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이곡 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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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소설 『죽부인전(竹夫人傳)』

고대소설 『죽부인전(竹夫人傳)』 고려 말엽의 학자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이 지은 가전체 설화(說話)1로 작자는 이색(李穡)의 아버지로서 문장에 뛰어났는데, 이 설화는 대나무를 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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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婦人傳

고려 말의 학자 이곡(李穀)[1]이 쓴 가전체 소설. 서거정이 만든 동문선 101권과 이곡의 가정집(稼亭集)[2]에 실려있다.

고려 말은 성적으로 문란한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성리학 학자였던 이곡은 이에 대해 일종의 열녀전을 써서 당시 시대상을 비판하려고 하였다.

이 작품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대나무를 모에화 의인화한 것인데, 사실 죽부인전이란 제목과 대나무를 의인화한 것은 이곡의 독창적인 발상은 아닌 듯하다. 송나라의 장뢰(張耒)가 지은 죽부인전에서도 죽제구(대나무 악기)를 의인화하였고, 원나라의 양유정(楊維楨)이 지은 죽부인전 역시 죽제구를 의인화하였다. 송나라와 원나라는 고려에 많은 문화적 영향을 주었고, 대나무 의인화는 일종의 장르물이었던 것. 장뢰의 경우 약 200년 이상 앞섰고, 양유정의 경우 이곡과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2. 원문과 해석

 
원문 및 해석 출처는 한국고전번역원. 죽부인전은 東文選卷之一百 부분에 실려있다.
 
 

夫人姓竹名憑。渭濱人篔之女也。系出於蒼筤氏。其先識音律。黃帝采擢而典樂焉。虞之簫。亦其後也。蒼筤自昆侖之陰。徙震方。伏羲時。與韋氏。主文籍。大有功。子孫皆守業爲史官。秦之虐也。用李斯計。焚書坑儒。蒼筤之後。寢微。至漢。蔡倫家客楮生者。頗>學文載筆。時與竹氏游。然其人輕薄。且好浸潤之譖。疾竹氏剛直。陰蠧而毁之。遂奪其任


부인의 성은 죽(竹)이요, 이름은 빙(憑)이니, 위빈(渭濱) 사람 운(篔)의 딸이다. 족계(族系)가 창랑(蒼筤)씨에서 났는데, 그 조상이 음률을 알아 황제(黃帝)가 뽑아서 악(樂)을 맡아보게 하였으니, 우(虞) 나라[3]의 소(簫)[4]가 역시 그의 후손이다. 창랑(蒼筤)[5]이 곤륜산 남쪽으로부터 진방(震方)[6]에 옮겨와 복희씨 때에 위(韋 책의 가죽끈)씨와 더불어 문적(文籍)을 주장하여 크게 공이 있어 자손이 대대로 다 사관(史官)의 업을 지켜 왔다. 진(秦) 나라가 포학한 때에 이사(李斯)의 계교를 써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묻어 죽이매, 창랑의 후손이 점점 한미하였고, 한대(漢代)에 이르러 채륜(蔡倫)의 문객 저생(楮生 종이)이란 자가 자못 글을 배워 붓을 가지고 때로 죽씨와 더불어 놀았으나, 그 사람됨이 경박하며 참언(讒言)을 좋아하여 죽씨의 강직함을 보고 슬그머니 좀먹어 헐어[7] 드디어 소임을 빼앗았다.
 
 
 
周有竿。亦竹氏。後與太公望。釣渭濱。太公作鉤。竿曰。吾聞大釣無鉤。釣之大小。在曲直。直者。可以釣國。曲者。不過得魚也。太公從之。後果爲文王師。封於齊。擧竿賢。以渭濱爲食邑。此竹氏渭濱之所起也。今子孫尙多。若箖箊䇹筳是已。徙楊州者。稱蓧蕩。入胡中者。稱篷。
 
주(周) 나라에는 간(竿)[8]이 있었으니, 또한 죽씨의 후손이다. 태공망(太公望)과 더불어 위빈(渭濱)에 낚시질할 때, 태공이 갈퀴[9]를 만드니, 간(竿)이 말하되, “내가 들으니 큰 낚시는 갈퀴가 없다 하나이다. 낚시의 크고 작음이 곡(曲) · 직(直)에 있사오니, 곧은 것은 가히 나라를 낚을 것이요, 굽은 것은 고기를 얻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였다. 태공이 그 말을 좇아 뒤에 과연 문왕(文王)의 스승이 되어 제(齊) 나라에 봉함을 받았고, 간(竿)의 어짐을 천거하여 위빈으로써 식읍을 삼게 하니, 이것이 죽씨 위빈의 유래이다. 지금도 자손이 아직 많으니, 임(箖)[10] · 어(箊)[11] · 군(䇹)[12] · 정(筳)[13]이 그것이요, 양주(楊洲)로 옮겨간 자는 조(條 세죽) · 탕(簜 대죽(大竹))라 일컫고, 호중(胡中)으로 들어간 자는 봉(篷 편죽(編竹))이라 일컫는다.
 
 
 
竹氏大槩。有文武幹。世爲籩簋笙竿禮樂之用。以至射漁之微。載在典籍。班班可見。唯䇞性至鈍。心塞不學而終。至篔。隱而不仕。有一弟曰簹。與兄齊名。虛中直己。善王子猷。子猷曰。一日不可無此君。因號此君。夫子猷端人也。取友必端。則其人可知。娶益母女。生一女。夫人是也。緫角有貞淑姿。隣有宜男者。作淫詞挑之。夫人怒曰。男女雖殊。其抱節一也。一爲人所折。豈可復立於世。宜生慚而去。豈牽牛子之輩。所可覬覦也。旣長。松大夫以禮聘之。父母曰。松公君子人也。其雅操。與吾家相侔。遂妻之。

죽씨는 대개 문(文) · 무(武) 두 줄기가 있어, 대대로 변(籩)[14]ㆍ궤(簋)[15], 생(笙)[16] · 우(竽)[17]와 같은 예악의 소용으로부터, 활쓰고 고기잡는 작은 용도에 이르기까지 전적에 실려 있어, 마디마디 볼 수 있다. 오직 감(䇞)[18]은 성질이 지극히 둔하여 속이 막혀 배우지 못하고 죽었으며, 운(篔)[19]에 이르러 숨어 벼슬하지 않았다. 한 아우가 있었으니 이름은 당(簹)[20]으로 형과 이름을 가지런히 하여 가운데를 비우고 저를 곧게 하였는데, 왕자유(王子猷)[21]와 친하게 지냈다. 자유가 말하되, “하루도 이 군(君) 없이는 살 수 없다.” 하였으므로, 호를 차군(此君)이라 하였다. 대저 자유는 벗 취하기를 단정한 사람으로 할 터인즉,[22] 그 위인을 알 만하다. 당(簹)이 익모(益母)[23]의 딸과 결혼하여 한 딸을 낳으니, 부인이 바로 그이다. 처녀 때에 정숙한 자태가 있어 이웃에 사는 의남(宜男)[24]이란 자가 음사(淫詞)[25]를 지어 떠보니, 부인이 노하여 말하되, “남녀가 비록 다르나 그 절개는 하나인데, 한 번 사람에게 꺾인 바 되면 어찌 다시 세상에 서리요.” 하매 의생(宜生)이 부끄러워 달아났으니, 어찌 소 끄는 무리가 엿볼 바이랴. 이미 자라나자 송대부(松大夫)[26]가 예로써 청혼하니, 부모가 말하되, “송공(松公)은 군자이다. 그 평소의 조행이 우리 집과 서로 짝이 된다.” 하고 드디어 아내로 보내었다.
 
 
 
 
夫人性日益堅厚。或臨事分辨。捷疾若迎刃而解。雖以梅仙之有信。李氏之無言。曾且不顧。而况橘老杏子乎。或値烟朝月夕。吟風嘯雨。蕭洒態度。無得而狀。好事者。竊寫其眞。傳之爲寶。若文與可,蘇子瞻。尤好焉。

부인의 성질이 날로 더욱 굳고 두터워 혹 일에 당하여 분별할 때에는 민첩하고 빠름이 마치 칼날로 쪼갬 같으며, 비록 매선(梅仙)의 신(信)이 있음과 이씨(李氏)의 말없음으로써도 한 번도 일찍 돌아보지 않았거니, 하물며 귤로(橘老)와 행자(杏子)이랴. 혹 안개 낀 아침과 달밝은 저녁을 만나 바람을 읊고 비를 휘파람할 제는 그 말쑥한 태도를 무엇으로 형용하기 어려워 호사자들이 슬그머니 그 얼굴을 그려 전하여 보배로 삼으니, 문여가(文與可)[27]와 소자첨(蘇子瞻)[28] 같은 이가 더욱 그것을 좋아하였다.
 
 
 
松公長夫人十八歲。晚學仙遊糓城山。石化不返。夫人獨居。往往歌衛風。其心搖搖。不能自持。然性好飮。史失其年。五月十三日。移家靑盆山。因醉得枯渴之疾。遂不理。自得疾。依人而居。晚節益堅。爲鄕里所推。三邦節度使惟箘。與夫人同姓。以行狀聞。贈節婦。

송공(松公)이 부인보다 나이 18세가 위인데, 늦게 신선(神仙)을 배워 곡성산(穀城山)[29]에 노닐다가 돌로 화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부인이 홀로 살며 이따금 위풍(衛風)[30]을 노래하매 그 마음이 스스로 흔들흔들 하여 지탱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성질이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역사에, 그 해는 잊었는데 5월 13일에 청분산(靑盆山)[31]으로 집을 옮겨, 취하여 고갈(枯渴)[32]의 병을 얻어 드디어 고치지 못하였다. 병을 얻은 뒤로부터 사람을 의지하여 살았고, 만절(晩節)이 더욱 굳어 향리에서 일컬어졌다. 삼국절도사[33] 유균(惟箘 전죽(箭竹))이 부인과 동성(同姓)이라, 행장(行狀)으로써 위에 아뢰니, 절부(節婦)의 직함을 주었다.
 
 
 
史氏曰。竹氏之先。有大功于上世。其苗裔。皆有材。抗節見稱於世。夫人之賢宜矣。噫。旣配君子。爲人所倚而卒無嗣。天道無知。豈虛語哉。

사씨(史氏)가 말하기를, “죽씨의 조상이 크게 상고의 세상에 공이 있었고, 그 묘예(苗裔)[34]들이 다 재능이 있고 절개가 있어 세상에 일컬음이 되었으니, 부인의 어짐이 마땅하다. 아, 이미 군자를 짝하고 남의 의지함이 되고도 마침내 후사가 없었으니, 천도(天道)가 무지하다 함이 어찌 헛 말이랴.” 하였다.
 
 
[주석]

[1] 목은 이색의 아버지이다. 교과서에도 실렸던 차마설(借馬說)도 이 이곡이 쓴 작품.

[2] 가정(稼亭)은 이곡의 호(號)

[3] 임금을 말한다. 요순시대의 그 순 맞다.

[4] 악기의 이름

[5] 푸르고 어린 대나무

[6] 동쪽

[7] 종이가 나오기 전 사용하던 죽간(竹簡)은 대나무를 가죽끈으로 연결한 것이기 때문에, 가죽끈이 닳아버려 흩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공자 주역과 관련된 고사인 위편삼절이 바로 이런 경우

[8] 낚시대

[9] 낚시바늘

[10] 대나무 임, 가리개 름

[11] 잎사귀 엷은 대 어

[12] 살대 균[13] 가는 대 정[14] 제사나 연회때 사용하던 그릇[15] 제사때 사용하던 그릇. 햇곡식을 담았다.[16] 생황[17] 피리 우[18] 죽순이 맛있는 대나무[19] 왕대 운[20] 왕대 당, 수레 먼지 받이 당[21] 왕헌지, 대나무를 좋아하였다 한다.[22] 원문에 나오는 夫子猷端人也取友必端 맹자 이루(離婁)편에 나오는 자탁유자(子濯孺子)와 유공지사(庾公之斯)의 이야기에 나오는 말이다. 짧게 설명하자면, 자탁유자란 사람이 전쟁터에 나갔는데 몸이 아파 활을 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적군의 추적까지 받게되어서 꼼짝없이 죽게되었는데, 추적하는 사람이 유공지사란 이야기를 듣고 안심했다는 내용이다. 유공지사의 스승인 윤공지타(尹公之他)는 자신의 제자이고, 그는 단정한 사람이므로 그가 제자로 키운 사람도 반드시 단정한 사람(夫尹公之他 端人也 取友必端矣)일 터이므로 자신에게 활질을 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단정한 사람은 공사구분을 못한다. 판단은 적중하여 유공지사는 화살의 촉을 빼버리고 쏴 그를 살려주게 된다.[23] 익모초를 말한다.[24] 윈추리[25] 음탕한 노래나 글[26] 소나무[27] 북송의 화가 문동(文同), 대나무 그림에 뛰어났다고 한다.[28] 소동파[29] 유방을 보좌하여 천하를 통일한 장량에게 육도삼략을 전해줬다는 황석공(黃石公)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30] 시경의 편명. 기오(淇澳)라는 시에서 군자의 미덕을 대나무에 비유하여 찬양하였다. 절차탁마가 나온 바로 그 시

瞻彼淇奧
(첨피기오) : 저 기수가의 물굽이를 바라보니

綠竹猗猗
(록죽의의) : 푸른 대나무 무성하고

有匪君子
(유비군자) : 빛나는 그 어른

如切如磋
(여): 깎은 듯 다듬은 듯

如琢如磨
(여) : 쪼은 듯 간 듯

瑟兮僩兮
(슬혜한혜) : 장중하고 당당하여

赫兮咺兮
(혁혜훤혜) : 빛나고 훤하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31] 화분을 상징

[32] 나무가 말라가는 것

[33] 삼국절도사 또는 삼방절도사로 번역한다.

[34]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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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곡(李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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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의 아버지.

이곡은 일찍이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쳤다. 원나라의 조정에 고려로부터 동녀주3*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음으로써 고려에서의 관직생활도 순탄하였다. 그는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결하였다. 그러나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여러 편의 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

『동문선』에는 100여 편에 가까운 이곡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죽부인전(竹夫人傳)」 가전체문학주2|으로 대나무를 의인화하였다. 그밖에 많은 시편들은 고려 말기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구체적인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가정집』 4책 2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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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이곡 선생 묘

여행일: 2018. 3. 17. 위 치: 충남 서천군 기산면 광암리 산 10-1 [가정 이곡(稼亭 李穀)(1298~1351)] 목차 펼치기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부(仲父), 호는 가정(稼亭). 아버지는 자성(自成)이며 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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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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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세계와 저술활동

원 · 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 말 신유학(성리학)이 수용되고 척불론(斥佛論)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을 견지하여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 · 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 여부로 판단하는 인간 중심, 즉 성인 · 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 유교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이색의 문하에서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킨 명사(名士)와 조선 왕조 창업에 공헌한 사대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정몽주(鄭夢周) · 길재(吉再) · 이숭인(李崇仁) 등 제자들은 고려 왕조에 충절을 다하였으며, 

정도전(鄭道傳) · 하륜(河崙) · 윤소종(尹紹宗) · 권근(權近) 등 제자들은 조선 왕조 창업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색-정몽주 · 길재의 학문을 계승한 김종직(金宗直) · 변계량(卞季良) 등은 조선 왕조 초기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저서에는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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