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時

ㅡ도연명(陶淵明, 365년~ 427년)

 

春水滿四澤 

(춘수만사택) 봄물은 사방의 못에 가득하고

夏雲多奇峰 

(하운다기봉)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가 많기도 하다

秋月揚明輝

( 추월양명휘) 가을 달은 밝은 빛을 드날리고

冬嶺秀孤松 

(동령수고송) 겨울 산마루엔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도다

 

 

 

 

 

자경전- 한중록 집필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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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혜경궁 홍씨 1부 & 혜경궁 홍씨 2부/수원화성;융릉·홍씨·양위후 거처

https://blog.naver.com/kydong47/223232035147 혜경궁 홍씨, 한중록/4편 종합본 「한듕록」·「한듕만록」 & 수원화성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지은 회고록.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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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 한중록/4편 종합본 「한듕록」·「한듕만록」 & 수원화성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지은 회고록.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974 한중록(閑中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작자의 회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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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작자의 회갑해에 쓰여졌고, 나머지 세 편은 1801년(순조 1)∼1805(순조 5) 사이에 쓰여졌다.

필사본 14종이 있으며, 국문본·한문본·국한문혼용본 등이 있다. 사본에 따라 ‘한듕록’·‘한듕만록’·‘읍혈록’ 등의 이칭이 있다. 4편의 종합본은 「한듕록」·「한듕만록」의 두 계통뿐이다.

제1편에서 혜경궁은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에서부터 이듬해 입궁하여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중도에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하여 의식적으로 사건의 핵심을 회피한다. 그 대신 자신의 외로운 모습과 장례 후 시아버지 영조와 처음 만나는 극적인 장면의 이야기로 비약한다.

후반부에는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아버지·삼촌·동생들이 화를 입게 된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 편은 화성행궁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만난 지친들의 이야기로 끝난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 1년 5월 29일 동생 홍낙임(洪樂任)이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뒤에 쓴 글이다.

제2편에서 혜경궁은 슬픔을 억누르고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야기를 서두로,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한 까닭은 이 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또 친정 멸문의 치명타가 된 홍인한사건(洪麟漢事件)의 배후에는 홍국영(洪國榮)의 개인적인 원한풀이가 보태졌다고 하면서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가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는 날을 꼭 생전에 볼 수 있도록 하늘에 축원하며 끝맺는다.

제3편은 제2편의 이듬해에 쓰여진 것으로 주제 역시 동일하다. 혜경궁은 하늘에 빌던 소극성에서 벗어나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정조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성이 지극하였는지, 또 말년에는 외가에 대하여 많이 뉘우치고 갑자년에는 왕년에 외가에 내렸던 처분을 풀어주고 언약하였다는 이야기를 기술하며, 그 증거로 생전에 정조와 주고받은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마지막 제4편에서는 사도세자가 당한 참변의 진상을 폭로한다. ‘을축 4월 일’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을축년은 순조 5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돌아간 해이다. “임술년에 초잡아 두었으나 미처 뵈지 못하였더니 조상의 어떤 일을 자손이 모르는 것이 망극한 일”이라는 서문이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2260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https://ko.wikipedia.org/wiki/%EC%B0%BD%EA%B2%BD%EA%B6%81

 

창경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창경원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유원지로서의 창경원 후신에 대해서는 서울대공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창경궁(昌慶宮)은 서울특별시에 있는 궁궐로 조선 성종(1483년) 때에 건축하였다. 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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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조선고적도보의 창경궁 배치도.

 

창경궁이 위치한 곳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였다. 창경궁은 조선시대 왕궁 가운데 유일하게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8] 남향을 하지 않고 동향을 한 이유는 이 궁이 별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지며, 지형상으로도 동향이 적합하였던 듯하다.[8]

현재 창경궁에는 조선시대 건물로는 명정전(국보 제226호), 통명전(보물 제818호), 홍화문(보물 제384호), 숭문당·함인정·환경전·경춘전·양화당·집복헌·영춘헌·관덕정·월근문·선인문·명정문과 명정전 회랑(보물 제381호)이 있고, 석조물로는 옥천교(보물 제386호), 풍기대(보물 제846호), 관천대(보물 제851호), 창경궁내 팔각칠층석탑(보물 제1119호)이 있다.[12] 낙선재(樂善齊) 지역은 원래 창경궁에 소속되었었으나 지금은 창덕궁 경내에 있다.[12]

창경궁의 정전이고 명정전이고, 명정전의 출입문인 명정문은 중문이며, 궁궐의 정문은 홍화문이다.[12] 홍화문의 좌우에는 익각이 있고, 홍화문을 들어서면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옥천에 옥천교가 있다.[12] 이 다리를 지나면 바로 명정문이 나오는데, 창경궁은 경복궁의 흥례문, 창덕궁의 진선문에 해당하는 문이 없어 홍화문에서 바로 명정문으로 들어가도록 구성된 점에서 다른 규모에 비해 규모가 작고 격식이 떨어진다.[12] 창경궁의 중심 건물인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은 중심축에 맞추어 놓여 있으나, 지형을 살려 건물을 배치하였기 때문에 반듯하게 좌우 대칭을 이루지 않고, 주변 행각도 이에 맞추어 약간 틀어져 있다.[12]

현재 창덕궁 경내에 위치한  낙선재(樂善齊) 는 잊을 수 없는 공간이다. 김기동 교수님은 여름방학 고소설 강좌 과제로 필사본 고소설 한 편씩을 지정해 주고 그 줄거리를 요약해 제출하게 했다. 그곳에는 궁녀였던 할머니 한 분이 계셔서  연신 흘려쓴 한글 글자 독음을 배워야 읽을 수 있었다. 물론 과제물 미제출자의 학점은 0점 처리되어 재수강의 고충을 당했다.

대학 졸업장 갖기 위해 편입한 여학생 중에는 낙선재에 와서 하는 일이라곤 바로 옆의 동물원에 가서 호랑이를 구경하거나 원숭이 똥구녕을 살피는 일로 소일하는 날이 많았다. 1960년대 후반에는 서울 소재 대학엔 편입생들이 많았다. 학생수가 정원의 4~5배는 예사고 취업이 용이한 공대는 그 2배는 되었다. 광활한 부지를 확보하고 현대식 건물로 덮인 캠퍼스를 보노라면 그분들의 공로에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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