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
https://ko.wikipedia.org/wiki/%EC%B9%B4%EB%A5%BC_%EB%A7%88%EB%A5%B4%ED%81%AC%EC%8A%A4
카를 마르크스(독일어: Karl Marx ˈkaɐ̯l ˈmaɐ̯ks[*][2][3], 문화어: 칼 마르크스,
1818.5.5.- 1883.3.14
독일의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정치이론가, 언론인,
공산주의 혁명가
1818년 5월 5일 ~ 1883년 3월 14일)는 독일의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정치이론가, 언론인, 공산주의 혁명가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8%94%EB%9D%BC%EB%94%94%EB%AF%B8%EB%A5%B4_%EB%A0%88%EB%8B%8C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러시아어: 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 본성: 울리야노프·Улья́нов,[1] 영어: Vladimir Ilyich Lenin/Ulyanov, 문화어: 울라지미르 일리이츠 레닌,[2] 1870년 4월 22일(구력 4월 10일) ~ 1924년 1월 21일)은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혁명가, 정치경제학자, 정치철학자, 정치인, 노동운동가로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다. 공산주의자이면서도 특별히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을 발전시킨 레닌주의 이념의 창시자이다. '레닌(Ле́нин)'이라는 성씨는 혁명가로서 그가 사용하던 가명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C%98%A4%EC%A9%8C%EB%91%A5_%EC%82%AC%EC%83%81
마오쩌둥은 당시 ‘소비에트 노선’이라 불리는 좌경 노선을 비판하고, 코민테른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는 군중과 인민을 지도할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매우 적은 상황에서 노농동맹을 확고하게 유지하고, 세력을 단결할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였다.
마오쩌둥은 중국 현실에 맞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적극적으로 적용하여 당대 중국 공산주의 운동에서의 교조주의 경향을 비판하였다. 그는 1942년 옌안 소비에트에서 《당정풍론》를 발표하여 당내 우경투항주의, 극좌모험주의를 배척하는 일대 쇄신 노선을 새로이 밝혔고, 이후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 사상을 투쟁의 전면에 내세우게 되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가 탈스탈린화를 추진할 때,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고수하는 동시에 소련의 수정주의 노선과 대립한 사상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우경화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 아시아 및 남아메리카 공산주의 정당이 마오쩌둥 사상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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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은 후난성 샤오산의 부유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그는 일찍이 반제국주의를 견지했으며 특히 1911년 신해혁명과 1919년 5·4운동 사건의 영향을 받았다. 베이징 대학에서 사서로 일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였고 1927년 추수 봉기를 이끄는 중국공산당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국민당과 국공 내전이 있던 중 마오쩌둥은 홍군을 지도하였고 장시 소비에트의 급진적인 토지 정책을 이끌었으며, 궁극적으로 중국공산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대장정, 중일 전쟁 당시 국민당과 일시적으로 제2차 국공 합작을 하였으나 일본의 항복 이후 중국의 내전이 재개되었고 마오쩌둥의 군대는 국민당 정부를 패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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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로동당(南朝鮮勞動黨, 영어: Workers' Party of South Korea), 줄여서 남로당은 1946년 11월 23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합당으로 결성된 대한민국의 공산주의 정당이다. (46년 9월 4일 남로당 준비위원회 결성) 당수는 초대 여운형, 2대 허헌, 3대 박헌영이 맡았다. 기관지로 노력인민이 있었다. 1949년 6월 24일 북조선로동당에 흡수됨. 1949년 6월 30일 조선로동당 결성 ..
남조선로동당의 역사[편집]
좌파운동의 재정립[편집]
1945년 8월 15일 독립 이후 남한에는 여러 좌파 정당들이 있었지만, 정판사위조지폐사건(46년5월) 등으로 조선공산당의 활동은 거의 정지상태(공식적으로 불법화)에 있었으므로(민전의 활동이 지하화), 남한 내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력을 재정비하기 위하여 3당(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을 합당하여 '남조선로동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여운형이 초대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부위원장 박헌영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당내 주도권 장악문제로 여운형과 박헌영은 지속적으로 갈등하였고, 박헌영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선을 비판하자, 여운형은 탈당하고 후에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였다.[1]
1946년 12월 2일, 허헌은 기자회견에서 사로당(사회로동당)을 겨냥하여 '기회주의적이고 영웅주의적인 태도로 인민의 갈 바를 혼란시키는 것은 절대로 배격하는 바'라고 비난하고, '진실로 독립과 인민의 이익을 위하여 싸우려는 진정한 동지는 남로당에 들어와 같이 싸울 수 있다'라고 밝혔다.
좌익 운동[편집]
남로당은 초기에 주로 합법적으로 남한에서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을 계속하였고, 한편으로는 노동자, 농민들을 선동하여 각종 파업투쟁 등을 주도하였는데, 대표적으로 10월 1일 대구사건(남로당산하의 전평이 주도)을 들 수 있다.[2]
그러다 이승만을 포함한 우익세력의 단독 정부 수립운동이 전개되던 무렵에 남로당 세력은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운동 노선에 반발하여 급진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어 각종 테러나 게릴라 전, 노동자 총파업 등을 주도하면서 남한 정국을 흔들어 놓았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2.7 파업,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남부군사건 등이 있다.
1948년 8월 남로당과 북로당은 연합중앙위원회를 설치하였고, 1949년 6월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이 되었다. 그러나 이 합당사실은 대외적으로 뿐만 아니라 일반당원들에게조차 숨겨진 비밀합당이었다. 그래서 1949년 6월 합당 후에도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남로당원과 게릴라들을 선동하고 격려하는 문서에는 여전히 남로당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3] 그래서 이들의 저항은 북한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남쪽의 인민들의 자발적인 이승만 정부에 대한 저항으로 위장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에야 남로당 대신에 합당된 조선로동당이라는 이름을 공개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박헌영을 주축으로 월북한 남로당파는 처음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상당한 세력으로 자리잡았으나, 1955년에 즈음하여 김일성에 의해 한국 전쟁의 책임을 뒤집어 쓰고 숙청되었다.
이후 남조선로동당이 공식적으로 사라지고, 남로당파가 숙청으로 사라진 뒤에도 '남로당'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던 조선로동당의 지부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자리잡았다.
대한민국내에 남로당과 관련된 사건[편집]
2·7파업과 남로당[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2·7 사건입니다.
1948년에 들어와 강경투쟁으로 전환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투쟁이 바로 민설에서 주도한 2·7파업이다. 1948년 2월 7일 아침,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은 통신과 운송설비의 가동을 중지시키면서 총파업에 들어갔다.
제주 4·3 사건[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제주 4·3 사건입니다.
1947년 제주도의 한 독립운동 기념식에서 어린아이를 말로 치고 간 경찰을 경찰서까지 쫓아간 도민들에게 경찰 측이 발포하여 12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관련자들이 연행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남로당 측을 중심으로 민관 총파업이 일어나자 경찰은 이를 무력 진압하고 다수의 경찰을 파면한 후 이 자리를 우익 단체인 서북청년단 출신자들로 메우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경찰 등 당국에 대한 불만이 커져가던 배경에서 1948년 남로당의 김달삼 등이 5.10 총선거와 남한 단독 정부수립 반대 등을 내세우며 경찰에 대해 무장봉기하여 상호 간의 교전이 발생했다. 이후 9연대 사단장 중령 김익렬은 김달삼과 회담을 가져 72시간 내에 전투를 중단하기로 합의하였으나, 미군정 측과 조병옥 경무부장 등이 이에 강경론을 고집하자 큰 갈등이 빚어지면서 무산되었다. 동년 10월 정부 측이 파견한 군 병력이 대대적인 소탕 작전에 돌입하면서 최대 수만 명에 달하는 제주도민들이 살해당하고 중산간 마을의 95%가 방화되었다.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여순항쟁) 과 남로당[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입니다.
여순 14연대 반란사건[4] 은 1948년 당시 대한민국 국군 14연대의 인사계 상사였던 지창수가 14연대를 이끌고 봉기하여 여수시와 순천시 일대를 장악했다가,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으로 들어간 사건을 가리킨다.
이 사건의 주동자 지창수가 남로당원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이 사건이 남로당의 지령으로 계획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현재는 여순 반란 사건이 아닌 여순 항쟁으로 정정되었다.
제주 4.3 사건이 발발하여 진압을 지원할 목적으로 가까운 여수에 위치한 14연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으나, 민간인을 학살 하는 작전임을 인지한 지창수가 부대원들을 데리고 그 명령에 불복한 사건다.
여수는 수도 서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지창수가 부대원들에게 조선인민군이 남하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으며, 반란이 일어난 후에 남로당의 승인이 떨어졌다는 등의 상황증거는 지창수가 우발적으로 일으킨 반란을 남로당 당중앙이 후에 어쩔 수 없이 승인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0월 27일 반란사건이 완전히 진압된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남로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의 공모자 색출이 시작되어 수천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여순 반란 공모자로 몰려서 살해되었다. 이후 남로당은 사실상 소멸 상태에 이르렀다. 한편 1948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만주군 출신 박정희 소령은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를 받았고, 여수·순천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남로당 하부조직책 혐의로 같은 해 11월 11일 체포되었다. 1심에서 “파면, 급료몰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하며, 감형한 징역을 집행정지함” 조치를 받았다. 다음 해 1월 강제 예편되었으며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후[편집]
14연대 반란사건 이후, 남로당의 대한민국 내 지상활동은 거의 소멸했다. 남로당이 대한민국 내에 주도한 여러 파업과 폭동, 반란사건과 그 이후 이어진 한국전쟁을 겪은 제1공화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을 제정, 대한민국 내 모든 공산주의 세력을 국가보안법에 의거해 공권력을 이용해 축출하였다.
역대 당수
박헌영의 빨치산은 북한의 정예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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