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s2YvLKRaejc

 

효제충신예의염치는 仁을 실현하는 실천유학이었다.

송대에 이르러 무이산에 거처를 정한 주희는 유학을 철학화한 理氣철학을 정립한다.

송시열은 주자학을 조선에 받아들이는 한편 그의 삶은 주희를 모델로 했다.

화양구곡이 그것인데, 충북 영동 월류봉 아래에도 그의 서당터였었다고 유허비를 세웠다. 천하절경이라는 말씀.

유학에는 사후 세계에 대한 이상향으로 신선들이 산다는 명산대천을 꼽았다.

경치좋은 곳은 유학자들의 이상향이었고 이이(李珥) 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는 연시조로 모두 10수로 되어 있다. 그가 해주 수양산 밑 고산면에 은거했을 때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서 그 곳 경치를 관암(冠巖)·화암(花巖) 등 9곡으로 나누어 읊은 것이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0898

 

송시열(宋時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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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은 조선 후기 효종~숙종 대 문신이이자 학자로서 김장생·김집의 제자이며, 주희와 이이의 학문을 모범으로 삼았다. 효종 대 중국 청나라에 대한 복수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북벌에 동참하였고, 현종 대 화양동을 비롯한 고향에 은거하며 존주대의의 확립에 힘썼다. 숙종 대 초반 예송의 책임을 지고 유배 생활을 겪은 뒤, 경신환국 이후 다시 출사하여 조선중화주의의 실현에 앞장섰다. 그러나 원자 정호를 반대한 이유로 기사환국 때 사사되었다.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 우재(尤齋) · 문정(文正)이다. 아버지는 강릉참봉(康陵參奉)을 지낸 송갑조(宋甲祚), 어머니 선산곽씨(善山郭氏)는 임진왜란  조헌(趙憲)과 함께 금산에서 전사한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1607년(선조 40) 외가인 충청도 옥천 구룡촌(九龍村)에서 태어났다.

수학 과정

1613년(광해군 5) 곽지인(郭志仁)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듬해부터 3년간 회덕(懷德) 송촌(宋村) 송이창(宋爾昌)의 집에 머물며 그 아들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 소학(小學)』과 『 가례(家禮)』 등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1617년(광해군 9) 인목대비주1에게 배사(拜謝)주2한 일로 금고(禁錮)주3되어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을 배우며 주희(朱熹)와 이이(李珥)의 학문을 모범으로 삼았다. 1625년(인조 3) 이색(李穡)의 후손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결혼하였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맏형 송시희(宋時熹)와 자형(姊兄) 윤염(尹爓)을 잃었다.

1630년(인조 8)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 · 김집(金集) 부자에게 종유주4하며 본격적인 학문의 길에 들어선 뒤, 1632년(인조 10) 회덕으로 이사하여 송준길과 함께 강학주5에 전념하였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서 이이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에 근거하여 성리학적 우주론을 해명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로 장원을 차지하였다.

1636년(인조 14)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주6의 사부(師傅)가 되어 『주역(周易)』과 『서경(書經)』을 가르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였다. 삼전도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물러나 은거하며 평생토록 산림(山林)으로 자처하였다.

정치사상

송시열은 주나라의 예악문물(禮樂文物)로 상징되는 유교 문명의 계승[존주(尊周)] 및 송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 사상의 수호[위주(衛朱)]를 평생의 과업으로 자임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이이의 성리설(性理說), 김장생의 예설(禮說), 김상헌(金尙憲)의 척화론(斥和論) 등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이지만, 금나라의 침략에 직면했던 남송 시기 주희의 학문에 기반하여 1644년 이후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한 동아시아 질서의 대변동 속에서 조선 왕조의 유교적 정체성을 재확립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그 시대적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양란 후유증의 극복이라는 과제에 직면하였던 17세기 후반 조선의 상황 속에서, 송시열의 정치사상은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의 유교적 인륜 질서를 근간으로 삼아 조선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는 내수(內修)의 이념과, 이적(夷狄)인 청나라의 침략으로 말미암은 남한산성의 치욕을 복수하고 붕괴된 중화(中華) 질서를 회복하려는 외양(外攘)의 염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의 내수외양론은 유교적 화이론(華夷論)에 이론적 토대를 두고 있었다. 중화를 높이고[존중화(尊中華)] 이적을 배척하는[양이적(攘夷狄)] 화이분별론은 중국 고대부터 존재해 왔는데, 중화와 이적을 구분하는 지역 · 혈통 · 문화 등 기준 가운데 후천적 · 가변적 요소인 문화를 가장 중시하였음이 유교적 화이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다. 이때 문화란 예의(禮義)와 인륜(人倫)을 핵심으로 하는 유교 문명을 의미하였다.

송시열은 소중화(小中華)로 자부해 온 조선 왕조가 이적이 세운 청나라에 사대하게 된 병자호란 이후의 상황을 개탄하며, 천리(天理)의 실현이라는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청에 대한 복수설치(復讎雪恥)주29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금나라의 침략을 겪었던 남송대 주희의 학문을 새롭게 해석하며 17세기 조선 사상계의 전범으로 삼고자 하였다.

효종의 죽음과 남명(南明)주30의 멸망으로 중원 회복의 가능성이 사라진 현종 대에 들어서는 문화적 화이론에 입각하여 주나라로 상징되는 유교 문명의 부흥을 자신의 책무로 자임하였다. 특히 조선 왕조의 정체성을 유학의 의리론적 전통 위에 수립하려는 새로운 역사의식으로 표출되었다. 은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킨 기자(箕子)에 대한 존숭과 원나라에 신복(臣服)했던 고려 말의 역사에 대한 비판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태조비 신덕왕후의 부묘 및 단종 사육신 추숭을 통하여 태종 세조가 부자 및 군신 의리를 저버렸던 도덕적 과오를 바로잡고 조선 왕조의 의리론적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왕조의 차원을 넘어 유교 문명의 계승이라는 문제의식을 담은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으로 확대되었다.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병하여 소중화를 지켜준 만력제(萬曆帝)주31와 나라가 망하자 자결을 선택한 숭정제주32의 의리를 추모하며, 북벌을 통해 화이분별의 의리를 실천하고자 했던 효종을 그 계승자로 설정한 유교 문명의 새로운 계보를 제시하였다.

이처럼 명 멸망 이후 조선이 중화의 적통을 계승하였다는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의 이념은 명 멸망 60주년인 1704년(숙종 30)에 이르러 제자 권상하(權尙夏)가 화양동에 건립한 만력제와 숭정제의 사당 만동묘(萬東廟)를 통해 상징화되었다. 또한 같은 해 숙종이 창덕궁 북원(北苑)에 대보단(大報壇)을 건립하여 만력제에 대한 제사를 거행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국가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송시열의 조선중화주의는 그간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매몰된 관념적 · 비주체적 사대주의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명대의 정치와 문화 전반에 대하여 부정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황제 중심의 전제정치와 환관의 발호로 집약되는 명의 정치제도를 비판적으로 인식하였을 뿐 아니라, 양명학(陽明學)이 주류를 이루던 명의 사상 역시 배척하였다.

아울러 “나는 평생 명나라의 글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단언하며 16세기 후반 이후 조선에 풍미하던 명의 문풍을 배격하고, 명 학자들의 예학 또한 주자의 본뜻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혹평하였다. 요컨대, 송시열의 중화주의는 혈통(한족) 또는 왕조(명나라)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아니라, 예의를 핵심으로 하는 유교적 문화 가치에 대한 존숭 및 계승 의식을 의미하였다.

학술과 사상

송시열의 학문은 송대 신유학(新儒學)을 집대성한 주희에 대한 절대적 존신(尊信)에 기반하였다. 천리의 보편성과 인간의 도덕적 자각을 전제로 의리(義理)과 정통(正統)의 가치를 강조하였던 주희의 학문과 행적을 통하여, 양란 직후 조선 사회가 직면한 혼란을 극복할 전범(典範)을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특히 요순삼대(堯舜三代) 이후 유학의 종지(宗旨)가 공자(孔子) · 맹자(孟子) 이후 송대 도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는 주희의 도통론(道統論)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숙종 대 문묘 개혁에서 볼 수 있듯이 한 · 당 유학자들에 대한 배척으로 드러나는 한편, 주희를 비롯한 송대 학자들이 남긴 방대한 저술의 핵심을 요약하고 상호모순된 언설을 교감 · 정리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물로는 『주자대전(朱子大全)』 가운데 의심스럽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을 뽑아 해설을 덧붙인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이정전서(二程全書)』의 내용을 주제별로 분류한 『정서분류(程書分類)』, 주희 문인들이 기록한 『주자어류(朱子語類)』의 내용을 교감하여 재편집한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송 이방자(李方子)의 『주자연보(朱子年譜)』와 명 대선(戴銑)의 『주자실기(朱子實紀)』를 통합하여 정리한 『기보통편(紀譜通編)』, 이황(李滉)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정경세(鄭經世)의 『주문작해(朱文酌海)』를 합치고 보완한 『절작통편(節酌通編)』, 『논어』와 『맹자』에 대한 주희의 초기 견해를 조목별로 정리한 『논맹혹문정의통고(論孟或問精義通考)』 등이 있다.

한편, 송시열은 주자 이후 조선의 도학 전통을 정리하며, 고려 말 절의의 상징인 정몽주(鄭夢周)와 유교적 이상국가를 수립하려 했던 조광조(趙光祖)를 거쳐 이이와 성혼(成渾) 그리고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도통론을 제시하였다.

또한 이이 · 성혼을 비롯하여 정철(鄭澈)과 조헌(趙憲) 등 16세기 후반 서인의 결집을 주도한 주요 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하며, 선조 대 동서분당(東西分黨) · 기축옥사(己丑獄事) · 임진왜란 당시 그들의 처신이 정당하였음을 옹호하였다. 이는 이황을 정점으로 삼아 학문적 정체성을 견고하게 다져오며 일원적 도통의식을 형성해 온 남인과 비교하여, 17세기 전반까지도 명확하지 못했던 서인의 학문 계보를 주자학적 도통관에 입각하여 정비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이의 입산(入山) 행적을 거론하며 그의 이기설(理氣說)을 가리켜 불교와 육상산(陸象山)주33의 영향을 받은 이단(異端)이라 규정한 남인들과 여러 차례 충돌하였다. 또한 주희의 경서 주석을 따르지 않았던 윤휴 사문난적(斯文亂賊)주34이라 지목하고, 윤휴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보인 친구 윤선거(尹宣擧)마저 주자학의 배신자로 비난한 일은 숙종 연간 노소 분기의 중요한 원인을 이루었다.

 

영동 송시열 유허비는송시열 선생이 서재를 짓고 강학하던 곳이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2582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https://kydong77.tistory.com/21649

 

주희(朱熹),朱子十悔 & 武夷九曲歌/ 도연명, 桃花源記 & 歸去來辭

주희(朱熹), 朱子十悔 or 朱子十訓 不孝父母死後悔 (불효부모사후회)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후에 뉘우친다. 不親宗族疎後悔 (부친종족소후회) 종친들에게 친밀하밀 않으면 헤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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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22112

 

주희, 무이도가(武夷櫂歌)- 武夷九曲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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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李珥, 1537년 1월 17일(음력 1536년 12월 26일)~1584년 2월 27일(음력 1월 16일))는 조선의 문신이자 성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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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山九曲歌 10수 -율곡 이이

[무료] 계림 팔각채 http://blog.daum.net/guideman/14050397 무이산 http://blog.daum.net/guideman/14050453 장가계 천자산 http://blog.daum.net/guideman/14049890 화산잔도 http://blog.daum.net/guideman/14494709 [화면이 뜨지 않으면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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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1804

 

원문/전문 보기 - 高山九曲歌 (고산구곡가)

4 어즙어, 武夷(무이)를 想像(상상)고 學朱子(학주자)를 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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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9D%B4

 

이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율곡이이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이 사람의 호와 이름을 딴 대한민국의 구축함에 대해서는 DDG-992 율곡이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리이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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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李珥, 1537년 1월 17일(음력 1536년 12월 26일)~1584년 2월 27일(음력 1월 16일))는 조선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관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서인(西人)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이언적이황송시열박세채김집과 함께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하나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의 업적은 성리학에서의 이기일원론의 학문을 밝힌것으로 잘알려져있다.[3]

율곡 이이는 1536년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에 있는 외가인 오죽헌(烏竹軒)에서, 덕수 이씨 통덕랑 사헌부감찰 이원수와 평산 신씨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죽헌 별채에서 태어났는데, 신사임당이 태기를 느끼게 된 계기가 흑룡이 바다에서 하늘로 오르는 꿈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그가 태어난 방은 몽룡실(夢龍室)이라 일렀고, 아이 때의 이름은 '현룡'(見龍)이라 지었다가 뒤에 이(珥)로 바꾸었다. 이후 경기도 파주에 자리한 본가로 와서 생활하였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3648

 

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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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구곡도는 이이가 정계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던 황해도 해주 고산면에 있는 석담구곡(石潭九曲)의 경치를 읊은「고산구곡가」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이이가 1569년(선조 2) 교리직(校理職)을 그만두고 해주 야두촌(野頭村)으로 물러갔을 때 경향 각지에서 그의 학문과 덕행을 흠모하던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이듬해 이이는 문인들과 고산의 석담을 돌며 구곡의 이름을 짓고 이 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1575년(선조 8) 황해도 관찰사로 있다가 다시 석담으로 돌아와 주희(朱熹)가 만년에 은거하면서 경영한 무이정사(武夷精舍)와 무이구곡(武夷九曲)의 자연을 읊은 「무이도가(武夷櫂歌)」를 본떠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세웠고, 1578년에는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Zf0jsSFDQo

 

 諸佛(모든 부처님 - 七佛)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이미 여섯 명의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했다.

첫 번째 부처님은 비바시불,

두 번째는 시기불,

세 번째는 비사부불,

네 번째는 구류손불,

다섯 번째는 구나함모니불,

여섯 번째가 가섭불이고

석가모니불이 일곱 번째다.

이 일곱 부처님을 총칭해 ‘과거칠불’이라고 하는데 칠불통계게는 과거칠불의 공통적인 가르침이다.

칠불통계게는 문헌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가섭불의 게송이라는 게 일반적이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009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https://www.youtube.com/watch?v=EI_2BcYUIPI

 

https://kydong77.tistory.com/21845

 

계정혜(戒定慧 - 戒律 · 禪定 · 智慧) 三學, 4성제 8정도 12연기

https://chamsonsajeon.tistory.com/939 삼학((No.306))—계 · 정 · 혜(戒定慧), 삼학은 삼위일체 |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참선을 해야 삼학((No.306))—계 · 정 · 혜(戒定慧), 삼학(三學)은 삼위일체(三位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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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20779

 

七佛通戒偈 -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七佛 傳法偈

불교의 교의는 무었인가? 한 마디로 요약하면 마음을 청정히 하여 선악을 구분하여 항시 국리민복을 위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아래의 七佛 傳法偈가 대변한다. 칠불통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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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921

 

불교(佛敎)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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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b.history.go.kr/id/sy_001r_0020_0250_0020

 

한국 고대 사료 DB

권 제1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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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왕대 이서국 사람들이 침략하자 미추왕능에서 죽엽군이 나와 물리치다.

제14대 유리왕(儒理王)註 497대에 이서국(伊西國)註 498 사람들이 와서 금성(金城)註 499을 공격하였다. 우리가 크게 막으려 했으나 오랫동안 견딜 수 없었다. 홀연히 이상한 병사가 있어 와서 도와주었는데 모두 댓잎[竹葉]을 귀에 꽂고 있었다. 우리 병사와 힘을 합쳐 적병을 공격해 격파했다. 적군이 물러간 후에 [이상한 병사들이] 돌아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대나무의 잎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 있음을 보고 그때서야 선왕에 의한 음덕의 공이 있었음을 알았는데, 이로 인하여 죽현능(竹現陵)이라 하였다.
註) 497
신라의 제1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284∼298년이다. 이 왕은 백제와 화친하여 함께 왜를 정벌하려다가 그만두었고, 이서고국(伊西古國)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498
현재의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에 있던 소국으로, ≪삼국유사≫ 권1 기이1 노례왕조의 기록에 따르면, 유리왕 19년(서기 42)에 신라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한다. 한편 유례왕 14년(297)에 이서국의 사람들이 신라를 침공한 사실은 이 기사 외에도 ≪삼국유사≫ 권1 기이1 이서국조에서도 확인된다.
註) 499
신라의 왕성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조 및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성곽조에 의하면, 부(府)의 동쪽 4리에 있고 토축으로서 둘레가 2,407척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본서 신라본기 및 지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금성은 신라 초기의 궁으로서, 혁거세거서간 21년(서기전 37)에 축조되었으며, 그에 관한 기록이 소지마립간 22년(500)까지 나온다.
 
 
 
 

[윤용섭의 신삼국유사] 48. 미추왕과 죽엽군(竹葉軍)

제13대 미추왕은 김알지의 7세손으로 성덕(聖德)이 있었으므로 첨해왕의 자리를 물려받아 왕위에 올라, 23년간 재위하였다. 미추왕에게는 신비한 이야기가 몇 있다.제14대 유례왕 때에 이서국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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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미추왕김알지의 7세손으로 성덕(聖德)이 있었으므로 첨해왕의 자리를 물려받아 왕위에 올라, 23년간 재위하였다. 미추왕에게는 신비한 이야기가 몇 가지 있다.

제14대 유례왕 때에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다. 신라는 군병을 동원하여 막으려 했으나, 오랫동안 대적할 힘이 부족했다. 그 때 이상한 군사가 나타나 신라의 병사와 힘을 합쳐 적을 멸하였는데 모두 댓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적의 잔병이 물러간 후에 그 이상한 병사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대나무의 잎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 있음을 보고 그제야 음덕으로 도와주었음을 알았다. 이로부터 이 능을 죽현능(竹現陵)이라 하였다.

미추왕의 성은 김씨(金氏)다. 미조, 미고, 미소라고도 한다. 갈문왕(葛文王) 구도(仇道)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 박씨이고, 왕비는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의 딸 광명부인(光明夫人)이다. 선왕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이 아들 없이 죽자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김씨 왕계의 시조가 되었다.

제37대 혜공왕 14년(779년)4월,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김유신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장군과 같았다. 갑주를 입고 무기를 든 40여명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서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조금후에 능 안에서 우는 통곡을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호소하는 말이 다음과 같았다.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습니다. 나라를 진호(鎭護)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다른 곳으로 멀리 가서 다시는 이 나라를 위하여 힘쓰지 않으렵니다. 임금님께서는 허락하여 주십시오.”

미추왕이 대답하기를, “공과 내가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오. 아무 말 말고 그전처럼 힘써 주시오.”

김유신이 세 번을 청하였으나 왕은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 바람은 이내 돌아갔다. 혜공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대신 김경신을 보내어 김공의 능에 가서 사죄하고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취선사에 내리어 명복을 빌게 하였다. 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인즉, 나라사람들이 그 덕을 기리며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서열을 오릉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불렀다.

출처 : 경북일보(http://www.kyongbuk.co.kr)

 

혜공왕대 유신공이 원통함을 미추왕에게 호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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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 사료 DB

오래 지나 제36대 혜공왕(惠恭王)대인 대력(大曆) 14년 기미(己未) 4월에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유신공(庾信公)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모습이 장군과 같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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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지나 제36대 혜공왕(惠恭王)註 500대인 대력(大曆)註 501 14년 기미(己未) 4월에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유신공(庾信公)의 무덤註 502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모습이 장군과 같았다. 또한 갑주를 입고 무기를 든 40여 명의 군사가 뒤를 따라 와서 죽현능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능속에서 우는 소리 혹은 호소하는 듯한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호소하는 말에,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혼백이 되어 나라를 진호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을 잠시도 가벼이 하거나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770)에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註 503 군신들이 저의 공훈을 생각지 않습니다.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가서 다시는 힘쓰지 않으려니 왕께서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오직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오. 공은 전과 같이 노력해 주시오.” 하였다. [유신공이] 세 번 청하였으나 [미추왕은] 세 번 모두 허락하지 않았고, 회오리바람은 이내 돌아갔다.
혜공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바로 상신註 504 김경신(金敬信)註 505을 보내어 김공의 능에 가서 사죄하고 공을 위하여 공덕보전(功德寶田)註 506 30결을 취선사(鷲仙寺)註 507에 내리어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을 토벌한 후 복을 빌기 위해 세운 곳이기 때문이다. 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인즉, 왕이 국가를 보호하려는 노력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라의 사람들이 그 덕을 기리며 삼산(三山)註 508과 함께 제사지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서열을 오릉(五陵)註 509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고 불렀다.註 510
註) 500
신라의 제36대 왕으로 ‘제37대’라고 서술한 본문은 잘못이다. 재위 기간은 765∼780년이다.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어머니인 만월부인이 섭정하였다. 혜공왕 4년에 대공(大恭)과 대렴(大廉)이 난을 일으켰고 동왕 6년에 김융(金融), 11년에 김은거(金隱居)·염상(廉相)·정문(正門)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어수선해졌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재위 16년에 일어난 김지정(金志貞)의 난 와중에서 죽음으로써 신라의 중대 왕실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501
당 대종(代宗)의 연호로 766~779년에 사용하였다.
註) 502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에 김유신의 무덤이라고 전하는 무덤이 있다. 무덤은 원형의 봉분에 십이지상을 조각한 호석으로 둘러져 있다.
註) 503
혜공왕 6년에 김유신의 자손인 김융이 복주(伏誅)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혜공왕 6년(770)조에 따르면 김융은 반혜공왕의 입장에서 난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한 바 있다(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註) 504
상신(上臣)은 상대등(上大等)을 가리킨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원성왕은 선덕왕 원년(780)에 상대등으로 임명된 바 있다. 원문에는 '工臣'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삼국사기≫의 관련 기사를 고려하여 '상신'으로 풀이한다.
註) 505
후에 원성왕으로 즉위하는 인물이다. 선덕왕이 죽은 후 김주원과 더불어 왕위를 다투었고 그 결과 신라 제38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註) 506
‘보(寶)’란 사원 또는 어떤 기관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재단의 명칭이다. 따라서 공덕보전이란 공덕에 보답하기 위하여 내리는 전지로 이해할 수 있다.
註) 507
≪삼국사기≫ 권43 열전3 김유신 하에서는 이 절을 두고 김유신이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평정하고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에서 김유신이 죽은 673년 사이에 창건되었겠지만, 어디에 세워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註) 508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조에는 신라가 삼산(三山)과 오악(五岳) 이하 명산 대천을 나누어 대사·중사·소사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중 삼산(三山)에 지내는 제사는 대사에 해당하였는데, 나력(奈歷)·골화(骨火)·혈례(穴禮)가 바로 그 세 산에 해당하였다.
註) 509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무덤을 가리킨다. 박혁거세는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만에 승천하였다가 7일만에 유체가 흩어져 땅으로 떨어졌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 합장하려 했으나 큰 뱀이 이를 방해하므로 다섯 조각의 유체를 각각 다섯 개의 무덤으로 장사지냈기 때문에 오릉이라고 하였다(≪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
註) 510
≪삼국사기≫에 의하면 제36대 혜공왕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오묘(五廟)를 정하는데 미추왕은 김씨의 시조이므로 태종대왕·문무대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큰 공이 있으므로 모두 세세불훼(世世不毁)의 신위로 하고 거기에 친묘 2위를 합해 오묘로 하였다(≪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 대묘에는 미추왕을 모셨으며 신라의 가장 큰 국가적 제사인 오묘 중 가장 으뜸의 위치에 있었다.
 

[삼국유사 오디세이] 32. 김유신이 미추왕릉을 찾아간 까닭은?

779년(혜공왕 15) 4월 초여름, 송화산 김유신 장군릉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바람 속에 김유신 장군이 얼핏 보였다. 준마에 오른 장군과 무장한 군사 40명이 회오리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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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왕에게 호국의 상징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도 추가했다.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 군사들이 금성을 공격해왔다. 전세가 불리했는데 귀에 대나무를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적군을 격파했다. 군사들은 홀연히 사라졌는데 미추왕릉 앞에 대나무 잎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선왕의 공덕인 줄 알고 그 능을 죽현릉이라 불렀다.

김유신이 미추왕을 찾아간 이유가 명확해졌다. 김씨가 왕위에 있는 동안 미추왕은 신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존숭받는 선조왕이었다. 김유신의 미추왕릉 불시방문은 홀대 받고 있는 김유신계의 집단 청원이었던 것이다.

김유신 또한 미추왕과 함께 신라의 지키는 호국의 수호신이다. 삼국을 통일의 주역이고 신문왕 때는 이견대에서 문무왕과 함께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신문왕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출처 : 경북일보(http://www.kyongbuk.co.kr)

 

 

 

 

https://kydong77.tistory.com/21171

 

경주 대릉원 천마총, 천년의 역사/ 천마도& 금관

https://www.youtube.com/watch?v=Fbrbr4muNIo *대마도도 우리땅인디..... 사전 설명 https://namu.wiki/w/%EA%B2%BD%EC%A3%BC%20%EC%B2%9C%EB%A7%88%EC%B4%9D%20%EC%9E%A5%EB%8B%88%20%EC%B2%9C%EB%A7%88%EB%8F%84 https://www.youtube.com/watch?v=hsEpAzLtNu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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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amu.wiki/w/%EC%B2%9C%EB%A7%88%EC%B4%9D

 

천마총

天馬冢 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9 ( 황남동 )에 위치한 고분 이다. 과거에는 '경주 155호분'이라고

namu.wiki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tg/view.do?subjectCode=tg_ty_060&tabId=02&levelId=tg_001_0240&ganada=&pageUnit=10

 

우리역사넷

천마총(天馬塚)은 대형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나무 널[木棺]과 부장품을 넣는 수장궤(收藏櫃)를 큰 나무 덧널[木槨] 안에 넣고 돌을 쌓아 덧널을 덮은 후, 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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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은 대릉원의 무덤 중 가장 늦은 시기인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무덤의 주인은 소지 마립간(炤知麻立干, 재위 479~500)이나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으로 추정되는데, 보통은 지증왕의 무덤으로 본다.

[참고]

대릉원 가운데 무덤의 인물이 밝혀진 것은 미추왕지증왕뿐이다.

 

 

혼유석(魂遊石)은 영혼이 놀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설치한 돌이다. 제의(祭儀)를 올릴 때 제물(祭物)을 놓기 위해 만든 돌상은 조선 선조 이전까지는 석상(石床)으로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왕릉에서 지내는 불교식 제의에서 사용되던 기물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왕릉에서 직접 제의를 하지 않고 정자각(丁字閣)에서 유교식 제례를 올리게 되자 용도가 없어진 석상을 조선후기에 속칭을 따라 혼유석이라 하였다.

 

https://dh.aks.ac.kr/sillokwiki/index.php/%ED%98%BC%EC%9C%A0%EC%84%9D(%E9%AD%82%E9%81%8A%E7%9F%B3)

 

혼유석(魂遊石) - sillokwiki

능원(陵園)이나 묘(墓)의 봉분 앞에 설치된 직사각형의 돌로 된 상석. 개설 혼유석(魂遊石)은 영혼이 놀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설치한 돌이다. 제의(祭儀)를 올릴 때 제물(祭物)을 놓기 위해 만든

dh.aks.ac.kr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910

 

혼유석(魂遊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https://www.youtube.com/watch?v=8ZDnq0hRCJY

 

 

https://www.youtube.com/watch?v=fHDS7mzHwIM

 

 

https://www.youtube.com/watch?v=5VUxfbMIuaQ

 

 

https://www.youtube.com/watch?v=9jm246akrmw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695553#home

 

100세 인구 2만명 시대…은퇴 전 키워야 할 7가지 능력 | 중앙일보

재정적으로 준비 없는 은퇴는 노후 빈곤과 노후 불행의 원인이 되고, 활력 없는 은퇴생활은 보람과 의미 없는 삶으로 연결된다. 책은 생애설계를 위해 ▲일 ▲다층 연금 체계 구축 ▲자산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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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 인생설계』는 풍요롭고 건강한 백세시대를 준비할 수 있는 지침서다. 책은 생애설계를 위해

▲일

▲다층 연금 체계 구축

▲자산관리 준비

▲대인관계 

▲삶의 의미를 키우기 위한 다양한 활동 

▲행복한 마음 갖기

▲건강한 몸 유지 등을 7대 분야를 정했다.

이 책은 7대 분야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헌, 통계와 사례를 활용해 분야별 구체적인 실천전략을 제시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c9zO9JJwv2o

 

https://thepllab.com/post/502

 

조직 내 세대 갈등, 어떻게 풀어야 할까? - Trends | 더플랩 인사이트

최근 한국 언론에서 유독 많이 접하게 되는 단어는 단연 ‘MZ세대(Generation MZ)’일 것이다. MZ세대란 밀레니얼(Millenial) 세대와 Z세대를 합친 용어인데, 2018년 말에 한 연구기관의 트렌드 보고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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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세대구분은 베이비붐 세대(Baby Boomers), X세대(Generation X), 밀레니얼 세대(‘Y세대’에서 명칭 변경), Z세대로 나뉜다.

한국에서는 전형적인 전후 세대인 55~65년생 베이비붐 세대와,

65~80년에 출생해 독재와 반공교육 잔재를 경험한 X세대와는 달리,

유년시절부터 급격한 경제발전과 80년대 이후 민주화 문화 속에서 자라난 세대가 그 이전과 구별된다. 이는 한국 사회만의 특색일 것이다.

그래서 사실 밀레니얼 세대Z세대는 연구기관 별 정의에 따라 최대 30년 넘게 차이가 나지만 한국에서만은 ‘(기성세대와는 다른) 요즘의 주류 젊은이들’로 묶이는 것이다.

또한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는 각각 청년, 청소년기에 발전된 디지털 기술과 스마트 디바이스의 수혜를 집중적으로 입어 개인 간 연결성이 그 이전 세대에 비해 무척 높다는 매우 중요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MZ%EC%84%B8%EB%8C%80

 

MZ세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MZ세대는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를 통틀어 지칭하는 대한민국의 신조어다. 밀레니얼 세대는 Z세대와 Z세대 사이의 인구통계학적 집단이다. 일반적으로 1980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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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세대

이 인구통계학적 코호트의 구성원들은 밀레니엄 세대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밀레니엄 세대로 바뀌기 때문이다. 작가 William Strauss와 Neil Howe가 슈트라우스를 창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우 세대론은 밀레니얼 세대를 명명하는데 널리 인정받고 있다.

1993년 8월, 광고 시대 사설은 당시 X세대와 다르게 정의된 13-19세(1974~1980년 출생) 청소년을 묘사하기 위해 Y세대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밀레니얼 세대는 베이비붐 세대의 자손이고 1981년 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출생률이 증가했으며, 세대의 큰 규모 때문에 에코붐 세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1990년 8월에 출산율이 정점을 찍었고 선진국의 소규모 가정으로의 20세기 추세가 계속되었다. 심리학자 진 트웬지는 2006년 저서 제너레이션 미(Generation Me)에서 밀레니얼 세대를 '미 세대'로 묘사했다. 제안된 이 그룹의 대체 이름에는 인터넷 세대, 9/11 세대 등이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캐슬린 샤푸티스는 밀레니얼 세대를 부메랑 세대 또는 피터팬 세대로 분류했는데, 그 이유는 구성원들이 성인기로의 통과의례들을 그들 이전의 세대들보다 더 오랫동안 지연시키는 경향 때문이다. 또한, 이전 세대보다 더 오랜 기간 부모와 함께 사는 구성원들에 대한 경향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킴벌리 파머는 높은 주거 비용과 고등 교육, 그리고 노년층의 상대적 풍요를 이러한 추세를 이끄는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Z세대

Z세대라는 이름은 Y세대(밀레니얼 세대)부터 알파벳 순서를 이어받아 X세대에 이은 2세대라는 점에서 유래했다.[1][2]

이 세대의 다른 이름으로는 i세대[3]국토안보부 세대[4], 인터넷 세대, 디지털 원주민, 네오디지털 세대, 인터넷 세대[5], 100년대, 포스트 밀레니얼 세대 등이 있다. 인터넷 세대라는 용어는 인터넷의 대량 채택 이후에 탄생한 첫 세대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54]

심리학 교수이자 작가인 장 트웬지는 2006년 밀레니얼 세대에 관한 책의 제목으로 iGeneration(줄여서 iGe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출판사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 당시에는 아이팟과 아이맥 컴퓨터는 있었지만 아이폰과 아이패드는 없었다. 트웬지는 나중에 그녀의 2017년 책 iGen에 이 용어를 사용했다. 이 이름은 2009년 인구학자 셰릴 러셀에 의해 만들어졌다.

퓨리서치센터가 2019년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구글 트렌드에 올라온 다양한 명칭을 조사한 결과 미국에서는 Z세대라는 용어가 압도적으로 인기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메리엄-웹스터 사전과 옥스퍼드 사전은 모두 Z세대에 대한 공식 엔트리를 가지고 있다.[6]

일본에서 코호트는 디지털 네이티브로 기술된 이전 코호트에서 한 단계 벗어난 네오디지털 네이티브로 기술된다. 디지털 네이티브는 주로 텍스트 또는 음성으로 통신하는 반면, 네오디지털 네이티브는 비디오, 비디오 전화 및 영화를 사용한다. 네오디지털 네이티브는 PC에서 모바일로, 그리고 텍스트에서 비디오로 변화를 강조한다.[7][8]

주머(Zoomer)는 아이러니하거나 유머러스하거나 조롱하는 어조로 Z세대를 지칭하는 비공식 용어이다.[9] 베이비붐 세대를 가리키는 부머라는 용어와 Z세대의 "Z"를 결합했다. 이에 앞서 2000년대에는 특히 활동적인 베이비붐 세대를 묘사하기 위해 주머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10] 2018년, Zen Z 청소년을 조롱하는 4chan 인터넷 밈에서 "Zoomer"라고 불리는 ‘Wojak' 캐리커처를 통해 사용되면서 현재의 Zoomer의 인기는 급상승했다.[11][12] Merriam-Webster의 기록에 따르면 Z세대라는 용어는 적어도 201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Z세대라는 용어는 2021년 10월 메리엄 웹스터 사전에 추가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b6ta3zeRcA

 

 

https://www.youtube.com/watch?v=RZBmsRavmdY&t=84s

 

 

[뉴스] 의정갈등

https://www.chosun.com/national/welfare-medical/2024/03/29/EM65DVPZUNEZHAYK2D54YSSCRA/

 

“다음 달 대학병원들 구조 조정 돌입할 것… 빅5도 6개월 이상 못 버텨”

다음 달 대학병원들 구조 조정 돌입할 것 빅5도 6개월 이상 못 버텨 신응진 병원협회 정책위원장

www.chosun.com

신응진 대한병원협회 정책위원장(순천향대학교 중앙의료원 특임원장 겸임)은 26일 본지 전화 인터뷰에서 “다음 달이 되면 적지 않은 대학 병원들이 의사·간호사의 월급을 지급하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무급 휴가를 보내는 병원들이 많아질 것”이라며 “서울의 빅5 병원도 6개월 이상 못 버틴다”고 했다. 국내 가장 큰 ‘빅5′(서울대·서울아산·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성모) 병원을 포함한 70여 곳(부속 병원 포함) 대학 병원 대부분이 1~2개월 내 구조 조정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대한병원협회는 병상 30개 이상을 갖고 있는 전국 3500여 개 병원의 병원장 모임이다. 국내 규모별 병원의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단체로 꼽힌다.

현재 빅5 병원도 하루 10억~30억원의 적자가 발생해 1000억원의 마이너스 통장으로 적자를 메우고 있다. 최영석 충북대병원장도 지난 19일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이번 (전공의 이탈) 사태가 5주째로 접어들면서 입원 환자 등이 40% 이상 줄어 일일 수익이 3억여 원 감소했다”며 “4월부터는 매월 90억여 원의 수입 감소가 예상돼 자금 차입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https://v.daum.net/v/20240401030220701

 

“의대 증원하되 규모-시기 조정” 57.2%… “2000명 증원” 28.5%

25일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들이 이동하고 있다(자료사진). 2024.3.25 뉴스1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정책을 두고 국민 57.2%가 “증원하되 규모와 시기를 조정한 중재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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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증원하되 규모-시기 조정” 57.2%… “2000명 증원” 28.5%

[총선 D―9 여론조사]
“정부, 의료공백 잘못 대응” 57.5%… 중도층서도 “중재안 마련” 66.4%
대통령실, 표심 악재 與우려에도… 이종섭-황상무때와 달리 “원칙 우선”

 

https://v.daum.net/v/20240402014016594

 

尹 "국민께 송구...의료계, 합리적 방안 가져오면 논의"

[앵커] 윤석열 대통령은 의료 개혁을 주제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의료계 집단행동에 따른 국민 불편을 조속히 해소하지 못해 송구하다고 밝혔습니다. 2천 명 증원은 최소한의 증원 규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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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esnNY6Xs7P8

 


https://www.youtube.com/watch?v=xsbB6HGdSZM

 

 

https://www.youtube.com/watch?v=lSQCDsDLL4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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