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디스(아랍어: حديث نبوي)는 무함마드가 말하고(Qaul), 행동하고(Fi'ul), 다른 사람의 행위를 묵인한(Taqreer)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하디스는 꾸란(코란), 이즈마, 끼야쓰와 함께 샤리아(이슬람법)의 4대 원천을 이루며 그 중 꾸란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무슬림은 알라의 말씀인 꾸란과 더불어 하디스에 기록된 무함마드의 언행(순나)에 따라 행동함을 삶의 기반으로 한다. 하디스를 수집한 유명한 이슬람 학자로는 이맘 부카리, 이맘 무슬림 등이 있다. 기독교의 Q문서처럼 종교의 시조의 말을 담은 종교적인 어록인 것이다.
Q자료는 예수의 어록이라고 생각되는 구절들로 이루어진 가상의 기독교 문서를 말한다. Q라는 명칭은 출처 또는 원천을 말하는 독일어의 Quelle에서 유래했다. 주로 예수의 설교를 담은 어록 복음서일 것으로 본다. 공관복음서 문제에 가장 널리 알려진 해법은 Q자료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배경
이슬람교 최초 백년간의 사업상 특색은 무함마드의 언행에 관한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사항을 수집, 전달하는 활동이었다. 이 사업은 자발적인 것으로 정치적 중심지가 아니라 학문의 중심지였던 메디나에서 발전하였다. 당연히 그 지역은 무함마드와 접촉을 가졌던 많은 '교우'들이 모여살던 곳이어서 제1차적인 자료를 얻기에는 매우 적당한 곳이었다. 이슬람 이전의 아랍족 사회에서는 '순나(전통)'가 규범적 가치를 지녀서 각 종족은 그들 조상의 순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이 관념으로부터 초기 이슬람에서는 교단 전체의 순나를 종교와 사회규범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아랍족의 정복사업에 따라서 아랍족이 주둔하게 된 새로운 정복지마다 순나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하디스 학자들은 순나를 무함마드가 설정한 관례에 한정할 것을 주장하고 이 견해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역사
본래 문자로 쓰여진 것은 계시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처음에 하디스는 구전(口傳)으로 전승된 것이었다. 그러나 뒤 이어 율법과 교리를 무함마드의 언행에 연관시키기 위하여 많은 하디스가 유포되었고 각 분파와 정치적 당파는 자기 파에 유리하도록 하디스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교리상·율법상 후세의 시대적 필요에 따라서 하디스의 공급이 성행하게 되었다. 거기서는 유대교·그리스도교에 기원을 둔 훈화,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된 잠언(箴言)까지도 무함마드가 말한 것처럼 꾸며지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순수한 하디스를 엄선하는 방법을 하디스 학자들이 만들어냈다. 그것은 전달자의 세대적 연속을 음미해 보는 방법으로서, 이스나드(isnad)라고 한다. 이 하디스 비판의 방법은 이슬람력 2, 3세기에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샤리아(율법) 형성기에 해당되며, 율법의 필요에 의하여 하디스가 규범으로서 요청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디스의 집대성은 법학의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이슬람력 3세기 초엽(서기 9세기초)에는 법학으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학문체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3세기 중엽(서기 9세기 중엽)에는 법학과 교차하여 이에 비판적 집대성이 확립되고 '사히하(확실한 것)'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하디스의 정전(正典)으로서 권위를 인정받았는데, 편집 형식은 법학자와 신학자를 위하여 신앙과 실천 등 모든 사항에 걸쳐 즉석에서 참조할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다. 그 뒤에도 계속하여 하디스의 편찬사업이 발전하여 동 시대의 여러 가지 문제 해결에 권위를 주기 위하여 새로운 하디스가 편찬되었다.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를 비교하며 역사를 간략히 알아봅니다. 기원전 2000년 경에 중동지방에는 `아브라함`이 살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교에서 믿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조상입니다. '아담' 이후에 '노아' 등의 중요 인물이 있었고 수많은 인류가 번성했지만, 그 민족들 중에서 선택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분리돼 나온 종교이므로, 아브라함은 기독교에서도 역시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차이와 역사 예수와 무함마드]
그런데 이슬람교의 아랍인들도 아브라함을 조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이 장자 계승 문제로 분열되면서, 이스마엘이 아랍의 선조가 되고 이삭이 유대인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원수지만 원래는 뿌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뿌리도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스라엘의 고대는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이었다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차이와 역사 예수와 무함마드]
이삭의 아들 야곱에게는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민족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유다국을 세워서 정통성을 가졌습니다. 이들이 바로 직계 유대인 선조입니다.
그 후, 분열되었던 이스라엘 국이 기원전 770년쯤에 망하고, 남쪽의 유다 국도 기원전 580년쯤에 멸망하였습니다.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유대인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유대교와 기독교 차이
유대교와 기독교가 갈라지게 된 역사적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우리는 이때를 '서기 1년'으로 칩니다. 본격적으로 기독교가 퍼지기 시작한 것은 로마 식민지 시대인 서기 30년 정도입니다.
로마는 기독교인을 잔인하게 죽이며 박해를 했지만, 서기 300년대에 결국 로마도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전 유럽이 가톨릭교가 되는 역사를 맞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종교개혁을 외치는 프로테스탄트 개신교의 시작. 예수와 무함마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차이와 역사]
기독교가 유럽에 뿌린 내린 후, 1520년대의 '마틴 루터'라는 신부와 1530년대의 '장 칼뱅'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종교개혁을 주장했는데, 그 결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신교도)파'가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도 다시 갈라지는데, 우리는 '천주교'와 '개신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국, 미국, 북유럽은 개신교 신자가 많으며 남유럽, 남미는 천주교 신자가 많습니다.
역사적인 기독교와 이슬람교 차이
유대교가 시작된 중동에서는 서기 600년쯤에 '무함마드'가 나타나면서 이슬람교 역사도 시작되었습니다. 원래 아랍지역은 "다신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이 들어와 살면서 "유일신"의 영향이 생겼습니다.
무함마드는 유일신 사상을 받아들여 알라신만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알라'는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을 뜻합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도 '쿠란'에 공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마호메드,무하마드)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차이와 역사 예수와 무함마드]
사우디아라비아를 영토로 삼은 무함마드가 죽은 후 '칼리파' 시대가 되면서 지금의 중동과 아프리카 북부, 그리고 스페인까지 영토를 넓혔습니다.
이슬람교는 아랍과 북아프리카, 동남아시아에 많은 신자가 살고 있습니다. 아랍과 아프리카가 영토 정복을 통해 이슬람교가 전파된 곳이라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시아는 선교를 통해 전파된 곳이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 충돌 이유/ 수메르 문명
유대교와 기독교 차이는 중동의 유대교가 유럽으로 건너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차이는 유럽과 아랍이라는 지역적, 문화적 차이에 있습니다. 이슬람교와 유대교 차이는 역사적 생존 과정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들 종교는 모두 형제입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기본 역사가 같은 구약성경을 보고 있으며, 유일신과 구원의 메시지를 함께 합니다.
쿠란 3:7 에는 “그대에게 그 책(쿠란)을 계시한 분이 하나님이시며 […] 우리는 그것(쿠란)을 믿나이다 모든 것/전체는 우리의 주님으로부터 왔나이다”라고 적혀 있다. 즉, 이슬람 신앙의 근본은 쿠란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쿠란에서 맥락적 이해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그만큼 성서가 부분적인 이해만으로는 잘못 이해되고 잘못 해석되기 쉽다는 것이다. 따라서 쿠란은 전체적인 의미를 왜곡하고 구절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을 “비유적인 것을 따라 이설을 조성(쿠란 3:7)”하는 사람들이라 칭하면서 그들을 비난한다. 이슬람 혐오주의자들 혹은 극단주의자들이 이슬람 신앙과 거리가 먼 원리에 입각하는 이유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용이한 구절만 선별하여 쿠란을 잘못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쿠란에는 분명 “그들을 발견한 곳에서 그들을 살해하라 (2:191)“라는 구절이 있다. 이슬람이 폭력적인 종교라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애용되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 단편적인 구절을 전체적인 맥락 (2:190-194) 속에서 읽는다면 의미는 달라진다.
190. 너희에게 도전하는 하나님의 적들에게 도전하되 그러나 먼저 공격하지 말라 하나님은 공격하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으시니라
191. 그들을 발견한 곳에서 그들을 살해하고 그들이 너희들을 추방한 곳으로부터 그들을 추방하라 박해는 살해보다 더 가혹하니라 그들이 하람사원에서 너희들을 살해하지 않는 한 그들을 살해하지 말라 그러나 그들이 그것에서 살해할 때는 살해하라 이것은 불신자들에 대한 보상이라
192. 만약 그들이 싸움을 단념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관용과 은총으로 충만케 하시니라
193. 박해가 사라질 때까지 그들에게 대항하라 이는 하나님을 위한 신앙이니라 그들이 박해를 단념한다면 우매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적대시 하지 말라
194. 살생이 금지된 살은 성스러운 달이거늘 살생을 금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공격할 때는 그들이 공격했던 것처럼 그들을 공격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공경하라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신앙인들과 함께 하시니라
하디스에서는 “나의 뒤에 유대인이 있다 와서 그를 죽여라”라는 부분이 있다. 이슬람이 반유대주의적인 종교임을 입증하려고 할 때 흔히 이용되는 구절이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로부터 전해내려온 구두 보고인 하디스는 매우 복잡하다. 하디스에 대한 서술은 다양하며, 하나의 버전에서 기록된 특정 서술이 실제로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 서술의 모든 전달 연결고리들을 세심히 검토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위에 언급된 유대인과 관련된 기록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도 관련된 모든 전달 연결고리를 검토하는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문제의 하디스에 대한 다른 버전의 서술들을 찾아보면, 이 부분은 예수의 부활과 예수 대 다짤(Dajjal; 반 메시아적 인물) 간의 종말론적 투쟁을 묘사하는 ‘심판의 날’에 대한 이야기의 일부이다[3]. 이 이야기는 전쟁에 임하는 두 군사 집단 간의 투쟁에 대한 내용이며, 한 쪽은 명백히 정당하지 못한 집단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이 아닌 것으로 서술된다. 나아가 종교 간의 투쟁도 아니다. 무슬림들은 사실상 모든 의로운 기독교인, 유대인 및 무슬림은 모두 단합하여 ‘심판의 날’에 예수를 따를 것이라고 믿고 있다.
문제의 하디스 기록이 가리키는 유대인은 ‘심판의 날’ 투쟁하는 두 군사 집단 중 의롭지 못한 다짤(Dajjal) 집단의 한 구성원이다. 다짤 집단은 다짤을 신으로 섬기는 7만여 명의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대인들의 인구 중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대부분의 유대인은 무슬림들 및 기독교인들과 함께 아브라함계의 3대 신앙(Abrahamic Faiths)을 이루어 다짤 집단과 투쟁하는 의로운 군사 집단에 속한다. 결국 하디스가 가리키는 사람은 무고한 민간인이 아니라 바로 이 다짤 집단의 병사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짤 집단의 종교적 정체성은 무슬림들을 포함한 모든 종교의 악인들이다. 하디스에서 언급된 사람이 다짤 집단의 구성원 중 하필 유대인인 것이며, 그는 문맥상 다짤 병사를 대표하기 때문에 “나의 뒤에 유대인이 있다 와서 그를 죽여라“라는 부분은 “나의 뒤에 진리를 거역하는 자가 있다” 혹은 “나의 뒤에 다짤 병사가 있다“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하디스에는 '유대인을 살해해도 된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의 하디스를 근거로 이슬람의 반유대주의 성격을 주장하는 이슬람 혐오주의자들 혹은 극단주의자들은 하디스의 특정 기록에 대한 문맥을 도외시하여 이슬람 신앙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해석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수메르(Sumer)는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남쪽 지방으로 오늘날 이라크의 남부 지역이다. 수메르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수메르인은 대략 기원전 5,500년에서 기원전 4,000년 사이부터 수메르 지방에서 살기 시작하였다.[1]
수메르 문명이 가장 융성했던 때는 기원전 제3천년기로, 역사학자들은 통상적으로 이 1000년의 기간을 크게 초기 왕조 시대(2900?~2350? BC), 아카드 왕조 시대(2350?~2150? BC), 우르 제3왕조 시대(2150?~2000? BC)의 세 시대로 구분한다.[2]
"수메르인"이란 말은 그들의 뒤를 이은 아카드인이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에 사는 사람을 부르던 말이었다.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을 웅 상 기가(ùĝ saĝ gíg-ga, 음성학적으로 uŋ saŋ giga) "검은 머리 사람들"[4]이라고 불렀고, 그들의 땅은 키엔기르(Ki-en-ĝir) "수메르말을 쓰는 사람들의 땅"[5][6][7]이라고 불렀다. 아카드어 "수메르"는 아마도 이것의 방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왜, 아카드인들이 이 남쪽 땅을 "수메르"[5][7] 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성경의 "시날"(Shinar), 이집트의 "신그르"(Sngr), 히타이트의 "산하르"(Sanhar)는 모두 "수메르"의 서방 방언으로 볼 수 있다.[5]
1792년(정조 16) 1월 24일, 정조가 현륭원에 참배하기 위해 한강 배다리를 건널 때 수행하면서 이 시를 지었다. 배다리의 제작 과정과 구조를 간단히 서술하고, 정조가 매년 봄 화성의 현륭원으로 참배하러 가는 효성을 예찬하였다. 정조는 1월 25일 현륭원에 참배하고, 1월 26일 환궁하였다.
용주사의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佛說大報父母恩重經板)은 목판 42판, 동철판 7판, 석판 24판의 세 종류가 있다. 모두 73판으로 1796~1799년 사이에 조성되었다. 목판은 변상도, 과판(科判), 한문본, 국문본 등이 양면으로 양각되어 있으며, 동철판은 변상도 7판이 단면에 양각되어 있다. 특히 목판의 도각(刀刻)형태까지 동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석판은 과판과 한문본 등으로 단면에 음각되어 있다.
이 경판들은 정조의 명으로 조성되어 주자소에 내입(內入)되었다가 화성 용주사에 보내진 기록이『주자소응행절목(鑄字所應行節目)』에 수록되어 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은 매우 정교하고 장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변상도에는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의 화풍이 고스란히 살아남아 있으며 본문은 당대의 명필이던 오수(寤修) 황운조(黃運祚, 1730~1800) 서풍(書風)의 명품 경판(經版)이다.
오늘날 용주사 간행의『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전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것은 정조의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혼심을 쏟아 조성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 종류의 경판들은 당대 최고 장인들의 예술성까지 곁들여져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더욱이 보존상태가 온전하다는 점, 18세기 말의 국어사 자료가 된다는 점, 이전의 판화와는 달리 경판의 변상도는 공간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 등에서 가치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