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 (光海君日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5339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조선후기 제15대 왕 광해군의 재위 기간 동안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다룬 실록.

1608년 2월부터 1623년 3월까지 광해군 재위 15년 2개월 간의 국정 전반에 관한 사실을 다루었다. 187권.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중초본(中草本, 太白山本) 64책과 정초본(正草本, 鼎足山本) 39책의 두 종류가 남아 있다.

『광해군일기』는 1623년(인조 1) 이수광(李睟光) 등이 광해군 당시의 시정기(時政記)에 무필(誣筆)이 많다고 하여 이를 수정할 것을 제의했으나, 재정 궁핍 등의 이유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1624년 1월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광해군 때의 시정기와 『정원일기(政院日記)』 등 사료가 될 기록들이 춘추관서리 홍덕린(洪德麟)의 헌신적인 수습에도 불구하고 많이 흩어져 없어지고 말았다.

이에 이괄의 난이 평정된 뒤, 광해군 때에 주서(注書)를 지낸 사람들의 가장일기(家藏日記)를 수합해 『정원일기』를 보수하게 하였다. 또 춘추관에 명하여 당시 사관(史官)으로 있던 사람들의 가장사초(家藏史草)와 각처에 남아 있던 조보(朝報)·야사(野史) 등을 수집하게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물러난 왕이기 때문에 시정기만 수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시정기만으로는 왕위에 있었던 광해군의 실록을 실질적으로 대신할 수 없어 1624년 2월 29일 춘추관의 건의로 『광해군일기』를 편찬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해 6월, 일기편찬의 찬수청(纂修廳)을 남별궁(南別宮)에 설치하고 총재관(摠裁官) 윤방(尹昉)을 중심으로 1·2·3방으로 나누어 편찬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본 사료인 시정기와 『정원일기』 등이 대부분 이괄의 난 때 흩어져 없어졌기 때문에 부득이 광해군 즉위 이후의 조보와 사관의 가장된 사초, 사대부 집안의 소장인 일기, 상소문의 초고, 야사·문집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 정리해 편찬하였다.

 

https://namu.wiki/w/%EA%B4%91%ED%95%B4%EA%B5%B0%EC%9D%BC%EA%B8%B0

 

광해군일기 - 나무위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

namu.wiki

1608년 2월부터 1623년 3월까지 광해군 재위 15년 2개월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으로, 실록 중 유일하게 중초본(中草本)과 정초본(正草本) 두 종류가 모두 남아있다. 또한 유일하게 인쇄본이 없이 필사본만 존재하는 실록이다.

중초본(태백산본)은 1624년(인조 2년) 2월 29일부터 편찬을 시작하여 1627년 정묘호란의 발발로 잠시 작업이 중단되었다가 1633년(인조 11년) 12월에 최종 완성하였다. 총 187권 64책이다.

정초본(정족산본)은 중초본이 완성된 다음해인 1634년 정월부터 편찬을 시작하여 동년 5월에 최종 완성하였다. 총 187권 40책이며, 당시 정초본을 만들며 그 편집 과정을 모두 기록한 광해군일기찬수청의궤(光海君日記纂修廳儀軌)와 함께 사고에 같이 보관하였다.

원래 일반적으로 실록 편찬을 완료하면 초초본과 중초본은 세초하여 없애고 정초본만을 인쇄해 사고에 보관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광해군일기만은 특이하게 중초본까지 사고에 보관하여 남겼다. 이 광해군일기 중초본에는 붉은 먹 또는 검은 먹으로 내용을 수정하거나 가필한 모습이 생생히 보이고 있기 때문에 당시 실록 편찬 체계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로 인정받는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300900&code=kc_age_30 

 

우리역사넷

광해군은 조선의 15대 임금으로 1575년(선조 8) 음력 4월 26일 선조[조선](宣祖)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혼(琿)이고, 어머니는 후궁이던 공빈 김씨(恭嬪金氏)였다. 선조의 정비(正妃)는 의인

contents.history.go.kr

격변기를 헤쳐나간 성군인가? 폐모살제의 폭군인가?

1575년(선조 8) ~ 1641년(인조 18)

명나라는 조선에 원병을 보내왔지만 계속해서 조선에게 일본과 화친할 것을 압박하였다.

사실 임진왜란 초반 불리했던 전세는 명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부터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화포로 무장한 명군은 1593년 1월 9일 평양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를 크게 물리쳤고, 개성을 탈환하여 한양으로부터 일본군이 물러나게 하였다. 하지만 명은 일본군과 전쟁을 계속하기보다는 강화협상을 통해서 문제를 매듭짓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대승을 거둔 권율(權慄)이 이후 명나라의 허락 없이 전쟁했다는 것을 이유로 벌주려 하기도 했다.

선조와 조선 조정이 명이 주도하는 강화 협상에 반발하자 명에서는 왕위 교체론을 흘리면서 선조를 압박하였다. 1593년 10월 조정이 서울로 돌아오는 시점을 전후로 하여 광해군의 자질과 능력을 한껏 칭찬하면서 선조를 대신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의 군사관계 업무를 총괄토록 하라고 종용하였던 것이다.

결국 광해군은 윤 11월 19일부터 좌의정 윤두수(尹斗壽),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 호조판서 한준(韓準), 공조판서 김명원(金命元) 등 세 판서가 소속된 ‘무군사(撫軍司)’를 이끌고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병력모집과 훈련, 군량수집의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듬해 8월 광해군이 서울로 귀환한 이후로도 명에서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사관계 업무를 광해군에게 계속 주관토록 하라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1595년 3월 27일 명의 황제가 보내온 칙서에서 광해군에게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의 군무를 총괄하도록 명령하였다. 더욱이 국왕에게 보내야 할 황제의 칙서가 세자인 광해군 앞으로 되어 있었고, ‘부왕의 실패를 만회하라’는 말로써 노골적으로 선조의 실정을 언급하였다.

이처럼 원병으로서의 명과 전쟁의 직접적 피해자로서의 조선의 입장이 충돌할 때, 명은 광해군을 언급하면서 선조를 압박하였고, 임진왜란 동안 15번이나 선조는 광해군에게 양위하겠다는 말을 꺼내면서 이런 압박을 타개하였다.

이런 상황이 곤혹스러웠던 것은 광해군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을 두둔하던 명은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는 광해군이 맏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왕세자로 승인해달라는 조선의 요구를 매번 거부했다. 오히려 임해군을 원상복귀토록 하고 광해군에게는 분수를 지키라고 하여, 광해군에게 왕세자를 내어놓고 물러나라는 요구를 해왔다.

반정과 광해군의 몰락

1623년 3월 서인 일파의 주도로 반정이라 불리운 무력 쿠데타에 의해 광해군 정권은 전복되었다. 오래 전부터 이귀 일파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주장이 많았다. 하지만 광해군이 총애하던 상궁 김개똥이 그의 판단을 흐려놓은 탓이었는지 광해군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미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때를 놓친 상태였다. 12일 새벽 반정 세력의 기습으로 내시의 등에 업혀 탈출한 광해군은 “이이첨이 저지른 짓이 아닌가?”라고 물을 정도로 사태파악을 하지도 못하고 있었고, 대북파와의 사이도 멀어진 상태였다.

불과 천 여 명에 불과한 반정 세력의 병력으로 광해군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3월 13일 광해군과 그의 아들을 찾아냄으로써 반정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반정성공과 함께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벌어졌다. 대북파의 핵심인물들이 처형되었고, 이이첨, 정인홍 모두 처형되었다. 이외의 대북파들 대부분이 처형되거나 유배, 투옥되었고, 소위 죄질이 미약한 자들은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평안감사 박엽(朴燁)과 의주부윤 정준(鄭遵)도 처형되었다. 광해군의 의중을 받들어 대외정책을 일선에서 실천했던 인물들로 명을 의식한 조처였다.

과연 인조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의 명분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폐모살제’였다. ‘어머니’의 위치에 있던 인목대비를 대비의 자리에서 끌어내렸으며, 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은 강상윤리를 저버린 군주였다. 둘째 궁궐건설을 비롯한 수많은 토목공사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사직이 위기에 처하게 했다 셋째 명에 대한 사대를 소홀히 하고 후금과 밀통하여 명을 배신한 군주였다는 것이 인조반정을 일으킨 대의명분이었다.

하지만 권좌에서 쫓겨난 광해군은 죽임을 당하지 않고 명이 다할 때까지 19년이나 더 살다가 1641년 7월 1일 67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그 사이 반정직후 왕세자였던 아들 이지(李祬)가 거사를 위하여 연금된 주택을 빠져 나오기 위해 땅굴을 파고 탈출하던 중 발각되어 인조의 명령에 따라 자진했고, 세자빈이었던 며느리도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것을 목도해야 했다. 곧바로 왕비였던 부인마저 세상을 떠난다. 딸이 남기는 했지만, 혼자나 다름없었던 광해군은 반란군과 연결을 우려하여 태안이나 제주로 유배지를 옮겨 다녀야 했다. 더 이상 왕이 아닐 뿐만 아니라 죄인이었던 광해군에게 심부름하는 계집종마저도 면박을 주었다고 하니 반정이후 19년이란 세월을 더 산 것은 그에게는 어쩌면 모진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2000년대 초반까지의 통설

대동법은 광해군이 시행한 정책으로 알려져 있었다. 기존 통설의 시각으로는, 대동법의 시행 의도는 공납에 따른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으나 당시 기득권인 양반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대동법을 극성으로 반대했다. 그래서 대동법은 경기도에 한정해 경기선혜법만이 실시될 수 있었다. 이상의 통설을 묘사한 것이《광해, 왕이 된 남자》다. 해당 영화의 묘사를 따르면, 광해군은 이걸 실시하려는데 신하들이 완고하게 반대한다.

그러나 이는 연구가 부족해서 나온 오해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광해군 시기 대동법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에 멀쩡한 사학자들까지 그렇게 받아들인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후로 대동법 연구들이 진행되면서 실상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2.2. 실상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자가 모두 '특산물이 나는 곳에 공물을 바치게' 했던 데에는 그 뜻이 있다. 그런데 이번 방납으로 교활한 수단을 부리는 폐단을 개혁하고자 이 '작미'라는 방법이 있었으니, 이는 그 근원은 맑게 하지 않고 하류만을 맑게 하고자 한 데 가깝지 않은가. 나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광해군일기》 1년 2월 5일

당시 공납(貢納)은 조선 세입의 60% 정도인데, 이걸 함부로 바꾸면 세입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전후 복구 중인데 함부로 세입을 바꿀 수도 없기 때문이다. 지주층의 반발이 심한 것도 광해군의 태도에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그러나 광해군의 실제 행태는 이상의 변호 논리와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광해군이 대동법을 반대하고 상납 방식을 그대로 시행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궁궐 공사였다. 옹호가 불가능한 명백한 학정이다. 광해군은 선조 말년에 재건하던 창덕궁 뿐 아니라 창경궁경희궁인경궁자수궁을 건설하고 정릉행궁(경운궁)을 확장했으며 경복궁도 간을 봤는데, 조선 왕조 전체를 살펴봐도 광해군처럼 그렇게 짧은 기간에 그렇게 많은 궁궐 공사를 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궁궐 공사 대부분은 기존 상납 방식을 따른 것이다.[10] 다시 말해 광해군은 공사비 마련에 문제가 생길까 저어하여 대동법 확대 시행을 거부한 것이다

 

*아래 동영상에서  YouTube에서 보기를 클릭하면 화면 보기가 가능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wH5OZ5Mj-8

 

https://www.youtube.com/watch?v=QcQa2n7sB_g 

 

https://www.youtube.com/watch?v=M2FQ3pSoiLg 

 

https://www.youtube.com/watch?v=_B3KtTSS6dE 

 

https://www.youtube.com/watch?v=Qt2Um1Fw85Y 

 

 

https://www.youtube.com/watch?v=-X5Oaqd2rTY 

 

https://www.youtube.com/watch?v=sGO_YGX8Y70 

 

https://www.youtube.com/watch?v=LNhaXU8fFb0 

 

https://www.youtube.com/watch?v=kEa3CRLhZ88 

 

 

 

https://kydong77.tistory.com/21482

 

여주 영릉(英陵) & 녕릉(寧陵)/ 신미대사, 산스크리트어> 한글창제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은 대한민국 사적 제195호로, 조선 제4대 세종과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능인 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인 영릉(寧陵)을 합쳐서 부르

kydong77.tistory.com

 

 

                                                                                               합장릉

男左女右 (남좌여우)의 의미: 음양설(陰陽說)에서, 왼쪽은 양이고 오른쪽은 음이라 함. 한자 읽기는 좌에서 우 방향.

 

https://www.youtube.com/watch?v=f1wp7JT7UIY

 

* 세종대왕의 생애와 영릉(英陵)

세종대왕은 조선 제4대왕으로 1418년부터 1450년 54세로 승하하실 때까지 32년간 재위하였다. 태조6년(1397년) 음력 4월10일(양력 5월15일) 조선조 제3대 임금이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태종8년 (1408년) 음력 2월11일(양력 3월17일)에 충녕군에 봉해지고, 같은 해 2월 16일(양력 3월22일) 우부대언 심온의 딸(소헌왕후 심씨)과 결혼하였다.

구 영릉 석물 - 세종대왕 신도비(舊 英陵 石物 - 世宗大王 神道碑)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세종대왕기념관 경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석이다. 2002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42-1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는 이수(螭首)를 포함한 비신(碑身)만 5.7m에 달하는 거대한 대리석비(大理石碑)로서 2년여의 공역(工役) 끝에 문종(文宗) 2년(1452년) 2월 21일 구 영릉(舊英陵) 내에 건립되었다. 앞면의 비명(碑銘)은 정인지(鄭麟趾)가, 뒷면의 비음기(碑陰記)는 김요(金銚)가 지었고, 전액(篆額)과 비명(碑銘)은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썼다. 제작에는 150여 명의 석공(石工)이 동원되었다.

 

녕릉(寧陵) :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묘

녕릉(寧陵)

*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묘, 효종대왕릉

영릉(寧陵)은 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1618∼1674)의 무덤이다. 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 (1673)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영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인 의릉(懿陵)도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

세종릉은 태종릉인 헌릉 곁에서 여주로 이전

https://www.youtube.com/watch?v=aU32rJCxTN0

 

 

 

 

https://www.youtube.com/watch?v=da4avcU_k94 

 

 

 

 

https://www.youtube.com/watch?v=3E0ZbQAVF84 

 

https://royaltombs.cha.go.kr/html/HtmlPage.do?pg=/new/html/portal_05_01_02.jsp&mn=RT_05_01_02

 

조선왕릉의 입지 및 구성

왕릉은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조성된다.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장례를 치르기 위해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이라는 임시 기관을 설치한다.

royaltombs.cha.go.kr

조선왕릉의 입지

왕릉은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조성된다.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장례를 치르기 위해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이라는 임시 기관을 설치한다.

국장도감은 장례를 치르는 기간(약 5개월)동안 전체 상례에 대한 재정과 문서 등을 관리하고, 재궁(梓宮, 관), 크고 작은 가마(대여(大輿) 등), 각종 의장(儀仗)을 제작하며, 발인(發靷)을 총괄하는 기관이다.

빈전도감은 염습(殮襲), 성빈(成殯), 성복(成服)에 관한 업무를 하며, 장례 기간 동안 왕이나 왕비의 신주와 혼백을 관리하는 기관이다. 특히 빈전도감은 왕릉을 조성한 후 혼전도감으로 이름이 바뀌어 삼년상 후 종묘에 신주를 모신다(부묘).

산릉도감은 왕릉을 조성하는 기관으로 건물 및 석물제작, 왕릉 자리 주변 정리 등 능 조성에 필요한 인원 관리 및 감독하는 기관이다. 보통 하나의 능을 완성하는 데에는 약 5개월의 시간이 걸리고, 능역(陵役)에 동원되는 인원은 6천명에서 많게는 1만 5천명 정도가 필요하다.

능지(陵地)는 보통 상지관(相地官)이 택지하게 되는데, 능지로서 적합한 자리 후보를 선정하고, 새로 즉위한 왕에게 천거하여 왕의 재가를 받아 결정한다. 때로는 왕이 친히 답사하기도 하며, 생전에 미리 능지를 선정하는 경우도 있다.

풍수 사상에 기초

조선왕릉의 입지는 풍수사상을 기초로 한다. 조선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위해 자연지형을 고려하여 터를 선정하는 것이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조선왕릉은 기본적으로 지형을 거스르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크기나 구성에 있어 자연친화적이며 주변경관과 잘 어우러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조선왕릉은 크게는 도읍지인 한양(현 서울) 주변의 한강을 중심으로 한강 북쪽의 산줄기인 한북정맥과 남쪽의 지형인 한남정맥을 중심으로 택지되었다. 그리고 봉분을 중심으로 한 능침공간은 조선의 풍수사상에서 길지라고 일컫는 사신사(四神砂)가 갖추어진 곳과 잘 부합하게 된다. 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갖춘 곳으로, 주산(主山)을 뒤로 하고 그 중허리에 봉분을 이루며 좌우로는 청룡(靑龍, 동)과 백호(白虎, 서)의 산세를 이루고 왕릉 앞쪽으로 물이 흐르며 앞에는 안산(案山)이 멀리는 조산(朝山)이 보이는 겹겹이 중첩되고 위요(圍繞)된 곳이다.

왕과 왕비의 시신이 들어있는 현궁(玄宮)이 묻혀있는 봉분은 혈처(穴處)에 위치한다. 혈처는 땅의 기운이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봉분이 자리 잡고 있는 언덕(岡)이 땅의 기운을 저장하고 능의 뒤쪽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잉(孕)은 그 기운을 주입시켜주는 역할을 맡아 혈처를 이룬다.

그래서 조선왕릉은 전체적으로 야지(野地)도 아니며 산지(山地)도 아닌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자리에 입지하고 있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야지에 조성되어 있는 신라의 왕릉이나 산지를 선호했던 고려의 왕릉과는 다른 형태이기도 하다.

도성과 가까운 입지조건 - 효(孝)의 실천

왕릉의 입지선정에는 풍수지리 이외에도 지역적 근접성을 고려하는 일이 중요하였다. 즉, 풍수적으로 명당이면서도 왕궁이 있던 도성(한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이 왕릉의 최적지였다. 이와 같이 접근성이 중요한 입지 조건이 되는 것은 후왕들이 자주 선왕의 능을 참배하고자 하는 효심의 실천에서 비롯된 것이다.

융건릉 건설시 조선시대 왕릉은 임금의 행차를 고려하여 80리, 지금의 40㎞ 안에 조성하는 것이 원칙이다. 임금의 원행도 80리를 넘을 수가 없었다. 현륭원은 도성과 88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다. 정조는 이러한 현륭원을 자주 왕래하였다. 1795년(정조 20)에는 어머니인 혜경궁을 모시고 현륭원에 행행하기도 하였다. 정조가 현륭원에 갈 때에는 과천 주정소에 머물렀는데, 이때 인덕원(仁德院) 주변의 부로(父老)들을 불러서 위로하며 고충을 묻기도 하였다.

한편, 정조는 1790년(정조 14) 용주사를 창건하여 현륭원의 원찰로 삼았다. 용주사 창건에 앞서 정조가 직접 부지를 답사하였고, 건축 과정에도 참여하였다. 

*도성에서 80리보다 8리가 더 많다고 하자 정조는 신하들에게 수원까지는 80리라고 일렀다. 어명에 따라 그후로 도성에서 수원까지는 80리가 되었다는 구전도 전한다.

[운영자 注] 용주사 창건도 정조의 효심의 발로.

본래 이곳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정조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할 때 무덤을 돌보는 '능침사찰'로 용주사를 같이 창건하였다. 용주사에서는 사격(寺格)을 높이기 위해 근처에 있던 갈양사(葛陽寺)라는 절을 이었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인 창건은 정조 임금이 하였다. 조선 전기의 세조랑 비슷한 이미지.

*세조: 누구보다 불심이 깊었던 세조는 원당사찰의 운영에도 가장 열성적이었다. 그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진 정변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의 명복을 빈다는 명분 하에 국가적 사업으로 원각사를 건립했다. 

조선왕릉의 공간구성

조선왕릉은 공간의 성격에 따라 진입공간, 제향공간, 능침공간의 세 공간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 공간은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왕릉은 죽은 자를 위한 제례공간이므로, 동선의 처리에 있어건서도 이에 상응하는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동선을 엄격하게 분리하고 죽은 자의 동선만을 능침영역까지 연결시켜 공간의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향로·어로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동선은 공존하되 구별되어있다. 즉, 산 자는 정자각의 정전에서 제례를 모신 뒤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고 죽은 자는 정자각의 정전을 통과하여 능침공간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진입공간 - 능역의 시작 공간

진입공간은 왕릉의 시작 공간으로, 관리자(참봉 또는 영)가 머물면서 왕릉을 관리하고 제향을 준비하는 재실(齋室)에서부터 시작된다. 능역으로 들어가기 전 홍살문 앞에는 금천교(禁川橋)라는 석조물이 있는데 왕과 왕비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상징한다. 그 밖에 진입공간 부근에는 음양사상과 풍수사상의 영향을 받은 연지(蓮池)를 조성하였다.

제향공간 -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의 공간

제향공간은 산 자(왕)와 죽은 자(능에 계신 왕이나 왕비)의 만남의 공간으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정자각(丁字閣)이다. 제향공간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紅箭門]부터 시작된다. 홍살문부터 본격적으로 제향의식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홍살문 옆에는 돌을 깔아 놓은 판위(版位)가 있는데, 참배하러 온 왕을 위한 자리이다. 홍살문 앞부터 정자각까지 이어주는 향로(香路)와 어로(御路)는 박석을 깔아 만든 돌길이다. 홍살문을 기준으로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향과 축문을 들고가는 길이라 하여 향로라 하고, 오른쪽의 낮은 길은 왕이 사용하는 길이라 하여 어로라 한다. 일부 왕릉에서는 향·어로 양 옆으로 제관이 걷는 길인 변로(邊路)를 깔아 놓기도 하였다. 향·어로 중간 즈음 양 옆으로는 왕릉 관리자가 임시로 머무는 수복방(守僕房)과 제향에 필요한 음식을 간단히 데우는 수라간(水刺間)이 있다. 정자각에서 제례를 지낸 후 축문은 예감(瘞坎)에서 태우는데, 정자각 뒤 서쪽에 위치해 있다. 조선전기에는 소전대(燒錢臺)가 그 기능을 하였으나 후에 예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정자각 뒤 동북쪽에는 장방형의 산신석(山神石)이 있는데, 산을 주관하는 산신에게 예를 올리는 자리이다.

능침공간 - 죽은 자의 공간

능침공간은 봉분이 있는 왕릉의 핵심 공간으로 왕이나 왕비가 잠들어 계신 공간이다. 능침공간 주변에는 소나무가 둘러싸여 있으며, 능침의 봉분은 원형의 형태로 태조의 건원릉을 제외한 모든 능에는 잔디가 덮여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봉분의 직경은 약 18m, 높이는 약 4m’로 조성하게 되어 있으나 후대로 갈수록 줄어드는 경향을 보여 평균 직경 약 11m를 이루고 있다. 능침공간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단: 상계(上階)

초계(初階)라고도 하며, 봉분이 있는 단이다. 봉분에는 12면의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을 둘렀으며, 경우에 따라 병풍석을 생략하는 경우와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생략하는 경우가 있다. 봉분 주위에는 석양(石羊)과 석호(石虎)가 능을 등지고 있는데, 보통은 네 쌍씩 배치하였으며 능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 외곽으로는 풍수지리의 바람막이와 담장 역할을 하는 곡장이 둘러져 있다. 봉분 앞에는 혼이 앉아서 노니는 공간인 혼유석(魂遊石, 석상(石牀))이 놓여져 있고, 그 좌우에는 기둥 모양의 망주석(望柱石)이 있다.

제2단: 중계(中階)

능침공간의 가운데 단이다. 중계의 가운데 8각 또는 4각의 장명등(長明燈)이 놓여져 있는데, 어두운 사후 세계를 밝힌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 좌우에는 왕과 왕비를 모시는 문석인(文石人)이 있으며 그 옆이나 뒤에 석마(石馬)가 놓여 있다.

제3단: 하계(下階)

능침공간의 가장 아랫단으로, 왕과 왕비를 호위하는 무석인(武石人)과 석마(石馬)가 놓여 있다. 문치주의를 내세웠던 조선왕조의 특성상 문석인을 무석인보다 한 단 높게 배치하였으나, 영조의 원릉에서부터 중계와 하계의 구분이 없어진 것은 무관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왕릉의 석물사상

조선왕릉에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인물상과 동물상을 비롯하여 봉분의 둘레와 전면에 능주의 영혼을 위한 의식용 석물들을 배치하였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음양사상과 풍수지리를 기본으로 하여 신인(神人)과 신수(神獸), 신비한 힘을 지닌 신령한 도구와 상서로운 물건 등으로 꾸며 능실을 보호하고 왕의 영원한 안식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와 같은 간절한 기원은 왕릉 주위를 장식하거나 주변에 배치된 석조 의례물의 모든 요소에 체계적으로 배어있다. 이것이 조선 왕릉 제도에서 석물의 역할로, 한국인의 내세관과 수호적 성격이 상징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석물은 거의 능침공간에 배치되어 있으며 왕릉으로서 장엄함을 강조하고 주변 경관과 조형적으로도 조화를 이루어 선조(先祖)의 사후 세계를 위한 격조 높은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42능에 1300여 점의 조각이 동일한 유형으로 끊임없이 조성되었고 대부분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 그 역사적 가치와 예술적 고유성이 매우 높다.

조선시대 예술미의 완전한 보존

조선왕릉의 석물조각은 한국미술사에서는 불교 조각 이외의 조각풍으로 조선시대의 역사와 조각사를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정해진 규범 속에서 조선시대의 사후세계에 대한 신앙과 조상숭배 사상을 바탕으로 일관되게 표현하였고, 현재까지 거의 훼손(도굴)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는 문화유산이다. 조선시대의 왕릉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왕과 유택에 대한 존엄성을 지켰던 덕택일 뿐 아니라, 왕릉 조성과 의식 그리고 부장품에 대해 자세히 기록해 둠으로써 도굴로 인한 훼손을 미리 방지하는 지혜가 있었다.

이러한 완전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조선왕릉 석물에 대하여 내용적인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특성
배치
  • 잔디 언덕 위에 조각을 배치하여 자연경관과의 조화
  • 모든 조각을 봉분 주변에 집중시켜 화려한 공간 구성
  • 모든 배치와 조각을 대칭 구도로 하여 엄숙함 강조
  • 석수를 바깥으로 향하게 배치하여 봉분수호의 의미 강조
고유장식
  • 병풍석과 난간석 조각으로 잔디 봉분을 장식
  • 12지신상 부조를 수관인신(獸冠人身)의 형태로 병풍석에 장식
  • 혼유석이 있으며, 이를 고석으로 받쳐 공간에 띄워 놓은 형식
  • 망주석의 형태가 독특하며 세호를 장식
예술성
  • 오랜 세월에 걸쳐서 동일한 이미지를 반복하여 하나의 형식 창조
  • 화강석의 색상과 질감으로 은은하며 신비한 분위기 창출
  • 머리를 크게 과장한 인체조각으로 능묘의 수호신상 성격 부여
  • 석호의 인상을 한국 민화의 그림과 같이 해학적으로 표현
상징성
  • 모든 부분의 석물이 고유의 상징성을 담고 있음
  • 석물의 배치를 상징에 맞게 체계적으로 배치
재료와 규모
  • 대리석, 석회암, 사암, 화산암에 비해서 영구적인 화강석 사용
  • 백성의 피해를 덜기 위해서 사람 크기로 조성하여 애민사상을 보임
역사 / 기록
  • 의궤 등을 통한 제작 과정에 대한 기록과 도상이 존재
  • 규범서, 역사서, 문집을 통한 다양한 기록 존재
보존
  • 600년 동안 두 번의 큰 전쟁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 양호

 

https://www.youtube.com/watch?v=lKjNPrY9vR0 

 

 

https://www.youtube.com/watch?v=74KNK6l1wfM 

 

 

https://www.youtube.com/watch?v=F4i2dbX_E3M 

 

 

 

https://www.youtube.com/watch?v=Kc4gFLl2MHw 

 

 

https://www.youtube.com/watch?v=LtV86CaF6as 

 

 

 

https://www.youtube.com/watch?v=9HhRZwHmpU4 

 

 

https://www.youtube.com/watch?v=TmQmhKveFww 

 

 

https://www.youtube.com/watch?v=DVXJNDBMs6o 

 

 

https://www.youtube.com/watch?v=Zyz_3ZRvMik 

 

                                                                                       세종신도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9861

비의 이수(螭首)는 비신과 같은 돌인 것으로 전해오며, 귀부(龜趺)는 현지에서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현재 자연석으로 이를 대용하고 있다. 비는 조선 초기의 석비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이수의 중앙 아래쪽에 ‘世宗英陵之碑(세종영릉지비)’라는 전액(篆額)이 있다.

비문은 마멸이 심하여 판독하기 어려우나, 비문의 내용『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記)』 『전주이씨선원보첩(全州李氏璿源譜牒)』에 실려 있다. 앞면의 비문은 당대의 명신 정인지(鄭麟趾)가, 뒷면은 김조(金銚)가 지었으며, 전액과 글씨는 안평대군이용(李瑢)이 썼다.

총 4,886자에 달하는 큰 비석으로, 비문의 내용은 세종대왕의 어진 업적을 찬양하고 왕후·빈(嬪) 및 그 소생들에 관한 약력 등을 적은 것이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시대 27대 왕들의 왕릉

https://www.youtube.com/watch?v=uR0aNANES1w

 

 
 

‘조선왕릉’이 한국의 9번째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유산이 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27일 새벽(한국시각)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33차 회의를 열어 한국이 신청한 ‘조선왕릉’(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최종 확정했다.

이에 따라 한국은

경주 석굴암ㆍ불국사,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서울 종묘·창덕궁, 수원 화성

(이상 1997년 지정),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ㆍ화순ㆍ강화 고인돌 유적(이상 2000년 지정)에 이어

조선왕릉을 8번째 세계 문화유산으로 추가했다.

2007년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까지 합쳐 한국의 세계유산 총수는 9건으로 늘었다. 또 2004년 문화유산에 등재된 북한·중국의 고구려 고분군을 포함하면 남북한의 세계유산은 모두 10건이 된다.

앞서 문화재청은 지난해 서울, 경기, 강원도 지역에 흩어진 조선시대 왕릉 42기 가운데 북한 개성 부근에 있는 제릉(1대 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후릉(2대 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를 세계유산으로 신청한 바 있다.

뒤이어 지난 4월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조선왕릉 40기를 사전 실사하고 제출한 평가결과 보고서에서 ‘등재 권고’ 판정을 내려 세계유산 등재가 유력시돼 왔다. 이번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는 세계 각국에서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을 포함해 30건을 등재신청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LJO4oxRX_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