했으니, 그 지취(志趣)의 낮고 얕음과 기질의 짧고 껄끄러움은 반드시 바로잡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내가 요즈음 다시 생각해 보아도 자기의 뜻을 사실적(事實的)으로 표현하는 데나 회포를 읊어내는 데는 넉 자로 된 시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본다. 고시(古詩) 이후의 시인들은 남을 모방하는 것을 혐오하여 마침내 4자로 시짓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요즈음 같은 처지는 4자시 짓기에 아주 좋구나.

너희들도 『시경(詩經)』「풍아(風雅)」의 근본 뜻을 깊이 연구하고

그 후에 도연명(陶淵明)이나 사령운(謝靈運)의 빼어난 점을 본받아 넉자시(四字詩)를 짓도록 하여라.

무릇 시의 근본은 부자(父子)나 군신(君臣)·부부(夫婦)의 떳떳한 도리를 밝히는 데 있으며,

더러는 그 즐거운 뜻을 드러내기도 하고,

더러는 그 원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끌어내게 하는 데 있다.

 

그 다음으로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서

항상 힘없는 사람을 구원해 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 주고자

방황하고 안타까워서 차마 내버려두지 못하는 간절한 뜻을 가진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시가 되는 것이다.

다만 자기 자신의 이해(利害)에만 얽매일 것 같으면 그 시는 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은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낸 서신인데,

다산의 시의식(詩意識)이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밑줄 친 부분의 지적과 같이 다산은 자신의 뜻을 사실적(事實的)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네 글자로 된 시만큼 효율적인 형식은 없다고 본다.

그만큼 『시경(詩經)』의 정신을 형식적 측면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출처 - 사림서당.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5265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전경원, 다산 정약용의 시경론(詩經論) 및 시의식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sy1851&logNo=221691011766&parentCategoryNo=&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장(장)을 중심으로 - 전경원(건국대강사) 1.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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