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상도는
①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상(兜率來儀相),
② 룸비니 동산에 내려와서 탄생하는 상(毘藍降生相),
③ 사문에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상(四門遊觀相),
④ 성을 넘어가서 출가하는 상(踰城出家相),
⑤ 설산에서 수도하는 상(雪山修道相),
⑥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의 항복을 받는 상(樹下降魔相),
⑦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포교하는 상(鹿苑轉法相),
⑧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1531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
自燈明法燈明 自歸依 法歸依
https://www.youtube.com/watch?v=m1yoC0VzTEs
https://www.youtube.com/watch?v=ScT7DcBApMA
https://kydong77.tistory.com/22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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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22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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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kwank99/30020440609
[사상계](1961. 11)에 발표된 김동리의 단편 소설. 태평양전쟁에 학병으로 끌려나간 주인공 '나'가 학병에서 탈출하여 불교에 귀의한 사건이 작품 구성의 골격을 이루고 있지만, 주제와 관련된 무게 중심은 작품 중간에 삽입된 '등신불'에 얽힌 만적의 불교 설화에 실려 있다.
이 작품은 <무녀도>와 마찬가지로 토속적이고 종교적 색채가 배어 있는 전통적 서정주의 세계를 보여 준 김동리의 후기 작품 세계를 대표한다. 인간의 운명은 추구하는 서정성과 순수 문학의 옹호라는 김동리의 문학관이 이 작품 속에서 인간의 고뇌와 슬픔을 만적의 소신공양을 통해 종교적으로 승화되어 있다.
[출처] 김동리 : 소설 <등신불(等身佛)> |작성자 틀
https://www.youtube.com/watch?v=sJ69sW8rLGg
https://www.youtube.com/watch?v=BD6IHqSyuok
https://www.youtube.com/watch?v=rrHZfAyCHyY
자승스님 열반송(대한불교조계종 제공)
https://namu.wiki/w/%EC%84%9D%EA%B0%80%EB%AA%A8%EB%8B%88/%EC%9D%BC%EC%83%9D
1. 개요
2. 탄생 이전
3. 탄생
카필라[17]는 기원전 6세기 어느 때에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 부근 히말라야 기슭에 위치한 샤카족의 작은 나라였다. 싯다르타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18]와 마야 부인[19] 사이에서 태어났다. 숫타니파타에는 석가모니 부처를 가리켜 "감자왕(甘蔗王)의 후예"라고 언급하는데, 석가족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감자왕으로부터 니구라 - 구로 - 구구로 - 사자협 - 정반(숫도다나)에 이르는 부계로 이어지는 것으로 계보를 전하고 있다.
어머니 마야 부인은 상아가 여섯 개 달린 흰 코끼리[20]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선 임신했다.[21] 마야 부인은 당시 풍습에 따라 친정인 천비성(데바다하)으로 향했는데[22], 도중에 룸비니 동산[23][24]에서 탐스러운 무우수(無憂樹) 나뭇가지를 잡고선, 오른쪽 겨드랑이 밑에서 석가모니를 낳았다.[25]
싯다르타는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26]을 걸었는데 그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올랐다. 그리고는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외쳤다.[27] 하지만 마야 부인은 임신 중 무리해서 여행을 나간 게 원인이 되어 그 후유증으로 출산 7일 뒤[28]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후 이모 마하파자파티가 사별한 슈도다나와 결혼하여 어린 고타마를 돌보았다.
싯다르타가 태어나고 난 후에 히말라야 산정에서 수행하던 현자 아시타 선인이 신들이 서른이나 모여 기뻐하고 제석천이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신들은 "비할 데 없이 뛰어난 보배이신 저 보살께서 모든 사람의 이익과 평안을 위해 인간 세계에 태어나 석가족 마을 룸비니 동산에 나셨기로 우리가 이렇게 기뻐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아시타 선인은 곧 내려와 카필라 국에 있는 슈도다나 왕의 궁정으로 찾아가서 석가모니의 탄생을 축하했다.
4. 사문유관(四門遊觀)
4. 사문유관(四門遊觀)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 및 《불본행집경》에 실려 있는 이 일화는 싯다르타가 네 개의 성문에서 각기 인간의 생로병사를 목격하고 그의 일생 처음으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싯다르타의 나이 스물아홉 살 되던 때, 싯다르타는 궁밖으로 나가보고 싶어서 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하고 마차에 올라 마부 찬다카와 함께 궁을 나섰다.
첫날, 궁궐 동문으로 나간 싯다르타는 늙어 힘도 없는 노인을 발견했다.[45] 싯다르타가 목격한 노인의 모습을 수행본기경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머리는 희고 이는 빠졌으며 살갗은 느슨하고 얼굴은 주름지고 살도 없고 등은 앞으로 구부러졌으며, 뼈마디는 시들어서 굽고 눈물과 콧물과 침은 뒤섞여 흐르며 상기(上氣)가 되어 어깨로 숨을 쉬고 몸의 빛깔은 검으며, 머리와 손은 쓸데없이 흔들고 몸은 벌벌 떨며 오로(惡露)는 저절로 흐르는데 그 위에서 앉았다 누웠다 하였다.
너무도 추레한 노인의 모습을 본 태자는 옆에 있던 종에게 저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고, 종이 왕년에는 용맹하기로 유명한 전사였던 늙은이라고 대답하자 다시 "무엇을 늙음이라 하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종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대저 늙음이란 나이가 많아서 감관이 완숙하고 모양이 변하고 빛깔이 쇠하며 기운이 미미하고 힘이 다하며 음식은 소화가 안 되고 뼈마디는 끊어지려 하며, 앉고 일어남에는 사람이 필요하며, 눈은 멀고 귀머거리가 되며, 문득 돌아서면 곧 말을 잊어버리고 갑자기 슬퍼지며,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늙음이라 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노인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싯다르타는 "사람이 세상에 사는 데에 이런 늙음이란 근심이 있었구나. 어리석은 사람이야 탐내고 사랑하겠지마는 어찌 즐거워 할 수가 있겠느냐? 만물이 봄에 나서 가을과 겨울이면 시들고 마르며, 늙음이 번개처럼 닥쳐오거늘 몸에 만족하고 의지하겠느냐?"라고 탄식하고 돌아왔고, 동쪽 성문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숫도다나 왕은 나라 안에 명을 내려서 태자가 다니는 길에 노인들이나 슬프고 불편한 감정을 자아낼 만한 것은 모두 치우게 했다.
다시 남쪽 성문으로 나간 싯다르타는 이번에는 병든 사람을 보게 되었다.
몸은 파리하고 배는 크며 몸은 샛노랗게 되었으며 기침을 하고 구역질을 하며, 온갖 마디는 몹시 쑤시고 아홉 구멍에서는 썩은 물이 새며, 부정한 것이 저절로 흐르고 눈으로는 빛깔을 보지 못하며, 귀로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신음하면서 숨을 쉬며, 손발은 허공을 더듬으며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짖고 ‘아내야, 아들아’ 하며 슬퍼하고 그리워하는지라.
역시나 충격을 받은 싯다르타는 종에게 "저 사람은 왜 저러느냐"고 물었고, 종은 "이 마을 부자인데 병들어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싯다르타가 다시 "병들었다는 것이 어떤 것이더냐?"라고 묻자, 종은 대답했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 요소[四大]인 땅[地]ㆍ물[水]ㆍ불[火]ㆍ바람[風]이 있어서 하나의 요소에 101가지 병이 있으며, 차츰 서로가 모여서 404가지 병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데, 이 사람은 반드시 극도로 춥고 극도로 덥고 극도로 굶주리고 극도로 배부르고 극도로 마시고 극도로 목마르는 등, 때와 자리를 잃었고 눕고 일어나는 데 법도가 없기 때문에 이런 병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태자는 다시 충격을 받고 "나는 부귀한 곳에서 살고 세상에서 가장 값진 음식으로 입을 상쾌하게 하고 마음을 놓아 제멋대로 하며 다섯 가지 욕심에 빠져서 스스로 깨달을 수가 없으므로 역시 이런 병이 있을 터인데, 저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느냐?"라며 한탄하며 궁으로 돌아왔다. 부왕은 이번에도 태자가 유람하는 곳에 길을 평탄하게 닦아 놓고 더러운 것을 길 가까이에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태자는 이번에는 서쪽 성문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싯다르타는 상여가 성을 나가고 집안 사람들이 상여를 따라 가면서 울부짖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번에도 태자는 옆에 있던 종에게 "저건 무슨 일이냐?"라고 물었고, 종은 마을에서 잘생긴 청년이 사고로 사망해 지금은 죽은 사람이라 그의 가족들이 장례를 치르고 있다고 대답했고 다시 싯다르타가 죽음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종은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죽음이란 다함입니다. 정신이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네 가지 요소가 흩어지려 하면서 혼신(魂神)이 편안하지 못하며 바람 기운이 떠나가서 숨이 끊어지고 불기운이 스러져서 몸이 차가워지며, 바람이 먼저, 불이 다음으로, 그리고 혼령(魂靈)이 떠나갑니다. 신체는 뻣뻣해지고 다시는 느끼는 것이 없어지며 10여 일 동안이면 살이 무너지고 피가 흐르며 띵띵 부풀고 문드러져 냄새나며, 취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몸 속에 있던 벌레가 도리어 그 살을 뜯어먹으며, 힘줄과 맥은 문드러져 다하고 뼈마디는 흩어져서 해골은 제 자리를 달리하며 척추ㆍ옆구리ㆍ어깨ㆍ팔ㆍ넓적다리ㆍ정강이와 발이며 손발가락은 저마다 제 자리에서 떨어지고 날짐승ㆍ길짐승은 다투어 와서 뜯어먹으며, 하늘과 용ㆍ귀신ㆍ제왕ㆍ인민 등,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간에 이 환난만은 멸한 이가 없습니다.
5. 성을 넘어 출가하다
6. 마왕의 꾐을 물리치다
7. 초전법륜(初轉法輪)
무엇에도 더럽혀짐 없는 사람.
모든 것에서 떨어져나와
애욕을 끊고 해탈한 사람.
스스로 체득했으니
누구를 가리켜 스승이라 하랴.
나에게는 스승 없고, 같은 이 없으며
이 세상에 비길 이 없도다.
나는 곧 성자요 최고의 스승,
나 홀로 정각(正覺) 이루어 고요롭도다.
이제 법을 설하려 카시(迦尸)[108]로 가거니
어둠의 세상에 감로(甘露)[109]의 북을 울리리라.
8. 열반
조선 전기에 그려진 쌍림열반도. 열반에 드는 장면에 이르러 슬퍼하는 제자들과, 석가모니의 다비 이후 사리를 거두는 사부대중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남송 시대 화가 목신충의 불열반도(仏涅槃図).[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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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지족은 자주 모임을 개최하고 그 모임에 많은 사람이 모인다는데, 정말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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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지족은 모일 때도 의기투합하여 모이고, 헤어질 때도 뜻을 모으고, 또한 일족의 행사도 뜻을 모아 거행한다는데, 정말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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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지족은 정해지지 않는 것은 새로 정하거나, 반대로 이미 정해진 것은 깨뜨리지 않고, 과거에 정해진 일족의 옛 법대로 행동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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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지족은 나이 든 이를 공경하고 존중하며 숭배하고 공양하며, 나이든 어른의 말을 경청하고자 한다는데, 정말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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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지족은 양가의 부인이나 여자를 폭력으로 붙잡아 가거나 구속하거나 가두지 않는다는데, 정말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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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지족은 그들의 성(城) 안팎에 있는 밧지족의 성지를 경애하고, 존중하고 숭배하고 공양하며 아끼고 봉납하는 제식(祭式)을 폐하지 않는다는데, 정말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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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지족은 존경받을 만한 아라한(阿羅漢)에 대하여 법에 적합한 대우를 해드리고자 능히 마음을 기울이고, 또한 아직 자기 나라에 오지 않은 존경받을 만한 이가 있다면, 그가 자기 나라를 찾아오도록 노력하며, 그리고 존경받을 만한 이들이 찾아오면 마음 편히 머물도록 항상 기원하고 있다는데, 정말 그런가.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가 묻는 일곱 가지 밧지족의 풍속에 대해서 모두 그렇다고 대답했고, 석가모니는 그때마다 "그러한 풍속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밧지 족에게는 번영이 있을 뿐 쇠망은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해 돌려보냈다.
사실 석가모니 부처가 밧지족을 치려는 아자세사트루 왕의 자문 요청을 정중하게 돌려보낸 것은 석가모니 자신이 전쟁에 개입하는 것이기도 했기에 종교 지도자로서도 온당하지 못한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석가모니 자신이 바이샬리라는 도시를 마음에 들어했고,[139] 이 바이샬리가 다름 아닌 밧지족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이후 석가모니는 같은 내용의 설법을 영축산에서 행한 뒤, 영축산을 떠나서 죽림정사로, 다시 파릉성(巴陵弗城)[140]으로, 다시 발지국의 구리촌(拘利村)으로, 나다촌(那陀村)으로, 그리고 비사리국(毘舍利國) 즉 바이샬리로 왔다. 이곳에서 석가모니 부처는 유녀 암바팔리로부터 망고나무 정원을 희사받아 암바팔리에게 설법을 행한다.
법현이 번역한 대반열반경에 따르면 열반을 석 달 앞두고 바이샬리에서 마지막 하안거를 보내고 건다 마을로 가려던 석가모니 부처가 바이샬리를 돌아보며 조용히 웃었는데, 옆에서 이를 본 아난다가 이유를 묻자 석가모니 부처는 "내가 저 바이샬리를 보는 것이 지금이 마지막이 될 테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불경에서는 이때 석가모니 부처가 바이샬리를 돌아보던 모습을 상왕회수(象王廻首) 즉 '코끼리가 자신이 태어난 숲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것 같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바이샬리를 떠난 석가모니 부처가 다시 돌아온 것은 마가다 국의 죽림총(죽림정사)이었다.
그때 석가모니 부처는 온 나라를 휩쓴 흉년으로 제대로 공양도 받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곡식이 귀해져서 탁발도 어렵게 된 가운데 안거가 다가오자 석가모니 부처는 마가다 안에 있는 비구들에게 "이 나라에 흉년이 들어 구걸하기가 매우 어렵다. 너희들은 각각 무리를 나누어 아는 곳을 따라 비사리나 발지국으로 가 그곳에서 안거(安居)하도록 하라. 그러면 궁색한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조언해 흩어 보낸 뒤, 자신은 아난과 함께 그대로 마가다에 머물렀다. 그리고 하안거 동안에 석가모니 부처는 병을 얻게 되었다.
비구들이여, 자기의 섬에 머물고 자기에게 귀의하라.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 법의 섬에 머물고 법에 귀의하라.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
해당 발언은 디가 니까야 16경 <대반열반경>과 26경 <전륜성왕사자후경>에서 전하는 석가모니 부처의 유명한 가르침이자 석가모니 부처의 유언으로 알려져있다. 보통 한역(漢譯)으로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自燈明法燈明 自歸依 法歸依)으로 옮기거나 현대한국어로는 "스스로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라. 스스로를 진리의 등불로 삼아, 그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라.”라고 번역한다. 형식적으로 a-c와 b-d가 대구를 이루고 있다. 즉, atta dīpā | dhamma dīpā가 대구를 이루고 atta saraṇā | dhamma+saraṇā가 대구를 이루는 것. 문장 전체의 핵어(head)가 vihar '살다'로서 전체를 관할하는 것으로 무리없이 해석할 수 있으나 분석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무리하게 번역하지 않고 '디빠'로 옮기는 팔리어 단어 dīpā는, 전통적으로 등불로 번역되었으나 섬으로 번역할 수 있다. 어떤 번역을 취하든,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와 법을 지침으로 삼으라"는 의미는 동일하다.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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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a+dīp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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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har+at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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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귀사+'디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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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순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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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디빠'로 삼아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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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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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a+saraṇ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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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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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ñña+saraṇ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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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귀사+피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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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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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피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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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피난처로, 다른 것을 피난처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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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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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amma+dīp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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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디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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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디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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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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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amma+saraṇ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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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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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ñña+saraṇ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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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피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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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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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피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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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피난처로, 다른 것을 피난처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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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현 비구는 <붓다 순례>에서 해당 발언이 나온 상황을 제시한다. 바이샬리를 좋아해서 생의 마지막 안거도 바이샬리에서 했던 석가모니 부처는 그 무렵 바이샬리를 휩쓴 기근에 그 자신의 노쇠 탓에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명상으로 감관을 제어해 고통을 이기고 기적적으로 회복하였는데[141] 제자 아난다가 "저는 부처님께서 회복하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고, 석가모니 부처가 그 근거를 묻자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아직 교단(상가)와 관련된 후계 문제를 언급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때 석가모니 부처는 "스승에게는 사사롭게 쥔 주먹(師拳)은 없다."[142]고 대답하면서 "나는 교단(상가)의 지배자도 명령자도 아니며, 내가 열반에 든 뒤에도 따로 교단(상가)의 지도자는 세울 필요가 없다." 단언하고, 그때 그러면 누가 교단을 이끌어야 하느냐는 아난다의 질문에 석가모니 부처가 바로 '자등명 법등명' 발언이 나왔다는 것이다. 즉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구절은 자신의 사후 교단(상가)를 가톨릭이나 이슬람처럼 어떤 통합된 지도자가 선출되어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남긴 법과 가르침, 계율 대로 이끌면 된다는 취지로 말한 것.[143]
바이샬리를 떠난 석가모니 부처는 파바 성에서 금 세공업자[144] 춘다에게 공양을 받았다. 이때 춘다가 올린 음식이 붓다가 받은 마지막 공양 '수까라 맛다와(sukaramaddava)'이다.[145] 전승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는 춘다의 수까라 맛다와 공양을 받고는 "이 음식은 붓다 이외에는 소화시킬 수 있는 이가 없으니, 아무에게 주지 말고 버려라." 하고는 사람이나 동물이 접할 수 없도록 땅을 파고 묻으라고 지시했다. 숫까라 맛다와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146] 춘다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만 먹고 다른 사람은 먹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석가모니 자신이 먹은 것은 공양받은 음식을 버릴 수가 없없기 때문이고.
결국 석가모니 부처는 이 음식을 먹고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린다. "석가모니 부처께서 곧 돌아가실 것 같았다"고 불전에서 그리고 있을 정도.[147] 자신 때문에 부처가 아픈 것을 눈치 챈 춘다가 흐느껴 울자, 울고 있는 춘다에게 "걱정 말게나. 무릇 세상에는 훌륭한 보시가 둘 있다네. 하나는 정각을 얻으려는 자에게 행한 보시[148] 나머지 하나는 깨달은 자가 열반에 이르렀을 때 행하는 보시일세."라며 다독여주었다고 한다. 이는 춘다를 추켜올려 석가모니를 죽였다는 죄목을 뒤집어 쓰게 하지 않기 위한 행동이기도 하다는 주장도 있다.
석가모니 부처는 히란야바티 강을 건너서 말라족의 땅 쿠시나가라로 가서 두 그루의 사라수 아래에 자리를 잡고, 머리를 북쪽으로 놓고 오른쪽으로 누웠다.[149]
동아시아의 불교 전승에서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일은 2월 15일이지만, 장아함경 유행경은 붓다의 탄생, 출가, 성도, 열반이 모두 2월 8일이었다고 기록하고, 반니원경은 탄생, 출가, 성도, 열반을 모두 4월 8일이라고 적시한다. 이와 달리 인도를 직접 견문하고 기록을 남긴 현장은 대당서역기 권6에서 열반일에 대한 일반론은 3월 15일이지만 설일체유부(상좌부 불교)는 9월 8일을 사용한다고 밝혔다. 자현 비구는 대당서역기의 언급과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을 전하는 기록들에서 공통적으로 '승상(繩床)'이라는 그물침대(해먹)를 언급한 부분이 있음을 주목했다. 사라수 두 그루 사이에서 열반한 이유는 바로 그물 침대를 매는 것과 관련된 것이라는 말이며, 계절상 야외에서 그물 침대를 걸고 자기에는 2월은 아직은 쌀쌀하고 추운 날씨이므로 대당서역기에서 현장이 기록한 대로 9월의 더운 날이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일이고 2월 15일은 어떤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50] 석가모니가 수까라 맛다와라는 공양을 받고 식중독 증세를 보였다는 전승과 대조해 보면 자현 비구의 추정도 설득력이 있다.
爾時,世尊與阿難俱,漸次遊行,到諸國界、村邑、聚落廣說諸法,所可化度,不可稱計。漸次復到鳩尸那竭國,力士生地,熙連河側,娑羅雙樹閒,而語阿難:‘可安繩牀而令北首,我今身體,極大苦痛,入於中夜,當取涅槃。’ 阿難受教,施繩牀已,佛卽就臥,右脅著地。爾時,阿難見佛臥已,隱於佛後悲泣流淚,極大苦惱。
이때 세존께서 아난과 함께 차례로 여러 나라와 고을과 마을들을 찾아다니면서 모든 법들을 자세히 설하니 그 교화하여 제도된 자들이 이루 일컬어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는 다시 구시나갈국(鳩尸那竭國)의 역사(力士)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서 희련하(熙連河) 곁에 있는 사라쌍수(娑羅雙樹) 사이에 이르러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지금 저 승상(繩床)에다 머리를 북쪽으로 하여 눕혀라. 지금 나는 몸이 지극히 고통스럽다. 그러니 오늘 밤에 열반에 들어야겠다.”
아난이 지시를 받고 승상을 마련하자 부처님께서 오른쪽 가슴을 땅에 붙이고 자리에 누우셨다. 이때 아난이 이처럼 부처님께서 누우신 것을 보고는 부처님 뒤에 숨어서 슬피 울면서 몹시 괴로워하였다.
마하마야경(摩訶摩耶經) 권하(卷下)
彼時,佛勅賢者阿難,汝於蘇連雙樹閒,施繩牀令北首,我夜半當滅度。受敎卽施,還白已具。佛到雙樹,就繩牀側右脅而臥。阿難在牀後,垂頭啼忼愾言 “一何駛哉!佛取泥洹。一何疾哉!世閒眼滅。我諸同志,從四方來,欲見佛者,望絕已矣。佛難復睹,難復得侍,來而不見,皆當悲慕,子何心哉。”그때에 부처님께서는 현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사라쌍수[蘇連雙樹] 사이에 승상(繩床)을 차려 놓고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하여라. 내가 밤중에 마땅히 열반에 들겠노라.”
아난은 곧 분부대로 하고 돌아와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다 준비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쌍수 아래로 가시어 승상에 나아가 오른쪽 옆으로 누우셨다. 아난은 승상 뒤에서 머리를 숙이고 울면서 목 메인 소리로 말하였다.
“어찌하여 그렇게 빠른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심이여. 어찌하여 그렇게 빠른가, 세상의 눈이 없어지는구나. 나의 모든 동지들이 사방에서 부처님을 뵈려 하는데 그들은 절망하고 말 것이며, 또 다시는 뵙기도 어렵고 다시는 모시기도 어렵고 와서 뵙지 못하니, 모두 슬피 사모할 뿐이니 나의 마음을 어찌할까?”
『반니원경』(般泥洹經) 2권(ABC, K0654 v19, p.217c02-c09)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이 가까워졌을 때, 조금 떨어진 나무 뒤에서 아난다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 흘리는 이유가 절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웃긴데, 스승이 곧 열반에 드는 것이 슬퍼서가 아니라 자신이 석가모니 부처를 25년이나 모셨음에도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는데 이제 열반에 드신다니 그것이 슬퍼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알아챈 석가모니 부처는 아난을 불러 가까이 오게 하고는 "너는 내가 열반한 뒤에 머지 않아 반드시 깨달음을 완성할 것이다."라고 수기를 주었고, 이에 아난은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는 자신의 장례법과 탑을 세우는 위치와 주관자까지 세심하게 지시한 다음, 아난에게, 말라족 사람들에게 가서 '오늘밤 수행을 완성한 위대한 성인이 열반에 든다.'고 알려주도록 했다. 당시 말라족 사람들은 마침 일이 있어 공회당에 모여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구름같이 몰려나와 석가모니 부처의 발에 예배를 올렸다. 이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번거롭자, 아난은 한 사람씩 인사하지 말고 가족끼리 나와서 할 수 있도록 규칙을 수정하여 처리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에 대한 말라족의 예배가 모두 끝나고 겨우 번잡함을 넘어선 안정이 찾아왔을 때, 수바드라라는 수행자가 석가모니 부처의 친견을 요구했다. 수바드라는 당시 120세[151]나 되었다는 말라족의 이름난 수행자였다. 그러므로 이전에 이미 석가모니 부처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석가모니 부처를 찾아가서 묻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든다고 하자, 더 이상 자신을 속이는 허울을 벗고 진실한 무지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석가모니 부처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수바드라는 예배자라기 보다는 논쟁하러 온 사람 같아 보였던 아난다는 “당신은 너무 늦었소”라는 말로 친견을 차단하였고, 석가모니 부처는 이를 듣고는 아난에게 “나에게 묻고자 하는 것이니 막지 마라. 그가 내 마지막 제자가 되리라.“라며 수바드라를 불렀다. 석가모니 부처를 만난 수바드라는 자신이 알고 경험한 수행의 가치들을 장황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석가모니 부처는 평생 없었던 행동, 그러니까 말을 중간에 끊는(!) 행동을 하면서 “당신이 말하려는 것을 안다. 다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당신이 부족한 것만을 지시해 주도록 하겠다.“라고 말했고, 수바드라가 이를 받아들이자, 석가모니 부처는 녹야원의 첫 설법에서 했던 것과 같은 주제의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을 준다.[152] 수바드라는 그의 완성되었던 수행자였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듣자 곧장 깨달음을 얻었는데,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을 차마 볼 수 없다.'면서 스스로 석가모니 부처보다 먼저 열반에 들기를 희망했다. 석가모니 부처가 뜻대로 하라고 하자, 수바드라는 바로 그 자리에서 열반에 들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석가모니 부처는, 제자들에게 최후로 더 질문할 것이 없는지를 물었지만 대중은 말이 없었고, 석가모니 부처는 다시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 물어볼걸.' 하면서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물어보라."라고 재차 종용했지만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석가모니는 "내가 현재 열반에 가까웠다고 부담스러워서 못 묻는 것이라면, 친구의 일이라고 하면서 물어보라." 하고 다시금 말했지만 대중은 말이 없었다. 아난다가 "이 대중 가운데는 따로 궁금한 것이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사뢰었다. 그러자 석가모니 부처는 “나도 그런 줄 안다. 이 대중들 중에 가장 어린 비구도 모두 도적(道迹)을 증득하여 악한 세계[惡道]에 떨어지지 않고 일곱 번을 오가고 나서 반드시 괴로움의 끝을 다할 것이다.”라며 그 자리에 있던 1,200명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얻게 될 도과(道果)에 대하여 기별하고, 팔을 내밀어 모든 비구들에게 “너희들은 마땅히 생각하라. 여래가 가끔씩 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은 마치 우담발꽃이 가끔 한 번씩 나타나는 것과 같다.”고 말한 다음, 게송을 읊었다.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석가모니 부처가 의식이 있을 때 남긴, 사실상 석가모니 자신의 유언이었다.
handa dāni, bhikkhave, āmantayāmi vo,
vayadhammā saṅ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a
"이제 그대들에게 마지막 말을 해야겠다. 비구들이여,
조건 따라 움직이는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
이 모든 것은 사라지는 법이다.
그러니 방일하지 않음으로(appamādena)[154]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하라.
《디가 니까야》 중 『마하빠리닙바나 숫딴따』, 6. 7
是故, 比丘! 無爲放逸. 我以不放逸故, 自致正覺, 無量衆善, 亦由不放逸得. 一切萬物, 無常存者, 此是如來末後所說.그러니 그대들이여, 방일하지 말지어다. 나는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정각에 이르렀나니, 나의 한량없는 모든 올바름도 또한 방일하지 않음에서 연유하였을 따름이다.
일체의 모든 존재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일 뿐이나니,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설법이니라.
《불설장아함경》(佛說長阿含經) 4권(ABC, K0647 v17, p.848a07-a10) 중 '유행경(遊行經)'
석가모니 부처가 숨을 거두는 장면을 불경은 선정의 순서에 따라 비유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가 눈을 감는 순간 초선에 들었고, 초선에서 출정하여 제2선· 제3선·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 무소유처정 ·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차례로 든 후 멸수상정(滅受想定)[155]에 들었다.
최후에 열반한 후 다비를 거행하였을 때, 사리가 무려 8섬 4말이 나왔는데, 당시 석가모니를 조문하러 온 8부족 왕들이 서로 가지려고 다투다가 어느 바라문이 중재하여 나눠 받았다고 한다.[156]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 이후 마하가섭의 주도로 석가모니 부처의 생전 언행과 설법에 대한 결집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제1차 경전 결집이라고 부른다.
[참고] 사리
산스크리트어로 시신(Śarīra: शरीर)
https://namu.wiki/w/%EC%82%AC%EB%A6%AC(%EB%B6%88%EA%B5%90)
사리(舍利)는 원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시신(Śarīra: शरीर)을 가리키던 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중국 문화권에서 불교를 받아들일 때 고승이나 여래의 시신을 가리키는 말로 쓰기 위해 번역할 때 일부러 음역하였다. 이미 신라시대 문서에서부터 나오는 이야기로 산스크리트어의 본디 의미와 달라졌다. 불교계에서는 크게 사리를 진신사리(眞身舍利)와 법신사리(法身舍利)[1], 그리고 승사리(僧舍利)로 나눈다.
진신사리는 석가모니의 실제 유해, 법신사리는 불법(佛法, 불교의 가르침)이 부처의 또다른 몸이라 하여 불경을 사리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승사리는 고승의 시신, 또는 그들을 화장하면 나온다는 돌 조각을 가리킨다. 한국에서 일반대중에게 다짜고짜 '사리'라고 하면 대개는 고승을 화장하면 나온다는 승사리를 떠올린다. 한국 불교계에서도 승려의 시신을 높여서 법구(法軀)라고 부름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불자들조차도 '사리'라고 하면 보통은 화장하면 나오는 구슬 같은 승사리를 떠올린다.
3.1.1. 승사리의 정체?
3.2. 법신사리
불교에서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부처의 몸은 금빛이나 보석의 색을 띤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의 몸과 색이 비슷하다는 보석을 진신사리를 대신하여 안치하였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석가모니의 가르침, 더 넓게는 불교의 가르침, 즉 불법(佛法)이야말로 부처님의 또다른 몸이라는 개념이 태동했다. 같은 이치로 불법의 가르침을 담은 불경은 또다른 부처의 몸(사리), 즉 법신사리가 되어 탑에 봉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경을 탑 안에 봉안하는 것은 종이에 글씨를 쓰면 되니까[14] 진신사리를 구해 안치하는 것보다 훨씬 쉬우므로 점차 이런 방식으로 탑을 제작하는 것이 대중화되었다.
3.3. 진신사리
불경의 기록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자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나무를 모아 전륜성왕의 예법에 맞추어 화장을 하다가 향수를 부어 불을 끈 뒤, 불에 타고 남은 뼈를 인근 8개 나라/부족의 대표들에게 분배하였다. 대표들이 저마다 사리를 분배받아 고국으로 돌아가 탑을 하나씩 세우니, 최초로 세운 불탑이라 하여 '근본8탑'이라고 부른다.[19] 석가모니가 열반하고 2-3백 년 남짓 지나 아쇼카 왕이 인도를 통일한 뒤 불교에 귀의하자, 근본8탑 중 한 기만 제외하고 나머지 탑들을 해체하여 사리를 꺼내 인도 각지에 진신사리를 담은 불탑 8만 4천 기를 세웠다고 한다.[20] 아쇼카 왕이 열지 않은 한 기는 오늘날 네팔 람그람에 있는 탑인데, 전설에 따르면 아쇼카가 탑을 열려고 하자 용왕이 나타나 막았다고 한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3/12/02/IDLRYUTUFZB3HBZBQSKBRRG5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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