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문무대왕릉

갑오년 새아침이 밝았다

1월1일 전후 그처럼 야단법석을 떨던 갑오년 청말띠 타령은 정작 갑오년 새아침이 밝았으나 언급하는 언론이 없다. 간지로 년을 밝히는 것은 태음력에 근거하므로 2014년 1월31일이 갑오년 설날인 정월초하루가 된다. 따라서 사실과 무관한 1개월 전의 갑오년 타령은 말짱 헛수작이요 넌센스인 셈이다.

설날의 ‘설’은 낯설다, 친숙하지 않다, 새롭다는 의미로 추정된다. 신정, 구정 등의 어휘를 사용하는 것은 일제침탈기에 일제가 민족혼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제정한 것을 인정하는 꼴이어서 나는 반대한다. 다만 갑오년 설날은 오늘 하루만을 지칭함을 밝혀둔다.

양력 1월1일에 차례를 모시는 것은 각 가정의 형편에 따라 결정할 일이지만 민속명절인 설날은 아니다. 1965년 ‘한국의 대일 청구권문제’에 대하여 ‘무상ㆍ유상을 포함하여 5억 달러의 대한민국경제협력’을 일본이 실행했다고 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남의 나라가 영유하고 있는 땅을 죽도라는 이름을 붙여 자기네 땅이라고 청소년용 교과서에까지 실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일제가 신정이라 명명한 양력 1월1일은 다만 새해 첫날이지 설날은 아니다.

현재 우경화에 빠진 일본의 정치지도자에 대해 덧붙이면 남의 나라를 36년간이나 침탈하고도 사과는 커녕 이런 망언과 망동을 쏟아내다니 세계적 지도자로서의 자격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런 날강도가 따로 없다. 

태음력에 관해서는 아래 포스터에서 정리했으므로 중복을 피한다.

 

간지와 시간  (0)

2012/12/15

사주팔자  (0)

2012/12/15

10간12지  (0)

2012/12/15

天干地支  (1)

독도가 한국땅인 이유  (2)

2012/08/29

[참고]

한일국교정상화협상

-21세기 정치학대사전(2010)

1961년 5월에 군사 쿠데타에 의해 박정희 정권이 탄생하자 한국은 한일관계의 개선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동년 10월 12일에 도쿄에서 김종필 중앙 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무장관의 회담에서 이른바 ‘김종필ㆍ大平正芳 메모’가 교환되어 최대의 현안이었던 ‘한국의 대일 청구권문제’에 대해서도 ‘무상ㆍ유상을 포함하여 5억 달러의 대한민국경제협력’을 일본이 실행하는 선에서 양방이 타협하여 협상이 크게 진전되었다. 그러나 그 후의 한일협상에 대한 반대운동의 격화 등 양측의 국내정세에 의해 협상이 지체되어 1965년에 들어서 간신히 한일 양국은 국교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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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

임진년 새아침이 밝았다.

2012년 1월이 다가오면서 언론까지 앞장서서 흑룡을 찾고

임진년 타령을 했지만 실상 임진년은 음력 년호이므로

음력 1월1일이 되어야 호칭하는 것이 옳다.

한자문화권인 한국인의 고유명절로 추석과 함께 설날을 꼽지만

아직도 “구정, 음력설” 등을 말하는 이들이 있어 아쉽기 그지없다.

주지하다시피 “신정, 구정”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한국인의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양력설’을

신설한 데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양력 1월1일은설날이 아닌 그저새해 첫날일 뿐이고

음력 1월1일을 호칭하는 말은 오직 ‘설날’밖에 없다.

마포에서 차례를 모신 후,

형님 내외분과 함께 홀로 되신 팔순의 안양 큰 자형과

일흔이 지나신 논현동 누님 내외분을 찾아뵈었다.

논현동 누님은 변호사로 일하는 장남 범식이 성북구 국회의원

한나라당 예비후보로 등록했다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포털 이전과정에서 사진이 잘렸으나 사진위를 클릭하면 원본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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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스티브 잡스는 2005년 6월12일 스탠포드대학교에서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했다.

15분짜리 이 연설에는 잡스가 가슴 속에 품고 살아야 했던 사연과 철학이 담겨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 명연설을 정독을 위해 영한 대역으로 정리해 보았다.

국역 주소창

http://www.facebook.com/notes/gwangpali/seutibeu-jabseuui-seutaenpodeu-jol-eobsig-yeonseol/192037510817423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저는 오늘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 중 하나를 졸업하는 여러분과 함께 이 자리에 선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저는 대학을 나온 적이 없습니다.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저로서는 이 자리가 대학 졸업에 가장 가깝습니다.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저는 오늘 여러분께 제 인생의 세 가지 이야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별 것 아닙니다. 그냥 세 가지 이야기입니다.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첫 번째 이야기는 점의 연결에 관한 것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six months,

저는 리드 칼리지를 6개월 다니고는 그만뒀습니다.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18개월 가량 청강생으로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바로 그만둔 것은 아닙니다.
So why did I drop out?
제가 왜 중퇴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얘기하자면 제가 태어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저의 생모는 젊은 미혼의 대학원생이었는데, 저를 입양 보내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대졸자 가정에 보내고 싶은 마음이 매우 강했던 것 같습니다.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변호사와 그의 부인이 제가 태어나면 바로 입양하려고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그런데 제가 태어나는 순간 이들이 딸을 갖고 싶다며 마음을 바꿨습니다.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그래서 대기자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은 저의 부모님한테 한밤중에 전화가 갔습니다.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예상과 달리 아들이라서 그런데요, 입양하실래요?”
They said: “Of course.”
그들은 “물론이죠”라고 대답했습니다.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생모는 저의 어머니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저의 아버지는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그래서 막판에 입양동의서에 서명하길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생모는 수개월 후 저의 부모님이 아기가 크면 대학에 보내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제 인생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17년 후 저는 정말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그런데 바보 같이 스탠포드 만큼이나 학비가 비싼 대학을 선택했습니다.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이 바람에 노동자 신분인 저의 부모님은 저축해둔 돈을 탈탈 털어 제 학비를 대야 했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6개월 다녀보니 저는 계속 다닐 만한 가치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저는 나중에 무엇을 하고 살지, 대학을 나오면 그게 무슨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저는 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을 몽땅 쓰고 있었습니다.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그래서 중퇴하기로 결심했고 아무 문제 없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그 당시에는 상당히 불안했지만 뒤돌아보면 제가 내린 최고의 결정 중 하나입니다.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중퇴한 순간부터는 재미 없는 필수과목을 듣지 않아도 됐고,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훨씬 더 흥미 있는 과목들을 청강하기 시작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낭만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저한테는 잘 곳이 없없습니다.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저는 친구들 방 바닥에서 잤습니다.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cent deposits to buy food with,
먹을 것을 사기 위해 콜라병을 모아 한 병에 5센트씩 받고 팔았습니다.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그 당시 헤어 크리쉬나 템플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괜찮은 식사를 제공했는데
그걸 얻어먹으려고 일요일 밤마다 시내를 가로질러 7마일이나 걸어가곤 했습니다.
I loved it.
그게 좋았습니다.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제가 호기심과 직관대로 하는 바람에 고생도 했지만 대부분 나중에 소중한 자산이 됐습니다.
Let me give you one example: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그 당시 리드 칼리지에는 아마 국내 최고의 서체학 강좌가 개설돼 있었습니다.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캠퍼스 곳곳에 붙이는 포스터랄지 모든 서랍에 붙이는 라벨에는 손으로 예쁘게 글씨를 썼습니다.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저는 중퇴를 했기 때문에 정규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었죠.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그래서 어떻게 글씨를 쓰는지 배우려고 서체학 강의를 듣기로 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저는 세리프가 뭔지 배웠고, 산 세리프 서체도 배웠습니다.
글자 조합에 따라 자간을 어떻게 조정하는지도 배웠고,
어떻게 해야 멋진 서체가 멋지게 나오는지도 배웠습니다.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그게 참 아름답고, 역사가 있고, 예술적으로 오묘해서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and I found it fascinating.
저는 여기에 매료됐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이런 걸 배워서 나중에 실제로 활용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안했습니다.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그런데 10년 후 우리가 첫 번째 매킨토시 컴퓨터를 설계할 때 뜬금없이 그게 필요해졌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우리는 서체에 관해 배운 걸 맥 설계에 반영했습니다.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이렇게 해서 맥은 서체가 아름다운 최초의 컴퓨터가 됐습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제가 대학에서 그 강좌를 듣지 않았다면
맥은 다양한 서체, 적절한 폰트 간격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윈도는 맥을 베낀 것이기 때문에 어떤 퍼스널 컴퓨터도 이런 것을 갖지 못할 뻔했습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제가 중퇴하지 않았다면 서체학 강의를 듣지 않았을 테고,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퍼스널 컴퓨터는 현재와 같은 아름다운 서체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제가 대학 다닐 때는 앞을 내다보고 점을 연결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 후에 뒤돌아보면 매우 매우 명확합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다시 말씀드리자면 여러분은 앞을 내다보고 점을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나중에 회고하면서 연결할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각각의 점이 미래에 어떻게든 연결될 거라고 믿어야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은 뭔가를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소화기관이든 운명이든 인생이든 업보든 뭐든지 믿어야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저는 이런 생각을 버린 적이 없었고 그게 제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저의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일찌감치 무얼 사랑해야 할지 깨달았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저는 스무살 때 워즈(스티브 워즈니악)와 함께 부모님 차고에서 애플을 창업했습니다.
We worked hard,
우리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dollars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두 사람이 차고에서 일하는 회사에 불과했던 애플은
10년 후 직원 4천명을 거느린 20억 달러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우리는 제가 서른살 되기 한 해 전에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내놓았습니다.
And then I got fired.
그 이듬해 저는 쫓겨났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어떻게 자기가 설립한 회사에서 쫓겨날 수 있습니까?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글쎄요. 애플이 성장하자 우리는 저와 함께 회사를 운영할 아주 재능있다고 생각한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 남짓은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러나 미래에 대한 비전은 엇갈리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는 추락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이사회는 그 사람 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이 서른에 저는 쫓겨났습니다.
And very publicly out.
아주 공개적으로 쫓겨났죠.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제가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것을 잃었습니다. 절망적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몇 달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더군요.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창업가정신을 잃어버렸다고 느꼈습니다. 저한테 바통이 전해졌는데 제가 떨어뜨렸다고 생각했습니다.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와 밥 노이스를 만나 이렇게 엉망으로 망친데 대해 사과하려고 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제가 실패했다는 것은 다 알려졌고 저는 도망칠까 생각도 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그러나 제 마음 속에서 뭔가가 천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전에 하던 일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애플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 데도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쫓겨났지만 저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그래서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그때는 몰랐지만,
결과적으로 애플에서 쫓겨난 게 저한테는 최상의 일이었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성공에 걸맞게 해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었고 모든 게 덜 확실했습니다.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그래서 제 인생의 가장 창의적인 시기 중 하나로 편하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그 후 저는 넥스트라는 회사를 창업했고 픽사란 이름의 회사도 운영했습니다.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그리고 놀란 만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그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픽사는 세계 최초의 극장배급용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만들어냈습니다.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입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rned to Apple,
상황이 놀랍게 바뀌어 애플이 넥스트를 인수했고 저는 애플로 돌아왔습니다.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그리고 우리가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은 애플이 지금 부활하는데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그리고 로린과 저는 멋진 가정을 꾸렸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이 가운데 어떤 것도 제가 애플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참으로 끔찍한 약인데 제 생각으로는 환자한테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살다 보면 벽돌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Don’t lose faith.
신념을 잃지 마십시오.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제가 계속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제가 하는 일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여러분도 사랑할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일일 수도 있고 여러분 애인일 수도 있습니다.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여러분의 일은 여러분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여러분이 대단한 일이라고 믿는 것을 해야만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대단한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아직 그걸 발견하지 못하셨다면 계속 찾으십시오.
Don’t settle.
안주해서는 안됩니다.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마음에 관한 일이 다 그렇듯이 그걸 발견해내면 여러분은 알게 됩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그리고 좋은 관계라는 게 그렇듯이 그것은 해가 거듭할수록 점점 좋아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찾아낼 때까지 계속 찾으십시오. 안주해서는 안됩니다.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저의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열일곱살 때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라. 그러면 언젠가는 제대로 될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 이 말은 저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그날 이래 33년 동안 저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저 자신한테 물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해도 오늘 하려고 했던 일을 하겠느냐?”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이에 대한 대답이 여러 날 잇따라 “노(No)”일 때는 뭔가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제 경험으로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내가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가장 큰 도움이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왜냐하면 외부의 기대, 온갖 자존심, 당황하거나 실패할까 두려워하는 마음,
이런 모든 것은 죽음 앞에서 떨어져 나가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게 됩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뭔가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이미 발가벗겨졌습니다. 마음이 내키는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쯤 전에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오전 7시30분에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췌장에 종양이 또렷하게 보이더군요.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저는 췌장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치료할 수 없는 암의 일종이 거의 확실하다면서
3개월 내지 6개월밖에 못산다고 저한테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의사는 집에 가서 일을 정리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죽을 준비를 하라는 말을 의사들은 이런 식으로 하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앞으로 10년 동안 하려고 했던 모든 것을 애들한테 수개월 안에 다 말하라는 얘기입니다.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모든 것을 정리해 가족들을 최대한 편하게 해주라는 얘기입니다.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유언을 하라는 얘기입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하루 종일 진단을 받았고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그날 저녁 늦게 조직 절개를 했습니다.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의사들은 제 목으로 내시경을 넣어 위를 거쳐 장까지 밀어넣었습니다.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주사바늘을 췌장까지 집어넣어 암에서 조직을 약간 떼냈습니다.
I was sedated,
저는 진정제를 맞은 상태였는데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옆에 있던 아내가 그러더군요. 의사들이 조직을 현미경으로 살펴보더니 큰소리로 말하더랍니다.
수술로 치료할 수 있는 매우 드문 종류의 췌장암이라고.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건강합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이때가 제가 죽음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때입니다.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앞으로 수십년 동안 이런 일이 없기를 저는 희망합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암을 이겨냈기에 저는 죽음에 대해 좀더 확신을 갖고 여러분한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아무도 죽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천당에 가길 원하는 사람도 천당에 가기 위해 죽기를 바라진 않습니다.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죽음은 우리 모두가 맞아야 하는 종착지입니다.
No one has ever escaped it.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And that is as it should be,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왜냐하면 죽음은 삶에 있어 최고의 발명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It is Life’s change agent.
죽음은 삶을 바꾸는 대리인입니다.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은 낡은 것을 치워 새로운 것에 길을 열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 이 순간 새로운 것은 여러분이지만 머잖아 여러분도 낡은 것이 되고 치워질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이렇게 극적으로 말씀드려 미안하지만 그게 엄연한 진실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한테 주어진 시간은 제한돼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의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그건 다른 사람이 생각한 대로 사는 것입니다.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다른 사람들의 시끄러운 의견으로 여러분 내부의 소리가 묻히지 않게 하십시오.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있게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십시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여러분이 진짜 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나머지 것들은 모두 부차적입니다.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렸을 때 “지구 전체 카탈로그(Whole Earth Catalog)”라는 멋진 책이 있었습니다.
우리 세대한테는 바이블 같은 책 중 하나였죠.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이곳 멘로파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스티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썼습니다.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이 사람은 시적인 솜씨로 책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This was in the late 1960′s,
그때가 60년대 후반이었는데,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퍼스널 컴퓨터나 데스크톱 출판이 나오기 전이라서 타자기로 치고 가위로 자르고 즉석 카메라로 찍어야 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구글이 등장하기 35년 전에 페이퍼백 형태로 구글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죠.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이상적인 책이었는데 방법과 개념 정리가 잘돼 있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티어트와 그의 팀은 ‘지구 전체 카탈로그’를 여러 판 찍었습니다.
작업이 다 끝났을 때 최종판을 냈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게 1970년대 중반인데 제가 여러분 나이쯤 됐을 때였습니다.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습니다.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여러분이 그 길을 걸었더라면 차가 지나갈 때 얻어탔을 법한 그런 길입니다.
Beneath it were the words:
사진 밑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이것이 그들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픈 상태로 살아라. 어리숙하게 살아라.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저는 항상 이렇게 되고 싶었습니다.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이제 졸업하고 새로 시작하는 여러분도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픈 상태로 살아라. 어리숙하게 살아라.
Thank you all very much.
대단히 감사합니다.
[스티브 잡스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 동영상]http://goo.gl/v2UYq
[스티브 잡스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 원문]http://goo.gl/9aBG
[아래 'Whole Earth Catalog' 뒷면 표지 사진]http://goo.gl/Rr4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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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본 고소설 읽기의 어려움

1960년대 후반 동국대 국문과를 다녔던 분들이라면 한 해의 여름방학은 창경궁 규장각에서 보내야 했었다.

고소설 연구의 권위자이셨던 시원(柿園) 김기동(金起東) 선생님의 고소설 작품의 줄거리 정리 과제물 때문이었다.

서른 살 안팎의 나이에 편입한 미혼의 한 여학생은 규장각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동물원* 철책에 붙어서서

원숭이들의 애무를 감상하거나 빈 입을 저작하며 먼 데 하늘을 바라보는 낙타에 넋을 빼앗긴 시간이 더 많았다.

나는 그 여학생이 동물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 붓글씨로 필사한 고소설을 한 줄도 읽을 수

없는 난감함 때문에 철책 앞에서 무료한 시간을 달랜 것으로 짐작한다.

궁인들이 필사한 고소설은 고대 불교 경전처럼 단아하여 아름답기는 했으나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해독이

거의 불가능했다. 현대국어만 읽어온, 활자 표기에만 익숙한 학생들에게 필사본 국문 고소설은 아름답긴 하지만

그저 해괴한 문자일 뿐이었다. 문장부호 하나 없이 한 줄을 시작하면 그 줄이 끝날 때까지 연속으로 달아 쓴데다

행아래 ‘아(ㆍ)’자까지 섞어 놓으니 그것이 어떤 음운의 표기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다행히 규장각에는 흰 머리를 곱게 빗질하여 비녀를 꽂고 흰 모시 한복 차림의 상궁 한 분이 계셔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두점을 찍어 보지만 문맥이 통하지 않던 게발자국 새발자국을 줄줄이 읽어 주셨다. 한창 나이에

노안(老眼)을 당해내지 못하는 내 눈이 부끄러웠다.

그 때 우리는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에야 과제물을 제출할 수 있었고, 선생님께서는 미리 과제물 미제출자는

학점을 내지 않는다고 엄포를 놓으셨다.

혹자는 선생님께서 학생들의 과제물을 가문소설의 경개 정리에 이용하셨으리라 말하지만 나는 수긍하지 않는다.

문맥도 통하지 않고 제출자조차 무슨 말을 썼는지 알 수 없는 과제물을 자료로 활용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명시 명구를 우리말로 적어 놓았다 하더라도 원작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학생들에게는

돼지에게 진주목걸이일 뿐이다. 게다가 필사자가 유사하거나 엉뚱한 음절을 적어 놓거나 자음접변되는

단어를 소리나는 대로 표기한 경우에 현대어 표기로 바꾸고 보면 실소를 금하기 어려웠다. 양반들이 삽입을

주문한 한시구가 광대들의 입말(口語)에서 엉뚱하게 변개됨은 필사본은 차치하고서라도 목판본이나

활자본 작품에서도 흔히 목도된다.

국문본 고소설 읽기의 어려움은 일차로 띄어쓰기가 안 된 데다가 연철 혼철에 생소한 한자어의 남용, 명시문의

독음 돌출 등을 들 수 있다. 이 책에 수록한 <퇴별가>에서 띄어쓰기와 한자, 문장부호를 제외하고 보면 짐작이

간다. 국문본 고소설의 훌륭한 독자라면 표기를 무시하고, 문자를 소리로 바꾸어 이해하는 훈련이 절실히

요청된다.

필자는 이미 대학 시절 시원 선생님의 연령을 훌쩍 넘어섰지만 선생님의 열정에 못 미침을 부끄러워한다.

강의실에서 강독할 수 있는 시간이 극히 제한적이어서 고소설 작품을 골고루 맛보기 위해서는 개인의 각고의

노력이 요청된다. 선생님과 내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에 대한 참회의 심정으로 원문 표기를 정리하고, 제 자리

에서 직해가 가능하도록 괄호를 사용하여 우리말이나 한자를 적어 이 책을 상재한다.

갑신년 동짓날

編著者 적음

*동물원이 과천으로 이전하기 전에는 이 창경궁 안에 있었는데, 당시에는 창경궁도

‘창경원’이라 하여 동물원을 연상시켰다. 이것은 내가 총독부시기의 일본인들과

그 당시 한국의 집권층들을 용서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 중의 하나이다.

어떻게 남의 나라 궁궐을 동물원으로 만들고 벚꽃으로 언덕을 덮어

꽃이 만개한 봄날이면 시민들을 불러모아

밤에도 궁궐을 유린시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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