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청준이 1976년 집필한 소설이다. 영화 서편제의 원작이기도 하다. 원래는 단편 연작인 '남도사람'에 수록된 단편소설로 한(恨)과 소리, 억압과 예술에 대한 주제를 다루었으며 후에 소설집 제목을 서편제로 변경하기도 하였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방랑하는 소리꾼이 아들과 수양딸 남매를 데리고 판소리를 가르치기도 하였지만 나중에 아들이 방랑에 불만을 품고 아버지와의 실랑이 끝에 이탈하고 딸마저 이탈할까를 우려하여[1] 아버지가 그녀에게 딸이 잠자는 사이 두 눈에 청강수를 넣어 눈을 멀게 한다[2]. 결국 딸은 앞 못보는 장님이 되지만 소리는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와는 달리 원작만의 분위기가 있으며 영화의 경우 일부 내용을 각색하여 소설에는 나와있지 않은 내용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원작소설에는 영화에 없는 부분이 더 많은데, 이것은 일부분만 영화화 되었기 때문이다. 남도사람은 다섯 편의 연작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영화 '서편제'의 원작은 1편 "서편제"와 2편 "소리의 빛"부분이다. 3편 "선학동 나그네"는 6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고, 2007년에 임권택 감독에 의해서 천년학이라는 영화로 제작된다. 서편제 본 줄거리와 별 관련이 없는 4, 5편은 아직 영상화되지 않았다.[3] 그리고 5편은 이청준의 다른 연작(언어사회학서설)과 크로스오버 작품이기도 하다.
영상화 작품은 임권택 작품만 있는게 아니라 1982년에 방영된 TV 문학관 소리의 빛 편도 있다. 하이틴 스타 조용원의 드라마 데뷔작이다.
늙은이의 한 가지 즐거움들에 관한 시 여섯 수를 향산(香山, 白居易)의 시체(詩體)를 본받아 짓다
1.[머리카락이 빠져 손질할 일 없음]
2.[치아 빠져 치통이 사라짐]
3.[눈이 어두워지니 경치나 구경]
4.[귀가 어두워지니 시비할 일 없음]
5.[나는 조선인, 조선시를 쓴다]
ㅡ한시의 형식에 다소 벗어나더라도 의미 전달에 초점을 둔다
老人一快事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縱筆寫狂詞 붓 가는 대로 미친 말을 마구 씀일세 競病不必拘 경병을 굳이 구애할 것이 없고 推敲不必遲 퇴고도 꼭 오래 할 것이 없어라 興到卽運意 흥이 나면 곧 이리저리 생각하고 意到卽寫之생각이 이르면 곧 써내려 가되 我是朝鮮人 나는 바로 조선 사람인지라 甘作朝鮮詩 조선시 짓기를 달게 여길 뿐일세 卿當用卿法 누구나 자기 법을 쓰는 것인데 迂哉議者誰 오활하다 비난할 자 그 누구리오 區區格與律 그 구구한 시격이며 시율을 遠人何得知 먼 데 사람이 어찌 알 수 있으랴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난(阿難)과 가섭(迦葉)을 협시로 모시고, 다시 그 주위에 16나한상을, 끝부분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함께 봉안한다.
때로는 아난과 가섭 대신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羯羅菩薩)을 안치하여 삼세불이 이루어지게 배열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함께 안치되는 16나한은 수행이 완성되어 이미 성자의 위치에 오른 수많은 아라한(阿羅漢)들 중 말세(末世)의 중생에게 그 복덕을 성취하게 하고 정법(正法)으로 인도하게 하겠다는 원(願)을 세운 성자들이다. 이들이 일찍이 많은 영험담과 함께 민간에서 크게 신봉되어 나한신앙을 형성하게 됨에 따라 사찰 중요 당우의 하나인 응진전에 봉안된 것이다. 수행을 통해 더 이상 번뇌가 새어나오지 않는 경지에 이르면, 공양을 받을 만하다고 하여 '응공(應供)'이라 불리는 아라한의 경지가 된다. 아라한을 줄여서 '나한'이라 부르고, 그들은 진리와 하나가 되었다고 하여 '응진(應眞)'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아라한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그 상(像)을 만들어 안치한 전각을 '나한전' 또는 '응진전'이라 부르게 되었다.후불탱화(後佛幀畫)로는 주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나 16나한도가 많이 봉안된다.
위 벽면 그림은 심우도
탐진치를 벗어나 자아의 본성 찾기를 불교에서는 잃어버린 소를 찾아 환희하다 인우구망의 경지에 이름을 표상함.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백련사에 대한 사적은 1432년(세종 13) 윤회(尹淮)가 저술한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와 정약용(丁若鏞)의 『만덕사지(萬德寺誌)』 등에 나타나 있다.
만덕산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하였다. 이 절은 839년(문성왕 1) 무염(無染)이 창건하였으며, 중요한 수도도량으로 면모를 달리한 것은 1211년(희종 7) 요세(了世)가 크게 중창한 뒤부터이다.
요세는 천태종계(天台宗系)의 승려로서 고승 지눌(知訥)과 깊은 친분 속에서 지눌과 함께 송광사에 머물다가, 1208년에 천태종의 묘의(妙義)를 얻었고, 강진에 살고 있던 최표(崔彪)와 최홍(崔弘)·이인천(李仁闡) 등의 권유로 만덕산에 자리를 잡고 그의 제자 원영(元營)으로 하여금 가람 80칸을 짓게 하였다.
이 역사(役事)는 1211년부터 1232년(고종 19)까지 21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당시 목백(牧伯)이 지극한 정성으로 재물을 보시(布施)하였다고 한다. 절이 완공되자 요세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고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결사(結社)를 맺었다. 이것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修禪社)와 쌍벽을 이루었던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이다.
그 뒤 이 절에서는 120년 동안을 이어 고려의 8국사(國師)를 배출하였다. 고려 말에는 강진지방이 세 차례의 왜구침입을 받았을 때 이 절도 함께 폐허화되었다. 조선 세종 때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보호를 받아 주지 행호(行乎)가 불타버린 가람을 복원하였다. 그 뒤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였으며, 그때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조계종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하여 종세(宗勢)를 키우고 있을 때, 이 절은 천태사상에 입각한 결사도량(結社道場)을 개설하여 침체한 불교중흥을 꾀한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외세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절 주위에 성을 쌓았는데, 이 성을 행호토성(行乎土城)이라고 한다. 현재의 절 또한 그때 쌓은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시왕전(十王殿)·나한전(羅漢殿)·만경루(萬景樓)·칠성각·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써 각 추녀마다 네 개의 활주(活柱)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전면 두 개의 주두(柱頭)는 용두(龍頭)로 장식한 다포집 건물이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만경루는 규모가 큰 누각으로 강진만 일대의 바다를 환히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 밖의 사중유적(寺中遺蹟)으로는 만덕산 백련사사적비와 원묘국사중진탑(圓妙國師中眞塔)이 있다. 사적비의 거북은 앉은 키가 높은 편이고 용의 눈이 험상궂게 생긴 귀부(龜趺) 위에 비신(碑身)이 있으며,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 모양을 한 가첨석(加檐石)이 놓여 있다. 중진탑은 방형의 지대석(地臺石)인 위에 연화문(蓮花文)의 중대석(中臺石)이 있으며, 상대석에도 무늬가 있으나 잘 보이지 않는다.
고복형(鼓腹形)의 옥신(屋身)에는 두 줄의 주렴문이 조각되어 있고,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하며, 상륜부에는 노반(露盤)·복발(覆鉢)·보주(寶珠)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절 주위에는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의 동백림과 정약용이 신유사옥 때 강진으로 귀양와서 조선의 실학을 집대성하고 차를 끊여 마시던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백련사를 가리켜 ‘남쪽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여 동백 또한 곁들여서 수목이 싱싱하게 푸른 모습이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라고 한만큼, 주위의 경관 또한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