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중시조 이전의 족보는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실재 중시조 이상의 혈통을 찾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다.

[주]족보는 씨쪽의 뿌리이다. 족보가 처음 출현한 것은 1423년(세종 5)이고 보면 그 이전의 혈통은 집안에 따라 기록문화의 차이는 있겠지만 시조를 신라 경순왕에 줄을 댄다든가 하는 것은 기억의 한계성으로 인하여 허구인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대개 중시조를 고려조 중기 이후로 정하는데, 거기서부터는 어느 정도 사실성을 인정할 수 있겠다.

사전에서 족보의 ‘연원 및 발간’항을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235800

[연원 및 발간〕

족보는 서양에서도 있었다고 하나 동양의 족보와 같은 것이라기보다 대체로 개인의 가계사(家系史)와 같은 것이다. 동양에서 족보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때 족보가 등장하고 있다. 족보의 연원을 살핌에 있어 족보의 편성·간행을 촉진시킨 우리 나라 고유의 사회적 정세를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두헌(金斗憲)은 “한국에 있어 족보의 발생은 벌족(閥族)의 세력이 서로 대치하고, 동성일족(同姓一族)의 관념도 매우 현저하게 된 이후의 일이며, 계급적 의식과 당파관념이 자못 치열해짐에 따라 문벌의 우열을 명백히 하려고 하였음에 기인한다.”고 말하였다.

족보 간행을 촉진시킨 요인으로는

① 동성불혼(同姓不婚)과 계급내혼제(階級內婚制)의 강화,

② 소목질서(昭穆秩序) 및 존비구별(尊卑區別)의 명확화,

---[펀자주]소목질서(昭穆秩序)란 종묘나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

왼쪽 줄을 소(昭)라 하고, 오른쪽 줄을 목(穆)이라 하여 1세를 가운데에 모시고

2세, 4세, 6세는 소에 모시고, 3세, 5세, 7세는 목에 모신다. ---

③ 적서(嫡庶)의 구분,

④ 친소(親疏)의 구분,

⑤ 당파별(黨派別)의 명확화 등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고려사≫나 고려시대의 묘지명 등의 사료에 의하면, 소규모의 필사(筆寫)된 계보는 이미 고려시대 이래로 귀족 사이에 작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한 동족 또는 한 분파 전체를 포함하는 족보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출현하였다. 족보가 처음 출현한 것은 1423년(세종 5)으로 이때에 간행된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영락보 永樂譜≫가 최초의 족보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족보는 문화 유씨의 두번째 족보인 1562년 간행의 10책의 ≪가정보 嘉靖譜≫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 1476년 발간의 ≪안동권씨세보≫가 현존하는 최고의 족보임이 확인되었다. 이 밖에 조선 초기 15세기에 간행된 족보는 남양 홍씨(南陽洪氏, 1454), 전의 이씨(全義李氏, 1476), 여흥 민씨(驪興閔氏), 1478), 창녕 성씨(昌寧成氏, 1493) 등의 족보이다.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족보는 조선 초기인 15세기에 처음으로 출현하였는데 모든 동족이 같은 시기에 족보를 간행한 것은 아니다. 어떤 종족은 16세기에, 어떤 종족은 17세기, 18세기, 19세기, 20세기에 비로소 족보를 간행하였던 것이다.



[사진]에펠탑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세느강변 풍경. 한강에 비하면 세느강은 도랑이라예.딱 한 사람,하느님의 생김새를 궁금해 한 天上의 시인이시여,영면하소서!천상엔 고문 같은 건 없겠지요.세상이 선진화되면 지상에도 고문같은 건 없어지겠지요.세계사라는 게 개인의 자유와 인권신장을 위해 투쟁한피의 역사라는 게 서글퍼집니다.시인 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에는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공작단 사건"이 소개되었고, 아래의 천상병 까페에도 <시인소개>를 클릭하면 인용되어 있습니다. http://chunsangbyung.new21.org/main.htm시인 천상병<上> /시인 천상병<中> / 시인 천상병<下>한국경제신문 게재분'시인 천상병' <上> 1967년 7월 14일자 신문을 펴든 문학인들은 1면 톱기사로 실린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공작단 사건"의 전모와 함께 연루된 사람들의 이름이 실린 것을 보았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엔 뜻밖에도 시인 천상병(千祥炳,1930~1993)의 이름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재불화가 이응로(李應魯),재독작곡가 윤이상(尹伊桑),그리고 몇몇 재독 유학생들이 동베를린을 구경하고 돌아온 것을 두고 북한의 배후 조종에 따른어마어마한 "간첩단"사건으로 확대.조작된 것이다. 중앙정보부 발표문에 따르면 천상병은 강빈구와 만난 자리에서 "동인이 간첩활동을 하고 있어 수사대상 인물임을 기화로 금품을 갈취할 목적하에 동인에 대하여 중앙정보부에서 내사중이라고 말하여 상피의자로 하여금 공포감을 갖게"한뒤에 수십여 차례에 걸쳐서 "1백원 내지 6천5백원씩 도합 5만여원을 갈취착복"하면서 수사기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울대 상대 동문이자 친구인 강빈구(姜濱口)는 동독 유학중 동독을 방문했었다는 얘기를 천상병에게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천상병은 예의 다른 문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강빈구로부터도 막걸리값으로 5백원,1천원씩 받아 썼던 것이다. 그것이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시인 천상병이 "국사범"으로 조작되는 사건의실체였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문인들은 어처구니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어쨌든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3개월,그리고 교도소에서 3개월 동안 갖은 고문과 치욕스러운 취조를 받고 난 뒤 선고유예로 풀려났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당한 그날은...이젠 몇 년이었는가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네 사과 뼈는 알고 있다.진실과 고통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서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전기고문을 세 번씩이나 당했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도 갔다오고 아이도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스무 해나 지난 뒤에 털어놓았다. "그날은-새"라는 시는 "그날"의 고통과 치욕의 경험을 간결하고 단호한 시행 속에 압축해놓고 있다. "고문은 받았지만 진실과 고통은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나타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진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남들은 내가 술로 인해 몸이 망가졌다고 말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의 추측일 뿐이다" 그를 한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은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불편한 손놀림과 발걸음, 잿빛의 얼굴, 입가에 허옇게 달라붙은 침의 흔적, "괜찮다,괜찮다,괜찮다..."라고 말하는 그만의 어눌하면서도 동어반복적인 화법 등. 그의 이런 "특징"은 과도한 음주의 결과가 아니었던 것이다. /시인.문학평론가 한국경제신문 2002-06-02 '시인 천상병' <中> 장석주의 한국문단비사 천상병<중> 천상병은 1930년 일본 효고의 히메지에서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거주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한다. 마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그는 매우 조숙한 천재의 면모를 보인다. 그의 조숙한 재능은 당시 마산중학교 국어교사이던 김춘수의 눈에 띄어 1949년시 "강물" 등을 "문예"에 발표하기도 한다. 곧 6.25전쟁이 터지고 전란 초기에 미군 통역관으로 6개월 동안 근무한 그는 1951년 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한다. 이 무렵 그는 송영택.김재섭 등과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하고,"문예"에 "나는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라는 제목의 평론을 내놓으며 시작(詩作)과 함께 비평활동도 겸한다. 천상병은 1952년 "문예"에 시 "갈매기"로 완료 추천을 받고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1954년 그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그만두고 문학에 전념한다. 그는 이 때 "현대문학"에 월평을 쓰는가 하면 외국 서적의 번역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다가 1964년부터 2년 동안 김현옥 부산 시장의 공보 비서로 일하는데,이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 생활인 셈이다. 1970년 겨울 어느 날부터인가 동가식 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떠돌던 천상병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명동이나 종로에서 더는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1971년 봄이 다 가도록 종적을 감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몇몇 문인들이 연고가 있는 부산에 연락을 넣어왔지만거기에도 천상병은 없었다. "죽지 않았을까?" 가까운 시인들은 주민등록증도 없이 이 시인이 길에서 쓰러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천상병이 죽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예감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참 아까운 친구였는데. 안됐어. 시집 한 권도 없이 세상을 뜨다니!" 시인 민영등이 "요절시인" 천상병의 유고시집을 묶어주기 위해 이리저리 전갈을 넣어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잡지에 흩어져 있는 작품 60여편을 모았지만 시집 출간비용을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인 성춘복이 그 시집을 내겠다고 선뜻 나섰다. 그래서 1971년 12월에 당시로서는 호화장정의 천상병시집 "새"가 나오는데,시집출간 소식이 신문이며 방송 등을 통해 알려지며 장안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상병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는 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행려병자로 오인된 탓에 서울시립정신병원에수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 뒤에 천상병은 백치 같은 무구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친구들 앞에 나타났다. 천상병은 기인답게 버젓이 살아 있으면서 첫 시집을 "유고시집"으로 낸 유일무이한 시인이 되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내 영혼의 빈터에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내가 죽는 날그 다음날.산다는 것과아름다운 것과사랑한다는 것과의노래가한창인 때에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한 마리 새.살아서좋은 일도 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새) 새는 그의 시 세계의 중심 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이는 시적 자아의 대리자 또는 자유 지향성의 상징이다. 새는 삶과 죽음,천상과 지상의 교차점을 향해 날아간다. 삶은 견디기 힘들만큼 고통스럽다. 그러자 시인은 죽은 다음날 새가 되어 돌아와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의 현존을 응시한다. 영혼이 새가 되어 다시 삶을 바라보자 그것은 홀연히 찬란한 것으로 비친다. 그렇게 시인의 초연함은 삶의 절망과 고통을 한 순간에 찬란한 것으로 바꿔놓는다. 시인은 한 마리 새가 되어 죽음 쪽에서 삶을 바라보고 삶과 죽음을 동시에 노래하며 현실을 초월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시인.문학평론가 한국경제신문 2002-06-09 '시인 천상병' <下> &nbsp; 천진무구함과 무욕으로 무장한 천상병은 생전에 자본주의적 관행과 생리에 대해 무차별적인 테러를 감행한다. 그는 시쓰기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유유자적 떠돌며 동료 문인들과 시인 지망생들에게 술값이나 밥값 명목으로 2천원씩을 아무 거리낌없이 뜯어낸다. 시인은 악의 없는 "갈취범"이었다. 그래서 그를 미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미워하기는커녕 희귀한 문화재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가난은 내 직업이지만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이 햇빛에도 예금 통장은 없을 테니까......나의 과거와 미래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내 무덤가 무성한 풀잎으로 때론 와서괴로왔음 그런 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라고,씽씽 바람 불어라"("나의 가난은") 병원에서 요양하며 몸과 마음을 추스른 시인은 1972년에 친구의 손아래 누이인목순옥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 1979년에는 첫 시집 "새"에 실린 작품들을 거의 다 옮겨 실은 시선집 "주막에서"를 민음사에서 펴낸다. 이어 1984년에는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1987년에는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든다면"을 내놓는다. 말기에 이르면 천상병은 천진 난만할 정도로 단순한 어조로 기독교의 신인 하느님을 예찬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깊이 스며든 그의 유고시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하느님과 그섭리에 감사하는 내용으로 짜여 있다. 시에서 하느님은 대우주에 비견되는데,그는 절대자를 향한 무궁한 외경심과 찬양 속에서도 어린아이처럼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하는 순진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대우주의 정기(精氣)가 모여서되신 분이 아니실까싶다.대우주는 넓다.너무나 크다.그 큰 우주의 정기가 결합하여우리 하느님이되신 것이 아니옵니까?"(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 1988년 만성 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한 시인은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으나 불사조처럼 살아난다. 이후 그는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를 펴낸다. 1993년 4월 28일, 병든 몸으로 누워 있던 시인은 마침내 숨을 거둔다. 천상병이 고단한 이 세상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던 날,의정부시립병원영안실 밖으로는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다. 그가 죽고 난 뒤 몇 백만원인가 하는 조의금이 들어왔다. 시인의 가족으로는 처음 만져보는 큰돈이었다. 시인의 장모는 그걸 사람들 손이 타지 않는 곳에 감춘다고 감춘 것이 하필이면아궁이 속이었다. 그걸 모르고 시인의 아내는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가난하게 하지만 순진무구했던 시인이 죽어서도 "만악의 근원"인 돈을 없애버리려고 "장난"을 했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죽은 해 "진짜" 유고 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가 나오고,세해 뒤인 1996년에는 "천상병 전집"이 간행되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내 영혼의 빈터에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내가 죽는 날그 다음날.산다는 것과아름다운 것과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한창인 때에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한 마리 새.살아서좋은 일도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새) /시인.문학평론가 한국경제신문 2002-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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