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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4대사화(士禍)- 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 조선 붕당의 계보

https://www.youtube.com/watch?v=ffs--vKRU6g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D%99%94 사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송사를 개인끼리 서로 좋게 풀어버리는 법적 용어 사화(私和)에 대해서는 화해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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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D%99%94

 

사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송사를 개인끼리 서로 좋게 풀어버리는 법적 용어 사화(私和)에 대해서는 화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사화(士禍)는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화를 입는 일을 가리키며, 한국사에서는 특히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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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士禍)는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화를 입는 일을 가리키며, 한국사에서는 특히 조선 중기에 사림 세력이 화를 당한 연산군 때부터 명종 즉위년까지 발생한 5차례의 옥사를 말한다. 이들 사화는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1504년(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1519년(중종 14년)의 기묘사화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4화비숙청사건)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4대 사화’라고 부른다.

 

4대 사화

사화발생   연도발생    원인            가해자               피해자

무오사화 1498년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건 유자광연산군 김종직김일손김굉필권경우이목허반임희재(임사홍 아들), 표연말정여창 [홍귀달]
갑자사화 1504년 폐비 윤씨 사건, 연산군 왕권 강화 계획 연산군 윤필상이극균김굉필
이세좌한명회귀인 정씨엄귀인인수대비정찬손심회정안지한치형이극균성준조지서정성근정인인이승건홍한김천령
기묘사화 1519년 조광조의 개혁 정치 반발 남곤심정홍경주중종 조광조와 그의 추종자들
을사사화 1545년 소윤과 대윤의 권력 싸움 소윤 윤임,유관유인숙계림군봉성군이덕응정희정욱나식

 

제10대 연산군(燕山君)과 부인신씨(夫人愼氏)之墓

 

https://www.youtube.com/watch?v=YzV0HTx1QvE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6803

 

연산군(燕山君)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연산군은 조선시대 제10대 국왕이다. 1483년(성종 14년) 2월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12년간 재위하면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지나친 연회·사냥·음행 등 폭정을 자행하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는 이처럼 국왕 · 대신과 삼사의 갈등이 고조되던 상황에서 일어났다. 사화는 1498년(연산군 4) 7월 11일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에 세조를 비판한 내용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적발되면서 시작되었다. 나흘 뒤 유자광은 김종직의 「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에 대한 역심(逆心)주12을 담은 글이라고 고발하였다. 사건은 김종직과 그의 제자인 김일손 등이 세조에게 역심을 품고 불온한 문서를 작성한 음모로 규정되었고, 7월 27일 김종직을 부관참시주13하고 김일손 등을 처형하는 등 모두 52명을 처벌하면서 마무리되었다.

무오사화 이후 삼사가 위축되고 왕권이 강화된 것은 자연스런 결과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강화된 왕권을 국정 개혁 같은 긍정적이고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연회 · 음행 · 사치 · 사냥 · 민가 철거 같은 부정적이고 지엽적인 사안에 소비하기 시작하였다. 국왕의 부정적인 행태가 확대되자 기존의 삼사뿐 아니라 대신들도 간언을 올리게 되었다. 이를테면, 1502년(연산군 8년) 3월 삼정승주14 한치형 · 성준 · 이극균은 시폐(時弊)주15 10조를 올려 당시의 현안과 국왕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두 번째 사화인 갑자사화는 국왕이 점차 극단적인 폭정으로 치닫고, 대신과 삼사가 간헐적으로나마 간언을 제기하던 상황에서 일어났다. 발단의 직접적 계기는 모두 '능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1503년(연산군 9년) 9월 인정전에서 열린 양로연에서 예조판서 이세좌가 하사 받은 술을 엎질러 국왕의 옷을 적셨고, 이듬해 3월 경기도 관찰사 홍귀달이 손녀를 입궁시키라는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무차별적 숙청이 확산되는 데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한 폐모 문제는 신하들이 선왕의 잘못된 행동을 막지 않아 현재의 국왕에게 엄청난 슬픔을 안겨준 대표적 '능상'으로 규정되었다.

갑자사화는 여러 측면에서 무오사화와 달랐다. 우선 모두 239명이라는 많은 인원이 피화되었고, 사형이 절반을 넘었다. 곧 그것은 전면적이며 가혹한 숙청이었다. 외형적으로는 대신보다 삼사가 많이 처벌되었지만, 영의정을 지낸 한명회 · 정창손 · 윤필상 · 성준 · 한치형과 좌의정을 지낸 이극균 · 어세겸 등 주요 대신이 사형이나 부관참시를 당해 대신의 피해도 컸다.

갑자사화 이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기까지 2년 반 동안 연산군의 폭정과 황음주16은 더욱 격화되었다. 사간원과 경연을 포함한 여러 관서와 제도를 폐지하였으며, 사냥을 위해 민가를 철거하고, 금표를 도성에서 사방 100리까지 확대하였다. 기녀인 흥청(興淸)주17 300명, 운평(運平)주18 1,000명을 선발해 연회와 음행을 즐겼다.

1506년(연산군 12) 9월 2일 반정이 일어난 것은 자연스런 결과였다. 반정은 하룻밤 만에 성공하였고, 연산군은 즉시 폐위돼 강화도 교동에 안치되었다. 9월 24일 폐세자 이황 등 4남도 사사되었다. 연산군은 11월 6일 역질로 죽었는데, 일단 교동에 안장되었다가 1512년(중종 7) 폐비 신씨의 주청주19에 따라 경기도 양주 해촌(海村)으로 이장되었다. 부인 신씨는 1537년(중종 32) 죽어서 같은 곳에 안장되었다.

 

 

조선전기 제10대 연산군과 부인 신씨의 무덤. 묘. 사적.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6805

 

연산군묘(燕山君墓)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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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있는 조선전기 제10대 연산군과 부인 신씨의 무덤. 묘. 사적.

199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만4301㎡. 연산군은 실정(失政)이 극심하여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고 1506년(중종 1)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같 은해 9월 강화군 교동(喬桐)에 유배되었다.

그 해 11월 유배지에서 죽어 강화에 장사지냈다가 1512년 12월 폐비 신씨(愼氏)의 진언으로 그 이듬해 이 곳에 천장(遷葬 : 묘를 옮김)하였다.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愼氏)는 영의정 승선(承善)의 딸로 1488년(성종 19) 2월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1494년 왕비로 진봉(進封)되었다가 1506년 연산군과 함께 폐출되어 부인(夫人)으로 강봉되었으며 1537년에 죽었다.

분묘는 서편에 연산군, 동편에 부인의 묘가 쌍분(雙墳)으로 되어 있다. 묘역은 대군(大君)의 예우(禮遇)로 장례하여 곡장(曲牆 : 무덤 뒤에 둘러싼 작은 담) · 묘비(墓碑) · 혼유석(魂遊石) · 장명등(長明燈) · 향로석(香爐石) · 문인석(文人石) · 제실(祭室) 등이 갖추어져 있으나 병풍석(屛風石) · 석마(石馬) · 석양(石羊) · 사초지(莎草地 : 오래 되거나 허무러진 곳에 떼를 입히어 잘 다듬은 곳)는 설치하지 않았다.

연산군묘비 전면에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 후면에 ‘정덕 8년 2월 20일 장(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 부인 신씨의 묘비는 전면에 ‘거창신씨지묘(居昌愼氏之墓)’, 후면의 경우 앞구절은 파손되었고 뒷구절에 ‘6월 26일 장(六月二十六日葬)’이라 새겨져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_%EA%B5%AD%EC%99%95

 

조선 국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선 국왕(朝鮮國王)은 조선의 국왕이다. 조선 국왕은 대개 묘호로 불린다. 묘호를 올릴 때 공(功)이 있는 경우에는 '조(祖)'를, 덕(德)이 많은 경우에는 '종(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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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10대  燕山君

광해군
15대  光海君

위 두 분은 시호를 받지 못한 왕이다. 시호를 받지 못한 왕들은 왕자 시절의 '君'호를 그대로 유지한다.

 

연산군 묘는 왜 왕릉이 아닐까?

https://mediahub.seoul.go.kr/archives/1290707

https://mediahub.seoul.go.kr/archives/1290707

1494년 왕위에 오른 제10대 임금 연산군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됨과 동시에 지위가 연산군으로 낮춰졌다.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세상을 등졌고 같은 곳에 묘가 조성되었었다. 지금 묘는 1512년(중종 7)에 이장되어 온 것이다. 연산군처럼 왕후에서 폐위된 거창군부인 신 씨가 11대 임금 중종에게 이장을 간청한 결과다. 군부인 묘는 1537년(중종 32) 연산군묘 옆에 모셔졌다.

어떻게 연산군의 묘가 현 위치로 오게 되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결론부터 살피면 거창군부인의 인맥에서 비롯된다. 묘소 자리는 군부인의 외할아버지인 임영대군의 땅이었다. 임영대군은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로 계유정난을 도와 7대 임금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는데 일조한 인물이다.

연산군묘는 대군묘제에 따라 조성되었기에 아무래도 왕릉과는 많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정문에서 묘역이 있는 곳까지도 짧고 홍살문조차 보이지 않았다. 좁은 입구 통로를 지나 돌계단을 밟아 오르니 묘역이 한 눈에 들어찬다. 안내 표지판에서 상단 끝부분까지 직선거리가 고작 50~60m에 불과하다. 일국의 왕이었던 분의 무덤이라고 보기에는 그 규모가 매우 협소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 특이한 점은 경내에 연산군뿐만 아니라 다른 봉분들도 여럿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다. 묘역의 제일 높은 곳에 연산군 부부의 묘가 좌우로 나란히 쌍분으로 있고, 그 아래 중앙에 하나, 또 그 아래로 놓인 쌍분 등 모두 5기로 이루어져 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9174

 

무오사화(戊午士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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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조선은 성종대에 이르러 집권적 관인 지배체제가 확립되고 유교문화가 그 성숙기에 도달하였다. 세종·문종대에 융성했던 유학은 세조의 무단정치와 불교 숭상으로 한 때 저조했으나 성종대에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성종은 원래 학문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당시 중앙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던 훈구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들을 등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사림파의 종사(宗師)로 명성이 높았던 김종직(金宗直)을 중용하였다. 아울러 그 제자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 등 영남 출신의 신진사류를 대거 불러들이게 되었다.

중앙에 진출한 신진사류는 기성세력인 훈구파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특히 그들은 삼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주자학(朱子學)의 정통적 계승자임을 자부하였다.

동시에, 요순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도학적 실천을 표방해 군자임을 자처하면서 훈구파를 공격하였다. 즉 훈구파는 불의에 가담해 권세를 잡고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현상 유지에 급급한 보수적이고 고식적인 소인배로 멸시, 배척하였다.

이에 대해 훈구파는 사림들을 고고자존(孤高自尊: 자신들만이 고결하다고 스스로를 높임.)의 경조부박(輕佻浮薄: 언어 행동이 경솔하고 신중하지 못함.)한 야심배라 지탄하며 배격하였다.

이로써 두 세력은 자연 각각의 주의와 사상 및 자부하는 바가 서로 달라 일마다 대립하였다. 그 갈등이 날로 심화되어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적대관계로 진전되어 갔다.

 
내용

이를 배경으로 한 무오사화는 1498년 『성종실록』 편찬 때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중국 秦나라 때 項羽가 楚의 義帝를 폐한 것과 단종을 폐위, 사사한 사건을 비유해 은근히 단종을 조위한 글)과, 훈구파 이극돈(李克墩)이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국상 때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근신하지 않고 장흥(長興) 기생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사초에 올린 것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어 신진사류에 대한 참혹한 박해를 빚어낸 것이다.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존중하는 김종직과 신진사류들은 단종을 폐위, 살해하고 즉위한 세조의 불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한 정인지(鄭麟趾) 등 세조의 공신들을 멸시하는 한편, 대간(臺諫)의 직책을 이용해 세조의 잘못을 지적하고 세조의 공신을 제거하고자 계속 상소해 그들을 자극하였다.

앞서 김종직은 유자광이 남이(南怡)를 무고(誣告)로 죽인 자라 하여 멸시하였다. 그리고 함양군수로 부임해서는 그의 시가 현판된 것을 철거해 소각한 일이 있어 유자광은 김종직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또, 김종직의 문하생 김일손도 춘추관의 사관으로서 이극돈의 비행을 직필해 서로 틈이 벌어져 있었다. 이극돈과 유자광은 서로 손을 잡고 보복을 꾀하려 했으나 성종 때는 김종직이 신임을 받고 있어 일을 꾸미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종이 죽은 뒤 연산군이 즉위해 1498년 『성종실록』 편찬을 위한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그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이극돈은 이 때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 속에 실려 있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글이라 문제삼고자 그 사실을 유자광에게 알렸다.

유자광은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 등과 모의해 김종직이 세조를 비방한 것은 대역부도(大逆不道)한 행위라고 연산군에게 보고하였다.

연산군은 원래 사림파의 간언(諫言)과 권학(勸學)에 증오를 느끼고 학자와 문인들을 경원(敬遠)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방종과 사치 행각에 추종하는 자를 좋아하였다.

연산군은 유자광의 상소를 기회로 김일손 등을 7월 12일부터 26일까지 신문한 끝에 이 사건은 모두 김종직이 교사한 것이라 결론지었다.

우선, 이미 죽은 김종직을 대역죄로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磐)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무록(誣錄)했다는 죄명으로 능지처참(凌遲處斬) 등의 형벌을 가하였다. 같은 죄에 걸린 강겸(姜謙)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0935

 

갑자사화(甲子士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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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년(연산군 10) 갑자년에 훈구사림파 중심의 부중 세력이 궁중 세력에게 받은 정치적인 탄압 사건.

연산군의 생모이자 성종 비 윤씨가 질투가 심해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했다 하여, 1479년(성종 10) 윤씨를 폐했다가 다음 해에 사사(賜死)하였다.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이 사실을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알게 되었다. 연산군은 윤씨 사사 사건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 엄(嚴) · 정(鄭) 두 숙의(淑儀)를 궁중 뜰에서 때려 죽이고, 그들의 아들 안양군(安陽君) 이항(李㤚)과 봉안군(鳳安君) 이봉(李㦀)도 귀양을 보낸 뒤 사사하였다.

또한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왕비로 추숭(追崇)하고 성종 묘(成宗廟)에 배사(配祀)하려 했는데, 감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응교 권달수(權達手)와 이행(李荇)이 반대하다가 권달수는 죽고 이행은 귀양갔다. 그 뒤 사건은 더욱 확대되어 윤씨 폐위 및 사사 사건 당시 이를 주장한 사람이거나 방관한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죄를 묻게 되었다. 그 결과,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尹弼商) · 이극균(李克均) · 성준(成俊) · 이세좌(李世佐) · 권주(權柱) · 김굉필(金宏弼) · 이주(李胄) 등 10여 인이 사형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yo-uDhigRs 

 

https://m.khan.co.kr/article/201109110037512#c2b

 

우이령을 넘어 북한산 자락에서 총명한 정의 공주를 만났네!

맨발로 걸어도 좋은 숲길입니다. 여유 있는 소걸음으로 소귀고개(牛耳嶺)로 올라가는 길은 온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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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0년(1428), 정의 공주는 죽성군(후에 연창위, 양효공으로 불림) 안맹담과 혼인하였습니다. 공주가 훈민정음에 창제에 기여했다는 이야기는 맹담의 집안 족보인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종께서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음을 다 끝내지 못하여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셨다. 하지만 모두 풀어내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정인지가 짓고 아들 안빈세가 쓴 신도비는 이수와 귀부와 비신을 두루 갖춘 비로 조선 초기의 비가 이렇게 전체가 남아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사진:문화재청)

<정의 공주가 풀었다는 변음과 토착은 무엇일까?>

도대체 변음(變音)은 무엇이고, 토착음(吐着音)은 무엇일까요? 1994년 연세대 이가원 교수가 이 글을 처음 세상에 소개하면서 '변음(變音)'은 '말로 할 때 변하는 음'을 뜻하고, '토착(吐着)'은 '한문 구절 아래에 토를 다는 것'이라고 하였지요. 변음을 예를 들면 '받아쓰기'를 말로 하면 '바다쓰기(변음)'가 되는데 이를 어떻게 표기할지를 놓고 세종이 큰 고심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한소진의 소설 《정의 공주》에서는, 정의공주의 입을 빌어 변음은 말하자면 사투리 말을 표준말로 변환하여 한 가지로 쓰게 하는 것이라고 하네요.‘됐슈’라는 충청도 말은 ‘됐습니다’로 표기하는 것이지요. 사실 말이란 게 풍토에 따라 달라져 사는 곳에 따라 같은 말도 달리 표현되잖아요?과연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문자는 표기에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는 데까지 깊이 고민했음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토착음은? ‘吐’는 뱉는다는 뜻. ‘토’는 한마디로 중국 발음이 우리와 다르니 우리 소리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天’을 중국처럼 ‘텬’이라 말하지 말고 ‘천’으로 소리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착(着)’은 붙인다는 뜻으로 우리말의 조사에 대한 그 당시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자는 조사와 어미를 제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조사가 매우 발달한 언어로 조사를 어떻게 표기해야 좋은지 그 사용법을 밝혔다는 것입니다.

 

[참고 1]

光海君之墓

https://www.youtube.com/watch?v=zsFtbV1g4gA 

 

 

https://www.youtube.com/watch?v=KbH7MR9_uyM 

 

 

[참고 2]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300787&code=kc_age_30 

 

우리역사넷

조선 왕릉은 519년 동안 유지된 조선 왕조의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총 42기가 있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 2기가 있으며, 나머지 40기는 모두 경기도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조선 왕릉은 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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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朝鮮王陵]

조선 왕과 왕비의 무덤

조선 왕릉은 519년 동안 유지된 조선 왕조의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총 42기가 있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 2기가 있으며, 나머지 40기는 모두 경기도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조선 왕릉은 풍수사상에 입각하여 능지를 선정하였고, 도성 10리 밖에서 100리 이내에 자리 잡았다. 2009년 6월, 북한 개성에 있는 2기의 왕릉을 제외하고 40기가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https://kydong77.tistory.com/22221

 

조선왕조실록 47책

https://www.youtube.com/watch?v=gawiovygaCs https://www.youtube.com/watch?v=Gjd_xwLLamQ https://www.youtube.com/watch?v=VlOrHjwCVuI https://namu.wiki/w/%EC%A1%B0%EC%84%A0%EC%99%95%EC%A1%B0%EC%8B%A4%EB%A1%9D 조선왕조실록 - 나무위키 세초(洗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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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21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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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은 대한민국 사적 제195호로, 조선 제4대 세종과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능인 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인 영릉(寧陵)을 합쳐서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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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영릉, 여주로 이장/ 풍수지리설 비화(秘話)/ 국립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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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비명계 “개딸당 만드나”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230813/120686987/1

 

“혁신안 이행해달라” vs “개딸당 만드나”…민주당 혁신안 후폭풍

‘더불어민주당 김은경 혁신위원회가 내놓은 혁신안을 이행해주세요.’더불어민주당 홈페이지 국민응답센터에 지난 10일 올라온 이 같은 내용의 청원이 13일 오후 4시 기준 4만8000…

www.donga.com

 

개딸들 막말의 뿌리

 

개딸들의 막말

https://www.youtube.com/watch?v=104zcKmgx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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