於戱師之道其詣於極者與 佛祖合

其寓於跡者若張子房之受書於神

釋寳誌之預言未兆

一行之精貫術數者耦歟

師所傳陰陽說數篇世多

有後之言地理者皆宗焉

銘曰

오호라! 스님의 도덕은 극치에 이르러 佛祖와 더불어 합일하였으며,

자취를 나타낸 것은 마치 장자방이 神으로부터 兵書를 받은 것과 같고,

釋寶誌公 스님이 징조가 나타나기 이전에 예언한 것은

一行禪師가 음양 術數에 정통한 것과 같은 것이다.

스님께서 전하신陰陽說 數篇이 세상에 많이 유포되었는데,

후세의 지리가들이 모두 이것을 依宗하였다.

명(銘)하여 가로되,

過去諸佛

有微妙法

非文字詮

非思修攝

지난 세상 나타나신 모든 부처님!

無上甚深 微妙法을 연설했으니

그 법문은 文字로써 다툴 수 없고

聞思修인 三慧로도 얻지 못할새        ①

超然直指

一念千刼

惟我國師

優入其域

直指人心그 자리는 초연한 境地

一念卽是 千劫이라 長短이 없네!

위대하신 고려조의 우리 國師여!

禪悅世界 우유하게 自在하시네.        ②

善學無學

眞空不空

眞正法眼

四闢六通

達磨宗旨 禪思想을 善學하시어

眞空이나 空아니고 有도 아닐새

투철하신 眞正法眼 터득하시고

四通으로 자재하신 六神通이여!        ③

推其緖餘

寓數術中

不憑蓍筮

懸解無窮

無碍自在 확철하온 그 여력으로

陰陽數術 兼硏하여 교화하시다.

시서(蓍筮)로써 점복함을 依支치 않고

사건전에 미리 알아 적중하도다.        ④

舊邦俶擾

新命猶閟

先終知終

未至知至

후삼국을 평정하지 못하였으며

天의 명령 아직까지 닫혀 있으나

오래전에 지나간 일 모두 알았고

미래일을 미리 알아 예언하였다.        ⑤

譔書預獻

國祚攸始

作周興漢

如掌斯指 

책을 지어 王隆에게 전해 주면서

고려국이 개국됨을 예언하였다.

周文王이 周나라를 건국하듯이

후삼국을 통일함이 손 펴듯 하다.        ⑥

聖人聿起

膺籙受圖

乃眷所屬

發之自吾人

지리산속 구령에서 異人을 만나

地理書인 金壇玉笈 전해 받았다.

그로부터 각종 음양 연구하여서

上通天文 下達地理 自在하였네!         ⑦

雖隔世事

若合符殊

功偉績與

山河俱歷

장자방과 도선국사 때는 다르나

두 사람이 예언함은 다르지 않네!

위대하신 그 공적은 비길 데 없고

산하처럼 높고 깊어 다할 수 없다.        ⑧

歲三百

風流如在

瞻仰高躅

掀天磊

열반한 후 오늘까지 삼백년이나

바람 불고 물 흐름은 다르지 않네

높은 德을 瞻仰하는 四部衆이여!

그 도덕이 높고 높아 하늘 같도다.        ⑨

勒碑舊祠

揭示千載

咨爾山君

守護無怠

偉業行狀 돌에 새겨 舊祠에 세워

천년 만년 지나도록 보여주려고

산신령인 山君에게 부탁하노니

길이 길이 수호하여 게을리 마오.   

天德二年歲次庚午七月乙亥九日癸未立

    頴悟三重大師臣處實奉宣刻字

[출처] 🍎🍎도선국사 비기(道詵秘記)|작성자 Paxs

도선의 주요 저서

https://ko.wikipedia.org/wiki/%EB%8F%84%EC%84%A0%EB%8B%B5%EC%82%B0%EA%B0%80

 

도선답산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는 도선이 지었다고 전하는 감여서(堪輿書)이다. 음양지덕(陰陽地德)과 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을 설명하고, 도선의 답산가, 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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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답산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도선답산가 언어 추가 문서 토론 읽기 편집 역사 보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도선답산가 (道詵踏山歌)》는 도선 이 지었다고 전하는 감여서(堪輿書)이다. 음양지덕(陰陽地德)과 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을 설명하고, 도선의 답산가, 산론수파법(山論水破法) 외에 감여론을 수록한 것으로 고려 문종 (文宗)· 숙종 (肅宗)대에 많이 읽혔다고 한다. 전해지는 내용 [ 편집 ] 도선 대사는 그의 어머니가 개천에서 떠내려 오는 오이를 건져 먹고 태어났다고 한다.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는 칠언이구(七言二句)씩 모두 삼십팔련(三十八聯)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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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 대사는 그의 어머니가 개천에서 떠내려 오는 오이를 건져 먹고 태어났다고 한다.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는 칠언이구(七言二句)씩 모두 삼십팔련(三十八聯)으로 구성되어 있다는데 전해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1]

頭圓朱雀如鼓起

(두원주작여고기)

玄武垂頭兩水間

(현무수두량수간)

주작사(朱雀砂·혈처의 앞산)는 북소리 은은히 일어나듯 그 산등성이 원만하고

현무사(玄武砂·혈처의 뒷산으로 주산을 말함)는 두 물길이 모이는 사이에 우뚝 솟았네.

明堂可得容萬馬

(명당가득용만마 )

吉谷正欲平且尖

(길곡정욕평차첨)

그 안에 명당은 가히 만마(萬馬)를 싸안을 만하고

좋은 산곡(山谷)은 평탄함과 첨예함이 조화를 이루어 바르고 온순하구나.

靑龍蛇蛇頭高起

(청룡사사두고기 )

白虎徐行不欲殘.

(백호서행불욕잔)

청룡사(靑龍砂)는 뱀이 꿈틀거리며 고개를 치켜든 듯하고

백호사(白虎砂)는 조급하지 않아 사나운 줄 모르겠구나

ㅡ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중 일부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jogaewon&logNo=220135587123

주작이 북소리와 같이 일어나면

명당으로 일만 마리의 말을 부리고

현무가 양수간에 머리를 드리우면

계곡이 좋고 편안하며 안온 하다.

청룡이 북방으로 어리를 높이 들면

건·곤·감·리 등의 팔수가 충만하고

진사축미 간에 룡을 부리지 않고

백호를 향해 천천히 움직여 해함이 없으나

계축 간의 산 아래에는 자손이 없고

인신사해 간이 또한 막히지 않아

인간에 봉우리가 웅크리고 있으면 호환이 없고

명당 뒤에 돌이 있으면 관직이 따른다.

진사 간에 돌이 쌓여있으면 호환이 두렵고

산 능성이 게 눈 같으면 물난리가 있다.

명당 앞에 돌이 있으면 형벌을 받고

기대는 것이 흉한 돌이면 병난이 없다

자축 간에 오 척 정도의 돌이 있고

분묘 가에 돌이 있으면 마음공부를 이룬다.

미간에 괴이한 돌이 있으면 장녀가 음하고

둘째아들이 고향을 등지는 신세이며

자손은 팔 지옥을 면하기 어렵고

서쪽(兌)에 흉한 돌이 있으면 소녀가 음하다.

두 돌이 활과 같이 굽은 산꼭대기를 이루면 시정이 되어

도시 우두머리와 함께 하나 흐린 날과 진흙땅으로

장자는 불에 잃고 오간에 돌이 떨어진다.

다른 돌이 떠다니면 객사를 하고

대대로 요절하게 된다.

오간에 돌 셋이 있으면 반드시 귀인이 나고

주산이 원만한 봉우리면 장수가 셋 나와

분묘에서 젖이 나와 기운이 이웃 나라를 접한다.

주산이 층층한 봉우리로 구슬을 꿴듯하면

그 가운데 높고 두터운 것이 명당이다.

주산이 층층 봉우리이면 대대로 등과 하고

만대 조에 끊이지 않고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쌍봉이 머리를 들어

앞뒤로 참새가 날아 눈이 피로하면

자손 가운데 뾰쪽한 것에 찔리는 형을 받고

벼슬이 끊어지지 않으며 옳고 마당하게 행해

자손이 문장에 특출한 이가 나온다.

주산이 파쇠 되어 새로운 것을 대하거나

주산의 모습이 파하여 풀이 나지 않은데

거듭해 묶은 무덤을 쓰면 종 사리를 하고

그 땅에 샘이 있으면 음수로

비가 와도 진흙이 없어 말라버린다.

전통이 무너져 부녀자가 해를 입고

슬픔은 많고 기쁨이 적으니 고래로 이어졌다.

주산이 멀고 그 봉우리가 높은데

진사 간에 칼 봉우리가 있으면 형벌을 입고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면 다분히 부귀해

금상 옥포 같은 미인이 나온다.

무해 간에 높은 봉우리는 부귀영화다.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면 노인이 없다.

총명하고 지혜롭고 재주가 있으면 신무 간이 높고

인 묘간의 산이 높으면 귀한 아들이 나온다.

청룡이 중중으로 누각과 같은 지세는

우마가 장성하나 우 간에 호랑이가 엎드려 있고

축미 간이 길게 얽히어 있으면 이치에 밝은 사람이 있고

자손 중에 왕후 됨을 얻는다.

봉우리가 셋으로 우뚝 솟아

두 손을 마주 잡아 읍한 듯 고리를 이루면

산허리에 젖샘이 있으면 직위가 높아지고

좋은 문필가와 문장가를 얻어

부귀와 온전한 이름을 드날린다.

활과 같이 굽은 지세는 부귀하고

용과 호랑이가 구슬을 잡은 듯하면 모두가 부자이며

청룡이 약하고 물이 봉우리로 향하고

백호가 거듭되면 금과 옥을 아우르고

청룡이 뾰쪽해 달리는 듯 하면 고향을 여이고

부귀가 급히 이르러 총애를 받는다.

형세가 수레를 덮은 것 같으면 참으로 아름답고

백호의 봉우리가 원만하면 창고가 생기고

용의 모양이 누각과 반석 같으면 부귀하다

백호의 모양이 굴곡이 심하면 몰록 망하고

봉우리가 셋이면 문장가로 출세한다.

백호가 꽉 꼬여 있으면 여자가 목을 매고

자손이 장차 시정 거렁뱅이가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PtbzZYTKYZo 

 

 

흑산도 예리항

https://www.youtube.com/watch?v=zDe0jCfvbSU 

 

 

https://www.youtube.com/watch?v=Kon63SRo9xM 

 

 

https://www.youtube.com/watch?v=RMgC2hjQAes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95%BD%EC%A0%84

 

정약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약전(丁若銓, 1758년 4월 8일(음력 3월 1일)~1816년 6월 30일(음력 6월 6일))은 조선 후기의 문관, 실학자, 저술가, 생물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천전(天全), 호는 손암(巽庵), 연경재(硏經齋),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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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8년(영조 34년) 음력 3월 1일경기도 광주부 마재(또는 마현(馬峴),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정재원의 두 번째 부인인 윤소온(尹小溫, 윤두서의 손녀)이다. 정약현은 이복형, 정약종과 정약용은 동복동생이다.

정약전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어류백과사전인 자산어보(玆山魚譜) 를 집필함.

 

https://ko.wikipedia.org/wiki/%EC%9E%90%EC%82%B0%EC%96%B4%EB%B3%B4

 

자산어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문서는 책에 관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영화에 대해서는 자산어보 (영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산어보》(玆山魚譜)는 조선시대 영조-순조 당시 학자인 정약전이 1801년(순조 원년) 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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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IkUQfsVl90g 

 

 

https://www.youtube.com/watch?v=JmqNEDJsLeQ

 

 

https://www.youtube.com/watch?v=gtQ7GYW_gxE

 

 

https://www.youtube.com/watch?v=brl51Y9sdJU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3249

 

신유박해(辛酉迫害)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천주교회는 1785년의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등으로 순교자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94년 말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영입하는 등 조직적인 교회활동으로 1800년

encykorea.aks.ac.kr

 

정조는 “사교(邪敎)는 자기자멸(自起自滅)할 것이며 유학의 진흥에 의해 사학을 막을 수 있다.”고 적극적 박해를 회피하였다. 또한 천주교를 신봉하는 양반 남인 시파(時派)의 실권자인 재상 채제공(蔡濟恭)의 묵인도 있었다. 그러나 정조와 채제공이 죽자 정계의 주도세력이 벽파(僻派)로 바뀌면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가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벽파는 남인 시파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대왕대비를 움직여 시파와 종교적 신서파(信西派)에 대하여 일대 정치적 공세를 취하게 되었다.

벽파는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멸륜지교(滅倫之敎)로 몰아붙여 탄압을 가하였다. 또한 그의 배후 정치세력을 일소하고자 1801년 대왕대비 언교(諺敎)로 박해령을 선포, 전국의 천주교도를 수색하였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동원한 수색에서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고 300여 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신유박해의 대표적 순교자로는 중국인 주문모와 초대 교회의 창설자인 지도적 평신도들이었다. 주문모는 한때 피신하였다가 스스로 의금부에 나타나 취조를 받은 뒤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그리고 초기교회의 지도자이던 이승훈(李承薰)·정약종(丁若鍾)·최창현(崔昌顯)·강완숙(姜完淑)·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김건순(金健淳)·홍낙민(洪樂敏) 등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斬首)되었고, 왕족인 송씨(宋氏)주 01)와 신씨(申氏)주 02)도 사사(賜死)되었다. 한편, 지방교회 지도자들도 다수 순교하였다.

내포교회(內浦敎會)의 사도로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은 공주에서, 전주교회의 지도적 교인이던 유항검(柳恒儉)·관검(觀儉) 형제는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유박해(辛酉迫害))]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95%BD%EC%9A%A9

 

정약용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다산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다산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1762년 음력 6월 16일) ~ 1836년 4월 7일(1836년 음력 2월 22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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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1762년 음력 6월 16일) ~ 1836년 4월 7일(1836년 음력 2월 22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는 미용(美庸), 는 다산(茶山)·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문암일인(門巖逸人),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1]

신유박해 사건으로 강진에 유배당함.

 

https://kydong77.tistory.com/21760

 

강진 사의재(四宜齋)/文前대통령,‘사의재’ 출범/정약용,'自笑'

​ ​ https://m.blog.naver.com/edin1115/221706948469?view=img_6 전남 강진 - 사의재(四宜齋) 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230118_0002163258 ​ 강진 사의재(四宜齋)는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1801년

kydong77.tistory.com

 

 

https://kydong77.tistory.com/20875

 

홍도 흑산도/ 정약전(丁若銓), 자산어보(玆山魚譜)

https://www.youtube.com/watch?v=LS9epSlACD4 https://www.youtube.com/watch?v=YzkT5vM4cyY https://www.youtube.com/watch?v=TxHjpXi6_p8 https://www.youtube.com/watch?v=VDhKXteWKu8 https://www.youtube.com/watch?v=gtQ7GYW_gxE https://www.youtube.com/watch?v=Ptb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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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naver.com/flyseohan/221988433289

 

흑산도여행 흑산도 사리 유배문화공원에서 정약전과 최익현을 만나다.

이웃님들 모두 안녕? 연일 하루에도 5~6회식  공공안전정보가 속속 전해지는데 인천과 부천지역 또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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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8년 5월 5일 ~ 1883년 3월 14일

                                   1870년 4월 22일(구력 4월 10일) ~ 1924년 1월 21일

                                                                      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

https://ko.wikipedia.org/wiki/%EC%B9%B4%EB%A5%BC_%EB%A7%88%EB%A5%B4%ED%81%AC%EC%8A%A4

카를 마르크스(독일어: Karl Marx ˈkaɐ̯l ˈmaɐ̯ks[*][2][3], 문화어: 칼 마르크스,

1818.5.5.- 1883.3.14

독일의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정치이론가, 언론인,

공산주의 혁명가

1818년 5월 5일 ~ 1883년 3월 14일)는 독일철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정치이론가, 언론인, 공산주의 혁명가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8%94%EB%9D%BC%EB%94%94%EB%AF%B8%EB%A5%B4_%EB%A0%88%EB%8B%8C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러시아어: 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 본성: 울리야노프·Улья́нов,[1] 영어: Vladimir Ilyich Lenin/Ulyanov, 문화어: 울라지미르 일리이츠 레닌,[2] 1870년 4월 22일(구력 4월 10일) ~ 1924년 1월 21일)은 러시아 제국소비에트 연방혁명가, 정치경제학자, 정치철학자, 정치인, 노동운동가볼셰비키의 지도자였다. 공산주의자이면서도 특별히 마르크스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을 발전시킨 레닌주의 이념의 창시자이다. '레닌(Ле́нин)'이라는 성씨는 혁명가로서 그가 사용하던 가명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C%98%A4%EC%A9%8C%EB%91%A5_%EC%82%AC%EC%83%81

마오쩌둥은 당시 ‘소비에트 노선’이라 불리는 좌경 노선을 비판하고, 코민테른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는 군중과 인민을 지도할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매우 적은 상황에서 노농동맹을 확고하게 유지하고, 세력을 단결할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였다.

마오쩌둥은 중국 현실에 맞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적극적으로 적용하여 당대 중국 공산주의 운동에서의 교조주의 경향을 비판하였다. 그는 1942년 옌안 소비에트에서 《당정풍론》를 발표하여 당내 우경투항주의, 극좌모험주의를 배척하는 일대 쇄신 노선을 새로이 밝혔고, 이후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 사상을 투쟁의 전면에 내세우게 되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가 탈스탈린화를 추진할 때,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고수하는 동시에 소련의 수정주의 노선과 대립한 사상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우경화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 아시아 및 남아메리카 공산주의 정당이 마오쩌둥 사상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C%98%A4%EC%A9%8C%EB%91%A5

마오쩌둥은 후난성 샤오산의 부유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그는 일찍이 반제국주의를 견지했으며 특히 1911년 신해혁명과 1919년 5·4운동 사건의 영향을 받았다. 베이징 대학에서 사서로 일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였고 1927년 추수 봉기를 이끄는 중국공산당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국민당국공 내전이 있던 중 마오쩌둥은 홍군을 지도하였고 장시 소비에트의 급진적인 토지 정책을 이끌었으며, 궁극적으로 중국공산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대장정, 중일 전쟁 당시 국민당과 일시적으로 제2차 국공 합작을 하였으나 일본의 항복 이후 중국의 내전이 재개되었고 마오쩌둥의 군대는 국민당 정부를 패배시켰다.

https://ko.wikipedia.org/wiki/%EB%82%A8%EC%A1%B0%EC%84%A0%EB%A1%9C%EB%8F%99%EB%8B%B9

남조선로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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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로동당
南朝鮮勞動黨
 
약칭
남로당
당직자
당수
역사
창당
해산
선행조직
내부 조직
중앙당사
 
 

남조선로동당(南朝鮮勞動黨, 영어: Workers' Party of South Korea), 줄여서 남로당1946년 11월 23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합당으로 결성된 대한민국공산주의 정당이다. (46년 9월 4일 남로당 준비위원회 결성) 당수는 초대 여운형, 2대 허헌, 3대 박헌영이 맡았다. 기관지로 노력인민이 있었다. 1949년 6월 24일 북조선로동당에 흡수됨. 1949년 6월 30일 조선로동당 결성 ..

남조선로동당의 역사[편집]

좌파운동의 재정립[편집]

1945년 8월 15일 독립 이후 남한에는 여러 좌파 정당들이 있었지만, 정판사위조지폐사건(46년5월) 등으로 조선공산당의 활동은 거의 정지상태(공식적으로 불법화)에 있었으므로(민전의 활동이 지하화), 남한 내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력을 재정비하기 위하여 3당(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을 합당하여 '남조선로동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여운형이 초대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부위원장 박헌영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당내 주도권 장악문제로 여운형과 박헌영은 지속적으로 갈등하였고, 박헌영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선을 비판하자, 여운형은 탈당하고 후에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였다.[1]

1946년 12월 2일, 허헌은 기자회견에서 사로당(사회로동당)을 겨냥하여 '기회주의적이고 영웅주의적인 태도로 인민의 갈 바를 혼란시키는 것은 절대로 배격하는 바'라고 비난하고, '진실로 독립과 인민의 이익을 위하여 싸우려는 진정한 동지는 남로당에 들어와 같이 싸울 수 있다'라고 밝혔다.

좌익 운동[편집]

남로당은 초기에 주로 합법적으로 남한에서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을 계속하였고, 한편으로는 노동자, 농민들을 선동하여 각종 파업투쟁 등을 주도하였는데, 대표적으로 10월 1일 대구사건(남로당산하의 전평이 주도)을 들 수 있다.[2]

그러다 이승만을 포함한 우익세력의 단독 정부 수립운동이 전개되던 무렵에 남로당 세력은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운동 노선에 반발하여 급진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어 각종 테러나 게릴라 전, 노동자 총파업 등을 주도하면서 남한 정국을 흔들어 놓았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2.7 파업,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남부군사건 등이 있다.

1948년 8월 남로당과 북로당은 연합중앙위원회를 설치하였고, 1949년 6월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이 되었다. 그러나 이 합당사실은 대외적으로 뿐만 아니라 일반당원들에게조차 숨겨진 비밀합당이었다. 그래서 1949년 6월 합당 후에도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남로당원과 게릴라들을 선동하고 격려하는 문서에는 여전히 남로당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3] 그래서 이들의 저항은 북한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남쪽의 인민들의 자발적인 이승만 정부에 대한 저항으로 위장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에야 남로당 대신에 합당된 조선로동당이라는 이름을 공개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박헌영을 주축으로 월북한 남로당파는 처음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상당한 세력으로 자리잡았으나, 1955년에 즈음하여 김일성에 의해 한국 전쟁의 책임을 뒤집어 쓰고 숙청되었다.

이후 남조선로동당이 공식적으로 사라지고, 남로당파가 숙청으로 사라진 뒤에도 '남로당'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던 조선로동당의 지부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자리잡았다.

대한민국내에 남로당과 관련된 사건[편집]

2·7파업과 남로당[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7 사건입니다.

1948년에 들어와 강경투쟁으로 전환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투쟁이 바로 민설에서 주도한 2·7파업이다. 1948년 2월 7일 아침,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은 통신과 운송설비의 가동을 중지시키면서 총파업에 들어갔다.

제주 4·3 사건[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제주 4·3 사건입니다.

1947년 제주도의 한 독립운동 기념식에서 어린아이를 말로 치고 간 경찰을 경찰서까지 쫓아간 도민들에게 경찰 측이 발포하여 12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관련자들이 연행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남로당 측을 중심으로 민관 총파업이 일어나자 경찰은 이를 무력 진압하고 다수의 경찰을 파면한 후 이 자리를 우익 단체인 서북청년단 출신자들로 메우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경찰 등 당국에 대한 불만이 커져가던 배경에서 1948년 남로당의 김달삼 등이 5.10 총선거와 남한 단독 정부수립 반대 등을 내세우며 경찰에 대해 무장봉기하여 상호 간의 교전이 발생했다. 이후 9연대 사단장 중령 김익렬김달삼과 회담을 가져 72시간 내에 전투를 중단하기로 합의하였으나, 미군정 측과 조병옥 경무부장 등이 이에 강경론을 고집하자 큰 갈등이 빚어지면서 무산되었다. 동년 10월 정부 측이 파견한 군 병력이 대대적인 소탕 작전에 돌입하면서 최대 수만 명에 달하는 제주도민들이 살해당하고 중산간 마을의 95%가 방화되었다.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여순항쟁) 과 남로당[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입니다.

여순 14연대 반란사건[4]1948년 당시 대한민국 국군 14연대의 인사계 상사였던 지창수가 14연대를 이끌고 봉기하여 여수시순천시 일대를 장악했다가,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으로 들어간 사건을 가리킨다.

이 사건의 주동자 지창수가 남로당원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이 사건이 남로당의 지령으로 계획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현재는 여순 반란 사건이 아닌 여순 항쟁으로 정정되었다.

제주 4.3 사건이 발발하여 진압을 지원할 목적으로 가까운 여수에 위치한 14연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으나, 민간인을 학살 하는 작전임을 인지한 지창수가 부대원들을 데리고 그 명령에 불복한 사건다.

여수는 수도 서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지창수가 부대원들에게 조선인민군이 남하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으며, 반란이 일어난 후에 남로당의 승인이 떨어졌다는 등의 상황증거는 지창수가 우발적으로 일으킨 반란을 남로당 당중앙이 후에 어쩔 수 없이 승인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0월 27일 반란사건이 완전히 진압된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남로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의 공모자 색출이 시작되어 수천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여순 반란 공모자로 몰려서 살해되었다. 이후 남로당은 사실상 소멸 상태에 이르렀다. 한편 1948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만주군 출신 박정희 소령은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를 받았고, 여수·순천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남로당 하부조직책 혐의로 같은 해 11월 11일 체포되었다. 1심에서 “파면, 급료몰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하며, 감형한 징역을 집행정지함” 조치를 받았다. 다음 해 1월 강제 예편되었으며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후[편집]

14연대 반란사건 이후, 남로당의 대한민국 내 지상활동은 거의 소멸했다. 남로당이 대한민국 내에 주도한 여러 파업과 폭동, 반란사건과 그 이후 이어진 한국전쟁을 겪은 제1공화국이승만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을 제정, 대한민국 내 모든 공산주의 세력을 국가보안법에 의거해 공권력을 이용해 축출하였다.

역대 당수

 

박헌영의 빨치산은 북한의 정예부대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hKevEFDKimY

 

 
 
 

 

 

https://www.hani.co.kr/arti/area/capital/1024816.html

 

독립투사 한 서린 ‘통곡의 미루나무’, 쓰러진 채 보존한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보존 처리 거쳐 전시 시작“역사적 아픔 시민과 나누기로”

www.hani.co.kr

나무가 자리를 지킨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생을 마감한 독립운동가는 송학선, 엄순봉, 채경옥 등이다.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생을 마친 독립투사는 4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루나무가 제자리를 지키는 사이 1908년 10월 문을 연 서대문형무소는 1987년 11월까지 감옥으로 쓰이다가, 1998년 11월 역사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 '통곡의 미루나무'

독립투사들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며 이 나무를 안고 통곡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7vqBflHzTs 

 

 

 

 

https://www.youtube.com/watch?v=bdnxdLjPCEs

 

 

 

 

 

 

 

 

https://kydong77.tistory.com/21379

 

안중근, 내가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윤봉길, 상해의 홍구공원 폭탄 투척 사건

https://www.youtube.com/watch?v=yEO3NNOvaXk 내가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https://www.youtube.com/watch?v=hOcB0pngL6g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3/26/2014032600457.html 안중근 의사의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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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과 己未獨立宣言書(기미독립선언서)/ 서대문독립공원

모델은 나폴레옹이 세운 파리 개선문 1890년대에 서재필은 영은문과 모화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서재필은 직접 프랑스의 개선문 사진을 보고,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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