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 16년 (純祖 十六年)은 1816년 (병자), 배에 탄 암허스터 경은 영국의 외교관이자 그 항해 후 인도 총독(1823~1826)이 된 인물로 그가 건네 준 것은 영어 성경 3책이었다. 이수정은 중국을 경유하여 유입된 한문본에 토를 다는 데서 번역을 시작하였는데.....
신약 누가복음 한문본
구약성경 한문본
국한문혼용문 구약 사무엘 上
https://www.bskorea.or.kr/prog/trans_feature.php
1961년에 최종적으로 개정하여 사용하고 있는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은 역사적으로 한국 교회의 사랑을 받아 온 자랑스러운 성경이다.
그러나 이 성경을 그대로 계속해서 쓰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학교 교과서와 일반 출판물에서 쓰는 한글 맞춤법이 변하였고, 사람들이 사용하는 현실 언어도 많이 변하였으며, 성서학 및 관련 학문들도 눈부시게 발전하여, 성경을 개정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대한성서공회에서는 가능한 한 현재의 「개역」성경의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최소한으로, 꼭 필요한 부분만 개정한다는 원칙 하에 개정 작업을 시작하였다.
▶ 문법상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
▶ 어휘 선택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
▶ 개역당시 어휘 선택이 현재 그 의미가 바뀌어 오해가 있을 경우 현대 어휘로 고친다. 과거에는 통용되었으나
현재에는 잘 쓰이지 않거나 어려운 말은 쉬운 말로 바꾼다.
▶ 제3인칭 대명사 ‘저’와 ‘저희’는 각각 ‘그’와 ‘그들’로 고친다.
▶ 사투리는 표준말로 바로잡는다.
▶ 준말은 그 원말로 바꾼다.
▶ 수치감이나 혐오감을 유발시키는 말은 다른 말로 대치한다.
▶ 명사나 대명사에서 의미 전달에 꼭 필요한 경우 소유격과 복수형을 밝힌다.
▶ 오역임이 확실한 것은 바른 번역으로 고친다.
https://www.youtube.com/watch?v=R6dc-VAAjVo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4856
세례를 받은 뒤 「요한복음」 13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신앙고백서’를 발표, 윤치호의 ‘신앙고백서’와 함께 한국 기독교 초기 신자의 신앙 양태를 대표해 주고 있다.
기독교에 입교한 뒤 한글성서 번역사업에 착수, 일본주재 미국 성서공회 총무였던 루미스(Loomis, H.)의 권유와 협력에 따라 먼저 한문성서에 토를 단 『현토한한신약전서(懸吐韓漢新約全書)』를 간행하였다.
이어서 순한문성서인 『신약마가젼복음셔』를 번역했는데, 이 한글성서가 1885년 4월 처음 입국한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H.G.)와 아펜젤러(Appenzeller, H. G.)에게 주어졌다. 이 밖에 몇 편의 교리서를 번역하고 한국 문학과 천주교 관계 저서와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1883년 12월 13일 미국에서 발간되던 선교잡지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한국의 선교를 호소하는 글을 기고, 외국선교본부에서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1884년 7월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 맥클레이(Maclay, R. S.)를 김옥균(金玉均) 등과 만나게 하여 입국을 실현시켰다.
1885년 1월에는 일본에 도착한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 내한에 앞서 간단한 한국말을 가르치기도 하는 등 한국 개신교 수용에 교량적 구실을 다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1886년 귀국 뒤에 수구파의 음모에 휘말려 처형된 것으로 전하여진다.
https://christianlife.nz/archives/4428
초기 한반도의 복음전래
오래 전 서기 635년부터 845년, 통일신라 시대에 당나라를 통해서 경교가 한반도에 전래되었다고 일부 학자들이 말한다. 서기 1253년에는 몽고를 통해서 로마 선교사인 ‘루브루크’에 의해 고려(Core’e)시대에 카톨릭이 접촉되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인 서기 1592년과 1598년도 임진왜란과 정유왜란 당시에는 일본군의 종군신부인 ‘세스페데스’가 조선에 참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1627년과 1653년에는 당시 기독교 국가였던 화란인 ‘벨트브레’(박연)와 ‘하멜’이 무역하던 배가 파선되어 조선에서 활동한 일이 있었다.
18세기는 한국 천주교 형성기로 실학운동이 왕성하였고, 이승훈(세례명; Peter)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은 해인 1784년부터 1884년까지 100년 기간을 조선시대의 ‘천주교 선교세기’라고 부른다.
조선 조정에서는 1784년 4월에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여, 1791년(신해박해)와 1801년(신유박해)에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조선에 선교사로 와있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천주교도인 수 천명이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죽임을 당했다.
이런 박해 가운데서도 천주교 일부 지도자들은 ‘텬쥬공경가’, ‘성교요지’, ‘성교전서’, ‘쥬교요지’ 같은 신앙서적을 저술하여 민간에게 널리 알렸다.
1815년부터 1839년(기해박해)과 1866년(병인박해)까지 조선 조정에서는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여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임을 당했다. 1845년에는 중국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신부가 된 ‘김대건’ 신부가 평안도 의주로 월경하여 활동하던 중 발각되어 그 이듬해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순교하면서도 전달한 성경과 존 로스의 한국어 성경
개신교 선교사인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올라오다가 순교를 당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죽는 순간까지도 주변의 조선인들에게 한문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이 성경으로 인하여 조선 평양에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설립되었다.
1872년에 만주지역에서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소속인 존 로스(1841~1915)와 존 매킨타이어(1837~1905) 선교사가 한국선교를 위한 체계적인 선교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존 로스 선교사는 압록강 상류 부근까지 가서 한 사람의 한인에게 한문 성경 몇 권을 전하고 돌아왔는데 수년 후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또한 존 로스는 1874년에 한중 국경에 있는 고려문에 가서 노방선교와 설교를 하며 한국어 성경을 제작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에 의주 출신인 이응찬을 만나게 되었다.
이응찬은 존 로스의 한국어 어학선생이 되는 한편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세 명의 의주 청년과 함께 존 로스의 한국어 성경 번역 작업에 협력하였다.
1879년 네 사람 모두 메킨타이어 선교사에 의해 세례를 받게 되었으며, 또한 같은 해에 만주 우정에서 존 로스 선교사에 의해 서상륜이 1883년에는 김청송이 세례를 받았다.
1878년에는 존 로스와 이응찬 김진기 백홍준 공역으로 누가복음 초역이 완료되었고, 1879년에는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로마서 원고가 작성되었다.
1891년에 존 로스는 매킨타이어가 수정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검토하여 최종원고를 완성하고, 1881년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 지원을 받아 인쇄소를 봉천에 설치하여 한글로 된 첫 개신교 문서인 “예수성교문답”과 “예수성교요령”을 인쇄했다.
이듬해인 1882년에는 첫 성경인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셔”와 “예수성교요안니 복음전셔”를 발행했다 이후 1887년에는 신약 전권인 “예수성교전셔”가 완간되었다.
일본에서의 이수정의 성경번역
이와 같이 중국에서 존 로스와 몇 명의 한국인에 의해 복음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 일본에서는 이수정에 의해서 복음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수정이 40세 되던 해 1883년에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George William Knox) 에게서 세례를 받은 소문이 퍼지자 일본에 와있던 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 선교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일본주재 미국 성서공회 헨리 루미스(Henry Loomis) 선교사로부터 한국성서 번역을 의뢰받은 이수정은 작업에 착수하여 1883년 7월 30일에 요한복음 일부가 인쇄되어 미국 성서공회 본부에 보내졌다.
한문성경에 토(주석)를 단 현토성경<신약성경 마가전>이 1884년 11월에 출판되었고, <현토한한신약전서>가 1887년에 출판되었다.
이수정은 모든 조선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성경으로 1884년 4월에 완성하여 다음해 2월에 <신약 마가복음서언해> 1천부를 발행했다.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이 성경을 가지고 왔었다. 이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번역도 완성했으며, 이수정의 번역은 로스 역본과 함께 한글성경 번역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번역 초본들이었다.
한국의 선교는 성서 번역에서부터 출발했으며 한국인에 의해서 스스로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며, 또한 교회가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서 자립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이미 개신교 신자들이 국내에 생겨나고 있었고, 회심한 이들이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으며, 성경이 대량으로 반포되고 있었고, 그리고 특별한 것은 기독교가 만주에 흩어진 한인들 사이에 놀랍게 확산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주지역에서는 1895년 한국인에 의해 교회 건축이 이루어진 이후, 무려 1,500개의 교회가 건립되었으며, 복음을 접한 한국인들은 매서인이 되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은 한국인들 사이에 조용히 저변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성경번역과 전달은 오늘날의 한국복음화의 밀알이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2JrVZUm0lk
https://kydong77.tistory.com/20563
https://ko.wikipedia.org/wiki/%EC%84%B1%EA%B2%BD
구약성경-오경(토라)- 역사서
예언서- * 이사야* 예레미야 |
신약성경괄호를 표기한 부분은 해당 성경의 저자이다. 알려지지 않은 경우에는 '익명'으로 표기하였다.복음서
|
[유다서] 한국 기독교는 부정함.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54204
▲타낙(Hebrew Bible; Tanakh)의 구조.
[참고]
* 기독(교)'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중국어 음역어의 축약형인 '基督(敎)'를 한국어식 발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기독이란 그리스도를 한자어로 번역한 말.
그리스도란 기름부은 자, 곧 세례를 의미한다.
예수는 세례요한으로부터 셰례를 받았다.
유대인들을 구원할 그리스도의 출현은 유대인들의 전례적 희망사항이었다.
4복음서를 통해 예수는 자신이 유대인들이 고대하는 구원자임을 선포하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C%9C%84%EC%9D%BC%EC%B2%B4
삼위일체(三位一體, 고대 그리스어: Τριάδος 트리아도스[*], 라틴어: Trinitas 트리니타스[*])란 그리스도교에서 성경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교리이다. 하나님은 본질에서 한 분이시며 위격(位格, 고대 그리스어: ὑπόστασις 휘포스타시스[*])에서는 세 분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1] 삼위일체에 대해서 동방교회는 본질에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되는 신비를 지지했고, 서방교회는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동일본질로 한 분 하나님이 되는 신비를 지지하며 신학적 관점의 차이를 보였다.[2]
<신학대전> 삼위일체설 완성자
토마스 아퀴나스(영어: Thomas Aquinas, 이탈리아어: Tommaso d'Aquino, 1224년/1225년? ~ 1274년 3월 7일)는 서방교회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이다. 또한 자연신학의 으뜸가는 선구자이며 서방교회에서 오랫동안 주요 철학적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는 토마스 학파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교회학자 33명 중 하나이며, 현재 로마가톨릭교회는 그를 신학자요 박사로 존경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이름을 딴 학교나 연구소 등이 많이 있다.
https://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3088149
1816년 이양선, 언어불통 속의 첫 만남
1816년 9월 5일 낯선 이양선 두 척이 충남 서천 마량진 해안에 나타났다. 마량진은 조선시대에 수군 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있던 군영이었다. 두 배는 영국 정부가 청국에 파견한 사신 로드 암허스트(Sir Jeffrey William Pitt Amherst) 경과 수행원들을 실은 순양함 알세스트(HMS Alceste)호와 호위함 레이어(HMS Lyre)호였다.
알세스트호 함장 멕스웰(Captain Sir Murray Maxwell, 1775~1831)은 영국 왕실해군 장교로서 나폴레옹 전쟁 때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다.
배에 탄 암허스터 경은 영국의 외교관이자 그 항해 후 인도 총독(1823~1826)이 된 인물이었다. 그를 태우고 중국을 방문한 후 배는 조선 서해안과 류우큐제도를 방문했다. 이들은 영국으로 돌아가다 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섬에 들러 유배 중이던 나폴레옹을 만나기도 했다.
알세스트호 함장 머레이 맥스웰(Sir Murray Maxwell)과 레이어 호의 바질 홀 함장이 이끄는 두 배는 북경 방문을 마치고 귀환 길이었다. 배는 발해만을 돌아 조선을 발견하고 측량을 했다.
이양선 두 척이 해안 멀리에 정박한 것을 발견한 마량진(鎭)의 첨사 조대복(趙大福)과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升烈)이 병졸과 현민들을 동원하여 배를 나포하려다 배가 커서 불가능하자 정탐차 배를 방문하였다. 이때 성경이 전달되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성경 전래로 기록되는 이 방문에 관하여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있다.
첨사와 현감이 (큰) 배에 내릴 때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굳이 주었는데, 작은 배에서 받은 두 권과 합하면 세 권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순조 16년 7월 19일(병인)조
* 순조 16년 (純祖 十六年)은 1816년 (병자)
알세스트 호의 항해 중 성경 전달 장면(p.36) ⓒ천지일보 2023.12.06.
이때 전달한 책 3권이 영어 성경이었다. 한국인이 처음 성경과 만났던 이 사건은 한국인은 영어를 모르고, 영국 측은 한문이나 한국어를 몰라 소통되지 않은 채 이루어졌다. 알세스트호의 군의관 존 맥레오드(John Mc’Leod)는 영국으로 돌아가 항해기를 남겼다. 그의 기록은 <알세스터의 항해-코레아 해안을 따라서- (Voyage of His Majesty's Ship Alceste, Along the Coast of Corea)>로 1818년 런던과 필라델피아에서 발간되었다. 책에서 성경을 전달하는 장면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출처 : 천지일보(https://www.newsc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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