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寫眞贊[자화상 찬]

俯視李賀

(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다 볼 만큼

優於海東

(우어해동) 조선에서 최고라고들 했지.

騰名謾譽

(등명만예) 높은 명성과 헛된 칭찬

於爾孰逢

(어이숙봉) 네게 어찌 걸맞겠는가.

爾形至眇

(이형지묘) 네 형체는 지극히 작고

爾言大閒

(이언대동) 네 언사는 너무도 오활하네.

宜爾置之

(의이치지) 네 몸을 두어야 할 곳은

丘壑之中

(구학지중) 금오산 산골짝이 마땅하도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9751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경주 금오산[남산] 용장사지 삼층석탑

 

금오신화 5편은 34세 무렵 용장사 서고에서 집필한 것으로 추정됨/ 아래 시 참조.

세종의 대구 시로 비단 50필을 하사받고 5세 신동으로 세상에 알려진 김시습은

20대 중반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시험 준비를 하던시절,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에 서책을 불사르고 승려가 됨

34세 무렵 경주 남산[금오산] 용장사 서고에서 <금오신화> 5편을 저술함

거렬당한 사륙신의 시신을 거둬 노량진에 모신 분도 김시습이라 함.

김시습은 생륙신의 한 사람.

1439년(세종 21년)

5세 때에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중용과 대학을 배워 능통하였다.

정승 허 조 (許稠)가 그를 찾아가서 불러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늙을 로(老)자로 운을 달아 지어라]라고 하니,

곧 [늙은 나무가 꽃 피는 것은 마음이 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니

허 조는 문득 무릎을 치면서 [정말 신동이구나!]하고 탄복하였다 한다.

세종께서 이 소문을 듣고 시습을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그의 재주를 시험하게 하여

[동자의 학문하는 태도가 흰 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것 같구나

( 子之學 白鶴 靑空之末)]

란 싯귀를 주어 댓귀를 지으라 하니

[성스러운 임금님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바다속에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

(聖主之德 黃龍 海之中)]

고 답하여, 세종께서는 크게 칭찬하시고 비단 50필을 상으로 내렸다. 이로부터 이름은 온 나라에 떨쳐 사람들에게서 5세 신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5세 신동은 비단 끝자락을 허리에 묶어 끌고 가더란 설화도 있습니다.

 

茸長寺有懷(용장사 유회)

ㅡ 김시습

 

茸長山洞幽

용장산동유, 용장산 골짜기 깊고 깊어서

不見有人來

부견유인래, 사람이 오는 것이 보이지 않네.

細雨移溪竹

세우이계죽, 가랑비는 시냇가 대나무를 찾아가고

斜風護野梅

사풍호야매, 스쳐가는 바람은 들의 매화를 감싸주네.

小窓眠共鹿

소창면공록,  작은 창에서 잠드니 꿈은 사슴을 따라 나서고         

枋椅坐同灰

방의좌동회, 낡은 의자에 앉으니 몸과 마음 식은 재로다

不覺茅簷畔

불각모첨반, 초가집에 딸린 밭두둑이 알지 못하는 사이

庭花落又開

정화낙우개, 뜨락의 꽃밭에는 꽃이 지고 또 피누나.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8087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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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만복사저포기 上

自寫眞贊[자화상 찬] 俯視李賀 (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다 볼 만큼 優於海東 (우어해동) 조선에서 최고라고들 했지. 騰名謾譽 (등명만예) 높은 명성과 헛된 칭찬 於爾孰逢 (어이숙봉) 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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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만복사저포기 下

萬福寺摴蒲記 下 만복사저포기 2]무덤에서 사흘간 처자 환신과 지내다 1)처자 환신을 따라 개령동 처자의 집에 가다 生執女手, 經過閭閻, 양생이 여인의 손을 잡고 마을을 지나가는데, 犬吠於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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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8085

 

김시습, 이생규장전 上

[주]담장은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경계다. 담장 안은 이생이 경험하지 못한 이상세계였다. 담장을 넘어 최랑과 시를 창수하니 신선세계에서 선녀를 만난 기분이었다. 어떻게 빠져들지 않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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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8084

 

김시습, 이생규장전 下

[주]연애[풋사랑]-울산 농장, 결혼-홍건적의 난에 피살, 인귀교환-명수 다해 영별. 이 작품은 세 차례에 걸친 만남과 이별의 변주곡이다. 2]이생, 최랑과 이별하다 1)이생의 행동이 탄로나 울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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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2577

 

김시습,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주] 이 작품은 부벽루에서 시를 창수할 짝을 만난 홍생과 선녀 기씨녀의 회고시의 향연이다. 고양된 회고의 정서를 응축한 홍생의 칠률 6수, 기씨녀의 칠률 6수, 五言 40운 80구의 기씨녀의 오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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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남염부주지 上

이 작품에는 매월당이 20년에 걸친 정신적 방황에서 도출하려 했던, 삶과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회의와 불교의 세계관 및 의식의 오류에 대해 염왕과 대화하는 형식을 통해 정리하고 있다. 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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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남염부주지 下

3]염왕과의 담론 1)유불을 비교하다 生問曰 (생문왈) : 박생이 물었다. 周孔瞿曇 (주공구담) : "주공과 공자와 석가는 何如人也 (하여인야) : 어떤 사람들입니까?" 王曰 (왕왈) : 임금이 말하였다. 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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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용궁부연록

[주]한생이 용궁의 상량식 잔치에 초대되어 상량문 짓고, 용궁의 풍류잽이들과 초대받은 사람들이 돌아가며 재주를 보이며 시를 지은 후, 한생은 용궁을 두루 구경하고, 진주 두 알과 비단 두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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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전 -율곡 이이

[주]세조의 왕위찬탈로 파탄난 인생, 그는 장부의 표상이라며 수염을 기른 중으로 일생을 방랑했다.47세때 환속하여 조부신께 사죄문도 올렸지만 충신불사이군의 유교적 이데올로기는 태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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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년보

http://www.maewd.com/

매월당 김시습기념관>학습마당>매월당

 

1435년(세종 17년)

시울 반중 북쪽에 있는 충순위(忠純衛) 일성(日省)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 (江陵)이요, 자는 열경(悅卿), 휘는 시습(時習),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법호는 설잠(雪岑)이다. 대대 무인의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문장이 뛰어나 귀여움을 받았다.

고려조 (高麗朝) 시중 김태현(金太鉉)의 십삼세 손이다. 그이 외조가 맡아서 글을 가르쳤는데 말은 가르치지 않고 천자만 가르치어 어려서부터 말로 하는 것보다 글로 표현하는 것이 더 빨랐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논어(論語)에 [자왈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子曰 學而時習之 不亦悅(設)乎)]에서 시습(時習)을 따서 휘(이름)로 하고 경(卿)자를 넣어서 열경(悅卿)이라고 자를 지었다고 한다. 세살 때 한시를 능히 지었다.

유모가 맷돌에 보리 가는 것을 보고 ,

[비도 없이 천둥소리 어디서 나나,

누런 구름 조각이 각 사방에 흩어지네]

하고 소리 높이 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신기하게 여겼다. [無 雨 黃 雲]

 

1439년(세종 21년)

5세 때에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중용과 대학을 배워 능통하였다.

정승 허 조 (許稠)가 그를 찾아가서 불러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늙을 로(老)자로 운을 달아 지어라]라고 하니,

곧 [늙은 나무가 꽃 피는 것은 마음이 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니

허 조는 문득 무릎을 치면서 [정말 신동이구나!]하고 탄복하였다 한다.

세종께서 이 소문을 듣고 시습을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그의 재주를 시험하게 하여

[동자의 학문하는 태도가 흰 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것 같구나( 子之學 白鶴 靑空之末)]

란 싯귀를 주어 댓귀를 지으라 하니

[성스러운 임금님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바다속에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聖主之德 黃龍 海之中)]

고 답하여, 세종께서는 크게 칭찬하시고 비단 50필을 상으로 내렸다. 이로부터 이름은 온 나라에 떨쳐 사람들에게서 5세 신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5세부터 13세까지

이웃에 사는 대사성(大司成) 김 반(金泮)의 문하에서 논어(論語).맹자(孟子).시경(時經).춘추(春秋)를 배웠으며, 이웃에 사는 사성(司成) 윤상(尹祥)에게 나아가 역경(易經).예기(禮記)와 여러 사서(史書)에서 제자백가(諸自百家)에 이르기까지 배웠다.

 

1449년(세종 31년)

1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외가에서 양육을 받았다.

 

1454년(단종 2년) 20세 때,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455년(세조 1년) 21세에,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端宗)이 왕위를 빼앗겼다는 변보를 듣고 문을 닫고 3일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읽던 서적을 다 불에 태우고 거짓 미친 채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1458년(세조 4년) 24세 때,

관서지방을 여행하였다.

가을에 <탕유관서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를 저술하였다 .

 

1463년(세조 9년) 28세 때

방랑 여행으로 호남지방을 여행하였고 그해 가을에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를 저술하였다. 가을에 서적 구입차 서울에 올라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를 받아 열흘 동안 법화경(法華經)을 교정하였다.

 

1465년(세조 11년) 31세 때,

경주(慶州)에 정착하였고, 봄에 남산의 주봉인 금오산 용장사 아래 계곡에 금오산실을 지어 살았다.

3월말에 효령대군의 초청을 받아 서울로 나와 원각사(圓覺寺)의 낙성식에 참석하였다.

 

1468년(세조 14년) 34세 때,

겨울에 금오산에 거처하고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저술하였다.

이즈음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하다. 경주 남산의 주봉이 금오산이다.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를 모방하여 인귀교환설화를 수용하여 ‘신화’라 붙이다.

 

1471년(성종 2년) 37세 되던 해

봄에 금오산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와 도성 동쪽 수락산 기슭에 폭천정사를 짓고 은거하였다.

 

1476년(성종 7년) 42세 때,

<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를 저술하다.

 

1481년(성종 12년) 47세 때,

다시 속인이 되었다. 고기를 먹고 머리를 기르며 안씨(安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다.

 

1482년(성종 13년) 48세 때,

이 해 이후부터 세상이 쇠진해짐을 보고는 세상일에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1483년(성종 14년) 49세 때,

육경(六經).자사 등의 많은 서적을 싣고 관동유람의 길을 떠났다.

 

1485년(성종 16년) 51세 때,

봄에 <독산원기(禿山院記)>를 지었다.

 

1493년(성종 24년) 59세 때,

3월에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현재는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無量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

1511년 (중종 6년)

세상을 떠난지 18년만에 왕명으로 유집(遺集)을 찾아 모아서 간행케 하였다.

1582년 (선조 15년)

세상을 떠난 지 89년만에 선조께서 이 이(李珥)에게 영을 내리어 김시습전(金時習傳)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1703년 (숙종 29년)

세상을 떠난지 210년만에 유생 곽억령 등이 김시습 등 6인의 절의를 추모하여 사우를 세울 것을 상소하여 대왕께서 윤허하였다.

1782년 (정조 6년)

세상을 떠난 지 289년만에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추증하였다.

1784년 (정조 8년)

세상을 떠난 지 291년만에 청간(淸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참고]

무량사 (無量寺)에 선생의 부도(浮屠)가 있고 또 영정이 있다.

경주시 기림사 일주문 안에도 사찰 경내에 경주 남산에서 옮겨온 사당이 중수되어 있다.

이 영정은 선생이 자신의 초상을 자필로 그리셨다는 설이 전해 온다 .

선생은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저명한 학자이시다.

 

http://blog.naver.com/kwank99?Redirect=Log&logNo=30029487601

 

이율곡 : 전기 <김시습전(金時習傳)>

<김시습전(金時習傳)> 【해설】 이이(李珥)가 지은 전(傳). 김시습에 대하여 지은 전이다. 작자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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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전(金時習傳)

-이이(李珥)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고 관은 강릉(江陵)이다. 신라 알지왕(閼智王)의 후손에 주원(周元)이라는 왕자가 있어 강릉을 식읍(食邑: 공신에게 내리어 조세(租稅)를 받아쓰게 한 고을)으로 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눌러 살아 관향으로 하였다.

그 후에 연(淵)이 있고 태현(台鉉)이 있었는데 모두 고려의 시중(侍中)이 되었다. 태현의 후손 구주(久住)는 벼슬이 안주목사(安州牧使)에 그쳤는데, 겸간(謙侃)을 낳았으니 그의 벼슬은 오위부장(五衛部將)에 그쳤다. 겸간이 일성(日省)을 낳으니 음보(蔭補: 벼슬을 조상의 음덕으로 얻는 것)로 충순위(忠順衛)가 되었다.

일성이 선사 장씨(仙사 張氏)에게 장가들어 선덕 10년(宣德十年: 世宗 17년, 1435) 시습을 한사(漢師: 지금의 서울)에서 낳았다. 특이한 기질을 타고나 생후 겨우 여덟 달에 스스로 글을 알아보았다. 최 치운(崔致雲: 본관 강릉(江陵). 세종 때 평안도 도절제사(都節制使) 최윤덕(崔潤德)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웠다.)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기어 이름을 시습이라고 지었다. 말은 더디었으나 정신은 영민하여 문장을 대하면 입으로는 잘 읽지 못하지만 뜻은 모두 알았다. 3세에 시를 지을 줄 알았고 5세에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통달하니 사람들은 신동이라 불렀다. 명공(名公) 허조(許稠) 등이 많이 보러갔다.

장헌대왕(莊憲大王: 세종대왕의 시호)께서 들으시고 승정원으로 불러들여 시로써 시험하니 과연 빨리 지으면서도 아름다웠다. 하교(下敎)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친히 보고 싶으나 세속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할까 두려우니, 마땅히 그 집에서 면려(勉勵)하게 하며 들어내지 말고 교양을 할 것이며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

하시고 비단을 하사하시어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명성이 온나라에 떨쳐 오세(五歲)라고 호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시습이 이미 임금의 장려하여 주심을 받음에 더욱 원대한 안목으로 학업을 힘썼다.

그런데 경태(景泰: 명 태종의 연호 1450-1467)의 연간에 영릉(英陵: 세종대왕)ㆍ현릉(顯陵: 문종대왕을 이름.)이 연이어 돌아가시었고, 노산(魯山: 단종)은 3년 되는 해에 왕위를 손위(遜位)하였다. 이 때에 시습의 나이 21세로 마침 삼각산(三角山)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서울로부터 온 사람이 있었다. 시습은 즉시 문을 닫아걸고 3일 동안 나오지 않다가 이에 크게 통곡하고 서적을 몽땅 불살라 버렸으며, 광증을 발하여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자취를 불문(佛門)에 의탁하고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그리고 여러 번 그 호를 바꾸어 청한자(淸寒子)ㆍ동봉(東峯)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ㆍ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그의 생김생김은 못생기고 키는 작았다. 뛰어나게 호걸스럽고 재질이 영특하였으나 대범하고 솔직하여 위의(威儀)가 없고 너무 강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했다.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분개한 나머지 심기(心氣)가 답답하고 평화롭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세상을 따라 어울려 살 수 없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육신에 구애 받지 않고 세속 밖을 노닐었다. 국중(國中) 산천은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고 좋은 곳을 만나면 머물러 살았으며, 고도(故都)에 올라 바라볼 때면 반드시 발을 동동 구르며 슬피 노래하기를 여러 날이 되어도 마지않았다.

총명하고 영오(穎悟)함이 남달리 뛰어나서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시ㆍ서ㆍ역ㆍ예기ㆍ주례ㆍ춘추)은 어렸을 때 스승에게서 배웠고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전수(傳受)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섭렵(涉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번 기억하면 끝내 잊지 아니하므로, 평일에는 독서하지 않고 또한 서책을 싸가지고 다니지도 않지만 고금의 문적(文籍)을 빠짐없이 관통하여 사람들이 질문을 하면 의심할 여지없이 즉시 응대하였다. 돌무더기가 뭉쳐 있는 듯 답답하고 의분과 개탄으로 차있는 심흉(心胸)을 스스로 시원하게 풀어볼 도리가 없었기에 무릇 세상의 풍ㆍ월ㆍ운ㆍ우(風月雲雨), 산림천석(山林泉石), 궁실의식(宮室衣食), 화과조수(花果鳥獸)와 인사(人事)의 시비득실(是非得失), 부귀빈천, 사생질병, 희노애락(喜怒哀樂)이며, 나아가 성명이기(性命理氣)ㆍ음양유현(陰陽幽顯: 음은 유하고 양은 현하다)에 이르기까지 유형무형(有形無形)을 통틀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면 모두 문장으로 나타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문장은 물이 솟구치고 바람이 부는 듯하며 산이 감추고 바다가 머금은 듯 신(神)이 메기고 귀신이 받는 듯 특출한 표현이 거듭거듭 나와 사람으로 하여금 실마리를 잡을 수 없게 하였다. 성률(聲律)과 격조(格調)에 대하여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지만 그중에서 빼어난 것은 사치(思致: 생각의 운치)가 높고 멀어 일상의 생각에서 뛰어났으므로 문장이나 자질구레하게 다듬어 수식하는 자로서는 따라 갈 수 없는 터이었다.

도리(道理)에 대해서는 비록 완미하여 탐색하고 존양(存養: 존심 양성)하는 공부가 적었지만 탁월한 재능과 지혜로써 이해하여, 횡담(橫談)ㆍ수론(竪論)하는 것이 대부분 유가(儒家)의 본지를 잃지 않았다. 선가(禪道)와 도가(道家)에 대해서도 또한 대의를 알았고 깊이 그 병통의 근원을 탐구하였다. 선어(禪語: 禪門의 말) 짓기를 좋아하여 현모하고 은미한 뜻을 발휘 천명하되, 날카로워 훤해서 막히는 것이 없었으므로 비록 이름 높은 중으로서 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도 감히 그 칼날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그의 타고난 자질이 빼어났음을 이것을 가지고도 징험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명성이 일찍부터 높았는데 하루아침에 세상을 도피하여 마음으로는 유교를 숭상하고 행동은 불교를 따라 한 시대에 괴이하게 여김을 당하였다고 여겼으므로 그래서 짐짓 미쳐서 이성을 잃은 모양을 하여 진실을 가렸다. 글을 배우고자하는 선비가 있으면 나무나 돌을 가지고 치거나 혹은 활을 당기어 쏘려는 듯이 하여 그 성의를 시험하였으므로 문하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적었다. 또 산전(山田)을 개간하기 좋아하여 비록 부귀한 집안의 자제라도 반드시 김을 매고 거두어들이는 일을 시키는 등 매우 괴롭혔으므로 끝까지 학업을 전수받는 자는 더욱 적었다.

산에 가면 나무껍질을 벗겨 하얗게 하여 시 쓰기를 좋아 하였으며 외워 읊조리기를 얼마동안 하고나서는 번번이 통곡하고 깎아버리곤 하였다. 시를 혹 종이에 쓰기도 하였으나 남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대부분 물이나 불 속에 던져벼렸다. 혹은 나무를 조각하여 농부가 밭갈고 김매는 모양을 만들어 책상 옆에 벌려놓고 하루 종일 골똘히 바라보다가는 통곡하고 불태워 버리기도 하였다. 때로는 심은 벼[禾]가 아주 무성하여 잘 여믄 모습이 완상(玩賞) 할만하면 술에 취해 낫을 휘둘러 온 이랑을 다 베어 땅에 내어 버리고서는 큰 소리로 목놓아 통곡하기도 하였다. 행동거지가 종잡을 수 없었으므로 크게 세속사람들의 비웃어 손가락질하는 바 되었다.

산에 살고 있을 때 찾아오는 손을 보고서 서울 소식을 물어, '마구 비웃고 꾸짖는 사람이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으fp 기쁜 빛을 하고 만일, '거짓으로 미쳤으며 속에 포부가 있다고 하더라'하면 문득 눈살을 찌푸리면서 기뻐하지 않았다. 사령을 받은 고관이 혹 인망이 없는 사람이면 반드시 통곡하여 이르기를,

"백성이 무슨 죄 있길래 이 사람이 이 자리를 맡는가"

하였다. 그 당시에 명경(名卿: 이름있는 공경) 김 수온(金守溫)과 서 거정(徐居正)은 국사(國士: 나라의 모범되는 선비)로 상찬(賞讚)되었다. 거정이 바야흐로 행인을 물리치고 바삐 조회에 들어가는데, 시습이 남루(藍縷)한 옷차림에 새끼줄로 허리띠를 두르고 폐양자(蔽陽子: 천한 사람이 쓰는 백죽립(白竹笠)를 쓰고서 저자에서 만났다. 시습은 앞에서 인도하는 무리를 무시하고 머리를 쳐들고 불러 말하기를 "강중(剛中: 거정의 자)이 편안한가"하였다. 거정은 웃으면서 이에 응답하고 초헌(초軒: 대부가 타는 수레)을 멈추어 서로 대화를 나누니, 온 저자 사람들이 놀라는 눈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조정의 선비로서 시습의 모욕을 당한 사람이 참지 못하여 거정을 보고서 상주하여 그 죄를 다스려야겠다고 하니 거정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그만두시오, 미친 사람과 무얼 따질 것이 있겠소. 지금 이 사람을 죄주면 백대(百代)후에 반드시 공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이오."

하였다. 김 수온이 지관사(知館事)로서 "맹자 견양혜왕(孟子見梁惠王)"이라는 논제를 가지고 태학(太學: 성균관)의 유생들을 시험하였다. 어떤 상사생(上舍生: 진사나 생원)이 삼각산에 가서 시습을 보고 말하기를,

"괴애(乖崖: 수온의 별호)가 장난을 좋아합니다. '맹자 견양혜왕'이 어찌 논제에 합당하겠습니까."

하였다. 시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노인이 아니면 이 논제를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고 이에 붓을 들어 재빨리 한편의 글을 만들어 주며 말하기를,

"생원이 스스로 지은 것처럼 해서 이 노인을 한번 속여 보시오."

하였다. 상사생이 그 말대로 따라하였더니 수온이 끝까지 읽지도 않고 급히 묻기를.

"열경이 지금 서울의 어느 절에 머물고 있는가."

하였다. 상사생은 숨길 도리가 없었으니 그 알려짐이 이와 같았다. 그의 이론은 대략 '양혜왕은 왕을 참칭(僭稱)한 자이니, 맹자가 만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인데 지금은 그 글이 없어져서 수집하지 못한다. 수온이 죽은 뒤 그가 좌화(坐化: 앉아서 죽음)하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시습은 말하기를,

"괴애는 욕심이 많은데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는가 설혹 있었다 하더라도 좌화는 예가 아니다. 나는 다만 증자(曾子)의 역책(易책)과 자로(子路)의 결영(結纓)을 들었을 따름이오.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아마 수온이 부처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성종(成宗) 12년(1481) 시습의 나이 47세였다.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제문을 만들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은 대략 이러하였다.

"제(帝: 순임금)께서 오교(五敎: 오륜)를 베푸심에 부자유친(父子有親)이 맨 앞에 위하고 죄가 3천 가지로 나열되지만 불효의 죄가 가장 크옵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살고 있는 이 누구인들 부모의 길러주시고 교육하여 주신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고 미련한 소자는 본지(本支)를 사승(嗣承)하여 이어나가야 하온데 이단(異端: 불교와 노장)에 침체(沈滯)하여 말년에서야 겨우 뉘우치고 있습니다. 이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경(聖經)을 탐색하여 추원(追遠)하는 큰 의례를 강구하여 정하고, 청빈한 생활을 참작하여 간략하지만, 정결하기를 힘쓰며 성의가 담긴 제수를 차리려 애썼습니다. 한무제(漢武帝)는 70세에야 비로소 전 승상(田丞相)의 ‘선술(仙術)을 멀리하라’는 말을 깨달았고, 원덕공(元德公)은 100세에야 허 노재(許魯齋)의 ‘인의강상(仁義綱常)’의 권고에 감화하였습니다."

드디어 안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다. 많은 사람들이 벼슬하라고 권하였으나 시습은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고 방광(放曠)하기를 예와 같이 하였다. 달 밝은 밤을 만나면 이소경(離騷經) 외우기를 좋아하였고, 외우고 나면 반드시 통곡하였다. 혹 송사하는 곳에 들어가 사곡(邪曲)한 것을 정직한 것으로 만들어 궤변(詭辯)을 부려서 반드시 이겼으며, 판결 문안이 이루어지면 크게 웃고 파기하기도 하였다. 뛰노는 시동(市童)들과 어울려 놀며 취하여 길가에 드러눕기 일쑤였다. 하루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이 저자를 지나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저놈을 멈추게 하라"

고 하였다. 창손은 듣지 못한 체 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위험한 일로 여기어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절교하였는데 다만 종실(宗室: 왕족)인 수천부정(秀川副正) 정은(貞恩)과 남 효온(南孝溫)ㆍ안응세(安應世)ㆍ홍유손(洪裕孫) 등의 무리 몇 사람만이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효온이 시습에게 묻기를,

"나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시습은 대답하였다.

"창구멍으로 하늘을 엿보는 거지."

효온이,

"동봉 그대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시습은 말하였다.

"넓은 뜰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는 거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아내가 죽자, 다시 산으로 돌아가 두타(頭陀)(중이 머리를 깎아 눈썹과 같게 한 것)의 모습을 하였다. 강릉과 양양 지방에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였고 설악(雪嶽)ㆍ한계(寒溪)ㆍ청평(淸平) 등지의 산에 많이 있었다. 유자한(柳自漢)이 양양의 원으로 있으면서 예로써 대접하며 가업을 회복하여 세상에 나가기를 권하자 시습은 이를 서신으로 사절했는데, 거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장차 장참(長鑱: 긴 자루가 달린 가래. 농기구의 한 가지)을 만들어 영출(笭朮: 茯笭과 蒼朮)이나 캐겠소. 온 나무가 서리에 얼어붙거든 중유(仲由)의 온포(縕袍)를 손질하고, 온산에 백설이 쌓이거든 왕공(王恭)의 학창을 매만지려 합니다. 낙백(落魄)하여 세상에 사는 것보다는 소요(逍遙)하며 한 평생을 보내는 편이 나을 것이요, 천년 후에 나의 속뜻(素志)을 알아주기 바라는 바이요."

성종 24년(1493)에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병들어 누워 서거하니 향년 59세였다. 우연을 하여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임시로 빈소차림을 하여 놓아두라고 일렀다. 3년 후에 장사지내려고 빈소를 열어보니 안색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 중들은 놀라 탄식하며 모두 부처라고 하였다. 마침내 불교식에 의하여 다비(茶毗: 불교의 화장)하고 그 뼈를 취하여 부도(浮圖: 작은 탑)를 만들었다. 생존시에 손수 늙었을 때와 죽었을 때의 두 개의 화상을 그리고, 또 스스로 찬(贊)을 지어 절에 남겨 두었다. 찬의 끝에 이르기를,

네 모습이 지극히 못났는데, 爾形至

네 말 너무 당돌하니, 爾言大동

마땅하도다 네가 宜爾置之

구렁텅에 빠짐이어 溝壑之中

하였다. 지은 시분은 산실(散失)되어 십분의 일도 보존되지 못하였는데 이자(李자)ㆍ박상(朴祥)ㆍ윤춘년(尹春年) 등이 선후 수집해서 세상에 인쇄하여 내놓았다고 한다.

신 삼가 생각컨대, 사람이 천지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는데, 청하고 탁하며 후하고 박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면서 아는 생지(生知)와 배워서 아는 학지(學知)의 구별이 있으니, 이것은 의리(義理)를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습과 같은 사람은 문(文)에 대하여 나면서부터 터득했으니 이는 문장에도 생지가 있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미친 짓을 하여 세상을 도피한 은미한 뜻은 가상하나 그렇다고 굳이 윤리의 유교를 포기하고 방탕하게 스스로 마음내키는 대로 한 것은 무엇입니까.

비록 빛을 감추고 그림자마저 숨기어 후세로 하여금 김시습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한다 한들 도대체 무엇이 답답할 것 있겠습니까. 그 인품을 상상해 보건대 재주가 타고난 기량(器量)의 밖으로 넘쳐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였던 것이니, 어찌 경청(輕淸)한 기(氣)를 받기는 풍족한데 후중(厚重)한 기를 받기는 부족하였던 이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절의(節義)를 표방(標榜)하고 윤리를 심어 그 심지를 구극(究極)하여 보면 일월(日月)로 더불어 광채를 다툴 만합니다. 그러므로 그 기풍(氣風)을 접하면 나약(懦弱)한 사람도 감흥하여 일어서게 될 것이니 비록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시습의 영특한 자질을 가지고 학문과 실천을 갈고 닦으며 힘썼던들 그 이룩한 바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 바른말과 준엄한 논의로 기피(忌避)해야 할 것도 저촉하며, 공(公)ㆍ경(卿)을 매도(罵倒)해 조금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 당시에 그의 잘못을 들어 말한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선왕의 성대하신 덕과 높은 재상들의 넓은 도량은, 말세에 선비로 하여금 말을 공손하게 하도록 하는 것과 견주어 볼 때, 그 득실이 어떠하겠습니까. 아! 거룩합니다.』

 

【해설】

이이(李珥)가 지은 전(傳). 김시습에 대하여 지은 전이다. 작자의 문집인 <율곡집> 권14∼16 ‘잡저’에 실려 있는 그의 유일한 ‘전(傳)’이다. 율곡의 나이 47세 7월에 지은 것으로, 대부분 김시습에 대해 있는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였으며, 다만 끝에 저자의 의견을 덧붙여 절의와 윤기를 내세워 백세지사(百世之師)로 찬양하여 그의 억울한 울분의 넋을 달래주고자 하였다.

<김시습전>의 내용은 김시습의 선세가계(先世家系)에서 시작하여, 어린 시절 학문을 처음 익히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화와 단종의 손양(遜讓)과 세조의 즉위에서 비롯된 김시습의 행적이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특히, 불문(佛門)에 의탁하여 방외(方外)에 놀았으나 그의 중심은 언제나 유자(儒者)의 위치에 머물렀음을 지적하였다. <김시습전> 중에서 학문과 문학적 재능에 대하여 세밀히 기록하는 과정에서 더러 세상에 전해지는 이야기 등도 수록하고 있다.

그 중에서 김수온(金守溫)ㆍ서거정(徐居正)ㆍ남효온(南孝溫)ㆍ정창손(鄭昌孫)ㆍ유자한(柳自漢)과의 일화는 대체로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말년에 그가 안씨(安氏)를 취하여 가정을 이루었던 사실과 오늘날 이자(李秕)ㆍ박상(朴祥)ㆍ윤춘년(尹春年)에 의하여 그의 시문집이 전하게 된 내력을 밝혔다. 말미에는 이이 자신의 김시습에 대한 평을 기록하고 있다.

<김시습전>은 전통적인 전의 양식에 충실하여 사실을 기록하는 데에 치중하였다. 따라서 일화로 남는 김시습의 행적 정리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설화로 유전하는 그의 일생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위하여 엄격한 비평적 안목에 의하여 그를,

“재주가 그릇(器) 밖으로 넘쳐흘러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으리만큼 되었으니, 그가 받은 기운이 경청(輕淸: 곡조 따위가 맑고 가벼움)은 지나치고 후중(厚重)은 모자라게 마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義)를 세우고 윤기(倫紀: 윤리와 기강)를 붙들어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풍성(風聲)을 듣는 사람들은 겁장이도 용동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되기에 남음이 있다.”고 한 말은 그의 내면세계를 중심으로 한 평가일 것이다.

또한, 이이는 김시습이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써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다면 그 업적은 한이 없었을 것이라면서 애석해하였다. 불우한 삶을 영위하였던 한 인물에 대한 올바른 기록을 전이라는 양식을 빌려 쓴 하나의 전형이다.

김시습 영정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산 무량사] /무량사에서 임종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8088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https://kydong77.tistory.com/21288

 

경주 남산의 불상들, 신라 천년의 佛心

https://www.youtube.com/watch?v=0ntn3Q28BD4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 가, 개달음에 뿌리를 내리자.) *위 주문(呪文)의 산스크리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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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마애석가여래 좌상은 용장사지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kydong77.tistory.com/20419

 

林悌, 鼠獄說(서옥설)

백호(白湖) 임제(1549~1587) www.youtube.com/watch?v=KLpOIbt-VCE newsis.com/view/?id=NISX20140917_0013174722 조선시대 부패한 정치사회 비판한 우화소설…임제 ‘서옥설’ 【서울=뉴시스】김태은 문화전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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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稗言>은 〈서옥설〉이본이다. 

kostma.korea.ac.kr/dir/viewIf?uci=RIKS+CRMA+KSM-WZ.0000.0000-20140423.TOYO_1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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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사항 북한이나 중국에서는 이 책의 작가를 임제(林悌, 1549-1587)로 확정하고 있지만, 남한에서는 아직까지 찬자 및 시기에 대해 확정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18세기 이후의 작품으로 이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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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사항

북한이나 중국에서는 이 책의 작가를 임제(林悌, 1549-1587)로 확정하고 있지만, 남한에서는 아직까지 찬자 및 시기에 대해 확정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18세기 이후의 작품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서옥설〉이 임제가 쓴 것으로 알려진 이유는 김태준이 『조선소설사』에서 비롯된다. 어떤 근거로 이 작품의 작가를 임제로 확정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추측컨대 김일성대학 송산문고에 소장된 등사본에 쓰인 ‘羅州 林悌 著’라는 기록과 관련되어 있으리라 본다. 아마도 김태준이 본 자료가 원본이고, 김일성대학에 소장된 자료는 이를 등사한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이 작품의 저자를 임제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소설 작품에 유명인을 가탁한 작품이 적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작품 역시 임제를 가탁했을 가능성이 더욱 커 보인다. 이 점에서 아직은 이 작품의 작가를 미상으로 두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하겠다.

구성 및 내용

이 책은 창고의 곡식을 모두 훔쳐 먹은 쥐를 창고 신[倉神] 앞에 잡아다가 송사를 벌이는 송사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송사의 형식을 통해 당시 세태를 고발하는 면모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우언소설의 형식도 갖추고 있다. 마지막에는 ‘태사공왈(太史公曰)’로 시작하는 간단한 논평을 붙였다. 소설 내지에는 각종 잡다한 한시 및 연환시(連環詩), 윤회시(輪回詩), 안택가(安宅歌). 차귀거래사(次歸去來辭) 등 다양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패언』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는 마을에서 불이 났을 때 주변으로 번지는 환란을 벗어나기 위해 창사(倉舍)는 반드시 한적한 곳에다 지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창고 주변은 풀이 무성하게 우거지고, 돌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이끼가 담장과 벽에 얽히고 설켜 있고, 곰팡이가 계단에 항상 피어 있었다. 창고가 먼 탓에 사람들의 발길도 뜸했다. 그 시절에 움푹 패인 굴에 큰 쥐가 살았는데, 교활하고 남을 속이는 데에 뛰어나서 모든 쥐들의 대장이 된다. 예전에 가마솥 세 다리 중 한 다리를 파서 넘어뜨린 것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것도 모두 그의 계략이었다.

하루는 쥐가 모든 쥐들을 불러 인적이 드문 창사에 들어가 생활할 것을 제안한 후, 마침내 천여 마리의 쥐를 거느리고 창고에서 지낸다. 이들은 배가 고프면 먹고, 배가 부르면 그치면서 10여년 간을 지내다보니, 마침내 창고가 텅 비게 된다. 이를 안 창고 신은 신병을 시켜 쥐를 잡아다가 그 죄를 꾸짖으며 그 도당과 부추긴 자들을 사실대로 말하도록 한다. 쥐는 먼저 자신의 고단한 신세를 말한 후, 복숭아나무 신[桃神]이 웃으며 지켜봤고, 버드나무 신[柳神]이 춤을 추면서 조장을 했다고 아뢴다. 그러자 창고 신이 이 둘을 잡아다가 그 죄를 물으니,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는 쥐가 말한 행위는 자기들의 본성임을 아뢴다. 창고 신이 그들의 공초를 보고 근거가 있다고 보아, 그 둘을 감옥에 가둔 후 다시 쥐에게 묻는다. 그러자 쥐는 이번엔 문신(門神)과 호령(戶靈)이 자신을 조장했다고 말한다. 창고 신은 이에 둘을 잡아다가 그 죄를 물으니, 문신과 호령의 행위 역시 그들의 본성이므로 죄가 없다고 공초한다. 이들의 공초를 본 창고 신은 이 둘을 감옥에 가두고 다시 쥐에게 배후를 묻는다.

이런 식으로 쥐는 도신(桃神)과 유신(柳神), 문신(門神)과 호령(戶靈)에 이어 순차적으로 늙은 고양이(蒼猫)와 황견(黃犬), 청설모(狌)와 두더지(鼴), 흰 여우(白狐)와 삵(斑狸), 고슴도치(蝟)와 수달(㺚), 노루(獐)와 토끼(兎), 사슴(鹿)과 돼지(豕), 양(羊)과 새끼 양(羔), 원숭이(猿)와 코끼리(象), 승냥이(狼)와 곰(熊), 노새(䮫)와 당나귀(馿), 소(牛)와 말(馬), 기린(獜)과 사자(獅), 남산의 호랑이(南山之虎)와 북해의 용(北海之龍) 등이 자신을 조장했다고 말한다. 창고 신 역시 순차적으로 이들을 불러와서 그 죄를 따지고, 그들도 순차적으로 순리로써 무죄를 주장한다. 그들의 공초를 본 창고 신은 모두 근거가 있기에 이들을 옥에 가둔 후, 다시 쥐를 불러 화를 내며 바른대로 말하도록 한다.

이에 쥐는 다시 자신의 고단한 처지를 말한 뒤,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의 속성을 비판한다. 꽃이 피면 시들고 시들면 다시 피는 것이 나무의 이치로, 무심히 꽃이 피고 무심히 꽃이 지는 것이거늘 복숭아나무는 그렇지 않아서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고 사람의 마음을 태탕케 하니, 연꽃이나 매화와 비교하여 어떠한가를 묻는다. 또한 무당들에게 꺾여 기도의 용도로나 쓰이고, 무릉도원으로 이끌어 피세하게 한 후 다시 그 곳을 찾지 못하게 한 죄를 따진다. 버드나무는 상심을 자아내게 하는 나무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두 나무는 상서롭지 못함을 따진다. 이런 식으로 앞서 창고 신에게 자신을 조장했다고 말한 존재의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제시한다. 그것은 공초를 길게 함으로써 요체를 짚어낼 수 없도록 하려는 쥐의 꼼수이기도 했다.

이어서 쥐는 자신이 밤에 작업을 할 때 반딧불이가 불을 밝히고, 닭은 새벽이 온다는 것을 알려주기에 수월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고 밝힌다. 이에 창고 신은 반딧불이와 닭을 잡아와 그 죄를 따진다. 반딧불이와 닭은 자신들이 밤에 불을 밝히고 새벽에 우는 이유를 말한다. 공초를 본 창고 신은 이 둘을 일단 가둔 후, 쥐가 고발한 내용은 반딧불이와 닭의 직임이라 하고, 쥐에게 실제 부추긴 자를 사실대로 말하라고 한다. 이에 쥐는 순차적으로 달팽이(蝸)와 거미(蟻), 두견새(杜鵑)와 앵무새(鸚鵡), 꾀꼬리(鶯)와 나비(蝶), 제비(燕)와 개구리(蛙), 박쥐(蝙蝠)와 참새(鳥雀), 까마귀(烏)와 까치(鵲), 솔개(鴟)와 올빼미(梟), 거위(鵝)와 오리(鴨), 굴뚝새(鷦鷯)와 비둘기(鵓鳩), 메추라기(鶉)와 꿩(雉), 매(鷹)와 새매(鸇), 기러기(鴻)와 큰기러기(鵠), 황새(鸛)와 집오리(鶩), 갈매기(鷗)와 백로(鷺), 송골매(鶻)와 수리(鷲), 비취(翡翠)와 원앙(鴛鴦), 해오라기(鵁鶄)와 비오리(鸂鶒), 난새(鸞)와 학(鶴), 봉황(鳳凰)과 공작(孔雀), 붕새(鵬)와 고래(鯨)가 부추겼다고 한다. 창고 신은 이들의 공초를 보고 모두 수감한 후,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음을 밝힌다. 그러면서 화를 내며 다시 부추긴 자들을 요구하자, 쥐는 한꺼번에 벌(蜂), 매미(蟬), 거미(蜘蛛), 풀벌레(螗䗻), 하루살이(蜉蝣), 잠자리(蜻蜓), 파리(蠅), 모기(蚊), 두꺼비(蟾蜍), 지렁이(蚯蚓), 자라(鰲), 게(蟹) 등이 부추겼다고 한다.

창고 신은 이들을 모두 가두고, 철사로 쥐를 묶어 기둥에 매단 후 신병들에게 명하여 오형(五刑)의 기구와 큰 솥에 담긴 뜨거운 물을 가져오게 하며 위협한다. 그리고 자기의 족당들이 작당하고서 날짐승과 들짐승 및 곤충들에게까지 그 죄를 돌리니 그 간악함이 드러났다면서 쥐의 입을 자르고, 가죽을 벗겨내고, 사지를 잘라내고, 가슴과 배를 가르고, 꼬리를 자르며, 귀를 끊고, 눈을 도려내고, 목을 끊고, 그 척추는 끓는 물에 던짐으로써 남는 것이 하나도 없게 하라고 명한다. 이에 쥐는 울며 한 마디 말을 하고 죽겠다고 한다. 그러고는 신(神)은 자신의 간악함만 알고, 자신이 말한 다른 동물들의 사특함을 모른다면서 그들의 특성에 따른 잘못을 하나하나 제시한다.

말을 마치자 맹견이 침을 흘리고 혀를 날름거리며 쥐를 물려하자, 그제야 쥐는 다급하게 자신을 부추긴 자를 사실대로 말하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늘과 땅의 신, 산과 들의 도깨비, 푸르고 울창한 소나무와 잣나무, 바람과 구름, 이슬과 별, 해와 달 등 모든 것들이 상제의 명에 따른 것이니, 자신의 행위도 그러한 것이니 무슨 죄냐고 묻는다. 이에 창고 신은 크게 웃으며 상제께서 악종을 내신 까닭을 여쭙겠다고 한 후, 상제를 알현하자, 상제는 그 사안을 보고 간활한 꾀로 자신의 덕을 더럽히고 금수들을 무고했다고 하면서 쥐는 온갖 방법으로 죽이고, 나머지 금수는 방송하라고 한다. 이에 창고 신은 내려와 모든 금수를 풀어주고, 임의로 복수를 하도록 한다. 이에 하늘과 땅을 덮을 만큼 급히 쥐 육속에게 달려들어 물어뜯고 하는 등의 잔혹한 복수를 한다. 기린과 봉황이 말리면서 그만 두게 하자, 비로소 모두 돌아간다. 이로써 이후는 창고의 곡식이 농사짓지 않은 자에게 빼앗기는 환란도 없어졌다.

 

서지적 가치

이 책은 〈서옥설〉 이본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서옥설>은 국립중앙도서관본 〈鼠獄記〉, 규장각본 〈鼠獄說〉, 김광순본 〈鼠獄說〉, 임형택본 〈鼠獄說〉 등이 있다. 이 외에 김일성대학본 등 북한에도 몇 종이 더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보았던 소설과는 다른 성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책 이면에 쓴 다양한 한시와 글들도 주목할 만하다. 이들 역시 기녀 관련 한시들을 한데 모아 놓기도 하는 등 따져볼 만한 작품들도 더러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역시 주목해야 할 장르는 소설이다.

여기에 실린 소설은 기존에 보았던 고전소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독자들의 흥미를 고려한 권선징악을 주제로 했다든가, 구성력에서 긴밀성을 갖추려고 했다든가 하는 점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사물의 속성을 강조하려고 한 경향만이 돋보일 뿐이다. 내용에서 쥐가 제시하고 비판한 실로 다양한 들짐승과 날짐승, 그리고 곤충의 속성은 서사적 장치로 활용되었다기보다는 찬자가 독자들에게 지식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양한 동물이나 곤충을 제시하면서 낯선 한자들을 다수 쓴 것도 서사성보다는 교술성을 강조한 결과라 할 만하다. 내용 그 자체보다는 현학적인 내용을 드러내기에 급급한 모양새다. 이런 유형의 소설은 현재까지 많이 알려진 바가 없다. 아마도 19세기 이후 지적 요구 양상이 소설을 통해 드러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음 직하다.

내용적 가치

이 책의 내용은 특별할 것이 없다. 곡식을 훔친 쥐를 창고 신이 징치했다는 것이 전부다. 더구나 소설을 구성하는 내용 대부분은 쥐가 배후로 지목한 각종 동물들의 공초를 듣는 데에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소설은 줄거리 자체보다 동물들이 말한 속성을 이해하는 점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속성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이 소설 작가가 살았던 당대의 현실적 문제를 제시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점은 이 소설의 마지막 논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불은 두드리지 않으면 번지고, 옥사는 결단하지 않으면 번진다. 창고 신으로 하여금 그 죄를 따져 책망하였으면 그 재앙은 반드시 거세게 번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 요사한 기운이 쌓인 것이 어찌 창고에 구멍을 내는 미물 하나뿐이겠는가? 아! 두렵도다![火不擈則延, 獄不斷則蔓, 向使倉神, 案其罪而磔之, 則其禍必不熾也. 噫! 戾氣所鍾, 豈獨穴倉之一虫也. 吁! 可畏也.]

불길을 미리 잡지 않으면 큰 불이 되는 것처럼 옥사도 일찍이 결단하지 않으면 크게 번진다는 하였다. 그리고 작가가 말하고자 한 본심을 직접 드러냈다. ‘요사한 기운이 어찌 쥐와 같은 미물뿐이겠는가?’라는 물음은 곧 세상 천지에 사악한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말한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이 소설은 사악한 자들에 의해 횡행하는 무분별한 송사와 분명한 사안에 대해 우유부단한 면모를 갖춘 당시의 세태를 동물에 빗대어 제시한 것이라 할 만하다.

북한에서 다루고 있듯이, 이 작품을 ‘중세 봉건사회 탐관오리의 교활성과 악랄성을 풍자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정치성보다는 세태에 초점을 맞춰 읽는 것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음 직하다. 실제 이런 유형의 소설은 근대 전환기 󰡔금수회의록󰡕과 같은 동물들을 통해 세태를 경계한 우언소설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물론 그것이 외래 작품을 수용한 것이라 해도, 그런 문학적 전통이 존재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또한 쥐, 다람쥐, 두꺼비, 황새 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가운데 많은 동물들이 함께 등장해 송사 또는 토론을 벌이는 19세기의 여타 우화소설과 함께 그 사적 흐름을 조명할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장효현, 윤재민, 최용철, 지연숙, 이기대, 『교감본 한국한문소설 우언우화소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07.

김태준, 박희병 교주, 『증보 조선소설사』, 한길사, 1992.

조선문학창작사 고전문학실, 『고전소설 해제』, 한국문화사, 1994.

 

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793

 

패관문학(稗官文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패관문학이라는 말이 국문학사와 소설사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김태준(金台俊)의 『조선소설사 朝鮮小說史』가 처음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패관문학보다 패관소설(稗官小說)·패사(稗史

encykorea.aks.ac.kr

 

패관문학에 대한 의미를 대략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설화문학,

② 설화문학과 소설문학을 연결하는 과도기적인 문학형식,

③ 고려 후기의 가전체작품,

④ 실사적(實事的)인 잡록 또는 견문잡지(見聞雜識)를 총집한 수필문학,

⑤ 고전소설,

⑥ 고려 중엽에 등장한 『파한집』·『보한집』 등의 시화문학 등이다.

 

 

www.youtube.com/watch?v=KLpOIbt-VCE

 

 

* 조선시대엔 창고의 곡식이나 축내던 관료들이 이제는 땅투기로 민초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군요.

kydong77.tistory.com/20600

 

全공직자 재산등록, "행정력 낭비"/ 선거판, 급하다 급해!

www.youtube.com/watch?v=1Uqk5stEcGk 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21/03/29/2021032902334.html 全공직자 재산등록, 가족 포함 재산신고자 1000만명 이를 수도..."행정력 낭비" 기존 대상 23만명, LH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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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youtube.com/watch?v=oz8U8GJA1Jw

 

www.youtube.com/watch?v=gIHYIslGqnE

 

 

박영선 32%-오세훈 55.8% /김영춘 32.1%-박형준 51.1% (리얼미터) 

www.youtube.com/watch?v=97EDyaaG17I

 

 

www.youtube.com/watch?v=MP5VmiV4lfM

 

 

[4·7 재보선] '친노' 조기숙 "민주당의 네거티브 안 통해..명분 있는 패배 준비해야"

news.v.daum.net/v/20210401004000768

 

[4·7 재보선] '친노' 조기숙 "민주당의 네거티브 안 통해..명분 있는 패배 준비해야"

참여정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31일 더불어민주당의 4·7 재보궐선거 패배를 예상하면서 "명분 있는 패배를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차후를 도모할 수 있다"고 조

news.v.daum.net

"명분 있는 패배가 盧정신..그래야 차후 도모"
"LH사태는 성냥불에 불과, 폭발할 게 폭발했다"
"文극렬 지지자, 막말과 훈계질이 도를 넘어"

 

www.youtube.com/watch?v=TkK2YPGW-Uk

 

 

 

 

쥐는 또다시 蝙踾(편복, 박쥐)과 鳥雀(조작)이라 하다가,

烏(오, 까마귀)와 雀(작, 참새)이라 하다가,

鴟(치, 솔개) 鵻(추. 산비둘기) 鳩(구, 비둘기) 雉(치, 꿩)

鷹(응, 매) 鴻(홍, 큰기러기) 鵠(곡, 고니) 鶴(학, 학)

鶯(앵, 꾀꼬리) 鷺(로, 해오라기) 鷲(취, 수리) 翡翠(비취)

鳳凰(봉황) 孔雀(공작) 鵬(붕, 붕새) 등이라 말했다.

또 蜂(봉, 벌) 蟬(선, 매미) 蜘蛛(지주,거미) 蜋(랑, 사마귀)

蜉(부, 하루살이) 蜻(청, 귀뚜라미) 蠅(승, 파리) 蚊(문, 모기)

蟾(섬, 두꺼비) 蚯(구, 지렁이) 蚓(인, 지렁이) 등이 사주했다고

둘러댔다.

 

 

kydong77.tistory.com/20424

 

鼠獄記(서옥기) 4

www.youtube.com/watch?v=KLpOIbt-VCE 위와 같이 쥐를 아무리 고문해 봐야 자백하지 않았다. 드디어, 크게 성이 난 쥐를 결박하여 기둥에다 매달고 神兵들에게 五刑을 갖추게 하고, 큰 가마솥에 물을 끓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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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youtube.com/watch?v=KLpOIbt-VCE

 

 

 [출전] 김기동, 한국고전소설연구,교학사, 1981. pp.146-148.

필사본 26면, 每面12행, 평균28자씩 쓴 漢文寫本

 * 필서본 표기 소설명은 '鼠獄記'임.

 

쥐 한 마리가 여러 쥐들을 거느리고 곡식 창고를 뚫고 들어가 여러 해 동안

배부르게 잘 지냈다.

어느 날, 쌀창고지기 神에게 발각되어 神兵에게 잡혀갔다.

창고의 神은 누가 여기에 쌀이 있다는 걸 가르쳐 주었냐고 국문했다.

쥐는 米倉 앞에 서 있는 桃木과 柳木이라 둘러댔다.

창고의 神은 즉시 桃木과 柳木의 神을 압송해 와 문초하니,

門神과 戶神이 가르쳐 주었다고 말했다.

창고의 神은 門神과 戶神을 잡아들여 국문하니, 이를 부정했다.

 

쥐는 또 猫(묘, 고양이)와 犬(개)라 하다가

兎(토기) 鹿(사슴) 豕(시, 돼지) 羊 羔(고, 양새끼) 猿(원, 원숭이) 熊(웅, 곰)

䮫(루, 큰 노새) 驢(려, 나귀) 牛 馬 驎(린, 얼룩말) 獅(사, 사자) 虎(호, 범)

龍(룡) 등이라 말했다.

 

또 쥐는 螢光(형광)이 밝혀 주었고, 群鷄(군계, 닭들)이 때를 알려 주었다고 했다.

쥐는 또 蝸(와, 달팽이)가 침을 내어그 담벽을 적셔주었고,

蟻(의, 개미)가 出器하여 그 흙을 수레 삼았으니

나를 도운 자는 달팽이와 개미라 했다.

압송된 달팽이와 개미는 개미의 진술을 부인하였다.

 

www.youtube.com/watch?v=mQ1fvedDw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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鼠獄記(서옥기) 2

쥐는 또 猫(묘, 고양이)와 犬(개)라 하다가 兎(토기) 鹿(사슴) 豕(시, 돼지) 羊 羔(고, 양새끼) 猿(원, 원숭이) 熊(웅, 곰) 䮫(루, 큰 노새) 驢(려, 나귀) 牛 馬 驎(린, 얼룩말) 獅(사, 사자) 虎(호, 범) 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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鼠獄記(서옥기) 3

쥐는 또다시 蝙踾(편복, 박쥐)과 鳥雀(조작)이라 하다가, 烏(오, 까마귀)와 雀(작, 참새)이라 하다가, 鴟(치, 솔개) 鵻(추. 산비둘기) 鳩(구, 비둘기) 雉(치, 꿩) 鷹(응, 매) 鴻(홍, 큰기러기) 鵠(곡,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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鼠獄記(서옥기) 4

위와 같이 쥐를 아무리 고문해 봐야 자백하지 않았다. 드디어, 크게 성이 난 쥐를 결박하여 기둥에다 매달고 神兵들에게 五刑을 갖추게 하고, 큰 가마솥에 물을 끓여 집어 넣겠다고 위협하며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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