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옥 당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서 "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한다"면서 "모처럼 성사된 귀중하고 의미 있는 자리를 어느 한쪽의 정치적 목표가 달성되지 않았다고 해서 폄훼하고 평가 절하해서야 더 나은 다음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거부한 민주당의 1인당 25만 원 민생회복지원금에 대해 "과학적 근거나 사회적 합의 없이 단순히 정치적 이유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정부로선 무책임한 일"이라고 엄호했다. 유상범 의원도 SBS라디오에서 "굉장히 정치적으로 쟁점화되고 정쟁으로 활용되는 의제들이 많다"며 "자기가 총선에서 승리한 거대야당의 대표라는 존재감을 보이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화양구곡이 그것인데, 충북 영동 월류봉 아래에도 그의 서당터였었다고 유허비를 세웠다. 천하절경이라는 말씀.
유학에는 사후 세계에 대한 이상향으로 신선들이 산다는 명산대천을 꼽았다.
경치좋은 곳은 유학자들의 이상향이었고 이이(李珥) 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는연시조로 모두 10수로 되어 있다. 그가 해주 수양산 밑 고산면에 은거했을 때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서 그 곳 경치를 관암(冠巖)·화암(花巖) 등 9곡으로 나누어 읊은 것이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 효종~숙종 대 문신이이자 학자로서 김장생·김집의 제자이며, 주희와 이이의 학문을 모범으로 삼았다. 효종 대 중국 청나라에 대한 복수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북벌에 동참하였고, 현종 대 화양동을 비롯한 고향에 은거하며 존주대의의 확립에 힘썼다. 숙종 대 초반 예송의 책임을 지고 유배 생활을 겪은 뒤, 경신환국 이후 다시 출사하여 조선중화주의의 실현에 앞장섰다. 그러나 원자 정호를 반대한 이유로 기사환국 때 사사되었다.
가계 및 인적 사항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 우재(尤齋) · 문정(文正)이다. 아버지는 강릉참봉(康陵參奉)을 지낸 송갑조(宋甲祚), 어머니 선산곽씨(善山郭氏)는임진왜란때조헌(趙憲)과 함께 금산에서 전사한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1607년(선조 40) 외가인 충청도 옥천 구룡촌(九龍村)에서 태어났다.
수학 과정
1613년(광해군 5) 곽지인(郭志仁)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듬해부터 3년간 회덕(懷德) 송촌(宋村)송이창(宋爾昌)의 집에 머물며 그 아들송준길(宋浚吉)과 함께 『소학(小學)』과 『가례(家禮)』 등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1617년(광해군 9)인목대비주1에게배사(拜謝)주2한 일로금고(禁錮)주3되어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을 배우며 주희(朱熹)와이이(李珥)의 학문을 모범으로 삼았다. 1625년(인조 3)이색(李穡)의 후손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결혼하였고, 1627년(인조 5)정묘호란때 맏형 송시희(宋時熹)와 자형(姊兄) 윤염(尹爓)을 잃었다.
1630년(인조 8) 연산(連山)의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부자에게종유주4하며 본격적인 학문의 길에 들어선 뒤, 1632년(인조 10) 회덕으로 이사하여 송준길과 함께강학주5에 전념하였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서이이의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에 근거하여 성리학적 우주론을 해명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로 장원을 차지하였다.
1636년(인조 14)인조의 둘째 아들봉림대군주6의 사부(師傅)가 되어 『주역(周易)』과 『서경(書經)』을 가르쳤다.병자호란이 일어나자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였다.삼전도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물러나 은거하며 평생토록산림(山林)으로 자처하였다.
정치사상
송시열은 주나라의 예악문물(禮樂文物)로 상징되는 유교 문명의 계승[존주(尊周)] 및 송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 사상의 수호[위주(衛朱)]를 평생의 과업으로 자임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이이의 성리설(性理說), 김장생의 예설(禮說),김상헌(金尙憲)의 척화론(斥和論) 등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이지만, 금나라의 침략에 직면했던 남송 시기 주희의 학문에 기반하여 1644년 이후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한 동아시아 질서의 대변동 속에서 조선 왕조의 유교적 정체성을 재확립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그 시대적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양란 후유증의 극복이라는 과제에 직면하였던 17세기 후반 조선의 상황 속에서, 송시열의 정치사상은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의 유교적 인륜 질서를 근간으로 삼아 조선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는 내수(內修)의 이념과, 이적(夷狄)인 청나라의 침략으로 말미암은 남한산성의 치욕을 복수하고 붕괴된 중화(中華) 질서를 회복하려는 외양(外攘)의 염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의 내수외양론은 유교적 화이론(華夷論)에 이론적 토대를 두고 있었다. 중화를 높이고[존중화(尊中華)] 이적을 배척하는[양이적(攘夷狄)] 화이분별론은 중국 고대부터 존재해 왔는데, 중화와 이적을 구분하는 지역 · 혈통 · 문화 등 기준 가운데 후천적 · 가변적 요소인 문화를 가장 중시하였음이 유교적 화이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다. 이때 문화란 예의(禮義)와 인륜(人倫)을 핵심으로 하는 유교 문명을 의미하였다.
송시열은 소중화(小中華)로 자부해 온 조선 왕조가 이적이 세운 청나라에 사대하게 된 병자호란 이후의 상황을 개탄하며, 천리(天理)의 실현이라는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청에 대한복수설치(復讎雪恥)주29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금나라의 침략을 겪었던 남송대 주희의 학문을 새롭게 해석하며 17세기 조선 사상계의 전범으로 삼고자 하였다.
효종의 죽음과남명(南明)주30의 멸망으로 중원 회복의 가능성이 사라진 현종 대에 들어서는 문화적 화이론에 입각하여 주나라로 상징되는 유교 문명의 부흥을 자신의 책무로 자임하였다. 특히 조선 왕조의 정체성을 유학의 의리론적 전통 위에 수립하려는 새로운 역사의식으로 표출되었다. 은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킨 기자(箕子)에 대한 존숭과 원나라에 신복(臣服)했던 고려 말의 역사에 대한 비판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태조비 신덕왕후의 부묘 및단종과사육신추숭을 통하여태종과세조가 부자 및 군신 의리를 저버렸던 도덕적 과오를 바로잡고 조선 왕조의 의리론적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왕조의 차원을 넘어 유교 문명의 계승이라는 문제의식을 담은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으로 확대되었다.임진왜란때 원군을 파병하여 소중화를 지켜준만력제(萬曆帝)주31와 나라가 망하자 자결을 선택한숭정제주32의 의리를 추모하며, 북벌을 통해 화이분별의 의리를 실천하고자 했던 효종을 그 계승자로 설정한 유교 문명의 새로운 계보를 제시하였다.
이처럼 명 멸망 이후 조선이 중화의 적통을 계승하였다는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의 이념은 명 멸망 60주년인 1704년(숙종 30)에 이르러 제자권상하(權尙夏)가 화양동에 건립한 만력제와 숭정제의 사당만동묘(萬東廟)를 통해 상징화되었다. 또한 같은 해숙종이 창덕궁 북원(北苑)에대보단(大報壇)을 건립하여 만력제에 대한 제사를 거행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국가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송시열의 조선중화주의는 그간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매몰된 관념적 · 비주체적 사대주의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명대의 정치와 문화 전반에 대하여 부정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황제 중심의 전제정치와 환관의 발호로 집약되는 명의 정치제도를 비판적으로 인식하였을 뿐 아니라,양명학(陽明學)이 주류를 이루던 명의 사상 역시 배척하였다.
아울러 “나는 평생 명나라의 글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단언하며 16세기 후반 이후 조선에 풍미하던 명의 문풍을 배격하고, 명 학자들의 예학 또한 주자의 본뜻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혹평하였다. 요컨대, 송시열의 중화주의는 혈통(한족) 또는 왕조(명나라)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아니라, 예의를 핵심으로 하는 유교적 문화 가치에 대한 존숭 및 계승 의식을 의미하였다.
학술과 사상
송시열의 학문은 송대 신유학(新儒學)을 집대성한 주희에 대한 절대적 존신(尊信)에 기반하였다. 천리의 보편성과 인간의 도덕적 자각을 전제로 의리(義理)과 정통(正統)의 가치를 강조하였던 주희의 학문과 행적을 통하여, 양란 직후 조선 사회가 직면한 혼란을 극복할 전범(典範)을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특히 요순삼대(堯舜三代) 이후 유학의 종지(宗旨)가 공자(孔子) · 맹자(孟子) 이후 송대 도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는 주희의 도통론(道統論)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숙종 대 문묘 개혁에서 볼 수 있듯이 한 · 당 유학자들에 대한 배척으로 드러나는 한편, 주희를 비롯한 송대 학자들이 남긴 방대한 저술의 핵심을 요약하고 상호모순된 언설을 교감 · 정리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물로는 『주자대전(朱子大全)』 가운데 의심스럽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을 뽑아 해설을 덧붙인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이정전서(二程全書)』의 내용을 주제별로 분류한 『정서분류(程書分類)』, 주희 문인들이 기록한 『주자어류(朱子語類)』의 내용을 교감하여 재편집한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송 이방자(李方子)의 『주자연보(朱子年譜)』와 명 대선(戴銑)의 『주자실기(朱子實紀)』를 통합하여 정리한 『기보통편(紀譜通編)』,이황(李滉)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정경세(鄭經世)의 『주문작해(朱文酌海)』를 합치고 보완한 『절작통편(節酌通編)』, 『논어』와 『맹자』에 대한 주희의 초기 견해를 조목별로 정리한 『논맹혹문정의통고(論孟或問精義通考)』 등이 있다.
한편, 송시열은 주자 이후 조선의 도학 전통을 정리하며, 고려 말 절의의 상징인정몽주(鄭夢周)와 유교적 이상국가를 수립하려 했던조광조(趙光祖)를 거쳐 이이와 성혼(成渾) 그리고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도통론을 제시하였다.
또한 이이 · 성혼을 비롯하여정철(鄭澈)과조헌(趙憲) 등 16세기 후반 서인의 결집을 주도한 주요 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하며, 선조 대 동서분당(東西分黨) ·기축옥사(己丑獄事) · 임진왜란 당시 그들의 처신이 정당하였음을 옹호하였다. 이는 이황을 정점으로 삼아 학문적 정체성을 견고하게 다져오며 일원적 도통의식을 형성해 온남인과 비교하여, 17세기 전반까지도 명확하지 못했던 서인의 학문 계보를 주자학적 도통관에 입각하여 정비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이의 입산(入山) 행적을 거론하며 그의 이기설(理氣說)을 가리켜 불교와육상산(陸象山)주33의 영향을 받은 이단(異端)이라 규정한 남인들과 여러 차례 충돌하였다. 또한 주희의 경서 주석을 따르지 않았던윤휴를사문난적(斯文亂賊)주34이라 지목하고, 윤휴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보인 친구윤선거(尹宣擧)마저 주자학의 배신자로 비난한 일은 숙종 연간 노소 분기의 중요한 원인을 이루었다.
관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서인(西人)의 영수로 추대되었다.이언적, 이황, 송시열, 박세채, 김집과 함께문묘종사와종묘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하나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의 업적은성리학에서의이기일원론의 학문을 밝힌것으로 잘알려져있다.[3]
율곡 이이는1536년강원도강릉부죽헌동에 있는 외가인오죽헌(烏竹軒)에서, 덕수 이씨 통덕랑사헌부감찰이원수와 평산 신씨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죽헌 별채에서 태어났는데, 신사임당이 태기를 느끼게 된 계기가 흑룡이 바다에서 하늘로 오르는 꿈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그가 태어난 방은 몽룡실(夢龍室)이라 일렀고, 아이 때의 이름은 '현룡'(見龍)이라 지었다가 뒤에 이(珥)로 바꾸었다. 이후경기도파주에 자리한 본가로 와서 생활하였다.
고산구곡도는 이이가 정계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던 황해도 해주 고산면에 있는 석담구곡(石潭九曲)의 경치를 읊은「고산구곡가」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이이가 1569년(선조 2) 교리직(校理職)을 그만두고 해주 야두촌(野頭村)으로 물러갔을 때 경향 각지에서 그의 학문과 덕행을 흠모하던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이듬해 이이는 문인들과 고산의 석담을 돌며 구곡의 이름을 짓고 이 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1575년(선조 8) 황해도 관찰사로 있다가 다시 석담으로 돌아와 주희(朱熹)가 만년에 은거하면서 경영한 무이정사(武夷精舍)와 무이구곡(武夷九曲)의 자연을 읊은 「무이도가(武夷櫂歌)」를 본떠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세웠고, 1578년에는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월류봉 둘레길은 포토존이 있는 데크에서 반야사까지 이르는 총 8.4km의 구간으로, 1코스 여울소리길, 2코스 산내소리길, 3코스 풍경소리길로 구성되어 있다. 데크길을 조성해 무장애 탐방이 가능한 구간이 많아 남녀노소 가볍게 산책하듯 걸을 수 있는 아주 편한 둘레길이다.
1코스 "여울소리길"은 다섯 봉우리가 이루는 산세와 절벽 끝에 있는 정자 월류정, 그 아래 유유히 흐르는 조강천을 보며 시작되어 석천을 지나 완정교에 이른다.
2코스 "산새소리길"은 농촌마을 풍경과 물 흐르는 소리를 감상하며 걷는 길로 완정리에서 백화마을을 지나 우매리로 향하는 길이다.
3코스 "풍경소리길"은 우매리에서 시작하여 징검다리를 건너 피톤치드가 많은 편백나무 숲과 백화산 반야사를 걷는 길이다.
3코스의 종착지인 반야사는
영험한 호랑이 형상으로도 유명하며, 사찰안에 보물로 지정된 반야사 삼층석탑과 수령 500년이 넘는 백일홍나무가 있어 둘러볼 만하다.
그리고 대웅전 뒷쪽의 언덕 돌계단을 오르면 문수전이 벼랑끝에 자리하고 있고 구수천이 구불구불 돌아 흐르는 감입천의 전형적 모습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백화산의 아름다운 산세를 바라보는 뷰가 끝내주는 백미의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