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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왕대 이서국 사람들이 침략하자 미추왕능에서 죽엽군이 나와 물리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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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섭의 신삼국유사] 48. 미추왕과 죽엽군(竹葉軍)
제13대 미추왕은 김알지의 7세손으로 성덕(聖德)이 있었으므로 첨해왕의 자리를 물려받아 왕위에 올라, 23년간 재위하였다. 미추왕에게는 신비한 이야기가 몇 있다.제14대 유례왕 때에 이서국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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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미추왕은 김알지의 7세손으로 성덕(聖德)이 있었으므로 첨해왕의 자리를 물려받아 왕위에 올라, 23년간 재위하였다. 미추왕에게는 신비한 이야기가 몇 가지 있다.
제14대 유례왕 때에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다. 신라는 군병을 동원하여 막으려 했으나, 오랫동안 대적할 힘이 부족했다. 그 때 이상한 군사가 나타나 신라의 병사와 힘을 합쳐 적을 멸하였는데 모두 댓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적의 잔병이 물러간 후에 그 이상한 병사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대나무의 잎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 있음을 보고 그제야 음덕으로 도와주었음을 알았다. 이로부터 이 능을 죽현능(竹現陵)이라 하였다.
미추왕의 성은 김씨(金氏)다. 미조, 미고, 미소라고도 한다. 갈문왕(葛文王) 구도(仇道)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 박씨이고, 왕비는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의 딸 광명부인(光明夫人)이다. 선왕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이 아들 없이 죽자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김씨 왕계의 시조가 되었다.
제37대 혜공왕 14년(779년)4월,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김유신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장군과 같았다. 갑주를 입고 무기를 든 40여명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서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조금후에 능 안에서 우는 통곡을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호소하는 말이 다음과 같았다.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습니다. 나라를 진호(鎭護)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다른 곳으로 멀리 가서 다시는 이 나라를 위하여 힘쓰지 않으렵니다. 임금님께서는 허락하여 주십시오.”
미추왕이 대답하기를, “공과 내가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오. 아무 말 말고 그전처럼 힘써 주시오.”
김유신이 세 번을 청하였으나 왕은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 바람은 이내 돌아갔다. 혜공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대신 김경신을 보내어 김공의 능에 가서 사죄하고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취선사에 내리어 명복을 빌게 하였다. 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인즉, 나라사람들이 그 덕을 기리며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서열을 오릉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불렀다.
출처 : 경북일보(http://www.kyongbuk.co.kr)
혜공왕대 유신공이 원통함을 미추왕에게 호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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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지나 제36대 혜공왕(惠恭王)대인 대력(大曆) 14년 기미(己未) 4월에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유신공(庾信公)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모습이 장군과 같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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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오디세이] 32. 김유신이 미추왕릉을 찾아간 까닭은?
779년(혜공왕 15) 4월 초여름, 송화산 김유신 장군릉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바람 속에 김유신 장군이 얼핏 보였다. 준마에 오른 장군과 무장한 군사 40명이 회오리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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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왕에게 호국의 상징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도 추가했다.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 군사들이 금성을 공격해왔다. 전세가 불리했는데 귀에 대나무를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적군을 격파했다. 군사들은 홀연히 사라졌는데 미추왕릉 앞에 대나무 잎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선왕의 공덕인 줄 알고 그 능을 죽현릉이라 불렀다.
김유신이 미추왕을 찾아간 이유가 명확해졌다. 김씨가 왕위에 있는 동안 미추왕은 신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존숭받는 선조왕이었다. 김유신의 미추왕릉 불시방문은 홀대 받고 있는 김유신계의 집단 청원이었던 것이다.
김유신 또한 미추왕과 함께 신라의 지키는 호국의 수호신이다. 삼국을 통일의 주역이고 신문왕 때는 이견대에서 문무왕과 함께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신문왕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출처 : 경북일보(http://www.kyongbu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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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릉원 천마총, 천년의 역사/ 천마도& 금관
https://www.youtube.com/watch?v=Fbrbr4muNIo *대마도도 우리땅인디..... 사전 설명 https://namu.wiki/w/%EA%B2%BD%EC%A3%BC%20%EC%B2%9C%EB%A7%88%EC%B4%9D%20%EC%9E%A5%EB%8B%88%20%EC%B2%9C%EB%A7%88%EB%8F%84 https://www.youtube.com/watch?v=hsEpAzLtNu0
kydong77.tistory.com
https://namu.wiki/w/%EC%B2%9C%EB%A7%88%EC%B4%9D
천마총
天馬冢 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9 ( 황남동 )에 위치한 고분 이다. 과거에는 '경주 155호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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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넷
천마총(天馬塚)은 대형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나무 널[木棺]과 부장품을 넣는 수장궤(收藏櫃)를 큰 나무 덧널[木槨] 안에 넣고 돌을 쌓아 덧널을 덮은 후, 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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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은 대릉원의 무덤 중 가장 늦은 시기인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무덤의 주인은 소지 마립간(炤知麻立干, 재위 479~500)이나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으로 추정되는데, 보통은 지증왕의 무덤으로 본다.
[참고]
대릉원 가운데 무덤의 인물이 밝혀진 것은 미추왕과 지증왕뿐이다.
혼유석(魂遊石)은 영혼이 놀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설치한 돌이다. 제의(祭儀)를 올릴 때 제물(祭物)을 놓기 위해 만든 돌상은 조선 선조 이전까지는 석상(石床)으로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왕릉에서 지내는 불교식 제의에서 사용되던 기물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왕릉에서 직접 제의를 하지 않고 정자각(丁字閣)에서 유교식 제례를 올리게 되자 용도가 없어진 석상을 조선후기에 속칭을 따라 혼유석이라 하였다.
https://dh.aks.ac.kr/sillokwiki/index.php/%ED%98%BC%EC%9C%A0%EC%84%9D(%E9%AD%82%E9%81%8A%E7%9F%B3)
혼유석(魂遊石) - sillokwiki
능원(陵園)이나 묘(墓)의 봉분 앞에 설치된 직사각형의 돌로 된 상석. 개설 혼유석(魂遊石)은 영혼이 놀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설치한 돌이다. 제의(祭儀)를 올릴 때 제물(祭物)을 놓기 위해 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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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910
혼유석(魂遊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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