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가 일어나자 이 해 9월 일제가 민중의 무장투쟁을 약화시키기 위해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을 공포,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크게 분노하여 11월 차도선(車道善) · 태양욱(太陽郁)과 산포대(山砲隊)주1를 조직하여 의병을 일으킨 뒤, 북청의 후치령(厚峙嶺)주4을 중심으로 갑산(甲山)주5 · 삼수(三水)주6 · 혜산(惠山)주7 · 풍산(豊山)주8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1910년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간도로 건너가 차도선 · 조맹선(趙孟善) 등과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하였다. 이후 교포들에게 광복사상을 고취하며 국내와 연락, 애국지사 소집과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였다.
1919년 3 · 1운동 후 3~6월 사이 대한독립군을 창설했다. 같은 해 8월, 2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혜산진 · 갑산 등지의 일본군을 습격,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에 자신감을 갖고 정예부대를 인솔, 다시 압록강을 건너 강계(江界)주9 만포진(滿浦鎭)을 습격한 뒤 자성에서 3일 동안 일본군과 교전하여 70여 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1919년 3 · 1운동 후 동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간도대한국민회(間島大韓國民會)를 결성하자 1920년 5월 합작하였다. 간도대한국민회와 대한독립군의 합작 군사조직으로 제1군사령부가 결성되었고 홍범도는 정일 제1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20년 5월 27일 북로사령부로 개명되었고, 이후 최진동(崔振東)이 지휘하는 도독부(都督府)와 통합하였다. 최진동이 독군부 부장, 안무가 부관, 홍범도가 북로제1군사령에 임명되었다. 확대 개편된 500여 명의 대부대로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였다.
1920년 6월 최진동과 협력하여 종성(鍾城)주2 삼둔자(三屯子)주3 부근에서 국경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120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으며, 두만강 대안의 봉오동(鳳梧洞)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전멸시키는 큰 성과를 올리니,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전투이다.
또한 같은 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도 제1연대장으로 참가, 제2연대장 김좌진(金佐鎭), 제3연대장 최진동 등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거듭한 일본군이 계속해서 추격해 오자 독립군조직을 총망라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부총재에 선임되었다. 그 뒤 간도지방의 김좌진 · 최진동부대와 함께 노령(露領)으로 이동, 흑룡강 자유시(自由市)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고 러시아군과 교섭하여 협조를 얻었다.
그러나 러시아 공산당의 배반으로 무장해제 된 뒤 많은 단원이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는 등 이른바 자유시참변을 겪게 된다. 이 사변 이후 1922년 고려공산당과 한족공산당이 통합하여 조직한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의 고등군인징모위원에 임명되었다.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되어 이곳에서 극장 수위 등으로 일하다가 1943년 76세로 사망하였다. 2021년 광복절 카자흐스탄에서 봉환된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됐다.
고려 후기의 문인. 본관은 한산(韓山).[2]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고려삼은(隱)이라 불린다.[3] 익재 이제현밑에서 공부했으며 성리학을 연구했고 문하에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남재, 권근, 길재, 이첨, 하륜, 윤소종, 염흥방 등 사실상 여말선초 거의 모든 사대부들을 키워 낸 인물. 자신의 제자인 권근, 정몽주, 길재 등을 통하여 후일 관학파[4]와 사림파가 형성되었기에 그 계보에서 거의 최상단에 있는 인물로 신진사대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괜히 사대부의 아버지가 아니다.
평가
성리학맥에서 이색의 위치는 한국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 → 안향의 6군자[11] → 이제현 → 이곡 → 이색 → 정몽주 → 길재, 권근으로 이어지는데, 조선 성리학의 정통 계보는 이색, 정몽주, 길재가 시발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색과 이색의 제자들 대부분이 여말선초에 난세의 핵심부에 위치해 있었던 점은 당시 성리학이 매우 현실 참여적인 학문이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수제자로는 일반적으로 정몽주를 들며 특히 이색은 정몽주의 강론을 듣고 정몽주야말로 동방이학의 비조라는 찬사를 보냈을 정도다.[12]
다만 조선 개국에는 반대했기 때문에 학자로서의 위치나 명성에 비해서 정치적 입지는 다소 약하고 이렇다 할 정치적 업적도 없는 편인데, 실제로도 당대에 이미 "이재(= 관리로서의 재능)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선 왕조 세종실록에 보면 좋은 평가도 있지만 대체로 혹평에 가까운 편이다.
조선 초기와 중 · 말기의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로, 조선 초에는 대부분의 성리학의 전파자이자 대부분의 신진사대부가 이색의 제자였던 만큼 정치적 위치와는 무관하게 입지는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실제로 일부 급진 신진 사대부 계층에서 척불론이 강하게 일자, 불교에 대해 반감이 크게 없었던 태조는 이색을 들어 반박을 해 무마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개국공신 일등공신인 정총에게 대장경을 인출할 원문을 지어 바치라고 지시하자, 정총은 이에 반대하며 "불교는 왕조를 병들게 하는 악(惡)이며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거부한다. 이에 태조는 "이색도 그런 말은 안 했다. 네가 이색보다 잘났느냐!!"라고 반문했고, 결국 정총도 여기에 지고 글을 지어 바친다.
이처럼 이색은 정치가나 관리로서의 자질은 떨어졌으나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학문의 깊이 만큼은 대단히 뛰어났던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여말선초의 급변기를 이끌었던 대다수의 사대부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웠음을 생각해 보면 결코 과소평가할만한 인물이 아니다. 즉, 후일의 사림들처럼 정치가나 경세가의 면모까지 겸비하지는 못 했지만 전적으로 대학자로서 활약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끝까지 조선 왕조를 거부했지만 조선 왕조를 세운 세력들을 다 키워낸 조선의 사상적 스승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 중 · 후기 이후부터는 이색의 평가는 급전직하하는데, 유교의 교조화가 깊어지고 특히 불교에 대한 거부감이 나날이 심해지면서 불교와 가깝게 지냈던 이색은 더욱 비난을 받게 된다. 특히 여주 신륵사의 나옹선사의 비문을 써주는 등[13] 불교와 친하게 지내는 경향을 많이 보여줘서 이후 성리학에서 내내 까이게 된다. 일단 비문을 써주는 대가로 절에서 후원을 많이 해줘서 풍족하게 살 수 있었지만[14] 조선의 불교 탄압에 의해 불교와 친하게 지냈던 이색까지 덩달아 까이게 된 것, 반대로 정도전은 젊은 시절 비문을 몇번 써준 적은 있지만 나중에 불교와 관계를 끊고 죽을 때까지 불교를 탄압한다.
조선인들도 대체로 이색의 학문이나 인간됨에 호의를 표하고 있고, 비극적인 개인사에 대해서도 동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다. 용재총화에서는 아들인 이종학[15]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고 있었지만 트집을 잡힐까 봐 어디 가서 대놓고 슬퍼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손님이 오자 같이 말을 타자는 핑계로 깊은 숲 속까지 가서 아무도 보지 않는 그곳에서 날이 어두워지도록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인간인 이상 명예욕이 꽤 있었던 것 같긴 하다. 이제현 사후 익재집의 서문을 작성했는데, 그 글에 1000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의 이름이 기억될 수 있는지에 대해 걱정하는 내용을 썼다. 그리고 이름만으로 천년을 살겠다는 것은 거의 모든 사대부들이 남긴 공통된 소망이라 딱히 이색만 명예욕이 꽤 강했다고 하긴 무리다.
[위 사진 우측 상단의 글] '목은선생화상찬'
牧隱先生畫像讚/ 권근(權近, 1352∼1409) 호는 양촌(陽村), 이색 · 정몽주의 문인.
창랑의 후손이 점점 한미하였고, 한대(漢代)에 이르러 채륜(蔡倫)의 문객 저생(楮生 종이)이란 자가 자못 글을 배워 붓을 가지고 때로 죽씨와 더불어 놀았으나, 그 사람됨이 경박하며 참언(讒言)을 좋아하여 죽씨의 강직함을 보고 슬그머니 좀먹어 헐어[7] 드디어 소임을 빼앗았다.
[22]원문에 나오는 夫子猷端人也。取友必端은맹자이루(離婁)편에 나오는 자탁유자(子濯孺子)와 유공지사(庾公之斯)의 이야기에 나오는 말이다. 짧게 설명하자면, 자탁유자란 사람이 전쟁터에 나갔는데 몸이 아파 활을 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적군의 추적까지 받게되어서 꼼짝없이 죽게되었는데, 추적하는 사람이 유공지사란 이야기를 듣고 안심했다는 내용이다. 유공지사의 스승인 윤공지타(尹公之他)는 자신의 제자이고, 그는단정한사람이므로 그가 제자로 키운 사람도반드시 단정한 사람(夫尹公之他端人也其取友必端矣)일 터이므로 자신에게 활질을 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단정한 사람은 공사구분을 못한다.판단은 적중하여 유공지사는 화살의 촉을 빼버리고 쏴 그를 살려주게 된다.
국보 제151호이자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이다. 정족산사고본, 태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과 함께 국보명으론 기타산엽본이 유네스코 측에는 상편 21책으로 되었다.
문화재청에서는 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의 25대 472년의 기록만을 조선왕조실록으로써 취급하여 국보 151호 지정 및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지정도 이들 기록에만 되어 있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도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로서 편찬되었으나, 이 실록을 편찬할 때는 이미 일제강점기였으므로 전통 방식을 100% 따라서 편찬하지 않았고, 일제가 정략적 의도로 왜곡한 부분이 있어 문화재청에서는 별도로 취급한다.
북한도 적상산사고본의 대부분을[10] 보유했는데, 북한에서는 '조선봉건왕조실록', '리조실록' 등으로 칭한다. 북한에 있는 적상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대한민국의 손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국보로 지정되지도 못했고, 유네스코에 북한과 공동등재하지 않았으므로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빠졌다.
실록 편찬은 고려 때 고려실록부터 있었고, 조선건국 시에도 마찬가지로 춘추관을 만들고 기록자인 사관(史官)을 두었다. 사관들은 왕들을 따라 다니면서 왕과 주변 관료들이 하는 행동을 빠짐없이 적은 기록물 사초(史草)를 만들었다. 그외에도 춘추관 사관들은 3년마다 자신들이 작성한 사초와 각 관청의 기록물[13]을 모아 별도로 시정기(時政記)를 만들어 의정부와 사고에 보관했다.
사초와 시정기 모두 실록편찬의 공정성을 보장하고, 기록자를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왕조차 볼 수 없는 비공개 문서였다. 따라서 조선 시대 왕중 자신의 사초를 읽어본 왕은 거의 없다.[14]연산군이 무오사화 때 자신의 사초를 보았다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이는 오해로 연산군 본인의 사초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초를, 그마저도 직접이 아니라 문제가 된 부분만 신하가 베껴온 것을 읽었다. 그리고 그나마도 최악의 선례가 되어 오히려 더욱 금기시되었다.
왕으로 즉위했던 인물이 사망하면[15], 현직 왕은 사관 같은 춘추관의 구성원과 정승급 고위 인사를 넣은 임시기구인 실록청(實綠廳)을 설치하고, 위에서 언급한 사초, 시정기와 승정원일기 같은 각 관청의 기록들을 모아서 죽은 왕의 실록을 편찬했다.
편찬과정은 3단계로 나누어지며 첫 단계는 실록청을 도청(都廳) 아래에 방(房) 1-3곳으로 나누고(세종, 성종 같이 분량이 많은 실록의 경우 방을 6개까지 늘렸다고 한다). 각 방에서 1차 자료에서 중요한 사실을 가려 초초(初草)를 작성하고, 다음으로 방에서 작성한 초초본을 도청에서 편집해 중초(中草)를 작성하고, 마지막으로 실록청의 수장인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재차 수정하고 문장을 통일해 정초(正草)를 작성하면 실록이 완성된 것이었다.
이후 완성된 실록은 5개를 복사해서 춘추관에 1개를 두고 지방에 만들어 둔 사고(史庫)마다 1개씩 보관한다. 그리고 실록청은 마지막 작업으로 초초본과 중초본을 시냇물에 씻어 없애는 세초를 했는데, 이것에 대해선 하위 문단에서 설명하도록 한다
세초(洗草)란 초초와 중초 때문에 나중에 문제가 생김을 막고자 아예 물에 씻어서 새 종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 세초식은 실록 편찬의 '쫑파티'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세초식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남겨두기도 했다. 세초가 시행되는 곳은 현재도 남아있는 서울 종로구 신영동의 '세검정'. 세초 후에는 세초연이라는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실록 편찬 과정은 세계적인 역사기록의 편찬 과정이면서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기록 말살의 과정인 셈이기도 하다.
세초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물자를 아끼기 위해서이다. 왕도정치를 표방한 조선 왕조는 꽤 검소하게 정부를 운영했기 때문에 모든 물자를 귀하게 여겼다. 조선 조정에게 초조본과 중초본의 제작에 들어가는 종이는 무척 아까운 지출이었다. 굳이 검소를 표방하지 않았더라도, 당시 종이는 현대에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한 물건이었고, 반도 내에 널리 퍼져있는 험난한 산세같은 환경의 문제들로 인해 세금을 거두는 것이 한계가 있었던 조선 입장에선 너무 많은 지출이었다. 특히 한지는 제작공정이 까다로워서 대량생산이 불가능했고, 고급지는 더욱 귀했다. 여기에 두 가지 판본 외에도 사료 편찬을 위해 왕의 재위기간 동안 사관들이 열심히 여러가지 일을 기록한 원본사료인 사초에 쓰인 종이까지 합하면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 정도 양을 한번 쓰고 말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여 정초본이 완성되면 필요성이 줄어든 다른 사료들의 종이를 재활용하고 전부 세초하는 것. 한지는 찢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서 물로 잘 씻어 먹물을 빼낸 뒤 잘 말리면 다시 사용할 수 있다.
사초 기록에 있어 사관들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정쟁의 소지를 차단하기 위해서이다. 다듬어서 완성된 형태로 만든 실록과는 달리 사초는 그야말로 어떤 상황에 대해 사관의 생각이 여과없이 기록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사관들이 화를 입거나 정쟁이 불거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연산군 때 김일손의 사초에서 비롯된 무오사화는 사초의 내용이 공개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무오사화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연산군이 사초를 열람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신하들을 처벌하였기 때문에 중종 때 대대적으로 세초를 하고, 아예 세초를 의무로 규정하여 이전에 세초하지 않고 남겨뒀던 사초까지 모두 씻어버렸다.[16] 연산군 이후 사초를 보려 한 임금은 없었다. 연산군 이후 사초 열람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나는 연산군 같은 폭군이다! 하고 선언하는 짓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명색이 '기록물'인데 왕이 실록을 참고조차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왕이 실록을 직접 읽지는 않되, 조정에서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일이 있으면 그 전례를 찾아보기 위해서 왕이 사관에게 지시를 내려 열람하여 기록을 찾도록 했다. 과거에는 연산군 때부터 세초가 시작되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성묘보전세초록이 발견되며, 조선 초기에도 세초가 행해져 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작업 때문에 사라진 어마어마한[17] 초초와 중초, 생생한 현장 자료들을 보지 못하게 되어 애석하게 여기는 역사학자들도 많다. 그나마 조선 후기는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 다른 자료들도 남아있지만 조선 전기는 하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기록이 거의 증발했으니...
단, 광해군일기는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중초본이 남아 있다. 그래서 정초본에 없는 광해군에 대한 기사가 있다. 이는 광해가 폐위되었고 그의 세력이 재기할 가능성이 아예 사라졌기 때문에 굳이 중초본을 없애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조선 왕조 내내 사초와 실록을 열람할 수 없도록 하는 금기가 대체로 지켜져왔고, 이를 깨고 열람을 시도할 때마다 대신들의 격렬한 항의에 의해 뜻을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성계는 "사관이 나에 대해 어떻게 써 놓았는지 직접 보고 그것을 통치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라는 얘기를 꺼냈다가 신하들이 "통치의 귀감으로 삼고자 하신다면 전대의 역사서를 읽는 것으로도 충분하옵니다."라고 나오자 더 말을 못 한 적이 있다. 세종은 태종실록 편찬이 끝난 뒤 부왕의 실록을 보려고 했다가 '열람한다면 후대 임금들도 본받아 실록을 보고 고칠 겁니다.' 하고 신하들이 반대해 뜻을 접었다.세종 13년 기사 같은 기사에 따르면 이 금기의 원형은 태종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당시에는 사초와 역대 실록 전부를 포함하는 전적인 금기는 아니었고 선왕의 실록만 열람하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이후 세종이 태조실록 편찬본과 태종실록의 사초를 열람하면서 태종실록을 열람하지 않은 이유로 태종실록 편찬자가 아직 살아있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든 것을 보아 태종 역시 비슷한 이유로 열람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컴퓨터도, 소규모 기억장치도 없던 시절에 백업을 정말 철저하게 했다. 고려실록은 궁궐에 1부, 소실을 대비해 해인사에 1부, 총 2부를 만들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은 항상 4~5부를 만들었다. 고려실록도 몽골제국의 고려 침략전쟁이나 거란군의 고려침략전쟁인 여요전쟁으로 파괴당했고, 홍건적과 왜구와의 전쟁때도 소실되기도 하는 등 이렇게 오랑캐의 침략으로 소실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부터 실록이 완성되면 복사본의 오·탈자를 막기 위해 활자로 4부를 인쇄해서 한양의 춘추관에 한 부를 두고, 나머지 3부는 지방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관해서 3년에 한 번씩 꺼내 볕에 말리는 '포쇄'라는 작업으로 곰팡이가 슬거나 좀이 먹는 것을 방지했다고 한다. 지방의 세 곳은 충주·전주·성주였는데, 겉보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았지만 대사헌 양성지는 보관 장소에 이의를 제기하며 세조 12년(1466) 11월 17일에 상소를 올렸다. '춘추관은 한양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하삼도(下三道)[18]에 있는 사고는 관청 옆에 붙어 있어 화재의 위험이 있으며 장차 외적이 침입하면 소실될 수도 있으니, 인적이 드문 궁벽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 가령 전주 사고는 지리산으로, 성주 사고는 금오산으로, 충주 사고는 월악산으로 옮겨 그 고장의 절에 보관하고 땅을 지급해서 인근 백성들로 하여금 지키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조정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72년이 지나 중종 33년(1538) 11월 6일에 성주 사고에 화재가 발생해 태조실록부터 연산군일기까지 전소되자, 나머지 사고에서 인쇄·필사해서 성주로 보냈는데, 사고의 위치를 바꾸진 않았다. 그런데 54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전주 사고본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19] 전주 사고본도 전주의 유생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20][21]이 사재를 털어 사고의 책들을 전부 내장산으로 옮겨놓고 이듬해 관청에 넘겨줄 때까지 번갈아서 지켜보며 간신히 지켜냈다(이때 안의가 남긴 기록이 수직상체일기). 결국 광해군 때 춘추관과 함께 마니산·오대산·태백산·묘향산에 사고를 마련하고, 전쟁 뒤의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재출판하여 실록 5부를 갖추었다. 그랬는데도 춘추관 사고본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에, 청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묘향산 사고본은 적상산으로, 마니산 사고본은 정족산으로 이전했다.
일제강점기에 각지의 사고를 철폐하면서 적상산본은 창경원장서각으로,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총독부로 옮겨졌으며 경성제국대학이 개교하면서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다시 이관되어 근대적 장서학에 따라 관리를 받았다. 실록을 처음 학술적으로 연구한 곳도 경성제국대학이었다. 그리고 오대산 사고본[22]은 일제가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반출했는데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대출본 47권을 제외하고 날려먹었다.[23] 정족산본은 경성제국대학에 살아남았다가 서울대학교 개교 이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관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있던 실록들은 임시수도 부산으로 수송되었는데, 서울대 도서관의 태백산사고본과 정족산사고본 등은 군용 트럭에 실려 부산으로 수송되어 경남대한부인회 창고, 경상남도청 창고 등에 보관되었다. 창경원의 적상산본은 제때 피난하지 못하고 6.25 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했을 때 월북한 사학자 김석형(金錫亨)의 건의를 김일성이 받아들여 평양으로 옮겼다. 이후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서 소장한 듯하다. 이는 북한에 있는 유일한 조선왕조실록 판본으로, 대한민국보다 먼저 번역된 《리조실록》의 원전이 되었다고 하는데, 북으로 이송되는 도중 수 차례 폭격 맞을 뻔한 기회를 넘기고 천운으로 살아남은 판본이다. 분명히 피난 갈 때 부산행 기차에 실어서 출발했음을 확인했는데 불구하고 통째로 사라져버린 6.25 전쟁의 미스터리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조선인민군이 기차를 통째로 노획했던 것[24]. 그렇게 북한으로 넘어가버렸다고 생각한 적상산본은 다는 아니지만 일부가 남한에 남아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권 그리고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서각에서 3권을 발견했다. 관련 기사
최종적으로 현재 남한에는 사고본 2종이, 북한에는 1종이 남아있다. 이 중 태백산본은 만일을 대비해 1985년부터 부산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에 보관하고 있다. 일본에 있다 일부만 남은 오대산본은 2006년에 영구대출 형식으로 한국에 반환되었다.[25] 반환 직후 국립고궁박물관에 임시 소장하고 있는데 소장 장소를 두고 논란이 있다. 본래 사고가 있던 월정사에선 사고본을 월정사의 조선왕조실록박물관으로 옮겨야 합당하다고 주장하고, 문화재청에서는 국보급 문화재를 민간 전시관에서 보관하기엔 곤란하다는 입장을 편다. 사고본의 복제품과 영인본을 월정사 측에게 기증해서 보관·전시 중이지만 월정사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며 계속 원본 소장을 주장한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남아있는 조선왕조실록은 100%가 아니다. 문종실록을 편찬할 때 전주 사고본의 제11권 표지를 제9권에다 입히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전주 사고에는 제11권이 없고 제9권만 두 권이 있었다. 이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으며 전주 사고본만 살아남고, 이후 판본은 전주 사고본을 원본으로 삼아 복제한 것이기 때문에 문종실록 제11권은 소실되었다.
권수나 책수로는 동시대 중국의 명청실록에 비해 적지만, 내용의 풍부함과 상세한 묘사 등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인 편년체 역사서로 평가받는다. 권수 자체는 적지만 글자 수는 조선왕조실록이 훨씬 더 많다. 대명실록은 2909권이지만 글자는 1600만 자 정도로, 4965만 자인 조선왕조실록의 1/3에 불과하다. 한자는 표의문자이기에 글자 수가 곧 내용의 양.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존속 기간이 조선에 비해 절반 정도에 지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명, 청은 중국을 통치하는 거대국가였음을 감안하면, 중국에 비하여 강역이 아주 작은 조선이 수십 배 큰 중국의 국찬사서의 몇 배나 되는 분량을 기록한 게 오히려 무서운 일이다.
국가의 정무뿐만 아니라, 국왕과 신하들의 인물 정보, 외교와 군사 관계, 의례의 진행, 천문 관측 자료, 천재지변 기록, 법령과 전례 자료, 호구와 부세, 요역의 통계자료, 지방정보와 민간 동향, 계문, 차자, 상소와 비답 등, 당시 조선 시대의 거의 모든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외교적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는다. 분류가 역사서고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이지, 그 실체는 1400년 이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정보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유네스코에서도 인정했듯이 이렇게 꼼꼼하고 정확하게 기록된 역사서는 세계에 흔치 않다. 실제 실록에 있는 기록들로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경상도 동래현(東萊縣)에서 세 사람, 양주(梁州)·창원(昌原)·비옥(比屋)에서 각각 한 사람씩 벼락을 맞았다.
震慶尙道東萊縣三人梁州昌原比屋各一人。
태종 9년(1409) 6월 15일 병진 3번째 기사
평안도 삼화현(三和縣) 사람 박독동(朴禿同)과 강아지가 벼락을 맞았다.
震平安道三和縣人朴禿同及狗兒。
세종 5년(1423) 7월 21일 기해 2번째 기사
충청도 회덕현(懷德縣)에서 사람이 벼락을 맞았다.
忠淸道懷德縣人物雷震。
현종 9년(1668) 6월 28일 을미 2번째 기사
이것만 보아도 조선이 얼마나 체계가 확고하게 잡힌 관료제 사회였는지를 알 수 있다. 동네 개가 벼락을 맞았다는 기록마저 있을 정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불길한 징조로 여겼던 일식이나 월식 뿐만 아니라 각종 천체활동에 대한 자료도 방대하게 기록해놓았다. 이중에는 1604년 요하네스 케플러가 관측하여 '케플러 초신성'이라고도 불리는 SN 1604에 대한 기록도 있다. 케플러는 이 초신성을 거의 1년 가까이 기록을 남겼는데, 당시 실록을 기록하던 사관도 이에 못지 않게 7개월 가까이 이를 기록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같은 천체를 보고 각각 남긴 기록이 지금까지 남았다는 점이 흥미로운 점. 아래는 7개월간 기록된 내용들 중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
밤 1경에 객성(客星)이 천강성(天江星) 위에 나타났는데, 미수(尾宿)와는 11도(度)이고 북극성과는 1백 9도의 위치였다. 형체는 세성(歲星)보다 작고 황적색(黃赤色)이었는데, 동요하였다. 3경과 4경에 달무리가 졌다.
묘시와 진시에 안개 기운이 있었다. 진시에 태백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밤 1경에 객성이 천강성 위에 나타났는데, 형체의 크기는 금성(金星)만하였고 광망이 매우 성하였으며 황적색으로 동요하였다. 위치한 곳의 성수(星宿)의 도수(度數)와 북극성과의 도수는 달과 가까이 있는 데다가 유기(游氣)가 있어 측후할 수 없었다.
선조 37년(1604) 윤9월 7일 2번째 기사
1경에서 3경까지 달무리가 졌다. 5경에 객성(客星)이 구름 사이로 조금 보였다.
선조 38년(1605) 3월 15일 1번째 기사
특히 여진족의 중흥을 연구하는 데 1차 사료로 꼽힌다. 청나라 건국 전에 여진족 스스로 남긴 사료가 거의 없는데, 조선에서는 북방을 항상 관심지역으로 여겨 국가 안보를 위해 여진족의 동태를 열심히 기록하였기 때문이다.[27] 아래 기사를 보면 동태를 기록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록에 집착하는 광기가 느껴질 정도이다.현대뿐만 아니라 당대에도 큰 의의가 있었다. 만인지상의 존재인 임금조차 실록에 자신이 어떻게 기록될지를 모르니 몸가짐을 조심케 하는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삼가 살피건대 역대에서 역사를 수찬하는 자는 모두 당시의 기거주(起居注)를 근거하고 간혹 여러 사서(史書)의 기록을 간추려 채록하며 그가 직접 보고 기록한 것을 덧붙였는데도 오히려 어긋나고 잘못된 것이 많았기 때문에 《강목(綱目)》에도 《고증(考證)》·《집람(集覽)》·《집람정오(集覽正誤)》의 설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중에 사사로이 좋아하고 미워하거나, 공변되지 못하게 시비한 것이거나, 심지어 굽은 것을 곧다고 하거나, 정(正)을 사(邪)라고 하거나, 제현(諸賢)을 무함하거나 일세를 더럽게 먹칠한 부분에 대해서는 바로잡지 않을 수 없었으니, 송(宋)나라 범충(范冲)의 사서(史書)가 바로 그것이다. (…) 무사(誣史) 중 특히 근거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유기(遺記) 및 이목(耳目)이 미치는 바의 사실만을 가지고 이를 증변(證辨)하면서 끝내는 ' 《실록》을 살펴보건대'로 예(例)를 삼았다. 그 나머지 제신들이 무고되고 모욕을 당한 것에 대해서는 일일이 거론하여 말끔히 씻어내지는 못하였으나, 그 사람의 처음과 끝을 살피면 그의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니, 보는 사람이 자세히 살필 일이다.
역사학자들에게 최악의 적이 기록말살형임을 생각해본다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선 중기 이후 붕당 정치가 격화되고 당색에 따라 인물에 대한 평가가 크게 오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져 실록에도 그대로 반영되곤 했다. 따라서 '수정실록'은 집권당이 바뀌면 그 인물에 대한 평가를 자기 당에 입맛에 맞게 고치는 수정 작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 편찬한 사관들도 이전 실록 편집의 주체들은 '몹쓸 신하'니 '황당한 평가를 내렸다.'느니 하면서 깠지만, 정작 그들이 남긴 실록 내용 그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들이 새롭게 쓴 내용들도 어느 한쪽에 치우친 평가라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면서 두 내용 모두 남기니 후손들이 알아서 잘보고 판단해달라는 말까지 남겼다. 또한 실록의 수정을 요구한다는 것은 기존 편찬자의 잘못을 전제로 함에도 불구하고, 실록 편찬과 관련된 어떠한 이유로든 기존 편찬자들을 처벌하려는 것은 금기로 여겨졌다.
이런 기록이 없었다면, 오늘날 재평가와 그에 대한 반박이 오가는 광해군이 단순히 연산군과 비슷한 폭군으로만 남을 여지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기존 기록이 없어지고 선조수정실록만 남았다면, 남는 기록이 광해군에 부정적인 시각으로 서술된 기록이 전부라 그에 맞춰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조반정의 주동자들이 사서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성했을 것이라는 심증은 계속 남겠지만, 다른 기록이 없는 이상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의 영역이 되기 때문. 사실 세계사의 여러 사례를 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실록의 내용 자체를 수정하는 경우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닌데, 실록에 기록된 인물의 이름이 후대에 재위한 왕의 이름과 겹쳐 피휘를 위해 후대에 실록에서 이름을 고친 예가 있다. 가령 선조 때 태종 대에 한성부 판관을 지낸 원황(元晃)이라는 인물의 이름이 예종의 휘와 겹친다는 이유로 태종실록에서 원황의 이름을 元滉으로 고친 일이 있었다.#
사신은 논한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지금 재상들의 탐오가 풍습을 이루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은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어 권요(權要)를 섬기고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너도나도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에 몸을 던져 요행과 겁탈을 일삼으니, 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겠는가. 진실로 조정이 청명하여 재물만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고, 수령을 모두 공(龔)·황(黃)과 같은 사람을 가려 차임한다면, 검(劎)을 잡은 도적이 송아지를 사서 농촌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찌 이토록 심하게 기탄없이 살생을 하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추적 포착하기만 하려 한다면 아마 포착하는 대로 또 뒤따라 일어나, 장차 다 포착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이는 절의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棟樑)이 되기 때문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先朝) 때의 일을 인용하여 헌의하는 말에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의견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사관은 논한다.(史臣曰)' 하는 문장으로 시작하면서 사관이 귀띔으로 들은 정보를 기록하거나,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논평한 부분이 있는데, 사관도 사람이니 만큼 가끔 지나치게 주관적이거나 당파에 치우친 생각을 적어 놓았다. 사관의 평을 읽으면 공감이 가거나 통쾌할 때도 있고, 고개가 갸우뚱해질 때도 있다. 상기한 두가지 예시로, 임꺽정의 행각을 두고 사관이 아주 날카롭게 원인을 진단한 부분에서 사관은 '대신이란 놈들이 뇌물이나 먹어대고 관리들이 백성들을 쥐어짜니 임꺽정 같은 놈이 나오겠냐 안나오겠냐?'고 비판했고 이는 현대인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지만, 병자호란 때 속환해온 여인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과 박해에 그녀들을 보호하고자 나선 최명길을 "삼한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라고 비판한 사관의 성차별적 시선에는 현대인들은 당혹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실록에 풍부하게 기록된 사실을 읽어보면 사관의 평이 옳은지, 그른지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사실 오히려 이는 장점인데, '사관은 논한다'로 인해 어디까지가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사관의 주관적인 평가가 개입한 부분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사서도 사람이 쓰는 것인 이상 필자의 주관이 전혀 개입하지 않기는 힘드므로, 사실과 주관을 뭉뚱그려 적는것보다는 이렇게 사실과 주관적인 논평을 분리해서 기록하는 편이 훨씬 정확한 기록이 될 수 밖에 없다. 또한 해당 사실을 당대 지식인인 사관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당시의 사회상을 파악하는데에 참고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장점.
조선은 철저한 수도집중중앙집권국가였기에 지방 기록이 적다. 예를 들면 옆나라 일본은 각 지역의 가문에서 쓴 기록이 많이 남았고 이것들이 주된 기록이라서, 일부 관찬 정사와 국가 공문서들만 파도 큰 틀은 잡을 수 있는 한국과는 연구 방식도 다르다. 다만 서술 목적 자체가 중앙정부의 역사 기록물이라 중앙정부 중심이지 지방 관련 기록은 지역에서 올라온 주요 공문서를 모은 각사등록이라는 책이 따로 있다. 그리고 이것도 실록 못지 않게 양이 많다.
또 후대 왕이 모아서 집필하기 때문에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실록의 내용이 사실관계가 왜곡되거나 빠진 경우도 있다.[43]무인정사 당시 정도전의 최후나 영정조 때 사도세자 관련 기록, 계유정난 등이 대표적인 예. 비슷하게 같은 실록인데도 후대 사관들이 정리한 내용과 사건 당일의 기록이 모순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44] 대표적으로 연산군일기에서 무오사화 때 이극돈의 행보를 들 수 있다.[45]
실록의 방대한 분량에 압도되어 '이것만 읽으면 조선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일단 조선왕조실록은 어디까지나 사초와 승정원일기, 각종 공문서 및 개인사료를 가져다 편집해 만든 요약본이다. 하루 종일 회의가 이어진 경우 발언을 일일이 기록하지 않고 핵심적인 부분이나 결과만 수록했다. '일일이 기록한 것'을 보려면 사초나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을 찾아봐야 한다. 다만 요약을 했다고는 해도 마구 한 것은 아니라서 실록 편찬을 맡았던 실록청의 관련 사료들을 보면 어떻게 해야 분량을 적절히 줄이면서도 사실이 왜곡되지 않을지 고민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정치적 견해에 치중되었다는 비판을 수용하여 수정실록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또한 실록은 어디까지나 한양 중앙정부의 시각이 강하다 보니 각 지역에 대해서는 소홀할 수밖에 없고, 중앙정부에 반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치우친 견해를 쓸 수밖에 없었다. 즉 어떤 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났다면 실록은 그것을 '역적의 난'이라고 하지, 일으킨 쪽 입장을 대변하여 적어주진 않는단 이야기다. 물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뭐가 문제였는가.'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과 밝혀진 사실들은 적힐 수 있지만 결국 중앙정부의 입장이라는 한계가 있다. 정조 때 실록을 읽은 다음에 북학의 같은 책을 한 번 읽어보면 같은 시대를 다룬 기록임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그리고 실록은 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관심으로 적은 사료가 아니다. 한양 중앙정치에 관한 기록이 대부분이고 그 사회의 미시적인 역사, 예를 들어 속옷의 변천사, 화폐의 유통범위 등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한 부분까지 알아내려면 가문 기록이나 야사집, 야담집을 비롯한 잡기류, 일기 등도 뒤져봐야 한다. 물론 이것들은 대부분이 한자라 대중적 접근도가 극히 떨어지거나 민감한 것들이 있기에 아직 연구자들만의 영역이다. 그나마 인조실록에 담배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등 어쩌다 한번 나오는 식이다.
또 하나의 한계라면 역시 사람이 쓰다보니 민수의 옥 같은 사건도 있었고[46] 조선 후기로 갈수록 당쟁이 격화됨에 따라서 실록도 당파 입맛에 맞게 내용이 바뀌었다. 이른바 '수정실록', '개수실록', '보궐정오'인데 물론 선조수정실록은 사초가 부족해서 그랬다고 반박 할 수 있지만 현종개수실록이나 숙종실록보궐정오, 경종개수실록은 당연히 사초도 많은데 "어 저거 우리 당파가 쓴 거 아니네? 거짓" 정도 논리로 나왔다. 그래도 나름 장점이 있다면 원 실록과 수정실록 두 개를 교차검증할 수 있다는 점이다.[47] 또한 당시 당파가 관련 사건에서 어떤 입장이었는지 알 수 있다. 당대의 헛짓거리가 후대에는 더 도움이 될 수 있음이 얄궂은 일이다. 예시를 들자면 선조실록을 두고 서인들이 실록 내용이 부실하고 당파성 있다고 여겨 인조 때 수정실록을 편찬했는데, 수정실록 또한 당파성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조실록 자체에 당파성이 없었다고 볼 순 없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시기에 편찬되었고 당시 왕은 광해군이었기에 아무래도 북인 입맛에 맞게 저술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헌종실록, 철종실록은 아예 세도정치의 영향인지 사초도 줄어들어 실록 내용이 많지가 않다. 그나마 해당 부분은 다행히 승정원일기가 있다.
첫 부분인 태조실록과 끝 부분인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무작정 신뢰하기 어려운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읽을 때 주의가 필요하다. 우선 태조실록은 태조 이성계를 미화하기 위해 신화적인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태조실록 총서는 이성계와 그의 조상들이 조선 왕이 되기 전, 즉 고려의 '일개 장수'이던 시절의 기록으로써, 사관이 옆에서 보고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것이 아니므로 조선왕조실록의 다른 부분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리고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조선총독부 주도 하에 편찬되어 일본 측에 불리한 기사는 왜곡해 실었다는 문제가 있다.
이렇게 기록이 많이 남을 수 있었던 건 조선 사관들이 그만큼 근성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관들은 자세한 기록을 위해 왕을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유명한 예로 사냥을 나간 태종이 말에서 떨어지자 부끄러웠는지 "사관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한 일이 있었는데, 이 내용마저기어코 기록하였다.
親御弓矢, 馳馬射獐, 因馬仆而墜, 不傷。 顧左右曰: "勿令史官知之"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니: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태종 4년(1404) 2월 8일 4번째 기사에서.
왕이 알리기 싫어한 일조차 기어코 사관들이 알아내어 꼼꼼하게 기록에 남겼고, 후대에도 그걸 없애지 않고 편찬까지 했다는 얘기다. 오죽하면 이 내용은 실록 홈페이지의 인기 검색어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특히 태종 때 민인생(閔麟生)이란 사관은 경연 때 왕이 말하는 걸 들으려고 병풍 뒤에서 숨어 있던 경우도 있었고, 평범한 연회 때도 기록하려고 초대도 안 받고 불쑥 나타나기도 했다. 심지어, 절대왕권을 지녔던 조선 초기 태종 집권기에는 이름모를 사관이 왕과 중전 등이 거주하는 내전에 몰래 들어가려고 했었다고 한다. 이 정도면 거의 스토커나 파파라치 저리가라 수준.
근성의 시작, 연회의 불청객: 실컷 연회를 즐기고 궁으로 돌아가는 태종의 눈에 띈 사관 민인생. 태종 1년 3월 18일 기사
지칠 줄 모르는 근성의 징조: 기세좋게 편전(왕의 거처 겸 업무 공간)에 들어가려다가 제지당함. 태종 1년 4월 29일 기사
들이대기: "편전에서 정사 보실 때도 옆에서 '전하의 아름다운 말씀' 을 기록해도 될까요?" 태종 1년 5월 8일 기사
편전 엿보기: 민인생이라는 사관이 편전에 앉아 업무를 보는 태종을 바깥에서 엿보다가 걸림. 태종 1년 7월 8일 기사
슬픈 결말: 여러 번 몰래 엿보다 걸렸는데 심지어 휘장을 걷고 엿본 것까지 문제가 되어서 변방에 귀양 가는 진짜(…) 슬픈 결말. 태종 1년 7월 11일 기사
11년 후 아직도 찜찜한 태종: 민인생이 일으킨 사건 후 9년이 지나 사관의 편전 출입을 허용했지만, 뭔가 찜찜했는지 "사관이 언제부터 편전에 들어왔냐?" 하고 물어 지신사가 2년 전이라고 대답. 그러자 태종이 말이 없어서 불안해진 지신사. 태종 12년 7월 29일 기사
뒷담화: '아침마다 사관도 입시하게 해달라.'는 말이 나오자 민인생의 이야기를 하며 불쾌해 하는 태종. 태종 12년 11월 20일 기사
이러하듯 사관들의 기록정신에 성역은 없었다. 왕이 쪽팔린 일을 하고 '이거 쪽팔리니까 적지 마라' 라고 한 것도 적었고, 왕이 욕설을 쏟아내도 정직하게 적었으며 정치가 개판이었던 문정왕후 집권기에는 대놓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라고 불경한 수준의 문장까지 실어놓기도 했고, 도둑이 생기는 원인을 살피지는 않고 때려잡자고만 주장하는 명종의 주장이 옳지 못하다고 왕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을 쓰기도 했다.
심지어 사관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까지도 적어야 했다. '사관들이 요즘 자꾸 조는데 한번 조져야겠다'라거나, '사관들 근태 관리가 안된다. 혼쭐을 내야 겠다'라는 대신들의 논의들까지도 울면서 모두 꼼꼼하게 적었다.[49][50]
이 때문에 왕은 사관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심지어 왕이 잡아다가 벌을 내리는 사례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무오사화.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어서 터진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 외에도 세조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는 기사들을 많이 실었었다. 결과는 피바다… 그리고 영조 1년 이천해의 공초에선 영조가 사관들에게 '죄인의 흉악한 말을 쓰지 말라'고 하자 사관이 '흉참하기 때문에 차마 쓸 수 없었습니다.' 하고 맞장구치며 설설 긴 모습도 있다. 이 대화를 굳이 써놨다는 건, 앞에서는 그렇게 말해두고 결국 적었다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30년 후 신치운이 경종 독살설과 게장을 언급하여 영조가 '이거 쓰지 말라' 라고 명령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성을 잃은 틈을 타, 당시 사관이 "지금 신치운이 치는 게장 드립이 지난번에 이천해가 했던 소리랑 똑같습니다. 참고해두세요" 라고 재치있게 기록했다.[51]조선시대 사관들의 30년 존버 메타
물론 사관들도 사람인 만큼, 편찬자나 사관의 당색에 따라서 평가가 왔다갔다하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늘 일부 편파적인 평가나 곡필의 의심이 가는 부분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 하지만 실록은 그런 편파서술이나 곡필을 분량이 압도적인 사실 서술로 극복해버리곤 한다. 즉, 일부 곡필된 부분이 있어도 면밀하게 기록된 전후사실들을 눈 똑바로 뜨고 분석만 잘 하면 진상이 떠오를 만큼 기록이 풍부하다! 설령 당대의 임금이 직접 특정부분을 찾아내서 없애버리려 해도 양이 많아서 찾는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없애도 임금이 돌아간 뒤 '없애려 하였다' 라고 또 적을 것이 뻔하니...
그리고 조선 후기 당쟁으로 인해 집권당이 바뀌어도 이전 집권당에 유리하게 기록된 기존 실록을 없애버리지 않고 보존하면서 자신의 당에게 유리한 내용을 수정실록·개수실록·보궐정오 등으로 다시 편찬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새 집권자가 기존의 기록을 아예 없애버리는 기록말살형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가를 보면 실록의 공정성이 새삼 느껴진다.
영인(影印)이란 도서, 그림 등의 원본을 사진으로 찍어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요새 감각으로 말하면 스캔본.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사진판으로 영인한 적이 있었고, 해방 이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다시 1955년부터 4년 간에 걸쳐 태백산본을 영인해 A4 크기의 양장본 48책으로 간행하였다. 현재는 영인이 아닌 책을 그대로 복제하는 복본 제작과정이 진행중이다. 가쿠슈인에서도 영인한 적이 있다고 한다. 1955년까진 이조실록이라고 불렀으나 이조가 멸칭이란 주장이 대두되어 1955년 10월 12일 조선왕조실록으로 공식적으로 개칭했다. 북한은 아직까지도 리조실록이라 부른다.
기록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북한에서는 적상산본을 바탕으로 1980년 모두 400권으로 번역이 되어 리조실록이란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남한에서는 원래 전문가들이 보는것을 염두에 두고 번역작업을 했기 때문에 고유명사와 용어를 살린 것과 달리 북한은 대중서를 지향하여 공식용어나 표현을 모조리 현대어로 고쳐서 내놓았다. 가령 '주상이 종친을 거느리고'라는 표현은 '임금이 가족들 데리고'로 하는 식. 심지어 임금이 받은 시호도 거의 현대 한국어로 풀이해, 가령 세종의 시호인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은 '영특하고 문명하며 슬기롭고 용감하며 어질고 뛰어나며 명철하고 효성스러운 세종장헌대왕'으로 번역되었다. # 이러한 번역방식은 원단어의 뜻이나 늬앙스가 달라질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어쨌든 어려운 역사적 전문용어나 고어에 익숙치 않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남한 번역본보다 북한 번역본이 훨씬 읽기 쉽다. 또한 한국 정부(문화재청)의 견해와는 달리 북한 번역본은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도 실록의 일부로 포함하여 번역했다.
한편 남한에서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가 주관하여 번역 작업에 들어가 1993년 말에야 번역이 완료되어 출판되었다. 1994년 4월 문화체육부, 교육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민족문화추진회, 서울시스템(주)의 합의로 '조선왕조실록 CD롬 간행위원회'가 발족되어 전산화 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1995년 CD롬 초판이 간행되었고 이후 1997년에 1차 개정판, 1999년에 2차 개정판이자 보급판이 출시되었다. 뒤에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별도로 CD롬으로 제작했으며 원문 전산화도 뒤이어 이루어졌다.
현재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를 만들어 자유롭게 무료로 국역본과 원본을 열람할 수 있다. 과거 네이버처럼 실시간으로 인기 검색어를 보여준다. 대마도 징벌, 측우기 등 학업을 목적으로 한 조사 키워드가 대부분인 반면 '태종 사냥 떨어져' 같은 것도 있어 태종의 수치 플레이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또한 한국고전종합DB에서도 번역이 진행중인 승정원일기의 해석본과 함께 조선왕조실록의 국역본을 열람할 수 있다. 한국고전종합DB에서는 주로 국역본 열람에 중점을 두고, 원문을 열람하고자 할 경우에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로 리다이렉트된다.
조선왕조실록 전산화는 전세계 지식인들은 물론 한국의 많은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52] 전산화 과정에서 수많은 오류가 수정되고 새로운 점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 권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책도 전산화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현재도 꾸준히 증역, 오역 수정 등으로 보완 중이다. 분량이 워낙 많아 (승정원 일기, 일성록 등과 더불어) 실록이 수많은 한문 학자들을 먹여살린다는 말도 있다. 워낙 방대한 양이라 번역/수정 작업이 끝도 없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
일반 명사와 고유 명사를 혼동하여, 고유 명사로 된 것을 일반 명사로 풀어서 번역하거나 고유 명사가 아닌데도 이름이겠거니 하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띈다. 예를 들면 흥인지문(興仁之門)은 동대문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걸 한자 하나하나 다 풀어서 '인(仁)을 일으키는 문' 이라고 하거나, 임진왜란 당시에 天將이라고 하면 명나라의 지휘관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걸 '하늘의 장수' 로 번역하는 식. 직역이나 비표준어 같은 건 시간과 예산의 문제로 인해 번역을 빨리 완성할 필요가 있었다는 이유라도 댈 수 있지만, 이런 건 그냥 오역이다.
대략 1995년에 서울시스템이라는 회사에서 조선왕조실록 CD롬을 판매하자 상당수 사극에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이 반영되기 시작했고,[53] 2005년에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하자 젊은 작가층도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용의 눈물[54]이나 왕과 비같은 사극도 조선왕조실록 CD롬을 참고해서 쓴 사극이다.[55]
쉽게 검색을 할 수 있으니까 새로운 인물들을 찾아내서 대입한다든가, 새로운 해석이 많아졌다. 진짜 검색만 해보면 다 나오는 수준이다. 조선시대 사극이 이전에는 연산군, 단종, 희빈 장씨 같은 몇몇 소재만 수십번은 우려먹었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온갖 퓨전 사극이 나오는 바탕이 되었다. 꼭 이런 자료가 있어야 퓨전 사극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만 이러한 세세한 서술 덕분에 퓨전 사극들이 상당히 탄탄한 지형 위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다만 이렇게 풍부한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하는 덕에 아이러니하게도 사극 작가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실록의 데이터가 워낙 방대하고 상세하여서, 약간의 고증오류만 내더라도 전국의 역덕들이 물어뜯기 때문. 실록이 존재하는 한, 고증오류는 사극작가들이 피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지뢰밭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딴에는 열심히 조사하고 '이쯤이면 완벽하겠지.' 싶다가도 역덕들은 실록을 통해 귀신같이 오류를 찾아낸다.
정통사극에서 이런 고증논란이 일어나는 상황이 반복되자 거꾸로 큰 줄기만 챙기고 세세한 상황은 픽션을 가미했다고 못박고 출발하는 육룡이 나르샤나 뿌리깊은 나무 같은 팩션사극, 더 넘어서 아예 조선시대라는 배경과 일부 핵심이 되는 배경[56]같은 기본적인 뼈대만 남겨놓고 핵심적인 이야기는 전부 허구로 갈음한 구르미 그린 달빛이나 해를 품은 달 같은 퓨전사극이 등장하고 인기를 끌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퓨전사극의 경우엔 아예 처음부터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완전한 허구라고 못을 박고 시작하며 성조대왕처럼 아예 없는 왕을 등장시키고 시대상도 일부러 불분명하게 하는 등 고증오류 논란을 일찌감치 피하기 위한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57]
대충 주제 하나를 잡고,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서 기사를 좀 복붙한 다음, 적당히 자신의 썰을 덧붙이면 그럴듯한 역사교양서가 하나 나온다.
책 쓰기 참 쉬워졌다. 실록이 공개된 후로 조선왕조를 다룬 책들은 거의 다 이런 상황이다. 덕분에, 실록만 대충 훑어보고 사료를 자기 주장에 들어맞는 것만 쥐어뜯어서 쓴 불쏘시개 수준의 역사교양서도 넘쳐나는게 문제. 대표적인 예가 원균명장설. 실록에서 선조가 원균에 대해 찬양한 발언만 적당히 짜맞추고, 다른 기록과 신하들의 의견과의 교차 대조는 전혀 하지 않고 조합한 것이다. 게다가 임진왜란은 실록 이외에 신뢰할 만한 사적 기록도 상당히 많은데, 원균명장설에서는 오직 '원균행장'만을 취사선택한다.
자기 조상님의 업적을 찾아보려고 검색했더니 탐관오리였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발견하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는 공명첩을 사는 족보 위조나 족보 매매가 정말 흔했다. 즉, 자신의 조상이 실제 자신의 조상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기에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사실, 이제 와서는 족보의 진실성 여부를 따지기도 어렵고 또 그럴 필요성도 많이 줄었다. 다만 자신의 조상이 옆동네라면?
사관들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적은 문서이긴 하나 일단은 공문서다보니 왕이나 주변인물들이 하던 욕설은 '흉참한 말', '입에 담을 수 없는 말', '차마 듣지 못할 하교' 같은 식으로 돌려서 말하는데, 자기 며느리와 그가 낳은 장손을 비롯 손자들에게 한 패드립에 대한 기록이 인조실록에 있다. 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왕의 몇 안 되는 욕설 기록이다. 실록 외의 기록에는 정조의 비밀 편지 등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개새끼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狗雛强稱以君上之子, 此非侮辱而何?
외모평가를 거의 하지 않거나 해도 아주 박하게 평가를 한다. 만약 실록에서 외모평가가 나왔다면 아주 아름답거나 아주 특이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특히 양녕대군의 애첩이던 어리나 희빈 장씨처럼 실록에서 대놓고 미인이라고 기록된 경우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드문 편. 헌종도 헌종실록 1권에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으며 '고 기록되어 있어 현대에 조선 임금 중 최고 미남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58]
실록을 포함, 전근대 동양에서 서적/출판물의 분량을 말할 때 쓰는 '권' 과 '책' 에서 '권'은 '내용상 구분하여 나눈 단위' 이고 '책'은 '물리적으로 종이를 묶은 단위' 를 뜻한다. 즉 오늘날 흔히 말하는 '장(챕터, 파트)' 이 당시의 '권' 이고, '권' 이 당시의 '책' 이다. 예를 들어 태조실록이 15권 3책이라고 하면, 15개 장이 3권 책에 나뉘어 수록되었다는 의미다.
문종 1년 12월에서 2년 1월까지 다룬 11권이 표지만 11권이고 내용은 9권이기 때문에 전체 실록 중 유일하게 공백이 있는 실록이다. 원인은 인쇄 중 실수로 표지와 내용이 바뀐 책이 전주사고에 봉인된 바람에 생긴 일이다. 반대로 말하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다른 사고에 아마 표지만 9권이고 내용이 11권인 문종실록이 있었다는 것이다. 선조 33년 예문관 대교 권태일이 묘향산에 있던 실록을 열람하다가 문종실록의 표지가 11권인데 정작 내용은 9권의 내용이 거듭 실린 것을 확인했다. 이때 권태일은 분명 처음에 인쇄하여 나누어 저장할 때 권질이 잘못되어 서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훗날 영조 9년 누락이 재확인되어 오대산에 있는 실록을 전서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오대산에 있던 실록도 결국 전주에 있던 실록을 복사한거라 의미가 없었고 결국 문종실록 11권은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관련 자료들이 대거 소실되면서 임진왜란 이전은 극히 소략하다. 반면 임진왜란부터 선조 말까지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대거 들어가 분량이 비대해졌다. 선조 24년(1591)까지가 25권 12책뿐인데 비해 선조 25년부터 41년까지는 196권 104책이다. 그나마 선조 25년이 1월부터 3월까지가 빠졌음에도…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이 편집 주체가 되어 북인이 편집한 선조실록의 내용을 수정한 것. 효종 대에 완성되었다. 이이, 성혼 같은 서인 인사들에 대한 왜곡된 기록을 바로잡음을 목적으로 수정한 것이다. 서인만 좋게 쓰면 눈치 보여서인지 유성룡 등 대북파가 폄하한 남인도 좋게 써준 기술이 많다. 하지만 서인에 대한 왜곡은 심각하며 선조실록에서 생각보다 고쳐진 부분은 많지 않다. 원균명장론이나 십만양병설 같은 주장들과 관련이 있어서 관련 논쟁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실록.
일제강점기에는 실록이 쓰이지 않다가 순종이 죽은 뒤 조선총독부 산하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기구에서 1927년 4월 1일부터 1935년 3월 31일까지 고종과 순종의 기록을 실록이란 이름을 붙여서 써낸다.
비록 실록이라는 이름은 붙었고, 국가 공인의 최종 편집본이라 조약, 대외 공문서 등에 대한 기록은 잘 정리되어 있지만, 제대로 실록청을 열어서 쓴 실록이 아니고, 일제에 불리한 부분이 누락 혹은 왜곡되었다. 예를 들어 고종실록의 을미사변 내용을 보면 미우라 고로가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구절은 단 한 문장도 없고,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안타깝다고 하는 등. 이 때문에 문화재청에서는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제외하고 있으며, 국보 및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목록에서도 빠져 있다.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등의 주요 관찬사료를 채택하여 쓰여졌고 주요 조서‧칙령‧법률‧조약문 등을 망라하고 있으므로 역사적 사실을 아예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일제의 정략적 의도가 많이 들어가 있기에 역사학자들은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또한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의 정부기록은 일본의 편집이 거의 없는 승정원일기[60]나 개인 문집들을 많이 사용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기록유산임과 동시에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왕조 472년간의 역사를 수록한 것으로서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에 걸쳐 작성된 기록이다. 이 조선왕조실록과 같이 꼼꼼하고 정확하게 기록된 역사서는 세계에 흔치 않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경제, 산업, 교통, 통신, 사회, 풍속, 미술, 공예,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또한, 일본, 중국, 몽고 등 동아시아 제국의 역사연구, 관계사 연구에도 귀중한 기본자료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을 작성했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에 대한 비밀성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그 때문에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한국사 교육과정에서 조선시대 분량 ≥ 그 이전의 모든 분량 현상이 나타나게 된 주요 원인. 조선시대 이전 역사가 쓰여진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조선 이전의 역사를 담은 모든 서적을 합쳐도 실록 하나보다 양이 적다. 그만큼 실록의 분량이 초월적으로 방대하고 자세하며, 조선시대 이전의 사서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이렇게 될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조선과 같이 역사서 집필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않은것도 원인이지만, 가장 큰 원인은 반란이나 전쟁등의 이유로 보관되어있던 전대의 역사서가 소실되어 버렸단 것이다.[61]한국사에서 사서가 대규모로 소실된 대전쟁만 해도 10세기부터 4번이나 있다. 여요전쟁, 여몽전쟁, 임진왜란, 한국전쟁.
몇몇 사건은 중국에서 일어났지만 중국 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되었다. 명나라 궁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명사에는 치부를 감추기 위해 기록을 없앴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당시 고문을 당했던 조선 출신 궁녀의 증언을 수록하였다. 그도 그럴 게,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도 피해자도 둘 다 조선 출신 공녀였다. 중국인 여씨가 조선에서 온 여씨에게 성도 같으니 친하게 지내자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영락제의 총애를 받다가 마침 급사한 조선 공녀 출신 권씨를 여씨가 독살했다고 무고한 것. 여기서 조선 출신 후궁들이 여럿 죽었다. 겨우 살아남은 몇몇은 조선으로 도로 방출당했는데, 그들의 증언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덕분에 명나라 궁중의 잔인한 고문법을 현대에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연좌제로 얽혀서 고문받다 죽은 인물 중 하나가 영락제에게 "니 정력이 딸려서 궁녀가 내시랑 바람핀건데 누굴 탓하냐"고 일침을 날린 적이 있는데, 이게 실록에 실려 버리기까지 한다.
전술했듯이 원칙적으로 왕은 절대 읽을 수 없었으며, 책벌레 겸 지식덕후였던 세종대왕은 그 내용이 너무나 궁금했던 나머지 몇번이나 보려고 시도했지만 "태조실록"을 제외하곤 보지 못했다.
태조실록이 편찬된 후, 세종은 "지금 태조실록은 1책(冊)뿐이잖아? 나중에 잃어버리면 큰일인데. 그러니 복사본을 만들어서 한 책은 춘추관, 한 책은 내가 볼수있게 해놓자. 이건 다 나라를 위한거야."라고 하는데 세종의 속셈을 알아챈 변계량이 "그건 아니되옵니다!"라며 결사 반대해서 결국 세종이 포기했다. (1425년 12월 5일)
세종실록 80권 세종 20년 기사를 보면 세종이 "이미 《태조실록》을 보았으니 《태종실록》도 또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지니 여러 겸춘추(兼春秋)에게 상의하라"라고 말한다. 그러자 황희와 신개 등이 "역사서를 임금이 함부로 본다면 그 내용도 임금의 입맛에 맞을 것인데, 그렇다면 먼 후손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라며 적극적으로 반발했다. (1438년 3월 2일)
혜성의 출몰, 일식, 월식, 신성 출몰, 신성 폭발 등 각종 천문현상들도 다수 기록되었다.[62]선조실록에 있는 SN 1604 관측기록은 이 초신성을 연구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선조실록에 기록된 SN 1604 관측 기록은 케플러를 비롯한 유럽의 천문학자들이 남긴 기록보다도 상세하며, 특히 밝기 변화가 초신성 폭발 직후부터 상세히 기록되어, 이 초신성이 Ia형 초신성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줬다. 좀 더 이른 시기에 있었던 SN 1572 초신성에 대한 기록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는지, 기록이 딱 한줄 남아있다.
또한 지진 및 백두산, 한라산의 분화에 대한 기록도 있어서 한반도가 결코 지진, 화산의 안전지대가 아님을 후대에게 시사해 주고 있다.
실록(實錄)은 동아시아권에서 편년체 역사 기록 양식 및 이 양식에 따라 쓰여진 기록을 총칭하는 말이다. 전근대 중국, 한반도, 일본, 베트남의 왕조들이 실록을 출간했으며, 현대까지 실록을 만들고 있는 나라는 군주제를 시행하는 일본이 유일하다. 실록이라는 명칭은 "실제로 있었던 일(事實)을 그대로 기록한다(直錄)"라는 뜻.
본래 중국에서 황제의 일대기를사관이 기록했던 것에서 유래하며 실록의 기초가 되는 사관의 원래 기록은 사초(史草)라고 부른다.
최초의 실록은 중국남북조시대(439~589) 이전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되며 남조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의 행적을 기록한 양황제실록이 기록상으로는 가장 오래된 실록이다. 그러나 실록의 제작체계가 마련된 것은 당나라 때의 일로, 황제가 사망하면 기록관원인 기거주(起居住)의 기록을 중심으로 문서와 기타 기록을 모아 편찬하는 형식이었다. 또한 중국의 실록은 각 왕조의 정사(正史)를 기록하는 총서를 편찬할 때 기초자료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왕조역사서는 서(書)나 사(史)로 부른다[1].
현존 중국 실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당순종 실록 5권, 그 다음이 송태종 실록 일부 20권이다. 나머지 명 이전 실록들은 죄다 유실되었다. 명나라의 대명실록(大明實錄)[2]은 태조 홍무제부터 천계제까지[3] 2,964권, 청나라의 청실록(淸實錄)[5]은 청태조부터 광서제까지 4,404권이 있다.[6] 하지만 분량상으로는 같은 시기 조선왕조실록이 앞서는 편이다. 일례로 대명실록의 경우 글자 수는 총 1,600만 자 정도인데 조선왕조실록은 총 4,964만 자 이상이다.[7]
한국은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기록이 구삼국사, 삼국사기 등에 남은 걸 봐서 그 원사료가 되었을 사관과 기록체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중국 방식의 '실록'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918~1392) 때로, 8대 현종 대에 이르러 창업주 태조 왕건부터 전왕이었던 7대 목종 왕송까지의 역사를 정리하여 7대실록 36권을 편찬하게 한 것이 최초이다. 이 실록은 거란의 침입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되면서 왕실 역사를 기록했던 서적들이 모두 불타 다시 역사서를 편찬한다는 의미로 제작된 것으로, 1034년 덕종 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고려의 실록 제작체계는 중국과는 다른 구조로, 감수국사, 수국사, 동수국사, 수찬관, 직사관의 5대 편제였으며, 사관은 시정을 기록하는 관리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이후 덕종실록[8]이 편찬되었으며 숙종, 예종, 인종, 의종,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원종,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공민왕, 공양왕의 실록이 추가로 편찬되었다. 고려사 기록에서 실록이 편찬된 왕은 상기 21왕이 전부라서 나머지 왕들은 실록을 편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국사에 보면 고려 역대왕의 실록은 모두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고려실록 중 현존하는 실록은 없다. 조선 시기 한양 춘추관에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보관되어있다가 임진왜란 때 타버렸기 때문이다. 이 때 조선왕조실록도 같이 불탔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전국 각지에 백업본을 분산 배치해 둬서 한양이 불타도 복원이 가능했지만 지나간 왕조의 실록인 고려실록은 그냥 보관에 의의를 두는 상태였으므로 백업은 따로 해놓지 않았고 그대로 원본이 사라진 것이다.
고려실록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고 하는 조선시대의 고려사는 고려실록보다 훨씬 적은 분량으로 요약한 것으로, 고려실록을 얼마나 반영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기에 애석한 점이라 할 수 있다.
고려가 멸망하고 나서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한국 실록의 대표이자 현존하는 유일한 한국의 실록인 조선왕조실록이 등장한다. 고대와 중세 국가를 통틀어 세계 역사상 가장 자세한 통치기록이며 또한 편년체 역사서 중 가장 세밀한 기록으로 당시의 국내 및 국외 정세와 천문현상, 자연재해, 기상, 생활상, 지리, 인물등 여러 방면에서 참고되지 않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일본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879년(간교元慶 3년)에 55대 몬토쿠 덴노의 일대역사를 다룬 일본 몬토쿠 덴노 실록(日本文徳天皇実録)이 완성된 것이 최초의 실록[9]이다. 몬토쿠 덴노의 뒤를 이어 즉위한 56대 세이와 덴노의 명으로 편찬된 이 실록은, 후지와라노 모토츠네(藤原基経), 미나후치노 토시나(南淵年名), 미야코노 요시카(都良香), 오오에노 오톤도(大江音人)의 4인 체제로 제작되다가 877년에 미나후치노 토시나, 오오에노 오톤도가 잇따라 사망하자 스가와라노 코레요시(菅原是善)가 뒤를 이어 참가해 3인 체제로 완성시켰다.
뒤를 이어 56대 세이와 덴노부터 57대 요제이 덴노, 58대 고코 덴노 3대 30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実録)가 901년(엔기延喜 원년) 8월에 완성되었다. 59대 우다 덴노의 명으로 편찬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이 우다텐노가 897년(칸표寬平 9년) 황태자 아쓰히토(敦仁) 친왕에게 양위하면서 작업이 일시중단되었다. 이후 60대 다이고 덴노로 즉위한 아쓰히토의 명으로 그 해 다시 편찬재개에 들어가 901년에 완성시켰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 말기에 율령제의 쇠퇴로 더 이상 실록간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거의 천 년이 지나 천황 중심의 정부가 들어선 메이지 유신 이후에 실록 간행이 재개되었다.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일본은 군주제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실록을 지금도 계속 만들고 있으며, 궁내청(패전 이전에는 궁내성)에서 편찬을 주도한다. 전근대 한반도나 중국처럼 천황이 죽으면 편찬 작업을 시작하며, 완성되면 현재 재위중인 천황에게 바쳐진다. 지금까지 고메이 천황기(孝明天皇紀), 메이지 천황기(明治天皇紀), 다이쇼 천황실록(大正天皇実録), 쇼와 천황실록(昭和天皇実録)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완성되었다고 해서 출간이 바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서, 메이지 천황기는 1933년 완성되었으나 출판은 1968년에서야 메이지 연호 100주년을 맞아 이루어졌고, 다이쇼 천황실록은 1937년 완성되었으나 출간되지 않다가, 2001년에 일본에서 제정된 정보공개법에 따라 아사히 신문이 정보공개를 청구해 2002년부터 11년간 4차례에 걸쳐 정보공개를 통해 출간되었다. 쇼와 천황실록은 2014년에 완성되어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출간되었다. 다만 다이쇼 천황 실록은 본래 비공개 자료였다가 정보공개 청구 때문에 공개된만큼 출간 당시에는 전체의 3% 부분이 비공개 처리되어 있었고, 2015년에 NHK의 정보공개 청구로 인해 비공개 처리를 대부분 해제한 다이쇼 천황실록이 재출간된 바 있다. 지금도 비공개 처리된 부분이 없지는 않은데 주로 다이쇼 천황의 의료진단서나 성적 등이 개인정보 문제로 비공개 처리되어 있다고 한다.
응우옌 왕조 시대에 쓰여진 대남식록(大南寔錄)[11]이 있다.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한 뒤에도 응우옌 왕조는 유지되었기에 1802년부터 1945년까지 기록되었다. 이 당시 베트남이 황권강화와 프랑스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편집과 기록에 있어서 황실과 프랑스 식민당국의 눈치를 봐야하지만 어쨌든 베트남 근현대사와 근처 나라의 정세를 연구할때 빼놓을수없는 중요한 자료이다. 총 584권으로 한문으로 기록되었으며 1960년대부터 1978년까지 북베트남에서 번역이 진행되어 베트남어 번역본이 순차적으로 출간되었고 남베트남에서도 별개의 번역본이 순차적으로 출간될 예정이었지만 혼란과 남진통일로 인해 끝을 보지 못했다, 2000년대 초부터 새로 개정한 번역본이 출간되고있다. 단, 바오다이 황제에 대해 기록한 대남식록은 현재 소실되어서 없다. 물론 기록은 해놓았지만 1960년대 남베트남이 혼란에 빠지면서 실록 자체가 사라졌다. 다만 프랑스 식민당국에서 남겨놓은 기록물들은 있기 때문에 이걸로 보충한다는 듯.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는 25대 국왕의 실록 28종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1392년부터 1863년까지 472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하였다. 전체 1,893권 888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고, 정치·사회·경제·문화·예술 등 여러 방면에 대한 사실을 망라한다. 다만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일제 강점기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하여 왜곡이 많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포함되지 않으며, 세계기록유산 등재에도 제외되었다.
2 실록은 언제부터 편찬되었나
실록은 역대 제왕의 사적(事績)을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실록이라는 명칭은 6세기경 중국 남조 양(梁)의 주흥사(周興嗣)가 지은 『황제실록(皇帝實錄)』에서 유래하는데, 당과 송을 거치면서 그 체제가 정비되었다. 현재 중국에는 당의 실록 일부와 『명실록(明實錄), 『청실록(淸實錄)』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초기부터 실록이 편찬되었다. 『고려사』에 고려의 『태조실록』에 대한 기록이 있고, 감수국사(監修國史) 등에게 실록을 편찬하게 했다는 기록도 여러 차례 나타난다. 조선 건국 후에는 고려 공민왕부터 공양왕까지의 실록을 편찬했고, 세종대에는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고려 실록을 참고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3 조선 『태조실록』에서부터 『철종실록』까지
조선왕조실록 28종은 『태조강헌대왕실록(太祖康獻大王實錄)』에서부터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실록(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實錄)』까지 고유한 명칭을 가지고 있다. 각 실록 명칭은 국왕의 묘호(廟號)를 앞에, 시호(諡號)를 그 뒤로 배열하여 지었다. 조선 후기에는 시호를 여러 차례 올리면서 길어졌기 때문에 실록 명칭 역시 길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태조실록』, 『철종실록』과 같이 묘호만 붙인 실록 명칭을 사용한다.
한편, 연산군과 광해군은 폐위된 국왕이기 때문에 실록 명칭을 사용하지 못했다.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와 같이 제목은 다르지만, 서술 체제는 다른 실록과 같다. 이 중 『광해군일기』는 인간(印刊)되지 못하고 정초본(正草本)과 중초본(中草本)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중초본에는 최종 검토를 하면서 줄이거나 삭제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서 중초-정초로 이어지는 실록 편찬 과정의 내막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몇몇 실록은 수정되기도 했다. 광해군대 편찬된 『선조실록』은 효종대에 수정되어 『선조수정실록』이 별도로 존재하고, 숙종 즉위 후의 『현종실록』은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을 숙청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이후에 『현종개수실록』으로 개수(改修)된 판본이 별도로 존재한다. 그리고 영조 즉위 후 간행된 『경종실록』은 집권세력인 노론의 비판으로 인해 『경종수정실록』으로 수정된 판본이 별도로 있다.
조선 후기 붕당의 대립은 실록의 편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숙종실록』의 편찬은 약 10년에 가까운 기간이 소요되었는데, 그 사이 경종의 사망과 영조의 즉위가 이루어지면서 권력을 잡은 세력이 소론에서 노론으로 바뀌었고,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 후에는 소론이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소론의 요구로 각 권의 끝에 잘못되거나 빠진 기사를 모아 ‘보궐정오(補闕正誤)’를 붙이게 되었는데, 이 역시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대립 양상이 드러난 결과이다. 이 두 실록은 모두 전해지므로,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입장 차이를 서로 비교해 볼 수도 있다.
4 조선왕조는 왜 실록을 편찬했나
전통적으로 유교적 역사의식이 강했던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은 역대 국왕의 기록을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실록을 편찬해 왔다. 따라서 국왕 재위기간 동안 매일매일의 일을 기록해 두는 준비 작업이 필요했고, 이는 실록뿐 아니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등의 편찬에도 반영되었다.
실록은 당대의 ‘현대사’ 기록이었다. 실록은 국왕이 사망한 뒤 후계 국왕이 즉위한 이후 실록청 신료들이 선왕 때의 사초를 모아 편찬한 것으로, 편찬 과정에서 당대의 복잡한 정치권력의 향배가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국왕이 바뀌었어도 선왕과 정치적 공동체였던 신하들 상당수가 조정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이는 실록 편찬 방향에 영향을 끼쳤다. 조선왕조실록이 지금은 과거 조선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지만, 조선시대에는 편찬 당시의 정치적 헤게모니가 반영된 ‘현대사’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록 편찬은 정치에 대한 참여 방식이기도 했다. 사관(史官)이 국왕의 지근거리에서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하는 것은 권력 남용을 제약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또한 국왕은 자신의 정치적 행위가 낱낱이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종이 말에서 떨어졌을 때 관련 사실을 사관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한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그러나 정작 사관은 알리지 말라고 했다는 사실까지도 기록하였다.
5 사관, 실록을 만든 사람들
실록 편찬을 담당했던 사관 구성은 모두 겸직제로 이루어졌다. 우선 ‘한림 8원’에 해당하는 예문관의 봉교(奉敎) 2명, 대교(待敎), 검열(檢閱) 4명은 춘추관의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하였다. 이들은 임금의 가까이에서 보고 들은 국정 전반의 내용을 사초(史草)로 기록하였다. 사초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 중에서도 역사 평가나 비밀스러운 사항이 적힌 것은 집에 보관해 두었다가 훗날 실록 편찬시에 제출한다. 이를 가장사초(家藏史草)라고 한다.
사관의 겸직제는 세종대 이후 점점 확대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기준에 따르면, 영의정은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좌·우의정은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겸하였다. 육조의 판서 중 2원은 지춘추관사, 참판 중 2원은 동지춘추관사를 겸임하였다. 그리고 수찬관(修贊官), 편수관(編修官), 기주관(記注官), 기사관(記事官) 등의 임무를 의정부, 홍문관, 시강원, 사헌부, 사간원 등의 관원들이 겸춘추(兼春秋)의 직임을 띠고 수행하였다.
사관은 사초를 쓰는 것에서부터 실록을 편찬하는 일까지 담당함으로써 조선의 역사 기록을 담당하였다. 이들이 역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의 기본적인 원칙은 직서주의(直書主義)였다. 임의로 사초를 도려내거나 긁어없애거나 먹으로 지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처벌이 이루어졌다. 간혹 개작(改作)의 사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일부에서는 개작했다는 점을 밝혀두기도 했다. 원칙적으로 사관들은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사필(史筆)을 굽히지 말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역사를 서술하였다.
6 초초, 중초, 정초를 거치는 편찬 과정
실록을 본격적으로 편찬하게 되면,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가장 먼저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고 편찬을 맡은 관료들을 임명하였다. 그러면 사료를 수집하는데, 사초와 춘추관시정기(春秋館時政記), 조보(朝報), 일기, 문집 등이 망라된다. 광해군대 선조의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국가의 주요 전적이 대거 불타버려서 왜란 이전의 기록을 서술하기 위해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를 비롯하여 각 관료의 집에 보관된 조보, 일기 등을 찾아내 사료로 활용하기도 했다.
각종 사료들을 토대로 하여 초초(初草)를 완성하면, 그것을 다시 검열하여 중초(中草)가 만들어졌으며, 마지막에는 대신들의 감수 후에 정초(正草)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활자로 인쇄하여 간행, 반포하였다. 실록을 인쇄한 것은 세종때부터이다. 세종은 정초본 1부 외에 활자 인쇄본 3부를 만들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정초본이 완성되면 초초, 중초와 사초를 비롯한 각종 자료들은 폐기되었다. 자료의 유출을 막아야 했고, 최종 편찬된 실록과 상반된 자료가 남아 정쟁을 일으킬 만한 여지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예외적으로 『광해군일기』가 중초본, 정초본이 모두 남은 것은 활자 인쇄가 행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모든 실록은 편찬과정에서의 자료들을 모두 물에 풀어서 기록을 없애고 종이는 재생해서 썼다. 이 과정을 세초(洗草)라고 한다. 주로 세검정(洗劍亭) 인근의 차일암(遮日巖)에서 이루어졌으며, 세초 후에는 세초연(洗草宴)이 벌어지기도 했다.
실록이 사고(史庫)에 보관되면 국왕과 신하들은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다. 간혹 국정 운영에 있어서 관련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때 실록을 참고하는 경우는 있었다.
고려와 조선시대 사관(史館) 혹은 춘추관(春秋館)에 소속된 사관들이 그날 그날의 시정득실(時政得失)과 관리들의 현부(賢否)나 비행(非行)을 기록하였다.
기록된 자료는 시정기(時政記)라 하여 매달마다 1책 혹은 2책으로 묶어 매년 마지막 달에 왕에게 책수만 보고하고 춘추관에 보관했다가 실록 편찬 때 이용하였다. 비밀이 엄격히 지켜져 실록이 편찬되면 세초(洗草)라 하여 물에 빨아 그 종이는 재생하여 다시 사용하였다.
이처럼 춘추관에서 공적으로 작성한 시정기는 일종의 공적 사초였다. 그 규범으로는 첫째 줄에는 연월일·간지(干支), 날씨, 각 지방에서 일어난 변괴를 쓰고, 둘째 줄에는 왕이 있는 곳, 경연에의 참석 여부, 왕에게 보고되거나 명령이 내려진 사항을 쓰도록 되어 있었다.
왕명과 관계되는 것도 원칙이 있어서, 먼저 입시(入侍)하여 설명하는 일은 내용의 요점만 기록하고, 연혁과 시비(是非)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썼다. 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아뢰는 것은 무조건 기록하며, 여러 번 되풀이되면 내용에 첨가된 것만 더 쓰도록 하였다.
의식과 예법은 후일에 참고가 된다고 판단되면 번거로워도 모두 기록하고, 과거급제자는 누구 외 몇 명이라고만 쓰고, 관리의 임명은 고관(高官)만 쓰되 지방관의 임명과 특별 임용 또는 임용에 물의가 있으면 아무리 하찮은 관리도 모두 쓰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초 이외 가장(家藏) 혹은 사장(私藏)의 사초가 있었다.
세종 때의 사초에 대한 기록을 보면, 사관은 비밀스런 일이나 개인의 인물됨 등을 따로 가장사초로 작성해두도록 하고, 시정기는 부본(副本)을 충주사고에 두도록 하였다. 가장사초는 사관이 개별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관했다가 실록을 편찬할 때 춘추관에 제출하였다.
그런데 간혹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커다란 사화가 일어나기도 했으니 무오사화(戊午史禍)가 바로 그것이다. 사관은 사초를 절대로 누설할 수가 없도록 법적 조처가 마련되어 있었다.
초기에는 가장사초의 제출 때 사초작성자의 성명을 기입하지 않았으나, 정변이 몇 차례 있게 된 뒤로는 가장사초의 납입 때 사초작성자의 성명을 기록하게 하였다. 왕은 실록뿐만 아니라 사초를 읽을 수 없었다. 폭군이라 칭하는 연산군이 재위 10년이 지난 뒤 가장사초를 작성하지 못하도록 명한 때가 있었으나, 사초를 볼 수는 없었다.
사고(史庫)는 사각(史閣)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국초부터 실록(實錄)을 편찬했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고종은 1227년(고종 14)에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완성하여 한 질은 개경의 사관(史館)에 보관하고 다른 한 질은 해인사(海印寺)에 보관하였다. 고려 조정은 1270년(원종 11) 강화도에서 환도한 뒤에 실록을 일시적으로 불당고(佛堂庫)에 보관하다가 1274년(충렬왕 즉위) 9월, 중서성(中書省)에 사관을 두고 실록을 옮겨 보관하였다.
사화(士禍)는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화를 입는 일을 가리키며, 한국사에서는 특히 조선 중기에 사림 세력이 화를 당한 연산군 때부터 명종 즉위년까지 발생한 5차례의 옥사를 말한다. 이들 사화는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 1504년(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 1519년(중종 14년)의 기묘사화,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4화비숙청사건)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4대 사화’라고 부른다.
연산군은 조선시대 제10대 국왕이다. 1483년(성종 14년) 2월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12년간 재위하면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지나친 연회·사냥·음행 등 폭정을 자행하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는 이처럼 국왕 · 대신과 삼사의 갈등이 고조되던 상황에서 일어났다. 사화는 1498년(연산군 4) 7월 11일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에 세조를 비판한 내용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적발되면서 시작되었다. 나흘 뒤 유자광은 김종직의 「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에 대한 역심(逆心)주12을 담은 글이라고 고발하였다. 사건은 김종직과 그의 제자인 김일손 등이 세조에게 역심을 품고 불온한 문서를 작성한 음모로 규정되었고, 7월 27일 김종직을 부관참시주13하고 김일손 등을 처형하는 등 모두 52명을 처벌하면서 마무리되었다.
무오사화 이후 삼사가 위축되고 왕권이 강화된 것은 자연스런 결과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강화된 왕권을 국정 개혁 같은 긍정적이고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연회 · 음행 · 사치 · 사냥 · 민가 철거 같은 부정적이고 지엽적인 사안에 소비하기 시작하였다. 국왕의 부정적인 행태가 확대되자 기존의 삼사뿐 아니라 대신들도 간언을 올리게 되었다. 이를테면, 1502년(연산군 8년) 3월 삼정승주14 한치형 · 성준 · 이극균은 시폐(時弊)주15 10조를 올려 당시의 현안과 국왕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두 번째 사화인 갑자사화는 국왕이 점차 극단적인 폭정으로 치닫고, 대신과 삼사가 간헐적으로나마 간언을 제기하던 상황에서 일어났다. 발단의 직접적 계기는 모두 '능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1503년(연산군 9년) 9월 인정전에서 열린 양로연에서 예조판서 이세좌가 하사 받은 술을 엎질러 국왕의 옷을 적셨고, 이듬해 3월 경기도 관찰사 홍귀달이 손녀를 입궁시키라는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무차별적 숙청이 확산되는 데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한 폐모 문제는 신하들이 선왕의 잘못된 행동을 막지 않아 현재의 국왕에게 엄청난 슬픔을 안겨준 대표적 '능상'으로 규정되었다.
갑자사화는 여러 측면에서 무오사화와 달랐다. 우선 모두 239명이라는 많은 인원이 피화되었고, 사형이 절반을 넘었다. 곧 그것은 전면적이며 가혹한 숙청이었다. 외형적으로는 대신보다 삼사가 많이 처벌되었지만, 영의정을 지낸 한명회 · 정창손 · 윤필상 · 성준 · 한치형과 좌의정을 지낸 이극균 · 어세겸 등 주요 대신이 사형이나 부관참시를 당해 대신의 피해도 컸다.
갑자사화 이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기까지 2년 반 동안 연산군의 폭정과 황음주16은 더욱 격화되었다. 사간원과 경연을 포함한 여러 관서와 제도를 폐지하였으며, 사냥을 위해 민가를 철거하고, 금표를 도성에서 사방 100리까지 확대하였다. 기녀인 흥청(興淸)주17 300명, 운평(運平)주18 1,000명을 선발해 연회와 음행을 즐겼다.
1506년(연산군 12) 9월 2일 반정이 일어난 것은 자연스런 결과였다. 반정은 하룻밤 만에 성공하였고, 연산군은 즉시 폐위돼 강화도 교동에 안치되었다. 9월 24일 폐세자 이황 등 4남도 사사되었다. 연산군은 11월 6일 역질로 죽었는데, 일단 교동에 안장되었다가 1512년(중종 7) 폐비 신씨의 주청주19에 따라 경기도 양주 해촌(海村)으로 이장되었다. 부인 신씨는 1537년(중종 32) 죽어서 같은 곳에 안장되었다.
199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만4301㎡. 연산군은 실정(失政)이 극심하여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고 1506년(중종 1)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같 은해 9월 강화군 교동(喬桐)에 유배되었다.
그 해 11월 유배지에서 죽어 강화에 장사지냈다가 1512년 12월 폐비 신씨(愼氏)의 진언으로 그 이듬해 이 곳에 천장(遷葬 : 묘를 옮김)하였다.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愼氏)는 영의정 승선(承善)의 딸로 1488년(성종 19) 2월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1494년 왕비로 진봉(進封)되었다가 1506년 연산군과 함께 폐출되어 부인(夫人)으로 강봉되었으며 1537년에 죽었다.
분묘는 서편에 연산군, 동편에 부인의 묘가 쌍분(雙墳)으로 되어 있다. 묘역은 대군(大君)의 예우(禮遇)로 장례하여 곡장(曲牆 : 무덤 뒤에 둘러싼 작은 담) · 묘비(墓碑) · 혼유석(魂遊石) · 장명등(長明燈) · 향로석(香爐石) · 문인석(文人石) · 제실(祭室) 등이 갖추어져 있으나 병풍석(屛風石) · 석마(石馬) · 석양(石羊) · 사초지(莎草地 : 오래 되거나 허무러진 곳에 떼를 입히어 잘 다듬은 곳)는 설치하지 않았다.
연산군묘비 전면에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 후면에 ‘정덕 8년 2월 20일 장(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 부인 신씨의 묘비는 전면에 ‘거창신씨지묘(居昌愼氏之墓)’, 후면의 경우 앞구절은 파손되었고 뒷구절에 ‘6월 26일 장(六月二十六日葬)’이라 새겨져 있다.
1494년 왕위에 오른 제10대 임금 연산군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됨과 동시에 지위가 연산군으로 낮춰졌다.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세상을 등졌고 같은 곳에 묘가 조성되었었다. 지금 묘는 1512년(중종 7)에 이장되어 온 것이다. 연산군처럼 왕후에서 폐위된 거창군부인 신 씨가 11대 임금 중종에게 이장을 간청한 결과다. 군부인 묘는 1537년(중종 32) 연산군묘 옆에 모셔졌다.
어떻게 연산군의 묘가 현 위치로 오게 되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결론부터 살피면 거창군부인의 인맥에서 비롯된다. 묘소 자리는 군부인의 외할아버지인 임영대군의 땅이었다. 임영대군은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로 계유정난을 도와 7대 임금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는데 일조한 인물이다.
연산군묘는 대군묘제에 따라 조성되었기에 아무래도 왕릉과는 많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정문에서 묘역이 있는 곳까지도 짧고 홍살문조차 보이지 않았다. 좁은 입구 통로를 지나 돌계단을 밟아 오르니 묘역이 한 눈에 들어찬다. 안내 표지판에서 상단 끝부분까지 직선거리가 고작 50~60m에 불과하다. 일국의 왕이었던 분의 무덤이라고 보기에는 그 규모가 매우 협소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 특이한 점은 경내에 연산군뿐만 아니라 다른 봉분들도 여럿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다. 묘역의 제일 높은 곳에 연산군 부부의 묘가 좌우로 나란히 쌍분으로 있고, 그 아래 중앙에 하나, 또 그 아래로 놓인 쌍분 등 모두 5기로 이루어져 있다.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조선은 성종대에 이르러 집권적 관인 지배체제가 확립되고 유교문화가 그 성숙기에 도달하였다. 세종·문종대에 융성했던 유학은 세조의 무단정치와 불교 숭상으로 한 때 저조했으나 성종대에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성종은 원래 학문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당시 중앙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던 훈구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들을 등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사림파의 종사(宗師)로 명성이 높았던 김종직(金宗直)을 중용하였다. 아울러 그 제자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 등 영남 출신의 신진사류를 대거 불러들이게 되었다.
중앙에 진출한 신진사류는 기성세력인 훈구파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특히 그들은 삼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주자학(朱子學)의 정통적 계승자임을 자부하였다.
동시에, 요순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도학적 실천을 표방해 군자임을 자처하면서 훈구파를 공격하였다. 즉 훈구파는 불의에 가담해 권세를 잡고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현상 유지에 급급한 보수적이고 고식적인 소인배로 멸시, 배척하였다.
이에 대해 훈구파는 사림들을 고고자존(孤高自尊: 자신들만이 고결하다고 스스로를 높임.)의 경조부박(輕佻浮薄: 언어 행동이 경솔하고 신중하지 못함.)한 야심배라 지탄하며 배격하였다.
이로써 두 세력은 자연 각각의 주의와 사상 및 자부하는 바가 서로 달라 일마다 대립하였다. 그 갈등이 날로 심화되어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적대관계로 진전되어 갔다.
내용
이를 배경으로 한 무오사화는 1498년 『성종실록』 편찬 때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중국 秦나라 때 項羽가 楚의 義帝를 폐한 것과 단종을 폐위, 사사한 사건을 비유해 은근히 단종을 조위한 글)과, 훈구파 이극돈(李克墩)이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국상 때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근신하지 않고 장흥(長興) 기생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사초에 올린 것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어 신진사류에 대한 참혹한 박해를 빚어낸 것이다.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존중하는 김종직과 신진사류들은 단종을 폐위, 살해하고 즉위한 세조의 불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한 정인지(鄭麟趾) 등 세조의 공신들을 멸시하는 한편, 대간(臺諫)의 직책을 이용해 세조의 잘못을 지적하고 세조의 공신을 제거하고자 계속 상소해 그들을 자극하였다.
앞서 김종직은 유자광이 남이(南怡)를 무고(誣告)로 죽인 자라 하여 멸시하였다. 그리고 함양군수로 부임해서는 그의 시가 현판된 것을 철거해 소각한 일이 있어 유자광은 김종직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또, 김종직의 문하생 김일손도 춘추관의 사관으로서 이극돈의 비행을 직필해 서로 틈이 벌어져 있었다. 이극돈과 유자광은 서로 손을 잡고 보복을 꾀하려 했으나 성종 때는 김종직이 신임을 받고 있어 일을 꾸미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종이 죽은 뒤 연산군이 즉위해 1498년 『성종실록』 편찬을 위한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그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이극돈은 이 때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 속에 실려 있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글이라 문제삼고자 그 사실을 유자광에게 알렸다.
유자광은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 등과 모의해 김종직이 세조를 비방한 것은 대역부도(大逆不道)한 행위라고 연산군에게 보고하였다.
연산군은 원래 사림파의 간언(諫言)과 권학(勸學)에 증오를 느끼고 학자와 문인들을 경원(敬遠)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방종과 사치 행각에 추종하는 자를 좋아하였다.
연산군은 유자광의 상소를 기회로 김일손 등을 7월 12일부터 26일까지 신문한 끝에 이 사건은 모두 김종직이 교사한 것이라 결론지었다.
우선, 이미 죽은 김종직을 대역죄로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磐)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무록(誣錄)했다는 죄명으로 능지처참(凌遲處斬) 등의 형벌을 가하였다. 같은 죄에 걸린 강겸(姜謙)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년에 훈구사림파 중심의 부중 세력이 궁중 세력에게 받은 정치적인 탄압 사건.
연산군의 생모이자 성종 비 윤씨가 질투가 심해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했다 하여, 1479년(성종 10) 윤씨를 폐했다가 다음 해에 사사(賜死)하였다.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이 사실을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알게 되었다. 연산군은 윤씨 사사 사건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 엄(嚴) · 정(鄭) 두 숙의(淑儀)를 궁중 뜰에서 때려 죽이고, 그들의 아들 안양군(安陽君) 이항(李㤚)과 봉안군(鳳安君) 이봉(李㦀)도 귀양을 보낸 뒤 사사하였다.
또한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왕비로 추숭(追崇)하고 성종 묘(成宗廟)에 배사(配祀)하려 했는데, 감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응교 권달수(權達手)와 이행(李荇)이 반대하다가 권달수는 죽고 이행은 귀양갔다. 그 뒤 사건은 더욱 확대되어 윤씨 폐위 및 사사 사건 당시 이를 주장한 사람이거나 방관한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죄를 묻게 되었다. 그 결과,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尹弼商) · 이극균(李克均) · 성준(成俊) · 이세좌(李世佐) · 권주(權柱) · 김굉필(金宏弼) · 이주(李胄) 등 10여 인이 사형되었다.
세종 10년(1428), 정의 공주는 죽성군(후에 연창위, 양효공으로 불림) 안맹담과 혼인하였습니다. 공주가 훈민정음에 창제에 기여했다는 이야기는 맹담의 집안 족보인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종께서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음을 다 끝내지 못하여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셨다. 하지만 모두 풀어내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정인지가 짓고 아들 안빈세가 쓴 신도비는 이수와 귀부와 비신을 두루 갖춘 비로 조선 초기의 비가 이렇게 전체가 남아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사진:문화재청)
<정의 공주가 풀었다는 변음과 토착은 무엇일까?>
도대체 변음(變音)은 무엇이고, 토착음(吐着音)은 무엇일까요? 1994년 연세대 이가원 교수가 이 글을 처음 세상에 소개하면서 '변음(變音)'은 '말로 할 때 변하는 음'을 뜻하고, '토착(吐着)'은 '한문 구절 아래에 토를 다는 것'이라고 하였지요. 변음을 예를 들면 '받아쓰기'를 말로 하면 '바다쓰기(변음)'가 되는데 이를 어떻게 표기할지를 놓고 세종이 큰 고심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한소진의 소설 《정의 공주》에서는, 정의공주의 입을 빌어 변음은 말하자면 사투리 말을 표준말로 변환하여 한 가지로 쓰게 하는 것이라고 하네요.‘됐슈’라는 충청도 말은 ‘됐습니다’로 표기하는 것이지요. 사실 말이란 게 풍토에 따라 달라져 사는 곳에 따라 같은 말도 달리 표현되잖아요?과연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문자는 표기에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는 데까지 깊이 고민했음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토착음은? ‘吐’는 뱉는다는 뜻. ‘토’는 한마디로 중국 발음이 우리와 다르니 우리 소리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天’을 중국처럼 ‘텬’이라 말하지 말고 ‘천’으로 소리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착(着)’은 붙인다는 뜻으로 우리말의 조사에 대한 그 당시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자는 조사와 어미를 제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조사가 매우 발달한 언어로 조사를 어떻게 표기해야 좋은지 그 사용법을 밝혔다는 것입니다.
조선 왕릉은 519년 동안 유지된 조선 왕조의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총 42기가 있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 2기가 있으며, 나머지 40기는 모두 경기도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조선 왕릉은 풍수사상에 입각하여 능지를 선정하였고, 도성 10리 밖에서 100리 이내에 자리 잡았다. 2009년 6월, 북한 개성에 있는 2기의 왕릉을 제외하고 40기가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