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평광기(太平廣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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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제집
  • 자부(子部)
  • 태평광기(太平廣記)

1. 개요《태평광기(太平廣記)》는 북송(北宋) 때 이방(李昉) 등 12인이 태종(太宗)의 칙명을 받아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977)부터 다음 해 3년(978)에 걸쳐 편찬한 유서(類書)이다. 모두 500권이고 목록 10권이며, 내용의 전체는 92부(部)로 나뉘어 있다. 청나라의 《사고전서(四庫全書)》는 이를 소설가(小說家)에 편입시켰다. 《문원영화(文苑英華)》·《태평어람(太平御覧)》·《책부원구(冊府元龜)》와 함께 송사대서(宋四大書)로 일컬어진다. 소설의 유서로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2. 편자

(1)성명:이방(李昉)(925~996) 등 12인
(2)자(字)·별호(別號):이방의 자(字)는 명원(明遠).
(3)출생지역:심주(深州) 요양(饒陽)(현 하북성(河北省))
(4)주요활동 및 생애
이방은 오대(五代) 후한(後漢) 건우(乾祐) 연간에 진사(進士)가 되고, 후주(後周)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으며, 송(宋)나라에 귀의하여 중서사인(中書舍人) 벼슬을 하였다. 세 번이나 한림(翰林)에 들어갔다. 송 태종(宋太宗) 태평흥국(太平興國) 8년(983),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배수되었다. 단공(端拱) 원년(988) 파직되어 우복야(右僕射)가 되었다가, 순화(淳化) 2년(991)에 다시 평장사(平章事)에 배수되었다. 《구오대사(舊五代史)》 편찬에 참여하고, 《태평어람(太平御覽)》 1,000권, 《태평광기(太平廣記)》 500권, 《문원영화(文苑英華)》 1,000권 등 3부 유서(類書)의 편찬을 주재하였다. 이 가운데 《문원영화》는 이방이 호몽(扈蒙)·서현(徐鉉)·송백(宋白) 등 17명과 함께 태종의 칙명을 받들어 태평흥국 7년(982)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지도(至道) 2년(996)에 졸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뒤에 송나라 인종(仁宗)의 어휘(御諱)인 조정(趙禎)을 피하여 문정(文正)으로 개시(改諡)되었다. 《송사(宋史)》 권265에 입전(立傳)되어 있다.
(5)주요저작:《개보통의(開寶通義)》, 《태평어람(太平御覽)》, 《문원영화(文苑英華)》, 《구오대사(舊五代史)》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태평광기》는 북송 태종(太宗)의 칙명을 받은 이방 등 12명이 태평흥국 2년(977) 3월부터 다음 해(978) 8월까지 편찬하였으며, 인판(印板)을 새긴 것은 태평흥국 6년(981) 정월이라고 한다. 981년의 판각 이후 증쇄되지 않았다. 이 《태평광기》는 전한(前漢)부터 북송 초까지의 기담(奇談) 7,000편을 모아 신선(神仙)·방사(方士)·명현(名賢) 등 92류로 정리하였다. 권수(巻首)에는 인용서목(引用書目)으로서 《사기(史記)》 등 343종의 서적 이름을 열거하였으나, 채록은 하였으면서 인용서목에 빠진 것을 추가하면 근 500종의 문헌을 인용한 듯하다. 그 가운데 235종은 현존하지만 나머지는 산일(散逸)하였다.
명나라에 들어와 가정(嘉靖) 45년(1566)에 허개(談愷)(호(號) 십산(十山))가 필사본을 저본으로 삼아 판각하여 융경(隆慶) 원년(1567)에 수정본을 출판하였다. 이것을 담각본(談刻本)이라고 한다. 만력 연간(1573~1619)에는 허자창(許自昌)이 수정한 허각본(許刻本)이 나왔다. 청나라 건륭(乾隆) 연간(1736~1795) 황성(黄晟)이 교정한 소형본(小型本)은 황씨건상본(黄氏巾箱本)이라고 한다. 그 외 청나라 진중어(陳仲魚)가 발견한 송본(宋本)을 근거로 허각본을 교정하고 그 사실을 기입한 진씨수교본(陳氏手校本), 손잠(孫潜)이 담각본에 송본과의 차이를 주기(注記)한 손교본(孫校本), 담각본과는 다른 계통의 명나라 사본인 야죽재초본(野竹齋鈔本)(명초본(明鈔本)) 등이 있다. 또 소엽산본(掃葉山本)과 필기소설대관(筆記小說大觀), 석인본(石印本)이 있다. 가장 완비된 판본은 왕소영(汪紹楹) 점교본(點校本)이다. 1959년에 왕소영이 담각본을 저본으로 교감한 것을 인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가 출판하고, 1961년에 다시 오식(誤植) 정정본을 중화서국(中華書局)이 출판하였다. 그리고 《태평광기》는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되어, 현재 문연각사고전서본(文淵閣四庫全書本)이 영인되어 있다.

4. 내용

《태평광기》는 전부 500권이며 목록 10권이 별도로 있다. 전한부터 북송 초까지의 奇談 7,000여 편을 모아 신선(神仙)·방사(方士)·이승(異僧)·보응(報應)·명현(名賢)·공거(貢擧)·호협(豪俠)·유행(儒行)·회해(詼諧)·부인(婦人)·정감(情感)·몽(夢)·환술(幻術)·신(神)·귀(鬼)·요괴(妖怪)·재생(再生)·용(龍)·곤충(昆蟲)·초목(草木)·잡전기현(雜傳記賢) 등 92목 1,500류로 분류한 것으로, 소설(小說) 유서 가운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태평광기》의 92목만을 보면 다음과 같다(괄호의 숫자는 권(卷)을 나타냄).

신선(神仙)(1~55)·여선(女仙)(56~70)·도술(道術)(71~75)·방사(方士)(76~80)·이인(異人)(81~86)·이승(異僧)(87~98)·석증(釋証)(99~101)·보응(報應)(102~134)·정응(征應)(135~145)·정수(定數)(146~160)·감응(感應)(161~162)·참응(讖應)(163)·명현(名賢)(164)·염검(廉儉)(165)·기의(氣義)(166~168)·지인(知人)(169~170)·정찰(精察)(171~172)·준변(俊弁)(173~174)·유민(幼敏)(175)·기량(器量)(176~177)·공거(貢擧)(178~184)·전선(銓選)(185~186)·직관(職官)(187)·권사(權挱)(188)·장수(將帥)(189~190)·효용(驍勇)(191~192)·호협(豪俠)(193~196)·박물(博物)(197)·문장(文章)(198~200)·재명(才名)(201)·유행(儒行)(202)·악(樂)(203~205)·서(書)(206~209)·화(畵)(210~214)·산술(算術)(215)·복서(卜筮)(216~217)·의(醫)(218~220)·상(相)(221~224)·기교(伎巧)(225~227)·박희(博戯)(228)·기완(器玩)(229~232)·주(酒)(233)·식(食)(234)·교우(交友)(235)·사치(奢侈)(236~237)·궤사(詭詐)(238)·함녕(諂佞)(239~241)·유오(謬誤)(242)·치생(治生)(243)·편급(褊急)(244)·회해(詼諧)(245~252)·조초(嘲誚)(253~257)·치비(嗤鄙)(258~262)·무뢰(無賴)(263~264)·경박(輕薄)(265~266)·혹폭(酷暴)(267~269)·부인(婦人)(270~273)·정감(情感)(274)·동부(童仆)(275)·몽(夢)(276~282)·무(巫)(283)·환술(幻術)(284~287)·요망(妖妄)(288~290)·신(神)(291~315)·귀(鬼)(316~355)·야차(夜叉)(356~357)·신혼(神魂)(358)·요괴(妖怪)(359~367)·정괴(精怪)(368~373)·영이(靈異)(374)·재생(再生)(375~386)·오전생(悟前生)(387~388)·총묘(冢墓)(389~390)·명기(銘記)(391~392)·뇌(雷)(393~395)·우(雨)(396)·산(山)(397)·석(石)(398)·수(水)(399)·보(寶)(400~405)·초목(草木)(406~417)·용(龍)(418~425)·호(虎)(426~431)·축수(畜獸)(432~446)·호(狐)(447~455)·사(蛇)(456~459)·금조(禽鳥)(460~463)·수족(水族)(463~472)·곤충(昆虫)(473~479)·만이(蠻夷)(480~483)·잡전기(雜傳記)(484~492)·잡록(雜錄)(493~500).

5. 가치와 영향

《태평광기》는 남송과 원나라 이후 널리 읽혀서 남송·원나라 화본(話本)·잡극(雜劇), 명·청 소설·희곡에는 이 책에서 제재를 취한 것이 많다. 또한 이 유서는 한국과 일본에서도 널리 읽히고 활용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김현감호(金現感虎)’에 보면, 호랑이와 관련된 고사를 언급하면서 《태평광기》로부터 신도징(申屠澄) 고사를 인용하였다. 또 〈한림별곡(翰林別曲)〉 2장에는 독서인이 《태평광기》를 열람하는 광경이 언급되어 있다. 〈한림별곡〉이 1216년(고종 3)에 창작되었다고 본다면, 1216년 이전에 《태평광기》가 들어왔으리라 추측된다. 조선시대에는 중국 문헌에 산재하는 고려시대 문헌을 집일하기 위하여 중국 역사서와 정서(政書)는 물론, 《책부원구(冊府元龜)》·《태평광기(太平廣記)》·《옥해(玉海)》·《산당고색(山堂考索)》·《사림광기(事林廣記)》·《기찬연해(記纂淵海)》·《고금합벽사류비요(古今合璧事類備要)》·《한원신서(翰苑新書)》·《해록쇄사(海錄碎事)》·《사물기원(事物紀原)》·《유설(類說)》·《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등의 유서를 활용한 사례가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괴담전서(怪談全書)》로 번안되었다.
조선시대에 《태평광기》는 사례집으로도 활용되었다. 이를테면 1441년(세종 23) 5월 18일(계축), 의관(醫官)이 경중과 외방에서 뇌부(雷斧)·뇌설(雷楔)을 물색하라고 청원할 때 《대전본초(大全本草)》·《필담(筆談)》, 주희의 설과 함께 《태평광기》를 거론하였다. 1462년(세조 8) 성현(成俔)의 백씨 성임(成任)이 《태평광기》 500권을 요약해서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 50권을 만든 후, 다른 여러 서적에서 모은 30권을 합쳐 《태평통재(太平通載)》 80권을 이루었다. 《태평광기상절》은 143항목 843편 고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승소(李承召)(1422~1484)는 〈약태평광기서(略太平廣記序)〉에서, 《태평광기》가 유가 성리학에서 벗어나지만 유학자의 견문을 넓히는데 도움이 될 만하다고 그 가치를 인정하였다. 1463년(세조 8) 1월 1일(병신), 세조는 중궁과 함께 인정전(仁政殿)에서 풍정(豊呈)을 받고는 양성지(梁誠之)에게 “경(卿)이 《태평광기》를 아는가?”라 묻고, 《태평광기》 중의 말을 이야기하였다. 양성지는 그 일을 기회로 세조를 권계(勸戒)하였다. 성종 때인 1492년(성종 23), 이극돈(李克墩)은 《태평통재》를 중간하였다. 1569년(선조 2) 6월 20일(임진)의 석강(夕講)에서 기대승(奇大升)이 그 책을 ‘사람의 심지(心志)를 오도하는 책’이라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은 《태평광기》에 대해 고증적 고찰을 가하면서도 그 책을 실상은 애독하였다. 이를테면 장유(張維)는 《태평광기》를 통해서 〈규수객전(虯鬚客傳)〉을 읽고 《계곡만필(谿谷漫筆)》에 논평을 남겼다.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西浦漫筆)》 하권 49칙에서, 명나라 건문제(建文帝) 부자(父子)가 난을 피해 숨었다는 명나라 패관소설의 전설에 대해, 당나라 측천무후 때 서경업(徐敬業)과 낙빈왕(駱賓王)이 망명하였다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제왕이 난을 피해 몸을 숨겨 천수를 다한 일은 예로부터 없었던 일’이라고 대비 논법을 구사하였다.
조선에서는 17세기 이후 《태평광기언해》가 이루어졌다. 현재로서 고(故) 김일근(金一根)님 소장의 멱남본(覓南本)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낙선재본(樂善齋本) 두 본이 완정하다. 한편 멱남본(전 5권 중 제2권 낙질)과 연세대 귀중본(제2권)은 권지일 26편(120면), 권지이 21편(99면), 권지삼 21편(118면), 권지사 26편(125면), 권지오 33편(107면)이니, 제2권의 낙질분을 제외한 5권에 모두 127편의 이야기를 실었다. 한편 낙선재본은 9권 완질이 현존하며, 총 268편의 이야기를 실었다. 후자는 전자를 저본으로 하면서 《전등신화(剪燈新話)》·《전등여화(剪燈餘話)》 속의 이야기를 일부 언해하고 우리나라 고소설 ‘매화전 전반부(뉴방삼의뎐)’도 수록하였다. 《태평광기언해》는 《태평광기》 가운데 조선의 사정에 맞지 않거나 외설스런 내용, 이단(異端)을 받드는 내용은 생략하였다. 후일담(後日譚)이 붙어 있을 때는 그것을 생략하였으며, 표현이나 어구도 상당히 많이 바꾸었다. 단 삽입시(揷入詩)의 경우는 거의 그대로 번역하였다. 또한 제4책(화(火)) 제12화 〈왕환지[지환]뎐(王之渙傳)〉은 《집이기(集異記)》에 들어 있던 기정화벽(旗亭畫壁) 고사로, 통용본 《태평광기》에는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유설(類說)》, 《설부(說郛)》, 《산당사고(山堂肆考)》 등 유서(類書)에 널리 전하는 고사이다. 《태평광기언해》는 《설부》 수록 ‘왕환지(王煥之)’의 원문을 저본으로 한 듯하다.

6. 참고사항

(1)명언
• “방주(坊州) 의군현(宜君縣)의 왕로(王老)가 온몸에 부스럼이 난 도사를 위해 도사의 말대로 술을 만들어 항아리에 가득 채워 주자, 도사가 항아리 속에 들어가 앉아 있은 지 3일 만에 머리털이 다시 새까맣게 되고 살결도 하얗게 되었으며, 왕로도 그 도사의 말대로 남은 술을 마시자 일시에 공중으로 올라가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신선(神仙)〉
• “신라 출신으로 당나라 빈공 진사가 되었으나 복기련형(服氣鍊形)을 하였던 김가기(金可記)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본래 《속선전(續仙傳)》에 수록되어 있던 이야기를 전재한 것이다. 권143 〈징응(徵應)〉에는 흑치상지(黑齒常之) 이야기가 《조야첨재(朝野僉載)》로부터 전재되어 있다.” 〈신선(神仙)〉
•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이 신선술을 광적으로 좋아하자 부장(部將) 여용지(呂用之)가 후토부인(后土夫人)이 영이(靈異)하다는 이야기를 지어내어 고변을 유혹한 기록이 나온다.” 〈요망(祅妄)〉
• “당(唐)나라 이하(李賀)가 27세로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늘에서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붉은 용을 타고 내려와 ‘옥황상제가 지금 그대를 불러와 새로 지은 백옥루(白玉樓)의 기문을 짓게 하라 하였소.’ 하고서 천상으로 데리고 갔다는 고사가 나온다.” 〈귀(鬼)〉
(2)색인어:태평광기(太平廣記), 태평광기언해(太平廣記諺解), 이방(李昉), 유서(類書), 신선(神仙), 도술(道術), 방사(方士), 이인(異人), 보응(報應), 감응(感應).
(3)참고문헌
• 太平廣記(李昉 等編, 中華書局)
• 교역 태평광기언해(김동욱, 보고사)
• 연세대소장 태평광기언해본(김장환·박재연, 학고방)
• 한국한문기초학사(심경호, 태학사)
• 白話太平廣記(陸昕·郭力弓·任德山 主編, 北京燕山出版社)
• 白話太平廣記(周振甫 主編, 中州古籍出版社)
• 文白對照全譯太平廣記(高光·王小克·汪洋主編, 全5冊, 天津古籍出版社)
• 白話太平廣記(丁玉琤 等 主編, 全5冊, 河北敎育出版社)
• 譯注太平廣記鬼部(堤保仁 編, 星雲社)
• 新釋太平廣記 〈鬼部〉 (西本芳男 新釋·編集)
• 譯注 太平廣記婦人部(鹽卓悟·河村晃太郎編 汲古書院)
• 太平廣記夢部譯注稿(今場正美·尾崎裕 著, 中國藝文研究會)
【심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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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광기상절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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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太平廣記詳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성임(成任, 1421-1484)이 세조의 명을 받아 세조 8년(1462)에 중국의 ≪태평광기≫를 국내 최초로 발간한 책. 총 50권이었으나 26권만 현존한다. 국립중앙박물관옥산서원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이 소장 중이다.

2. 내용


태평광기는 한나라 때부터 북송 때까지 중국에서 떠돌던 설화 및 야사들을 모아 978년에 총 500권으로 완성한 중국의 대표 설화집이다.## 중국 고대 문학의 금자탑이자 집성체로 간주된다.

한국에서는 고려 문종 때부터 반드시 완독해야 할 대표 설화집으로 지식인들에게 애호받았다. 그러나 조선 세조 이전까지는 국내에서 직접 판목을 만들어 인쇄하지 못하였고, 중국으로부터 비싼 가격을 지불하여 수입해와야 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자체적인 판목을 만들고 한국의 사정에 맞게 내용을 손본 것은 조선 세조 8년(1462)에 왕의 명을 받아 성임이 태평광기상절을 만들면서부터이다. 당대의 유명한 학자 서거정[1]이 서문을 쓰고 태평광기의 내용을 총 50권으로 축약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 이후 우리나라에 필기(筆記) 저술 문화가 유행하였고, 야담이라는 중국이나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는 한국식 전설이나 민담, 야사나 설화 등을 모은 단편 모음집이 나타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지식인들이 태평광기라 지칭한 책은 중국의 원본 태평광기가 아니라, ≪태평광기상절≫이나 역시 성임이 지은 ≪태평통재(太平通載)≫ 둘 중 하나였다.

원래는 총 50권이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26권이다. 총 26권에 143개 편목, 839편 고사를 모았다.

태평광기상절은 중국 학계에서 매우 유명한 서적이다. 이는 태평광기상절이 현재 중국이 자랑하는 고전 중국문학의 금자탑, 태평광기의 현존하는 판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이고, 특히 중국 내에서는 완전히 멸실된 고전 6종이 온전히 남아 전하기 때문이다. 북송 때 이방(李昉) 외 12명이 만들어 태청루(太淸樓)에 보관했던 송판(宋板) 원본은 소실되었다. 이후 명나라의 담개(談愷), 허자창(許自昌)이 1566년에 교각(校刻) 출판한 것이 현 중국의 태평광기 중 가장 오래된 판본이고, 이후 간행된 중국의 태평광기들도 전부 1566년본을 저본으로 한다. 조선에서 세조의 명으로 처음 발간한 태평광기상절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판본인 1566년본보다 100여 년 정도 이전에 만들어진 판본으로,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태평광기이다.연합뉴스

이 때문에 중국 학계에서 태평광기에 대한 논문이나 칼럼이 나올 때마다 한국의 태평광기상절이 반드시 언급된다고 한다.

오직 한국에만 남아 있는 태평광기 6문은 다음과 같다. 蕃中六畜[2], 耶孤兒[3], 胡王[4], 王陟[5], 侯泳[6], 陳延美[7]

또한 중국의 태평광기와 한국의 태평광기상절은 수록된 이야기의 출전이 다르게 표기된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張嘉貞은 중국 판본에서는 定命錄을 출전이라, 태평광기상절에서는 明皇雜錄을 출전이라 적었다. 현재 중국학계와 한국학계 모두 태평광기상절에 표기된 출전이 맞다고 본다.
 
 
 
 
 

(중국사 사료) 태평광기 원문

태평광기 :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링크가 걸린 원문 사료입니다. 이 자료는 역사

xn--2n1bk9rtmh26jp7fdva.com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068

 

태평광기언해(太平廣記諺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사본. 『태평광기』는 중국 북송(北宋)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에 중국 각지에 퍼져 있던 당나라 이전까지의 설화·소설·전기·야사 등을 모두 채집하라는 칙명(勅命)에 의해 엮어진 전 500권의

encykorea.aks.ac.kr

송나라 초에 이방 등 12명이 왕명을 받아 엮은『태평광기』를 한글로 번역한 설화집.

필사본.

『태평광기』는 중국 북송(北宋)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에 중국 각지에 퍼져 있던 당나라 이전까지의 설화·소설·전기·야사 등을 모두 채집하라는 칙명(勅命)에 의해 엮어진 전 500권의 방대한 전집으로, 중국 설화·소설의 보고라 불린다.
우리 나라에는 고려 고종 때, 제유(諸儒)의 작이라는 「한림별곡(翰林別曲)」에 이것이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수입되어 널리 읽혔음을 알 수 있고, 이후의 우리 나라 설화·고소설 등의 소재로도 『태평광기』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1462년(세조 8)에 성임(成任)이 『태평광기』의 이야기를 순서에 따라 가려 뽑아 50권으로 간추려 엮은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이 간행되었다. 이것은 뒤에 다른 이야기들과 합쳐 편찬한 『태평통재(太平通載)』 80권 속에 실려 널리 유포되었다.
『태평광기』는 전집이기 때문에 6,900여 종의 이야기가 유별로 실려 있는데, 이 속에서 순서에 관계없이 자유로 가려 뽑아 언해한 것이 『태평광기언해』이다. 이 언해가 언제 누구에 의한 것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으며, 현재 두 종류의 필사본이 있다.
그 하나는 전 5권으로 되어 있는 김일근(金一根) 소장본인데, 그 중 제2권이 낙질이다. 이 언해본은 제1권만 1957년통문관(通文館)에서 영인 출간한 바 있고 1990년에 다시 김일근 교수에 의해 두 종류의 『태평광기언해』가 영인 출간되었다.
이 언해본은 『태평광기』에서 유별이나 순서에 관계없이 각 분야에서 가려 뽑아 언해하여 분권하였으므로 원전의 편제와는 전혀 다르다. 제2권의 낙질분을 제외한 네 권에는 모두 106편의 이야기를 싣고 있으며, 제2권의 양을 다른 것과 비슷하다고 본다면 전체는 130여 이야기를 수록한 셈이 된다.
또 다른 언해본은 전 9권의 낙선재본(樂善齋本)이다. 이것은 완질이 현존하며, 9권까지에 총 268편의 이야기가 역시 유별이나 편차에 관계없이 양에 따라 분권, 수록되었다.
그런데 이 언해본은 앞의 전 5권본을 보충하여 추가한 것이다. 여기에는 5권본의 제4권 끝부분과 제5권 전체가 실려 있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이어 추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 5권본이 전해오는 동안에 낙장되고 산일된 것을 수습하여 싣고, 다시 원전에서 이야기를 뽑아 언해하여 추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언해본에 서로 겹친 설화를 제하면 전체 310여 종의 이야기가 언해된 셈인데, 이는 원전 『태평광기』의 약 20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언해에 사용된 어휘와 표기에서 두 본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결레ᄃᆞᆯ→겨레ᄃᆞᆯ이’, ‘동뎡→동졍’, ‘ᄠᅢ예→ᄯᅢ예’, ‘ᄠᅥ나노라→ᄯᅥ나노라’, ‘겨집ᄃᆞᆯ과→겨집들과’ 등으로 낙선재본이 후대에 변경, 표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용된 어휘로 보아 최초의 언해는 17세기경, 즉 조선 선조 이후 숙종 때까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므로 국어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편, 이 언해는 원문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직역한 것이 아니라, 앞이나 뒷부분을 줄여 놓은 것도 있고 제목을 바꾼 것도 있으며, 인명만으로 된 원제목에 ‘뎐(傳)’을 붙여 놓은 것도 있는 등 국문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 낙선재본에는 『태평광기』 속의 이야기가 아닌 것을 10여 종이나 언해하여 함께 실어 놓았다. 여기에는 『전등신화(剪燈新話)』·『전등여화(剪燈餘話)』 속의 이야기를 언해한 것도 있고, 우리 나라 필사본 고소설 「매화전」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이야기도 ‘뉴방삼의뎐’이라는 제목으로 수록하고 있다.
어떤 설화는 시대배경을 ‘홍무초(洪武初)’, ‘대명초(大明初)’, ‘원나라 지정간(至正間)’ 등으로 명기한 것도 있어, 창작설화에 가까운 작품을 함께 싣고 있다.
이러한 것은 『태평광기언해』라 하여 언해하는 책의 제목이 분명한 책 속에 다른 작품을 혼입했다는 점에서 우리 나라 언해문학 연구의 한 자료가 된다.
저본은 『태평광기』의 초판본인 송판(宋板)이 아니고 명나라 가정 연간에 출간된 명판(明板)으로 확인된다. 저본 『태평광기언해』의 첫 부분은 신선(女仙 포함)관계 설화로 시작하며, 신선 관련 설화가 전체의 20%에 달한다.
그러나 『태평광기언해』는 처음에 ‘뎡덕닌뎐·니공뎐·ᄇᆡ셔뎐·매분아뎐·니탄녀뎐·두목디뎐·신번현령뎐·풍운뎐·최셔ᄉᆡᆼ뎐·최시뎐’ 등으로 시작되는데, 이 10편 속에 신선관련 이야기는 단 한 편도 없다. 처음 3편은 운수(運數)관련 설화이고, 다음 3편은 부인과 애정 관계 이야기이며, 나머지 4편은 귀신설화이다.
전 5권본 『태평광기언해』 제1권에 실린 26편 설화 중 마지막 4편만이 신선관련 설화이고, 절반인 13편이 귀신·요괴 관련 설화로 엮어져 있어, 조선시대 사람들의 설화 내용에 대한 관심도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참고문헌
  • 『태평광기언해』(김일근 편,박이정,1990)
  • 『한중소설설화비교연구』(김현룡,일지사,1976)
  • 『영인태평광기언해』(김일근 교설,통문관,1957)
  • 「태평광기언해본고」(김현룡,『문호』 6·7,1971)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태평광기언해(太平廣記諺解))]참고문헌
  • 『태평광기언해』(김일근 편,박이정,1990)
  • 『한중소설설화비교연구』(김현룡,일지사,1976)
  • 『영인태평광기언해』(김일근 교설,통문관,1957)
  • 「태평광기언해본고」(김현룡,『문호』 6·7,1971)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태평광기언해(太平廣記諺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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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태평광기』- 고대 소설의 집대성

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068 태평광기언해(太平廣記諺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사본. 『태평광기』는 중국 북송(北宋)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에 중국 각지에 퍼져 있던 당나라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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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거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백거이(중국어: 白居易, 772년 ~ 846년)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등으로 불리었다. 당나라 때 뤄양(洛陽) 부근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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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거이(중국어: 白居易, 772년 ~ 846년)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등으로 불리었다. 당나라 때 뤄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태어났다.

작품

백거이는 다작(多作)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존하는 문집은 71권, 작품은 총 3,800여 수로 당대(唐代) 시인 가운데 최고 분량을 자랑할 뿐 아니라 시의 내용도 다양하다. 젊은 나이에「신악부 운동」을 전개하여 사회, 정치의 실상을 비판하는 이른바 「풍유시(諷喩詩, 風諭詩)」를 많이 지었으나, 강주사마로 좌천되고 나서는 일상의 작은 기쁨을 주제로 한 「한적시(閑適詩)」의 제작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밖에도 평소 둘도 없는 친구였던 원진(元稹), 유우석(劉禹錫)과 지은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등의 감상시도 유명하다.

백거이가 45세 때 지은 「비파행」은 그를 당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게 하였으며, 또, 현종(玄宗)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시 「장한가」도 유명하다.

풍유시를 주로 했던 시기, 한적시를 주로 지었던 시기 전체를 통틀어, '짧은 문장으로 누구든지 쉽게 읽을 수 있는(平易暢達)' 것을 중시하는 시풍(詩風)은 변함이 없었다. 북송(北宋)의 석혜홍(釋惠洪)이 지은 《냉재시화(冷齎詩話)》 등에 보면, 백거이는 시를 지을 때마다 글을 모르는 노인에게 자신이 지은 시를 읽어주면서, 노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평이한 표현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렇게 지어진 그의 시는 사대부(士大夫) 계층뿐 아니라 기녀(妓女), 목동 같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까지 애창되는 시가 되었다.

이 밖에 <백시 장경집> 50권에 그의 시 2,200수가 정리되었으며, 그의 시문집인 <백씨 문집>은 그의 모든 시를 정리한 시집이다.

장편서사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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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恨歌 1 -백낙천

[주]작품의 주석번호는 순서대로 1), 2), 3)....으로 볼 것. 長恨歌 -백거이 [白居易, 772~846]字 낙천(樂天). 장한가는 120구 840자. 구섭우편저, 한역당시삼백수, 안병렬역, 계명대출판부, 1991. 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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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恨歌 2 -백낙천

제3단:전란 후 양귀비를 잊지 못하는 현종의 슬픔과 아픔. 天旋地轉廻龍馭 천지가 돌고돌아 천자는 서울 장안으로 돌아오는데38) 到此躊躇不能去 마외역에 이르자 머뭇거리며 차마 가지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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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창부의 노래, 비파에 붙여 -백낙천

琵琶行 幷序 元和十年, 予左遷九江郡司馬. 明年秋, 送客湓浦口.聞舟中夜彈琵琶者, 聽其音錚錚然有京都聲.問其人, 本長安倡女.嘗學琵琶於穆曹二善才, 年長色衰, 委身爲賈人婦. 遂命酒, 使快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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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平廣記 : 神仙四十八 : 白樂天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白樂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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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樂天》

唐會昌元年,李師稷中丞為浙東觀察使。有商客遭風飄蕩,不知所止。月餘。至一大山。瑞雲奇花,白鶴異樹。盡非人間所覩。山側有人迎問曰:「安得至此。具言之。令維舟上岸。云:「須謁天師。」遂引至一處,若大寺觀。通一道明鈔本「道」下有「士」字。入。道士鬚眉悉白。侍衛數十。坐大殿上,與語曰:「汝中國人,茲地有緣方得一到,此蓬萊山也。既至,莫要看否。遣左右引於宮內遊觀。玉臺翠樹,光彩奪目,院宇數十,皆有名號。至一院。扃鏁甚嚴。因窺之。衆花滿庭。堂有裀褥,焚香階下。客問之。答曰:「此是白樂天院,樂天在中國未來耳。」乃潛記之,遂別之歸。旬日至越,具白廉使。李公盡錄以報白公。先是,白公平生唯修上坐業,及覽李公所報,乃自為詩二首,以記其事。及答李浙東云:「近有人從海上回,海山深處見樓臺。中有仙籠明鈔本「籠」作「龕」。開一室,皆言此待樂天來。」又曰:「吾學空門不學仙,恐君此語是虛傳。海山不是吾歸處,歸即應歸兠率天。」然白公脫屣煙埃,投棄軒冕,與夫昧昧者固不同也,安知非謫仙哉。出《逸史》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0074270 

태평광기(太平廣記)에 나타난 신선고(神仙攷)-한국(韓國) 고소설(古小說)과의 상관성(相關性) 고찰(考察)-

 

blog.daum.net/thddudgh7/16560706?category=1425284

 

태평광기(667) 제48권 신선(神仙)(3-1) 백락천(白樂天)

                                    태평광기(太平廣記)(667) 송(宋)나라 태종(太宗)의 칙명으로 977년에 편집된 500권의 설화집으로, 태평흥국(太平興國) 3 년(978)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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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광기(668) 제48권 신선(神仙)(3-2) 백락천(白樂天)

                                    태평광기(太平廣記)(668) 송(宋)나라 태종(太宗)의 칙명으로 977년에 편집된 500권의 설화집으로, 태평흥국(太平興國) 3 년(978)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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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광기(669) 제48권 신선(神仙)(3-3) 백락천(白樂天)

                                    태평광기(太平廣記)(669) 송(宋)나라 태종(太宗)의 칙명으로 977년에 편집된 500권의 설화집으로, 태평흥국(太平興國) 3 년(978)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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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천/ 아내에게

http://blog.paran.com/sphh/41330252 增內(아내에게) - 백낙천(白樂天) 生爲同室親 [생위동실친] 死爲同穴塵 [사위동혈진] 他人尙想勉 [타인상상면] 而況我與君 [이황아여군] 살아서는 한 방에서 사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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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낙천(白樂天)의 시 51수 감삼.

◈ 백낙천(白樂天)의 시 51수 감삼.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3,800 여수의 시문을 읊어서 시(詩)문학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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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광기언해(太平廣記諺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사본. 『태평광기』는 중국 북송(北宋)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에 중국 각지에 퍼져 있던 당나라 이전까지의 설화·소설·전기·야사 등을 모두 채집하라는 칙명(勅命)에 의해 엮어진 전 500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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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송나라 초에 이방 등 12명이 왕명을 받아 엮은『태평광기』를 한글로 번역한 설화집.

내용

필사본.

『태평광기』는 중국 북송(北宋)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에 중국 각지에 퍼져 있던 당나라 이전까지의 설화·소설·전기·야사 등을 모두 채집하라는 칙명(勅命)에 의해 엮어진 전 500권의 방대한 전집으로, 중국 설화·소설의 보고라 불린다.

우리 나라에는 고려 고종 때, 제유(諸儒)의 작이라는 「한림별곡(翰林別曲)」에 이것이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수입되어 널리 읽혔음을 알 수 있고, 이후의 우리 나라 설화·고소설 등의 소재로도 『태평광기』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1462년(세조 8)에 성임(成任)이 『태평광기』의 이야기를 순서에 따라 가려 뽑아 50권으로 간추려 엮은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이 간행되었다. 이것은 뒤에 다른 이야기들과 합쳐 편찬한 『태평통재(太平通載)』 80권 속에 실려 널리 유포되었다.

『태평광기』는 전집이기 때문에 6,900여 종의 이야기가 유별로 실려 있는데, 이 속에서 순서에 관계없이 자유로 가려 뽑아 언해한 것이 『태평광기언해』이다. 이 언해가 언제 누구에 의한 것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으며, 현재 두 종류의 필사본이 있다.

그 하나는 전 5권으로 되어 있는 김일근(金一根) 소장본인데, 그 중 제2권이 낙질이다. 이 언해본은 제1권만 1957년통문관(通文館)에서 영인 출간한 바 있고 1990년에 다시 김일근 교수에 의해 두 종류의 『태평광기언해』가 영인 출간되었다.

이 언해본은 『태평광기』에서 유별이나 순서에 관계없이 각 분야에서 가려 뽑아 언해하여 분권하였으므로 원전의 편제와는 전혀 다르다. 제2권의 낙질분을 제외한 네 권에는 모두 106편의 이야기를 싣고 있으며, 제2권의 양을 다른 것과 비슷하다고 본다면 전체는 130여 이야기를 수록한 셈이 된다.

또 다른 언해본은 전 9권의 낙선재본(樂善齋本)이다. 이것은 완질이 현존하며, 9권까지에 총 268편의 이야기가 역시 유별이나 편차에 관계없이 양에 따라 분권, 수록되었다.

그런데 이 언해본은 앞의 전 5권본을 보충하여 추가한 것이다. 여기에는 5권본의 제4권 끝부분과 제5권 전체가 실려 있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이어 추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 5권본이 전해오는 동안에 낙장되고 산일된 것을 수습하여 싣고, 다시 원전에서 이야기를 뽑아 언해하여 추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언해본에 서로 겹친 설화를 제하면 전체 310여 종의 이야기가 언해된 셈인데, 이는 원전 『태평광기』의 약 20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언해에 사용된 어휘와 표기에서 두 본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결레ᄃᆞᆯ→겨레ᄃᆞᆯ이’, ‘동뎡→동졍’, ‘ᄠᅢ예→ᄯᅢ예’, ‘ᄠᅥ나노라→ᄯᅥ나노라’, ‘겨집ᄃᆞᆯ과→겨집들과’ 등으로 낙선재본이 후대에 변경, 표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용된 어휘로 보아 최초의 언해는 17세기경, 즉 조선 선조 이후 숙종 때까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므로 국어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편, 이 언해는 원문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직역한 것이 아니라, 앞이나 뒷부분을 줄여 놓은 것도 있고 제목을 바꾼 것도 있으며, 인명만으로 된 원제목에 ‘뎐(傳)’을 붙여 놓은 것도 있는 등 국문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 낙선재본에는 『태평광기』 속의 이야기가 아닌 것을 10여 종이나 언해하여 함께 실어 놓았다. 여기에는 『전등신화(剪燈新話)』·『전등여화(剪燈餘話)』 속의 이야기를 언해한 것도 있고, 우리 나라 필사본 고소설 「매화전」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이야기도 ‘뉴방삼의뎐’이라는 제목으로 수록하고 있다.

어떤 설화는 시대배경을 ‘홍무초(洪武初)’, ‘대명초(大明初)’, ‘원나라 지정간(至正間)’ 등으로 명기한 것도 있어, 창작설화에 가까운 작품을 함께 싣고 있다.

이러한 것은 『태평광기언해』라 하여 언해하는 책의 제목이 분명한 책 속에 다른 작품을 혼입했다는 점에서 우리 나라 언해문학 연구의 한 자료가 된다.

저본은 『태평광기』의 초판본인 송판(宋板)이 아니고 명나라 가정 연간에 출간된 명판(明板)으로 확인된다. 저본 『태평광기언해』의 첫 부분은 신선(女仙 포함)관계 설화로 시작하며, 신선 관련 설화가 전체의 20%에 달한다.

그러나 『태평광기언해』는 처음에 ‘뎡덕닌뎐·니공뎐·ᄇᆡ셔뎐·매분아뎐·니탄녀뎐·두목디뎐·신번현령뎐·풍운뎐·최셔ᄉᆡᆼ뎐·최시뎐’ 등으로 시작되는데, 이 10편 속에 신선관련 이야기는 단 한 편도 없다. 처음 3편은 운수(運數)관련 설화이고, 다음 3편은 부인과 애정 관계 이야기이며, 나머지 4편은 귀신설화이다.

전 5권본 『태평광기언해』 제1권에 실린 26편 설화 중 마지막 4편만이 신선관련 설화이고, 절반인 13편이 귀신·요괴 관련 설화로 엮어져 있어, 조선시대 사람들의 설화 내용에 대한 관심도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참고문헌

  • 『태평광기언해』(김일근 편,박이정,1990)
  • 『한중소설설화비교연구』(김현룡,일지사,1976)
  • 『영인태평광기언해』(김일근 교설,통문관,1957)
  • 「태평광기언해본고」(김현룡,『문호』 6·7,1971)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태평광기언해(太平廣記諺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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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광기(667) 제48권 신선(神仙)(3-1) 백락천(白樂天)

                                    태평광기(太平廣記)(667) 송(宋)나라 태종(太宗)의 칙명으로 977년에 편집된 500권의 설화집으로, 태평흥국(太平興國) 3 년(978)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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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광기(668) 제48권 신선(神仙)(3-2) 백락천(白樂天)

                                    태평광기(太平廣記)(668) 송(宋)나라 태종(太宗)의 칙명으로 977년에 편집된 500권의 설화집으로, 태평흥국(太平興國) 3 년(978)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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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광기(669) 제48권 신선(神仙)(3-3) 백락천(白樂天)

                                    태평광기(太平廣記)(669) 송(宋)나라 태종(太宗)의 칙명으로 977년에 편집된 500권의 설화집으로, 태평흥국(太平興國) 3 년(978)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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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광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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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광기(太平廣記)는 칙명(勅命)에 따라 편집된 총 500권의 중국의 소설집이다.

목차

소개[편집]

≪태평광기≫는 한대(漢代)부터 북송 초에 이르는 소설·필기·야사 등의 전적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광범위하게 채록해, 7000여 조에 달하는 이야기를 수록한 책이다. 각 고사의 끝에는 채록 출처를 밝혀놓았는데, 인용된 책은 거의 500종에 가까웠으며, 그중에서 절반가량은 이미 망실된 것이었으나 ≪태평광기≫에 의거해서 적지 않은 내용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또한 현존하는 절반가량의 인용서도 ≪태평광기≫에 인용된 해당 고사에 근거해 잘못된 부분을 고증하거나 교감할 수 있다. 따라서 고소설의 일문(佚文)을 보존하고 있는 측면과 고소설의 변화, 발전을 연구하는 측면에서 볼 때 ≪태평광기≫의 중요성은 지대하다고 하겠다.

내용[편집]

내용은 거리의 소문, 개인의 에피소드, 진기하고도 색다른 이야기 등이 대부분으로서 신선·선녀… 잡전기(雜傳記)·잡록(雜錄) 등으로 모두 92항목으로 분류되어 있다.

≪태평광기≫에 수록된 이야기는 신선귀괴(神仙鬼怪)와 인과응보(因果應報)에 관한 것이 비교적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어떤 경우는 한 부류가 한 권으로 되어 있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한 부류가 여러 권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그중에서 <신선(神仙)>·<여선(女仙)>·<보응(報應)>·<신(神)>·<귀(鬼)>·<요괴(妖怪)> 등의 부류가 다른 부류의 권수보다 상대적으로 분량이 많다. 이러한 경향은 고대 민간풍속과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이래 지괴(志怪)소설의 흥성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잡전기(雜傳記)>류는 모두 당대(唐代)의 전기(傳奇) 작품을 수록했는데, 이를 통하여 당대 전기에 주로 어떤 종류의 내용이 기록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부류별로 고사를 배열하는 이러한 체제는 독자들이 이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데에 많은 편리함을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송대 이전 고소설의 변천과 발전 상황을 알고 싶으면 이 책에 근거해서 탐색해 나갈 수 있다.

편자[편집]

편자는 이방(李昉) 외 12명으로 모두가 송대(宋代) 초기의 일류학자이다.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978)에 원고를 완성하여 3년 후에 판을 새겼는데, 후학(後學)에는 그다지 필요한 서적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어서 판본(板本)은 궁중 서고인 태청루(太淸樓)에 보관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송판(宋板)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광기>가 세상에 유포되고 있는 것은 명(明)의 담개(談愷)가 초본을 입수하여 1566년에 교각(校刻) 출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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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이방『태평광기』- 고대 소설의 집대성

김장환(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태평광기』는 어떤 책인가? 고래의 숨은 이야기와 자질구레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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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광기』는 어떤 책인가?

고래의 숨은 이야기와 자질구레한 일, 보기 드문 책과 없어진 문장이 모두 여기에 있는데, 그 권질(卷帙)이 적은 것은 종종 전부 수록해 놓았으니, 대개 소설가의 깊은 바다이다. ··· 이 책은 비록 신괴(神怪)를 많이 얘기하고 있지만 채록한 고사가 매우 풍부하고 명물(名物)과 전고(典故)가 그 사이에 섞여 있기에, 문장가들이 늘 인용하는 바이고 고증가들 역시 자료로 삼는 바가 많다. 또한 당(唐) 이전의 책 가운데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잔결(殘缺)된 서적이 10분의 1이나 여전히 보존되어 있으므로 더욱 귀중하다.

-청(淸) 기윤(紀昀)의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태평광기(太平廣記)』는 중국 북송(北宋) 태종(太宗)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978)에 편찬되어 태평흥국 6년(981년)에 판각되었다. 이 책은 한(漢)나라 시대부터 북송(北宋) 초기에 이르는 소설, 필기, 야사 등의 전적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광범위하게 채록하여 총 500권에 7,000여 조에 달하는 이야기를 수록했다.

 

92개의 각 부류1)에 실려 있는 고사는 시대순으로 배열되어 있고, 대부분 인물명을 제목으로 삼았으며, 고사의 끝에는 채록의 출처를 밝혀 놓았다. 인용된 책은 거의 500종에 가까운데, 그중에서 절반가량은 이미 망실된 것으로 『태평광기』에 의거해서 적지 않은 내용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또한 현존하는 절반가량의 인용서도 『태평광기』에 인용된 해당 고사에 근거하여 잘못된 부분을 고증하거나 교감할 수 있다. 따라서 고소설의 일문(佚文)을 보존하고 있는 측면과 고소설의 변화 발전을 연구하는 측면에서 볼 때 『태평광기』의 중요성은 지대하다고 하겠다.

 

『태평광기』에 수록된 이야기는 신선귀괴(神仙鬼怪)와 인과응보(因果應報)에 관한 것이 비교적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어떤 경우는 한 부류가 한 권으로 되어 있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한 부류가 여러 권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그중에서 신선(神仙), 여선(女仙), 보응(報應), 신(神), 귀(鬼), 요괴(妖怪) 등의 부류가 다른 부류의 권수보다 상대적으로 분량이 많다. 신의 부류는 조상신, 사당신, 산천신 등에 관한 내용이고, 귀의 부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귀신(도깨비)' 이야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경향은 고대 민간풍속과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이래 지괴(志怪)소설의 흥성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잡전기(雜傳記)」는 모두 당(唐)나라 시대의 전기(傳奇)를 수록했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 어떤 종류의 내용이 주로 기록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부류별로 고사를 배열하는 이러한 체제는 독자들이 이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데에 많은 편리함을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송(宋)나라 시대 이전 고소설의 변천과 발전 상황을 알고 싶으면 이 책에 근거해서 탐색해 나갈 수 있다.

 

『태평광기』는 각종의 고소설을 많이 모아놓았을 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종교, 민속, 명물, 전고, 문장, 고증 등의 면에서 풍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다방면의 연구와 참고 자료를 제공한다. 특히 위진남북조와 당나라 때의 사회 상황을 연구할 때에도 이 책에서 많은 유용한 자료를 찾아 낼 수 있다.

 

유서로서의 『태평광기』

『태평광기』의 성격을 규명하는 다양한 논의 가운데 하나는 유서(類書)로 간주하는 것이다. 유서는 각종 자료를 찾아보기 쉽게 주제별로 나누어 편집한 책으로서, 오늘날의 백과사전처럼 필요한 자료나 구절을 찾아보는 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당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서는 주로 도구적인 책으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유서는 중국의 전통적인 학문체계인 유가 경전이나 역사서, 철학사상서, 작가들의 문집 안에 적절히 포괄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별로 주목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단순히 자료를 모아놓은 도구서로서 유서를 이해하는 것에서 한 발짝 물러나 생각해 본다면, 유서는 '도구서'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유서가 표방하고 있는 세계의 여러 가지 현상과 사물, 사건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방식과 구조 속에서 우리는 당시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고 그것들을 나름대로 분류화, 체계화, 개념화한 세계 해석의 방식을 감지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서가 지어졌을 당시의 배경과 목적, 체제 등의 앞뒤 흐름을 제대로 살펴본다면 유서는 중국의 전통 문화구도를 설명하는 중요한 하나의 창이 될 수 있다.

『태평광기』는 중국 소설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고대 소설의 보고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고대 소설의 망실된 자료를 집록하고 교감하는 일차적인 자료를 제공해주는 도구서로서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단순히 자료적 차원에서 이용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태평광기』라는 유서 그 자체에 주목하면 또 다른 새로운 측면을 볼 수 있다. 괴이한 이야기만을 잔뜩 모아놓은 『태평광기』가 어떻게 국가 정책적 차원에서 편찬이 추진될 수 있었는가? 그것이 다른 유서와 구별되는 점은 무엇인가? 그것의 편찬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이는 당시의 문화적 맥락 안에서 『태평광기』가 편찬될 수 있었던 흐름과 함께 『태평광기』라는 유서가 완성된 이후에 파생되었던 흐름을 아울러 살펴보아야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이다. 이러한 논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특히 중국 '소설(小說)'을 인식하는 방식의 변화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유서로서의 『태평광기』는 특히 다른 유서와는 달리 '이야기(故事)'만을 분류 수록함으로써, 반대로 '서사(narrative)'관념을 확정짓고 개념화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전에는 사부(史部)나 자부(子部)에 아무렇게나 섞여있었던 '서사'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태평광기』의 서사는 그것이 표방하고 있는 세계 인식과 결부되어 사부에 속할 수 있는 서사와는 다른 종류의 서사, 곧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세계에서는 좀처럼 보지 못하는 종류의 '기이한(奇) 이야기'였다. 결국 '이야기'만을 모아 수록한 『태평광기』라는 거대한 유서의 편찬은 '소설'의 인식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는 『태평광기』 편찬 전에 기록되었던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와 『구당서(舊唐書)』 「경적지」의 목록 및 그 이후에 편찬되었던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의 목록을 비교해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태평광기』에 인용되었던 '기이한 이야기'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사부에 섞여있지 못하고 모두 '소설가류(小說家類)'로 이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의 '소설가'는 이미 『태평광기』이전의 소설가의 관념과는 달라진 것이다. 곧 『태평광기』라는 유서의 편찬은 기이한 이야기를 소설의 범주에 편입시킴으로써 전체 소설의 인식 변화를 유발하는 중대한 전환점으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태평광기』의 국내 전래와 유행

『태평광기』가 처음 우리나라에 전래된 분명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남송(南宋) 때의 문인 왕벽지(王闢之)가 지은 『승수연담록(澠水燕談錄)』을 보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송 신종(神宗) 원풍(元豊) 3년(1080)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박인량(朴寅亮) 이 『태평광기』에 실려 있는 고사를 능숙하게 활용하여 글을 지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원풍 3년은 고려 문종(文宗) 34년에 해당하며, 『태평광기』가 간행된 때(981년)로부터 100년이 되기 직전이다. 따라서 그 이전에 『태평광기』가 국내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승수연담록』의 기록에서 중요한 것은 일화의 주인공이 박인량이란 점이다. 그는 고려 초기의 문신(文臣)으로 『수이전(殊異傳)』의 편찬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수이전』은 신라 시대 말에서 고려 시대 초에 간행된 설화집으로, 지금은 망실되어 전체적인 체제와 특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 일문(佚文)이 집록된 상태이다. 현재 『수이전』은 한국 고소설의 성립 시기를, 종래 조선 초의 『금오신화(金鰲新話)』에서 나말여초(羅末麗初)로 앞당길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기존에는 『수이전』의 성립 문제를 중국의 지괴소설이나 당 전기 등의 영향 관계에서 추정해 보았는데, 이 기록을 통해 『태평광기』와 나말여초의 고소설 성립 문제를 보다 구체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후로 고려 문신 윤포(尹誧)의「태평광기촬요시(太平廣記撮要詩)」(1146), 『한림별곡(翰林別曲)』(1216),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등에 『태평광기』의 서명이나 내용이 계속 나타난다.

조선 시대 초기에는 중국 판본이 재차 수입되어 당시 식자층의 필독서가 되었다. 그러나 원서는 분량이 너무 방대하고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구해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세조(世祖) 8년(1462)에 성임(成任)이 원서를 50권으로 축약한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을 간행했으며, 그 후 다른 여러 책에서 채록한 30권 분량의 고사를 합쳐 80권으로 된 『태평통재(太平通載)』를 다시 간행했다. 이를 통해 당시 『태평광기』의 수요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태평광기상절』은 일찍이 망실되었지만 최근까지 50권 중 26권이 발굴되었으며, 『태평통재』도 현재 일부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태평광기상절』과 『태평통재』는 여러 차례의 간행을 통해 많은 독자층을 확보했지만, 어디까지나 한문을 이해할 수 있는 식자층에 국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한문을 해독할 수 없는 일반 서민이나 여성 독자들을 위해서는 우리말로 된 번역본이 필요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명종(明宗: 1545~1567 재위) 때를 전후해서 나온 것이 바로 『태평광기언해(太平廣記諺解)』이다. 현존하는 언해본으로는 멱남본(覓南本)과 낙선재본(樂善齋本) 두 종류가 있다.

이처럼 『태평광기』는 그 자체로 혹은 『태평광기상절』, 『태평통재』, 『태평광기언해』의 다양한 형태로 조선 시대문인들에게 애독되었고, 그에 따른 영향 또한 상당한 것이었다. 이러한 축약본과 언해본에 어떠한 고사들이 선별 수록되었는지를 분석해본다면, 중국소설에 대한 당시 독자들의 독서경향을 알아낼 수 있으며, 이는 곧 국내 고소설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 데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태평광기』의 현대적 수용

고전의 매력은 시대를 초월하여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되는 데에 있다. 약 천여 년 전에 편찬된 『태평광기』도 지금까지 다양한 독자층을 형성하며 애독되고 있다.

『태평광기』는 작심하고 벼려서 처음부터 끝까지 독파하는 책이 아니다. 불로장생하는 신선 이야기에서부터 기이한 동식물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92개의 큰 부류와 150여 개의 작은 부류에 체계적으로 분류된 7,000여 편의 이야기 중에서 자신이 관심 있는 부분만 골라 읽으면 된다. 예를 들어 여우 이야기에 관심 있는 독자는 「호(狐)」부류에 실려 있는 80여 편의 이야기를 읽으면 된다. 선진(先秦) 시대부터 송대 초까지의 다양한 여우 이야기를 읽다 보면 약 2천 년 동안 변화 발전해온 여우 이야기의 전개과정과 구성 및 묘사기법 등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중국 여우 이야기의 작은 역사'인 셈이다. 특히 사회문화론적 시각에서 문학 작품에 나타난 동물 이미지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요즈음 그 주요 테마 가운데 하나인 여우 이미지의 형성과정을 파악하는 데 더 없이 좋은 자료가 된다.

『태평광기』에 수록되어 있는 모든 이야기는 후대 작품의 창작 소재와 제재로 활용될 수 있다. '신혼(神魂)'의 부류에 실려 있는 「왕주(王宙)」- 일명 「이혼기(離魂記)」- 이야기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왕주와 천낭(倩娘)의 사랑을 천낭의 혼을 통하여 이룬다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당대 전기소설을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작품은 훗날 많은 속작과 개작들을 만들어냈는데, 원ㆍ명ㆍ청나라와 근대를 거치면서 문언소설, 백화소설, 희곡 등으로 새롭게 지어졌으며, 현대에는 『천녀유혼(倩女遊魂)』이라는 영화로 등장했다. 이처럼 『태평광기』에는 현재까지 우리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작품들이 많이 실려있다. 『태평광기』는 더 이상 옛날에 기록된 박제된 이야기가 아니라 천의 얼굴을 한 이야기꾼으로서 늘 우리 곁에 존재한다.

최근에는 국내에서 『태평광기』 가운데 100편의 이야기가 문화 콘텐츠로 개발된 바 있는데, 비교적 완전한 이야기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 중에서 내용이 환상적이고 낭만적이며 주인공의 성격 특성이 명확히 드러나는 이야기가 선정되었다. 따라서 신선이나 귀신, 환술과 꿈에 관한 판타지 성향의 이야기가 주로 선정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인간의 대담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늘 현재성을 간직하고 있다. 아마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이러한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지어지고 새롭게 변주될 것이다. 선정된 각 작품에는 개요, 원문, 번역문, 캐릭터 그림, 내용 그래픽 등이 첨부되어 있으며, 원작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시놉시스가 제공된다. 이 사업은 애니메이션을 포함한 문화예술창작자들에게 창작 소재와 제재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태평광기』가 오늘날의 멀티미디어 환경에 수용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2)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태평광기』의 편찬 목적은 무엇인가?

현재 『태평광기』의 편찬 목적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일치되어 있지 않지만 대체로 두 가지 설이 유력하다. 그 하나는 오대(五代)에서 귀항(歸降)한 여러 제왕과 지식인들을 국가 주도의 대형 편찬사업에 참여시켜 새로운 왕조에 대한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무력으로 오대를 정벌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송 태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종이 정치기반을 공고히 하면서 문교(文敎)와 학술을 장려한다는 정부의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선포하기 위하여 편찬했다는 설이다. 아무튼 국가 차원에서 그동안 축적된 지식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2. 『태평광기』 부류 배열의 특징은 무엇인가?

『태평광기』의 부류는 순서대로 도교 관계 이야기, 불교 관계 이야기, 숙명(宿命)에 관한 이야기, 인간사(人間事)에 관한 이야기, 꿈과 환상에 관한 이야기, 귀신과 요괴에 관한 이야기, 죽음과 재생에 관한 이야기, 자연현상에 관한 이야기, 조수초목(鳥獸草木)과 물고기에 관한 이야기, 기타 등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중에서 도교 관계 이야기에 해당하는 '신선(神仙)', '여선(女仙)', '도술(道術)', '방사(方士)', '이인(異人)'의 부류와 불교 관련 이야기에 해당하는 '이승(異僧)', '석증(釋證)', '보응(報應)'의 부류가 앞에 배열되어 있고 그 분량 또한 134권으로 전체의 27%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수나라와 당나라, 오대를 이어 송나라 시대 초기까지 크게 유행했던 도교와 불교의 영향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 『태평광기』가 우리문학에 미친 구체적인 영향은 무엇인가?

『태평광기』는 고려 시대에 우리나라에 전래된 후로 소설문학에 새로운 소재와 기법을 제공함으로써 우리나라 고소설의 생성과 발달을 촉진시켰다. 특히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이규보(李奎報)의 『백운소설(白雲小說)』,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 등과 같은 잡록식 패관(稗官) 문학과, 임춘(林椿)의 「국순전(麴醇傳)」ㆍ「공방전(孔方傳)」, 이규보의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 등과 같은 가전체(假傳體)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추천할 만한 텍스트

『태평광기』(전21권), 이방 외 지음, 김장환 외 옮김, 도서출판 학고방, 2000~2005.

 

각주

1) 각 부류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1.신선(神仙) 2.여선(女仙) 3.도술(道術) 4.방사(方士) 5.이인(異人)

6.이승(異僧) 7.석증(釋證) 8.보응(報應) 9.징응(徵應) 10.정수(定數)

11.감응(感應) 12.참응(讖應) 13.명현(明賢) 14.염검(廉儉) 15.기의(氣義)

16.지인(知人) 17.정찰(精察) 18.준변(俊辯) 19.유민(幼敏) 20.기량(器量)

21.공거(貢擧) 22.전선(銓選) 23.직관(職官) 24.권행(權倖) 25.장수(將帥)

26.효용(驍勇) 27.호협(豪俠) 28.박물(博物) 29.문장(文章) 30.재명(才名)

31.유행(儒行) 32.악(樂) 33.서(書) 34.화(畵) 35.산술(算術)

36.복서(卜筮) 37.의(醫) 38.상(相) 39.기교(伎巧) 40.박희(博戲)

41.기완(器玩) 42.주(酒) 43.식(食) 44.교우(交友) 45.사치(奢侈)

46.궤사(詭詐) 47.첨녕(諂佞) 48.유오(謬誤) 49.치생(治生) 50.편급(楄急)

51.회해(詼諧) 52.조초(嘲誚) 53.치비(嗤鄙) 54.무뢰(無賴) 55.경박(輕薄)

56.혹포(酷暴) 57.부인(婦人) 58.정감(情感) 59.동복(童僕) 60.몽(夢)

61.무(巫) 62.환술(幻術) 63.요망(妖妄) 64.신(神) 65.귀(鬼)

66.야차(夜叉) 67.신혼(神魂) 68.요괴(妖怪) 69.정괴(精怪) 70.영이(靈異)

71.재생(再生) 72.오전생(悟前生) 73.총묘(塚墓) 74.명기(銘記) 75.뇌(雷)

76.우(雨) 77.산(山) 78.석(石) 79.수(水) 80.보(寶)

81.초목(草木) 82.용(龍) 83.호(虎) 84.축수(畜獸) 85.호(狐)

86.사(蛇) 87.금조(禽鳥) 88.수족(水族) 89.곤충(昆蟲) 90.만이(蠻夷)

91.잡전기(雜傳記) 92.잡록(雜錄)

2) 이 사업은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의 지원으로 개발되어 그 결과물이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다.

홈페이지 주소는 "http://chinastory.culturecontent.com"이다.

 

 

 

www.youtube.com/watch?v=-lkG_Ki70XI

 

 

www.youtube.com/watch?v=Ipz1wGUzAno

 

 

 

www.youtube.com/watch?v=bmoAR5kKH1I

 

 

www.youtube.com/watch?v=w4kU5FJSDm4

 

 

www.youtube.com/watch?v=5hV7u7xXYHo

 

 

www.youtube.com/watch?v=zqEKvoncgQM

 

 

www.youtube.com/watch?v=aXt937L2QeI

 

 

 

ko.wikipedia.org/wiki/%EC%84%9C%EC%9C%A0%EA%B8%B0

 

서유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6세기 중국 목판본 서유기 《서유기》(西遊記)는 중국 명나라 시기의 장편소설이다. 전 100회로, 오승은(吳承恩, 1500-1582)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오승은은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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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 인물[편집]

 

수부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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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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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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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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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XSed6-p0cwY

 

<枕中記> 아동극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LSUj9KGPKRI

 

 

https://ko.wikipedia.org/wiki/%EC%B9%A8%EC%A4%91%EA%B8%B0

 

침중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침중기(枕中記)》는 중국 당대의 풍자소설로 작자는 심기제(沈旣濟)이다.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는 가난한 서생이 한 도사(道士)가 준 베개로 인해 일생 동안의 영고성쇠(榮枯盛衰)의 모습을 보나, 깨고 보니 그것이 잠깐 동안의 꿈이었다는 것을 알고, 명리(名利)를 찾는 자신의 하찮은 모습을 깨닫는다. 파란만장의 일생을 일순의 꿈에 응축시킨 소설수법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황량일취몽(黃梁一炊夢)'의 고사(故事)로서 후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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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576?category=485795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주]인터넷에는 완역된 것이 없어 초역을 시도해 본다. 참고로,

<남가태수전>과 <침중기>에서 발생한 고사성어의 유의어를 찾아본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의 유의어 : 一場春夢(일장춘몽), 白日夢(백일몽),

南柯一夢(남가일몽), 南柯之夢(남가지몽),

邯鄲之枕(한단지침), 邯鄲之夢(한단지몽),

呂翁枕(여옹침), 一炊之夢(일취지몽), 槐安夢(괴안몽),

老生之夢(노생지몽), 

황량몽(黃粱夢):

한단 지방에서 꾼 꿈으로 인생과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말하는 성어이다.

黃粱一炊(황량일취), 黃粱一炊夢(황량일취몽),

 

 

《枕中記》

탕현조(湯顯祖,1550 -1617)

 

01

開元七年,道士有呂翁者,得神仙術,

行邯鄲道中,息邸舍,攝帽弛帶,隱嚢而坐。

당나라 현종 때, 도사 여옹(呂翁)은 신선술을 얻어

한단으로 가는 도중에 지방의 주막에서 쉬었다.

모자를 벗고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고 행랑에 기대어 앉았다.

俄見旅中少年,乃盧生也。

衣短褐,乘靑駒,將適於田,

亦止於邸中,與翁共席而坐,言笑殊暢。

잠시 후 여행 중인 소년을 만났는데 곧 노생이었다.

짧은 갈옷을 입고 푸른 망아지를 타고 들에 가려다가 그 집에 들러 여옹과 함게 앉았다.

노생은 담소함이 매우 유창했다.

久之,盧生顧其衣裝敝褻,乃長歎息曰:

「大丈夫生世不諧、困如是也!」

한참 후 노생은 자신의 허름한 옷차림을 보고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사나이로 세상에 태어나서 가난에 찌들리는 이 꼴이 무엇입니까?」

翁曰:「觀子形體,無苦無恙,

談諧方適,而歎其困者,何也。」

여옹이 말했다.

「자네 모습을 보니 괴로움이나 근심이 없어 보이는데

즐겁게 얘기하다가, 갑자기 가난을 탓하다니 어찌된 일인가?」

生曰:「吾此苟生耳,何適之謂。」

노생:「저는 그저 목숨만 붙어있을 따름인데 어찌 즐겁다고 하십니까?」

翁曰:「此不謂適,而何謂適。」

여옹:「이것을 즐겁지 않다고 한다면 무엇을 즐겁다 하겠는가?」

答曰:「士之生世,當建功樹名,出將入相,

列鼎而食,選聲而聽。

使族益昌而家益肥,然後可以言適乎。

노생:「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마땅히 공명을 세워 장수로 출전하고 재상에 올라

풍부한 음식을 누리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종족이 더욱 번창하고 집안이 더욱 부유해진 연후에

즐거움을 말할 수 있겠지요.

吾嘗志于學,富於游藝,自惟當年,靑紫可拾。

今已適壯,猶勤畎畝,非困而何。」

言訖而目昏思寐。

저는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학식이 풍부해져

자기 당년에 고관대작을 얻으려 했습니다.

지금 이미 장년인데 아직도 들에 가서 경작해야 하니

곤궁한 게 아니면 무엇입니까?」

말을 마치자 눈이 어두워지며 잠들려 했다.

時主人方蒸黍,翁乃探嚢中枕以授之曰:

「子枕吾枕,當令子榮適如志。」

그때 주막 주인은 마악 조밥을 짓고 있었는데

여옹이 자루 속에서 베개를 찾아 노생에게 주면서 말했다.

「자네 이걸 베개를 베게. 자네 뜻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게 할 테니.」

其枕靑瓷,而竅其兩端,

生俛首就之,見其竅漸大,明朗。

乃舉身而入,遂至其家。

그 베개는 청자였는데 양 끝에 구멍이 있었다.

노생은 머리를 뉘여 취침했는데 그 구멍이 점점 커지더니 환해졌다.

이에 몸을 들어 구멍 속으로 들어가 드디어 한 집에 이르렀다.

 

02

數月,娶清河崔氏女。女容甚麗,生資愈厚。

몇 달 뒤에 그는 청하 최씨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여인은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고 재산도 풍요로웠다.

生大悦,由是衣裝服馭,日益鮮盛。

노생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의복장속(衣服裝束)과 거마(車馬)도

날이 갈수록 더욱 신선하고 융성했다.

明年,舉進士,登第;

釋褐祕校;應制,轉渭南尉。

이듬해 진사시에 응시하여 급제했다.

그는 갈옷(평민복장)을 벗고 비서성 교서랑이 되고

황제의 뜻을 받들어 위남에 이르러 현위가 되었다.

俄遷監察御史;轉起居舍人,制誥。

얼마 후에 감찰어사에 승진하고

기거사인(起居舍人), 지제(知制)의 함위(銜位)에 전보되었다.

三載,出典同州,遷陜牧。

3년이 지난 뒤에 전주에 이르러 지방장관이 되었고

협으로 자리를 옮겨 목을 맡았다.

生性好土功,自陜西鑿河八十里,以濟不通。

邦人利之,刻石紀德。

그는 성품이 수리(水利) 건축을 좋아하여

협서로부터 하천 80리를 뚫어 교통문제를 해결했다.

협서 백성들이 편리함에 감사하여 돌에다 그의 공덕을 새겼다.

移節汴州,領河南道採訪使,徴爲京兆尹。

변주의 지방장관으로 벼슬을 옮겨

하남도에 이르러 채방사(採訪使)를 맡았고

황제의 명으로 경조윤이 되었다.

是歳,神武皇帝方事戎狄,恢宏土宇。

이 해에 당 현종이 융적에 빌붙어서 영토를 확장했다.

會吐蕃悉抹邏及燭龍莽布支攻陷瓜沙,

而節度使 王 君毚新被殺,河湟震動。

마침 토번의 실말라와 촉룡망포지가 과사를 공격하여 함락하자

절도사, 왕, 군참이 피살되고 황하와 황수의 형세가 불안했다.

帝思將帥之才,遂除生御史中丞,河西道節度。

황제는 장수의 재능을 생각해서

드디어 노생에게 어사중승(御史中丞)을 주어 하서절도사를 제수했다.

大破戎虜,斬首七千級,開地九百里,築三大城,以遮要害。

그는 오랑캐를 대파하고 70급을 참수하고

영토 9백리를 개척하였으며 세 대성을 축조하고 요해지를 차단했다.

邊人立石於居延山以頌之。

歸朝册勳,恩禮極盛。轉吏部侍郎,遷戸部尚書兼御史大夫。

변경의 백성들이 거연산에 비를 세워 공덕을 칭송했다.

조정에 돌아와 공훈에 걸맞는 작위를 책봉하여 은혜와 의례가 지극히 성대했다.

관직은 이부시랑에 전보되었다가 호부상서겸어사대부로 승진했다.

時望清重,羣情翕習,大爲時宰所忌。

한 때는 명망이 청고(清高)하고 존중 받았으나

대가들에게 꺼림을 받는 바 되었다.

以飛語中之,貶爲端州刺史。

유언비어로 중상을 입어 단주자사로 좌천되었다.

三年,徴爲常侍。未幾,同中書門下平章事。

3년 뒤 왕명으로 상시가 되었다가 얼마 후에는 다시 재상이 되었다.

與蕭中令嵩、裴侍中光庭,

同執大政十餘年,嘉謨密命,

一日三接,獻替啓沃、號爲賢相。

재상 숙고, 시중 배광정 등과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여 10여 년 동안 아름다운 모의와 밀명을 수행했는데

하루에 세 번 만나기도 하고 황제의 아름다운 뜻 다음으로 양책을 올려 노생을 사람들이 현상이라 일컬었다.

同列害之,復誣與邊將交結,所圖不軌。

동령의 관료들이 그를 해쳤다.

또 변방의 장수들과 사귀며 관계를 맺었으나

도모하던 것이 빗나갔다고 무고했다.

下制獄。府吏引從至其門而急收之。

황제는 하옥을 명했다.

경조부의 관리들이 시종들을 이끌고 노생 집에 와서 그를 급히 체포하여 수감했다.

生惶駭不測,謂妻子曰:

노생은 놀라고 두려워, 자신의 목숨을 예측할 수 없어 아내에게 말했다.

「吾家山東,有良田五頃,足以禦寒餒。

何苦求祿?而今及此,

思衣短褐,乘靑駒,行邯鄲道中,不可得也。」

「내 집은 본래 산동 땅이요. 좋은 밭 몇 마지기가 있어 추위와 굶주림은 면할 수 있었소.

어째서 벼슬을 하려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구료.

차라리 다시 짧은 갈옷을 입고 푸른 망아지를 타고 한단의 길을 가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게 되었구려.」

引刃自刎。其妻救之,獲免。

칼을 빼어 자기 목을 찌르려 했으나 그의 아내가 그를 구하여 죽음을 면했다.

其罹者皆死,獨生爲中官保之,減罪死,投驩州。

그와 연관된 사람들은 모두 죽었지만 

홀로 노생만이 환관들의 구정(舊情)을 입어 성명을 보전하고

죽을 죄에서 감형되어 환주에 유배되었다.


03

數年,帝知冤,復追爲中書令,封燕國公,恩旨殊異。

몇 년 뒤에 황제가 그의 억울함을 알고

다시 중서령 벼슬을 회복해 주고, 연국공에 책봉하니

황제의 은총의 뜻이 특별했다.

生五子,曰儉,曰傳,曰位,曰倜,曰倚,皆有才器。

다섯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검(儉)、전(傳)、위(位)、척(倜)、의(倚)라 불렀는데 모두 재능이 많았다.

儉進士登第,爲考功員外;傳爲侍御史,位爲太常丞;

倜爲萬年尉;倚最賢,年二十八,爲左襄。

검(儉)은 진사로 급제하여 고공원외(考功員外)가 되었고,

전(傳)은 시어랑(侍禦郎)이 되었고,

위(位)는 태승상(太常丞)이 되었고,

척(倜)는 만년지명(萬年地名)의 위(尉)가 되었고,

의(倚)는 가장 현명하여 나이 28세에 좌양(左襄)에 올랐다。

其姻媾皆天下望族。有孫十餘人。

그가 혼인한 척들은 모두 명문거족(名門擧族)들이었다。

손자들은 10여명이었다。

兩竄荒徼,再登台鉉,

出入中外,徊翔臺閣,五十餘年,崇盛赫奕。

노생은 두 차례 유배되고

두 차례 재상의 고위직에 올랐다.

중앙과 지방을 출입하며 50여 년간

벼슬의 지위가 높고 명성이 크게 빛났다.

性頗奢盪,甚好佚樂。後庭聲色,皆第一綺麗。

前後賜良田、甲第、佳人、名馬,不可勝數。

노생은 성품이 사치 방탕하고

방랑하고 음란한 즐거움을 매우 좋아하여

후원의 처첩들은 모두 천하제일의 미색이었다.

전후로 하사받은 양전과 가옥, 미녀, 명마 등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後年漸衰邁,屡乞骸骨,不許。

말년에는 몸이 점점 쇠약하고 노쇠해져

여러 차례 사직하기를 요청했으나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病,中人候問,相踵於道,名醫上藥,無不至焉。

병이 나서 환관들이 문병오느라 길에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명의와 상품의 약재도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將歿,上疏曰:

노생은 죽음에 임하여 상소했다.

「臣本山東諸生,以田圃爲娯,

偶逢聖運,得列官敘。

신은 본디 상동의 일반 유생으로 들에서 경작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다가

우연히 성은을 입어 이름을 관리의 위치에 올렸습니다.

過蒙殊獎,特秩鴻私。

出擁節旌,入昇台輔。

周旋中外,綿歴歳時。

황제의 과분한 보살핌을 입어 특별한 직위와 지나치게 집안을 일구었습니다.

지방에서는 절기의 환대를 받았고 조정에 들어와서는 재상직에 올랐습니다.

조정의 안팎에서 황제의 친척들과 교분을 맺어

다년간 비단이 깔린 길을 걸어왔습니다.[카페트 위를 걸었습니다.]

有忝天恩,無裨聖化。

負乘貽寇,履薄增憂。

日懼一日,不知老至。

황제의 은총을 입으면서도 황제의 교화에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성현의 자리에 머물러 높은 지위를 저버리고 해를 끼칠까

얇은 얼음 위를 밟듯이 점차 두렵습니다

날마다 그날의 책무를 두려워하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늙어버렸습니다.

今年逾八十,位極三事,

鐘漏並歇,筋骸倶耄。

금년에 여든을 넘어 관직을 삼공의 자리를 다 거쳤습니다

목숨도 막바지에 이르렀고 근골(筋骨)도 모두 노쇠했습니다.

彌留沈頓,待時益盡。

顧無成效,上答休明。

空負深恩,永辭聖代。

머무는 사이에도 몸은 무겁고 피곤하여 마상(馬上)에서 기다리는 시간도 점차 다해갑니다.

돌아보니 이룬 공적도 없이 황제의 무한한 성명(聖明)에 매우 감사드립니다.

부질없이 성은을 저버리고 영원히 황제의 태평성대를 송축합니다.

無任感戀之至,謹奉表陳謝。」

감격과 그리움의 지극함을 붙일 데 없어 삼가 이 표를 올리며 감사를 표합니다.

詔曰:

황제가 조서를 내렸다.

「卿以俊德,作朕元輔。

出擁藩翰,入贊雍熙,

昇平二紀,實卿所頼。

比嬰疾疹,日謂痊平。

豈斯沈痼,良用憫惻。

경은 뛰어난 덕행으로 짐의 수석 보좌가 되었다.

지방에서는 나를 보장하고 돕는 일을 수행하였고

조정에서는 나를 도와 조정을 빛나게 하였다.

20년간 태평을 누린 건 실로 경의 덕택이었다.

너의 질병은 마상(馬上)에서 나을 수 있다고 여겼는데

이처럼 오래되어 난치병이 되어 참으로 나를 민망하고 측은하게 할 줄은 몰랐다.

今令驃騎大將軍高力士,就第候省。

其勉加鍼石,爲予自愛。

猶冀無妄,期於有瘳。」

지금 표기대장군 고력사를 너의 집에 보내 살펴보고

치료에 힘쓰게 할 터이니 나를 위하여 생명을 자애하라.

오히려 마음 속에 희망을 품고 회복하기를 기대하노라.

是夕,薨。

그날 저녁 노생은 죽었다.

盧生欠伸而悟,見其身方偃於邸舍,

노생이 기지개를 켜면서 깨어 보니 꿈이었다.

 

呂翁坐其傍,主人蒸黍未熟,觸類如故。

옆에는 여옹이 있었고,

잠들기 전 밥을 짓고 있던 집주인은 여전히 밥을 짓고 있었다.

모든 게 전과 다름없었다.

生蹶然而興,曰:「豈其夢寐也。」

그는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이 모든 게 꿈이었던가?」

翁謂生曰:「人生之適,亦如是矣。」

여옹이 웃으며 말했다.

「인생 만사가 다 그런 거라네.」

生憮然良久,謝曰:

노생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윽고 감사를 드리면서 말했다.

「夫寵辱之道,窮逹之運,

得喪之理,死生之情,盡知之矣。

「영화와 치욕, 부귀와 빈곤, 삶과 죽음을 다 겪어 보았습니다.

此先生所以窒吾欲也。敢不受教!」

이는 선생께서 제 욕망을 막아주신 것입니다.

다시 가르침을 받지 않더라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稽首再拜而去。

노생은 여옹에게 두 번 절하고 떠나갔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575?category=485795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지구의 탄생과 생명체의 기원Ⅰ

https://www.youtube.com/watch?v=Tpvo2iLSf_A

 

지구의 탄생과 생명체의 기원 II

https://www.youtube.com/watch?v=_VImHFtPBtA&t=19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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