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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타니파타(Sutta-nipata) – 디지털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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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타니파타(Sutta-nipata)  목차

제1장 사품(蛇品)

1.뱀 1~17

2. 다니야 18~34

3. 무소의 뿔 35 ~75

4. 밭을 가는 바아라드바아자 76~89

6. 파멸 90~115

7. 천한 사람 116~142

8. 자비 143~152

9. 설산에 거주하는자 153~180

10. 아알라바카 야차(夜叉) 181~

11. 육체에 대한 가르침 193~206

12. 성자 207~221

 

제2장 소품(小品)

1. 보물 222~238

2. 비린 것  239~252

3. 부끄러움  253~257

4. 위 없는 행복  258~269

5. 수우칠로오마 야차(夜叉) 270~273

6. 이치에 맞는 행복 274~283

7. 바라문에게 어울리는 일 284~ 315

8. 배(船) 316~323

9. 어떠한 도덕(道德) 324~330

10. 정진(精進) 331~334

11. 라훌라 335~343

12. 방기이사 344~358

13. 올바른 편력(遍歷) 359~375

14. 담미카  376~404

 

제3장 대품(大品)

1. 출가(出家) 405~424

2. 힘써 닦는 일 425~449

3. 훌륭하게 말해진 것 450~486

5. 마아가  487~510

6. 사비야  511~548

7. 세에라 549~593

9. 바아셋타 594~677

10. 코오카알리야  658~678

11. 나아라카 679~723

12. 두 가지 관찰 724~765

 

제4장 8편의 시

1. 욕망(慾望)  766~771

2. 동굴(洞窟) 772~779

3. 분노(憤怒)  780~787

4. 청정(淸淨) 788~895

5. 으뜸가는 것  796~803

6. 늙음  804~813

7. 팃사 멧테야  814~823

8. 파수우라  824~834

9. 마아간디야  835~847

10. 죽기 전에  848~861

11. 투쟁(鬪爭) 862~877

12. 잇닿은 응답 -소편(小篇)  878~894

13. 잇닿은 응답 -장편(長篇)  895~814

14. 신속(迅速)  915~ 934

15. 몽둥이를 드는 일  935~954

16. 사아리풋타  955~975

 

제5장 피안

1 서(序)  976~1031

2. 학생 아지타의 질문  1032~

3. 학생 팃사 멧테야의 질문  1040~

4. 학생 푼나카의 질문  1043~

5. 학생 멧타구우의 질문  1049~

6. 학생 도오타카의 질문  1061~

7. 학생 우파시이바의 질문  1069~

8. 학생 난다의 질문  1077~

9. 학생 헤마카의 질문 1084~

10. 학생 토오테야의 질문  1088~

11. 학생 캄파의 질문  1092~

12. 학생 자투칸닌의 질문 1096~

13. 학생 바드라우다의 질문  1101~

14. 학생 우다야의 질문 1105~

15. 학생 포오사아라의 질문  1112~

16. 학생 모오가라아자의 질문  1116~

17. 학생 핑기야의 질문

18. 열 여섯 학생들의 질문에 대한 결론

Categories경전Tagssuttanipata, 숫타니파타

 

숫타니파타(Sutta-nipata)

<숫타니파타>의 숫타는 ‘경(經)’, ‘니파타’는 ‘모음’이라는 뜻이므로 우리말로는 ‘경의 모음’ 즉 경집(經集)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은 주로 길고 짧은 시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직 팔리어대장경에만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경전 중에서도 가장 먼저 성립되었으므로 인간적인 모습의 부처님과 초기의 불교형태를 아는데 중요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보통 경이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딱딱하고 어려운 느낌을 갖게되고 현대적인 감각과는 동떨어진 인상을 받게 되지만, 숫타니파타는 첨단과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그 귀절 하나하나가 그대로 와닿는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우기 불교의 전문적인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불교의 진수를 문학적으로 드러내보이는 것이 마치 부처님 곁에서 말씀을 듣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이 경은 모두 5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천여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제4장은 한역대장경에 <의족경(義足經)>이라는 이름으로 한역되었습니다.

제1장은 수행자의 모습을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하여 <사경(蛇經)>이라고도 합니다. 사경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는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제2장에는 부처님께서 라훌라에게 ‘부처님의 아들이라 해서 함께 있는 다른 비구들을 가볍게 보거나 교만한 마음을 내어서는 안된다’고 간곡히 타이르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변에서 늘상 접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간명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지혜로운 해답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는 것이 바 로 <숫타니파타>입니다. 특히 <숫타니파타>는 원시불교 성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어서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순수하고 소박한 불교사상과 최초기 교단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숫타니파타

제1장 사품(蛇品)

1.뱀

(1) 뱀의 독이 몸에 퍼지는 것을 약으로 다스리듯, 치미 는 화를 삭이는 수행자(修行者)는, 이 세상(此岸) 도 저 세상(彼岸)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 물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2) 연못에 핀 연꽃을 물 속에 들어가 꺾듯이, 애욕을 말 끔히 끊어 버린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3) 넘쳐 흐르는 애착의 물줄기를 남김 없이 말려 버린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 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4) 거센 흐름이 연약한 갈대의 뚝을 무너뜨리듯이, 교 만한 마음을 남김 없이 없애 버린 수행자는, 이 세 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5) 무화과 나무 숲속에서 꽃을 찾아도 얻을 수 없듯이, 모든 존재를 항상 있는 것이라고 보지 않은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 은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6) 안으로 성냄이 없고, 밖으로는 세상의 영고 성쇠(榮枯盛衰)를 초월한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7) 생각(想念)을 불살라 남김이 없고, 마음이 잘 다듬 어진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8) 달려갈지라도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고, 망상 (妄想)을 아주 초월한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 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9) 달려갈지라도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고, `이 세상 모든 것은 허망하다’고 아는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10) 달려갈지라도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고,`모든 것 은 허망하다’고 알아 탐욕에서 떠난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11) 달려갈지라도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고,`모든 것 은 허망하다’고 알아 애욕에서 떠난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12) 달려갈지라도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고,`모든 것 은 허망하다’고 알아 미움에서 떠난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 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13) 달려갈지라도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고,`모든 것 은 허망하다’고 알아 헤매임(迷妄)에서 떠난 수행 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14) 너쁜 버릇이 조금도 없고, 악이 뿌리를 뽑아 버린 수행자는,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15)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인연이 되는, 즉 번뇌에서 생기는 것을 조금도 갖지 않은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16) 사람을 생존에 얽어 매는 애착을 조금도 갖지 않은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 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17) 다섯 가지 덮임(5蓋)을 버리고, 번뇌 없고 의혹 을 넘어 괴로움이 없는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 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 는 것처럼.

2. 다니야

(18)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 나는 이미 밥도 지었고,우유도 짜 놓았습니다. 마히이 강변에서 처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내 움 막은 지붕이 덮이고 방에는 불이 켜졌습니다. 그러니 신(神)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19) 스승은 대답했다. “나는 성내지 않고 마음의 완강한 미혹(迷惑)을 벗어 버렸다. 마히이 강변에서 하룻밤을 쉬리라. 내 움막(곧 자신)은 드러나고 탐욕의 불은 꺼져 버렸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20)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모기나 쇠파리도 없고, 소들은 늪에 우거진 풀을 뜯어 먹으며, 비가 와도 견디어낼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21) 스승은 대답했다. “내 뗏목은 이미 잘 만들어져 있다. 거센 흐름에도 꺼떡없이 건너 벌써 피안(彼岸)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더 뗏목이 소용없노라.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 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22)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내 아내는 온순하고 음란하지 않습니다. 오래 함께 살아도 항상 내 마음에 듭니다. 그녀에게 그 어떤 나쁜 점이 있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신 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23) 스승은 대답했다. “내 마음은 내게 순종하고 해탈해 있다. 오랜 수양 으로 잘 다스려졌다. 내게는 그 어떤 나쁜 점도 있지 않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 소서.”

(24)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나는 놀지 않고 내 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아이들은 모두 다 건강합니다. 그들에게 그 어떤 나 쁜 점이 있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신이 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25) 스승은 대답했다. “나는 그 누구의 고용인도 아니다. 스스로 얻은 것 에 의해 온 누리를 걷노라. 남에게 고용될 이유가 없 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26)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아직 길들지 않은 송아지도 있고, 젖을 먹는 어린 소도 있습니다. 새끼 밴 어미소도 있고, 발정한 암 소도 있습니다. 그리고 암소의 짝인 황소도 있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27) 스승은 대답했다. “아직 길들지 않은 어린 소도 없고, 젖 먹는 송아지 도 없다. 새끼 밴 어미소도 없으며, 발정한 암소도 없다. 그리고 암소의 짝인 황소도 없다. 그러니 신 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28)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소를 매놓을 말뚝은 땅에 박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문자> 풀로 만든 새 밧줄은 잘 꼬여 있으니, 송아 지도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29) 스승은 대답했다. “황소처럼 고삐를 끊고, 코끼리처럼 냄새나는 넝쿨 을 짓밟았으니, 나는 다시 모태(母胎)에 들지는 않 을 것이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30) 갑자기 검은 구름이 비가 되어 뿌리더니 골짜기와 언덕에 물이 넘쳤다. 신께서 뿌리는 빗소리를 듣고 다니야는 이렇게 말했다.

(31) “우리는 거룩한 스승을 만나 얻은 바가 참으로 큽니다. 눈이 있는 이여, 우리는 당신께 귀의(歸依)하 오니 스승이 되어 주소서. 위대한 성자시여.

(32) 아내도 저도 순종하면서 행복한 분(부처님) 곁에서 청 정한 행(淸淨行)을 닦겠나이다. 그러면 생사가 없는 피안(彼岸)에 이르러 괴로움을 없애게 될 것입니다.”

(33) 악마 파아피만이 말했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사람이 집착하는 근본 은 바로 기쁨이다. 집착할 데가 없는 사람은 기뻐할 것도 없으리라.”

(34) 스승은 대답했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 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참으로 사람이 집착하는 근본은 근심이니라. 집착이 없는 이는 근심할 것도 없느니라.”

3. 무소의 뿔

(35) 모든 생물에 대해서 폭력을 쓰지 말고, 모든 생물을 그 어느 것이나 괴롭히지 말며, 또 자녀를 갖고자 하지도 말라. 하물며 친구이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6)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 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른다. 연정에서 우환이 생기는 것임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7) 친구를 동정한 나머지 마음이 얽매이면 손해를 본다. 가까이 사귀면 이런 우려가 있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8) 자식이나 아내에 대한 애착은 마치 가지가 무성한 대 나무가 서로 엉켜 있는 것과 같다. 죽순이 다른 것에 달라붙지 않도록,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9) 숲속에서 묶여 있지 않는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 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 가라.

(40) 동반자(同伴者)들 속에 끼면, 쉬거나 가거나 섰거나 또는 여행하는 데도 항상 간섭을 받게 된다. 남이 원치 않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41) 동반자들 속에 끼면 유희와 환락이 있다. 또 자녀들 에 대한 애정은 매우 크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싫지만, 무소의 뿔 처럼 혼자서 가라.

(42)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남을 해치려는 생각 없이 무 엇이나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온갖 고난을 이겨 두 려움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43) 출가한 몸으로 아직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 다. 또한 집에 사는 재가자(在家者)도 그러하다. 남의 자녀에게 집념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44) 잎이 떨어진 코오빌라아라 나무처럼,재가자의 표 적을 없애 버리고 집안의 굴레를 벗어나, 용기 있는 이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45) 만일 그대가 현명하고, 일에 협조하고,예의 바르고, 총명한 동반자를 얻는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걸어 가라.

(46) 그러나 만일 그대가 현명하고, 일에 협조하고, 예의 바르고, 총명한 동반자를 얻지 못하면 마치 왕이 정 한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47) 우리는 참으로 친구를 얻는 행복을 기린다. 자기보 다 뛰어나거나 동등한 친구와는 가까이 친해야 한 다. 이러한 친구를 만나지 못할 때에는 허물을 짓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48) 금공(金工)이 잘 만들어낸 두 개의 황금 팔찌가 한 팔에서 서로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무소의 뿔처 럼 혼자서 가라.

(49)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잔소리와 말다툼이 일어나니라. 장차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잘 살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0) 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곱고 감미로우며 즐겁게 하고, 또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마음을 산산이 흩으러 놓는다. 욕망의 대상에는 이러한 우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1) 이것이 내게는 재앙이고 종기이고 화이며, 병이고 화살이고 공포다. 이렇듯 모든 욕망의 대상에는 그 러한 두려움이 있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2) 추위와 더위,굶주림,갈증,바람, 그리고 뜨거운 햇볕과 쇠파리와 뱀,이러한 모든 것을 이겨 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3) 마치 어깨가 떡 벌어진 코끼리가 그 무리를 떠 나 마음대로 숲속을 거닐 듯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4) 모임(集會)을 즐기는 이에게는 잠시 동안의 해탈에 이를 겨를이 없다. 태양의 후예(부처님)가 한 말씀을 명심하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5) 서로 다투는 철학적 견해를 초월하고 깨달음에 이르 는 결론에 도달하여 도(道)를 얻은 사람은 `나는 지혜를 얻었으니, 이제는 남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다’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6) 탐내지 말고 속이지 말며, 갈망하지 말고 남의 덕을 가리지도 말며, 혼탁과 미혹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애착에서 벗어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7)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그릇되고 굽은 것에 사로잡힌 나쁜 벗을 멀리 하라. 탐욕에 빠져 게으른 사람에게 가까이 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8) 널리 배워 진리를 아는, 고매하고 총명한 친구와 사귀라. 온갖 이로운 일을 알고 의혹을 떠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9) 세상의 유희나 오락이나 쾌락에 만족하지 말고 관심 도 가지지 말라. 꾸밈없이 진실을 말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60) 처자도 부모도 재산도 곡식도, 친척이나 모든 욕망까지도 다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61) `이것은 집착이구나. 이곳에는 즐거움도 상쾌한 맛 도 적고 괴로움뿐이다. 이것은 고기를 낚는 낚시이다’ 라고 깨닫고, 현자(賢者)는 물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62) 물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는 것처럼, 또는 불이 다 탄 곳에는 다시 불붙지 않는 것처럼,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63) 우러러 보거나 헤매지 말고, 모든 감관(感官)을 막 아 마음을 지켜 번뇌가 일어나는 일없이, 번뇌의 불에 타지도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 가라.

(64) 잎이 저버린 파아리찻타 나무처럼, 재가자(在家者) 의 모든 표적을 버리고 출가하여 가사를 걸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 가라.

(65) 모든 맛에 탐착하지 말고, 욕구하거나 남을 양육하 지 말라. 문전마다 밥을 빌어 가정에 매이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66) 마음의 다섯 가지 덮개를 벗겨 버리고, 모든 수번뇌 (隨煩惱)를 잘라 버려 의지하지 않으며, 애욕의 허물을 끊어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67) 전에 경험했던 즐거움과 괴로움을 버리고, 또 쾌락과 우수를 버리고 맑은 고요와 안식을 얻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68) 최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 정진하고, 마음의 해이를 물리치고 행동하는 데에 게으르지 말며, 힘차게 활동하여 몸의 힘과 지혜의 힘을 갖추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69) 홀로 앉아 선정(禪定)을 버리지 말고, 모든 일에 늘 이치와 법도에 맞도록 행동하며, 살아 가는 데 있 어 우환을 똑똑히 알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70) 애착을 없애기 위해 게으르지 말고, 벙어리도 되지 말고,학식이 있고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理法)를 확 실히 알며 자제하고 노력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71)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72) 이빨이 억세어 뭇짐승의 왕이 된 사자가 다른 짐승 을 제압하듯이,종벽한 곳에 살기를 힘쓰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73) 자비와 고요와 동정과 해탈과 기쁨을 때에 따라 익히고, 모든 세간(世間)을 저버림이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74) 탐욕과 혐오와 헤매임을 버리고, 매듭을 끊어 목숨을 잃어도 두려워 말고, 물무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75)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벗을 사귀고 또한 남 에게 봉사한다. 오늘 당장의 이익을 생각지 않는 벗 은 보기 드물다. 자신의 이익만을 아는 사람은 추하 게 보인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4. 밭을 가는 바아라드바아자

(76)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때 거룩하신 스승(부처님)께서는 마가다나라 남산에 있는 <한포기 띠(芽)>라고 하는 바라문 촌에 계시었다. 그때 밭을 갈 고 있던 바라문 바아라드바아자는 씨를 뿌리는 데에 오백 자루의 괭이를 소에 메웠다. 스승께서는 오전 중에 속옷을 입고 바리때와 겉옷(重依)을 걸치고, 밭을 갈고 있는 바라문 바아라드바아자에게로 가셨다. 때 마침 그는 음식을 나누어 주고 있기에 스승은 한쪽에 가 서 계시었다.

바라문 바아라드바아자는 음식을 받기 위해 서 있는 스승을 보고 말했다. “사문(沙門 = 도를 닦는 사람)이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습니다. 사문이여, 당신도 밭을 가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갈고 뿌린 다음에 먹으십시오.”

스승은 대답하셨다.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갈고 뿌린 다음에 먹습니다.”

바라문이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 고오타마의 멍에나 호미,호미 날, 작대기나 소를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 고오타마는 어째서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 를 뿌립니다. 갈고 뿌린다음에 먹습니다’라고 하십 니까?”

이 때 밭을 갈던 바라문 바아라드바아자는 시(詩) 로써 스승에게 여쭈었다. “당신은 농부라고 자칭하시지만,우리는 밭 가는 것 을 본 일이 없습니다. 당신이 밭을 간다는 것을 우 리들이 알아 듣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77) 스승은 대답했다. “믿음은 종자요,고행은 비이며, 지혜는 내 멍에와 호미, 부끄러움은 괭잇자루, 의지는 잡아 메는 새끼, 생각은 내 호미날과 작대기입니다.

(78) 몸을 근신하고 말을 조심하며,음식을 절제하여 과 식하지 않습니다. 나는 진실을 김매는 것으로 삼고 있습니다. 유화(柔和)가 내 멍에를 떼어 놓습니다.

(79) 노력은 내 황소이어서 나를 안온의 경지로 실어다 줍니다. 물러남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 그곳에 이르면 근심 걱정이 없습니다.

(80) 이 밭갈이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고 단 이슬(甘露) 의 과보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이런 농사를 지으면, 온갖 고뇌에서 풀려 나게 됩니다.”

(81) 이 때 밭을 가는 바라문 바아라드바아자는 커다란 청동(靑銅)바리에 우유죽을 하나 가득 담아 스승에게 올렸다. “고오타마께서는 우유죽을 드십시오. 당신은 진실 로 밭가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당신 고오타마께서 는 단이슬의 과보를 가져다 주는 농사를 짓기 때문 입니다.” “시를 읊어 얻은 것을 나는 먹을 수 없습니다. 바라 문이여, 이것은 바르게 보는 사람들(눈을 뜬 사람들) 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시를 읊어 생긴 것을 눈을 뜬 사람들(諸佛)은 받지 않았습니다. 바라문이여, 법에 따르는 이것이 눈을 뜬 사람들의 생활 방법입니다.

(82) 완전한 사람인 큰 선인(大仙人), 번뇌의 더러움을 다 없애고, 나쁜 행위를 소멸해 버린 사람에게는 다 른 음식을 드리십시오.

그것은 필경 공덕을 바라는 이의 복밭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고오타마시여,이 우유죽을 저는 누구에게 드려야 합니까?”

“바라문이여,신, 악마, 범천(梵天)들이 있는 세계 에서 신,인간,사문,바라문을 포함한 뭇 중생 가운 데서 완전한 사람(如來)과 그의 제자를 빼놓고는, 아무도 이 우유죽을 먹고 소화시킬 사람은 없습니 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이 우유죽일랑 산 풀이 적은 곳에 버리십시오.”

그리하여 밭을 가는 바라문 바아라드바아자는 그 우유 죽을 생물이 없는 물속에 쏟아 버렸다. 그런데 그 우 유죽은 물속에 버려지자마자 부글부글 소리를 내면 서 많은 거품을 내뿜는 것이었다. 마치 온종일 뙤약볕 에 쪼여 뜨거워진 호미날을 물속에 넣을 때 부글부 글 소리를 내면서 많은 거품이 이는 것과 같았다. 이 때 바라문 바아라드바아자는 모골이 송연하여 두려워 떨면서 스승 곁에 다가섰다. 그리고 스승의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며 여쭈었다.

“놀라운 일입니다, 고오타마시여.놀라운 일입니다, 고오타마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이에게 길을 가리켜 주듯이, 혹은`눈이 있는 자는 빛(色)을 보리라’ 하여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 주듯이, 고오타마 당신 은 여러가지 방편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저는 고오타마 당신께 귀의하고, 진리와 도를 닦는 스 님들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저는 고오타마 곁에 출 가하여 완전한 계율(具足戒)을 받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밭을 가는 바라문 바아라드바아자는 부 처님 곁에 출가하여 완전한 계를 받았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이 바아라드바아자는 홀로 사람들을 멀리 하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마침내 더 없이 청정한 행의 궁극을( – 많은 선남자들은 바로 그것을 얻기 위해 집을 나와 집없는 상태가 된 것인데 -) 현세에서 스 스로 깨달아 증명하고 구현하며 살았다.`태어나는 일은 끝났다. 청정한 행은 이미 완성됐다. 할일을 다 마쳤다. 이제 또 다시 이런 생존을 받지는 않는 다’ 라고 깨달았다. 그리하여 바아라드바아자 장로는 성인(聖人)의 한 사람이 되었다.

5. 춘다

(83) 대장장이 아들 춘다가 말했다. “위대하고 지혜로운 성인,눈을 뜬 어른, 진리의 주 인,애착을 떠난 분,인류의 최상자(最上者), 뛰어 난 마부에게 저는 물어 보겠습니다. 세상에는 얼마 나 되는 수행자가 있습니까? 일러 주십시오.”

(84) 스승(부처님)은 대답했다. “춘다여, 네 가지 수행자가 있고, 다섯번째는 없느니라. 지금 그 물음에 답하리라. <도로써 이긴 이 (勝者)> <도를 말하는 이> <도에 사는 이> 그리고 <도를 더럽히는 자>이니라.”

(85) 대장장이 춘다는 말했다. “눈을 뜬 사람은 누구를 가리켜 <도로써 이긴 이>라 부르십니까?

그리고 <도를 생각하는 사람>은 어찌 하여 다른 이와 견줄 수 없습니까?

또 묻겠습니다 만 <도에 의해 산다>는 것을 설명해 주십시오.

그 리고 <도를 더럽히는 자>라는 것도 제게 말씀해 주 십시오.”

(86) “의혹을 넘어서고 고뇌를 떠나 열반을 즐기며, 탐욕 을 버리고 신(神)들을 포함한 세계를 이끄는 사람, 이런 사람을 <도로써 이긴 이>라고 눈을 뜬 사람들은 말한다.

(87) 이 세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으로 알고, 법을 설 하고 판별하는 사람, 의혹을 버리고 동요하지 않는 성인을 수행자들 중에서 둘째로 <도를 말하는 이> 라 부른다.

(88) 잘 설명된 법의 말씀인 도에 살아 스스로 억제하고, 깊이 생각해서 잘못된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을 수행자들 중에서 세째로 <도에 사는 사람>이라 부른다.

(89) 맹세한 계율을 잘 지키는 체하지만, 고집세고 가문을 더럽히며, 오만하고 거짓이 있으며, 자제력이 없고 말 많고 그러면서도 잘난 체하는 사람을 가리켜 <도 를 더럽히는 자>라고 한다.

(90) 학식이 있고 총명한 재가(在家)의 성스런 신도는`그 들 네 종류의 수행자는 다 이와 같다’고 알아, 그들 을 통찰하여 그와 같이 보더라도 그 신도의 믿음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는 어째서 더럽혀진 것과 더럽 혀지지 않은 것, 깨끗한 이와 깨끗하지 않은 자를 똑같이 볼 수 있을 것인가.”

6. 파멸

(91)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때 거룩하신 스승(부 처님)은 사아밧티이(舍衛城)의 제타 숲, 고독한 사 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는 장자의 동산(祗樹給孤獨園 = 祗園精舍)에 계시었다.

그 때 용모가 아름 다운 한 신이 밤중이 지났을 무렵, 제타 숲을 두루 비추면서 스승께 가까이 왔다. 그러더니 스승께 절 하고 한쪽에 서서 시로써 호소하는 것이었다.

“저희는 파멸하는 사람에 대해서 고오타마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파멸에 이르는 문은 어떤 것입니까? 스승께 그것을 묻고자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92) 스승은 대답했다. “번영하는 사람도 알아 보기 쉽고, 파멸도 알아 보기 쉽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번영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망한다.”

(93)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첫째 파멸입니다. 스승님, 둘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94) “나쁜 사람들을 사랑하고 착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 으며, 나쁜 사람이 하는 일을 즐기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95)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둘째 파멸입니다. 스승님, 세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96) “잠자는 버릇이 있고, 교제의 버릇이 있고, 분발해서 정진하지 않고 게으르며, 걸핏하면 화 잘 내는 것으로 이름난 사람이 있다.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97)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세째 파멸입니다. 스승님, 네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 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98) “자기는 풍족하게 살고 있으면서 늙어 쇠약한 부모는 돌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99)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네째 파멸입니다. 스승님, 다섯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00) “바라문이나 사문, 혹은 다른 걸식하는 이를 거짓 말로 속인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01)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다섯째 파멸입니다. 스승님, 여섯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02) “엄청나게 많은 재물과 황금과 먹을 것이 있는 사람 이 혼자서 맛있는 것을 먹는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 이다.”

(103)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여섯째 파멸입니다. 스승님, 일곱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 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04) “혈통을 뽐내고 재산과 가문을 자랑하면서 자기네 친 척을 멸시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05)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일곱째 파멸입니다. 스승님, 여덟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06) “여자에게 미치고 술과 도박에 빠져 버는 족족 잃어 버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07)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여덟째 파멸입니다. 스승님, 아홉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08) “자기 아내로 만족하지 않고, 매춘부와 놀아나고, 남의 아내와 어울린다.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09)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아홉째 파멸입니다. 스승님, 열번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10) “한창 때를 지난 남자가 틴발 열매처럼 불룩한 유방을 가진 젊은 여인을 유인하여 그녀를 질투하는 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11)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열번째 파멸입니다. 스승님, 열 한번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12) “술과 고기 맛에 빠져 재물을 헤프게 쓰는 여자나 남자에게,집안 일의 실권을 맡긴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13)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열 한번 째 파멸입니다. 스승님, 열 두번째 것을 말씀해 주 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14) “크샤트리야(武士) 집안에 태어난 사람이 권세는 작 은데 욕망만 커서, 이 세상에서 왕위를 얻고자 한다 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15) 세상에는 이러한 파멸이 있다는 것을 잘 살펴서, 성 현들은 진리를 보고 행복한 세계에 이른다.”

7. 천한 사람

(116)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때 거룩하신 스승은 사아밧티이의 제타 숲, 고독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 을 나눠주는 장자의 동산에 계시었다. 그 때 스승께 서는 오전에 내의를 입고 바리때와 겉옷을 걸치고 밥을 빌러 사아밧티이에 들어가셨다.

그 때 불을 섬기는 바라문 바아라드바아자의 집에는 성화(聖火)가 켜지고 제물이 올려져 있었다.

스승은 사아밧티이 거리에서 탁발(托鉢)하면서 그의 집에 가까이 가셨다.

불을 섬기는 바라문 바아라드바아자는 스승이 멀리 서 오는 것을 보고 스승께 말했다.

“까까중아, 거기 섰거라. 가짜 사문아, 거기 섰거 라. 천한 놈아, 거기 섰거라.”

이렇게 당한 스승께서는 불을 섬기는 바라문 바아라 드바아자에게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도대체 당신은 천한 사람을 알고나 있소?

또 천한 사람을 만드는 조건이 무엇인가를 알 고 있소?”

“고오타마여, 나는 사람을 천하게 하는 조건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아무쪼록 저에게 천한 사람을 만드는 조건을 알 수 있도록 그 이치를 말씀해 주십시오.”

“바라문이여, 그러면 주의해서 잘 들으시오. 내 말 하리다.” “네,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불을 섬기는 바라문 바아라드바아자는 스승께 대답했다. 스승은 말씀하셨다.

“화를 잘 내고 원한을 품으며, 간사하고 악독해서 남의 미덕을 덮어 버리고,

그릇된 소견으로 음모하 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17) 한번 태어나는 것이거나 두번 태어나는 것이거나, 이 세상에 있는 생물을 해치고 동정심이 없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18) 시골과 도시를 파괴하고 포위하여, 독재자로서 널리 알려진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19) 마을에 있거나 숲에 있거나 남의 것을 주지도 않는 데 훔치려는 생각으로 이를 취하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20) 사실은 빚이 있어 돌려 달라고 독촉을 받으면,`당 신에게 갚을 빚은 없다’고 발뺌을 하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21) 얼마 안 되는 물건을 탐내어 행인을 살해하고 그 물 건을 약탈하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22) 증인으로 불려 나갔을 때 자신이나 남을 위해, 또는 재물을 위해 거짓으로 증언하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23) 때로는 폭력을 가지고, 혹은 서로 사랑하여 친척이 나 친구의 아내와 어울리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 로 아시오.

(124) 자기는 재물이 풍족하면서도 늙고 쇠약한 부모를 섬 기지 않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25) 부모 형제 자매, 혹은 의붓 어머니를 때리거나 욕하 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26) 상대가 이익되는 일을 물었을 때, 불리하게 가르쳐 주거나 숨긴 일을 말하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27) 나쁜 일을 하면서, 아무도 자기가 한 일을 모르기를 바라며 숨기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28) 남의 집에 갔을 때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면서, 그 쪽에서 손님으로 왔을 때는 예의로써 보답하지 않 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29) 바라문이나 사문 또는 걸식(乞食)하는 사람에게 거 짓말로 속이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30) 식사 때가 되었는데도 바라문이나 사문에게 욕하며 먹을 것을 주지 않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 시오.

(131) 이 세상에서 어리석음에 덮여 변변찮은 물건을 탐하 고 사실이 아닌 일을 말하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 으로 아시오.

(132)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며, 스스로의 교만 때 문에 비굴해진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33) 남을 괴롭히고 욕심이 많으며, 나쁜 욕망이 있어 인색하고, 덕도 없으면서 존경을 받으려 하며, 부끄러 움을 모르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34) 깨달은 사람을 비방하고 혹은 출가나 재가의 제자들 을 헐뜯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135) 사실은 존경받지 못할 사람이 존경받을 사람이라 자부하고, 범천(梵天)을 포함한 세계의 도적인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천한 사람이오. 내가 당신에게 말한 이러한 사람들은 참으로 천한 사람인 것이오.

(136)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오, 태어나면 서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오. 행위에 의해서 천 한 사람도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오.

(137) 나는 다음에 실예를 들겠으니 이것으로 내 말을 알아 들으시오. 찬다아라 족의 아들이며, 개백정 마아 탕가로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 있었소.

(138) 그 마아탕가는 얻기 어려운 최상의 명예를 얻었소. 많은 왕족과 바라문들이 그를 섬기려고 모여 들었소.

(139) 그는 신들의 길, 더러운 먼지를 떨어 버린 대도(大道)를 올라가 탐욕을 버리고 범천의 세계에 가게 되었소. 천한 태생인 그가 범천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소.

(140) 베에다 독송자의 집에 태어나 베에다의 글귀에 친숙 한 바라문들도, 때로는 나쁜 행위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소.

(141) 이와 같이 되면, 현세에서 비난을 받고 내세에는 나 쁜 곳에 태어나오. 신분이 높은 태생도 그들이 나 쁜 곳에 태어나는 것을, 그리고 비난 받는 것을 막 을 수는 없소.

(142)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오. 날 때부 터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오. 그 행위로 말미암아 천한 사람도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오.”

(143) 이와 같이 말씀하셨을 때에 불을 섬기는 바라문 바아라드바아자는 스승께 사뢰었다.

“훌륭한 말씀입니다. 고오타마시여. 훌륭한 말씀입니다. 고오타마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 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듯이,혹은`눈이 있는 사람들은 빛을 볼 것 이다’하고 어둔 밤에 등불을 비춰 주듯이, 당신 고오 타마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밝히셨습니다. 저는 당신 고오타마께 귀의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수 행승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고오타마께서는 오늘부 터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저를 귀의한 재속(在俗) 신자로서 받아 주십시오.”

8. 자비

(143) 사물에 통달한 사람이 평안한 경지에 이르러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능력 있고, 정직하고 바르며, 말씨는 상냥하고 부드 러우며, 잘난 체하지 말아야 한다.

(144) 만족할 줄을 알고, 기르기 쉽고, 잡일을 줄이고, 생 활도 또한 간소하게 하며, 모든 감관이 안정되고 총 명하여 마음이 성내지 않으며, 남의 집에 가서도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

(145) 다른 식자들로부터 비난을 살 만한 비열한 행동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생물은 다 행복하라.태 평하라.안락하라.

(146) 어떠한 생물일지라도 겁에 떨거나 강하고 굳세거나, 그리고 긴 것이건 큰 것이건 중간치건,짧고 가는 것 이건,또는 조잡하고 거대한 것이건.

(147)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또는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거나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148) 어느 누구도 남을 속여서는 안 된다. 또 어디서나 남을 경멸해서도 안된다. 남을 골려 줄 생각으로 화를 내어 남에게 고통을 주 어서도 안된다.

(149)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아끼듯이,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내라.

(150) 또한 온 세계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를 행하라. 위 아래로, 또는 옆으로 장애와 원한과 적의가 없는 자비를 행하라.

(151) 서 있을 때나 걸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서 잠 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가지라. 이 세상 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숭고한 경지라 부른다.

(152) 온갖 사뙨 소견에 팔리지 말고, 계를 지키고 지견 (知見)을 갖추어 모든 욕망에 대한 탐착을 버린 사 람은 결코 다시는 모태에 드는 일이 없을 것이다.

9. 설산에 거주하는자

(153)설산(雪山)에 사는 사람 칠악야차(7岳夜叉)가 말했다. “오늘은 보름, 포살(布薩) 날이다. 눈부신 밤이 가까와졌다. 자,우리들은 세상에서도 뛰어난 스승 고오타마를 뵈러 가자.”

(154) 설산야차가 말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 안립(安立)되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원하는 것과 원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의 생각은 자제할 수 있는 것일까?”

(155) 칠악야차는 대답했다. “그런 분의 마음은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잘 정돈되어 있다. 그리고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 에 대해 그의 생각은 잘 자제될 수 있다.”

(156) 설산야차가 말했다. “그는 주지 않는 것은 갖지 않을까? 그는 살아 있 는 것을 죽이지 않으려고 자제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게으름에서 떠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는 정신통일을 그만 두지 않을 것인가?”

(157) 칠악야차는 대답했다. “그는 주지 않는 것은 갖지 않는다. 그는 산것을 죽 이지 않으려고 자제하고 있다. 그는 게으름에서 떠 나 있다. 눈을 뜬 사람(부처님)은 정신통일을 그만 두지 않는다.”

(158) 설산야차가 말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까? 거치른 욕설을 하지 않을까? 이간질을 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말을 하 지 않을까?”

(159) 칠악야차는 대답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거치른 욕설을 하지 않는다. 그는 이간질을 하지 않는다. 그는 쓸 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160) 설산야차가 말했다. “그는 욕망의 향락에 빠지지 않을까? 그의 마음은 혼탁하지 않을까? 헤매임을 초월했을까? 그리고 모 든 사물을 똑똑히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을까?”

(161) 칠악야차는 대답했다. “그는 욕망의 향악에 빠지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혼탁하지 않다. 모든 헤매임을 초월했다. 그리고 모 든 사물을 똑똑히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162) 설산야차가 말했다. “그는 밝은 지혜를 갖추고 있을까? 그의 행동은 청정할까? 그는 온갖 번뇌의 때를 소멸해 버렸을까? 그는 이제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을까?”

(163) 칠악야차는 대답했다. “그는 밝은 지혜를 갖추었다. 그의 행동은 청정하다. 그는 온갖 번뇌의 때를 소멸해 버렸다. 그리고 그는 이제 다시는 세상에 태어나는 일이 없다.” 설산야차가 말했다. “성인의 마음은 행동과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밝은 지혜와 청정한 행을 갖추고 있는 그를 네가 찬탄하 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인의 마음은 행동과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밝은 지혜와 청정한 행을 갖추고 있는 그를 네가 따라 기 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64) 칠악야차가 말했다. “성인의 마음은 행동과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자, 우리는 밝은 지혜와 청정한 행을 갖추고 있는 고오 타마를 뵈러 가자.”

(165) 설산야차가 말했다. “그 성인은 영양(羚羊)과 같은 정강이를 가졌고, 여 위고 가늘어 총명하고 소식(小食)해서 탐내지 않으 며, 숲속에서 조용히 사색하고 있다. 오너라, 우리 는 고오타마를 뵈러 가자.

(166) 온갖 욕망을 돌아보지 않고, 마치 사자처럼, 코끼리 처럼 홀로 가는 그에게 가서 우리는 물어 보자. 죽음의 멍에에서 벗어나는 길을.”

(167) 두 야차가 같이 말했다. “열어 보이는 분, 풀어서 밝히는 분, 모든 사물의 궁극에 통달하고 원망과 공포를 넘어서 눈뜬 분,고 오타마에게 우리는 물어 보자.”

(168) 설산야차가 말했다. “무엇이 있을 때 세계는 생깁니까? 무엇에 대해 사랑하게 됩니까? 세상 사람들은 무엇에 집착해 있으 며, 또 무엇 때문에 해를 입고 있습니까?”

(169) 스승은 대답했다. “설산에 사는 자여, 여섯 가지 것이 있을 때 세계는 생기고, 여섯 가지 것에 대해서 사랑하게 되고, 세계는 여섯 가지 것에 집착하고 있으며, 또 세계는 그 여섯 가지 것에 해를 입고 있느니라.”

(170) “그것으로써 세계가 해를 입는다는 집착이란 무엇입니까?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말씀해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171) “세상에는 다섯 가지 욕망의 대상이 있고, 의지(意) 의 대상이 여섯번째라고 한다. 그런 것에 대한 탐욕 에서 벗어난다면 곧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172) 이와 같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길을 너희에게 사실 대로 밝히겠다. 이 일을 난 너희들에게 말하겠다. — 이렇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173) “이 세상에서 누가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누가 큰 바다를 건널 수 있겠습니까? 의지할 것도, 붙잡을 것도 없는 깊은 바다에 들어가면 누가 가라앉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74) “항상 계(戒)를 몸에 지니고, 지혜가 있고 마음을 가다듬어 안으로 살피고 염원(念願)이 있는 사람만 이 건너기 어려운 거센 흐름을 능히 건널 수 있다.

(175) 애욕에 대한 생각에서 떠나 모든 매듭을 초월하고, 환락의 마음을 멸해 버린 사람, 그는 깊은 바다에 가라앉지 않는다.”

(176) 설산야차가 말했다. “깊은 지혜가 있고 미묘한 뜻을 보며, 아무것도 않고 욕망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일에서 해탈하여 천상의 길을 가는 저 위대한 선인(仙人)을 보라

(177) 세상에서 이름 높고 미묘한 뜻을 보며, 지혜를 가르 쳐 주고 욕망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알고 총명 하며, 거룩한 길을 가고 있는 저 위대한 선인을 보라.

(178) 오늘 우리는 좋은 태양을 보고, 아름다운 새벽을 만 나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거센 흐름을 건너 번 뇌의 때가 묻지 않은, 깨달은 사람을 우리는 만났 기 때문에. (179) 천이나 되는 저의 야차 무리들은 신통력이 있고 명 예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당신께 귀의합니 다. 당신은 우리의 위 없는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180) 저희들은 마을에서 마을로, 산에서 산으로 돌아다니겠습니다. 깨달은 이와 진리의 뛰어난 까닭을 예배 하면서 -.”

10. 아알라바카 야차(夜叉)

(181) 아알라바카 야차(夜叉)가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때 거룩하신 스승께서는 아알라비나라 아알라바카 야차의 처소에 머물고 계셨다.

그 때 아알라바카 야차는 스승께 와서 말했다. “사문이여, 나가 주시오.” “좋다, 친구여.” 하고, 스승은 나가셨다. 또 야차는 말했다. “사문이여, 들어오시오.” “좋다, 친구여.” 하고, 스승은 들어가셨다. 또 다시 아알라바카 야차는 말했다. “사문이여, 나가 주시오.” “좋다, 친구여.” 하고 스승은 다시 나가셨다. 또 야차는 말했다. “사문이여, 들어오시오.” “좋다, 친구여.” 하고, 스승은 또 들어가셨다.

세번째 또 아알라바카 야차는 스승에게 말했다. “사문이여, 나가주시오.” “좋다, 친구여.” 하고, 스승은 나가셨다. 또 야차는 말했다. “사문이여, 들어오시오.” “좋다, 친구여.” 하고, 스승은 들어가셨다.

네번째 또 아알라바카 야차는 말했다. “사문이여, 나가 주시오.” 이 때 스승은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더 나가지 않겠다. 네 할일이나 해라.” “사문이여, 제가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제게 해답을 못한다면, 당신의 마음을 산란케 하고 당신의 심장을 찢은 뒤 두 다리를 잡아 간지스강 건 너로 내던지겠소.”

스승은 대답했다. “친구여,신, 악마,범천을 포함한 세계에서, 그리 고 사문, 바라문, 신,인간을 망라한 산 것 중에서, 내 마음을 산란케 하고 내 심장을 찢고 두 다리를 잡아 간지스강 건너로 내던질 만한 자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친구여, 그대가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거든 무엇이 나 물어 보라.”

아알라바카 야차는 스승에게 다음의 시로써 말을 걸 었다.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으뜸가는 재산은 무엇입니까? 어떠한 선행(善行)이 안락을 가져 옵니까? 참 으로 맛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최상의 생활입니까?”

(182) “이 세상에서는 신앙(信仰)이 사람에게 으뜸가는 재산이다. 덕행이 두터우면 안락을 가져 온다. 진실이 맛 중의 맛이며,

지혜롭게 사는 것이 최상의 생활이 라 할 수 있다.”

(183) “사람은 어떻게 해서 거센 흐름을 건넙니까? 어떻게 해서 바다를 건넙니까? 어떻게 해서 고통을 초월합 니까? 그리고 어떻게 해서 완전히 청정해질 수 있읍니까?”

(184) “사람은 신앙으로써 거센 흐름을 건너고, 정진으로 바다를 건넌다. 근면으로써 고통을 초월하고, 지혜 로써 완전히 청정해진다.”

(185) “사람은 어떻게 해서 지혜를 얻습니까? 어떻게 해서 재물을 얻습니까? 어떻게 해서 명성을 떨칩니 까? 어떻게 해서 친교를 맺습니까? 또 어찌 하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갔을 때 걱정 이 없겠습니까?”

(186)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 안락을 얻는 이치(理法) 를 믿고 정진하고 총명하다면, 가르침을 받으려는 열망에 의해서 지혜를 얻는다.

(187) 정당히 일을 하고 참을성있게 노력하는 자는 재물을 얻는다. 성실을 다하면 명성을 떨치고 무엇인가를 줌으로써 친교를 맺는다.

(188) 신앙을 갖고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성실, 진리, 견고,보시 이 네가지 덕이 있으면, 그는 내세에 가 서도 걱정이 없다.

(189) 만일 이 세상에 성실, 자제, 보시, 인내보다 더 나 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널리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물어 보라.”

(190) “무엇 때문에 다시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널리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내세에 이익되는 일 을 깨달았는데.

(191) 아아, 깨달으신 분께서 아알라비에 살러 오신 것은, 저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저는 보시하면 어째서 위대한 과보가 얻어지는 가를 알았습니다.

(192) 저는 시골에서 시골로, 도시에서 도시로 돌아다니겠습니다. 깨달으신 분과 진리의 뛰어남에 예배하면서.”

11. 육체에 대한 가르침

(193), 걷거나 서며, 혹은 앉고 눕거나 몸을 구부리고 또는 편다. 이것이 신체의 동작이다.

(194) 신체는 뼈와 힘줄로 연결되어 있고, 내피(內皮)와 살과 살갗으로 덮여져 있어,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다.

(195) 신체 내부는 내장과 위로 가득 차 있고, 간장, 방광, 심장, 폐장, 신장, 비장이 있다.

(196) 콧물, 점액, 진물, 지방, 피, 관절액, 담즙, 기름이 있다. 또 그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 나온다. 눈에서는 눈꼽, 귀에서는 귀지.

(198) 코에서는 콧물, 입에서는 담즙을 내거나 가래를 뱉 는다. 온 몸에서는 땀과 때를 배설한다.

(199) 또 그 머리는 빈곳(空洞)이 있고 뇌수로 차 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무명(無名)에 이끌려서 그것을 깨끗한 것으로 안다.

(200) 또 죽어서 몸이 쓰러졌을 때에는 부어서 검푸르게 되고, 무덤에 버려져 친척도 그것을 돌보지 않는다.

(201) 개나 여우, 늑대,벌레들이 파 먹고, 까마귀나 독수 리 같은 것이 쪼아 먹는다.

(202)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수행자는, 깨달은 사람의 말 씀을 듣고 그것을 완전히 이해한다. 왜냐 하면, 그는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203) `저 죽은 시체도 살아 있는 이 몸뚱이와 같은 것이 있다. 살아 있는 이 몸뚱이도 죽은 저 시체처럼 될것 이다’고 안팎으로 몸에 대한 욕망에서 떠나야 한다.

(204) 이 세상에서 애욕을 떠난 지혜로운 수행자는, 죽지 않고 평안하고 멸하지 않는 열반의 경지에 도달했다.

(205) 인간의 이 몸뚱이는 부정하고 악취를 풍기어, 꽃이 나 향으로 보호되고 있다. 온갖 오물이 가득 차 여 기 저기서 흘러 나오고 있다.

(206) 이런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을 훌륭한 것 으로 알고, 또 남을 업신여긴다면 그는 소경이 아니 고 무엇이겠는가.”

12. 성자

(207) 친한 데서 두려움이 생기고, 집안 살림살이에서 더 러운 먼지가 낀다. 친함도 없고 살림살이도 없다면, 이것이 바로 성인 의 깨달음이다.

(208) 이미 돋아난 번뇌의 싹을 잘라 버리고, 새로 심지 않고 지금 생긴 번뇌를 기르지 않는다면, 이 홀로 가는 사람을 성인이라 부른다. 저 위대한 선인(仙人)은 평안의 경지를 본 것이다.

(209) 번뇌가 일어나는 근본을 살피어 그 씨를 헤아려 알 고, 그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기르지 않는다면, 그는 참으로 생(生)을 멸해 구경(究竟)을 본 성인이 고, 망상을 버려 미궁에 빠진 자의 무리 속에 끼지 않는다.

(210) 모든 집착이 일어나는 곳을 알아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탐욕을 떠나 욕심이 없는 성인은 무엇을 하려 고 구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피안(彼岸)에 다달았 기 때문에.

(211) 모든 것을 이기고 온갖 것을 알며, 지극히 총명하고 여러가지 사물에 더럽히지 않으며, 모든 것을 버리 고 애착을 끊어 해탈한 사람, 어진이들은 그를 성인 으로 안다.

(212) 지혜로운 힘이 있고, 계율과 맹세를 잘 지키고, 마 음이 잘 집중되어 있고, 선정(禪定)을 즐기며, 생각 이 깊고, 집착에서 벗어나 거칠지 않고, 번뇌의 때 가 묻지 않은 사람, 어진이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213) 홀로 걷고 게으르지 않은 성인, 비난과 칭찬에도 흔 들리지 않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은 연꽃 처럼, 남에게 이끌리지 않고 남을 이끄는 사람, 어 진이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214) 남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 하거나 욕을 하더 라도 수영장에 서 있는 기둥처럼 태연하고, 애욕을 떠나 모든 감관(感官)을 잘 가라앉힌 사람, 어진이 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215) 베짜는 북처럼 똑바로 스스로 편안히 서서 모든 악 한 행위를 싫어하고,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어진이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216) 자제하여 악을 행하지 않고, 젊을 때나 중년이 되어 서도 성인은 자신을 억제한다. 그는 남을 괴롭히지 않고, 남한테서 괴로움을 받지도 않는다. 어진이들 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217) 남이 주는 것으로 생활하고 새 음식이거나 먹던 음 식이거나 또는 남은 찌꺼기를 받더라도, 먹을 것을 준 사람을 칭찬하지도 않고 화를 내어 욕을 하지도 않는다면, 어진이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218) 성의 접촉을 끊고, 어떠한 젊은 여자에게도 마음을 앗기지 않으며, 교만하지도 태만하지도 않은, 그래서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 어진이들은 그를 성인으 로 안다.

(219) 세상을 잘 알고, 최고의 진리를 보고, 거센 흐름과 바다를 건넌 사람, 속박을 끊고 의존하지 않으며, 번뇌의 때가 묻지 않은 사람, 어진이들은 그를 성인 으로 안다.

(220) 출가한 이와 집에 있는 이는 주소와 생활 양식이 같지 않다. 집에 있는 이는 처자를 부양하지만, 계를 잘 지키는 이(출가자)는 무엇을 보아도 내것이라는 집착이 없다. 집에 있는 이는 남의 목숨을 해치 고 절제하기 어렵지만, 성인은 자제하고 항상 남의 목숨을 보호한다.

(221) 마치, 하늘을 날으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아무리 애 를 써도 백조를 따를 수 없는 것처럼, 집에 있는 이 는 세속을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성인이나 수행자 에게 미치지 못한다.

제2장 소품(小品)

1. 보물

(222) 여기 모인 모든 귀신들은 지상의 것이건 공중에 있 는 것이건 다들 기뻐하라.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고 내 말을 들으라.

(223) 귀신들이여, 귀를 기울이라. 밤낮으로 재물을 바치 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라. 함부로 하지 말고 그들을 지키라.

(224) 이 세상과 내세의 그 어떤 부(富)라 할지라도, 천상 의 뛰어난 보배라 할지라도, 우리들의 완전한 사람 (如來)에게 견줄 만한 것은 없다. 이 훌륭한 보배는 눈 뜬 사람(부처님) 안에 있다. 이 진리에 의해 행복하라.

(225) 마음의 통일을 얻은 스승이 도달한 번뇌의 소멸,이 욕(離欲),불사(不死),뛰어난 것, 그 이치(理法)와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훌륭한 보배는 이치 속에 있다. 이 진리에 의해서 행복하라.

(226) 가장 뛰어난 부처가 찬탄해 마지 않는 청정한 마음의 안정을, 사람들은 <빈틈없는 마음의 안정>이라 고 한다. 이 마음의 안정과 대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뛰어난 보배는 그 이치 속에 있다. 이 진리에 의해서 행복하라.

(227) 착한 사람들이 칭찬하는 여덟 가지 지위를 가진 사 람들은 이러한 네쌍의 사람이다. 그들은 행복한 사람 (부처님)의 신도이며 보시를 받을 만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베푼 사람은 커다란 과보를 얻는다. 이 뛰 어난 보배는 모임(승단) 안에 있다. 이 진리에 의해 서 행복하라.

(228) 굳은 결심으로 부지런히 일하고, 고오타마의 가르침 에 따라 욕심이 없으며, 죽음이 없는 데에 들어가 고, 도달해야 할 경지에 이르며, 보상 없이 얻어 평 안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이 뛰어난 보배는 모임 안에 있다. 이 진리에 의해서 행복하라

(229) 마치 성문 밖에 선 기둥이 땅속에 박혀 있으면, 사 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모든 성스러운 진리를 관찰하는 착한 사람은 이와 같은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이 뛰어난 보배는 모임 안에 있다. 이 진리에 의해서 행복하라.

(230) 깊은 지혜를 가진 사람(부처님)이 말씀하신 모든 거 룩한 진리를 똑똑이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커다란 잘못에 빠지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여덟번째 생존 을 받지는 않는다. 이 뛰어난 보배는 모임 안에 있 다. 이 진리에 의해서 행복하라.

(231) 자신을 실재(實在)라고 보는 견해와 의혹, 표면적인 계율,맹세, 이 세가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는 지견(知見)을 성취하는 동시에 그것들은 버려진다. 그는 네 가지 악한 곳을 떠나, 다시 여섯 가지 큰 죄를 범하지는 않는다. 이 뛰어난 보배는 모임 안 에 있다. 이 진리에 의해서 행복하라.

(232) 또 그가 몸과 말과 생각으로 조그만한 나쁜 짓을 했 다면, 그는 그것을 감추지 못한다. 궁극의 경지를 본 사람은 감출 수가 없다. 이 뛰어난 보배는 모임 안에 있다. 이 진리에 의해서 행복하라.

(233) 초여름 더위가 숲속의 가지에 꽃을 피우듯이, 그에 비할 수 있는 평안에 이르는 묘법(妙法)을 눈뜬 사 람이 가르치셨다. 이익이 되는 최상의 일들을 위해 서. 이 뛰어난 보배는 눈뜬 사람 안에 있다. 이 진리에 의해 행복하라.

(234) 뛰어난 것을 알고, 뛰어난 것을 주고, 뛰어난 것을 가 져 오는 위없는 이가 으뜸가는 법을 설했다. 이 뛰어 난 보배는 눈 뜬 사람 안에 있다. 이 진리에 의해 행복하라.

(235) 묵은 업은 이미 다 했고, 새로운 것은 생기지 않는 다. 그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종자 를 없애고 그 성장을 원치 않는 어진이들은 등불처럼 멸한다. 이 뛰어난 보배는 모임 안에 있다.이 진 리에 의해 행복하라.

(236) 여기 모인 귀신들은 지상의 것이건 공중의 것이건, 신과 인간이 섬기는 이같이 완성된 눈 뜬 사람을 예 배하자 행복하라.

(237) 여기 모인 귀신들은 지상의 것이건 공중의 것이건, 신과 인간이 섬기는 이같이 완성된 진리를 예배하자 행복하라.

(238) 여기 모인 귀신들은 지상의 것이건 공중의 것이건, 신과 인간이 섬기는 이같이 완성된 모임(승가)을 예 배하자 행복하라.

2. 비린 것

(239) “수수, 딩굴라카, 치이나카 콩, 잎열매, 구근(球根),넝쿨열매를 선한 사람한테서 바르게 얻어 먹으 면서 욕심부리지 않고 거짓말을 안 한다.

(240) 맛잇게 잘 지어진 밥을 남한테 얻어서 입맛을 다시 며 먹는 사람은 비린 것을 먹는다. 캇사파여.

(241) 범천의 친척(바라문)인 당신은 잘 요리된 새고기와 함께 쌀밥을 맛있게 먹으면서도 `나는 비린 것을 허 락 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캇사파여, 나는 그 의 미를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말한 비린 것이란 어떤 것인가를.”

(242) “산것을 죽이는 일, 때리고 자르고 묶는 일, 훔치고 거짓말 하는 일, 사기와 속이는 일, 그릇된 것을 배 우는 일, 남의 아내와 가까이 하는 일, 이것이 바로 비린 것이지 육식(肉食)은 그렇지 않다.

(243) 이 세상에서 욕망을 억제하지 않고, 맛있는 것을 탐 내고, 부정한 생활에 어울리며, 허무론(虛無論)을 가지고 바르지 못한 행을 하는 완고하고 어리석은 사람들, 이것이 비린 것이지 육식은 그렇지 않다.

(244) 난폭하고 잔혹하며,험담을 하고 친구를 배신하고 무자비하며, 몹시 오만하고 인색해서 아무것도 남에 게 주지 않는 사람들,이것이 비린 것이지 육식은 그렇지 않다.

(245) 성내고 교만하고 고집스럽고, 반항심, 속임수, 질투, 허풍, 극단적인 오만, 불량배와 섞이는 일, 이것이 비린 것이지 육식은 그렇지 않다.

(246) 악질이라 빚을 갚지 않고, 밀고를 하고, 재판정에서 는 위증을 하며, 정의를 가장하고 사악(邪惡)을 범 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몹쓸 사람들, 이것이 비린 것이지 육식은 그렇지 않다.

(247) 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살생을 하고, 남의 것을 빼앗 으면서 도리어 그들을 해치려하고, 성미가 나빠 욕심 많고 난폭하며 무례한 사람들, 이것이 비린 것이지 육식은 그렇지 않다.

(248) 이것들(생물)에 대해 탐내고 배반하고 부당한 행동을 하고, 항상 나쁜 짓을 하려고 애쓰고, 죽어서는 암흑 에 이르며, 머리를 거꾸로 처박고 지옥(地獄)에 떨 어지는 사람들, 이것이 비린 것이지 육식은 그렇지 않다.

(249) 생선이나 고기를 먹지 않는 것도, 단식, 나체, 삭발, 결발(結髮), 먼지, 거치른 사슴 가죽을 입는 것도, 화신(火神)을 섬기는 것도, 또는 불사(不死)를 얻기 위한 고행, 신주(神呪), 공양, 제사나 계절에 따른 고행도 모두 다 의혹을 넘어서지 않으면 그 사람을 청정하게 할 수 없다.

(250) 통로(여섯 개의 기관 = 6根)를 지키고 기관을 억제 하며 행하라. 이치(理法) 안에서 편안히 서서 바르 고 솔직한 것을 즐기고, 집착을 떠나 모든 고통을 버 린 어진이는 보고 듣는 것으로 더렵혀지지 않는다.”

(251) 이와 같은 이야기를 거룩하신 스승 (과거 캇사파 부 처님)께서는 되풀이해 말씀하셨다. 베에다의 신주 (神呪)에 통달한 사람(바라문)은 그것을 알았다. 비린 것을 떠나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그리고 뒤 따르기 힘든 성인(부처님)은 여러 가지 싯귀로써 그 것을 말씀하셨다.

(252) 눈 뜬 사람이 훌륭하게 가르치신 ( 비린 것을 떠나 모든 고통을 제거한 ) 말씀을 듣고, 그 바라문은 겸허한 마음으로 완전한 사람(如來)에게 예배하고. 그 자리에서 출가할 것을 원했다.

3. 부끄러움

(253) 부끄러워할 것을 잊어버리고 또 싫어해서 `나는 당 신의 친구다’라고 말하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맡 아서 도와 주지 않는 사람, 그는 내 친구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254) 모든 친구들에게 실천이 없이 말만 앞세우는 사람은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임을 어진이는 알 고 있다.

(255) 항상 우정이 끊어질까 염려하여 아첨하면서도, 벗의 결점만을 보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다. 아기가 엄마의 품에 안기듯이 그 사람을 의지하고, 다른 사람 때문에 그 사이가 멀어지지 않는 사람이 야말로 친구다.

(256) 일의 결과를 바라는 사람은 인간으로서 적당한 짐을 지고, 기쁨을 낳고 칭찬을 받으며, 안락을 가져 올 원인을 닦는다.

(257) 멀어지고 떨어지는 맛과 평안해지는 맛을 알고 법의 기쁨을 마시는 사람은, 고뇌를 떠나고 악을 멀리한다.

4. 위 없는 행복

(258)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날 거룩한 스승은 사아 밧티이의 제타 숲, 고독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 눠주는 장자의 동산에 계시었다. 그 때 용모가 단 정한 한 신이 밤중이 지나 제타 숲을 두루 비추면서 스승께로 왔다. 그리고 예배한 후 한 쪽에 서서 시로써 여쭈었다. “많은 신과 사람들은 행복을 바라면서 행운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뜸가는 행복을 말씀해 주십시오.”

(259)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말고 어진이와 가 깝게 지내며, 존경할 만한 사람들을 존경할 것, 이것이 위없는 행복이다.

(260) 자기에게 알맞은 곳에 살고, 일찌기 공덕을 쌓았고, 스스로는 바른 서원을 하고 있는 것, 이것이 위없는 행복이다.

(261) 박학과 기술과 훈련을 쌓고, 그 위에 언변이 능숙한 것, 이것이 위없는 행복이다.

(262) 부모를 섬기는 것, 처자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 일에 질서가 있어 혼란하지 않는 것, 이것이 위없는 행복이다.

(263) 보시와 이치에 맞는 행위와 친척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과, 비난을 받지 않는 행위, 이것이 위없는 행복이다.

(264) 악을 싫어해 멀리하고, 술을 절제하고, 덕행을 소홀 히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위없는 행복이다.

(265) 존경과 겸손과 만족과 감사와, 때로는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 위없는 행복이다.

(266) 인내하는 것, 온순한 것, 수행자들을 만나는 것, 때로는 이치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 이것이 위없는 행복이다.

(267) 수양과 깨끗한 행위와 거룩한 진리를 보는 것, 안정 을 입증하는 것, 이것이 위없는 행복이다.

(268) 세상 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걱정과 티가 없이 안온한 것, 이것이 위없는 행복이다.

(269) 이러한 일을 한다면 어떤 일이 닥쳐도 패하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나 행복할 수 있다.이것이 그들에 게는 위없는 행복이다.

5. 수우칠로오마 야차(夜叉)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날 거룩한 스승께서 는 가야아의 탕키타 석상(石床)에 있는 수우칠로 오마 야차의 집에 계시었다.

그 때 두 야차가 스승 이 계신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 카라 야차가 수우 칠로오마 야차에게 말했다.

“그는 사문이다.” 그러나 수우칠로오마 야차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진정한 사문인지,엉터리 사문인지를 내가 알 때까지는 그를 사문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수우칠로오마 야차는 스승께 가까이 갔다. 그러나 스승은 몸을 피하셨다.

그는 스승께 여쭈었다. “사문이여, 당신은 나를 두려워하고 있군요.”

“벗이여, 나는 너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너와 부딪치는 것은 좋지 않다.”

“사문이여, 당신에게 묻겠소, 만약 내 질문에 대답 을 못하면,

당신의 마음을 산란케 하고 당신의 심장 을 찢은 뒤, 다리를 붙들어 간지스강 건너로 내던 지겠소.”

“벗이여, 신, 악마, 범천을 포함한 세계에서 사문, 바라문 , 신 , 인간을 망라한 모든 산것 중에서

내 마 음을 산란케 하고 내 심장을 찢으며,

내 두 발을 잡아 간지스강 건너로 내던질 만한 자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벗이여, 네가 묻고 싶은 것이 있거든 무엇 이든 물어보라.”

수우칠로오마 야차는 다음의 시로써 스승에게 물었다.

(270) “탐욕과 혐오는 어떤 원인에서 생기는 것인가. 좋고 싫은 것, 소름끼치는 일은 어디서 생기는 것인가. 또 온갖 망상은 어디서 일어나 방심케 하는가? 마 치 어린이들이 까마귀를 놓아 버린 것처럼.”

(271) “탐욕과 혐오는 자신에게서 생긴다. 좋고 싫은 것과 소름끼치는 일도 자신으로부터 생긴다.

온갖 망상도 자신에게서 생겨 방심케 된다. 마치 어린이들이 까마 귀를 놓아 버린 것처럼.

그것들은 애착에서 일어나고 자신으로부터 나타난 다.

마치 바니얀(榕) 나무의 어린 싹이 가지에서 생 기듯이.

널리 모든 욕망에 집착해 있는 것은 덩쿨 이 숲속에 뻗어 있는 것과 같다.

(272) 야차여, 들어라. 번뇌가 어떤 원인으로 일어나는 것 인지 아는 사람들은 번뇌를 버릴 수 있다.

그들은 건너기 어렵고, 아직 아무도 건넌 사람이 없는 이 거 센 흐름을 건너서 다시는 더 몸을 받는 일이 없다.”

6. 이치에 맞는 행복

(274) 이치에 맞는 행동, 깨끗한 행동, 이것을 더 없는 보배라고 한다. 가령 집을 떠나 출가(出家)의 몸이 되었을지라도.

(275) 만약 거치른 말씨를 쓰고 남을 괴롭히기 좋아하며 짐승같다면, 그 사람의 생활은 더욱더 악해지고 더러워질 것이다.

(276) 논쟁을 즐기고 우매한 성미로 덮여 있는 수행자는, 눈 뜬 사람의 설법을 알아 듣지 못한다.

(277) 그는 무명(無明)에 이끌려 수양을 쌓은 사람들을 괴 롭히고, 번뇌가 지옥으로 가는 길임을 알지 못한다.

(278) 참으로 이러한 수행자는 고난의 장소에 태어나고, 모태에서 다른 모태로, 암흑에서 암흑으로 전생(轉生)하며, 죽은 후에도 고통을 받게 된다.

(279) 마치 똥구덩이가 세월이 지나면 똥으로 가득 차듯 이, 부정한 사람은 참으로 깨끗이 하기 어렵다.

(280) 수행자들이여, 이와 같은 출가 수행자들은, 사실은 집에 기대고 있는 사람이고, 삿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릇된 생각과 행동을 하고 나쁜 곳에 있 는 사람인 줄 알아라.

(281) 그대들은 화합해서 그런 사람을 물리치라. 쌀겨처럼 그를 키질하여 쓰레기처럼 날려 버려라.

(282) 그리고, 사실은 사문이 아니면서 사문인 체하는 (쌀겨)들도 불어 버려라. 삿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고, 그릇된 행동을 하며 나 쁜 곳에 있는 그들을 불어 버려라.

(283) 스스로 깨끗한 이가 되고, 서로 동정심을 가지고 청 정한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하라. 그곳에서 서로 사 이좋게 총명하게, 그리고 고뇌를 없애도록 하라.

7. 바라문에게 어울리는 일

(284)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날 거룩한 스승께서는 사아밧티이의 제타 숲, 고독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 을 베푸는 장자의 동산에 계시었다. 그 때 코오살라 나라에 사는, 큰 부자인 바라문들 이 – 그들은 늙어 쇠약해 있었지만 – 스승이 계신 곳에 가까이 와서 인사를 하였다. 서로 기억에 남을 만한 즐거운 인사를 나누더니 한 편에 가서 앉았다. 큰부호인 바라문들은 스승께 여쭈었다. “고오타마시여, 대체 현재의 바라문들은 옛날 바라 문들이 지켜 내려온 바라문의 법을 따르고 있는 것일까요?”

“바라문이여, 지금의 바라문들은 예전 바라문들이 지켰던 바라문의 법을 지키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고오타마시여, 별 지장이 없으시다면, 옛날 바라문들이 지켜 온 바라문의 법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바라문들이여, 명심해 잘 들으시오. 내가 말 을 해드리리다.”

“듣겠습니다.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스승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옛 선인(仙人)은 자신을 억제하는 고행자였소. 그 들은 오욕(五欲)의 대상을 버리고 자기의 참된 의(義)를 행하였소.

(285) 바라문들에게는 가축도 없었고, 황금도 곡식도 없었소. 그러나 그들은 베에다의 독송을 재보(財寶)로 삼고 곡식으로 삼아, 브라흐만의 창고를 지켰던 것이오.

(286) 그들을 위해 문간에 마련하여 놓은 음식을, 신도들 은 바라문들에게 주려고 생각했소.

(287) 여러 가지로 아름답게 물들인 의복과 침상과 집을 많 이 가지고 있는 지방과 나라 사람들은 모두들 바라 문에게 경례했소.

(288) 바라문들은 법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을 죽이 거나 눌러 이겨도 안되었소. 그들이 문간에 서 있 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소.

(289) 옛말의 바라문들은 사십 팔년 동안 동정(童貞)의 청 정행을 가졌소. 지(知)와 행(行)을 구했던 것이오.

(290) 바라문들은 다른 종족의 여자를 얻지 않았소. 또 그 들은 아내를 사지도 않았소. 그저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살고 화목해 즐거워하였소.

(291) 함께 살면서 즐기고 있었지만, 바라문들은 아내를 가 까이 할 수 있는 시기를 제하고는, 월경(月經) 때문 에 멀리해야할 때에는 결코 성의 교섭을 갖지 않았소.

(292) 그들은 불음(不淫)의 행과 계율 , 정직 , 온순 , 고행 , 유화와 남을 해치지 않고 참는 것을 칭찬했소.

(293) 그들 중에서 용맹하고 으뜸가는 바라문들은 성의 교 섭을 꿈꾸는 일도 없었소.

(294) 이 세상에 있는 일부 유식자들은 그들의 행동을 본 받아 가며 불음과 계율과 인내를 찬탄했소.

(295) 쌀과 침구와 의복 , 제호(버터) , 기름을 법답 게 모아 그것으로 제사를 지냈소. 그들은 제사를 지 낼 때에 결코 소를 잡지 않았소.

(296) 부모 형제 또는 다른 친척들과 마찬가지로 소는 우 리들의 선량한 벗이오. 소한테서는 약이 생기오.

(297) 소에서 생긴 약은 식료품이 되어, 우리에게 기운을 주고 피부를 윤택하게 하며, 또 즐거움을 주오. 소에게 이러한 이익이 있음을 알아 그들은 소를 죽이 지 않았던 것이오.

(298) 바라문들은 손발이 부드럽고 몸이 크며 용모가 단정 하고 명성이 있으며, 자기 의무에 충실하여 할일은 하고, 해서 안될 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소. 그들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이 세상 사람들은 안락 하고 번영했소.

(299) 그런데 그들에게 뒤바뀐 견해가 일어났던 것이오. 점점 왕자 같은 영화와 곱게 단장하고 화려하게 입 은 부인들을 보게 됨에 따라.

(300) 또는 준마(駿馬)가 이끄는 훌륭함 수레, 아름다운 옷, 여러 가지로 설계되어 그 부분마다 잘 지어진 주택을 보고.

(301) 바라문들은 소의 무리가 번창하고 미녀들에 둘러 싸여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고 말았소.

(302) 그래서 그들은 베에다의 신기로운 주문을 편찬하고, 저 감자왕(甘蔗王)에게 가서 말했소. `당신은 재 산도 곡식도 풍성합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 의 재산은 많습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의 재산은 많습니다.’

(303) 그래서 수레와 군사의 주인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 로 – 말에 대한 제사, 인간에 대한 제사, 투창(擲棒)에 대한 제사, 소오마에 대한 제사, 아무에게나 공양하는 제사 – 이러한 제사를 지내고, 재물을 바 라문들에게 주었소. (304) 소 , 침구 , 의복, 아름답게 꾸민 여인과 준마를 단 좋은 수레며, 아름답게 수놓인 옷들.

(305) 쓸모있게 잘 설계된 훌륭한 주택에, 여러 가지 식 량을 가득 채워 바라문에게 주었소.

(306) 이리하여 그들은 재물을 얻었는데, 이번에는 또 그 것을 저장하고 싶은 생각이 났던 것이오. 그들은 욕 심에 사로잡혀 많은 것을 갖고 싶어 했소. 그래 그들은 또 베에다의 주문을 편찬하여 다시 감자왕을 찾아 갔었소.

(307) `물과 땅과 황금과 재물과 곡식이 생명있는 사람들 의 필수품이듯이, 소도 사람들의 필수품입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의 재산은 많습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의 재산은 많습니다.’

(308) 수레와 군사의 주인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로 수 백 수천 마리의 소를 제물로 잡게 되었소.

(309) 발이나 뿔, 그 밖에 무엇으로든지 해를 끼치지 않는 소는 양처럼 유순하고, 항아리가 넘치도록 젖을 짤 수 있었소. 그런데 왕은 뿔을 잡고 칼로 찔러서 소 를 죽이게 했던 것이오.

(310) 칼로 소를 찌르자, 신들과 조상의 신령과 제석천 , 아수라 , 나찰들은`불법한 일이다’고 소리쳤소.

(311) 예전에는 탐욕과 굶주림과 늙음의 세 가지 병밖에는 없었소. 그런데 많은 가축들을 제사 지내기 위해 죽인 까닭에 아흔 여덟 가지나 되는 병이 생긴 것이오.

(312) 이와 같이 살생의 몽둥이를 부당하게 내려친다는 것은, 그 옛날부터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오.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소를 죽였던 것이오. 제사 를 지내던 사람은 이치를 거스리고 있었던 것이오.

(313) 이와 같이 옛부터 내려온 이 좋지 못한 풍습은 지혜 로운 이의 비난을 받아 왔소. 사람들은 이러한 일을 볼 때마다 제사지내는 이를 비난하게 되오.

(314) 이렇게 해서 법이 무너질 때, 노예(슈우드라)와 서 민(바이샤)의 양자가 분열하고, 여러 왕족들이 흩어 지고 아내는 지아비를 경멸하게 되었소.

(315) 왕족이나 범천의 친족(바라문) 또는 종성(種姓)의 제도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생(生)에 대한 말씀을 버리고 욕망에 사로잡히고 만 것이오.”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큰 부자인 바라문들은 스승 께 여쭈었다. “훌륭한 말씀입니다. 고오타마시여. 훌륭한 말씀입니 다,

고오타마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듯 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자에게 길을 보 여 주듯이, 또는`눈있는 사람은 빛을 볼 것이다’하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 주듯이, 당신 고오타마 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 주셨습니다. 저희들은 당신께 귀의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수행승 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당신 고오타마께서는 오늘부 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귀의한 재속신자로서 저희 을 받아 주십시오.”

8. 배(船)

(316) 누가 만일 남한테서 배워 이치를 알게 되었다면, 그 사람 섬기기를 마치 신들이 인드라신(帝釋天) 섬기듯 해야 한다.

학식이 풍부한 사람은 존경을 받으면 그 사람에게 대해서 진심으로 기뻐하며 진리를 보인다.

(317) 어진이는 이것을 이해해서 듣고, 이치에 따라 가르 침을 실천하고, 이러한 사람을 가까이하여 게으르지 않는다면 식자, 분별할 줄 아는 이, 총명한 이가 된다.

(318) 아직도 사물을 이해못하고 질투심이 있는 소인이나 어리석은 이를 가까이 섬긴다면, 여기서는 이치를 알지 못하고 의심을 버리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른다.

(319) 마치 사람이 물이 많고 물결이 센 강에 빠지면, 그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 가는 것과 같다. 그런 이가 어 찌 남을 건네 줄 수 있겠는가.

(320) 그와 마찬가지로, 진리도 모르고 학식 많은 사람에게서 의(義)를 듣지 않으면, 스스로도 모르고 의심 도 풀 수 없다. 그가 어찌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321) 튼튼한 배를 타고 거기 노와 키가 있다면, 저을 줄 을 아는 경험자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태워서 건네 줄 수 있다.

(322) 베에다에 통달하고 자신을 수양하고 많은 것을 배워 동요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기 때문에 가 르침을 듣고 따르려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323) 그러므로 정말 지식이 있고 학식이 많은 성실한 사 람과 가까이 하라. 사물을 알고 실천하면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안락을 얻으리라.

9. 어떠한 도덕(道德)

(324) 어떠한 도덕이 있고, 어떠한 행동을 하며, 어떠한 행위를 부지런히 해야만, 바르게 서고 또 으뜸가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325) 손위의 사람을 공경하고 시기하지 말며, 스승을 만 나 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얻어서 설법을 지성으로 들어라.

(326) 고집을 버리고 겸허한 태도로 때를 맞추어 스승을 찾아 가라. 사물과 진리와 자제(自制)와 청정한 행동을 마음에 두고 이를 설명하라.

(327) 진리를 즐기고 진리를 기뻐하며, 진리에 머무르고 진리의 길을 알며, 진리를 비방하는 말을 입에 담지 말 라. 훌륭하게 설해진 진리에 따라 생활하라.

(328) 웃음, 농담, 울음, 혐오, 거짓말, 사기, 탐욕, 오만, 격분, 난폭, 더러움, 탐익을 버리고 교만을 떠나 자 신을 안정시켜 행동하라.

(329) 훌륭한 설법은 들어서 이해하면 알맹이(精)가 된다. 듣고 안 것은 정신의 안정을 닦으면 알맹이가 된다. 사람이 성급하거나 게으르면 지혜도 학식도 늘지 않 는다.

(330) 성인이 말씀하신 진리를 기뻐하는 사람들은 말과 생 각과 행동이 가장 뛰어나다. 그들은 평안과 유화와 명상 속에 머무르면서 학식과 지혜의 진수(眞髓)에 이른 것이다.

10. 정진(精進)

(331) 일어나라. 앉아라. 잠을 자서 너희들에게 무슨 이 익이 있겠는가. 화살에 맞아 고통 받는 이에게 잠이 웬말인가.

(332) 일어나라. 앉아라. 평안을 얻기 위해 일념으로 배우라. 그대들이 게을러서 그 힘에 굴복한 것을 <죽음 의 왕>이 알고, 그대들을 헤매지 못하도록 하라.

(333) 신과 인간은 애착에 얽매어 무엇인가를 갖고자 한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라. 짧은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짧은 세월을 헛되이 보낸 자는 지옥에 떨어져 슬퍼 하기 때문이다.

(334) 게으름은 때와 같은 것, 때는 게으름 때문에 생긴다. 애써 닦음으로써, 또한 밝은 지혜로써 자기에게 박 힌 화살을 뽑으라.

11. 라훌라

(335)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라훌라야, 늘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너는 어진 이(賢者)를 가볍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니냐? 모든 사 람을 위해 횃불을 비춰주는 사람을 너는 존경하고 있느냐?”

(336) 라훌라는 대답했다. “늘 함께 살고 있다고 해서 어진이를 가볍게 보는 일 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횃불을 비춰 주는 사람을 저는 항 상 존경합니다.” (이상 序詩)

(337) “사랑스럽고 즐거움이 되는 오욕(5欲)의 대상 버리 고, 믿음으로 집을 떠나 괴로움 없애는 사람이 되라.

(338) 선한 친구와 사귀어라. 인가(人家)를 떠나 깊숙하고 고요한 곳에서 거처하여라. 그리고 음식의 양을 아는 사람이 되어라.

(339) 옷과 얻은 음식과 병자를 위한 물건과 거처, 이런 것에 대해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다시는 세속에 돌아가지 말아라.

(340) 계율을 지키고 다섯 감관(5官)을 지켜 네 육신을 살펴라. 참으로 세상을 지겹게 생각하라.

(341) 애욕 때문에 깨끗이 보이는 겉모양을 떠나 생각해라. 육신은 부정한 것이라고 마음에 새겨두고, 마음을 하나로 집중시켜라.

(342) 마음에 자취(相)를 두지 말라. 마음에 도사린 오만을 버려라. 오만을 없앤 너는 마음 편안한 나날을 보내리라.”

(343) 참으로 거룩한 스승은 라훌라 존자에게 이와 같은 시로써 되풀이해 가르치셨다.

12. 방기이사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거룩한 스승께서는 아알라비 이에 있는 악가알라바 영수(靈樹) 밑에 계시었다. 그 때는 방기이사 존자의 스승인 니그로오다캅파라는 장로가 그 나무밑에서 죽은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방기이사 존자는 홀로 앉아 명상에 잠겨 있다가 이런 생각을 하였다. `우리 스승은 정말로 돌아가신 것일 까? 그렇지 않으면 아직 살아 계실까?’ 방기이사 존자는 저녁때가 되자 명상에서 깨어나 스승(부처님) 이 계신 곳으로 갔다. 거룩하신 스승께 절한뒤 한쪽 에 가서 앉았다. 그는 스승께 여쭈었다. “거룩하신 스승이시여, 제가 홀로 앉아 명상에 잠겨 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스승은 정 말로 돌아가신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아직 살아 계 시는 것일까’ 하고요. ” 방기이사 존자는 일어서서 옷을 왼쪽 어깨에 걸치고 스승께 합장하더니, 다음 같은 시로써 사뢰었다. “현세에서 모든 의혹을 끊고 위없는 지혜를 가지신 스승께 묻겠습니다. 세상에 알려지고 명망 높고 마 음이 평안에 돌아간 수행자가 악가알라바에서 돌아 가셨습니다.

(344) 스승님이여, 당신께서는 그 바라문에게 (니그로오 다캅파)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오로지 진리만을 보신 분이시여, 그는 당신을 예배하고 해탈을 구하 여 애를 써 정진했습니다.

(345) 석가님이여, 멀리 보시는 분이여, 저희들은 당신의 제자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저희 귀는 들을 준비 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저희 스승이십니다. 당신 은 가장 뛰어난 분이십니다.

(346) 저희의 의혹을 풀어 주십시오. 이것을 저에게 말씀 해 주십시오. 지혜 많은 분이시여, 그가 아주 죽었 는지 아닌지를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천 개의 눈을 가진 제석천(帝釋天)이 신들에게 말하듯이. 널리 보시는 분이시여!

(347) 이 세상에 속박인 것은 헤매는 길이고, 무지와 의심 으로 인해서 있는 것이지만, 완전한 사람(如來)을 만나면 그런 것은 다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은 인간 을 위한 으뜸가는 눈이기 때문입니다.

(348) 바람이 구름을 걷어 버리듯이, 사람(부처님)이 번뇌 의 티끌을 털어버리지 않는다면, 온 세상은 뒤덮이 어 암흑이 될 것입니다. 빛을 가진 사람들도 빛을 내지 못할 것입니다.

(349) 어진이들은 세상을 비추는 분입니다. 어진이여, 저 는 당신을 그런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당신 이야말로, 사실로 보는 분으로 알고 이렇게 찾아 온 것입니다. 대중 속에서 저희들을 위해 니그로오 다캅파에 대한 일을 밝혀 주십시오.

(350) 원컨대 선하고 미묘한 음성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백조가 목을 느리고 천천히 우는 것처럼, 잘 다듬어 진 원만한 음성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는 명심 해서 들으리이다.

(351) 생사를 남김 없이 버리고, 악을 없애 버린 부처님께 청하여 가르침을 들읍시다. 범부들은 알고 싶고 말 하고 싶은 것을 다할 수 없지만, 모든 완전한 사람 은 마음 먹은 대로 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52) 이 완전한 예언이 올바른 지자(智者)인 당신으로 인 해 잘 보전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최후의 합장을 드립니다. 스스로는 알면서 말씀하지 않음으로써 저 희를 방황케 하지 마십시오. 지혜로운 분이시여!

(353) 이것 저것 거룩한 이치를 알고 계시면서 저희를 방 황케 하지 마십시오. 정진에 뛰어나신 분이여! 한 여름 더위에 지친 사람이 물을 찾듯이, 저는 당신 의 말씀을 갈구합니다. 말씀의 비를 내려 주십시오.

(354) 캅파아야나가 청정한 행으로써 이루려 했던 목적 은 헛된 것이었습니까? 혹은 해탈한 사람처럼 소 멸된 것입니까? 아니면, 생존의 근원을 남겨둔 것 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스승은 대답했다.

(355) “그는 이 세상 명칭과 형태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린 것이다. 오랫동안 빠져 있던 검은 악마의 흐름을 끊 어 버린 것이다.”

다섯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스승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356) “일곱번째 선인(仙人)이여, 당신의 말씀을 듣고 저 는 기뻐합니다. 제 물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당신 께서는 저를 속이지 않을 것입니다.

(357) 눈 뜬 사람의 제자인 니그로오다캅파는 말한 대로 실행하여, 사람을 속이는 죽음의 악마가 펼친 질긴 그물을 찢어 버렸습니다.

(358) 스승이시여, 캅파아야나는 집착의 뿌리를 보았습니다. 아아, 캅파아야나는 가장 건너기 어려운 사마(死魔) 의 영역을 넘어선 것입니다.

13. 올바른 편력(遍歷)

(359) “지혜가 많고, 강을 건너 피안(彼岸)에 이르러 완전 한 열반을 얻고, 마음이 안락한 성인께 여쭙니다. 출가하여 여러가지 욕망을 없앤 수행자는, 어떻게 해야 이 세상을 바르게 편력할 수 있습니까?”

(360) 스승은 말씀하셨다. “길조의 점, 천지이변의 점, 해몽, 관상보는 일을 완전히 버리고, 길흉의 판단을 버린 수행자는, 세상 에서 바르게 편력할 것이다.

(361) 수행자가 생존을 초월하고 이치를 깨달아, 인간계와 천상의 모든 향락에 대한 탐욕을 버린다면, 그는 세 상에서 바르게 편력할 것이다.

(362) 수행자가 두 가지 말을 버리고, 분노와 인색을 버리 고 순역(順逆)의 생각을 떠난다면, 그는 세상에서 바르게 편력할 것이다.

(363) 좋아하는 것이나 좋아하지 않는 것이나 다 버리고, 아무것에도 집착하거나 매이지 않고 온갖 속박에서 벗어난다면, 그는 세상에서 바르게 편력할 것이다.

(364) 그가 생존을 이루고 있는 요소 가운데서 견고한 실 체를 보지 못하고, 모든 집착에 대한 탐욕을 삼가며, 얽매임이 없어 아 무것에도 이끌리지 않는다면, 그는 세상에서 바르게 편력할 것이다.

(365)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거역하지 않고, 바르게 법을 알아 열반의 경지를 구한다면, 그는 세상에서 바르 게 편력할 것이다.

(366) 수행자가`그는 나를 숭배한다’하면서 거만해 하지 않고, 욕을 먹더라도 마음에 두지 않으며, 남에게서 음식을 얻었다고 해서 교만해지지 않으면, 그는 세상을 바르게 편력할 것이다.

(367) 수행자가 탐욕과 생존의 희망을 버리고, 다른 생물 을 자르거나 묶지 않고, 의혹을 넘어서 번뇌의 화살 을 뽑아 버린다면, 그는 세상에서 바르게 편력할 것이다.

(368) 수행자가 자기 분수에 알맞는 것을 알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해치지 않고 사실 그대로 이치를 안다면, 그는 세상에서 바르게 편력할 것이다.

(369) 그에게 있어서 어떤 잠재적인 집념도 없이 악한 뿌리가 뿌리채 뽑히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다 면, 그는 바르게 세상을 편력할 것이다.

(370) 번뇌의 때는 이미 가시고, 거만한 생각을 쉬고 모든 탐욕의 길을 넘어 스스로 억제하고 평안에 이르러 마음에 안정이 온다면, 그는 바르게 세상을 편력할 것이다.

(371) 신심이 있고 학식이 있는 어진이가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결정된 길을 보고, 여러 당파 사이에 있으면 서도 당파에 맹종하지 않으며, 탐욕과 혐오와 분노 를 삼간다면, 그는 바르게 세상을 편력할 것이다.

(372) 청정한 행으로써 번뇌를 이긴 승리자이며, 덮여 있 는 것을 벗겨 모든 사물을 지배하고, 피안에 이르러 흔들리지 않고,

생존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잘 인 식한다면, 그는 바르게 세상을 편력할 것이다.

(373)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쓸데 없는 생각을 하지 않고, 지극히 깨끗한 지혜가 있어 모든 변화하는 현상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으면, 그는 바르게 세상을 편력 할 것이다.

(374) 궁극의 경지를 알고, 이치를 깨달아 번뇌의 때를 씻 는 것을 보고, 모든 생존을 구성하는 요소를 멸해 버린 까닭에, 그는 세상을 바르게 편력할 것이다.”

(375) “거룩하신 스승이시여, 참으로 그렇습니다. 그와 같 이 생활하고 스스로 자제하는 수행자는 온갖 속박에 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는 바르게 세상을 편력할 것입니다.”

14. 담미카

(376)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날 거룩한 스승께서 는 사아밧티이의 제타 숲, 고독한 사람에게 음식을 베 푸는 장자의 동산에 계시었다. 그 때 담미카라는 재가 (在家) 신도가 오백 명의 신도들과 함께 스승께로 와서 예배한 뒤 한쪽에 앉았다.

담미카는 시로써 부처 님께 여쭈었다. “지혜가 넓으신 고오타마시여, 당신께 묻습니다.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은 출가하는 것과 집에서 믿 는 것과 어느 쪽이 더 좋은 것입니까?”

(377) 당신께서는 신들을 포함한 이 세계의 귀취(歸趣)와 궁극의 목적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미묘한 일 을 보는 데는 당신을 따를 이가 없습니다. 세상 사 람들은 당신을 뛰어난 눈 뜬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378) 당신께서는 널리 깨달으시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가엾이 여겨, 지식과 이치를 말씀 해주십니다. 널리 보시는 분이시여, 당신께서는 세상에 덮인 것을 벗겨 주시고, 티 없이 온 세상을 비추십니다.

(379) 에라아바나라고 부르는 코끼리 왕은 당신이 승자임 을 듣고 당신께로 왔었습니다. 그도 당신의 말씀을 듣고는`참, 좋구나.’ 하면서 기뻐 돌아갔습니다.

(380) 비사문 천왕인 쿠베라도 가르침을 듣고자 당신께 왔었습니다. 어지신 분이여, 그가 물었을 때도 당신 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도 또한 당신 말씀을 듣고 기 뻐했습니다.

(381) 아아지이비카 교도이건 자이나 교도이건 논쟁을 즐기는 어떤 이교도일지라도, 모두 지혜로써는 당신 을 당할 수 없습니다. 마치, 서 있는 사람이 달리는 사람을 따를 수 없는 것같이.

(382) 논쟁을 즐기는 어떠한 바라문이라도, 그가 노년이건 또는 중년이나 청년인 바라문일지라도, 혹은`나야 말로 논객(論客)이다’ 라고 자부하는 사람들까지도, 다들 당신의 도움을 얻고자 합니다.

(383) 스승이시여, 당신께서 말씀하신 이치는 미묘하고 또 한 안락을 가져 옵니다. 원컨대 저희들에게도 설해 주십시오. 위 없이 눈 뜬 분이시여.

(384) 출가 수행자들과 재가 신도들은 눈 뜬 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여기 모였습니다. 티 없는 사람(눈 뜬 사 람)이 깨닫고 가르치는 법을 듣기 위해서. 마치, 신 들이 인드라 신의 말을 듣는 것처럼.”

(385)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수행자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번뇌를 없애는 이 치를 그대들에게 말하겠노라. 그대들은 모두 그것을 잘 지키라. 뜻을 보는 지혜로운 이는 출가한 사람에게서 그 행동을 배우고 행하라.

(386) 수행자는 때가 아닌데 돌아다니지 말아라. 정해진 시각에 탁발을 하러 마을에 가라. 때가 아닌데 다니 면 집착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뜬 사람 들은 때가 아닌데 나다니지 않는다.

(387) 모든 빛 ,소리 ,냄새 ,맛 , 촉감은 사람을 도취시킨 다. 이런 것에 대한 욕망을 삼가고, 정해진 시각에 아침밥을 얻으러 마을에 들어 가라.

(388) 그리고 수행자는 정해진 때에 얻은 밥을 가지고 홀로 그늘에 앉아 라. 자신을 자제하고 안으로 돌이켜, 마음이 밖으로 쏠리게 해서는 안된다.

(389) 만일,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나 다른 수행자 들과 함께 이야기 할일이 있거든, 그 사람에게 훌륭 한 진리를 보여 주어라. 이간하는 말이나 남을 비방해서는 안 된다.

(390) 사실 어떤 사람들은 비방하는 말에 반발한다. 그처 럼 옹졸한 사람을 우리는 칭찬하지 않는다. 논쟁의 집착이 이곳 저곳에서 일어나 그들을 속박하므로 방심하게 된다.

(391) 지혜가 뛰어난 사람(부처님)의 제자는 행복한 사람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음식과 거처와 침구와 가 사(袈裟)의 때를 세탁할 물을 조심해서 사용하라.

(392) 그러므로 수행자는 음식을 씻고 침구와 가사를 세탁 할 물에 집착해 더럽히는 일이 없다. 마치 연꽃잎에 구르는 물방울처럼.

(393) 다음은 재가자가 해야 할 일을 말하리라. 이와 같이 실행하는 사람은 좋은 가르침을 듣는 사람이다. 순수한 출가 수행자에 대한 규정은, 소유의 번거로움 이 있는 사람이 지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394) 산 것을 몸소 죽여서는 안 된다. 또 남을 시켜 죽여 서도 안 된다. 그리고 죽이는 것을 보고 묵인해도 안 된다. 난폭한 것을 두려워하는 모든 생물에 대해서 난폭을 거두어야 한다.

(395) 그리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주지 않는 것은 무엇 이든, 또 어디에 있든, 그것을 갖지 말라. 남을 시켜 가지거나 남이 가지는 것을 묵인하지도 말라. 주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가져서는 안 된다.

(396) 슬기로운 사람은 음행(淫行)을 회피하라. 타오르는 불구덩이를 피하듯. 만일 불음(不淫)을 닦을 수가 없더라도, 남의 아내를 범해서는 안 된다.

(397) 집회의 장소에 있든 단체에 있든 간에, 누구도 남에 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남에게 거짓말을 시켜 도 안 된다. 또 남이 거짓말 하는 것을 묵인해도 안 된다. 모든 허망한 말을 하지 않는다.

(398) 또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이 불음주의 가르침을 기 뻐하는 재가자는 남에게 술을 마시게 해도 안 된다. 남이 술 마시는 것을 묵인해서도 안 된다. 이것은 마침 내 사람을 취하게 하고 미치게 하는 것임을 알라.

(399)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취함으로써 나쁜 짓을 하고, 또한 남들로 하여금 게으르게 하고 나쁜 짓을 하게 한다. 이 불행의 원인을 회피하라. 그것은 사람을 취하게 하고 미치게 하며 어둡게 하는 것인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를 즐기는 것이다.

(400) 첫째, 살아 있는 것은 해치지 말라. 둘째, 주지 않 는 것을 가지지 말라. 세째, 거짓말을 하지 말라. 네째, 술을 마시지 말라. 다섯째, 부정한 짓인 음행 을 떠나라. 여섯째, 밤에는 음식을 먹지 말라.

(401) 일곱째, 화환을 걸치지 말라. 향수를 쓰지 말라. 여 덟째, 땅위에 펼친 자리 위에서만 자라. 이것이야말 여덟 부분으로 된 우포오사타(齊戒)이다. 괴로움 을 없애 버린 부처가 가르친 바이니라.

(402) 그리고 각각 보름 동안 제14일, 15일, 제8일 에 우포오사타를 닦으라. 또 특별한 달에는 여덟 부분으로 된 원만한 우포오 사타를 청정한 마음으로 행하라.

(403) 우포오사타를 행한 식자(識者)는 청정하게 가라앉은 마음으로 기뻐하면서, 이튿날 아침 일찍 수행자에게 음식을 베푸어 주어라.

(404) 법답게 얻은 재물을 가지고 부모를 섬기라. 올바른 장사를 하라. 이와같이 열심히 살고 있는 재가자는 죽은 후에 <저 절로 빛이 난다>는 신들 곁에 태어나리라.

제3장 대품(大品)

1. 출가(出家)

(405) 눈이 있는 사람(부처님)은 어째서 출가를 했는지, 그는 무엇을 생각한 끝에 출가를 기뻐했는지, 그의 출가에 대해서 나는 이야기하리라.

(406) `집에서 사는 생활은 비좁고 번거로우며, 먼지가 쌓 이는 곳이다. 그러나 출가는 넓직한 들판이며 번거 로움이 없다’고 생각해 출가한 것이다.

(407) 출가한 다음에는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를 멈추었다. 말로서 짓는 악행(惡行)도 버리고, 아주 깨끗한 생활을 하였다.

(408) 눈 뜬 사람은 마가다 나라의 서울, 산으로 둘러 싸 인 왕사성(王舍城)으로 갔다. 뛰어난 모습을 가진 그는 탁발하기 위해 그곳으로 간 것이다.

(409) 마가다 왕 빔비사라는, 높은 다락 위에서 그를 보았다. 뛰어난 모습을 가진 그를 보고 신하들에게 말했다.

(410) “그대들은 저 사람을 보아라. 아름답고 건장하고 깨끗할 뿐 아니라, 행동도 얌전하게 앞만을 본다.

(411) 그는 눈을 아래로 뜨고 정신을 차리고 있다. 저 사 람은 천한 집 출신이 아닌 것 같다. 사신들이여, 뛰 어가 그를 따르라. 저 수행자는 어디로 가는가.”

(412) 왕의 사신들은 그의 뒤를 따라 갔다. “저 수행자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는 어디에 사 는 것일까?”하면서.

(413) 그는 모든 감관을 억제하여 잘 지키고 바르게 깨닫 고 조심하면서 집집마다 음식을 빌어 잠깐 동안에 바리때를 채웠다.

(414) 거룩한 분은 탁발을 끝내고 그 도시 밖으로 나와 판 다바산으로 향했다. 아마 그는 그 곳에 살고 있는 모양이다.

(415) 고오타마가 자기의 처소에 가까이 이른 것을 보자 사신들은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그리고 한 신하는 왕궁으로 돌아가 왕에게 아뢰었다.

(416) “대왕이시여, 그 수행자는 판다바산 앞쪽에 있는 굴 속에 호랑이나 황소처럼, 그리고 사자처럼 앉아 있습니다.”

(417) 사신의 말을 듣자 빔비사아라 왕은 화려한 수레를 타 고 판다바산으로 길을 재촉했다.

(418) 왕은 수레로 갈수 있는 곳까지 달려간 뒤 수레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 그 곁에 앉았다.

(419) 왕은 기뻐하면서 인사를 나눈 후 이렇게 말했다.

(420) “당신은 젊음이 넘친 인생의 봄입니다. 용모도 수려하고 귀한 왕족 태생인 것 같습니다.

(421) 코끼리 떼를 앞세운 날쌘 군대를 정비해서 나는 당 신께 선물로 드리겠으니 그것을 받으십시오. 나는 당 신의 태생을 알고 싶으니 말해 주십시오.”

(422) “왕이여, 저쪽 히말라야 중턱에 한 민족이 있습니다. 옛부터 코오살라 나라의 주민으로 부(富)와 용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423) 성은 <태양의 후예>라 하고, 종족은 <석가족>이라 합니다. 왕이여, 나는 그런 집에서 출가했습니다. 욕 망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424) 모든 욕망에는 우환이 있고, 출가는 안온하다고 알 아 힘써 정진합니다. 내 마음은 이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2. 힘써 닦는 일

(425) 네란자라아강 기슭에서 평안을 얻기 위해 힘써 닦 고 명상하는 나에게,

(426) 악마 나무치는 위로의 말을 건네며 다가왔다. “당신은 야위었고 안색이 나쁩니다. 당신은 죽음에 임박해 있습니다.

(427) 당신이 죽지 않고 살 가망은 천에 하나입니다.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생명이 있어야만 모든 착한 일도 할 수 있으므로.

(428) 당신이 베다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청정한 행을 하고 성화(聖火)에 제물을 올리는 고행을 쌓는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429) 애써 정진하는 길은 가기 힘들고 행하기 힘들며 도 달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같은 시를 읊으면서 악마는 눈뜬 분 곁에 섰다.

(430) 악마가 이렇게 말하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게으름뱅이의 친척이여, 악한 자여, 그대는 세상의 선업(善業)을 구해서 여기에 왔지만,

(431) 내게는, 세상의 선업을 찾아야 할 필요는 털끝만치도 없다. 악마는 선업의 공덕을 구하는 자에게 가서 말하라.

(432) 네게는 믿음이 있고, 노력이 있고 지혜가 있다. 이처럼 전심하는 나에게 너는 어찌하여 생명의 보전을 묻는가?

(433) 애쓰는 데서 일어나는 이 바람은 강물도 마르게 할 것이다. 오로지 수도에만 정진하는 내 몸의 피가 어찌 마르지 않겠는가.

(434) 몸의 피가 마르면 쓸개도 가래침도 마를 것이다. 살 이 빠지면 마음은 더욱더 밝아지리라. 내 생각과 지 혜와 순일한 마음은 더욱더 편안하게 될 것이다.

(435) 나는 이토록 편안히 살고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 으므로 내 마음은 모든 욕망을 돌아 볼 수가 없다. 보라, 이 마음과 몸의 깨끗함을!

(436) 너의 첫째 군대는 욕망이고, 둘째 군대는 혐오이며, 셋째 군대는 기갈, 넷째 군대는 애착이다.

(437) 다섯째 군대는 권태와 수면, 여섯째 군대는 공포, 일곱째 군대는 의혹, 여덥째 군대는 겉치레와 고집이다.

(438) 잘못 얻은 이득과 명성과 존경과 명예와 또한 자기 를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

(439) 나무치여, 이것들은 너의 병력(兵力)이다. 검은 악마의 공격군인 것이다. 용감한 사람이 아니면 그를 이겨낼 수가 없다. 용자는 이겨서 즐거움을 얻는다.

(440) 내가 문자풀을 입에 물 것 같은가? (적에게 항복 할 것 같은가) 이 세상의 생은 달갑지 않다. 나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겠다.

(441) 어떤 수행자(비구)나 바라문들은 너의 군대에게 패해 버리고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덕 있는 사람들의 갈길조차 알지 못한다.

(442) 병력이 사방을 포위하고 악마가 코끼리를 탄 것을 보았으니, 나는 그들을 맞아 싸우리라. 나로 하여금 이곳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라.

(443) 신들도 세상 사람도 너의 병력을 꺽을 수 없지만, 나는 지혜를 가지고 그것을 깨뜨린다. 마치 굽지 않은 흙단지를 돌로 깨뜨려 버리듯이

(444) 스스로 사유(思惟)를 자제하고 신념을 굳게 하고 이 나라 저 나라로 편력할 것이다.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445) 그들은 내 가르침을 실행하면서 게으르지 않게 노력하고 있다. 그곳에 가면 근심할 것이 없고, 욕망 이 없는 경지에 그들은 도달하리라.”

(446) 악마는 말했다. “우리들은 칠년 동안이나 그(부처님)를 한발 한발 따라 다녔다. 그러나 항상 조심하고 있는 정각자(正覺者)에게는 뛰어들 틈이 없었다.

(447) 까마귀가 기름 빛깔을 한 바위의 둘레를 맴돌며`이 곳에서 말랑말랑한 것을 얻을 수 없을까? 맛좋은 먹이가 없을까?’ 하며 날아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448) 그곳에서 맛있는 것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까마 귀는 날아가 버렸다. 바위에 가까이 가본 그 까마귀 처럼, 우리는 지쳐서 고오타마를 떠나 간다.”

(449) 근심에 잠긴 악마의 옆구리에서 비파(琵琶)가 뚝 떨어졌다. 그만 그 야차는 기운 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3. 훌륭하게 말해진 것

(450)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날 거룩한 스승 부처 님께서는 사아밧티이의 제타 숲, 고독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는 장자의 동산에 계시었다. 그 때 스승은 여러 사문들을 불렀다.

“사문들이여.” “거룩하신 스승이시여.” 하고, 사문들은 스승께 대답했다. 스승께서는 말씀하시었다. “사문들이여, 네 가지 특징을 갖춘 말씀은 훌륭하게 설해져 조금도 잘못되지 않았다. 모든 지자(智者)들이 보아도 결점이 없어 비난 받지 않을 것이다.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사문들이여, 여기서 사문이 훌륭하게 설한 것만을 말하고, 잘못 설해진 것을 말하지 않으며, 법만을 말하고 비법을 말하지 않으며, 좋은 것만 말하고 좋 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으며, 진실만을 말하고 거짓된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하자. 사문들이여, 이 네 가지 특징이 갖추어져 있는 말은 훌륭하게 설해진 말이고 잘못 설해진 것이 아니다. 모든 지자들이 보 아도 결점이 없어 비난 받지 않을 것이다.” 이같이 말씀하신 후, 행복한 사람인 스승께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착한 사람들은 가장 좋은 말씀을 한다.

이것이 첫째다. 법을 말하고 비법을 말하지 말라. 이것이 둘 째다. 좋은 말을 하고 좋지 않은 말을 하지 말라. 이것이 세째다. 진실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말라. 이것이 넷째다.”

이 때 방기이사 장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한 쪽 어깨에 걸치고 스승이 계신 곳을 향해 합장하고 말했다.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행복한 분이시여.” “어디 말해보라. 방기이사여.” 라고, 스승은 말씀하셨다. 방기이사 장로는 스승앞 에서 알맞는 시로써 스승을 찬탄했다.

(451) “`자기를 괴롭히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는 말만을 하 여라.’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잘 설해진 말씀입니다.

(452) `좋은 말만을 하여라.’ 이것은 기꺼이 환영받을 말입니다. 느낌이 나쁜 말을 쓰지 말고 남의 맘에 드 는 말만을 하는 것입니다.

(453) 진실은 참으로 불멸(不滅)의 말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법칙입니다. 착한 사람들은 진실에, 사물에, 또는 이치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454) 평안에 이르기 위해서,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 부 처님이 설하신 말씀은 여러 말 가운데서 가장 뛰어 난 것입니다.”

4. 순다리카 바아라드바아자

(455)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코오 살라 나라 순다리카아 강변에 살고 계셨다. 마침 그 때 바라문인 순다리카 , 바아라드바아자는 순다리카 아 강변에서 성화(聖火)를 받들어 불에 공양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라문인 그는 불에 공양이 끝나자 자 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두루 살피면서 말했다. “이 공양의 나머지를 누구에게 줄까?” 그는 머지 않은 곳에 거룩한 스승이 나무 아래서 머리까지 옷을 둘러 쓰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는 왼손에는 공양의 나머지를 들고, 바른 손에는 물 병을 들고 스승께로 갔다. 스승은 그의 발소리를 듣 고 머리에 둘렀던 것을 벗었다.

순다리카 , 바아라드바아자는,`이분은 머리를 깎고 계시다. 이분은 삭발한 분이다’하며, 되돌아 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설사 머리를 깎았다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바라문 일 수도 있다.

가까이 가서 그의 출신을 물어 보리라.’ 그는 스승께 가까이 가서 물었다. “당신의 출신은 무엇입니까?”

스승은 바라문인 순다리카 , 바아라드바아자에게 시 로써 말씀하셨다. “나는 바라문도 아니고 왕자도 아니오. 나는 바이샤 족 사람도 아니고, 다른 아무 것도 아니오. 모든 범부의 성(姓)을 잘 알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생각하면서 세상을 두루 다니오.

(456) 나는 중의(重衣)를 걸치고 집이 없으며, 수염과 머리를 깎고 마음을 편안히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거닐고 있소. 바라문이여, 당신이 내게 성을 묻는 것은 당치 않소.”

(457) “여보시오, 바라문이 바라문을 만났을 때에는 `당신 은 바라문이 아닙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 자신이 바라문이거든 바라문이 아닌 내게 대답하시오. 나는 당신에게 세 귀절 스물 넉자로 된 저 사아비트리이 찬가(讚歌)를 묻겠소.”

(458) “이 세상에서 선인(仙人)이나 왕족, 바라문이나 일 반인들은 무엇 때문에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까?”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궁극에 이른 베에나에 통달한 사람이 제사 때 어떤 세속인의 헌공(獻供)을 받는다면, 그 사람의 제사는 성취한 것이오.”

(459) 바라문이 말했다. “나는 베에다에 뛰어난 사람을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대한 나의 헌공은 성취할 것입니 다.

이전에는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해 다른 사람이 남은 제물을 먹었습니다.”

(460) 스승께서 말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당신은 의로운 사람으로 의 를 구해 왔으니 가까이 와서 물으시오. 아마도 이 곳 에서 평안하고 성냄의 연기가 사라져, 괴로움과 욕 심이 없는 총명한 사람을 만날 것이오.”

(461) “고오타마시여, 저는 제사를 즐기고 있습니다. 또, 제사를 지내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똑똑히 알지 를 못합니다.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무엇에 바치는 헌공이 효과가 있는가를.” `그럼 바라문이여, 귀를 기우리시오. 나는 당신에게 법을 설하리다.

(462)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으시오. 불은 온갖 섶 에서 일어나는 것, 천한 집에 태어난 사람이라도, 성인으로 도심(道心)이 굳고, 부끄러워하고 뉘우 치는 마음으로 행동을 삼가면 고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오.

(463) 진실을 가지고 자제하고 모든 감관을 억제하며, 베다의 깊은 뜻을 통달하고 청정한 행을 닦는 사람 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치시오. 복과 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해야 합니다.

(464) 모든 욕망을 버리고 집 없이 걸으며, 자기 분수를 잘 알아 억제하고, 베틀의 북처럼 곧은 사람들, 그 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치시오.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시오.

(465) 탐욕을 떠나 모든 감관을 조용히 지키고, 달이 라 아후의 장애에서 빠져 나가듯이 걸림이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치시오. 복덕을 구하 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시오.

(466) 집착하는 일 없이 항상 마음을 다스려 내것이라고 고집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을 거니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치시오.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해야 합니다.

(467) 모든 욕망을 버리고 욕심을 이겨 생사의 끝을 알고 평안에 돌아가, 맑고 시원한 호수처럼 완전한 사 람(如來)은 공양을 받을 만합니다.

(468) 완전한 사람(如來)은 평등한 자(과거에 눈이 열린 사람들, 여러 부처님들)와 같고, 평등하지 않은 사 람과는 멀리 떨어져 있소. 그는 끝 없는 지혜를 가 지고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서 때가 묻지 않소.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합니다.

(469) 거짓과 교만과 탐욕을 떠나 내것이라고 집착하거나 욕망과 성냄이 없어, 마음 고요히 근심의 때를 버린 바라문인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합니다.

(470) 마음의 집착을 이미 끊고 아무것에도 붙들리지 않으며,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서나 걸림이 없는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합니다.

(471) 마음을 한결같이 안정하여 거센 흐름을 건너고, 가장 뛰어난 지혜로써 법을 알고, 번뇌의 때를 소멸 해 최후의 몸을 가지고 있는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합니다.

(472) 생존의 더러움과 거친 말씨도 없어져 버렸소. 그는 베에다에 통한 사람이고, 모든 일에 대해 해탈하였소.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합니다.

(473) 집착을 넘어 집착이 없고, 교만한 마음이 가득한 사 람들 가운데 있으면서 교만한 마음이 없으며, 밭이 나 땅과 함께 괴로움을 잘 알고 있는 완전한 사람 은 공양을 받을 만합니다.

(474) 욕망에 끌리지 않고 멀리 떠나는 것을 보고, 남들이 가르치는 다른 견해를 초월하여 아무것에도 걸리지 않은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합니다.

(475) 이것 저것 모든 사물을 깨달아 이미 그것이 제거되 고 존재하지 않소. 평안에 돌아가 집착을 버리고 해 탈한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합니다.

(476) 번뇌의 속박과 이 세상의 생존을 멸해 버린 궁극의 경지를 보고, 애욕의 길을 남김없이 끊고 청정해서, 결점과 티가 없이 투명한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합니다.

(477) 자기가 자기 자신을 보고 인정하지 않으며, 마음이 안정되고 신체가 곧아, 스스로 편히 머물러 동요하 지 않으며, 마음이 거칠지 않고 의혹이 없는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합니다.

(478) 헤매임(迷妄)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장애는 아무것 도 없고, 온갖 것에 대해 지견(知見)이 있으며, 최 후의 몸을 가지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 이것만 으로도 사람은 깨끗해진다 – 완전한 사람은 공양 을 받을 만합니다.’

(479) `당신과 같은 베에다에 뛰어난 사람을 만났으니, 저 의 제물은 참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범천(梵天)께 서 증인이 되어 살펴 주십시오. 스승이시여, 원컨대 저에게서 받아 주십시오. 스승이시여, 저의 공양을 받아 주십시오.”

(480) “시를 읊어 얻은 것을 나는 먹을 수 없소. 바라문이여, 이것은 바르게 보는 사람들 (눈뜬 사람들, 모든 부처님들)의 법이 아니오. 시를 읊어 얻은 것을 눈 뜬 사람들은 물리치오. 바라문이여, 이것이 바로 눈 뜬 사람들의 생활 규범이오.

(481) 완전한 사람인 위대한 선인(仙人), 번뇌의 때와 악 행(惡行)을 소멸한 사람에게는 다른 음식을 바치시 오. 그것이야말로 공덕을 바라는 이의 복밭이기 때문이오.”

(482) “스승이시여, 저 같은 사람은 보시를 받을 수 있는 사람, 제사 때 찾아가 공양을 드릴 사람을, 저는 당신의 가르침을 받아 알고 싶습니다.”

(483) “격정을 떠나 마음에 흐림이 없고, 모든 욕망을 벗 어나 근심을 없앤 사람. (484) 한계의 끝(번뇌)을 눌러 생사를 다 알고, 성인의 덕 성을 몸에 갖춘 그러한 성인이 제사를 위해 왔을 때,

(485) 그에게 눈섭을 찌푸리지 말고 합장하여 예배하시오. 음식을 가지고 그를 공양하시오. 이러한 보시는 뜻 을 이루게 되고 그 과보를 가져 오는 것이오.”

(486) “눈을 뜬 당신은 공양을 받기에 마땅합니다. 당신은 으뜸가는 복밭이고 온 세상의 보시를 받으실 분입니다. 당신께 드린 물건은 커다란 과보를 가져 올 것 입니다.” 바라문인 순다리카 바아라드바아자는 스승께 말씀 드렸다.

“훌륭하십니다, 고오타마시여. 훌륭하십니다, 고오 타마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듯이, 가려진 것을 벗겨 주듯이, 방향을 잃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듯이, 그리고 `눈 있는 이는 빛을 보리라’ 하면서 암흑속에서 등불을 비쳐 주듯이, 고오타마께서는 여 러 가지 방법으로 법을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고오 타마 당신께 귀의합니다. 그리고 법과 수행승의 모 임에 귀의합니다. 저는 고오타마께 출가하고 완전한 계율(具足戒)을 받겠습니다.”

그리하여 바라문 순다리카 바아라드바아자는 스승 께 출가하고 완전한 계율을 받았다. 그러더니 얼마 후에 이 장로 순다리카 바아라드바아자는 홀로 멀 리 떠나 게으르지 않고 애써 정진 끝에 더없이 청정 한 행의 궁극 -모든 선남자들이 바로 그것을 얻기 위해 집을 떠나 집 없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인데 – 을 이 세상에서 스스로 깨닫고, 이를 증명하고 구현 하며 세월을 보냈다. `태어나는 일은 끝났다. 청정한 행은 이미 완성되었다. 할 일을 다 마쳤다. 이제 두번 다시 이런 생을 받지는 않는다’고 깨달았다. 그래서 순다리카 바아 라드바아자 장로는 성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5. 마아가

(487)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날 거룩하신 스승께서 는 왕사성의 독수리 봉(鷲峰)에 계시었다. 그 때 마 아가 청년은 스승이 계신 곳으로 가서 인사를 드렸다. 기쁘고 기억할 만한 인사를 나눈 뒤 한옆에 앉 더니 스승께 말했다.

“고오타마시여, 저는 참으로 베푸는 사람이며, 관대 하여 구하는 바에 응하며, 법에 따라 재물을 구합니다. 그리고는 법에 의해서 얻은 재물을 한 사람에게 도 주고, 두사람에게도 주고, 세 사람, 네 사람, 다 섯 사람, 여섯 사람, 일곱, 여덟, 아홉, 열 사람, 스무 사람, 설흔, 마흔, 쉰 사람에게도 주고, 백 사 람에게도 주며, 더 많은 사람에게도 나누어 줍니다. 고오타마시여, 내가 이렇게 주고 이와 같이 바친다면 얼마나 많은 복덕을 얻겠습니까?” “젊은이여, 그대가 참으로 주고 그와 같이 바친다면, 많은 복덕을 얻게 되리라. 젊은이여, 누구든지 참으로 주는 시주이거나, 관대하여 구하는 바에 응하며, 법에 따라 재산을 얻어 그 재산으로 하여금 한 사람내지는 백 사람에게 나 누어 주며,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은 많 은 복덕을 얻게 되리라.” 마아가 청년은 시로써
여쭈었다. 마아가 청년이 말했다.

(487) “가사를 입고 집 없이 다니는 너그러우신 스승 고오 타마께 저는 묻겠습니다. 베풀어 주기를 원하는 데 따르는 재가(在家)의 시주, 복덕을 구하고 복덕을 위해 공양을 바치고, 이 세상 에서 남에게 음식을 주는 사람이, 제사를 지낼 때에 는 누구에게 바치는 제물이 가장 깨끗합니까?”

(488) 스승은 대답하셨다. “마아가여, 시물(施物)을 구하는 데에 따르는 재가 의 시주, 복덕을 구하고 복덕을 위해 공양을 바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남에게 음식을 베푸는 것으로 써 받을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어야 한다.”

(489) 마아가 청년은 말했다. “시물을 구하는 데 따르는 재가의 시주, 복덕을 구하고 복덕을 위해 공양을 바치는 사람이, 이 세상 에서 남에게 음식을 베풀 때에, 마땅히 보시를 받을 사람을 제게 말씀하여 주십시 오. 스승이시여.”

(490) “참으로 집착 없이 세상을 걸어 가고, 아무것도 가 진 것 없이 자기를 다스리는 완전한 사람,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 들을 공양하라.

(491) 모든 결박을 끊고 자제하고 해탈하여 괴로움과 욕심이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492) 모든 결박에서 벗어나 자제하고 해탈하여 괴로움과 욕심이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 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493) 탐욕과 혐오와 미망(迷妄)을 버리고 번뇌의 더러움 에서 벗어나 청정한 행을 닦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494) 거짓도 없고 교만도 없고, 탐욕을 떠나 내것이라고 집착하지도 않고, 욕망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 그들 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 은 그들을 공양하라.

(495) 참으로 온갖 애착에 붙잡히지 않고, 이미 거센 흐름 을 건너 내것이라는 집착이 없이 다니는 사람들, 그 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 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496)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어떠한 세상에 있어서도 갖가지 생존에 대한 애착이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 들을 공양하라.

(497) 모든 욕망을 버리고 집없이 다니며 자신을 억제하고 배틀의 북처럼 똑바른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498) 탐욕을 떠나 모든 감관을 안정시켜 달이 월식에서 벗어나듯이 붙들리지 않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 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499) 평안에 돌아가고 탐욕을 떠나 성내지 않으며, 이 세 상에서 생존의 모든 요소를 버리고, 갈 길이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 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500) 생과 사를 남김 없이 버리고 모든 의혹을 넘어 선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501) 자기를 델타(洲 = 의지처)로 하여 세상을 다니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모든 일로부터 해탈한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502) `이것이 마지막 생존이고 다시는 생을 받지는 않는 다’라고, 이 세상에서 똑똑히 알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503) 베다를 잘 알고, 고요한 마음을 즐기며, 생각이 깊고, 깨달음을 얻어 많은 사람을 귀의시킨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504) “참으로 제 질문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보시받을 사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스승이시여, 당신 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이 세상에서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당신께서는 이 이치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 입니다.”

(505) 마아가 청년이 다시 말했다. “보시를 받고자 하는 데에 응하는 재가의 시주, 복덕을 구하고 복덕을 위해 공양을 바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남에게 음식을 줄 때, 완전한 제사가 어떤 것인지를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요. 스승님.”

(506) 거룩한 스승은 대답하셨다. “마아가여, 제사를 지내라.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어 떤 경우라도 마음을 깨끗이하여라. 제사지낼 사람이 전심할 일은 오로지 제사뿐이다. 그는 여기에 편안히 머물러 사악(邪惡)을 버린다.

(507) 그는 탐욕에서 떠나 사악(邪惡)을 누르고 한량 없는 자비심을 일으켜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아서 그 마음 이 사방에 가득 차게 한다.”

(508) “누가 깨끗해지고 해탈하는 것입니까? 누가 붙들려 얽매일 것입니까? 무엇으로 인해 사람은 스스로 범 천계(梵天界)에 이릅니까? 성인이시여, 몰라서 묻 는 것이니 일러 주십시오. 스승이시여, 저는 지금 범천을 눈 앞에 보았습니다. 진실로 당신은 범천과 같은 분이십니다. 빛을 지닌 이시여, 어떻게 하면 범천계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509) 스승은 대답하셨다. “마아가여,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완전한 제사를 지 낼 수 있는 사람은 보시 받는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보시에 응하는 사람이 이처럼 바르게 제사를 지낸다면 범천계에 태어날 것이다.”

(510) 이와 같이 말씀하셨을 때, 마아가 청년은 스승께 아뢰었다. “훌륭하십니다, 고오타마시여.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고오타마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사람에게 길을 가리켜 주 듯이, 그리고`눈 있는 사람은 빛
을 볼 것이다’하며 암흑 속에서 등불을 비쳐 주듯이, 고오타마께서는 여 러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고오 타마께 귀의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수행승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오늘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 스승 고오타마께서는 저를 집에 있는 신도로서 받아 주십시오.”

6. 사비야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날 거룩하신 스승께서는 왕사성 죽림원(竹林園)에 있는 다람쥐 사육장에 머물고 계시었다. 그 때 편력 중인 수행자 사비야에 게 옛 혈연자(血緣者)인 한 신(神)이 말했다. “사비야여, 사문이건 바라문이건 그대가 질문을 했 을 때 분명히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이 있거든 그대는 그 밑에서 깨끗한 행을 닦아라.”

편력의 수행자 사비야는 그 신에게서 그와 같은 말 을 배워 가지고 다음의 여섯 스승을 찾아가 물었다. 즉, 푸우라나 캇사파, 막카리 고오사아라, 아지타 케에사캄바리, 파쿠타 캇차아야나, 베랏티 족의 아 들인 산자야, 나아타 족의 아들 니칸타 등인데, 그 들은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많은 무리들을 이끄는 단체의 스승이었다.

명성을 떨치고, 교파(敎派)의 교 조이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인(善人)이라고 숭배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편력의 수행자 사비야에게서 질문을 받았지 만, 만족하게 답변을 하지못했다. 그 뿐 아니라, 화를 내고 혐오와 근심의 빛을 감추지 못했으며, 도리 어 사비야에게 반문을 했다. 그래서 사비야는 이렇 게 생각했다.

`이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많은 무리를 이끄는 단체의 스승이며, 명성이 있고, 교파의 교조로서 많은 사람들 로부터 숭배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내게서 질 문을 받고도 만족스런 대답을 못했다.

뿐만 아니라, 화를 내고 혐오와 근심의 빛을 감추지 못했으며, 내 게 도리어 반문을 했다. 나는 그만 집으로 돌아가 세속적인 욕망이나 누릴까 보다.’ 그러다가 사비야는 다시 이렇게 생각했다. `여기 계신 사문 고오타마도 많은 무리를 거느린 단 체의 스승이시며, 명성이 있고, 교파의 교조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인이라 숭배를 받고 있다. 고오타 마를 찾아가 물어 봐야겠다.’ 그러면서 사비야는 이런 생각도 했다. `여기 있는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연만해서 아주 늙은 이들이지만, 상좌에 있고 경험을 쌓았으며 출가한 지 가 퍽 오래 되었다. 그런데도 내게 해답을 못해 주었는데, 어찌 사문 고오타마가 내 물음에 똑똑히 답해 줄 수 있을까?

사문 고오타마는 아직 젊고 출가한 지도 오래 되지 않았는데……’ 그러다가 사비야는 또 이렇게 생각했다.

`사문을 젊다고 해서 우습게 보거나 경멸해서는 안 된 다. 그는 젊지만 사문이다. 그에게는 큰 신통(神通)과 위력이 있다. 나는 고오 타마에게 가서 물어 보리라.” 그리하여 사비야는 왕사성을 향해 길을 떠났다. 죽림원 다름쥐 사육장에 계시는 거룩한 스승을 뵈었다. 기쁘고 기억에 남을 만한 인사를 나눈 뒤 한곁 에 앉았다. 사비야는 스승께 시로써 여쭈었다. “의혹이 있어 질문하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저를 위 해 그 의혹을 풀어 주십시요. 제가 물으면 차례대로 법에 따라 분명히 대답해 주십시오. ”

(511) 스승께서는 대답하셨다. “당신은 질문을 하려고 멀리서 왔소. 당신을 위해 그것을 풀어 주리다. 당신이 물으며 차례대로 법에 따라서 분명하게 대답해 주겠소.

(512) 사비야여, 무엇이든 마음에 있는 것을 물어 보시 오. 나는 낱낱이 물음에 대답해 드리리다.”

(513) 이 때 사비야는 생각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내가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에 게서는 들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는데, 사문 고오타 마께서는 그 기회를 주시는구나.’ 그는 기뻐하면서 스승께 여쭈었다. 사비야가 물었다. “무엇을 얻은 사람을 수행승이라 부릅니까? 무엇에 의해 온화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자신을 억제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어째서 눈 뜬 사람이라 부릅니까? 스승이시여, 이것을 제게 설명해 주십시오.”

(514) 스승은 대답했다. “사비야여, 스스로 도를 닦아 완전한 평안에 이르 고, 의혹을 뛰어 넘으며, 생존과 쇠멸(衰滅)을 버리 고 청정한 행에 머물러 이 세상에 거듭 태어나지 않 는 사람, 그를 수행승이라 합니다.

(515) 모든 일에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혀 이 세상 아무것 에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흐름을 건너 더럽히지 않 고 욕정이 일어나지 않는 사문, 그를 온유한 사람이라 합니다.

(516) 온 세상에서 안팎으로 모든 감관을 수양하고, 이 세 상과 저 세상이 싫어 멀리하며, 죽을 때를 기다리며 수양하는 사람, 그는 자기를 억제한 사람입니다.

(517) 모든 우주시기(宇宙時期)와 윤회와 목숨이 있는 자의 생과 사, 그 두 가지를 사유 분별하여 티끌을 털어 버리고, 깨끗하게 생을 멸해 버린 사람, 그를 눈뜬 사람이라 합니다.”

(518) 그 때 사비야는 스승의 말씀을 듣고 몹시 기뻐하면 서 환희한 마음으로 다시 스승께 물었다. 사비야가 여쭈었다. “무엇을 얻은 사람을 바라문이라 합니까? 무엇을 가 지고 사문이라 합니까? 왜 목욕하는 사람이라고 부 릅니까? 어째서 용(龍)이라고 부릅니까? 스승이 시여, 제 물음에 대답해 주십시오.”

(519)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사비야여, 모든 악을 물리치고 때묻지 않고, 마음 을 잘 가라앉혀 스스로 안정하며, 윤회를 넘어서 완전한 자가 되어 걸림이 없는 사람, 그를 <바라문>이라 합니다.

(520) 평안에 돌아가 선과 악을 버리고 때묻지 않으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고 생과 사를 초월한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사문>입니다.

(521) 온 세상에서 안팎으로 모든 죄악을 씻어 버리고, 시 간의 지배를 받는 신과 인간 속에 살면서도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 그를 <목욕하는 사람>이라 부릅니다.

(522) 세상에 있으면서 어떠한 죄악도 짓지 않고 온갖 매 듭의 얽힘을 풀어 버리고 모든 것에서 해탈한 사람, 이런 사람을 <용>이라 합니다.”

(523) 그 때 편력의 행자 사비야는 스승의 말씀을 듣고 몹시 기뻐하면서 환희한 마음으로 또다시 스승께 물었다. 사비야는 여쭈었다. “모든 눈 뜬 사람(부처님)은 누구를 밭의 승자(勝者) 라 부릅니까? 무엇을 가지고 출중하다 합니까? 어째서 현자(賢者)입니까? 어떻게 해서 성인이라 불립니까? 스승이시여, 제 물음에 대답해 주십시요.”

(524)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사비야여, 하늘의 밭, 사람의 밭, 범천의 밭 등, 모든 밭을 분별하고 모든 밭의 근본인 속박에서 벗 어난 사람, 이러한 사람이 바로 그 때문에 <밭의 승 자>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525) 하늘의 광(藏), 사람의 광, 범천의 광 등, 모든 광 을 분별하고 모든 광의 근본인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그 때문에 <출중한 사람>이라 불립니다.

(526) 내외(內外) 양면에서 흰 것을 분별하여 청정한 지혜 가 있고, 흑과 백 (善惡法)을 초월한 사람, 이런 사람은 바로 그 때문에 <현자>라 불립니다.

(527) 온 세상에서 안팎으로 정사(正邪)의 법을 알고, 인 간과 신의 숭배를 받아 집착의 그물을 벗어난 사람, 그는 <성인>입니다.”

(528) 그 때 편력의 행자(行者) 사비야는 스승의 말씀 듣고 기뻐하며 환희한 마음으로 다시 스승께 질문했다. 사비야가 여쭈었다. “무엇을 얻은 이를 베에다에 통달한 사람이라 부릅 니까? 어떻게 해서 알 수 있는 겁니까? 어떻게 해서 경 책(警策)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까? 태생이 좋다 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스승이시여, 저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529)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사비야여,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베다를 잘 분별해서 모든 감수(感受)에 대한 탐 욕을 버리고 그 감수마저 초월한 사람, 그는 <베다에 통달한 사람> 입니다.

(530) 안팎으로 병의 근원이 되는 망상의 명칭과 형태를 알아서, 온갖 병의 근원인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 그런 사람은 바로 그 때문에 <달관한 사람>이라 불리웁니다.

(531) 이 세상에서 모든 죄악을 떠나 지옥의 고통을 초월 하고 경책하는 사람, 힘을 다해 정진하는 현자, 그런 사람이 <경책하는 사람>이라 불립니다.

(532) 안팎으로 집착의 근원인 모든 속박을 잘라 버리고, 온갖 집착의 근원인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 그러한 사람은 바로 그 때문에 <태생이 좋은 사람>이라고 불리웁니다.”

(533) 그 때 편력의 행자 사비야는 스승의 말씀을 듣고 기 뻐하면서 가득찬 마음으로 다시 스승께 질문했다. 사비야가 물었다. “무엇을 얻은 사람을 박식(博識)한 사람이라 부릅 니까? 무엇에 의해 거룩하게 됩니까? 또 어떻게 해야만 행(行)이 갖추어진 사람이 됩니까? 편력의 행자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스승이시여, 저에게 설 명해 주십시오.”

(534) 스승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비야여, 가르침을 듣고 나서는, 세상의 옳고 그 른 모든 이치를 잘 알고, 모든 일의 정복자, 의혹이 없는 사람, 해탈한 사람, 괴로움이 없는 사람을 <박 식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535) 모든 더러움과 장애를 끊고 지혜로운 이는 모태(母胎)에 들지 않습니다. 세 가지 생각과 더러움을 털 어 버리고 망상 분별을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을 <성인>이라 부릅니다.

(536)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할 일을 다하고 뛰어나 항상 이치를 알며, 어떤 일에도 집착하지 않고, 해탈하여 성냄이 없는 사람, 그를 <행이 갖추어진 사람>이라 부릅니다.

(537) 위로나 아래로, 또는 옆으로나 가운데로 모름지기 괴로움의 과보가 생기는 행위를 피하여, 잘 알아 행 하고 거짓과 교만한 마음과 탐욕과 성냄과 명칭과 형태를 없애 버리고, 얻을 것을 얻은 사람, 그를 <편 력의 행자>라 부릅니다.”

(538) 그 때 편력의 행자 사비야는 스승의 말씀을 듣고 몹 시 기뻐하면서 환희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웃 옷을 한편 어깨에 걸치고, 스승께 합장하며 알맞는 시로써 스승을 찬탄하였다.

“사문들의 논쟁에 휘말린 명칭과 문자와 표상(表象) 에 의해 일어난 예순 세 가지 이설(異說)을 이기고, 지혜 많은 분은 거센 흐름을 건느셨습니다.

(539) 당신은 괴로움을 모두 없애고 피안(彼岸)에 이른 분 입니다. 당신은 참 사람이시고 깨달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번뇌의 때를 씻어버린 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신은 빛이 있고, 이해 있고, 지혜가 많습니다. 괴로움을 없앤 분이시여, 당신은 저를 구해 주셨습 니다.

(540) 당신은 저에게 의혹이 있는 것을 아시고, 저를 의혹 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저는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성인이시여, 성인의 길 을 다하신 분이여, 마음이 거칠지 않은 태양의 후예 시여, 당신은 인자하십니다.

(541) 제가 예전에 품었던 의문을 당신께서는 똑똑히 밝혀 주셨습니다. 눈이 있는 이여, 성인이시여, 참으로 당신은 깨달으신 분입니다. 당신에게는 장애되는 것 이 없습니다.

(542) 당신의 번민은 모두 소멸되었습니다. 당신은 청량 (淸凉)하고 몸을 절제하고 견고하며 성실하게 사시 는 분입니다.

(543) 코끼리 중에 왕이시며 위대한 영웅이신 당신께서 말 씀하실 때에는 모든 신들은 나아라다와 팝바타들과 함께 기뻐합니다.

(544) 존귀하신 분이시여,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가장 뛰 어난 분이시여,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신들을 포함한 온 세상에서 당신에게 견줄 만한 사 람은 없습니다.

(545) 당신을 깨달은 분입니다. 당신은 스승이십니다. 당 신은 악마를 정복한 분이며 현자이십니다. 당신은 번뇌의 숨을 힘을 끊고 스스로 건너셨고, 또 사람들 을 건너 주십니다.

(546) 당신은 속박을 넘어섰고, 모든 번뇌의 더러움을 없 앴습니다. 당신은 집착하는 일이 없는 사자입니다. 두려워 떠는 일이 없으십니다.

(547) 아름다운 흰 연꽃이 더러운 물에 물들지 않듯이, 당신은 선악의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습니다. 용감 한 분이시여, 두발을 뻗으십시오. 사비야는 스승께 예배드립니다.”

(548) 편력의 행자 사비야는 거룩하신 스승의 두 발에 머 리를 대고 절을 하며 말했다. “훌륭한 일입니다, 거룩한 스승이시여. 훌륭한 일입 니다, 거룩한 스승이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 켜 주듯이, 덮인 것을 열어 보이듯이, 길 잃은 이에 게 길을 가리
켜 주듯이, 또는 `눈 있는 사람은 빛을 보리라’하며 암흑 속에서 등불을 비추어 주듯이, 거 룩하신 스승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을 밝혀 주셨습니다. 저는 당신 고오타마께 귀의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수행승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거룩하신 스승이시여, 저는 스승께 출가하겠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계율을 받고 싶습니다.” “사비야여, 과거에 이교도이었던 자가 내 가르침과 계율에 따라 출가하여 완전한 계율을 받고자 한다 면, 그는 넉 달 동안 따로 살아야 합니다. 넉 달이 지난 후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여러 수행자는 그를 출가시키고, 완전한 계율을 받게 해서 수행승이 되 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사람에 따라 그 기간에 차이가 있 을 수 있습니다.”

“거룩한 스승이시여, 그러시다면 저는 넉 달이 아니 라 네해 동안이라도 따로 살겠습니다. 그래서 사년이 지나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하신다면, 여러 수행승들 은 저를 출가시키고 완전한 계율을 받게 하여 수행 승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편력의 행자 사비야는 그 때 바로 스승 앞에 서 출가하여 완전한 계율을 받았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이 장로 사비야는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홀로 살며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하다가, 마침내 다 시 없는 깨끗한 행의 궁극( 모든 선남자들은 그것 을 얻고자 집을 나와 집 없는 상태에 이르렀지만) 을 현세에서 스스로 깨달아 증명하고 구현하며 세월 을 보냈다.`태어나는 일은 끝났다. 청정한 행은 이 미 완성됐다. 할 일을 다했다. 이제 다시 이러한 생존 을 받지는 않는다’ 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비야 장로는 성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7. 세에라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때 스승께서는 수행승 천 이백 오십인과 함께 앙굿타라아파를 두루 다니시 다가 아아파나라고 하는 앙굿타라아파의 한 마을에 들어가셨다.

머리 딴(結髮) 행자 케니야는 생각했다. `석가 족의 아들인 사문 고오타마는 석가 족의 집에서 출가하여, 수행승 천 이백 오십 인의 큰 무리를 이끌고 앙굿타라아파를 편력하다가 아아파나에 이르 렀다.

그 고오타마에게는 다음과 같은 좋은 소문이 있다. 즉 그는 참사람, 깨달은 사람, 지혜와 행을 갖춘 사람, 행복한 사람, 세상을 알아버린 사람, 위없 는 사람, 사람들을 길드리는 이(御者), 신과 인간의 스승, 눈 뜬 사람, 거룩한 스승이라고 불리운다.

그 는 스스로 깨닫고 증명하여 신,악마,범천을 포함 한 이 세계와 사문,바라문,신,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가르침을 베푼다. 그는 처 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고, 글과 뜻이 잘 갖추어진 가르침과 원만하고 청정한 행을 설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훌륭하고 존경받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머리 딴 행자 케니야는 스승이 계신 곳으로 가서 인사를 드렸다. 기쁘고 기억할만한 인사를 나 눈후에 한편에 가 앉았다.

스승께서는 머리 딴 행자 케니야에게 법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지도하시고, 용기를 주어 기쁘게 해 주셨다. 케니야는 스승께 이 같이 말씀드렸다.

“고오타마께서는 수행승의 무리와 함께 내일 제가 올리는 음식을 받아 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스승은 케니야에게 말씀하셨다. “케니야여, 수행승의 무리는 많아서 천 이백 오십 인 이나 됩니다. 또 당신은 바라문들을 섬기고 있지 않 습니까?”

케니야는 거듭 스승께 여쭈었다. “고오타마시여, 수행승의 무리는 천 이백 오십 인이 나 되고, 또 저는 바라문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렇 지만 고오타마께서는 수행승들과 함께 내일 제가 올 리는 음식을 받아 주십시오.” 스승은 케니야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케니야여, 수행승의 무리는 많아서 천 이백 오십 인 이나 되며, 당신은 바라문들을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케니야는 세 번째 스승께 여쭈었다. “고오타마시여, 수행승의 무리는 많아서 천 이백 오십 인이나 되며, 또 저는 바라문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오타마께서는 그들과 함께 오셔서 제가 올리는 음식을 받아 주십시오.” 스승께서는 침묵으로써 승낙하셨다. 케니야는 스승 께서 승낙하신 것을 알고, 자리에서 떠나 자기의 암자로 갔다. 그리고는 친구와 친척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내 말을 들으십시오. 나는 사문 고오타마를 그 수행승의 무리와 함께 내일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나를 도와 주십시오.” 케니야의 친구와 친척들은 승낙하고, 어떤이는 솥을 걸고 나무를 쪼개며, 어떤이는 그릇을 씻고 독에 물 을 길어다 붓고 혹은 자리를 준비했다. 그리고 케니 야 자신은 흰막을 친 원당(圓堂)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때 세에라 바라문은 아아파나에 살고 있 었는데, 그는 3베에다의 깊은 뜻을 깨달아 어휘,활 용론,음운론,어원론과 제4의 아타르바 베에다와 제5 고담(古譚)의 어귀(語句)와 문법에 통달하고, 순세론(順世論)과 위인의 관상에 통달했으며, 삼백 명의 소년에게 베에다를 가르치고 있었다. 케니야는 세에라 바라문을 신봉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그 때 세에라 바라문은 삼백 명의 소년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다.

오래 앉아 있었기 때문에 생긴 피로를 풀기 위해 여기저기 산책을 하다가 케니야의 암자에 가까이 갔었다. 세에라 바라문은 케니야의 암자에 사는 머리 딴 행자 들이, 어떤 이는 솥을 걸고 나무를 빠개며, 어떤이는 그릇을 씻고 독에 물을 길어다 붓고 혹은 자
리를 준비하며, 케니야는 몸소 원당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 았다. 그래서 그는 케니야에게 물었다.

“케니야, 당신 아들이 장가라도 가는 것입니까? 혹은 딸이 시집이라도 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큰 제사가 있습니까? 또는 마가다왕 세니야 빔비사아라가 군대 를 이끌고 내일 식사라도 하러 오게 돼 있습니까?”

“세에라시여, 저는 아들을 장가보내지도 않고 딸을 시 집보내지도 않으며,

또 마가다왕 세니야 빔비사아라 를 초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게는 머지 않아 큰 제사가 있습니다. 석가 족의 아들인 사 문 고오타마가 석가 족의 집에서 출가하여 앙굿타라아 파나라를 두루 다니다가 그를 따르는 수행승 천 이백 오십 인과 함께 아아파나에 오셨습니다. 그 고오타마 에게는 이런 좋은 법문이 따르고 있습니다. 즉, 그 스승은 참사람, 깨달은 사람, 지혜와 행을 갖춘 사 람, 행복한 사람, 사람을 길들이는 이, 신과 인간의 스승, 눈뜬 사람, 거룩한 스승이라고들 합니다.

저 는 그분을 수행승과 함께 내일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케니야여, 당신은 그를 눈 뜬 사람이라 부릅니까?” “세에라여, 나는 그를 <눈뜬 사람>이라 부릅니다.” “케니야여, 당신은 그를 <눈뜬 사람>이라 부릅니까?” “세에라여, 나는 그를 <눈 뜬 사람>이라 부릅니다.”

그 때 세에라 바라문은 생각했다. `눈 뜬 사람이란, 이 세상에서 그 목소리를 듣기조차 힘든 일이다. 그런데 우리들 성전(聖典)속에 위인의 상(相)이 설흔 두 개 전해지고 있다. 그것을 갖추고 있는 위인에게는 단 두 가지 길이 있을 뿐 다른 길은 있을 수 없다.

만일 그가 재가(在家)의 생활을 한다 면, 그는 전륜왕(轉輪王)이 되어 정의를 지키는 법왕, 사방의 정복자로서 국토백성을 안정시키고 칠보 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바퀴(輪)라는 보배, 코끼리,말,구슬,여자,재산 그리고 지휘자라는 보배가 따를 것이다. 또 그에게는 천 명 이상의 아들 이 있어 모두가 용감무쌍하며 외적을 쳐부순다. 그는 이 대지(大地)를 사해(4海)의 끝에 이르기까지 무력 을 쓰지 않고 정의로써 정복하고 지배한다. 그러나 그 가 만일 집을 떠나 출가자가 된다면 참사람, 깨달은 사 람이 되어 이 세상 온갖 번뇌의 가림을 없앨 것이다.” 세에라는 케니야에게 물었다. “케니야여, 그럼 그 참사람, 깨달은 사람인 고오타 마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케니야는 바른 팔을 들어 세에라 바라문에게 말했다. “세에라여, 저쪽으로 가면 푸른 숲이 있습니다.

그 곳에 부처님이 계십니다.” 그리하여 세에라 바라문은 삼백 명의 소년들과 함께 스승이 계신 곳으로 갔다. 그 때 세에라 바라문은 같이 온 바라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천천히 걸어 소리를 내지 말고 따라 오너 라. 모든 스승은 사자처럼 홀로 거니는 분이며, 가까 이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사문 고오타마 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너희들은 중간에 참견을 해서는 안된다. 내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세에라 바라문은 거룩하신 스승이 계신 곳으로 갔다. 스승께 절을 하고 나서 기쁘고 기억할 만한 인사를 나 눈 뒤 한편에 가 앉았다. 그리고 세에라 바라문은 스 승의 몸에 설흔 두 가지 위인의 상이 있는지 없는지 를 살폈다. 그는 스승의 몸에서 단 두 가지 상을 내 놓고 설흔 두 가지 위인의 상이 거의 갖추어져 있음을 보았다.

그 두 가지 상은 그것이 과연 스승께 있 는지 없는지 의심되어 <눈 뜬 사람>이라는 것을 믿 을 수 없었다. 그 두 가지란 몸의 막(膜) 속에 들어 있는 음부(隱部)와 광장설상(廣長舌相)이었다.

그 때 스승은 생각했다. `이 세에라 바라문은 내 몸에 있는 설흔 두 가지 위인의 상을 거의 보았지만, 단 두 가지는 보지 못했다. 몸의 막속에 들어 있는 음부와 광장설의 두 위인상은 그것이 과연 내게 있는지 없는지 의심하고, 눈 뜬 사람임을 믿지 않는구나.’

그래서 스승께서는 세에라 바라문이 몸의 막 속에 들어 있는 음부를 볼 수 있도록 신통(神通)을 나타 내셨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혓바닥으로 양쪽 귓속을 아래 위로 핥으시고, 양쪽 콧구멍을 아래 위로 핥으시며, 또 이마를 혀로 핥으시었다. 세에라 바라문은 이렇게 생각했다.

`사문 고오타마는 설흔 두 가지 위인상을 완전히 갖추고 계시다. 그러나 나는 그가 부처님인지 아닌지는 아 직 모르겠다. 다만 나는 늙고 나이가 많아, 스승이나 또는 그의 스승인 바라문들이 <모든 존경받을 사람, 깨친 사람은 자기가 칭찬받을 때는 자신을 나타낸 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럼, 나는 적 당한 시로써 사문 고오타마를 그 앞에서 찬탄하리라.’ 그래서 세에라 바라문은 적당한 시로써 스승의 면전 에서 찬탄하였다.

“스승이시여, 정력이 있는 분이시여, 당신은 몸이 완전하고 빛이 나며 태생도 좋고 보기에도 아름답습니다. 금빛으로 빛나며 이는 아주 흽니다.”

(549) 그리고 태생이 좋은 사람이 갖추는 용모는 모두 위 인의 상으로서 당신 몸에 있습니다.

(550) 당신은 눈이 맑고 얼굴도 보기 좋으며, 신체는 크고 단정하며 빛나 사문들 속에서도 태양처럼 빛납니다.

(551) 당신은 보기에도 아름다운 수행자(비구)로 그 살갗은 황금 빛입니다. 이렇듯 용모가 훌륭한데 어찌 사 문될 필요가 있습니까?

(552) 당신은 전륜왕이 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사방을 정복 하여 잠부주(인도)의 지배자가 되셔야 합니다.

(553) 왕족이나 시골의 왕들은 당신께 충성을 맹세할 것입 니다. 고오타마시여, 왕중의 왕으로서, 인류의 제 왕으로서 통치를 하십시오.”

(554) 스승은 대답했다. “세에라여, 나는 왕이로되 위 없는 진리의 왕입니다. 진리로써 바퀴(輪)를 굴리는 것입니다. 거꾸로 돌 수 없는 바퀴를.”

(555) 세에라 바라문이 말했다. “당신은 정각자(正覺者)라고 스스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오타마시여, 당신은`위없는 진리의 왕이 고, 진리로써 바퀴를 굴린다’고 말씀하십니다.

(556) 그렇다면 누가 당신의 장군입니까? 스승의 상속자 인 제자는 누구입니까? 이 굴려진 법 바퀴(法輪)를 누가 당신의 뒤를 이어 굴릴 것입니까?”

(557) 스승은 대답했다. “세에라여, 내가 굴린 위없는 법 바퀴를 사아리풋 타(舍利佛)가 굴릴 것입니다. 그는 완전한 사람을 따라 나타난 사람입니다.

(558) 나는 알아야 할 것을 이미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끊어야 할 것을 이미 끊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부처입니다. 바라문이여.

(559) 내게 대한 의혹을 푸십시오. 바라문이여. 그리고 나를 믿으십시오. 깨달은 사람들을 만나기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560) 그들(눈뜬 사람)이 가끔 세상에 나타나는 것은 그 대들에게는 만나보기 어려운 일인데, 나는 바로 그 정각자입니다. 바라문이여, 나는 번뇌의 화살을 꺾어 버린 위없는 사람입니다.

(561) 나는 신성한 사람이며, 비길 데 없고, 악마의 군대를 때려부셨으며, 모든 적을 항복시켰고, 아무것에도 두려움 없이 기뻐합니다.”

(562) 세에라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눈이 있는 이의 말씀을 들어라. 그는 번뇌의 화살을 꺾어 버린 사람이며 위대한 영웅 이시다. 마치 사자가 숲속에서 포효하는 것과 같다.

(563) 신성한 분, 비길데 없고 악마의 군대를 쳐부순 이를 보고, 누가 믿지 않을 것인가. 이를테면, 살갗이 검 은 종족 출신이라도 믿으리라.

(564) 따르고자 하는 자는 나를 따르라. 그리고 따르고 싶지 않은 자는 떠나 가거라. 나는 뛰어난 지혜있는 분에게 출가하겠다.”

(565) 세에라의 제자들이 말했다. “만일 스승님께서 바로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기뻐 하신다면, 저희들도 또한 뛰어난 지혜있는 분에게 출가하겠습니다.”

(566) 세에라가 스승께 말했다. “저희들 삼백 명의 바라문은 합장하고 청합니다. 스승이시여, 우리들은 당신 곁에서 깨끗한 행을 닦겠습 니다.”

(567) 스승이 말했다. “세에라여, 깨끗한 행이 잘 설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눈앞에 당장 과보를 가져 옵니다. 도를 닦는 사람이 게으르지 않고 출가하여 청정행을 닦는 것은 헛된 일 이 아닙니다.”

(568) 세에라 바라문은 제자들과 함께 스승 곁에 출가하여 완전한 계율을 받았다. 그 때 머리 딴 행자 케니야는 그날 밤이 지나자 자기 암자에서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을 차려 놓고 스승께 시간이 된 것을 알렸다. “고오타마시여, 시간이 되었습니다. 공양 준비가 되었습니다.” 스승은 오전 중에 속옷(內衣)과 겉옷(重衣)을 입고 바리때를 드시고 머리 딴 행자 케니야의 암자로 가 셨다.

그리고 수행승의 무리와 함께 미리 마련된 자 리에 앉으셨다. 케니야는 부처님을 비롯하여 수행 승들에게 손수 맛좋은 음식을 나르면서 마음껏 들도록 권했다. 그리고 케니야는 스승께서 공양을 마치 시고 바리때에서 손을 떼시자 한층 낮은 자리에 앉
았다. 스승은 다음과 같은 시로써 케니야에게 감사의 말씀을 하셨다. “불에 대한 공양은 제사 중에도 가장 으뜸입니다. 사아비트리이는 베에다의 싯귀(詩句)중에서 으뜸이고, 왕은 사람 중에서 으뜸이며, 큰 바다(大洋)는 모든 강 중에서도 으뜸이듯이.”

(569) 달은 뭇별 중에서 으뜸이며, 태양은 빛나는 것 중에 서 으뜸이고, 스님들은 공덕을 바라고 공양하는 사 람들에게 가장 으뜸인 것입니다.”

(570) 스승은 이러한 시를 읊어 케니야에게 감사의 뜻을 말씀하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시었다. 세에라 장로는 자기를 따르던 무리들을 떠나 홀로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여 얼마 안 가서 ( 여러 선남자들이 그것을 얻으려고 떳떳하게 집을 나와 집
없 이 사는 것인데) 위없는 청정행의 궁극을 현세에서 스스로 깨닫고 증명하고 구현하며 세월을 보냈다. `태어나는 일은 끝났다.

청정한 행은 이미 완성됐다. 할일을 다 마쳤다. 이제 다시는 이러한 생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함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세에라 장로는 그의 무리와 함께 성인의 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세에라 장로는 그의 무리들과 함께 스승이 계신 곳으로 갔었다. 그리고 옷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스승께 합장하여 다음의 시로써 여쭈었다.

“스승이시여, 눈이 있는 분이시여, 오늘부터 여드레 전에 우리는 당신께 귀의했습니다만, 일곱밤을 지 나 우리는 당신의 가르침속에서 안정을 얻었습니다.

(571) 당신은 깨달으신 분입니다. 당신은 스승이십니다. 당 신은 악마의 정복자이며 현자이십니다. 당신은 번뇌 의 잠재적 가능성을 끊고, 몸소 건너시고 또 이 사 람들을 건네 주십니다.

(572) 당신은 장애를 넘어서고 모든 번뇌의 더러움을 없애 버렸습니다. 당신은 집착없는 사자이십니다. 무서워 떠는 일이 없으십니다.

(573) 이들 삼백 명의 수행승은 합장하고 서 있습니다. 영 웅이시여, 발을 뻗쳐 주십시오. 여러 용(龍 = 行者) 들로 하여금 스승께 예배드리게 하렵니다.”

8. 화살

이 세상에서 사람의 명은 정해 있지 않아 얼마 사는 지 모른다. 애처롭고 짧아 고뇌로 엉켜 있는 것이다.

(575) 태어난 것은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 늙으면 죽음이 온다. 실로 생이 있는 자의 운명은 이런 것이다.

(576) 익은 과일은 빨리 떨어질 위험이 있다. 그와 같이 태어난 자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에게는 항상 죽음의 두려움이 있다.

(577) 이를테면, 옹기장이가 만든 질그릇이 마침내는 모두 깨어지고 말 듯이 사람의 목숨도 또한 그렇다.

(578) 젊은이도 장년도 어리석은 이도 지혜로운 이도 모두 죽음에는 굴복해 버린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579) 그들은 죽음에 붙잡혀 저 세상으로 가지만, 아비도 그 자식을 구하지 못하고 친척도 그 친척을 구하지 못한다.

(580) 보라. 친척들이 애타는 마음으로 지켜보지만, 사람은 하나씩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사라져 간다.

(581) 이렇듯 세상 사람들은 죽음과 늙음으로 인해서 해를 입는다. 그러나 슬기로운 이는 세상의 참모습(實相) 을 알고 슬퍼하지 않는다.

(582) 그대는 온 사람의 길을 모르고, 또 간 사람의 길을 모른다. 그대는 생과 사 양극을 보지 않고 부질없이 슬피 운다.

(583) 미망(迷妄)에 붙들려 자기를 해치고 있는 사람이 울고불고해서 무슨 이익이라도 생긴다면 현자도 그렇게 할 것이다.

(584) 울고 슬퍼하는 것으로서는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다. 다만 그에게는 더욱더 괴로움이 생기고 몸만 여윌 따름이다.

(585) 스스로 자신을 해치면서 몸은 여위고 추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 데, 울고 슬퍼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586) 근심을 버리지 않은 사람은 점점 더 고뇌를 받게 된다. 죽은 사람 때문에 운다는 것은 근심에 사로잡힌 것이다.

(587) 또한 자신이 지은 업으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 라. 살아 있는 자는 죽음에 붙잡혀 떨고 있지 않은가.

(588) 사람들이 여러 가지를 염원할지라도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기대에 어긋나는 것도 이와 같느니라. 보라, 세상의 저 모습을!

(589) 가령 사람이 백년을 살거나 그 이상을 산다 할지라도 마침내는 친족들을 떠나 이 세상의 생명을 버리게 된다.

(590) 그러므로 존경하는 사람의 말씀을 듣고, 죽은 사람 을 보았을 때에는`그는 이미 내 힘이 미치지 못하게 되었구나’라고 깨달아 슬퍼하거나 탄식하지 말아라.

(591) 이를테면, 집에 불이 난 것을 물로 꺼 버리듯이, 지혜롭 고 총명한 사람들은 걱정이 생겼을 때는 이내 지워 버린다.

마치 바람이 솜을 날려 버리는 것과 같이.

(592) 자신의 즐거움을 구하는 사람은 슬픔과 욕심과 걱정 을 버리라. 자기 번뇌의 화살을 뽑으라.

(593) 번뇌의 화살을 뽑아 버리고 거리낌 없이 마음의 평 안을 얻는다면 모든 걱정을 초월하고, 근심 없는 자, 평안에 돌아간 자가 될 것이다.

9. 바아셋타

(594)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때 거룩한 스승께서는 잇차아낭갈라 숲에 살고 계시었다. 그 때 재산이 많 고 저명한 바라문들이 그곳에 많이 살고 있었다.

즉, 찬킨 바라문, 타아룻카 바라문, 포옥카라사아치 바 라문, 자아눗소오니 바라문, 토오데야 바라문, 이 밖에 저명한 바라문들이었다. 그 때 바아셋타와 바아라드바아자라고 하는 두 젊은 이가 오랫동안 앉아 있었기 때문에 생긴 피로를 없 애기 위해, 여기저기 거닐면서 논쟁을 벌였다.

“도대체 바라문이란 어떤 것인가?” 바아라드바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계(父系)와 모계(母系) 양쪽이 다 유서깊은 순결 한 모태에 깃들기를 칠대(7代)의 조상에 이르기까지 혈통에 대해서 지탄이나 비난 받은 일이 없는 이 런 사람을 바라문이라 합니다.”

바아셋타는 말했다. “사람이 계율을 지키며 덕행을 갖추고 있다면, 바 로 이 사람이 바라문입니다.”

바아라드바아자는 바아셋타를 설득할 수 없었고, 바 아셋타도 바아라드바아자를 설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아셋타는 바아라드바아자에게 말했다. “바아라드바아자여, 석가 족의 아들인 사문 고오타마는 출가하여 이곳 잇차아낭갈라 숲속에 살고 있습 니다. 그 고오타마에게는 이러한 좋은 명성이 떠돌고 있습니다. 즉, 그 스승은 존경할 만한 사람, 눈뜬 사람, 지혜와 덕행을 갖춘 사람, 행복한 사람, 세상 을 안 사람, 위없는 사람, 사람들을 길들이는 이, 신과 인간의 스승, 눈이 열린 부처님, 거룩한 스승 이라
고 합니다. 바아라드바아자여, 사문 고오타마에게로 가 봅시다. 거기 가서 그분에게 이것을 물어 봅시다.

그의 대답에 따라 우리는 그것을 믿읍시다.” 그들은 스승이 계신 곳으로 찾아 갔다.

스승께 절을 하고 나서, 기쁘고 잊을 수 없는 말들로 인사를 나 눈 뒤 한쪽에 앉았다. 바아셋타 바라문은 다음과 같 은 시로써 스승께 여쭈었다.

“우리 두 사람은 3베에다의 학자라고 스승께서도 인정하고 스스로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저는 포옥카라사아치의 제자이고 이 사람은 타아루 카의 제자입니다.

(595) 3베다에 쓰여 있는 모든 것을 우리는 완전히 알 고 있습니다. 우리는 베에다의 어귀(語句)와 문법에 통달했고 독 송도 스승에게 견줄 만합니다.

(596) 고오타마시여, 그러한 우리가 태생에 대한 논쟁을 했습니다. `태생에 따라 바라문이 된다’고 바아라드 바아자는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행위에 따라 바라 문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눈이 있는 분이시여, 이 런 사정임을 알아 주십시오.

(597)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가 없습 니다. 그래서 눈뜬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스승께 물 으러 온 것입니다.

(598) 사람들이 보름달을 향해 합장하고 예배하며 공경하듯이, 세상 사람들은 고오타마를 예배하고 공경합니다.

(599) 세상의 눈으로 출현하신 고오타마에게 우리는 묻습니다. 태생에 따라 바라문이 됩니까? 행위에 따라 바라문이 됩니까?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바라문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도록.”

(600) 스승은 대답하셨다. “바아셋타여, 그대들을 위해 모든 생물에 대한 태생 의 구별을 차례대로 설명해 주리라. 그들의 태생이 여러 가지로 다르기 때문이다.

(601) 풀이나 나무에도 종류의 구별이 있는 줄을 알아라. 그러나 그들은, `우리는 풀이다’라든가, `우리는 나무다’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의 특징은 태생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태생은 여러 가지로 다르기 때문이다.

(602) 또 구더기나 귀뚜라미로부터 개미에 이르는 것들에 게도 종류의 구별이 있음을 알아라. 그들의 특징은 태생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태생은 여러 가지로 다르기 때문이다.

(603)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네발 달린 짐승에게도 종류 의 구별이 있다는 것을 알아라. 그들의 특징은 태생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태생은 여러 가지로 다르기 때문이다.

(604) 배로 기어 다니는 길이가 긴 것들에게도 종류의 구별이 있음을 알아라. 그들의 특징은 태생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태생은 여러 가지로 다르기 때 문이다.

(605) 물속에 태어나 물에서 사는 물고기들도 종류의 구별이 있음을 알아라. 그들의 특징은 태생에 기인하 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태생은 여러 가지로 다르기 때문이다.

(606) 그리고 날개를 펴 하늘을 날으는 새들에게도 종류의 구별이 있음을 알아라. 그들의 특징은 태생에 기인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태생은 여러 가지로 다르 기 때문이다.

(607) 이와 같은 생물에 있어서는 태생에 기인한 특징이 여러 가지로 다르지만, 인류에게는 태생에 기인한 특징이 다를 수 없다.

(608) 머리카락이나 머리,귀,눈,입,코,입술이나 눈썹 에 대해서도.

(609) 목이나 어깨,배,등,궁둥이,가슴,음부나 성교에 대해서도.

(610) 손이나 발,손가락,손톱,종아리,넓적다리,얼굴 색이나 음성에 대해서도, 다른 생물처럼 태생에 기 인한 특징의 구별이 인류에게는 결코 없다.

(611) 몸을 받은 생물 사이에는 각기 구별이 있지만, 인간 에게는 그런 구별이 없다. 인간 사이에서 구별이 나 타나는 것은 다만 그 명칭뿐이다.

(612) 인간 가운데서 소를 치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는 농부이지 바라문이 아님을 알아라. 바아셋타여.

(613) 인간 가운데서 여러 가지 기능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능인이지 바라문이 아님을 알아라. 바아셋타여.

(614) 인간 가운데서 사고 파는 것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장사치이지 바라문이 아님을 알아라. 바아셋타여.

(615) 인간 가운데서 남의 일을 해주고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고용인이지 바라문이 아님을 알아라. 바아셋타여.

(616) 인간 가운데서 주지 않는 것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 람이 있다면, 그는 도둑이지 바라문이 아님을 알아 라. 바아셋타여.

(617) 인간 가운데서 무술(武術)에 의해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사이지 바라문이 아님을 알아라. 바아셋타여.

(618) 인간 가운데서 사제직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제관(祭官)이지 바라문이 아님을 알아라. 바아셋타여.

(619) 인간 가운데서 고을이나 나라를 차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왕이지 바라문이 아님을 알아라. 바아셋타여.

(620) 나는 바라문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람을 바라문 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는`그대여, 라고 불리 는 사람’이라 부른다. 그는 무엇인가 소유물에 걸리어 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집착이 없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1)) 모든 속박을 끊고 겁내지 않으며, 집착을 초월해 붙잡혀 있지 않은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2) 가죽 끈과 가죽 줄을 고삐와 함께 끊어 버리고 장애 를 없애 눈 뜬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3) 죄 없이 욕을 먹고 구타나 구속을 참고 견디며, 인내력이 있고 마음이 용맹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4) 성내지 않고 도덕을 지키며, 계율에 따라 욕심을 부 리지 않고, 몸을 안정시켜 <최후의 몸>에 이른 사 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5) 연꽃잎에 이슬처럼, 송곳 끝에 겨자씨처럼, 온갖 욕 정에 더럽히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6) 현세에서 이미 자기의 고뇌가 소멸된 것을 알고, 무 거운 집을 내려 놓고 걸림이 없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7) 지혜 깊고 총명하며 온갖 길에 통달해 최고의 목적 에 도달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8) 재가자나 출가자 아무하고도 섞이지 않고, 집 없이 편력하며 욕심이 없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9) 힘 세거나 약한 어느 생물에게도 폭력을 쓰지 않 고, 또 죽이거나 죽이도록 하지 않는 사람, 그를 나 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0) 적의를 품은 자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대적 하는 마음이 없고, 폭력을 휘두르는 자와 함께 있으 면서도 마음이 온화하며, 집착하는 자들과 같이 있으면서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1) 겨자씨가 송곳 끝에서 떨어지듯이, 애착과 증오와 거 만과 거짓을 털어 버린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2) 거칠지 않고 사연을 전하는데 진실한 말을 하며, 말 로써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3) 이 세상에서 길고 짧거나, 가늘고 굵거나,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막론하고, 주지 않은 것은 어떤 물건이 라도 갖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4) 현세도 내세도 바라지 않고, 욕심도 걸림도 없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5) 집착이 없고 완전히 깨달아 의혹이 없이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6) 이 세상의 재앙이나 복덕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 고, 근심과 티가 없이 깨끗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7) 구름에 가리워 있지 않은 달처럼, 깨끗하고 맑아 환 락의 생활이 끝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8) 이 힘들고 어려운 길, 윤회, 헤매임을 넘고 피안에 이르러 정신을 안정시키고, 욕망도 의욕도 집착도 없 이 마음이 평안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 다.

(639) 이 세상의 욕망을 끊고 집을 떠나 편력하며, 욕망의 생활을 끝낸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0)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을 끊고 집을 떠나 편력하며 애착의 생활을 끝낸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1) 인간의 인연을 끊어 버리고 천상의 인연도 벗어나 모든 굴레를 벗어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2) 쾌락도 쾌락 아닌 것도 버리고, 맑고 깨끗해져 얽 매임 없이 온 세상을 이겨낸 영웅,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3)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의 생사를 알고, 집착 없이 행복한 사람, 깨달은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4) 신도 귀신(간다르바)도 인간도 그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사람, 번뇌의 더러움을 멸해 버린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5) 앞에도 뒤에도 중간에도 한 물건도 가지지 않고 집 착하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6) 황소처럼 늠늠하고 기품있는, 영웅,대선인(大仙人),승리자,욕망없는 사람,목욕 자,깨달은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7) 전생 일을 알고, 천국과 지옥을 보며, 생존을 멸(滅)해버린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8) 세상에서 쓰는 이름이나 성은 통칭(通稱)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태어난 그 때마다 임시로 붙여져 전해지는 것이다.

(649) 성명이 임시로 붙여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릇된 선입견을 오래 가지게 된다. 모르는 사람은 말한다. `태생에 의해서 바라문이 된다’고.

(650)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되고,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안 되기도 하는 것이다.

(651)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 며, 행위에 의해 장사치가 되고, 또한 행위에 의해 고용인이 된다.

(652)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며, 행위에 의해 제관이 되고, 행위에 의해 왕이 된다.

(653) 현자(賢者)는 이와 같이 행위를 사실 그대로 본다. 그들은 <연기(緣起)>를 보는 자이며, 행위와 그 과 보를 잘 알고 있다.

(654) 세상은 행위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로 인해서 존재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행위에 매어 있다. 마치 달리는 수레가 쐐기에 의해 매어 있듯이.

(655) 고행과 청정한 행과 감관의 억제와 자제, 이것으로 바라문이 된다. 이것이 으뜸가는 바라문이다.

(656) 지식인들이 볼 때 3베에다를 갖추고 마음 편안 하여 다시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사람이 범천이며 제석(帝釋)이다. 바아셋타여, 이러한 줄을 알아라.”

(657)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바아셋타와 바아라드바아자 청년은 스승께 말씀드렸다. “훌륭하십니다, 고오타마시여, 훌륭하십니다, 고오타마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이에게 길을 가리켜 주듯이, 그리고`눈이 있는 자는 빛을 볼 것이다’하면서 어두운 밤에 등불을 비춰 주듯이, 당신 고오타마께서 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을 밝혀 주셨습니다.

저희 들은 이제 고오타마와 진리와 승가에 귀의하겠습니다. 고오타마께서는 저희를 오늘부터 죽을 때까지 귀의한 재가신자로 받아 주십시오.”

10. 코오카알리야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날 거룩한 스승께서는 사아밧티이의 제타 숲, 고독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 을 나눠 주는 장자의 집에 계시었다.

그 때 수행승 코오카알리야는 스승이 계신 곳으로 갔다. 스승께 인사드린 후 한쪽으로 가서 앉아 말씀드렸다.

“거룩한 스승이시여, 사아리풋타와 모옥갈리아나는 사뙨 생각을 가지고 나쁜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스승은 수행승 코오카알리야에게 일렀다

. “코오카알리야여,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코오카알 리야여,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사아리풋타와 모옥 갈라아나는 선량한 사람들이다.”

코오카알리야는 거듭 말했다. “거룩한 스승이시여, 저는 스승을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다만, 사아리풋타와 모옥갈라아나는 사뙨 생각 을 지니고 나쁜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스승은 다시 수행승 코오카알리야에게 말씀하셨다. “코오카알리야여,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사아리풋 타와 모옥갈라아나를 믿고 사랑하여라, 그들은 선량 한 사람들이다.”

코오카알리야는 세 번째로 말씀드렸다. “거룩하신 스승이시여, 저는 스승을 믿고 의지합니다만, 사아리풋타와 모옥갈라아나는 사뙨 생각을 가지고 나쁜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스승께서도 세 번 같은 말씀을 하셨다. “코오카알리야여,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그들을 믿 고 사랑하여라,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러자 수행승 코오카알리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 승께 절하고 바른쪽으로 돌아 나가 버렸다. 그는 나가 자마자 온 몸에 겨자씨만한 종기가 생겼다. 처음에는 겨자씨만 하던 것이 차츰 팥알만 해졌다. 팥알만 하던 것이 또 콩알만해졌다. 그러더니 대추씨만 해지고 대추알만 해졌다. 이와 같이, 감자만 해지고, 덜 익은 모과 열매만 해지고, 익은 모과만 하던 것이 마 침내 터져서 고름과 피가 되어 흘렀다.

코오카알리 야는 마침내 그 병고 때문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사아리풋타와 모옥갈라아나에게 적의를 품었기 때문에 죽어서

홍련(紅蓮)지옥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 때 사바세계의 주인인 범천(梵天)은 한밤중이 지났을 무렵, 아름다운 얼굴로 제타 숲을 두루 비추면 서 스승이 계신 곳으로 찾아갔다. 인사를 드린 뒤 한편에 서서 스승께 사뢰었다.

“거룩하신 스승이시여, 수행승 코오카알리야는 죽었 습니다. 거룩하신 스승이시여, 수행승 코오카알리 야는 사아리풋타와 모옥갈라아나에게 적의를 품었기 때문에 죽어서 홍련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사바세계의 주인인 범천은 이렇게 말하며 스승께 절 하
고 바른쪽으로 돌아 사라졌다. 날이 밝자 스승께서는 여러 수행승에게, 어제 밤 에 범천이 왔었던 일을 말씀하셨다.

그 때 한 수행승이 이렇게 말했다. “거룩하신 스승이시여, 홍련지옥의 수명은 얼마나 됩니까?”

“수행승이여, 홍련지옥의 수명은 길다. 그것을 몇년 이라든가, 몇 백년, 몇 천년, 몇 십만년이라고 헤아 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거룩하신 스승이시여, 그렇지만 비유로써 설명하 실 수는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 그렇게는 말할 수 있다.” 하시면서 스승께서는 말씀하셨다.

“수행승이여, 이를테면 코오살라 나라의 말(斗)로 되 서 스무 카아리카의 깨(한수레분)가 있는데, 그것을 꺼낸다고 하자. 한 사람이 백년을 지날 때마다 한 알 씩 꺼내는 그런 방법으로 해서, 그 스무 카아리카의 깨를 다 꺼낸다 하더라도 한 압부다지옥은 아직 끝나 지 않는다.

그런데 스무 압부다지옥은 한 니랍부다지 옥과 같다. 그리고 스무 니랍부다지옥은 한 아바바 지옥이며, 스무 아바바지옥은 한 아하하지옥, 스무 아하 하지옥은 한 아타타지옥이며, 스무 아타타지옥은 한 황련 (黃蓮)지옥과 같고, 스무 황련지옥은 한 백수련 (白睡蓮)지옥과 같으며, 스무 백수련지옥은 한 청련 (靑蓮)지옥, 스무 청련지옥은 한 백련지옥과 같다.

그래서 스무 백력지옥은 한 홍련지옥에 해당된다. 수행승들이여, 그런데 코오카알리야는 사아치풋타와 모옥갈라아나에게 적의를 품었기 때문에 홍련지옥에 떨어진 것이다.” 행복한 사람인 스승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신 뒤, 다시 말씀을 이으셨다.

(657)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그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 온다. 어리석은 자는 욕설을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신을 찍고마는 것이다.

(658) 비난받을 사람을 칭찬하고, 또 칭찬해야 할 사람 을 비난하는 사람, 그는 입으로 죄를 더하고 그 죄 때문에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659) 도박으로 재산을 잃는 자는 가령 자신까지를 포함해 모든 것을 잃는다 하더라도 그 불행은 오히려 적은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 악의 를 품은 사람의 죄(불행)는 아주 무거운 것이다.

(660) 악담 또는 악의를 가지고 성인을 비방하는 사람은, 십만과 삼십 육 니랍부다지옥과 다섯 압부다지옥에 떨어진다.

(661) 거짓말을 하는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 또 했으면서 안 했다고 하는 자도 마찬가지다. 둘 다 똑같이 행 동이 비열한 사람들이라, 죽은 후에는 같은 내세(來世)를 갖는다.(지옥에 떨어진다.)

(662) 남을 해칠 마음없이 깨끗하고 더럽히지 않은 사람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그러한 악이 돌아온 다. 바람을 거슬러서 먼지를 날리는 것처럼.

(663) 여러 가지 탐욕의 대상에 빠져, 신앙심도 없고 인색하며, 불친절하고 이기적이며 이간질을 하는 사람 은 말로써 남을 때린다.

(664) 입이 더럽고 부실하며 천한 자여, 산 것을 죽이고 사특하여 악한 행위를 하는 자여, 야비하고 불량하며 덜된 자여, 이 세상에서 말을 너무 말아라. 그대는 지옥에 떨어지라.

(665) 그대는 먼지를 뿌려서 해(害)를 끌어 들이고, 착한 사람들을 비난하여 죄를 지으며, 온갖 나쁜 일을 하 여 오랫동안 깊은 구렁(지옥)에 빠진다.

(666) 그 어떤 업(業)도 멸하지 않는다. 그것은 반드시 되 돌아와 그 임자가 그것을 받는다. 어리석은 자는 죄 를 짓고 내세에서 그 괴로운 과보를 받는다.

(667) 지옥에 떨어진 자는 쇠꼬창이로 꿰이고, 날카로운 칼이 달린 철창에 찔린다. 또한 불에 달은 쇳덩이를 전에 지은 업에 알맞는 음 식으로써 먹어야 한다.

(668) 지옥의 옥졸들은`잡아라!’`때려라!’ 할 뿐 부드 러운 말을 걸어 주지 않으며, 상냥한 얼굴로 대해 주 지 않고, 의지가 되어 주지 않는다. 지옥에 떨어진 자는 깔려진 숯불 위에 앉아 불붙는 화염 속에 들어간다.

(669) 또한 그곳에서 지옥의 옥졸들은 지옥에 떨어진 사람 들을 철망으로 몰아 넣어 쇠망치로 내려 친다. 그리고는 새까만 암흑 속에 두는데, 그 어둠은 안개처럼 끝없이 퍼져 있다.

(670) 또 다음에는 그 화염이 타오르는 구리솥에 들어간다. 오랫동안 그 끓는 가마솥 안에서 익혀지면서 떴다 가라앉았다 한다.

(671) 고름과 피로 가득찬 솥이 있어, 죄를 범한 자는 그 속에서 끓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어느쪽으로 가든 지 피고름 때문에 더럽혀진다.

(672) 구더기가 사는 물솥이 있어, 죄를 범한 자는 그 안 에서 익어 간다. 나오려 해도 붙잡을 것이 없다. 그 솥은 안으로 굽고 둘레가 모두 한결같기 때문이다.

(673) 날카로운 칼날로 된 숲이 있어, 지옥에 떨어진 사람 이 그 속에 들어가면 팔다리가 잘린다. 옥졸들은 꼬 챙이로 혀를 꿰어 잡아 다니면서 괴롭힌다.

(674) 또 지옥에 떨어진 자는 예리한 면도칼이 있는 베다 라니이 강에 이른다. 어리석은 무리들은 나쁜 일을 하고 죄를 범함으로써 그곳에 떨어진다.

(675) 그곳에는 검은 개, 점박이 개, 검은 까마귀 떼와 여 우들이 있어, 울부짖는 사람들을 뜯어 먹는다. 또 독수리 까치들도 살을 쪼아 먹는다.

(676) 죄를 범한 자가 받는 지옥의 생태는 실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명이 남아 있는 동 안 해야 할 일을 하고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677) 홍련지옥에 떨어진 자의 수명은 짐차에 실은 깨알의 수만큼 된다고 지자(智者)들은 헤아렸다. 즉 그 햇 수는 오조년(5兆年)과 오천만 년인 것이다.

(678) 여기 말한 지옥의 고통이 아무리 오래 계속된다 할 지라도 그 동안은 지옥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기 때 문에 인간은 청정하고 어질고 착한 미덕을 위해 항 상 말과 마음을 지켜야 한다.

11. 나아라카

(679) 아시타 선인(仙人)은 한낮의 휴식 때에, 정결한 옷 을 입은 설흔 명의 신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옷을 벗어 들고 공손히 제석천(帝釋天)을 극구 찬탄 하는 것을 보았다.

(680) 기뻐서 뛰노는 신들을 보고 선인은 조심스레 물었다. “신들이 기쁨에 넘쳐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왜 당신들은 옷을 벗어 흔들고 있는 것입니까?

(681) 만일 아수라와의 싸움에서 신들이 이기고 아수라가 졌다 할지라도 몸의 털을 곤두세울 만큼 그토록 기 뻐할 수는 없을 터인데, 어떤 희귀한 일이 있기로 그처럼 기뻐하는 것입니까?

(682) 그들은 소리치고 노래하며 악기를 연주하고 손뼉을 치면서 춤을 춥니다. 나는 수미산 꼭대기에 살고 있는 당신들께 묻습니 다. 존경하는 분들이여, 제 궁금증을 어서 풀어 주십시오.”

(683) 신들은 대답했다. “비할 데 없이 묘한 보배인 저 보살(미래의 부처님)은 모든 사람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인간세계에 태 어 났습니다. 석가족 마을 룸비니이 동산에. 그래서 우리는 만족해하고 기쁨에 넘쳐 있는 것입니다.

(684) 무릇 살고 있는 자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사람, 가 장 높은 사람, 황소 같은 사람, 살아 있는 것 중에 서 가장 높은 분은, 머지 않아 선인들이 모이는 숲 에서 법바퀴(法輪)를 굴릴 것입니다. 용맹스런 사자가 뭇 짐승들을 이기고 포효를 하듯이.”

(685) 선인은 그 말을 듣자 급히 인간세계로 내려 왔다. 그리고 숫도오다나왕의 궁전에 가까이 가서 석가 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도 한 번 뵙고 싶습니다.”

(686) 그리하여 석가족들은 솜씨 있는 금공(金工)이 만든 황금처럼 반짝이며 행복에 빛나는 거룩한 아기의 얼 굴을 아시타 선인에게 보였다.

(687) 불꽃처럼 빛나고 하늘의 달처럼 맑으며, 구름을 헤치고 비치는 가을 태양처럼 환한 아기를 보고 환희에 넘쳐 몹시 기뻐했다.

(688) 신들은 뼈가 있고 천개의 둥근 고리가 달린 산개 (傘蓋)를 공중에 펼쳤다. 또 황금 자루가 달린 불자 (拂子)를 위 아래로 흔들었다. 그러나 불자나 양산 을 손에 쥔 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689) 칸히시리(아시타)라는 머리 딴 선인은, 머리 위에 흰 양산을 가리고 빨간 모포에 싸여 있는 황금 패물 같은 악기를 보고 기뻐서 가슴에 안았다.

(690) 용모와 신주(神呪 = 베에다)를 환히 알고 있는 그는 황소같이 훌륭한 석가 족의 아기를 안고 그 유다른 상(相)을 살피더니 환성을 질렀다. “이 아기는 위 없는 사람, 인간 중에서 가장 뛰어났습니다!”

(691) 그러더니, 선인은 자기의 얼마 남지 않는 생애를 생 각하고, 말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선인이 우는 것을 보고 석가 족들은 물었다. “우리 왕자에게 무슨 장애라도 있단 말인가?”

(692) 석가족들이 걱정하는 것을 보고 선인은 말했다. “왕자에게 어떤 불길한 상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닙 니다. 그는 평범한 상이 아닙니다. 주의해서 길러 주십시오.

(693) 이 왕자는 깨달음의 궁극에 이를 것입니다. 이 아기 는 가장 으뜸가는 청정을 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고 불쌍히 여긴 나머지 법바퀴를 굴릴 것 입니다. 그의 청정한 행은 널리 펼쳐질 것입니다.

(694)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살, 내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 습니다. 도중에서 내게는 죽음이 찾아올 것입니다. 나는 비할 데 없이 큰 힘을 가진 사람의 가르침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695) 청정한 수행자 아시타 선인은 석가족에게 커다란 기 쁨을 안겨 주고 궁중을 떠나갔다. 그는 자기의 조카 나아라카를 불러 비할 데 없이 큰 힘을 가진 사람의 교법을 따르도록 하였다.

(696) “만일 네가 나중에`눈뜬 사람이 깨달음을 펴고 진 리의 길을 간다’는 말을 듣거든, 그 때 그곳으로 가서 그 분의 가르침을 따라 그 밑에서 청정행을 닦아라.”

(697) 남을 위해 걱정하고 미래에 있어서 최상의 청정행을 예견한 그 성인에게 가르침을 받고 온갖 착한 일을 쌓을 나아라카는 승자(勝者 = 부처님)를 기다리면서 스스로의 감관을 지키고 살아갔다.

(698) 훌륭한 승자가 <법바퀴>를 굴린다는 소문을 듣고, 아시타 선인이 일러준 대로 으뜸가는 선인(부처님)을 보고 기뻐하며 거룩한 성인에게 행을 물었다.

(699) 나아라카가 말했다. “아시타가 알려 준 말을 잘 알아 들었습니다. 그러 하오니 고오타마시여, 모든 것에 통달하신 당신께 묻겠습니다.

(700) 저는 출가하여 탁발(托鉢)의 행을 쌓으려 하오니, 성스러운 행과 으뜸가는 길을 말씀해 주십시오.”

(701) 스승(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그대에게 성스러운 행을 일러 주리라. 이것은 행하기 어렵고 이루기 힘들다. 이제 그대에게 그 것을 알려 줄 것이니, 마음을 굳건히 하라.

(702) 마을에서 욕을 먹든지 절을 받든지 한결 같은 태도로 대하여라. 욕을 먹더라도 성내지 말며, 절을 받더라도 우쭐거 리지 말고 냉정하여라.

(703) 가령 동산의 숲속에 있더라도 불꽃처럼 여러 가지가 나타난다. 아낙네는 성자를 유혹한다. 아낙네로 하 여금 유혹하도록 하지 말라.

(704) 성행위(性行爲)에서 떠나 온갖 욕망을 버리고, 약하고 강한 모든 생명 있는 것에 대해 적대시 말고, 애착하지도 말라.

(705) 그들은 나와 같고 나도 그들과 같다고 생각하여, 생 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 또한 남들로 하여금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

(706) 범부가 집착하는 욕망과 욕심을 떠나 눈있는 사람은 길을 가라. 지옥을 벗어나라.

(707) 배를 주리고 음식을 절제하여 욕심을 없애고 탐내지 말라. 욕망을 버리면 욕심이 없어 평안하다.

(708) 그 성자는 탁발을 끝내고 숲에 돌아와 나무 아래 머물러 앉아야 한다.

(709) 그 현자는 전신의 안정에 전념하고 숲에서 즐기며 나무 아래서 명상함으로써 스스로 만족해야 한다.

(710) 날이 새면 마을로 가야 한다. 신도에게서 초대를 받거나 마을에서 음식을 가져 올지라도 결코 반겨서는 안 된다.

(711) 성자는 마을에 이르러 집들을 조급하게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이야기를 끊고 음식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말을 꺼내서는 안 된다.

(712) `음식을 얻어서 잘 됐다’`얻지 못한 것도 잘 됐다’ 생각하고, 완전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라도 태연히 돌아온다. 마치 과일을 얻으려고 나무밑에 간 사람이 과일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태연히 돌아오는 것처럼.

(713) 그는 바리때를 손에 들고 돌아다니며, 벙어리는 아 닌데 벙어리처럼 보이는 것이다. 시물(施物)이 적다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시주를 업신여겨서도 안 된다.

(714) 사문(부처님)은 높고 낮은 여러 가지 도(道)에 대 해서 말씀하셨다. 거듭 피안에 이르는 일은 없으나 한 번에 이르는 일도 없다.

(715) 윤회의 흐름을 끊은 수행승에게는 집착이 없다. 해 야 할 선(善)도, 하지 말아야 할 악도 버렸기 때문 에 번뇌가 없는 것이다.”

(716) 스승은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그대에게 성자의 길을 말하리라. 음식을 얻을 때에는 면도날의 비유처럼 하여라. 혀를 입천정에 붙이고 스스로 배를 주리라.

(717) 마음이 침체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쓸데없이 많은 것을 생각해서도 안 된다. 비린내가 없이, 걸림이 없이, 청정한 행을 궁극의 의지처로 삼아라.

(718) 홀로 앉는 일과 도인에게 봉사하는 일을 배우라. 성인의 길은 홀로 있는 것이다. 홀로 있어야만 즐거울 수 있다.

(719) 그렇게 하면 그는 시방(十方)에 빛이 나리라. 욕망을 버리고 명상하고 있는 여러 현자들의 명성을 들으면, 내 제자는 더욱더 부끄러움과 믿음을 일 으켜야 한다.

(720) 이 일을 깊은 늪과 얕은 개울물의 비유로 알아라. 바닥이 얕은 개울물은 소리내 흐르지만, 큰 강물은 소리없이 흐르는 법이다.

(721) 모자라는 것은 소리를 내지만, 가득찬 것은 아주 조용하다. 어리석은 자는 반쯤 물을 채운 항아리 같 고, 지혜로운 이는 물이 가득찬 연못과 같다.

(722) 사문이 의미 있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스스로 알고 법을 설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알고서 많은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723) 그러나 스스로 알고 자제하여 많은 말을 하지 않는 다면, 그는 성인으로서 성인의 행에 알맞다. 그는 성인으로서 성인의 행을 체득한 것이다.”

12. 두 가지 관찰

(724)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사아 밧티이의 동원(東園)에 있는 미가아라 장자 어머니의 누각(鹿子母講堂) 안에 계시었다. 그 때 거룩하신 스승은 정기적인 집회(布薩) 날인 달 밝은 보름밤에 수행승(비구)의 무리에 둘러 싸여 집밖에 계시었다. 거룩하신 스승께서는 묵묵히 앉아 있는 수행승들을 돌아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었다.

“여러 수행승들이여, 착하고 거룩하게 집을 나와 깨달 음에 이르는 여러 가지 진리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착하고 거룩하게 집을 나와 깨닫게 하는 여 러 가지 진리를 듣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라.`두 가 지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그대들이 말하는 두 가지란 무엇이냐고 한다면, `이것 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하는 것 이 하나의 관찰이고, `이것은 괴로움의 그침이다. 이것은 괴로움을 그치게 하는 길이다’하는 것이 둘 째 관찰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두 가지를 바르 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證得)하든가, 혹은 번뇌 의 남음이 있는 이 헤매는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 는 일이다.”

거룩한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그리고 행복한 스승께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괴로움을 모르고, 또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을 모르 며, 괴로움을 남김없이 없애는 방법도, 괴로움을 그치게 하는 길도 모르는 사람들.

(725) 그들은 마음의 해탈을 얻지 못하고, 지혜의 해탈도 얻지 못한다. 그들은 윤회를 끊어 버릴 수가 없다. 그들은 생과 늙음을 받는다.

(726) 그러나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을 알고, 괴로움을 남김 없이 없애는 방법을 알고, 또 한 괴로움을 그치게 하는 길을 안 사람들.

(727) 그들은 마음의 해탈을 이루고, 지혜의 해탈도 구현한다. 그들은 윤회를 끊어 버릴 수가 있다. 그들은 생과 늙음을 받지 않는다.”

(728)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일 을 바르게 관찰할 수가 있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무슨 까닭인가. 어떤 괴로 움이라도 모두 업(業)에 따라 생기는 것이라고 함이 하나의 관찰이고, 그러나 업을 남김 없이 끊어 버 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 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든가, 혹은 번뇌가 남아 있는 이 헤매는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거룩한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행복한 스승께서는 다시 다음같이 말씀하셨다.

“세상에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괴로움은 생존의 업 에 따라 일어난다. 참으로 알지 못하고 그 생존의 업을 짓는 어리석은 자는 되풀이해서 괴로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똑똑히 알고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을 관찰 해 업을 짓지 말아라.”

(729)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 른 방법이 있는가 하고 그대들에게 묻는 이가 있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떠한 괴로 움이든 무명(無明)으로 인해서 생긴다고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무명을 남김 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은 생기지 않는다 함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 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든가, 또는 번뇌의 남음이 있는 헤매는 이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같이 말씀하셨다. “이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되풀이하여 윤회를 받는 사람들은 그 귀취가 무명에만 있다.

(730) 이 무명이란 커다란 헤매임인데, 이로 말미암아 오 랜 윤회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밝은 지혜에 이른 중생들은 다시 생존을 받 는 일이 없다.”

(731)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 른 방법이 있는가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있 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떠한 괴로움이든 모두 형성력(形成力)으로 인해 생긴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형성력을 남김 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은 생기지 않는다 함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 어느 한가지를 기대 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든가, 또는 번뇌의 남음이 있는 이 헤매는 생존에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같이 말씀하셨다.

“어떠한 괴로움이 모두 형성력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모든 형성력이 없어진다면 괴로움이 생기지도 않는다.

(732) 괴로움은 형성력으로 인해 일어난다고 알아서, 모든 형성력을 없애고 욕심을 끊는다면, 괴로움은 없어지 고 만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라.

(733)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안 현자나 베에다에 통달한 사람들은, 악마의 속박에서 벗어나 다시는 생존을 받지 않는다.”

(734) “수행승들이여, 또 다른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 하는 방법은 없는가고 그대들에게 누가 묻거든`있다’ 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이든 식별 (識)로 인해서 일어난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 러나 식별작용을 남김 없이 없앤다면 괴로움도 생기 지 않는다 함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가지를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 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중 어느 하나가 기 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든가, 또는 번 뇌의 마음이 있는 이 헤매는 미망의 생존에 다시 돌 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어떠한 괴로움이 생길지라도 그것은 모두 식별작용 으로 인해 일어난다. 식별작용이 소멸된다면 괴로움 이 생길 수 없다.

(735) 괴로움은 식별작용에 의해 일어난다고 알아 식별작 용을 고요히 가라앉힌 수행승은, 쾌락을 탐하지 않 고 평안에 돌아가 있다.”

(736)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 른 방법은 있는가라고 그대들에게 누가 묻거든 `있 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도 모 두 접촉으로 인해서 일어난다 함이 그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접촉을 남김 없이 아주 없애 버린다면 괴로 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함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로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 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든가, 또 는 번뇌의 남음이 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 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접촉에 얽매이고, 생존의 물결에 밀리며, 사특한 길에 든 사람은 속박을 끊기 어렵다.

(737) 그러나 접촉을 잘 알아 평안을 즐기는 사람은, 실로 접촉을 없애 버렸기 때문에 쾌락을 느끼지 않고 평 안에 돌아가 있다.”

(738)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 른 방법이 있는가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있 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도 모 두 감수(感受)로 인해서 일어난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모든 감수를 남김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 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로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 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개의 과보 중에 어느 하나가 기 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또는 번 뇌의 남음이 있다면, 이 헤매는(迷妄) 생존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같이 말씀하셨다. “즐겁든 괴롭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건 간에 냇적으로나 욋적으로 감수된 것은 모두,

(739) 괴로움이라 알고, 없어지고 말 허망한 사물에 접촉 할 때마다 소멸을 인정하고야 그에 대한 집착을 버 린다. 온갖 감수가 소멸하기 때문에 수행승은 쾌락을 느끼지 않고 평안에 돌아가 있다.”

(740)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도 모두 애착으로 인해 일어난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애착을 남김 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 이 일어나지 않는다 함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고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 는 수행승들에게는 두 과보 중에 어느 하나가 기대된 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또는 번뇌의 남 음이 있는 이 헤매는 생존에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 씀하셨다.

“애착을 벗삼는 사람은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영원히 굴러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741) 애착은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이라는 이 우환을 알 아, 수행승은 애착을 버리고 집착 없이 바른 생각을 가지고 편력해야 한다.”

(742)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이 든 모두 집착으로 인해 일어난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집착을 남김 없이 없애 버린다 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 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 거나, 번뇌가 남아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 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 씀하셨다. “집착으로 인해 생존이 생긴다.

생존하는 자는 괴로 움을 받는다. 태어난 자에게는 죽음이 있다. 이것이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이다.

(743) 그러므로 현자들은 집착이 소멸되는 까닭을 바르게 알고, 태어남의 소멸을 잘 알아 다시는 생존을 받지 않는다.”

(744)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이 든 모두 기동(起動)에 의해서 일어난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기동을 남김 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 하는 수행승들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번뇌가 남아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 씀하셨다. “어떠한 괴로움도 모두 기동(起動)으로 인하여 생긴 다. 모든 기동이 소멸되면 괴로움도 생기지 않는다.”

(745) 괴로움은 기동으로 인해 생긴다는 것을 알아 모든 기동을 버리고, 기동이 없는 상태에서 해탈하여,

(746) 생존에 대한 애착을 끊고 마음이 고요한 수행승은 생의 윤회를 벗어난다. 그는 다시는 생존을 받지 않는다.”

(747)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떠한 괴로움이 든 모두 음식으로 인해 일어난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음식을 남김 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또는 번뇌가 남아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 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 씀하셨다. “어떠한 괴로음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은 모두 음식으로 인해 생긴다. 모든 음식이 소멸되면 괴로움도 생기지 않는다.

(748) 괴로움은 음식으로 인해 생긴다는 이 우환을 알아, 모든 음식을 잘 알고 모든 음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749) 모든 번뇌의 때를 없애 버림으로써 병이 나지 않음 을 바르게 알고 반성하여 음식을 애용하고, 이치에 사는 베에다의 달인(達人)은 어리석은 생존자의 수에 들지 않는다.”

(750)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 이든 모두 동요(動搖)로 인해 일어난다 함이 하나의 관찰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동요를 남김 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번뇌가 남아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어떠한 괴로움이 일어날지라도 모두 동요로 인해 서 일어난다. 모든 동요가 그치게 되면 괴로움도 생 기지 않는다.

(751) 괴로움은 동요로 인해 일어난다고 알아서, 그 때문에 수행승은 애착의 동요를 버리고, 모든 형성력을 종식시켜, 무동요 무집착으로 바른 생각을 가지고 편력해야 한다.”

(752)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걸림이 있는 사람은 주저한다는 것 이 하나의 관찰이다. 걸림이 없는 사람은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 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번뇌가 남아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 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걸림이 없는 사람은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걸림 이 있는 사람은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집착하고 있 어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753) 여러 가지 걸림 속에 커다란 두려움이 있다는 이 우환을 알아, 수행승은 걸림 없고 집착 없이 바른 생각을 가지고 편력해야 한다.

(754)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 른 방법이 있는가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있 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물질적 영역보다도 비물질적 영역이 더욱더 고요하다고 하는 것이 하나 의 관찰이다. 비물질적 영역보다 소멸의 편이 더 욱 고요하다 하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 행승들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번뇌가 남아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물질적 영역에 태어나는 모든 생물과 비물질적 영 역에 사는 모든 생물들은 소멸을 모르기 때문에, 다 시 이 세상에 태어난다.

(755) 그러나 물질적 영역을 잘 알고, 비물질적 영역에 안주하여 소멸에서 해탈한 사람들은 죽음을 버린 것 이다.”

(756)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수행승들이여, 신과 악마가 공존하 는 세계, 사문,바라문,신,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 존자가 `이것은 진리다’고 생각한 것을, 성자들은 `이것은 허망하다’고 사실대로 바른 지혜를 가지고 본다. 이것이 하나의 관찰이다.

신과 악마가 공존하는 세계, 사문,바라문,신,인 간을 포함한 모든 생존자가`이것은 허망하다’고 생각한 것을, 성자들은`이것은 진리이다’라고 있는 그 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보아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번뇌가 남아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 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보라. 신과 세상사람들은 내가 아닌 것을 나(我) 라고 생각하고 명칭(名)과 형태(色)에 집착해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757) 어떤 것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사실과는 다르다. 왜냐 하면, 어리석은 자의 생각은 허망하기 때문이다. 지나 가버리는 것은 허망한 것이므로.

(758) 그러나 안정은 허망한 것이 아니다. 성자들은 이것을 진리로 안다. 그들은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쾌락을 탐하지 않고 평안에 돌아간 것이다.”

(759) “수행승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라고 누가 묻거든`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수행승들이여, 신과 악마 가 공존하는 세계, 사문,바라문,신,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존자가`이것은 안락이다’라고 생각한 것 을, 성자들은`이것은 고뇌다’라고 사실대로 바른 지혜로써 살핀다. 이것이 하나의 관찰이다. 신과 악마가 공존하는 세 계, 사문,바라문,신,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존자 가`이것은 고뇌다’고 생각한 것을, 성자들은`이것 은 안락이다’고 사실대로 바른 지혜로써 살핀다.

이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가지고 바르게 살피며,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승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번뇌가 남아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있다고 할 수 있는 빛깔,음성,향기,맛,만져지 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한결같이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것.

(760) 그것들은 실로 신이나 세상사람들에게는 다같이 <안 락>이라 인정되고 있다. 또한 그것이 멸할 때에는 그들은 그것을 <고뇌>라고 생각한다.

(761) 그러나 성인들은 자기의 신체를 단멸(斷滅)하는 것 이 안락이라고 생각한다. 바르게 보는 사람들의 생 각은 세상의 사람들과는 정반대다.

(762) 다른 사람들이 <안락>이라 하는 것을 성자들은 <고 뇌>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고뇌>라고 하는 것을 성자들은 <안 락>이라고 생각한다. 알기 어려운 진리를 보라. 무 지란 사람들은 여기서 헤매게 된다.

(763) 덮여 있는 사람에게는 어둠이 있다. 바르게 보지 않 는 사람에게는 암흑이 있다. 선량한 사람에게는 펼 쳐 보임(開顯)이 있다. 마치 볼 수 있는 사람에게 광명이 있는 것처럼. 이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짐 승같은 치인(痴人)은 안락의 곁에 있으면서도 그것 을 모른다.

(764) 생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히고 생존의 흐름에 떠 내려가, 악마의 영토에서 사는 사람은 이 진리를 깨닫기 힘들다.

(765) 성자들 말고 누가 이 경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이 경지를 바르게 알면, 번뇌의 때가 묻지 않은 이가 되어 원만한 평안에 들어가리라.” 스승(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은 기뻐하면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이 설법이 있을 때 육십명의 수행승들은 집착이 없어져 마음이 더러움에서 해탈되었다.


제4장 8편의 시

1. 욕망(慾望)

(766)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 잘 될 때에는, 그는 참으로 인간이 갖고자 하는 것을 얻어서 기뻐한다.

(767) 욕망을 이루고자 탐욕이 생긴 사람이, 만일 욕망을 이루지 못하게 되면, 그는 화살에 맞은 사람처럼 괴 로워 번민한다.

(768) 뱀의 머리를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것처럼, 모든 욕망을 피하는 사람은 바른 생각을 하고, 이 세상의 애착을 넘어선다.

(769) 농토,집터,황금,마소(牛馬),노비,고용인,부녀, 친척, 그밖에 여러 가지를 탐내는 사람이 있다면,

(770) 무력한 것(온갖 번뇌)이 그를 이기고 위험과 재난이 그를 짓밟는다. 그러므로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마 치 파손된 배에 물이 새어들 듯이.

(771) 그래서 사람은 항상 바른 생각을 지키고, 모든 욕망을 회피해야 한다. 배에 스며든 물을 퍼내듯이, 그와 같은 욕망을 버리 고 강을 건너 피안에 도달한 사람이 되라.

2. 동굴(洞窟)

(772) 동굴(육신)속에 머물러 집착하고, 온갖 번뇌에 덮 이어 미망(迷妄) 속에 빠져 있는 사람, 이러한 사람 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참으로 이 세상 욕망 을 버리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773) 욕구에 따라 생존의 쾌락에 붙잡힌 사람들은 해탈하 기 어렵다. 남이 해탈을 시켜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래와 과거를 생각하면서 이러한 현재의 욕 망, 또는 과거의 욕망에 탐착한다.

(774) 그들은 욕망을 탐하고 구하고 빠지고, 인색하고 부 정(不正)에 친근하지만, 죽을 때에는 괴로움에 짓눌 려 슬퍼한다. 여기서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하고.

(775) 그러므로 사람들은 여기서 배워야 한다. 세상에서 부정이라고 알려진 그 어떤 일에도 휩쓸려 서는 안된다. 사람의 목숨은 짧은 것이라고 현자(賢者)는 말하지 않았던가.

(776) 여러 가지 생존에 대한 집착에 붙들려 이 세상 사람 들이 떨고 있는 것을 나는 본다. 못난 사람들은 여 러 가지 생존에 대한 애착을 떠나지 못한 채 죽음에 직면하여 울고 있다.

(777) 무엇인가를 내 것이노라고 집착해 동요하고 있는 사 람들을 보라. 그들의 모습은 매말라, 물이 적은 개 울에서 허덕이는 물고기와 같다. 이 꼴을 보고 <내 것>이라는 생각을 말아야 한다. 여러 가지 생존에 대해 집착을 버리고

(778) 현자는 양극단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고, 감관과 대 상의 접촉을 잘 알아서 탐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조차 비난할 나쁜 짓을 하지 않고, 보고 듣는 일에 팔리지 않는다.

(779) 생각을 정리해 강을 건너라. 성인은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에 더럽히지 않으며, 뇌의 화살을 빼고 애써 정진하여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는다.

3. 분노(憤怒)

(780) 마음으로부터 화를 내고 남을 비방하는 사람이 있다. 또한 마음이 진실한 사람이라도 남을 비방하는 일이 있다. 비방하는 말을 들을지라도 성인은 그것 에 동하지 않는다. 성인은 무슨 일에나 마음이 거칠어지지 않는다.

(781) 욕심에 끌리고 소망에 붙들린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견해를 초월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완전하다고 생각한 바를 그대로 행한다. 그는 또한 아는 대로 떠 들어댈 것이다.

(782) 누가 묻지도 않는데 남에게 자기의 계율과 도덕을 선 전하는 사람, 스스로 자기 일을 떠들고 다니는 사람 은, 거룩한 진리를 갖지 못한 사람이라고, 진리에 도달한 사람들은 말한다.

(783) 편안하고 마음이 안정해진 수행승이 계율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하고 있노라 하면서 뽐내지 않고, 이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번뇌가 불타지 않는다면, 그 는 거룩한 진리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고, 진리에 도달한 사람들은 말한다.

(784) 때묻은 교법을 미리 만들고 고치며, 치우쳐서 자기 안에서만 훌륭한 열매를 보는 사람은 <흔들이는 평 안>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785) 모든 사물에 대한 고집을 확실히 알고 자기 견해에 대한 집착을 초월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 에 사람들은 그런 비좁은 견해의 울타리 안에 갇혀 법을 등지고 또 집착한다.

(786) 사악(邪惡)을 쓸어 없애버린 사람은, 이 세상 어디 를 가든 모든 생존에 대해 미리 가지고 있는 편견이 없다. 사악을 물리친 사람은 허위와 교만을 버렸거 늘, 어찌 윤회에 떨어질 것인가. 그에게는 이미 의 지하고 가까이할 아무것도 없다.

(787) 모든 일에 기대고 의지하는 사람은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기대고 의지함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는 집착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 다. 그는 이 세상에서 모든 편견을 쓸어 버린 것이다.

4. 청정(淸淨)

(788) `으뜸가고 병(病)이 없는 청정을 나는 본다. 사람이 아주 깨끗해지는 것은 견해에 달려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을 으뜸으로 알고 청정을 생각하는 사람 은, 견해(見解)를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해서 얻는 지혜로 생각한다.

(789) 만일 사람이 견해로 인해서 청정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 또 사람이 지식에 의해 괴로움을 버릴 수 있 는 것이라면, 번뇌에 얽매인 사람이 바른 길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도 깨끗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 이 말하는 사람을 <편견이 있는 사람>이라 부른다.

(790) 바라문은 바른 길 말고는 본 것,학문,계율,도덕, 사색 중 어느 것도 청정하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재앙과 복에 때묻지 않고 자아(自我)를 버려, 이 세상에서 재앙과 복의 원인을 만들지 않는다.

(791) 옛 스승을 버리고 다른 스승을 의지하며, 번뇌의 동 요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은 집착을 뛰어 넘을 수 없 다. 그들은 잡았다가는 또 버린다. 원숭이가 나무가 지를 잡았다가 다시 놓아 버리듯이.

(792) 스스로 맹세와 계율을 가진 사람은 생각에 잠겨 여 러 가지 잡다한 일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베에다에 의해 알고 진리를 이해하며, 잡다 한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793) 그는 모든 사물에 대해서 보고 배우고 생각한 것을 자제하고 지배한다. 이렇게 관찰하고 덮인 것 없이 행동하는 사람을, 어찌 이 세상에서 망상 분별할 수 있겠는가.

(794) 그들은 망상 분별하지 않고, 어떤 것을 유달리 소중 하게 여기지도 않으며, <궁극의 청정>을 말하지도 않는다. 결박되어 있는 집착을 버리고 어떠한 세상 사물에 대해서도 바라는 것이 없다.

(795) 바라문은 번뇌의 범위를 초월해 있다. 그가 무엇을 보거나 알아서 집착하는 일은 없다. 그는 욕심을 부 리지도 않고, 또 욕심에서 떠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그는 이 세상에서는 이것이 으뜸이라고 부질없 이 집착하지 않는다.

5. 으뜸가는 것

(796) 세상에서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보는 것들을 <으뜸가 는 것>이라 생각하고, 여러 가지 견해에 붙들려 그 밖에 다른 것들은 다 <뒤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므 로 그는 여러 가지 논쟁을 넘어설 수가 없다.

(797) 그는 본 것, 배운 것, 계율이나 도덕, 사색한 것에 대해서 자신 안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고서, 그것만 을 집착한 나머지, 그 밖에 다른 것은 모두 뒤떨어 진 것으로 안다.

(798) 사람이 어떤 일에만 치중한 나머지, 그 밖에 다른 것은 모두 유치하다고 본다면, 그것은 대단한 장애 라고, 진리에 도달한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수행승은 본 것, 배운 것, 사색한 것, 또는 계율이나 도덕에 구애를 받아서는 안 된다.

(799) 지혜에 대해서도, 계율이나 도덕에 대해서도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기를 남과 동등하다거나 남보다 못하다거나 또 는 뛰어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800) 그는 이미 가지고 있던 견해를 버리고 집착하지 않 으며, 지혜에 대해서도 특별히 의존하지 않는다. 그 는 실로 여러 가지 다른 견해로 분열된 사람들 틈에 있으면서 당파에 맹종하지 않고, 어떤 견해일지라도 그대로 믿는 일이 없다.

(801) 그는 양극단에 대해서, 여러 생존에 의해서, 이 세 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원하는 바가 없다. 모든 사물에 대해 단정할 만한 고집이 그에게는 조 금도 없다.

(802) 그는 이 세상에서 본 것, 배운 것, 또는 사색한 것 에 대해서 티끌만한 망상도 갖지 않는다. 어떠한 견 해에도 집착하지 않는 바라문이, 이 세상에서 어찌 망상 분별하겠는가.

(803) 그들은 망녕된 생각으로 분별하지 않고, 그 어느 한 가지 견해만을 유달리 존중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모든 가르침을 원하지도 않는다. 바라문은 계율이나 도덕에 이끌리지도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피안(彼 岸)에 이르러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6. 늙음

(804) 아, 짧도다 인간의 생명이여. 백 살도 못되어 죽어 버리는가.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결국은 늙어서 죽는 것을

(805) 사람들은 내 것이라고 집착한 물건 때문에 근심한다. 자기가 소유한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 것은 모두 변하고 없어지는 것으로 알고, 집에 머물러 있지 말아라.

(806) 사람이`이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물건, 그것은 그 사람의 죽음으로 잃게 된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현명하게 이 이치를 깨닫고, 내 것이라는 관념에 사로 잡히지 말아라.

(807) 이를테면, 눈을 뜬 사람은 꿈속에서 만난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듯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이 세상을 떠나면 다시는 만 날 수가 없다.

(808) 누구 누구라고 하던 사람들도 한번 죽은 후에는 그 이름만이 남을 뿐이다.

(809) 내것이라고 집착하여 욕심부리는 사람은, 걱정과 슬 픔과 인색함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안온함을 얻은 성인들은 소유를 버리고 떠난 것이다.

(810) 싫어하고 물러나 행을 닦는 수행승은 멀리 떨어진 곳 을 즐겨 찾는다. 그가 생존의 영역 속에 자기를 드 러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에게 어울리는 일이다.

(811) 성인은 아무것에도 머무르지 않고,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또 슬픔도 인색함도 그를 더럽히지 않는다. 마치 연 꽃 잎에 물이 묻지 않는 것처럼.

(812) 이를테면, 연꽃 잎에 물방울이 묻지 않듯이, 성인은 보 고 배우고 사색한 어떤 것에도 더렵혀지지 않는다.

(813) 사특한 악을 털어버린 사람은 보고 배우고 생각한 어 떤 일에도 유달리 집착하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것에 의해서 깨끗해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탐내지 않고 탐욕에서 떠나려 하지도 않는다.

7. 팃사 멧테야

(814) 장로 팃사 멧테야가 말했다. “스승이시여, 성교에 탐익하는 자의 파멸을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의 가르침을 듣고 우리도 멀리할 것 을 배우겠습니다.”

(815) 스승께서는 대답하셨다. “멧테야여, 성교에 탐익하는 자는 가르침을 잃고, 그 행은 사특하고 악하다. 이것은 그들 안에 있는 천한 요소이다.

(816) 여태까지는 독신으로 살다가 나중에 성교에 빠지는 자는, 수레가 길에서 벗어난 것과 같다. 세상 사람들 은 그를 천한 범부라 부른다.

(817) 지금껏 그가 가졌던 명예와 명성을 다 잃게 된다. 이 일을 보고 성교를 끊도록 힘쓰라.

(818) 그는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 가난뱅이처럼 생각만 한다. 이런 사람은 남의 좋은 평판을 듣고 부끄러워한다.

(819) 남에게 욕을 먹으면 칼날을 세우고 거짓말을 한다. 이것이 그에게 커다란 난점이다.

(820) 독신을 지키고 있을 때에는 여러 사람에게서 지혜로 운 분이라고 인정받던 사람도, 성교에 빠지기 때문 에 마침내 어리석은 사람처럼 괴로워한다.

(821) 성인은 이 세상에서 앞뒤로 이러한 재난이 있음을 알아, 굳게 독신을 지키고 성교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822) 속된 일에서 떠나는 것을 배우라. 이것은 모든 성인 에게 있어 으뜸가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 자기가 최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만 평안 에 가까워졌을 뿐이다.

(823) 성인은 온갖 욕망을 거들떠보지 않으며, 이를 떠나 행하고 흐름을 건넜기 때문에, 온갖 욕망에 속박되 어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한다.”

8. 파수우라

(824) 그들은`이것만이 청정하다’고 고집하면서, 다른 가 르침은 청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자기가 따르고 있는 것만이 선(善)이라 하면서, 서로 다른 진리를 고집하고 있다.

(825) 그들은 토론을 좋아하고, 집회에 나가 서로 상대방 을 어리석은 자라고 낙인하며, 스승을 업고서 논쟁 을 벌인다. 자신이 칭찬을 받고자 스스로를 진리에 도달했다고 하면서.

(826) 집회에서 논쟁에 참가한 사람은 칭찬을 받고자 애를 쓴다. 그리고 패배하면 풀이 죽어 논적(論敵)의 결 점을 찾다가 남한테서 비난을 받고 화를 낸다.

(827) 모든 심판자들이 그가 말한 바에 대해서`그대는 패 배했다. 논파당했다’고 하면, 논쟁에 패배한 자는 슬피 울고,`그는 나를 이겼노라’고 비탄에 잠긴다.

(828) 이러한 논쟁이 수행자들 사이에 일어나면, 이들 가 운데에 득의(得意)와 실의가 엇갈린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논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칭찬을 받는 것 이외에 아무런 이익도 없기 때문이다.

(829) 또는 집회에서 의견을 말하여 그로 인해 칭찬을 받고, 속으로 기대했던 이익을 얻어, 그 때문에 기뻐 우쭐해진다.

(830) 우쭐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를 해치는 것이다. 그런 데 그는 교만하고 허세를 부린다. 이것으로 미루어 논쟁을 해서는 안 된다. 모든 통달한 사람들은 그로 인해 청정이 얻어진다고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831) 이를테면, 국왕의 녹을 먹고 사는 용사가 상대편 용 사를 찾아 환성을 지르며 뛰어가는 것과 같다. 용사여, 그 토론자가 있는 곳으로 가라. 상대가 되어 싸울 자는 이전에도 거의 없었다.

(832) 특수한 철학적 견해를 가지고 논쟁하여`이것만이 진 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대는 그들에게 말하라.`논쟁이 일어나도 그대와 상대할 사람은 여 기에는 없다’고.

(833) 또 그들은 번뇌의 군대를 처부수고, 바른 견해가 모 든 편견과 모순되지 않게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서 그대는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파수우라여, 오 랫동안 <으뜸가는 것>이라 해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834) 그런데 그대는`나야말로 승리를 거두리라’고 생각 하며, 마음 속에 여러 가지 편견을 가지고, 사특한 악을 물리친 사람(부처님)과 보조를 같이 하고 있지 만, 그것만으로는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9. 마아간디야

(835)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예전에 도를 닦을 때에 애착과 혐오와 탐욕 이라는 세 마녀(魔女)를 보고도 그녀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욕망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오줌 똥으로 가득 찬 그 여자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그녀들에 게 발을 대기조차 싫
었다.”

(836) 마아간디야가 말했다. “만약 당신이 여러 왕들이 구했던 여자, 그와 같은 보 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어떠한 견해를 어떠한 계율,도덕,생활법을, 그리고 어떠한 생존 상태로 태어나는 것을 말씀하십니까?”

(837)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마아간디야여, 나는 이런 것을 말한다고 정해진 것이 없다. 모든 사물에 대한 집착이라 분명히 알고, 모든 견해에서 과오를 보고 고집하는 일이 없어, 살피면서 마음의 평안을 알았노라.”

(838) 마아간디야가 말했다. “성인이시여, 당신께서는 생각해서 구성한 정설(定說)를 고집함이 없이 <마음의 평안>이란 말씀을 하 시는데, 그것을 다른 현인(賢人)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839) 스승은 대답하셨다. “마아간디야여, 견해에 의해서나 학문에 의해서나, 지식이나 계율, 혹은 도덕에 의해서 청정해질 수 있 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견해와 학문과 지식이 없 이도, 계율과 도덕을 지키지 않고도 청정해질 수 있 다고 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버리고 고집하지 않고 걸려 있지 않으며, 평안하고 덧없는 생존을 원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마음의 평안이다.”

(840) 마아간디야가 말했다. “만약 견해와 학문과 지식과 계율이나 도덕에 의해서 도 청정해질 수 없다 하고, 또한 무견해,무학,무식 에 의해서도, 계율과 도덕을 지키지 않는 것에 의해 서도, 청정해질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혼 미케 하는 가르침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 들은 견해에 의해 청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841) 스승은 대답하셨다. “마아간디야여, 그대는 자기 소견에 의해서 물어 보기 때문에 집착된 일에 빠진 것이다. 그대는 이 마음의 평안에 대해서도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 대는 나를 보고 사람을 미혹케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842) `같다’든가`뛰어났다’든가 혹은`뒤떨어졌다’고 생 각하는 사람, 그는 그런 생각 때문에 다툴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 그에게는`같다’든가`뛰어났다’`뒤떨어졌다’는 생 각이 없다.

(843) 그 바라문은 어째서`내 말은 진실하다’고 하는가. 또 그는`네 말은 허위다’라고 해서 누구와 논쟁하겠는가. 같다든가 같지 않다든가 하는 분별이 없어 진 사람이 누구와 논쟁을 벌이겠는가.

(844) 집을 버리고 거처도 없이 방황하며, 마을에서 친교 (親交)를 갖지 않는 성인은 온갖 욕망을 떠나 미래 에 희망을 두지도 않으며, 또한 군중에게 이론(異論) 을 내세워 논란을 벌여서도 안 된다.

(845) 용(수행의 완성자)은 모든 편견을 떠나 세상을 편 력하기 때문에, 고집을 부려 논쟁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수련(睡蓮)이나 가시 돋힌 연꽃이 물이 나 진흙에 더럽히지 않듯이, 성인은 평안을 말하는 사람이므로 탐내지도 않고 욕 망에도 세속에도 더럽히지 않는다.

(846) 베에다에 통달한 사람은 견해나 사색에 있어서 교만 하지 않다. 그의 본성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업에 의해서도 학문에 의해서도 이끌리지 않는다. 그는 집착하는 곳에도 끌려 들지 않는다.

(847) 생각을 떠난 사람에게는 결박이 없다. 지혜에 의해 서 해탈한 사람에게는 미혹(迷惑)이 없다. 생각과 견해를 고집한 사람들은 남과 충돌하면서 세 상을 방황한다.”

10. 죽기 전에

(848) “어떻게 보고, 어떤 계율을 지키는 사람을 <평안하 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고오타마시여, 그 가장 뛰어난 사람을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849) 스승은 대답하셨다. “죽기 전에 애착을 떠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 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미래 에 대해서도 별로 걱정할 바가 없다.”

(850) 그 성인은 화내지 않고, 두려워 떨지 않고, 우쭐거 리지 않고, 후회하지 않으며, 주문을 외우고 허둥거 리지 않고 말을 삼간다.

(851) 미래를 원하지도 않고, 과거를 추억하며 우울해 하 지도 않는다. 감관에 닿는 모든 대상에서 멀리 떨어 질 것을 생각하며, 여러 견해에 이끌리는 일이 없다.

(852) 탐욕에서 멀리 떠나 거짓 없고 욕심 내지 않으며, 인색하거나 거만하지 않으며, 미움받지 않고 두 가지 말(兩舌)을 하지 않는다.

(853) 유쾌한 일에 빠지지 않고 거만하지도 않으며, 부드 럽고 상냥하게 말하며, 믿는 일도 없고 욕심을 버리 는 일도 없다.

(854) 이익을 바라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이익이 없을지 라도 성내지 않는다. 애착 때문에 남을 거역하지 않 으며, 맛있는 음식을 탐익하지도 않는다.

(855) 평온해 있고, 항상 바른 생각을 가지고 세상에서 남 을 자기와 같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또 자기가 뛰 어났거나 못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에게는 번 뇌의 불이 타오르지 않는다.

(856) 걸림이 없는 사람은 이치를 알아 걸림이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생존을 위한 애착이나 생존을 끊어 없 애려는 애착이 없다.

(857) 모든 욕망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 그야말로 <평안한 사람>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에게는 얽매임의 매듭 이 없고, 이미 모든 집착을 뛰어 넘었다.

(858) 그에게는 자식도 가축도 논밭도 주택도 없다. 이미 얻은 것도 아직 얻지 못한 것도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859) 범부와 사문 또는 바라문들이 그를 비난하여 탐욕의 허물이 있다고 하겠지만, 그는 욕심 같은 것을 생각 해 본 적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여러 가지 논 의를 받고도 동요하지 않는다.

(860) 성인은 탐욕을 떠나 인색하지 않으며`자기는 잘났 다’든가 `자기는 동등하다’든가`자기는 못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분별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망 상분별에 따르지도 않는다.

(861) 그는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다. 또 무소유를 걱정하 지도 않는다. 그는 모든 사물에 이끌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참으로 <평안한 사람>이라 할만 하다.

11. 투쟁(鬪爭)

(862) “투쟁,논쟁,근심,슬픔,인색,만심(慢心),오만, 악구(惡口)는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 어디서 일어난 것인지, 그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863) “투쟁,논쟁,근심,슬픔,인색,만심,오만,악구 는 사랑하고 좋아하는 데에서 일어난다. 투쟁과 논쟁에는 인색이 따르고, 논쟁이 일어나면 악구가 나온다.”

(864) “세상에서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 인연이 되어 일어납니까? 또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욕심 은 무슨 인연으로 생기며, 사람이 내세에 대해서가 지는 희망과 그 성취는 무슨 인연으로 생깁니까?”

(865) “세상에서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과 욕심은 욕망이 인연이 되어 생긴다. 또 사람들이 내세에 대해 갖는 희망과 성취도 이것을 인연으로하여 일어난다.”

(866) “그러면 세상에서 욕망은 무엇을 인연으로 일어납니까? 또 형이상학적인 단정은 무엇에서 생깁니까? 분노와 거짓말과 의혹과 사문이 말하는 일들은 무 엇에서 일어납니까?”

(867) “세상에서 쾌(快) 불쾌라고 하는 것에 의해서 욕망이 일어난다. 모든 물질적 존재에 있어 생기고 소멸 하는 것을 보고, 세상사람들은 욋적인 사물에 사로 잡혔다고 단정을 내린다.

(868) 분노와 거짓말과 의혹, 이런 것도 쾌 불쾌의 두 가지 가 있을 때 나타난다. 의혹이 있는 자는 지혜의 길에 서 배우라. 사문은 알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을 말한 것이다.”

(869) “쾌 불쾌는 무엇을 인연으로 일어납니까? 또 무엇 이 없을 때 이것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생기고 소멸하는 뜻과 그 인연이 되어 있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870) “쾌 불쾌는 접촉을 인연으로 해서 일어난다. 접촉이 없을 때에는 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생기고 소멸한다는 뜻과 그 인연이 되어 있는 접촉 을 나는 너에게 말한다.”

(871) “세상에서 접촉은 무엇을 인연으로 일어납니까? 집 착은 무엇에서 생깁니까? 무엇이 없을 때 아집(我執)이 없어집니까? 또 무엇이 소멸했을 때 접촉을 없앨 수 있습니까?”

(872) “명칭과 형태로 인해서 접촉이 일어난다. 모든 집착 은 요구에 의해서 생긴다. 요구가 없을 때는 아집도 없으며, 형태가 소멸했을 때는 접촉도 없어지고 만다.”

(873) “어떻게 행하는 자에게 형태가 소멸됩니까? 소멸되 는 모습을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그것을 알고자 합 니다. 나는 이같이 생각했습니다.”

(874) “있는 그대로 생각하는 자도 아니고, 잘못 생각하는 자도 아니며, 생각이 없는 자, 생각을 소멸한 자도 아니다. 이렇게 행하는 자의 형태는 소멸한다. 그러나 넓혀지는 의식은 생각을 인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875) “우리가 당신께 물은 것을 당신께서는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또 다른 것을 당신께 묻겠으니 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 세상에서 어떤 현자들은 이 상태야말로 사람의 으뜸가는 청정한 경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청정한 경지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876) “이 세상의 어떤 현자들은 이 상태야말로 최상의 청정한 경지라고 말한다. 또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단멸(斷滅)을 말하고, 정신도 육체도 남김 없이 소 멸하는 데에 으뜸가는 청정한 경지가 있다고 말한다.”

(877) 그러나 생각이 깊은 성인은, 이 사람들은`걸림이 없다’는 것, 여러 가지 걸림을 알고` 현자는 여러 가지 덧없는 생존을 받지 않는다’고 알아, 해탈된 사람은 논쟁에 끼여 들지 않는다.”

12. 잇닿은 응답 -소편(小篇)

(878) 세상 학자들은 저마다 견해를 가지고, 서로 다른 편 견을 가지고, 자기야말로 진리에 통달한 사람이라 하면서 여러 가지로 주장한다.`이렇게 아는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다. 이것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직 완 전한 사람(如來)이 아니다’라고.

(879) 그들은 이렇듯 다른 편견을 가지고 논쟁하며`저 사 람은 어리석어 진리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 런 사람들은 모두 자기야말로 진리에 이른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지만, 그들 중에 누구의 말이 진실한 것일까?

(880) 만약 남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어리석고 저속하며 지혜가 뒤떨어진 자라면, 그들은 모두 각 자의 견해만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어리석고 지혜 가 뒤떨어진 사람인 것이다.

(881) 또 만약 자기의 견해로 인해 깨끗해지고 완전히 청 정한 지혜를 가진 자, 진리를 터득한 자, 밝은 지혜 를 지닌 자가 된다면, 그들의 견해는 그러한 점에서 똑같이 완전하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지혜가 뒤떨어 진 자는 없을 것이다.

(882) 어리석은 사람들이 서로 남의 말만 하는 것을 듣고, 나는`이것은 진실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견해를 진실이라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남을 <어리석은 자>라고 보는 것이다.

(883) 어떤 사람들이`진리다, 진실하다’고 말하는 그 견 해를 다른 사람들은`허위다, 허망하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서로 다른 편견을 가지고 논쟁한다. 어째서 사문들은 동일하게 말하지 않는 것일까?

(884) 진리는 하나뿐, 둘은 없다. 그 진리를 안 사람은 다 투는 일이 없다. 그들은 각기 다른 진리를 찬양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문들은 동일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885) 스스로 진리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면서 말하는 사람 들은, 어째서 여러 가지 다른 진리를 내세우는 것일까? 그들은 여러 가지 다른 진리를 남에게서 들은 것일까? 아니면, 자기의 사색만을 따르고 있는 것일까?

(886) 세상에 다른 영원한 진리는 없다. 다만 영원한 것으 로 상상할 따름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견해에 대해서 사색하고 탐구하여 `내 말은 진리다’`다른 사람 의 말은 허망하다’고 두 가지로 말하는 것이다.

(887) 견해나 전해 내려 오는 학문이나 계율,서원,사색 등에 의존하여 남의 말을 의존하고, 자기 학설의 단정을 기뻐하면서`반대하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 다. 진리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한다.

(888) 반대자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보는 동시에, 자기는 진리에 이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 자 기는 진리에 이른 사람이라 하면서 남을 멸시한다.

(889) 그는 그릇된 망견(妄見)으로 차 있고, 교만에 넘쳐 있다. 자기는 완전하다고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제 일인자(第1人者)라 자만한다. 그의 견해는 자신이 볼 때 그처럼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890) 만약 남이 자기를 어리석다고 해서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 자신도 상대와 함께 어 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다. 또한 자기를 베에다의 달 인(達人),현자라 부를 수 있다면, 여러 사문 중에 어리석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891) `내 학설 이외의 가르침을 말하는 사람들은, 청정을 등지고 완전한 사람(如來)이 아니다’라고 일반 외도 (外道)들은 말한다. 그들은 자기의 견해에 빠져 때 가 끼어 있기 때문이다.

(892) 자기 학설만을 청정하다 말하고, 남의 가르침에는 청 정이 없다고 한다. 이설(異說)의 무리들은 이와 같 이 집착하여 자기의 길만을 완고히 내세운다.

(893) 자기의 도(道)를 완고히 내세우고 있지만, 어느 누 구를 어리석은 사람이라 볼 수 있을 것인가. 남의 말을 우매하다거나 부정(不淨)하다고 한다면, 그는 스스로 옹고집이 되고 말 것이다.

(894) 학설의 결정에 있어서 스스로 잘 헤아리면서도 다시 그는 세상에서 논쟁하게 된다. 모든 철학적 단정(斷定)을 버렸다면 사람들은 고집 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13. 잇닿은 응답 -장편(長篇)

(895) 이러한 견해를 고집하면서`이것만이 진리다’라고 논쟁하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남의 비난을 받는다. 다만 일부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뿐.

(896) 가령 칭찬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보잘 것 없는 것이어서 평안을 얻을 수는 없다. 논쟁의 결과는 칭 찬과 비난 두 가지라고 나는 말한다. 이 도리를 보 더라도 그대들은 논쟁이 없는 경지를 안온하게 알아 논쟁을 하지 말아라.

(897) 대개 범속한 무리들이 갖는 이러한 세속적인 견해를 지자(知者)들은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는 보고 듣 는 일에 대해`이것이다’라고 단정하지 않기 때문에 걸리는 일이 없다. 그는 무엇 때문에 걸릴 것인가.

(898) 계율을 최상의 것으로 받드는 사람들은`계를 지킴 으로써 청정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며 계를 받는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따르자. 그러면 청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고 하면서, 진리에 이르렀다고 말 하는 사람들은 덧없는 생존에 유혹되고 있는 것이 다.

(899) 만약 그가 계율이나 도덕을 깨뜨렸다면 그는 두려워 떤다. 그는`이곳에만 청정이 있다’라고 갈망한다. 이를테면, 카라반(隊商)에서 이탈된 장사치가 카라 반을 찾고, 집을 떠난 나그네가 집을 찾는 것처럼.

(900) 모든 계율과 맹세도 저버리고, 세상에서 죄과가 있 든 없든 이 행위를 다 버리고, 청정하다든가 부정하 다 든가 하면서 무엇을 구하는 바도 없이, 그것들에 게 얽매이지 말고 행하여라. 물론 평안을 고집하지도 말고.

(901) 하기 싫은 고행을 하며, 혹은 보고 배우고 생각한 것으로 인해 음성을 높여 청정을 찬탄하는 이는, 덧 없는 생존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902) 원하고 구하는 이에게는 욕심이 있다. 또 계략이 있 을 때는 두려움이 있다. 이 세상에서 생도 사도 없 는 사람,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갖고자 할 것인가.

(903) 어떤 사람이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하는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은 <천한 것>이라고 한다. 이 중에서 어 느 것이 참다운 주장일 것인가. 그들은 저마다 자기 야말로 진리에 이른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

(904) 그들은 자기의 가르침을 완전하다 하고, 남의 가르 침을 천박하다고 한다. 그들은 이렇게 서로 다른 편 견을 가지고 논쟁하며, 저마다 자기 가설(假說)을 진리라고 말한다.

(905) 만약 남에게 비난받고 있기 때문에 천박하다고 한다면 모든 가르침 가운데서 뛰어난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고, 남 의 가르침은 덜됐다고 하기 때문이다.

(906) 그들은 자기의 도(道)를 자찬하는 것처럼, 자기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논의(論議) 는 진실하다고 했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논의는 모두가 청정하기 때문이다.

(907) 바라문들은 남에게 이끌리지 않는다. 또한 여러 가 르침에 대해서 단정을 내리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논쟁을 초월해 있다. 남의 가르침을 가장 훌륭 하다고 보지도 않기 때문에.

(908) ‘우리는 안다. 우리는 본다. 이것은 사실이다’라는 견해로 인해서 어떤 사람들은 청정을 알고 있다. 비록 그가 보았다 하더라도 그 자신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들은 바른 길에서 벗어나 다 른 일에 의해 청정이 있다고 말한다.

(909) 보는 사람은 명칭과 형태를 보는 것이다. 보고 나서 는 그것들을 상주(常住), 안락, 실아(實我)라고 인정한다. 보고 싶은 사람은 많든 적든 그렇게 볼 것이다. 진리에 통달한 사람들은 그렇게 봄으로써 청정해진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910) 집착하여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견해를 존중하므 로 그를 이끌기란 매우 어렵다. 자기가 믿고 있는 것만이 옳다고 하며, 그것에서만 청정을 인정하는 논자(論者)는 그와 같이 일방적으로만 본 것이다.

(911) 바라문은 바르게 알고 망상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 자기 소견에 흐르지 않고 지식에도 기대지 않는 다. 그는 범속한 모든 견해를 알고 마음에 두지 않 는다.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집착하고 있지만.

(912) 성자는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속박을 버리고, 논쟁 이 벌어졌을 때에도 어느 한쪽에 가담하지 않는다. 그는 불안한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평안하고 태 연하며 집착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집착하고 있지만.

(913) 지나간 허물은 버리고 새로운 허물을 만들지 않으며 욕심 버리지 않고 논쟁에 집착하는 일도 없다. 현자는 모든 견해를 벗어나 세상에 물들지 않으며, 자책할 일도 없다.

(914) 현자는 보고 배우고 생각한 어떤 일에 대해서도 맞 서지 않는다. 그는 부담에서 해방되어 있다. 그는 계략을 꾸미지 않고, 쾌락에 빠지지 않으며, 구하는 일도 없다.

14. 신속(迅速)

(915) “태양의 후예이신 위대한 선인(仙人 = 부처님)께 세 속에서 멀리 떠나는 일과 평안의 경지에 대해서 묻겠습니다. 수행자는 어떻게 보아야 세상의 어떤 것 에도 집착하지 않고 평안에 들 수 있겠습니까?”

(916) 스승께서는 대답하셨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의식의 근본을 모두 제지(制止)하고, 안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애착까지도 눌러 버리도록 항상 명심하여 배우자.

(917) 안팎으로 될 수 있는 한, 이치를 알아 버려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만한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진리에 도달한 사람은 그것이 평안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918) 이로 말미암아`나는 뛰어나다’든가`나는 뒤떨어졌 다’든가 혹은`나는 대등하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러 가지 질문을 받더라도 자기가 잘났다고 망 녕되이 생각하지 말아라.

(919) 수행자는 마음이 평안해야 한다. 밖에서 고요함을 찾지도 말아라. 안으로 평안하게 된 사람은 고집할 것이 없다. 하물며 어찌 버릴 것이 있으랴.

(920) 바다 속에는 파도가 일지 않고 잔잔하듯이, 고요 히 멎어 움직이지 말아라. 수행자는 무슨 일에나 욕 심을 내서는 안 된다.”

(921) “눈을 뜨신 분께서는 몸소 체험하신 법, 위험과 재 난의 극복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바라옵건대, 바른 길을 일러 주십시오. 계율규정(戒律規定)이나 정신안정의 법도 말씀해 주십시오.”

(922) “눈으로 보는 것에 탐내지 말아라. 저속한 이야기에 서 귀를 멀리 하라. 맛에 탐착하지 말아라.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이라도 내것이라고 고집하지 말아라.

(923) 고통을 겪을 때라도 수행자는 결코 비탄에 빠져서는 안 된다. 생존을 탐내서는 안된다. 무서운 것을 만났을 때도 떨어서는 안 된다.

(924) 음식이나 옷을 얻더라도 묵히거나 쌓아 두어서는 안된다. 또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 해서 걱정해서도 안 된다.

(925) 마음을 안정시켜라. 당황해서는 안 된다. 후회하지 말아라. 게으르지 말아라. 그리고 수행자는 한가하고 고요한 앉을 자리와 누울 곳에서 살아야 한다.

(926) 잠을 많이 자서는 안 된다. 부지런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게으름과 거짓과 담소(淡笑)와 유희와 이성간 의 교제와 겉치레를 버려라.

(927) 내 제자는 아타르바 베에다의 주법(呪法)과 해몽과 관상과 점(占星)을 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새 짐 승의 소리를 듣고 점치거나, 임신술(姙娠術)이나 의 술(醫術)을 행해서도 안 된다.

(928) 수행자는 비난을 받더라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칭 찬을 받더라도 우쭐거리지 말아라. 탐욕과 인색과 성냄과 욕설을 멀리해야 한다.

(929) 수행자는 장사해서는 안 된다. 결코 남을 비방해서 는 안 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가까이 교제해서 도 안 된다.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만나지 말아라.

(930) 또 수행자는 거만해서는 안 된다. 자기의 이익을 위 해 책략적인 언사를 써서도 안 된다. 오만 불손하 거나 불화를 거져 올 말을 해서는 안 된다.

(931) 거짓말을 피하라. 조심해서 속이지 않도록 하라. 그 그리고 생활에 대해서나 지혜에 대해서, 혹은 계율이 나 도덕에 대해서, 자기가 남보다 뛰어났다고 생각 해서는 안 된다.

(932) 출가 수행자나 말 많은 세속인들 한테서 욕을 먹거나 불쾌한 말을 많이 듣더라도 거친 말로 대꾸 해 서는 안 된다. 선한 사람들은 적대적인 대답을 하지 않는다.

(933) 수행자는 이 이치를 알아, 잘 분별하고 늘 조심해서 배우라. 모든 번뇌의 소멸된 상태가 <평안>임을 알 고, 고오타마의 가르침에 게을리 하지 말아라.

(934) 그는 스스로 이기고 남에게 지는 일이 없다. 남에게 서 전해 들은 것이 아니고 스스로 증득(證得)하는 이치를 보았다. 그러므로 여래의 가르침에 게으르지말고, 항상 예배하고 따라 배우라.”

(935) 이와 같이 스승(부처님)은 말씀하셨다.

15. 몽둥이를 드는 일

(935) 말다툼하는 사람들을 보라. 몽둥이를 드는 데서 공 포가 생긴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서 그것을 멀리했 는지, 멀리한 일에 대해서 말하리라.

(936) 물이 적은 곳에 있는 물고기처럼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또 서로 반목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 고, 나는 두려워졌다.

(937) 이 세상 어디나 굳건하지는 않다. 어느 곳이나 모두 흔들리고 있다. 나는 내가 의지해 야 할 곳을 찾았지만, 이미 죽음과 고통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곳은 없었다.

(938) 온갖 살아 있는 것이 결국 장애에 부딪치는 것을 보 고 나는 불쾌해졌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마음 속에 차마 볼 수 없는 번 뇌의 화살이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939) 이 화살에 꽂힌 자는 사방을 헤맨다. 이 화살을 뽑아 버리면 헤매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 는다.

(940) 세상에서는 여러 가지 학문을 배운다. 그러나 그 여 러 가지 속박의 굴레에 빠져서는 안 된다. 모든 욕망을 완전히 알고 나서 자기의 평안을 배우라.

(941) 성자는 성실해야 한다. 오만하지 않고 사특한 탐욕 과 인색을 초월해야 한다.

(942) 마음을 편안히 갖는 사람은 잠과 권태와 우울을 이 겨내야 한다. 게을러서는 안 된다. 교만에 머물러 있어도 안 된다.

(943) 거짓말을 피하라. 아름다운 모양에 애착을 주지 말 아라. 또 교만한 마음을 잘 알아라. 포악하지 말아라.

(944) 낡은 것을 좋아하지 말아라. 새로운 것에 매혹당하지도 말아라. 사라져 가는 것을 슬퍼하지 말아라. 잡아 끄는 것(애착)에 붙잡히지 말아라.

(945) 나는 이끄는 자를 탐욕, 거센 흐름, 빨아 들이는 욕구라고 하며, 계략, 포착, 넘기 힘든 욕망의 진흙탕이라고도 한다.

(946) 성자는 진실에서 떠나지 않고, 바라문은 육지(평안) 에 서 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평안에 이른 사람>이라 불린다.

(947) 그는 지자(智者)이고 베에다의 달인(達人)이다. 그 는 이치를 알아 걸림이 없다. 그는 세상에서 바르게 행동하고,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948) 이 세상에서 모든 욕망을 초월하고, 극복하기 어려 운 집착을 넘어선 사람은 떠내려 가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다. 걱정하지 않고 사모하여 애태우지도 않는다.

(949) 과거에 있었던 것(번뇌)을 말려 버리라. 미래에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없게 하라. 중간(현재)에도 아무 일에나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평안해지리라.

(950) 명칭과 형태에 대해서 내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 또는 무엇인가 없다고 해서 근심하지 않는 사 람, 그는 참으로 늙지 않는다.

(951) `이것은 내것이다’ 또는 `이것은 남의 것이다’ 하는 생각이 없는 사람, 그는 내것이다라는 관념이 없으므 로, 내게는 없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는다.

(952) 시기하지 않고, 탐내지 않으며, 흔들려 괴로워하지 않고, 만물에 대해 평등하다. 떨고 있지 않는 사람 에게 대해 묻는 이가 있거든, 나는 그의 아름다운 점을 이렇게 말하리라.

(953) 흔들려 괴로워하지 않고,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작위(作爲)도 있을 수 없다. 그는 노작(勞作) 에서 벗어나 가는 곳마다 안온을 본다.

(954) 성자는 자기가 대등한 사람들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못난이들 속에 있다거나 잘난 사람들 속에 있 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평안에 돌아가 인색하지 않고, 취(取)하거나 버리지 않는다.

16. 사아리풋타

(955) 존자(尊者) 사아리풋타는 여쭈었다. “저는 아직 본 일도 없고 누구에게서 들은 일도 없 습니다. 중생의 주인이신 스승께서 도솔천에서 내 려오신, 그와 같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956) 눈 있는 사람은 신과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모든 암흑을 벗겨 버리고 홀로 법의 즐거움을 받으셨습니다.

(957) 걸림 없이, 거짓 없이 오신 스승, 눈뜬 사람인 당신께, 속박된 많은 무리들을 위해 묻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958) 수행자는 세상이 싫어 사람이 없는 곳이나 나무 아래, 혹은 묘지를 사랑하고 산골짜기의 동굴 속에 거처합니다.

(959) 그리고 여러 곳에 있지만, 그곳에는 얼마나 무서운 일이 있을 것인가. 수행자는 소리 없는 곳(無聲處) 에 기거하더라도 무서워해서는 안됩니다.

(960) 아무도 가보지 않는 곳으로 갈 때에는 얼마간 위험 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외딴 곳에 기거 하더라도 그러한 위험은 이겨내야 합니다.

(961) 부지런히 정진하는 수행자에게는 어떠한 변재가 있 습니까? 그의 행동 범위는 어떠합니까? 그가 지키 는 계율이나 맹세는 어떠한 것입니까?

(962) 마음을 안정시켜 바르게 생각하는 어진 사람은 어떠한 학문을 몸에 지녀 자기에게 묻는 때를 씻어 버리는 것입니까? 마치 대장장이가 은(銀)의 때를 벗겨 버리듯이.”

(963)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사아리풋타여, 세상이 싫어 인적이 끊어진 곳에 기거하고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들이 즐기는 경지와, 법을 때라 실천하는 차례를 내가 아는 대로 그대에게 말하리라.

(964)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분수를 지키는 슬기로운 수행 자는 다섯 가지 공포에 떨어서는 안 된다. 즉, 말파 리,모기,뱀,도둑을 만나는 일과 네 발 가진 짐승들이다.

(965) 이교도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그들에게 두려워할 많은 것이 있을지라도 -. 또한 선을 추구 하여 다른 모든 위험과 재난을 이겨내라.

(966) 병이나 굶주림, 추위나 더위를 견디어야 한다. 저 집 없는 사람은 그런 것들의 침입을 받더라도 용기를 가지고 굳세게 살아야 한다.

(967)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약한 것이나 강한 것이나 모든 생물에게 자비한 마음으로 대하라. 마음의 혼란을 느꼈을 때는 <악마의 무리> 라 생각하고 이것을 제거하라.

(968) 분노와 교만에 지배되지 말아라. 그 뿌리를 뽑아 버 려라. 또 유쾌한 것이나 불쾌한 것이나 모두 극복해 야 한다.

(969) 지혜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선(善)을 좋아하여 위험 과 재난을 물리치라. 으슥한 곳에서 눕는 불쾌를 참 으라. 다음 네 가지 걱정거리를 이겨야 한다.

(970) 즉,`나는 무엇을 먹을까?’ `나는 어디서 먹을까?’ `어제 밤 나는 잠을 못잤다’ `오늘 나는 어디서 잘 것인가?’ 집을 버리고 도를 배우는 사람은, 이러한 네 가지 걱정을 억제하여라.

(971) 적당한 때 음식과 옷을 얻고, 이 세상에서는 적은 양으로 만족하기 위해 옷과 음식의 양을 알아라. 그는 옷과 음식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마을을 거닐 때는 조심하며, 욕을 먹더라도 나쁜 말로 대꾸해서는 안 된다.

(972) 눈을 아래로 뜨고, 여기 저기 기웃거리지 않으며, 일심으로 생각하고 똑똑하게 깨어 있으라.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신의 안정을 유지해 분별과 욕망과 회한(悔恨)을 끊어 버리라.

(973) 남에게 충고를 들었을 때에는 반성하고 감사하라. 함께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거치른 마음을 버려라. 좋은 말을 하고, 때에 맞지 않는 말을 해서는 안 된 다. 남을 헐뜯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

(974) 또 세상에는 다섯 가지 티끌이 있다. 주의 깊은 사 람은 그것을 억제할 것을 배우라. 빛깔, 소리, 냄새, 맛, 감촉에 대한 탐욕을 이겨 내라.

(975) 수행승은 정신차려 마음도 아주 해탈하고, 이런 것 에 대한 욕심을 억제하여라. 그는 적당한 때에 법을 바르게 살피고, 마음을 통일 하여 암흑을 없앤다.”

(976) 이와 같이 스승(부처님)은 말씀하시었다.

제5장 피안

1 서(序)

(976) 베에다에 통달한 한 바라문(바아바린)은 무소유의 경지에 이르고자 코오사라 족의 아름다운 도시에서 남국(南國)으로 내려 왔다.

(977) 그는 앗사카와 아리카 두 나라의 중간을 흐르는 고 오다아바리이 강변에 살고 있었다. 이삭을 줍고 나 무 열매를 먹으면서.

(978) 그 강변 가까이 커다란 마을이 하나 있었다. 그 곳에 서 얻은 것을 가지고 그는 큰 제사를 지냈다.

(979) 그가 제사를 끝내고 자기 암자로 돌아왔을 때 바라 문 한 사람이 찾아 왔었다.

(980) 그의 발은 상하고 목은 타며, 이는 더러워지고 머리는 먼지로 뒤덮인채 암자 속의 바아바린에게 가까이 와서 오백 금을 구걸하는 것이었다.

(981) 바아바린은 그를 보자 앉을 자리를 권하고, 그의 기분과 건강을 물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982) “내가 가지고 있던 물건은 다 베풀어 주었습니다. 바라문이여, 용서해 주시오. 내게는 오백 금이 없습 니다.”

(983) “내가 구걸하는 데도 당신이 베풀어 주지 않는다면 지금부터 이레 후에 당신의 머리는 터져 일곱 조각 이 날 것이오.”

(984) 거짓말을 한 그 바라문은 주문을 외우며 무서운 저주를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바아바린은 괴로워했다.

(985) 그는 걱정의 화살을 받고 나서 음식도 먹지 않고 풀이 죽어 있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은 정신의 안정을 누릴 수 없는 법이다.

(986) 바아바린이 두려워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보자, 암자를 지키는 여신(女神)은 그의 곁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987) “그는 머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는 재물을 탐내는 사기꾼입니다. 그는 머리도, 머리가 떨어지는 일도 알지 못합니다.”

(988) “그럼 당신은 알고 있겠군요, 묻건대, 머리와 머리 가 떨어지는 일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당신 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

(989) “나는 그것을 모릅니다. 그것에 대한 지식은 내게는 없습니다. 머리와 머리가 떨어지는 일은 모든 승자 (勝者 = 부처님)가 알고 계십니다.”

(990) “그럼 이 지상에서 머리와 머리가 떨어지는 일은 누 가 알고 있습니까? 여신이여, 그것을 내게 말해 주 십시오.”

(991) “카필라 성에서 나온 세계의 지도자(부처님)가 계십 니다. 그는 감자왕(甘蔗王)의 후예이고 석가 족의 아 들이며,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

(992) 바라문이여, 그는 참으로 눈을 뜬 사람이고, 모든 사물에 통달했습니다. 모든 신통력을 가지고 있으 며, 모든 것에 대한 눈을 가졌습니다. 온갖 것을 소 멸한 경지에 이르렀고, 번뇌를 멸해 해탈하였습니다.

(993) 그 눈뜬 사람, 거룩한 스승, 눈 있는 분은 세상에서 법을 설하십니다. 당신은 그분께 가서 물으십시오. 그분은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994) <눈뜬 사람>이란 말을 듣고 바아바린은 몹시 기뻐했다. 그의 근심은 가벼워졌다. 그는 많은 기쁨을 얻었다.

(995) 바아바린은 기뻐 감동하여 여신에게 물었다.

“세상의 주인은 어느 마을, 어느 거리, 어느 고 을에 계십니까? 그곳에 가서 가장 뛰어나신 정각자 (正覺者)에게 저는 예배드리겠습니다.”

(996) “승자, 지혜가 많은 사람, 티없는 사람, 머리가 떨 어지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우왕(牛王) 같은 분이 신, 저 석가 족의 아들은 코오사라의 서울인 사아밧 티이에 계십니다.”

(997) 그래서 그는 베에다의 신주(神呪)에 통달한 제자 바 라문들에게 말하였다.

“오너라, 학생들여. 나는 너희에게 알리노니, 내 말을 듣거라.

(998) 세상에 출현하기 어려운 희귀한 저 눈뜬 사람이 지 금 세상에 나타나셨다.

너희들은 어서 사아밧티이로 가서 그 뛰어난 사람을 뵈어라.”

(999) “그러면 스승이시여, 우리가 그분을 보고 <눈 뜬 사 람>이라고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십 시오.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1000) “모든 베에다 가운데 설흔 두 가지 완전한 위인의 상(相)이 전해져 있고, 차례로 설명되어 있다.

(1001) 몸에 이런 설흔 두 가지 위인의 상이 있는 사람, 그 에게는 두 가지 앞길이 있을 뿐, 셋째 길은 없다.

(1002) 만약 그가 집에 머문다면 이 대지를 정복하리라. 형벌 에 의하거나 무기에 의하지 않고 법으로써 통치한다.

(1003) 또 그가 집을 나와 집 없는 사람이 된다면, 덮여 있 는 것을 벗기고, 더 없이 높은 눈 뜬 사람,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된다.

(1004) 내가 태어난 해와 성씨와 상의 특징과 신주와 제자들과 머리와 머리가 떨어지는 것을 마음속으로만 그에게 물어라.

(1005) 만약 그가 보는 데에 아무 장애도 없는 부처님이라 면, 마음속으로 물은 질문에 말로써 대답할 것이다.”

(1006) 바아바린의 말을 듣고 제자인 열 여섯 명의 바라문 들, 아지타와 팃사,멧테야, 푼나카, 그리고 멧타구우

(1007) 도오타카, 우파시이바, 난다, 헤마카, 토오데야, 캄 파, 현자 자투칸닌.

(1008) 바드라아브다, 우다야, 포오사아라 바라문과 지자 (智者) 모오가라아자와 대선인 핑기야 등.

(1009) 그들은 저마다 그들의 무리들을 이끌고 있었으며,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정신을 안정한 자들이며, 평안한 마음을 즐기고, 현명하며, 전생에 온갖 선한 일을 심은 사람들이다.

(1010) 머리를 땋고 염소 가죽을 걸친 그들은 모두 타아바린에게 절하고, 또 바른편으로 도는 예를 갖추고, 북쪽으로 떠났다.

(1011) 무라카의 서울 파티타아나에 들어가 옛날의 마아힛 사티로, 또 우제니이, 고오낫다, 베디사, 바나사라 는 곳으로.

(1012) 코오삼비이, 사아케다, 사아밧티이로 갔다. 다음 세타비야, 카필라밧투, 쿠시나아라아의 도시로 들어 갔다.

(1013) 그리고 향략의 도시 파아바아, 베사아리이, 마가다 의 서울 라아자그리하로, 아름답고 상쾌한 석묘(石廟)에 이르렀다.

(1014) 목마른 사람이 냉수를 찾듯이, 또 장사치가 큰 이익을 구하듯이, 더위에 지친 사람이 나무 그늘을 찾듯 , 그들은 서둘러 거룩한 스승이 계신 산으로 올라 갔다.

(1015) 거룩한 스승께서는 그 때 여러 비구들 앞에서 사자 가 숲속에서 외치듯이, 법을 설하고 계시었다.

(1016) 빛을 비치고 난 태양같은, 둥근 보름달 같은 눈 뜬 사람을 아지타는 보았다.

(1017) 그 때 아지타는 부처님 몸에 원만한 상호가 있는 것 을 보고 기뻐하면서 한곁에 서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물었다.

(1018) “저의 스승 바아바린의 생년을 말하시오. 성씨와 상을 말하시오. 베에다에 통달해 있는 것을 말하시오. 제자는 몇명이나 가르치고 있는지 말해 보시오.”

(1019) “그의 나이는 백 스무살이다. 그의 성은 바아바린이 고, 몸에는 세 가지 특상(特相)이 있으며, 그는 3 베에다의 깊은 뜻에 통해 있다.

(1020) 위인의 특상과 전설과 어휘와 의례에 통달하고, 오 백 명의 제자를 가르치며, 자기 진리의 궁극에 통달 해 있다.”

(1021) `애착을 끊어 버린 으뜸가는 분이시여, 바아바린이 가진 모든 특상을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저로 하 여금 의심을 갖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1022) “그는 혀를 가지고 자기 얼굴을 덮는다. 그의 양미 간에는 흰 털이 있고, 음부는 감추어져 있다. 학생이여, 그의 세 가지 특상은 이러하니라.”

(1023) 질문자가 아무것도 묻지 않는데 부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은 감격하여 합장하고 생각했다.

(1024) `그는 누구일까? 신일까, 범천일까? 혹은 수자아 의 남편인 제석천일까?’ 마음속으로 이와 같이 생 각하였다.`도대체 누구에게 대답을 하신 것일까?’

(1025) 바아바린은 머리와 머리가 떨어지는 일에 대해서 물었다. `스승이시여. 그것을 설명해 주십시오. 선인이시여, 우리들의 의혹을 풀어 주십시오.’

(1026) 고오타마 부처님은 대답하셨다. “무명이 머리인 줄 알아라. 신앙과 생각과 선정(禪定)과 욕심과 노력에 연결되어 있는 밝은 지혜가 머리를 깨어 떨어뜨리는 것이다.”

(1027) 그래서 그 학생은 크게 감동하여 미칠 듯이 기뻐하 며, 염소 가죽으로 만든 옷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부처님의 발밑에 꿇어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였다.

(1028) 아지타가 물었다. “거룩하신 분이여, 바아바린 바라문은 그의 여러 제자들과 함께 환희하여 거룩하신 스승의 발밑에 예배 드립니다. 눈이 있는 분이시여.”

(1029) 고오타마는 대답했다. “바아바린 바라문은 여러 제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 학생이여, 그대도 또한 즐거워하라. 오래 살아라.

(1030) 바아바린이나 그대들에게서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을 것이다. 마음속에 묻고자 하던 것이 있거든 다 물어라.”

(1031) 눈뜬 분에게서 허락을 받았으므로 아지타는 합장하고 앉아서 완전한 사람(如來)에게 첫째 질문을 하였다.

2. 학생 아지타의 질문

(1032) 존자 아지타가 물었다. “세상은 무엇으로 덮여 있습니까? 세상은 무엇 때문에 빛나지 않습니까? 세상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커다란 공포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1033)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아지타여, 세상은 무명에 덮여 있다. 세상은 탐욕 과 게으름 때문에 빛나지 않는다. 욕심은 세상의 때이며, 고뇌는 세상의 커다란 공포라고 나는 말한다.”

(1034) 존자 아지타가 말했다. “번뇌의 흐름은 어느 곳에나 흐르고 있습니다. 그 흐름을 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흐름을 막고 보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1035) 스승은 대답했다. “아지타여, 세상에서 모든 번뇌의 흐름을 막아 내 는 것은 조심하는 일이다. 그것이 번뇌의 흐름을 막고 보호한다. 그 흐름은 지혜로 막을 수 있는 것이다.”

(1036) 존자 아지타가 말했다. “지혜와 조심하는 일과 명칭과 형태는 어떠한 때 소멸하 는것입니까? 이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1037) “아지타여, 그대의 질문에 답하리라. 식별(識別)작 용이 없어짐으로써 명칭과 형태가 남김 없이 멸했을 때에, 이 명칭과 형태가 없어진다.

(1038) “이 세상에는 진리를 찾아 밝힌 사람도 있고, 배우 고 있는 사람도 있으며, 범부도 있습니다. 바라건대 현자께서는 그들의 행동을 말씀해 주십시오.”

(1039) “수행승은 여러 가지 욕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 마 음이 혼탁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물의 진상에 숙달하여 정신을 차리고 편력하여라.”

3. 학생 팃사 멧테야의 질문

(1040) 존자 팃사,멧테야가 물었다. “이 세상에서 만족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양극단을 통달할 만큼 깊이 생각해 양극단이나 중간 에도 때묻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누구를 위인이라 부릅니까? 이 세상에서 만나는 여인(번뇌)을 추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1041) 스승은 대답했다. “멧테야여, 모든 욕망에 대해서 청정한 행을 지키고, 애착을 떠나 항상 조심하고 구명(究明)하여 평안에 돌아간 수행자, 그에게는 흔들임이 없다.”

(1042) “그는 양 극단을 통달하고 깊이 생각해, 양 극단이 나 중간에도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를 나는 위인이 라 부른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만나는 여인(번뇌)을 초월해 있다.”

4. 학생 푼나카의 질문

(1043) 존자 푼나카가 물었다. “흔들리지 않는 근본을 달관하신 당신께 여쭙고자 이렇게 왔습니다. 선인(仙人)이나 상인(常人)이나, 왕족, 바라문은 무 엇 때문에 널리 신들에게 희생(犧牲)을 바쳤습니까? 스승이시여, 당신께 묻사오니 나에게 말씀을하여 주 십시오.”

(1044) 스승은 대답했다. “푼나카여, 대개 선인,상인,왕족,바라문들이 세상 에서 널리 신들에게 희생을 바친 것은 현재 우리들의 이러한 생존상태를 희망하여 노쇠에 걸리어 희생을 바친 것이다.”

(1045) 존자 푼나카가 물었다. “스승이시여, 대개 이 세상에서 선인,상인,왕족,바 라문들이 모두 신들에게 희생을 바쳤습니다만, 제사 에 게으르지 않았던 그들은 생과 노쇠를 초월한 것입니까? 나의 사람이시여, 당신께 묻사오니 그것을 제게 설명하여 주십시오.”

(1046) 스승은 대답했다. “푼나카여, 그들은 희망하고 칭찬하고 멸망하여 공양을 바친다. 이득에 의해 욕망을 달성하고자 희망하 는 것이다. 제물을 바치기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생존에 대한 탐착을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생과 노쇠를 초월하지 못했다고 나는 말한다.”

(1047) 존자 푼나카가 말했다. “만약 제물을 바치기에 몰두해 있는 그들이 제사로 써도 생과 노쇠를 초월하지 못했다면, 나의 사람이 여, 신과 인간의 세계에서 생과 노쇠를 초월한 사람 은 누구입니까? 스승이시여, 당신께 묻사오니 그것을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1048)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푼나카여, 세상에서 이런 저런 상태를 구명하여 아무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평안에 머물러 연기도 고뇌 도 욕망도 없는 사람, 그는 생과 노쇠를 초월했다고 나는 말한다.”

5. 학생 멧타구우의 질문

(1049) 존자 멧타구우가 물었다. “스승이시여, 당신께 묻겠습니다. 이것을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은 베에다의 달인, 마음을 수양하신 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갖가지 괴로움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입니까?”

(1050) 스승은 대답했다. “멧타구우여, 그대는 내게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을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대에게 말하리라. 세상의 온갖 괴로움은 집착으로 인해 생긴다.

(1051)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집착을 만드는 사람은 어 리석음으로 되풀이해 괴로움에 다가선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있어 괴로움이 생기는 것을 본 사람은 집 착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1052) “우리가 당신에게 물은 바를 당신은 우리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다른 것을 또 묻겠습니다. 어떻게하면 현자들은 번 뇌의 흐름, 생과 노쇠, 근심과 슬픔을 초월할 수 있습니까? 성인이시여, 그것을 제게 설명해 주십시오. 당신은 이 법칙을 분명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1053) 스승이 대답했다. “멧타구우여, 현세에 전해 내려온 것이 아닌 이 법칙을 나는 내게 말하겠다. 그 법칙을 듣고 명심해서 행동하여 세상의 집착을 초월하여라.”

(1054) “위대한 선인이시여, 저는 그 으뜸가는 법칙을 받아 그지없이 기쁩니다. 그 법칙대로 행하여 세상의 집 착을 넘어서겠습니다.”

(1055) 스승이 대답햇다. “멧타구우여, 상하 죄우 중앙에서 그대가 아는 어 떤 것이라도 그것에 대한 기쁨과 집착과 식별(識別) 을 제거하고, 덧없는 생존상태에 머물지 말아라.

(1056) 이렇게 해서 조심하고 게으르지 않는 수행자는 내것 이라 고집했던 것을 버리고, 생과 노쇠, 근심과 슬 픔을 버리고, 지자(智者)가 되어 이 세상의 괴로움 에서 벗어나리라.”

(1057) “위대하신 선인의 말씀을 듣고 저는 기쁩니다. 고오 타마시여, 번뇌의 요소가 없는 경지가 잘 설명되었습니다. 확실히 스승께서는 괴로움을 버리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이 법칙을 있는 그대로 알고 계십니다.

(1058) 성인이시여, 당신께서 간절히 가르치시고 이끌어 주 신 사람들은 곧 괴로움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용이 시여, 그럼 당신 가까이 가서 예배드리겠습니다. 스 승이시여, 저를 가르치고 이끌어 주십시오.”

(1059)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욕망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는 바라문, 베에다의 달인이라고 그대가 안 사람, 그는 확실히 이 번뇌의 흐름을 건넜다. 그는 피안에 이르러 마음이 거칠지 않고 의혹도 없다.

(1060) 또 그는 이 세상에서는 지자이고, 베에다의 달인이 며, 여러 가지 생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애착을 떠나 고뇌도 없고 희망도 없다. 그는 생과 노쇠를 뛰어 넘었다고 나는 말한다.”

6. 학생 도오타카의 질문

(1061) 존자 도오타카가 물었다. “스승이시여, 당신께 묻겠습니다. 이 일을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위대하신 선인이여, 저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당신의 음성을 듣고 저는 열반을 배우겠습니다.”

(1062)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도오타카여, 그럼 이 세상에서 현명하게 정신차려 정진하라.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자기의 평 안을 배우라.”

(1063) “저는 신과 인간의 세계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 고 행동하는 바라문을 봅니다. 널리 보시는 분이여, 저는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석가시여, 저로 하여금 온갖 의혹에서 풀려나게 해 주십시오.”

(1064) “도오타카여, 나는 이 세상에서 어떠한 의혹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해탈시켜 주지는 못한다. 다만 그대가 으뜸가는 진 리를 안다면, 그것으로 인해 그대는 번뇌의 흐름을 건너게 되리라.”

(1065) “바라문이여, 자비를 베풀어 멀리 떨어지는 진리 를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그것을
알아야만 하겠습 니다.

저는 마치 허공처럼 여러 가지 모양을 나타내 지 않고, 이 세상에서 고요하고 걸림없이 행
하겠습 니다.”

(1066)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도오타카여, 현세에서 전해 내려 오지 않은 이 평안 을 네게
말하겠다.

그것을 알아 정신차려 행하고, 세상의 집착을 뛰어 넘으라.”

(1067) “위대한 신이여, 저는 그 으뜸가는 평안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그지 없이 기쁩니다.

그것을 알아 정신차려 행하고, 세상의 집착을 끊겠 습니다.”

(1068)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도오타카여, 상하 죄우 중앙에서 그대가 알고 있는 무엇이건,

그 것을 세상의 집착이라 알고, 이것저것 생존에 대한 애착을 가져서는 안 된다.”

7. 학생 우파시이바의 질문

(1069) 우파시이바 존자가 물었다. “석가시여, 저는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 큰 번뇌의 흐름을 건널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의지해 건널 수 있는 것을 가르쳐 주십
시오. 널 리 보시는 분이여.”

(1070) 거룩한 스승은 대답했다. “우파시이바여, 정신차려 무소유를 기대하면서`거 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으로써 번뇌 의 흐름을 건너라. 모든 욕망을 버리고 의혹에서 벗어나 애착의 소
멸을 밤낮으로 살펴라.”

(1071) 존자 우파시이바가 말했다. “모든 욕망에 대한 탐착에서 벗어나 무소유에 의해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높은 <유상 해탈(有想解脫)>에서 해탈한 사람, 그는 게으르지 않고 거기에 편히 머무
를 수 있겠습니까?”

(1072) “우파시이바여, 모든 욕망에 대한 탐착에서 벗어나 무소유에 의해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높은 상념의 해탈에 도달한 사람, 그는 물러서지 않고 거기에 편 히 머무르리라.”

(1073) “널리 보시는 분이여, 만약 그가 물러나지 않고 여 러 해 동안 거기에 머문다면,

그는 해탈하여 청량 (淸凉)하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사람의 식 별작용은 있는 것입
니까?”

(1074) “우파시이바여, 가령 사나운 바람에 불린 불꽃은 꺼 져 버려 불의 수에 들지 않는 것
처럼,

성인은 명칭 과 신체에서 해탈해 없어지고, 존재하는 수에 들지 않는다.”

(1075) “멸해버린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까, 혹은 상주 (常住)하고 무병한 것입니까?

성인이시여, 그것을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은 이 법칙을 있는 그대로 알고 계시니 말입
니 다.”

(1076) 스승은 대답하셨다. “우파시이바여, 멸해 버린 자에게는 그것을 헤아릴 기 준이 없다.

그것을 이렇다 저렇다 말할 만한 근거가 그에게는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깨끗이 끊어지면 논리의 길도 완전히 끊 어져 버리는 것이다.”

8. 학생 난다의 질문

(1077) 존자 난다가 물었다. “세상에는 여러 성자가 있다고들 합니다. 어째서 그 렇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지혜가 갖추어진 사람을 성자라고 부릅니까,

혹은 생활이 갖추어진 사람을 성자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1078) 스승은 대답했다. “난다여, 이 세상 진리를 통달한 사람은 견해로나

학 문으로나 지식을 보고 성자라고 하지는 않는다.

번뇌 인 마군을 깨뜨려 고뇌가 없고 욕망이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성자라고
나는 말한다.”

(1079) 존자 난다가 물었다. “대개 이런 사문인 바라문들은 견해나 학문에 의해서 청정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계율이나 서원에 의해 서도 청정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 가 지 방법으로 청정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스승이시 여,

그들은 거기에 의존하여 스스로 자제하고 있지만, 과연 생과 노쇠를 넘어선 것입니까?

존경하는 스승이 시여, 당신께 묻사오니 그것을 제게 가르쳐 주십시 오.”

(1080) 스승은 대답했다. “난다여, 이들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견해로 인 해 청정해지고,

계승된 학문에 의해서도 청정해진다 고 말한다. 그리고 계율이나 서원에 의해서도 청정 해
진다고 한다.

이밖에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해서 청 정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것을 가지 고
자제한다 할지라도,

생과 노쇠를 초월한 것은 아 니라고 나는 말한다.”

(1081) 존자 난다가 말했다. “대개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견해나 학문에 의해서,

또 는 계율이나 서원에 의해서 청정해진다고 합니다. 이 밖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해 청
정해진다고 합니다.

성인이시여, 만일 당신께서`그들은 아직도 번뇌의 흐름을 건너지 못했다’고 하신다면,

신과 인간의 세 계에서 생과 노쇠를 초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스승이시여, 당신께 묻사오니 그것을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1082) 스승은 대답하셨다. “난다여, 나는 모든 사문,바라문들이 생과 노쇠에 싸여 있다고 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견해 나 학문, 사색이나 계율 혹은 서원을 다 버리고, 또 온갖 방법을 다 버리
고,

애착을 깊이 살펴 마음에 때가 묻지 않은 사람들, 그들은 참으로 <번뇌의 흐 름을 건넌 사
람들>이라고 나는 말한다.”

(1083) “위대하신 선인의 말씀을 듣고 저는 한없이 기쁩니 다.

고오타마시여, 번뇌의 요소가 없는 경지를 훌륭 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견해,학문,사 색,계율,서원을 모두 버리고, 또 여러 가지 방법 을 버리고

그 애착을 깊이 살펴 마음에 때가 묻지 않은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번뇌의 흐름을 건넌 사람들>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9. 학생 헤마카의 질문

(1084) 존자 헤마타가 물었다. “고오타마 이전에 옛 사람들이`이전에는 이러했 다,

미래는 이렇게 되리라’하고 내게 말해 준 것은 모두 전해 들은 바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모두 사색 의 혼란을 더할 뿐입니다.

(1085) 저는 그들의 말을 즐겨 하지 않았습니다. 성인이시 여, 애착을 끊어 버리는 방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을 알아 명심하고 행해서 세상의 집착을 뛰어 넘겠습니다.”

(1086) “헤마카여, 이 세상에서 보고,듣고,생각하고,식별 한 아름다운 사물에 대해서

탐욕을 없애는 것이 영 원한 열반의 경지이다.

(1087) 이것을 잘 알고 명심해 현세에서 번뇌를 완전히 벗 어 버린 사람은 항상 평안에 들
어가 있다.

세상의 애착을 뛰어 넘은 것이다.”

10. 학생 토오테야의 질문

(1088) 토오데야 존자가 물었다. “모든 욕망에 머물지 않고, 애착이 없이 온갖 의혹을 초월
한 사람,

그는 어떤 해탈을 구하면 좋겠습니까?”

(1089) 스승은 대답했다. “토오데야여, 모든 욕망에 머물지 않고 애착이 없이 온 갖 의혹을
초월한 사람,

그에게는 따로 해탈이 없다.”

(1090) “그는 소원이 없는 사람입니까? 또는 무엇인가를 하 고 있는 것입니까? 그는 지혜가
있는 것입니까?

또는 지혜로써 무엇인가를 계획하는 사람입니까? 석가이시여, 그가 성인임을 제가 알 수 있
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널리 보시는 분이여.” (1091) “그는 아무 소원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
는다.

그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지만, 지 혜로써 무엇을 꾸미지는 않는다. 토오데야여,

성인 은 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라.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며, 욕망의 생존에 집
착하지도 않는 다.”

11. 학생 캄파의 질문

(1092) 캄파 존자가 물었다. “무서운 폭류(暴流)가 밀려 왔을 때 호수 가에 있는 사람들, 노쇠와 죽음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을 위해 섬(피난처)을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은 이 괴로움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피난처를 제게 보여 주십시오. 나의 사람이시여.”

(1093) 스승은 대답하셨다. “캄파여, 아주 무서운 폭류가 밀려 왔을 때 호수 가 에 있는 사람들, 노쇠와 죽음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 을 위한 섬을 너에게 말해 주리라.

(1094) 어떠한 소유도 없고 집착하여 취할 일이 없는 것, 이것이 바로 피난처이다. 그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그것은 노쇠와 죽음의 소멸인 것이다.

(1095) 이것을 분명히 알고 명심하여 현세에서 번거로움을 완전히 떠난 사람들은 악마에게 꿇리지 않는다. 그 들은 악마의 종이 되지 않는다.”

12. 학생 자투칸닌의 질문

(1096) 자투칸닌 존자가 물었다. “저는 용사로 욕망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거센 흐름을 건넌 사람(부처님)에게 <욕심 없는 것>에 대해 묻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평안의 경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본래 눈이 있는 분이시여, 스승이 시여, 그것을 사실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1907) 거룩한 스승께서는 모든 욕망을 억제하고 사십니다. 마치 빛나는 태양이 빛으로 인해 대지를 이기는 것과 같습니다. 지혜 많으신 분이여, 지혜가 적은 저에게 법을 설해 주십시오. 저는 그것을 알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서 생과 노쇠를 버리는 일에 대해서.”

(1098) 스승은 대답하셨다. “자투칸닌이여, 모든 욕망에 대한 탐욕을 억제하여 라. 떠남(出離)을 안온으로 보아라. 그대에게는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1099) 과거에 있었던 것(번뇌)을 말려 버려라. 미래에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없게 하라. 중간에 있어서도 그 대가 아무것데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평안해 질 것이다.

(1100) 바라문이여, 명칭과 형태에 대한 탐착을 떠난 사람 에게 여러 가지 번뇌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는 죽음에 지배될 염려가 없다.”

13 학생 바드라우다의 질문

(1101) 바드라우다 존자가 물었다. “집착의 주소를 버리고 애착을 끊어 괴롭거나 동요되는 일 없이, 환희를 버리고 거센 흐름을 건너 이미 해탈하고, 계략이 없는 현명한 당신께 원합니다. 용(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이곳에서 물 러날 것입니다.

(1102) 용자(勇者)시여, 당신의 말씀을 듣고자 많은 사람이 여러 지방에서 모여 들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잘 설 명해 주십시오. 당신께서는 법을 있는 그대로 알고 계시니 말입니다.”

(1103) 거룩한 스승은 대답하셨다. “바드라우다여, 상하 좌우 중간에 걸리는 애착을 모조리 없애라. 세상에 있는 어느 것에라도 집착하 면, 그것 때문에 악마가 따라 다니게 된다.

(1104) 그러기 때문에 수행자는 바르게 알고 명심해서, 세 상에 있는 어느 것에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 죽음의 영역에 애착을 느끼는 이런 사람들을 <집착하는 사 람들>이라 보고서.”

14. 학생 우다야의 질문

(1105) 우다야 존자가 물었다. “이 세상의 티끌과 때를 벗어나 명상에 잠겨 할 일을 다 마치고, 번뇌에 더럽힘 없이 모든 사물의 피안에 도달한 스승께 묻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무명(無明) 을 깨뜨리는 일과 요해(了解)에 의한 해탈을 말씀해 주십시오.”

(1106) 거룩한 스승은 대답하셨다. “우다야여, 애욕과 근심, 이 두 가지를 버리는 일, 침울한 기분을 없애는 일, 후회하지 않는 일.

(1107) 고요한 마음과 깨끗한 생각과 진리에 대한 사색을 먼저 할 것, 이것이 무명을 깨뜨리는 일이며, 요해에 의한 해탈이라고 나는 말한다.”

(1108) “세상 사람들은 무엇으로 인해 속박되어 있는 것입 니까? 세상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 까? 무엇을 끊어 버림으로써 평안(열반)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1109) “세상사람들은 환희에 속박되어 있다. 생각(思考)이 세상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다. 애착을 끊어 버림으 로써 평안이 있다고 말한다.”

(1110) “정신차려 행하는 사람의 식별작용은 어떻게 없애는 것입니까? 그것을 스승께 묻고자 저는 온 것입니다. 당신의 그 말씀을 저는 듣고 싶습니다.”

(1111) “안팎으로 감각적 감수(感受)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 이와 같이 정신차려 행하는 사람의 식별작용은 없 어지는 것이다.”

15. 학생 포오사아라의 질문

(1112) 포오사아라 존자가 물었다. “과거의 일들을 설명하고 괴로워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으며, 의혹을 끊고 모든 사물의 피안에 이른 스승께 묻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1113) 물질적인 형태의 생각을 떠나, 신체를 모두 버리고, 안팎으로 <아무것도 없다>고 보는 사람의 지혜를 저 는 묻고 싶습니다.

석가이시여, 그러한 사람은 다시 어떻게 인도되어야 합니까?”

(1114) 거룩한 스승은 대답하셨다. “포오사아라여, 모든 식별작용이 머무는 상태를 알아 버린 완전한 사람(여래)은 그가 존재하는 모양도 알고 있다. 즉, 그는 해탈하여 거기에 의존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1115) 무소유가 성립되는 까닭, 즉`기쁨은 속박이다’고 알아 그것에 대해 조용히 관찰한다. 안정된 바라문에게는 이와 같은 분명한 지혜가 있다.”

16. 학생 모오가라아자의 질문

(1116) 모오가라아자 존자가 물었다. “저는 지난 날 두 번이나 석가님께 물었습니다. 그러 나 눈이 있는 분께서는 설명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선(석가)은 세 번째에는 설명해 주신다고 저는 들었습니다.

(1117)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신과 함께 있는 범천(梵天)의 세 계로, 명망이 높은 고오타마의 견해는 모르고 있습니다.

(1118) 이렇듯 오묘한 분께 묻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세상 은 어떻게 보는 사람을, 죽음의 왕(염라대왕)은 보 지 못합니까?”

(1119)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항상 정신차려 자기를 고집하는 편견을 버리고, 세상을 빈 것(空)으로 보라. 그러면 죽음을 넘어설 수가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세계를 보는 사람을 죽음의 왕은 보지 못한다.”

17. 학생 핑기야의 질문

핑기야 존자가 물었다. “나는 나이를 먹어서 기력도 없고 빛도 바랬습니다. 눈도 똑똑히 보이지 않고 귀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헤매다가 그대로 죽지 않도록하여 주십시오. 원컨대 진리를 말씀해 주십시오. 알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삶과 늙어 쇠함을 버리는 길을.”

스승은 대답하셨다. “핑기야여, 물질적인 형태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쇠퇴해 가는 것을 볼 수 있고, 물질적인 형태가 있기 때문에 게으른 사람들은 병에 시달립니다. 핑기야여, 그 러므로 당신은 게으르지 말고 물질적인 형태를 버려, 다시는 생존의 상태로 돌
아오지 않도록 하십시오.”

“사방과 그 사이와 상하(上下) 등 이 시방(十方)세 계에서 당신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또 인식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원 컨대 법을 설해 주십시오. 그것을 저는 알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삶과 늘어 쇄함을 버리는 길을.”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핑기야여, 사람들은 애착에 빠져 고뇌하고, 늙음에 쫓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핑기야여, 당신은 게으르지 말고 애착을 끊어 다시는 생존 상태로 돌아오지 않도록 하십시오.”

18. 열 여섯 학생들의 질문에 대한 결론

스승께서 마가다 나라 파아사아나카 사당에 계실 때 에 위와 같은 설법을 하시고, 바아바린의 제자인 열 여섯 바라문의 질문에 따라 대답하셨다. 만약 그 질 문의 낱말의 뜻과 이치를 알고 이치를 따라 실천한 다면, 노쇠와 죽음의 피안에 이를 것이다. 이 가르 침은 피안에 이르게 하는 것이므로, 이 법문을 <피안에 이르는 길>이라 부른다. 아지타와 팃사 멧테야, 푼나카, 멧타구우, 도오타 카, 우파시이바, 난다, 그리고 헤마카 토오데야와 캄파 두 사람과, 현자 자투카닌, 바드라 우다, 우다야, 포오사아라 바라문
과 현명한 모오가 라아자와 위대한 선인 핑기야 등.

이들은 행이 갖추어진 선인(仙人)이신 눈 뜬 사람(부 처님)께 가까이 갔다. 미묘한 질문을 하면서 으뜸 가 는 부처님께 다가갔다.

그들의 질문에 따라 눈 뜬 분은 있는 그대로 답변을 하셨다. 성인은 모든 질문에 대해 시원스런 대답을 했기 때문에, 바라문들은 만족하였다. 그들은 태양의 후예인 눈 뜬 사람, 눈이 있는 분에게 만족하여 뛰어난 지혜인 밑에서 청정한 수행을 하였다. 낱낱의 질문에 대해서 눈 뜬 사람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에 이를 것이다.

으뜸가는 길을 닦는 사람은 차안에서 피안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피안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므로 <피안에 이르는 길>이라고 한 것이다.

핑기야가 바아바린에게 돌아가 들은 대로 말했다. “<피안에 이르는 길>을 외우겠습니다. 티가 없고 지 혜가 많은 사람(부처님)은 스스로 본 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욕심이 없고 번뇌의 숲이 없어진 분께서 어찌 허망한 말을 하시겠습니까. 때와 미혹에서 벗어나 교만과 거짓을 버린 사람에 대한 찬사를 저는 말하겠습니다.

바라문이시여, 암흑을 지워 버린 눈 뜬 사람, 널리 보시는 사람, 세상의 궁극에 이른 사람, 모든 생존 상태를 초월한 사람, 티 없는 사람, 모든 괴로움을 버린 사람, 그는 참으로 <눈뜬 사람>이라고 불리우 기에 마땅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분을 가까이 모셨습니다.

이를테면, 새들이 엉성한 숲을 떠나 열매가 풍성한 숲에 깃들 듯이, 저도 또한 소견이 좁은 사람들을 떠나 백조처럼 큰바다에 이르렀습니다.

고오타마 이전의 옛 사람들이`이전에는 이러했다, 미래에는 이렇게 될 것이다’하고 저에게 말한 것 은 모두 전해진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두 사색의 혼란을 더할 뿐입니다.

그는 홀로 번뇌의 암흑을 지워 버리고 앉아, 빛으로 비치고 있습니다. 고오타마는 지혜가 많으신 분입니 다. 그는 지혜가 넘치는 사람입니다. 그 즉시(卽時) 효과가 있는, 시간이 필요치 않는 법, 즉 번뇌가 없는 애착의 소멸을 제게 말씀해 주셨습 니다. 그분에게 견줄 사람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바아바린이 말했다. “핑기야여, 그대는 지혜가 많은 고오타마, 지혜가 넘 치는 고오타마 곁에서 잠시라도 떨어져 살 수 있겠는 는가? 그 즉시 효과가 있는, 시간을 초월한 진리, 즉 번뇌 가 없는 애착의 소멸을 내게 설해 주었다. 그에게 견 줄 사람은 아무데도 없다고 했는데.”

핑기야가 말했다.

“바라문이시여, 저는 지혜가 많은 고오타마, 지혜가 넘치는 고오타마 곁을 떠나서는 한 시라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 즉시 효과가 있는, 시간을 초월한 진리, 즉 번뇌 가 없는 애착의 소멸을 저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분에게 견줄 사람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바라문이시여, 나는 게으르지 않게 밤낮으로 마음의 눈을 가지고 그분을 보고 있습니다. 그분을 예배하면서 밤을 보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을 떠나 살 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신앙과 기쁨과 마음과 생각은 고오타마의 가르침 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지혜 많으신 분이 어느 쪽으 로 가시거나 그곳을 향해 나는 예배하겠습니다.

나는 이제 늙어서 기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몸은 그곳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항상 그곳에 가 있습니다. 바라문이시여, 내 마음은 그와 맺어져 있습니다. 나는 더러운 흙탕에 누워 여기 저기 떠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거센 흐름을 건넌, 티없이 깨달은 분(正覺者)을 만났습니다.”

이 때 거룩하신 스승께서 나타나 말씀하셨다.

“박카리와 바드라우다 또는 아알라비 고오타마가 믿 음에 의해서 깨달은 것처럼, 당신도 믿음에 의해서 깨달으십시오. 당신은 죽음의 영역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핑기야여.”

핑기야가 말했다. “저는 성인의 말씀을 듣고 더욱 더 믿게 되었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번뇌의 덮임에서 벗어나 마음이 거칠지 않고, 말솜씨가 있는 분입니다. 신들을 초월했다는 법을 잘 알아 이것 저것 모든 것 을 다 알고 있습니다. 스승께서는 의심을 가지고 묻 는 사람들의 질문에 분명한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아무데도 비할 바 없고, 빼앗기지 않으며,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저는 틀림없이 도달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 제게는 조금도 의심이 없습니다. 제 마음 이 이와 같이 믿고 알고 있는 것을 인정해 주십시오.”

영문 SuttaNipata.pdf / 숫타니파타 일본어싸이트

Categories경전Tagssuttanipata, 숫타니파타

 

숫타니파타 – 디지털 불교

숫타니파타(Sutta-nipata) <숫타니파타>의 숫타는 ‘경(經)’, ‘니파타’는 ‘모음’이라는 뜻이므로 우리말로는 ‘경의 모음’ 즉 경집(經集)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은 주로 길고 짧은 시들

kr.buddhism.org

 

https://www.youtube.com/watch?v=t9gYmlLYrrg 

 

 

https://www.youtube.com/watch?v=Zlmso2wGU0M 

 

< 금강경>번역에서 四相은 구마라집譯, 현장법사는 士夫想, 意生想, 마납파상, 作者想, 受者想을 추가하여 9상이라 함. 

1번 해석

3번 해석

 

 

https://kydong77.tistory.com/21555

 

각묵, 금강경 발제 1-12/ <금강경> 한문과 국역

https://kydong77.tistory.com/21522 한문과 국역" data-og-description="금강경 원문및 한글해석 https://cafe.daum.net/suheangday/saHk/2?q=%EA%B8%88%EA%B0%95%EA%B2%BD+%EC%9B%90%EB%AC%B8%EA%B3%BC+%ED%95%..

kydong77.tistory.com

 

 

ko.wikipedia.org/wiki/%EC%82%AC%EC%83%81_(%EB%B6%88%EA%B5%90)

 

사상 (불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4상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주역의 4상에 대해서는 주역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불교 용어로서의 사상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사상(事相)은 현상계의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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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4상(四相, 산스크리트어catvāri lakṣaṇāni티베트어mtshan nyi bzhi영어four marks of existence)은 생멸(生滅)하는 존재, 보다 정확히는 생멸변천(生滅變遷)하는 존재로서의 모든 유위법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4가지 성질인 (生) · (住) · (異) · (滅) 또는 (生) · (住) · (老) · 무상(無常)을 말한다.[3] 
  2. 구사론》에 따르면 이 4가지 성질은 유위법으로 하여금 유위법이게 하는 유위법의 본질적 성질로서 어떤 이 이 4가지 성질을 갖추고 있으면 그것은 유위법이다. 그리고 이 4가지 성질이 없으면 그 은 무위법이다.[4][5] 유위상(有爲相) · 4유위(四有為) · 4유위상(四有爲相) · 유위4상(有爲四相) 또는 4본상(四本相)이라고도 한다.[6][7]4유위상 또는 유위4상은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의 법체계와 유식유가행파의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에 속한다.[6]4유위상 또는 유위4상은 찰나유위상(剎那有爲相)과 분위유위상(分位有爲相)으로 나뉜다. 
  3. 찰나유위상은 모든 유위법에서 매 찰나마다 일어나는 생멸변천으로서의 (生: 생겨남) · (住: 유지됨) · (異: 달라짐) · (滅: 소멸됨)을 말하며, 세유위상(細有爲相) 또는 승의제유위상(勝義諦有爲相)이라고도 한다. 
  4. 분위유위상은 유정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한 기간[一期] 즉 한 생애 동안 겪는 생멸변천으로서의 (生: 태어남, 유년기) · (住: 성장과 장성, 소년기부터 장년기) · (老: 노쇠함, 노년기) · 무상(無常: 죽음)을 말하며, 조유위상(粗有爲相) 또는 세속제유위상(世俗諦有爲相)이라고도 하며 이것은 1기상속(一期相續) 즉 유정의 한 생애 동안의 5온의 상속에 의거하여 유위상을 세운 것이다.
  5. 한편, 《북본열반경》 제12권에서는 (生: 탄생) · (老: 늙음) · (病: 병듦) · (死: 죽음)를 1기4상(一期四相)이라 말하고 있다. 1기4상은 과보4상(果報四相) 또는 조4상(粗四相)이라고도 한다.[6][7]
  6. 4상(四相)은 5온 즉 심신(心身: 마음과 몸, 정신과 육체)에 대해 실아(實我, 아트만), 즉 '실재하는 나[我]'라고 그릇되이 집착하는 4가지 유형의 잘못된 견해인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을 말한다. 아인4상(我人四相) · 식경4상(識境四相) 또는 4견(四見)이라고도 한다.[3][6][7]아인4상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의 정도에 깊고 옅음의 차이가 있는데 옅은 상태에서 깊은 상태의 순서로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하고 이 4가지를 통칭하여 4상(四相)이라고 하며 지경4상(智境四相)이라고도 한다.[7][8]

 

https://www.youtube.com/watch?v=Tm7YLTilnCM&t=130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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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4상(四相)이란- 상 - 법보신문

“보살에게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다면 그는 이미 보살이 아니다”라는 ‘금강경’ 제3대승정종분의 구마라집역[羅什譯]에는 4상이 아・인・중생・수자(我・人・衆生・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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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상(我相)이란 모든 일에 있어서 ‘나입네~’라며 자신을 내세우는 생각으로 자만심과 흡사하며,

인상(人相)이란 그러한 나는 남과 다르다 여겨서 내 것 혹은 우리 것이란 울타리를 쳐놓고 그렇지 않은 것과 안과 밖으로 구분을 짓는 생각이며,

중생상(衆生相)이란 나건 남이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채 남아있는 존재일 뿐이란 자기비하적인 생각이며,

수자상(壽者相)이란 비록 중생으로 남아있더라도 최소한 목숨을 지닌 존재로서 영혼 혹은 인격의 주체를 갖추고 있다는 생각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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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4상(四相)은 무엇인가?-하 - 법보신문

아뜨만(ātman)을 고정불변의 실체로 상정하여 그것은 영원불변하다 여기며, 우리가 절대상태인 브라흐만(brahman)에 이를 때까지 그 아뜨만이 주체가 되어 윤회를 거듭한다는 것이 브라만교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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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人相, pudgala­saṁjñā)은 그 기본생각이 유아론에 근거한 것인 듯함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도 부파불교의 한 갈래인 독자부(犢子部)에 의해 제기되고 주장된 사상이다. 불멸 후 300년경이 지난 부파불교시대에 윤회를 설명함에 있어서 무아론의 경우 윤회하는 주체가 없다는 점을 혼란스럽게 여겼다. 독자부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아에도 속하지 않고 물질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존재를 ‘뿌드갈라’란 이름으로 등장시켜 불교의 무아론도 만족시키고 윤회의 주체도 설명하고 있으니, 그것이 인상이다. 불교의 유식사상도 인상과 비슷한데, 유식사상이건 독자부의 인상이건 그들의 주장을 면밀히 따라가다 보면 분명 유아론이 아닌 무아론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금강경’에서 수자상과 더불어 인상을 떨쳐버려야 할 아상의 또 다른 형태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은 ‘금강경’이 저작된 시기에 독자부의 인상에 의한 폐해가 심각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아울러 현재와 미래에 불교 안에서 일어날 새로운 ‘인상’이 생겨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수자상과 인상은 브라만교의 아상이 자이나교와 불교의 한 부파에서 단지 조금 더 다듬어진 사상에 새로운 이름을 달고 나온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대승불교의 발흥기이자 ‘금강경’이 저술되었던 시기에 나름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대표적인 유아론이었던 까닭에,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브라만교의 아상과 더불어 대승불자라면 떨쳐버려야 되는 생각으로 ‘금강경’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중생상은 여타의 3상과는 약간 색깔이 다른, 아리안 계열의 민족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나열순서는 비록 약간 틀리지만 범어본과 구마라집역은 동일한 4상인데 반해 현장역은 무려 9상으로 되어 있다. 현장 스님이 번역했을 범어판본은 남아있지 않은데, ‘대반야경’ 권577에도 현장역과 동일한 9상을 언급하고 있으니 단순히 불려놓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9상은 4상

사부상(士夫想, 근원이 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

의생상(意生想, 마음으로 이뤄진 몸이 있다는 생각),

마납파상(摩納婆想, 뛰어난 자아가 있다는 생각),

작자상(作者想, 행위의 특정 주체가 있다는 생각),

수자상(受者想, 대상을 받아들이는 특정 주체가 있다는 생각) 등 5가지가 더해진 것이다.

이 가운데 ‘마납파’는 힌두교의 비슈누파에서 궁극적인 자아로 상정하는 것이니, 곧 이들 또한 아상의 다른 모습들일 뿐이다.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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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4상(四相)과 9상(九相) - 법보신문

우리가 흔히 읽는 ‘금강경’의 구마라집 스님 한문 번역본엔 아・인・중생・수자(我・人・衆生・壽者)의 4상이 언급되어 있으며, 전해지는 주요 범어판본 역시 인상(人相)의 순서만 제일 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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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전하는 ‘금강경’의 현장 스님 번역본은 거기에 5상이 더해져 9상으로 되어 있으며,

‘대반야경’ 등에도 9상을 언급하고 있다.

더해진 5상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부상(士夫想, puruṣa­saṁjñā)은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사람, 즉 근본인간(puruṣa)이 고정불변의 실체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말한다. 범어 뿌루사(puruṣa)는 보통명사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한편 고유명사로 ‘영원불멸의 근본인간’이라는 개념으로 인도의 고대문헌인 리그베다(ṛgveda)와 까타(kathā)우빠니샤드 등에 등장한다. 흔히 순수하게 인도사상을 다룰 때는 뿌루사를 한문으로 원인(原人)이라 번역하는데, 중국불교에선 인도사상에서 강조하는 원래의 의미를 다소 약화시키고자 단순히 남자를 가리키는 말인 사부(士夫)를 그 번역어로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뿌루사는 인도사상에서 핵심술어의 하나로서 베다뿐만이 아니라 그 후의 상캬학파에서도 뿌루사와 쁘라끄르띠라는 이원론의 한 축으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등 그 의미와 역사는 매우 깊다.

의생상(意生想, manomaya­saṁjñā)은 마음[manas]으로 이루어진[­maya] 어떤 것이 고정불변의 실체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말한다. 사실 인도사상에서 말하는 마나스(manas)는 우리말의 ‘마음’과는 사뭇 다르게 사용된다. 마나스는 ‘마음’보다는 ‘생각’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생각’ 그 자체도 아닌, ‘사고능력에 의해 생성된 정신적인 결과물’ 정도로서 느야야학파에 의하면 일종의 본질적인 물질로 간주된다. 그래서 의생상은 ‘사고능력에 의해 생성된 정신적인 결과물로 이루어진 그 어떤 것이 고정불변의 실체로 존재한다는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인도의 전통사상이 거의 수동적인데 반해 능동적인 색체를 지니고 있다.

마납파상(摩納婆想, māṇava­saṁjñā)은 ‘마나와’라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말한다. 마나와는 보통명사로서 ‘결혼하지 않은 브라만 출신의 젊은 사람’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시에, 흡사 브라만교의 아뜨만처럼 힌두교의 비슈누파에서 궁극적인 자아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도 쓰인다.

작자상(作者想, kartṛ­saṁjñā)은 모든 행위에 있어 그 행위를 주재하는 행위자가 고정불변의 실체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말한다. 인도 논리학에서 어떤 행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행위를 하는 행위자(kartṛ)와 행위의 도구(karaṇa)와 행위 그 자체(karma) 및 행위의 결과(kārya) 등 네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여긴다. 이 가운데 행위자를 고정불변의 실체로 간주한 것인데, 불교에선 행위자라는 것이 단지 오온(五蘊)이 임시로 뭉쳐있는 것일 뿐이므로 실체로 간주하지 않는다.

수자상(受者想, bhoktṛ­saṁjñā)은 모든 행위의 결과나 대상을 즐기는 어떤 존재[boktṛ]가 고정불변의 실체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말한다. 이는 ‘바가왓기따’에서 언급되는 등 인도철학에서 고대부터 중요한 술어로 사용되어왔다.

사부상부터 수자상까지의 다섯 가지 상 또한 어차피 아상(ātma­saṁjñā)의 변형일 뿐이다. 그저 오랜 역사는 비슷하지만 그리 발전되지 못한 사상이거나 혹은 나중에 설립된 교파나 학파에 의해 새롭게 주장된 것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현장 스님이 9상을 나열할 때 사부상(士夫相)을 인상(人相)보다 앞에 놓았는데, 베다시기부터 있어왔던 사부상이 불교의 독자부에 의해 주장된 인상보단 아무래도 당시 민중들의 뇌리에 더 깊이 인식되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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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여시아문과 중생상 - 법보신문

경전의 첫머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여시아문(如是我聞)’. 현대의 대역경가이셨던 운허 스님에 의해선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는 능동문으로 번역되어 잘 알려져 있지만, 범어로는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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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 지경공덕분 후반부에 “하찮은 법을 좋아하는 자는 사상(四相)에 집착하는 까닭에 이 ‘금강경’을 듣거나[聽] 받아지니거나[受] 독송하거나[讀誦] 남을 위해 해설해줄[爲人解說] 수 없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읽는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문을 약간 축약하여 옮긴 것이다.

동일부분의 현장 스님 번역문을 뒷부분만 옮겨보면 “하열한 믿음과 이해를 지닌 유정은 이 가르침을 받아지니고[受持] 독송하여[讀誦] 궁극적인 것까지 통달하며[究竟通理] 더불어 남을 위해[爲他] 널리 설해주어[宣說] 열어 보이고[開示] 이치대로 뜻을 지을 수는[如理作意] 없다”로 범문과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는데, 다만 ‘받아지니고’ 등의 표현이 굳이 수동문으로 읽어도 틀렸다고 할 수는 없는 능동문으로 되어있는 점이 차이가 날 뿐이다.

 

https://m.cafe.daum.net/santam/IQZL/302

 

불교는 행복찾기

불교에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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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상의 '아(我)'는 아트만(atman) - '아상이 없다'는 말은 '아트만은 오류'라는 뜻.
당시에 불교와 경쟁하던 네 집단이 있었는데, 저건 불교와 다르다는 뜻으로 '사상'을 언급.
'현실적 오류를 범하는 저런 판단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는 말씀 - 사상의 가르침.
아상 - 아트만을 주장하면 안 돼. 왜? 불교는 무아(無我)니까..

인상 - 보특가라(pudgala 푸드가라 人, 衆生) 사상. 당시 불교 안에서도 어떤 윤회의 실체를 주장하는 파(독자부 犢子部)가 있었는데 그걸 부정 그 독자부를 '부불법외도(附佛法外道)' 라고 부른다 - '불교 안에 있는 외도집단' (당시 논서에서 그렇게 언급)
왜? 불교는 무아설인데 독자부는 인간 안에 있는 어떤 '영구적인 불변의 실체'를 주장 - 실체윤회
그래서 '인상'은 보특가라에 대한 부정

중생상 - 사트바(sattva) - 정확한 가록은 찾지 못 했지만, 이것도 어떤 '실체'에 대한 주장인 것만은 분명

수자상 - 지바(jiva 壽, 命): 자이나교에서 말하는 '생명을 연속해 가는 어떤 실체'

 

blog.daum.net/511-33/12369683

 

<사상(四相)-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

                 <사상(四相)-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                                                   불교에서 ‘상(相, pali..

blog.daum.net

 

 

https://www.youtube.com/watch?v=RlJaw5v5LMA&t=728s 

 

 

https://blog.naver.com/karsamo/220838222360

 

금강경 사상(四相)-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에 대한 설명

<사상(四相)-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 불교에서 ‘상(相)’이란 말이 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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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karsamo/220798802274

 

[금강경 발제] 2. 相(산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 구마라즙의 4相과 현장의 9相

[금강경 발제문] 相(산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 구마라즙의 4相과 현장의 9相 실 상 사 화 림 원 발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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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karsamo/220820982819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 : 15. 사마타와 위빳사나

제20강: 초기불교의 수행 - 사마타와 위빳사나 각묵스님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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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youtube.com/watch?v=26avvLh6fKM

 

 

www.youtube.com/watch?v=GcX2344iCbE

 

 

m.cafe.daum.net/david1080/K0sG/99?listURI=%2Fdavid1080%2FK0sG

 

용수의 <중론>을 통해 본 不生不滅(불생불멸)의 의미

오늘도 저의 반야심경 해설작업의 일부를 찢어올립니다. 용수의 중론에 나오는 不生不滅(불생불멸)의 의미 또 용수의 중론에도 불생불멸이 나온다. 중론의 첫머리에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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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묵, 금강경 발제 1-12/ <금강경> 한문과 국역

https://kydong77.tistory.com/21522 한문과 국역" data-og-description="금강경 원문및 한글해석 https://cafe.daum.net/suheangday/saHk/2?q=%EA%B8%88%EA%B0%95%EA%B2%BD+%EC%9B%90%EB%AC%B8%EA%B3%BC+%ED%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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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여래어장애중득보제도

 

 

법정, '보왕삼매론' 법어

www.youtube.com/watch?v=EqdCPKBT-tc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보왕삼매경'에서 따온 '보왕삼매론'은 중국 원나라 말기부터 명나라 초기에 걸쳐 염불수행으로써 중생을 교화하셨던 묘협스님의 글 중 한 부분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묘협스님께서 지으신 『보왕삼매염불직지(寶王三昧念佛直指)』 총 22편 제17편「십대애행(十大礙行: 열 가지 큰 장애가 되는 행)」에 나오는 구절을 가려 뽑아 엮은 글입니다. 「십대애행」은 묘협스님께서 수행삼매를 닦음에 있어 방해되는 열 가지 큰 장애를 여러 불경에 의지하여 정립해 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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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왕삼매론 원문과 해설

http://kr.buddhism.org/%EB%B3%B4%EC%99%95%EC%82%BC%EB%A7%A4%EB%A1%A0-%EC%9B%90%EB%AC%B8%EA%B3%BC-%ED%95%B4%EC%84%A4/ 보왕삼매론 원문과 해설 – 디지털 불교 보왕삼매론 원문과 해설 자료1. 『寶王三昧念佛直指』 十大碍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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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협 (妙叶) , 『보왕삼매염불직지』/ 제 17 편 / 총 22 편

https://beingwithoutself.files.wordpress.com/2019/03/tenobstaclespractice.pdf

보왕삼매론은 수행과정에서 나타나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10 가지 지침을 담고있는 글이 다. 이 글의 저자는 원말명초(元末明初)의 이름난 선승인 묘협 (妙叶) 스님으로 보왕삼매론은 『보왕삼매염불직지』 총 22 편 가운데 제 17 편에 실린 십대애행(十大碍行)에 해당한다. 십대애행부분이 곧 보왕삼매론인 것은 아니고 십대애행 부분에서 상당부분을 생 략하고 발췌하여 단순화시킨 것이 보왕삼매론이다:

 

1. 念身不求無病,身無病則貪欲易生; 是故聖人設化,以病苦為良藥。

    염신불구무병   신무병즉탐욕역생  시고성인설화이병고위량약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病苦)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Don't wish your body to be free from ailments.

If one's body is free from ailments, it is easy to become greedy.

Therefore the Ancients tell us to regard illness itself as medicine.

 

2. 處世不求無難,世無難則驕奢必起; 是故聖人設化,以患難為逍遙。

    처세불구무난    세무난즉교사필기  시고성인설화,이환난위소요。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 씀하시되「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하셨느니라.

Don't wish for a life free from difficulties.

A life free of difficulties gives rise to arrogance and extravagance.

Therefore the Ancients tell us to happily accept a life of anxieties and difficulties.

 

3. 究心不求無障,心無障則所學躐等; 是故聖人設化,以遮障為解脫。

    구심불구무장    심무장즉소학렵등   시고성인설화,이차장위해탈。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하셨느니라.

Don't wish for a mind free of obstacles while practicing/studying.

If there are no hindrances you will miss the point in your study/practice.

Therefore the Ancients taught us to attain the way amidst hindrances.

 

4. 立行不求無魔,行無魔則誓願不堅; 是故聖人設化,以群魔為法侶。

    입행불구무마   행무마즉서원불견     시고성인설화,이군마위법려。

 

수행하는데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 군으로서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하셨느니라.

Don't wish not to encounter evil while you practice.

A practice without encountering evil will not allow for one’s vows to strengthen.

Therefore the Ancients taught us to regard all evil as friends on the way.

 

5. 謀事不求易成,事易成則志存輕慢; 是故聖人設化,以留難為成就。

    모사불구역성   사역성즉지존경만   ;  시고성인설화이류난위성취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 되나니 ,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하셨느니라.

Don't wish to complete any task easily as this gives way to carelessness.

Therefore the Ancients taught that overcoming many difficulties is the way to attainment.

 

6. 交情不求益吾,交益虧吾則損道義; 是故聖人設化,以淡交為資糧。

    교정불구익오    교익오즉휴손도의  시고성인설화이담교위자량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순결로써 사귐을 길 게 하라」하셨느니라.

Don't wish to gain benefits through your friendships.

If one wishes to gain advantages through friendships, the fidelity in the relationship will deteriorate.

Therefore the Ancients taught that pureness is the way to keep friendships lasting.

 

7. 於人不求順適,人順適則心必自矜; 是故聖人設化,以逆人為園林。

    어인불구순적    인순적즉심필자긍  시고성인설화이역인위원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서 원림을 삼으라」하셨느니라.

Don't wish to gain the blind respect of others.

Receiving unconditional acknowledgement is the way to arrogance.

Therefore the Ancients taught us to surround oneself with people who are critical.

 

8. 施德不求望報,德望報則意有所圖; 是故聖人設化,以布德為棄屣。

    시덕불구망보   덕망보즉의유소도   시고성인설화,이포덕위기사。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덕을 베푸는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하셨느니라.

Do not think about receiving the results of your good deeds.

If one wishes for the results of one's good deeds, it will give way to a mind of anticipation to arise.

Therefore the Ancients taught us to regard one's good deeds as a pair of worn, old shoes.

 

9. 見利不求沾分,利沾分則癡心亦動; 是故聖人設化,以疏利為富貴。

    견리불구첨분    리첨분즉치심역동   시고성인설화,이소리위부귀。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적은 이익으로서 부자가 되라」하셨느니라.

Don't wish to make an extra profit.

Wishing to realize excessive gains gives way to a foolish mind.

Therefore the Ancients taught us to become affluent through small gains.

 

10. 被抑不求申明,抑申明則怨恨滋生; 是故聖人設化,以屈抑為行門。

      피억불구신명    억신명즉원한자생  시고성인설화,이굴억위행문。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하셨느니라.

Don't wish for the clarification of your situation in case you suffer injustice.

Wishing for rehabilitation is the way for a mind with resentments to arise.

Therefore the Ancients taught us to regard one's experience of injustice as a gate of cultivation.

 

 

www.youtube.com/watch?v=lsOXjHL7zOw

 

 

(1) 念身不求無病   身無病則貪欲易生
     념신불구무병   신무병즉탐욕역생

(2) 處世不求無難   世無難則驕奢必起
     처세불구무난   세무난즉교사필기

(3) 究心不求無障   心無障則所學躐等
     구심불구무장   심무장즉소학렵등

(4) 立行不求無魔   行無魔則誓願不堅
      입행불구무마   행무마즉서원불견

(5) 謀事不求易成   事易成則志存輕慢
     모사불구역성   사역성즉지존경만

(6) 交情不求益吾 交益吾則虧損道義
     교정불구익오   교익오즉휴손도의

(7) 于人不求順適  人順適則心必自矜
     우인불구순적  인순적즉심필자긍

(8) 施德不求望報  德望報則意有所圖
     시덕불구망보   덕망보즉의유소도

(9) 見利不求沾分  利沾分則痴心亦動
     견리불구첨분  리첨분즉치심역동

(10)被抑不求申明  抑申明則怨恨滋生
      피억불구신명  억신명즉원한자생

 

 

kr.buddhism.org/%EB%B3%B4%EC%99%95%EC%82%BC%EB%A7%A4%EB%A1%A0-%EC%9B%90%EB%AC%B8%EA%B3%BC-%ED%95%B4%EC%84%A4/

 

보왕삼매론 원문과 해설 – 디지털 불교

보왕삼매론 원문과 해설 자료1. 『寶王三昧念佛直指』 十大碍行 第十七 一念身不求無病 身無病則貪欲乃生 二處世不求無難 世無難則驕奢必起 三究心不求無障 心無障則所學 等 四立行不求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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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王三昧念佛直指』 十大碍行 第十七

『보왕삼매념 불직지』 십대애행 제17

寶王三昧論(보왕삼매론)

一念身不求無病 身無病則貪欲乃生

1.념신불구무병 신무병칙탐욕이생

1.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하셨느니라.

二處世不求無難 世無難則驕奢必起

2.처세불구무난 세무난칙교사필기

2.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하셨느니라.

三究心不求無障 心無障則所學

3.구심불구무장 심무장즉소학렵등

3.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하셨느니라.

四立行不求無魔 行無魔則誓願不堅

4.립행불구무마 행무마칙서원불견

4.수행하는데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서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하셨느니라.

五謀事不求易成 事易成則志成輕慢

5.모사불구이성 사이성칙지존경만

5.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되나니 ,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하셨느니라.

六交情不求益我 情益我則虧失道義

6.교정불구익오 교익오칙휴손도의

6.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 하라」하셨느니라.

七於人不求順適 人順適則內心自矜

7.어인불구순적 인순적칙심필자긍

7.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서 원림을 삼으라」하셨느니라.

八施德不求望報 德望報則意有所圖

8.시덕불구망보 덕망보칙의유소도

8.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덕을 베푸는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하셨느니라.

九見利不求霑分 利霑分則癡心必動

9.견리불구첨분 리첨분칙치심역동

9.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적은 이익으로서 부자가 되라」하셨느니라.

十被抑不求申明 抑申明則人我未忘

10.피억불구신명 억신명칙원한자생

10.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하셨느니라.

 

是故大聖化人以病苦爲良藥.

시고대성화인이병고위량약.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병고(病苦)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以患難爲解脫. 以障碍爲逍遙. 以群魔爲法侶. 以事難爲安樂. 

이환난위해탈. 이장애위소요. 이군마위법려. 이사난위안락. 

以幣交爲資糧. 以逆人爲園林. 以市德爲棄. 以利爲富貴. 

이폐교위자량. 이역인위원림. 이시덕위기사. 이소리위부귀. 

以受抑爲行門. 

이수억위행문. 

如是則居碍反通. 求通反碍. 

여시칙거애반통. 구통반애. 

이와 같이 막히는 데서 도리어 통하는 것이요, 통함을 구하는 것이 도리어 막히는 것이니, 

是以如來於障碍中得菩提道.

시이여래어장애중득보제도. 

이래서 부처님께서는 저 장애 가운데서 보리도를 얻으셨느니라.

至若鴦屈摩羅之輩. 提婆達多之徒. 皆來作逆. 而佛悉與其記. 化令成佛. 彼逆吾之順. 彼毁之成也. 於學道人 若不先居於碍. 則障碍至時莫能排遣. 使法王大寶因玆而失. 可不惜

지약앙굴마라지배. 제파달다지도. 개래작역. 이불실여기기. 화령성불. 피역오지순. 피훼지성야. 어학도인 약불선거어애. 칙장애지시막능배견. 사법왕대보인자이실. 가불석

 저「앙굴마라」와 「제비달다」의 무리가 모두 반역스런 짓을 했지만 우리 부처님께서는 모두 수기를 주셔서 성불하게 하셨으니, 어찌 저의 거슬리는 것이 나를 순종함이 아니며 제가 방해한 것이 나를 성취하게 함이 아니리요. 요즘 세상에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만일 먼저 역경에서 견디어 보지 못하면 장애에 부딪칠 때 능히 이겨내지 못해서 법왕의 큰 보배를 잃어버리게 되나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是故聖人設化 以病苦爲良藥. 以患難爲逍遙. 以遮障爲解脫. 以群魔爲法侶. 以留難爲成就. 以 交爲資糧. 以逆人爲園林. 以布德爲棄 . 以疎利爲富貴. 以屈抑爲行門. 如是居碍反通. 求通反碍. 是以如來. 於障碍中得菩提道. 至若鴦 摩羅之輩. 提婆達多之徒. 皆來作逆. 而我佛悉與記 . 化令成佛. 豈非彼逆乃吾之順也. 彼壞乃我之成也. 而今時世俗 學道之人 若不先居於碍. 則障碍至時. 不能排遣使法王大寶 由玆而失. 可不惜哉. 可不惜哉.

위 내용은 해인총림의 종진스님의 글을 요약한 것임

 

법정스님 보왕삼매론강의

 

한글 보왕삼매론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하셨느니라.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하셨느니라.

수행하는데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서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되나니 ,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하셨느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 하라」하셨느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서 원림을 삼으라」하셨느니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덕을 베푸는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하셨느니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적은 이익으로서 부자가 되라」하셨느니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막히는 데서 도리어 통하는 것이요,
통함을 구하는 것이 도리어 막히는 것이니,
이래서 부처님께서는 저 장애 가운데서 보리도를 얻으셨느니라.

요즘 세상에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만일 먼저 역경에서 견디어 보지 못하면 장애에 부딪칠 때 능히 이겨내지 못해서 법왕의 큰 보배를 잃어버리게 되나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법정스님의 보왕삼매론 법문

신앙 생활은 끝없는 복입니다.우리가 절에 가서 법문을 .듣다 보면 대개 비슷비슷한 말씀 아닙니까. 신앙생활에 예습은 없어요. 하루하루 정진하고 익히는 복습이지요. 영적인 체험은 복습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하루하루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복습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복습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어제까지 익혔던 정진은 어제로써 끝나는 겁니다. 오늘부터 새로운 시작입니다.

지금까지 보왕삼매론 많이 들었죠? 이제 다시 복습 삼아서 말씀드립니다. 지금까지 들었던 것 모두 잊으세요. 그건 과거사예요.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음미하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사바세계라 합니다. 사바세계가 무슨 뜻입니까. 범어 산스크리트에서 온 말인데 사하다트, 사하를 중국말로 옮기다 보니까 사바가 됐는데 이 말을 우리말로 하자면 참고 견디어 나가야 하는 세상이란 뜻이에요. 참을 인(忍)자, 흙 토(土)자 인토(忍土). 즉, 우리가 사는 세계를 사바세계 혹은 ‘참는 땅’이라는 겁니다. 또는 감인토, 견딜 감(堪), 참을 인(忍)자 즉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것이 참고 견디어 나가는 세상이다, 이런 뜻입니다.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거기에 삶의 묘미가 있어요.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된다면 좋을 것 같지만 세상사는 재미가 없을 거예요.

보왕삼매론은 이런 사바세계를 살아가면서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옛 선사들이 교훈으로 얘기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생활의 지혜예요. 또 순경계가 아니고 역경계, 삶의 거스름 속에서 터득하는 생활의 지혜, 자기 관리에 대한 일종의 처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제가 읽고 해설하겠습니다.

첫째,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병고(病苦)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이 몸이라는 게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로 이뤄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인간의 존재는 반야심경에 나오듯 오온, 즉 색수상행식, 물질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가 합쳐서 만들어진 유기적 존재입니다. 본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어떤 인연이 닿아 이런 형상을 갖추고 나왔습니다. 또 인연이 다 하면 이게 흩어지고 말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몸 자체가 무상한 거예요. 늘 변하는 겁니다. 고정돼 있지 않습니다. 생노병사라 하잖아요. 저를 오랜만에 본 신도나 스님들은 ‘아이구 스님두 이제 많이 늙으셨네요’합니다. 중이라구 안 늙는 재간이 있습니까? 부처님도 생노병사 하셨는데. 그게 우주의 질서예요. 그러나 영혼에는 생노병사가 없다고 하잖아요. 거죽은 생노병사가 있다지만 알맹이는 생도 없고 노도 없으며, 병도 없고 사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선 일상적인 우리를 갖고 얘기하는 겁니다. 몸에 어떻게 병이 없을 수 없습니까? 그게 유기체인데. 탈이 나는 거지요. 병을 앓을 때 신음만 하지 말고 그 병의 의미를 터득하라는 말예요. 평소에 건강했을 때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들을 앓을 때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이웃에게 고마움도 느껴야 하고 내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왔는가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가, 내 인간관계는 어떠했는가, 나는 직장에서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왔던가 하는 것을 스스로 자기 성찰할 수 있는 계기로 삼으라는 겁니다.

병고 자체가 죽을 병이 아니라면 그 병을 통해서 새로운 눈을 뜨라는 겁니다. 양약을 삼으라는 말이지요. 사람의 몸은 허망한 유기체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모여있지만 이 다음 순간 또 어떻게 될지 몰라요.

예측할 수 없는 존잽니다. 본래 그런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몸 가지고 늘 건강하기를 바라지 말라는 겁니다. 이 말은 즉 건강했을 때, 내게 건강이 주어졌을 때 잘 살라는 거예요. 허송세월 말라는 겁니다. 인생을 무가치한 곳에 쏟아 버리지 말라는 거예요. 육신의 병은 약으로 다스릴 수 있어요. 정신적인 병은 약으로써 다스리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얼마나 허약합니까? 옛날보다 가진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고 여러 가지 편리한 시설 속에 살고 있는데 체력과 의지는 자꾸 떨어져요.

어떤 게 몸에 좋다고 하면 하루아침에 모두 그 쪽으로 쏠리잖아요? 이렇게 허약합니다. 옛날 농사짓고 살던, 이런 흙에다 뿌리를 내리고 살던 시절에는 흙으로부터 많은 기운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런 흙의 교훈을 몸소 익혔기 때문에 그렇게 허약하지 않았는데 이젠 자꾸 흙으로부터 멀어지니까, 대지로부터 멀어지니까 그렇게 허약해지는 거예요. 생각 자체가 허약해졌어요. 몸이 조금만 어떻다 하면 하루아침에 좌절하잖아요? 중생의 병은 업에서 나옵니다. 업이란 뭡니까? 하루하루 익히는 생활 양식이에요. 생각이라든가 먹는 음식이라든가 생활습관 이것이 건강하게도 만들고 병도 만듭니다.

중생의 병은 업에서 나옵니다. 보살의 병은 어디에 있는가. 자비심. 유마경에 중생이 앓기 때문에 내가 앓는다는 말씀이 있잖습니까. 어머니들은 자식이 아플 때 같이 앓잖아요. 이게 정상적인 경웁니다. 자식이 밤새 잠 못 자고 앓을 때 같이 앓는 거예요. 그게 어머니예요. 생명의 뿌리니까. 그런데 자식이 앓고 있는데도 한쪽에서 쿨쿨 자고 모른 체 한다면 그건 어머니가 아니에요. 가짜예요. 이게 누가 시켜서 그런 게 아닙니다. 원천적으로 자식이란 것은 모태에서 나온 가지 아닙니까? 뿌리에서 파생된 가지라고요. 가지가 앓을 때 뿌리가 앓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중생의 병은 업에서 나오지만 보살(어머니들이 보살이지요)의 병은 자비심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건 정상적인 경우고 세상이 이렇게 막 돼가다 보니까 자식이 앓는지 마는지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헬스클럽 다니고 잘 먹고 지내지 집안 식구들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이런 희한한 사람도 더러 있잖아요? 모든 게 선지식이에요. 우리 앞에는,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둘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선지식입니다.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언짢으면 언짢은 대로 우리의 삶에 교훈을 주고 있어요. 좋은 일이라면 본받아야겠지만 좋은 일이 아니라면 본받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병고(病苦)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다시 말하면 순경계가 아닌 역경계에서 그걸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처세훈입니다.

둘째,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제 잘난 체하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일어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하셨느니라.

이 세상을 고해라 하잖습니까? 고통의 바다라고. 사바세계란 말은 그런 뜻이에요. 우리가 어려운 세상, 고해, 사바세계를 살아가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바랄 수는 없습니다. 어려운 일이 쌓여있는 것이죠. 곤란합니다. 어떤 집안을 놓고 보더라도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어떤 개인의 인생도 그렇고. 세상살이에 곤란 없게 되면 사람들이 넘치게 돼요. 잘난 체 하고 남의 어려운 사정을 모르게 됩니다. 마음이 사치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는 거예요. 자신의 근심과 걱정을 밖에서 오는 귀찮은 것으로 생각지 말라는 거예요. 자신의 삶의 과정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숙제로 생각해야 해요. 우리 집안의 어떤 걱정과 근심거리가 있다면 회피해선 안 됩니다. 그걸 딛고 일어서야 해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우리 집안에 이런 액난이 닥치는가, 이것을 안으로 살피고 딛고 일어서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 세상에 저마다 자기 짐을 지고 나오잖아요. 그 짐마다 무겁고 달라요. 누구든 이 세상에 나온 사람들은 남들이 넘겨볼 수 없는 짐을 지고 있다니까요. 그런 근을 지니고 있어요. 그것이 그 인생이에요. 그러니까 집안에 무슨 어려움이 있다고 나쁘게만 생각지 마세요. 그 어려움을 통해서 그걸 딛고 일어서는 새로운 창의력을, 의지력을 계발하라는 우주의 소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세상은 살아갈 만한 세상이 됩니다.

처음부터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이 사바세계라는 것, 참고 견뎌야 할 세계. 그런데 여기에 묘미가 있어요. 만약 이곳이 극락이나 지옥이라면 아무 재미가 없어요. 극락? 아무 고통도 없다는 거예요. 무슨 생각만 해도 몰려온다는 거예요. 물론 우리가 볼 때 이상적으로 추구해야 할 세계입니다. 그러나 재미없어요. 또 지옥? 너무 고통스러워서 감내할 수가 없어요. 사바세계는 그 중간이에요. 그러니까 참고 견딜만한 세상이란 것이죠.

셋째, 공부하는 데에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하셨느니라.

공부라는 것은 꼭 스님이나 신도들이 정진하는 것만 뜻하는 게 아닙니다. 공부한다고 해서 학생들이 공부하고 스님들이 수행하는 것만 뜻하는 게 아니에요. 이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에요. 장애 없는 세상이 어딨습니까? 다 장애가 있단 말예요. 좋아서 사랑한다는 데도 삼각관계니 뭐니 해서 장애가 있잖아요. 다 장애물이 있다니까요. 장애 없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스님들도 그렇고 세상 사람들도 그렇고 한 평생 세상을 살다보면 무수한 장애물 경주예요. 지금까지 우리가 이 자리에 오면서 얼마나 많은 장애물을 헤치고 왔습니까? 그러니까 인생이란 것은 장애물 경주라니까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이 장애물이. 해탈이란 뭡니까? 그런 장애물을 넘어서 안팎으로 자유로워진 상태, 안팎으로 홀가분해진 상태 이걸 해탈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장애라는 것은 해탈로 이르는 디딤돌이에요. 발판이에요. 그런 장애가 없으면 해탈도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모든 게 다 필요한 존재라니까요. 이 우주에는 다 필요한 거예요. 어떤 미생물이 됐든 다 우주에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생겨났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귀찮다고 해서 농약으로, 강한 살충제로 죽여 보세요. 그 미생물만 없어지는 게 아니고 그것이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우리에게 진짜 없어서는 안 될 이로운 것까지 모두 사라지잖아요. 오늘 이 생태계의 변화라든가 환경문제, 또 지구 온난화 문제 이게 다 뭡니까?

너무 우리가 전체적인 흐름과 조화를 모르고 어떤 부분적인 것에 갇혀서 그것만 지나치게 소비하고 낭비하고 혹사시키다 보니까 지구 자체가 인간들을 감당 못하는 거예요. 그래 여기저기에서 털어 내느라, 재채기하느라고 지진도 일으켰다가 또 여기저기 불도 일으켰다가 그러잖아요. 지구에 사는 인간들이 마치 물것처럼 하도 귀찮게 하니까 털어 내느라고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거예요. 지구가 뭡니까. 우리가 기대려는 생명의 바탕이예요. 우리만 살고 지나갈 생명의 바탕이 아닙니다. 영원히 존속돼야 할 생명의 바탕입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들어와서 우리가 너무도 지구를 함부로 대했기 때문에 그 보상으로써 지금과 같은 여러 가지 이변이 오는 거지요.

장애 없길 바라지 마세요. 장애라는 것은 다 그걸 뚫고 지나갈 수 있는 해탈의 길로 이어진 길목이기 때문에 장애를 거부하지 말고 그걸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번뇌를 보리로 전환하고 생사를 열반으로 전환하고 고뇌를 기쁨으로 전환하라는 거예요.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는 거예요. 장애없인 해탈이 안 됩니다.

넷째, 수행하는 데에 마(魔)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 데에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모든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하셨느니라.

마란 뭡니까? 나쁜 거예요. 잠잠하게 정진하고 싶은데 늘 졸음이 온다거나 또 공연히 망상이 일어난다거나 다 마입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고 하잖아요. 또 도고마성(道高魔盛),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한대요. 이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그릇을 키우는, 우리의 기량을 키우는 소식으로 받아들여야지요. 우리가 어떤 좋은 일을 하려면 반드시 장애물이 생겨요. 그걸 회피해선 안 됩니다. 회피할 수도 없는 거구요. 그걸 딛고 일어섬으로써 새로운 기량, 새로운 의지력, 내가 지금까지 갖추지 못한 새로운 그릇이 마련되는 거예요.

집에서도 그래요. 무슨 사업하려고 하는데 부도직전에 어려운 일이 닥친다거나 또 혼사를 받았는데 엉뚱한 장애가 생긴다거나 누구나 이 사바세계에서 겪을 수 있는 일이라니까요. 그것을 겉으로만 밀어내려고 하지 말고 안으로 곰곰이 받아들이라는 거예요. 안에서 새기며 의미 부여를 하라는 거예요. 이것은 단순한 관념유희가 아닙니다. 소극적인 삶의 태도가 아니에요. 이건 삶의 지혜예요. 우리가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려움이 닥칠 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할 때 이런 옛 성인들의 말씀을 의지해서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수행하는데 마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 데에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한다. 서원. 저마다 서원이 있잖아요. 마음속으로 서원이 있어요. 꼭 수도 세계만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업하는데도 그렇잖아요. 어떤 기업을 경영하는데도 나름대로 서원이 있잖아요. 이 기업을 키워서 그것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기여하겠다 하는 서원들이 있다고요. 그런데 어떤 장애가 없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된다면 언제 내가 그런 서원을 세웠는가 싶을 정도로 스스로 후퇴하고 만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마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이렇게 옛 성인이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다섯째, 일을 계획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풀리면 뜻이 경솔해지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많은 세월을 두고 일을 성취하라’ 하셨느니라.

모든 일이 너무 쉽게 되면 안 좋아요. 쉽게 이뤄지면 쉽게 무너져요. 공이 들어가야 합니다. 부실 공사라는 게 뭡니까? 정당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너무 쉽게 이뤄졌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는 거예요.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어려움이 있어야 해요. 어려움이 없이 자란 아이들, 이 다음에 어려운 일 있으면 그걸 극복 못해요. 그냥 아파트에서 뛰어내린다구요. 이게 다 고해라니까요. 사바세계, 참고 견뎌야 할 세계라니까요.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때그때 면역을 갖춰야 해요. 일이 쉽게 되길 원하지 마세요. 모든 게 차례가 있는 겁니다. 하나의 씨앗이 땅 속에 들어가서도 사계절의 질서가 따라야 움이 트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잖아요. 너무 쉽게 풀리길 원하지 마세요.

뜸을 들이는 과정이 있어야 하잖아요. 뜸을 들여야 한다고. 많은 세월을 두고 일을 성취하라. 오랜 세월을 두고 성취하라는 거예요. 많은 세월을 두고 기량이 커지고 그런 도량을 감당할 만한 자질이 갖춰지는 거예요. 아직은 내 그릇이 그런 도량을 감당할 만한 준비가 안 됐는데 만약 거기에 무슨 일이 뜻대로 된다면 교만해지고 안이해 진다구요.

여섯째,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한다면 의리를 상하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순결로써 사귐을 깊게 하라’하셨느니라.

친구란 뭡니까. 또 다른 나예요. 또 다른 내 자신이라고. 친구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보지 마세요. 또 다른 내 분신이라니까요. 그래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잖아요.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믿음과 의리, 신의로써 인간관계가 이뤄져야 하는데 특히 친구지간은 그래야 해요. 믿음과 의리가 없으면 친구지간이 아닙니다. 스승과 제자, 부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모든 인간관계에는 그런 믿음과 의리, 하나 곁들인다면 예절도 들어가야 해요. 친할수록 예절이 갖춰져야 해요. 예절은 뭡니까? 사람의 도리죠. 사람의 품위고. 좋은 인간관계에는 반드시 믿음과 신의, 예절로 이뤄져야 해요. 친구?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에요. 그러니까 유유상종, 끼리끼리 어울리잖아요. 친구지간에 친구를 수단으로써 자기 출세하는데 발판으로 삼지 말라는 거예요. 순결로써 사귐을 깊게 하라, 인간 관계를 두텁게 하라는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살만큼 살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남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관계만 남습니다. 내가 잘 산 인생이라면 좋은 관계가 남고 내가 잘못 산 인생이라면 언짢은 관계만 잔뜩 남는 거예요. 관계를 통해서, 이웃을 통해서, 친구를 통해서 거듭거듭 인간형성의 길로 나가야 합니다. 친구는 고마운 존재예요. 왜냐하면 나를 그렇게 일깨워주니까. 나를 풍요롭게 만들고 나를 깨우쳐주니까.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눠갖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한다면 의리를 상하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순결로써 사귐을 깊게 하라’하셨느니라.

일곱째,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진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 무리를 이루라’하셨느니라.

묘미가 있는 말이에요.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 무리를 이루라는 거예요. 이게 뜻맞는 사람들끼리 살아야 하는데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끼리 어울리라는 게 상당히 갸웃갸웃해지는데 한 가정을 두고 생각해 봅시다. 가정에 아무 탈이 없는, 정말 서로 화합하고 화목한 가정이 이 세상에 더러 있겠지요. 많지는 않아요. 다 갈등이 있어요. 집안에 모두 효자만 있다면 좋을 것 같지만 그 집안 재미없어요. 인생을 모른다구요. 불효가 있기 때문에 효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불효자가 있기 때문에 효의 값을 아는 거예요. 돌담을 쌓는데 똑 같은 돌은 필요가 없습니다. 큰 돌, 작은 돌, 모난 돌, 납작한 돌 다 필요하잖아요. 우리 조직사회, 이 세상도 마찬가지예요. 저마다 각기 독특한 개성이 틀린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거예요. 이때 전체적인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서로가 노력하면 돼요. 조화가 깨지면 그건 병든 상태이기 때문에 안 되고 자기 개성을 마음껏 발휘해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면 되는 겁니다. 부모들이 해야 할 일은 그거예요. 큰놈은 이런데 작은놈은 이렇더라. 비교하지 마세요. 비교하면 기분 나쁜 겁니다. 다 한 몫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세요. 어디에 내놓든 사람으로서 한 몫을 하면 된다니까요. 모두가 우등생? 말도 아니지. 우등생 아닌 사람이 있으니까 우등생이 있는 거지요.

여덟째, 공덕을 베풀 때에는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게 되면 불순한 생각이 움튼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덕 베푼 것을 헌 신처럼 버리라’ 하셨느니라.

공덕이란 공적과 덕행이지요. 한마디로 선행이에요. 선행을 베풀 때는 과보를 바라지 말라. 결과를 바라지 말라는 거예요. 과보를 바라면 장삿속이예요. 신앙생활은 공리성을 배제해야 합니다. 계약이 아니에요. 기도할 때, 요즘 수능시험 때문에 다급해진 엄마들 많지요?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합격이 됐든 불합격이 됐든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좋은 점수가 나오든 덜 나오든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그냥 최선을 다 할 뿐이에요. 내가 안 할 수 없으니까 간절한 마음에서 기도할 뿐이지 따로 무슨 결과, 결과 갖고 따지지 말라니까요.

기도란 뭡니까?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할뿐이에요. 결과를 바라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간절한 마음으로 하면 간절한 메아리가 있게 마련이에요. 그게 우주의 질서입니다.

공덕을 베풀 때에는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게 되면 불순한 생각이 움튼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덕 베푼 것을 헌 신처럼 버리라’하셨느니라.

아홉째,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하셨느니라.

작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행복의 비결은 결코 크고 많은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경제 현실이 어떻습니까? 그저 입만 벌리면 다들 경제 타령하잖아요. 하루에도 기업체들이 몇 개씩 도산되고…. 그런데 인간 생활이 경제만이 전부가 아니에요. 우리가 너무 지금 그런 일에만 치우치고 있다고요. 세계의 흐름이 그러니까. 그러니까 분에 넘치게 과소비하고 있잖아요. 우리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고. 오늘날 경제가 어려운 것은 일찍이 우리 그릇은 만들어놓지 않고 자꾸 욕심껏 뭘 담기만 하려고 했던 과보에요.

오늘의 불황은 우리들 마음이 그만큼 빈약하다는 증거예요. 그릇을 키우려면 눈앞의 이해관계에 매달리지 말고 덕을 길러야 합니다. 개체를 넘어서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니까요. 소욕지족(少慾知足). 작은 것으로써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 해요. 만족할 줄 알면 잘 사는 거예요. 만족할 줄 모르면 늘 갈증 상태죠. 오늘날 우리들은 무엇을 갖고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그렇게 됐어요. 늘 갈증 상태예요. 작은 것을 갖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넉넉해져요.

열째, 억울함을 당할지라도 굳이 변명하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변명하다 보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의 문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사필귀정이란 뜻인데 모든 잘잘못은 반드시 바른 길로 돌아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검고 흰 것이 저절로 드러나요. 진실은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습니다. 마치 꽃향기처럼. 그렇기 때문에 굳이 변명하려 들지 말라는 거예요. 변명하게 되면 거기서 원망하는 마음, 여러 가지 잡음이 생기기 때문에 굳이 변명하지 말라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다 드러난다는 거예요. 참고 견디면서 안으로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막히는 데서 도리어 트이는 것이요, 트임을 구하는 것이 도리어 막히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많은 장애 가운데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셨다. 요즘 세상에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먼저 역경에서 견디어내지 못한다면, 어떤 장애가 부딪칠 때 그것을 이겨낼 수 없다. 그래서 마침내는 법왕의 큰 보배까지도 잃게 될 것이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마음에 깊이 새겨 생활의 지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결론 삼아서 말씀드리지요.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면 자신이 지닌 생명의 씨앗을 꽃 피울 수가 없습니다.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꽃이 있어요. 다 꽃씨를 지니고 있다고요. 그런데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 꽃을 피워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씨앗이 움트기 위해서는 흙 속에 묻혀서 참고 견디는 그런 인내가 필요해요. 그래서 참고 견디라는 겁니다. 거기에 감추어진 삶의 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사바세계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극락도 지옥도 아니라는 거예요. 사바세계. 참고 견딜만한 세상. 여기에 삶의 묘미가 있습니다.

가끔 외우시면서 생활의 지혜로 쓰이시길 바랍니다.

法泉當스님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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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왕삼매론십대애행 寶王三昧論十大礙行 Discourse on the Samadhi of the Jewel Emperor The Ten Great Obstruct

보왕삼매론십대애행 寶王三昧論十大礙行 Discourse on the Samadhi of the Jewel Emperor The Ten Great Obstructions to Practice 1.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겨 반드시 계를 파하고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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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寶王三昧論十大礙行

보왕삼매론십대애행 

Discourse on the Samadhi of the Jewel Emperor
The Ten Great Obstructions to Practice


1.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겨 반드시 계를 파하고 도에서 물러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一、念身不求無病

       념신불구무병

       身無病則貪欲乃生  貪欲生必破戒退道

       신무병칙탐욕내생 탐욕생필파계퇴도

       是故大聖化人以病苦爲良藥

1. Do not expect your body to have no ailments.
If your body has no ailments, craving arises and without fail you will break the precepts and fall from the path and so the holy ones have told us to accept the torments of illness as an effective remedy.


2. 세상을 살아감에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곤란이 없으면 반드시 교만심을 일으켜 일체를 속이고 억압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환난으로써 해탈(解脫)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二、處世不求無難

       처세불구무난

 世無難則驕奢必起  驕奢起必欺壓一切

세무난칙교사필기 교사기필기압일체     

是故大聖化人以患難爲解脫

시고대성화인이환난위해탈


2. Do not expect to have no difficulties living in the world.

If you have no troubles, without fail you will give rise to the mind of arrogance and you will come to deceive and oppress all and so the holy ones have told us to accept anxieties and calamities as liberation.


3. 마음공부를 함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장애가 없으면 배움이 건너뛰어 반드시 얻지 못하고 얻었다고 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장애로써 소요(逍遙)를 삼으라 하셨느니라.

三、究心不求無障

      구심불구무장

       心無障則所學躐等  學躐等必未得謂得

      심무장칙소학렵등 학렵등필미득위득

       是故大聖化人以障礙爲逍遙

      시고대성화인이장애위소요


3. Do not expect to have no obstacles in your investigation of the mind.

If you have no obstacles, you will skip over in your learning and without fail you will claim to have attained when you are unable to attain and so the holy ones have told us to accept obstacles as leisurely strolls.


4. 수행하는데 마장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장이 없으면 서원이 굳건하지 못하여 반드시 깨닫지 못하고 깨달았다고 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四、立行不求無魔

       립행불구무마

行無魔則誓願不堅  願不堅必未證謂證
행무마칙서원불견 원불견필미증위증      

是故大聖化人以群魔爲法侶

시고대성화인이군마위법려

4. In establishing your practice do not expect to have no demonic obstructions.
If you have no demonic obstructions, your vow and aspiration will not be durable and without fail you will claim to be enlightened when you are unable to be enlightened and so the holy ones have told us to accept the demon hordes as our friends who help us in our cultivation.


5. 일을 계획함에 쉽게 이루기를 바라지 말라.
    일을 쉽게 이루면 경솔하고 거만하여 반드시 유능함을 자칭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일은 어려움으로써 안락(安樂)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五、謀事不求易成

      모사불구이성       

事易成則志成輕慢  志輕慢必稱我有能
사이성칙지성경만 지경만필칭아유능       

是故大聖化人以事難爲安樂

시고대성화인이사난위안락

5. In planning your endeavors do not expect to accomplish them easily.
If you achieve your endeavors easily, you will become rash and haughty and without fail you will praise your own aptitude and so the holy ones have told us to accept difficulty as blissful pleasure.


6. 벗을 사귐에 내게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게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여 반드시 남의 허물을 보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나를 해롭게 하는 벗으로써 자량(資糧)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六、交情不求益我

      교정불구익아         
       

情益我則虧失道義  虧道義必見人之非
정익아칙휴실도의 휴도의필견인지비       

是故大聖化人以幣交爲資糧

시고대성화인이폐교위자량


6. In friendships do not expect profit for yourself.

If you seek to benefit yourself, you will erode fidelity and without fail you will find fault with the other and so the holy ones have told us to accept the friend who hurts us as our wealth and sustenance.


7. 남이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말라.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자만심이 생겨 반드시 내가 옳다는 생각에 집착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내 뜻을 거스르는 사람으로써 원림(園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七、於人不求順適

       어인불구순적       

人順適則內心自矜  內自矜必執我之是
인순적칙내심자긍 내자긍필집아지시       

是故大聖化人以逆人爲園林

시고대성화인이역인위원림

7. Do not expect others to comply with you.
If they comply with you, the mind of egoism will arise and without fail you will become attached to the thought that “I am right” and so the holy ones have told us to accept the contradiction of our wishes as our garden grove.


8. 덕을 베풀되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마음이 생겨 반드시 명예를 드날리고자 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덕을 베풀되 헌 신처럼 버리라 하셨느니라.

八、施德不求望報

      시덕불구망보            

德望報則意有所圖  意有圖必華名欲揚
덕망보칙의유소도 의유도필화명욕양

是故大聖化人以市德爲棄屣

시고대성화인이시덕위기사

8. In contributing your virtues do not expect reward.
If you expect rewards, a scheming heart will arise and without fail you will try to broadcast your name and glory and so the holy ones have told us to extend our virtues, but toss them off like an old shoe.


9.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동하여 반드시 부당한 이득이 나를 해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적은 이익으로써 부귀(富貴)를 삼으라 하셨느니라.
九、見利不求霑分

      견리불구점분

利霑分則癡心必動  癡心動必惡利毀己
리점분칙치심필동 치심동필악리훼기

故大聖化人以踈利爲富貴

시고대성화인이소리위부귀

9. Do not expect benefits beyond your fair share.
If the benefits you receive exceed your fair share, the mind of foolishness stirs and without fail improper profits come to harm you and so the holy ones have told us to accept meager benefits as our wealth and rank.


10. 억울함을 당하여 밝히려고 하지 말라.
      밝히고자 하면 인아상(人我相)이 일어나 반드시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함으로써 수행의 문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十、被抑不求申明
      피억불구신명

抑申明則人我未忘  存人我必怨恨滋生
억신명칙인아미망 존인아필원한자생

是故大聖化人以受抑爲行門

시고대성화인이수억위행문

10. When you are victimized, do not seek to report and disclose it.
If you seek to report and disclose it, the imagination that “I have entitlement over the other” arises and without fail you will come to abet the mind of resentment and so the holy ones have told us to accept encounters with victimization as the door to cultivation.


如是則居礙反通  求通反礙
여시칙거애반통 구통반애

이러한즉 막히는데서 통하게 되고 통함을 구하는 것이 도리어 막히게 되나니

是以如來於障礙中得菩提道
시이여래어장애중득보리도
부처님께서는 많은 장애 가운데서 큰 깨달음을 얻으셨으니

鴦屈摩羅之輩  提婆達多之徒  皆來作逆
앙굴마라지배 제파달다지도 개래작역
앙굴마라와 제바달타의 무리가 다 반역된 짓을 했으되

而佛悉與其記  化令成佛
이불실여기기 화령성불
부처님께서는 모두 수기(授記)를 주어 교화하사 성불케 하셨느니라.

豈不以彼逆而爲吾之順  以彼毀而爲吾之成也
기불이피역이위오지순 이피훼이위오지성야
어찌 저들의 반역으로 순종함을 삼고 저들의 훼방으로 나의 성취를 삼음이 아니리요.

於今學道人  若不先居於礙
어금학도인 약불선거어애

이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만일 역경(逆境)에 처해 보지 못하면

則障礙至時莫能排遣  使法王大寶因茲而失 可不惜諸
즉장애지시막능배견 사법왕대보인자이실  가불석제
장애에 부딪칠때 능히 이겨내지 못하여 법왕의 큰 보배를 잃어버리게 되나니
가히 애석하지 아니하리요.
 

Exactly like this, the places where you are blocked will become open to access and the things in which you seek access, on the contrary, will become blocked, and so the Buddha attained great enlightenment in the midst of many hindrances, and although Angulimala and Devadatta committed treacherous misdeeds, the Buddha granted both of them the prophecy of their future Buddhahood and enlightened them. How can we not accept the betrayals of others as compliance and the opposition of others as our attainment? Now if a person learning the Path does not encounter oppositional situations, when he or she collides with obstructions, he or she will not be able to win ably and will come to lose the great treasure of the Dharma Emperor so do not readily lament.


*소요(逍遙)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
*자량(資量) 깨달음에 이르는 데 바탕이 되는 선근공덕(善根功德).
*원림(園林) 자신의 집에 딸린 정원의 숲.
*수기(授記) 부처님이 그 제자들이 수행하여 얻은 깨달음으로 ‘미래의 언제 어디서 부처가 되리라’는 말씀

*환산 스님 영역(英譯).

 

https://chamsonsajeon.tistory.com/227 [참선사전:티스토리]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No.410)—보왕삼매론십대애행(寶王三昧論十大礙行) 장애 속에서 도를 성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No.410)—보왕삼매론십대애행(寶王三昧論十大礙行) 장애 속에서 도를 성취하는 법 | 참회(懺悔).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 묘협 스님께서 지으신 『보왕삼매염불직

chamsonsajeon.tistory.com

 

www.youtube.com/watch?v=zOTpl9RvmZs

 

 

자료2. 禪門日誦

寶王三昧論

一念身不求無病 身無病則貪欲易生

二處世不求無難 世無難則驕奢必起

三究心不求無障 心無障則所學 等

四立行不求無魔 行無魔則誓願不堅

五謀事不求易成 事易成則志存輕慢

六交情不求益吾 交益吾則虧損道義

七於人不求順適 人順適則心必自矜

八施德不求望報 德望報則意有所圖

九見利不求沾分 利沾分則癡心亦動

十被抑不求申明 抑申明則怨恨滋生

是故聖人設化 以病苦爲良藥. 以患難爲逍遙. 以遮障爲解脫. 以群魔爲法侶. 以留難爲成就. 以 交爲資糧. 以逆人爲園林. 以布德爲棄 . 以疎利爲富貴. 以屈抑爲行門. 如是居碍反通. 求通反碍. 是以如來. 於障碍中得菩提道. 至若鴦 摩羅之輩. 提婆達多之徒. 皆來作逆. 而我佛悉與記 . 化令成佛. 豈非彼逆乃吾之順也. 彼壞乃我之成也. 而今時世俗 學道之人 若不先居於碍. 則障碍至時. 不能排遣使法王大寶 由玆而失. 可不惜哉. 可不惜哉.

是故聖人設化
시고성인설화,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以疏利爲富貴
이소리위부귀, 작은 이익도 부귀로 여기라 하였느리라
(知分 知足 知止 三知)

10. 被抑不求申明:
      피억불구신명,  억울한 누명을 해명하려고 하지 말라.

抑申明則怨恨滋生

억신명즉원한자생, 해명하려고 하면 원한(我相과 人相)을 키우게 된다.

是故聖人設化
시고성인설화,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以屈抑爲行門
이굴억위행문, 억울함을 받아들이는 것을 수행의 문 삼으라 하였느니라.

위 내용은 해인총림의 종진스님의 글을 요약한 것임.

 

www.youtube.com/watch?v=JmeuoGWiiTY

 

 

www.hankyung.com/thepen/lifeist/article/112363

 

[조민호의 인생백과사전] 30년만에 다시 보는 보왕삼매론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

www.hankyung.com

 

 

blog.naver.com/peterjay/55865245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강의 법륜스님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강의 법륜스님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

blog.naver.com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강의

ㅡ법륜스님

 

1.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2.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3.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4.수행하는데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모든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5.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 되나니 ,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  
 
6.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 하라.  
 
7.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나니,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써 무리[園林]를 삼으라.  
 
8.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덕을 베푸는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  
 
9.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나니, 적은 이익으로서 부자가 되라.  
 
10.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 <보왕삼매론>은 중국 원나라 말기부터 명나라 초기에 걸쳐 중생을 교화했던 묘협(妙協)스님의 저서 《보왕삼매염불직지(寶王三昧念佛直指)》총 22편중 17편 십대애행(十大礙行)에 나오는 구절을 가려 뽑아 엮은 글이다.  
 
 
법륜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1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1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지는 많은 바람들, 병이 없기를 원하고, 장애가 없기를 바라고, 일이 쉽게 되기를 바라고, 남이 내 뜻에 잘 따라주기를 바라는 것들에 대해서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장애는 일어날 만한 인연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수없는 인연을 지어놓고 과보를 받지 않으려고 도망가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정면으로 과보를 받아드릴 뿐 만 아니라 그 장애의 원인도 규명해서 본질을 꿰뚫어보아야 한다.”   
  
<보왕삼매론>에서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많은 어려움을 하나하나 들어서 그것을 부처님의 정법에 따라 수행으로 뛰어넘는 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교훈 같은 말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제법이 공한 이치에 바탕을 두고 인생사를 해결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병고(病苦)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  
  
一 念身不求無病身 無病則貪欲易生 
일 염신불구무병신 무병즉탐욕이생 
是故聖人設化 , 以病苦為良藥 , 
시고성인설화 , 이병고위양약 , 
우리는 누구나 몸에 병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병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고뇌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고뇌를 불교에서는 간략하게 네 가지로 표현합니다. 태어나는 고(苦), 늙는 고, 병드는 고, 죽는 고, 바로 생로병사(生老病死)이지요.  
  
태어나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태어난 자가 죽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죽지 않기를 원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죽지 않기를 원하니 괴로울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이것을 고통으로 보니 고통이지,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하나의 현상입니다. 파도가 일어나는 것이 바닷물의 현상인 것처럼 천하 만물은 봄이 되면 싹이 트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지는 것은 하나의 자연 현상입니다.  
파도가 출렁이는 것이 고통입니까? 잎이 피고 지는 것이 고통입니까?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자연현상 중 하나입니다. 자연현상을 두고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생각에 빠져 하나의 자연현상을 잘못 생각해서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자연현상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생명의 원리라 하며 그것을 찬탄합니다. 봄에 움이 트는 것을 찬탄하고 꽃 피는 것을 찬탄하고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찬탄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몸에 대해서만 이 자연현상을 거부하고 싶어 합니다. 나를 떠나서 세상을 본다면 그것은 하나의 자연현상일 뿐인데 나에게 사로잡혀 자연현상을 거부하기 때문에 큰 고통이 됩니다. 그러니 이러한 제 현상, 즉 법의 실상을 안다면 몸에 병이 나지 않기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몸에 병이 나는 것은 그냥 하나의 자연현상이지요.  
  
어떤 기계를 만들든지 그 기계가 가끔 고장이 날 때가 있습니다. 고장이 안 나는 기계는 없어요. 기계가 고장 나면 수리하면 됩니다. 고장 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고장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기계가 고장 날 때는 날 수밖에 없는 어떤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니 기계가 고장 났다고 신경질 낼 것이 아니라 고장 나면 고치면 됩니다. 고장이 나면 고쳐 쓰면 되고, 고장이 덜 나도록 사용할 때 유의하면 됩니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경과되면 더 이상 수리할 수 없는 정도가 되고, 수리하는 경비로 많이 듭니다. 이것을 계속 수리해서 유지시키려면 새로 기계를 사는 것보다 훨씬 비쌉니다. 그럴 때는 폐기처분하는 것입니다. 그럼 폐기처분하는 것이 손실인가? 손실이 아니에요. 그동안 충분히 썼으니까요. 우리의 몸도 그와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 몸에 병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죠. 잔고장이 나면 고치고 그 차의 상태를 잘 알아서 조심을 하게 마련입니다. 자동차가 잔고장이 많이 나면 과속을 안 하게 되지요. 그런데 자동차가 아무 고장이 없고 속도도 잘 나면 과속할 위험이 있습니다. 과속을 하면 사고 나되 죽는 수가 있지요. 그래서 몸이 건강한 사람들이 한 번 아파서 병원에 가면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소에 몸이 전혀 아프지 않았던 사람들이 장수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잔병치레 하는 사람이 오래 산다.’는 옛 말이 있지요. 왜냐면 몸을 조심하거든요. 몸을 조심해서 그때그때 잘 처치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고장이 전혀 안 나면 과신하게 됩니다. 과신하게 되니까 어느 순간에 큰 사고가 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배고픈데 밥 먹으려는 게 탐욕인가? 졸린데 자는 게 탐욕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욕구라고 합니다. 욕구가 지나치면 탐욕이라고 하지요. 중생이 갖는 욕심을 보통 오욕 - 식욕, 색욕, 재욕, 수면욕, 명예욕 - 이라고 합니다. 몸이 건강하고 병이 없으면 이런 것이 더 일어나게 됩니다. 몸에 병이 없으면 여러 가지 탐심이 생겨나서 수명을 단축시키고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육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살면서 연관 맺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든지 힘이 남아돌게 되면 과욕을 부리게 됩니다. 그런데서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는 것입니다.  
  
만약 몸에 병이 났으면 병의 원인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병의 원인을 살펴보면 다 병이 일어날 만한 어떤 이유가 있습니다. 다만 그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내가 큰 재앙이라도 맞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병고를 통해 자기가 이제껏 살아온 인생을 반성하고 돌이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그저 절에 와서 절 몇 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제법(諸法)이 공(空)한 도리, 욕심을 버리는 행위’가 될 때, 바로 기도가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될 때, 나에게 있는 병이 내 삶의 약이 되고, 내 삶을 반성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병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이 몸은 생로병사하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병은 생기는 것이지요. <유마경>을 보면 병이 난 유마거사는 자신의 병을 방편 삼아 설법을 합니다. 병을 고쳐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병들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우치는 방편으로 쓰지요.  
  
이렇게 생로병사는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병이 낫고 안 낫고를 떠나서 병에 구애를 안 받는 것이 근본 가르침이고 그 다음으로는 병의 원인이 이런 과욕으로 생겨난 줄을 알아 그 과욕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병이 낫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고  
탐욕이 생겨나면 마침내 파계하여 도에서 물러나게 되느니라.  
몸에 병이 없으면 과욕을 하게 되고 과욕은 계율을 깬다.   
계율을 깬다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기본선을 깨뜨리게 되는 것이다.   
병의 인연을 살펴서 병의 성품이 공한 것을 알면 병이 나를 어지럽히지 못한다.   
설령 병이 있다 하더라도 나를 어지럽히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병에 구애받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여러분들도 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나치게 민감하지 말고 ‘몸이라는 것은 잘 다스려 써야 하지만 때로는 고장이 날 수도 있다, 고장이 나면 수리해서 쓰면 된다.’ 이런 가벼운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또 몸에 고장이 났을 때 원인이 있기 때문에 그 원인을 잘 찾아서 수리해서 쓰면 됩니다. 그런데 원인을 찾아 병원에 가서 어디가 나쁘다하는 결과를 듣고는 그 결과에만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인 병의 80퍼센트는 정신적 과욕, 스트레스이고 거기에 따른 과식, 따라서 온갖 과욕에서 병이 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돌이켜서 여러분이 마음을 가볍게 가지고 베푸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뭔가를 얻기 위해 나를 고집하고, 뭔가를 움켜쥐기 위해 애를 쓸수록 몸과 마음에 병이 듭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고개를 숙이고 상대에게 “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면서 가정생활부터 가볍게 할 때, 여러분들의 건강도 좋아집니다.  
  
※ 보왕삼매론은 중국 원나라 말, 명나라 초기의 혼란기에 생존한 묘협 스님의 ‘보왕삼매염불직지’ 안에 있는 스물 두 편의 글 중 제17편, ‘십대애행’에 해당하는 글입니다.  
원문은 지금 우리들이 읽고 있는 것보다 긴 문장인데 많은 사람들이 읽고 새기기에 편하도록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법륜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2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2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   
  
[원문]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교만과 자랑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교만과 자랑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반드시 모두를 속이고 억압하게 되느니라.   
고난의 경계를 잘 살펴 고난이 본래 허망한 것임을 알면 고난이 나를 어찌 상하게 하리.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고난으로써 해탈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二 處世不求無難 世無難則驕奢必起 
이 처세불구무난 세무난즉교사필기  
是故聖人設化 , 以患難為逍遙 , 
시고성인설화 , 이환난위소요 ,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고난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월 초하룻날부터 정초기도로 한 해를 시작하면서 올해 어려운 일이 없기를 바라고 또 영험 있다 하는 도량을 찾아다니며 무사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하는 말씀은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습니다.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기 때문에 명산 대첩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하는데,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이럴 필요가 없지요. 그러면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지난 호 <월간 정토>에 말씀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병들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일은 우리 뜻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바라는 바대로, 원하는 바대로 다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풍비박산이 되어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다 이루어진다고 하면 서로 원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상충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출가하여 부지런히 정진해서 성불하는 게 목표인데 ‘나의 부모님’이 나에 대해서 원하는 것은 그것과는 다르지요. 또 ‘나의 여자 친구’도 나에 대해서 원하는 바가 다르겠지요. 이렇게 서로 원하는 바가 상충되는데,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사람은 오늘 놀러가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내일 놀러가는 사람이 있는데 각각은 자신이 놀러가는 날의 날씨가 맑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계속 맑게 되면 비가 오지 않아 물이 없어서 농사는 안 되고 먼지가 펄펄 날리니 금방 사막이 되어 버리겠지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면 자연은 사막이 되어 버리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이 좋은 게 아니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니 결국 바꿔 말하면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이 세상을 망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하는 바대로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게 이 세상의 참모습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안 되면 괴로워하면서 갖가지 곤란을 겪습니다.  
  
여러 가지 곤란을 겪는 것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그런 일을 겪는 것은 그런 일을 겪을 만한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나오는 것이므로 당연히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과’입니다. 중생의 세계에서는 바로 이 인과의 법칙을 따릅니다. 그래서 원인을 지은 것으로 결과가 있는데 우리는 내가 지은 그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결과에 대해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타난 결과를 ‘재앙’ 혹은 ‘곤란’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원인을 알게 되면 ‘재앙’이나 ‘곤란’이 아니라, 그러한 것이 ‘당연한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과법을 알아 나에게 주어진 현실을 기꺼이 받아드림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앞에서 말한 대로 세상 자체가 내가 원하는 대로 안되는 게 정상이니까 원하는 대로 안되는 게 괴로워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 나의 괴로움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날씨가 맑든 날씨가 흐리든 그 자체는 우리들이 괴로워야할 아무런 이유가 아니지요. 날 괴롭히려고 비가 오거나, 날 괴롭히려고 해가 나는 게 아니라 그냥 일상적인 기후환경인데 내가 ‘오늘 날씨가 맑아야한다’ 거나 ‘비가 내려야하는데.’ 하고 바라는 대로 돼야 한다고 할 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되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곤란하지, 원하는 대로 되어야한다는 생각이 없으면 곤란한 일은 아니지요. 약간 불편한 일일 뿐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원하는 대로 다 되지 않는 게 진리이므로 원하는 대로 안 된다고 해서 괴로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내 뜻대로 될 수 없으므로 곤란은 시시때때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곤란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큰 고통을 겪습니다. 곤란이라는 것은 시시때때로 나타나는 것이고 그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세상살이가 다 내 뜻대로 되는 것처럼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도 가끔 있지요. 그러면 사람이 교만해집니다. 인기 가수, 탤런트, 스포츠맨 등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처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세상살이에 조심하는 마음이 없어서 교만하고 거만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들에게 걸식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남의 집에 와서 밥 얻어먹는 주제에 큰 소리 칠 수 있습니까. 날마다 남의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으려면 문간에서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주면 좋고 안 줘도 좋고 많이 줘도 좋고 적게 줘도 좋고 이것 줘도 좋고 저것 줘도 좋습니다. 걸식과 구걸의 차이는 걸식은 수행의 한 방편이고 구걸은 욕심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걸식을 할 때는 욕심을 버리고 걸식을 하고, 구걸을 할 때는 욕심으로 전전긍긍합니다. 걸식을 할 때는 주는 사람에게 맡기면서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고, 구걸을 할 때는 주는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입니다. 폭력이든 애걸복걸하든 어쨌든 강요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걸식을 하는 자는 겸손해야합니다. 그래서 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의 제자들은 교만해서는 안 된다, 겸손해라. 나의 제자들은 비굴해서는 안 된다, 당당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겸손과 비굴을 같이 봅니다. 욕구가 있으면 비굴해집니다. 그런데 욕구가 없으면 당당해집니다. 욕구가 있으면 교만합니다. 욕구가 없으면 겸손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당당하면서 겸손하고 겸손하면서 당당합니다. 천하에 아무 거리낌이 없으면서도 천하 사람에게 고개를 숙입니다. 중생은 천하 사람에게 움츠려 비굴하고 또 천하 사람에게 잘났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여러분들이 돈에 집착하면 자기보다 돈 많은 사람을 만나면 비굴해지고 자기보다 돈 적은 사람을 만나면 교만해집니다. 또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는 비굴하고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는 거만해집니다. 얼굴 모양에 집착하게 되면 자기보다 잘생긴 사람에게는 기가 죽고 자기보다 못생긴 사람에게는 잘난 척을 합니다. 지식에 집착하면 자기보다 지식이 더 많은 사람에게는 기를 못 펴고 자기보다 지식이 못한 사람에게는 큰소리 뻥뻥 칩니다. 실제로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심리지요. 그런데 ‘나’라고 하는 이것을 내려놓게 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비굴할 아무런 이유도 없고, 거만할 아무런 이유도 없어집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는 가난한 자에게 밥을 빌게 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겸손하도록 가르치고, 궁성에 가서는 그 어떤 것도 빌지 못하게 해서 왕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도록 가르쳤습니다. 대부분은 왕에게 고개를 숙이고 대중 앞에 가서는 고개를 쳐들게 됩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붓다의 가르침은 왕에게는 고개를 숙이지 말고 대중 앞에 가서는 고개를 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자는 수행자의 발아래 내려놓고, 이 세상에서 제일 낮은 자는 수행자의 머리 위에 얹어놓으니 하니 결국은 세상을 평등하게 보는 것입니다. 왕은 천시하고 중생은 높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을 똑같이 평등하게 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 비굴하지 말고 당당하라고 하였습니다. 근데 이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면 교만하게 됩니다. 이건 주위의 사람을 봐도 그렇고 자기 자신을 가만히 지켜봐도 알 수 있습니다. 뭐든지 뜻대로 잘 되면 사람은 교만해지고 자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교만한 마음이 생기고 자랑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억압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원문에 ‘고난의 경계를 잘 살펴 고난이 본래 허망한 것임을 알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지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한다고 바라는 데서 고난이 되지 본래는 고난이란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공(空)’이지요.  
고난이 어찌 나를 상하게 하랴.  
우리가 고난이라 말하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본래 고난이 없는 것을 알아버리면 그 고난이 나를 어지럽히지 못합니다. 그러니 여기 고난의 경계를 잘 살펴보면 실체가 없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을 알면 어느 고난도 아무런 장애가 안 되지요.  
- 월간 정토 2007년 4월호-  
  
 
법륜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3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3   
공부하는 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마라   
  
「공부하는 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마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하셨느니라.」   
  
[원문]   
마음 공부하는 데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마라.  
마음 공부하는 데 장애가 없으면 배움에 등급을 뛰어넘게 되고  
등급을 뛰어넘으면 반드시 얻지 못하고서도 얻었다고 하게 되느니라.  
이 장애에 뿌리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면 장애가 스스로 고요해져서 장애에 걸릴 것이 없어지나니,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을 자유로이 거닐어라 하셨느니라.   
  
三 究心不求無障 心無障則所學蹋等  
삼 구심불구무장 심무장즉소학답등   
是故聖人設化 , 以遮障為解脫 , 
시고성인설화 , 이차장위해탈 ,  
염불을 하면 염불에 집중이 되고, 참선을 하면 화두가 성성해지고, 명상을 하면 마음이 호흡에 집중 되고,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해 보면 그렇지 않지요. 온갖 번뇌, 망상이 끼어들어 집중이 안 됩니다.  
  
마음 공부의 온갖 장애는 먼저 내적 장애와 외적 장애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외적 장애는 수행하겠다고 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든지 집에 부도가 나든지 해서 공부를 할 수 없는 조건이 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외부에서 갖가지 번뇌가 생기는 거예요. 하지만 외적 장애는 사실 장애가 아닙니다. 그냥 하나의 사건일 뿐입니다. 그런데 외적 장애에 부딪혔을 때 내적으로 수행에 대한, 공부에 대한 회의와 의심이 일어나면 외적인 사건은 큰 장애가 됩니다. 공부하는 데 회의가 일어나서 싫어하는 마음에 사로잡히면 외적인 상황이 갑자기 큰 장애로 나타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외적 장애는 여기서 논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외적 장애는 장애라고 하지만 사실은 장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적으로 공부에 대한 회의가 들지 않으면 외적 장애는 문제가 안 되거든요. 오히려 외적인 장애는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마음 공부할 때 생기는 내적 장애 중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번뇌입니다. 명상을 한다고 앉아 있으면 이미 지나가버린 옛날 생각이 끝없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책에 있는 글처럼 내가 옛날에 그랬다는 기록이지 그게 어떻든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과거에 사로잡힙니다. 지나온 삶이 괴로웠으면 사람이나 세상에 대한 적의가 생깁니다. 지금 내가 돌이켜봤을 때 과거의 기억이 괴로웠다고 한을 품으면 그것은 나에게 큰 불행을 자초합니다. 반면에 과거의 좋았던 기억에 사로잡혀서 번뇌가 일기도 합니다. ‘나도 한 때는 지위가 높았는데, 부자였는데, 얼굴이 예뻤는데…….’ 이런 생각을 자꾸 하게 되면 현재의 자기가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과거에 휩싸여서 현재의 자신이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못 하게 됩니다. 그래서 현재의 자기를 자꾸 불행하게 만들지요. 과거의 나쁜 기억에 사로잡히면 과거를 불행하게 만들고, 과거의 좋은 기억에 사로잡히면 현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내적 장애의 두 번째는 망상이에요. 미래에 대한 생각이지요. 있지도 않은 일을 마치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걱정이 생깁니다. 미래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현재를 불행하게 만들어요. 이런 망상 때문에 집중이 안 되지요.  
  
세 번째는 회의입니다. ‘절하면 뭐하나, 수행하면 뭐하나.’ 주로 안 될 때 이런 생각이 많이 일어나지요. ‘꼭 정진해야 하나, 내가 뭘 잘못했다고 참회하나.’ 이렇게 자꾸 의심이 듭니다. 공부하기 싫은 마음에 사로잡히면 합당한 이유가 생깁니다. 합당한 이유가 생기니까 그만둘 수 있지요. 내가 하기로 해 놓고 안 하는 게 아니고 안 할 이유가 생겨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하기로 해 놓고 안 했을 때 여기에 대한 책임감이 적습니다. 공부할 때 드는 회의와 의심, 이 마장은 무섭습니다. 번뇌가 끝없이 일어나 집중이 안 되는 것도 힘들지만 그것은 ‘번뇌가 왜 이리 많지, 왜 이리 공부가 안 되지’하는 정도지,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는 아니잖아요. 그러나 회의와 의심은 ‘과연 공부를 할 필요가 있는가, 안 해도 되지 않는가.’ 하는 쪽으로 계속 끌고 가는 거예요. 이럴 때 여러 가지 바깥 이유가 겹치지요. 이사를 간다든지 여행을 간다든지 이런 이유가 겹치면 안 하게 되는 거예요. 싫어함에 사로잡히게 되면 남의 말이 귀에 안 들리고 사물을 봐도 눈에 안 보입니다. 그래서 사로잡힘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싫어함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장애의 핵심은 싫어함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의욕이 없는 거예요. 흐르는 물처럼 명예도 무엇도 다 버리고 사는 것은, 다 버렸다 하더라도 생기가 있습니다. 좌절이나 절망과는 거리가 멀지요. 무심의 상태라는 것은 그 안에 ‘소소영영’, 깨어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명상할 때도 마음의 평정, 마음의 고요함 속에 정념이 있어야 합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흐리멍덩한 상태는 수행하는 데 큰 장애에요.  
  
우리가 공부할 때 이런저런 것들을 장애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장애가 아닙니다. 마음의 작용이에요. 밖에서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사건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내 업이 어떤 부분에서 애착과 혐오를 일으키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장애가 없어서 명상하면 명상이 고요히 되고, 염불하면 염불이 잘 되고, 어떤 일을 하든 뜻대로 되면 좋을 것 같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됩니다. 교만해지게 됩니다. 무엇이든 일을 할 때, 손쉽게 하려고 하면 안 돼요. 오히려 적당한 장애는 우리 인생을 탄탄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면서 가끔 장애를 맞는 것이 나쁜 게 아닙니다. 장애를 뛰어넘을 때만이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장애를 뛰어넘지 못하고 걸려 넘어지면 좌절과 절망에 빠지는 겁니다. 장애물 경기와 같습니다. 뛰어넘으면 승리를 하지만 걸려 넘어지면 패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원을 세웠으면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이 장애에 뿌리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면, 다 공하다는 것을 이해하면 장애가 스스로 고요해져서 장애에 걸릴 것이 없어집니다. ‘장애’라 하는 것은 장애에 걸려 넘어질 때 장애지, 그 장애에 구애를 받지 않으면 이미 그것은 더 이상 장애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입니다. 반야심경에 나오지요. ‘심무가애(心無罫碍)’, 마음에 장애가 없어지면 ‘심무가애 무가애고(心無罫碍 無罫碍故)’, 바깥 장애도 없어져 버립니다. 장애가 없으므로 ‘무유공포(無有恐怖)’, 두려울 것이 없어지지요.  
  
우리는 아무 장애가 없기를 바라는데 장애는 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장애가 우선이에요. 싫어하는 데 사로잡히면 이 마음이 바로 장애가 됩니다. 그러니 마음에서 걸리지 않으면 이것은 다만 하나의 사건이 되고, 그런 사건을 해결하게 되면 나에게 능력이 생기고 힘이 생깁니다. 그것이 나를 성장하게 만듭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나에게 좋은 일이에요. 돌아보면 지금까지 겪었던 수많은 장애들이 나를 성장하게 만들고 공부를 도와줬어요. 그런데서 우리가 장애를 해탈의 지름길로 여기고, 장애 가운데서 해탈을 얻어야 하는 거예요. 갖가지 장애 속에서 자유로워야지 장애 없이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법륜 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4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4   
수행하는 데 마 없기를 바라지 마라   
  
「수행하는 데 마(魔) 없기를 바라지 마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원문]   
『수행하는 데 마(魔) 없기를 바라지 마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견고해지지 못하고   
서원이 견고하지 못하면 반드시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하고도 증득했다고 하느니라.   
마가 허망한 것임을 꿰뚫어보고 마 자체에 뿌리가 없다는 것을 사무쳐 알면   
마가 어찌 나를 괴롭힐 수 있으리.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길 모든 마로써 수행을 돕는 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四 立行不求無魔 行無魔則誓願不堅 
사 입행불구무마 행무마즉서원불견 
是故聖人設化 , 以群魔為法侶 ,  
시고성인설화 , 이군마위법려 ,   
우리가 수행을 할 때 ‘마장(魔障)이 낀다.’ 이런 말을 많이 하지요? 공부하다 보면 공부를 못 하게 하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수행하는 데 마 없기를 누구나 다 원하지요. 그런데 수행을 하면 누구에게나 마장이 일어납니다. 옛사람들은 이 마장이라는 것을 ‘수행을 방해하는 마구니’라고 하여, 그것이 수행을 못 하도록 방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장애는 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마음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은 그게 어떤 것이든 하나의 사건일 뿐입니다. 그 사건 때문에 내가 물러나는 마음을 내면 그게 바로 ‘마장’이지요.  
  
그러면 이런 물러나는 마음, 어떤 것을 하려고 할 때 나아가지 못하고 물러나는 마음이 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것이 내 업식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습관을 바꾸려고 할 때, 과거의 습관이 저항하는 거예요. 이 업의 흐름, 습관의 흐름은 물리학에서 말하는 뉴턴의 제3법칙인 ‘관성의 법칙’과 같아요. 움직이는 물건은 계속 움직이려고 하고, 멈추었던 물건은 계속 멈추어 있으려고 하는 성질이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움직이는 물체를 멈추려면 힘을 가해야 하고, 멈춰 있는 물체를 움직이려면 역시 큰 힘을 가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습관이라는 것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 움직이는 물체와 같아요. 습관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계속 그 방향으로 가려 하는데 우리가 그걸 바꾸려고 하면 이 습관이 상당한 저항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저항력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결심을 하면 꼭 사건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래서 옛날부터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결심을 단단히 해도 삼일을 못 넘기지요.  
  
하지만 이 마장이라는 것도 확실한 의지, 즉 죽기를 각오한 대결정심 앞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반면에 털끝만큼이라도 틈이 생기면 마장은 쏜살같이, 비수같이 파고들어서 주인 노릇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생각 자체를 바꾸게 하여 공부할 필요성을 못 느끼게 합니다.  
  
우리가 어떤 결심을 하면 마음속에서는 항상 또 다른 망설임이 생기지요. 부처님께서도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기 직전까지 마왕으로부터 유혹을 받게 됩니다. 마왕의 자리를 주겠다는, 즉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유혹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중생이 바라는 최고의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이때에 부처님께서는 “마왕이여, 나는 바라는 바가 없소.” 하고 말씀하셨어요. 바라는 바가 없으니까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이 부처님께는 아무런 유혹이 되지 않는 거예요. 이것도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게 좋을까요, 원하는 바가 없는 게 좋을까요? 원하는 바가 없는 것이 나에게 훨씬 좋습니다.  
  
날씨를 예로 들어 봅시다. 날씨에 대해서 내가 어떠했으면 좋겠다는 원하는 바가 없으면 비 오든, 구름 끼든, 덥든, 춥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바가 있으면 날씨의 변화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굉장히 지혜로운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법은 높고 낮음이 없지요. 제법은 존재 가치의 높고 낮음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空)’입니다. 다만 필요에 의해 쓰일 뿐이에요. 그런데 우리의 가치는 높고 낮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높다는 데 집착합니다. 이러한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일단 이치가 뚫리면, 수없이 걸려서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치가 딱 꿰뚫어지지 않으면 자기가 잘못을 하고도 잘못한 줄 모르고, 틀리고도 틀린 줄 모르고, 모르면서도 물을 줄 모릅니다. 자신에게 뭐가 문제인 줄을 모르니까 이것은 해결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일단 이치를 확실히 알아버리면 잘못해도 잘못한 줄 알고 모르면 모르는 줄 알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나아지게 돼요. 그래서 법의 이치를 정확하게 꿰뚫어야 합니다. 이것을 ‘견도(見道)’라고 합니다. 적어도 이생에는 ‘견도’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치를 통달하여도 지금까지의 습관이 있기 때문에 자꾸 무의식적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약간 방심을 하면 업식이 일어나서 업식이 주인 노릇을 합니다. 이치대로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바로 거기서부터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는 것이 ‘수행’입니다. 넘어져서 일어날 줄 모르는 상태에서 누워 있는 것은 수행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수행’은 연습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됩니다. 즉, 자신이 공부할 때 자기 원하는 대로 되면 교만해지듯이 이 마음이 교만해져서 얻지 못한 것도 얻었다, 증득하지 못한 것도 증득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수행하는 데 마 없기를 바라지 말 게 아니라, 마장이 있더라도 구애받지 않아야 합니다. 마장이 일어날 때 그것이 마장인 줄 알면 됩니다. ‘아, 이게 과거 나의 업식이구나. 이렇게 일어나는구나. 이 뿌리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이걸 늘 봐야 합니다. 그럼 거기에 휩쓸려 가지 않아요. 견도가 열리면 어긋나는 자기를 끝없이 볼 수 있어요. 부부관계에서도 볼 수 있고, 음식에서도 볼 수 있고, 잠자는 것에서도 볼 수 있고, 절하면서도 볼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24시간이 공부꺼리지요. 그러니 잘하면 내게 교훈이 되고 못하더라도 내게 뉘우침이 되니까 넘어져도 일어나면 됩니다. ‘아, 내가 이 정도에 걸려 넘어지는구나.’ 알게 되면 한 번, 두 번 걸려 넘어지면서 세 번째는 안 넘어질 수도 있지요.  
  
세상살이에 혼란이 있는 게 정상인 것처럼, 일하는 데 장애가 있는 것이 정상이에요. 그런 것처럼 수행할 때는 마가 있는 게 정상입니다. 수행하는 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견고해지지 못합니다. 원을 세웠다 하더라도 한 번, 두 번 넘어지면서 만 번 넘어져도 일어나고, 다시 만 한 번째에도 일어난다고 하면 그 원이 아주 견고한 겁니다. 그러니 부처님도 서원이 굳건하지 못했다면 마왕이 천하를 다 내 주겠다고 했을 때 받았을 거예요.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이무소득고 -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 처럼 얻을 바가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마가 허망한 것임을 꿰뚫어 보고 마 자체에는 뿌리가 없다는 것을 사무쳐 알게 되면 마가 어찌 나를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로써 수행을 돕는 벗을 삼으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런 마장이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 나한테 이런 마장이 또 있구나. 결국은 이것이 내가 앞으로 극복해야 될 대상이구나.’ 하고 돌이킬 줄 안다면, 마장이 일어남으로써 우리가 알아차리는 기회를 얻는 것이지요. 일어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일어남으로 해서 내 수행의 과제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말고 마를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꾸준히 정진해나가시기 바랍니다.  
 
 
법륜 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5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5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 데 두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 하셨느니라.」   
  
[원문]   
  
『일을 도모함에 있어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   
일이 쉽게 성취되면 뜻이 경박하고 교만해지며,  
뜻이 경박하고 교만해지면 반드시 나는 유능하다고 스스로 칭하게 되느니라.  
생각하는 대로 일을 가늠할 수는 있지만 일을 이룸은 업을 따르는 것.   
일이란 지금의 능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일의 어려움을 안락으로 삼으라 하셨느니라.』  
  
五 謀事不求易成 事易成則志存輕慢 
오 모사불구역성 사역성즉지존경만  
是故聖人設化 , 以留難為成就 ,  
시고성인설화 , 이류난위성취 ,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일이 쉽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일을 하다보면 뜻대로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참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힘들어하고 좌절하면서 자기 능력을 탓합니다. 반대로 일이 잘 되면 자기 능력을 과신하고 그러다 보면 큰 사고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등산을 할 때 오르기 편한 산을 선택하면 편하기는 하지만 재미가 좀 떨어집니다. 험한 산을 오르면 힘은 들지만 재미가 있잖아요. 또 날마다 다니던 산보다 처음 가는 산을 선택하면 재미가 있습니다. 길을 잃거나 두세 번 헤매다보면 그때는 괴롭지만 지나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경험으로 그 산에 대해 훤히 알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일이 뜻대로 안 될 때, 되도록 하기 위해 연구를 하면 경험이 쌓이고 공부가 되고 그것이 능력이 됩니다.  
  
그런데 일이 잘 안 될 때 연구하지 않으면 좌절하거나 실망하고 그러면서 괴로움이 생깁니다. 노력 없이 쉽게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부처님이나 하느님 같은 존재에게 빌기도 합니다. 이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에요. 일이 안 될 때는 왜 안 되는지 연구해서 나에게 더 많은 학습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되는대로 하면서 ‘일이 안 되는 것을 수행삼아 한다.’라고 말하면 안 되지요.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아무리 정교하게 계획을 세우고 치밀하게 준비를 해도 상황이 따라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준비가 잘 되어 있으면 객관적인 상황이 안 받쳐줘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연구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생각지도 않은 변수를 몇 번 경험하면서 전문가가 되기도 하지요. 그래서 어떤 새로운 일을 할 때도 몇 가지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에 대응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일을 그르친 경험으로 대처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잘못됨으로써 배우는 기회가 생깁니다. 일이 뜻대로 되면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고 자기가 하는 일은 뭐든 잘 된다고 과신하다가 장애에 부딪히고 좌절하고 심하면 충격도 받습니다. 그러나 잔병이 많은 사람이 질병에 대한 대응능력이 생기는 것처럼 어려운 문제들에 많이 부딪히면 그만큼 대처능력이 생깁니다.  
  
정토회에서는 일 년에 한 차례 인도 성지 순례를 갑니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여행을 하면 예기치 못한 변수가 늘 일어납니다.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고 준비를 충분히 했는데도 돌발 상황들이 생기는 것이지요. 비행기가 안개 때문에 이륙을 못 해 일정에도 없는 방콕에서 하루를 자야 하는 경우도 있고, 인도라는 나라가 우리의 상식과는 달라서 엉뚱한 일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서든 문제는 늘 있기 마련이니 이걸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며 아주 면밀히 계획을 세웁니다. 비행기가 하루 늦게 도착한다든지, 기차가 예닐곱 시간 늦게 온다든지, 버스가 중간에 고장이 나서 못 간다든지 할 때도 여행의 큰 줄기에는 차질 없이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지순례 일정을 짤 때 오늘 저녁에 도착해 오늘 저녁에 기차를 타는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아요. 오늘 저녁에 도착하면 내일 저녁에 출발하는 기차를 예약하고 그 사이에 구경거리를 마련합니다. 그래서 만약 비행기가 늦어지면 그 구경거리만 빼고 일정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제일 어려웠던 일 중 하나는 호텔에는 제 시간에 도착했는데 예약한 30개 방을 달라고 했더니 10개만 주고 20개는 못 준다고 한 사건이었습니다. 딴 사람이 와서 돈을 두 배로 주면 예약과는 상관없이 방을 내주기 때문에 방이 없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도에 가면 우리 뜻대로 안 됩니다. 오는 경계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고 사전에 교육을 합니다. 성지순례이기 때문에 여행사 따라 오듯이 불평, 불만을 하기보다는 길거리에서 자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달리는 차 안이나, 기차 안에서 기도를 놓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일정을 책임지는 사람은 대중의 편의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담당자는 네다섯 시간 전에 호텔에 먼저 가서 체크를 해야 합니다. 이런 점검들은 예전에 일이 잘 안 된 경험을 했던 덕분에 생긴 대처능력입니다.  
  
무조건 일이 뜻대로 되어야 좋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일이 뜻대로 되면 사람이 경솔해지고 잘한다는 우월감으로 콧대가 높아집니다. 수행과는 정반대로 가지요. 그러니 어떤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일을 자기 생각대로 추진할 수는 있지만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자기의 의도대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많은 조건들과 결합해 이루어집니다. 즉, ‘인연과’입니다. ‘인’은 내가 의도하는 것이고 ‘연’은 주위의 상황 조건이에요. 인이 조금 부족해도 연이 무난하면 괜찮아요.  
전기를 예로 들어 볼까요. 여기 전기 스파크가 일어나도 그 순간, 누가 봤다거나 불이 옮겨 붙을만한 나무나 다른 물체가 없었다면 불이 날 원인은 있어도 주변 조건으로 화재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화재 위험이 있는 곳이라도 불씨가 없으면 불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꼭 큰 화재가 날 때는 불씨가 있고, 그 때 마침 주위에 인화물질이 있고, 대처할 사람이 없을 때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인연과’ 입니다. 그러니까 조심을 하고, 계획을 잘 세우는 것은 ‘인’입니다. 인은 씨앗이라고 할 수 있어요. 씨앗도 좋아야 하지만 반드시 씨앗이 좋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에요. 좋은 씨앗도 자갈밭에 떨어지면 잘 자라지 않아요. ‘연’이 어떠냐에 따라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씨앗인데 자갈밭에 떨어졌으면 밭을 바꿔야 하고 좋은 밭인데 나쁜 씨앗이 떨어졌으면 씨앗을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서 일을 하는 것은 내가 하지만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반드시 내 의도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주변 상황과 관계가 있어요. 그것을 수용해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일이란 지금의 능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주어진 조건과 결합해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일의 어려움을 수행으로 삼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일어날 때 그것을 해결하는 것을 재미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법륜 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6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6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 하라 하셨느니라.」  
[원문]   
『정을 나누되 나에게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   
나의 이익을 바라며 정을 나누면 도의를 잃게 되고 도의를 잃게 되면   
반드시 그릇됨을 드러내게 되느니라.   
정의 근본을 잘 살펴볼지니, 정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요,  
정은 인연을 의지할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힘든 교제로써 깨달음의 밑천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六 交情不求益吾 交益吾則虧損道義 
육 교정불구익오 교익오즉휴손도의 
是故聖人設化 , 以敝交為資糧  
시고성인설화 , 이폐교위자량   
 
우리는 친구를 사귈 때도 상대로부터 조금이라도 득을 보려고 합니다. 아닌 것 같지만 ‘괜찮은 친구’라는 것은 ‘내가 득 보는 친구’라는 뜻입니다. 득 본다는 것은 꼭 경제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그 친구를 사귐으로 해서 배우는 게 많든지, 경제적으로 도움을 얻든지, 출세의 줄이 되든지, 놀면 재밌든지, 뭐가 되었든 그 친구로부터 득을 보는 거예요. 그런데 친구가 나에게 와서 매일 죽겠다고 울며 상담하고, 돈 빌려 달라고 해서 내가 부담이 되면 나는 그 친구를 멀리하게 됩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에요. 사람들은 결혼할 때도 자기가 이롭고자 결혼을 합니다. 살아봐서 별로 득이 안 된다 싶을 때 나타나는 생각은 ‘이럴 바엔 혼자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거예요. 혼자 사는 것보다 별로 좋은 게 없다는 것은 별로 득 되는 게 없다는 뜻이지요. 더 나아가서 ‘이제 못 살겠다.’ 하는 것은 그 손해가 막심하다는 거예요. 우리는 서로 솔직할 필요가 있어요. 여러분들이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관계는 바로 부부입니다.   
 
옛날에 제가 부부수련을 진행한 적이 있어요. 부인들에게 “남편한테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남편이 나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일 것 같은가?”라고 물은 적이 있어요. 남편들에게도 “아내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아내가 나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일 것 같은가?”라고 물었지요. 결과는 아내가 남편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존중이었어요. 부부로 같이 살면서 아내는 남편이 자기를 멸시하거나 얕보는 데 대한 상처가 많았어요. 남편이 아이들 보는 앞에서 “네가 뭘 알아?”라고 면박을 줄 때 가장 모멸감을 느낀다고 했어요.
 
근데 남편들에게 아내가 뭘 가장 원할 것 같냐고 물었더니 ‘돈’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어요. ‘마누라하면 돈만 생각난다. 우리 마누라는 돈만 벌어주면 괜찮다.’ 남편들이 이렇게 돈에 대한 압박이 있으니 아내에게 돈을 못 벌어주면 괜히 위축이 되는 거예요. 반대로 자기가 돈을 좀 벌어주는 편이면 대부분이 바람을 피워요.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바람피우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이 없어요. 생활비를 충분히 주고 있으니 나머지는 자기 취미생활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부부가 평등하려면 아내도 남편이 돈을 벌어 와야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남녀관계에서 평등하다는 의미 안에는 경제적인 문제에서도 평등하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남편이 직장을 잃고 집에 있게 되면, 부인은 자기가 나가서 돈을 버는 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남편을 무능하다고 생각하거나 꼴 보기 싫어하면 그건 불평등한 관계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여자니까 하고 주장하고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남녀가 평등하니까 하고 주장하면 갈등이 생깁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귈 때 이익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선을 보거나 연애할 때도 학벌이나 경제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잖아요. 인물도 잘 나고 신체도 좋고 성격도 좋고 사회적 지위와 명예도 있고, 또 자기만 쳐다봐야 하는 사람이길 바라잖아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연애할 때 한눈에 반했다고 말하는데 실 한 눈에 반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런 여러 가지를 다 갖추고 있다는 것이지요. 가난한 집에 팔이나 눈이 하나 없거나, 말을 더듬는 등 장애인을 보고 한 눈에 반했다는 경우는 없잖아요. 상대가 내 눈에 왕자 같거나 공주 같아 보인 경우에 한눈에 반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 눈에 반하면 연애나 결혼생활이 오래 못 갑니다. 그냥 같이 살다보니 정이 들어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이혼율이 높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눈에 반했다는 것은 기대치가 그만큼 높다는 거예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에게 가진 기대치가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 실망하게 됩니다. 바라는 것이 없거나 낮을수록 관계가 오래가고 서로에 대한 실망이 적어요. 기대치가 없으니 특별히 미워한다거나 원수가 되거나 헤어지는 일이 없어요.  
 
누구를 사귀어 정을 주고받는 게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좋다고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에요. 누가 나를 좋아한다고 내가 상대를 금방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감정적으로, 정서적으로 좋아지는 경우도 있고, 인간관계를 오래 하다보면 그 사람의 진의를 알게 되어 좋아지기도 합니다. 특히 내가 어렵거나 하는 경우에 그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내가 몸과 피부로 느끼잖아요.   
 
여기서 말하는 ‘순결’이란 ‘꼭 너만 사귄다.’ 하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그를 위하는 마음, 바른 마음을 갖고 사귀면 사귐이 길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신의 손에 있는 돈을 낭비하지 않고 잘 보관하고 관리하는 것도 부자가 되는 길이지만 자기가 한 번 만든 인간관계를 나쁘게 만들지 않고 사귐을 길게 하는 것도 엄청난 재산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사람을 만나서 서로 원수가 되거나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관계를 만들면 있는 재산을 잃는 것과 같은 거예요. 원효대사는 상대가 나를 미워하는 것까지도 내 문제로 봤습니다. 우리는 그 수준까지는 안 되더라도 수행자라면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상대 때문에 재산상의 손실을 입었든, 폭행을 당했든, 그 어떤 이유가 있어도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상대를 미워하면 우선 내가 괴롭고 사람도 잃게 됩니다.   
 
그러니까 수행하는 사람은 수행을 잘하는 것이 돈을 버는 거예요. 열심히 수행하면 주위에 신뢰를 얻고, 그것이 곧 재산이 되어 앞으로 언제 무슨 일로 나에게 이익을 가져올지 모릅니다. 뿌린 인연의 공덕은 언젠가는 옵니다. 금방 오기도 하고 십년 후에 오기도 하고 다음 생에 오기도 하고 여러 생이 지나서 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사귈 때는 길게 사귀어야 해요. 길게 사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롭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이해를 따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손익 계산을 좀 더 길게 하라는 거예요.   
 
인과의 법칙이 있다는 것은 인생은 손해 볼 일도 없고 득 볼 일도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투자했는데 금방 돌아오지 않으면 손해라고 느끼고, 투자는 작게 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많으면 득으로 느끼죠. 우리 인생은 늘 손해도 보고 득도 봅니다. 손해 보는 것이 꼭 나쁜 게 아니에요. 손해 보는 것은 저축하는 것이고 다음에 득이 되어 나타납니다. 지금 득이 되는 것은 좋은 게 아니에요. 다음에 갚아야 되니까요. 그러니까 손실과 득에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한 노력보다 많이 받는다면 빚을 내거나 저축한 걸 갖다 쓰는 거고 내가 한 것보다 돌아오는 게 적다면 빚 갚거나 저축하는 겁니다. 사실은 인생에는 손익이 없습니다. 계산을 무한대로 하면 본래 손익이 없어요.   
그래서 조금만 길게 보면 이익 보려 하지 않아도 득이 되는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법륜 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7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7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기 쉽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써 원림(園林)을 [무리를] 삼으라 하셨느니라.」  
 
[원문]   
『다른 사람이 순종하고 거스르지 않기를 바라지 마라.   
사람들이 순종하여 거스르지 않으면 내심으로 자신을 뽐내며   
내심으로 자신을 뽐내게 되면 반드시 내가 옳다고 고집하게 되느니라.   
깨달은 이의 자세는 사람들의 허망한 행위를 관하여 그냥 무심하게 주고받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거역하는 사람으로서 원림(園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七 於人不求順適 人順勢則心必自矜 
칠 어인불구순적 인순세즉심필자긍  
是故聖人設化 , 以逆人為園林 ,  
시고성인설화 , 이역인위원림 ,  
 
우리는 누구나 남이 내 뜻에 순종해 주기를 원합니다. 내가 말하면 남편도 “그래, 그래.” 하기를 원하고, 아내도 “예, 예.” 하기를 원하고, 부모까지도 “오냐, 오냐.” 하기를 원해요. 누구나 이렇게 원하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상대방이 “예, 예” 하는 것이 정상일까요, “예, 예” 하지 않는 것이 정상일까요? “예, 예.” 하지 않는 게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상대 역시 자신의 생각이 있기 때문에 나와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을 할 때는 가볍게 해야 합니다. 가볍게 한다는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을 상대가 들어줄 것이라는 전제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가 내 말을 안 들어줄 바에야 굳이 왜 말을 해? 내 입만 아프지.’ 하는데 그것은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는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나에게 무조건 순종하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마음이 교만해집니다. 이런 경우의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왕이에요. 왕은 어렸을 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항상 “‘예, 예.” 하고 순종하니 자신이 말하고 생각한 것은 다 진리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기 의견을 거스르면 화를 내고 처벌을 하거나 때로는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죽여 버립니다. 우리가 악덕 군주라고 하는 사람도 한 개인으로 보면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말하는 입만 있었지 듣는 귀는 없이 키워졌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는 잘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말하면 모든 사람이 따른다는 것이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결국 이런 교만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이런 이유로 앞으로 갈수록 이혼율이 높아질 거예요. 또 두 번, 세 번 이혼하는 경우도 많이 늘어날 것입니다. 이혼이라는 것이 서양 문물이 들어와 우리 전통 문화가 파괴되어서 생기는 문제만은 아니에요. 가장 큰 원인은 자녀를 하나나 둘밖에 낳지 않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집이라도 아이가 하나 둘밖에 없기 때문에 아이한테는 무엇이든지 최고로 해 주려고 합니다. 월급의 절반을 들여서라도 아이한테만은 최고의 것을 해 주고 모든 기준이 아이가 됩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좋게 말하면 개성이 강하고 나쁘게 말하면 아주 버릇없고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가 자기에게 제대로 안 해 준다고 느끼면 “제대로 해 주지 않을 바에야 뭐 때문에 낳았어요?”하면서 부모에게 반항하고 덤비게 됩니다.
 
이런 아이의 태도는 부모가 한 행동의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들은 보통 때는 버스나 기차를 타다가도 아이와 함께 갈 때는 택시를 타거나 고속열차를 타잖아요. 내가 불편한 것도 있지만 아이를 위한다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택시나 좋은 기차를 타고 가는 것에 습관이 듭니다. 그래서 아이가 좀 크거나 아니면 집안 형편이 나빠져서 좀 낮춰서 살자고 하면 아이는 싫어합니다. 아이가 나빠서라기보다 자랄 때 그렇게 자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프가니스탄에 있을 때 손님으로 초대받아서 아프간 사람의 집에 가면 다섯 살, 일곱 살 된 조그만 아이들도 손님 접대한다고 물도 가져오고 옆에 줄을 서서 인사하며 일을 합니다. 손님이 나가면 신발까지 닦아서 앞에 놓아줍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아이들은 어때요? 오히려 아빠나 엄마가 아이 앞에 신을 갖다 주고 신겨 주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집에서는 부모가 자기를 떠받드는데 학교에 들어가면 아무도 부모처럼 자기에게 안 해 준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친구들이 이기적이라고 느끼는 거예요. 아마 앞으로는 옛날처럼 의리 있고, 오래가는 친구 관계를 갖기가 어려울 겁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받기만 하고 자라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잘 몰라요. 그래서 세대 차이가 예전보다 심하게 생기는 겁니다. 마치 기독교와 무슬림이, 또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이 문화가 달라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반면에 같은 세대면 이제는 한국 아이들과 일본 아이들은 오히려 별로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언어가 다른 것 빼고는 금방 동질감을 느껴요.
 
그런데 같은 나라에 살아도 기성세대하고 신세대는 말과 얼굴 모양만 같고 나머지는 굉장히 다릅니다. 이렇게 미루어 볼 때 앞으로 남한과 북한 사람들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을 겁니다. 같은 민족이라는 것, 같은 말을 쓰고, 얼굴 생김새가 같고, 옛날의 풍습이 같았다는 것을 빼놓고는 서로 만나면 공통점이 별로 없어요. 이것은 단순히 이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의 변화 속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왕삼매론> 중 특히 이 가르침이 아주 중요합니다.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마라.’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말할 때는 상대가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하지 말고 내 의견을 그냥 내놓아야 합니다. 또 상대가 다른 의견을 내놓으면 그 의견에 꼭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견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견해를 더 얘기하고 싶으면 얘기는 더 할 수 있되 고집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의 견해를 내놓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것을 고집하게 되면 다른 사람을 억압하게 됩니다. 누구나 의견을 솔직하게 내놓고 그것을 서로 인정하고 다시 토론해서 같은 것은 함께 가고 다른 것은 서로 인정해서 달리 가는 거예요.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뽐내는 것이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을 압니다. 의견을 내더라도 옳다 그르다 시비하지 않고 그냥 무심하게 주고받을 뿐입니다. 무심하게 주고받는다는 말은 자기 의견이 있으면 억누르지 않고 가볍게 내놓고, 다른 사람의 얘기도 무심히 듣는 걸 말합니다. 저 사람의 의견을 다 들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 없이 듣는 것입니다. 내놓을 때 가볍게 내놓고, 들을 때도 가볍게 듣고 거기에 대해서 상대가 들어야 한다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고 상대가 말하면 내가 다 들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갖지 않는 거지요. 그러면 내 마음의 답답함도 없고 상대의 얘기도 귀담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 후에 판단은 나중에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교만해지면 나에게 불행이 됩니다. 주위에 숲을 이루듯이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거기에 걸림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거기에 공부가 굉장히 많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내 뜻에 맞는 사람들만 주위에 데리고 살면 패거리가 되고,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 내 말에 섣불리 “예” 하지 않는 사람들을 주위에 두고서도 내가 만약에 능히 거기서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공부가 아주 잘 된 사람인 것이지요. 그렇다고 내 뜻에 맞는 사람과는 같이 살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살다가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이 한두 명 생긴다고 해서 그들을 미워하며 배척하느라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수행의 과제로 삼으라.’는 건 내가 내 생각에 빠지는 것을 거슬리는 그 상대가 막아주어 나도 모르게 공부가 되어, 사람들이 나를 따라주니까 내가 교만해지는 것을 막아준다는 뜻입니다.  
 
 
 
법륜 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8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8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마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마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덕 베푼 것을 헌신처럼 버려라 하셨느니라.」  
 
[원문]  
『덕을 베풀되 보답을 바라지 마라.  
베푼 덕에 대해 보답을 바라게 되면 무엇인가를 도모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도모하는 생각이 있게 되면 반드시 화려한 명예를 드날리고자 하게 되느니라.  
덕의 본성이 없음을 밝히고 덕이 영원하지 않음을 관조할지니   
덕이란 참알맹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덕 베푼 것을 헌신짝 버리듯이 하라 하셨느니라.』  
 
八施德不求望報 德望報則意有所圖 
팔시덕불구망보 덕망보즉의유소도  
是故聖人設化 , 以布德為棄屣  
시고성인설화 , 이포덕위기사   
 
우리가 남에게 보시를 하거나 돕거나 뭔가 보탬이 되도록 해주면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누구나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흔히 우리는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없는 사랑을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지식을 사랑하는 마음에도 대가를 바라는 마음의 뿌리 끝이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면 엄마들은 “내가 너를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아이가 자기 기대만큼 안 되어 섭섭하다는 거예요. 결국 부모가 자식에게 베풀어준 사랑에도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부모 자식 사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너한테 이렇게 해줬다.’라는 말은 다르게 표현하면 ‘네가 내 공을 알아야한다.’라는 겁니다. 알아서 그것을 돈으로 갚든지, 인사로 갚든지 무엇으로든 갚아야 한다는 거지요. 이런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어떨까요? 상대가 내가 원하는 것처럼 반응을 해주면 다행인데, 반응해 주지 않으면 섭섭함이 생기고 섭섭함이 지나치면 미움이 생깁니다. 그러다 미움이 지나치면 원망이 생기고, 원망이 지나치면 원한이 맺힙니다. 원한이 맺히면 내가 상대에게 보복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좋아하고 사랑했던 마음이 상대를 해치는 쪽으로까지 가게 되지요.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부처님을 좋아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부처님이 존경스러워 갖가지 공양을 올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부처님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똑같이 대하는 것을 보고 섭섭한 마음이 생겼어요. 부처님이 자신을 남들보다 조금 더 특별하게 대해줬으면 하는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거예요. 그렇지만 부처님은 언제나 한결같은 분이셨습니다.
 
그 여인은 부처님에 대해 섭섭하다 못해 미운 마음까지 생겼어요. 그래서 공양도 올리지 않고, 결국 절에도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그 여인은 어떤 나라의 왕자에게 시집을 가버렸고 얼마 후 왕비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이 그 왕비의 나라에 와서 법을 전하게 되었는데 왕궁에서 궁녀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너무나 좋아하는 것을 보고는 질투심이 생겼지요. 그래서 궁녀들에게 부처님의 설법을 못 듣게 하고 심지어 왕에게 말해서 어느 누구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지 못하도록 금지를 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왕비는 부처님의 법을 펴는 데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이 되었고 부처님의 생존까지도 위협하는 사람이 된 것이지요. 사실 부처님은 이 여인이 부처님을 좋아한 것도 모르고, 원한에 사무쳐서 부처님을 미워하는 줄도 모르셨어요.   
여러분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입니다. 그 사람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잖아요. 그런데 상대방이 반응하지 않는다고 미워하고 심하면 죽이려는 마음까지도 생기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남이 나를 좋아하면 자신이 굉장한 사람인 줄 알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남이 나를 좋아할 때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조심하여 닥쳐올 수 재앙을 미리 막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봄에 새싹이 틀 때 이것이 자라 여름에는 무성해지고 가을에는 낙엽으로 질 것을 미리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낙엽이 질 때 슬픔을 일으키거나 실망하지 않아요. 새싹이 필 때 벌써 낙엽을 보되 새싹은 새싹으로 좋고, 무성한 잎은 무성한 잎으로 좋고, 낙엽은 낙엽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렇게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치면 그 다음 단계는 인연을 따라 나투는 겁니다. 이미 결말이 어떤지를 알기 때문에 현상에 빠지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러니 남이 나를 좋아할 때 내가 덩달아 좋아하면 과보가 따르니 그 과보를 받겠다는 각오를 하세요. 만약 과보가 싫으면 누가 나를 좋아하는 것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을 받지만 사랑에 빠지지 않는 거지요.   
우리는 산을 좋아하되 산을 미워하지 않고 바다를 좋아하되 바다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또 꽃을 좋아하되 꽃을 미워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바라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악산은 열 번 가도 좋고 바다도 열 번 봐도 항상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기대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불법을 공부하면 무미건조한 인간, 돌 같은 인간, 냉혈한이 되는 게 아닌가 하고 염려하는 사람이 있는데 잘 몰라서 그래요.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보면 좋아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바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미워한다는 것은 뭔가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좋아하되 바라지 마라, 베풀되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런 인연과보가 일어나지 않고 ‘사랑은 눈물의 씨앗’도 아니고 ‘미움의 씨앗’도 아니게 됩니다.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 있기 때문에 미움이 생기는 거예요. <금강경>에서 말하기를 ‘보살은 베풀되 과보를 받지 아니하고 과보를 탐하지 않는다.’ 이라고 합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것이 진정한 공덕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 누구를 좋아하든 누구에게 베풀든 그것이 절대 미움으로 돌아오지 않아요.
 
산이나 꽃, 바다를 좋아하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바라는 마음이 없으니 아무리 좋아해도 절대 원한이 맺히지 않지요. 그러면 왜 사람은 좋아해서 무엇을 베풀어주고도 원수가 될까요? 우리네 인간관계에서는 돈 주고 몸 주고도 원수지고 뺨 맞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럴 때는 안 주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조건 안 주면 되느냐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누군가에게 물질적으로 베풀었든, 도움을 주었든, 사랑을 했든 마음에 섭섭하거나 미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생은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누군가에게 베풀면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길은 두 가지에요. 바라는 마음을 충족시켜 주거나 내가 충족시켜 줄 수 없으면 받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도 보시도 받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살펴보세요. 내가 많이 베풀어주고 도와주거나 사랑하던 관계가 지금까지 좋은 관계로 유지된 경우가 많은가요? 시집가서 시동생들 뒷바라지해서 공부시켰거나 시집, 장가보냈다는 분들이 많지요. 그런 형제들과 지금도 관계가 좋습니까? 아마 원수진 경우가 많을 거예요. 왜냐하면 해주는 사람이 많이 바랐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내가 고생 고생해서 남편을 고시 공부시킨 경우, 누나가 고생해서 동생들 공부시킨 경우는 백이면 백 다 원수가 됩니다. 해준 사람은 바라는 마음이 있고 받은 사람은 해준 사람의 공을 알긴 알아도 받은 사람이 생각하는 그만큼은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만큼 모르기 때문에 바라는 사람은 섭섭하고 받았던 상대는 또 마음이 무거운 거예요. 그것 좀 해줬다고 자기가 다 한 것처럼 자꾸 얘기하는 게 듣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가능하면 안 만나려고 하고 그러면 해 준 사람은 더 섭섭해지면서 서로 원수가 되는 거예요.  
결국 바라는 것이 나를 해치고 관계를 해치게 됩니다. 이 이치를 아시고 수행자라면 베풀되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법륜 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9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9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마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마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 하셨느니라.」  
 
[원문]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마라.   
이익을 바람이 분에 넘치면 반드시 어리석은 마음이 요동을 치고   
어리석은 마음이 요동을 치면 반드시 추악한 이익 때문에 자신을 훼손시키느니라.   
세상의 이익이란 본래 공한 것, 분에 넘치는 이익을 바라면 번뇌만 커지나니   
이익을 허망하게 구하지 말지어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이익을 멀리 하는 것으로 부귀를 삼으라 하셨느니라.』  
  
九 見利不求沾分 利沾分則癡心易動 
구 견리불구첨분 이첨분즉치심역동 
是故聖人設化 , 以疎利為富貴 ,  
시고성인설화 , 이소리위부귀 ,   
우리가 어떤 일을 도모할 때는 늘 이익을 많이 바랍니다. 조그마한 일을 해 놓고 큰 이익을 바라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부처님께 공양물을 조금 올려놓고는 ‘우리 아들 서울대학교 가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또 자기 아들은 말썽이 많으면서 좋은 며느리를 보려고 한다든지, 자기 딸은 자기가 봐도 문제가 있는데 사위는 좋은 사람을 구하려고 합니다.  
 
부모로서의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이것은 모순입니다. 부모인 나도 내 아들, 딸 대하기가 힘든데 누가 내 아들과 딸을 감싸주겠느냐고 생각하면서 며느리나 사위되는 사람에게 항상 고마워해야 합니다. ‘참 고맙고 착하다. 문제 많은 내 자식을 돌봐주니 고맙다. 밥이라도 먹여주니 고맙다.’ 이렇게 여기세요. 그래서 며느리에게는 “아가, 네가 우리 집에 시집 안 왔으면 내 아들이 평생 혼자 살았을 건데 네가 와서 살아주니 고맙다.” 하고, 사위에게는 “자네가 아니면 내 딸을 누가 데리고 살겠는가? 고맙네.” 이렇게 고마운 마음을 내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도와주되 간섭은 하지 않으면 갈등이 생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고마움을 모르니 며느리나 사위가 밉고 갈등이 생기지요. 고마움을 모른 채 기도하는 것은 허황된 이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우리들은 항상 이렇게 분에 넘치는 이익을 원합니다.  
 
장사도 마찬가지에요. 자기가 물건을 팔 때는 조금이라도 돈을 더 받으려고 궁리하고, 팔고나서는 가격이 오를까 봐 조바심 내고, 반대로 자기가 물건을 살 때는 조금이라도 더 싸게 사려고 하고, 산 뒤에는 가격이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심리에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세속에 사는 사람들한테 아예 이익을 바라지 말라는 얘기는 안 하셨어요. 수행자들에게는 ‘이익을 바라지 마라. 상대에게 도움을 주라.’ 이렇게 가르쳤고 세상 사람에게는 ‘이익을 너무 바라지 마라. 지나친 욕심을 부리면 도리어 재앙의 원인이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마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반드시 어리석은 마음이 요동친다.’는 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우리 사회도 한번 보세요. 가지고 있던 땅이 갑자기 열 배, 스무 배 값이 올라 부자가 되거나 주식 투자로 갑자기 큰돈이 생긴 사람들을 보면, 돈을 아껴 유용한 데 쓰기보다는 사치를 부리며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돈이 제 값어치를 못 해요. 일을 해서 벌어도 마찬가지에요.   
이익이 분에 넘쳐서 좋은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복권이 당첨돼서 그 돈으로 알뜰하게 살면서 성공했다는 사람 얘기는 듣기 힘들잖아요. 그런 사람치고 정상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 드뭅니다.   
 
제가 언젠가 잡지에서 읽었는데 요정이라는 곳에 다니는 여자들의 한 달 수입이 1000만 원쯤 된다고 해요. 그런데 한 달 쓰는 돈이 또 1000만 원이랍니다. 그래서 남는 돈이 없대요. 처음에는 대학생들까지 돈 때문에 아르바이트처럼 일을 시작했는데 몸이 상품이다 보니 몸에 쓰는 돈이 점점 많아지면서 오히려 빚만 진다고 합니다. 몸은 몸대로 버리고 정신은 정신대로 파괴되는 거죠. 그래서 한 달에 10만 원 벌어서 5만 원 쓰고 5만 원 저축하는 사람보다 못한 거예요.   
 
돈은 한번 낭비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 아껴서 쓰는 것이 잘 안 됩니다. 옛날에는 버스나 일반열차를 타다가 새마을호를 타려고 하면 돈이 아까워서 떨렸잖아요. 그런데 일단 새마을호를 한번 타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일반 열차를 못 탑니다. 지금은 KTX 한두 번 타면 새마을 기차도 안 타집니다. 택시 타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택시 타고 돌아다니는 습관이 들면 버스는 안 타집니다. 버스를 타면 아무리 바빠도 시간 맞추느라 한 시간 전에 나가는데 택시 타는 습관이 있으면 10분, 20분을 그냥 보내면서 ‘까짓것 택시타고 가면 되지.’ 하고 생각이 바뀌는 거예요. 또 자가용 한번 타기 시작하면 이제는 차가 없으면 못 다니게 됩니다. 차가 없으면 아예 나갈 생각도 안 하고 다리가 없는 줄 알아요. 자가용이 몸에 붙으면 차가 자기 발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물론 차가 유용하고 시간이 절약되고 여러 가지 좋은 측면이 있지만 이것이 다 습관입니다.   
 
그래서 우리네 습관이라는 것이 한번 편리하고 좋은 곳으로 올라가면 내려가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분에 넘치는 이익이 생기면 그것을 쓰고 또 분에 넘치는 이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분에 넘치는 이익은 얻을 확률이 매우 적습니다. 첫째는 쉽게 얻지 못해 괴롭고 둘째는 설령 얻었다 하더라도 부작용이 많이 생겨서, 그 다음엔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고통이 더 커집니다.
 
‘이익을 바람이 분에 넘쳐 어리석은 마음이 요동치면’ 반드시 추악한 이익 때문에 자신을 훼손시킵니다. 이렇게 해서 몸과 마음을 다 피폐하게 만듭니다. 꼭 쾌락 때문이 아니어도 사람이 절망스러울 때도 술, 담배, 마약을 합니다. 돈이 아주 많아서 즐기기도 하지만 아주 극한 상황의 고통에 처할 때, 그 고통을 잊기 위해서도 외부의 자극에 쉽게 빠지는 거예요. 그래서 수행을 하기에는 천상도 좋지 않고, 지옥도 좋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마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을 도웁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 하셨느니라.’ 이 말은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이 이 세계에 가장 큰 부자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늘 부족하다고 헐떡거리게 되면 아주 빈곤한 사람이 되고 비록 가난하지만 만족할 줄 알면 부자입니다. 그래서 늘 뭔가가 부족하고 아주 뜻대로 안 이루어진다고 좌절하고 부정적으로 살면 ‘극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족하는 마음으로 검소하게 살면 ‘청빈’이라고 합니다. 깨끗한 가난입니다. 청빈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며 자기 삶에 만족을 하기 때문에 부자에 속합니다. 돈이 얼마나 있느냐가 아니라 자기 삶에 만족을 하면 그 사람이 바로 부자입니다. 그래서 분에 넘치는 이익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지금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법륜 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10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10 
억울함을 당해 밝히려고 하지 마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한 마음을 밝히게 되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삼으라 하셨느니라.」  
 
[원문]  
『억울함을 당하여 거듭 거듭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자꾸만 밝히고자 하면 상대와 나를 잊지 못하고   
상대와 나를 두게 되면 반드시 원한이 무성하게 자라느니라.   
억울함을 받아들여 능히 참고 용서하라.  
참고 용서하면 겸허하게 바뀌나니  
억울한 일이 어찌 나를 상하게 할 수 있으리.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받아들이는 것을 수행의 문으로 삼으라 하셨느니라.』 
十被抑不求申明 抑申明則怨恨滋生 
십피억불구신명 억신명즉원한자생  
是故聖人設化 , 以屈抑為行門  
시고성인설화 , 이굴억위행문   
 
내가 안 했는데 했다고 하는 억울함을 당했을 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억울함을 밝혀 해명하고 싶어 합니다. 저도 한때는 억울함을 밝히는 것이 세상의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거짓을 밝히는 것과 자기의 억울함을 밝히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내 억울함이라는 것은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주관적이기 쉽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가 있으면 나름대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각자 약간의 억울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말을 하면 아무리 잘 전달을 했다 해도 내가 말한 것과 상대가 들은 것이 조금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상대가 내가 말한 것과 다르게 자기가 들은 대로 이야기를 하면 나는 억울하지요. 내용은 같은데 의미 해석이 다르거나 아예 말 자체가 다르게 전달되면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하면서 억울함을 밝히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억울함을 자꾸 밝히려고 하면 상대는 본의 아니게 자신이 엉뚱하게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상대가 또 억울해서 자기가 들은 것이 정당하다고 밝히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다가 서로 원한이 쌓이게 됩니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말했지만 저 사람은 ‘저렇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을 하세요. 내가 억울한 것을 밝히는 것은 나한테는 좋지만 거꾸로 상대는 억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된다는 말입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어떤 일이 있을 때 아내가 억울하다고 너무 밝혀버리면 남편이 상처를 입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도 속속들이 너무 밝혀버리면 상대가 상처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국 나로 인해 상대가 나쁜 인간이 되어버리고 내가 해명한다고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상대에게 덮어씌우는 격이 되므로 다시 억울한 마음을 가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런 모순의 관계를 해결하고 양쪽이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하셨습니다.   
 
저는 예전에는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억울함을 당하면 밝히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 문제가 공부거리가 되었습니다. 저도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한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누명을 쓰고 어디로 끌려가서 두들겨 맞고 고문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나올 때는 여기서 일어난 일을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각서까지 썼습니다. 억울한 사람 데려다 고문한 그 사람들이 각서를 써도 용서를 할까 말까한데 결과적으로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이 고문을 당하고 각서를 썼습니다.
 
이것이 한 시대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도 그 시대에서는 그 사람들대로 잘한다고 했던 거예요. 전쟁터에 가면 군인이 잘한다고 상대편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만약 억울함이 한이 되면 누구 손해입니까? 한이 맺히면 결국 자기 손해입니다. 반대로 억울함을 통해 공부가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뭐든지 다 참고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권리가 필요하면 법적으로 대응을 하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10년, 20년 노력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대학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되었는데 부당하다고 재판을 해서 10년 만에 이겼습니다.
 
그런데 대학 측에서 채용을 안 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채용 안 해준 것이 억울하다고 재판을 해서 또 10년 만에 이겼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70이 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이 때문에 재임용 자격이 안 되고 20년간 재판하느라 논문을 한 편도 못 써서 또 재임용이 안 됐습니다. 우리 사회에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핍박한다고 억울함을 밝히는 과정에서 내가 희생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일을 하면 희생이 아니라 용기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일이 해결 되든 해결되지 않든 괴롭지 않습니다. 억울하니까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억울한 마음 없이 문제를 풀어나가야 원망이 쌓이지 않습니다. 
 
호랑이가 내 부모를 물어 죽였기 때문에 내가 호랑이를 죽인다면 살생입니다. 그러나 호랑이가 내 부모를 물어 죽였듯이 더 많은 사람을 물어 죽이려는 것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호랑이를 잡았다면 보살행이 됩니다. 내가 살생의 과보를 감수하고 중생을 구제했기 때문입니다. 살생의 과보를 면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과보를 기꺼이 받으면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차원이 좀 다르지요.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어떤 일을 밝힐 때도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고 하다가 더 복잡해지지 않습니까? 오히려 딱 받아들이면 확 뚫려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장애들, 여러 역경들을 이겨내는 것은 연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경계에 부딪치면서 이겨내는 힘이 있으면 앞으로 어떤 것이든 해낼 힘이 있지만 그냥 온실에서 자란 것처럼 아무 일이 없기만 바라면 그것은 오히려 인생 공부에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진을 하는 동안에 이런 저런 일이 자꾸 나타나면 어차피 받아야 할 일들이 닥쳐온다고 생각하세요. 어차피 받아야 할 과보라면 빨리 받는 것이 좋고 갚아야 할 빚이라면 빨리 갚는 것이 좋습니다. 미루어 놓았다가 나중에 갚아야 할 이유가 뭐 있겠어요. ‘어차피 받아야 할 인연 과보라면 일찍 받자.’ 이런 마음으로 임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첫째,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병고(病苦)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둘째,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제 잘난 체하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일어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셋째, 공부하는 데에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하셨느니라.  
 
넷째, 수행하는 데에 마(魔)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 데에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모든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다섯째, 일을 계획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풀리면 뜻이 경솔해지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많은 세월을 두고 일을 성취하라' 하셨느니라.  
 
여섯째,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한다면 의리를 상하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순결로써 사귐을 깊게 하라' 하셨느니라.  
 
일곱째,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진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 무리를 이루라' 하셨느니라.  
 
여덟째, 공덕을 베풀 때에는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게 되면 불순한 생각이 움튼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덕 베푼 것을 헌 신처럼 버리라' 하셨느니라.  
 
아홉째,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 하셨느니라.  
 
열째, 억울함을 당할지라도 굳이 변명하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변명하다 보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의 문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법정스님 보왕삼매론강의

https://www.youtube.com/watch?v=uJw_D57NeBA&t=133s 

사바세계, '참고 견디는 세상'의 의미

 

https://kydong77.tistory.com/21686

 

보왕삼매론 원문과 해설

http://kr.buddhism.org/%EB%B3%B4%EC%99%95%EC%82%BC%EB%A7%A4%EB%A1%A0-%EC%9B%90%EB%AC%B8%EA%B3%BC-%ED%95%B4%EC%84%A4/ 보왕삼매론 원문과 해설 – 디지털 불교 보왕삼매론 원문과 해설 자료1. 『寶王三昧念佛直指』 十大碍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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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보왕삼매론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하셨느니라.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하셨느니라.

수행하는데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서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되나니 ,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하셨느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 하라」하셨느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서 원림을 삼으라」하셨느니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덕을 베푸는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하셨느니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적은 이익으로서 부자가 되라」하셨느니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막히는 데서 도리어 통하는 것이요,
통함을 구하는 것이 도리어 막히는 것이니,
이래서 부처님께서는 저 장애 가운데서 보리도를 얻으셨느니라.

요즘 세상에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만일 먼저 역경에서 견디어 보지 못하면 장애에 부딪칠 때 능히 이겨내지 못해서 법왕의 큰 보배를 잃어버리게 되나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blog.naver.com/ecogis1/120059678816

 

나에게 온 새로운 보왕삼매경

보왕 삼매경(寶王三昧經) 첫째,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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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fungsoo.tistory.com/8550841

 

도고마성(道高魔盛)

도고마성(道高魔盛)이란 말은 수행이 깊어갈수록 마의 방해가 심해진다는 말입니다. 수행자의 수행력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마구니의 방해가 커집니다. 그러므로, 수행자의 수행이 깊어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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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아제(揭諦揭諦) : 가자 가자.

바라아제(波羅揭諦) : 피안으로 가자.

바라승아제(波羅僧揭諦) : 피안으로 완전히 가자.

모지(菩提) : 깨달음에

사바하(娑婆訶) : 뿌리를 내려라.

 

이 반야바라밀다주는 산스크리트어로 외우는게 좋습니다.

그게 원어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산스크리트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토말 :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 스와하 <=== 억양을 부드럽게 했을 때

한국말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영 어 :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해 석 :

가라. 가라.

피안으로 건너가라.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가라.

깨달음에 뿌리를 내려라.

 

https://www.youtube.com/watch?v=2B3Yb7AmTUg

 

 

ko.wikipedia.org/wiki/%EC%9C%84%ED%8C%8C%EC%82%AC%EB%82%98

 

위파사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파사나(위빠사나, 위빠싸나, Vipassanā, विपश्यना, 觀, Vipaśyanā) 또는 관(觀)은 불교의 명상법이다. 동국대학교 한글대장경 사이트에서는 비파사나(毘

ko.wikipedia.org

 

 

www.youtube.com/watch?v=Rm7l05iHDss&list=PL7qq979gQcK2_rqY3wnZMxgVTzt8WVgNV&index=17

 

 

www.youtube.com/watch?v=JO9ENsLoPQI&list=PL7qq979gQcK2_rqY3wnZMxgVTzt8WVgNV&index=18

 

 

www.youtube.com/watch?v=KOE9-aZPCAA&list=PL7qq979gQcK2_rqY3wnZMxgVTzt8WVgNV&index=19

 

 

www.youtube.com/watch?v=xwf-iTRRKD8&list=PL7qq979gQcK2_rqY3wnZMxgVTzt8WVgNV&index=20

 

 

www.youtube.com/watch?v=2lJwh0n_qEI&list=PL7qq979gQcK2_rqY3wnZMxgVTzt8WVgNV&index=21

 

 

www.youtube.com/watch?v=Y7XccNB31Os&list=PL7qq979gQcK2_rqY3wnZMxgVTzt8WVgNV&index=22

 

 

www.youtube.com/watch?v=oRe3bYGBnrM&list=PL7qq979gQcK2_rqY3wnZMxgVTzt8WVgNV&index=23

 

 

www.youtube.com/watch?v=OapOzygiZNI&list=PL7qq979gQcK2_rqY3wnZMxgVTzt8WVgNV&index=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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