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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 한중록/4편 종합본 「한듕록」·「한듕만록」 & 수원화성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지은 회고록.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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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지은 회고록.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974

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작자의 회갑해에 쓰여졌고, 나머지 세 편은 1801년(순조 1)∼1805(순조 5) 사이에 쓰여졌다.

필사본 14종이 있으며, 국문본·한문본·국한문혼용본 등이 있다. 사본에 따라 ‘한듕록’·‘한듕만록’·‘읍혈록’ 등의 이칭이 있다. 4편의 종합본은 「한듕록」·「한듕만록」의 두 계통뿐이다.

제1편에서 혜경궁은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에서부터 이듬해 입궁하여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중도에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하여 의식적으로 사건의 핵심을 회피한다. 그 대신 자신의 외로운 모습과 장례 후 시아버지 영조와 처음 만나는 극적인 장면의 이야기로 비약한다.

후반부에는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아버지·삼촌·동생들이 화를 입게 된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 편은 화성행궁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만난 지친들의 이야기로 끝난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 1년 5월 29일 동생 홍낙임(洪樂任)이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뒤에 쓴 글이다.

제2편에서 혜경궁은 슬픔을 억누르고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야기를 서두로,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한 까닭은 이 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또 친정 멸문의 치명타가 된 홍인한사건(洪麟漢事件)의 배후에는 홍국영(洪國榮)의 개인적인 원한풀이가 보태졌다고 하면서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가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는 날을 꼭 생전에 볼 수 있도록 하늘에 축원하며 끝맺는다.

제3편은 제2편의 이듬해에 쓰여진 것으로 주제 역시 동일하다. 혜경궁은 하늘에 빌던 소극성에서 벗어나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정조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성이 지극하였는지, 또 말년에는 외가에 대하여 많이 뉘우치고 갑자년에는 왕년에 외가에 내렸던 처분을 풀어주고 언약하였다는 이야기를 기술하며, 그 증거로 생전에 정조와 주고받은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마지막 제4편에서는 사도세자가 당한 참변의 진상을 폭로한다. ‘을축 4월 일’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을축년은 순조 5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돌아간 해이다. “임술년에 초잡아 두었으나 미처 뵈지 못하였더니 조상의 어떤 일을 자손이 모르는 것이 망극한 일”이라는 서문이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왕조의 나인이라 위세가 등등하였던 동궁나인(東宮內人)들과 세자 생모인 영빈(暎嬪)과의 불화로 영조의 발길이 동궁에서 멀어졌다. 때마침 영조가 병적으로 사랑하였던 화평옹주의 죽음으로 인하여 영조는 비탄으로 실의에 빠져 세자에게 더욱 무관심해졌다.

세자는 그 사이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놀이를 즐겼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代理)를 시켰으나 성격차로 인하여 점점 더 세자를 미워하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마침내는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762년(영조 38) 5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9일 만에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다. 혜경궁은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홍봉한(洪鳳漢)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임오화변 이후 종래의 노소당파가 그 찬반을 놓고 시파(時派)와 벽파(僻派)로 갈라져서, 세자에 동정하는 시파들이 홍봉한을 공격하며 뒤주의 착상을 그가 제공하였다고 모함하였기 때문이다. 작자는 양쪽 의론이 다 당치 않다고 반박하면서 “이 말하는 놈은 영조께 충절인가 세자께 충절인가.”라며 분노한다.

제1편은 혜경궁의 회갑해(정조 19)에 친정 조카에게 내린 순수한 회고록이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친정의 억울한 죄명을 자세히 파헤친 일종의 해명서이다.

그 골자가 되는 세 사건은 영조 46년(1770)에서 정조 2년(1778) 사이에 왕비(貞純王后)의 친정 경주 김씨와 전 세자빈의 친정 풍산 홍씨의 정권다툼으로, 작자의 아버지와 아들이 화를 당한 일을 말한다.

즉, 한유(韓鍮)의 상소로 아버지 홍봉한이 실각하고, 삼촌 홍인한과 동생 홍낙임이 사사되는 원인이 된 정조초, 이른바 정유역변의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해명한 것이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사도세자 사건과 관련된 홍봉한 배후설이다.

홍봉한은 당시 좌의정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도의적인 책임을 넘어 뒤주를 바쳤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제4편에서 작자가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궁중비사(宮中祕史)의 내막을 폭로한 것은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공주의 후예로 명문가인 친정이 자기 때문에 망하였다는 죄책감으로 71세 노령에도 무서운 집념으로 써낸 것이다.

의의와 평가

「한중록」은 역사적 인물의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이 그가 비빈(妃嬪)이라는 사실에서, 정계야화로서 역사의 보조자료가 된다. 임오화변의 이유 및 홍봉한일가에 대한 사관을 재검토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실기문학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류문학, 특히 궁중문학이라는 점에서 궁중용어, 궁중풍속 등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한중록」은 소설로 볼 수 있을 만큼 문장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있다. 그리고 치렁치렁한 문체는 옛 귀인(貴人)들의 전아한 품위를 풍기고 경어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작자를 비롯하여 등장인물 가운데에서 전통사회의 규범적 여인상의 전형을 볼 수 있다는 점 등으로, 이 작품은 우리 고전문학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https://namu.wiki/w/%ED%98%9C%EA%B2%BD%EA%B6%81%20%ED%99%8D%EC%94%A8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는 사도세자의 정실이며 정조의 친어머니다. 그 외의 자녀로는 의소세손, 청연공주, 청선공주가 있다. 혜경궁(惠慶宮)은 아들 정조에게서 받은 궁호다.

영안위 홍주원의 5대손으로 홍주원의 부인이 선조의 딸 정명공주였기 때문에 선조의 외6대손이기도 하다.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로 1744년(영조 20년), 10살의 어린 나이[3]세자빈에 책봉되어, 동갑내기 사도세자혼인하였다. 명목상 간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초간택 때 이미 대왕대비인 인원왕후, 왕비인 정성왕후 등 높으신 분들을 뵙고 궁인들이 홍씨가 괴로워할 정도로 그녀를 안으려 다툰 것을 보아 간택 전에 이미 그녀는 세자빈으로 낙점이 되었던 듯하다. 이 때 그녀의 조상인 정명공주가 사용하던 물품들이 혼수로 들어와 기이하게 여겼다.[4][5] 특히 병풍에는 홍봉한이 꾼 그녀의 특별한 태몽에 나타난 흑룡과 똑같은 흑룡이 수놓아져 있었다고 한다.

1814년(순조 14년), 정적이었던 정순왕후가 죽은 뒤, 차례차례 혜경궁 홍씨의 친정이 신원, 복권되었다. 또한 홍봉한죽음 직전에 그를 비난했던 정이환, 이심도 등의 처벌을 순조에게 요구한다. 이심도는 결국 사형에 처해진다.

혜경궁 홍씨는 전에 1805년(순조 5년)부터 담현증(痰昡症)을 앓아 오래 병석에 누웠는데, 점차 병세가 깊어져 1815년(순조 15년) 12월 15일, 81세의 일기를 끝으로 창경궁 경춘전에서 눈을 감았는데 손자 순조가 '헌경(獻敬)'이라는 시호를 올렸다.[27][28]

빈청에서 혜경궁의 시호를 다시 의논하여 올리다

빈청(賓廳)에서 혜경궁의 시호를 다시 의논하여 상계(上啓, 조정이나 윗 사람에게 여쭈어 봄)하였는데,

시호는 헌(獻) 【총명(聰明)하고 예지(睿知)함.】 경(敬) 【밤낮으로 경계(儆戒)함.】 이다.

- 《순조실록》 18권, 순조 15년(1815년, 청 가경(嘉慶) 20년) 12월 25일 (을해) 2번째기사

* 아들 정조 정조(正祖, 1752년 10월 28일 ~ 1800년 8월 18일) 사후 15년을 더 살았다.

* 정조는 건릉(사도세자릉) 옆 화성에서 모친 모시고 사는 게 꿈이었건만

정조(正祖, 1752년 10월 28일 ~ 1800년 8월 18일, 재위: 1776년 4월 27일(음력 3월 10일)[1] ~ 1800년 8월 18일(음력 6월 28일)[2])는 조선 제22대 이며, 대한제국추존 황제이다. (李), 는 산 또는 성(祘)[주해 1], 본관전주(全州), 는 형운(亨運)[3], 는 홍재(弘齋)다.[4]

[출처] 혜경궁 홍씨, 한중록/4편 종합본 「한듕록」·「한듕만록」 & 수원화성|작성자 은자

 

 

KBS 한국사전 – 피눈물의 기록 한중록, 혜경궁 홍씨 1부 - YouTube

 

 

KBS 한국사전 – 피눈물의 기록 한중록, 혜경궁 홍씨 2부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U9FDbKarkQc

 

https://www.youtube.com/watch?v=Yd2Y81qcr_I

 

 

https://www.youtube.com/watch?v=5ZeVfjg6vt8

 

 

https://www.youtube.com/watch?v=OCC1iB2d2zM

 

 

조선 제 21대 국왕 영조.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자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 [사진제공=경기도박물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2638496#home

 

혜경궁 홍씨와 노론은 왜 사도세자를 등졌나 | 중앙일보

[유성운의 역사정치]

www.joongang.co.kr

 

사위가 죽자 더 번성한 처가

혜경궁 홍씨는 1735년 홍봉한의 차녀로 태어나 1815년 81세로 생을 마쳤습니다. 아들 정조가 죽은 뒤에도 15년을 더 살았습니다. 장수했지만 삶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왕을 이을 줄 알았던 남편은 시아버지의 손에 죽더니, 아들은 얼굴도 못 본 시아주버니 효장세자(태어난 지 2년 만에 사망한 사도세자의 형)의 아들로 입적돼 ‘대비(大妃)’의 자리에도 오를 수 없는 신세가 됐습니다.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올랐는데도 혜경궁이라는 신분으로 머무르게 된 이유입니다.

 

대비가 아니면 왕실에서의 위상은 물론 영향력에도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정조가 죽은 뒤 자신보다 10살 어린 시어머니(영조의 두 번째 부인 정순왕후)의 친정, 경주김씨에 의해 홍씨 집안이 도륙됐을 때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바라봐야 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한중록』을 남기게 된 주요 요인 중 하나가 됐습니다.

혜경궁의 친정인 풍산 홍씨 집안은 어땠을까요. 이들은 노론에 속했지만 혜경궁 홍씨가 입궐하기 전까진 그다지 주목받는 집안은 아니었습니다. 홍봉한도 딸인 혜경궁이 세자빈으로 간택된 후에야 비로소 과거(문과)에 급제했으니까요. 하지만 딸 덕분에 팔자가 180도 바뀝니다. 각종 요직을 거치다 영의정까지 오르며 노론의 핵심 인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참고로 그의 5대조 홍주원은 선조의 부마였는데, 광해군과 대척점에 선 정명공주의 남편이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이 집안은 왕실과 혼맥 인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도세자는 이때 혜경궁 홍씨에게 “이번엔 아마도 무사치 못할 듯하니… 나는 폐하고 세손(정조)은 효장세자의 양자를 삼으면 어찌할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미 당시 분위기가 사도세자가 무사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흘러갔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화성으로 행차하는 혜경궁홍씨의 가마를 묘사한 반차도.

이 무렵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가 세자 처소에 와서 얼마간 머물면서 모자간의 애틋한 정을 나누었다는 『한중록』의 기록도 이런 추정을 가능케 합니다.

1762년(영조 38년) 5월 15일 발표된 영조의 ‘폐세자반교문’은 총 2건인데, 이 중 한 건은 구성이 흥미롭습니다. 바로 영빈이씨의 발언을 통해 사도세자의 각종 비행과 문제점을 조목조목 밝힙니다. 이 사건이 정치적 사전 조율을 거쳐 진행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혜경궁 홍씨의 집안은 이미 영조의 마음이 떠난 사위(사도세자)를 지키며 반대파(공홍파)로부터 공격을 당하기보다는 외손자(정조)를 보호해 가문의 위상을 지키는 '플랜 B'로 방향을 설정했던 것 같습니다.
임오화변이 발생하고 3개월 가량 지난 후 사위를 떠나보낸 홍봉한이 영조에게 올린 상소문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성상의 이번의 거조(사도세자의 처분)는 진실로 부득이한 것이었고 그날의 교시(敎示)도 역시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애통해하는 마음은 애통해하는 것이고, 의리는 의리이니 사사로운 애통으로 인하여 공적인 의리를 가릴 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영조실록』 38년 8월 26일)

그런 점에서 혜경궁 홍씨가『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비극적 최후가 그의 '광기(狂氣)' 때문이라고 한사코 강조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 궁중엔 '죄인지자 불가승통(罪人之子 不可承統·죄인의 아들은 왕위 계승이 불가하다)'는 말이 떠돌았습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을 겨냥한 정치적 모략선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그저 '미치광이'라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국법상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지만, 미치광이의 아들은 제약이 없습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0867

 

정조(正祖)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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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뒤에 眞宗이 됨)의 후사(後嗣)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에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올랐는데, 생부인 장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또한 세손으로 갖은 위험 속에서 홍국영(洪國榮) 등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리고 ‘개유와(皆有窩)’라는 도서실을 마련해 청나라의 건륭문화(乾隆文化)에 관심을 갖고 서적을 수입하면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그리하여 즉위하자 곧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해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 · 홍인한(洪麟漢) · 홍상간(洪相簡) · 윤양로(尹養老) 등을 제거하였다. 나아가 그의 총애를 빙자해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저 축출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정조는 퇴색해버린 홍문관을 대신해 규장각을 문형(文衡)의 상징적 존재로 삼고, 홍문관 · 승정원 · 춘추관 ·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성지화(作成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작성지화’의 명분 아래 기성의 인재를 모으고, 참상(參上) · 참외(參外)의 연소한 문신들을 선발, 교육해 국가의 동량으로 키워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우문지치’의 명분 아래 세손 때부터 추진한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수입에 노력하는 동시에 서적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였다.

곧 임진자(壬辰字)주1 · 정유자(丁酉字)주2 · 한구자(韓構字)주3 · 생생자(生生字) · 정리자(整理字) · 춘추관자(春秋館字) 등을 새로 만들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사서 · 삼경 등의 당판서적(唐版書籍)의 수입 금지 조처도 이와 같이 자기문화의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왕조 초기에 제정, 정비된 문물제도를 변화하는 조선후기 사회에 맞추어 재정리하기 위해 영조 때부터 시작된 정비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속오례의(續五禮儀)』 ·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대전통편(大典通編)』 · 『문원보불(文苑黼黻)』 · 『동문휘고(同文彙考)』 · 『규장전운(奎章全韻)』 · 『오륜행실(五倫行實)』 등이 그 결과였다. 이와 함께 자신의 저작물도 정리해 뒷날 『홍재전서(弘齋全書)』(184권 100책)로 간행되도록 하였다(1814).

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당쟁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졌으며,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A1%B0

 

정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조(正祖, 1752년 10월 28일 ~ 1800년 8월 18일, 재위: 1776년 4월 27일(음력 3월 10일)[1] ~ 1800년 8월 18일(음력 6월 28일)[2])는 조선 제22대 왕이며,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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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1752년 10월 28일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창경의 경춘전(景春殿)에서 태어났다. 형인 의소세자가 3살의 어린 나이로 먼저 요절한 뒤 태어났기 때문에 탄생 당일 영조에 의해 원손(元孫)이 되었다.[6] 의소세자의 장례를 치른지 3년이 지나 세손으로 책봉하였다.[7][8]

1755년(영조 31년), 영조는 어린 원손이 네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총명한 것을 기뻐하였으며 신하들 앞에서 경전을 읽어보도록 하였다. 원손은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 10자를 외고 부모 두글자를 썼다.[9] 영조는 이후로도 여러 차례 원손이 한번 본 사람을 구별하여 가리키는 것이나 글씨를 쓰는 것을 칭찬하였다. 1757년 영조는 직접 자서를 보고 글자를 골라 원손의 이름을 정하였다.[10]

영조는 김종수를 세자의 교리(校理)로 삼아 글을 가르치도록 하였고 1761년 4월 14일(영조 37년 음력 3월 10일) 성균관입학하였다.[11]

대리청정

노론 벽파계열이 당론으로 세손을 제거하려 하자 세손은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하며 신경썼다. 특히 홍국영은 그에게 불리한 자료로 작용할만한 자료, 물건들을 찾아 제거했고, 세손 시절 사부인 김종수는 당론에 맞서며 택군이라며 벽파를 공격했다. 한편 김종수는 외척이 주를 이룬 벽파와는 다른 또 다른 정파 청명당 혹은 청명파를 구성한다. 1772년 청명(淸名, 청렴함과 명예)을 존중하고 공론을 회복해 사림 정치의 이상을 이루려는 노론내 청명류(淸名流)의 정치적 결사체가 드러날 때, 당파를 없애려는 영조는 이들이 오히려 당론을 조장한다고 보고 김종수를 비롯한 조정(趙晸), 김치인(金致仁), 정존겸(鄭存謙), 이명식(李命植) 등을 유배보냈다. 이때 김종수는 경상도 기장현 금갑도(金甲島)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방면되었다.

1775년(영조 51년) 봄, 영조는 82세의 나이로 노환에 시달려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자 세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겼다. 그러나 세손이 대리청정을 할 경우 입지가 궁색하게 될 것을 염려한 노론 벽파는 이를 극구 반대하였다.[31]

임금이 이르기를,“근래 나의 신기(神氣)가 더욱 피로하여 한 가지의 공사를 펼치는 것도 역시 수응하기가 어렵다. 이와 같고서야 만기(萬幾)를 처리할 수 있겠느냐? …… 두 자[주해 3]를 하교하려 하나 어린 세자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렵다. 청정(聽政)에 있어서는 우리 왕조(王朝)의 고사(故事)가 있는데, 경 등의 의향은 어떠한가?”하니, 적신(賊臣) 홍인한이 앞장서서 대답하기를,“동궁께서는 소론과 노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하였다. 임금이 한참 동안 흐느껴 울다가 기둥을 두드리며, 이르기를,“경 등은 우선 물러가 있거라.”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영조 125권, 51년 11월 20일(계사)

당시 세자의 나이는 24세였다. 영조는 홍인한을 파직시키고 옥새를 세자궁으로 옮겨 대리청정을 맡겼다. 장조(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홍계회, 김상로, 정후겸, 김귀주 등 노론 벽파는 정조의 즉위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시도하였다. 영조는 세손에게 “김상로는 너의 원수이다.”라고 한 바 있다. 이때 세자시강원의 홍국영이 이들을 탄핵하여 세손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32] 영조 또한 순감군(巡監軍)의 수점권을 세자에게 주어 만약을 대비하였다.[33]

즉위 초기

홍국영의 득세와 몰락

정조는 홍국영을 특별히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삼았다가[45] 다시 도승지로 올렸고[46] 임금의 호위를 위한 숙위소를 설치하여 홍국영을 숙위대장에 임명하였다.[47] 전례가 없던 이러한 조치로 홍국영은 막강한 실권을 쥐게 되었다.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업고 모든 정사에 관여하여 삼사[주해 4]의 소계[주해 5], 팔도의 장첩[주해 6], 묘염[주해 7], 전랑[주해 8] 직의 인사권 등을 모두 총괄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홍국영의 이러한 득세는 실권을 쥔 세도 정치의 시작으로 평가된다.[48]

정조는 세자 시절부터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49] 정조는 즉위 초기 반대 세력에 둘러쌓여 있었기 때문에 홍국영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6월 23일 정후겸과 홍인한의 수하였던 윤약연, 홍지해 등을 친국하면서 소론이 홍국영을 제거하려고 한 시도에 대해 세자시절 “옷을 벗지 못하고 자는 수가 또한 몇 달인지를 알 수 없었으니, 저궁의 고립과 위태함이 어떠했고 국가 사세의 간난(艱難)함이 어떠했겠는가?”라며 오직 홍국영이 자신을 보호하였다고 언급하면서 “홍국영에 있어서는 궁료(宮僚)로 있을 때부터 임금의 몸을 보호해와 한쪽 손으로 하늘을 떠받치는 공로가 있었으니, 무릇 이 사람을 장해(狀害)하려는 흉계를 하는 사람은 곧 우익을 제거해 버리려는 흉심이 있는 것이다. 즉조(卽祚)한 이후 …… 오직 이 하나의 신하를 의지하여 믿고 있는데 기필코 장살하고야 말려고 하니,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장차 어느 지경까지 가려는 것인가?”라고 하여[50] 홍국영에 대한 신임을 보였다.

그러나 홍국영은 사사로운 관계에 따라 인사를 전횡하는가 하면, 영조의 계비이자 정조에게는 할머니가 되는 정순왕후가 독단적인 한글 전교를 통해 후궁을 간택한다고 하자 자신의 누이를 원빈으로 들이는 등 무리한 권력 강화를 시도하였다.

홍국영 몰락의 직접적 원인은 확실하지 않다. 원빈이 왕비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믿어 이를 보복하려고 왕비의 음식에 독약을 넣다가 발각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48][51] 그러나, 홍국영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이 지나치게 권력을 탐한 것과, 외척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억제하는 정조의 정책에 반해 스스로가 외척이 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52] 현경왕후는 《한중록》에서 원빈이 죽자 홍국영이 효의왕후를 의심하여 내전의 나인을 함부로 국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53],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 담(憺)을 앞세워 왕위계승권에 관여하려 한 것도 정조가 홍국영을 축출한 원인이 될 것이다.[52]

1779년(정조 3년) 홍국영은 도승지를 사임하였고[54] 정조는 홍국영에게 백마와 금전을 선물로 주며 낙향시켰다.[55] 홍국영은 낙향한 이후 탄핵 상소가 이어져 강원도 횡성 강릉 등지로 방출되었다가 1781년(정조 5년) 사망하였다. 정조는 홍국영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 사람이 이런 죄에 빠진 것은 참으로 사려(思慮)가 올바른 데 이르지 못한 탓이다. 그가 공을 세운 것이 어떠하였으며, 내가 의지한 것이 어떠하였었는가? 처음에 나라와 휴척(休戚)을 함께한다는 것으로 지위가 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았기에 권병(權柄)을 임시로 맡겼던 것인데, 그가 권병이 너무 중하고 지위가 너무 높다는 것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삼가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서 오로지 총애만을 믿고 위복(威福)을 멋대로 사용하여 끝내는 극죄(極罪)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이는 나의 허물이었으므로 이제 와서는 스스로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스스로를 탓하였다.[56]

왕권강화와 정치개혁

규장각

정조는 홍국영의 실각 후 탕평책을 바탕으로 직접 정치를 이끌었다. 그러나 집권 초기 반대파에 둘러쌓여 있던 정조에게는 친위세력이 없었다. 정조는 자신의 뜻에 따를 문신을 육성하기 위하여 규장각을 설치하는 한편 군영을 개혁하여 국왕의 병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장용영

《무예도보통지》의 삽화

"없는 군사는 도태시키고 낭비되는 군량은 줄여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새롭게 장용영을 세우는 대신 기존의 5군영에서 수어청 총융청의 폐지를 관철시키는 한편, 군영의 장군 임명은 병조판서를 통해 임금이 재가하도록 하여 군 인사권에 대한 국왕의 통제권을 강화하였다.[77] 기존의 5군영은 외척을 비롯한 여러 권신들에게 장악되어 있었고 인사권 또한 사실상 임금에게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조는 이를 일원화하고자 하였으나 창설의 목적과 규모가 서로 달라 이를 통합하기가 쉽지 않자 새롭게 군영을 만들게 된 것이다.[78]

정조는〈병학통〉을 직접 지어 군사 훈련을 중요시 하였고, 정기적인 훈련을 감독하는 한편 직접 군사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30 명에서 출발한 장용영은 수원으로 진영을 옮긴 뒤 18,000 명까지 늘어났다.[79] 장용영의 장교는 무과를 통하여 선발하였는데, 양반의 서얼과 평민 가운데에서도 급제자가 많았다.[78] 또한, 정예병의 훈련을 위해 규장각 검서인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장교인 백동수에게 훈련교본인 《무예도보통지》를 간행하도록 하고[80], 1795년(정조 19년) 이순신의 글을 모아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하면서 이순신의 일기들을 모아 《난중일기》라고 이름붙였다.[81]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 세자의 헌릉원을 수원에 이장한 뒤 수원 화성을 축조하고, 능행을 명분으로 자주 거둥하였는데, 1795년(정조 19년) 을묘 원행에서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수원에서 과거를 열어 대소 신료와 군사를 이끌고 대규모 원행을 하였다. 장용영의 군사들을 수반한 을묘 원행은 군주의 힘을 대내외에 과시한 것이었다.[82] 이때의 원행을 기록한 그림이 〈정조 대왕 능행 반차도〉로 경기감사가 앞을 서고 채제공이 그 뒤를 이었다. 반차도에는 모두 1,779명의 인물과 779마리의 마필이 등장하고 있다.[83] 장용영은 정조의 각별한 관심 속에 정예군으로 성장하였으나, 정조 사후 순조를 대리하여 수렴청정을 한 정순왕후에 의해 해체되었다.[84]

화성능행반차도(부분). 가마에 쓰인 자궁(慈宮)이라는 표식은 현경왕후다.

배다리

문득 연산군 시대를 연상시키는 배다리를 한강에 놓는다. 연산군 시대의 배다리는 조운(漕運)에 쓰이는 한강[85] 물길을 오래도록 막는다는 평(評)이 있어서,[86] 정조는 70칸짜리[87] 창고를 지어[85] 배다리에 건설에 필요한 자제와 장비를 보관하며 재활용하여 설계를 발전시켰다.[86] 상설 기관인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하여 배다리를 관리하였고, 헌릉(獻陵)·영릉(英陵)·영릉(寧陵)에 갈 때 광나루에 배다리를 놓았다.[88]

 

 

https://blog.naver.com/kydong47/223233338497

 

혜경궁 홍씨 奉壽堂(봉수당) 진찬연, 회갑연

진찬연(進饌宴) http://www.jonghap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46532 http://dh.aks.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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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jonghap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46532

 

수원화성문화제 - ‘혜경궁 홍씨 진찬연’ - 경인종합일보

[수원=경인종합일보 김형천 기자] 수원화성문화제 - ‘혜경궁 홍씨 진찬연’ 수원화성문화제의 또하나의 볼 거리 ‘혜경궁 홍씨 진찬연’이 23일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재현됐다....

www.jonghapnews.com

 

http://dh.aks.ac.kr/~heritage/wiki/index.php/%EB%B4%89%EC%88%98%EB%8B%B9

 

봉수당 - HeritageWiki

해설문 국문 1789년(정조 13) 건립 1997년 복원 화성행궁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인 정당이다. 1789년(정조 13)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로 옮겨오면서 고을 수령이 나랏일을 살피는 동헌(東軒)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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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9년(정조 13) 건립
  • 1997년 복원

화성행궁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인 정당이다. 1789년(정조 13)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로 옮겨오면서 고을 수령이 나랏일을 살피는 동헌(東軒)으로 짓고, 장남헌(壯南軒)이라 불렀다.

1795년(정조 19) 혜경궁의 회갑연을 거행하며 이곳에서 잔치를 벌이게 되자 이름을 봉수당으로 고쳤다. 궁궐에서는 대비나 상왕이 머무는 건물에 한정하여 목숨 수(壽) 자나 길 장(長) 자를 붙이는데 정조는 어머니를 위해 이름을 높여 지었다. 봉수당 뒤로는 새로 장락당을 지어 혜경궁의 거처로 삼았다.

건물은 정면 7칸의 길고 단정한 모습이며 내부에는 일반 동헌과 같이 대청과 방을 두었다. 넓은 마당 한 가운데는 왕이 지나는 어로를 두고 건물에 월대를 마련하고 마당 북쪽 행랑에는 누상고를 지어 문서와 물품을 보관했다. 누상고는 동헌에서 흔하게 설치하지만 어로와 월대는 행궁 정당인 봉수당에서만 볼 수 있는 시설이다.

1795년 윤2월, 혜경궁의 환갑잔치를 열던 날에는 봉수당 앞에 넓은 무대를 설치하고 춤과 음악을 연주하며, 서울에서 왕을 모시고 내려온 문무백관이 마당 가득 들어앉아 음식을 즐겼다.

국문 수정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이다. 정조 13년(1789)에 고을 수령이 나랏일을 살피는 동헌(東軒)으로 지었다. 처음 이름은 장남헌(壯南軒)이었으나 1795년 혜경궁의 회갑연을 계기로 봉수당으로 이름을 고쳤다. 궁궐에서는 대비나 상왕이 머무는 건물에 목숨 수(壽) 자나 길 장(長) 자를 붙이는 전통이 있어,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이름을 고친 것이다.

건물은 정면 7칸으로 일반 동헌과 마찬가지로 대청과 방을 둔 구조이나, 마당 한 가운데에는 왕이 지나는 길인 어로를 두었고 건물 앞에는 넓은 기단인 월대를 갖추었다. 어로와 월대는 일반 동헌에는 없고 임금이 머무는 공간에만 설치하는 시설이다. 1795년 윤2월, 혜경궁의 회갑잔치가 열리던 날 봉수당 월대 앞에 넓은 무대를 설치하고 춤과 음악을 연주했다. 당시 행사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FezU9Wyq_8

 

 

https://www.youtube.com/watch?v=rjI1hnJ92Ac

 

 

 

https://www.youtube.com/watch?v=mf-boYRZCro

 

 

 

https://namu.wiki/w/%ED%99%94%EC%84%B1%ED%96%89%ED%96%89%EB%8F%84%20%EB%B3%91%ED%92%8D

 

화성행행도 병풍 - 나무위키

<화성행행도병풍>은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이하여, 정조 19년(1795년) 윤 2월 9일부터 8일간에 걸쳐 모친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화성의 현륭원(顯隆園)을

namu.wiki

 

[시사뉴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민주당 진교훈 후보 당선/ 17.15%p 격차

 진교훈 56.5% 김태우 39.4%..민주 '낙승'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791017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진교훈 후보 당선…17.15%p 격차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진교훈 후보가 당선됐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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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kydong47/223220699537

 

단군신화, 古朝鮮[王儉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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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문헌기록

2.1. 《구삼국사》(舊三國史)

2.2. 《삼국사기》(三國史記)

2.3. 《삼국유사》(三國遺事)

2.4. 《제왕운기》(帝王韻紀)

2.5. <조연수(趙延壽) 묘지명>

2.6. 《설암잡저》(雪巖雜著) <묘향산지>(妙香山誌)

2.7. 《응제시주》(應濟詩註)

2.8.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2.9.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2.10. 《금오신화》(金鰲新話)

2.11. 《청학집》(靑鶴集)

2.12. 오계일지집(梧溪日誌集)

3. 구전문학

3.1. 향산제

3.2. 환인, 환웅과 연결이 없는 단군 신화

3.3. 구빈마을 전설

3.4. 구미호 관련 전설

4. 관련 유적

4.1.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

4.2. 마니산(摩利山) 참성단(塹星壇)

4.3. 전등산(傳燈山) 삼랑성(三郞城)

5. 신화소

5.1. 환인

5.2. 박달나무(檀樹)

6. 단군신화의 지리

2.2.삼국사기》(三國史記)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夲校勘 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다.

2.3.삼국유사》(三國遺事)

古朝鮮【王儉朝鮮】

고조선【왕검조선】

魏書云 "乃徃二千載 有壇君王倹, 立都阿斯逹【経云 無葉山. 亦云 白岳, 在白州地或 云 在開城東 今白岳宮是.】開國號朝鮮 與髙同時."

《위서》(魏書)에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서, 아사달(阿斯逹)[원주1]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불렀으니 고(高: 요 임금)[6]와 같은 때였다."라고 하였다.[7]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庻子桓雄 數意天下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徃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即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糓·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고기》(古記)에는 "옛날에 환인(桓因)[원주2][9]의 서자[10] 환웅(桓雄)이 있어서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구하기를 탐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고 가서 그곳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웅은 무리 3,000명을 이끌고 태백산정(太伯山頂)[원주3]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왔으니, 그곳을 신시(神市)라 부르고 이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부른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운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니 무릇 인간의 360여 일들을 주관하여 세상에 있으며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遺霊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軰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 而婚之孕 生子號曰 壇君王倹.

이때 한 범과 한 곰이 있어서 같은 굴에 살았는데, 항상 신웅(神雄)[12]에게 기도하기를 변화하여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이때 신이 신령한 쑥 한 줌과 마늘[13] 20매를 주면서 '너희가 이것을 먹으면서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모습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범이 받아서 이를 먹고 삼칠일(三七日: 21일) 동안 삼갔더니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지만 범은 삼가지 못해서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함께 혼인을 맺지 못하므로 매양 단수(壇樹) 아래에서 아이 가지기를 바라며 빌었다. 웅이 이에 가화(假化)하고 그와 혼인하여 아이를 배니 아들을 낳으므로 단군왕검이라 불렀다.

以唐髙即位五十年庚寅【唐堯即位元年 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都平壤城【今西亰】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逹,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旀逹.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即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亰 後還隠於阿斯逹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歳.

당고(唐高) 즉위 50년 경인(庚寅)[원주4][15]평양성(平壤城)[원주5]에 도읍하여 처음으로 조선(朝鮮)이라 칭했다. 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또는 궁홀산(弓忽山)[원주6]이나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다스림이 1,500년이었다. 주(周) 호왕(虎王: 주무왕)[18] 즉위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阿斯達)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었다. 나이는 1,908세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기이> 제1 -고조선(왕검 조선)-

壇君記云 '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 有産子名曰 夫婁.' 今拠此記 則解慕漱私河伯之女 而後産朱蒙 壇君記云 '産子名曰 夫婁.', 夫婁與朱蒙 異母兄弟也.

《단군기》(檀君記)에는 '군(君;단군)이 서하(西河) 하백(河伯)의 딸과 더불어 혼인하니,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夫婁)라고 하였다.'고 했다. 지금 이 기록[19]에 따르면 해모수(解慕漱)가 하백의 딸과 사통해서 뒤에 주몽(朱蒙)이 났다고 하고, 《단군기》에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고 하였다.'고 하니, 부루와 주몽은 어머니가 다른 형제이다.

《삼국유사》 <기이> 제1 -고구려-

2.4.제왕운기》(帝王韻紀)

  • 이승휴(李承休), 1287년.

初誰開國啓風雲 / 처음 누가 나라를 열고 풍운을 시작했나?

釋帝之孫名檀君 / 제석(帝釋)의 손자로 이름은 단군(檀君)이라.

本紀曰 "上帝桓因有庶子曰 雄. 云云. 謂曰 '下至三危太白 弘益人間歟.' 故雄受天符印三箇 率鬼三千 而降太白山頂 神檀樹下. 是謂檀雄天王也. 云云. 令孫女飮藥 成人身, 與檀樹神婚 而生男 名檀君. 據朝鮮之域爲王, 故 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穢與貊 皆檀君之壽也. 理一千三十八年 入阿斯達山爲神, 不死故也."

본기(本紀)》에는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가 있어 웅(雄)이라 하였다. 운운. 이르길 '삼위태백(三危太白)으로 내려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겠습니다.'라 하므로, 웅이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귀(鬼) 3,000명을 이끌고 태백산정(太白山頂)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왔다. 이를 단웅천왕(檀雄天王)라고 부른다. 운운. 손녀에게 약을 마시게 하여 사람의 몸으로 만들고, 단수신(檀樹神)과 더불어 혼인시켜서 남자를 낳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조선(朝鮮)의 영역에 웅거하여 왕이 되었으니, 고로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예(濊)와 맥(貊) 모두가 단군의 후손이다. 다스린 것이 1,038년이고 아사달산(阿斯達山)으로 들어가 신(神)이 되니, 죽지 않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竝與帝高興戊辰 / 고(高: 요임금)와 함께 나란히 무진(戊辰)에 흥하여,

經虞歷夏居中宸 / 우(虞: 순임금)를 지나 하(夏)를 거쳐 대궐에 살다가

於殷虎丁八乙未 / 은(殷) 호정(虎丁: 무정) 8년 을미(乙未)[20]

入阿斯達山爲神 /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이 되었네.[21]

亨國一千二十八

/ 나라를 향유함이 1,028년인데

無奈變化傳桓因

/ 어쩔 수 없이 변화하여 환인(桓因)에 전했으나

却後一百六十四

/ 도리어 164년이 지난 뒤에

仁人聊復開君臣

/ 어지신 분(기자)[22]이 군신(君臣)을 다시 열었도다.[23]

《제왕운기》 하권

《제왕운기》의 기록은 대체로 《삼국유사》와 비슷하지만 다소의 차이가 있다. 우선 환웅의 이름을 단웅으로도 기록하고 있으며, 호랑이와 곰의 설화는 없고, 단웅의 손녀[24]가 약을 먹어 사람으로 변한 뒤 단수신[25]과 소통하여 낳은 것이 단군으로 되어 있다. 이는 천손이 모계로 이어진 특이한 사례이다.

또한 뒤이어 부여비류국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 놓았다.

(전략)신(臣)이 일찍이 상국(上國)에 사자로 갔을 때 요하 가에 있는 노변(路邊)에 무덤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부여 부마(駙馬)대왕의 무덤이다'라고 하였다. 또 가탐(賈耽)[26]은 "큰 평원의 남쪽의 압록(鴨綠)은 모두가 부여의 옛 땅이니 북부여란 것은 마땅히 요하 가에 있었을 것이다. 그 개국(開國)은 대개 후조선으로부터 지금에 이르렀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동명 본기》에서 적기를, "비류왕 송양이 일러 말하길 '나는 선인의 후예로 대대로 왕이 되었다. 금일 그대는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부용이 되는 게 어떠하겠는가?'라고 한 것은 이 또한 단군의 후손이 아니겠는가?"(比流王松壤謂曰 予以仙人之後 累世爲王 今君造國日淺. 爲我附庸可乎 則此亦疑檀君之後也)라고 하였다.

《제왕운기》문화콘텐츠닷컴 사이트, 김경수 역 .

《檀君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 名雄,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降太白山神檀樹下, 是爲檀雄 天王。 令孫女飮藥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立國號曰朝鮮。 朝鮮、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濊與貊, 皆檀君之理。

2.9.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雄)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藥)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南北沃沮), 동·북 부여(東北扶餘), (濊)와 (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 中 《단군고기

4. 관련 유적

4.1.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

4.2. 마니산(摩利山) 참성단(塹星壇)

4.3. 전등산(傳燈山) 삼랑성(三郞城)

5. 신화소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古記)》의 단군 신화를 어느 정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 환인서자: 여기서 서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장자, 서자 개념이 아니라 고대 문헌 기록에는 "아들"," 태자를 가르치는 스승" 등의 의미로 고대 사서에 사용한 예가 있다.
  • 환웅: 천손강림의 모티브를 반영하고 있다. 반고 신화를 비롯하여 중국에서는 땅에서 신이 등장하지만 단군 신화에서는 천상의 환웅이 땅으로 내려왔다는 점에서 고대 한국과 중국의 계통상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천손 강림 신화는 한민족 뿐 아니라 주로 동북아시아 유목 민족에게서 나타나는 신화 유형이며 고대 한반도인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건국 신화까지 이어진다.
  • 삼위 태백: '3개의 봉우리가 있는 태백산'이라는 해석도 있고, '삼위산과 태백산'이라는 해석도 있다. 오늘날의 평안북도요동 반도 사이에 있는 으로 추측.
  • 천부인 세 개: 천부인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청동기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입장에서는 정권을 상징하는 (비파형) 동검, 제사를 상징하는 거울, 풍요를 상징하는 방울 등으로 추정한다. 최남선이 일본 신화의 삼신기(세가지의 신기)와 엮기 위해 만든 가설이다.
  • 태백산: 일연은 묘향산으로 비정했는데, 이는 대동강을 대동맥으로 삼는 평양 중심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고조선이 요동에서 출범했으며 단군 신화가 이를 반영하고 있다는 입장에서는 요동 ~ 압록강 일대의 여타 산을 지목한다.하지만 현대 한국인의 일반적 인식에서는 보통 백두산으로 비정된다.
  • 신단수(단수): 이그드라실과 같은, '하늘과 땅을 잇는' 나무의 모티프를 상징한다. 일연은 '제단 단(壇)'을 사용했으나, 후대의 기록에서는 '박달나무 단(檀)'을 사용하여 해석이 나뉜다.
  • 풍백, 운사, 우사: 각각 바람, 구름, 비를 상징하며, 농경 사회의 관념을 반영한다. 참고로 한국 고유의 신 명칭이 아니라 일연 대에 중국의 신 이름을 끌어온 것으로, 후대에 윤색되거나 단순히 그 뜻을 표현하기 위해 한자어가 선택된 것이다.
  • 범 한마리: 환웅 집단과 교화를 이루지 못한 집단으로 만주와 한반도 북쪽에서 거주하는 토착민일 가능성이 높다. 호랑이를 숭상하는 기록이 있어 '동예'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현재도 한반도 동쪽 러시아 극동지역 연해주에는 호랑이를 숭배하는 소수민족 우데게이족[34]아무르강 근처에는 곰을 숭배하는 소수민족 니브흐족이 살고있어 그 흔적이 유지되고 있다.
  • 곰 한 마리: 곰을 숭상하는 집단으로 비정되며, 만주와 한반도 북쪽에서 거주하는 토착민일 가능성이 높다. 이주민에 순응한 집단으로 상정된다. 함경도 지방 전설에 나오는 토착 민족인 마고할미 세력과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민족 기원설 중 가장 유력한 남북 이중 형성설[35]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
  • 단군 왕검: 이주민인 환웅 집단과 '곰을 숭상하는 집단' 부족이 결합한 결과물로 비정되며, 환웅 집단에서 추대된 통치자. '단군'을 제사와 관련된 권위로, '왕검'을 정치 지도자로 추정하여 제정일치 사회라고 보는 해석이 주류이다.
  • 당고(중국 임금)가 즉위한 지 50년: 당시 중국의 달력으로 계산하면 기원전 2333년 10월 3일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국의 청동기 문명과 중국 청동기 문명의 발흥 사이에는 천 년 이상 차이가 있으므로, 후대에 한국사와 중국사의 연대를 맞추기 위해 끌어올린 연대라고 추정한다.
  • 평양성: 지금 북한의 수도인 평양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고려의 서경(지금의 평양)이 단군신화의 평양과 동일한 곳이라고 해서 그렇다. 하지만 고조선 건국시의 최초 중심지는 요서나 요동으로 추정되므로 평양성이 지금의 북한의 평양일 가능성은 없다.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으로 이동하면서 단군신화도 평양중심설화로 바뀌었다고 보면 된다. 또는 이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은 맞고, 단군신화가 평양 지역의 어떤 집단에 대한 신화였던 것이 고조선 건국신화로 덮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단군조선은 부정된다.
  • 백악산 아사달: 충청북도 괴산에 있는 백악산이 아니라 요동 근처의 어느 산이다.[36]
  • 1500년 동안 다스렸다: 당연히 실제 통치자의 수명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 통치자의 위대함을 주장하기 위한 후대의 윤색이다. 관련 기록들을 볼 때 신선 사상이 융화된 것으로 보인다. 또는 왕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기자: 현재 기원전 4세기경부터 존재했음이 확인되는 기자조선 전승을 반영한 것이나, 한국 학계에서는 고고학적 문제점 등을 이유로 수용하고 있지 않다.
  • 장당경: 황해도 유주에 관련 전승이 남아 있다. 개마고원이라는 설도 있다.
  • 산신이 되었다: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5.1. 환인[편집]

환인(桓因), 환인(桓仁), 혹은 단인(檀因).

제석천, 혹은 상제(上帝)로 여겨진다. 제석천 또한 상제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제석천과 동일시 되는 환인을 상제로 보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 가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일단 제석천의 원래 이름인 인드라를 한역하여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라고도 하는데, '석가(釋迦)'는 '능(能)'이라는 의미[37], '제환(提桓)'은 '천(天)'의 뜻, '인다라(因陀羅)'는 '제(帝)'의 의미를 가진다. 이 '석가제환인다라'를 줄여서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 하며, 이 중에서 '환인(桓因)'을 떼어낸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대해서는 국내 최초 기록자인 《삼국유사》의 책임자가 승려 일연이었기 때문에, 단군을 불교와 섞어버린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반면 윤내현은 유학자였던 이승휴가 불교적 개념으로 《제왕운기》를 서술했을리 없고, 인용한 책도 《본기》로 《삼국유사》와 다르기 때문에 불교적 윤색론을 부정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석가 제환 인다라'에서 단어 첫 자 '제'가 아닌 중간자 '환'을 연결해서 환인이라는 이름을 지어냈다고 보는 것은 억지라는 반론도 있다. 실제 일연 스님은 '제석환인'이라 쓰지 않고, '환인이 있는데 제석이라고도 한다'고 분리해서 적었다.

'하늘님'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불교적 의미를 덧붙혔을 것이라는 설이 있고, 빛, 태양 숭배 사상에서 '환한 님'이 음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환웅은 신라의 차차웅이라는 이름과 연계하여 하늘님보다는 낮은, 땅의 무당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5.2. 박달나무(檀樹)

박달나무는 흔히 못 보고 넘기기 쉬우며 그다지 눈길을 끌지 않지만 단군 신화에서 중요한 상징물이다.

환웅이 내려온 곳이 신성한 박달나무(神檀樹)이며, 단군이 태어난 곳은 박달나무 아래이다. 우리 나라에는 신목(神木)이나 목신(木神) 신앙이 널리 퍼져 있는데, 신(神)이 나무에 내려오거나 나무에서 신인(神人)이 태어나는 것은 이러한 목신 신앙과 이어서 생각할 수 있다.

단군의 이름부터가, 단(檀)은 곧 '박달나무 단'이며 따라서 단군을 "박달나무의 임금"으로 풀이할 수 있다.

박달나무는 자작나무의 일종으로 시베리아와 몽골 등 동북아시아에서 많이 자라며 한민족뿐 아니라 중앙 아시아 유목 민족들도 신성시하는 나무이다.

다만 여러 문헌에서 박달나무 단 대신에 '제단 단(壇)'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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