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mu.wiki/w/%EC%9D%B4%EC%83%89%28%EA%B3%A0%EB%A0%A4%29
고려 후기의 문인. 본관은 한산(韓山).[2]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고려삼은(隱)이라 불린다.[3] 익재 이제현 밑에서 공부했으며 성리학을 연구했고 문하에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남재, 권근, 길재, 이첨, 하륜, 윤소종, 염흥방 등 사실상 여말선초 거의 모든 사대부들을 키워 낸 인물. 자신의 제자인 권근, 정몽주, 길재 등을 통하여 후일 관학파[4]와 사림파가 형성되었기에 그 계보에서 거의 최상단에 있는 인물로 신진사대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괜히 사대부의 아버지가 아니다.
평가
성리학맥에서 이색의 위치는 한국 성리학의 시조인 안향 → 안향의 6군자[11] → 이제현 → 이곡 → 이색 → 정몽주 → 길재, 권근으로 이어지는데, 조선 성리학의 정통 계보는 이색, 정몽주, 길재가 시발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색과 이색의 제자들 대부분이 여말선초에 난세의 핵심부에 위치해 있었던 점은 당시 성리학이 매우 현실 참여적인 학문이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수제자로는 일반적으로 정몽주를 들며 특히 이색은 정몽주의 강론을 듣고 정몽주야말로 동방이학의 비조라는 찬사를 보냈을 정도다.[12]
다만 조선 개국에는 반대했기 때문에 학자로서의 위치나 명성에 비해서 정치적 입지는 다소 약하고 이렇다 할 정치적 업적도 없는 편인데, 실제로도 당대에 이미 "이재(= 관리로서의 재능)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선 왕조 세종실록에 보면 좋은 평가도 있지만 대체로 혹평에 가까운 편이다.
조선 초기와 중 · 말기의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로, 조선 초에는 대부분의 성리학의 전파자이자 대부분의 신진사대부가 이색의 제자였던 만큼 정치적 위치와는 무관하게 입지는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실제로 일부 급진 신진 사대부 계층에서 척불론이 강하게 일자, 불교에 대해 반감이 크게 없었던 태조는 이색을 들어 반박을 해 무마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개국공신 일등공신인 정총에게 대장경을 인출할 원문을 지어 바치라고 지시하자, 정총은 이에 반대하며 "불교는 왕조를 병들게 하는 악(惡)이며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거부한다. 이에 태조는 "이색도 그런 말은 안 했다. 네가 이색보다 잘났느냐!!"라고 반문했고, 결국 정총도 여기에 지고 글을 지어 바친다.
이처럼 이색은 정치가나 관리로서의 자질은 떨어졌으나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학문의 깊이 만큼은 대단히 뛰어났던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여말선초의 급변기를 이끌었던 대다수의 사대부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웠음을 생각해 보면 결코 과소평가할만한 인물이 아니다. 즉, 후일의 사림들처럼 정치가나 경세가의 면모까지 겸비하지는 못 했지만 전적으로 대학자로서 활약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끝까지 조선 왕조를 거부했지만 조선 왕조를 세운 세력들을 다 키워낸 조선의 사상적 스승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 중 · 후기 이후부터는 이색의 평가는 급전직하하는데, 유교의 교조화가 깊어지고 특히 불교에 대한 거부감이 나날이 심해지면서 불교와 가깝게 지냈던 이색은 더욱 비난을 받게 된다. 특히 여주 신륵사의 나옹선사의 비문을 써주는 등[13] 불교와 친하게 지내는 경향을 많이 보여줘서 이후 성리학에서 내내 까이게 된다. 일단 비문을 써주는 대가로 절에서 후원을 많이 해줘서 풍족하게 살 수 있었지만[14] 조선의 불교 탄압에 의해 불교와 친하게 지냈던 이색까지 덩달아 까이게 된 것, 반대로 정도전은 젊은 시절 비문을 몇번 써준 적은 있지만 나중에 불교와 관계를 끊고 죽을 때까지 불교를 탄압한다.
조선인들도 대체로 이색의 학문이나 인간됨에 호의를 표하고 있고, 비극적인 개인사에 대해서도 동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다. 용재총화에서는 아들인 이종학[15]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고 있었지만 트집을 잡힐까 봐 어디 가서 대놓고 슬퍼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손님이 오자 같이 말을 타자는 핑계로 깊은 숲 속까지 가서 아무도 보지 않는 그곳에서 날이 어두워지도록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인간인 이상 명예욕이 꽤 있었던 것 같긴 하다. 이제현 사후 익재집의 서문을 작성했는데, 그 글에 1000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의 이름이 기억될 수 있는지에 대해 걱정하는 내용을 썼다. 그리고 이름만으로 천년을 살겠다는 것은 거의 모든 사대부들이 남긴 공통된 소망이라 딱히 이색만 명예욕이 꽤 강했다고 하긴 무리다.
[위 사진 우측 상단의 글] '목은선생화상찬'
牧隱先生畫像讚/ 권근(權近, 1352∼1409) 호는 양촌(陽村), 이색 · 정몽주의 문인.
挺天資之粹美 窮聖學之精微
胷襟洒落 瑩徹光輝
踐履極於篤實 文章妙於發揮
匪點之狂 而有詠歸之興
猶惠之和 而無不恭之譏
學者仰之如山斗 國家倚之如蓍龜
膺大拜而不變其塞 履大難而不怵於威
赤心彌諒 素節不移
眞公所以自噵之辭也 若夫江漢滔滔
雲烟霏霏 追逐歐韓 並駕齊馳
後之觀者 知吾言之不欺也
-『陽村先生文集』卷之二十三
牧隱先生畫像讚(목은 선생 화상찬)
ㅡ 권근(權近, 1352∼1409)
挺天資之粹美
정천자지수미/ 빼어난 천품의 수미함으로
窮聖學之精微
궁성학지정미/ 성학(聖學, 주자학·성리학·理氣철학)의 정미함을 궁구하니
胸襟洒落
흉금쇄락/가슴속이 깨끗하여
瑩徹光輝
영철광휘/ 밝은 광채를 발하도다
踐履極於篤實
천리극어독실/ 실천은 독실함에 극을 이루고
文章妙於發揮
문장묘어발휘/문장은 발휘함에 절묘하였네
匪點之狂而有詠歸之興
비점지광이유영귀지흥/ 증점(曾點)의 狂(광)은 아니로되 영귀(詠歸)의 흥취가 있었고
猶惠之和而無不恭之譏
유혜지화이무불공지기/ 유하혜(柳下惠)의 화순함 같으나 불공(不恭)의 비난은 없었기에
學者仰之如山斗
학자앙지여산두/ 학자들은 태산과 북두처럼 우러러 사모하고
國家倚之如蓍龜
국가의지여시구/ 국가에서는 시초와 거북처럼 의지하였네.
膺大拜而不變其塞
응대배이불변기색/ 재상이 되어서도 평소의 지조를 변치 않았고
履大難而不怵於威
리대난이불출어위/ 험난함을 당하여도 위엄에 굴하지 않았도다.
赤心彌諒
적심미량/충심이 더욱 신실하여
素節不移
소절불이/ 평소의 지조 안 바꾼 건
眞公所以自道之辭也
진공소이자도지사야/ 참으로 공이 스스로 한 말이거니와
若夫江漢滔滔
약부강한도도/ 강한(江漢)이 도도히 흘러가듯
雲煙霏霏
운연비비/ 구름과 안개가 뭉게뭉게 일어나듯
追逐歐韓
추축구한/ 구양수(歐陽脩)와 한유(韓愈)를 따라잡아
並駕齊馳
병가제치/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으니
後之觀者
후지관자/ 후세에 공의 문장을 보는 이가
知吾言之不欺也
지오언지불기야/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리로다.
출처 : 충청미디어(https://www.thecm.net)
https://www.thecm.net/news/articleView.html?idxno=17613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9750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에 있는 고려후기 이곡과 이색 父子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해설사 曰] 양지 바른 이 묘소엔 함박눈이 와도 쌓이지 않는 명당이라 해설했었는데, 그 이튿날엔 눈이 그대로 쌓였더란다.
목은 선생의 묘지터를 설정한 무학대사는 북방은 북한산과 삼각산이, 남방은 한강이 외적의 침공으로부터 막아 주는 천하 요새 경복궁을 설정한 풍수지리학의 대가이셨다.
이색신도비 李穡神道碑
https://www.youtube.com/watch?v=lidC3K74iHk
https://www.youtube.com/watch?v=SvSnvcpq5BU
https://www.youtube.com/watch?v=6NDQEBjwVo0
https://www.youtube.com/watch?v=p3cBmAH8gFc
https://www.youtube.com/watch?v=5OEIp4G18KA
사당 孝靖祠(효정사)
https://www.youtube.com/watch?v=_ELP4FdIzLo
가정(稼亭) 이곡 (李穀),「죽부인전(竹夫人傳)」한문 vs 국역/ 가전체문학
https://kydong77.tistory.com/22225
夫人姓竹名憑。渭濱人篔之女也。系出於蒼筤氏。其先識音律。黃帝采擢而典樂焉。虞之簫。亦其後也。蒼筤自昆侖之陰。徙震方。伏羲時。與韋氏。主文籍。大有功。子孫皆守業爲史官。秦之虐也。用李斯計。焚書坑儒。蒼筤之後。寢微。至漢。蔡倫家客楮生者。頗>學文載筆。時與竹氏游。然其人輕薄。且好浸潤之譖。疾竹氏剛直。陰蠧而毁之。遂奪其任
부인의 성은 죽(竹)이요, 이름은 빙(憑)이니, 위빈(渭濱) 사람 운(篔)의 딸이다.
죽씨는 대개 문(文) · 무(武) 두 줄기가 있어, 대대로 변(籩)[14]ㆍ궤(簋)[15], 생(笙)[16] · 우(竽)[17]와 같은 예악의 소용으로부터, 활쓰고 고기잡는 작은 용도에 이르기까지 전적에 실려 있어, 마디마디 볼 수 있다.
부인의 성질이 날로 더욱 굳고 두터워 혹 일에 당하여 분별할 때에는 민첩하고 빠름이 마치 칼날로 쪼갬 같으며,
송공(松公)이 부인보다 나이 18세가 위인데, 늦게 신선(神仙)을 배워 곡성산(穀城山)[29]에 노닐다가 돌로 화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사씨(史氏)가 말하기를, “죽씨의 조상이 크게 상고의 세상에 공이 있었고,
[1] 목은 이색의 아버지이다. 교과서에도 실렸던 차마설(借馬說)도 이 이곡이 쓴 작품.
[2] 가정(稼亭)은 이곡의 호(號)
[5] 푸르고 어린 대나무
[6] 동쪽
[7] 종이가 나오기 전 사용하던 죽간(竹簡)은 대나무를 가죽끈으로 연결한 것이기 때문에, 가죽끈이 닳아버려 흩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공자의 주역과 관련된 고사인 위편삼절이 바로 이런 경우.
[8] 낚시대
[9] 낚시바늘
[10] 대나무 임, 가리개 름
[11] 잎사귀 엷은 대 어
[12] 살대 균
[13] 가는 대 정
[14] 제사나 연회때 사용하던 그릇
[15] 제사때 사용하던 그릇. 햇곡식을 담았다.
[18] 죽순이 맛있는 대나무
[19] 왕대 운
[20] 왕대 당, 수레 먼지 받이 당
[22] 원문에 나오는 夫子猷端人也。取友必端은 맹자 이루(離婁)편에 나오는 자탁유자(子濯孺子)와 유공지사(庾公之斯)의 이야기에 나오는 말이다. 짧게 설명하자면, 자탁유자란 사람이 전쟁터에 나갔는데 몸이 아파 활을 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적군의 추적까지 받게되어서 꼼짝없이 죽게되었는데, 추적하는 사람이 유공지사란 이야기를 듣고 안심했다는 내용이다. 유공지사의 스승인 윤공지타(尹公之他)는 자신의 제자이고, 그는 단정한 사람이므로 그가 제자로 키운 사람도 반드시 단정한 사람(夫尹公之他 端人也 其取友必端矣)일 터이므로 자신에게 활질을 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단정한 사람은 공사구분을 못한다. 판단은 적중하여 유공지사는 화살의 촉을 빼버리고 쏴 그를 살려주게 된다.
[24] 윈추리
[25] 음탕한 노래나 글
[26] 소나무
[27] 북송의 화가 문동(文同), 대나무 그림에 뛰어났다고 한다.
[29] 유방을 보좌하여 천하를 통일한 장량에게 육도삼략을 전해줬다는 황석공(黃石公)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30] 시경의 편명. 기오(淇澳)라는 시에서 군자의 미덕을 대나무에 비유하여 찬양하였다. 절차탁마가 나온 바로 그 시
瞻彼淇奧
(첨피기오) : 저 기수가의 물굽이를 바라보니
綠竹猗猗
(록죽의의) : 푸른 대나무 무성하고
有匪君子
(유비군자) : 빛나는 그 어른
如切如磋
(여절여차): 깎은 듯 다듬은 듯
如琢如磨
(여탁여마) : 쪼은 듯 간 듯
瑟兮僩兮
(슬혜한혜) : 장중하고 당당하여
赫兮咺兮
(혁혜훤혜) : 빛나고 훤하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31] 화분을 상징
[32] 나무가 말라가는 것
[33] 삼국절도사 또는 삼방절도사로 번역한다.
[34] 후손들
https://www.youtube.com/watch?v=nCV7qDL6YeA&t=31s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52
고려후기 절의를 지킨 세 학자의 총칭.
흔히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일컫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근년에는 길재 대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400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길상화(吉祥華)
https://m.blog.naver.com/yhy714/22309378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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