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당시인은 삼당(三唐)으로 줄여 부르기도 하며 이들의 시를 삼당시(三唐詩)라 한다. 삼당이라는 명칭은 임상원(任相元)이 ≪손곡집 蓀谷集≫의 서(序)에서 이들 세 사람의 문집을 합간(合刊)하여 삼당집(三唐集)이라 하였다는 기록에서부터 보인다. 이후 신위(申緯)가 <동인논시절구 東人論詩絶句>에서 다시 “재천삼당최백이(才擅三唐崔白李)”라 하였고, 그 주에 이들 세 사람을 세상에서 삼당이라 일컬는다고 하였다. 삼당시인의 가장 큰 의의는 고려 전기 이래 지속되어 온 송시풍(宋詩風)을 당시풍으로 전환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주(李冑), 김정(金淨), 신광한(申光漢), 나식(羅湜), 김인후(金麟厚), 박순(朴淳) 등이 나와 당시풍의 시를 썼으나 이러한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는데, 이들에 이르러 당시풍이 시단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송시(宋詩)의 관념적이고 이지적인 면 대신, 흥취와 여운을 중시하며 내용에 있어서도 낭만적인 경향을 띠는 것이 많다. 이달이 박순(朴淳)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교유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후 남원 광한루(廣寒樓)와 대동강의 부벽루(浮碧樓) 등에서 시회(詩會)를 가지면서 시사(詩社)로서의 성격이 형성되었다. 특히 봉은사(奉恩寺)에서 시재를 자주 겨루었다고 한다. 이달은 처음부터 당시풍을 지향한 것은 아니어서 송시풍을 선호하다가 최경창과 백광훈을 만나면서 당시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고도 한다. 이들 세 사람이 모두 당시를 배웠지만, 최경창은 청경(淸勁)하고 백광훈은 고담(枯淡)하며 이달은 부염(富艶)하다는 개성의 차이는 있다. 또 이들이 성당(盛唐)의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만당(晩唐)의 기미(綺靡)에 머물렀다는 한계도 아울러 지적되고 있으며, 모두 그 생애가 불우하여 맹교(孟郊)와 가도(價島)의 유(類)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또 율시보다는 절구에 능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백광훈은 박순(朴淳)의 문인으로 13세 되던 해인 1549년(명종 4)에 상경하여 양응정(梁應鼎)·노수신(盧守愼) 등에게서 수학하였다.
1564년(명종 19)에 진사가 되었으나 현실에 나설 뜻을 버리고 강호(江湖)에서 시와 서도(書道)로 자오(自娛)하였다. 1572년(선조 5)에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백의(白衣)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시재(詩才)와 서필(書筆)로써 사신을 감탄하게 하여 백광선생(白光先生)의 칭호를 얻었다.
백광훈은 1577년(선조 10)에 처음으로 선릉참봉(宣陵參奉)으로 관직에 나서고, 이어 정릉(靖陵)·예빈시(禮賓寺)·소격서(昭格署)의 참봉을 지냈다. 그는 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리었다. 송시(宋詩)의 풍조를 버리고 당시(唐詩)를 따르며 시풍을 혁신하였다고 해서 그렇게 일컬었다.
송시냐 당시냐 하는 시비는 아주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삼당시인들은 송시가 자연스런 감동에서 멀어지고 인정이나 세태의 절실한 경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을 지적하고, 방향전환을 위해서 당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백광훈의 시는 당풍(唐風)을 쓰려고 노력하였고, 풍류성색(風流聲色)을 중시하여 자못 낭만적이고 염일(艶逸)한 시풍(詩風)을 지녔던 것이다. 이정구(李廷龜)는 그의 문집 서(序)에서 백광훈은 손꼽히는 호남시인으로 특히 절구(絶句)를 잘하여 당나라의 천재시인 이하(李賀)에 비견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의 시는 천기(天機)로 이루어진 것이라 평하였다. 백광훈은 이산해(李山海)·최립(崔岦) 등과 더불어 팔문장(八文章)의 칭호를 들었다.
최경창은 백광훈(白光勳) · 이후백(李後白)과 함께 양응정(梁應鼎)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555년(명종 10) 17세 때에 을묘왜란으로 왜구를 만나자, 퉁소를 구슬피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일화가 있다.
1561년(명종 16) 23세 때부터 상상(上庠)에서 수학했다. 1568년(선조 1)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가 됐다. 예조 · 병조의 원외랑(員外郎)을 거쳐 1575년(선조 8)에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1576년(선조 9) 영광군수로 좌천됐다. 이때에 뜻밖의 발령에 충격을 받고 사직했다. 그 뒤에 가난에 시달렸다.
다음해에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복직했다. 1582년(선조 16) 43세에 선조가 종성부사(鍾城府使)로 특별히 제수했다. 그러나 북평사의 무고한 참소가 있었고 대간에서 갑작스러운 승진을 문제 삼았다. 그래서 선조는 성균관직강으로 고치도록 명했다. 최경창은 상경 도중에 종성객관에서 죽었다. 저서로 『고죽유고』가 있다.
최경창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이이(李珥) · 송익필(宋翼弼) · 최립(崔岦) 등과 무이동(武夷洞)에서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또한 정철(鄭澈) · 서익(徐益) 등과 삼청동에서 교류했다.
이달은 당시의 유행에 따라 송시(宋詩)를 배우고 정사룡(鄭士龍)으로부터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그러나 박순(朴淳)은 그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이류로 떨어진 것이다.”라고 깨우쳤다. 그리고 이백(李白)의 악부(樂府)·가(歌)·음(吟)과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보여주었다.
이에 그는 이백·왕유·맹호연의 시를 보고 시의 오묘한 이치가 그들의 작품에 있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 당시를 열심히 익혔다. 『이태백집(李太白集)』과 성당십이가(盛唐十二家: 당나라 때의 유명한 열두 명의 시인)의 글, 유우석(劉禹錫)과 위응물(韋應物)의 시, 양백겸(楊伯謙)의 『당음(唐音)』 등을 모두 외웠다고 전한다. 이렇게 5년 동안 열심히 당시를 배우자, 시풍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비슷한 품격의 시를 쓰던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은사(奉恩寺)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모였다. 임제(林悌)·허봉(許愼)·양대박(梁大樸)·고경명(高敬命) 등과도 자주 어울려 시를 지었다.
을유년 이월 이십 팔일에 직산의 성환역에서 묵는데, 제주에서 약물을 진공하러 온 김극수란 사람도 왔기에, 인하여 밤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곳의 풍토와 물산을 대략 물어보고 마침내 그 말을 기록하여 탁라가 십사 수를 짓다[乙酉二月二十八日宿稷山之成歡驛濟州貢藥人金克修亦來因夜話略問風土物産遂錄其言爲賦乇羅歌十四首]
여관서 막 만났어도 마치 서로 친한 듯한데 / 郵亭相揖若相親
겹겹의 보자기엔 갖가지 약물 진기도 해라 / 包重般般藥物珍
옷에선 비린내 나고 언어는 간삽하니 / 衣袖帶腥言語澁
보건대 그대는 진정 바다 안 사람이구려 / 看君眞是海中人
당초의 세 사람은 바로 신인이었는데 / 當初鼎立是神人
서로 짝지어 해뜨는 동쪽에 와서 살았네 / 伉儷來從日出濱
백세토록 세 성씨만 서로 혼인을 한다 하니 / 百世婚姻只三姓
듣건대 그 유풍이 주진촌과 비슷하구려 / 遺風見說似朱陳
성주는 이미 죽고 왕자도 끊어져서 / 星主已亡王子絶
신인의 사당 또한 황량하기만 한데 / 神人祠廟亦荒涼
세시엔 부로들이 아직도 옛 일을 추모하여 / 歲時父老猶追遠
광양당에서 퉁소와 북을 다투어 울리누나 / 簫鼓爭陳廣壤堂
바닷길이 어찌 수천 리만 되리오마는 / 水路奚徒數千里
해마다 왕래하여 일찍부터 잘 아는지라 / 年年來往飽曾諳
구름 돛을 걸고서 쏜살같이 달리어 / 雲帆掛却馳如箭
하룻밤의 순풍에 해남을 당도하누나 / 一夜便風到海南
한라산의 푸른 기운 방사와 통하여라 / 漢拏縹氣通房駟
물풀 사이에 아침 놀이 활짝 걷혔네 / 雲錦離披水草間
한번 호원에서 목장을 주관한 이후로 / 一自胡元監牧後
준마들이 해마다 황실로 들어갔다오 / 驊騮歲歲入天閑
오매며 대모이며 검은 산호에다 / 烏梅玳瑁黑珊瑚
부자며 청피는 천하에 없는 것이니 / 附子靑皮天下無
물산만이 동방의 부고일 뿐 아니라 / 物産非惟東府庫
그 정수가 다 사람 살리는 데로 들어간다오 / 精英盡入活人須
대합조개며 해파리며 석화에다 / 車螯海月與蠔山
농어며 문린 이외에 또 몇 가지이던고 / 巨口文鱗又幾般
해 저물면 비린 연기가 향정을 덮어라 / 日暮腥煙冪鄕井
수우의 수많은 배들이 생선 싣고 돌아오네 / 水虞千舶泛鮮還
집집마다 귤과 유자 가을 서리에 잘 익어 / 萬家橘柚飽秋霜
상자마다 가득 따 담아 바다를 건너오는데 / 採著筠籠渡海洋
고관이 이를 받들어 대궐에 진상하면 / 大官擎向彤墀進
빛과 맛과 향기가 완연히 그대로라네 / 宛宛猶全色味香
사군의 수레와 기마대가 길이 포위하여라 / 使君車騎簇長圍
꿩 토끼 고라니 노루 온갖 짐승이 쓰러지네 / 雉兔麇麚百族披
해도엔 다만 곰과 범과 표범이 없어 / 海島但無熊虎豹
숲에서 노숙을 해도 놀래킬 것 없다오 / 林行露宿不驚疑
뜨락의 풀밭에서 전룡을 만나면은 / 庭除草際遇錢龍
분향하고 축주 올리는 게 그 지방 풍속인데 / 祝酒焚香是土風
육지 사람들 놀라며 서로 다퉈 비웃으면서 / 北人驚怕爭相笑
도리어 오공이 죽통에 든 걸 원망한다오 / 還怨吳公在竹筒
여염집 자제들이 태학에 유학하여 / 閭閻子弟游庠序
학문으로 많은 인재 길러짐을 기뻐하노니 / 絃誦而今樂育多
큰 바다라서 어찌 지맥이야 끊어졌으랴 / 滄海何曾斷地脈
높은 인재가 이따금 문과에도 오른다오 / 翹材往往擢巍科
두무악의 위에 있는 영추의 물은 / 頭無岳上靈湫水
가물어도 안 마르고 비가 와도 불지 않는데 / 旱不能枯雨不肥
천둥 벼락과 구름이 별안간에 발생하나니 / 霹靂雲嵐生造次
노는 이가 뉘 감히 신의 위엄을 가벼이 보리 / 遊人疇敢褻神威
화태도의 서쪽은 물이 서로 부딪치어 / 火脫島西水相擊
풍뢰를 뿜어대고 성난 파도가 하도 높아 / 風雷噴薄怒濤高
만곡의 크나큰 배가 비스듬히 가노라면은 / 萬斛海鰌傾側過
나그네의 목숨은 가볍기 그지없다오 / 行人性命若鴻毛
순풍 기다리며 조천관에 머무노라면 / 候風淹滯朝天館
처자들이 서로 만나 술잔을 권하는데 / 妻子相看勸酒盃
한낮에도 이슬비 부슬부슬 내리나니 / 日中霢霂霏霏雨
알건대 이는 고래가 기를 뿜어서라네 / 知是鰍魚噴氣來
[주D-001]당초의 세 사람은……신인이었는데 : 제주도(濟州島)에는 맨처음 양을나(良乙那)·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라는 세 사람이 있어 그 땅에 나누어 살면서 그 사는 곳을 도(都)라고 이름하였는데, 신라(新羅) 때에 고을나의 후손 고후(高厚)가 그 두 아우와 함께 바다를 건너서 신라에 조회하니, 왕이 기뻐하여 고후에게는 성주(星主)란 호칭을 주고, 그 둘째 아우는 왕자(王子)라 하고, 끝 아우는 도내(都內)라 하고, 나라 이름을 탐라(耽羅)라 했다고 한다.
[주D-002]주진촌 : 옛날 중국 서주(徐州)의 주진촌에는 주씨와 진씨만이 살면서 대대로 통혼(通婚)을 하며 서로 의좋게 살았다는 데서 온 말이다.
[주D-003]광양당 : 제주도 남쪽 호국신사(護國神祠)의 당명(堂名)임. 전설에 이르기를 “한라산신(漢拏山神)의 아우가 나서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고 죽어서는 신이 되었다. 고려(高麗) 때에 송(宋) 나라 호종단(胡宗旦)이 와서 이 땅을 압양(壓禳)하고 배를 타고 돌아가는데, 그 신이 매로 변화하여 돛대 머리에 날아오르더니, 이윽고 북풍이 크게 불어 호종단의 배를 쳐부숨으로써 호종단은 끝내 비양도(飛揚島) 바위 사이에서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그 신의 신령함을 포창하여 식읍(食邑)을 주고 광양왕(廣壤王)을 봉하고 나서 해마다 향(香)과 폐백을 내려 제사하였고, 본조(本朝)에서는 본읍(本邑)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했다.”고 하였다.
[주D-004]방사 : 거마(車馬)를 관장한다는 별 이름이다.
[주D-005]호원에서 목장을 주관 : 원(元) 나라 때에 제주도를 거마(車馬)를 관장하는 방성(房星)의 분야(分野)라 하여 이 곳에 말의 목장(牧場)을 두고 단사관(斷事官)이나 만호(萬戶)를 두어 목축을 주관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6]수우 : 본디 소지(沼池)나 하천(河川)을 맡은 관명인데, 여기서는 곧 해산물(海産物)을 관장하는 기관을 가리킨 말이다.
[주D-007]전룡 : 큰 뱀을 말하는데, 용(龍)의 일종이라고도 한다.
[주D-008]두무악 : 한라산(漢拏山)의 이칭이다.
[주D-009]조천관 : 제주도 세 고을을 경유하여 육지로 나가는 자는 모두 여기에서 바람을 기다리고, 전라도를 경유하여 세 고을로 들어오는 자도 모두 이 곳과 애월포(涯月浦)에 배를 댄다고 한다.
'늙은이의 한 가지 즐거움(老人一快事)'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년)의 시집 '송파수작(松坡酬酢)’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나이 71세 때(75세에 서거)에 쓴 것으로서, 늙음에 따른 신체의 변화를 겸허하고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달관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요 내용은..
1수에서 머리카락이 없어지니 감고 빗질하는 수고도 없고 백발의 부끄러움도 없다고 하며 민둥머리를 예찬하고,
2수에서는 치아가 다 빠져도 음식을 씹고 삼키는 데 지장이 없고 무엇보다 치통이 없어졌음을 즐거워 하고,
3수에서는 눈이 어두어지니 책 읽어야 할 부담이 없어지고 좋은 경치를 보고 즐기게 되며,
4수에서는 귀가 들리지 않아 세상의 시비 다툼을 듣지 않게 됨을 노래하고
5수에서는 붓 가는 대로 미친 말을 마구 써도 퇴고할 필요도 없고 남의 비평에 신경 쓰지 않아서 좋고,
6수에서는 손님과 바둑을 두는 일을 꼽으며, 만만한 상대만을 골라 두며 편안히 즐김을 읊고 있다.
명물학의 유행은 조선 후기 문화계의 특기할 만한 현상의 하나이다. 명물학은 명물도수학 혹은 명물고증학 등으로 불리며 18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그간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외부 사물의 정보를 수집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취합한 정보를 정리한 저술이 나타났다. 명물학 자체가 反성리학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명물학은 성리학적인 토대를 흔들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명물학의 그러한 위험성을 간파하였던 정조는 학술 정책을 통해 명물학의 성격을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는 세도가들이 경세와는 거리가 먼 명물고증학에 심취한 가운데 일부 지식인들은 정조의 정책을 계승하여 명물고증학의 확산에 대응하였다. 명물학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연구하려는 움직임과 그것을 견제하려는 시도가 교차하면서 명물학은 전개되었다. 명물학의 유행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이와 관련한 연구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명물학은 조선 후기의 사상사 내지 문화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검토해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문헌을 대상으로 그 속에서의 사실을 통해 인용할 줄 알아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가 되며,
세상에 명성을 떨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는 다산의 "조선시(朝鮮詩)" 선언과도 동일한 맥락에서 언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의 글도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이기 위해 작성한 서신인데,
이 글에서 다산은『시경(詩經)』시의 전형적 형식인 네 자로 된 시(四字詩)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가 인식했던 시의 근본에 관해 언급한다.
... 시(詩)를 반드시 힘써야 할 것은 아니지만 성정(性情)을 도야(陶冶)하려면 시를 읊는 것도 상당히 도움이 된다. 예스러우면서 힘있고, 기이하면서 우뚝하고, 웅혼하고, 한가하면서 뜻이 심원하고, 맑으면서 환하고 거리낌없이 자유로운 그런 기상에는 전혀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가늘고 미미하고, 자질구레하고 경박하고 다급한 시에만 힘쓰고 있으니 개탄할 일이로다. 단지 율시(律詩)만 짓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비루한 습관으로 실제로 다섯 자나 일곱 자로 된 고시(古詩)는 한 수도 보지 못했으니, 그 지취(志趣)의 낮고 얕음과 기질의 짧고 껄끄러움은 반드시 바로잡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내가 요즈음 다시 생각해 보아도 자기의 뜻을 사실적(事實的)으로 표현하는 데나 회포를 읊어내는 데는 넉 자로 된 시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본다. 고시(古詩) 이후의 시인들은 남을 모방하는 것을 혐오하여 마침내 4자로 시짓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요즈음 같은 처지는 4자시 짓기에 아주 좋구나.
너희들도 『시경(詩經)』「풍아(風雅)」의 근본 뜻을 깊이 연구하고
그 후에 도연명(陶淵明)이나 사령운(謝靈運)의 빼어난 점을 본받아 넉자시(四字詩)를 짓도록 하여라.
무릇 시의 근본은 부자(父子)나 군신(君臣)·부부(夫婦)의 떳떳한 도리를 밝히는 데 있으며,
더러는 그 즐거운 뜻을 드러내기도 하고,
더러는 그 원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끌어내게 하는 데 있다.
그 다음으로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서
항상 힘없는 사람을 구원해 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 주고자
방황하고 안타까워서 차마 내버려두지 못하는 간절한 뜻을 가진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시가 되는 것이다.
다만 자기 자신의 이해(利害)에만 얽매일 것 같으면 그 시는 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