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평광기(太平廣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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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태평광기(太平廣記)》는 북송(北宋) 때 이방(李昉) 등 12인이 태종(太宗)의 칙명을 받아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977)부터 다음 해 3년(978)에 걸쳐 편찬한 유서(類書)이다. 모두 500권이고 목록 10권이며, 내용의 전체는 92부(部)로 나뉘어 있다. 청나라의 《사고전서(四庫全書)》는 이를 소설가(小說家)에 편입시켰다. 《문원영화(文苑英華)》·《태평어람(太平御覧)》·《책부원구(冊府元龜)》와 함께 송사대서(宋四大書)로 일컬어진다. 소설의 유서로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2. 편자
(1)성명:이방(李昉)(925~996) 등 12인
(2)자(字)·별호(別號):이방의 자(字)는 명원(明遠).
(3)출생지역:심주(深州) 요양(饒陽)(현 하북성(河北省))
(4)주요활동 및 생애
이방은 오대(五代) 후한(後漢) 건우(乾祐) 연간에 진사(進士)가 되고, 후주(後周)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으며, 송(宋)나라에 귀의하여 중서사인(中書舍人) 벼슬을 하였다. 세 번이나 한림(翰林)에 들어갔다. 송 태종(宋太宗) 태평흥국(太平興國) 8년(983),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배수되었다. 단공(端拱) 원년(988) 파직되어 우복야(右僕射)가 되었다가, 순화(淳化) 2년(991)에 다시 평장사(平章事)에 배수되었다. 《구오대사(舊五代史)》 편찬에 참여하고, 《태평어람(太平御覽)》 1,000권, 《태평광기(太平廣記)》 500권, 《문원영화(文苑英華)》 1,000권 등 3부 유서(類書)의 편찬을 주재하였다. 이 가운데 《문원영화》는 이방이 호몽(扈蒙)·서현(徐鉉)·송백(宋白) 등 17명과 함께 태종의 칙명을 받들어 태평흥국 7년(982)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지도(至道) 2년(996)에 졸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뒤에 송나라 인종(仁宗)의 어휘(御諱)인 조정(趙禎)을 피하여 문정(文正)으로 개시(改諡)되었다. 《송사(宋史)》 권265에 입전(立傳)되어 있다.
(5)주요저작:《개보통의(開寶通義)》, 《태평어람(太平御覽)》, 《문원영화(文苑英華)》, 《구오대사(舊五代史)》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태평광기》는 북송 태종(太宗)의 칙명을 받은 이방 등 12명이 태평흥국 2년(977) 3월부터 다음 해(978) 8월까지 편찬하였으며, 인판(印板)을 새긴 것은 태평흥국 6년(981) 정월이라고 한다. 981년의 판각 이후 증쇄되지 않았다. 이 《태평광기》는 전한(前漢)부터 북송 초까지의 기담(奇談) 7,000편을 모아 신선(神仙)·방사(方士)·명현(名賢) 등 92류로 정리하였다. 권수(巻首)에는 인용서목(引用書目)으로서 《사기(史記)》 등 343종의 서적 이름을 열거하였으나, 채록은 하였으면서 인용서목에 빠진 것을 추가하면 근 500종의 문헌을 인용한 듯하다. 그 가운데 235종은 현존하지만 나머지는 산일(散逸)하였다.
명나라에 들어와 가정(嘉靖) 45년(1566)에 허개(談愷)(호(號) 십산(十山))가 필사본을 저본으로 삼아 판각하여 융경(隆慶) 원년(1567)에 수정본을 출판하였다. 이것을 담각본(談刻本)이라고 한다. 만력 연간(1573~1619)에는 허자창(許自昌)이 수정한 허각본(許刻本)이 나왔다. 청나라 건륭(乾隆) 연간(1736~1795) 황성(黄晟)이 교정한 소형본(小型本)은 황씨건상본(黄氏巾箱本)이라고 한다. 그 외 청나라 진중어(陳仲魚)가 발견한 송본(宋本)을 근거로 허각본을 교정하고 그 사실을 기입한 진씨수교본(陳氏手校本), 손잠(孫潜)이 담각본에 송본과의 차이를 주기(注記)한 손교본(孫校本), 담각본과는 다른 계통의 명나라 사본인 야죽재초본(野竹齋鈔本)(명초본(明鈔本)) 등이 있다. 또 소엽산본(掃葉山本)과 필기소설대관(筆記小說大觀), 석인본(石印本)이 있다. 가장 완비된 판본은 왕소영(汪紹楹) 점교본(點校本)이다. 1959년에 왕소영이 담각본을 저본으로 교감한 것을 인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가 출판하고, 1961년에 다시 오식(誤植) 정정본을 중화서국(中華書局)이 출판하였다. 그리고 《태평광기》는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되어, 현재 문연각사고전서본(文淵閣四庫全書本)이 영인되어 있다.
4. 내용
《태평광기》는 전부 500권이며 목록 10권이 별도로 있다. 전한부터 북송 초까지의 奇談 7,000여 편을 모아 신선(神仙)·방사(方士)·이승(異僧)·보응(報應)·명현(名賢)·공거(貢擧)·호협(豪俠)·유행(儒行)·회해(詼諧)·부인(婦人)·정감(情感)·몽(夢)·환술(幻術)·신(神)·귀(鬼)·요괴(妖怪)·재생(再生)·용(龍)·곤충(昆蟲)·초목(草木)·잡전기현(雜傳記賢) 등 92목 1,500류로 분류한 것으로, 소설(小說) 유서 가운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태평광기》의 92목만을 보면 다음과 같다(괄호의 숫자는 권(卷)을 나타냄).
신선(神仙)(1~55)·여선(女仙)(56~70)·도술(道術)(71~75)·방사(方士)(76~80)·이인(異人)(81~86)·이승(異僧)(87~98)·석증(釋証)(99~101)·보응(報應)(102~134)·정응(征應)(135~145)·정수(定數)(146~160)·감응(感應)(161~162)·참응(讖應)(163)·명현(名賢)(164)·염검(廉儉)(165)·기의(氣義)(166~168)·지인(知人)(169~170)·정찰(精察)(171~172)·준변(俊弁)(173~174)·유민(幼敏)(175)·기량(器量)(176~177)·공거(貢擧)(178~184)·전선(銓選)(185~186)·직관(職官)(187)·권사(權挱)(188)·장수(將帥)(189~190)·효용(驍勇)(191~192)·호협(豪俠)(193~196)·박물(博物)(197)·문장(文章)(198~200)·재명(才名)(201)·유행(儒行)(202)·악(樂)(203~205)·서(書)(206~209)·화(畵)(210~214)·산술(算術)(215)·복서(卜筮)(216~217)·의(醫)(218~220)·상(相)(221~224)·기교(伎巧)(225~227)·박희(博戯)(228)·기완(器玩)(229~232)·주(酒)(233)·식(食)(234)·교우(交友)(235)·사치(奢侈)(236~237)·궤사(詭詐)(238)·함녕(諂佞)(239~241)·유오(謬誤)(242)·치생(治生)(243)·편급(褊急)(244)·회해(詼諧)(245~252)·조초(嘲誚)(253~257)·치비(嗤鄙)(258~262)·무뢰(無賴)(263~264)·경박(輕薄)(265~266)·혹폭(酷暴)(267~269)·부인(婦人)(270~273)·정감(情感)(274)·동부(童仆)(275)·몽(夢)(276~282)·무(巫)(283)·환술(幻術)(284~287)·요망(妖妄)(288~290)·신(神)(291~315)·귀(鬼)(316~355)·야차(夜叉)(356~357)·신혼(神魂)(358)·요괴(妖怪)(359~367)·정괴(精怪)(368~373)·영이(靈異)(374)·재생(再生)(375~386)·오전생(悟前生)(387~388)·총묘(冢墓)(389~390)·명기(銘記)(391~392)·뇌(雷)(393~395)·우(雨)(396)·산(山)(397)·석(石)(398)·수(水)(399)·보(寶)(400~405)·초목(草木)(406~417)·용(龍)(418~425)·호(虎)(426~431)·축수(畜獸)(432~446)·호(狐)(447~455)·사(蛇)(456~459)·금조(禽鳥)(460~463)·수족(水族)(463~472)·곤충(昆虫)(473~479)·만이(蠻夷)(480~483)·잡전기(雜傳記)(484~492)·잡록(雜錄)(493~500).
5. 가치와 영향
《태평광기》는 남송과 원나라 이후 널리 읽혀서 남송·원나라 화본(話本)·잡극(雜劇), 명·청 소설·희곡에는 이 책에서 제재를 취한 것이 많다. 또한 이 유서는 한국과 일본에서도 널리 읽히고 활용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김현감호(金現感虎)’에 보면, 호랑이와 관련된 고사를 언급하면서 《태평광기》로부터 신도징(申屠澄) 고사를 인용하였다. 또 〈한림별곡(翰林別曲)〉 2장에는 독서인이 《태평광기》를 열람하는 광경이 언급되어 있다. 〈한림별곡〉이 1216년(고종 3)에 창작되었다고 본다면, 1216년 이전에 《태평광기》가 들어왔으리라 추측된다. 조선시대에는 중국 문헌에 산재하는 고려시대 문헌을 집일하기 위하여 중국 역사서와 정서(政書)는 물론, 《책부원구(冊府元龜)》·《태평광기(太平廣記)》·《옥해(玉海)》·《산당고색(山堂考索)》·《사림광기(事林廣記)》·《기찬연해(記纂淵海)》·《고금합벽사류비요(古今合璧事類備要)》·《한원신서(翰苑新書)》·《해록쇄사(海錄碎事)》·《사물기원(事物紀原)》·《유설(類說)》·《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등의 유서를 활용한 사례가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괴담전서(怪談全書)》로 번안되었다.
조선시대에 《태평광기》는 사례집으로도 활용되었다. 이를테면 1441년(세종 23) 5월 18일(계축), 의관(醫官)이 경중과 외방에서 뇌부(雷斧)·뇌설(雷楔)을 물색하라고 청원할 때 《대전본초(大全本草)》·《필담(筆談)》, 주희의 설과 함께 《태평광기》를 거론하였다. 1462년(세조 8) 성현(成俔)의 백씨 성임(成任)이 《태평광기》 500권을 요약해서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 50권을 만든 후, 다른 여러 서적에서 모은 30권을 합쳐 《태평통재(太平通載)》 80권을 이루었다. 《태평광기상절》은 143항목 843편 고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승소(李承召)(1422~1484)는 〈약태평광기서(略太平廣記序)〉에서, 《태평광기》가 유가 성리학에서 벗어나지만 유학자의 견문을 넓히는데 도움이 될 만하다고 그 가치를 인정하였다. 1463년(세조 8) 1월 1일(병신), 세조는 중궁과 함께 인정전(仁政殿)에서 풍정(豊呈)을 받고는 양성지(梁誠之)에게 “경(卿)이 《태평광기》를 아는가?”라 묻고, 《태평광기》 중의 말을 이야기하였다. 양성지는 그 일을 기회로 세조를 권계(勸戒)하였다. 성종 때인 1492년(성종 23), 이극돈(李克墩)은 《태평통재》를 중간하였다. 1569년(선조 2) 6월 20일(임진)의 석강(夕講)에서 기대승(奇大升)이 그 책을 ‘사람의 심지(心志)를 오도하는 책’이라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은 《태평광기》에 대해 고증적 고찰을 가하면서도 그 책을 실상은 애독하였다. 이를테면 장유(張維)는 《태평광기》를 통해서 〈규수객전(虯鬚客傳)〉을 읽고 《계곡만필(谿谷漫筆)》에 논평을 남겼다.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西浦漫筆)》 하권 49칙에서, 명나라 건문제(建文帝) 부자(父子)가 난을 피해 숨었다는 명나라 패관소설의 전설에 대해, 당나라 측천무후 때 서경업(徐敬業)과 낙빈왕(駱賓王)이 망명하였다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제왕이 난을 피해 몸을 숨겨 천수를 다한 일은 예로부터 없었던 일’이라고 대비 논법을 구사하였다.
조선에서는 17세기 이후 《태평광기언해》가 이루어졌다. 현재로서 고(故) 김일근(金一根)님 소장의 멱남본(覓南本)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낙선재본(樂善齋本) 두 본이 완정하다. 한편 멱남본(전 5권 중 제2권 낙질)과 연세대 귀중본(제2권)은 권지일 26편(120면), 권지이 21편(99면), 권지삼 21편(118면), 권지사 26편(125면), 권지오 33편(107면)이니, 제2권의 낙질분을 제외한 5권에 모두 127편의 이야기를 실었다. 한편 낙선재본은 9권 완질이 현존하며, 총 268편의 이야기를 실었다. 후자는 전자를 저본으로 하면서 《전등신화(剪燈新話)》·《전등여화(剪燈餘話)》 속의 이야기를 일부 언해하고 우리나라 고소설 ‘매화전 전반부(뉴방삼의뎐)’도 수록하였다. 《태평광기언해》는 《태평광기》 가운데 조선의 사정에 맞지 않거나 외설스런 내용, 이단(異端)을 받드는 내용은 생략하였다. 후일담(後日譚)이 붙어 있을 때는 그것을 생략하였으며, 표현이나 어구도 상당히 많이 바꾸었다. 단 삽입시(揷入詩)의 경우는 거의 그대로 번역하였다. 또한 제4책(화(火)) 제12화 〈왕환지[지환]뎐(王之渙傳)〉은 《집이기(集異記)》에 들어 있던 기정화벽(旗亭畫壁) 고사로, 통용본 《태평광기》에는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유설(類說)》, 《설부(說郛)》, 《산당사고(山堂肆考)》 등 유서(類書)에 널리 전하는 고사이다. 《태평광기언해》는 《설부》 수록 ‘왕환지(王煥之)’의 원문을 저본으로 한 듯하다.
6. 참고사항
(1)명언
• “방주(坊州) 의군현(宜君縣)의 왕로(王老)가 온몸에 부스럼이 난 도사를 위해 도사의 말대로 술을 만들어 항아리에 가득 채워 주자, 도사가 항아리 속에 들어가 앉아 있은 지 3일 만에 머리털이 다시 새까맣게 되고 살결도 하얗게 되었으며, 왕로도 그 도사의 말대로 남은 술을 마시자 일시에 공중으로 올라가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신선(神仙)〉
• “신라 출신으로 당나라 빈공 진사가 되었으나 복기련형(服氣鍊形)을 하였던 김가기(金可記)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본래 《속선전(續仙傳)》에 수록되어 있던 이야기를 전재한 것이다. 권143 〈징응(徵應)〉에는 흑치상지(黑齒常之) 이야기가 《조야첨재(朝野僉載)》로부터 전재되어 있다.” 〈신선(神仙)〉
•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이 신선술을 광적으로 좋아하자 부장(部將) 여용지(呂用之)가 후토부인(后土夫人)이 영이(靈異)하다는 이야기를 지어내어 고변을 유혹한 기록이 나온다.” 〈요망(祅妄)〉
• “당(唐)나라 이하(李賀)가 27세로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늘에서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붉은 용을 타고 내려와 ‘옥황상제가 지금 그대를 불러와 새로 지은 백옥루(白玉樓)의 기문을 짓게 하라 하였소.’ 하고서 천상으로 데리고 갔다는 고사가 나온다.” 〈귀(鬼)〉
(2)색인어:태평광기(太平廣記), 태평광기언해(太平廣記諺解), 이방(李昉), 유서(類書), 신선(神仙), 도술(道術), 방사(方士), 이인(異人), 보응(報應), 감응(感應).
(3)참고문헌
• 太平廣記(李昉 等編, 中華書局)
• 교역 태평광기언해(김동욱, 보고사)
• 연세대소장 태평광기언해본(김장환·박재연, 학고방)
• 한국한문기초학사(심경호, 태학사)
• 白話太平廣記(陸昕·郭力弓·任德山 主編, 北京燕山出版社)
• 白話太平廣記(周振甫 主編, 中州古籍出版社)
• 文白對照全譯太平廣記(高光·王小克·汪洋主編, 全5冊, 天津古籍出版社)
• 白話太平廣記(丁玉琤 等 主編, 全5冊, 河北敎育出版社)
• 譯注太平廣記鬼部(堤保仁 編, 星雲社)
• 新釋太平廣記 〈鬼部〉 (西本芳男 新釋·編集)
• 譯注 太平廣記婦人部(鹽卓悟·河村晃太郎編 汲古書院)
• 太平廣記夢部譯注稿(今場正美·尾崎裕 著, 中國藝文研究會)
【심경호】
https://namu.wiki/w/%ED%83%9C%ED%8F%89%EA%B4%91%EA%B8%B0%EC%83%81%EC%A0%88
1. 개요
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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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의 내용은 태평광기상절 편찬의 시대적 의미를 참고하였습니다.
태평광기는 한나라 때부터 북송 때까지 중국에서 떠돌던 설화 및 야사들을 모아 978년에 총 500권으로 완성한 중국의 대표 설화집이다.#, # 중국 고대 문학의 금자탑이자 집성체로 간주된다.
한국에서는 고려 문종 때부터 반드시 완독해야 할 대표 설화집으로 지식인들에게 애호받았다. 그러나 조선 세조 이전까지는 국내에서 직접 판목을 만들어 인쇄하지 못하였고, 중국으로부터 비싼 가격을 지불하여 수입해와야 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자체적인 판목을 만들고 한국의 사정에 맞게 내용을 손본 것은 조선 세조 8년(1462)에 왕의 명을 받아 성임이 태평광기상절을 만들면서부터이다. 당대의 유명한 학자 서거정[1]이 서문을 쓰고 태평광기의 내용을 총 50권으로 축약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 이후 우리나라에 필기(筆記) 저술 문화가 유행하였고, 야담이라는 중국이나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는 한국식 전설이나 민담, 야사나 설화 등을 모은 단편 모음집이 나타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지식인들이 태평광기라 지칭한 책은 중국의 원본 태평광기가 아니라, ≪태평광기상절≫이나 역시 성임이 지은 ≪태평통재(太平通載)≫ 둘 중 하나였다.
원래는 총 50권이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26권이다. 총 26권에 143개 편목, 839편 고사를 모았다.
태평광기상절은 중국 학계에서 매우 유명한 서적이다. 이는 태평광기상절이 현재 중국이 자랑하는 고전 중국문학의 금자탑, 태평광기의 현존하는 판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이고, 특히 중국 내에서는 완전히 멸실된 고전 6종이 온전히 남아 전하기 때문이다. 북송 때 이방(李昉) 외 12명이 만들어 태청루(太淸樓)에 보관했던 송판(宋板) 원본은 소실되었다. 이후 명나라의 담개(談愷), 허자창(許自昌)이 1566년에 교각(校刻) 출판한 것이 현 중국의 태평광기 중 가장 오래된 판본이고, 이후 간행된 중국의 태평광기들도 전부 1566년본을 저본으로 한다. 조선에서 세조의 명으로 처음 발간한 태평광기상절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판본인 1566년본보다 100여 년 정도 이전에 만들어진 판본으로,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태평광기이다.연합뉴스
이 때문에 중국 학계에서 태평광기에 대한 논문이나 칼럼이 나올 때마다 한국의 태평광기상절이 반드시 언급된다고 한다.
오직 한국에만 남아 있는 태평광기 6문은 다음과 같다. 蕃中六畜[2], 耶孤兒[3], 胡王[4], 王陟[5], 侯泳[6], 陳延美[7]
또한 중국의 태평광기와 한국의 태평광기상절은 수록된 이야기의 출전이 다르게 표기된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張嘉貞은 중국 판본에서는 定命錄을 출전이라, 태평광기상절에서는 明皇雜錄을 출전이라 적었다. 현재 중국학계와 한국학계 모두 태평광기상절에 표기된 출전이 맞다고 본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068
필사본.
- 『태평광기언해』(김일근 편,박이정,1990)
- 『한중소설설화비교연구』(김현룡,일지사,1976)
- 『영인태평광기언해』(김일근 교설,통문관,1957)
- 「태평광기언해본고」(김현룡,『문호』 6·7,1971)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태평광기언해(太平廣記諺解))]참고문헌
- 『태평광기언해』(김일근 편,박이정,1990)
- 『한중소설설화비교연구』(김현룡,일지사,1976)
- 『영인태평광기언해』(김일근 교설,통문관,1957)
- 「태평광기언해본고」(김현룡,『문호』 6·7,1971)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태평광기언해(太平廣記諺解))]
ko.wikipedia.org/wiki/%EB%B0%B1%EA%B1%B0%EC%9D%B4
백거이(중국어: 白居易, 772년 ~ 846년)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등으로 불리었다. 당나라 때 뤄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태어났다.
작품
백거이는 다작(多作)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존하는 문집은 71권, 작품은 총 3,800여 수로 당대(唐代) 시인 가운데 최고 분량을 자랑할 뿐 아니라 시의 내용도 다양하다. 젊은 나이에「신악부 운동」을 전개하여 사회, 정치의 실상을 비판하는 이른바 「풍유시(諷喩詩, 風諭詩)」를 많이 지었으나, 강주사마로 좌천되고 나서는 일상의 작은 기쁨을 주제로 한 「한적시(閑適詩)」의 제작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밖에도 평소 둘도 없는 친구였던 원진(元稹), 유우석(劉禹錫)과 지은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등의 감상시도 유명하다.
백거이가 45세 때 지은 「비파행」은 그를 당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게 하였으며, 또, 현종(玄宗)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시 「장한가」도 유명하다.
풍유시를 주로 했던 시기, 한적시를 주로 지었던 시기 전체를 통틀어, '짧은 문장으로 누구든지 쉽게 읽을 수 있는(平易暢達)' 것을 중시하는 시풍(詩風)은 변함이 없었다. 북송(北宋)의 석혜홍(釋惠洪)이 지은 《냉재시화(冷齎詩話)》 등에 보면, 백거이는 시를 지을 때마다 글을 모르는 노인에게 자신이 지은 시를 읽어주면서, 노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평이한 표현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렇게 지어진 그의 시는 사대부(士大夫) 계층뿐 아니라 기녀(妓女), 목동 같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까지 애창되는 시가 되었다.
이 밖에 <백시 장경집> 50권에 그의 시 2,200수가 정리되었으며, 그의 시문집인 <백씨 문집>은 그의 모든 시를 정리한 시집이다.
장편서사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장한가(長恨歌)
- 비파행(琵琶行)
https://ctext.org/taiping-guangji/48/bailetian/zh
《白樂天》
唐會昌元年,李師稷中丞為浙東觀察使。有商客遭風飄蕩,不知所止。月餘。至一大山。瑞雲奇花,白鶴異樹。盡非人間所覩。山側有人迎問曰:「安得至此。具言之。令維舟上岸。云:「須謁天師。」遂引至一處,若大寺觀。通一道明鈔本「道」下有「士」字。入。道士鬚眉悉白。侍衛數十。坐大殿上,與語曰:「汝中國人,茲地有緣方得一到,此蓬萊山也。既至,莫要看否。遣左右引於宮內遊觀。玉臺翠樹,光彩奪目,院宇數十,皆有名號。至一院。扃鏁甚嚴。因窺之。衆花滿庭。堂有裀褥,焚香階下。客問之。答曰:「此是白樂天院,樂天在中國未來耳。」乃潛記之,遂別之歸。旬日至越,具白廉使。李公盡錄以報白公。先是,白公平生唯修上坐業,及覽李公所報,乃自為詩二首,以記其事。及答李浙東云:「近有人從海上回,海山深處見樓臺。中有仙籠明鈔本「籠」作「龕」。開一室,皆言此待樂天來。」又曰:「吾學空門不學仙,恐君此語是虛傳。海山不是吾歸處,歸即應歸兠率天。」然白公脫屣煙埃,投棄軒冕,與夫昧昧者固不同也,安知非謫仙哉。出《逸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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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광기(太平廣記)에 나타난 신선고(神仙攷)-한국(韓國) 고소설(古小說)과의 상관성(相關性) 고찰(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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