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룡비어천가>의 해동 六龍 : 이안사-목조, 이행리-익조, 이춘-도조, 이자춘-환조/ 태조, 태종
2대왕 정조는 누락. 태조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대표함. 太字 시호(세종 생각)
*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 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되었고,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손자 이춘(李椿), 증손 이자춘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서 벼슬했다. 천호(千戶) 벼슬이란 필요시 천명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다.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의 이성계 직계 가문은 전주 이씨 종가가 아니었다. 종가는 장남의 직계 후손인데 이성계의 직계 조상은 이한의 장남 후손 즉 종가가 아니었다. 심지어 이성계조차 위로 이복 형이원계(李元桂)가 있었다. 그러다가 이성계 가문이 조선을 건국하고 왕가(王家)가 되면서 종가, 종주 자리를 가져와서 현재 전주 이씨 종주는 대한제국 황제위 요구자이원(李源)이다.
이성계는 고려 말의 홍건적의 난과 왜구 격퇴에서 무공을 세워 유명해졌으며,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정치적·군사적 실권을 한 손에 쥐었다. 신흥 정치세력과 연계하여 고려를 대체하는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였다. 통상적으로는 묘호를 따라서 태조라고 부른다. 1392년부터 1398년까지 7년간 재위하였으며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제2대 임금인 정종에게 양위하였다.
태종은 조선전기 제3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400~1418년이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서 조선 건국과정에서 결정적인 고비마다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선 인물이다.
조선 개국
정몽주 등을 제거함으로써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건하게 하여 새로운 왕조인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1392년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함에 따라 이방원은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6]
원래 장자로 왕세자를 세워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조선 개국의 중요한 논리 중 하나였던 우창비왕설에 연관된 태조의 장남인진안대군방우를 제치고, 신하들은 나이와 공로를 감안해 신의왕후 소생 실질적 장남 영안군 이방과 또는 이방원을 세자로 세우라고 주청을 올렸다. 개국의 공로를 따지면 이방원이 태조의 아들 중 가장 많은 공을 세웠으나, 당시 "왕권(王權)보다 신권(臣權)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국정이 안정된다"라는 신권을 주창하던 정도전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 신권을 주장하는 자기들을 제거할까 봐 두려워 결국 왕세자로 태조의 막내아들이자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의안대군방석을 선택하였다.[7]
1394년 그는 전직 몽골 관료였으며 조선의 외교관이었던조반등을 따라 연경과 남경을 방문하여주원장을 대면하였고, 후의영락제와도 만났다.[8]
세자 자리를 두고신덕왕후강씨 소생의의안대군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정비인신의왕후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이에 크게 불만을 나타냈으며 그것은 누구보다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이방원도 마찬가지였다. 태조는 개국 이후 군권분장정책을 통해 영안군 이방과, 정안군 이방원, 무안군 이방번, 세자의 매제 흥안군 등에게 절제사 직임을 수여해 군권을 분할했으며, 이것은 종친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는 원칙에 위배되고 군권을 국왕의 통제 아래에 놓는 일원적 지배 체제에 위배되었으므로, 개국 초부터 태조의 지시 아래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반발한 이방원은1398년에 부왕 태조가 와병 중임을 틈타 아내민씨의 후원과이숙번·하륜·조영무등 사병 혁파 반대 세력,이화·사촌이천우·처남민무구·민무질등 종친, 외척과 결탁해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남은·심효생등의 개국공신들과 이복 동생인 무안대군 방번·세자 방석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안 가 태조는 권력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영안군 방과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났다. 왕위를 물려받은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가 바로 조선의 제2대국왕정종이다.[6]이때 아버지 이성계의 서형인이원계의 아들들이 그를 지지하고 정안군 이방원이 국정을 장악한다.
하지만 형제들 간에 다시 한번 분란이 발생하는데, 이방원의 넷째 형인회안대군방간이박포의 꼬드김에 넘어가 왕위에 오를 목적으로1400년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때에도이화·이천우등이 그를 도왔고, 상대적으로 우수한 장수들과 병사들을 가지고 있던 이방원은 쉽게 이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다. 이후 박포 등을 처형하고 회안대군 부자를 황해도 토산으로 귀양보냈다. 이때에도 회안대군을 죽여야 된다는 여론이 나왔으나 그를 유배시키는 선에서 불문에 부쳤다.
성종은 38세라는 이른 나이에 승하했는데, 그 나이에 28명이나 되는 자식을 얻었다는 건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 해도 이 분야의 권위자라 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거느린 후궁의 숫자를 보면 성종은 12명, 태종은 12명, 세종은 6명, 중종은 10명이다. 성종 때는 일종의 교조주의(敎條主義)가 팽배해, 서예(書), 활쏘기(射) 같은 육예(六藝)[64]도 나라를 올바로 다스리는 데에 방해된다며 대간들이 상소를 올렸을 정도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을 선언했다. 윤지충(1759~ 1791)은 유교식 제사를 거부하다 처음으로 순교한 조선후기 천주교인이다.
시복미사 강론에서 교황은 "오늘 우리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안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승리를 경축합니다. 이제 그분들의 이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 옆에 나란히 함께 놓이게 되었다“며 ”이는 한국의 천주교인 여러분이 모두 하느님께서 이 땅에 이룩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여러분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기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권상연(權尙然, 1751년 ~ 1791년12월 8일)은 조선의 천주교순교자이다. 세례명은 야고보이다. 고모상을 당하여 내종형제(4촌)인 윤지충과 함께 신주를 없애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는 죄목으로 구금되어 순교하였다. 이 두 사람의 순교 사건을 가리켜 '신해박해' 또는 '진산사건'이라고 한다. 2021년 9월 1일에 천주교 전주교구는 2021년 3월 초남이성지의 바우배기에서 성역화 작업을 하던 중 권상연의 유해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1][2]
조선시대에는 국조인 태조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진전을 서울에는 문소전(文昭殿) 한 곳, 외방에는 전주의 경기전, 영흥의 준원전,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개성의 목청전(穆淸殿) 등 다섯 곳에 두고 유지하였다. 조선 왕실의 관향인 전주에 있던 태조의 영전에 경기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1442년(세종 24)의 일이다. 이듬해에는 새로 태조의 어진을 경기전에 봉안하였고 제위전을 두어 제사의 비용으로 쓸 수 있게 하였다.
재위 1392∼1398.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성계(李成桂)이다. 처음 자는 중결(仲潔)이다. 호는 송헌(松軒) · 송헌거사(松軒居士)이다. 등극 후에 이름을 이단(李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화령부(和寧府: 영흥)에서 태어났다.
이자춘(李子春)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다.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했다. 특히 활솜씨가 뛰어났다.
그의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 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 손자 이춘(李椿)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 벼슬했다.
이자춘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로 있었다. 이자춘은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내응해 원나라 세력을 축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이자춘은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되어 동북면(東北面) 지방의 실력자가 되었다.
이미 명나라 공격에 대한 생각이 있었던 최영은 그 이후부터는 요동 공격을 주장하는 세력의 핵심이 되어, 인척 관계를 맺은 우왕과 더불어 요동 원정을 논의했다. 우왕은 요동 공격에 대한 자문을 최영에게 구했고, 최영은 이에 대해 찬성했다. 즉요동 공격이라는 정책의 핵심은 바로 최영이었다.
이 때문에 요동 공격을 반대하는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이 직접 최영의 집에 찾아가 요동 공격을 만류했지만, 이미 결심을 내린 최영은 이자송을곤장으로 두들겨 패서유배를 보낸 다음에곧 죽여버렸다.
사냥을 핑계로 이동하며 요동 공격 준비에 착수하던 우왕은 지금의황해북도봉산군인 봉주(鳳州)에 도착했을 무렵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 정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동안 우왕은 기본적으로 모든 일을 최영하고만 단 둘이서 논의하곤 했었으나, 이번 요동 정벌은 예외적으로 처음, 이성계에게도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워낙에 중대한 사안인만큼 이성계가 고려 말명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임견미 등을 소탕하는데 최영과 더불어 핵심 인물이었던 만큼 우왕이 이성계에게도 동의를 구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양을 치는데 힘을 써주라는 우왕의 말을 들은 이성계는 여기서 우왕에게 명백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이것이 바로한국사에서 유명한<사불가론>(四不可論)이다.
(중략)
"만일 명나라 영토를 침범함으로써 천자로부터 벌을 받는다면 즉각 나라와 백성들에게 참화가 닥칠 것이다. 내가 이치를 들어서 회군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주상께서는 잘 살피지 않으시고 최영 또한 노쇠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는 그대들과 함께 직접 주상을 뵙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자세히 아뢰고 측근의 악인들을 제거해 백성들을 안정시켜야만 한다.
일단 회군이 결정되자, 원정군은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진군을 개시했다. 군대가 1일 30리를 간다해도 12km인데, 당시 원정군의 회군 루트에는압록강,청천강,대동강,예성강등이 있어 도하 작전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더욱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원정군의 총 숫자는 50,000명으로, 빠르게 움직이기에는 숫자가 많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정군은400km를 10일만에 주파하는 괴력을 보였다. 내키지 않은 채로 북상하던 원정군이 서경에서 위화도까지 가는데 20일이 걸렸음을 고려하면, 회군 당시에는 두 배 먼 거리를 오히려 절반의 시일만에 남하했던 것이다.
이성계는 잠시 동안 허수아비 왕으로 어린 창왕(제33대)을 앉혔다가 공양왕(제34대)으로 갈아치운 뒤, 결국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렇게 역성혁명이 성공해 5백 년 고려 왕조가 멸망했고, 새로운 5백 년 왕조인 조선이 건국되었다.
이성계 이전에도 무신들이 고려의 권력을 쥐고 뒤흔든 사례가 없지는 않았지만, 이성계는 이전까지의 무신들과는 다르게 명망과 신흥 유신들의 지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모두 결합한 초유의 군벌이었다. 그 후 위화도 회군에서 함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조민수의 도전과 정몽주(鄭夢周)의 마지막 저항이 있었으나 자신의 실력 뿐만 아니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대부들(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지지를 얻은 이성계는 이 모든 도전을 이겨내면서 새로운 왕조를 개국하기에 필요한 명분과 입지를 충분히 갖추었다.
또한, 명나라가 흥하고 북원이 망해가는 역사적인 전환기에서 나올 뻔한 고려의 마지막 북진 정책인 제2차 요동정벌이 엮여 있어, 한국사 전체를 놓고 봐도 가장 극적인 사건이자 흥미진진한 논쟁 거리(만약 요동 정벌을 그대로 강행했다면?)로 회자된다.
전주 풍패지관(全州 豊沛之館)은 전라북도전주시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583호로 지정되어 있다.
풍패(豊沛) 또는 풍패지향(豊沛之鄕)이란 말은 새로운 왕조를 일으킨 제왕의 고향을 말하는 것이다. 유방이 고향인 지금의 강소성 패군 풍현에서 기병(起兵)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제위(帝位)에 오르자 고향 사람들에게 세금과 부역을 면해 준 일이 있다. 그 뒤부터 제왕의 고향은 모두 풍패라고 대칭(代稱)한다.
이성계의 실제 출생지는 함경도 영흥이지만, 조상 대대로 살던 곳이자 전주 이씨의 관향(貫鄕)으로 조선 왕조의 발상지인 전라도 전주(全州)를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하였다. 한 고조 유방이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고향인 패군(沛郡) 풍현(豊縣) 즉 풍패(豊沛)에 들러 승리를 기념하며 고향 사람들을 모은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듯, 이성계는 왜구를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고향인 전주(全州)에 들러 황산대첩의 대승을 기념하며 전주 이씨 종친들을 모은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으며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포부를 드러냈다.
전주는 조선 왕조의 풍패지향이고 조선시대 전라도의 위상을 말해주는 전국8도중 가장크고 웅장했던 전라감영의 건물중 외국사신등의 귀빈들을 위한 객사에 중국사신이 적어놓은 풍패지관이란 현판이 아직도 남아있다.
한 시대 지나간 계절은 모두 안개와 바람 한 발의 총성처럼 사라져간 생애의 다리 건너 지금은 일년 중 가장 어두운 저녁 추억과 북풍으로 빗장 찌르고 안으로 못을 박는 결별의 시간 이따금 하늘엔 성자의 유언 같은 눈발 날리고 늦은 날 눈발 속을 걸어와 후득후득 문 두드리는 두드리며 사시나무 가지 끝에 바람 윙윙 우는 서럽도록 아름다운 영혼 돌아오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