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작자의 회갑해에 쓰여졌고, 나머지 세 편은 1801년(순조 1)∼1805(순조 5) 사이에 쓰여졌다.

필사본 14종이 있으며, 국문본·한문본·국한문혼용본 등이 있다. 사본에 따라 ‘한듕록’·‘한듕만록’·‘읍혈록’ 등의 이칭이 있다. 4편의 종합본은 「한듕록」·「한듕만록」의 두 계통뿐이다.

제1편에서 혜경궁은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에서부터 이듬해 입궁하여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중도에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하여 의식적으로 사건의 핵심을 회피한다. 그 대신 자신의 외로운 모습과 장례 후 시아버지 영조와 처음 만나는 극적인 장면의 이야기로 비약한다.

후반부에는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아버지·삼촌·동생들이 화를 입게 된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 편은 화성행궁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만난 지친들의 이야기로 끝난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 1년 5월 29일 동생 홍낙임(洪樂任)이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뒤에 쓴 글이다. 제2편에서 혜경궁은 슬픔을 억누르고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야기를 서두로,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한 까닭은 이 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또 친정 멸문의 치명타가 된 홍인한사건(洪麟漢事件)의 배후에는 홍국영(洪國榮)의 개인적인 원한풀이가 보태졌다고 하면서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가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는 날을 꼭 생전에 볼 수 있도록 하늘에 축원하며 끝맺는다.

제3편은 제2편의 이듬해에 쓰여진 것으로 주제 역시 동일하다. 혜경궁은 하늘에 빌던 소극성에서 벗어나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정조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성이 지극하였는지, 또 말년에는 외가에 대하여 많이 뉘우치고 갑자년에는 왕년에 외가에 내렸던 처분을 풀어주고 언약하였다는 이야기를 기술하며, 그 증거로 생전에 정조와 주고받은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마지막 제4편에서는 사도세자가 당한 참변의 진상을 폭로한다. ‘을축 4월 일’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을축년은 순조 5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돌아간 해이다. “임술년에 초잡아 두었으나 미처 뵈지 못하였더니 조상의 어떤 일을 자손이 모르는 것이 망극한 일”이라는 서문이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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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 - 나무위키

빈청에서 혜경궁의 시호를 다시 의논하여 올리다빈청(賓廳)에서 혜경궁의 시호를 다시 의논하여 상계(上啓, 조정이나 윗 사람에게 여쭈어 봄)하였는데, 시호는 헌(獻) 【총명(聰明)하고 예지(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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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는 사도세자의 정실이며 정조의 친어머니다. 그 외의 자녀로는 의소세손, 청연공주, 청선공주가 있다. 혜경궁(惠慶宮)은 아들 정조에게서 받은 궁호다.

영안위 홍주원의 5대손으로 홍주원의 부인이 선조의 딸 정명공주였기 때문에 선조의 외6대손이기도 하다.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로 1744년(영조 20년), 10살의 어린 나이[3]세자빈에 책봉되어, 동갑내기 사도세자혼인하였다. 명목상 간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초간택 때 이미 대왕대비인 인원왕후, 왕비인 정성왕후 등 높으신 분들을 뵙고 궁인들이 홍씨가 괴로워할 정도로 그녀를 안으려 다툰 것을 보아 간택 전에 이미 그녀는 세자빈으로 낙점이 되었던 듯하다. 이 때 그녀의 조상인 정명공주가 사용하던 물품들이 혼수로 들어와 기이하게 여겼다.[4][5] 특히 병풍에는 홍봉한이 꾼 그녀의 특별한 태몽에 나타난 흑룡과 똑같은 흑룡이 수놓아져 있었다고 한다.

1814년(순조 14년), 정적이었던 정순왕후가 죽은 뒤, 차례차례 혜경궁 홍씨의 친정이 신원, 복권되었다. 또한 홍봉한죽음 직전에 그를 비난했던 정이환, 이심도 등의 처벌을 순조에게 요구한다. 이심도는 결국 사형에 처해진다.

혜경궁 홍씨는 전에 1805년(순조 5년)부터 담현증(痰昡症)을 앓아 오래 병석에 누웠는데, 점차 병세가 깊어져 1815년(순조 15년) 12월 15일, 81세의 일기를 끝으로 창경궁 경춘전에서 눈을 감았는데 손자 순조가 '헌경(獻敬)'이라는 시호를 올렸다.[27][28]

빈청에서 혜경궁의 시호를 다시 의논하여 올리다

빈청(賓廳)에서 혜경궁의 시호를 다시 의논하여 상계(上啓, 조정이나 윗 사람에게 여쭈어 봄)하였는데,

시호는 헌(獻) 【총명(聰明)하고 예지(睿知)함.】 경(敬) 【밤낮으로 경계(儆戒)함.】 이다.

- 《순조실록》 18권, 순조 15년(1815년, 청 가경(嘉慶) 20년) 12월 25일 (을해) 2번째기사

* 아들 정조 정조(正祖, 1752년 10월 28일 ~ 1800년 8월 18일) 사후 15년을 더 살았다.

* 정조는 건릉(사도세자릉) 옆 화성에서 모친 모시고 사는 게 꿈이었건만

정조(正祖, 1752년 10월 28일 ~ 1800년 8월 18일, 재위: 1776년 4월 27일(음력 3월 10일)[1] ~ 1800년 8월 18일(음력 6월 28일)[2])는 조선 제22대 이며, 대한제국추존 황제이다. (李), 는 산 또는 성(祘)[주해 1], 본관전주(全州), 는 형운(亨運)[3], 는 홍재(弘齋)다.[4]

 

https://www.youtube.com/watch?v=POr6rnzbaCo

 

 

https://www.youtube.com/watch?v=POr6rnzbaCo

 

 

https://www.youtube.com/watch?v=Yd2Y81qcr_I

 

 

https://www.youtube.com/watch?v=5ZeVfjg6vt8

 

 

https://www.youtube.com/watch?v=OCC1iB2d2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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