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고대 종교 창시자와 마찬가지로, 석가모니가 태어난 해가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딱 잘라서 말할 수가 없다. 여러 경전들이 공통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의 사망 당시 나이가 80세였다는 것이다.
남방불교에서는 기원전 624-기원전 544년, 북방불교에서는 기원전 1026-기원전 949년으로 보아 그 차이가 대단히 크다.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기원전 560-기원전 480년 / 기원전 460- 기원전 380년 설이 있다.[33] 와타나베 쇼코는 불타 석가모니에서 기원전 560년 무렵이라는 데에 세계 학자들의 의견이 유력하게 모인다고 설명했다. 이때 딱 '기원전 560년'이 아니라 '기원전 560년무렵'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데, 기원전 560년을 전후로 몇 년 정도 오차가 있을 수 있지만 대충 그 정도라는 뜻이다. 한스 볼프강 슈만(Hans Wolfgang Schumann) 같은 서양의 불교학자들은 석가모니의 생몰년을 대체로 기원전 563년 - 기원전 483년이라고 보지만, 이러한 추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주류 학설과는 100년 넘게 다른 연도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석가모니의 탄생 날짜를 한중일 삼국 똑같이 4월 초파일(음력 4월 8일)로 보고 기념하는데, 인도 달력으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와타나베 쇼코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어머니의 태 안에 들어간 시기, 즉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 부인이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던 것이 '베샤카 달의 보름날'[34]이라고 한다. 겨울이 지나고 봄빛이 무르녹을 때쯤으로 4월 그믐께쯤 되는데, 이로부터 열 달 뒤에 석가모니가 태어났다고 한다면 양력으로 3월 초순이다.
내소사 대웅보전 단청은 사람의 힘으로도 새의 힘으로도 호랑이희 힘으로도 칠하다가 칠하다가 아무래도 힘이 모자라 다 못 칠하고 그대로 남겨놓은 것이다. 내벽 서쪽의 맨 위쯤 앉아 참선하고 있는 선사, 선사 옆 아무것도 칠하지 못하고 너무나 휑하니 비어둔 미완성의 공백을 가 보아라. 그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대웅보전을 지어 놓고 마지막으로 단청사를 찾고 있을 때, 어떤 해어스럼 제 성명도 모르는 한 나그네가 서로부터 와서 이 단청을 맡아 겉을 다 칠하고 보전 안으로 들어갔는데, 문 고리를 안으로 단단히 걸어 잠그며 말했었다. “내가 다 칠해 끝내고 나올 때까지 누구도 절대로 들여다보지 마라.” 그런데 일에 폐는 속에서나 절간에서나 언제나 방정맞은 사람이 끼치는 것이라, 어느 방정맞은 중 하나가 그만 못 참아 어느 때 슬그머니 다가가서 뚫어진 창구멍 사이로 그 속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나그네는 안 보이고 이쁜 새 한 마리가 천정을 파닥거리고 날아다니면서 부리에 문 붓으로 제몸에서 나는 물감을 묻혀 곱게 곱게 단청해 나가고 있었는데, 들여다 보는 사람 기척에 “아앙!” 소리치며 떨어져 내려 마루 바닥에 납작 사지를 뻗고 늘어지는 걸 보니, 그건 커어다란 한 마리 불호랑이었다. “대호 스님! 대호 스님! 어서 일어나시겨라우!” 중들은 이 곳 사투리로 그 호랑이를 동문 대우를 해서 불러댔지만 영 그만이어서, 할 수 없이 그럼 내생에나 소생하라고 이 절 이름을 내소사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 단청하다가 미처 다 못한 그 빈 공백을 향해 벌써 여러 백년의 아침과 저녁마다 절하고 또 절하고 내려오고만 있는 것이다
『능가경(楞伽經)』은 인도 유가행파-여래장 계통 경전이다. 붓다가 스스로 깨달은 지혜(svapratyātmāryajñāna)를 해설하며 모든 분별 세계가 내 마음일 뿐이라는 유심(唯心) 사상, 8식설과 알라야식으로 대표되는 유가행파의 심식설, 그리고 여래장(如來藏) 사상과 다양한 수행론 등이 설해지고 있다.
간경도감에서 간행하였다. 10책. 상1이 1·2, 상2가 1·2·3, 하1·2·3이 각각 1·2로 분권(分卷)되어 있다.
『원각경』은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의 약칭인데, 당나라 종밀(宗密)의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鈔)』에 세조가 토를 달고, 신미(信眉)·효령대군(孝寧大君)·한계희(韓繼禧) 등이 번역한 것이다.
책머리에 간경도감 도제조 황수신(黃守身)의 전(箋)과 간행에 관여한 황수신·박원형(朴元亨)·김수온(金守溫) 등 관원의 이름이 열기되어 있다.
현재 원간본은 권하3의 1·2(李崇寧家 소장) 등이 전한다. 원간본의 책판으로 1472년(성종 3) 인출된 책도 있다.
원간본과 인면(印面)·지질 등이 같지만, 권두의 내제(內題) 다음에 있는 ‘御定口訣 慧覺尊者臣信眉 孝寧大君臣補 仁順府尹臣韓繼禧等譯(어정구결 혜각존자신신미 호령대군신보 인순부윤신한계희등역)’의 2행이 빈칸으로 바뀌었다. 간경도감의 폐쇄 등 인출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또, 책끝에 활자로 된 김수온의 발문이 있다.
중간본은 1575년(선조 8) 전라도 안심사(安心寺)에서 원간본을 복각한 책이다. 이 책판은 6·25 때까지 보존되어 있었는데, 1932년한용운(韓龍雲)이 보수하여 인출하였다.
『금강경언해』도 함께 인출하였는데, 약간의 보판(補板)이 있으므로 자료로 다룰 경우 주의를 요한다. 1932년 인출본을 저본으로 한 영인본이 1977년대제각(大提閣)에서 간행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이 책의 판식과 번역 양식은 모두 목판본 『능엄경언해』와 같다. 그러나 정서법에 있어서는 ㆆ과 각자병서가 폐기된 점이 특이하다.
『능엄경언해』·『법화경언해』에서 ‘ᄒᆞᇙ가·ᄒᆞᆯ까’,, 『금강경언해』에서 ‘ᄒᆞᆯ까’로 표기되던 어형이 ‘ᄒᆞᆯ가로만 표기된 것이다. 어두의 각자병서, 예컨대 ‘쓰다·ᅘᅧ다’도 ‘스다·혀다’로 표기되었다. 이 책에 처음으로 나타난 이러한 표기는 성종 때의 『두시언해』 등에 계속된다.
『원각경언해』에서 언해부분만을 제외하고 구결부분만으로 된 책이 있다. 을유자(乙酉字)로 된 『원각경구결(圓覺經口訣)』로 분권은 언해본과 같고, 모두 5책이다. 현재 원간본과 이를 복각한 중간본이 모두 전한다.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세조 7년(1461년) 불경을 한글로 풀어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세조 11년(1465년)에 목판에 새기고 닥종이에 찍어 낸 것이다. 현재는 서(序), 권 상1-1, 권 상2-1∼3, 권 하1-1∼2, 권 하2-1∼2가 전하고 있으며, 크기는 세로 32.7㎝, 가로 23.7㎝이다. 인쇄상태가 정교한 것으로 보아 목판에 새기고 나서 처음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책의 첫머리에는 판각에 관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고, ‘校正(교정)’의 도장이 찍혀있다. 책 끝에 모두 3차례에 걸쳐 잘못된 부분을 교정했다고 적고 있는데, 그만큼 본문의 내용에 정확도를 기했음을 알 수 있다.
간경도감에서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한 경전 중 원각경은 전하는 예가 드물기 때문에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으며, 특히 ‘校正(교정)’의 도장이 찍힌 초간본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아단문고 소장. 5권을 2책으로 묶어 간행한 것으로 크기는 권 상이 세로 27㎝, 가로 18.2㎝ 권 하가 세로 27.8㎝, 가로 18.2㎝이다. 간경도감<刊經都監 : 세조 7년(1461년)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간행한 책들과 같은 형식인데, 다만 본문을 한글로 풀지 않고 토만 달아 놓았다. 세조 11년(1465년)에 정란종의 글씨를 동활자(銅活字)로 만들어서 조합하여 원각경을 찍으려 했지만 억불 정책에 의한 영향으로 토만 달게 된 것이다.
경기도하남시광덕사소장. 『원각경(圓覺經)』으로 약칭되기도 하는 이 판본은 종밀(宗密)이 소초(疏鈔)한 것에 세조가 한글로 구결을 단 것을 1465년(세조 11년)에 을유자(乙酉字)로 인출한 것이다. 을유자는 1465년인 을유에 정난종(鄭蘭宗)의 글씨를 자본으로 주조한 글자이다. 간경도감 언해본을 저본으로 경문 및 주석의 한글 구결 부분만을 편집하여 을유자판으로 인출되었으므로 구결은 간경도감본 원각경언해와 일치한다. 이 을유자판 원각경은 주로 불경을 간행할 목적으로 주조된 활자로 인출되어 전래본이 많지 않고 초인본이라 인쇄 상태도 깨끗하여 귀한 판본에 속하므로 15세기 국어학 및 서지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국학 중앙 연구원장서각소장. '대방광불원각수다라요의경'은 줄여서 '원각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우리 나라 승려들의 교과 과목으로 채택되어 불교 수행의 길잡이 구실을 하는 경전이다.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 소장본은 1465년에 간경도감 국역본을 저본(底本)으로 경문 및 주석의 한글 구결 부분만을 편집하여 주자소에서 을유자(乙酉字)로 인출한 금속활자본으로 1책(序, 卷上一之一)의 결본(缺本)이다.
이 책은 1465년 원각사를 준공한 기념으로 세조의 명에 따라 정난종 서체를 자본으로 을유년에 활자를 주조하여 간행된 판본으로 ‘을유자본(乙酉字本)’이라 불린다. 이 활자는 '원각경' 등 주로 불경을 간행할 목적으로 주성(鑄成)되었던 까닭에 당시 유신들의 강한 반대로 사용되지 못하다가 갑진자(甲辰字) 주조 시 이를 녹여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 전래본이 희귀한 실정이며, 조선 시대 국어학 및 서지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부산광역시서구대성사소장. 대성사 소장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언해본은 1465년(세조 11년)에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언해본을 후대에 번각한 것이다. 이 책에는 간행 사실에 관한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간행 사항은 알 수 없으나, 간기가 있는 다른 판본들이 모두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되었다는 점과 이 책의 지질을 검토한 결과, 임진왜란을 전후한 조선 중기 무렵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보존 상태가 대체로 좋은 편이고, 간행된 지 비교적 오래된 판본으로 전해지는 동일 판본이 확인되지 않아 희소 가치가 있으며, 15세기 한글 연구에 중요한 산문자료(散文資料)의 하나로서 자료적 가치가 있는 문화재이다.
원명은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이다. 1권 12장. 당(唐)나라 영휘(永徽)연간에북인도 계빈국(罽賓國)의 승려 불타다라(佛陀多羅)가 한역하였다. 대승(大乘) ·원돈(圓頓)의 교리를 설한 것으로, 주로 관행(觀行)에 대한 설명인데, 문수(文洙) ·보현(普賢) ·미륵보살 등12보살이 불타와 1문1답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고려의 지눌(知訥)이 이 경을 중시하여요의경(了義經)이라 하여 퍼뜨리기 시작하여,조선 초에 함허(涵虛)가《원각경》 3권을 지으면서 한국 불교 전문강원(專門講院)에서의 승려의 교과과목으로 채택되었다. 《유마경(維摩經)》 《능엄경(楞嚴經)》과 함께선(禪)의 3경(經)이며, 이에 대한 주석서(註釋書)로는 당나라 종밀(宗密)의 《원각경소(圓覺經疏)》(6권), 《원각경초(鈔)》(20권) 《원각경대소(大小)》(12권) 등 9종이 있다. 현존 경판은1588년 청도군 운문사(雲門寺)에서판각한 경판이 보존되어 있고,1611년 하동 쌍계사(雙溪寺)판과1655년의 순천 선암사(仙巖寺) 판각의 경판이 보존되어 있다. (두산백과)
대보살마하살 십만인과 더불어 함께 하였으니,그 이름왈, 문수사리보살, 보현보살, 보안보살, 금강장보살, 미륵보살, 청정혜보살, 성덕자재보살, 변음보살, 정제업보살, 보각보살, 원각보살, 현선수보살등은 우두머리가 됨으로써 모든 권속과 더불어,모두 다 삼매에 들어 여래의 평등법회에 같이 머물렀다.
불타다라(佛陀多羅) 한역 중국 당(唐)나라 영휘(永徽) 연간 純爺 編 한역 참조 : 한글대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